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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쳐야 한다, 목숨을 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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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모임인 '민중가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보니 "나는 저 산만 보면 피가 끓는다"로 시작하는 <지리산>을 소개하는 이가 있더군요. 물론 이 노래도 잘 알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이 곡의 작곡자인 박종화씨가 쓴 다른 곡인 '바쳐야 한다'가 생각났습니다.

 

사실 지금은 내일까지 성적처리 마감이라 못다한 채점을 하고 있는데, 잘 집중이 안되길래 무슨 딴짓으로 기분전환을 할까 하다가 인터넷 서핑은 집에 있는 노트북의 성능이 좋지 않은 관계로 참기로 하고 대신 이렇게 '바쳐야 한다'에 대한 소개글을 올립니다. 이 노래는 이광웅 샘의 '목숨을 걸고'라는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니 시에 대한 소개일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제 자신이 노래를 먼저 알게 되었으니 그쪽으로 분류해야 하겠지요.

 

근데 박종화의 '바쳐야 한다'라는 노래를 아는 사람이 더 많을까요, 아니면 이광웅의 '목숨을 걸고'라는 시를 아는 사람이 더 많을까요? 아, 이건 제 티스토리블로그에서 담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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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시기에 어떤 시대였는지를 한겨레의 김의겸 기자는 오송회 사건의 예를 들어 얘기합니다.
단지 물가가 안정되었다, 올림픽을 유치했다 등의 이유만으로 전두환 시대가 미화될 수 없음을 보여주지요.
나중에 사람들은 이명박 시대를 어떻게 평가할까요? 이미 평가를 나름대로 하고 있지만, 평가받을 인간들은 이를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듯합니다.
  
김의겸 기자의 글을 보면서 이전에 써두었던 '바쳐야 한다, 목숨을 걸고'란 글이 떠올랐습니다. 얼마 전 오송회 사건이 무죄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때는 '그렇군' 하면서 그냥 넘어갔었습니다. 그런데 김선주 칼럼을 보면서 제가 썼던 글이 생각났고,
자작나무님이 네이버블로그에 있던 제 글을 퍼가면서 다시 읽어보고 이를 옮겨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바쳐야 한다'의 1절 노래가사마저 다 잊어버린 듯 싶습니다. 갈수록 민중가요로부터 멀어지는 건 아닌지...

  
[편집국에서] 오송회 교사를 ‘고발’한 제자들 (한겨레, 김의겸 정치부문 정치팀장, 2008-11-30 오후 07:39:49)
 
[여적]이한주 판사의 사죄 (경향, 김택근 논설위원, 2008년 11월 26일 18:09:59)
 
오송회 사건이 재심 공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26년 만이다. 그런데 무죄보다 더 뜻있는 일이 법정에서 벌어졌다. 재판부가 과거의 잘못된 재판을 진심으로 반성했던 것이다. “그동안 억울한 옥살이로 인한 심적 고통을 주고, 사법부에 대한 기대를 무너뜨린 데 대해 이 자리를 빌려 사죄드립니다.” 재판장인 이한주 광주고법 부장판사의 판결문은 반듯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어떠한 정치권력의 간섭을 받지 않고 오로지 국민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 책무에 충실하겠습니다. 앞으로 재판부는 좌로도, 우로도 흐르지 않는 보편적 정의를 추구하겠습니다.” 이 판사는 또 이렇게 약속했다. “법대(法臺) 위에서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소신으로 판사직에 임하겠습니다.” 공판이 끝난 후 피고인과 가족들은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 법정의 경위들이 이를 제지하려 하자 이 판사는 “말리지 말라”고 했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 그러나 판결로는 말할 수 없는 억울한 사연, 핏빛 절규가 있다. 이는 판사가 대신 말해야 한다. 이 판사가 억울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었기에 비로소 ‘죄없는 피고인들’은 세상을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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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칼럼] 목숨을 걸고 … (한겨레, 김선주 언론인, 2008-11-26 오후 07:28:24)
 
진짜 교사가 되려 했던 이광웅 시인은 지난 25일 전두환 정권 시절의 대표적인 공안조작사건이었던 ‘오송회’ 연루자 9명 전원에게 26년 만에 무죄가 선고된 자리에 없었다. 심한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갔다가 풀려나 다시 복직했으나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직되고 힘든 세월을 보냈던 이광웅 시인이 암으로 세상을 뜬 것은 15년 전이다.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억울한 세월을 살았으면서도 그는 맑디맑은 심성의 좋은 시를 남겼다.
 
