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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사회주의와 그 적들 - 조지 오웰,『위건 부두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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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건 부두로 가는 길/조지 오웰 지음ㆍ이한중 옮김/한겨레출판 발행ㆍ328쪽ㆍ1만2,000원; The Road to Wigan Pier/1937.
 
얼마 전 영화배우 황정민이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읽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올 초에 새로 번역되어 나왔는데, 읽어보지 못했다가 우연히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읽게 되었다.
 
여기에는 위건 부두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책 중에 보면 오웰은 위건 경치가 아니라 사람을 좋아했고, 위건 부두는 헐려버리고 이젠 그 자리마저 확실치가 않다고 나온다. 옮긴이는 위건 부두는 형편없는 탄광촌의 어엿한 강변휴양지인 셈이라고 하면서, 대중의 자조(自嘲)를 끌어와 책의 제목으로 썼다고 밝힌다. 이런 제목을 보건대, 오웰이 유명인사가 아니었다면 이 책은 별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파묻혀버렸을 것이다. 조지 오웰이 썼기에 내가 번역된 이 책을 접하게 된 셈이다.
 
아래에 책 중에 나오는 상당히 많은 구절들을 발췌해놓았지만, 힘들여 하고 보니 책을 처음 잡았을 때처럼 그냥 편하게 읽어도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옮긴이도 그렇고, 몇몇 서평들은 특히 ‘민주적 사회주의와 그 적들’이라는 제목의 2부를 두고 현재 시점에서도 나름의 함의가 있다고 하지만, 솔직히 오웰의 사회주의 비판은 나이브하다고 하겠다. 고리타분한 사회주의자를 묘사한 부분을 발췌하여 들이대면 그럴싸하지만, 전반적인 맥락에서 보면 오웰이 정작 말하고자 하는 바에서 조금 어긋나는 경우가 많고, 사회주의를 폭넓게 본다 하더라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고 사회주의 이념 자체를 재구성해야 하는 지금에 적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이 책을 쓸 때의 오웰의 나이가 서른넷이었다는 점과, 이튼 스쿨을 졸업했으나 대학을 가지 않고 영국의 식민지에서 5년을 보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책에서 얻을 것은 사회주의와 관련된 이념적ㆍ이론적인 부분에 있다기보다는 그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우러나오는 상황인식과 통찰력에 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당시 사회현실의 묘사와 그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여타의 대목들이 훨씬 인상적이다. 물론 이 또한 르포르타주의 정수를 보여주는, 탄광 지대 노동자들의 실상을 담은 1부를 빼고 하는 얘기다. 1937년 파시즘과의 전쟁 전야의 영국 상황이 오히려 한국 상황과 유사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야 하나.
 
오웰이 1부에서 묘사하고 있는 현실은 참여관찰을 통해 제출된 무슨 보고서를 보고 있는 것처럼 나타나 있다. 그래서 소위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나오는 전형적인 현실을 묘사하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리감이 느껴진다. 과연 이렇게 열악했을까 하는 느낌 말이다. 이 정도 되면 착취받는 이들이 들고 일어나는 게 정상이겠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 않는 이상한 현실을 짚어내고는 있으나, 거기에서 멈춘다. 오웰이 할 수 있는 부분이 거기까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2부에서는 문제가 있는 이 현실을 냉소하면서도 자신이 냉소하게 된 나름의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더구나 버나드 쇼 등 당대의 사회주의 작가들에 대한 실명비판을 하고 있는 대목도 재미있고...
 
이 책은 자신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라면 자의적으로 읽어낼만한 대목이 많다. 자신이 오웰이 비판하는 ‘사회주의자’(한국적인 상황에서는 진보개혁세력이라고 해야 맞겠다)에 해당하는 줄도 모르면서 자신의 인식틀에 이 책을 꿰맞추는 것이다. 자신은 사회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면서,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좌파 지식인들을 질타한다. 그렇게 질타당할 정도로 좌파 지식인들이 많았던가. 오히려 그런 좌파 지식인들이 ‘한 줌도 안 되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미미하기 때문에 문제 아니던가.
 
한국 사회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와 저변 확대가 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지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한국 전쟁 이후 좌파들이 언제 설쳐본 적이라도 있던가. 한국사회에서 그런 무대는 지금까지 별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오웰이 살았던 시기의 영국에서 사회주의가 직면한 현실과 2010년 한국에서 사회주의가 가진 위상과 현실은 다르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언론들에 실린 서평은 대부분 책 맨 뒤에 실린 옮긴이의 말을 정리한 수준이다. 옮긴이의 말만 읽더라도 이 책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인데, 그래도 책을 전반적으로 읽는 것과는 다르다.
  
에피소드1. 이 책을 읽고 D.H. 로렌스와 그가 쓴 『채털리 부인의 연인』(실비아 크리스텔이 나오는 영화로 유명하다)을 다시 보게 되었다. 오웰은 로렌스를, 노동 계급 인텔리로서 자신의 생활방식 자체를 적어도 외부적으로나마 바꾸며, 국가 장학금을 통해 중산층으로 올라가는 데 성공하는 유형의 대표적인 인물로 묘사한다. 로렌스는 오웰이 사립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고자라고 말했다 한다. 로렌스는 오웰을 정말 싫어했다 보다.
 
에피소드2. 채식주의자에 대한 오웰의 별난 정의를 보면 오웰은 사회주의자들이 채식주의자연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본 것 같다. “멀쩡한 사람들의 본능이 확실히 옳은 것은, 음식에 대해 별난 사람은 송장 같은 삶을 5년 더 연장하고자 하는 바람에서 스스로를 인간 사회와 단절시키려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보통의 인간과는 접촉하지 않겠다는 사람인 것이다.” (234쪽)

 

1부 탄광 지대 노동자의 밑바닥 생활
 
○ 브루커 부부의 하숙집에서
○ 막장의 세계를 체험하다
아무튼 거기엔 보통 사람이 지옥에 있으리라 상상할 만한 게 대부분 있다. 더위, 소음, 혼란, 암흑, 탁한 공기, 그리고 무엇보다 참을 수 없이 갑갑한 공간이 그것이다. 불 말고는 모든 게 다 있다. 저 아래에는 뿌연 탄진을 잘 뚫지 못하는 램프와 손전등의 미약한 빛은 있되, 활활 타는 지옥불만은 없다. (32쪽)
그들(‘필러’들)이 하는 일은 보통 인간의 기준으로 보자면 거의 초인적이라 할 만큼 엄청나다. 그것은 그들이 어마어마한 양의 석탄을 퍼담을 뿐만 아니라, 두세 배 힘든 자세로 작업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기는 자세를 유지해야만 하는데 그게 얼마나 힘든지는 시늉만 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삽질은 서서 할 때 더 쉬운 법이다. 삽을 움직일 때 무릎과 허벅지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릎을 꿇게 되면 그 부담을 팔과 배 근육으로 다 떠안아야 한다. 다른 조건들도 작업을 딱히 더 수월하게 해주는 건 아니다. 덥고(제각각이지만 경우에 따라 숨 막힐 정도다), 탄진은 목구멍과 콧구멍을 틀어막으며 눈썹에 자욱하게 쌓이며, 그 비좁은 공간 안에 있으면 기관총 소리처럼 시끄러운 컨베이어벨트의 소음이 끝없이 들려온다. 그런데도 필러들은 철로 만든 사람처럼 보이고, 또 그렇게 일을 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매끈하게 덮여 있는 탄진을 보면, 그들은 정말 철의 인간 같다. (33-34쪽) 온몸이 시커메진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놀랍도록 힘차고 빠르게 삽을 휘둘러 석탄을 뜬다. ‘휴식’ 시간이란 게 없으니, 그들은 이론상으론 전혀 쉬지 않고 일곱 시간 반을 일한다. (34-35쪽)
→ 철의 노동자라는 말은 여기에다 쓰는 모양이다. 탄광 막장 노동의 현장은 물론 광부들의 삶에 대한 오웰의 관찰은 정말 치밀하고 구체적이다. 이 글을 읽으며 한겨레의 서평 제목이 ‘업계의 자랑~’이 계속 떠올랐던 것도 그 때문일 터이다.
 
