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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살아서 여여(如如)했어야지(양동주 추모집 서문)

살아서, 살아서 여여(如如)했어야지


참 힘듭니다.
이 글을 쓰기가 힘듭니다.
이런 ‘추모집’에 글을 쓰기가 너무 힘들고 싫습니다.
동주가 지금 있어야 할 곳은 이 ‘추모집’이 아닙니다.
고향땅 함덕 서우봉 밑 바닷가 모래해변, 때만 되면 고사리, 버섯, 곰취를 찾아다니던 제주의 오름과 곶자왈, 그가 농막이라도 지어 농사를 지으려고 했던 동백동산 곁 이 천 평 밭에,
촌놈 동주는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지금!

 

정녕 동주가 지금 있어야 할 곳은 그가 사랑했던 가족과 벗들과 지인들의 ‘마음’속이 아닙니다.
생계를 위해 서툴게 농사짓던 감귤밭 검질(잡초) 작업을 위해 예초기를 들고 있어야 합니다.
벗들과 밤 세워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열띈 정치토론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이 사회와 정치의 민주주의를 위해 열린 촛불 광장에 다시 발 딛고 서 있어야 합니다.
지금, 동주가 있어야 할 곳은.

 

벌써 일 년이 훌쩍 지나가버렸습니다.
동주가 없는 일 년이 무심코 흘러가버렸습니다.
동주는 지금 여기에 없고, 왕방울처럼 꿈뻑이던 두 눈과 티 없이 맑은 미소도 없고, 쩌렁하던 목소리도 없고---
그가 남긴 글과 사진들만 블러그와 페북에 외롭게 남아있습니다.

 

동주는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블러그와 페북에 버섯에 대해, 농사에 대해, 이 사회와 정치의 민주화에 대해 글을 쓰고 사진을 찍어 올리는 것을 즐겨했습니다.
근데 동주가 진짜 원하고 그리워했던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눈을 마주치고 소통하고 토론하고---
그가 블러그와 페북을 통해 글을 쓰고 사진을 올린 것은 사람이 그리워서입니다.
숨길 것 없이 자신의 온 몸과 온 느낌과 온 판단을 드러내고, 거칠 것 없이 사람들과 만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남긴 글과 사진은 그가 그토록 만나고자 원했던 사람들에 보내는 절절한 손짓입니다.
그렇게 사람을 그리워했습니다. 동주는!

 

동주가 떠나고 나서야, 그가 남긴 글과 사진을 모두 묶으면서 비로소, 그가 살아왔던 삶과 그의 바람을 조금은 온전하게 알 수 있게 됐습니다.
그와 함께 했던 벗들과 지인들의 추모글을 통해서 동주가 어떻게 살았고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제야 어렴풋이 이해하게 됐습니다.
근데 지금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지금 여기 동주가 없는데---
지금도 안타깝습니다. 이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서라면 미문화원 점거든 울산 노동현장이든 촛불항쟁이든 타산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졌던 동주가 자신의 병 치유를 위해, 자신의 몸을 위해 모든 것을 걸지 않은 것이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고향에 귀향한 내게 동주가 제안했던 여러 일들을.
제주의 할머니들이 힘겹게 지은 농작물을 모아 팔 수 있는 온라인 유통망을 만들었으면 했습니다.
분열된 진보진영이 하나의 현실적인 정치세력으로 결집해 나가는 방안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제주도를 좀 더 민주적이고 생태적인 지역으로 만들기 위해 도지사 선거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며 직접 제안문을 쓰고 사람을 불러 모으기도 했습니다.
이제 동주의 제안과 바람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 됐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을 떠납니다. 언제 떠날 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특히 동주는! 지금은 아니었습니다.
살아서, 살아서 여여(如如)했어야 합니다.
뜻 그대로 “있는 그대로” 여여하게 살려면, 살아있었어야 합니다.
여래(如來)는 “오는 것과 가는 것이 같은 사람”, 즉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지만, 동주는 살아서 여여(如如)했어야 합니다.
살아야 여여(如如)할 수 있습니다.

 

‘여여(如如)하게 살아보자’던 동주는 떠났습니다.
그가 떠난 세월이 일 년이 됐지만, 동주는 지금 혼으로라도 되돌아와 무릎 꿇고 잘못을 빌어야 합니다.
그가 사랑했고, 그리워했던 가족들과 벗들과 지인 분들께.
먼저 떠나가서 미안하다고.
아마 동주는, 내가 아는 동주는 그럴 겁니다.
“먼저 가서 미안해요.”

