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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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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4/11/3에 실린 문광훈 교수의 자크 데리다에 관한 글.

아직 자크 데리다의 글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앞으로는 읽을 가능성이 있을까?

출처: http://www.khan.co.kr/news/artview.html?artid=200411021755511&code=99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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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읽는 세상] 자크 데리다의 죽음

〈문광훈 고려대 아세아연구소 교수·독문학〉

 

어떤 행동이 바른 것인가를 아는 것은 깊게 생각하는 데서 오고, 이런 생각은 우선 넓게 느낌으로써 가능하다. 넓게 느끼고 깊게 생각할 때, 실천도 바른 방향을 잡을 수 있다. 그러니까 사고는 감각과 행동을 이어주는 다리 구실을 한다. 그렇다면 이 모든 감각과 사고 그리고 행동은 무엇으로 나아가는가. 그것은 아마도 자유 또는 자유로운 삶일 것이다. 지난 10월 초에 세상을 떠난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참으로 자유로운 사고를 자유로운 언어 속에 표현하면서 자유로운 삶을 살지 않았나 여겨진다. 뛰어난 학자치고 감각과 언어와 사고가 두루 자유롭지 않은 이가 있으랴만은 그의 저작은 철학과 문학, 정치와 예술의 경계 위에서 이 경계를 부단히 허물면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유를 실천했던 증거가 아닌가 한다.

 

학계는 그를 두고 한편에서는 해체론의 입안자로서 서구철학의 형이상학적 전통을 일거에 무너뜨린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사상가의 하나로 생각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학문적으로 연대감이 부족하고 정치적으로도 미심쩍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 경계 허물며 자유 실천 -

그의 글은 이런 면을 부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체로 역설적이고, 기존에의 비판은 전복적이며, 문체 역시 자주 유희적이다. 그러나 그는 정의나 법의 문제를 집요하게 주제화하기도 하였고, 팔레스타인의 권리나 망명자의 문제와 관련하여 현실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나는 그를 무엇보다 풍부한 착상 속에서 사고의 빛이 번득이는, 그래서 그 어디에서도 상투성의 외피를 던져버린 창의적 사상가로 이해한다. ‘차연(差延)’이나 ‘의미의 잉여’와 같은 많은 독창적 개념을 통해 그가 알려주는 것도 흔히 있는 구분의 근거가 얼마나 허약하고, 언어는 얼마나 불안정하며, 존재란 얼마나 취약하며, 세계는 또 얼마나 이질적인 것인가였다. 이것을 우리는 사변적 진술로서가 아니라 일상적 차원에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데리다의 철학을 단순히 ‘입장 바꾸기와 이를 통한 포용’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그의 사고는 하나의 입장으로 굳어진 이념과 원리의 폐해를 지적하고자 하였지 그 스스로 무입장적 혼돈 속에 빠졌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누구보다 확고한 신념 속에서 독자적 철학을 펼쳐갔다. 이라크 붕괴 이전에 미국을 ‘불량국가(rogue state)’로 불렀던 것도, 하버마스와 더불어 유럽의식의 각성을 촉구하면서 ‘새로운 인터내셔널리즘’을 주창한 것도 다름 아닌 데리다였다. 그의 글이 창의적인 것이라면, 이 창의성은 감각의 개방성과 사고의 자유로움이 아닐 수 없다. 그 글의 신선함도 여기에서 올 것이다. 열린 감각이 자유로운 사고를 가능하게 하고 이런 사고가 언어에 의해 가감없이 전달될 때 철학은 꽃피어 난다. 상상력의 해방이 학문의 한 존재이유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아닌 것에 열려 있을 때야 가능하다. 그래서 타자에의 열림은 그 자체로 사랑의 표현이 된다. 결국 사랑이 없다면 학문도 사고와 행동의 묵은 관습을 변모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이런 열림을 말할 수 있는가. 말해도 좋을 만큼 녹록한 것인가.

 

시인 김수영이 우리 문단과 현실의 낙후성을 지적한 것은 40년 전의 일이지만,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헌재의 판결을 보면서 어쩌면 앞으로 그만큼 더 지나야 우리 사회가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되지 않을까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500년 전 왕조의 관습헌법으로 민주정체 아래의 지금 헌법을 진단한다? 이보다 개탄스러운 일은 그러나 아직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거짓이 현실의 많은 질서를 이룰 때, 타자에의 개방 이상으로 절실한 것은 분명한 판별력이다.

 

- 현명하게 사는길 알려줘 -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합리적이고 무엇이 야만적인지에 대한 구분의 능력이 없다면, 사랑이나 연민은 물론 양보나 합의도 어렵다. 우리는 개혁과 민생의 문제에 대해, 그것이 동전의 양면과 같음을 아직 합의조차 못했다. 한 철학자의 죽음은 자유로운 사고와 현실의 간극 이외에 거꾸로 ‘절차적으로 사고’하는 일의 중요성을 알려준다. 집단의 이기로부터 벗어나 ‘모두가 현명하게 사는 길’을 찾는 데에도 사고의 여러 단계는 있고, 이 단계에서 구별의 능력은 그 바탕이 된다. 구별을 통한 자기입장의 규정 없이는 사랑도 오래가지 못한다.


입력: 2004년 11월 02일 17:55:51 / 최종 편집: 2004년 11월 02일 17:5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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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28 23:39 2004/11/28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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