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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기 여성과 직업 - 2

이중착취: 그러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식민지 시기 여성과 직업-2 손유경 기자 2004-09-26 23:31:24 <일다는 퍼슨웹(www.personweb.com)과 공동기획으로 ‘신여성’에 관한 기사를 연재합니다. ‘신여성’의 연애와 사상, 직업과 지위 등을 중심으로 당시 사회를 살펴보는 과정은 여성의 역사를 복원하고 현재를 비추어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연재기사의 필자는 김미지님(퍼슨웹 기획위원, 성공회대 강사)과 손유경님(퍼슨웹 기획위원, 아주대 강사, <대담한 책읽기> 공저자)입니다. -편집자 주> 남편 전용 창기(娼妓)가 되고 싶지 않다면 1920년대 초중반 <신여성> 주요 필진들은 경제적 자립을 이루어야만 여성도 하나의 인격체로 대접 받을 수 있다는 데 대해 별다른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 1925년을 고비로 해서 <신여성>에는 사회주의적 색채를 띤 이론적 분석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여성도 적당한 직업을 구해 자기의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당위적 목소리는 여성으로 하여금 ‘기생충’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게 만든 사회, 역사적 조건을 탐색해 보아야 한다는 유물론적 입장과 만나게 된다. 이는 자유주의적 참정권 운동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이 잡지 <신여성>에 남긴 궤적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사회적 직업을 갖고 있는 않은데다가 유모, 식모, 침모를 집에 두고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는 여성들, 특히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생활하는 “소위 공부한다는 여자들”은 자기 남편에게 자기의 “생식기를 팔고 얻어먹는 매음녀”에 불과하다는 협박에 가까운 주장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하룻밤에도 여러 남자에게 생식기를 일원 혹은 오원씩 받고 팔아서 생애하는 창기나 매음녀와 이렇게 한집에 들어앉아서 다만 한 남편에게 한 주일에 두 번 혹은 세 번씩 팔아서 그것으로 매일매일 먹고 입고 마실 것을 얻는 이런 종류의 아내와는 결코 다른 점이 없을 것입니다. … 다만 서로 다른 점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는 공개적이요 하나는 다만 한 남자의 전용물임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주요섭, “결혼 생활은 이렇게 할 것”, <신여성> 1924년 5월호) <신여성> 1925년 1월 을축신년호는 “개인주의적 해방 즉 해방운동의 첫 계단에서 민중적 사회적 제 이 계단으로 넘어서는 노력”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의미심장한 권두언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말하는 여성의 사회적 해방이란 경제적 자립을 통한 여성의 사회적 지위 상승을 뜻한다. 같은 권호의 독자논단에서 이경숙이라는 한 독자는 조선 여성의 해방을 “정신적 해방”과 “경제적 해방”으로 각각 구분하고, 후자가 훨씬 실제적이며 긴요한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이론’보다는 ‘실천’이, ‘정신적 개조’보다는 ‘물적(物的) 개조’가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물적 개조, 즉 여성의 경제적 해방이 선행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의 여성이 ‘기생충’처럼 살 수밖에 없게 된 것은 그녀의 선천적 결함 때문이 아니라 물질적, 경제적 조건이라는 외부 환경이 그녀의 삶을 그렇게 강제했기 때문이었다. 바뀌어야 할 것은 ‘경제’고 ‘제도’였다. “사회가 가정을 이룬 부인의 생활보장을 해주기 전에는 결국 여자는 그 가정에 매달리게 됩니다. 따라서 남편에게 매달린 물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 이것이 고치어지려면 먼저 그 근본인 경제적, 물질적 조건이 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는 동시에 또한 거기에 따른 사회적, 도덕적, 법률적 조건도 변동이 될 것이요 또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주요한, “처녀독본”, <신여성> 1931년 3월호)


가정은 아늑하지 않다 경제권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에 피할 수 없는 예속 관계가 성립된다고 한다면, 남녀문제 역시도 결국은 넓은 의미의 계급문제라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김경재는, 전적으로 사적 공간이라 간주되는 가정 안에서의 부부관계가 사실은 ‘사유’ 관념을 바탕으로 한 경제, 사회제도를 그 모델로 하고 있음을 밝히면서, 경제적 실권을 가진 남성과 그렇지 못한 여성 사이에 형성된 주인-노예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오늘의 세상은 남자의 세상이니 국가의 조직이 남자를 본위로 하고 되었다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소위 법률이란 것이나 도덕, 풍속, 습관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남자를 위하여 존재되어 있다. … 경제적으로 우월한 자가 세상에서 권력계급이 되고 경제적으로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한 자는 사회적으로 보아 아무런 권력을 못 가지게 됨과 같이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즉 부부의 사이에서도 경제적으로 실권을 잡고 있는 남자에겐 여자가 정복을 당하게 된 것이다. … 재산을 본위로 한 자본주의의 세상이 되자 더욱 더욱 여자는 남자의 노예로 化하였고 유린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세상은 언제까지나 제한하고 지속되라는 법은 없다. 