그 세계는 지상에 있는 우리의 세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머지 반쪽이다. 아마도 우리가 하는 모든 것, 말하자면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부터 대서양을 건너는 것까지, 빵을 굽는 것부터 소설을 쓰는 것까지 모든 게 직간접적으로 석탄을 쓰는 것과 상관이 있다. 평화를 위한 모든 수단에 석탄이 필요하며, 전쟁이 터지면 석탄은 더욱 필요해진다. 혁명기에도 광부는 계속 일하러 가야 한다. … 혁명도 반동도 석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47쪽) 우리는 모두 우리에게 ‘석탄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석탄을 얻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는 좀처럼, 또는 전혀 떠올리지 못한다. … 어떤 면에서 당신의 차를 모는 것은 도로 밑 수백 미터 지하에서 석탄을 캐내고 있는 광부들이다. 꽃에 뿌리가 필요하듯, 위의 볕 좋은 세상이 있으려면 그 아래 램프 빛 희미한 세상이 필요한 것이다. (48쪽)
탄광의 여건이 지금보다 열악했던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젊을 때 땅속에서 허리에 마구馬具 같은 띠를 차고 두 다리를 사슬로 이은 채, 팔다리로 기고 광차를 끌며 일하던 할머니들이 아직도 더러 살아 있다. 그들은 임신한 상태로도 그런 일을 하곤 했다. 나는 심지어 지금도 만일 임신한 여자들이 땅속을 기어다니지 않으면 석탄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석탄 없이 살기보다는 그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리라 생각한다. 어떤 육체노동이든 다 그렇다. 그것 덕분에 살면서도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망각한다. (48-49쪽)
→ 오웰은 석탄이 혁명은 물론 교황과 히틀러가 자신의 활동을 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며, 언제든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지금은 이러한 석탄에 해당하는 게 뭘까. 그리고 육체노동자의 전형인 광부는 또 무엇이고?
 
○ 광부들의 삶
광부가 일하는 시간을 하루 일곱 시간 반뿐이라고 본다면 큰 오산이다. 일곱시간 반이란 실제 작업 시간일 뿐, 여기다 한 시간 이내인 경우는 드물고 심심찮게 세 시간이 될 수도 있는 ‘여행’ 시간을 보태야 한다. (탄광 속을 기어서 몇 킬로미터를 왔다 갔다 하는, 이 ‘여행’은 법적으로는 작업이 아니며 그래서 광부는 그 대가를 받지 못한다. (42쪽)) 더구나 대부분의 광부들은 탄광을 오가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들여야 한다. 탄광 주변에 마을이 조성되어 광부들이 일터 바로 옆에서 사는 경우는 작은 탄광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큰 탄광촌에서는 거의 모두가 버스로 일터까지 다녔다. 나와 함께 묵었던 광부 하나는 아침 근무조여서 아침 여섯 시부터 낮 한 시 반까지 작업을 했다. 그런데 그는 새벽 3시 34분에 일어나 오후 세 시가 넘어서야 돌아오곤 했다. (54-55쪽)
이렇게 저열한 불편과 냉대를 당하고, 늘 기다려야 하고, 모든 걸 상대방 편한 대로 해야 하는 것은 노동 계급의 생활에선 당연한 일이다. 무수히 많은 영향력이 끊임없이 노동자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피동적인’ 역할로 축소시켜버린다. 그는 행동하는 게 아니라 무엇에 따라 처신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신비로운 권위의 노예임을 자각하며, 자신이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른 그 무엇을 원해도 ‘그들’이 결코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언젠가 나는 함께 홉을 따다가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에게 왜 노조에 가입하지 않느냐고 물어본 일이 있다. 나는 바로 ‘그들’이 절대 그걸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들’이 대체 누구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이 전능한 존재인 건 분명했다. (67쪽)
→ 1930년대 영국의 계급관계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주택 문제
한 여인의 얼굴이 지금도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지칠대로 지친 해골 같은 그 얼굴은 더없이 비참한 신세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 참담한 돼지우리 같은 곳에서 아이 여럿을 깨끗이 기르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녀의 표정은 마치 나더러 온몸에 똥을 뒤집어쓴 기분을 느껴보라고 말하는 듯했다. (85쪽)
→ 오웰은 여러 탄광촌의 많은 집을 답사해보고 핵심적인 사항을 꼼꼼하게 메모한 후 이를 책에 옮겼다. 이를 보면 그 집들의 상태가 어떤지를 떠올려볼 수 있다. 여기에다 직설적으로 그런 주택에 사는 이들을 묘사한다. 마이크 데이비스의 『슬럼, 지구를 뒤덮다』에서 세계 도시들의 빈곤화를 묘사한 부분을 떠올리게 한다. 7-90년 전의 영국은 여전히 진행형인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 없는 건, 북부 도시들이 공공건물은 으리으리하고 호화롭게 지으면서 애처로울 정도로 주택 부족 문제에 시달리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반즐리의 경우, 노동계급을 위해 공중목욕탕은 물론이요 적어도 신규 주택 2천 채가 필요하다고들 하는데도 최근에 시 청사 신축에 15만파운드를 썼다.
→ 1930년대의 영국이나 2010년대의 한국을 비교하면 주택 공급율의 측면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관료들이 보이는 행태는 다르지 않다. 화폐단위만 바꾸면 한국의 어느 도시 상황이라고 해도 들어맞지 않을까. 
 
