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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비환(2000). 데모크라토피아를 향하여' 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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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비환(2000). 데모크라토피아를 향하여. 서울: 교보문고.
  
정치학에서 제기되는 여러 쟁점들을 쉽게 설명하고 있다.
아무래도 강의용으로 나온 내용을 풀어서 쓴 책이라서 그런 듯하다.
하지만, 기존의 정치학 교과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해서 구태의연한 대목이 많이 눈에 띈다.
제목은 그대로 하더라도 그에 딸린 내용은 왼쪽의 눈으로 좀더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여기에서 제시되는 주제들에 대해 나름의 입장 정리만 하더라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관점을 지니게 될 듯하다.

  


1부 인간의 정치, 삶의 정치
  
1. 정치, 그 불가피성과 매력
  
버나드 크릭(Bernard Crick)에 의하면, 정치는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위대한 가치가 있다. 정치는 모든 사회 집단들의 자유와 능력을 극대화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김비환, 2000: 18).
  
→ 통치형태의 분류에서 다수지배자의 순수형인 Polity를 법치적 민주제로, 타락형을 폭민제로 번역하고 있다.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보여준다.
 
2. 정치는 참다운 인간됨의 조건
3. 국민을 위한 국가, 국가를 위하는 국민
4. 국가의 발생과 존재근거
5. 권력, 두 얼굴의 야누스
6. 민주주의 없이 정치권력 없다?!
7. ‘표현의 자유’ 대 국가: 영화 ‘거짓말’의 경우
8. ‘포스트모던’한 정치의 모습은?
9. 권위와 권위주의 사이
  
민주주의는 권위가 부재하는 상황이 아니다. 단지 권위가 창출되고 유지되며 행사되는 방식이 전통적인 권위주의 사회와는 크게 다를 뿐이다(김비환, 2000: 62).
  
10. 질서와 삶의 비전, 이데올로기
11. 새는 보수와 진보의 양 날개로 난다
 
보수와 진보는 기본적으로 사회의 변동에 관한 태도 및 견해를 의미한다(김비환, 2000: 69).
  
12. 지역주의, 공멸에 이르는 병
 
2부 민주주의, 그 장구한 역사의 드라마
 
13. 민주주의를 아십니까?
  
민주주의는 어원상 인민 - 원래는 가난한 다수의 사람 - 을 의미하는 demos와 권력 혹은 지배를 의미하는 kratos의 합성어로서 어원적으로는 ‘가난한 다수의 지배’를 의미한다. 그래서 고전 시대의 민주주의는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수적인 우세에 입각해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뜻했다. 그래서 플라톤 등은 민주주의를 가장 나쁜 정치체제로 평가했다.
그러나 사회가 진화하면서 대다수 인민들은 교육의 혜택을 받기 시작하고 물질적인 여유도 확보해감으로써 민주주의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김비환, 2004: 81).
→ 이게 타당한 설명인지 모르겠다.
  
민주주의를 인민의 자치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 결과를 떠나서 민주주의는 인민 다수의 합의를 통해 정치공동체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정치원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어떤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정한 절차 혹은 수단이라고만 이해한다면,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보다 효율적인 방법이 제시될 경우에 민주주의가 불필요하게 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며 합리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개인들의 도덕적 특성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 그 자체는 고유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
민주주의는 자유로운 인격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므로, 다른 목적을 위해서 잠시라도 유보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김비환, 2004: 82-83).
 
던(J. Dunn)은 민주주의를 ‘결코 완성할 수 없지만, 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상으로 표현했다. 민주주의는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는 정치원리 중에서 가장 결함이 적을 뿐 아니라,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염원을 그나마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생활의 원리이다. 민주주의는 오직 민중의 관심과 참여를 통해서만 숨쉬며 생존해갈 수 있다(김비환, 2004: 84).
  
14. 민주주의, 그 이상과 현실의 조우
 
슘페터(J. Schumpeter)의 경험주의적인 엘리트주의 민주주의론과 그 비판(김비환, 2004: 88)
민주주의는 정책결정과정에 민중들이 자유롭게 참여하는 정치형태가 아니라 민중이 자신들을 통치할 대표자들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제도적 장치에 불과하다.
지나친 경험주의적 편향성
민주주의에 담겨있는 본래의 규범적 의미를 제거하여 있는 그대로의 민주정치 현실을 정당화시켜 버리는 보수주의적 편향성
  
15. 민주주의, 평등한 시민권을 향한 대장정
 
미국에서는 1960년대 초에 이르러서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투표할 수 있게 되었고, 스위스에서는 1971년에야 여성들이 참정권을 갖게 되었으며, 호주에서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야 흑인들에게도 투표의 권리가 부여되었다(김비환, 2004: 92).
 
