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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노동 사회의 비젼 ; 자본주의 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김철식, 질라라비 4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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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철식인가. 좀 글을 쉽게 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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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노동 사회의 비젼 ; 자본주의 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질라라비 2003년 1월호(통권 4호) :: 2003-02-18   조회: 130

김철식 |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정책위원

 

1. 들어가며 
      

20세기 자본주의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가 위기의 상황에 들어섰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Arrighi, 1994; Brunhoff, 1999; Brenner, 1998; Dum?nil and L?vy, 1999 등). 또한 이러한 자본주의의 위기는 동시에 노동의 위기를 가져오고 있다는 사실에도 많은 학자들이 동의한다. 전세계적인 실업 및 불안정고용의 확산, 전통적인 노동조합 조직률의 쇠퇴, ‘고용없는 성장’에 대한 불안감 등등. 이러한 현상들이 가시화됨에 따라 ‘20대80’사회는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의 우울한 현실을 반영하는 설득력 있는 담론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상황에 대한 동의가 그것의 원인, 극복방법, 대안사회의 상에 대한 동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위기의 구체적 양상과 원인과 관련하여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이 글에서는 최근 새로이 주목받고 있는 일단의 논의를 검토하고자 한다. 이에 따르면 현재 사회는 더 이상 노동이 필요하지 않은 ‘노동의 종말(end of work)’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리프킨, 1996). 그리고 이러한 특징을 가진 새로운 사회의 비전은 ‘탈노동(post-work)’사회로 개념화되기도 한다(Aronowitz et al., 1998). 또한 이러한 새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해 ‘노동거부’운동이 주장된다(강내희, 1999; 고병권, 1999). 도대체 현재의 위기 상황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위기를 하나의 기회로 삼아 새로운 대안사회를 그려볼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떠한 모습일 것인가?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 글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이들의 주장을 검토하면서 여기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쟁점들에 대해서 검토해보고자 한다.  
      

2. 노동의 종말 혹은 탈노동사회? 
      

(1) 현재의 위기의 원인과 특징은 무엇인가 
      

논자들마다 차이가 있지만 소위 ‘탈노동’사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는 현대 자본주의의 특징은 ‘기술발전으로 인한 일자리의 축소와 생산성의 증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리프킨(Rifkin)에 의하면 현 시대는 “제조와 서비스 제공 과정에 있어서 기계가 인간노동을 대체하는 새로운 시대”, 즉 “무노동의 시대”로 규정된다(리프킨, 1996: 31, 373). 이는 주로 두가지 원인에서 기인한다. 첫째, 기술대체라고 일컫는 것으로, 정보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소프트웨어가 노동자의 일자리를 대체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블루칼라의 일자리는 지난 몇십년간 엄청난 규모로 줄어들었다. 둘째, 작업장의 ‘리엔지니어링’이다. 즉 새로운 생산기술의 발전의 결과, 생산을 위한 기업조직구조를 새로이 혁신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주로 중간관리층의 일자리를 줄임으로써 일자리의 축소에 큰 기여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자리의 축소는 생산의 감소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생산의 감소는 고용의 감소를 낳는다. 그러나 반드시 그 역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현재의 경우 생산의 증가가 고용의 증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생산의 증가는 일자리의 축소와 동반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오늘날의 실업이 기술 및 조직의 변화로 인한 것으로 이는 비가역적인 것이다(Lunghini, 1995: 41-2/Bellofiore, 1999: 26에서 재인용). 즉 오늘날은 이윤의 증대와 번영, 그리고 정리해고가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Aronowitz et al., 1998:41). 
      

물론 이러한 생산의 증가가 반드시 일자리의 축소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필요노동량의 축소가 반드시 일자리 축소로 귀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필요노동의 축소가 "노동시간의 감소, 자유시간의 증가라는 혜택 수여의 기회로 작용하기보다는 오히려 노동의 희소화를 통한 새로운 지배의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즉 필요노동량의 축소는 일자리의 축소를 가져왔고 이에 따라 노동을 희소한 것으로 만들게 됨으로서 "노동에 대한 접근권을 갖는 소수 노동자는 핵심적 지위를 갖게 되고, 나머지는 주변부 노동자로 전락시키는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강내희, 1999: 26). 
      

