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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5/19
    '쪽팔린 게 싫다' 문화(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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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6/05/03
    차라리 하루 쯤 '해방'을 즐기자(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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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6/04/29
    노동계 뽀스떠(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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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6/04/26
    퇴직금 지급 협상 타결 인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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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6/04/24
    이거 참, 너무 긴장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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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6/04/21
    자칭 '비정규직 담당' 최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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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4/21
    '공교육' vs '사교육'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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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6/04/17
    자존심 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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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6/04/13
    잠도 안오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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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03/30
    퇴직금을 받자!(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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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팔린 게 싫다' 문화

 

행인님의 [어잌후... 뒌장...]에 관련된 글.

 

 

거창 농민회장 출신의 김상택이란 자가 민주노동당 군의원 후보로 나서더니 돈을 뿌렸단다. 화들짝 놀라버린 경남도당은 당기위를 통해 후보자격 박탈과 제명 처분을, 중앙당은 거창군위원회의 다른 후보들의 출마 자격 박탈과 해당 위원회 사고처리를 재빨리 시행했다.

 

(기겁한 이들이 꽤 많은 듯하다.  나는 돈봉투 사건에 놀라지 않았다. 나는 변하고 있는 게 확실하다. 어이가 없다거나 화가 나거나 하지도 않는다. 이제는 서서히 민주노동당을 나와 내밀하고 깊은 끈을 공유한 그 무엇으로 여기지 않는가 보다. 즉, 내면의 일부를 차지한 또 하나의 자아가 아닌 것이다. 나는 내 상태가 좋아지는 걸로 이해한다.)

 

어쨌든 내가 이번 사건에서 깜짝 놀란 건 당이 어쩜 저렇게 잽싸게도 사건을 처리할까다. 이 놀라운 순발력! 선거시기이기는 한가보다. 그렇지만 당이 전력을 다해 예민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시기라는 걸 가만하더라도 하루 만에 당내에서 처리할 수 있는 모든 걸 처리했다는 건 분명 '다른' 요소가 작용한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기본적으로 '쪽팔린 게 싫다'가 정치 활동의 기준이다. 민주노동당이 출발할 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이 정치문화는 민주노동당이 소위 '현실정치'에 길들여지면서 확대되고 안착되었다. 그 과정에서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던 적지 않은 지부급 인사와 중간간부들이 쪽팔린 것만은 피하고자 했던 자세가 크게 기여했다.

 

김상택이 같은 인간들은 민주노동당에 아주 많다. 적지 않은 수의 후보자들과 그들의 운동원들, 당 간부들은, "어쩜 저런 짓을 할 수 있어?"라고 얘기하면서도 내심, 혹은 지들끼리는, "왜 재수없게 걸려서 똥물 튀기고 그래? 돈 뿌리는 것도 능력이래니까."라며 분개하고 있다. 한마디로 민주노동당 후보 중 누군가 돈뿌리니까 쯕팔린 것 뿐이다. 중앙당이건 경남도당이건 나뒀다간 더 쪽팔릴 것 같으니까 하루만에 일처리를 마친 것이다.

 

정치도의적 차원에서 수치심을 갖추는 건 미덕이다. 쪽팔린 게 뭔 줄은 알아야 한다. 그런데 작금의 민주노동당의 정치문화는 '쪽팔리지만 않으면 된다'이니까 문제다. 즉, 유권자, 국민 눈치보기다. 이로써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는 당 내부의 문제, 또 하나는 당의 공개적 주장과 활동의 문제이다.

 

 

유권자, 국민에게 쪽팔린 게 싫어서 쪽팔린 건만 피하고자 한다면 결국, 유권자나 국민이 관심을 갖지 않을 문제는 해결하고 싶어하질 않는다. 당 내부 문제일 터이다.

 

농민회는 철저히 이익집단이다. 자기들의 농산물 생산 방식을 유지하면서 소득을 확대하고 싶어하지, 어려움이 있더라도 한국의 농업과 농촌이 어떻게 재설계되어야 할까에는 적극적이지 않다. 이런 입장때문에 지난 주요 선거 때 민주노동당과 전농의 합작 과정은 너무나 지저분했다. 농민회 몇몇 핵심 간부들은 민주노동당 강령에는 농민과 관련한 게 없고 농촌 정책도 한 줄 없다고 전국의 농민회에 소문을 냈다. 그 새빨간 거짓 모략질에 대해 제대로 사과도 안했다. 게다가 환경농업 정책이 주요 공약화되는 걸 노골적으로 싫어했는데, 그렇다면 무얼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으면 하느냐는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농민회가 심히 이기적이라 실질적인 연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소위 '운동의 윤리'라는 측면에서는 비판해도 정치 논리로는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민주노동당은 비록 정치 논리 때문에 농민회에게 러브콜을 하더라도 이념적 일관성과 다양한 계급.계층 간 이해 조절을 위해 당의 시스템을 갖추었어야 했다는 점이다. 농민회 끌어들이면 쪽수 늘어날 정파의 이해와 한국 정치 제도 상 과대대표된 농촌에 조직을 심어야 한다는 당위만으로, 민주노동당은 비굴하게 농민회와 합작을 한 것이다.

 

농민회 예를 들어서 그렇지 다양한 사람들이 민주노동당에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은 이들에게 이념적 지표나 정책적 이해, 연대의 정신을 체계적으로 제공하지 않는다. 이 짓 하자면 힘도 들고 귀찮다. 그리고 이 짓 안한다고 쪽팔릴 일 없으니 그냥 안한다. 소위 유권자나 국민이라 불리는 집단은 민주노동당이 어떻게 구성되었고 어떻게 자기 관리를 하는 지에 관심 없다. '쪽팔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정치문화는 스스로를 감시하고 비판하고 다듬는 데에는 힘을 쏟지 않는다.

