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30일 낮 제주시 노형동에 위치한 ‘가장자리 농원’. 눈앞에 다가온 가을에 밀려나는 게 서운한 듯 늦여름 더위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던 날이었다. 3천여평 정도 되는 밭 어귀엔 백구 한 마리가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는 기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농장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낌새를 알아채곤 짖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농원 주인 박성인(61)씨가 나와 기자를 맞았다.
35년. 검질(‘김’의 제주어) 매는 게 가장 힘들다는 ‘초보’ 농부 박성인씨가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기간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절반 이상을 ‘노동’에 천착했다. 30년 전과 비교해 지금 한국 사회의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은 얼마나 나아졌을까.
지금 우리 곁에서 어떤 이는 곡기를 끊어가며, 또 어떤 이는 감금에 가까운 경찰의 제지 속에서, 또 어떤 이는 끝이 잘 보이지도 않는 고공 철탑에 올라가며 우리 사회의 노동 민낯을 고발하고 있다. 박성인씨를 만나 대한민국 노동의 현주소를 물어봤다.
◇“대학생활 1년, 답 찾을 수 없어 바로 노동현장으로”
1978년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한 그는 딱 1년 동안 학교에 다녔다. 학과 수업도, 동아리 활동도 10대부터 품었던 삶에 대한 고민에 아무런 답을 주지 못했다. 대학 생활에 회의를 느낀 그는 바로 다음 해인 1979년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제대를 한 1982년. 비로소 박씨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답을 찾게 된다.
“그때는 기득권이었던 대학생들이 자신들이 가진 것들을 버리고 군사 독재 정권에 맞서서 민주화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게 시대적 흐름이었어요. 군대를 제대하면서 민주화가 가장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판단했던 곳이 바로 노동현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복학 신청만 해놓고 바로 (노동)현장에 들어가게 됐죠.”
수많은 사회문제 중 왜 하필 ‘노동’이었냐고 묻자 그는 “노동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어떻게 한 사회의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고 되묻는다.
“한 사회를 지탱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게 노동이에요. 그런데 노동의 주체인 노동자는 70~80년대 특히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고통받았어요. 노동3권도 보장받지 못하고 공돌이, 공순이라 불리며 사회적으로 가장 천시당하는 존재였죠.”
그에게 있어 노동운동은 사회를 변혁하려는 시도이자 움직임이었다. 동시에 어릴 때부터 자신을 괴롭혀왔던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기도 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지난 8월30일 제주시 노형동 가장자리 농원에서 만난 박성인씨. (사진=김재훈 기자)
◇“4.3, 노동, 그리고 민주화…모두가 연결된 개념”
지난 35년 그리고 앞으로 그의 삶을 ‘노동’과 연결해준 계기는 바로 제주4·3이었다. 그는 제대 후 1년 가까이 제주에서 지냈다. 이 기간 그는 4·3을 통해 ‘민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됐다. 4·3 당시에 민중이 부당한 공권력과 미 군정에 맞서 싸운 정신과 80년대 민중인 노동자들이 부당한 자본권력에 맞서 싸운 정신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친구인 김수열 시인과 걸어서 제주도를 한바퀴 돌며 4·3을 겪었던 동네 할머니들과 얘기도 많이 나누고 많이 깨닫게 됐습니다. 당시 항쟁하고 죽어갔던 이들의 정신을 지금 시대의 우리가 어떻게 되살려내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죠. 그게 바로 오늘날의 ‘노동운동’이라고 본 겁니다.”
‘노동’, ‘4·3’ 그리고 ‘민주화’, 이 모두가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는 생각이 굳혀지자 그는 공개적으로 “노동운동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강연을 통해 “4·3의 진실은 딱 노동운동의 진전만큼만 밝혀진다”는 그의 믿음을 전하고 있다.
◇“두 차례에 걸친 감옥생활 3년9개월…치열하게 노동 공부했다”
박씨는 1986년 ‘다산보임사건(이념서적을 일본 등에서 들여와 운동권 학생들과 노동자들에게 의식화 학습을 한 혐의로 출판기획사 다산·보임 관계자들을 구속한 뒤 ’국가보안법‘ 위반 등을 적용해 실형을 선고한 사건)’으로 1년 6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
당시 그는 노동운동에 대해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부터, 현장인 밑에서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기 시작했다. 출소한 후엔 공사현장의 일용직 노동자, 하청업 노동자 등으로 일하며 현장에서 노동운동을 펼쳤다.
