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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와 과학 철학 I

노동자와 과학 철학 I

 

앞으로 [현자에서 미래를]에서 필자는 진화론, 우주팽창이론, 카오스 정리, 상대성원리 등 현대 과학에 대해 다뤄볼 예정이다. 참고로 양자역학은 현재 노동자의 힘에 연재 중에 있다. 일반적으로 과학은 자연의 객관진리를 반영하기 때문에 그 어떤 비판도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수사과정에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결과나 DNA 분석의 결과는 결정적인 증거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 속에는 숨어있는 1인치가 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과학수사의 결과인 ‘유서대필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조금만 파고 들어가 보면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는 레닌에 의해 극복된 경험주의의 부활을, 우주 빅뱅이론은 진화론으로 극복된 종교의 창조론을, 유전자연구는 나치와 함께 멸망한 우생학과 유사한 유전자 결정론을 부활시키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 어떤 것도 자본주의 속에서 격리된 섬으로 남을 수 없다. 자본주의속에서 발전한 과학은 자본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영향을 받은 과학은 자본가 계급의 입장을 대변한다. 이것이 현대과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현대 철학을 같이 이해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 글은 현대과학의 흐름을 맑스주의 관점에서 잘 정리되어 있어 번역하였다. 이 글의 저자 알랜 우즈(Alan Woods)는 ‘국제 맑스주의 경향 International Marxist Tendency’이라 알려진 ‘맑스주의 인터내셔널을 위한 위원회Committee for a Marxist International’를 이끌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반항하는 이성: 맑스주의와 현대과학 Reason in Revolt: Marxism and Modern Science“이 있다. 이 글은 원문을 중심으로 이해하기 쉽게 일부 보충하고 일부 삭제하여 '수정 번역'하였다. 원문을 보고 싶은 분들은 아래 site에서 볼 수 있다. (역자 주)

 http://easyweb.easynet.co.uk/~socappeal/philosophy/chapter6.html 


 

노동자와 과학 철학 I

 

-20세기 현대 철학

우연한 기회에 장거리 택시 안에서 철학 어쩌고..하는 책을 꺼내 들었다. 그 책을 본 택시노동자의 말은 자본주의 시대에 철학의 위상을 가늠하기에 충분했다. "도에 관심 있으시군요." 이렇듯 우리시대(자본주의시대)의 철학은 꽃을 피우기도 전에 돌이킬 수 없는 쇠퇴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사실 자본주의 철학에는 새롭고 의미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이 철학을 경멸하고 있고 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무관심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지도 모른다.


여기서 극단적인 노동 분업의 파괴적인 영향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상아탑 속에 격리된 대학교수들은 노동자들이 평생을 읽어도 이해할 수 없게 모호한 글을 적고 있으며 심지어 동료 학자들조차 답하기도 어렵게 글을 적고 있다. 사실 그들의 글을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관심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그나마 미미하게라도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동료 철학자들이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생계를 유지해야 되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적 철학자들은 일부러 이해할 수 없게 정교하게 설계된 듯한 특수 용어나 기호에 호소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자기들만의 비밀 언어를 가지고 있어 그 비밀을 전수받은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고대 승려-카스트와 닮아 있다. 그러한 난해한 철학 속에 그들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이 있다.  

 

오래전에 요제프 디쯔겐(Joseph Dietzgen)1)은 주류 철학은 과학이 아니라 사회주의에 대항하는 방위수단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전문 철학자들은 냉전시대에나 가능한 말이라고 부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맑스주의에 반대하고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투쟁을 지원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냉전시대에는 두드러지게 나타났을 뿐이고 지금도 여전히 사실이다.