광주고법 형사1부(재판장 이한주)는 이날 이례적으로 26년간 어려운 세월을 살아온 이들에게 법원의 이름으로 사과를 했다. ‘검찰의 조서 등은 고문·협박·회유에 의한 것으로 증거능력이 없다’고 밝히고, 경찰에서 전기통닭구이 등의 고문이 행해진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피고인들이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위반한 적이 없고, 법원에 가면 진실이 밝혀지겠지 하는 기대감이 무너졌을 때 여러분이 느꼈을 좌절감과 사법부에 대한 원망, 억울한 옥살이로 인한 고통에 대해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고 했다. 미술교사였던 부인 김문자씨 역시 해직과 복직을 겪으며 신산한 세월을 살아왔다. 법정에서 판사가 원고 없이 억울한 누명을 썼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는 말을 들으며 한 편의 좋은 시를 읽는 것 같은 감격을 맛보았다고 한다.
 
빨갱이의 자식, 간첩의 가족이라는 누명 아래 자녀를 기르고 밥벌이를 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동시대를 산 사람으로서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특히 이광웅 시인은 주모자로 몰려서 관련자 가족들의 원망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이 시인 부부는 항상 마음에 짐을 진 것 같은 세월을 살았다. 자신의 억울함보다는 자신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은 동료들과 그 가족들을 걱정하며 이중의 고통을 겪었던 이광웅 시인도 저세상에서 이제야 비로소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민주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우리 사회엔 진짜가 되기 위해, 진짜를 말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우리 사회는 커다란 빚을 졌다. 그 값진 노력 덕에 우리는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기도 했고 도덕성을 확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는 그런 노력의 성과를 무로 돌리려는 움직임에 직면했다. 서울시 교육청에서 고교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할 역사특강을 위해 꾸려진 강사진의 면면과 이들의 평소 발언을 종합해 보면 이들이 역사를 진짜로 가르치리라 보기 어렵다.
 
가짜를 진짜라고 우긴다고 해서 진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가르치려면 진짜를 가르쳐야 한다. 26년 만에 ‘오송회’ 사건의 진실이 밝혀진 것처럼, 가짜를 주입해도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는 법이니까

 

  
목숨을 걸고
                        이 광 웅
이 땅에서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박종화님의 노래에 대해서는 애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래를 노래 자체로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노래에 담긴 함의를 생각하면서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약간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자신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불리워질 수 있다고 보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된 데에는 박종화님의 노래 가운데 꽤 있는 시를 바탕으로 한 곡들이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런 노래 가운데 <바쳐야 한다>가 있습니다.  
이 노래를 접하게 된 것도 거의 15년이 다 되어가네요.
 
술을 마실 때 권주가 비슷하게 이 노래를 부르면서 가사내용의 과도함에 약간 생경해하면서도 "그래. 무엇을 하려고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최선을 다하여, 목숨을 걸고..." 이런 생각을 했었더랬지요. 물론 지금은 "제대로 하지 못하려면 아예 하지 마", 이런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는 하고 있지 않지만, 목숨을 걸고 해야 할 것들이 아직도 많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사실 목숨을 걸고 할 것이 있다는 것일 뿐, 뭘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는 사고는 저에게 어울리지 않는 듯 합니다. 이 글을 써놓은 것은 시일이 좀 되었는데, 아무래도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지껏 올리지는 못했거든요. 여전히 박종화님에 대한 생각도 정리되어 있지 않구요.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목숨을 걸고 뭘 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살아가면서 필요하다는 것이었지요. 아직까지 목숨을 바쳐 뭘 하겠다라고 하는 건 치기라고 봅니다
 