1991년엔 제파PD(반제반파쇼민중민주주의·소련의 현실사회주의와 북한의 주체사상을 모두 억압적인 사상이라 비판하며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등장하는 자본주의가 해소된 사회를 추구할 것을 주장한 계열) 그룹에서 활동하다 다시 국가보안법 혐의로 붙잡혀 2년3개월간 감옥생활을 했다.
지난 8월30일 제주시 노형동 가장자리 농원에서 만난 박성인씨. (사진=김재훈 기자)
그리고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를 목도했다. 박씨에게 이 시기는 ‘끝’이라는 충격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는 전환점이었다.
“그때 같이 운동하던 사람들 많은 경우가 절망해서 전향하기도 했죠. 그 사람들에겐 세계사적으로 희망이 무너진 거예요. 근데 전 충격을 덜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80년대 공부할 때 소련을 모델로 보고 한 게 아니고 한국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했거든요. 징역 살면서 현실사회주의가 왜 패배했는지, 근원적으로 공부하고 접근을 했죠.”
◇“노동은 인간 그 자체…자신이 할 일 자신이 결정하는 ‘노동의 해방’ 추구해야”
박씨는 노동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말한다. 하나는 말 그대로 ‘먹고 살기 위해 재화를 생산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인간 그 자체’다.
그는 “노동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실현시키는 역할을 한다. 끊임없는 노동을 통해 인간이 지금의 인간으로 발전하고 변화한 것”이라며 “노동이 인간 그 자체라는 점에서 자신이 할 일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노동의 인간화’ 또는 ‘노동의 해방’”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보통 사람들이 ‘노동은 힘들다’라고 말하는 경우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물리적으로 힘든 일일 때이고 다른 경우는 남이 시켜서 억지로 해야 하거나 노동의 대가를 온전히 받지 못할 때”라며 “전자는 과학기술이나 기계 발명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지만 후자는 지금까지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인류 역사가 발전하려면 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가사 등 ‘필요노동’에 들어가는 노동력은 줄여가고 줄인 만큼 사람들이 예술이나 취미활동과 같은 자유로운 노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과학기술 등의 발전이 이뤄지면서 ‘필요노동’에 투입되는 절대적인 노동시간이 줄어듦에 따라 자연히 사회 구성원 모두의 노동시간은 단축돼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이런 모순 현상의 원인이 ‘계급의 양극화’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층은 자신의 24시간을 필요노동에 쓸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고소득층의 24시간은 어떤가요? 계급 간의 문제가 여기서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이 시대의 필요노동과 자유노동이 어떻게 분배되고 배치되는지를 보면 우리 사회의 노동 현실이 어디쯤 있는지 볼 수 있죠.”
지난 8월30일 제주시 노형동 가장자리 농원에서 만난 박성인씨. (사진=김재훈 기자)
◇“절차적 민주주의만 강조…가장 중요한 사회경제 민주주의는 후퇴”
박성인씨는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사회경제 민주주의의 후퇴를 꼽는다. 일상과 노동현장에서의 민주화가 이뤄지지 않았는데 ‘절차적 민주주의’만을 강조하면서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80년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를 외치면서 선거와 같은 ‘절차적 민주주의’만 강조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른바 ‘386세대’ 대부분이 민주화 문제를 그저 정권 교체 정도로만 생각한 거죠. 정권이 바뀌면서 민주주의가 정착했다고 생각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사회경제 민주주의는 오히려 후퇴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사회경제 민주주의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한국 사회에서의 노동자의 위치도 변방으로 밀려났다. 노동자 간 연대도 점차 균열되기 시작했다.
“87년 민주화 운동 이후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파업과 노동조합 결성 등을 통해 임금 인상과 노동 환경 개선을 이뤄냈죠. 당시엔 대기업 노동자들이 싸워서 임금 인상을 얻어내면 전체 노동자의 임금 인상으로 이어졌어요. 그때까진 조직된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노동자 연결고리, 97년 IMF 이후 깨져”
노동자들을 연결하는 고리는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깨지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와 함께 정리해고제가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정리해고라는 게 생기니까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 등으로 노동자 계층이 나눠지면서 소수의 노동자가 전체의 노동자를 대변하는 선순환 구조가 차단된 거죠. 자본이라는 지배세력이 집요하게 갈라놓았습니다. 그리고 노동계에선 노동자를 온전하게 하나로 묶는 시도를 하긴 했지만 대부분 실패했고요.”
