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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공무원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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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이 행정학이다 보니 전국공무원노조에서 발행하는 공무원U신문에 칼럼을 써야 하는 일도 생긴다. 이미 다른 사람이 쓴 글에 내 의견을 보태거나 지적질을 하는 건 쉬운데, 내가 글을 쓰는 건 여전히 어색하다. 억지로 쥐어짜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지... 가장 어려운 건 제목 정하는 거다. 제목을 뭘로 할까 하다가 "공무원에겐 영혼이 없어야 하나" 이런 식으로 밋밋하게 보냈는데, 이명희 샘이 페북에 올려놓은 사진을 보니 "영혼없는 공무원들의 시대"(뒤에 또 뭐가 있나?)라고 조금더 그럴싸하게 되어 있다. 실제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초고는 이렇다. 다시 보니 윤증현 기획재정부장관을 재정경제부장관이라고 해놨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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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행정논총」 제49권 4호에 실린 박천오 교수의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미와 인식’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우리나라 중간ㆍ고위직 공무원들은 정치적 중립을 직업공무원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로 의식하면서도 실천에는 소극적이어서, 소신 있는 정책 입안ㆍ집행보다는 정무직에 대한 충성을 더 우선시한다고 한다. "국민에 성실봉사 의무와 책임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영혼이 없는 존재보다 영혼이 있는 존재가 돼야" 하겠지만, "공무원이 정책수립ㆍ정책집행 과정에서 자기주장을 집권당이나 대통령의 뜻까지 거슬러 가며 유지하는 ‘전문직업적 접근’은 현실적으로 어렵거니와 타당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는 용어는 미국의 행정학자 랄프 험멜(Ralph P. Hummel)이 1977년에 펴낸 『관료적 경험(The Bureaucratic Experience)』에서 관료제를 비판하면서 공무원은 생김새가 인간과 비슷해도 머리와 영혼이 없는 존재라고 언급한 데서 유래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명박 정부 출범 직전인 2008년 1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국정홍보처 업무보고에서 처음 등장했다. 당시 한 인수위 전문위원이 참여정부의 언론정책을 따지면서 국정홍보처 폐지를 강조하자, 김창호 국정홍보처장이 “우리는 영혼없는 공무원들”이라고 하소연한 데서 비롯되었다. 공무원 스스로 별칭을 단 것이다. 이후 ‘영혼 없는 공무원’은 일종의 관용구처럼 회자되기 시작했고, 실제 공무원들이 스스로에게 영혼이 없다는 걸 보여준 사례는 수두룩하다.
 
취임일성으로 "기획재정부 공무원들은 영혼을 가져도 좋다"고 했던 윤증현 기획재정부장관은 2010년 초 당시 고용장려세제가 세수만 축내고 효과는 없다고 극구 반대하다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고용증대투자세액공제제도를 들고 나왔다. 이에 대해 국회의 질책이 쏟아지자 그는 "그래서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고 말하지 않느냐"고 궁색한 변명을 했다.
 
중앙부처 뿐 아니다. 무상급식 문제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시의회와 대립각을 세우던 무렵 서울시 공무원들은 온갖 무상급식 반대 논리를 만들어 보고하던 이들이었다. 시의회가 무상급식 지원 조례를 제정하자 권한 밖의 일을 시장에게 떠넘긴다며 행정안전부의 유권해석을 의뢰하기도 했고, 대법원 소송까지 제기했으며, 2010년 말에는 시의회에는 예산 편성권이 없다는 이유로 무상급식 지원 예산 집행을 거부하기도 했다. 그러더니 시장이 바뀌자 태도를 하루아침에 바꿔 그동안 무상급식을 반대했던 이유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첫 결재로 무상급식 예산 지원안을 내밀었다.
 
최근 행정고시 출신의 한 공무원이 17년간의 공직생활 끝에 도달한 3급 부이사관 자리를 버리고 4급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하향지원'하기로 하면서, 공무원 생활 마감의 직접적인 계기로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을 들었다. 그는 “행시 출신의 이른바 ‘공무원 엘리트’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민간인 사찰에 가담한 걸 보고 같은 공무원으로서 자괴감을 느꼈다”며, 참여정부 때 대놓고 노무현 대통령과 정부 정책을 비판하던 고위직 공무원들이 이명박 정부 들어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고 하지만 국민에게 영혼을 맞추면 된다”고 했다.
 
영혼이 없는 공무원의 극단은 'VIP께 절대충성하는 친위조직', 'VIP에게 일심(一心)으로 충성할 비선'이었던 '친이(親李)세력'과 '영포라인'의 비선 공무원들일 것이다. 최근 공개된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업무추진 지휘체계'(2008년 8월 28일 작성) 문건에 따르면, '정부의 모든 권한은 대통령이 위임하기 때문에 (비선 조직에) 정당성이 있고 형식적 업무분장에 구애될 필요가 없다'고 되어 있다. 머리와 영혼이 없는 이들 공무원들이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르니 국정이 잘 돌아갈 리 없다.
 
이유야 어떻든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는 용어가 무소신 공무원을 비꼬거나 자기합리화하는 도구가 된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분석과 이를 풀어보려는 노력 없이 영혼 없는 공무원만 탓해서는 안 된다. 사실 영혼 없는 존재가 어디 공무원뿐인가. 공무원 보고 영혼이 없다고 질타하는 언론사 기자들이나 일반 기업에 종사하는 회사원들은 과연 영혼이 얼마나 있을까?
 
영혼 없는 공무원이 양산된 데에는 관료사회의 고질적인 권력추종적인 문화와 함께 역대 정권의 공무원 사당(私黨)화ㆍ도구화가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공무원으로 하여금 정권과 여당의 충복이기를 요구하고, 영혼 없는 공무원으로 살도록 강요하는 현실 자체가 문제다.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은 정치적 독립성을 의미하는 것일 뿐 정치적 무권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현재 공무원들은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누려야 할 정치적 기본권을 제약당하고 있다. 2009년 개정된 공무원 복무규정에 따르면 공무원이 집단이나 연명, 또는 단체 명의를 사용하여 국가 정책을 반대하거나 국가 정책의 수립ㆍ집행을 방해하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다. 영혼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국민에게 영혼을 맞춘단 말인가? 이를 바란다면, 공무원의 정치적 기본권을 보장하고 공무원 복무규정을 개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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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4 00:02 2012/06/04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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