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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만이 복잡하지 않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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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리앗 전사 이갑용의 노동운동 이야기
『길은 복잡하지 않다』
이갑용 지음 | 철수와 영희 | 2009
 
1. 원래 이 책을 사거나 볼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헌책방 순회중에 이 책을 발견하고 샀는데, 헌책방에 이 책이 나온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책을 잡은지 이틀만에 독파했다. 책상에 앉아서 본 것은 아니고, 출퇴근하면서 읽었는데도 금방 진도를 뺄 수 있었다. 그 만큼 책에 대한 몰입도가 강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쉽게 읽혔고, 현재의 내 입장에서는 뭔가 깊게 되새길만한 대목이 많지 않았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해 끄적이는 까닭은 이미 이 책을 읽었던 이들과는 다른 시각에서 볼 만한 부분이 있고, 이를 기억하기 위함이다.
 
2. 이 책에 언급된 이들 중에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의 평조합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이들이 눈에 익은 사람들이다. 그 만큼 우리의 삶에서 울산을 비롯한 전국의 노조 활동가들이, 노동계급의 지도자들이 가까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은 노동조합의 활동가들이 과거만큼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뭘까. 그들이 나와 같은 정치조직에 몸담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런저런 활동을 하면서 그들을 접하게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과거만큼 노동조합운동이 위력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 만큼 나나 그들이 나이를 먹었다는 게 주된 이유일 터이다. 아무튼 아쉽다. 물론 그렇다고 일부러 ‘옹립’하는 식으로 만들어낼 필요는 없으리라.
 
3. 여기서부터는 항상 그렇듯이 발췌하면서 생각해보기.

 

○ 민주화란 별것이 아니었다.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노동자가 인간다운 대우를 받고, 임금이 올라 생활 형편이 나아지고, 그 지긋지긋한 잔업철야를 벗어나는 것, 그것이 바로 민주화였다. 이 변화를 지속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민주화란 여의도에서나 따지는 절차로 축소되었고, ‘민주 대 반민주’ 구도는 노동자나 서민을 더 이상 껴안을 수 없었다. (16쪽)
이 책은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조직도 없는, 그렇지만 싸움의 근육이 울퉁불퉁 살아 있고 투쟁으로 노동운동을 바로 세우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찬 한 노동운동가가 지금 어디에선가 하늘로 오르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눈물로 쓴 기록이다. 이 책을 덮으며 나는 역사에서 길은 단 한 번도 복잡한 적이 없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길은 복잡하지 않았다. 우리의 마음이 복잡했을 뿐이다. (17쪽)
→ 한홍구 교수는 “길은 복잡하지 않았다, 우리의 마음이 복잡했을 뿐이다”라는 발문을 썼다. 그가 이런 책에 발문을 쓴 것이 의외였는데, 촛불시위 때부터 함께 얘기를 나눈 것이 계기였단다. 한홍구 교수는 자신의 친구 유시민을 옹호하던 것에서 정치적 입장이 변한 것일까. 아마 이에 대해 얘기하라고 하면 한홍구 교수는 여전히 복잡하지 않을까.
우리의 마음을 비롯하여 다른 대부분의 것들은 복잡하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 또한 당연히 복잡하고 섬세하며 세련된 것이어야 한다. 단지 길만 복잡하지 않을 뿐이다. 대다수의 민중들은 이런 복잡함 속에서 하나하나씩 나름의 결단을 내리며 살아가고 있음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 회사는 아예 이발사를 고용해서 곳곳에 배치했다. 일하는 시간을 쓸까봐 휴식시간 10분 동안이나 점심시간에 깎으라고 했다. (32쪽)
→ 80년대의 한국기업들은 어디서나 시간관리ㆍ동작관리를 통해 작업의 능률성을 도모했던 테일러시스템(과학적 관리)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위의 문장은 현대중공업 또한 예외가 아니었음을 잘 보여준다. 
 
○ 협상의 기술 (64-68쪽)
첫째, 기죽으면 안 된다. 상대의 기를 꺾어야 한다.
둘째, 교섭단 안에 반드시 ‘무대뽀’ 역할을 정해야 한다.
셋째, 노동자들의 옷을 입고 머리띠를 꼭 해야 한다.
넷째, 상대방에게 유리한 발언은 금지해야 한다.
다섯째, 야간 교섭을 금지해야 한다.
여섯째, 공개의 원칙을 지키고 애초 협상단을 고수해야 한다.
일곱째, 개별 행동을 금지해야 한다.
여덟째, 교섭위원 개인마다 철저하게 준비를 시켜야 한다.
아홉째, 상대방의 발언을 계속 공개해야 한다.
열 번째, 조합원이라는 백을 이용하라.
열한 번째, 교섭을 일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열두 번째, 이면 합의서를 만들어선 안 된다.
→ 책의 여기저기에서 지은이 자신이 노동운동 기간에 배우고 실천했던 여러 가지 팁(Tip)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물론 이러한 팁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활동가가 자신의 정리된 활동을 공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물론 그 내용이 상당히 당파적이라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위의 협상의 기술은 단지 단체교섭 시에만 제한적으로 적용된다.
 
○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이원건은 나중에 현대중공업 노조 6대 노조위원장이 되어 조합원을 배신하고 직권조인을 한다. 현대중공업 노조 위원장 자격으로 노태우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노동자들의 억울한 현실을 말하기는커녕 교도소에 담배 좀 넣어주라는 기가 막힌 발언으로 세간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뉴라이트 간부로, 이명박 대통령의 선거를 도왔고 한나라당 활동을 하는 현대중공업 노조 오욕의 인물 가운데 하나다. (74-75쪽)
→ 이원건이라는 이름을 오랜만에 들어본다. 그 콧수염 기른 얼굴을 뉴라이트 노동운동하는 이들 속에서 발견해서 안타까웠는데... 원래 그랬던 사람인가?
 
