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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의 여섯 가지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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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 국장이 1999년에 진보정당의 성격에 대해 쓴 것이다. 당원교육에 대해 검토하면서 자료를 찾아 정리하다가 발견하였다. 벌써 6년이 다되어가는 글이지만, 읽어볼 만하다.

 

이재영 국장은 당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읽혀지길 바라면서, 당 성격에 대한 학습용으로 삼지 말길 당부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교육용으로도 유의미하지 않을까 싶다. 

 

민주노동당의 여섯 가지 성격은 노동자 대중정당, 이념을 구성하는 정당, 철저한 민주주의 정당, 모든 수단을 사용하는 정당, 단계적으로 성장하는 정당,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정당이다. 몇 가지 이견이 있지만, 이러한 성격 규정은 여전히 유효하다.

 

결론 부분에 나온 사회주의자에 관한 언급이 인상적이다. "생활의 모든 방면과 수준에서 사회주의로 사고하고 실천하는 자만이 사회주의자라는 칭호를 가질 수 있다."

 



우리 당의 여섯 가지 성격

이 재 영 1999. 8. 10.

 

"한 번 들은 것은 잊고, 한 번 본 것은 기억하고, 직접 해본 것은 이해한다."
                                                                                   - 중국 속담

 

연초에 출판된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이라는 책이 세간의 화제를 모으고 있다. 책 내용이야 별다를 게 없어서, 조금 관심 있게 세상을 관찰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이야기할만한 수준인데도, 그토록 책이 많이 팔리는 것은 그 필자가 일본인인 때문이리라. 누구나 치부가 있게 마련이고, 남편이나 처에게 그것을 들켰다 하여 호들갑을 떨지는 않는다. 문제는 보이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 보이게 됐을 때인데, 한국인의 쇼비니즘적 심성에서 일본인이야 더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우리 당 역시 넘치고 모자라는 게 많고, 냉혹한 비판에 의해 교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운동권에 횡행하는 우리 당에 대한 비판은 사실과는 아무 관련 없이 습관적으로 남발되는 것이다 보니, 대개의 당원들에 의해 서로의 불신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만다. 또, 가끔씩 나오는 당 내의 목소리도 분파적 논리로 가공된 혐의가 크다.

  

이제, 창당 궤적을 거스를만한 변수는 거의 해소되었다. 언제나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하던 사람들이, 일일이 대응할 여유가 없다거나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는 변명을 계속 들이댈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발의자이자 주도자야말로 당에 대한 가장 엄혹한 비판자이어야 한다. 설마 맞아 죽기야 하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 당의 가장 부끄러운 치부는 무엇인가? 평당원과 당 간부를 막론하고, 도대체 당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당이 무엇인지, 뭘 하려는 당인지, 어떤 당인지, 어떻게 만들고 어디로 가려는지,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무지하거나 무시한 채 창당으로 밀려가고 있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당'에서 멀어질 따름이다.

원컨대, 이 글을 당 성격에 대한 학습용으로 삼지 말길 당부한다. 이 글이, 당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읽혀지길 바란다.


1. 노동자 대중정당

 

나는 몇 년 전부터 '계급연합당'이라는 개념을 목적의식적으로 유포시켰다. 그렇다 해서 '계급당'이나 '계급연합당'을 명확히 분별할 만큼 식견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이른바 '운동권'에 팽배해 있는 잘못된 당관(黨觀)을 불식하고자 하는 의도에 의해서였다.


'현대적 국민정당'이니 '무엇 중심 당' 하는 수식어를 붙인 당 이론은 대개 당원의 직업적 구성이 어떠한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보니 '국민정당'이라 일컬어질 때는 국민의 절대 다수인 노동자는 별 무 소용인 정당이라 인식되고, '노동계급정당'에서는 다른 계급·계층은 배제하거나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으로 호도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혁명사 어느 쪽을 뒤져 보아도 특정 출신의 직업자만으로 구성되거나 압도하는 정당은 찾아 볼 길이 없다. 레닌은 사회민주당 2차 대회에서 당명에 '노동자'라는 꼬리를 붙이자고 제안하면서, '당 간부의 20%를 노동계급 출신이 차지하는 것'이 소원이라 말했다. 레닌에 있어 '노동계급'은 전취해야 할 당의 미래상이지, 현실의 표현은 아닌 것이다. 귀족인 크롬웰은 왕정을 타도했고, 부르주아 콜베르는 반동 왕정의 수호자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당의 구성은 당의 성격을 보호하고 재생산하는 기제일 수는 있지만, 당의 성격 자체는 아니다.