저는 처음에 이 노래가 박종화님이 작사작곡한 노래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광웅 시인의 <목숨을 걸고>라는 시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이광웅님은 오송회 사건으로 알려진 분입니다. 오송회 사건은 1982년 그를 비롯한 군산제일고에서 재직하던 교사들이 자생적 간첩으로 몰려 파면과 구속을 당하게 된 사건입니다. 국어교사로 재직 하던 그는 월북 시인 오장환의 시집 <병든 서울> 따위를 읽었다는 죄목으로 이에 연루되었고, 이로 인해 갖은 고문을 당하였고, 5년동안 감옥생활을 하였습니다. 오송회 사건은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무수히 존재했던 간첩단 사건 중의 하나였고, 나중에 잘못되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광웅님은 1987년 군산 서흥중에 복직되었으나 1989년 전교조가 결성되자 당연히 이에 가입하였고, 이런 이유로 다시 해직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위암으로 투병하다가 1992년 12월 운명하였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그에 대해 이렇게 평하였습니다. "그의 잘못이 있다면 목숨을 걸고 술을 마시고, 연애를 하고, 교단에 섰다는 것뿐. 그는 진정한 진짜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시집으로 『대밭』(1985), 『목숨을 걸고』(1989), 『수선화』(1992)를 남겼는데, <목숨을 걸고>는 그가 해직 중에 발표했던 시입니다. 군산과 장항을 잇는 금강하구둑 입구에 그를 추모하는 제자들과 민족문학작가협의회(지금의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신입니다)와 전교조 등이 성금을 모아 만든 시비가 있다고 합니다. 언제 그곳에 가게 되면 이 시비를 한번 보고 싶습니다. 
 
최근에 가끔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이광웅 시인의 시를 애송하는 분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대부분 창작과 비평사에서 2002년 나온 것으로 되어 있는 『목숨을 걸고』라는 시집을 인용하지요. 하지만 15년도 넘는 이 시가 사랑받는 걸 보면 시인은 가도 시는 남는 듯 합니다.
 
이 시를 빌어 만든 노래가 <바쳐야 한다>입니다. 아래 박종화님의 글에서도 나오지만, 박종화님이 가사를 외워 부를 수 있는 몇 안되는 자신의 노래 중에서 으뜸으로 치는 곡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자노래단의 1992년 테입 '민중연대 전선으로'에 실려 있는 곡으로 기억하는데, 이는 박종화 창작 2집에 맨처음 실린 것과 같습니다. 같은 곡이 박종화창작골든베스트 앨범 I 격정 속으로(II는 생활 속으로입니다)에 <파랑새>에 이어 두번째로 실려 있습니다.
 

 

노동자노래단 - 바쳐야 한다 
 
하지만 이 버전보다 제가 더 좋아하는 버전은 전대협노래단의 것입니다. <전대협, 우리의 자랑이여>라는 테입에 실려 있는 것인데, 아마 제가 이 버전으로 이 노래를 처음 접했기 때문일 겁니다. 이 노래를 자주 부르던 당시에는 비록 넉넉한 술값은 없었지만, 함께 부를 기회도 많았고, 그런 자리도 많았기에 노래 부를 맛이 좋았던 듯 합니다. 술맛도 좋았구요.
 
저도 가사는 2절이 더 와닿습니다. 아무래도 이광웅님의 시가 생각나서일 테지요. 그래서 예전에는 1절밖에 외우지 못했는데, 이 시점에 2절까지 외우려고 할 필요는 없을 듯하고요. <목숨을 걸고>라는 시도 좋은데, 이는 당연히 암송이 안됩니다.
 
박종화님의 누리집 노래창고에 <바쳐야 한다>에 관한 해설이 있는데, 상당히 길긴 하지만 이 또한 읽어볼 만합니다.
 