○ 여전히 ‘회사가 없으면 노동조합도 없다, 그러니 회사를 살려야 모두가 산다’며 노동조합의 목적과 존재 이유를 왜곡한다. 그러나 우리는 1987년 이전,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아무런 장치도 없었을 때와 노동조합이 생긴 이후의 차이를 너무도 분명하게 경험했다. (90쪽)
→ 노동조합을 경험해본 사람은 그 필요성을 누구나 알고 있을 듯하다. 아마 그러하기에 남한의 지배세력들은 어떻게든 노동조합을 정치의 중심에서 배제하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노동조합은 우리에게 희망이 되고 있는가. 노동조합의 목적과 존재 이유를 저들은 잘 알고 있는데, 우리는 이를 간과하고 있지는 않는지...
 
○ 투쟁을 통해 간부도 길러지고, 지도자를 보는 대중의 눈도 단련된다. 투쟁 없이 말만 하는 지도부는 임원들끼리 자리다툼만 하게 된다. 그래서 파업은 노동자의 학교다. 나는 현장의 조합원들을 의심해본 적이 없다. 현장의 노동자는 정직하고 강하다. 그리고 정확하다. (111쪽)
회사의 돈과 권력에 포섭된 대의원을 상대할 집행부의 무기는, 위원장의 지략이나 지도력이 아니다. 그저 조합원을 믿고 조합원들이 대의원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단, 그런 믿음을 주려면 집행부가 평상시에도 회사와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140쪽)
→ 운동을 한다면 대중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현장의 조합원들을 의심해서는 안되는 것일까. 항상 대중이 강하고 정확한 것은 아니다.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 따져 보면 불과 5년 만에 10년 동안 고정되어 있던 성과금이 배로 오르고, 임금도 두 배 이상, 거기에 각종 단체협약의 인상분까지 합하면 회사가 지급해야 할 임금이 1987년보다 10배 정도는 늘어났다. 그뿐인가. 해마다 파업을 했으니 일한 날은 더 적고, 경쟁 붙여 시켰던 공짜 일까지 제하면 정말 회사가 망해야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해마다 흑자란다. 답은 그거였다. 그동안 우리가 그만큼 착취당했다는 것, 회사가 늘 피우던 엄살은 거짓이었다는 것. 우리는 정말 바보였다는 것. (116쪽)
1987년 파업 전에는 시급 670원, 한달 16만 800원이 기본급이다. 그런데 협상이 타결되고 나서 시급 764원, 한 달 18만 3360원이 기본급이 되었다. 입사 후 4년 동안 시급 40원이 올랐는데 파업 후에는 무려 124원이 오른 것이다. (298쪽)
파업 후 임금이 적게는 3년치에서 많게는 10년치 수준까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계속 오르니 노동자들이 오히려 회사를 걱정하게 된다. 현대중공업 조합원들도 이러다 회사가 망하는 게 아닌가 공공연하게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 그런데 회사는 오히려 흑자를 발표한다. 노동자들은 그제야 자본, 특히 재벌이 어떻게 자신의 부를 축적해왔는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노동자들의 임금으로 마땅히 지급되었어야 할 돈이 모두 재벌의 주머니로 들어갔던 것이다. 지본은 자신을 희생해서 우리의 임금을 지불한 게 아니라 엄청나게 착취해서 쌓아두었던 초과 이윤 가운데 자신들이 위험하지 않을 만큼만, 조금 내놓았던 것뿐이다. 그것도 억지로 말이다. (299쪽)
→ 해마다 파업이 있을 때마다 파업에 따른 손실이 얼마나 큰지가 언론에 대서특필되는데, 위의 대목은 이것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보여준다.
 