○ 실업수당으로 사는 사람들
실업상태인 독신 남성의 삶이란 비참하다. 그는 가구 딸린 방에서 주당 6실링을 내고 사는 경우가 많으며, 나머지 9실링으로 그 밖의 것들을 겨우겨우 해결해야 한다. 물론 그는 제대로 먹을 수도 다른 이런저런 것들을 제대로 챙길 수도 없으며, 한 주에 방세로 6실링을 내야 하는 처지라 필요 이상으로 집 안에 버티고 있기도 어렵다. 때문에 그는 낮 시간을 안 떨고 있을 수 있는 공공도서관이나 그 밖의 장소에서 때워야 한다. 안 떨고 있을 수 있는 것, 이것이야말로 실업자인 독신남이 겨울에 관심을 쏟는 거의 유일한 문제다. (109쪽)
→ 남의 일이 아니라서 관심 있게 본 대목이다. ㅡ.ㅡ;;
  
○ 실업과 먹을거리
나는 먹을거리의 변화가 왕조나 종교의 변천보다 중요하다는 주장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통조림 음식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세계대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 그런데도 음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좀처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묘한 일이다. 정치인이나 시인이나 주교의 동상은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요리사나 베이컨 제조인이나 과채(果菜) 재배인의 동상은 아예 없다. (124쪽)
 
○ 그리운 노동 계급 가정의 거실 풍경
노동 계급 가족은 중산층 가족과 마찬가지로 결속하되 그 관계는 훨씬 덜 억압적이다. 노동자는 가문의 위신이라는 끔찍한 짐을 맷돌처럼 목에 걸고 다니지 않는다. 중산층은 빈곤에 처하면 완전히 망가지는데, 그것은 대체로 가족들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성공’하지 못한다고 밤낮으로 들볶는 친척이 너무 많아서이다. … 중산층 노동자들인 효과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터인데, 파업이라도 나면 중산층 아내들은 거의 다 남편을 부추겨 파업을 방해하여 다른 사람의 일자리를 차지하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 계급의 또 다른 특징은 동등하다고 여기는 상대면 누구에게나 꾸밈없이 말한다는 점이다. 중산층은 원치 않는 것을 주면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일단 받아들일 텐데, 노동 계급 사람은 바로 원치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서도 ‘교육’에 대한 노동 계급의 태도가 얼마나 다른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 노동 계급은 누가 배웠다고 하면 은근히 존경하곤 하지만, ‘교육’이 자신들의 삶에 손을 뻗치면 건강한 본능으로 그것을 간파하여 거부해버린다. (155-56쪽)
노동 계급의 가정에서는(실업 상태 아닌 비교적 살 만한 가정을 말한다) 다른 데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따스하고 건전하고 인간적인 공기가 있다. … 나는 형편이 가장 나은 편인 노동 계급 가정의 거실 풍경이 완벽한 균형을 이룬다고 할 만큼 너무나 편안한 것을 보고 깜짝 놀라곤 했다. 특히 겨울날 저녁에 차를 마시고 난 뒤, 조리용 난로에선 불꽃이 춤을 추고, 난로 한쪽에선 아버지가 셔츠 차림으로 흔들의자에 앉아 경마 결승전 소식을 읽고, 어머니는 다른 한쪽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아이들은 1페니 주고 산 박하사탕 때문에 행복해하고, 개는 카펫에 드러누워 불을 쬐는 정경을 볼 수 있는 집은 정말 가볼 만한 곳이다. (157쪽) 우리 시대가 살기에 완전히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음을 나에게 일깨워주는 것은 근대 기술의 승리도, 라디오도, 영화도, … 아니다. 그것은 내 기억에 남은 노동계급 가정의 거실 풍경이며, 그중에서도 아직 영국의 번영기이던 전쟁 이전의 내 어린 시절에 이따금 보았던 정경들이다. (159쪽)
 
2부 민주적 사회주의와 그 적들
 
○ 학교에서 익힌 편견
자신이 사회주의에 대해 진정으로 호의적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작금의 상황이 과연 용인할 만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하며, 계급이라는 지독히도 까다로운 문제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정해야 한다. (163쪽)
계급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먼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를 알아야 한다. 중산층은 ‘속물’이라는 말에서 그쳐버린다면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속물근성이란 것이 일종의 이상주의와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다. (177족)
 
○ 제국 경찰에서 부랑자로
제국주의를 혐오하기 위해서는 그 일원이 되어봐야 한다. 밖에서 보면 영국의 인도 지배는 호의적이며 필요하기까지 한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도 그런 부분이 있다. … 타국민을 통치할 때는 자국민을 통치할 때보다 관대한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지배 체제의 일원이 되면 그것을 정당화할 수 없는 압제로 인식하지 않는 게 불가능하다. … 근대인 중에서 마음 속 깊이 남의 나라를 침략해서 그곳 사람들을 힘으로 억누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는 게 사실이다. 타국민에 대한 압제는 경제적 압제보다 훨씬 더 분명하고 이해하기 좋은 악덕이다. (195쪽)
나는 내 자신이 단순히 제국주의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간의 모든 형태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스스로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려가 억압받는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어졌다. (201쪽)
→ 오웰은 5년간 인도제국 경찰로 일한 것을 제국주의 압제의 일원으로 복무한 것으로 여겨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래서 “모든 피압제자는 언제나 옳으며 모든 압제자는 언제나 그르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것은 “압제자가 되어본 사람으로 얻을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결론”(200-01쪽)이라는 것이다.
 
○ 건너기 힘든 계급의 강
우리 모두 계급 차별을 맹렬히 비난하지만 그것이 정말 없어지기를 진지하게 바라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와 맞닥뜨린다. 그것은 모든 혁명적 소신이 갖는 힘의 일부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은밀한 확신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212쪽) 확고부동한 압제에 맞서 싸우는 소설가 존 골즈워디를 붙들어주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 자신이 그것을 확고부동한 것으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뜻밖의 일들이 벌어지고 그가 알던 세계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그의 생각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그는 아마 좀 더 품위 있는 형태의 파시즘에 도달했을 것이다. 이것이 감상주의의 불가피한 운명인 것이다. 그의 모든 견해는 현실을 최초로 맞닥뜨리자마자 정반대의 것으로 변해버린다. (213쪽)
많은 사람들은 번거롭게 자신의 습성과 ‘이데올로기’를 바꾸지 않고도 계급 차별을 철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사방에서 계급 타파를 위한 활동이 왕성하게 전개되고 있다. 어딜 가나 자신이 계급 차별을 타파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정말로 믿는 선의의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다. (218쪽) 나는 계급 타파를 위한 그런 모든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이 아주 심각한 잘못이라고 확신한다. 그런 것들은 때로는 부질없는 짓에 그치고 마는 수도 있지만, 분명한 성과가 나타날 때는 대개 계급적 편견을 ‘강화’하는 노릇을 한다. 무리하게 속도를 높이고 계급간에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운 평등을 강권했으니, 거기서 비롯되는 마찰 때문에 그냥 뒀으면 영영 묻혀버렸을 수도 있는 온갖 감정이 표출되고 마는 것이다. 감상주의자의 견해란 현실과 맞닥뜨리자마자 정반대의 것으로 돌변해버린다. (219쪽)
 
