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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2/18
    앳된 얼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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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6/02/17
    잉여에 대한 집착(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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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6/02/16
    라디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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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6/02/07
    어제 신문 보고 울고, 오늘 책 보다 기절(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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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6/01/31
    아이의 비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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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6/01/27
    아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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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1/24
    최근 본 미남자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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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6/01/16
    집 떠나 일주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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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6/01/09
    새해소망이라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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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01/06
    <까페 뤼미에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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앳된 얼굴

딸래미와 놀다가 장난을 한 번 쳤다.

동그랗게 말아놓은 양말을 옷 속에 집어넣어 '찌찌 생겼다'하는 장난.

내 딸래미는 아직 다섯살 밖에 되지 않았다.

엄마 찌찌를 애기였을 때의 친구처럼 느끼는 딸래미와 그냥 그런 식으로의 찌찌 장난을 할 생각이었다. 좋아하는 인형을 애기라고 하고 젖을 물리며 놀 수도 있겠고...

그런데 나는 양말 말아놓은 덩어리를 찌찌라고 옷 속에 밀어넣었다가 아주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다섯살 아이 얼굴 하고 불룩 튀어나온 가슴이 전혀 뚱딴지 같지 않고 어떤 '그림'을 자연스럽게 연출해 놓는 것이었다. 

그 그림은, 초등학생들 사이에 유행했던 캐릭터, 그래서 아동용 종합장이나 필통이나 스티커 등등에 수도 없이 찍혀있는 캐릭터, 베리베리 뮤뮤나 마법전사 ****(이름을 까먹음), 이누야샤의 누구누구(이름 또 까먹음) 바로 그것이었다.

 

이제보니 그 캐릭터들의 이미지가 바로 이것이로구나.

얼굴은 십대, 아니 십대 중에서도 초초반, 아니 십대도 될까말까에 가슴은 c컵 쯤 불룩.

바로 딱 이것이었다.

 

으악 구역질이 나왔다.

이런 이미지는 누가 만들어놓는 것일까.

초등학생들이, 얼굴은 자기 또래의 친구를 원하지만 가슴은 불룩해서 엄마같은 여자가 좋다고 하는 것일까.

 

 

앳된 얼굴이 유행이네 어쩌구 하던데,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얼굴이 악세사리인 수준을 넘어, 나이는 또 왜 무작정 어려야 되는 걸까.

얼마전 민씨 모녀의 자살미수 때문에도 이 나라의 맹목적 배타성, 주변으로 밀려나면 그대로 추락이고 마는 맹목적 중앙집중형 배타성 때문에 비참한 기분이었는데, 이 나라가 집중하는 그 '중앙'은 정말 재수없게 유치하고 질이 낮구나,하는 생각이다.

 

하루, 내면이 성장했다고 고요하고 평화롭다가 바로 그 다음날 입에서 욕만 튀어나오니, 내가 아직 성장이 덜 된거야, 누가 내 성장을 막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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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에 대한 집착

한때 카메라에 집착했던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내가 아니라 렌즈가 내가 누구인지 말해준다고 착각했던 것 같다.

내 앞에 카메라를 매달고, 어딘가에 렌즈를 갖다대면서.

나는, 사진이 아니라, 그 착각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성장하면서 사진을 잊었다.

사진을 잃어 아쉽지만, 다행이라면 다행, 나는 성장하였다.

내가 찍은 사진을 어떻게 '전시'할 수 있을까- 그것은 잠시 나를 착각하게 해준 기특한 렌즈의 결과물인데- 에 집착하면서 스캐너를 샀었다. 없는 돈을 쪼개쪼개 반드시 사야만 했었다.

 

스캐너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잭 한 쪽이 떨어져나간지 오래됐다.

이쑤시개 보다 작은 쪼가리가 부러진 건데, 그럼으로써, 스캐너는 아주 무용지물이 됐다.

 

그런 스캐너를 가지고도 평화롭게 산지 몇개월이 넘었다(일년이 넘었는지도 모르겠다).

