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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 재구성 위한 세가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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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질문과 그에 대한 답에 대해 동의한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사실 아래 글에 나오는 것처럼 진보정치의 재구성에 있어서 가져야할 원칙조차 정리하기 어렵기는 하다. 하지만 좀더 구체화되었으면 한다.

 

홍세화 대표의 글을 추가하면서 그에 대해 코멘트를 했다가 날려먹었다. 이전 코멘트에선 이를 다른 좌파진영이 어떻게 받아들일까가 궁금하다는 등 여러가지를 언급했는데, 다시 언급하기 싫다.

  

그나저나 내가 서야할 자리는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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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 재구성 위한 세가지 질문 (레디앙 / 2012년 8월 13일, 6:33 PM)
[기자 생각] 진보정치 재구성과 재건 가능한가?
하나, 왜 변해야 하는가? : 진보정치 공멸의 위기 인식 필요
역사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 통합진보당의 내분과 진보정치의 빅뱅이 진행되는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통합진보당 구당권파들은 현재의 분당과 빅뱅의 흐름을 조준호 혹은 참여당계의 의도와 음모가 깔려 있는 진보정치 파괴 공작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신당권파들은 구당권파들이 진보정치 위기의 주범이고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패권 세력이라고 규정한다. 진보신당을 비롯한 통합진보당 외부의 진보세력은 그들의 내분과 갈등에 대해 구당권파, 신당권파 모두가 진보정치를 위기에 몰아넣은 공동 책임이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과연 이 사태에서 자유로운 자 누구인가? 없다. 누구에게 좀 더 많은 책임과 원인을 돌릴 수는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책임의 비중과 주범을 규정하고 낙인찍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치의 존재 자체가 위태로워지고 공멸에 처한 상황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 인식에서 진보정치의 혁신, 변화, 재건의 몸부림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정치세력, 운동세력들은 자신의 논리적 이념적 정당성을 갖고 있다. 그것이 없으면 세력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정당성과 올바름은 그들 ‘내부의 성원’이 아니라 그 ‘외부의 대중’에게 끊임없이 검증받아야 한다.
정치와 운동의 영역에서는 대중들에게 보여지고 이해되고 비판 혹은 지지받는 모습이 정직한 자신들의 모습이다. 대중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다. 그 관계를 부정한다면 정치와 운동은 대중으로부터 고립된 분파들의 자기 정당성 고집과 무한 경쟁밖에 남지 않는다.
지금 통합진보당 사태의 후과와 파장은 진보정치의 공멸로 드러나고 있다. 국민들은 물론이고 진보정치의 주요 기반이었던 노동자 민중 속에서도 진보정치에 대한 회의와 냉소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통합진보당이라는 울타리 내에 있던 세력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치라는 공통의 이름을 사용하고 그것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고 했던 모든 진보정치 세력을 대상으로 한 냉소이고 비판이다.
이것에 대한 답변이 “우리는 아니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는 것이 되어서 안되고, 그런 논리로 피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번 사태는 진보정치 내부에서 서서히 쌓여가고 있었던 패권주의의 논리, 정파 중심적 조직운영, 진보의 정체성에 대한 희석과 약화, 보수정당의 지분 정치와 정치공학적 습성에 대한 모방들이 폭발한 것이다.
그리고 그 부정적 관행과 문제점들에 대한 집착이 가장 강한 집단이 통합진보당의 구당권파였던 것이다. 결국 그들이 진보정치의 가장 큰 기득권 세력이었기 때문에 그 과거의 관행의 변화와 단절에 대해 가장 소극적이고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구당권파들은 억울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의 모순들과 문제점들이 폭발할 때 변화의 폭발에 저항하거나 소극적일 때 역사와 운명은 무자비하게 다가온다. 그렇게 구당권파는 진보세력에서 가장 패권적이고 가장 문제적인 집단으로 규정된 것이다. 그래서 통합진보당의 구당권파와 신당권파의 대립을 선과 악, 상식과 비상식의 대립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신당권파를 선한 집단이자 상식적인 집단이라고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질문은 진보정치가 대중으로부터 외면받고 부정당하는 상황, 진보정치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진보정치의 부정적 관행을 어떻게 혁파하고, 선거공학과 지분정치가 아닌 대중적 진보의 정체성과 가치를 어떻게 올곧게 세울 것이냐, 그런 가치가 살아있는 새로운 집을 어떻게 다시 지을 것이냐 라는 질문이다.