이러한 흐름에 새로운 것은 없다. 맑스주의가 기존 질서에 도전하며 상당한 힘을 발휘하면서 나타난 이후로 지배계급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시작해서 모든 맑스주의 이데올로기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들은 맑스주의 이름만 나와도 그들은 조건반사식으로 대응한다. "낡은", "과학적이 아닌", "오래전에 반증된", "형이상학"과 같이 초라하고 지루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철학의 신성한 전당에서 기피인물 취급받았던 사람은 맑스와 엥겔스뿐만이 아니었다. 불상하게도 헤겔은 한때 뛰어난 철학자의 철학자로 칭송받았지만 이후 아무도 인용하지도 배우려하지도 않는 부끄러운 침묵의 음모 속에 묻혀 버렸다. 일반적으로 직업적 철학자들의 경우 경력을 관리해주고 연구자금을 지급해 주는 사람들을 비난하기란 무척 어렵다. 그러한 물질적 이익뿐아니라 한때 실제 세계에 대해 중요하고 심오한 것을 실제로 말하는 철학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 싫었을 것이다.




 

과학 철학의 주요 흐름


철학자 앙리 베리그송(Henri Bergson)이나 존 듀이(John Dewey), 조지 산타냐(George Santayana)와 화이트헤드(A. N. Whitehead)를 제외하면, 현대 서구 철학은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실존주의와 관계가 있는 주관주의 학파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적 철학(linguistic philosophy)2)을 포함해서 다양한 종류의 "논리 실증주의"이다. 일반적으로 전자의 철학은 라틴 국가, 특히 프랑스에서 더 많은 반향을 일으켰고 후자는 지금까지 앵글로-색슨 지역에서 지지 받았다. 이 글에서는 후자 쪽에 더 많이 집중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학 철학을 대표한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미국과 영국에서 지배적인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흐름은 신-실증주의, 논리 경험주의, 경험비판론, 분석 철학 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장하며 여러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이 영국과 미국에서 지배적으로 일어났지만 독일과 특히 오스트리아 철학자들에 의해 크게 의존하고 있다.


20세기 전환기에 물리학자 에네스트 마흐(Ernst Mach)는 경험-비판론을 발전시켰다. 마흐는 물질세계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약간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그것은 원래 그 철학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철학은 20세기 많은 철학자와 과학자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이 철학은 18세기 비숍 버클리 사상에 기초하고 있으며 한마디로 새로울 것이 없는 최악의 주관적 관념론이다. 그러나 신-실증주의자들은 그들을 따로 과학적 실증주의자로 부르며 버클리가 그들의 원 저자임을 인정하기 싫어한다.


비숍 버클리 사상은 근본적으로 영국의 협소한 경험주의 철학에서 나왔으며, 인간의 모든 지식은 우리의 감각으로 부터 나온다는 로커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지식은 감각-지각으로 부터 나오는데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사과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확실하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보고 냄새 맡고 맛을 보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나의 감각-지각이다.' 이러한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다다르는 결론은 이 세상에는 오직 나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사상을 유아론(solipsism, 라틴어로 solo ipsus -"I alone")이라고 한다. 물질적 세계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엥겔스는 1892년 [공상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 Socialism Utopian and Scientific]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우리 불가지론자는 우리의 모든 지식이 우리의 감각 기관을 통해서 받는 정보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데 동의한다. -라고 그는 부연 설명한다―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 사물을 지각하고 그것을 정화하게 모사할 수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 또 계속해서 불가지론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즉 사람이 사물 또는 사물의 속성에 대해 말할 때 실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사물 자체 또는 사물의 속성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사물들이 감각기관에서 일으키는 지각뿐이다.


 이 말은 확실히 논증을 통해서 반박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람은 논증하기 전에 행동(실천)하고 있었다. "태초에 행동(실천)이 있었다." 인간은 행동(실천)을 통해서 인간의 지혜로 논증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도 전에 이미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푸딩이 맛있는지 없는지는 먹어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우리가 지각하는 물체의 속성을 우리 자신을 위해 이용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통해 얻은 지각이 옳은지를 정확히 시험해 볼 수 있다. 만일 그 지각이 틀렸다면 그 사물을 이용하려던 우리의 판단은 틀린 것이며, 그 사물을 이용하려는 온갖 시도는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리고 그 사물에 대해 우리가 기대했던 결과를 갖는다면, 우리가 사물의 속성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우리 외부의 진실과 일치하고 있다는 긍정적 증거이다."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버클리의 사상을 연상케 하는 마흐의 기본적인 언급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나의 감각을 통해 세상을 해석한다."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 유물론자들은 여기에다 "세상은 나의 감각과 독립적으로(상관없이) 존재한다."는 말을 추가한다. 이런 기본적인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엄청나게 불합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내가 알 수 있는 전부는 나의 감각뿐이다. 그러므로 나 이외에 다른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관찰하기 전에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결국 내가 세계를 관찰하기 전에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눈을 감으면 세상은 사라진다! 는 것이다.