 

일곱살에 영구치를 얻고, 열네살에 성호르몬을 얻고, 스물한살에 방탕을 얻고, 스물여덟에 독립과 살림을 얻고, 이제 서른다섯. 구불구불 칠년마다 돌아오는 나의 자아는 지금 성장을 얻고 있는 듯. 그것이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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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설겆이 하면서는 라디오가 제격.

씨디를 고르는 것도 설겆이 전초 행위로서는 너무 과하다.

그저 전원만 켜면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하는 라디오가 최고의 설겆이 친구.

 

나는 10시에 <김갑수의 아름다운 당신에게>부터 11시 <신지혜의 영화음악> 씨비에스 고정, 12시 이후엔 케이비에스 클라식 에프엠 (12시 클라식 방송에는 한국 근대 소설가나 시인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줌), 한동안 이 시간의 설겆이를 양도받은 남편은 그냥 이비에스만 냅다 틀어놓는 쪽이라함. 한영애가 진행하는 음악시간이 끝나면 무슨 교육상담이 있고(상담프로그램은 은근히 중독성이 있는 거 같음), 또 무슨 (방송대) 강의 같은 것이 있고, 그거 끝나면 어떤 음악하는 사람이 게스트를 한 명 초청해서 마구 수다를 떠는 프로가 있는 것 같고(왕수다판), 또 소설가 한강의 오디오북 어쩌구하는 프로(한강 목소리 너무 깜).. 이걸 그냥 다 듣는다고 한다(그의 의외의 느긋함?).

 

 

어제는 11시 쯤 내가 설겆이를 하고 있었는데, 라디오 주파수가 도무지 잘 맞지 않아 그 잡음을 피하려고 어디 잡히는 데 아무데만 나와라하고 있었다.

에프 알 데이빗의 <워즈>가 잡혔다. 음, 뭐 들어줄만 하지. 옛날 생각도 나고.

노래가 끝나고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김기덕.

이 양반 장수한다.

사랑사는 사람에게 고백을 하려는데 말이 안나온다, 이런 노래가 워즙니다.

여전히 김기덕식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하는 말,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4*위, 스모키의 리빙 넥스트 도어 투 엘리스!!!!

이러고 있는 거다.

아니, 김기덕 식 강의가 문제가 아니라,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이란 오백년 묵은 챠트를 아직도!!!!!

 

그는 이 챠트만 벌써 몇년째 하고 있는 것일까.

몇년 째 거기서 거기 팝송을 틀면서 몇년 째 똑같은 썰을 풀고있는 저 대단한 집념.

엘리스네 집에 어느날 리무진이 들어갔어요. 죽었다는 거죠. 사랑하는 엘리스가 죽었다는 겁니다. 이런 노랩니다, 이게.

하면서 이어지는 비지스의 할러데이.

...정말 이 노래를 틀어달라고 했는지, 스콜피언스의 할러데이를 틀어달라고 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있었던 경찰이 아닌 다음에야 그걸 어떻게 확인하겠습니까. 근데 그냥 비지스의 할러데이를 틀어줬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노래가 히트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41위까지만, 내일은 40위부터..

 

김기덕의 저 마구리가 먹혀드는 방송계란 나로선 알 수 없지.

그 나물에 그 반찬도 도가 있지, 이십년전에 끓인 국 한 냄비를 물만 더 붓고 내내 계속 끓여내놓고 있는 저 뚝심은 무얼까.

사람이란 원래 무슨 챠트 씨리즈를 좋아하는 본능을 갖고 있는 것인지도..

나도 베스트 어쩌구하는 거 좋아하잖아?

아무튼 김기덕에게는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언제까지 하는지 한 번 보자.

이왕지사 내년에도 십년후에도 이십년후에도 계속 하시길.

그렇게 되면 오호,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챠트계에 독보적인 기록이 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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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신문 보고 울고, 오늘 책 보다 기절

뭐야, 세상에, 어제 신문 보다가 기가 막혀 울음.

마흔 된 여자가 딸 죽이고 자기도 죽으려다가 딸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바람에 다 실패하고 말았다고.

이영표가 일부러 먼 길 돌아 드리블 연습하며 가슴에 품는다는 대한민국이 이런 나라다.