  
다른 한편, 많은 혁명가들이 그러하였듯이, '계급의 사상을 선취(先取)했다'는 선언을 통해 계급 대표성을 자임할 수도 없다. 자의적인 '지도'라는 것이 얼마나 계급이익에서 일탈해왔는가 하는 사례는 너무도 비일비재하다.
  

당의 계급적 성격은 당의 지도이념과 당의 계급적 기초 사이에 형성되는 긴장 관계 어느 곳인가에 있다.
 

'계급연합당'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일단 제 역할을 다 했고, 이 개념의 효용처는 가시적 미래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계급연합당'의 본연은 다수 계급조직의 당 내 동맹이다. 하지만, 우리 당에 명실상부한 계급조직들은 실재치 않는다. 전농을 비롯한 소생산자 계급조직은 합류치 않았다. 또, 계급성을 표방하는 유일한 조직인 민주노총조차도 자기 활동의 90% 이상을 노동자계급 4%의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단위사업장 투쟁에 바치는 직업조직에 머물고 있다.

   
정당에 있어 계급은, 사회정치적 계급이다. 따라서 우리 당은 계급정당도 아니고, 계급연합정당도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계급당이냐, 아니냐' 하는 반정치적 예단이 아니라, '대중정당'이라는 생소한 개념이다. '대중정당'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 다중성(多衆性). 정당의 궁극적 목적인 다수의 획득이 생소할 정도로 우리는 후진적이었다. 객관적 조건에 의해 불가피하게 취했던 한시전술인 '전위당론'을 금과옥조로 삼던 기풍이 이제야 극복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명시성. 우리는 이제서야 20세기 초 레닌이 주창했던 근대적 정당운동을 계승하게 되었다. '지지하는 자 모두'를 당원으로 간주하는(따라서 당에 대한 실질적 권한은 소수 음모자만이 쥐는) 전근대적 당이 아니라, 규정에 따른 입당 절차에 따라 명시적인 의무와 권리를 가지는 사람만을 당원으로 인정하는 조직이 우리 당이다. 모모하는 운동권 단체나 보수정당들처럼 누가 자기 조직원인지도 모르는 조직이 아니라, 조직을 창출하고 제어하는 기반인 χ명의 조직원을 가지는, 한국 최초의 조직을 우리는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대중정당이 내포하는 위험성이다. 대중은 분열되어 단일치 않고, 무릇 대중은 양면적이다. 우리가 기대고자 하는 대중은 누구인가? 역사가 보여주듯이, 전위정당은 안전성을 부분적으로 보장하는 데 반해, 대중정당은 전면적 가능성과 위험성을 동시에 가지게 되는데, 우리는 계급성이라는 목표에 이르는 도정으로 대중의 가능성에 우선 착목하였다.
 

우리 당은 노동계급성이라는 지향을, 대중정당이라는 형식과 공개정당이라는 방법을 통해 이루려는 정당이다.