○ 1994년 미국 월드컵이 열렸을 때 한국 팀 경기시간에 맞춰 파업시간을 정했다. 파업 참가율이 엄청 높아진다. 우습게 생각하는 동지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새벽에 축구를 보고 다음날 피곤해서 움직이기 싫은데 노조가 오전 파업을 해주니 얼마나 고마운가. 파업에 참가하지 않고 축구만 봤다면 찜찜했겠지만, 축구를 보면서도 파업에 참여할 수 있으니 조합원도 기분이 좋은 것이다. 그때 합병되어 처음으로 참여한 중전기 조합원들이 이런 파업을 신기해하면서 열심히 참여해 핵심대오로 자리 잡기도 했다. 날마다 전면 파업을 벌이는 것은 조합원의 피로도가 높고 집행부도 힘들다. 우리는 정상 근무, 부문별 파업, 시간대별 파업을 적절히 활용했다. (142쪽)
→ 축구를 보면서도 파업에 참여할 수 있는 것, 파업의 효과를 높일 수 있는 방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러한 전술이 조합원들의 의식을 높였을까. 파업이 노동자의 학교라면 학교답게 진행되어야 한다. 파업은 지루하지 않게 유지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파업하는 목적과 본질마저 몰각시켜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 울산연합 세력은 전노회의 결정을 뒤엎을 수 없는 상황에서 1998년 지방 선거에서 자신들을 도울 후보로 윤재건의 전노회 탈퇴를 설득했다. 이들은 어느 후보가 민주노조를 지키고 현장의 투쟁을 잘할 것인지보다, 누가 실제 당선되어 자기들의 선거를 도울 것인가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161쪽)
유세장의 앞자리에 아주머니들이 무리 지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 조합원도 아니고 일반시민도 아닌 그 여성들은 정치판의 유세장에 온 듯 “정갑득”을 연호했다. 거기까진 그나마 괜찮았는데, 우리가 유세할 때 마구 야유를 보내는 것이다. … (왜 여기 와서 이런 짓을 하느냐고 하자) 그 여성들은 “남편이 조합원이다”라며 맞섰다. 알고 보니 이들은 정갑득 후보를 지원하는 울산연합의 조직원들이었다. 이들은 1997년 대선을 기점으로 정치운동에 뛰어들면서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을 주창한 ‘국민파’와 함께 노동운동의 범 우파로 자리 잡게 된다. 하지만 나는 노동운동, 더구나 간선제로 치러지는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여기에 올 정도라면 지역에서 운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일 텐데, 이런 자리에 동원되어 바깥 정치판에서나 하는 짓을 와서 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고 앞자리에서 노골적인 야유를 보냈다. (186-87쪽)
→ 현대중공업 노조 임원선거,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를 통해 이갑용은 전국연합 세력의 종파성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그리 적당하지 않아 보인다. 위에서 언급된 ‘바깥 정치판’은 아마도 제도정치를 의미할 텐데, 이를 통해 은연 중에 정치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확산시킨다. 또한 간선제 선거에서 선거권이 없는 사람들은 참여해서 환호할 자유나 권리도 없는가. 소심한 성격의 나는 유세장이라는 곳에서 노골적인 환호나 야유를 보낸 적은 없지만, 그런 행태를 보이는 이들을 비난하고 싶진 않다. 유세장이 끼리끼리 밀어주는 장이 아니고 견해와 입장이 다른 이들이 경쟁하는 장이라면 환호와 야유는 자연스런 것이다. 내가 한나라당이나 엔엘 성향의 인사의 발언에 야유를 보낼 수 있듯이 그들도 내 발언에 대해 야유를 보낼 수 있다. 아마 발언하는 자신은 들어보지도 않고 야유한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대략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뻔히 안다는 것, 선수끼리의 상식 아닌가. 그 아주머니들이 동원되었다면 비판받아야 하지만, 이것 외에는 과도한 지적이라고 본다.
 
○ 1997년 8월, 민주노총과 전국연합이 공동으로 ‘국민승리21’이라는 선거조직을 결성하고 대선 후보 추진을 준비한다. 이들이 내건 슬로건은 ‘일어나라 코리아!’와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이었다. 특히 ‘일어나라 코리아’는 노동자 후보로도, 민주 진영 후보로도 그 정체성을 찾을 수 없는 이상한 애국주의 구호였기 때문에 큰 비판을 받았다. (169쪽)
→ 아마 이 때 제대로 비판되고 평가되었다면 민주노동당이 분당까지 가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 그땐 몰랐었다. 내가 위원장에 출마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구조였다는 것을. 출마하고 나서야 나는 기성 정치판 못지않게 운동 판에 존재하는 학연, 지연, 정파, 서울 중심주의 등에 의해 굴러가는 복잡한 조직의 구조를 알게 됐다. 서울에 운동의 뿌리도 없고, 지하조직에서 학습을 시켜준 학생운동 출신 선배도 없고, 내 정책을 만들어줄 연구소니 뭐니 하는 연줄 하나 없이, 아는 사람이라곤 해고자 몇 명이 전부고, 경험이라곤 현대중공업 투쟁이 전부인 나는 전혀 위원장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 서울내기들의 눈에는 그저 무식한 울산 촌놈이었던 것이다. 민주노총의 위원장이라는 게 알 만한 사람들이 모여 작당하고 후보군을 뽑아 품평하고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후보를 섭외해서 ‘세워지는’ 것임을, 보이지 않는 손은 운동 판에도 있음을 미처 몰랐다. … 좌파로 분류되었던 이들에게 출마 의도를 말하니 한결같이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냥 부위원장에 출마하라”고 말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그 ‘때’는 누가 결정하는 거지? 정파에 소속된 적도 없고, 어떤 조직에 몸담아본 적도 없는 나는 그런 분위기가 이해되지 않았고 오히려 수상하기만 했다. (175쪽)
노동운동의 중심이라는 울산에서 큰 투쟁을 해본 사람들이 민주노총을 맡아야 한다면 당연히 지역의 동지들이 논의하고 조합원들에게 알리고 추천을 받는 것이 순서일 텐데, 우리는 같은 지역에서 함께 활동하면서도 서울 중심 정파들의 작업에 휘말리고 있었다. (176쪽)
→ 이갑용의 이 지적에는 어느 정도 수긍할 만하다. 하지만 이는 일면만을 본 것이 아닐까. 골리앗의 외로운 늑대가 명예로운 칭호이긴 하지만, 혼자서는 세상을, 운동판을 바꿀 수 없다. 복잡하지 않은 길을 바꾸고자 한다면,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을 모아서 조직을 만들고, 함께 바꿀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0년이 넘게 노동운동을 해왔으면서도 조직, 정파의 의미와 중요성을 경시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독불장군이라는 그의 별칭은 양면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서울 중심 정파라는 것도 어폐가 있다. 수도권 중심주의는 운동은 물론 모든 사안에서 지양되어야 하지만, 서울을 중심으로 정파운동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풍토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노동운동의 핵심이 되는 현장이 서울 밖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굴러왔다.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갑용은 “나는 노동운동, 특히 서울의 노동운동 판이 참 더럽다는 걸 알아가기 시작했다. 서울의 이런 세력들이 상층 권력을 장악하려 술수들을 쓰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조합원들을 가지고 노는구나. 노동운동 판도 힘 있는 사람들이 좌지우지한다는 걸 깨달은 순간 배신감도 들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179쪽)고 토로하는데, 이런 현실이 달라지지 않았음을 그도 잘 알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그가 할 일은 무엇일까. 민주노총 위원장까지 지낸 그가 단지 노동운동의 이면을 드러내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는 걸까. 책을 발간하는 것 이상으로 그에게 무언가를 기대한다면 과한 것일까.