 
둘,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가? : 진보의 리모델링이 아니라 재건축이어야
새롭게 변화를 모색할 때 두가지 길이 있다. 비유하자면 리모델링과 재건축이다. 그 둘의 차이는 기둥과 골격을 두고 외양을 새로 정비하는 것이냐, 기둥과 골격까지 새롭게 다시 세우느냐의 차이이다.
통합진보당 내부에서 개조하고 혁신하고 새롭게 하겠다는 것이 구당권파들의 논리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잃어버린 대중들의 신뢰, 노동자 민중의 지지를 복원할 수 없다. 그 만큼 위기는 근본적인 것이다. 
통합진보당의 골격은 진보정치의 정신을 견지하면서 대중화 노선을 통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정당, 수권가능한 진보정당이라는 논리로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 통합연대의 공학적 통합이라는 골격에 근거하였다. 이질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상충하는 세력들의 단순 합산으로 덩치를 키우고, 그 커진 덩치가 대중화 노선이라고 생각한 꼴이다.
그러나 그 이질성은 진보의 정체성을 희석시켰고, 진보정치의 부정적 관행과 문제점들은 단순 통합이라는 조직의 골격을 무너뜨린 것이다. 그런 공학 정치와 덩치키우기 식의 왜곡된 진보정치를 주도했던 이들이 구당권파였다. 그런데 이들은 다시 통합진보당을 리모델링해서 가자고 주장한다.
부실 건축물의 외양만 고쳐서 사람들에게 살자고 하면 그것은 범죄 행위이다. 부실의 원인을 제거하고, 골격과 기둥이 무너졌다면 새로 집을 짓는 것이 현명하고 책임있는 행위이다. 그래서 통합진보당 신당권파의 새 정당 창당 움직임에 대해 참여계 주도의 개량화된 정당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구당권파나 그 동조 세력들의 전형적인 적반하장 논리이고 자기 정당화의 옹색한 논리일 뿐이다.
마치 자신들이 진보운동의 정신을 견지하는 세력이고 진보운동에 침투하여 진보정치를 개량화, 우경화시키는 자유주의세력 참여당 계열에 맞서 싸우는 것으로 포장하려고 하지만 이것은 대중과 진보적 대중들을 우롱하는 행위이다.
바로 그들 구당권파들이 참여당과의 통합을 가장 광폭하게 추진하였고 마치 그것이 진보정치의 대중화, 집권 가능한 정당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석기 의원이 비례대표 경선에서 자랑스럽게 바로 자신이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통한 집권 가능한 진보정당 노선을 설파하고 사람들을 설득한 전략가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대중들이 그 기억들을 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게다.
진보정치와 진보운동을 재건축할 때는 깊고 튼튼하고 폭넓게 재구성해야 한다. 깊어야 한다는 것은 진보정치의 뿌리인 노동운동의 혁신과 연계해야 하고(노동운동과 무관하거나 별개로 진보정치를 사고하는 것은 부실화의 지름길), 튼튼하다는 것은 명망가 개인의 정치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조직 민주주의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이고(지도자의 리더십과 개인 정치에 조직이 좌우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 폭넓어야 한다는 것은 통합진보당 내의 세력 재편이 아닌 진보정치 전체의 재구성, 재건축(정체성과 가치에 근거하여 진보정치의 주체를 확장하는 것은 필요)이 되도록 고민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셋,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 공통의 지반 위에서
지금 진보정치 재구성, 새로운 진보정당의 창당을 반대하는 세력은 통합진보당의 구당권파와 그 동조 세력이다. 그렇다면 그 외의 세력과 주체들은 통합진보당 혁신모임에 참여하는 통합연대, 참여당 계열, 인천연합, 비연합 자주세력과 민주노총의 산별대표자들과 노동운동의 주요세력인 국민파 중앙파 현장파 그리고 진보신당과 녹색당과 같은 통합진보당 외부의 정치집단들이다. 이들 중에는 통합진보당 구당권파와 다른 의미에서 진보정치의 재구성에 동의하지 않는 세력들도 있을 것이다. 좌파정당이 목표이기 때문에 우경적 세력과는 절대 함께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별도의 당을 추진한다는 목표를 가질 것이다.