 

전대협노래단 - 바쳐야 한다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바쳐라
사랑은 그럴 때 아름다워라
술 마시고 싶을 때 한 번쯤은 

목숨을 내걸고 마셔 보거라
전선에서 맺어진 동지가 있다면
바쳐야 한다 죽는 날까지 아낌없이 바쳐라
번쩍이는 칼창 움켜쥐고 나서라 전사여
그날을 위해
이 한 목숨 걸고 나서라
 
구차한 목숨으로 사랑을 못해
사랑은 그렇게 쉽지 않아라
두려움에 떨면은 술도 못마셔
그렇게 마신 술에 내가 죽는다
붉은 맹세 붉은 피로 맺어진 동지여
죽어도 온다 그날은 온다 민족의 해방이여
번쩍이는 칼창 움켜쥐고 지켜라 전사여
우리의 깃발
이 한 목숨 걸고 나서라
 

* * * *
 
열정 하나로 느즈막에 들어 선 노래창작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절감할 때쯤 해서 '바쳐야 한다'는 만들어졌다. 내게 있어서 창작의 시작은 깊은 고민을 던져주지 못했다. 만들어서 실패하더라도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면 그 뿐이고 좋은 노래가 만들어지면 더없이 좋겠다라는 정도로 출발하였다. 누구 눈치보고 하는 것도 아니고 유명한 작곡가가 되어보고 싶어서는 더 더욱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만든 노래에 대한 생각도 내가 만들어 내가 부르고, 옆에 있는 한 동지만이라도 불러주면 그 뿐이라는게 전부였다. 물론 창작에 대한 보이지 않는 자신감과 반드시 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은 있었다. 그런 확신의 이유가 뭐였냐고 물으면 나도 모른다.문예의 길에서 오랜동안 머물렀던 지나온 날이 그런 확신을 갖게 했나보다.
 
애써 의미를 축소하던 뜻과는 달리 첫 작품을 내 놓고 엄청난 홍역을 치뤄야만 했다. 복에 겨운 홍역이었다. 노래는 나의 상상을 초월한 대중의 격려와 사랑을 받게 되었다. 가까이서 지켜보던 동지들이 시골가서 소 팔아 오고, 납부금을 대신 갖다주고, 월급받아 건네주고 무작정 교정에 나가 아는 사람이 지나가면 닥치는데로 만원씩 강도질(?)해 만든 테이프가, 그 따뜻한 동지들의 무한한 사랑에 다행스럽게도 보답을 하고 말았다. 돌아보면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테이프 하나 만드는데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의 사람과 기술 그리고 돈이 들어 간다는 것도 제작을 해 가면서 처음 알게 되었으니, 제작과정은 한 마디로 배우러 다니는 정도 였으니 제작 순간순간이 위태로웠다. 하나를 채우면 하나가 모자라고, 또 하나를 채우면 모자란 다른 하나를 채우러 뛰어다니고 말이다. 멋모르고 진행하다보니 비용도 일반값에 비해 거의 두배 이상을 들어야 하는 비싼 댓가를 지불했다. 그렇다고 내게 조언을 해 준사람은 없었다. 유일하게 스튜디오 사용을 조건없이 싼 가격으로 사용하게 한 '소리모아'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형님들만 생각난다.잘 만들어 보라는 말은 많아도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었었다면 소값하며, 등록금 하며, 강도질 하며 닥치는대로 가져다 쓴 비용을 어떻게 감당했겠는가! 생각을 하면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다행히 노래는 퍼지고 창작집은 남다른 사랑을 받게 되었다. 능력있는 작곡가여서도 아니고 경륜있는 활동가여서도 아닌 그런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을까!
   
사람들이 애정어린 관심을 갖고 유별나게 사랑을 해 주었던 것은 실천하는 오늘을 있는 그대로 가지고 대중의 허전한 가슴을 깊게 파고 들었기 때문은 아니었나하는 생각이다.
   
동지들의 사랑이 깊어갈 때 나는 반대로 고민으로 빠져 들었다. 자신의 진로와 책임있는 노래 작업의 뒷처리와 대중들에게 끼친 영향의 재고 등등이 머리 전체를 흔들어 놓았다. 깊은 사색과 연구로 이론울 정립해야 했고, 다음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작품을 내 와야 하는 부담도 안게 되었다. 그야말로 앞으로의 진로와 직결되는 지점이었다. 계속해서 별다른 능력없는 상태로 노래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전에 결심을 굳힌대로 지금과 상관없이 나갈 것인가! 판단의 갈팡질팡은 생각과는 달리 쉽게 끝나고 말았다.
   