따라서 문제는 새로운 시대 "생산성 향상분이 어떻게 분배되는가"에 놓여있다. 즉 그것이 일부에 의한 전유만으로 귀결될 때, 그것은 "대량실업과 전세계적 빈곤, 사회적 불안과 격변"을 가져오게 될 것이지만(리프킨, 1996: 31), 반대로 “생산성의 극적인 향상이 근로시간 감소와 급료 및 임금의 지속적인 인상으로 연결”될 때(리프킨, 1996: 31), “지금의 노동을 다양한 생산적 활동, 삶을 위한 활동, 문화적 활동으로 전환(강내희, 1999:26)”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와 관련하여 필자는 두가지 문제를 제기하려 한다. 첫째는 현재의 위기의 원인과 관련한 것이다. 그것은 앞의 논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기술혁신으로 인한 것인가? 그것이 오늘날 이야기되고 있는 자본주의 위기와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둘째는 현재를 노동의 종말로 규정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이다. 이러한 기술의 혁신이 노동계급을 사라지게 만들고 있는가? 즉 노동은 종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줄어들기보다는 불안정한 형태로 변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첫번째 문제와 관련하여 1970년대 이후 본격화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실제로 1970년대 이후 선진자본주의 경제는 공통적으로 경기침체와 높은 인플레이션, 실업률의 급격한 상승을 경험하였다. 이러한 위기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는 어떠한 방식으로 해결되었나(해결하려고 했었나)? 
      

뒤메닐과 레비(Dum?nil and L?vy, 1999)는 1970년대의 위기는 보다 장기적인 자본주의의 진화의 결과로 본다. 그것의 한가지 중요한 특징은 노동 및 생산과 비교한 고정자본의 ‘부담’ 증가, 즉 이윤율의 저하이다. 이윤율의 감소는 기업의 현금흐름을 압박함으로써 유동성의 위기를 가져온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은 조그마한 수요감소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게 되며, 이에 따라 거시경제가 동요하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경향이 위기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경험적 자료를 이용하여 이 시기 기술 변화는 모든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둔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기술변화가 실업의 주요한 원인이라는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한편 브레너(Brenner, 1998)는 이러한 이윤율의 저하가 자본과 자본사이의 격화된 경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이윤율의 저하는 자본의 철수에 따른 시장 균형의 재형성을 낳기는커녕 저하된 이윤율을 감내하면서 비용삭감 경쟁을 계속하는 자본의 속성으로 말미암아 이윤율 저하가 계속된다고 한다. 자본으로 하여금 이런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것은, 무디(Moody, 1999)도 지적하고 있듯이, 대규모 고정자본 투자(sunk cost)로 인한 경직성의 증대로 인한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자본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는가? 이에 대해서는 아리기(Arrighi, 1994)의 논의가 유용할 듯하다. 그는 자신의 주저인 <장기 20세기>(The Long Twentieth Century)에서 자본축적의 역사적 단계를 구별하기 위하여 축적체제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각각의 축적체제는 산업적 팽창과 금융적 팽창의 두 국면을 갖는다고 본다. 생산물 시장에서의 공급과잉은 생산물 시장을 둘러싼 경쟁의 격화를 낳고 이에 따라 생산물의 가치실현은 불확실해지게 된다. 따라서 자본은 이윤확보가 불확실한 생산물 시장에서 철수하여 금융시장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에 따라 금융적 팽창이 주요한 축적의 국면이 되고 금융자본의 생산자본에 대한 우위가 확보되게 되는 것이다. 아리기는 현재의 미국 헤게모니하의 자본주의 축적구조가 1970년대를 넘어서면서 산업적 팽창의 시대를 넘어서서 금융적 팽창의 시대로 들어섰다고 보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브뤼노프(Brunhoff, 1999)는 다양한 자본주의 모델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이들을 관통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공통적 특성을 자본축적과정의 ‘금융화’로 본다. 이는 주로 세계적 규모의 자본의 구조조정에 의해 구축된다. 일반적으로 말해, 자본주의적 금융은 생산적 자본의 팽창을 융통·조정한다. 그러나 위기가 심화되고, 더 이상 생산자본을 통한 이윤확보가 불확실할 경우 금융은 생산자본에의 투자가 아니라 주식시장, 통화시장에서의 투기적 거래를 발전시킴으로써 자본축적과정에 영향을 미치고, 자본의 금융화를 발생시킨다.  
      

