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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광소 -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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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록 복권을 사진 않지만,

복권 한장을 살 때마다 행복해하는 이들에게 '그딴 것을 사서 뭐하느냐'고 말하지 못한다. 

하지만 몇 백만분의 일의 당첨확률을 가진 복권에 인생의 낙을 걸도록 만든 이 사회는 용서하지 못하겠다.  



                                                표광소


돈 천만 원이면
빚보증 잘못 선 아우의
빚을 대신 갚을 수 있고,
 
삼천만 원이면
칠순 넘어서도 노점상하는
어머니께 시장 근처에 깨끗하고 햇빛 잘 드는
방 한 칸 얻어드릴 수 있다
 
일억이면
시골 가서 묵은 땅 탕탕 갈아엎어 찰지도록
유기농을 할 수 있고,
 
삼억이면
산동네에 떡하니
어린이 도서관을 지을 수도 있으련만,
  
삼억은 고사하고
돈 천만 원도 없었다
돈 천만 원은 고사하고
 
매달 생활비에도 빠듯한
월급봉투를 조마조마 기다리며
노동자 구보 씨는
 
서울 끝 산동네에서 하산하는 새벽마다
낡은 지하철 1호선에 비몽사몽
한 시간 이상 실려 갔다
 
사천원 이하의
얼큰한 김치찌개나 속 시원한 잔치국수를 먹으며,
밥 먹듯이 야근하고,
 
밤늦게 돌아와 눈 맑은
두 아이랑 반짝반짝 별빛 눈 맞출 짬도
힘도 없이
 
아홉 평 지하 방에 누워,
어느 날 갑자기 싹둑 목 자르는 가위에 눌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외쳤다
 
꿈 깨어, 편취하며 탈세하며 돈세탁하며 뒷돈 챙기며
호화저택에 사는 사장의 띵한
그 속내야 빤해도,
 
양심선언이든 고발이든 했다가
탈주자로 한번 찍히면 그나마
노동자 노릇도 못하고 노숙자로 한뉘 떠돌까봐
 
눈먼 3년 귀먹은 3년 벙어리 3년 벌벌 떨었어도 그 사이
복권 한 장 안 샀다고, 노동자 구보 씨가 오늘은,
어쩌다 소주 한 잔씩 마신 친구들한테 주사를 부렸다
  
삼억짜리 복권에만 붙어도 한방에 빚 갚고,
깨끗하고 햇빛 잘 드는 방에
어머니도 모시고, 묵은 땅 탕탕 갈아엎어
찰지도록 농사하며, 도봉산 무수(無愁)골 같이
잔걱정 많은 산동네에 떡하니
어린이 도서관도 지을 수 있다고 반짝이는
  
그 속내야 빤해도,
기적을 안 바라고 사기도 안 친다고,
가난하지만 부끄럽지 않다고
  
하늘을 우러러
별들에게 큰소리 한번 쳤다,
모처럼 불콰하여
  
계간 <진보평론>21호. (2004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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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27 22:38 2006/10/27 22:38

2 Comments (+add yours?)

  1. 로자 2006/10/28 05:42

    흐... 나도 복권 당첨되면 뭐 하고 뭐 하고 많이 생각하는데.... 그런데 문제는 복권을 안 산다는 거~

     Reply  Address

  2. 새벽길 2006/10/28 14:59

    저는 복권 당첨될 생각조차 하지 않는데요. ㅋㅋㅋ

     Reply  Add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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