이들과 통합진보당 구당권파를 제외하고 상당한 이념과 노선의 스펙트럼을 가진 통합적 진보정당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반면 통합진보당 vs 진보신당 녹색당의 구도에서 더 세분화되고 분화된 서너개의 복수 진보정당 시대가 도래할 가능성도 있다.
이 상황의 미래에 대해 예측하거나 어느 한 길이 올바르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진보정치의 재구성이 제기되는 현 상황에서 각 세력들이 함께 하는 정당이 될지, 아니면 각각의 당으로 더 분화할 지를 가늠하는 것은 서로 ‘공통의 정치적 정책적 지반’을 가질 수 있느냐는 질문이 먼저 제기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통합연대의 3자 통합이 파탄이 난 결과는 참여당이라는 이질적 세력이 참여했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진보정당을 지향할 것인지에 대한 공감대와 공통지반을 확인하고 공유하는 과정이 없이, 총선과 선거 정치에서의 지분을 더 많이 확보하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만이 공통 지반으로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 지반이 붕괴하였기 때문에 파탄의결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 주요 정치 세력들간에 공통의 지반 형성이 가능한지, 최소한의 정치적 컨센서스가 가능한지를 확인해야 한다.
어떤 가치와 지향, 정책이 새 정당의 ‘진보성’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정당의 목표이기도 하고 정당의 성격과 기반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북한 문제나 애국가 같은 예민한 쟁점들도 가치와 정책적 맥락에서 재정리해야 한다. 또 하나는 대선에 대한 후보 전술, 야권 연대, 권력 참여 등의 문제도 공통의 지반 위에서 논의할 수 있는지 확인되어야 한다.
새로운 진보정당에서 야권 연대와 권력 참여가 모든 정치활동의 기준이자 목표가 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구당권파들의 정치적 입장과 하나도 차이가 없다. 다만 민주당 등 다른 세력에게 우리가 더 의미있고 상식적인 파트너라고 내세울 것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진보정당이 아니라 민주당의 효율적인 파트너가 되기 위한 리모델링에 다름 아니다.
또한 민주당 등과의 연대에 대해서는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용인할 수 없다는 논리, 민주당 뿐만 아니라 통합진보당 내의 어떤 세력과도 함께 할 수 없다는 주장, 심지어 민주노총도 분리시키고 좌파노총을 따로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는 분파의 논리이지 대중적 진보정치를 지향하는 세력의 논리일 수는 없다. 그들에게 좌파와 진보라는 것은 다른 세력과 공유할 수 없는 자신들만의 독점물일 뿐이다.