이러한 말을 믿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러나 철학자뿐만 아니라 일부 매우 존경받는 과학자들까지도 이와 아주 유사한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마흐도 유명한 물리학자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1950년대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양자역학의 주류 흐름에 반발해서 '누군가 달을 보고 있을 때만 달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1981년 물리학자 데이비드 머민(David Mermin)은 "아무도 달을 보고 있지 않다면 달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마흐의 주장은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 의해 완전히 반박되었다. 여기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물질이란 인간의 감각에 의해 주어지고, 우리의 감각에 의해 복사되고 촬영되고 모사되지만, 그것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를 표현하기 위한 철학적 범주이다." (Lenin, Collected Works, Vol. 14, p. 130.) 맑스와 엥겔스도 이 점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실제 존재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언제나 우리 시야의 한계를 넘어서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의 통일성(공통점)은 물질성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두세 명의 마술사에 의해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철학 및 자연과학의 장구한 발전에 의해 증명되는 것이다."(Engels, Anti-Duhring, p. 54) 이것은 이미 헤겔도 언급한 바 있다. "일상의 언어로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에 의해 의미를 주고 감각에 의해서 외부와 닿는다."(Hegel, Logic, p. 67.)


흄과 칸트로 부터 시작해서 마흐까지 그들의 근본적인 실수는 감각을 개인(주체)과 물질세계(객체)를 분리하는 어떤 장벽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사실 감각 자체는 신경계, 뇌, 신체, 음식 등 물리적 환경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감각을 신체와 같이 어떤 식으로 조직된 물질과 분리하여 독립적인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관념주의자들의 사유 중에서 최악이다. 그것은 과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종교와 관념론과는 모든 면에서 일치한다.


사유는 사유를 하게하는 물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유라는 것은 어떤 식으로 조직된 물질(예를 들어 신체)의 생산물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연의 한 부분이며 특히 자연을 이해하고 반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매우 특별한 부분이다. 주관적 관념론의 가장 두드러진 모순은 다음과 같다: 만약 물리적 세계가 사람이 인식할 때만 존재한다면, 인류가 존재하기 이전 혹은 생명체가 존재하기 이전에는 세상이 어떻게 존재했겠는가?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지금까지도 그들의 논리를 비틀고 돌려 보지만 이러한 아주 기본적인 질문에 대해서도 만족할 만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의식", "사유" 등을 이미 자연스럽게 주어진 그 무엇, 본래부터의 존재, 자연과 대립하는 것으로 보는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따르면 의식과 자연, 사유와 존재, 사유법칙과 자연법칙이 일치하는 것을 매우 이상하게 여겨야 된다. 그렇다면 다시 도대체 사유와 의식이 무엇이고 또 어디에서 나왔는가라는 질문을 해보면 그것은 결국 인간의 두뇌의 산물이라는 것, 인간 그 자체도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 속에서, 또 이 환경과 더불어 발전하는 자연물의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결국에는 자연의 산물에 불과한 인간두뇌의 산물이 나머지 자연과 연관성에서 모순되지 않고 서로 잘 조응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Engels, Anti-Duhring, p. 44.)그리고 레닌도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직업적(주류) 철학자들에 의해 방황하지 않는 모든 과학자들을 위해 아울러 모든 유물론자들을 위해 감각은 실재로 의식과 외부 세계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통로 역할을 한다. 감각은 외부 자극 에너지를 의식적인 것으로 전환한다. 이러한 과정은 우리 주위의 일상 경험 속에서 그리고 수백만 번 관찰되었고 관찰되고 있다. 관념론에서는 감각을 의식과 외부세계의 연결 통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외부세계로 부터 의식을 구분하기 위한 울타리, 벽으로 보고 있다. 즉, 외부 현상의 이미지가 감각에 조응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존재"로 본다. (Lenin, Collected Works, Vol. 14, p. 51).