16. 자유주의, 민주주의의 파트너
17. 민주주의와 그 적들: 독재와 전체주의
  
독재와 전체주의를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한편 독재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부각시켜주는 것은 삶의 두 영역-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구분이다. 정치권력이 삶의 공적인 영역만 통제하느냐, 아니면 사적인 영역까지를 포함한 모든 삶을 통제하느냐 여부가 중요한 구분 기준이다. 
 
전체주의는 권력이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을 통제함으로써 전체 사회를 일정한 방향으로 동원․유도해 나가는 정치형태이다(김비환, 2000: 101-102).
 
18. 아테네, 민주주의의 영원한 고향
 
아테네 민주정치의 이상과 목표는 페리클레스의 ‘장송연설’에 잘 나타나 있다. 페리클레스의 연설에 나타난 아테네 민주정치의 이상과 목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아테네의 민주정치에서는 권력이 소수의 수중이 아닌 전체 민중의 손에 있다. 둘째, 공적인 지위의 등용에 있어서는 계급보다는 실천 능력이 고려된다. 셋째, 사생활에서는 자유롭고 관용을 베풀지만 공공업무에서는 법률을 준수한다. 넷째, 아테네에서는 개인이 자신의 일뿐만 아니라 국가의 공무에도 관심을 갖는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아테네 민주정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덕스러운 시민이 주체가 된 정치라는 점이다. 덕스러운 시민은 도시국가의 번영과 자유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사생활을 희생하려는 각오를 갖고 있다. 그리하여 협소한 사생활의 공간을 벗어나서 도시국가의 공공문제를 토론하고 결정하는 데 직접 참여하려고 한다. 그들은 사생활에만 몰두하고 있는 사람을 전혀 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김비환, 2000: 110).
  
19. 영국혁명: 국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
 
20. 프랑스 혁명: 정의와 평등을 향한 불멸의 이정표
 
1789년 직접민주주의의 이념은 분명히 존재했었고, 이 이념은 혁명과정을 통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19,20세기의 혁명운동들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민주정부에 보다 확실한 모델을 발견하기 어려웠던 프랑스 혁명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와 로마 공화국으로부터 모델을 끌어왔다. 이 모델은 정치적 결정과정에 대한 시민의 적극적이고도 계속적인 참여와 공화국에 대한 헌신과 충성의 정신이 중심이 된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직접민주주의 이념을 부활시켜 실천하고자 시도했다는 점, 그리고 역설적으로 새로운 대의민주주의의 필요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근대 민주주의의 발전에 중대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김비환, 2000: 119-120).
 
21. 미국의 독립선언: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
 
혁명기 미국 민주주의의 형성과 발전에서 투표권의 확대보다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은 평범한 민중들이 정치과정에 직접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단지 투표만 했던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통치자로서 활동했다.
 
1776년 대부분의 미국혁명주의자들은 군주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했지만 혼합정 이론을 배격할 의도는 없었다. 그들은 새로운 공화국은 군주정과 귀족정, 그리고 민주정의 장점을 결합하여 구체화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형식상으로는 혼합원리를 바탕으로 한 공화제적인 정부형태가 탄생하게 되었다. 단일한 제도 내에서 위약한 통치자인 상원은 소수의 대표자들로, 그리고 강력하고 광범위한 힘을 가진 하원은 다수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펜실바니아의 일부 혁명주의자들은 혼합정 이론을 거부했다. 그들은 미국에는 오직 하나의 계급만이 존재하며, 정부는 단지 그들의 대표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상원을 인정하면 귀족제도가 부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국 펜실바니아의 제헌의원들은 총독과 상원이 없는 단일한 입법체로 구성된 단순한 정부형태를 생각해냈다. 그것은 거대한 공동체에서 실천 가능한 18세기형 민주주의에 가장 근접한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자들은 단일한 행정수반과 상원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혼합정을 옹호했다. 그런 상황에서 펜실바니아 헌법의 반대자들 중 일부는 상원의 존재는 귀족이나 상층계급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을 이중으로 대변하는 것이라며 상원제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양원제도를 다른 사회계급의 입장을 대표하는 제도가 아니라 온전한 신뢰를 보낼 수 없는 입법부의 두 부분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와 같이 상원이 민중을 대표하는 또 다른 제도라고 한다면 정부의 다른 부분들인 총독이나 재판관들도 민중을 대표하는 제도들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모든 권위는 민중으로부터 나온다는 공화국의 원리와 민중이 직접 통치한다는 민주정의 원리 사이에는 명확한 구분이 없어지고 만다. 1776년 헌법을 제정할 때 미국인들은 총독과 상원들이 비록 민중에 의해 선출되지만 민중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선거를 대표성의 원천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의원들과 그들이 대표하는 민중 사이의 이해관계의 상호성이 대표성의 적합한 기준이었다. 비록 선출된 지사들이나 상원들의 권위가 민중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해도, 그들은 민중과 같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고, 따라서 민중을 대표하지 않았던 것이다.
 