2. 이념을 구성하는 정당

"과거는 더 이상 미래를 밝게 비추어 주지 못하고, 정신은 어둠 속을 행군하고 있다." 토크빌이 살았던 시대가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처럼 우리 당의 처지를 정확하게 드러내는 말도 드문 것 같다. 우리는 행군의 발길을 한시도 멈추지 않았지만, 않을 것이지만, 우리의 발길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확신치 못한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이렇다 저렇다, 속출하는 다양한 논(論)은 냉정히 말하자면, 공당(公黨)에게는 모두 개연성 있는 가설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당은 이념 문제에 대한 두 가지 편향을 경계해야 한다.
티라노사우루스가 되살아난다면, 정글의 제왕이 될까? 영화에서처럼 무지막지한 폭군으로 군림할까? 천만의 말씀. 티라노의 보폭은 인간보다도 짧고, 무는 힘은 악어만도 못하다. 공룡이 멸종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포유류와의 경쟁에서 패배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유전공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공룡은, 인간이 보호하는 쥬라기공원 안에서만 생존 가능하다. 옛 교조의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꾸는 사람들은 우리의 적이 혁명과 세계대전, 공황을 이겨낸 진화한 자본주의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다른 한편 당의 지도 이념은, 아무리 급해도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건처럼 급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념정당이니까 이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형식논리적으로는 옳지만, 이념이 변혁을 이루는 당의 수단일 뿐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전도(顚倒)된 인식이다. 우리에게 있어 이념 문제는 어떤 사상을 취사선택하거나 적당히 조합하여 내놓는 일이 아니라, 당을 이끌고 나라를 경영할 철학적 기반을 확립하는 일이다.

    
그럴듯한 상표 없음이 장애만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능동적 노력이 가능한 열린 상황을 긍정하자. 우리는 사후 선택이 아니라, 주체적·실천적 구성이라는 이념의 본령에 다가서 있다.

    
급진적 민주주의자였던 맑스가 사회주의자로 변신하는 데는 1848년 노동자혁명이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그후, 그는 바뵈프 공산주의자들의 운동방식과 용어를 차용하였고, 프랑스 내전 과정에서 블랑키즘의 '체제 자체의 파괴'라는 아이디어를 흡수하여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킨다.
이런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상 또는 이념은, 개인(소집단)의 연구 결과물이라기보다는 계급운동과의 부단한 교호작용에 의한 역사적 산물, 인류 지식과 구체적 실천의 화합물이라는 가르침이다. 또, 그것이 비정치적 주체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동맹과 독일사회민주당에 보고하고 활동했던 당원에 의해서만 표출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가장 주목해야 한다.
  

삼박한 깃발 없음을 두려워 말라. 개념이나 교조가 아니라, 인민의 마음과 세상사 속에 진리가 숨어 있다(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 하지 않던가. 우리 당은 지난 100여 년 간 잊혀져 있던 정신 - '형태로서의 진보가 아닌 운동으로서의 진보'로 복귀하고 있다. 새 세기의 이념을 세우는 주역으로 자임하자.


3. 철저한 민주주의 정당

사무실 이삿짐을 풀다, 진보정당추진위원회의 92년 총선 평가집을 발견케 되었다. 얄궂게도 그 제목이 『문제는 민주주의다』인지라, "그래, 아직도…"라는 새삼스런 중얼거림을 내뱉게 되었다. 운동권의 누군가가 민주주의를 들먹일 때, 나는 속으로 코웃음치곤 한다. 지난 십여 년 간 거창한 이름 가진 별별 조직의 중앙위원이니 집행위원이니 빠짐 없이 참가해봤지만, 진짜 토론을 한다든지 투표나 선거를 한 경우는 한 손에 쥘 정도도 되지 못한다. 정력적으로 민주주의 실험을 펼치던 노동조합의 시도도 근래에는 난관에 부딪혀 있는 듯 하다.


10여 년 전만 하여도 비민주적이라는 비판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던 보수정당들은 오늘날 선거를 통해 당직자를 선출하고, 표결로 의사를 결정하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반면 운동권에서 '선거'나 '표결'이란 말은 결코 들먹여서는 안 되는 금기이다. 언제나 추대받곤 하던 운동권 지도자들은 선거라는 거북살스럽고 위험한 장난을 기피하고, 표결은 '대동단결'을 해치는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잔재로 치부된다. 중진 활동가들이 모여 모양새 있게 '어르신' 수십 명을 지도부로 모시지만, 명함 뒷편에 직함을 하나 더 추가하였을 어르신 중 단 한 번이라도 사무실에 나오는 사람은 서너 명도 되지 못한다. 한다 하는 단체 대표 수십 명이 밤새워 '진지하고 열띤' 회의를 해서 나오는 결론은 고작 몇 일 몇 시에 데모한다는 계획을 넘지 못하고, 정작 데모하러 나오는 사람은 회의 참가자의 절반을 넘는 경우가 없다.
  