 

동주의 명복을 빌며. 2019. 10.01.
가장자리 농원에서, 박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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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에게 들려준 '초보운전 십계명'

● 초보운전 10계명 ●

 

1. 음주 운전은 무조건 하지 말라! 걸리지 않을 정도면 괜찮겠지 하다가 음주운전이 습관이 된다.

 

2. 운전 중 뜻밖의 상황에 처했을 때, 당황하거나 쫄지 말라! 침착하게 대처하면 다른 운전자들이 알아서 대처한다.

 

3. 크던 작던 사고가 났을 때는 절대 자리를 피하지 말고, 사람 중심으로 대처하라! 사람이 다쳤는지 안다쳤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모든 것은 보험으로 처리할 수 있지만, 사람이 다쳤을 때 제대로 대처하지 않으면 보험만으로는 안된다. 상대방이 다쳤을 때는 반드시 병원으로 가서 진단을 받도록 해야 한다.

 

4. 운전은 ‘흐름’과 ‘탄력’이다. 도로 주행 중일 때 무조건 천천히 간단고 안전한 것은 아니다. 다른 차들과 흐름을 맞춰야 한다. 도로가 언덕일 때, 오를 때는 탄력을 받고, 내려갈 때는 탄력을 죽여야 한다.

 

5. 운전에서 앞차와의 간격을 잘 유지하는 것이 위급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브레이크를 밟을 때는 후미등으로 뒷차가 어느 정도 간격으로 따라오고 있는 지 확인하는 것을 습관화해야 한다.

 

6. 안전운전은 ‘예측’운전이다. 도로의 상황, 차의 주행 속도 등을 판단하면서 어떠한 상황이 벌어질 지 예측하면서 대비해야 한다.

 

7. 운전을 잘 한다는 것은 악셀레다를 잘 밟는 것이 아니라, 브레이크를 잘 활용하는 것이다. 브레이크가 중요하다! 특히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 차를 정지할 때 브레이크를 잘 활용해야 한다.

 

8. 빗길 운전을 할 때는 앞뒤차간 간격을 잘 확보해야 한다. 빙판길 운전을 할 때는 급출발이나 급정거를 하지 말아야 하고, 빙판길 내리막길에서 차가 미끌어질 때 핸들을 반대 방향으로 꺾어서는 안된다. 그러면 사고가 더 커진다. 미끄러지는 방향으로 미끌어지게 놔두면서 피해를 최소화 해야 한다.

 

9. 야간 운전은 시야를 좁게 한다. 그래서 앞뒷차간 거리를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 운전하다가 졸리면 휴게소 같은데서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라!

 

10. 주차할 때 동작을 작게 하지 말고, 크게 해라. 우회전을 할 때는 먼저 오른쪽을 살핀 다음 곧바로 왼쪽을 살피고, 좌회전을 할 때는 먼저 왼쪽을 살핀 다음 곧바로 오른쪽을 살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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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항쟁과 나, 그리고 노동운동

“4.3은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노동운동의 진전만큼만 진상이 규명되고, 그 만큼만 계승된다.”
-제주4.3.항쟁과 나, 그리고 노동운동-

 

박성인/회원, 가장자리 농원지기

<질라라비>(철폐연대), 2018.3.

 

 

쉬쉬했다. 제사 때나 명절 때 숨죽이며 얘기를 들었다.
4.3때 할아버지가 경찰에 끌려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20대 초반이었던 셋아버지가 무장대로 싸우다가 어떻게 행방불명되셨는지. 그리고 그 일로 아버지가 연좌제 때문에 자신의 진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까지.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4.3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나뿐만 아니라, 당시 제주도민들은 누구나, 어느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4.3은 ‘폭도’들이 일으킨 ‘폭동’이었고, 입밖에 꺼내서는 안될 어두운 역사였다.
잊혀지고 지워져야할 역사였다.

 

82년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하기 전까지 제주도에 잠시 머물면서, 친구 수열이와 함께 걸어서 제주 일주를 했다. 4박5일간 도보여행을 하면서 머무는 마을마다 할머니들을 만나 4.3에 대한 얘기를 생생하게 들었다. 직접 겪은 4.3을 얘기하는 그 분들의 눈빛은 공포로 가득찼고, 목소리는 떨렸다.
20세 초반의 내게 ‘제주도민’은, ‘민중’은 그렇게 다가왔다.
‘분노’조차도 압도해 버리는 ‘공포’!
그 ‘공포’가 무엇인지, 4.3이 무엇이었는지 알기 위해 친구들과 4.3.에 대해 자료를 찾고, 4.3.에 관한 영서(<The Cheju Rebellion>, J. Merill)와 일서(<제주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김민주, 김봉현)를 번역하여 주변에 알렸다.
<순이삼촌>(1978년)을 써서 4.3.을 알린 현기영 선생님을 처음 찾아뵌 것도 이때였다.
그렇게 나의 운동은 4.3.과 함께 시작됐다.