1780년대에 이르면 미국인들은 오직 해당 관리에 대한 실제적인 투표만이 대표성을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점차 선출된 모든 정부인사들을 민중의 대표로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의회의 하원은 보다 더 직접적인 민중의 대변자로 인식되긴 했지만, 더 이상 유일하고 완전한 민중의 대변자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민중은 모든 곳에서 대표되었고, 모든 정부의 인사들에 의해 대표되기에 이르렀다.
 
정부의 모든 부분들에까지 대표관념을 확장시킴으로써 미국인들은 주에서 연방 수준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관리들로 구성된 새로운 연방제도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이제 민중은 모든 곳에서 지배한다고 볼 수도 있으며, 어떤 곳에서도 지배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게 되었다. 민중은 이제 과거에 하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 미국 정부에 참여하지 않게 되었다. 미국인들은 민중을 정부 바깥에 있는 사회계급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계속되어온 사회와 국가 사이의 동일성도 파괴되었다. 메디슨(J. Madison)에 의하면, 미국 정부의 진정한 독특성은 통치과정으로부터 민중을 전적으로 배제시킨 것이었으며, 따라서 미국은 언제나 공화국(대표체제)으로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체제를 해밀턴(A. Hamilton)은 민주공화정, 즉 대의민주주의라고 불렀다.
 
1776년까지만 해도 미국의 고전적 공화주의의 핵심 이념이었던 덕스러운 지도자의 상은 공익을 위해 사익을 희생하는 헌신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빈번한 선거운동과 경쟁정치, 법률 제정시 사적 이익을 고려해야 한다는 분위기의 고조, 정당의 합법화 등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변해갔다. 장사를 하는 것이나 정치에 종사하는 것이나 모두 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일이라는 점에서 동등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공공 서비스와 봉급은 더 이상 분리될 수 없게 되었다. 토크빌은 미국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일할 뿐만 아니라, 일 자체를 명예스럽게 생각한다고 하였다. 미국에서의 민주주의를 가장 독특하게 만들었던 것은 일에 대한 미국인들의 평등주의적인 생각이었던 것이다.
 
노동에 대한 태도와 누구나 노동을 해야 한다는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사고만큼 미국인들과 미국민주주의를 유럽과 확실하게 구분한 것은 없다. 누구나 일하려고 하고 따라서 노동계급이라 불릴 수 있는 특정집단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이 발전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모두가 노동자였고 공직마저도 생계를 위한 일로 인식되었다(김비환, 2000: 124-130).
 
→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독특한 해석이라고 해야 하나. 이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파악했으면 좋겠다.
 
22. 세계를 뒤흔든 붉은 깃발,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운영
 
1917년 2월, 러시아 소비에트는 1871년 프랑스에서 출현했던 자치공동체인 파리코뮌의 근대적 형태로서 등장했다. 파리코뮌(Commune de Paris)은 자체적인 입법, 사법, 행정 및 방위조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원리는 통치과정 전체를 통해 모든 민중을 참여시킨다는 것이었다. 볼셰비키(Bolshevik)의 애초의 역할은 민중을 정치과정에 참여시키는 것이었는데, 이에 따라 소비에트에서의 민주주의는 직접적이고 참여적이었다. 어떤 면에서 이는 단순한 유토피아적 이론이 아니라 전쟁이 남긴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민중의 힘을 이용하려는 현실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산업생산의 붕괴, 연료와 식량의 부족, 기근, 질병 등 전쟁의 재앙들은 소규모의 인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으며, 자신감과 열정이 있는 다수 민중의 힘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실제적으로 실현될 필요가 있었으며, 부르주아 의회주의의 한계를 메울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의 실제적 필요성과 낙관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는 고도로 집중화된 독재체제를 발전시켰다. 인민위원회에 집중된 권력은 혁명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비상수단으로서 정당화되었다. 볼세비키 정권이 코뮌식 민주주의를 실천하겠다고 한 약속은 실제로 포기되고 이상과 실제의 간격은 커져갔다. 소련공산당은 원래의 이상을 상황논리로 덮어버리고, 공산당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하며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포기하고 말았다(김비환, 2000: 134-135).
  