타도 대상이었던 반민주세력이 민주주의에 적응해 가고 있는 사이,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운동권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 위임받지 않은 권력을 휘두르고, 뭔가가 결정되거나 시행될 때는 언제나 배후의 이해관계와 공작을 캐보아야 하는 실정이다. 운동권은 군사독재가 강요했던 민주주의의 유예에 아직껏 안주하고 있다. 즐기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형식적 민주주의보다 내용적 민주주의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누가 그 내용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가? 오직 그들만이 판단한다. 입맛에 맞는 결정은 '대중의 요구가 표출'된 것이고, 바라지 않던 결정은 '관료집단의 음모'에 의한 것이다.
  

내용적 민주주의 같은 것은 꿈꾸지 말자. 지금 우리는, 보수정당의 형식적 민주주의를 쫓아가기에도 힘겨운 수준이다. 새 시대의 민주주의는 자신만이 올바름을 독점하고 있다는, 선민의식에 찌든 자들의 대행주의가 아니다. 우리 당의 민주주의는 민중을 위한(for) 것도 아니고, 민중에 대한(to) 것도 아니다. 우리 당의 민주주의는 민중에 의한(by) 것이다.
 

우리 당은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요소들에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는 당이다.
첫째, 권위주의. 보수정당들은 단일 권위가 확고해서인지 그에 대한 훼손이 아니라면, 합리를 확대하고 있다. 반면 운동권은 권위의 과두점(寡頭占)으로 고통받고 있다. 권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권위는 신뢰에 의한 위임과 총괄적 지지를 낳고, 조직을 효율화시킨다. 그러나 권위가, 결코 민주주의와 분업을 대체할 수 없음에도, 운동권은 조직보다 명망가에 의존하던 70년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그 권위가 허구일 때 발생한다. 역사적 경험이 권위를 낳고, 권위가 직책과 직권을 낳아야 하지만, 우리는 정반대의 경로를 따르고 있다.
  

둘째, 종파주의. 조직 안에 여러 이견이 있거나 집단 행동을 하는 분파가 있다하여 문제될 것은 없다. 오히려 실재하는 분파를 애써 외면하거나 죄악시하는 태도가 더 위험스럽다. 다수의 경쟁을 통해 지도 중핵을 형성하려는 우리 당에 있어 분파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문제는 분립의 이유 없이 분리하고, 당의 이익보다 분파의 이익을 앞세우는 데 있다. 우리 안에는 여러 그룹이 있다. 하지만 어떤 말을 자주 쓴다는 따위 지엽말단의 차이가 아니라, 과학적 노선 차이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그룹은 없다. 그룹과 그룹 사이보다는 그룹 안 개인과 개인의 차이가 더 클 정도다. 이것은 우리의 차이라는 것이 감성의 수준, 인간 관계의 관성이라는 저급한 차원에서 기원함을 의미한다. 보수정당의 계파보다 나을 이유 하등 없다. 나는, "우리는 이렇소"라고 용기 있게 나선 분파들이 쟁투하기를 바란다. 늘상 남과 다른 것을 강조하지만, 막상 자기를 밝히지는 못하는 분파, 어떤 이유든 끌어대어 분립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는 기생 분파는 당을 살리는 창조적 소수가 아니라, 당을 망치는 문제적 소수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셋째, 온정주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권위주의나 종파주의가 조직의 민주주의를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타인과 자신의 비민주적 태도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우리의 원칙은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이중적인 것이고, 타인을 제어치 않는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기약 없는 미래로 해결을 미루며, 관용과 온정으로 당을 방치하는 온정주의는 하루 빨리 청산되어야 한다.


4. 모든 수단을 사용하는 정당

  

정치의 정의(定議)는 정치학자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이것은 가두어둘 수 없는 맹수, 무궁무진한 '정치'의 원죄다. 그런데 지금 우리 당은 스스로를 가두려 한다.
  

