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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 58회 – 감귤 수확을 앞두고

 

 

 

1

 

읽는 라디오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 쉰여덟 번째 방송 시작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성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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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귤 수확을 앞두고 있습니다.

달려있는 양도 많고 상태도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어서

시세만 좋다면 올해는 모처럼 풍족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풍성하게 달린 감귤을 바라보면서 기분이 흡족해야할 텐데

몇 년 동안 시행착오를 계속 해왔기 때문에

수확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이런저런 잔걱정이 자꾸 들어섭니다.

그 와중에 아는 분이 오셔서 감귤을 보고는

“이파리에 비해서 열매가 너무 많이 달리면 새순과 꽃이 덜 나와서 내년 수확이 줄어든다”고 하시는 바람에 걱정이 또 늘어버렸습니다.

 

‘내년에 수확이 확 줄어들면 어떻하지...’

‘모처럼 많이 열렸는데 시세가 나쁘면 안 되는데...’

‘막상 수확했을 때 비상품이 많이 나오는 건 아닐까...’

‘앞으로 해야 될 일들이 많아질 텐데 잘 해낼 수 있을까...’

‘상태가 안 좋은 나무가 있는데 다른 걸로 옮겨 심어야할까...’

‘시행착오를 줄이려면 토양관리와 수분관리에 변화를 줘야할까...’

‘하우스 시설 보수도 해야 하는데 언제 어떤 순서로 해야 할까...’

 

수확을 앞두고 이런저런 준비를 하는 가운데

마음속에서 자꾸 끈적끈적한 것들이 올라오기에

일손을 멈추고 의자에 앉았습니다.

떨어진 감귤을 하나 까먹으며 마음속의 성민이를 불러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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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이 : 야.

 

마음속의 성민이 : 왜?

 

성민이 : 왜 자꾸 마음 심란해지게 궁시렁거리냐?

 

마음속의 성민이 : 유비무환이잖아. 미리미리 준비하고 있어야지.

 

성민이 : 니가 하는 얘기의 반은 미리 준비한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고, 또 나머지 반은 그때 닥쳐서 해도 되는 일이거든. 그다지 걱정할 필요 없는 것까지 미리 걱정해버리면...

 

마음속의 성민이 : 아, 알았어. 그렇게 잘난 니가 알아서 해.

 

성민이 : 야, 화내지 말고. 너한테 짜증내는 게 아니라 내가 너의 생각을 따라가기가 벅차서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천천히 가면 안 될까? 나 아직도 초보잖아.

 

마음속의 성민이 : 나는 그냥 니가 걱정돼서 그런 건데...

 

성민이 : 알아, 그래서 고맙기도 하고.

 

마음속의 성민이 : 내가 말이 좀 많았으면 미안해.

 

성민이 : 아니야, 너랑 얘기하다보면 나도 외롭지 않고 의지가 돼서 좋아.

 

마음속의 성민이 : 야, 노랗게 익은 귤들이 주렁주렁 달린 모습을 보니까 좋다.

 

성민이 : 그렇지? 저 모습을 보면서는 기분이 좋아야 하는 건데...

 

마음속의 성민이 : 나 때문에 기분 잡쳤다는 거지?

 

성민이 : 아니야, 너랑 대화하다보니까 지금은 행복을 느껴도 되는 순간이라는 걸 알게 됐어. 지난 한 해 동안 고생한 결과잖아. 좀 더 길게 보면 지난 몇 년 동안 시행착오하면서 얻어낸 결과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 결과에 만족하면서 지금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마음속의 성민이 : 그래, 편안하게 행복을 즐겨라. 나는 들어갈게.

 

성민이 : 아니야, 조금 더 얘기해도 되는데...

 

마음속의 성민이 : 행복을 즐길 때는 오롯이 그 감정에 빠져봐. 그래야 그 맛이 제대로 느껴질 거야.

 

성민이 : 그래, 고맙다.

 

마음속의 성민이 : 성민아.

 

성민이 : 응?