자칫해서 주변으로 빠지면 되돌아 살아올 길 없는 황천길 되는 나라.

마흔몇살이라는 민씨 그녀, 대학도 다녔던 엘리트에, 왠만큼 사는 집 자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오토바이에 한 번 치였던 것이 시각장애인으로 빠지는 삐걱이었고, 서른 즈음에 연애했다가 임신했을 때 낙태하지 않고 애 낳은 것이 미혼모로 빠지는 삐걱이었다.

내가 그녀가 아니될 것이란 보장이 어디있는가.

배 아프지 않는 약이라며 애에게 수면제 먹일 때 어미 심정이 어떠했을까.

딸은 보호소로 보내지고, 어미는 정신치료원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물론 그녀의 해발 5만 피트의 상처를 치료하려면 정신치료원이든 어디든 가서 쉬어야겠지만, 정작 정신치료원에 보내져서 정신치료 좀 받아야할 사람들이 멀쩡히 돌아다니며 정치입네, 나랏일하네하고 있는 데 정말 멀미가 난다.

 

 

그리고 바로 하루 지나고 오늘은 책을 보다가 심폐를 찌르는 곳곳의 문장들 때문에 기절함.

 

아이리스 머독의 <잘려진 머리>, 왜 이리 재밌는 거야. 진작 볼걸. 마틴 때문에 웃겨죽겠네.

오늘의 숱한 명명문장들 중 하나: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람됨이 밖으로 흘러나와 형성된 모든 것을 함께 잃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는 경우, 우리는 그렇게나 많은 것들, 그림들, 시들, 노래들, 장소들도 함께 잃게되는 것이다.  단테, 아비뇽, 셰익스피어의 노래, 콘웰의 바다, 그 방이 그대로 안토니어였다.

 

흠, 이것을 보고 문득 얼마전에 보았던 영화 <이터널 썬샤인 오브 스폿리스 마인드>가 생각남.

이 영화, 짐 캐리와 케이트 윈슬렛 두 배우 덕분에, 그리고 (올모여사가 지적했던) '날고 뛰어봤자 운명의 짝은 돌고도는 윤회의 동일자'란 사랑에 대한 냉소(난 영화보다 여사의 이 표현이 더 좋았던듯)적 자세를 감상하는 맛이 나쁘지 않았으나, 찝찝하게 뒷통수에 남은 것, 바로 기억의 말소에 대한 부분.

대상에 대한 기억을 지운다고 그게 그렇게 말끔하게 되나. 대상과 관련된 일기, 사건, 장소, 타인과의 대화 등등은 어떡할건가. 그것까지 지워버리면 남은 기억은 너덜너덜해져있을텐데.

<메멘토>도 그렇고, 나는 기억을 소재로 하는 영화는 어쩐지 대충 그렇다고 치고 넘어가자는 것 같아 보고나면 좀 민망하다.

 

그래서 야심차게 <이터널 썬샤인> 비디오를 빌려본 후 괜히 머쓱해져서 영화 보기가 쭉쭉 이어지지 못하고 있음. 아무래도 나에게 있어 영화는 막을 내린 듯. <청연>, <그대는 내 운명>, <사랑니> 등등 보고싶어 좀이 쑤시던 것들이 언제 그랬냐 싶게 맹맹하다. 이것도 청춘의 막이 내리고 중년의 막이 오름의 한 증상인지 싶다.

 

하여간에 민씨 모녀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그녀들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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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비명

그 완벽한 아이가 밤에 비명을 지른다.

자다가 갑자기.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한다.

가슴 속에 응어리가 있는 것이다.

응어리, 가슴에 맺힌 그 응어리는 나로 인한 것이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최고 애착대상인 부모, 즉 나와의 충만한 시간.

엄마가 일하러 가야하기 때문에, 아빠가 일하러 가야하기 때문에, 바쁘기 때문에, 아이는 계속 참아왔다.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응 알았어,대답하고는 어린이집에 갔었다.

그러나 어린이집 훌륭하시다는 선생 열, 또래친구 수억 다 필요없다.