그 선두에 '대중투쟁론'이 있다. 우리 당 역시 조직된 대중의 위력으로 목표를 성취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음모자로서의 당이나 테러에 의존하는 당이 아닌, 공개적 대중정당으로서의 우리에게 대중의 분노와 지혜, 지지와 물리력 이외의 수단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한국 운동권의 '대중투쟁론'은 대중의 막강한 힘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특정한 전술 형태에 대한 맹신과 특정한 전술 형태의 배격일 따름이다.
  

대중투쟁론의 모든 것은 "절박한 민중투쟁을 등지고 의회선거에 매몰된다"는 식의 주장, 집회 주최측의 통제를 어기고 가두로 뛰어들고는 "투쟁을 기피하는 지도부를 대중의 투쟁 열기로 잠재웠다"는 식의 평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대중투쟁론자들이 선호하는 대중투쟁은 파업(그 84∼93%가 경제파업이다 ; 91년-98년 기준), 집회 및 시위(특히 집시법을 위반하는) 등이다. 그리고 제도나 기구를 이용하는 투쟁은 '개량주의'로 낙인찍는다. 그렇다면, 보통선거권 쟁취를 강령의 제일 앞머리에 두곤 하던 맑스가 개량주의의 원조이다. 그렇다면, "인민의 정치생활은 언제나 선거에 의해 결산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극히 반동적인 의회조차도 모든 선동의 중심으로 이용"하고, "부르주아 의회도 이용할 줄 모르는 무정부주의자와 무자비하게 인연을 끊으라"고 조언한 레닌은 개량주의에 매몰돼 있었던 것이다(위 인용은 순서대로 「선거캠페인과 선거강령(1911)」,「제4차 국회의원 선거(1912)」,「국가와 혁명(1917)」).
  

당 전술의 채택, 그리고 투쟁에 대한 평가는 그 투쟁의 양상이 어떠한가가 아니라, 투쟁의 내용과 지향, 정세 및 조직 현실과의 적합성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대중투쟁론자들은 형태주의적 전술관에 빠져 대중을 생디칼리즘으로 오도(誤導)하고 있다.
  

대중투쟁론의 연장선상에 '대중투쟁을 지원하는 당'이라는 성격 규정이 자리한다. 상당 기간 동안 우리 당의 활동 중 대부분을 대중투쟁 지원이 차지할 것은 불문가지이지만, 계량에 따라 당의 성격과 임무를 가늠할 수는 없다. 대중투쟁 지원을 목표로 한다면 투쟁지원조직을 만들 일이지, 당을 만들 필요는 없다. 우리 당의 첫째 임무는 그 본연인 정치투쟁을 잘 하는 것이고, 대중투쟁에 정책적으로 결합하고 정치적으로 엄호하는 것이지, '몸 대주는' 투쟁 지원은 아니다.

    
'합법정당'이라는 재단도 옳지 않다. 선관위에 등록하는 우리 당이나, 비밀경찰의 추적을 받는 어떤 당 사이에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벼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벼랑은 스스로를 제한하는 자기 검열일 뿐이다. 국민회의가 모든 것을 공개하는가?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국민회의의 비밀당원과 간첩이 득시글댄다. 무슨 운동을 한다는 재야 명망가 상당수는 등판을 기다리며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는 국민회의의 구원투수들이다. 한나라당이 선거 제도에만 안주하는가? 아니다. 한나라당은 한총련만큼이나 정권 퇴진을 고창하며, 이른바 '장외투쟁'을 서슴치 않는다.
우리가 누구이고,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가장 정확하게 나와 있다. 무엇만 하겠다, 무엇은 안 하겠다고 선언하거나 약속하는 경직된 조직은 정당이 아니다. 더더구나 사회를 뒤흔드는 진보정당은 결코 될 수 없다. 우리 당은 어떤 전술도 꺼리지 않고, 어떤 상황도 피하지 않는 당이어야 한다.