이런 정치전술과 관련한 이슈와 쟁점은 진보의 가치라는 기준에 근거해서, 또는 독자적 진보정당의 성장과 발전에 도움이 되는가 독이 되는가라는 기준에 근거해서 민주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잊어서는 안되는 것 중의 하나가 진보정치의 재구성이라는 플랜은 주요 정치세력, 주요 개인과 집단들이 책임져야 할 역할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마치 대중들, 현장의 노동자들, 진보정치의 지지자들을 구경꾼으로 전락시켜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상층과 하층을 나누는 이분법은 잘못된 것이지만 몇몇 세력들의 합종연횡이나 정파들의 이합집산으로 진보정치의 재구성을 사고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주요 정치세력들의 공통의 지반을 만들고 확인해야 한다는 점은 정파들의 협상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 대중과 노동자 민중 속에서 하나의 독립적인 진보정당으로 서는 것이 설득력과 신뢰를 얻고 정당성을 확인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래서 다시 노동자와 노동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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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대선, 피할 수 없는 도전 (홍세화, 2012/08/13 11:15)
홍세화 대표가 진보신당 당원 토론용으로 8월9일 대표단-광역시도당위원장-부문위원장 연석회의에서 발표한 것
1. 역설의 연쇄 ― 총선과 대선 사이
2008년 미국발 금융 붕괴로부터 본격화된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위기가 한국 자본주의에 1997년에 이은 2차 파국을 예고하는 시점에서 진보정당운동의 주요 분파가 이미 실패한 자유주의적 대안으로 자진해서 편입된 것이야말로 역설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자본주의가 자멸의 징후를 뚜렷이 드러내는 현실 앞에서 이 체제를 극복하는 대안사회를 제시해야 할 진보정치가 먼저 자살해버린 이 역설보다 더한 비극이 있을까?
총선 직후 곧장 노출된 통합진보당 내부 파벌 간 쟁투는 제도정치 안의 지분 확대를 목표로 한 자유주의-민족주의-진보 세력 연합의 실체를 예상보다 이르게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른바 구당권파에 대한 제어에 실패하자 다른 분파들이 ‘탈당하지 않은 채 새로운 진보정당을 창당’한다는 기발한 방법을 통해 도생을 꾀하는 모습은 스스로 자초한 비극을 비극으로 정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세력들이 연출하는 희극이다. 이 경우에도 희극이 비극보다 참담하다. 자신들이 부정하다고 낙인찍은 정파의 뱃속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거기서 ‘새로운’ 당을 잉태하겠다고? 그리하여 그 희극의 무대에 바깥에 남아 있는 진보세력들을 초대하겠다고? 이 사기극은 대체 언제나 막을 내릴까?
통합진보당 사태 직후부터 이 당 내부에서 ‘노동정치의 실종’이란 말이 운위되는 걸 보면서 나는 또 하나의 역설을 고통스럽게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외환위기로부터 시작된 IMF 구제금융기. 이와 함께 본격화된 한국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이에 따른 노동에 대한 자본의 총공세(1996-1997년 총파업에 대한 이 자본의 대반격이라고도 할 수 있는)가 바로 개혁-자유주의 정권의 주도로 수행되었다는 사실, 이것이 이른바 한국에서의 ‘민주화 10년’의 역설이다. 
‘노동정치의 실종’은 이미 바로 이때부터 시작되었던 게 아닐까? ‘노동시장의 유연화’라는 이름하에 진행된 자본의 총공세가 노동 안에 포섭과 배제, 거기서 발생하는 적대의 경계를 수없이 만들어내고, 노동사회를 하나의 수직적 분업체제로 재편할 때 우리의 노동정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자유주의 정권 하의 2004년 마침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오랜 노력이 원내 진입 성공으로 결실을 맺은 때로부터 지금까지 8년 동안 진보정치는 상층 조직노동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 말고 무엇을 추구해왔던 것일까? 분열된 노동계급의 연대가 누락된 ‘민중권력’이었나? 아니면 자유-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자유주의자들의 무능을 보완해주는 사회민주주의적 대안이었나? 그러나 이마저도 벗어던진 것이 바로 2011년에서 2012년에 이르는 사이 진보정치의 주요 분파들과 민주노총 상층관료들이 보여준 권력정치의 속살이 아니었던가. 
배제된 노동을 민주주의의 바깥에 방치한 진보정치가 자유주의와의 ‘연합정치’를 숙주 삼아 권력 주체의 일부분이 되거나 최소한 생존의 원리로 삼으려는 것은 일종의 숙명일 수 있겠다. 그리하여 자신들의 시야를 생존의 벼랑 끝에 몰린 노동이 아니라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려 하면 할수록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그들과의 경계는 흐려질 것이다. 문제는, 이 자유주의-진보주의의 ‘연합정치’가 좌파정치의 다른 가능성을 몰수하고 새로운 주체형성을 질식시키는 것을 겨냥한다는 사실이다.