이상의 논의에서 볼 때, 오늘날의 위기는 자본주의의 본질적 위기이며,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금융적 단계로의 이행으로 볼 수 있다. 즉 오늘날의 위기의 본질은 바로 자본주의의 금융화인 것이다. 
      

한편 이러한 자본주의 금융화에 대한 논의는 헤게모니 국가와의 관계에서 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플릭스타인(Fligstein, 1998)의 논의가 유용할 듯하다. 그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세계화 현상은 미국 자본주의 헤게모니의 일반화시도라고 본다. 이는 헤게모니 국가로서의 미국이 1970년대 이후 위기를 극복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미국은 ‘주주가치(shareholder value)’ 개념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고 한다. 즉 단지 주주만이 기업활동에 대한 권리를 가져야 하며, 이러한 주주들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기업의 유일한 관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금융적 성과는 기업 전략을 선택하는 유일한 기준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주식가격 상승을 통한 단기적 주주 이윤 극대화를 위해 기업활동을 탈규제하고, 세금, 특히 부유층의 세금을 인하하고, 노동의 조직화를 보다 어렵게 하며, 미국 복지국가라는 것을 해체하려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주식가격 상승을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노동비용을 절감함으로써 기업의 경쟁력을 제고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리해고, 조직혁신을 통한 하청 외주화, 불안정 고용의 확대가 쉽게 도출될 수 있다. 이러한 미국의 위기해결 방식은 그동안 상대적으로 급속한 성장을 구가하여왔다고 인식되었던 독일, 일본, 아시아의 국가주도 모델이 1990년대 들어 위기에 봉착하면서 그 힘을 얻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시장은 좋은 것이고, 국가의 개입은 무조건 나쁜 것으로 주장된다. 이러한 주장들은 신자유주의라는 담론을 타고 전세계적으로 유포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서 볼 때, 기술 발전을 현재의 일자리 축소와 연결시키는 것은 오늘날 일반화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위기와 금융적 팽창국면으로의 이행, 신자유주의적 담론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간과하게 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원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다시 이후의 위기에 대한 처방에 있어서도 잘못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두번째로 기술혁신으로 인한 것이든, 자본주의의 위기로 인한 것이든, 실제로 노동 계급은 사라지고 있는가? 더 이상 노동력이 불필요한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즉 노동은 종말을 고하고 있는가? 
      

이와 관련하여 벨로피오르(Bellofiore, 1999)의 비판을 참고할 만하다. 그는 실제로 노동은 종말한 것이 아니라 실업과 함께 성장하고 있으며, 그것도 불안정하고 배제적인 것이 혼합된 형태로 성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먼저 그는 1996년 발간된 세계은행 보고서를 근거로 하여 세계적 차원에서 볼 때 임금노동은 성장하고 있으며, 다만 고소득, 중간소득, 저수입 국가에서의 노동력 비율이 변화하고 있을 뿐임을 밝혀내고 있다. 이와 더불어 흥미있는 것은 1974년 이래로 경제성장은 이전보다 더 직무집약적(job-intensive)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Bellofiore, 1999: 25-27). 
      

한편 카르체디(Carchedi, 1999)의 1970년대 이후 다국적기업의 지배력 증가, 경제적 권력의 집중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여기에서 실제로 다국적 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는 전세계 노동력의 단지 5%에 불과하다. 그러면 이러한 사실이 노동계급이 사라질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그의 답은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노동계급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 이는 다국적 자본의 지배영역이 증가함에 따라 빈곤이 증가함을 의미하는 것이지 노동계급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Carchedi, 1999: 74). 
      