 

마음속의 성민이 : 지난 한 해 동안 고생 많았다.

 

성민이 : 어, 고마워.

 

 

2

 

과거 부산형제복지원 생활을 했던 한종선씨가 쓴 ‘살아남은 아이’라는 책을 읽고 며칠 동안 꽉 막힌 듯한 마음으로 지내야 했습니다.

 

어머니 없이 구두닦이 아버지와 누나들과 함께 살아가던 한종선은 1984년 어느 날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고 누나와 함께 형제복지원에 강제로 실려갑니다.

그때 한종선의 나이는 9살이었고, 누나의 나이는 12살이었습니다.

집에 가겠다고 울며 보채는 두 아이에게는 무자비한 폭력이 퍼부어졌습니다.

 

9살 아이가 삼청교육대보다 더 군기가 쎈 그곳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의 지옥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 가슴이 너무 먹먹해서 그 지옥의 얘기는 옮기지 않겠습니다.

 

그곳에서 딱 한 번 누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누나가 정신병동으로 옮겨졌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누나를 볼 수 있을까 해서 몰래 정신병동을 훔쳐봤는데, 여자들이 발가벗겨진 채 침대에 묵여 있고, 가끔 어떤 남자가 와서 여자 위에 올라타서는 이상한 짓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한종선은 그저 아빠가 빨리 와서 자신들을 구해주기만을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복지원에 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빠는 자기들을 구해주러 온 것이 아니라 술 취해서 거리에서 자다가 그곳으로 붙잡혀 온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아빠를 단 한 번 만날 수 있었고, 누나의 얘기를 전해들은 아빠도 얼마 후에 정신병동으로 옮겨졌다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1987년 형제복지원의 끔찍한 실태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한종선은 그곳을 나올 수 있었지만, 닫혀 있는 지옥에서 열려 있는 지옥으로 나왔을 뿐입니다.

고아원과 교도소를 돌아다녀야 했던 그에게 세상은 사기와 냉대와 노동재해로 끝나지 않는 지옥의 경험을 계속 안겨줬을 뿐입니다.

나중에 어렵게 아버지와 누나를 만나게 되지만 그들은 정신병원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형제복지원의 원장이었던 박인근은 횡령혐의만 적용돼서 2년 6개월을 복역하고 나와서 아직도 사회복지사업가로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데...

 

어렸을 때의 끔찍한 기억을 다시 살려내면서 아주 힘들게 쓴 그의 글을 읽으려니 너무 힘들었습니다.

나의 지옥이 그의 지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며 위안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직도 지옥에서 살아가는 그를 위해 위로를 전할 수도 없고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태에서 그냥 꽉 막힌 가슴을 부여잡고만 있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그 책을 보시면 저처럼 힘들겠지만, 한 번 꼭 읽어보시길 바립니다.

 

 

2013년 2월 11일에 방송됐던 읽는 라디오 ‘내가 우스워 보이냐?’ 중 한 대목입니다.

한종선씨가 이 책을 쓴 이후 형제복지원문제가 다시 세상에서 얘기되기 시작했고

피해자들이 모여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등을 요구하며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애써 외면하던 국회는 뭉개작거리던 관련 법안을 뒤늦게 통과시켰고

공을 넘겨받은 정부는 형식적인 사과만 남기고 또다시 뭉개작거리고만 있습니다.

정말 어렵게 자신들의 고통을 세상에 알렸지만 손쉽게 그들의 삶을 뭉개버렸던 세상은 지금도 그들의 목소리를 뭉개버리고 있습니다.

 

거리에 장애인과 부랑자들이 널려있는 것이 보기 싫어서 청소하듯이 형제복지원에 몰아넣었던 과거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하는 사이

집안에만 갇혀 지내던 장애인들이 사회로 나서고 싶다고 이동권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대해 날선 공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약자들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해버리는 여당과 날선 공격으로 맞대응하는 야당을 보며

눈과 귀를 낮은 곳으로 더 쫑긋거려봅니다.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그들의 얘기만이라도 귀 기울여 들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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