  
○ 집회를 1주일 정도 남겨 두고 경찰에서 종로 거리 2차선을 주겠다는 통보가 왔다. 며칠 후 경찰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4차선을 줄 테니 받으라는 거였다. 나는 다시 거부했다. 신고하고 집회하는 것도 열받는 일인데 사실상 허가받아 하는 꼴이니 내가 받고 말고 할 이유가 없었다. … 1년 전만 해도 수십만 명의 노동자가 길거리로 나와 노동법ㆍ안기부법 날치기 반대 투쟁을 했는데, 대통령 선거에 휩쓸리면서 정치판으로 자리 찾아 떠난 자들은 그렇다 치고, 남은 사람들마저 조직에서 자리보전 놀음이나 하고 앉았으니, 투쟁은커녕 이들에게는 민주노총이 싸우는 조직이라는 의식이 없었다. 생긴 지 3년밖에 안 된 민주노총은 벌써 이렇게 관료들로 인해 현장 조합원들과 멀어지고 있었다. … 중앙 지도부가 정당한 싸움에 ‘불법’이란 죄를 덮어쓰고 감옥에 가는 것이 옳지, 합법을 고수하기 위해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를 회피하는 것 자체가 현장 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192-93쪽)
→ 이갑용의 태도가 옳고 원칙적이긴 한데, 결정하기 참 어려운 문제다. 1인 시위조차 온갖 꼬투리를 잡아서 못하게 하고, 사람이 많은 시내에서의 집회는 아예 허가되지 않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역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역량이고 현장동력이다. 이것이 받쳐줄 때 ‘불법’도 감수할 가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개값도 받지 못하는 짓일 뿐이다.
 
○ 노동자들이 거리를 점거하고 시위하는 것을 두고 시민의식이 없다, 폭력 행위다라고 비판하는 데 이는 오랫동안 권력을 가진 자들이 퍼뜨려온 논리에 우리 자신마저 길들어 있기 때문이다. 파업이란 노동자들이 가진 마지막 무기이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통해 맞서야 할 상대방-권력이든 자본이든-에게 어떤 타격도 입힐 수 없다면 이는 무기라고 할 수가 없다. (194쪽)
 
○ 재정위 사건은 밝혀진 것만 수억 원인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민주노총이 총체적인 비리 집단으로 불려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조직의 돈 수억 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했다. 대의원 대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연맹별로 대의원들에게 입막음해둔 탓에 이 문제는 조용히 넘어갔다. 조직의 돈을 개인이 마음대로 주식에 투기하고 사업에 손을 대서 날렸는데도 조직을 위한 충적으로 이해해달라고 한다. (211쪽)
결국, 내 잘못이다. 아무리 조직도 없고 혼자인 위원장이었어도 그때 그냥 관련자들을 검찰에 고발했어야 했다. 원칙을 지키고 조직 보위론자들에게 욕을 얻어먹는 게 차라리 낫다. … 원칙을 지키려는 노력보다 원칙을 지킨 결과적인 행위가 조직을 바꾸고, 조직을 지키는 일임을 뒤에서야 더 뼈저리게 깨달았다. (213쪽)
민주노총의 중앙 권력을 차지한 정파들은 문제가 생기면 어떤 형태로든 지도부를 장악하고 대의원을 조직하여 무마하거나 그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 해왔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더 커지게 되었고 조직이 받은 상처는 치유되기보다는 임시 봉합으로 인해 되려 퇴보했다. 내가 만나는 노동운동가 대부분이 이런 사실을 잘 알고 또 바꿔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바뀌지 않는 것일까. 나는 일단 드러내는 것에서부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알면서도 이런저런 음흉한 이유로 감춰왔던 사실들에 대해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내가 모르는 일들이 더 많을 테지만 일단은 누구라도 먼저 드러내기를 시작한다면 최소한 그 문제라도 해결을 위한 첫발을 뗄 수 있을 것이다. (214쪽)
→ 이 부분은 동감한다. 다만 검찰에 고발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만을 제외하고.
 
○ 위원장은 노사정위원회 불참을 주장해도 대의원 대회는 노사정위 참여를 결정하고, 총파업을 선언하면 위원장에게 철회하라고 조용히 협박하는 식이었다. … 내가 울산에서 현대중공업 투쟁을 할 때 바라봤던 서울의 그 유수한 노동운동가들의 실체를 확인한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관료 그 이상의 관료, 권력욕, 노회함, 능구렁이……. 그들을 보면 그런 단어들이 떠올랐다. 대의원 대회에서 그들의 수족인 대의원들이 발언하는 것을 보면 정말 욕지기가 나오려고 했다. 짜고 치는 고스톱, 각본대로 보스의 지시에 그들은 충실했고, 자신들이 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는 듯했다. 자기편 대의원이 나와서 발언하면 무조건 박수 치고, 상대편의 발언에는 야유를 보내고, 민주라는 이름을 단 조직의 대의원 대회라는 게 부끄러울 정도로 민주노총은 점점 조합원들 보기에 염치없는 조직이 되어갔다. 연맹의 위원장들은 어차피 곧 내려갈 위원장인 내게 힘을 실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기 연맹 소속 사업장들의 투쟁에 대응하느라 정신없었다. 나는 자기 정파 조직원이 아니라 해도 위원장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 곧 민주노총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임을 그들이 알아주었으면 했지만 그건 그야말로 바람일 뿐이었다. (214-15쪽)
민주노총 안에 굳건히 자리 잡은 권력. 현장에서 열심히 투쟁하는 동지들은 이들의 실체를 모르고 오히려 그들의 지시만 따르고 있으니 이 구도를 어떻게 깰 수 있을까. (221쪽)
→ 이런 사실들은 정말 민주노총의 부끄러운 치부이지만, 감출 것은 아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정파를 없앤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리라. 리더십의 문제도 있고....
 