이러한 논의들을 볼 때, 현재 줄어들고 있는 것은 임금노동 일반, 일자리 일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고소득의 일자리, 고용안정이 보장되는 일자리, 노동조건이 양호한 일자리인 것 같다. 오히려 다양한 형태의 불안정한 일자리, 즉 임시직, 일용직, 파트타임, 파견, 용역, 독립계약 등과 같은 임금도 낮고, 부가급여도 없으며, 항상 고용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일자리는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현상은 노동 일반이 소멸하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노동의 종말’이 아니라, “금융화와 신자유주의를 기조로 하는 자본축적양식의 변화가 노동과정, 노동력재생산, 노동시장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임노동자의 삶과 노동 생활전반의 수준이 저하되는” ‘노동의 불안정화’ 경향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사회진보연대 불안정노동연구팀, 2000: 18). 
      

(2) 대안을 발견하기 
      

그러면 ‘노동의 종말’ 주장이 제기하는, 현재의 위기를 극복한 새로운 사회의 비전은 무엇인가? 그리고 당면 현실을 그러한 방향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에 앞서 우선 이들 논의가 전제하고 있는 노동에 대한 기본가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이 검토하는 이후의 대안사회의 상은 바로 노동에 대해 이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전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① 노동에 대한 문제제기 - 노동은 신성한 것?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 노동은 찬미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것은 비정상적인 것, 경멸스러운 것, 심지어 노예적인 활동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고병권, 1999: 49). 노동이 그 중요성을 획득하게 된 것은 근대 부르조아 사회에서였다. 즉 “근대사회에서 노동은 구원과 자기 인식, 그리고 모든 부의 수단이었고 원천”이 된 것이다(고병권, 1999: 49-50). 근대적 의미의 노동이 등장하면서 “생산적 활동은 그 의미, 동기, 대상과 단절되고 임금을 버는 수단에 불과해졌다. 생산활동은 삶의 일부가 되기를 그치고 생계를 버는 수단이 되었다. 일을 위한 시간과 삶을 위한 시간은 분리되었다(Gorz, 1989: 21-2/강내희, 1999: 29에서 재인용)”. 물론 이렇게 이해된 노동은 바로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수행하는 임금노동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임금노동은 강제적 성격의 노동이며, 따라서 그것이 필요노동의 영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최소화되어야 한다(강내희, 1999: 25). 노동시간 단축이 제기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즉 노동시간 단축은 자연스럽게 자유시간의 확대와 맞물려 있는 것이다. 노동을 벗어난 자유로운 시간은 곧 ‘삶을 위한 활동’, ‘문화적 활동’에 투자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 ‘노동 거부’ 운동이 가지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놓여 있다. 즉 “기술발전으로 사회적 필요노동 시간이 축소되었기 때문에 이에 따른 과실이라 할 자유시간을 노동자계급이 획득해야” 하며, “이 자유시간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노동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강내희, 1999: 27). 
      
이러한 노동에 대한 거부가 노동 일반에 대한 거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적 노동에 대한 거부는 노동에 대한 재구성 없이는 불가능하다. 즉 “자본주의적 노동 개념 자체를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진정한 노동에 대한 거부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고병권, 1999: 55). 이런 점에서 노동의 범위는 확장되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공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에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노동은 반드시 임금노동에 의해서 구축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 “인간의 기본적 필요조건에는 생존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넘어선 생활도 포함되며, 따라서 필요 (노동의) 영역에는 사회적 문화적 인프라가 포함되어야 한다”. “사회적 문화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은 임금노동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익재원과 자발적 활동 등 좁은 의미의 노동 개념만으로 포괄되지 않는 조건과 활동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이러한 다양한 활동들이 모두 노동의 개념에 포함되어야 한다(강내희, 1999: 24). 
      