엄마 품에 안겨서 엄마 냄새를 맡고, 엄마와 눈을 맞추고, 엄마 입에서 나오는 엄마 말을 듣고, 엄마가 밥을 먹여주고, 엄마가 옷을 입혀주고, 엄마가 친구가 되어주는 것, 오로지 이것을 원한다.

아아, 이 안쓰럽게 사랑스러운 것.

그런데 나는, 사실, 며칠 전 읽기 시작한 소설이 더 재미있다.

이제 얼마있으면 새 일이 시작될 직장 준비에 더 마음이 급하다.

엄마는 너를 최고 사랑해,하고 으스러뜨릴 듯 껴안고 눈을 맞추어 바라보고는 돌아서서 직장 준비를 바삐 하고 잠깐 짬이 날 땐 궁금한 소설책을 집어 들고 싶은 것이다.

아이의 이 집착은 생존본능일 것이다.

약한 것의 생존본능.

그러나 그는 나를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본다(더할 수 없는 사랑의 눈빛).

나를 보면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안도와 평화가 보인다. 내가 없으면 그에게 안도와 평화가 있을까, 불안하다.

나는 외면하기도 잘 하면서, 실은 가슴으로 전전긍긍한다.

이렇게 완벽한 아이는 흔한 사랑 조차 충만히 받지 못하고, 인간과 인생과 세계의 괴리를 일찌기 체험하며 못난 인간의 허울많은 인생을 시작하나보다. 그래서 세계는 부조리 투성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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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여 아이와 대화가 가능해진 후, 그러니까 아이의 실체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내가 조금씩 발견할 수 있었던 그 실체라는 것을 한 문장으로 하자면, 아이는 참말로 완벽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이루 말 할 수 없이 상투적이라 이미 너덜너덜하게 닳아빠져 그 의미조차 너절해진 느낌의,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다'란 명제도, '아이는 천사와 같이 순수하다'란 명제도, 그래서 참인 것이었다.

 

이것은 섬뜩한 발견이었다.

 

나는, 아이를 싫어한다는 편으로 남고자 끈질기게 애쓰며 살아왔었는데(아이를 낳고 키우는 엄마된 주제에도. 딱히 어떤 아이가 싫어서라기 보다는 꾸역꾸역 태어나는 인간들이 싫은 것이었음) 두 손 들어 완패를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 내 앞에 육화하신 부처, 예수, 성인을 두고 감히 내가 뭐라고 그 존재를 '싫다, 좋다' 한단 말인가.

 

 

이 발견의 근거가 되는 상황 상황들을 하나하나 여기에 옮기기는 어려우니 요약정리하자면, 아이는 내가 풀어놓는 인간관, 인생관, 세상관 등에 대해서 내가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과 내가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것을 정확하게 꿰뚫어보았다. (그 판단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천상으로부터 내려진 솔로몬의 왕관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닐테고, 사실 그것은 다름아닌 아이의 '백지와 거울'이란 특성 때문이다. 외부를 고스란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고스란히 내비추고 있는 특성.) 그리고 그 괴리를 자기 몸으로 고민한다. 해답을 찾으며 타협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오오.

 

이러니 아이 앞에서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초라해지겠는가.

나의 일거수일투족, 일사일언이 진실인 것인가,하는 검증은, 이 나이에 새삼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참으로 섬뜩한 발견이었다.

 

 

언젠가부터, 아이가 짜증을 부리고 떼를 피우면, 미안해,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구나, 엄마가 몰랐구나,라는 말이 나왔다. 백만번 사과를 해도 미안해. 그러다가도 나는 역시 범인이라, 어른이랍시고, 떽 혼을 낸다. 홍수나는데 저수지에 또랑내어 논에 물대고 있는 꼴이라지. 누가 누구를 혼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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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본 미남자둘

한 남자는 키가 훌쩍 커서 백 구십 센티미터는 되어 보였다.