→ ‘4장 해고자 구청장’이 이 책에서 제일 인상적인 대목이었다. 자치단체장으로서 그에 대해 그리 잘 아는 것은 아니었는데,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과거부터 지금까지도 진보정치세력의 활로는 지방정치에 있다고 생각해왔고, 그 점에서 국회의원보다 기초단체장이 훨씬 유의미하다고 본다. 그런데 진보정당에 있는 이들 대부분은 기초자치단체장이나 지방선거의 후보자리를 중앙정치로 가는 징검다리로만 파악한다. 아직은 역량이 되지 않아서 인지도를 높이는 수단으로 양쪽 모두를 고려하곤 있지만, 언젠가는 부딪힐 일이므로 유의해야 한다. 이 점에서 “나는 늘 국회의원 10석보다 자치단체장 10곳을 잡는 것이 더 싸움에 유리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모두 중앙 정치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지역의 운동에 대해 관심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이갑용의 의견에 동의한다.
 
○ 구청장 시절에 저지른 실수는 민주노총이나 노동조합 때 일과는 사뭇 다르다. 운동의 원칙보다는 행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공무원 사회에 대한 파악이 부족했던 게 문제였다. 구속이나, 기소, 재판 등 나는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일들이, 공무원들에게는 엄청나게 두렵고, 중요한 일이라는 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274-75쪽)
  
○ 노조가 결성되고 동구청의 가입현황을 알아보니 한 명이 가입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분은 하청 노조 활동의 엄마인데, 아들이 좋아하는 구청장한테 대적하는 노조에 가입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 아들은 나도 잘 아는 동지여서 엄마를 가입 안 시키면 해고당한다고 협박(?)해 바로 가입시켰다. 동구는 가입 대상 모두가 가입해서 잘 활동하고 있다. … 나는 비정규직 노조의 간부들을 개별로 불러서 교섭하는 방법에 대해 노동운동 선배로서 조언해주기도 했다. (282쪽)
행정의 영역에서 또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단체장의 지위이다. 시장을 언제라도 독대할 수 있다는 이점 등을 활용해, 늘 반대 세력에게 둘러싸여 노동자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없는 관료들에게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을 엄호할 사람이 필요하다. (284쪽)
내가 현대중공업 노조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일방적으로 사측의 편만 들어주는 경찰만 없다면 노동자들이 교섭에서든 파업에서든 밀릴 이유 전혀 없다. 파업의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노동자들만 잡으러 무장하고 쳐들어오는 경찰 때문에 내부는 불안에 흔들리고 혼란스러워지면서 결국 분열이 일어난다. 나도 지금껏 파업 때문에 구속되었지만, 구속 사유가 노동조합법 위반인 적은 없다. 다 폭력 혐의로 구속되었다. (285쪽)
 
○ 구청장 때도 특별히 양복을 입을 일도 없고, 불편하기도 해서 집에 있는 잠바에 구청 마크를 박아서 입었다. 그랬더니 아주 편하고 좋았다. 사람들은 구청장이 되었으니 이제 양복을 입어야 하지 않느냐고 했지만, 나는 왜 양복을 입어야만 격이 맞는다고 생각하는지 의문이다. 노동자가 노동자의 옷을 입는 게 예의에 어긋난 것인가? 오히려 어설프게 정치인 흉내를 내면서 노동자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양복 입는 노동자 출신 정치인들이 더 우스운 것 아닌가?
양복에 금배지가 그렇게 좋은지……. 나는 민주노총의, 또는 노동자의 잠바가 좋다. 그리고 자랑스럽다. 어설프게 사회가 강요하는 ‘노동자 색깔 죽이기’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계속 당당한 노동자의 옷을 입을 것이다.
→ 이 부분은 동의하기 어렵다. 양복 입는 것이 ‘노동자 색깔 죽이기’에 동의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노동자의 옷이 잠바 뿐인가. 이는 노동자를 생산직 남성으로만 한정하는 편견이 들어 있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대부분 양복을 입고 출퇴근한다. 그리고 결혼식 때를 떠올려보라. 넥타이를 매지 않는 것까지는 용인되지만, 되도록 깔끔하게 입는 것이 예의인 것이고, 그런 차원에서 양복이나 정장을 입는 것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활동할 때 편한 복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 나는 노동 상담소 설치를 공약으로 내걸었는데 시작부터 관료 사회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초기에는 상담소의 간판을 구청의 공무원이 떼가기도 했고, 채용한 소장에게 임금을 못 줘 내 돈으로 월급을 주기도 했다. 구청 안에 노동 상담소를 둔 사례는 내가 알기로 지금까지 동구청이 유일하다. 밖에 있는 노동 상담소를 지원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구청 안에 상담소를 둔 것은 그 상징성과 책임감, 차별성을 위해서였다.
노동 민원 상담 전문가를 채용해서 구청이 이를 운영하도록 했다. 구청 안에 노동 상담소가 있으니 노동자와 주민들이 눈치 보지 않고 안심하고 드나들 수 있어 반응이 무척 좋았다. 노동자 밀집 지역에 노동 문제만큼 필요한 민원 상담이 어디 있겠는가. 상담소는 주민들과 노동자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지금은 구청장이 한나라당으로 바뀌어 사라지고 없다. (289쪽)
→ 반응이 무척 좋았다면 왜 구청장 소속 당이 바뀌었다고 사라져야 할까. 단지 노동 상담소에 대한 편견 때문에?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노동자 밀집 지역이라서 노동 상담소가 필요한 시기는 지났다. 노동자로의 신분이 부여되지 않는 온갖 특수고용직, 계약직 노동자들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4년 전만 하더라도 지방선거에서 많은 진보정당 후보들이 이러한 노동 상담소나 노동상담센터 설립을 공약했는데, 이제는 그런 공약을 거의 볼 수가 없다. ‘노동’에 대한 관심도를 그런 것으로 측정할 수는 없겠지만, 과거보다 약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 만큼 우경화되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전에는 립서비스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해야 할까.
 