 

첫발을 내딛었을 때, 내가 직면한 것은 그 운동의 ‘끝’이었다.
83년 대학에 복학을 하자마자 학교를 때려치우고 민주화운동을 한다고 노동현장으로 갔을 때, 아버지께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선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다고 얘기드렸다.
그 얘기를 들은 아버지는 그 운동의 끝을 우려하셨다.
‘패배’와 ‘죽음’!. 4.3.의 학살 경험으로부터 뼈속 깊숙이 새겨진 두려움과 패배주의. 
그래야만 했다. 민주화와 노동운동을 하려면 시작부터 그 ‘패배주의’에 맞서야했다.
나의 가족과 제주도민들 속에 깊게 각인된 그 ‘두려움’과 ‘패배주의’가 그 때는 그렇게 싫었다.

 

92년 원주교도소에서 두 번째 징역을 살고 있을 때, 신문을 통해 ‘다랑쉬굴’ 유해 발굴 소식을 들었다. 다랑쉬굴 유해 발굴은 4.3의 참혹함에 대해 사회적으로 이슈화시키는 계기였고, 내 마음을 다시 뒤흔든 계기이기도 했다.
제주에서 농민운동을 하는 이야성 선배(지금은 돌아가셨지만)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왜 4.3은 우리에게 죽음으로만, 유해로만 다가오는가? 죽음은 패배한 결과일 뿐인데. 4.3의 참모습은 ‘죽음’이 아니라 ‘항쟁’인데. 4.3항쟁은 민중이 주체가 돼서 자주적이고 통일된 국가를 세우려 했던 투쟁이었는데. 희망이었는데. 왜?”
그 때 조금 더 분명하고 확고하게 깨달았다.
4.3은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노동운동의 진전만큼만 진상이 규명되고, 그 만큼만 그 항쟁의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할 수 있다고.
민주화와 노동해방을 위한 나의 투쟁이 4.3 진상규명과 항쟁정신 계승과 무관하지 않다고.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제주에서도 4.3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운동이 본격화됐다.
‘이제사 말햄수다’, ‘4.3은 말한다’, 생존자들의 한맺힌 증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동백꽃 지다.’ 4.3의 처절했던 순간들이 그림으로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한라산’ 시로 쓰여지고, ‘한라산의 노을’ 소설로 쓰여졌다.
‘제주항쟁’, ‘4.3과 역사’로 조사 연구됐다.  
‘잠들지 않은 남도’로 노래 불리어졌고, 마당극단 한라산의 마당극으로 표현됐다.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가 구성됐고, 합동유령제가 열렸다.
이 모든 노력의 결과로, 마침내 2000년 1월 12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그 특별법에 따라 <진상보고서>가 채택되고, 노무현 정부는 ‘국가공권력에 의한 인권 유린’에 대해 제주도민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그리고 마침내 2014년 국가추념일로 지정됐다.
일단 4.3.진상규명은 ‘화해’와 ‘상생’의 이름으로 한 매듭을 지었다.
아니 진상규명을 위한 국가 차원의 첫 발을 내딛었다.
그래서 ‘4.3 사건’이다.
더 이상 폭도들에 의한 ‘폭동’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4.3항쟁’도 아니다.
“제주 4.3사건이라 함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올해로 4.3.은 70주년이 된다. 국가추념일로 지정도 됐다.
70주년을 맞이해서 ‘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가 구성됐다.
4.3에 대해 전국적으로 알리고, ‘4.3특별법’ 개정을 위한 운동도 전개한다.
추가 진상 규명과 피해자 배․보상, 치유 프로그램도 요구한다.
4.3당시 전국의 형무소에 구속됐다가 학살된 3,000여명에 대한 군사재판 무효화 제기도 한다.
모든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도 이루어지고, 가해자․학살책임자에 대한 규명도 해야 한다.
제주도민 30,000여명을 학살한 책임자 규명에서 미국도 자유로울 수 없다.
4.3이 제주도만이 문제가 아니라 전후 냉전체제의 구축 과정에서 발생한 제노사이드 사례로 보편화하는 시도도 이루어질 것이다.
이 시도는 계속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한 매듭을 지어야 한다.