5. 단계적으로 성장하는 정당

    

우리 당은 성장하는 정당, 변전(變轉)하는 정당이다.
창당 후 당원들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갈까? 아마도 사람들은 "당인데……"라거나 "당이니까……"라는 고민을 많이 하게 될 테다. 우리 사이에는 어느새, 당이니까 이 정도는 해야지, 당인데 그럴 수 있나 하는 문제의식이 자리잡아 가고 있다. 모두 충정에서 우러나온 것임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모든 당이 같을 수는 없다. 1만5천 내지 2만 명 정도의 당원을 갖게 될 99년의 당과 10만 명을 육박할 몇 년 후의 우리 당은 다를 수밖에 없다. 서너 명의 문필가가 대부분의 문서를 작성하는 당과 수십 수백의 전문가 풀(pool)을 상시 가동하는 당은 다를 수밖에 없다. 광역으로 조직을 짜도 생존키 어려운 지금의 당과 통 반 조직까지 갖춘 당은 사업 목표, 활동 수단, 활동 경로, 영향력에서 서로 다른 당이다.

    
2000년 초반까지의 우리 당은 2만 명 정도의 수동적 당원, 100명도 안 되는 전업 당 간부, 월 1억 가량의 유동 자산을 가지는 작고 힘 없는 당이다. 우리 당은 날씨가 안 좋으면 숨고, 큰 적을 만나면 피해야 하는 게릴라 부대다. 달랑 AK 소총 몇 자루 들고, 정규군 흉내를 내거나, 제국주의 군대와 정면 대결하는 멍청한 게릴라 부대는 없다. 질과 양에서 민중당 출마자의 절반도 갖추지 못한 우리가 내년 총선에 많은 투자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산발하는 즉자적 '투쟁'을 쫓아다니는 것은 그나마의 자원을 소진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게릴라 조직의 제일 가는 금도(襟度)는 과욕을 부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당 조직을 짜고, 계획을 세우고, 전술을 택하고 행사함에 있어 '당위'라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당으로서의 형식적 완결을 추구하거나 '시대적 과제'니, '급박한 요구'니 하는 것들에 휩쓸려서는 곤란하다. 당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이고, 어떤 일을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지, 냉정한 판단에 따라 주도면밀하게 움직여야 한다. 지금 단계 우리 당의 금도는 집중과 기동, 과감한 포기이다.
"별을 따려고 손을 뻗는 사람은 자기 발 밑의 꽃을 잊어 버린다." - 제레미 벤담


6.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정당

  

우리 당은 변화된 상황에 발맞추어 가는 새로운 유형의 정당이다.
첫째, 우리 당은 비국가 영역에 적극 참여하는 당이다. 지난 100여 년 간 정치는 국가와 동일시되어 왔다. 서구 사민주의와 동구 사회주의는 이런 인식에 따라, 제도를 생산하는 근원인 국가권력을 장악한 후 사회와 인민을 개조하는 전략을 취한 제2인터내셔널의 두 산물이다. 의회주의를 택하든 군사주의적 방식을 택하든 그들의 문제의식은 국가로만 향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문화, 시민사회 속에서 매순간마다 제도가 생산 유지되고 있으며, 정치투쟁 또한 비국가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국가 외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계급투쟁에 주목하면서, 그곳에서 자본에 대항하는 별도의 정치권력을 구축하여야 한다.
  

둘째, 우리 당은 명실상부한 탈국가주의, 노동자 국제주의를 지향한다. 지구적 자본주의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1848년에 제출됐다. 하지만 당시의 노동자 국제주의는 유럽에 국한되었고, 제2인터내셔널은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사회애국주의에 무릎 꿇었으며, 제3인터내셔널은 소련의 국가 이해를 관철하는 기구로 전락했다. 국제 자본 이동의 98%가 금융 투자인 오늘날 계급과 당의 운명은, 우리의 사고와 실천이 얼마만큼 국경을 넘는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투기자본의 가장 큰 돈줄이 미국 노동자 연기금인 상황, 원진레이온 설비가 '사회주의' 중국에 수출되는 상황을 넋 놓고 바라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당장, 국제사업에 사람을 배치하고 돈을 써야 한다.