○ 종처럼 산 세월을 깬 것이 87년 대투쟁이었고, 그 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은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 엄청나게 큰 기여를 했다. 자신들이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였기에 면밀한 연구와 입증 노력이 없어, 실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면서 이 사회의 왜곡된 분배 구조를 바꿔낸 것은 민주화 투쟁을 통해 독재 정권을 몰아낸 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에 기여한 것이다.
87년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임금 체계에 큰 변화가 생겼다. 특근처럼 시간 외에 일을 해야 받을 수 있는 수당 중심에서 기본급 중심으로 바뀐다. 우리 요구가 모두 관철된 건 아니지만, 일단 기본 생활이 될 정도의 기본급을 확보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296-97쪽)
노동자가 죽도록 일해서 재벌 주머니만 불려주는 구조, 회사는 커지고 회장 재산은 늘어나는데 노동자 삶은 그대로인 왜곡된 분배 구조를 우리는 바꿔냈다. 바로 노동조합을 통해서다. (300쪽)
분배의 정의는 의식의 전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87년도에 처음 투쟁이 시작되었을 때 조합원 수만 명이 운동장에 모였다. … 대의원들이 직접 다니며 조합원들의 불만과 요구사항을 조사해 적었다. 우리는 당연히 ‘임금인상’이나 ‘차등 지급 철폐’ 등이 가장 큰 불만이요 요구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뜻밖에도 ‘두발 자유화’ 요구가 튀어나왔다. 그 다음으로는 ‘복장 자율화’였고. 그 다음에야 ‘임금인상’, ‘차등 지급 철폐’, ‘폭력 금지’ 등등이 이어졌다. 이는 설문을 준비한 지도부나 대의원들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적은 임금보다 신체를 통제당한 것에 대한 불만이 더 높은 것을 보고 많은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노동자들에게 머리카락은 단순한 머리카락이 아니었던 것이다. 굴종, 체념, 부끄러움, 억울함, 그런 것들의 상징이었고, 민주노조가 생겨 두발 자유화를 쟁취하면서 우리는 머리를 기를 권리가 아니라 ‘인간답게 살 권리, 내 몸을 내 마음대로 결정할 권리’를 되찾았던 것이다. 노조는 우리가 ‘인간’임을 되찾게 해준 존재였다. (304쪽)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987년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면서 가장 강력한 투쟁 동력은 외주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외주 직영화’를 외치며 열심히 투쟁했다. 그 성과로 87년 투쟁이 마무리되면서 외주 노동자 만여 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 하청 노동자들은 직영 노동자보다 임금이 상대적으로 높았는데, 이들은 이금 30%가량 동결 또는 삭감을 감내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한다. 눈앞의 임금보다 차별도 없고 노동자를 보호해주는 노동조합에 소속되는 것이 더 안전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킨 큰 투쟁인데 제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아쉬운 부분이다. (306쪽)
 
○ 노동자들은 자본이 선전하는 대등한 파트너, 한가족, 한마음과 같은 단어에 쉽게 속는다. 적어도 노조를 만들기까지는. 일터 안에서 촘촘하게 연결된 인간적인 그물망을 통해, ‘적어도 저 사람이 내게 그러진 못할 거야’라고 생각했던 순진한 믿음은 노조를 만들고서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연이어 터지는 경영진의 악랄한 행동에 처음에는 당황하고, 자기 눈을 의심하다가,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중간관리자의 호소에 마음이 흔들리다가, 결국 악랄한 경영진의 탄압으로 노조를 탈퇴하거나, 혹은 투쟁하거나 두 가지 길에서 고뇌한다. 이는 노조 활동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대한민국 노동조합 99%의 현실이다. 나는 지금껏 노조를 반기는 자본가를 본 적이 없다. 이는 진보적인 인사가 경영을 하는 사업장도 마찬가지다. 노조를 정말로 상생을 위한 파트너로, 동등한 협력자로 인정하는 자본가를 찾아볼 수가 없다. 전태일이 꿈꿨던 그런 공장은 그야말로 ‘꿈의 공장’일 뿐이다. (310-311쪽)
→ 이에 당연히 동의한다. 다만, 이러한 서술이 맞다면 구청장으로서 공무원노조나 공공기관 노조에 대해 자신이 사용자, 자본가의 쪽에 있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할 것이고, 자신 또한 ‘노조를 정말로 상생을 위한 파트너로, 동등한 협력자로 인정하는 자본가’가 아니었음을 자기비판해야 한다. 구청장과 같은 자치단체장은 자본가가 아니라고 한다면 변화된 시대에 맞는 노조관을 제시해야 한다. 이런 경우 사용자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구체화되지 못한 부분 중의 하나가 아닐까.
 