그는 한국 사회 노동운동의 한계로 적절한 전략과 주체의 부재를 꼽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운동이 민주화의 일부로 시작됐다가 민주화 문제로만 그친 것이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비롯한 한계들이 오늘날 노동의 위기로 표현된다.
박성인씨가 지난 5일 제주시청 앞에서 열린 '그대로가 아름다워, 필요어수다! 양' 문화제에 함께 하고 있다. (사진=김재훈 기자)
“노동운동은 민주화를 위한 싸움인 동시에 노사 간 계급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자본에 맞선 싸움이 돼야 합니다. 한국은 90년대 초반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반자본주의 전략을 미처 마련 못 했다고 봅니다. 주체도 없었고요. 그 상황에서 97년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다 흔들려버린 거죠. 경제 위기는 노동자에 대한 공세가 가장 심해지는 시기거든요.”
그는 노동자끼리 서로 공격하는 구조를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일례로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를 ‘귀족 노조’라 일컫는 태도를 지적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회사에 쌓아둔 사내유보금이 엄청 납니다. 또 금융소득자 등 불로소득자가 굉장히 많고 재벌이나 오너들의 연봉이 노동자에 비해 지나치게 높죠. 이런 부분에 대해선 침묵하면서 대기업 노조가 파업을 하면 ‘귀족노조’라며 노동자가 노동자를 공격하기 바쁘죠. 이런 구조를 더 이상 용인해선 안 됩니다.”
◇“노동, 결국 정치의 문제”
박성인씨는 바로 지금이 우리 사회 노동운동의 위기라면서도 새로운 전환기이자 새로운 주체를 형성해야 하는 시기라고 강조한다. 80년대 이후 노동현장에서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는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는 이미 마련됐다. 노동3권도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노동조합 조직율은 10%에 불과하다. 특히 계약직 등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노동조합은 먼 얘기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실패를 거듭해온 노동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선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 그는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90년대 말에 노동자를 대변하는 정치인이 국회의원으로 진출하는 시도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 실패했죠. 지금은 이른바 진보정당이라 불리는 정치세력의 영향력이 가장 약화돼 있기도 하죠. 하지만 노동자들이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끊임없이 시도해야 합니다. 이게 지금 시기의 가장 관건이라 봅니다.”
지난달 8일 제주시 연동 농어업인회관 앞에서 열린 농민장터에서 박성인씨가 자신이 재배한 농작물을 판매하고 있다. 장터는 매주 일요일 오후에 열린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30년은 노동, 앞으로 30년은? 아직 고민 중”
30년이 넘도록 박성인씨를 붙잡은 것은 ‘노동’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30년간 그의 삶은 어디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까.
“물론 농사를 잘 짓는 게 가장 중요하죠. (웃음) 지금 가장 고민하는 건 앞으로 최소 30년 내가 붙잡고 가야할 게 무엇인지입니다. 방향이 잡히면 지난 30년 그랬듯 전력을 다해서 또 30년을 갈 겁니다. 그중 하나가 자연재배 농사 원리를 정리하고 교육하는 일, 또 다른 하나는 제주의 미래를 위한 정책 이론과 전략을 개발하는 일입니다.”
그에겐 30년 이후에 불리고 싶은 별명이 있다. 21세기 볼셰비키.
“지난번 서승 교수가 제주에서 북콘서트를 열었는데 뒷풀이 자리에서 나를 소개할 때 ‘이 시대 마지막 볼셰비키’라고 하더군요. 웃고 넘어가긴 했는데… 문득 30년 이후에 21세기의 볼셰비키라는 말을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말하는 역할이 되고 싶거든요. 환갑이 넘은 지금도 변화의 출발점이 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박성인,
1959년 제주 출생.
1978년 연세대 사회학과입학.
1982년 제주 학습모임 참여.
1983년 다산보임그룹 참여.
1986년 다산보임사건으로 구속.
1988년 울산지역 노동현장 취업.
1989~1990년 울산노동조합협의회 준비위 간사.
1991년 제파PD사건 구속.
1995~2007년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정책위원장·부소장·소장)
1999~2008년 노동자의 힘(기관지위원장·대표)
2009년 사회주의노동자당건설준비위원회 강령위원장.
2010년~ 사회주의노동자계급정당준비위원회 중앙위원.