이러한 새로운 기획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여전히 임금노동은 건드려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다. 그럼으로 인해 여가와 노동, 필요와 욕구, 일과 놀이라는 자본주의적 이분법의 논리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임금노동은 힘든 것, 어려운 것, 하기 싫은 것, 단순히 생존을 위한 것이며 많은 경우 자신의 욕구와는 상반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최소화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남은 최대의 부분들은 여가를 위해, 욕구를 위해, 놀이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노동의 개념 자체가 좀 더 확장되어, 더 많은 부분이 생산적 노동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면 여기에서 여전히 존재하는 임노동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즉 최소화되어야 하는 부분, 즉 하기 싫은, 힘든 부분인 임금노동시간은 고통스런 시간으로 용납되어야 하는 것인가? 
      
여전히 다수의 사람들은 임금노동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투자되는 시간은 자신의 생활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지금 임금노동을 수행하고 있지는 않지만 실업 상태에서 여전히 생존을 위해 새로운 임금노동을 찾아다니는 사람들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상태에서 임금노동은 여전히 열악한 작업환경, 높은 노동강도, 권위적인 통제 하에 놓여있다. 아니 오히려 많은 경우 그 정도가 심화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노동시간 단축 등을 통해 이 부분을 최소화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이와 더불어 실제로 수행되고 있는 임금노동을 좀 더 민주적이고 쾌적한 것, 하기 쉬운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보다 중요한 것은 아닐까? 노동의 인간화, 생활전반의 유의미성이란 바로 이러한 노동의 영역을 개조하려는 노력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단지 여가시간의 확대나 새로운 생산적 노동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으로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② 그러면 무엇을 할 것인가?

21세기가 도래한 지금 ‘탈노동’사회를 현실화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뉘앙스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탈노동’의 담론이 제시하는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노동시간 단축

노동시간 단축은 ‘탈노동’사회 담론이 현실화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그리고 가장 우선적인 요구로서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는 현대사회가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적은 노동시간으로도 높은 생산성을 달성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러한 “생산성의 극적인 향상이 근로시간의 감소와 급료 및 임금의 지속적인 인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인식에 기초한다(리프킨, 1996: 291). 또한 여기에는 노동시간 단축이 일자리 공유를 통해 작금의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음과 동시에 여가시간, 자유시간의 확장을 통해 보다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삶을 가능케 하는 핵심적인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리프킨은 노동시간 단축 문제를 주로 기술대체에 의한 실업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서 상정하고 있는 듯하다. 그에 의하면 생산성 혁명은 두가지 방식으로 노동시간에 영향을 미쳐왔다. 먼저 노동 및 시간절감 기술의 도입은 기업으로 하여금 대량해고를 가능하게 해 주었고, 그 결과 실업자들로 구성된 산업예비군이 창출되었다. 다른 한편 해고되지 않은 노동자들은 임금과 부가 급여의 하락을 보상하기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일하도록 강요된다(리프킨, 1996: 297).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동 및 시간절약기술 도입으로 발생하는 생산성 향상을 수백만 노동자와 함께 나누어야” 하며, 그것의 유력한 방안 중의 하나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일자리를 공유함으로써 실업을 줄이는 것이다(리프킨, 1996: 291). 
      
여기에서 노동시간단축에 따른 임금감소의 문제가 제기된다. 즉 동일한 일감을 두고 다수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공유하게 되면 그에 따른 임금감축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쇼어(Schor)는 현대의 노동자들이 보다 적은 노동을 위해 보다 적은 소비(와 이를 가능케 하는 임금)를 받아들여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여 아로노비츠 등은 노동시간 단축은 임금 감소나 잔업 없이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한다. 또한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즉 기술 혁명의 결과 노동시간의 단축과 생활수준의 향상이 동시에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이다(Aronowitz et al., 1998: 61). 그는 이러한 임금감소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전일제 고용(full-time job)이라는 사회적 표준을 변화시킬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노동거부’ 테제에서 볼 때, 노동시간 단축은 실업과 고용불안의 맥락이 아니라 ‘노동거부’와 연결된다. 이는 “노동시간의 단축이 바로 ‘자유시간’의 확대와 맞물려있기 때문이다”. 자유시간의 확대는 여가의 확대라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 “문화와 사회생활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 시간의 확대를 가능케 함으로써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회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병권, 1999: 54). 
      