색깔이 바랜 보라색 털모자를 쓰고 있었고 헐렁한 검정 스웨터를 입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긴 얼굴, 그러니까 뭐든 다 길어보이는 인상, 손가락도 길 것 같고, 그렇다고 무턱대고 예민섬세하기만 한 얼굴은 아닌데, 순정만화과의 극단으로 쏠릴 뻔한 분위기를 잡아주는 것은 나이 같다.

젊게 봐야 삼십대 후반. 마흔이 넘었다고 해도 그럴 법해보이는 연륜이 이 사람의 경우 매력 포인트 몇십점을 가산해주는 것 같다.

고개를 끄덕이며 주로 듣는다. 목소리는 분명 보드럽고 감미로울 것 같아.

 

옆의 남자도 어디서 빠지지않을 얼굴이지만, 키 큰 남자에 비해 약간 간이 덜 된 느낌이다.

조금 키가 작고, 조금 살집이 있고, 조금 더 젊어보인다.

주로 말을 하고 있고, 눈이 크고 눈빛이 강하다.

 

 

멀리서도 그들은 큰 키 때문에 눈에 띄었다.

내가 서있는 방향으로 그들이 걸어오고 있는 사이, 점점 더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시선을 끌어잡는 무언가 다른 공기가 있었다.

 

둘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삼십대 후반, 마흔의 두 (미)남자가 팔짱을 끼고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걷고 있는 그 모습은 아찔할 정도로 고혹적이었다.

여기가 빠리의 거리라면 그렇게나 아찔하지는 않았을 지도..

 

그 둘이 내 곁을 스쳐지나가는 순간, 나는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살짝 꽃 냄새와 벌꿀 냄새가 가미된 고농도 순수자연 신선 공기가 대기엔 가득하고, 햇볕은 항상 골든 옐로우이며, 비는 나무와 풀을 어루만져 항상 진초록이고, 사람들은 사랑한다. 항상 서로 사랑한다.

 

내가 잠깐 천사를 본 것이었다고 해도 그럴 법 했다.

 

사람들은 왜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의 사랑을 갈라놓으려 했던 걸까.

그것이 가장 아름다와, 너무 고혹적이라, 세상이 너무나 평화로와져서 악마질을 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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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떠나 일주일

집 떠나기 전 일주일, 규민이랑 부비며 꼬박 집에만 있었다.

규민이가 기관지염을 앓아 꼼짝없이.

공기 좋은 데 가서 살아야지, 하는 소리가 입에 달렸다.

그런 일주일을 보내니 어서 빨리 부산으로 가고 싶었다.

떠나는 날 월요일 전 주말엔 규민이에게 "엄마 퇴근"을 선언하고 뻗었다.

일요일밤엔 잠까지 안 왔다.

이게 얼마만이냐. 흥분과 긴장.

아이가 걱정되긴 했지만, 남은 선수진들도 든든하고, 이제 애 걱정은 의도적으로 접어두기로 작정하였다.

 

월요일 새벽 4시반 집을 나섰다.

5시25분 발 케이티엑스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정확히 구포역.

8시 10분 도착했더니 왠걸, 날씨 너무 좋음. 완전 봄.

촌스럽게 두꺼운 겨울코트 차림이라니.

낯선 도시, 차 창 밖의 낯선 거리,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8시 45분 쯤 목적지 신라대에 도착했다.

대학켐퍼스 또한 얼마만이냐. 스무살로 돌아가는 기분이닷.

 

그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 아홉시부터 저녁 여덟시까지 수업으로 꽉 채워진 날을 보내는데, 왜 그렇게 신이 나고 재미있고 즐겁고 상쾌하고 유쾌한지.

규민, 미안, 집에서 고생하는 남편, 미안, 여러모로 신경쓰고 고생한 엄마, 미안.

역시 학생이 최고 좋은 직업임을 다시 한 번 느낌.

나, 그냥 학생으로 평생 살면 안될까.

수업은 어찌나 가슴을 절절 끓이던지, 그림 수업은 또 나의 손의 아티스틱 욕구를 어찌나 일깨우던지, 몸으로 움직이는 수업은 또 어찌나 착 달라붙던지.