<1980년대, 변혁의 시간 전환의 기록 2- 학출활동가의 삶의 이야기, 유경순> 참조
박성인의 '나의 삶과 사상에 영향을 끼친 10인'
1.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독일 출신 신학자;1906~1945)
2. 시몬 베유(Simone Weil·프랑스 출신 사상가;1909~1943)
3.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독일 출신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경제학자;1818~1883)
4. 엥겔스(Friedrich Engels·독일 출신 철학자;1820~1895)
5. 레닌(Vladimir Il'ich Lenin·러시아 출신 혁명가이자 소련 초대 국가 지도자;1870~1924)
6.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폴란드 출신 사회주의 이론가;1871~1919)
7. 체 게바라(Che Guevara·아르헨티나 출신 혁명가;1928~1967)
8.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네덜란드 출신 철학자;1632~1677)
9.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미국 출신 경제학자이자 평화주의자;1883~1983)
10. 이반 일리치(Ivan Illich·오스트리아 출신 신학자이자 철학자;1926~2002)
73년이 걸렸다. 잊혀지고 지워지길 강요당하며 공포와 고통 속에서 침묵한 50여년 세월에 더해, 1999년 ‘4·3특별법’이 제정되어 <진상보고서>가 채택되고, ‘국가공권력에 의한 인권 유린’이라고 대통령이 제주도민들에게 공식 사과하고, 이어 국가추념일로 지정되고, 마침내 2021년 2월 8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소위에서 희생자 배․보상, 군사재판의 무효화 등의 내용이 담긴 개정안이 여야 합의로 다루어지기까지.
물론 아직 10여일이 남아 있다. 행안위 전체회의를 거쳐 큰 이변이 없다면 법사위와 26일 본회의에서 통과가 될 것이다. ‘피해 구제를 통해 명예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4·3특별법 개정은 이번 임시국회가 사실상 마지노선인 만큼, 여야간 합의에 의해 마지막 절차를 밟고 있는 만큼, 여러 쟁점에도 ‘4·3특별법’ 개정안은 통과될 것이다. 아니 통과되어야 한다.
아직 섣부를 수도 있지만,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더라도 다시 용역 결과와 보완 입법과정을 더 기다려야 하지만, 이번 4·3특별법 개정이 제주도민과 유가족분들께 조금이라도 위로와 명예회복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비극적 제주 현대사의 한 매듭을 지었으면 한다. 70여년이 넘는 ‘고통과 피해의 역사’에 한 매듭을 지었으면 한다.
우리는, 제주도민은 이런 매듭을 지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공포와 고통 속에서도 살아남아 긴 침묵 속에서도 끝내 기억해 왔고, 우리 세대는 4·3의 학살 경험으로부터 뼛속 깊숙이 새겨진 두려움과 패배주의를 조금씩 이겨내 왔으며, 마침내 80년대 이후 우리 사회의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이제사 말햄수다”고 외쳐왔고 싸워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4·3특별법 개정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의 성과이자 한 매듭이고, 우리 사회 민주화 진전의 성과이다. 두 세대에 걸친.
갇히지 말아야 한다, 이 성과에. 갇혀서는 안된다. 우리 자신의 역사이기에, 우리가 매듭지어야 할 역사이기에, 이번 4·3특별법 개정은 우리의 한계이기도 하다. ‘화해’와 ‘상생’의 이름으로 매듭을 짓는다고 해도 아직은 ‘한 매듭’일 뿐이다. 누군가 4·3특별법 개정을 4·3의 ‘완전한 해결’이라고 주장한다. 학살 책임자에 대한 규명 없이, 특히 학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미국의 책임 규명과 사과 없이 ‘완전한 해결’을 얘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위자료 등의 특별 지원?’ 한 발 물러서서 ‘위자료’라는 표현에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는 배·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치자. 그런데 왜 ‘특별 지원’인가? 4·3이 특별한가? 지난 4·3 70주년 이후 우리는 “4·3은 대한민국의 역사”라는 구호를 내걸고 ‘4·3의 전국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전국의 많은 국민들이 4·3의 비극에 대해 알게 됐고, 이번 4·3특별법 개정 과정에서도 함께 힘을 보탰다. ‘특별 지원’에 우리를 가두어서는 안된다. ‘4·3의 전국화’는 4·3을 전국에 알리는 것을 뜻할 뿐만 아니라, 전국의 전후 민간학살의 역사가 우리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진정 4·3은 전국화 된다. ‘특별 지원’은 바로 4·3 전국화의 한 측면을 가려버린다. 전후 민간인 학살과 4·3이 하나의 문제라는 것을 분리시켜 버린다.