90년 오월은 광주항쟁 10주년이 되었던 해다. 오월제가 예년에 비해 다양하게 치루어졌다. 나도 참가하여 오월 노래발표를 결행했다. 그것이 나로서는 동지들과 함께 해보는 첫 노래공연이었다. 이제 더 이상 고민해야 할 여지가 없었다. 많은 노력을 해 가면서 대중과 호흡하는 공연을 치루어 내고 말았으니 어떤 방식으로든 문예의 길을 책임성 있게 내 와야 했다. 공연내용은 시와 노래가 어울어지는 오월 형상화였다. 사회에 나와서 해 보는 노래공연이 처음인지라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엉성했던 것 같다.
 
어쨓든 공연에 필요한 20곡 정도를 짧은 시간동안 만들어야 했다. 정신없이 날밤을 새고 정해진 시간에 임무를 완수했다. 동지들과 작품평가를 하면서 뺄것은 빼고,고칠 것은 고쳐가며 연습으로 치달렸다. 이 때는 이미 '바쳐야 한다'가 완성된 후였다. 그렇지만 평가하는 곳에 내놓지 않았다. '바쳐야 한다`는 덮여진 오선지 위에 조용히 잠들고 있었다.
   
수 십곡을 만들어 놓고도 한 두곡 정도 밖에 발표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 창작실력의 전부였던 바에 남들은 그것을 미련한 방법이라고 비아냥거릴지도 모른다. 사실 두루두루 실력을 겸비하지 못한 괴팍하면서도 미련스런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지금도 같은 방법으로 노래를 만든다. 미련한 방법인지는 몰라도 제한없이 생활을 일기 쓰듯이 자유롭게 그릴 수 있어서 좋다.
 
관념적 창작 뭉치에 시도 때도 없이 매달려 스스로를 인내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것보다는 서스름 없는 생활 감정을 마음껏 찾아 나서는 것이 즐겁고 좋다. 어떤 주제를 의식적으로 정해 놓고 의무적으로 매달리는 창작은 만들어진 틀에 자신을 짜 맞추는 것과 흡사하다. 하나에 집중한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깊이있게 다가온 소재거리나 종자로부터 출발하고 그럴 때만이 작가의 진실한 창작열정은 타오르게 되는 것이다.
    
알아주지도 않고 어떤 방법으로든 보상 받는 일이 없어도 미련스런 방법은 많은 작품을 쓰게 했고,덩달아 쌓여 갔지만 대개는 볼품 없는 감자에 불과했다. 이것이야 말로 진짜 내 노래다고 하는 애착이 없는 바에야 볼품없는 감자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특히 관심도가 깊은 사람들이 묻는 자신이 자신있게 내놓을만한 노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더욱 그랬다. 창작방법이나 동기 그리고 애착을 갖는 노래등에 관해 물었을 때마다 느끼곤 했던 것은 절제된 정서로 내 자신을 간결하게 표현해 낸 노래가 없다는 것이다. 노래를 만든 이후 고작 몇곡 정도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지만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고민이 '바쳐야 한다'의 출발점이요 준비운동이었다.
수영을 하러 물에 들어 갈 때 운동을 하지 않고 뛰어든다고 해서 쉽게 죽진 않는다. 하지만 준비운동을 하고 들어간 사람보다 심장마비의 확률은 크다. 창작의 심장마비를 피하기 위한 준비운동은 자신을 솔직 담백하게 표현하면서도 이 시대 청년의 애국적 정서의 모범이기를 끝없이 갈구했다.
 
어느 이름없는 축하모임에서다.
한 친구가 축시를 멋들어지게 즉흥시로 대신 했었다. 애석히도 고인이 되신 이광웅 선생님의 '목숨을 걸고'라는 시를 빌어 낭송을 했었는데 야릇하게 나를 사로잡았다.일상 때 같았으면 그저 그러려니하고 지나쳐 버리고 말았겠지만 나를 표현하고 나를 말할 수 있는 노래에 집착을 하고 있었던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시가 낭송되는 중에 내가 써 내려가고 있었던 글(지금의 바쳐야 한다의 2절)과 비교하면서 음미를 해 보았다. 짧은 순간이었다.
   