‘대통령 직선제’를 출발시킨 이른바 ‘1987년 체제’의 탄생 이래 진보(좌파)정치는 언제나 자유주의 정치세력들에 의해 ‘선거연대’를 요구받아 왔다. 그것이 1인 권력 중심의 대통령제 아래서 극우-보수주의의 정치적 반동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 아래 추진되어 왔음은 부연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최근의 몇 년 동안처럼 이 ‘선거연대’가 되려 진보정치 분파로부터 이처럼 자발적으로 제기된 적은 없다고 하겠다. 어떤 의미에서 타 정치세력들과의 연대나 연합은 좌파정치의 정치적 권능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목격한 작금의 ‘연합정치’는 좌파의 정치적 능력을 정치적 구걸행위로 전락시킨 것 아니었던가? 자유주의 정치의 울타리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스스로 갇힌 진보정치가 자본의 정치를 위협할 수 있을까? 기껏 자본권력의 옷에 흙을 묻히는 것 말고.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아니 제도정치의 권력게임에서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거나 곤경이 깊어질수록 그들은 ‘선거연대’를 마치 시대의 정언명령처럼 되뇔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좌파정치의 소멸을 부르는 주술이다. 이 주술에 따르면 2012년 대선에서 ‘좌파’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또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이들과 함께 우리는 존재 상실과 망각의 강을 건널 것인가? “권력은 이미 시장(자본)에 넘어갔다”고 고백한 자유주의의 실패가 CEO 대통령을 출현시켰다는 정치적 상식도 숨기고 이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에 실패한 자유주의 정권의 복권을 위해 좌파정치-운동을 ‘실체 없는’ 존재로 전락시키려는 이 시도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2012년 대선은 지난 시기의 그것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한미 FTA 이후 심지어는 공공부문의 노동까지도 배제된 노동의 골짜기로 몰아넣는 현실에서 좌파정치-운동을 처음부터 무장해제시키려는 이 정치구도에 파열구를 내야하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이번 대선을 비켜갈 수 없다. 그것뿐인가? 2012년 대선, 우리는 지금 ‘주체 소멸의 위기’ 앞에 서있다. 이 대선 공간에 박근혜-김종인의 ‘경제민주화’와 ‘좌클릭’된 자유주의자 루스벨트를 꿈꾸는 ‘정직한 CEO’ 안철수 들러리 ‘진보후보’ 사이의 선택만을 남겨놓을 때 대선 이후 좌파정치-운동은, 정치의 영역에서도 사회운동의 영역에서도 존립의 기반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총선에서 패배한 우리가 대선을 돌파할 여력이 있는가라고 묻는 것은 올바른 접근법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 먼저 물어야 한다. 자유주의 정치가 만든 역설이 진보정치의 우경화라는 역설로 이어지는 이 연쇄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이 역설들이 강요하는 주체 소멸의 위기에 적극 대웅하지 않고도 대선 이후 우리가 좌파정치의 주체로 남아있을 수 있기나 한 것일까, 라고. 
 
2. 역설의 교훈 ― 어디에서 다시 시작할 것인가
진보정당운동의 굴절이 불러일으킨 파고는 지금 이 시간에도 여전히 우리의 발아래서 거칠게 출렁대고 있다. 통합진보당의 출현으로 주변으로 밀려나야 했던 우리가 지난 총선에서 바다 아래로 좌초하고 말았다면, 다가오는 12월 대선은 전체 좌파정치-운동의 존재 자체를 삼켜버리려 하고 있다. 이 거대한, 위험한 도전에서 비켜설 수 없다면,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것인가?