우선 실업에 대한 대안으로 제출되는 노동시간 단축을 검토해보자. 노동시간단축이 실업문제에 대한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일자리(혹은 일감)을 공유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기존 노동자의 노동시간이 단축됨으로 인해 공백으로 남게 된 시간에 다른 누군가가 노동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노동시간의 유연화는 필연적이다. 즉 노동시간 단축이 고용창출효과가 있으려면 노동시간 유연화가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노동시간 단축이 노동시간의 유연화를 동반하여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노동(시간)의 유연화는 바로 오늘날 노동의 불안정화를 가져오는 자본의 전략의 핵심이다. 따라서 이를 인정, 용인하고 노동시간 단축을 이루어내는 것은 그 자체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우선 그것이 의도했던 일자리 확보효과의 실효성 문제를 들 수 있다. 유연성이 확대됨에 따라 일자리가 지속적으로 축소된다. 여기에서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의 확대는 지속적인 일자리의 축소 경향으로 인해 상쇄된다. 그것은 “산업의 재편과 노동과정의 합리화 등이 노동시간 단축으로 인한 새 일자리 창출의 가능성을 사전에 삼켜버렸기 때문”이다(강수돌, 1997). 이런 상황에서 노동시간단축이란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건드리지 않은 상태에서 일시적이고, 부분적으로 일자리를 확보하려는 것에 다름아니며, 따라서 그것이 의도했던 성과 자체도 상당히 의문시되는 것이다. 
      
둘째,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확보되는 일자리의 성격 문제를 들 수 있다. 즉 새로이 확보되는 일자리가 이전보다 상당히 불안정한 일자리라는 것이다. 노동시간이 유연화됨에 따라 시간제 노동이나 기업사정에 따라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는 임시직 노동이 확산될 수 있게 된다. 결국 노동시간의 유연화를 동반하는 노동시간의 단축은 이러한 불안정 노동의 확산을 제도적으로 용인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삶의 질 제고’라는 문제의식 하에서 노동시간단축을 사고할 때에도 동일한 문제가 남는다. 실제로 노동시간단축의 현실화는 노사정간의 협약이든, (파업 등을 동반한) 노사간의 단체협약에 의해서이건 일정한 타협을 통해 관철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실적으로 많은 경우 이러한 타협은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의 유연화 혹은 임금감소를 교환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따라서 앞에서 제기한 문제가 동일하게 여기에도 적용된다. 이러한 가운데 임금감소 (및 노동의 유연화) 없는 노동시간 단축은 현실에서 전자의 전제조건은 사상된 채 단지 노동시간 단축만이 관철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것의 결과는 자유로운 여가확대라기보다는 유연한 불안정 노동 확산으로 귀결되기 쉽다. 
      
물론 이는 노사간의 역관계를 배경으로 한다. 다시 말해 노동시간 단축이 어떠한 형태로 관철될 것인가는 특히 노동의 강력한 의지와 집합성을 배경으로 하는 노동의 힘에 좌우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임금감소 없는 노동시간단축’이라는 공허한 구호가 아니라, 이를 물질화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한 고민에 두어져야 한다. 이러한 고민이 생략된 구호는 기존의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 즉 전반적인 노동대중의 불안정화를 심화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소득 개념의 확장: 사회적 소득, 보장 소득