 

그러나 남는 문제가 있다. ‘4.3항쟁’은?
‘4.3항쟁은 왜 패배했는가?’ ‘21c 4.3항쟁의 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나는 지난 35년간 노동운동을 하면서 이 두 질문을 포기한 적이 없다.
4.3항쟁에 대한 진상규명과 정신계승이 노동운동의 진전과 무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금 한국 사회의 노동운동의 진전이 4.3항쟁의 패배 원인에 대한 규명과 맞물려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해명할 때, 나는 패배주의에 갇힌 ‘피해자’가 아니라, 운동과 삶의 ‘주체’로 설 수 있다.
4.3은 미군정과 그 하수인인 친일세력, 서청 등의 탄압에 맞서 친일청산과 자주적인 통일 독립국가 건설을 염원했던 제주민중들의 항쟁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3만명이 넘는 제주도민이 학살당하고 투쟁을 주도했던 세력들이 궤멸됐으며,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는 실패했다.
그러나 그 패배가 제주도민들만의 몫인가?
아니다. 당시 민중이 주인된 자주적인 통일국가를 염원했던 세력들의 한계였고 패배였다. 4.3.항쟁의 한계는 당시 전국적 수준에서 투쟁의 끝자락에 놓여 있어서 새로운 투쟁을 촉발시켜내지 못한 채 제주지역으로 고립된 것이었다.
앞서지 못하고 뒤따라가면 고립되고, 고립되면 패배하고, 피해자로만 남는다.

 

4.3이 ‘민중항쟁’으로 복원되고, 정명(正名)되려면, 먼저 항쟁 주체들에 대한 뼈저린 평가와 반성적 성찰부터 해야 한다.
그것도 당시 제주도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수준에서.
당시 항쟁을 주도했던 남로당과 건준, 전평 등의 전략과 전술, 그 주체의 역사적인 형성까지 재평가를 해야 한다.
해방 이후 인민위원회, 자주관리운동 등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건설할 아래로부터의 민중권력의 맹아가 존재했다.
그러나 정세인식에서 미군정(미국에 의한 동북아질서의 재편)에 대한 판단의 오류, 신탁통치에 대한 대응에서의 혼선, 전국적 투쟁으로 결집시켜내는 조직력과 정치적 리더쉽의 결여로 아래로부터의 투쟁 역량이 지역별로 계속 소진되는 과정, 일제하 한반도 내에서의 독립운동의 주체 형성 과정에 대한 평가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
4.3.은 이러한 재평가 속에서 역시 ‘항쟁’으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그래서 4.3은 한국사회에서 민주화․변혁운동, 노동운동의 진전만큼만 이루어진다.

 

21c에 4.3의 정신계승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
특히 제주도의 노동자와 민중들은?
‘변방’의식을 벗어나 ‘가장자리’란 관점을 세워야 한다.
‘변방’의식이란 스스로를 중앙에 의해 항상 피해와 고통을 당하는 ‘피해자’로만 생각한다. 그리고 그 피해와 고통의 결과로 가끔 저항을 하는 주체로.
‘가장자리’의식은 역동적인 부딪힘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창출해 나가려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관점과 태도를 말한다.
21c 제주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부딪히는 곳, 동북아 세력이 가장 첨예하게 부딪히는 곳, 자본의 욕망과 대안적 삶에 대한 바램이 첨예하게 부딪히는 곳이다.
이 부딪힘 속에서 새로운 질서가 탄생한다.
이 가장자리에서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끌려가면, 패배한다.
변화를 주도할 때 이길 수 있다.

 

현재 제주도는 자연이 역사를 압도하고, 그 자연을 자본이 장악해가고 있다.
문제는 자본이다.
강정마을, 제2공항 강행, 난개발, 노동 문제 등으로 제주도가 다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해방 후 ‘민중 주체의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이 ‘4.3항쟁’의 희망이자 과제였듯이, 21c 평화와 인권, 생태와 노동, 민주주의(노동현장, 학교, 마을)의 새로운 전망을 세우고 싸워나가는 것이 ‘4.3항쟁’의 정신을 21c에 계승하는 것이다.
더 이상 피할 한라산기슭은 없다.
새롭고 역동적인 전망을 가지고 ‘노동현장’으로! ‘학교’로! ‘마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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