좌파(정치)는 어디에 존립하는가? 2011년 ‘9·4 당 대회’ 이후부터 2012년 4·11 총선에 이르기까지, 실제로는 4기 대표단이 꾸려진 때로부터 5개월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려 했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을 하려 하는가?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남아있는 자’들로서의 우리는 낡은 진보정치가 사라진 자리에서 새로운 좌파정치의 시작을 열기 위해서도 ‘근원’으로 되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 근원은 떠나온 과거이자 도달해야 할 미래이다. 좌파는 다른 세상을 꿈꾸는 자들이다. 이 꿈 속에서 ‘아직-오지 않은’ 미래를 선취하는 자들이다. 에른스트 블로흐에게서 빌려 온다면, 우리가 꾸는 꿈은 ‘밤꿈’이 아니라 ‘낮꿈’이다. 힘겨운, 고통스러운, 절망스러운, 대낮의 일터에서, 거리에서 일하며 저항하며 꾸는, 지금과는 다른 내일을 갈망하는 ‘낮꿈’이다. 이 ‘낮꿈’을 꾸는 자가 일어서서 그 꿈을 실천을 통해 구체적으로 창조해내는 것 이것이 좌파정치-운동이다.
지금 이 ‘낮꿈’을 꾸며 오늘을 견디는 자들은 누구인가? 나는 그들은 다름 아닌 이 시대의 ‘배제된 자(노동)’들이라고 생각했다. ‘배제된 노동’들 안에 쳐진 경계들은 일단 논외로 하자. ‘배제된 노동’은 두 번 버림받은 자들이다. 한 번은 자본과 권력에 의해, 다른 한 번은 조직노동에 의해. 오늘 진보정당운동과 조직노동의 굴절과 파국은 이 ‘배제된 노동’을 배제함으로써 시작되고 예고된 것이었다. 물론 진보정치와 조직노동은 자본과 권력을 향해서 ‘비정규직 철폐투쟁! 결사투쟁!’을 열심히 외쳤다. 비정규직의 노조가입이 배제된 현실에 대해서는 외면하거나 침묵하면서!
이 ‘배제된 노동’을 비례전략의 전면에 내세우려 했던 우리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 실패는 잘못된 목표 설정으로부터 온 것일까? 어떤 이들은 내게 이렇게 묻기도 했다. ‘배제된 노동’이란 말은 어떤 실체를 가지는 것이냐고. 혹은 그들에게 조직노동과 다른 ‘특별한’ 무엇이 있는가라고. 솔직히 다른 누구보다 내가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없다. 다만 한 가지는 안다. ‘배제된 자’들은 ‘배제’되었기 때문에 다르다는 사실! 그들이 새로운 좌파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느냐고? 그러한 주장은 그간의 진보좌파정치운동을 다시 무질서와 혼란 속으로, 혹은 또 다른 분열 속으로 모는 결과를 낳지 않겠냐고? 그렇다면 그동안 진보정치와 조직노동이 외쳐온, 분열된 노동계급의 단결은 대체 어떤 실체를 갖는 것이었을까? 노동의 수직분업체제를 반영한, 그것을 빼닮은 ‘배제된 노동’의 진보좌파의 하위주체로서의 포섭을 말하는가?
내가 아는 한 ‘배제’는 이 시대의 가장 정치적인 언어이자 새로운 노동정치의 기점이 되는 개념이다. 생존의 최전선에서 가장 고통 받고 가장 치열히 싸우는 ‘배제된 노동’을 단지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정치의 주체가 되게 하는 것, 나는 이것만이 전체 좌파진영을 무기력 상태로 몰아넣은 자유주의-진보주의 ‘연합정치’가 만들어낸 역설의 연쇄를 막아내고 좌파정치의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진보정치가 왜 의회주의의 틀 속에 자신을 가두게 되었는가? 나아가 왜 자유주의 정당과의 연합정치를 생존의 원리로 삼게 되었는가? 우리들 자신을 향해서도 질문을 던지자. 진보정치의 우경화를 거슬러 좌파진영의 단결을 촉구하며 시작했던 지난 총선에서의 우리의 싸움은 왜 남아있는 좌파-노동 주체들의 연대를 의미 있게 이루어내지 못했을까? 총선 이후 ‘새로운 진보좌파정당건설’ 추진이라는 우리의 목표 역시 왜 여전히 답보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람시가 말했던가? 진정한 위기는, 낡은 것은 사라졌는데도 새로운 것은 생겨나지 못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 있다고. 여전히 낡은 노래를 부르자고 선동하는 입을 틀어막고 새로운 희망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것인가?