보편적으로 작품을 쓸 때는 가사가 먼저 나오고 먼저 쓴 가사는 당연히 일절이 되는 것이 상례다. 거기다 덧붙이면 이절이 된다. 그렇듯 나도 일절을 먼저 써서 선율을 붙여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 때에 한 모임장에서 시낭송을 접하게 된 것이다. 어려운 창작의 길목에서 허우적거리고 2절과 끙끙거리던 때를 뒤엎어 버리고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싯점이었다.
 
술과 사랑 동지는 삶과 투쟁 삶의 삼위 일체를 표현해 내는 일상의 소잿거리다. 그것을 다 가사안에 집어 넣고 나니 더 이상 쓸 말이 없었다. 특색있는 소재나 대상을 찾지 못하고 일절의 내용을 이절에서 반복한다는 것은 큰 고역이었다.
 
고역을 뚫고 시 하나가 다가온다. 비록 내가 쓴 노랫말과 낭송된 그 시가 약간 다른 각도지만 술과 사랑이 있다는데 아주 흡족한 것이었다. 그것이 생활적인 소재라는 생각에서였다. 내 노래에 목숨이나 피같은 단어가 두서없이 많다는 사람들의 지적에 가급적 충실하려 했던 당시의 노력들이 일 순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시 낭송이 가져다 준 특유의 감동은 일이절의 가사반복으로 인한 실패도 감내하겠다는 결의까지 던져 주었던 것이다. 오랜 준비 운동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완성된다.
 
지금도 이 노래의 구체성은 이절에 있다고 생각한다. 역동적이며 생동감이 더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일절과 이절의 배치를 거꾸로 하고 만 것은 숨기려 하는 관성 탓이 크다. 별로 좋지 않는 창작 태도이다.
 
술과 사랑을 말하면서 확실하고 분명한 제 목소리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자 하는 나약함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 내 목소리는 이절에 감추고 다른 사람의 시를 통한 발설로 앞으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는 작품에 대한 부담을 덜어보고자 하는 간교함이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또 한편으론 생활습성에서 몸에 배긴 나의 관성 탓이다. 웬지 숨기고 픈 그런 관성이다. 어디를 가서라도 밝은 곳보다는 어두운 곳을, 넓은 곳보다는 좁은 곳을 찾는 희안한 습성이다. 생활습관이나 사회에 적응하는 방식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으나 이렇듯 작품에까지도 깊이있게 관여한다. 사업 작풍에도 스믈스믈 기어든다 조심해야겠다.
 
오월제 공연에서 발표하지 않은 채 덮여진 오선지에 잠을 자고 있어야 할 '바쳐야 한다'는 무슨 이유를 가지고 있었을까 살펴 보기로 하자.
   
어떤 노래이든지 처음부터 완벽한 곡으로 출현하진 않는다. 작가의 오랜 손질을 거치면서 나오게 된다. 듣는 사람들도 처음 들었을 때 한 번으로 좋은 노래를 분간하기란 어려운 문제다. 그 시대가 던져주는 정서도 고려되어야 하고 흐름에 맞는 선율도 고려되어야 하는 복잡한 문제가 쉽게 판단을 하는 것을 방해한다. 물론 처음 들어서 좋다고 판단할 수 있는 노래들도 있다. 반면에 자꾸 불러봐야 제 맛이 나는 노래도 있다. 자꾸 가사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하는 부류의 노래가 그것이다. 처음에는 좋게 들렸다가 몇 번 더 들으면 금새 식상해지고 마는 노래도 있다.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가슴에 내려앉는 노래들 중에서 대부분은 그저 노래가 좋다는 생각으로부터 시작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의 가슴에 젖어들면서 좋은 노래의 대열로 뛰어든다. 때문에 처음 듣는 순간에 일시적으로 부담스럽다고 해서 노래를 뜯어 고친다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작품의 손질은 자신의 몸에 칼을 대는 것과 흡사한 보이지 않는 전율을 느끼게 한다. 수술이 잘되면 건강 하겠지만 잘못되면 죽듯이 두려움은 노래손질에도 있기 마련이다.그래서 주저하기 일쑤지만 동지들 앞에서는 무기력하게 버티는 그런 생각이 기우에 지나지 않게 된다. 노래를 만들어 동지들 앞에 내 놓게 되면 칼질은 바로 시작된다.어쩔 땐 고치기위해 노래 감상을 한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고민없이 즉흥적으로 느끼는대로 노래를 고치려 들기도 한다. 조금만 부담스러워도 듬성듬성 가위질 하기를 요청한다. 수술은 듬성듬성 되는 것이 아니다. 노래를 고치는 것도 다를 바가 없다. 한 곳을 고치려면 그와 연결된 모든 고리 즉 선율에 부담을 주지않게 고쳐 주어야 한다. 선율에도 그 만의 구조와 질서를 갖기 때문이다. 그래도 난 노래 수정작업을 동지들과 함께하는 것에 적극적인 편이었다. 서스름없이 고치는 편이 많다. 이해 할 수 없는 이유를 들어 고치자고 해도 대다수의 의견이라면 주저없이 고쳐간다. 노래의 전체구성이 달라져도 상관없다. 그렇게 해서 노래가 더 좋아지든 나빠지든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다. 함께하는 것에 기쁨을 두는 편이 좋기 때문이다. 그 때를 생각해 보면 가끔씩 창작에 관한 개성의 차이로 부딛힌 것 같은데 결단코 내가 만들었다는 개인주의적 집착을 손에 쥐고 부딛힌 적은 없다.
    