 

 

쪽팔리는 자기 모습을 보이기 싫은 대상이 유권자, 내지는 국민이라는 것도 문제다. 왜냐면 그들은 하나의 계급도 계층도 아니다. 너무나 다양할 뿐만 아니라 서로 갈등하는 이해 당사자들이다. 다수에게 쪽팔리기 싫으면 계급적 이해관계를 떠난 폼나는 주장이나 여론 주도층의 주장을 수용해야 한다. 불평등으로 고통을 주는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는 정책/주장을 펼치는 것도 폼나지 않으면 쪽팔리니 안하고 만다.

 

민주노동당의 많은 공직자들은 소위 지역사업의 상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울산 북구와 동구는 2002년 지방선거 대표 공약이었던 참여예산제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가 나름대로 개혁적이라는 타당 공직자가 먼저 시행하니 나중에야 그거 한다고 부산했다. 경기도 기초의원들 다수는 재산세율 인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면서도 서민을 위한 정책이라며 조례를 발의했거나 찬성했다.

 

탈계급의 상징인 유권자와 국민이라는 개념은 사실 보수 언론의 시각을 대변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유권자와 국민의 눈치를 보며 쪽팔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건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적인 보수파들의 눈치를 보는 것과 똑같다.

 

그러니 강령정신에 동의하지도 않는 이들이 지역위원회에서 대장노릇하고 공직후보자가 되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유권자와 국민은 한 정당의 구성원이 당 강령에 동의하는지 안하는지에는 관심도 없으니까.

 

 

김상택이와 같은 불한당이 민주노동당에서 활개칠 수 있는 건 당의 정치문화가 몰계급적인 주체에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재밌는 건 이러다가 쪽팔릴 일만 생긴다는 것이다. 쪽팔리기 싫어서, 쪽팔리지만 않으면 되니 미루어 두거나 외면했던 그 무엇때문에 쪽팔리게 된다는 것이다.

 

사고가 터지자 덜 쪽팔리려고 하루만에 제명 따위의 조치를 취하며 당원 교육 어쩌고 주저린 민주노동당의 지도부는 앞으로 지들이 뭘 해야 하는지 알고나 있을까 싶다. 선거 후 경남도당에 책임을 묻겠다고 했는데, 경남도당의 대장은 문성현 대표다. 문성현은 선거 후에 당대표로서 더 이상 바지 사장 노릇 하지 않기 위해 뭔가 보여주겠다고 벼르고 있는데 셈셈 바꾸지나 않을까.

 

 

차라리 하루 쯤 '해방'을 즐기자

 

새벽길님의 [맘에 안드는 노동절 집회]

해미님의 [짜증을 넘어, 허탈한 노동절]

달군님의 [엄마는 모르실꺼야?]

스머프님의 [메이데이 에필로그..]

강철새잎님의 [투쟁하지 않는 노동절]

행인님의 [[마라톤] 메이데이 마라톤 참가]


등등 노동절 후기와 관련된 글일 것으로 믿음.

 

 

병원에 간다는 이유로 노동절 집회 및 행사 다 빼먹은 주제에 이런 글까지 쓰면 뻔뻔한 축으로 몰릴 수 있겠으나, 이제 뻔뻔하게 살 때도 되었으니 그냥 쓸란다.

 

2006년 민주노총, 한국노총의 노동절 행사는 말 그대로 '왕짜증'이었나보다. 요즘 스트레스에 민감한 내가 어느 곳에도 가지 않은 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블로그에서만 익숙한 블로거들을 만나지 못한 것, 그리고 찌라시 못 뿌린 건 안타깝고도 미안하다.

 

대부분의 블로거들이 한심한 노동절 행사를 지적하고 있다. '아빠 힘내세요' '엄마는 모르실꺼야'에서는 확 깬다. 더더구나 그 망할 뽀스떠와 함께 의도된 컨셉이었다는 것에 뒤로 넘어간다. 그 한심함은 싸움을 멈출 수 없는 지역의 노동절 집회와도 비교된다. 메인 구호가 선거구호로만 채워지는 것도 어색하긴 하다. 보수정당 심판은 좋은 얘기지만 '투표소 가서 민주노동당 찍어라'하고 동일한 의미로 씌여지니 어색하고 민망한거다.

 

나는 이 모든 후기들의 의미를 이해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한국노총이 마라톤 대회를 연 건 좋은 본보기라 생각한다. 오만 잡것들 TV 나오게 판 벌려 준 게 한심하고, 명박이한테 감사나 하는 짓거리가 짜증날 뿐이다. 투쟁의 긴박함 없는 시청 잔디밭의 시민축제같은 분위기도 나쁘지 않다.

 

나는 노동절 집회 뿐만 아니라 이 바닥 집회가 사실 다 짜증난다. 그건 그 집회에서 얘기하는 혹은 외치는 말과 구호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주저리는 새끼들만 주저리는 게 싫다. 그 씨방새들이 지껄인다고 투쟁의지가 높아지나? 힘이 커지나? 행사 주관자가 A부터 Z까지 다 결정하고 동원령 때리는 집회가 싫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집회 잘 안간다. 눈치 보여서 가거나 누구 만나서 노닥거리러 갈 뿐이다. 이제는 눈치 안보니 놀고 싶어지면 집회 나갈거다.

 

일년 내내 싸움없는 데 없고 갈등없는 데 없다. 투쟁은 일년 내내 해야 하니 하루쯤 놀면서 쉬자는 의미로 노동절 행사나 집회를 치렀으면 좋겠다. 개떼같이 모여서 재밌으려면 행사 주관자들이 A부터 Z까지 결정하는 행사는 꽝이다. 주관자는 판만 깔고 나서 찾아온 사람들이 알아서 놀게끔 빠져주는 예의를 지켰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거시기 연사들 주저리는 말보다는 집회장 여기저기에 나름대로 분노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정을 이래저래 듣는 게 더 유익하다고 믿는다. 처절한 투쟁을 하고 있을 KTX 승무원이 행여 마이크 잡고 얘기한들 직접 대면하고 얘기해 보는 것보다 좋겠는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투쟁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한 방향으로 모두 앉혀놓고 무대 위에서 발언하는 게 효과적일 것 같아 그러는 모양인데, 난 천만의 말씀 만만의 팥떡이라 생각한다. 왠만한 선동가가 아니면 무대 위에서 발언해 봐야 감정이입도 안되고 주목도 잘 안된다. 하지만 얼굴 맞대고 대화하면 상대가 말을 썩 조리있게 하지 못해도 집중하게 되고 그 사람의 표정 하나하나에 실려오는 의미를 알아챈다. 이런 공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당일에는 한정될 수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파급력은 더 좋다고 믿고 있다.