 외부 세계가 실재하는지 실재하지 않는지의 문제는 사실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이다. 그것은 연구를 통해서 풀리는 문제가 아니라 실제 존재 조건을 변화시키고 지배하고 다시 스스로 변화하기 위한 투쟁으로 이어지는 인류의 완전한 경험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이것은 맑스의 포이에르바흐의 테제 두 번째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인간의 사유가 객관적 진리성을 가지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결코 이론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인간은 자기사유의 진리성을, 즉 현실성과 힘을, 그 생명력을 실천을 통해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천이 없이 사유가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 하는 논쟁은 순전히 스콜라적인 문제이다". (MECW, Vol. 5, p. 3.)


헤겔주의 관념론에 대항한 경험주의


경험주의는 앵글로-색슨에 뿌리 깊은 전통이 있었지만, 19세기 후반에 영국의 대학에서 지배적인 철학은 헤겔주의였다. 이상하게도 그것은 적당히 신비주의적이며 종교적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브래들리(Bradley), 맥타카드(McTaggart)와 스털링(Stirling)등 당시 주류 헤겔철학자들이 헤겔에 대해 핵심을 빼고 관념주의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스털링은 [헤겔의 비밀]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 책에 대해 레닌은 "비밀은 잘 유지 되있다"고 비난한 바 있다.) 이들 관념론자들은 헤겔 철학에서 모든 가치 있는 내용을 삭제하고 신비주의적인 면만 보존하고 가르쳤다. 예를 들어 맥타카드는 시간의 개념은 일관성이 없으므로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신비주의적인 허튼 소리를 무어(G. E. Moore)나 러셀(Russell)과 같은 더 젊은 세대 철학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의 철학은 이러한 관념론적 신비주의에 대한 건강한 대응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대체한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대안을 모색했지만 상당히 낡은 영국적인 것-"상식"과 "사실"에서 그 대안을 찾았다. 그들은 철학에서 관념주의를 청소하기위한 시도로 다시 경험주위로 돌아간 것이다. 그들의 슬로건은 뉴턴의 슬로건과 같았다. "물리학, 형이상학을 두렵게 하라." 관념론자들의 잘못된 이론화 대신에 경험주의자들은 어떤 이론화작업도 선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자연과 같이 철학에서도 아무것도 없는 진공상태를 좋아하지 않는다.


형이상학에 대한 유일하게 살아있는 대안은 일관성 있는 유물론-변증법적 유물론이다.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영향을 받은 이 혁명적 철학을 무시함으로써 그들은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는 오류를 범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헤겔 철학에서 관념주의의 장식을 벗겨버리고 합리적 핵심을 드러내었다. 아무튼 그들은 이미 완전히 극복되어 다시 볼 필요도 없는 그런 초기 관점으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베이컨(Bacon), 홉스(Hobbes)와 로커(Locke)에 의한 영국 경험주의 학파의 발전 계보는 이미 버클리와 흄과 함께 장기적인 하강국면으로 접어들었고 점차적으로 완전히 막다른 골목으로 끝나고 있다. 존 스튜어트 밀(J. S. Mill)에 의해 재생 시도를 해보기도 했지만 이미 생명력 잃었고 속류화만 가속시켰다. 경험주의의 기본적인 명제는 : "나는 세상을 감각을 통해 해석한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자명한 이 명제에, 더 추가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세상은 내 감각으로 부터 독립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감각은 최종적으로 모든 인간지식의 원천이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많은 실수의 원천이기도 하다. 경험주의 초기에는 인간 사유에 있어서 거대한 도약을 이끌어 내었다. 과학을 지배한 종교 독제를 거부하였고 실험과 관찰에 기초한 진정한 과학적 방법의 승리를 이루어내었다. 그리고 스콜라 학파들의 무능한 관념주의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 유물론은 불완전하고 일면적이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유행하고 있던 기계론적 사고방식의 먹이가 되었다.