노동이 최소한으로 축소된 속에서도 여유있는 삶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임금이나 수입과는 다른 의미의 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단 임금과 소득을 구분하고 임금이 소득을 구성하는 비율을 낮추어야 한다. 즉 소득을 임금으로 환원하지 않는 사회적 자원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회적 소득‘ 개념이 도입된다. 그것은 화폐소득으로 환원되지 않는 소득, 화폐교환과는 다른 교환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개념이다. 실제로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은 임금으로 보상되지 못하는 노동으로 채워져있다(이상 강내희, 1999: 39-40). 사회적 소득은 바로 이러한 임금으로 환원되지 않는 활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와 이를 통한 가계의 적정 소득의 보장을 가능케 하며, 이에 따라 임금노동이 아닌 다양한 활동 영역의 개방을 가능케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개념으로 아로노비츠 등은 ‘보장 소득(guaranteed income)’ 개념을 제시한다(Aronowitz et al., 1998: 64-69, 75-76). 이것 역시 노동과 관계없이 물질적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소득을 의미한다. 보장소득의 핵심적 특징은 더 이상 사람들이 굶주리거나 일의 노예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이것의 존재가 노동에의 유인을 제거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은 기본수준 이상의 소득을 원하기 때문에 기꺼이 (임금)노동을 선택할 것이며, 또한 이러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공공재나 사회적 필요노동에 대한 책임을 갖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보장소득이 적용되면 민간부문은 보장소득 이상의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민간부문에 가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비용을 줄이기 위한 노동절약적 기술이 도입, 발전될 수 있으며, 이에 따른 절약된 노동은 공공서비스나 노동시간 단축의 형태로 공유될 수 있다. 
      

실제로 임금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소득, 노동여부와 관계없이 물질적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소득의 보장은 자본주의적 가치에 긴박되지 않는, 보다 여유있고, 풍요로운 생활을 위한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이러한 비전이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실천과 결부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은 무엇일까? 
      

사회적 공공영역의 구축

이와 관련하여 강내희는 사회적 공공영역의 구축의 필요성, 그리고 이를 위한 사회운동의 활성화를 제시한다. 여기에서 공공영역은 “시장과 국가로부터 벗어난 독자적 영역으로서 노동의 상품화와 교환가치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야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여기에서 경제는 선물경제에 한발 다가선 비시장 경제이고, 시간은 남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며, 활동은 자발적인 봉사의 형태를 띤다”. 따라서 “이 영역의 규모, 역동성에 의해 사회적 공공성의 확보와 문화적 활동의 확산 여부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강내희, 1999: 41). 
      
이와 유사하게 리프킨은 ‘제3부문’의 강화를 제시한다. 여기에서 제3부문이라 “독립적, 자원적 부문”으로써, “공동체 연대가 금전적 장치를 대체하고 ‘자신의 시간을 남에게 주는 것’이 자신과 자신의 서비스를 타인에게 판매하는데 근거한 인위적인 시장관계를 대체하는 영역”이다. 그것은 공동체 활동, 자원봉사, 비영리조직과 같은 “강제성도 없고 금전적인 관계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탈노동사회로의 성공적인 이행을 위해서는 “생산성 향상의 보다 많은 부분을 시장으로부터 제3부문으로 이전”시켜야 한다(이상 리프킨, 1996: 316-318, 326-327). 
      
이러한 공공영역이 구축되기 위해서는 대중의 자발적인 참여와 함께 공적 재원의 투여가 필요하며 또한 그것이 가능하다고 주장된다. 여기에서 다양한 세금 감면의 유인, 새로운 조세의 창출 및 조세 투입 우선순위의 변경 등이 검토된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조세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해왔고 그것의 변형을 주장해왔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는 실행되기 어려운 강고한 영역으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사회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노동운동이든, 시민운동이든, 여성운동이든, 환경운동이든, 학생운동이든 다양한 사회운동이 어떻게 활성화되는가 여부가 공공영역의 구축의 촉진을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또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오히려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다양한 사회운동이 활성화될 수 있는가에 있다. 이를 가능케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러한 운동들간의 연대를 구축할 수 있는 공통의 지점은 무엇인가? 이러한 고민들과 연결되지 못한다면 탈노동사회의 거창한 비전은 단지 미래에 대한 장미빛 환상을 넘어서기 어려울 것 같다. 
      