 

이런 저런 프로그램을 행사장 여기저기에서 돌리는 거다. 노래하고 싶으면 노래하고, 그림 그리고 싶으면 그림 그리고, 연설하고 싶으면 연설하고, 호소할 게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호소하고, 책 팔고 싶으면 책 팔고, 전시하고 싶으면 전시하고. 물론, 돌아댕기고 싶으면 열나 돌아댕기고. 뭐, 좀 모두 모였으니 잼나는 거 해보자 싶으면 행진하며 웃고 떠들고. 개성 있는 플랭카드 따위 들고 와서 자랑도 해보고. 행진이 밋밋한 사람들을 위해 달리기도 하고. 까이꺼 노무현 싫으면 괜히 청와대 쪽으로도 기웃거려 보고. 안되면 말고. 좋잖아.

 

A부터 Z까지 주관자가 다 정하는 집회는 기본적으로 선택을 위해서 묻혀버리는 얘기가 많을 수밖에 없다. 마이크가 권력이기 때문에 지들 입맛에 맞는 얘기만 한다. 적절히 정치세력간 안배를 고려하기도 하겠지만 생까도 어쩔 수 없다. 이런 데서 힘을 얻으라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노동절 집회와 같은 행사에서는 일치단결된 모습으로 으쌰 하면서 새로운 투쟁방향을 '총화'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게 일반적 운동권 정서인 듯해서 하는 말이다. 난 이게 운동권들이 갖고 있는 환상의 극치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투쟁방향이나 계획 따위는 집회 안 해도 이미 다 나와 있다. 사이트에 다 있다. 메일로도 온다. 모르겠으면 전화하면 다 안다. 그걸 노동절 집회와 같이 넓다란 곳에서 빽빽히 모인 사람들에게 마이크 잡고 떠든 들 뭐 달라지나? 거기 모인 사람들이 다 알아듣고 끄덕끄덕 하나?

 

차라리 하루 쯤 '해방'을 즐기자. 평소에 못해본 거 해보고 못해본 말 해보고. 주관자가 할 말 다 정해놓고 모여든 사람들에게 훈시하듯 지껄이고 노래하고 춤 추는 건 아주 오래 전에 '해방감'을 주었었다. 결코 지금은 아니다. 왜 예전엔 군화발 앞에서 집회를 했었나? 그 순간은 '해방감'을 주었으니까. 그래서 조직선 없어도 대중 집회에 사람들이 모이고 구경했던거다.

 

갑갑한 현실, 그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현실에서 하루쯤 해방감을 즐기는 날로 노동절을 삼아보자. 그걸 함께 즐기자고 하자. 하나 둘씩 모여서 더 커지지 않겠나?

 

 

노동계 뽀스떠

 

붉은사랑님의 [입 아프다!]에 관련된 글

귀연이슬님의 [왕저질 포스터]에 관련된 글

노란리본님의 [민주노총 노동절포스터의 문제]에 관련된 글

 

 

@ 2005년도 3월 비정규직 포스터 - 민주노총,민주노동당 / 공식적으로는 배포중지

 

① 위 포스터는 성차별적이라 하여 당 안팎의 갈등 끝에 당의 비정규직운동본부에서 배포하지 않기로 결정한 바가 있는 포스터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② 위 포스터는 민주노동당 및 노조가 실제로 있었던, 여러 사람들로부터 증언을 들었던 사례를 바탕으로 제작한 포스터입니다. 현실이기도 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배포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성차별적이라는 주장에 반하는 논리를 만들어 봅시다.

 

③ 위 포스터가 성차별적이라서 문제라면, 성차별적이기 때문에만 문제인가요? 민주노동당은 정당으로서, 위의 포스터를 공식 배포하였다면 어떤 정치적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었을까요?

 

⑤ 위 포스터를 [1999년도 민주노총 노동절 포스터]와 비교하면 어떤가요?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성평등의식이 많이 진전되었다고 할 수 있나요?

 

@ 1999년도 노동절 포스터 - 민주노총

 

⑥ 민주노동당이 홍보물을 제작할 때 어떤 점을 고려하면 좋을까요? 바람직한 홍보물 제작 과정을 생각해 봅시다.


 

<민주노동당 강원도당 성평등 교육 자료 2005. 11. 2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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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노동절 뽀스떠도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이 구설수라는 게, "너무 나간 거 아냐?", "아직은 사람들이 이해 못할걸?" 따위로 포스트모던하다거나, 상당히 예술적이라거나, 더 나아가 아직은 한국사회의 주류 사고에서는 익숙치 않은 진정 진보한 이미지 때문이라면 환영할 만하다. 근데 현실은, 앞이 아니라 뒤쳐지는 이미지 때문에 말이 많다.

 

1.

 

지난해 3월이겠지, 슬렁슬렁 출근을 하자마자 노동담당 정책연구원 중 하나가, "이 포스터 땜에 김XX씨 화났어. 어떻게 좀 해봐"하는 게 아닌가. 사무실 벽에 붙은 비정규직 뽀스떠를 봤다. 순간 첫번째 떠오르는 생각은, '오! 이 바닥에서 감성에 호소하는 이런 뽀스떠를 만들 생각을 다하다니.' 두번째 든 생각은, '역쒸! 민주노동당은 씩.씩.한.싸.나.이.들.의.정.당.이야'였다.

 

김XX씨는 여성분야 정책연구원이다. 이 양반은 정말 성질을 버럭버럭 내고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쪽팔려 죽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럴만도 하지. 문제는 이 뽀스떠 배포를 중지시키는거였는데 김씨의 노동계 인맥과 호소 능력이 상당한지라 알아서 여기저기 선동을 잘했다. 물론, 당홍보실과 비정규운동본부에게도 배포 중지를 요청하고.