○ 왜 사회주의가 지지받지 못하는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회주의가 정작 입지를 다져야 할 곳에서 기반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호감을 지닌 사람들은 많으나 사회주의라는 ‘아이디어’는 10년 전에 비해 폭넓은 지지를 못 받고 있다. 지금은 생각 있는 보통 사람이라면 사회주의자가 아닐 뿐 아니라, 사회주의에 대해 적극적으로 적의를 내보이고 있다. 그것은 주로 선전 방법이 잘못된 탓인 게 분명하다. (230쪽)
지금과 같은 때에는 ‘대체’ 왜 사회주의가 인기를 못 얻는지를 알아내는 게 절실하다. 그런 염증을 해소하고 싶다면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해야 하며, 그것은 곧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보통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보거나 적어도 그들과 같은 관점에서 헤아려볼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든 제대로 해결하려면 제대로 들어봐야 한다. 따라서 좀 역설적이긴 하지만, 사회주의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주의를 공격해보는 게 필요하다. (231쪽)
→ 오웰의 이러한 발언은 “사회주의의 근본 취지에는 공감하고 사회주의가 ‘통할’ 것이라 볼 만큼 생각도 있지만, 사회주의라는 말만 나오면 내빼기부터 하는 사람들을 옹호하는 식”으로, 즉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을 자청하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한국의 현실을 보면 누구라도 사회주의에 공감하고 있는 시기는 아닌 듯하다. 말끝마다 마르크스나 레닌을 인용하는 사회주의자들은 이제 거의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자 내지 사회주의자들이 전술을 제대로 짜면 바뀔 수 있을까? 그런 차원의 문제는 아님이 분명하다. 

 
문제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별난 사람이 바로 사회주의자고 사회주의자는 별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도 존재하는 것 같다. … 나아가 대부분의 중산층 사회주의자들이 이론적으로는 계급 없는 사회를 위해 애쓰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구질구질한 사회적 위신에 악착같이 매달린다는 추악한 현실도 고려해야 한다. (234쪽)
평범한 노동자에게, 이를테면 토요일 밤 아무 선술집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유형에게, 사회주의는 더 많은 임금과 더 짧은 노동 시간과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사람이 없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 혁명적인 유형에겐, 즉 기아 및 실업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석하고 고용주의 요주의 인물 명단에 오른 유형에겐, 사회주의란 압제에 저항하는 일종의 구호일 뿐이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진정한 노동자라면 그 누구도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보다 심각한 의미를 파악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런 그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보다 더 진정한 사회주의자인 경우가 많다. 그것은 그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와는 달리 사회주의란 곧 정의와 상식적인 양식(良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단, 그가 모르는 것은 사회주의가 경제적 정의로만 축소할 수는 없으며, 사회주의를 실현하자면 우리의 문명과 우리 자신의 생활양식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는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236-37쪽)
공산주의와 가톨릭주의가 비슷한 점 하나는 ‘배운’ 사람들만이 완전한 정통파라는 사실이다. (238쪽) 고집불통이 되는 법은 ‘배운’ 사람만이, 특히 문인만이 안다. 이는 공산주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순결한 형태의 신조는 진짜 프롤레타리아에게선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단, 이론과 책으로 무장한 사회주의자는 노동자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노동 계급에 대한 애정 때문에 행동한다는 말은 할 수 있다. (239쪽)
그런데 과연 그런가? 나는 사회주의자(자기 글을 소책자로 만들어내는 지식인이며 스웨터 차림의 더벅머리에 마르크스를 수시로 인용하는 타입을 말한다)를 보며 도대체 그의 ‘진짜’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품곤 한다. 그것이 누군가에 대한, 특히 자신과는 가장 동떨어진 부류인 노동 계급에 대한 사랑이라 믿기는 어려울 때가 많다. 내가 보기에 많은 사회주의자들의 숨은 동기는 병적으로 심한 질서의식일 뿐이다. (240쪽)
→ 오웰은 여기에서 노동 계급의 생활에 대한 이해나 자각이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면서 버나드 쇼나 웹 부처도 비판한다. 내가 버나드 쇼의 글이나 희곡을 읽어보지 못해서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오웰의 말대로라면 비판받을 만하다.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 부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혁명이란 그들이 어울리고 싶어 하는 서민이 주체가 되는 운동을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똑똑한 ‘우리’가 하층계급인 ‘그들’에게 부여할 일련의 개혁인 것이다. (242쪽)
진실은 사회주의가 ‘지금 알려지고 있는 방식으로는’ 주로 미흡하거나 심지어 비인간적일 정도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정은 있지만 생각은 없는 사회주의자들, 즉 빈곤을 없애길 바랄 뿐 그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다 이해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노동 계급 사회주의자들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의 문명을 싱크대 밑으로 가라앉혀버릴 필요가 있음을 이해하고 실제로 기꺼이 그렇게 하려고 하는, 책으로 훈련받은 지식인 사회주의자들이 있다. 유감스러운 것은 이 유형에 ‘진보’의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온갖 시시한 족속들이 섞여 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의 ‘근본’ 취지에 공감하는 평범하고 수수한 사람은 어느 심각한 사회주의 정당에도 자기 같은 부류를 위한 자리는 없다는 인상을 받는다. 더 나쁜 것은 그가 사회주의란 실현될지도 모르지만 가능한 한 저지해야 하는 운명 같은 것이라는 냉소적인 결론을 내리도록 내몰린다는 점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사회주의에 대한 통념이 사회주의자는 따분하거나 비위에 안 맞는 사람이란 관념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점이다. (246-48쪽)
 
○ 사회주의는 어떻게 파시즘을 키웠는가
정말 안타까운 것은 사회주의가 대체로 기계적 진보라는 관념과 결부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단순히 필요한 단계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으로, 거의 일종의 종교로서 그렇다는 점이다. (255쪽) 사회주의가 실현된 세계는 무엇보다 ‘질서’와 ‘효율’의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민감한 사람들이 사회주의로부터 뒷걸음치는 것은 바로 번쩍번쩍하는 웰스의 세계 같은 미래상 때문이다. (256쪽)
그러나 문제는 이보다 훨씬 더 깊은 곳까지 퍼져 있다. 지금까지 나는 기계적 진보를 추구하는 동시에 기계적 진보 때문에 불필요해지는 자질을 보존하려고 하는 것이 부조리하다는 점만을 지적했다. 더 고려해볼 문제는 기계가 압도함에 따라 손상되지 않을 인간 활동이 ‘과연’ 있겠느냐는 점이다. (265쪽) 모든 걸 기계로 할 수 있는 세상에서는 모든 게 기계로 이루어진다. 일부러 원시적인 방법으로 되돌아가는 것, 구식 연장을 쓰는 것, 무슨 일을 할 때 괜히 조금 더 어렵게 하는 것은 전부 일종의 딜레탕트 취미이며 과도한 멋 부리기다. … 그렇다면 기계적 진보의 경향은 노고와 창조를 필요로 하는 인간의 본성을 좌절시킨다고 하겠다. 그것은 눈과 손의 활동을 불필요하게 하거나 심지어 불가능하게 한다. (270쪽)
유감스럽게도 거의 모든 사람이 ‘사회주의-진보-기계-러시아-트랙터-위생-기계-진보’라는 연상을 하기 때문에, 사회주의에 적대감을 품는 사람과 기계문명에 적대감을 품는 사람이 대개 ‘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사회주의자치고 그런 현실을 이해하거나 아니면 그런 현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아는 사람은 아주 적다. (280쪽)
 