이렇게 한나절을 보내고, 기숙사 방의 단출한 살림 속에서 밥을 챙겨 먹고 빨래를 하고 책을 들춰보는 저녁나절, 이런 하루가 꿈인가, 생시인가..

 

그리고 집으로 왔다.

마지막 뒷풀이밤을 거하게 보내고, 잠이라곤 기차안에서 잠깐 눈을 붙인 게 전부인 물먹은 솜덩이같은 몸을 끌고.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안에서 누가 달려온다.

엄마, 부르면서.

 

앗, 저 아이가 규민인가.

내 팔에 들어온 이 아이가 규민이던가.

나랑 너무도 똑같이 생긴 이 아이.

특히 눈매가 너무 나랑 똑같다. 표정을 어색하게 구사하는 모양새하며, 입 안의 말을 분명하게 꺼내놓지 못하는 망설임도 어쩜 이렇게 나랑 똑같은지.

내가 이렇게 나랑 똑같은 애를 세상에 내놨구나, 넌 어떻게 앞으로 살아갈래.

갑자기 이 애가 와락 측은하다.

어차피 세상에 나와서 살아가야하는, 나랑 똑같은 아이.

 

규민아, 니가 규민이 맞아?

엄마는 어떤 예쁜 요정이 날개를 훨훨 움직여 엄마한테 오는 줄 알았어.

 

엄마, 나 보고싶었어?

그럼, 얼마나 보고싶었는지 몰라.

맨날맨날 내 생각했어?

그럼, 규민이 잘 있는지, 밥 잘 먹는지, 터전에서 잘 놀고 있는지, 아빠랑 잘 놀고 있는지, 맨날맨날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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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소망이라면,

돈 많다는 삼성생명은 어찌나 돈이 많은지, 정확한 기간과 액수를 외우고 있었는데 까먹었다, 비틀즈 원곡을 사용할 때 지불해야하는 로열티(원곡 뿐 아니라 비슷하게 부르거나 연주된 곡도 사용료를 내야한다고 함, 웬 재수.)가 가히 상상을 초월할 만큼 어마어마했는데, 테레비를 거의 틀지 않는 나도 자주 봐야할 정도로 쉴 새 없이 쏘아대던 삼성생명 부라보 유어 라이프 광고 배경음악으로 "I will"을 정확하게 폴 메카트니가 부른 것으로 쓰고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삼성생명이 그토록 거부가 된 데에는 적으나마 나의 돈도 있다. 십시일반이라고, 없는 통장에서 꼬박꼬박 매달 삼성생명께 돈을 바친다. 암보험도 두 개나 들어있고, 엄마가 옛날에 들어준 여성보험도 하나 있다.

 

그래서 삼성생명 직원(은 아닌데.. 보험아줌마의 현재 호칭은 무엇인가.)이 가끔 사근사근한 안부전화를 한다. 지금 돈이 없어서 보험을 더 들 수 없는데요,하고 어느날 용기있게 말했는데, 아, 그런 거 신경쓰지 마세요, 그것때문에 전화하는 거 아니에요,하고 그녀는 매우 프로훼셔널하게 대꾸를 하였다.

그러더니 급기야 우리집에 한 번 오겠다고 조르고 졸랐다. 내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게 이유의 전부라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왔다.

산타클로즈처럼 선물을 잔뜩 들고.

2006년 새해달력은 기본이고, 내가 평소에 갖고 싶어했던 딱 그 모양의 탁상거울이랑, 핸드폰에 매달라는 앙징맞은 개 인형줄 두 개, 원래는 여기까지였는데 애기선물을 안 챙겼다며 18 k 금으로 된 네잎클로바 책갈피까지.

 

나도 답변용 무언가를 내주어야하겠는데, 줄 수 있는 거라곤 그녀의 강의를 열심히 들어주는 것 뿐. 그녀는 역시 프로훼셔널하다.

 

삼십대 중반, 이때 십년 이십년을 내다보며 돈을 모아야한다,는 게 그녀 강의의 요지였다.

사실 나도 이 걱정을 안해본 것은 아니다. 내가 돈을 벌 수 있는 세월이 어디까지일까.