 

나는 노동계쪽 인맥이 없으니 뻠뿌질할 곳도 없었다. 그래도 당내에서는 작은 역할 하나했다. 소위 '윗선 타고 찍어누르기' 시도에 대한 방어라고나 할까. 여성분야는 내가 총괄하는 사회문화분야 중 하나였으므로 직제상 여성분야 정책연구원의 활동은 나의 업무 영역이기도 했다. 회사로 치면 내가 직속상관인 셈. 나에게 전화 여러 통 걸려왔다.

 

당시 여성위원장(지금도 그러네)은 처음에는 이 뽀스떠를 문제 삼지 않았다. 이게 왜 문제인지 몰라서 그랬는데, 여론이 나빠지니 그제서야 나섰다. 어쨌든 많은 여성위원장들(당, 노조의 크고 작은 단위)이 "그게 왜 문제야?"라는 반응을 보였단다. 더 큰 문제는 "대부분의 여자들도 문제가 없다는 걸 니들은 왜 문제 삼냐?"였다.

 

김XX를 잠재우라는 얘기지. 난 갈등이 시로. 그래서 걸려오는 전화통에 처음엔 좋게좋게 얘기했는데 점점 짜증이 나서 나도 할소리 다 해버렸다. 나름대로 방어 성공.

 

이런 뽀스떠 때문에 벌어지는 문제는 항상 앞이 캄캄하다. 그래도 그땐 '공식적'으로는 배포중지가 되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2.

 

2005년 비정규직 뽀스떠를 제작했던 제작진 중 한 명과 얘기를 나누었었다. 노동계 뽀스떠가 자주 성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기 때문에 상당히 신중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여러차례 수정도 했단다. 어떤 면에서 보면 제작 과정의 진전은 있어 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제작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은 당홍보실의 여성동지들이 인쇄 전에 이 뽀스떠는 문제가 될 것이라는 지적을 했었단다. 그런데 이 지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작 과정은 여전히 문제였던 것이다. 일종의 '검증' 과정이 생략되었던 것이다.

 

노동계 뽀스떠는 제작 과정에 '검증'이라는 절차가 없다. 이를 두고 제작진의 자율성을 언급하며 '검열'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뜻이다. 내가 환장(난 굶으면 환장한다)할 정도로 표현의 자유를 외쳐본 적이 있어서 아는 척 하는데, 당이나 노조가 뽀스떠 만드는데 내부적으로 검증 절차를 두는 건 검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건 언론사의 기자나 PD가 갖는 자율성 따위하고도 한 참 멀어 있는 얘기다.

 

노동계 뽀스떠의 성차별 시비가 오래오래 반복되어 왔는데 진지한 검증의 과정이 아직까지 없다는 것만으로도 노동계는 정신 못차리고 있는 게 확실하다.

 

3.

 

붉은사랑님의 [입 아프다!]의 덧글에 올해 노동절 뽀스떠 사진을 찍은 분의 글이 올라와 있다. 뽀스떠 사진의 모델이 되었던 노동자를 희화하는 듯하여 마음 아프다는 얘기.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이 뽀스떠가 되었다면 그 작가으로서는 뽀스떠가 씹히는 것도 자존심 상할 것이다. 나라도 그렇겠다.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분은 작가로서, 특히 사회문제를 다루는 작가로서 철학이 얉다.

 

모든 이미지는 그 이미지가 어느 맥락에 있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2006 노동절 뽀스떠의 그 사진이 덤프연대 파업 사진전에 걸려 있다면 훌륭한 사진이 될 것이다(물론, 왜 하필 덤프연대 파업 사진전일까에 대한 질문은 제쳐두고). 그러나 이 사진이 노동절 뽀스떠에 선택된 순간 최악의 사진이 되어버린 것이다.

 

만약 내가 이와 비슷한 사진을 찍었는데 이 사진을 뽀스떠 제작에 사용하겠다고 한다면 거절할 것이다. 그래도 막 써버리면 가장 악.랄.한.수.단.으로 민주노총-민주노동당 물먹일거다. 그 수단이 뭐냐고? 내가 진짜 악.랄.하.다.고 생각하는 저작권 침해. 돈 왕창 뜯어내서 제대로 된 포스터 만들거다.

 

4.

 

소위 운동권들이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언제냐며, 순 내부정치하고 앉아 있을 때다. 홍보물도 운동권들이나 돌려보라는 식의 내부정치. 귀연이슬님의 [왕저질 포스터]에 달린 덧글에 노동운동사나 공부하라는 글이 달렸다. 내가 볼때는 노동운동의 사건들을 잘 알고 있고 나름대로 열심히인 사람이 달아놓은 듯하다. 대체로 유심히 보는 건 운동권들이긴 하지만 노동절 뽀스떠는 운동권보다 아닌 사람들이 더 많이 본다. 아무리 유명한 투쟁 사진인들 뽀스떠에 넣어봐야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고 인상을 받겠는가? 운동권들 몰려 있는 단체, 노조 사무실, 그리고 대학 학생회실에 있는 데서나 '이게 무슨 사진이냐면... 주절주절...'할 텐데. 노동운동 공부 많이 했다면 내부정치나 하고 있으면 안된다는 배움을 얻어야지.

 

2005년도 비정규직 뽀스떠의 특징은 긴 이야기의 한 컷을 잡아냄으로써 뽀스떠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이야기의 당사자나 깊은 관계의 주변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즉, 감정이입을 노린다. 이 뽀스떠가 무슨 의미인지는 누구나 이해한다. 그러나 이해한다고 해서 감정이입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이 뽀스떠는 실패했다. 비정규직의 2/3 이상이 여성인데, 여성들의 감성에는 별호소력이 없다. 오히려, '남자이야기'가 됨으로써 소외를 느낀다. 비정규직 투쟁은 남성비정규직 투쟁이라는 이미지를 남긴다.