작금의 상황은 절박하다. 비록 더 나쁜 상황은 닥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재의 여건들은 지금의 경제 체제하에서는 개선될 여지가 없다. 그보다 더 급한 문제는 파시스트 세력이 유럽을 장악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회주의를 효과적으로 확산시키지 못한다면 파시즘을 타도할 가망은 없어진다. 사회주의야말로 파시즘이 상대해야 할 유일한 적수이기 때문이다. … 스스로를 선택된 민족으로 여기는 파시스트 국가들이 서로 치고받다 망하는 일은 전혀 벌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제 파시즘은 국제 운동이 되었으며, 그것은 파시스트 국가들이 약탈을 목적으로 단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은 확실히 의식하지 못할지는 몰라도 세계 체제를 모색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전체주의 국가라는 비전 대신에 전체주의 세계라는 비전이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289쪽)
(파시즘에 맞서기 위해) 우리가 함께 목표로 삼고 단결할 수 있는 이상은 사회주의의 바탕이 되는 이상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정의와 자유다. 이 이상은 이론 일변도의 독선과 파벌 다툼과 설익은 ‘진보주의’에 층층이 묻혀 버렸다. 사회주의자가 할 일은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290쪽) 오랫동안, 적어도 지난 10년 동안은 확실히, 제일 멋진 소리는 악마들이 다 냈다. 사회주의는 적어도 이 섬나라에서는 더 이상 혁명의 냄새를, 압제자 타도의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그보다는 괴팍스러움과 기계 숭배, 미련한 러시아 숭배의 냄새를 풍긴다. 그런 냄새를 한시 빨리 지우지 못한다면 파시즘이 승리할지도 모른다. (291쪽)
 
○ 우리가 해야 할 일
당이 내거는 그 어떤 가치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를 효과적인 방식으로 퍼뜨리는 일이다. (292쪽) 빈곤이 무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압제와 전쟁을 진정으로 혐오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잠재적으로 사회주의 편이다. 그러니 여기서 내가 할 일은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의 보다 지적인 적들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화해시킬 것이냐를 제안하는 것이다. 여기서 적이란 자본주의가 사악하다는 것을 알지만 사회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속이 메스꺼워지며 부르르 떠는 사람들이다. (293쪽)
마땅한 근거 없이 사회주의를 반대하게 만드는 편견부터 없애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회주의에는 반감을 느끼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자들에게는 반감을 품고 있다. 지금 밖으로 보여지는 사회주의가 대체로 매력이 없는 것은, 아무튼 밖에서 보기에 괴짜들이나 공론가들이나 말뿐인 볼셰비키 같은 이들의 노리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 것은 괴짜나 공론가 같은 사람들이 먼저 그런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다 인간적인 사람들이 운동에 많이 동참하면 그런 이들이 눈에 덜 띌 것이다. (296쪽)
→ 이런 상황은 확실히 지금 사회주의가 처한 상황과는 다르다. “사회주의에는 반감을 느끼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자들에게는 반감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자체에 대한 반감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현실 사회주의의 위기 때문일 수도 있고, 사회주의로서의 면모를 거의 보이지 않고 있는 북한이나 그 추종자들 때문일 수도 있다. 나아가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변혁의 전망을 사회주의가 보여주지 못한 측면도 있다. 다만, 오웰식의 사회주의 정의 차원에서 본다면, 즉 사회주의가 ‘난센스가 제거된 뒤의 정의와 자유’를 뜻한다고 하면, 이 정도의 사회주의 정의는 설득력이 있겠지만 그게 충분할지... 
 
사회주의자들이 본질을 희생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외관은 크게 희생해 마땅하다. 이를테면 사회주의 운동에 아직도 붙어다니는 괴팍스러움의 기미를 떨쳐버릴 수 있다면,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가능한’ 것은 훨씬 더 지적인 사회주의자들이 지지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어리석고 다분히 엉뚱한 방식으로 멀어지게 하는 일은 그만두는 것이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융통성 없이 구는 일이 너무 많은데, 그런 것들은 너무나 쉽게 근절할 수 있다. (299쪽)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셰익스피어가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는 것으로 셰익스피어가 당장 존경할 만한 인물이 되어버리는 정서가 민감한 사람들을 사회주의 운동에서 떼어놓는다. 거기다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구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끔찍한 전문용어도 문제다. 일반인들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니 ‘프롤레타리아의 연대’니 ‘수용자들에 대한 수용’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영감을 받는 게 아니라 정나미가 떨어질 뿐이다. 심지어 ‘동지’라는 말 한마디만 해도 사회주의 운동을 불신하는 데 적지만 한몫을 했다. 머뭇거리던 사람들 중에 용기를 내어 대중 집회에 갔다가 자의식 강한 사회주의자들이 의무적으로 서로를 ‘동지’라 부르는 것을 보고 실망하고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제일 가까운 맥줏집으로 들어가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가! 오랫동안 써봐도 부끄러움을 삼키지 않고서는 부를 수 없는 우스꽝스러운 호칭을 왜 붙여야만 한단 말인가? 평범한 문의자들을 사회주의자는 샌들을 신고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해 입에 거품을 무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가버리도록 만드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다. 사회주의 운동에도 인간미의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지 않는 한 게임은 끝이다. (300-01쪽)
→ 언론에 실린 서평을 보면 이 대목을 언급한 경우가 많다. 현재 상황에서도 어느 정도 타당한 면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는 대목도 있다.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구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끔찍한 전문용어”는 없다. 이를 대체할 용어가 없기에, 다른 용어로 표현할 경우 애초에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축소ㆍ왜곡될 수 있기에 불가피하게 사용하는 것일 뿐이다. ‘동지’라는 호칭이 대표적이다. ‘동지’라는 호칭은 아무데서나 사용되지 않으며, 더더구나 의무적이지도 않다.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뜻을 함께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부담스럽게 여길 필요는 없지 않을까.
 