다시, 문제는 민주주의이다. 그것도 그냥 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적 기율에 의해 통제되는)가 ‘어떤 민주주의인가’를 다시 묻는 질문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누가 제도정치의 역할을 부정한다고 했는가? 슬라보이 지젝의 말처럼, 오늘의 위기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와 이혼하려는 데 있다. 이 민주주의를 재구축하기 위해서도 정치 공간 안으로 ‘배제된 자’들의 침입을 허용하는 ‘다른 민주주의’를 요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도 이번 2012년 대선에서 좌파는 ‘절차적 민주주의’ 안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게 하는 ‘1987년 체제’의 낡은 유산을 극복할 새로운 정치질서(권력구도를 포함한)를 요구하는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이 ‘배제된 자들의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이 없다면, 이른바 이후 ‘2013년 체제’는 “빌 게이츠가 빈곤과 질병과 싸우는 가장 위대한 인도주의자이고 루퍼트 머독이 자신의 미디어제국을 통해 번 수억 달러를 동원하는 가장 위대한 환경주의자가 되는 세계”가 이 땅에도 열릴 것이다.
‘배제된 자들의 민주주의’는 자본 정치가 만들어놓은 ‘포섭된 노동’과 ‘배제된 노동’의 경계를 허무는 것을 목표로 하지 ‘포섭된 노동’을 다시 배제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다시 지젝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배제됨으로써만 사회에 속하게 되는, 배제가 포함의 형식인 자들은 사회적 매개 없이 곧바로 인류의 보편성을 체현한다고 한다. 나는 이 보편성을 ‘시대정신’로 옮겨놓으려 한다. 이것은 내가 ‘전태일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했을 때 바로 그 정신이라 말할 수 있다. 보편성-시대정신을 담지하고 있는 ‘배제된 자’들은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연대의 주체이다. 주식투자에 날밤을 새는 ‘포섭된 자’들이 연대의 주체일 수 있을까? 나는 이 땅의 ‘배제된 노동’의 주체들에게 호소하고 싶다. 이번 대선은 분열된 노동계급의 연대를 위해, 새로운 좌파정치의 탄생을 위해 당신들이 연대의 주체로 먼저 손을 내밀면 안 되는가? 당신들이 주체가 되어 절멸의 위기 앞에선 좌파정치를 재구축하면 안 되는가?
바로 이때 낡은 좌파정치는 새로운 ‘해방정치’로 거듭날 것이다. 우리는 좌파의 소멸을 강요하는 2012년 대선 구도를 지금까지의 상층연합만으로는 돌파할 수 없다. 우리를 흩어지지 않게 결속시키는 강력한 힘은 위로부터 기획된 제안이 아니라 다기한 ‘배제된 노동’ 주체들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결속으로부터 생겨날 것이다. 오늘 우리 중 누가 ‘해답’이란 걸 가지고 있겠는가? ‘잃어버릴 족쇄’도 없는 배제된 노동의 결의에 찬 저항 외에 이 지리멸렬한 상황을 어떻게 넘어갈 수 있겠는가? 
 
3. 역설의 변증 ― ‘좌파연대 2012 대선운동’를 통한 대선공동대응을 제안한다
길은 끝났다고 생각하는 데서 다시 시작되고, 다 지워졌다고 생각하는 때로부터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이것이 ‘역설의 변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당원 동지 여러분 모두에게 이제 이 ‘역설의 변증’이 지시하는 모험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자는 제안을 하고자 한다. ‘아래로부터의 연대’를 통한 좌파공동대응을 실현시키기 위해 정치조직으로서 우리가 가진 기득권이 있다면 모두 버리고 이 모험의 길에 나서자고. 
