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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중계를 보지 못하는 이유

얼마전에 한국의 프로야구 코리안시리즈 우승팀과 일본의 프로야구팀과의 친선경기가 몇 경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십대 초반 나도 야구장에 가봤다. 야구장에 가서 피자와 캔맥주를 먹자는 말에 넘어가 피크닉 가는 정도로 생각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소리 지르고 엉덩이 들썩하는데 부화뇌동하기도 쉽고, 부화뇌동 하는 가운데 먹는 피자와 캔맥주가 꽤 맛있었다. 하지만 나는 피자와 캔맥주가 끝나면 또 아이스크림을 먹고 아이스크림이 끝나면 또 무언가를 먹고 내차 먹다가 먹을 게 없어지면 몸을 꼬았다.

 

하지만 나에게도 일생일대 잊지 못할 정도로 역사적인 스포츠 경기가 있다.

국민학교 6학년때였는데, 한국 대 일본의 야구경기였다.

일본팀이 2점(인가? 이것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젠 가물가물하네) 선점하고 있었고, 한국팀은 도통 방망히 한 번 휘두르지 못했었다. 당시 같이 살고 있던 이모는 즉석 떡볶기를 좋아했었다. 그녀 나이 스물일곱, 집에서는 한창 노처녀 취급을 받고있었다. 지금 생각하기에 그녀는 즉석떡볶기 중독이었었던 것 같다. 우리는 광화문 내자호텔 근처 살고 있었는데, 점수변동이 없는 야구가 지겨워진 이모는 나를 꼬셔 정동 지역 최고 유명했던 미리내 분식점에 함께 가서 즉석떡볶기를 사오자고 했다. 나는 이모와 손잡고 그 길을 걸어가, 떡볶기 봉지를 달랑달랑 흔들며 집에 왔다. 집에 와서 끓여먹을 찰나, 막판에 한국팀 점수가 났다. 한대화가 막판 만루홈런으로 역전을 시킨 것이었다. 이모는 고 사이에 떡볶기 사오기를 잘하지 않았느냐며, 막판 만루홈런을 알고 그 사이의 시간을 잘 사용했다는 식으로 의기양양하게 뻐겼고, 나는 야구는 구회말 투아웃부터라는 의미를 가슴에 새겼다.

그 이후 프로야구가 생겨서 원년에 오비베어즈 어쩌구하며 다녔던 것도 좀 기억난다.

 

가끔 운동선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여자애들을 보면, 그게 멋져보여 나도 흉내내려 했던 적이 있었다. 진정으로 나의 총애를 받았던 선수도 몇 있다. 최천식, 전희철...

 

하지만 나는 스포츠 경기 앞에서 항상 딴 생각이 빠진다.

야구는 투수가 폼을 잡고 공을 던지기까지 그 사이에만 잠깐 딴 생각한다는 것이 정신 차리고 보면 벌써 공치고 타자 뛰고 있고, 농구는 반칙 나온 사이에만 잠깐 딴 생각한다는 것이 정신 차리고 보면 점수를 따라잡기 어렵고, 축구는 워낙 경기장이 넓어 시종일관 계속 딴생각이다. 고스트 바둑왕을 보며 잠깐 '승부욕'이란 것을 나도 가져봐야겠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그러다가 남편이 그러고 있는 날 한심하게 쳐다봐서 당장 관뒀다.), 사실 나의 적성과도 맞지 않는다.

 

얼마전에 있었던 한국 프로야구팀 대 일본 프로야구 팀 경기중계에서는 이승엽에 대한 딴생각에 빠졌다. 이승엽은 일본 프로야구팀 소속이었다. 이승엽은 얼마전에 결혼해서 새 신부와 일본에 갔다. 일본으로 가는 공항에서 이승엽과 새 신부는 나란히 사진포즈를 취했는데, 그녀는 짧은 청미니스커트에 곰사냥나가는 털부츠를 신고 있었다. 한 눈에 대단한 신세대 미녀였다. 이승엽처럼 잘 나가는 프로야구선수는 그런 미녀를 차지할 만하지. 이승엽이 경기하고 들어오면 그 피곤함과 스트레스를 나긋나긋 풀어줄 그녀가 곁에 있으니 총각 때와는 달리 이젠 안정이 되겠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싶었나보다. 그녀는 곁에서 이승엽의 피곤과 스트레스를 나긋나긋 풀어준다. 저런 미녀라면 이승엽은 눈녹듯 피곤을 풀 수 있을 것이다. 이승엽이 한국에 돌아오면 그녀도 함께 돌아오고, 다른 곳으로 가면 또 거기도 가고. 이승엽의 피곤을 풀어주기 위해 함께 항상 갈 것이다. 365일 고용된 개인용 창녀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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