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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 57회 – 고통에서 전해지는 온기

 

 

 

1

 

 

 

읽는 라디오 쉰일곱 번째 문을 열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들풀입니다.

 

오늘은 아름다운 바이올린 연주로 시작해봤습니다.

이 영상은 우크라이나 하르키우라는 도시의 어느 아파트 지하실에서 촬영됐다고 합니다.

계속되는 러시아의 폭격으로 인해 시민들이 이곳에서 장시간 동안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요

바이올리니스트인 베라씨가 지하실에 피신한 열한명의 이웃들을 위해 연주를 했다고 합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감싸오는 두려움을

서로의 온기로 이겨내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지하실에서 전해진 온기가

전쟁 같은 오늘을 보내고 있는 모든 분에게 온전히 전해지길 바래봅니다.

 

 

2

 

고통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자신의 고통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나는 받아들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타인의 고통을 대할 때 “내가 겪어 봐서 잘 알아.”라는 말을 최대한 자제한다. 그것은 교만이다. 남 대신 아파해 줄 수도 없고,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 겸손하게 아픔을 함께 하려고, 그 아픔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누구도 타인의 고통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함부로 ‘너의 고통을 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신영준씨와 고영성씨가 쓴 ‘뼈있는 아무말 대잔치’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공감을 많이 했었습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겸손해져야 한다는 말이 너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1년 전 살인으로 어린 딸을 잃은 어느 유족이 평소 크게 의지하며 지내던 이웃에게 모욕을 당했다며 상담회기 내내 화를 내다가 울기를 반복한 적이 있다. 그를 이토록 비통하게 만든 것은 바로 “죽은 아이는 이제 그만 잊고 빨리 둘째를 낳아서 허전한 마음을 채워요”라는 이웃의 말이었다. 추정컨대 유족의 상실감과 비통함을 1년 넘게 곁에서 지켜봤던 이웃으로서는 그것이 상실감을 보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었기에 그 같은 조언을 했으리라.

그러나 아직도 사망한 아이의 사진조차 볼 수 없고,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발작적으로 울음이 터져 나오고, 아이와 비슷한 또래를 보는 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든 비통함을 느끼는 그에게 ‘잊으라’는 말은 너무 가혹하며 ‘다른 아기를 낳으라’는 말은 미친 소리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족의 심리 상태를 모를 리 없는 이웃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경험해 보지 않아서 피해자가 느끼는 고통의 깊이를 헤아리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즉 공감이 쉽지 않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김태경씨가 쓴 ‘용서하지 않을 권리’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글을 읽고는 고민이 많이 됐습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진심어린 위로가 상처가 될 수 있다는 말에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고통을 헤아릴 수 없음에

그저 그의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마음을 전해야하는데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고통이 나에게 전해진다면

그것을 말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그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을 때

나에게도 삶의 파도가 밀려들어 힘겨움에 웅크리게 될 텐데

말 못할 나의 고통은 어디에 의지해야할까?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을 해봤습니다.

‘나는 그동안 어떻게 해왔을까?’

‘나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고 싶을까?’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다그치지 않고 그냥 제 고민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까

제 마음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해왔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오롯이 받아들으려고 하지 마. 그냥 옆에 있어주는 것일 뿐이야. 마음의 거리를 유지하고... 그리고 그냥 기다려. 그러면 언제가 일어날 거야.”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 곁에 있어주면 그곳에서 아주 작은 불씨가 생겨날 거야. 그 불씨는 너무 작고 연약해서 살리려고 입김을 불었다가 꺼져버릴 수도 있어. 그 불씨가 바람에 꺼지지 않도록 두 손으로 바람만 막아줘. 그러면 불씨가 살아나 너와 그에게 온기를 전해줄 거야.”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도망가거나 외면하고 싶다면 그냥 그 마음을 들여다 봐. 그런 마음을 갖는 것에 죄책감이 든다면 그냥 그 마음도 들여다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마음만 불편하다면 역시 그 마음을 들여다보기만 해. 자기 마음을 합리화하거나 위장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그 마음을 인정하고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알아서 움직일 거야.”

 

“너에게 고통이 찾아왔을 때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3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황재형 작가의 ‘탄천의 노을’이라는 작품입니다.

황재형 작가는 과거 1980~90년대 탄광촌의 모습을 주로 그려서 ‘광부화가’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이 작품도 그 당시 그려진 탄광촌 작품 중의 하나입니다.

 

온통 시커먼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는 냇물에 노을이 지니 묘한 기운이 전해집니다.

아름답다고 해야 할지, 더럽다고 해야 할지, 숭고하다고 해야 할지, 비참하다고 해야 할지

묘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잘 모르겠지만

그 시대를 살아갔던 이들의 삶이 노을 속에 비춰지는 것 같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윤정님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사진입니다.

냇물인지 물웅덩이지 모르겠지만

아주 작은 물이 주변을 고스란히 품고 있네요.

너무 맑고 고요해서 제 마음도 비춰질 것 같은데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지 조금 겁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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