당 대표인 나와 4기 대표단 모두는 이미 총선 전 새로운 진보좌파정당 건설을 위해 밀알이 될 것임을 결의한 바 있다. 어쩌면 이번 2012년 대선은 흩어진 진보좌파세력들의 연대를 통해 새로운 좌파정당을 탄생시킬 마지막 기회가 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무엇을 주저하고 무엇을 버리지 못할 것인가? 나는 이것이 총선 패배 이후 4기 대표단이 총사퇴라는 책임의 형식을 선택하지 않고 임기를 지속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실천 방향은 당내 논의를 별도로 구체화해 가되, 나는 우선 더 이상 시간을 늦추지 않고 좌파공동대응을 시작하기 위한 첫 출발로 ‘좌파연대 2012 대선운동’의 결성을 전체 제 좌파세력들에게 제안하려 한다. 우리 당은 이 ‘좌파연대 2012 대선운동’의 제안자일 뿐, 그리고 한 주체로서 참여할 뿐 정치조직으로서의 기득권을 내려놓을 것이다. 정당으로서의 경험과 자원은 의무의 확대로 작용할 뿐이지 권리의 근거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아래로부터의 연대’를 통한 좌파공동대응이 모험이라고 함은 이것의 실체화를 위해 우리 당이 독자적으로 후보를 선출하지 않고 ‘좌파연대 2012 대선운동’를 통해 도출된 원칙에 따른 경선원칙을 준수하고 ‘민중 선거인단’의 투표결과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나는 우리가 여기서 더 나아가 다양한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 조건을 활짝 열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4월 총선에서 우리가 경험했듯이 김순자 후보의 경우처럼, 좌파공동대응의 후보가 정치조직이나 정파조직의 대표 간 경쟁이 아니라 감추어진 정치역량을 발굴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미리 만들어진 어떤 지도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연대운동의 주체들인 제 집단과 개인을 최대한 결집시키기 위해 상층정치협상에 묶이지 않는 연대의 형식과 내용을 고민하고 또 고민해갈 뿐이다. ‘좌파연대 2012 대선운동’의 명칭을 정하는 것에서부터 ‘민중 선거관리위원회’ 구성, ‘민중 선거인단’ 모집, 대선후보 공동선대본, 대선 공동정책위원회, 선거운동에 이르는 전 과정에 우리는 우리의 경험과 아이디어, 기능으로 헌신할 뿐이지 지분보장을 결코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지도가 없는 모험이라는 말이 ‘당 해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현존하는 정치조직으로서의 자기내용을 가다듬고 발전시켜가는 것은 정치조직으로서의 당연한 활동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것이 새로운 좌파정당건설 과정과 적대적 갈등에 놓이지 않으리라는 것은 나의 개인적 판단이자 당 대표로서의 소신이기도 하다. 정치조직으로서의 자기확신과 한계를 동시에 인식하는 것, 그것은 우리의 미덕이지 감추어야 할 부끄러움이 아니다. 다만 우리 내부의 고유한 일정의 진행이 좌파공동대응을 가로막을 만큼 자기완결성을 가질 때 우리는 이미 정해져 있는 재창당의 일정과 수준에 대해 조정이 가능해야 한다는 점만 확인하도록 하자. 
‘진보의 죽음’이 운위되는 현실에서 아직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아래로부터의 연대’를 통한 좌파공동대응이 가능하겠냐고 미리 체념하지 말자. 그래서 우리가 먼저 대선 돌파의 의지를 밝히고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겠다고 천명하려는 것이다. 가장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소멸의 각오로 우리 자신을 던지는 이 선택이 좌파공동대응을 성사시키는 불씨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땅의 ‘배제된 자’들과 함께 파국과 절멸 너머에서 열리는 희망의 여명을 함께 목격하게 될 것이다. 부디 우리 모두가 힘을 모을 수 있기를. 이 애처로운 안간힘이 비극적 역설의 연쇄를 희망으로 바꾸어내는 변증을 이룰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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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4 02:04 2012/08/14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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