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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 135회

 

1

 

 

하루 종일 나무에 달라붙어서 끙끙거리다보면

머릿속에서는 오만가지 생각들이 춤을 춥니다.

명상을 하려고 가만히 있으면 해야 될 일에 대한 생각들이 난리를 치는데

막상 일을 하고 있으면 전혀 엉뚱한 놈들이 나타나서 휘젓고 다닙니다.

일이 바빠서 머릿속 생각들까지 챙길 여력이 없기에

그놈들이 마음껏 뛰놀도록 놔두는데

가끔 뛰노는 놈을 들여다보면 망나니들이 난장판을 치고 있습니다.

 

 

오래된 기억 속에 숨겨두고 싶은 것을 일부러 꺼내서 큰 소리로 읽어대고

굳이 할 필요 없는 걱정을 당당하게 짊어지고는 여기저기 부스러기를 흘리고

불편했던 기억을 괜히 불러내서 샌드백을 치듯이 주먹질을 해대고

심지어는 tv 프로그램 속으로까지 들어가서 논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난장판인 머릿속을 발견하면 망나니를 쫓아내기 위해 주문을 외웁니다.

“나쁜 생각 사라져라”

그러면 망나니는 급히 몸을 숨기지만 내가 방심했다 싶으면 다시 나타나 또 분탕질을 합니다.

그럴 때면 “좋은 생각 나타나라”라고 다른 주문을 외워보지만

일에 나빠서 생각에 집중할 수 없기에 망나니가 어질러놓은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합니다.

가득이나 몸마저 피곤해서 머릿속은 더 어지러워져버리죠.

 

 

부정적인 에너지가 넘쳐나면

싸우려들지 말고 그냥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면

부정의 에너지가 알아서 가라앉는다고 했지만

싸울수도 비울수도 없는 상황에서는

약발 없는 주문만 공허하게 외워댈 뿐입니다.

 

 

그럴 때면 잠시 일손을 멈추고 옆에 누워있는 사랑이에게 다가갑니다.

내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나를 쳐다보는 사랑이를 가만히 쓰다듬습니다.

그냥 그렇게 10초 정도 사랑이를 쓰다듬고 나서 다시 일을 하지요.

 

 

 

2

 

 

저는 일반시민들을 찾아가서 얘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을 좋아합니다.

한끼줍쇼, 유 퀴즈 온 더 블록, 김영철의 동네한바퀴,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프로그램들이죠.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이런 프로그램이 원활하게 제작되고 있지 못하지만 시간이 나면 다시보기를 하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즐깁니다.

가끔 내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강호동이 우리 동네를 찾아온다거나 길거리에서 유재석을 만난다거나 그러면...

 

 

말주변이 좋은 편이 아닌 저는 유머러스한 대화로 진행자를 쥐락펴락 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톡톡 튀는 맛도 없을 거고

드라마틱한 사연을 얘기하면서 눈물을 흘리게 만들기도 그렇고...

하지만 편안하게 농촌에서 살아가는 삶을 보여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가능하면 사랑이도 방송에 나올 수 있도록 제작진에게 배려를 부탁할 겁니다.

강호동이 온다면 텃밭에서 뽑아온 채소로 밥상을 차릴 거고

유재석을 만나서 퀴즈를 푼다면 상금으로 스텝들에게 회식을 쏘울 겁니다.

 

 

이런 내용이 방송에 나가면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의 연락들이 오겠죠.

가족들은 재미있었다면서 축하한다는 말을 전해올 거고

동네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괜시리 더 친근하게 말을 걸어올 거고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던 이들에게서도 연락이 오기도 하겠죠.

혹여나 ‘유명해졌으니 돈 좀 빌려줄 수 있느냐’는 당혹스러운 연락을 받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다나 한통의 편지가 도착합니다.

꽃무늬 봉투에 멋진 펜글씨로 쓰여진 주소에는 보내는 이의 이름이 없습니다.

봉투를 열었더니 역시 꽃무늬 종이 위에 아주 깔끔한 글씨로 짧은 문장이 쓰여 있었습니다.

“TV에서 우연히 당신의 얼굴을 보게 됐습니다. 행복해보이더군요. 저는 아직도 그날의 일이 떠오르는데...”

그리고 마지막에 보낸 이의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

편지를 보낸 이는 제게 성폭력을 당했던 분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제 상상은 끝이 났습니다.

전정작업을 하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가만히 놔뒀더니 여기로 흘러가더군요.

 

 

 

3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밥을 먹고 사랑이와 산책을 나서면

오름 위로 해가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약간 서늘한 새벽 기운 속에 맞이하는 햇살은

내 몸속에 다시 하루를 시작할 에너지를 전해줍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루 일을 다 마치고난 저녁

저녁을 먹고 나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사랑이와 밖에 나섭니다.

이번에는 바다로 떨어지는 해를 마주합니다.

선선한 기운을 느끼며 몸과 마음의 피로를 달래보는 순간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텃밭에 심어놓은 오이가 주렁주렁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고추와 토마토도 하나씩 달리기 시작했고

수박과 참외는 줄기를 열심히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모습이지요.

 

 

오름 위로 떠오르는 해와

바다 위로 떨어지는 해를 볼 수 있고

풍성한 과일과 채소를 만끽할 수 있는 삶

이보다 행복할 수 없는데

이 행복이 죄스러워서...

 

 

 

4

 

 

안녕하십니까, 저는 사랑이입니다.

음... 오늘도 성민이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어... 성민이는 저를 정말로 사랑합니다.

어... 성민이는 피곤할 때도 산책을 시켜줍니다.

그리고 또... 밥을 먹을 때는 ‘사랑이도 밥 먹어’라고 얘기해줍니다.

일을 할 때도 저를 자주 데리고 다닙니다.

음... 일을 하다가도 자주 쓰다듬어 줍니다.

그리고 어... 제가 원하는 게 있으면 어... 눈치로 알아차리고는 그걸 해줍니다.

예쁜 조카가 왔을 때도 어... 조카를 ‘사랑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저는 처음에 집밖에서 살았는데 어... 여름에 더우니까 에어컨 있는 데로 들어오라고 해서 음... 그 다음부터 집안에서 살게 됐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성민이가 제일 좋습니다.

어... 성민이랑 같이 사는 것이 정말 좋습니다.

음... 성민이가 옛날에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성민이를 항상 믿고 따를 겁니다.

 

 

 

 

 

(이상은의 ‘삶은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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