땡자땡자하며 지나온 젊음 덕에 수중은 빈털털이고, 거의 하루 벌어 하루 살고 있는 형편인데, 그렇다면 앞으로 하루벌이가 끝나는 날, 내 생활도 끝인 것이다. 그때 가서 나는 살만큼 살았다고쳐도 규민은 또 어떡할건가(이런 걱정을 정말 진심으로 하게된다).

 

그녀는 은행저축보다 보험회사 재테크 보험이 왜 좋은지 줄줄 꿰더니, 그 중 하나 가장 추천할 만한 것으로 변제주식펀드? 변환주식펀드? 하여간에 주식에다가 일정 투자하는 보험을 설명한다.

그녀 : 지금 주식이 얼마인지 아시죠?

나 : 네?.... 네, 얼마더라..

그녀 : 1,300이에요.

나 : 헉 (거기까지 올랐나, 벌써. 천이라고 하는 얘기는 들었는데. 그렇다면 갈 데까지 다 갔네.)

그녀 : (나의 표정을 읽은 듯) 미국 주식이 얼만지 아세요? 만***에요. 분석가들은 우리나라 주식이 미국의 딱 이십년전 상황이라고 해요. 이제 우리나라 주식도 그렇게 될거에요. 올해도 천오백,육백된다고 하잖아요. 삼성전자, 에스케이텔레콤 이런데에 예전에 주식 2억정도 가지고 계셨던 분들, 지금 68억원이래요. 주식으로 돈 번 사람들 참 많잖아요.

 

주식이 자본주의 꽃이라더니, 노동자도 자본의 주인으로 만들어주어 부자가 될 희망을 피워준다고 꽃인가, 아, 그 꽃, 공포스럽다.

침이 넘어갔다. 우리나라가 20년 후에 주식 만 포인트 달성하려고 무기 장사 총 장사에 전쟁 장사까지 벌이겠구나. 못할 짓이 무어겠는가. 삼성전자, 에스케이텔레콤 급기야 쌀농사까지 팔아넘기고 주식 천 삼백을 얻었는데. 핸드폰 장사 더 해먹어야 한다는 논리 오로지 이거 하나로 쌀농사 쯤 해치우지않았는가. 이것에 대면 그 어떤 논리도 나가떨어지지않았는가.

아, 무섭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한 사람이 어떻게 돈을 모아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 수 있는지를 얘기하는 자리에서 이제 다른 한 쪽은 어떻게 죽어나가든 상관없다는 식이라니.

 

 

새해 소망을 묻는 마이크에다 열에 여덟은 경기가 풀리고, 경제가 나아지고, 부자가 되었으면, 이라고 한다. 가구 당 한 대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고, 인터넷은 삼천만명이 사용한다고 하며, 핸드폰은 중학생이면 거의 가지고 있는 세상이면 소비산업이란 갈 데까지 다 간 것 아닌가. 여기서 경기/경제더러 더!더! 외치는 건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정말 모르겠다. 사람들이 무얼 원하는 건지.

 

새해소망이란 거 없었는데, 생겼다.

주식 500대 이하로 확 꺽어서 자본주의 꽃 말라비틀어주시고, 미국 전쟁산업 좀 고만하게 하시고, (여기서 끝나면 좀 아쉬우니)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홀딱 망하고, 민주노동당 많이 당선하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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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페 뤼미에르>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휀이었던 염승주답게 염승주의 2005년 베스트 무비는 <까페 뤼미에르>라고 했다. 

 

 

얼굴 본지도 몇 년에다가, 그렇다고 앞으로 몇 년 후에 얼굴 볼 것인가 하면 그럴 것 같지도 않은 사람을 두고 나는 참으로 이러쿵저러쿵 별 생각을 다 한다.

그런 사람이 있긴 하지.

직접 보며 말을 나누지 않아도 그 사람을 가끔 떠올리고,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영향을 조금 가끔 받고 있는.

난 왜 그런 사람이 하필이면 멸치대가리 염승주일까.

(염승주말고 다른 사람도 물론 있겠지, 예를 들면 존 레논이 그렇고...)