철학에서 스피노자(Spinoza), 라이프니츠(Leibniz), 칸트(Kant), 그리고 무엇보다도 헤겔과 같은 관념론자들에 의해 거대한 진보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일종에 역설이다. 이 모순은 맑스와 헤겔에 의해 해결되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유물론의 과학적 방법과 변증법을 결합시켰다.


무어는 명예롭게도 헤겔 주의적 신비주의를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경험주의 입장에서 피할 수 없는 신비주의도 반대하려고 노력했다. 버클리와 흄의 예는 경험주의 철학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그 종착지는 바로 주관적 관념론, 유아론(오직 "나"만 존재한다는 관념)의 혼돈속이다. 그런데 무어는 그의 논문, [판단의 본질(1899)]에서 사람의 감각에 독립해서 물리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1925년에 그의 에세이 [상식의 옹호]에서 그는 "나는 오늘 아침 밥을 먹었다(그래서 시간은 존재한다) 그리고 내 손에 연필을 가지고 있다(그러므로 외부 세계는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마흐와 하이젠베르크(Heisenberg)3)가 신비주의적 난센스를 선호한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런 표면상의 논증은 키니코스학파의 디오게네스(Diogenes)가 위로 아래로 걸어서 운동의 존재를 "증명"했을 당시의 철학에서 한걸음도 전진시키지 못한 것이다. "상식"은 어떤 한계 내에서 자신의 논리를 세울 수 있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는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 그리고 때로는 훨씬 더 심각한 실수를 초례하기도 한다. "상식"으로 지구는 평면이며 태양이 지구주의를 돈다고 할 때를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아무리 애를 쓰도, 우리는 바로 주어지는 감각-지각의 세계를 훨씬 너머설 수 있는 이론적 일반화 없이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무어는 "상식에 대한 믿음"에 호소하면서 형이상학에 대한 전쟁을 시도했지만 그의 철학은 많이 비어 있다. 왜 다른 것들 중에 꼭 이러한 상식에 호소하는가? 결국 이 생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편견에 사로잡힌 일상에 호소하는 것으로, 최종적으로는 현 상태에 뿌리를 둔 본질적으로 주관적 철학에 묶일 수밖에 없다.


논리 원자론(Logical Atomism)


 무어가 "상식"으로 회귀한 반면 러셀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갔다. 러셀과 초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근원적 구조에가 세계의 구조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언어를 분석하면 실재에 대한 중요한 진리를 밝혀낼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언어 속에 진실의 싹은 있다는 말은 헤겔이 이미 오래전에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도 역시 좁고 일면적이므로  결국 막다른 길목에 도달한다.  