 

내 생각에 노동계는 여성노동자들이 조직되길 바라지 않는다. 그들이 조직되면 귀찮은 일도 많아지고 무엇보다도 가진 권력 일부를 떼어줘야 하니 싫다.

 

5.

 

<민주노동당 강원도당 성평등 교육 자료 2005. 11. 26.> 중에서 뽑은 질문에 ④번이 없다. 그게 뭐냐면,

 

"④ 그림 한 장을 두고 볼 때와 서로 다른 그림 두 장을 나란히 두고 볼 때는 맥락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위 포스터와 함께 나란히 붙여놓으면 좋을 법한 포스터를 그림이나 글로 표현해 봅시다."

 

이다. 이 뽀스떠가 문제가 되었을 때 나의 주장은 뽀스떠 하나 더 찍자였다. 돈없다며 한칼에 씹혔다. 맥락이 달라지도록 하면 이왕 찍은 뽀스떠 버릴 일도 없잖은가.

 

만약, 내가 성차별적이지 않은, 혹은 남성보다는 여성들의 감성에 호소할 수 있는 포스터 이미지를 머릿속에 형상화할 수 있다면 내가 그 포스터 만든다. 그런데 내 머릿 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협업의 공간이 있다면 내가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인쇄에 돈이 많이 들어서 그렇지, 디자인까지의 협업이라면 그렇게 품과 비용을 들이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 놓고 민주노총더러 '받아라'해보는 것은 어떨지. 아마 10년 동안 받으라고 해야 받을까 말까 하겠지만 안받으면 돈 모아서 되는 만큼 포스터 찍어 돌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매년, 매번 반복되는 노동계 뽀스떠의 성차별 시비가 이제는 조금 달라져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내 생각에는 '대안 노동절 포스터'의 제작에 있는 듯하다. 나도 그렇지만 노동계는 '무성적'이라기보다는 '초성적' 포스터 이미지를 그리지 못하고 있다. 즉, 형상을 본 적이 없으니 달라지는 것도 없다. 그냥 '이게 왜 문제야?'만 반복한다. 이들에게 가장 좋은 교육은 '이런 게 있단다'가 아닐까 싶다.

 

퇴직금 지급 협상 타결 인사

 

적지 않은 진보네 블로거 여러분께서 성원해주신 덕분으로 퇴직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직 계좌에 착! 들어온 건 아니지만...

뭐, 어쨌든 공개적인 쪽팔림 사건은 피해가겠군요.

 

 

나름대로 독한 마음 먹고 시작한 퇴직금 받기 프로젝트가 이제 마무리만 남았으니 좋긴 좋네요. 퇴직금을 받아야 여기서 한뭉칫돈 떼어내서 큰 일 벌이려 궁리하던 저로서는 한 시름 놓게 되었습니다.

 

퇴직금 요구할 여덟 명 모으고, 함께 요구하는 사항도 조정하고, 퇴직금 달라고 요구하고, 안 좋은 결과에 대비도 하고, 여기저기 전화해대고, 이런저런 스트레스 받고... 이 과정에서 확인한 건, (1)퇴직금 요구한 여덟 명은 생각보다 모진 인간들이 아니라는 것, (2)당 지도부가 퇴직금 요구를 뭉개지 않을 만큼, 또한 모진 인간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원만한 해결점을 찾기 위해 여덟 명이 많이 양보하긴 했습니다만, '쪽팔림'을 동반할 격렬한 갈등을 피했으니 이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또 제가 남들보다 노력한 게 있어서인지 제가 헤택을 먼저 받게 될 듯합니다. 모두 한 번에 퇴직금을 받게 되면 나머지 일곱에게 '삥' 좀 뜯으려 했는데 밥이나 얻어 먹는 걸로 해야겠습니다.

 

진보네 블로거 여러분 격려에 감사드립니다.(꾸~버억)

 

 

이거 참, 너무 긴장되는군

 

내일(25일)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을 만난다.

퇴직금 건으로 이번이 두번째 만남이지만 사실 상 첫 협상이라고 봐야한다.

지난 21일 당 최고위원회 회의에서 퇴직금은 지급해야 한다고 확인한 모양이다.

오늘 내가 전화를 했더니 만나서 얘기하자고 한다.

아마, 언제까지 지급할 것인가로 협상을 벌이겠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8명의 문제라 부담이 크다.

벌써부터 긴장이 되는군.

 

나는 왜 항상 나중 일을 지금부터 걱정할까?

 

 

자칭 '비정규직 담당' 최고위원

 

민주노동당은 총선 후 최고위원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13인의 최고위원 중 대표, 정책위의장, 사무총장과 같은 선출 때부터 특별한 지위를 가진 자는 6인이고 7인은 그냥 최고위원이다. 지난 지도부까지는 나머지 7인도 당헌-당규에 따라 특정한 지위를, 당선 후에 부여받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학생-청년 담당 최고위원' 따위.

 

선출부터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는 최고위원 중 하나가 노동부문최고위원인데, 이는 민주노총에게 배타적 추천권이 있어서 민주노총이 추천한 후보에 대해서 찬반을 묻는다. 민주노총이 지난 최고위 선거에서 추천하지 않아 민주노동당에는 지금 노동담당이 없다.

 

그런데, 일반명부 최고위원이 된 이해삼이란 자가 있다. 이 사람은 작년에 당의 비정규직운동본부장을 지낸 이력을 앞세워 당선되었는데, 당의 비정규직 사업 담당 최고위원처럼 되었다. 그는 여전히 비정규직운동본부의 활동을 이끌고 있다. 즉, 민주노동당의 비정규직 사업의 대가리이며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이 갖고 있는 '노동'에 대한 개념이 무엇일까 의아해지는 일이 벌어졌다. 4월 11일 최고위원회 회의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한 것이다.