하여간에 나도 <까페 뤼미에르>가 무척 보고싶었다. <킹콩>보다 <까페 뤼미에르>가 더 보고싶다.

 

<까페 뤼미에르>의 광고를 보고 아, 이 영화 보고싶군,이란 생각을 하자마자 시사회신청을 열라 했다.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대여섯군데를 들러, 똑같은 답변을 써놓고, 회원가입을 하는 지랄을 하느라 두어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시사회 시간이 밤12시이니 규민이 재워놓고 나가면 딱 맞겠다, 티켓 두 장 오면 하나는 누굴 줄까, 일본인이랑 같이 보고싶은데 아는 일본인이라고는 하야타형밖에 없고, 이 양반은 밤 열두시에 만나 영화티켓을 건네며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고나와 영화가 좋으면 팔짱을 끼고 밤거리를 걸을 지도 모르는 낭만의 상대로는 왠지 끌리지 않는군, 그렇다면 어떡하나, 학교에 일본어 선생을 꼬셔볼까...하는데 시사회에 당첨 안 됐다. 그 후에 들은 소리는 <까페 뤼미에르>가 염승주의 2005 베스트 무비라고.

 

2006년엔(이 까마득한 숫자라니.) 영화를 좀 많이 봐야지,하고 있지만, 아직도 영화 보는 습관을 들이기가 힘들다. 영화를 보자면 약 두시간 쯤(집에서 비디오로 볼때나 그렇지 영화관에 가자치면 반나절이나) 꼼짝없이 시간을 묶어두어야한다는 것인데, 애 낳고 키우다보면 금 한 다라이를 주어도 바꿀 수 없는 게 두 시간이라, 이 금쪽보다 귀한 것을 어디 한 군데에 묶어쓰겠다는 과감성이 쉽게 나오지 않는 것이다. 사실 그러고서는 하는 짓이 인터넷이다.

인터넷 딱 삼십분만 하고, 책 한 시간, 나머지 삼십분은 차마시며 신문을 봐도 좋고, 손톱 맛사지를 할까, 인생을 음미하며 철학을 생각할까,하고 컴퓨터를 켜고는 두시간 홀랑 인터넷인 것이다. 이놈의 인터넷 정지해도 싸다.(아직 정지하지 못했음)

 

따라서 점점 영화와 나는 멀어지고(언제 가까운 적 있었던가만은) 그냥 이렇게 멀어지는 것이 수순인가보다,하고 생각하였다. 나에겐 내가 감당 못 할, 그러나 너무 가까와져버려 거부할 수는 이미 없는 것이 생겨버렸으니 영화 쯤 멀어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영화는, 보면 재미있으니, 보면 또 보고싶고..

요즘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있어서 특히 그런가보다.

요즘 본 것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어찌나 재미있는지 여러번 보면서도 보면 볼수록 재미있다.

새삼, 감상의 기쁨이랄까.

(규민이가 아직도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영화를 보지 못해(귀신때문에 무서워서 중간에 자꾸 빨리 돌려야함) 비디오로 복사를 못하고 있어 이 디비디를 빌려준 누군가에게 너무나 미안함)

오히려 처음 봤을땐, 캐릭터마다 이미지가 과다하게 느껴져서 싫었다. 이게 내가 에스에프나 환타지를 싫어하는 이유인 듯.

그러나 보면 볼수록 드러나는 것은 감정과 일상을 표현하는 섬세함, 세밀함, 풍성함.

섬세하고 세밀하고 풍성한 감정과 일상의 표현이란 창작의 원론 같은 것이다. 결국 아무 데도 더 가지 않았다. 아무리 길고 뛰는 디지털 시대 어쩌고 하지만, 세상은 늘 제자리인 것을. 줄기세포, 인간은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전기용접 따위로 신을 흉내내었다고 하려하다니.

황우석 얘기는 아무 데서도 하지 않는다고 결심했건만, 하필이면 엄마 아빠 앞에서 몇 마디 했다가 대판 싸우기만 했음. 으으으... (아니다, 황우석은 엄마랑 싸우고, 아빠하고는 이명박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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