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트 영역으로 건너뛰기

경기지역 총파업 성사와 승리를 위한 현장활동가대회(2011.5.31.)

경기지역 총파업 성사와 승리를 위한 현장활동가대회

2011.5.31.(화) 19:00, 수원역 광장

 

 

여느 노동자집회와 달리 깃발은 없었다.

참여한 현장활동가 한 사람 한 사람 스스로 ‘깃발’이었다.

‘경기지역총파업 성사와 승리를 위한 현장활동가대회’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만약 이 집회에서 결의한 것처럼 경기지역에서 ‘지역총파업’이 성사된다면, 이는 한국 사회 대중파업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도로 평가될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나는 지역총파업의 ‘성사’ 그 자체가 총파업의 목표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조합의 공식적인 의결 절차와 지침에 따른 파업 결의가 아닌 아래로부터 현장활동가들의 결의에 따른 지역연대파업이라는 점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더 이상 밀릴 수 없다는 현장활동가들의 절박한 정세인식이 그들을 이런 결의로 이끌었을 것이다.

더 이상 무기력하게 노조의 지침을 기다릴 수 없다는 자성이 그들을 나서게 했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해고는 살인이다!”(쌍용차)

“심야노동으로 골병들어 죽어가고 있다. 밤에는 잠좀 자자!”(유성기업)

“살인적인 등록금 인하해라!”(대학생)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많은 현장활동가들이 먼저 공장과 사무실의 담벼락을 뛰어넘어 먼저 ‘지역’으로 모였다. 그리고 ‘지역총파업’을 결의했다.

이제 현장활동가들은 이 결의를 가지고 다시 공장과 사무실로 들어갈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들이 다시 공장과 사무실 밖으로 나올 때는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그들 한사람 한사람이 깃발이 되어, 공장과 사무실의 모든 노동자들과 함께 ‘지역’으로 넘쳐날 것이다.

총파업투쟁 속에서 ‘현장’은 ‘지역’이 되고, ‘지역’은 ‘현장’이 될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경기지역총파업 투쟁 성사와 승리를 기원하며!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사노위 3차총회 결과 - '해산'안 부결되고, 3개월간 더 노력하기로 ---

사노위 제3차 총회 결과

 

‘공동실천위원회’로서 ‘추진위’ 건설을 약속한 1년만이었다.

5월 28일에 개최된 사노위 제3차 총회는 ‘추진위’ 건설로 나아갈 것인가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자리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두 가지 입장이 격돌했다.

“강령상의 통일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또 그럴 가능성도 없기 때문에 추진위로 나아갈 수 없고, 사노위를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

“강령상의 통일을 위해 한번 더 노력하고, 사노위로 결집한 조직역량을 더 발전시켜 추진위를 건설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

‘사노위 해산 건’을 먼저 논의했고, 표결 결과 부결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해산을 주장했던 15명 동지들이 퇴장한 가운데, ‘강령과 규약, 조직의 진로 건’에 대해 논의했다.

4차 총회 때까지(3개월간) 강령상의 통일을 위한 논의를 더 진전시키기로 했다.

그를 위해 5인의 강령기초위원을 선출했다.

추진위 건설을 조직적으로 책임져 나갈 대표와 중집위원 7인을 선출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후 4시에 시작된 총회는 격론에 격론을 거치면서 새벽 3시경에 끝났다.

‘사노위’를 통해 ‘추진위’로 갈 수 있는가가 이제 마지막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새벽 생거 진천에 있는 초평저수지는 태평스럽게도 잔잔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5.18.은 ‘광주’만의 5.18.이 아니다

5.18.은 ‘광주’만의 5.18.이 아니다

 

이틀 전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문화카페 라우리안에서 5.18.를 추모하는 작은 번개모임이 있었다.

서른 분 정도 모여, 5.18.역사유적지 탐방을 주제로 한 동영상을 보고, 아코디언과 기타 반주에 맞춰 지금은 거의 불려지지 않는 70~80년대의 민중가요도 함께 불렀다.

 

1980년 5월 18일에 광주에 있었던 사람도 있었고,

5월 광주에서 친구를 잃은 사람도 있었으며,

5월 광주 때 사귀던 남자 친구가 계엄군이었던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1980년 2월에 태어난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 때를 기억하며 김남주의 시(詩)를 읽었고, 누군가는 정태춘의 5.18.를 노래했으며, 누군가는 꼭 광주 망원동을 찾아가 빚진 마음을 갚겠다고 다짐했다.

모두는 5.18. 광주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자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틀이 지났다.

5.18.을 기념했던 모든 이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되풀이 되지말아야 할 5.18.은 다시 30여 년전의 과거로 돌아갔다.

 

아니? 아니다!

아직 진행 중이다.

5.18.은 5.18.만이 아니다.

5.18.에서 계엄군을 투입했던 5.27.까지가 5.18.이다.

아니다, 80년 3~4월의 민주화의 봄부터 5.18.이다.

그래, 5.18.은 광주만의 5.18.이 아니다.

5월 광주는 80년 전국적인 민주화의 봄이 철저히 광주로만 고립된 결과이다.

 

우리가 5월 광주에 빚진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다.

우리가 잊지말아야 할 지점은 바로 이 점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고립 속에서 해방광주를 지키고 만들어낸 그들처럼, 광주에 갇힌 5.18.을 해방시켜 내는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