 

"상근자는 일반 노동자와는 다른 정치간부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퇴직금 지급 문제는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이 사람의 활동을 주욱 지켜보는 사람들의 일반적 평가는 '똑똑하지는 못해도 심지가 굳은 사람이다' 또는 '그 사람의 진정성은 어찌 의심하겠는가'이다. 이해삼 최고위원은 예전에 당의 기획위원장을 역임했던 적이 있었는데 별 기획을 내놓지 못했었다. 정치기획이란 팽팽 돌아가는 머리가 있어야 하나 그게 없다는 게 증명된 것이다. 당시 그가 의욕적으로 기획안을 제시했다가 웃음거리가 된 사업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전당원 헌혈 캠페인'이었다.

 

이 사람이 똑똑하지 못한 건 지난해 비정규직운동본부장일 때도 확인되었다. 지난해 당의 비정규직 사업의 방향은 냉철한 정세분석이나 정책적 정교함을 요만큼도 반영하지 못했다. 비정규직 문제로 갈등하고 있는 사업장을 쫒아다녔고 농성만 열심히 하였을 뿐이다. 물론 열정적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똑똑하진 못해도 믿을만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단지, 정책위원회의 담당 연구원과 그와 함께 노력했던 몇몇 사람들이 성과를 냈을 뿐이다. 소위 한방 먹인 건 다 이들 손에서 나온 것이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실태조사 등.

 

이제는 이 사람에 대한 평가도 수정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이 사람은 '노동자'를 자본주의의 질서에서 특정하게 위치한 자들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단순하게 '자본가가 고용한 자'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돈벌기 위해 기업 만든 자를 자본가, 이 기업에 고용된 자를 노동자, 이걸 문구대로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를 포함한 노동의 문제는 한편으로는 '특례', 그로 인한 '제외'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권의 개념이 성장한 20세기에는 착취를 해도 룰이 필요하다는 걸 확인했고 이때문에 계급 타협으로 노동법 따위의 룰이 만들어졌다. 약자인 노동자를 최소한이라도 보호하기 위해 일반 적용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소위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최소 보호 장치를 무력화하기 위해 별별 논리와 계약관계를 만들어댔다. 사실 이것들은 신자유주의만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자본가가 호시탐탐 노리다가 전방위 공세를 하게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게 바로 특수고용직이니, 노동자성이 있니없니, 똑같은 일은 해도 돈도 적게 주고 기간을 정할 수 있다느니, 이런 직종도 파견을 보낼 수 있어야 한다느니 등등.

 

일반적 룰을 무력하게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일.반.적. 방식이 바로 예외, 특례를 마구 만드는 것이다. 이러면 케이스 바이 케이스가 되는 거고 약자가 기댈 수 있는 기둥은 쓰러져 버린다. 결국 야만이 일반적 규범이 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한국, 그리고 세계의 노동자들은 이 국면에 있는 것이다.

 

 

이해삼 최고위원은 이 사실을 알까? 자신의 노동관으로 이걸 파악하고 있다면 그것도 미스테리다. 수 세기에 걸쳐 굶주림에 허덕이거나, 길거리에서 피를 흘리거나, 잡혀가 고문당하다가 끝내 죽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결국 만들어냈던 '노동의 일반 규범'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당당하게 "상근자는 일반 노동자와는 다른 정치간부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말 한마디로 깔끔하게 부정하고 있지 않은가. 아마도 자기는 확실히 '자본가'나 '기업의 이사'가 아니니 당의 상근자는 노동자일 수 없다는 신념에서 우러나온 말인 듯하다.

 

한국의 고용관계에 대한 올바른 시각은 민주노동당에는 없고 오히려 노동관청이나 법원에 있을 것 같다. 아마도 퇴지금 문제 등이 법적인 문제로 비화하게 되면 민주노동당의 상근자의 노동자성은 노동관청이나 법원이 인정해 줄테니까.

 

 

'공교육' vs '사교육'의 대결

 

내가 교육문제로 골치를 앓기 시작한 건 2002년 대선 때부터였다. 그 이전에는 사회 걱정하는 사람의 하나로서 교육문제를 바라보는 수준이라고나 할까. 2002년 대선을 준비하던 그해 여름부터 민주노동당 정책위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나더러 교육공약까지 만들라고 하는 게 아닌가. 하라면 해야지. 교육공약 만들었다. 사실 '조합'을 했다. 당에 열심인 교육계 인사들의 도움으로.

 

2002년 대선은, 진보정당이 진보운동진영에 운동의 계기나 동력, 동기를 강하게 부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최소한 교육분야에서는 그러했는데, 그게 바로 '무상교육'이라는 공약이었다. 사실 2002년 대선에서 '무상교육'은 하나의 이념적 지표로 작용을 했지만 정책적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것은 '국공립대 통합(나아가 대학평준화)'이었다. 이 정책은 2003년을 지나 2004년 총선에서 상당히 수준 높게 다듬어졌고 총선 이후에도 조금씩 다듬어지고 있다. 무상교육 정책은 총선에서도 뻥치는 수준이었지만 총선 후에 상당히 진전된 내용으로 다듬어졌다. 이로써 민주노동당과 진보적 교육계는 공교육 개혁의 기본 방향과 그 내용을 수준 높게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교육 개혁의 내용은 무상교육(재정)과 대학평준화(경쟁질서와 그 폐해의 극복)만으로는 전부 채워질 수는 없다. 관련 있는 여러 문제들도 많다. 그 중에 두 가지를 독특한 방식으로 소개하고 싶은데, 하나는 지방교육자치이고 또 하나는 자립형 사립고 문제이다. 이 두 가지는 교육 정책적 수준에서는 단순하고 명쾌하게 연결되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민주노동당 울산시장 후보 경선(형식은 민주노총 추천 후보 경선)에서는 단순하게 연결되기도 한다. 어떻게?

 

노옥희 vs 김창현 = 전 교육위윈 vs 전 명문학원장

 

이를 두고 한편에서는 '공교육 vs 사교육의 대결'이라는 비유가 만연했었다. 약간 치사한 비유라고 보이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엔 맞는 비유다. 치사할지언정.

 

 

노옥희 후보가 울산시 교육위원이었을 때 회의에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지방교육자치 문제 때문이었다. 민주노동당도 당이니 이 문제에 대한 기본 입장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2005년 초 수개월에 걸쳐 다양한 입장의 사람들과 만나 결국 기본안을 만들었는데 그때 혁신교육위원들의 의견 청취 자리에서 노옥희 후보를 만났다. 사적인 인사나 대화는 없었고 철저하게 공적인 대화만 있었다.