오월제에 나서는 날에 노래는 동지들 앞에 얼굴을 내 밀고 형편없는 생채기를 들어 내 놓은곳이 다듬질 되어 갔다. 계속 다른 일만 하다가 노래가 쓰여질 목적과 위상이 정해지면 빠르고 짧은 시간에 한꺼번에 많은 노래를 내 놓는 습성때문에, 이것저것 돌볼 겨를도 없이 내놓았고 뒷처리는 동지들이 고생으로 마감이 되었다. 이런과정이 진행되고 있을 때 '바쳐야 한다'는 내놓지 않았던 것이다. 내놓으면 고쳐 버릴 것만 같은 조바심이 노래를 내놓지 못하게 했다. 일정정도 노래에 대한 사상의지적 신념이 있었던 탓에 고치기를 반대하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반대로 노래 전개의 어색함을 스스로 인식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바쳐야 한다'는 애초 만들어진 상태를 고스란히 유지한 채 대중을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오월제 공연에도 오르지 않았으니 품평의 대상에도 끼어들지 않았고 별 탈없이 오월 고개를 넘는다 공연장에도 신곡으로 내놓지 못할만큼 마음속엔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해 있었다. 노래를 늦게서야 내놓고 말하지 못한 그 때의 오월고개가 나만의 고충이었음을 함께했던 동지들에게 고백한다. 
  
설사 그 당시 젊은이들에게 애국적 전형을 찾는 노래가 못되었다 할지라도 '바쳐야 한다'는 나 혼자만일지언정 전형으로 삼는다. 어딜가나 누가 노래를 시키면 이 노래를 부른다. 내가 만든 노래중에서 그나마 가사를 외워서 끝까지 부를 수 있는 몇 곡 안되는 노래중의 으뜸이다.
 
출처 : 박종화 누리집 www.jonghw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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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2 02:29 2010/06/22 02:29

3 Comments (+add yours?)

  1. 새벽길 2010/06/22 02:54

    이 곡과 관련된 네오님의 사연이 재미있어서 담아놓습니다.

    전 군대 있을 때 '바쳐야한다'라는 노래가 나왔고,이등병 처음 받은 편지에 과여학생이 가사를 적어서 보낸 적이 있어요.첫편지라고 소대에서 크게 읽으라해서 읽는데,아무래도 이상하더라구요.고참 왈 '군생활 열심히 하라는 이야기네' 끝.
    가사에 '전선에서 맺어진 동지가 있다면.... 번쩍이는 칼창 움켜쥐고..' 뭐 그러니 그냥 군바리 힘내라는 시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첫 휴가 나와서야 그게 민중가요라는 걸 알고, 제발 그런 거 좀 보내지 말아달라고 사정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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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신도선 2010/06/25 13:18

    두려움에 떨면은 술도 못마시죠...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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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벽길 2010/06/25 14:47

      어디 갔다가 다시 등장? 얼굴 보기 어렵네. 잘 지내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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