○ 대우자동차가 노동자들을 대거 정리해고했다가 3-4년이 지난 후 다시 복직시킨 것처럼, 결국 정리해고는 자본이 저지른 잘못을 노동자에게 덮어씌우는 것이다. 해고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 노동자들이 버틸 수 있는 길은 결국 단결과 연대뿐이다. (315-16쪽)
부도덕한 돈을 받으며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다. 자본에 약점이 잡히는 순간 평생을 그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또한, 노동자로 살아갈 수도 없다. … 세상에 ‘누구도 모르는 비밀’이란 없다. 특히 회사와 관계에서 ‘누구도 모르는 비밀’을 만드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우리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자본은 물론 우리 상대 진영에선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긴장해야 한다. 긴장하고 조심하고 공개하고, 그 방법밖에는 없다. (321쪽)
 
○ 노조 활동가에 대해 은밀하게 진행되는 개별 포섭
그는 파업이나 큰 투쟁 없이 적당히 싸우고, 조합원 눈 속이고, 회사 이익 챙겨주고 산별로, 지역으로 떠난다. 물론 민주노조 진영에서 그는 아직 어용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활동가가 상급 단체 간부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바로 지금의 민주노총과 대기업 노조가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처럼 된다. 닳고 단 노동운동 관료들의 모습. 회사와 적당히 타협하고, 뒷돈도 받아가며 노조 밖 활동까지 협조받으며 노동운동가 행세를 하고 다니는 사람들. 비타협적으로 싸우는 사람은 그렇게 살 수가 없다. 파업하면 감옥 가고 해고되는 것은 당연하고, 노조가 힘이 없으면 조합원 자격마저 박탈시키는 게 현실이다. 안에서 정당하게 투쟁하는 노동자는 밖으로 진출하기도 어렵고, 회사에서도 상급 단체 상근자로 동의해주지 않는다. 위협이 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자본과 정권이 노동운동가를 가름하는 기준이다. (331-32쪽)
 
○ 민주노총 안의 보이지 않은 권력들, 선출되지 않아 견제 대상도 되지 않는 숨은 관료 권력들을 정리해야 조직이 산다. 그들이 저지른 해악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1996년 총파업에서 현대자동차라는 대기업 노조의 요구 때문에 그 투쟁의 막을 내렸다. 권영길은 총파업을 팽개치고 갑자기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현대자동차 노조의 정갑득 위원장도, 권영길 위원장도 모두 혼자서 내린 결정이 아니다. 그 결정을 한 정파 조직이 분명히 있다. 모두 그걸 안다. 알면서도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평가도 대상도 주체도 없다. 왜냐하면, 정파는 정파일 뿐 공식 조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정과 행동은 정파가 하는데, 비판은 선거 대책 본부나 파업을 철회한 민주노총 전체가 받게 되는 것이다. (347쪽)
→ 1996년 총파업 중단을 단지 현자노조의 요구 때문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정파의 결정으로 권영길이 갑자기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고? 당시 진보정당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 분위기가 있었던 상황에서 아무도 총대를 메려 하지 않았고, 권영길은 그 짐을 짊어졌을 뿐이다. 국민파의 결정도 분명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당시 진정추를 비롯한 진보정당정치를 꾸준히 해온 세력에서 민주노총 위원장이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에 나설 때 진보정치운동이 본궤도에 오를 수 있다고 보아 끊임없이 권영길을 설득한 것이 주요했다. 만약 권영길이 그 때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면 지금은 변변치 않게 보이지만, 그나마 나름의 성과를 냈던 민주노동당의 건설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 2004년에는 3대 사무총장을 지낸 이수호와 이석행이 우파의 후보로 나온다. 중앙파인 단병호 위원장과 러닝메이트를 했던 사람이, 이번에는 조직을 바꿔 우파의 후보가 되어 맞서게 된 것이다. 나는 사실 이런 지점을 비판하고 싶다. 노동운동의 정파가 이념보다는 권력으로 이합집산한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파와도 후보가 되고, 좌파와도 후보가 될 수 있는가? 적어도 정파라면 정치 지향과 노선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이게 제대로 된 정파인가? (349쪽)
강승규는 개인이 아닌 정파의 후보였다. 그러나 정파는 실체가 없으므로 책임지지 않는다. 결국, 책임은 공조직인 민주노총이 져야 한다. 임원 사퇴와 비대위로 조직을 초토화시키고도 강승규를 내보낸 우파는 사과도, 책임도 없다. (350쪽)
간선제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정파들이 민주노총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제도다. 어떤 사고를 쳐도 묻어두고, 덮어두고 자신들이 가진 권력으로 끝까지 보호한다. 다시 권력을 잡으면 그만이니 반성이나 책임 따윈 필요도 없다. 권력을 잡으니 자기 조직원들을 모든 자리에 앉힐 수 있고, 이는 다시 권력을 재생산하는 데 너무나 좋은 구조가 된다. (350-51쪽)
→ 강승규사건에 대한 이갑용의 언급은 우파에 대한 비판의 핵심이다. (이 문제는 여전하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국민파 노동운동이 이념보다는 권력에 목을 맨다는 비판은 옳다. 하지만 원칙적으로만 그러하다. 이수호의 경우 처음에는 확실한 정파에 소속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더욱이 통합집행부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좌우파가 합작할 수도 있다. 물론 남한 노동운동에서 통합집행부가 요구되는 상황은 없었고, 이를 시도하려는 것은 모두 비판대상이었다.
간선제/직선제 문제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 이갑용이 지적하는 간선제의 문제점이 직선제가 된다고 하여 해결된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이는 길은 복잡하지 않다는 것이 틀렸음을 잘 보여주는 쟁점이다.