3. 맺으며 - 노동의 종말인가 노동의 불안정화인가 
      

오늘날 세계는 엄청난 혼란과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2차대전 이후 성장을 구가하던 자본주의가 심각한 위기를 경험하게 되면서 기업의 생산성 향상이 급격히 둔화되었고, 경제성장률이 침체에 빠졌으며, 높은 인플레이션과 대량실업이 발생하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선진 자본주의 경제는 심각한 위기로 빠져들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본은 생산성을 향상시킴으로써 산업의 효율성과 국제경쟁력을 확보한다는 명분하에 공세적으로 다양한 새로운 시도들을 하게 된다. 생산과정에서의 기술적, 조직적 혁신이 단행되고, 노동력 사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유연적 생산방식이 도입되었다. 
      
경제적 환경의 변화와 국가 및 자본의 적극적인 공세는 노동자와 노동조합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다양한 유연적 생산방식의 도입과 노동의 수량적 유연성의 증대는 고용을 심각한 문제로 만들었으며, 이러한 고용불안의 영향 하에서 노동조건의 악화를 노동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강요한다. 한편으로 국가의 반노조 입법과 노동시장의 규제완화, 사용자의 노동조합 회피 전략 등은 노동조합 조직률의 하락과 정치적 영향력의 약화를 가져오면서 소위 ‘노동조합운동의 쇠퇴(union decline)’를 경험하게 만들었다. 
      
세계경제가 급속히 통합되어감에 따라 제3세계 국가들 또한 이상의 문제에서 예외가 아니다. 여기에 1980년대 이후 지속되고 있는 외채 및 금융위기, 구사회주의권 몰락 이후 가시화되고 있는 종족 및 민족분쟁, 국가주도의 급속한 산업화가 가져온 정경유착과 권위주의적 통제 등이 더해지면서 제3세계에서 문제의 양상은 보다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의 양상에서 나타나는 노동의 쇠퇴와 위기를 노동 일반의 소멸, ‘노동의 종말’로 개념화할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필자는 작금의 현실이 노동운동 및 노동자 대중에 미치는 영향을 ‘노동의 불안정화’ 경향으로 파악하는 것이 보다 문제에 올바르게 접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금융화와 신자유주의를 기조로 하는 자본축적양식의 변화로 인해 임노동자의 삶과 노동, 생활 수준 전반이 심각하게 불안정화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볼 수 있듯이 ‘평생직장’ 및 ‘완전고용’ 개념이 사라지고, 장기적인 ‘불안정 고용’, 일상화된 실업이 일반화되는 현상은 이의 단적인 예이다. 물론 여기에서 불안정화란 단지 고용조건상의 불안정화로 국한될 수 없다. 그것은 노동과정, 노동력재생산, 노동시장이라는 임노동관계 전반에 걸쳐서 관철되고 있는 것이며, 또한 각각의 계기들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중첩적이며 상호의존적인 방식으로 작용하면서 노동자들의 존재조건을 규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작용의 결과 노동자에게 있어서 불안정성은 하나의 계기로 환원될 수 없는 총체적이고 복합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문제가 이와 같이 규정될 때,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모색하기 위해 검토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될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위기의 원인은 무엇인가? 자본주의 금융화, 세계화, 신자유주의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이 노동자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은 어떠한 것인가? 이러한 당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노동 및 사회운동의 전략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 또한 변화된 상황에서 어떠한 전망과 요구를 가지고 보편적 이해를 실현해내며 연대를 물질화할 수 있는가? 등등. 대안사회에 대한 비젼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과 변화의 전략에 기초한 경우에라야 그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탈노동사회에 관한 논의와 관련하여 제기하고 싶은 것은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를 넘어선 전세계적 차원에서의 적용가능성의 문제이다. 탈노동사회 담론은 높은 이윤을 실현할 수 있는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에서, 거대한 이윤의 몫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의 문제에 중심이 두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거대한 이윤은 제3세계 국가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탈노동사회 담론에서 제기하는 급속한 노동대체적 기술혁신, 높은 생산성 향상 등은 제3세계 국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다. 따라서 그러한 담론들이 제3세계 국가들에게 주는 의미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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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0 15:17 2006/11/10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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