"프라이팬에 나오면 다시 불속이다" 러셀은 무어와는 다른 새로운 이론과 방법을 시도했다. 논리학을 과학적 기초위에 어떻게 올려놓을 수 있을까? 수학적 언어를 가져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젊고 뛰어난 오스트리아인 비트겐슈타인의 영향 하에 1918-19년 동안 그는 [논리 원자론의 철학] 이라는 일련의 글을 발표한다. 여기서 그는 언어의 근본적인 작용을 밝히기 위해 그리고 그것에 의해 언어가 기술하는 근본적인 구조를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캠브리지 대학으로 옮긴 뒤 처음에는 러셀과 카르넵의 입장을 공유했다. 그러나 이후 수학과 논리학의 토대에 회의를 품게 되었고 일상 언어로 연구방향을 바꾸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철학은 언어에 대한 비판이다."라는 생각을 발전시켰다. 그가 밝힌 목적은 "언어를 수단으로 우리 지식에 주문을 걸어버리는 것에 대항하여 전쟁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을 과거에 미해결된 중요한 철학적 문제를 모두 해결하는 "최종 해답"으로 밀고 나간다. 마치 과거에 미해결된 문제가 어떤 오해에서 비롯되었거나 혹은 정확하게 말하지 않아서 그리고 사유의 형식적 결함 때문에 발생된 것처럼, 단지 문법과 구문론을 잘 정리하면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는 것이다. 지금 2천 500년 만에 처음으로 옥스포드와 캠브리지 대학 출신의 위대한 사람이 갑자기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물론 맑스도 포함해서 이들과 같은 얼간이(?)들이 만들어 놓은 모든 혼란을 빠르게 정리하고 명확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논리원자론은 언어에 대한 완전히 잘못된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그 이름은 당시 물리학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가장 단순한 문장을 "원자적"이라 불렀고 더 복잡한 문장을 "분자"라고 하였다. 몇몇 구문을 물리학에서 빌려온 러셀은 언어에 관한 그의 주장이 과학적 분위기가 풍기기를 바랐지만 그의 철학에서 과학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언어는 이렇게 세부를 분해해서 이해하는 "환원주의"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별 부분들의 총합보다 훨씬 더 큰 복합적 총체이기 때문이다. 러셀의 접근방식은 좁고 형식주의적인 그의 철학뿐만 아니라 당시 물리학의 한계가 가지고 있는 결함까지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언어 철학의 개념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 이것은 언어에 대한 뛰어난 변증법적인 통찰력을 보인 헤겔은 물론이고 로커, 버클리 흄의 저서에서 이미 나온 것이다. 유명한 비트겐슈타인의 [논고 Tracticus]에서는 그들이 얼마나 언어에 대해 형이상학적으로 사유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그들 스스로를 얼마나 옭아매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우리는 실험 과학을 통해서만 세상을 알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책 [논고]에서는 실험과학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실제 세계와의 관계를 드러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논고]에서는 자신의 철학에 일관성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이들은 헤겔에게 난해함을 비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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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1)1828-1888 변증법적 유물론의 재구성에 노력한 맑스주의철학자이다. 변증법을 인식론의 문제로 접근한 것이 그의 중요한 이론적 공헌이다. 독일 철학자·사회주의자·유물론자. 로 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철학을 독학으로 공부했다. 포이어바흐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자로 활동하였다. 맑스·엥겔스와 관점을 달리한 독자적인 변증법적 유물론 체계에 도달했고, 특히 승려주의(僧侶主義)와 불가지론(不可知論)을 공격했다.

2) 언어철학(philosophy of language)는 언어에 대한 철학적 문제들을 다루는 철학의 한 분야이다. 따라서 언어철학에서는 언어와 실재의 문제, 의미와 지칭의 문제, 의미와 진리의 문제 등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설(J.Searle)은 보다 구체적으로 언어철학의 문제들을 다음처럼 정리하고 있다. "언어철학은 언어의 일반적 특징들, 가령 의미, 지칭, 진리, 검증, 언어행위나 논리적 필연성 등을 분석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언어철학은 철학의 어떤 주제들에 대한 이름이다."(J.Searle, ed., Philosophy od Language, p.1.) 반면에 "언어적 철학(Linguistic philosophy) 는 단어의 의미를 분석하거나 단어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분석함으로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전통적 철학의 문제들, 가령 결정론, 회의론, 인과성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루어질 수 있고, 또 세계를 기술하거나 묘사하기 위해서 우리가 언어에서 하는 분류나 구분들을 검토함으로써 세계의 어떤 특성을 탐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적 철학은 철학적 방법에 대한 이름이다."

http://agora.co.kr/cgi-bin/ez2000/ezboard.cgi?db=sellars-p3&action=read&dbf=87&page=6&depth=2 인용

3) 하이젠베르크에 대해서는 노동자의 힘 제 88호 '아무도 달을 보지 않으면 달은 존재하지 않는다?'에 설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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