 

이때 노옥희 후보의 태도에 사뭇 놀랐다. 왜냐면, 아무리 진보적인 교육계 인사라고 하더라도 교사 출신인 경우에는 대부분 현재의 교육자치체제(영주 분할 체제 : 난 현재의 '교육부-교육청-학교 체제'를 이렇게 부른다)를 기본적으로 옹호한다. 그러나 노옥희 후보는 이 체제는 기본적으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었다. 즉, 일반자치-교육자치의 통합 흐름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교육계의 정치적 지형(특히, 혁신교육인사들의 교육위원회 진출) 때문에 수년간 유예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었다. 이런 입장은 노옥희 후보만의 것은 아니었고, 교사 출신이라 하더라도 수년간 교육위원으로서 교육개혁에 헌신했던 다수의 교육위원들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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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정부-여당이 교육감을 주민 직선으로 선출하고 일반자치-교육자치를 통합하여 이번 지방선거에 즈음하여 교육감 선거도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게 2004년말부터 2005년초의 일이었는데 이때문에 교육계가 발칵 뒤집혔었다. 그 이유는 이론적으로나 헌법-교육기본법 등 법률 체계로나 상당히 복잡한 배경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단순하게 말하자면 교육계가 자신들의 영지를 내주기 싫기 때문에 문제가 커졌었다.  교육계의 반발로 일반자치-교육자치 통합 등은 실현되지 않았다. 정치권 입장에서는 선거를 겨냥한 계산이 있었는데 논의가 길어지니 이번 선거에 반영할 수는 없고 해서 포기한 것이다. 물론, 차후에 다시 고개를 들긴 할거다. 민주노동당은 이때 '일반자치-교육자치 통합'을 기본방향으로 정했다. 몇 가지 독특한 장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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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서 노옥희 후보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출신 배경이나 이해보다 한 차원 높은 대중의 이해를 고려할 수 있는 태도를 갖추고 있는 인사라는 것이다. 이는 공교육 개혁(사실 상 교육 개혁)에 대한 수준 있는 철학적-이념적 사고 체계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로써 진보적 정치인의 덕목을 모두 갖추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자신의 사적 배경이나 관계를 객관적으로 보고 사회 진보의 방향을 고민할 수 있는 기본 덕목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이 정도면 일단 현재 민주노동당 수준에서는 탑클래스다. 물론, 앞으로 정치인으로서 노옥희 후보는 사람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겨주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이와 달리 사교육의 대명사 김창현 전총장은 교육 철학이라고는 개똥밖에 없는 사람이다. 나는 이 사람이 울산 동구에서 최고 명문입시학원을 운영한 걸 문제삼지 않는다. 먹고 살자고 시작한 것이고 한편으로는 지역운동의 활로와 네트워크 확장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벌인 사업이다. 동네 학생들 입시 공부만 시킨 것도 아니고 지역 주민을 위해 좋은 일도 많이 했다고 하니 믿어줘야지.

 

내가 김창현 전총장을 두고 하고픈 얘기는 자신의 사적인 영역과 한국 사회의 진보에 대한 상을 구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엉터리 교육관으로 자신의 사적인 영역에 대해 변명이나 하는 한심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김창현 전총장은 자립형 사립고에 반대를 한다. 그건 귀족학교이기 때문이란다. 여기까지는 콜. 별문제 없다.

 

근데 공개적으로 자신의 딸이 서울 명문외고에 진학한 사실을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참으로 어이가 없다. 딸은 자립형 사립고에 진학하길 바랬는데 아버지가 자립형 사립고 정책을 반대하기 때문에 스스로 외국어고에 진학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마치 김창현 전총장 스스로가 자립형 사립고에 철저히 반대하고 있고, 가족 내에서는 관철시키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김창현 전총장의 딸이 자립형 사립고를 가길 원했다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서울의 명문외고에 진학한 사실을 문제삼을 수 없다. 김창현 전총장의 딸은 그런 선택을 할 권리, 어떤 비난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딸의 의견을 듣고 외고에 진학하게 한 김창현 전총장도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다만, 자립형 사립고 정책이 문제가 있어서 외고에 진학했다는 딸의 일화를 들며 자신이 교육 문제에 대한 진보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선전한 사실이 어처구니 없을 뿐이다. 이러면서 진보적 인사의 내적 갈등, 학원에서 학생들을 자사고에 입학시키는 게 어떻게 비춰질까 따위의 갈등을 소개한다. 비록 사교육으로 돈을 벌지언정 '교육 문제'라는 정책적 수준에서는 분명한 교육 개혁의 상을 갖고 있어야 진보정당의 지도자로 자격이 있다.

 

외고와 같은 특목고는 자립형 사립고(귀족학교)로 가기 위한 길목에서 설치한 학교다. 한번에 귀족학교로 가기 어려우니까 우파들이 우회로로 삼은 학교란 말이다. 본질적으로 이 둘은 같다. v.1.0과 v.2.0의 차이라고나 할까. 근데 자립형 사립고는 반대하니까 딸이 진학을 포기하도록 분위기 잡고, 외고는 반대 안하니까(이 사람은 보통의 우파처럼 소위 '영재교육'을 주장한다) 진학을 밀어주고. 무슨 교육관이 이런가. 이렇게 교육이념이 엉터리인 이유는 진보진영의 구호(자사고 반대 따위)에 반응은 해야겠고, 자기는 사교육에 뿌리를 둔 사람이 보니 헷갈려서 그런거다. 철학도 없고 깊이도 없으니 얄팍할 수밖에.

 

 

사람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충실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정치 지도자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결정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적인 배경이나 이해관계에 놓일 때와는 달리 대중의 큰 이해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노옥희 후보는 이런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이다. 반면 김창현 전총장은 이런 훈련이 안 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김창현의 부인인 이영순 의원이 울산동구청장이었을 때 학원 건물 앞에 소방도로가 뚫리는거다.