분명히 사회주의 운동은 너무 늦기 전에 피착취 중산층을 포섭해야 한다. 특히 숫자가 워낙 많아서 단결할 줄만 알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무직 종사자들을 포섭해야 한다. 물론 사무원이나 출장 판매원 같은 부류만큼 우리가 혁명적인 견해를 기대하기 어려운 대상이 없다. 내 생각엔 사회주의 선전에 쓰이는 ‘프롤레타리아 상투어’ 때문이다. 계급투쟁을 상징화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라는다소 신화적인 인물이 설정됐는데, 이는 근육질이면서 기름때 절은 작업복 차림의 짓밟히는 인간상이며, 실크 모자에 모피코트 차림의 뚱뚱하고 사악한 ‘자본가’와 대조를 이룬다. … ‘과연’ 프롤레타리아가 어떤 사람인지부터 설명하는 게 순서일 것이다. 그러나 육체노동자를 그 자체로 이상화하는 사회주의의 경향 때문에, 그런 과제는 충분히 명확하게 해결된 바가 없다. (304쪽)
사회주의자들은 착취자와 피착취자를 가르는 선이 정확히 어디부터인지를 확실히 밝혀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본질을 고수하는 게 중요한데, 핵심은 수입이 적고 불안정한 모든 사람은 한 배를 탄 이들이며 한편이 되어 싸워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자본가’나 ‘프롤레타리아’란 말은 덜 쓰고 약탈자나 피약탈자란 말은 더 쓰면서 일을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단, 아무튼 프롤레타리아는 육체노동자뿐인 듯 대하는 잘못된 습성은 버려야 한다. 사무원, 엔지니어, 출장 판매원, ‘영락한’ 중산층, 마을 식품점 주인, 하급 공무원, 그 밖의 온갖 애매한 사람들에게 바로 그들 ‘자신’이 프롤레타리아란 사실을, 그리고 사회주의란 건설 인부나 농장인부 만큼이나 그들에게도 바람직한 체제라는 사실을 납득시켜야 한다. ‘h’ 발음이 되는 사람들과 안 되는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라는 생각을 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205쪽)
이해관계가 상반되는 계급끼리 협력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같은 한 협력은 언제나 가능하다. 연합해야 할 사람들은 사장에게 굽실거려야 하고 집세 낼 생각을 하면 몸서리쳐지는 모든 이들이다. … 은행원과 부두 노동자 사이에는 습관과 전통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며, 은행원의 우월감은 대단히 뿌리가 깊다. 나중에는 뿌리 뽑아야 하겠지만, 당장 그에게 그런 요구를 한다는 건 무리다. 그러니 거의 모든 사회주의 선전의 일부가 되어버린 다소 무의미하고 기계적인 부르주아 곯려먹기를 당분간 그만둔다면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306쪽) 세련된 매너와 세련된 태도에 대한(‘부르주아의 가치’에 대한) 집요하고 흔히 몹시 어리석은 조롱은 우리가 쓰는 도구가 곡괭이든 만년필이든, 빈곤은 빈곤이라는 핵심적인 사실로부터 주의를 빼앗아버린다. (307쪽)
우리가 효과적인 사회주의 정당을 출범시키지 못한다면, 이 책의 1부에서 기술한 여건을 바로 잡거나 영국을 파시즘에서 구할 가망은 없어진다. 그것은 진정으로 혁명적인 의도를 가진 정당이어야 할 것이고, 행동할 수 있을 만큼 수적으로도 충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정당은 우리가 일반인도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일 만한 목표를 제시할 때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다른 무엇보다 지능적인 선전이 필요하다. … 필요한 것은 두 가지 사실을 대중의 의식 속에 각인하는 것뿐이다. 하나는 모든 피착취 인민의 이해관계는 같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사회주의는 상식적인 양식과 조화를 이룬다는 점이다. 계급차라는 지독히 까다로운 문제에 대해, 현재로서 유일한 방법은 여유를 갖는 것이며 사람들을 괜히 겁줄 필요는 없다. 아울러 무엇보다 근육질의 노동자를 상징으로 내세우는 계급 타파 투쟁을 그만둬야 한다. (3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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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오웰이 쓴 노동자의 잿빛 삶 (경향, 김종목 기자, 2010-01-15-17: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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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작가 오웰, 영국 탄광촌서 현실에 눈뜨다 (한겨레, 이왕구기자, 2010/01/15 22:53:50)
위건 부두로 가는 길/조지 오웰 지음ㆍ이한중 옮김/한겨레출판 발행ㆍ328쪽ㆍ1만2,000원
 
오웰이 <위건 부두로 가는 길>(1937)을 쓴 1930년대 중반 영국은 불황의 깊은 그늘이 드리워졌던 시기. 노동계급은 실업난에 허덕이고 있었고 중산층 역시 빈곤계층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유럽을 휩쓸던 파시즘의 물결은 순식간에 이들을 집어삼킬 태세였다. 오웰은 이 책에서 이런 상황을 우려하며 위기의 본질을 직시하고 진보적 대안을 제시한다. '정치작가'를 선언한 오웰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책이지만 한국에서는 1980년대초 번역됐다가 절판됐었는데, 올해 오웰 60주기를 맞아 다시 번역돼 선보였다.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오웰이 위건, 리버풀, 셰필드 등 영국 북부의 탄광 지역을 다니며 탄광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기록한 르포가 1부다. 탄광노동자들과 함께 두 달 동안 싸구려 여인숙에 머물며 식량난, 주택난 등에 시달리는 그들의 비참한 삶을 다룬 1부는 1930년대 영국사 연구자들이 자주 인용할 정도로 묘사가 생생하다. 지하 수백 미터의 갱도에서 몇시간 동안 허리를 구부린 채 채탄 작업을 하는 탄광노동자들의 노역을 직접 체험하는 장면, 벌레가 우글거리며 바닥이 썩고 벽에 금이 가는 집이지만 그곳에서나마 쫓겨날까봐 전전긍긍하는 노동자 가족의 현실 등을 오웰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포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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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를 위한 사회주의자 비판 (한겨레, 허미경 기자, 2010-01-15 오후 09:24:32)
“독선과 파벌·설익은 진보에 사회주의 이상 묻혀”
조지 오웰이 1930년대 진보세력에 날린 직격탄
‘동물농장’ ‘1984’를 반공우화로 읽는 건 ‘오독’ 암시

 
조지 오웰(1903~1950). 그는 현대문학의 고전 <동물농장>(1945)과 <1984년>(1949)을 쓴 소설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무엇보다 그는 사회주의 정치평론가였고 직접 혁명전선에 나선 행동가다. 한데 그의 대표작 <동물농장>과 <1984년>은 일종의 반공 우화 소설로, 사회주의의 ‘적자’로 군림했던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흔히 소개되고 그렇게 읽힌다. 아이러니다. 아니, 반토막 진실이다. 그가 1937년에 발표한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그런 독해가 상당 부분 오독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1936년 초 오웰이 좌익 출판단체로부터 영국 북부 탄광지대의 대량 실업 문제에 관한 르포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쓴 글이다. 그는 편집자 빅터 골란츠의 부탁을 받고 두 달에 걸쳐 위건과 리버풀, 반즐리 등 탄광지대를 집중 취재했다. 그곳에서 그는 가난한 노동자와 실업자들이 묵는 하숙집과 탄광노동자의 가정에 머물며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하고, 집다운 집에서 살 권리도 박탈당한 노동계급의 삶을 체험했다. <위건 부두…>는 당시 대량 보급되며 반향을 일으켰는데, 오웰은 스스로 <위건 부두…>를 통해 전투적이며 정치적인 작가로 거듭났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훗날 <나는 왜 쓰는가>라는 글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1936년부터 내가 쓴 진지한 작품들은 그 어느 한 줄이건 전체주의에 맞서기 위해,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해 쓴 것들이다.”
 