4·3의 전국화는 4·3을 전국에 알리는 것만이 아니라 전국의 민간인 학살 문제를 우리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일 때 그때 비로소 완성된다. 4·3을 포함한 전국의 전후 “국가폭력의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최소한의 피해회복 조치이자 명예회복 조치이고,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아 스스로를 치유하고 정의로운 국가로 거듭나는 길”이어야 한다. 4·3특별법 개정은 그 첫걸음이어야 한다. 그래서 수식어 없는 ‘배·보상’이 맞다.
나아가 4·3은 제주도, 한반도 문제만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체제 구축과정에서 발생한 동아시아지역의 제노사이드의 일부이다. 이 문제까지 규명될 때 4·3의 ‘완전한 해결’을 얘기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 앞에 겸허해야 한다. 4·3특별법 개정은 ‘완전한 해결’을 위한 첫걸음의 한 매듭이고, 아직은 그 두 번째 걸음을 향한 첫 발자욱일 뿐이라고.
그래도 남는 문제가 있다. 3년 전 70주년 전야제 추모사에서 현기영 작가는 이렇게 썼다. “4·3항쟁의 대의명분은 옳았습니다. 그러므로 4·3의 조상님들이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라 역사의 당당한 주체로서 역사에 기록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게 4·3항쟁이 역사에 올바르게 자리매김했을 때야 비로소 4·3 원혼들이 편안히 진혼되어질 것입니다.” 4·3 정명의 문제이다. 4·3‘사건’의 성격 규정 문제이다. 이는 두 세대에 걸친 70여년의 역사를 뛰어넘는 문제이다. 100여년에 걸친 한국 근현대사를 아우르는 문제이다.
4·3은 해방 후 미군정과 그 하수인인 친일세력, 서청 등의 탄압에 맞서 친일청산과 자주적인 통일 독립국가 건설을 염원했던 제주도민들의 항쟁이었다. 5·18이 학살로 끝났다고 ‘5·18학살’, ‘5·18사건’으로 불리우지 않듯이, 4·3항쟁이 학살로만, 피해자로만 자리매김되어서는 안된다. 4·3의 정명, 4·3사건의 성격 규명은 과거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오늘의 문제이기도 하다. 4·3항쟁이 제기했던 문제가 여전히 오늘날에도 현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4·3의 정명은, 4·3의 성격 규명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의 진전만큼만 이루어진다.
‘그 때 쿠바에 갔다 왔어야 했는데---.’ 지난 11월 25일 쿠바의 혁명가 카스트로가 90세의 일기로 사망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2000년의 기억이었다. 당시 ‘노동자의힘’ 대표로 호주 시드니에서 개최된 ‘Marxism 2000’에 참석했을 때, 행사의 주관자인 호주 민주사회주의당(DSP, Democratic Socialist Party)은 그해 말 쿠바에서 개최될 국제연대 행사에 참여해줄 것을 제안했다. 1990년대 초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10여년간 쿠바가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나갔는지를 평가하는 국제컨퍼런스라고 했다. 당연히 카스트로도 참석해서 발언한다고 했다. 그 유명한 카스트로의 연설을 직접 들어볼 수 있고, 무엇보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을 전세계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어떻게 진단하고 어떤 대안을 모색하는 지를 직접 토론하고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행사여서 마음이 설랬다. 가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가지 못했다. 당시 조직 내 상황이 긴박했고, 국가보안법의 문제도 걸려 있어서 결국 포기했다. 지금은? 후회된다. 그 때 어떻게든 가봤어야 했는데.
쿠바 혁명의 역사는, 그리고 쿠바의 혁명가들(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은 1980년대에 자생적인 첫걸음을 내딘 남한의 초보 사회주의 활동가들에게 ‘혁명적 상상력’의 원천 가운데 하나였다. 1980년대~90년대에 나도 초보 사회주의 활동가로서 당시 몇 권 번역되지도 않았던 쿠바 혁명과 쿠바 혁명가들을 소개한 책을 읽으며 한국에서 혁명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모색했다. 1953년 소수의 젊은 혁명가들을 중심으로 독재자 바티스타정권에 맞서 몬카다 군병영을 습격한 그 결기가 놀라웠고, 1955년 법정에서 한 “역사가 나를 사면할 것이다”던 최후변론이, 그 용기와 열정이 내 가슴을 뜨겁게 했다. 7.26운동 조직을 이끌고 50년대 후반에 마에스트라 산맥을 중심으로 전개한 게릴라전을 보며, 후퇴할 산맥(?)이 없는 우리에게는 ‘노동현장이 산맥’이라고 판단했다. 1959년 1월 마침내 게릴라부대가 중심이 되어 반바티스타 민주주의 혁명이 성공했을 때, 그 성공과 혁명 유지의 핵심적 동인이 아바나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들의 총파업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큐바혁명의 재해석>(바니아 밤비라)을 통해서 였다. 여느 혁명의 역사에서처럼 쿠바의 민주주의 혁명은, 민주주의의 철저한 진전을 통해, 토지개혁과 외국인 자산 몰수 등을 통해, 그리고 이에 개입하려는 지배계급과 미국의 반혁명 시도에 맞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갔다. 아니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만이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완성시킬 수 있고, 민주주의 혁명과 결합 없는 사회주의 혁명이 있을 수 없다는 점 역시 쿠바 혁명이 보여주었다.
