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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읽는 라디오, 오늘도 스위치를 켰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들풀입니다.
가까운 친척분이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평소에 살갑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지만 편하게 지내는 사이여서
가끔 왕래도 하고 서로 챙겨줄 것이 있으면 챙겨주기도 합니다.
근처에 편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좋아서
제게 여유가 있으면 이것저것 챙겨주곤 했습니다.
어머니가 보내온 반찬이 있으면 조금 덜어서 나누기도 하고
선물로 들어온 것이 딱히 쓸 일이 없으면 쓰라고 드리기도 하고
마트에서 장을 볼 때 맛난 것이 있으면 조금 더 사서 나누기도 합니다.
일상 속에서 소소한 것을 나누는 정이 오고가서 좋았습니다.
그렇게 정을 나누면서 편하게 지내다보면 사소한 부탁도 가끔 하게 됩니다.
제가 차가 없기 때문에 가끔 차편이 필요할 때 부탁하기도 하고
집에 일손이 살짝 필요할 때 잠시 부탁하기도 하면서
스스럼없이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제가 부탁을 하면 살짝 거절을 하더군요.
그 거절에 제 마음이 멈칫했습니다.
‘너무 편하게 생각해서 잦은 부탁이 귀찮게 느껴졌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어머니가 보내준 간장게장을 조금 덜어서 드렸더니 금세 답례로 과일이 전해졌습니다.
기브 앤 테이크 같은 느낌이 들어서 좀 찜찜하더군요.
그 이후 정을 주고받은 것에 조심스러워졌습니다.
그렇다고 관계를 싹둑 정리하기는 그래서 가끔 이것저것 나눌 것이 있으면 나누기는 하지만
그 나눔 속에 정이 담겨있지는 않게 되더라고요.
그마저도 제가 나누지 않으면 서로 오고가는 것도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조금씩 마음의 거리가 멀어져가고 있는데
얼마 전에 그분이 작은 부탁을 하나 해오셨습니다.
그리 어렵지 않게 들어드릴 수 있는 부탁이었고
평소의 관계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부탁이기도 했지만
그 마음의 거리 때문에 제 마음이 살짝 뾰로통해져 버렸습니다.
괜히 심술이 난 제 마음을 달래려고 노력을 해봤지만
마음이라는 것이 요상해서 그 거리감이 쉽게 좁혀지질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부탁을 거절하면서 관계를 단절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과 타협을 했습니다.
거리감이 생겨버린 것을 인정하고 그 정도 거리에서 서로 주고받으며 살아가자고요.
억지로 더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대신 일부러 멀어지지도 않기로 타협한 것입니다.
관계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이 어렵더군요.
2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팍팍해지는 것이 싫어서
가능하면 마음을 열고 살아가려고 노력해봅니다.
사람들과 정을 나누며 살아가보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해보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내 마음을 열어놓으면 필요한 것만 살짝 골라서 사라져 버리고
누군가 마음을 열고 미소를 지으면 그 의도가 두려워서 회피해 버리고
힘들어하는 이가 있어 다가서면 귀찮아서 등을 보여 버리고
정작 도움이 필요한 이가 있을 때는 내 마음이 닫혀 버리고...
해변에 조그만 모래성을 정성스레 쌓았다가
밀려드는 파도에 금세 무너지길 반복하는 것처럼
나의 노력이 부질없이 느껴질 때
백팔배를 하면서 제 자신을 격려합니다.
쉽지는 않지만 그렇게 조금 더 노력해보려 합니다.
3
유튜브로 음악을 듣다가 뜬금없이 캐럴을 듣게 됐습니다.
정작 크리스마스에는 잘 듣게 되지 않는 캐럴이었는데
꽃들이 만발하고 초여름 날씨처럼 기온이 높아진 4월에 듣는 캐럴은
들썩이는 마음을 조금 차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일 년 중에 마음이 가장 포근해지는 때가 크리스마스 즈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크리스마스라고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지만
한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에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는 계기는 되니까요.
꽃들이 만발한 완연한 봄을 맞아 몸과 마음이 들썩이게 되고
지나긴 코로나 방역으로 지칠 대로 지친 이 사회가 기지개를 켜고
정권교체로 인한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며 변화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요즘
조금은 차분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것도 괜찮을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은 흰 눈이 소복이 쌓인 화이트크리스마스입니다.
마음속에 환한 사랑의 기운을 가득 채워 넣으면서
잠시 눈을 감고 기도를 해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세상사는 모든 이들에게 고루고루 미치길 간절히 바래봅니다.
저 또한 지금 이곳에서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조수아의 ‘고요한 밤 거룩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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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면서 인간으로서 사람들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도 아마 그런 마음이셨을 거 같습니다. 본인이 죽을걸 알면서도 결국 왕이 따로 있는데도 사람들이 왕으로 받드니 국가 전복을 꾀했다는 정치범으로 십자가서 죽어가면서 끝도 없는 배신감과 외로움을 느끼셨을 거고.. 결국 그렇게 죽은후 다시 부활해서 하늘로 올라가셨을 거예요. 그리스도교는 이걸 희망으로 삼는 계시종교라서 성탄보다는 부활절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제일 큰 축제 중의 축제날로 삼고 있고요. 죽어서는 어떻게 된다라는 언급은 종교만이 할 수 있는 고유 영역이자 그 종교의 정체성일 이니까요.당시에는 있는지 없는지 존재감도 없던 핍박받던 노예들이 구세주가 오기를 기다리며 믿던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노예교,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저도 이런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아요. ㅠㅠ
화낼만한 일은 화내는게 당연합니다. 그런 것까지 왜곡하고 억압해서는 안되죠. 사랑은 달콤함하기도 하지만 분노와 좌절, 고통과 감내 우리가 살아가며 격는 그 모든걸 포함하는 종합선물 세트라고 봅니다.
그러나 화를 낼지언정 현실과는 반대로 내안의 자아는 무조건 용서와 평화와 사랑을 추구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ㅠㅠ 내면에서 그런 선택을 안하면 내가 괴롭고 힘들어지니까요. 마치 우리가 자본과 싸우다 닮아가지 않기위해 내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기울이는 시간을 가져야 하듯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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