 

오늘은 생뚱맞는 비교를 늘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공교육이나 사교육에 대한 내용은 아니었군.

 

 

자존심 상하다

 

지난 목요일에 사무총장 만나기 전에 대표 비서하도고 통화했었다. 대표도 만나고 싶다고.

비서에게 말해두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는 걸 아는 나는

금요일에 대표와 직접 통화했다.

퇴직금 문제는 궁극적으로 대표가 책임져야 하는 문제이니 직접 얘기해야겠다고.

이번주 초에 만나주겠다면서 비서실장과 구체적인 시간을 잡으라고 하더군.

일정을 대표가 직접 챙기는 건 아니니 비서실장과 통화했다.

비서실장에게 대표의 의사를 전하고 약속잡아달라고 했다.

알았단다.

 

그리고선 월요일이 다 지난 이 시간까지 연락이 없다.

아마도 나, 나와 함께 퇴직금을 요구한 사람들 마음이 급하다고 생각하나 보다.

보채는 사람이 적당히 보채줘야 대표 면담도 잡아주고 그럴 모양이다.

이 정도 되니 내 자존심이 심히 손상되었다.

내가 '만나주세요~오. 제발요~오. 잉잉잉~'하기까지 기다리는 모양인데,

더 이상 내가 전화를 거는 일은 없다.

대표 직접 만나서 할 얘기 내용증명으로 바로 보낼거다.

작성하고 함께 요구한 사람 회람하고 의견 조율하고 다시 작성하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목요일엔 보낼거다.

내용증명 받고 만나서 얘기하자 해봐야 소용없다.

이제는 놀러는 가도, 퇴직금 문제로 민주노동당사 가는 일 없을거다.

 

 

잠도 안오네...

 

내일, 아니 오늘 해가 뜨면 첫날이다.

무슨 첫날?

채권추심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첫날.

사무총장과 면담 약속을 했다.

오후에 만날거다.

 

이런 저런 정보를 취합해 보니 상황이 좋지 않다.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퇴직금을 조용하게 받지 못할 듯하다는 얘기다.

'노동'당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퇴직금을 시끄럽게 받아야 한다는 건 비극이다.

희극인가?

 

이미 민주노동당 퇴직금 미지급 건은 기자들 귀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퇴직금을 받자!

 

나는 5년 7개월 16일 동안 일을 했다. 한국사회의 진보와 진보정당의 성장을 위해서 민주노동당에서 일을 했다. 나의 동기는 명백히 정치적이다. 그렇다면 이 때문에 나는 내가 일한 노동에 대한 보상을 주장해서는 안 될까?

 

 

민주노동당을 사직한 지 2개월 가까이 지나 나는 오늘 당에 전화를 했다. 신임 총무실장와 퇴직금 문제로 얘기를 나누었다.

 

"퇴직금 때문에 연락했습니다."

 

"무슨 얘기를 듣고 전화하신 겁니까?"

 

"네? 무슨 얘기를 들어서가 아니라 퇴직금은 당연히 주셔야죠."

 

"당 사정 잘 알면서 그러세요. 그래서 뭐요?"

 

"퇴직금 달라구요."

 

"일단 알았습니다."

 

 

민주노동당은 창당 초기에서부터 상근자의 급여와 처우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생활급여 지급과 4대보험 가입, 그리고 퇴직금 적립의 필요성 등. 그때마다 재정 사정과 중앙-지역 간 형평성 문제로 항상 유예되었다. 지금 몇몇 시도당은 4대보험에 가입되어 있다.

 

민주노동당은 국회진출 이후에 정책연구원에게는 약간의 추가 급여와 4대보험을 제공했다. 정책연구원으로 일하다 퇴직한 2명에게는 퇴직금도 지불했다. 하지만 이는 왜곡된 문제를 안고 있다. 100명을 넘게 고용했다는 이유로 선관위는 민주노동당의 국고보조금을 삭감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당은 노동-보험-세무 관련 기관에는 50인 이하 사업장으로 등록되어 있다. 당에서는 정책연구원만 노동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세무서는 나의 근로소득에 대한 세금을 원천징수를 한 적도 없고, 나는 건강보험료도 지역가입자로서 냈다.

 

정책연구원의 경우는 그나마 채용 절차가 그럴 듯했고 구두로라도 고용계약이랄 만한 게 있어서인지, 그리고 4대보험과 근로소득세 원천징수를 하게 되어서인지 이들에게는 나름대로 할 건 한다. 이로써 당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정체성' 차이를 노린다. '정책연구원'은 고용된 사람. '상근자'는 '활동가'. 당이 '정책연구원'과 '상근자'를 구별하고 4대보험 적용도 차별하고 퇴직금 문제도 차별하는 게 마치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사장님들과 오버랩된다. 처우가 다르면 이해관계가 달라지고 생각과 느낌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양자의 이해관계의 차이는 '부리는 입장'에서는 좋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노동과 복지에 대해서 할 말을 하는 진보정당이, 유독 그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행태를 보이는 게 이해하기 어렵다. 자본가가 고용하지 않으면 노동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디. 당에서 일을 한다는 건 정치적 목표와 목적이 있으므로 노동의 대가를 바라는 건 정치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옳지 못하다는 생각들을 갖고 있는 듯하다.

 

 

내가 퇴직금으로 받아야 할 돈을 계산해 보았더니 다음과 같다.

 

116만 6,700원 × (5 + 7/12 + 16/365) = 656만 5,220원

 

내게는 적은 돈이 아니다. 나의 미래를 위해 써야 할 돈이다. 내가 '활동가'로서 일했다는 이유로, 나를 고용한 자가 자본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내가 일반 회사를 다닌 게 아니라는 이유로 나의 노동에 대한 보상을 포기해야 할까? 법이 최소한으로 보장한 나의 권리를 포기하면 누가 이로울까? 당이 더 성장할까?

 

진보진영 또 어디선가에도 있을 지 모르는 '보상의 유예'는 모두 끝나야 한다. 퇴직금을 받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