사실 내가 더 궁금한 것은, 그래서 더 알고 싶은 것은 1959년 쿠바 혁명 이후의 쿠바였고,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의 쿠바 현실과 그들의 고민과 해법이었다. 그래서 2000년에 쿠바 국제컨퍼런스에 가고 싶었다. 당시 사회주의 활동의 첫걸음을 내딛자마자 사회주의권 몰락이라는 충격을 온 몸으로 맞부딪혀야 했던 남한의 사회주의 활동가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기회였는데---. 다행히 2000년대 들어 쿠바와 쿠바 혁명가들에 대한 책들이 번역되거나 쓰여져서 간접적으로나마 쿠바의 역사와 현실을 접할 수 있었다. 쿠바의 유기농․생태농업, 무상의료․기초의료, 문맹퇴지와 무상교육, 제3세계 국제연대 등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국내에도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요시다 타로), <또 하나의 혁명, 쿠바의 기초의료제도>(린다 화이트포드 등), <의료천국 쿠바를 가다>(요시다 다로), <피델카스트로-마이 라이프>(이냐시오 라모네), <체게바라 평전>(장 코르미에) 등의 단행본을 통해 널리 소개됐다. 이 자체만으로도 쿠바가 경제봉쇄와 위기 속에서 어떻게 사회주의를 유지하고 더 진전시켰는지를 보여준다. 놀라운 것은 위기 속에서 그 위기를 극복해나간 방식이었다. 그들은 1990년 3월부터 ‘사회주의를 계속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인가’라는 토론을 쿠바 공산당 당원만이 아닌 전국민이 참여하는 대중토론회를 열고 그 토론의 결과로 ‘제한적인 개혁․개방’의 길(국영기업의 분권화, 자영업 부활, 개인의 달러 보유 및 사용 허용 등)을 결정했다. 가장 위기의 시기(‘평화로운 시대의 특별 시기’)에 가장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사회주의를 유지하면서 경제를 개혁해 나가는 방안을 전국민적으로 토론하고 합의한 것이다. 그리고 몇 년 전에 다시 한 번 이런 토론회를 개최해서 수렴된 내용을 정리해서 ‘경제개혁’방안을 마련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제개혁에 따른 여러 부작용도 드러나고 있고, 자칫 쿠바 사회주의체제가 무너질 우려도 제기되지만, 쿠바는 위기 극복 방식을 ‘핵미사일’ 대신에 ‘민주집중제를 통한 경제개혁’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온전히 쿠바의 민중들이 스스로 책임져나갈 몫이 될 것이다.
1950년대 이후 60여 년간 쿠바 혁명의 중심에 바로 혁명가 ‘카스트로’가 있었다. 이제 그가 혁명가로서의 한 일생을 마감했다. 카스트로는 생전에 자신의 개인숭배를 단호하게 반대했고, 집단지도체제를 통해 개인독재로 흐르는 것을 막아왔다. 몇 년 전 제작된 올리버 스톤 감독의 다큐 ‘카스트로’에서는 카스트로의 사망 이후의 쿠바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신이 죽은 후에도 쿠바가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에 카스트로는 올리버 스톤 감독을 쿠바 민중들 속으로 데려가서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준다. 당시 쿠바 민중들의 목소리는 이번 장례식장에 모인 수십만명의 민중들의 목소리에서도 다시 되풀이됐다고 한다. “나는 피델이다”(Yo soy Fidel). 1955년 법정에서 울려퍼졌던 카스트로의 “역사가 나를 사면할 것이다”는 선언은 그의 죽음과 함께 이렇게 이루어졌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