‘민주적 사회주의와 그 적들’을 논한 2부는 에세이 형식으로 쓴 정치평론이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 논쟁적인 것은 바로 이 글이다. 1930년대 영국 좌파 사회주의 리더들을 직접 겨냥해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청탁한 편집자 빅터 골란츠는 오웰이 파시즘과 싸우러 스페인에 간 틈을 타서 오웰의 논지에 대해 반론하는 서문을 넣고 출판했다. 골란츠는 그 뒤 오웰의 스페인 내전 참전기 <카탈루냐 찬가>(1938)에 대한 출판도 거부한다.
 
1936년은 대공황이 세계를 휩쓴 때이자 유럽에서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세력을 키워가던 때다. 오웰의 말을 따르면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고, 정직하게 살아가기가 불가능한 세상”이며 “사회주의가 후퇴”하던 때다. 오웰은 ‘민주적 사회주의와 그 적들’에서 당시 영국의 주류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직격탄을 날린다. 오웰은 사회주의자들이 거품을 물고 부르주아 규탄에만 열을 올림으로써 사회주의엔 오직 증오만이 있는 것처럼 노동계급과 대중들에게 비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 이론가들이 물질적인 유토피아를 사회주의의 목표로 선전하고 ‘미련한’ 러시아(스탈린) 숭배와 기계 숭배의 냄새를 풍김으로써 사회주의의 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평범하고 수수한 사람들로 하여금 파시즘으로 돌아서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무직직원 등 중산층을 사회주의로 끌어들여야 한다. 이것이 오웰의 주요 논지 중 하나다. 오웰의 사회주의자 비판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놓고 그 안에서 “사회주의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악마의 대변인’으로 나섰다고까지 오웰은 말한다.
 
그렇다면 오웰이 말하는 ‘민주적 사회주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일단 ‘반파시즘’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체제의 산업사회와 그 자본주의가 빚어내는 파시즘을 아울러 ‘전체주의’라고 이해한다. 오웰은 민주적 사회주의의 요체를 ‘정의와 자유’, ‘압제에 대한 반대’라고 말한다. 그 사회주의의 구체적 상을 찾으려 하면 일순 모호해지는 감이 있다. 오웰이 보기에 진정한 사회주의자란 압제가 타도되는 꼴을 보기를 적극적으로 원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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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의 자랑 조지 오웰의 르포 (한겨레21 2010.01.22 제795호, 정인환 기자)
[출판] 완벽한 객관적 묘사로 그려낸 1930년대 영국 북부 탄광 노동자의 삶 <위건 부두로 가는 길>
  
“나는 상류 중산층 가운데 하급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상류 중산층은 1880년대와 1890년대에 처음 생겨나…, 빅토리아 시대의 번영기가 퇴조하면서 한 무더기의 잔해만 남았다고 할 수 있다. …이론상으론 정장 입는 법과 정찬 주문하는 법을 알았지만, 실제로는 번듯한 양복점이나 번듯한 음식점에 갈 형편이 도무지 아니었다.”
 
‘에릭 아서 블레어’가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한중 옮김·한겨레출판 펴냄)에서 쓴 자기소개의 일부다. 명문 이튼스쿨을 졸업한 뒤 제국의 첨병이 돼 버마로 갔고, 5년여 ‘주구’ 노릇이 역겨워지자 부랑자로 떠돌았다.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를 위해 싸웠고,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의 광기에 맞서 펜을 벼렸다. 그새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1933년)을 시작으로 <카탈로니아 찬가>(1938년), <동물농장>(1945년), <1984>(1949년)를 잇따라 남긴 그는 1950년 1월21일 마흔여섯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시대’와 불화하며, 폭풍처럼 몰아쳤다. 작자 조지 오웰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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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위건 부두로 가는 길’ (내일, 김성배 기자, 2010-01-22 오후 12:03:46)
1936년, 조지 오웰 글을 바꾸다
영국 북부 탄광지대 체험 계기 사회주의자로 전환, ‘위건 부두…’에 담아

 
조지 오웰의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다. 사회주의자 조지 오웰은 1903년 영국의 식민지 인도에서 태어났다. 그 스스로가 표현하듯 ‘하급 상류 중산층’에 속한 그는 영국 사립 최고 명문인 이튼 학교를 마치고 명문 대학이 아닌 미얀마로 향한다. 식민 통치기구인 ‘인도 제국 경찰’에서 일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 때문에 영국으로 돌아와 런던과 파리에서 자발적인 부랑자 생활을 하고, 이 체험을 바탕으로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1933)을 펴내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나선다.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도 이때부터 쓰기 시작한다.
 