結. 당은 당이다

지금까지 나는, 우리 당의 현황과 나아갈 바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당만이 가지는 특수한 성격을 알리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당'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조직이 당이라는 사실 외에 여러 수식어들은 몽땅 잊어도 무방하다. 아니, 잊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당이란 무엇인가? 당은 사회의 조직자이다. 새 사회를 만드는 일이든, 사회를 유지시키는 일이든 당은 그 최종 조직자로 기능한다. 따라서 모든 당은 집합 이성일 수밖에 없으며, 특히 진보정당은 집단적 혁명가로서 기능해야 한다. 그러나 진보정당창당추진위원회의 현재 모습은 집합 이성이라거나 집단적 혁명가라 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걷는 길은, 말은 많지만 하는 일은 거의 없는 또 하나의 거대한 '운동권 연합전선체'로 향하고 있다.

    
우리는 운동권의 전통과 관례에 따라 의사결정 구조를 짜고 인사(人事)했다. 당에 대해 하등 아는 것이 없는 사람, 앞으로도 관계 없을 사람들이 당의 일을 갑론을박한다. 잘 뛰는 이동국이 아니라 유명한 차범근에게 공격을 맡기고, 연주가가 아니라 음악평론가에게 악기를 쥐어주는 꼴이다. 지금 진보정당창당추진위원회는 국가권력을 넘볼 당이 아니라, 보기에 그럴듯한 당으로 흘러가고 있다. 여기에 승리를 향한 냉정한 이성은 존재치 않는다.

    
대표들은 발족한지 네 달이나 지났음에도 조직에서 누가 일하고 있는지조차도 알지 못하고, 스무 명에 가까운 상임집행위원(常任執行委員) 중 상임하는 사람은 채 다섯도 안 된다. 이대로라면 사회개혁에 일조할지는 몰라도, 사회혁명을 이끄는 조직이 될 수는 없다. 당의 집단적 혁명가로서의 역할은 노동조합 활동의 연장도 아니고, 사회운동 여가를 활용하는 취미생활도 아니다. 우리 당은 시급히 당 외부의 질서에서 독립하여, 당의 고유한 질서를 창출해야 한다.
  

작년 이맘때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는 공개 선언을 하였다. 사회주의 도그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주장을 새삼 반복한 것이었는데, 또 다른 이면에서는 80년대 이념 인플레의 산물인 한국의 '사회주의'에 신물이 낫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자는 자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생활의 모든 방면과 수준에서 사회주의로 사고하고 실천하는 자만이 사회주의자라는 칭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그 지식을 지지하는 학자, 양심 삼는 사람들, 기껏해야 급진적 민족주의자나 민주주의자에 불과한 사람들이 '사회주의자'라 자칭하고 있다. 3류 혁명가와 사이비 사회주의자들의 '사회주의'는 운동권의 허장성세, 혁명적 낭만주의, 비이성적 맹동일 뿐, 합목적적 효율성 이외의 어떤 것도 가지지 않는 사회주의 핵심과는 아무 인연이 없다.

    
우리에게 있어 창당은 운동권 후진 문화와의 절연이다. 한국처럼, 일반민주주의적 과제인 진보 일반과 근로계급의 이해에 입각한 특수 진보가 착종된 사회에서는 진보정당의 진출을 가로막고 그 성장을 방해하는 모순이 당 내부에 배태된다. 그리고 근로계급은 일반민주주의 운동으로부터의 독립을 통해 진출·성장하게 마련이다. 맑스가, 범람하고 오도된 '사회주의'와 분별 정립하여 공산주의를 태동시킨 것처럼, 러시아 사민주의가, 나르드니키를 자양으로 삼으면서도 철저한 절연정책을 통해 형성된 것처럼, 우리의 창당 역시 한국 운동권과 절연하고 투쟁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우리 당의 진정한 창당은 한국 운동권의 전근대성, 비민주성, 비효율성, 관념성을 숙청하고, 사회주의적 전통을 복구하는 문화혁명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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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21 20:03 2005/02/21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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