세상은 진화하는 그 법칙에 의하여 무한히 진화하고 있다. 거기에 사람이 살았다는 참된 의미가 있고 역사가 지여지는 것이다.” (김경재, “여학생 여러분에게 고하노라”, <신여성> 1926년 4월호) 여기서 김경재는 근대의 공공 분야가 지극히 성별화된 배타적 체계라는 사실과 그것을 형성시킨 사회, 역사적 조건을 함께 폭로함으로써, 근대의 공/사 구획 논리, 특히 공=남성/사=여성이라는 이분법적 논리가 덮어 쓴 자명성의 가면을 벗겨내고 있다. 이런 논리라면 여성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사유재산제도에 기반한 자본주의 제도 자체가 해소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제도 자체가 해소되어야 한다는 것은 원리적 차원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언제까지나 가만히 앉아 자본주의여 망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현 상태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남성에게 양도한 경제권을 회수하는 것이었다. “여성의 적은 남편이 아닌 자본가” 이와 같이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자들은 여성에게도 사회적 노동을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것, 그리고 여성해방은 궁극적으로 사회구조의 혁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직업여성의 최후의 적은 남편이 아닌 자본가임을 강조하는 논의는 자칫 성별모순을 계급모순으로 흡수, 환원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무엇보다도 조선의 여성해방운동은 자본가를 타깃으로 삼아야 한다는 논조의 글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금후의 여성운동은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과 합류하는 노동부녀의 대중적 활동이 활발히 진전되는 것”(윤형식, “1931년의 여성운동과 금후 전망”, <신여성> 1931년 12월호)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직업을 가진다 해도 경제권을 찾을 수는 없으리라는 위기의식을 불어넣음으로써 직업부인의 계급의식은 한층 효과적으로 고취될 수 있었다. 여성도 무조건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하니 직업전선에서 부대끼자고 선동하는 일과, 일터에서 이루어지는 자본가에 의한 착취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는 작업은 동시에 진행되었다. “어떤 엄정한 의미에서 말하면 직업부인이 된다는 것도 역시 돈 있는 사람에게 공공연하게 팔리는 것”(일기자, “여성평단 - 부인직업문제”, <신여성> 1926년 2월호)임이 누차 강조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자본주의 사회는 어떤 경우에도 ‘노동자’에게 경제권을 양도하지 않는다는 새삼스런 진리를 깨닫는다면, 조선의 직업부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도 계급모순의 해결을 일차적 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여성 - 이때껏 우리는 막연히 조선여성 조선여성 하여왔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조선여성에도 아래 위 두 층이 있다”(한철호, “사회시평”, <신여성> 1933년 3월호)는 것이다. 조금도 신성하지 않은 사회적 노동 그렇다면 직업부인이 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사회에서까지 착취를 당하느니 집에 머물며 사회적 노동보다 훨씬 ‘신성한’ 일을 전담하라는 것인가? 좌절하지 말고 직업전선에 부대끼라는 것인가?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은 대체로 전자의 입장을 위해 손을 들어 주고 있다. 사회주의적 색채가 짙은 글들의 궁극적 귀결점이 직업부인으로 하여금 밖에서도 착취를 당하느니 차라리 집에서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는 것이 현실적 해결책이라는 데로 이르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메리카의 수백만 여자는 가정과 자녀의 보호를 단체 사업에 맡기고 자기는 사회적으로 유익한 직업인 상업에 종사한다. 그러하나 … 부인이 아무리 훌륭한 의논을 평화회에서 토할지라도 그 자녀가 육아실에서 서로 치고 서로 때리면 그 탁론이 무슨 힘이 있으랴? 또 부인이 윤리회의에서 첩첩요설의 이구(利口)를 부릴지라도 그 부인이 참혹한 독신생활을 하는 남자 하나도 구하지 못한다 하면 그 윤리회에서 요설을 부림이 무슨 유익이 있으랴?” (김윤경, “부인문제 其三 - 부인직업문제”, <신여성> 1924년 11월호) 위의 기사는 자유주의 여성운동가 엘렌 케이의 사상을 소개하고 있는 글이다. 그러나 어머니 노릇과 아내 노릇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려 한 엘렌 케이의 한계는 여성에게 남성의 보조자 내지는 자녀 양육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것을 권유한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자들에 의해서도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었다. “몇 푼 받는 직업 때문에 가정의 풍파가 일어나고 집안 꼴이 말이 아니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주부로서 사회의 기초가 되는 가정만을 완전히 만들어 나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 자녀가 있는 이로 직업을 가지는 것은 자녀에 대한 죄악이다.”(김자혜, “직업여성과 가정”, <신여성> 1933년 4월호) “자본가의 미끼”가 되고 있는 부인의 사회적 노동은 “착취가 따르는 직업노동. 정조를 위협하는 직업노동”이기에 “조금도 신성치 않다”(石南, “권두언 - 직업(노동)은 신성한가?”, <신여성> 1933년 4월호)고 폄하되었던 반면 가사노동과 출산, 육아의 가치는 적극적으로 격상되었다. ⓒ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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