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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라디오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 예순 다섯 번째 불을 켭니다.
안녕하세요, 들풀입니다.
힘겨운 책 한 권을 읽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끔찍한 고통을 당한 여성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전투에서 다치거나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후방에서 일상의 삶을 살아가다가 갑자기 나타난 군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을 기록한 책이어서
여성의 시각으로 반전의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겠거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예상은 초반부터 완전히 무너져버렸습니다.
이라크에서 ISIS에게 붙잡혀 집단사살, 집단강간, 성노예를 경험했던 어린 소녀의 증언이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생생하게 들려지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그 참상에 속이 매슥거릴 정도였습니다.
50페이지 정도 읽다가 더 이상 읽기 힘들어서 책을 덮었습니다.
이라크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던 그와 같은 끔찍한 증언들을 들어야한다는 것에 자신이 없어서 더 이상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책을 덮고 심호흡을 하고 있는데 예전에 봤던 ‘기쁨의 도시’라는 다큐멘터리가 생각났습니다.
그 다큐멘터리 역시 콩고 내전과정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성폭력에 대해 증언하고 그를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줬었습니다.
그곳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지옥 중의 지옥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책은 이런 지옥이 세계 곳곳에 널려있다고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쁨의 도시’에서 지옥을 경험한 여성들에게 하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눈물 흘리면서 숨지 말고 당당하게 외치면서 춤추고 노래하라”
“주위에서 지겨우니까 그만하라고 해도 여성이 자유로워지지 않는 한 얘기를 멈추지 말라”
그 얘기가 떠오르니 이 책을 끝까지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눈물 흘리면서 숨지 않고 당당하게 그 끔찍한 기억을 다시 되새김하는데
그 얘기를 듣는 것이 힘들다고
매번 같은 얘기라서 지겹다고
귀를 닫아버리면
여성들은 절대로 자유로워질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심호흡을 하고 책을 펼쳐들었습니다.
두꺼운 책에서 쏟아져 나오는 지옥의 경험들을 듣고 또 들었습니다.
하나의 얘기를 듣고 또 하나의 얘기를 듣다보면 그 끔찍함이 조금은 견딜만해질 줄 알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계속 끔찍하고 소름끼쳤고 매스꺼웠습니다.
그렇게 고통을 느끼면서 500페이지나 되는 책을 일주일 동안 읽었습니다.
그들의 얘기를 다 듣고 난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들의 얘기를 듣던 일주일 동안
제 마음을 심란하게 했던 일상의 고민들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제가 너무도 어이없으면서도 이기적이지만
그들의 얘기를 들으며 지냈던 일주일의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이 책을 뒤로하고 저는 제 삶을 계속 살아갈 것이고
잠시 사라졌던 일상의 고민들이 다시 고개를 내밀겠지만
제가 들었던 그 고통스러운 목소리들은
제 마음 언저리에 자리 잡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제게 수시로 얘기하겠죠.
“눈물 흘리면서 숨지 마라.”
“여성이 자유로워질 때까지 지겹도록 얘기해라.”
2
어느 날 라디오를 듣고 있는데
어느 유명한 정신과의사의 글을 소개하더군요.
자신에 대해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이를 상담하면서 얘기를 하다가
크림빵을 먹을 때 크림을 먼저 먹는지 빵을 먼저 먹는지에 대한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얘기가 있었는데 결론은
달콤한 크림을 먼저 먹기보다는 빵을 먼저 먹고 나서 달콤한 크림을 나중에 즐기는 것이 더 긍정적인 삶의 자세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같이 생겼을 때
나쁜 일을 먼저 처리하고 나서 좋은 일을 맞이했을 때
그 성취감과 행복함이 더 높아진다는 것이라나요.
그러면서 해석하길 ‘고통 뒤에 맛보는 행복’이라고 하더군요.
그 얘기를 들으면서 쓴 웃음이 나왔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름대로의 삶의 철학들이 다양하기는 하겠지만
저처럼 밑바닥에서 발버둥치는 사람에게는 전혀 와 닿지 않는 얘기였거든요.
나쁜 일 뒤에 좋은 일이 보상처럼 오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나쁜 일 뒤에 또 다시 나쁜 일이 연달아 오는 사람에게는
어쩌다 찾아온 좋은 일에 더 불안하기만 할 뿐입니다.
이 즐거움 뒤에 괴로움들이 다시 연달아 있을 것임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즐거움을 즐기기보다는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하다가 야금야금 즐거움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즐거움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즐거운 일이 괴로움이 돼버리는 꼴이지요.
지긋지긋한 라면으로 끼니를 챙기던 사람에게 누군가가 맛있는 닭도리탕을 배달해주었을 때
그것을 아껴서 조금씩 먹다가 더운 날씨 때문에 상해버린 닭도라탕을 버려야 하는 그 안타까움을 느껴본 사람들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왔던 사람들이라면 유명한 정신과의사의 얘기를 들으면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얘기할 겁니다.
망설지지 말고 달콤한 크림을 먼저 먹어라.
그 순간만이라도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빵을 씹으면서 삶을 견뎌라.
‘읽는 라디오 내가 우스워 보이냐?’ 2013년 5월 20일 방송 중 한 대목이었습니다.
성민씨가 이 대목을 보내오면서 짧은 메모를 남겼습니다.
“살다보니까 그때의 그 처절함을 점점 잊게 됩니다. 그걸 잊지 않으려고 되새겨봅니다.”
음...
오늘은 잠시 멈춰서 뒤를 돌아봅니다.
그들이 저를 바라보네요.
잠시 당황스럽지만
그 눈길을 애써 피하지 않으렵니다.
(아날로그 소년, 쿤타의 ‘절망도 사치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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