 
→ 353쪽 이하에 나오는 김창현, 이영순, 방석수, 송주석 등 울산연합의 인물들. 이는 언급하기 싫다. 

○ 민주노동당은 ‘노동자의 희망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 민주노동당’이다. 사장도 일하고 사원도 일한다. 주인도 일하고 종업원도 일한다. 그럼 민주노동당은 누구의 희망인가.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주인되는 사회’를 민주노동당은 말한다. 사장도 땀 흘려 일하고, 사원도 땀 흘려 일한다. 사장은 사우나에서 땀 흘리며 그걸 일이라고 여기고, … 어떤 종업원들은 시장이 골프장에서 땀 흘리는 것도 회사를 잘 되게 하기 위한 경영 활동의 하나이기 때문에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민주노동당은 땀 흘려 일하는 사장의 희망인가.
‘일하는 사람’을 한자말로 표현한 것이 ‘노동자’인데 우리의 시대와 역사는 ‘노동’을 불온함과 편협함의 대명사로 만들어버렸다. 원내 10석을 얻은 진보 정당도 ‘노동’이란 말을 앞세우지 못할 정도로, 그래서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이라는 아주 건전하고 순박한 단어의 조합을 내걸 정도로 타협하게 만들었다. 우리 내부의 이런 분위기는 오랫동안 목적의식을 가지고 계급운동을 하지 않고, 지표 없이 운동해온 결과다. ‘노동’이나 ‘계급’을 입에 올리면 시대에 뒤떨어진 편협한 좌익 소아병 환자 취급을 받는 것은 민주노동당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360-61쪽)
→ 진보신당 안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4. 노조 편을 드는 사측 관리자는 없을까.
이 책을 보면, 비타협적으로 싸우는 소수의 인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변절하거나 사측의 회유에 넘어간다. 하지만 노조 편을 드는 사측 관리자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노조는, 노조 활동가들은 그렇게 무능한 반면, 사측 관리자들은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단련되었는가. 그건 아닐 것이다. 이갑용은 지나치게 한쪽 면만을 보고 있다. 노자간의 관계는 적대적 모순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단위사업장에서 이갑용이 묘사한 것처럼 노사관계가 행해진다면 노동자들은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다. ‘아흔아홉 번 패배할지라도 단 한번 승리’를 통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바뀌었다 하더라도 다시 원상복귀한다. 길만이 복잡하지 않을 뿐 세상 복잡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이해하고 이를 풀어나가는 섬세한 지혜가 우리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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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0 23:32 2010/05/20 23:32

3 Comments (+add yours?)

  1. 들사람 2010/05/21 07:56

    코멘트 잘 읽었슴다. "길만이 복잡하지 않을 뿐"이며 이렇게 보는 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든다거나 하는 것과도 무관하단 말씀은 저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인데, 이렇게 정리를 해주시니 반갑네요.ㅎ

     Reply  Address

    • 새벽길 2010/05/22 10:47

      그냥 제 생각일 뿐인데,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분이 있었군요. 아무래도 돌아가는 걸 보면 그리 단순하지 않더라구요. 이를 푸는 방법도 당연히 단순해서는 안될 것 같았구요.

       Address

    • 들사람 2010/05/22 12:29

      새벽길/ 따로 얘기한 적도 없는데 생각이 얼추 비슷하다고 하시는 이런 상황을 보면, 새벽길님 스스로 "제 생각"이라 하신 말씀이 어쩌면, 정치적으로 잠재된 어떤 공통성의 한 자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난데없이 드네용.ㅋㅋ;

      근데 저로서는 이런 생각은 들어요. "자본"이라 불리는, 다시 말해 세계시장-(복수의)국가-(복수의)국민문화가 패키지를 이룬 사회적 관계와 맞서 싸우고 씨름하는 일이, 굳이 총 전적으로 갈음해 보자면 싸움의 기본 지형상 승보다는 패가 무척 많겠지만 중요한 건 승패의 "분포"와 "질"이 아니겠는가.. 이를테면 리그 총 전적이 15승 85패여도 정치적으로는 이긴 셈이나 마찬가지인, 그런 정치의 문법을 좀더 정치하게 상상해 봐야 하겠달까요.ㅎ 85패가 겉보기로야 패배여도 질적으로 거둔 성과(달리 말하자면, 계급 형성의 문화적 저변과 정치적 응집력 강화) 속에서 리그 후반부에는 명실상부한 15승을 가능케 하는 정치란 과연 어떤 걸지 말이죠.

      가만 보면, 매 선거 때마다 이런저런 벼랑끝 레토릭들로 관심을 유도하려 하지만, 실상 "별 영영가 없는" 승리에 단기적으로 목매달다가 정작 장기적인 승리의 토대나 저변을 외려 불모화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제가 보기엔, 이런 승리는 설사 이뤄진들 말씀하신 것처럼 "원상복귀" 내지 체제내화를 자초하는 길 같은데, 그럼에도 "정당인 이상 모름지기 집권이 지상과제"라는 자유주의 정치학스런 명제를 마냥 따르고만 있는 듯하단 거죠.

      "세상에 복잡하지 않은 건 없다는 걸 이해하고 이를 풀어나가는 섬세한 지혜가 요구된다"고 하신 말씀의 뜻을, 이렇듯 뭔가 본말전도된 저간의 상황을 넘어설 수 있는 좀더 지혜롭고 섬세한 실천의 문법을 요청한 거 아니겠냐고, 저는 그렇게 이해했습니다만.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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