작가로서 인정받은 오웰은 1936년 한 진보단체로부터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들의 실상을 취재해 글을 써달라는 제의를 받고, 두 달에 걸쳐 위건, 리버풀, 셰필드, 반즐리 등 랭커셔와 요크셔 지방 일대의 탄광 지대에서 광부의 집이나 노동자들이 묵는 싸구려 하숙집에 머물며 면밀한 조사를 한다. 바로 이 취재의 결과물이 ‘위건 부두로 가는 길’(1937)이다. 같은 해 일어난 스페인 내전을 주시하던 그는 이 책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겨주고 ‘파시즘에 맞서 싸우러’ 스페인으로 떠났고, 이후 이 전쟁 체험을 ‘카탈로니아 찬가’(1938)를 통해 전한다. 영국 북부 탄광 지대와 스페인 내전에서의 경험은 조지 오웰의 지향점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고 이후 ‘동물농장’(1945)과 ‘1984‘(1949)를 구상하는 밑거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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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똥 덩어리들아, 내가 이래도 우익이냐!" (프레시안, 장정일 소설가, 2011-04-02 오전 10:45:52)
[장정일의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오웰이 어떤 현장을 즐겨 찾았고 그 현장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게 무엇이었는지를 아는 것은 오웰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웰의 약력을 잠시 살펴봐야 한다. 그의 외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대영제국의 인도 식민지를 관리하는 식민 관료였고, 그는 아버지의 근무지인 인도에서 태어났다. 이후 교육열이 높은 어머니를 따라 영국으로 귀국한 그는 왕실 장학생으로 상류층 명문인 이튼 칼리지에 다녔으나 졸업 성적이 좋지 않아 대학 진학에는 실패했다. 대신 인도 제국경찰에 지원하여, 5년간 버마(미얀마)에서 경찰 간부 생활을 한다. 그때 나이가 19~24세.
오웰의 식민지 경찰은 물론이고 식민주의 전반에 대한 염증은 '코끼리를 쏘다'라는 에세이에 뛰어나게 기술되어 있는데, 그는 제국주의의 충견 노릇을 하는 자신의 양심을 무마하지 못하고 결국 사표를 낸다. 그러고 나서 속죄의 의미로 3년간 부랑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 경험이 자전 소설 또는 수기로도 분류되는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신창용 옮김, 삼우반 펴냄)로 정리되었으니, 그것이 오웰의 첫 책이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의 한 귀퉁이에는 그가 대우 좋은 식민지 경찰 간부직을 팽개친 심경이 꽤 자세하게 피력되어 있다.
나는 5년 동안 압제의 일원으로 복무했고, 그만큼 양심의 가책이 컸다. 잊히지 않는 숱한 얼굴들 때문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른다. (…) 내가 느낀 죄책감은 너무 엄청나서 속죄를 하지 않고서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과장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일을 5년 동안이나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하게 느낄 것이다. 번민 끝에 결국 얻은 결론은 모든 피압제자는 언제나 옳으며 모든 압제자는 언제나 그르다는 단순한 이론이다. 잘못된 이론일지 모르나 압제자가 되어본 사람으로 얻을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나는 내 자신이 단순히 제국주의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모든 형태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꼈다. (200~201쪽)
제국주의의 하수인 시절을 속죄하고자 3년간의 부랑자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버마가 아닌 자기 나라 안에, 버마인과 같은 '내부 식민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내 마음이 영국의 노동자 계급에게로 향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내가 노동 계급을 제대로 인식하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무엇보다 그들에게서 유사성을 발견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의에 당하는 상징적 희생자였으며 버마에서 버마인들이 하는 역할을 영국에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버마에서는 문제가 비교적 단순했다. 백인이 위에 있고 유색인은 밑에 있기 때문에, 당연히 유색인에게 동정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영국에 와보니 압제와 착취를 찾아보기 위해 버마까지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영국에, 바로 자기 발밑에, 다르긴 해도 어느 동양인 못지않게 비참한 생활을 하는 밑바닥 노동 계급이 있었던 것이다. (201쪽)
오웰이 있고자 한 현장은 피압제자·노동 계급·밑바닥이었다. 그런데 이런 현장에 대한 친화력은 그냥 생긴 게 아니다. 오웰 스스로가 실토하고 있는 바, 부랑 생활을 통해 "'하류 가운데 최하류' 사이에, 서구 세계의 밑바닥"(206쪽)에 있게 되기 이전에 그는 "노동 계급의 처지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고, "실업에 대한 통계를 본 적은 있었으나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깊은 반성과 속죄의 부랑 생활을 하면서 최하층 계급과 뒹굴기 이전에 그런 것들은 "내 경험 밖에 있는 일"이었다(202쪽).
오웰이 속한 계급은 "상류 중산층 가운데 하급"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밑바닥"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번도 자신이 영국 계급 체계 속에서 하위에 속한다는 것을 바로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까닭은 계급 체계를 "돈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이상 164쪽)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계급 차별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만으로는 아무 진전이 있을 수 없다. (…) 직시해야 할 사실은, 계급 차별을 철폐한다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는 점이다. 여기 중산층의 전형적인 일원인 내가 있다. 내가 계급 차별을 없애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거의 모든 것은 계급 차별의 산물이다. 나의 모든 관념은(선악에 대한, 유쾌와 불쾌에 대한, 경박과 경건에 대한, 미추에 대한) 어쩔 수 없이 '중산층'의 관념이다. 책과 옷과 음식에 대한 나의 취향, 명예에 대한 나의 감각, 나의 염치, 나의 식사예절, 나의 어투, 나의 억양, 심지어 나의 독특한 몸동작도 전부 특정한 훈육의 산물이며, 사회 위계의 윗부분에 있는 특정한 지위의 산물이다. 그런 사실을 이해할 때, 나는 프롤레타리아의 등을 두드려주며 그가 나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고 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 (217쪽)
사회적 계층과 경제적 계층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중산층 가운데 상당수가 서서히 프롤레타리아로 변해가고 있"(301쪽)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을 프롤레타리아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는 노동 계급에 속하지만 내 자신을 부르주아의 일원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여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303쪽)이다. 뿐만 아니라, "중산층인 사람이 몰락하여 최악의 빈곤층으로 떨어진다 해도 노동 계급에 대한 매몰찬 감정은 그대로 남아"있으며, 이런 사람들은 끝내 자신이 노동 계층이라는 것을 수용하기보다 "쉽사리 파시스트 정당에 동조"(303~304쪽)하게 된다.
이 책은 1937년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고, 연이어 벌어질 제2차 세계 대전을 목전에 두고 출간됐다. 하지만 중산층의 계급적 위선은 우리 시대에도 그대로 들어맞으며, 경제적 양극화의 밑변으로 굴러 떨어지면서 정치적으로는 도리어 보수화되는 중산층의 역설을 꿰뚫어 보여 준다.
사회주의 진영에서 논란이 되었던 2부에서 오웰은 "계급이라는 지독히 까다로운 문제"(163쪽)를 규명해 보겠다면서, 사회주의자들이 육체 노동을 이상시 하는 경향 탓에 실제로는 광부나 부두 노동자보다 더 열악한 수많은 사무원과 점원들이 자신을 프롤레타리아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아무튼 프롤레타리아는 육체 노동자뿐인 듯 대하는 잘못된 습성은 버려야 한다. 사무원, 엔지니어, 출장 판매원, '영락한' 중산층, 마을 식품점 주인, 하급 공무원, 그 밖의 온갖 애 매한 사람들에게 바로 그들 '자신'이 프롤레타리아란 사실을, 그리고 사회주의란 건설 인 부나 농장 인부만큼이나 그들에게도 바람직한 체제라는 사실을 납득시켜야 한다. (305쪽)
또한 이 책의 2부는 프롤레타리아의 친구인 척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노동 계급을 경멸하는 지식인 사회주의자들의 이중적 행태를 고발하고 있다. 이들은 일상어와 동떨어진 전문 용어나 정·반·합이라는 트릭 그리고 정통(러시아)을 내세우면서, 토요일 밤 아무 선술집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노동자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지식인 사회주의자들은 "삶에 대한 상류층적, 중산층적 태도를 완전히 버리"거나 "나를 철저히 변화시"(217쪽)키기보다 "책으로 단련된 사회주의자"(242쪽)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소위 우리나라의 '강단' 사회주의자들은 이 대목이 뜨끔할 것이다.
폴 존슨의 기념비적인 쓰레기 <지식인들>(한언 펴냄)과 박홍규의 <조지 오웰>(이학사 펴냄)에 나오는 한 구절은 조지 오웰의 복잡성에 대해 한 목소리를 낸다.
1950년, 오웰이 세상을 떠날 당시 그의 궁극적인 정치적 입장이 불분명해서 막연히 좌익 지식인으로 간주되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우익과 좌익은 오웰이 충성을 맹세한 이데올로기는 자기네 진영이라고 서로 우겼고 지금도 이 같은 다툼이 계속되고 있다. (<지식인들>(하권), 254~255쪽)
오웰은 복잡하다. 그 복잡성은 그에 대한 다양한 신자를 낳는다. 우익도 있고 좌익도 있다. 노동자도 있고 지식인도 있다. 그러나 오웰은 어느 편도 아니었다. 우익은 물론 좌익도 아니었다. (<조지 오웰>, 54쪽)
"빈곤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압제와 전쟁을 진정으로 혐오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잠재적으로 사회주의 편이다"(293쪽)고 말하는 오웰의 사상적 좌표를 분석하는 것보다 불필요한 시간 낭비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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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3 22:30 2010/05/13 22:30

댓글1 Comments (+add yours?)

  1. 박군 2010/05/14 18:25

    저도 이 기사 읽고 이 책보고싶다는 생각'만'하고 실천은 못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새벽길님 덕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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