23. 대의민주주의, 그 등장의 불가피성
 
서구에서 18세기 중엽부터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결과 경제생활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재편성되기 시작했고, 도시가 거대한 규모로 팽창됨으로써 도시의 인간관계는 원자화되었고, 익명성이 두드러졌으며, 상업적인 계약관계가 보편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모든 시민들이 한 곳에 모여 직접 사회의 문제를 논하고 결정하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대의민주주의의 발전은 단순히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적․시간적 제약 때문만은 아니다. 산업사회는 그 규모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그 구조의 복잡성에 있어서도 이전의 농경사회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고, 사회의 경제체제와 다양한 제도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이 없으면 관리하기 힘들게 되었다. 사회의 전문적인 관리를 위해서라도 국민들을 대표할 엘리트들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대의민주주의가 출현함으로써 국민들은 대표자들을 선출하는 정기적인 선거 때를 제외하고는 직접 모여서 국사를 논의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국민들은 소수의 전문가들로 하여금 국사를 담당하게 하고 자신들은 노동을 하고 돈을 벌며 여가를 즐기는데 시간을 쓰게 된 것이다. 물론 국민들은 자신의 수입 중에서 일부를 세금으로 납부하여 전문가들이 국사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이렇게 볼 때 대의제 민주주의는 전문가와 국민들 사이의 일종의 기능분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 보면 대의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전문주의의 불가피한 타협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인들의 자유와 합리성을 실현할 수 있는 절차와 과정이 필요했기에 민주주의가 근대인의 도덕적 특성 - 자율성 - 을 실현할 수 있는 절차로서 요구되었다. 그러나 근대의 산업사회는 시민들의 도덕적 특성을 직접적으로 실현하기에는 너무나 그 규모가 크고 복잡해져 버렸기 때문에 사회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이런 상황은 정치참여를 통해 자율성을 실현하고픈 시민들의 욕구와는 양립하기가 어려웠다(이와 같은 근대 산업사회의 구조적 난점은 자유주의 사회의 시민들을 점차 탈정치화시켰고, 프라이버시를 더욱 신성시하도록 이끌어갔다). 그러므로 시민들의 자율성을 최소한이나마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한편(최소한의 정치참여 욕구 실현), 복잡한 산업사회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엘리트들의 주도적인 역할을 허용할 수 있는 정치원리가 절실히 요청되었고, 이에 부합한 것이 바로 대의민주주의였다. 대의민주주의는 자율성의 이상과 사회관리의 효율성이 이상적으로 결합된 민주주의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김비환, 2000: 136-139).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비판
하지만 대의민주주의는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지나치게 최소화하고 있기 때문에 사이비 민주주의이다. 시민들은 몇 년만에 한 번씩 돌아오는 선거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자에게 한 표를 던지는 것이 고작이고, 그 후보자들도 자신들이 직접 추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이미 정해진 후보자들 중에서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1942)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다만 민중의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승인하거나 또는 부인할 기회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할 따름”이며,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대의민주주의는 기껏해야 시민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경쟁하는 정치 엘리트의 지배권을 정당화시켜 주는 정도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작동방식을 묘사하는 것으로 민주주의의 이상을 대체하고자 하는 시도는 매우 보수적이며, 시민들의 역할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한계가 있다. 또한 대의원들이 지적․도덕적으로 일반 시민보다도 월등히 우월하며 합리적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대의민주주의는 대의원들에게는 너무나 많은 권력을 쥐어주고, 국민에게는 너무나 적은 권력만을 남겨준다.
 
그래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대의원들의 부패와 무능력에 실망한 일반 시민들이 스스로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참여민주주의 운동이 거의 모든 국가에서 발생하고 있다(김비환, 2000: 139-141).
  
→ 사회구조의 복잡성, 전문적인 관리의 필요성의 문제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관료제의 극복과 관련하여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이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직접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공허할 수밖에 없다.
 
24. 대의민주주의의 ‘대표’: 누가, 누구를, 어떻게
 
대표개념이 사용되기 시작했을 때는 주로 두 가지 의미, ‘신탁’(trust)의 의미와 ‘대리’(delegate)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신탁으로서의 대표개념은 일반 시민들이 그 대표자에게 정치적 문제에 관한 모든 일을 책임지고 관리해 달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일반 시민과 대표자들 간에 능력의 차이가 상당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엘리트주의의 성격을 갖는다. 대리모델에서 대리인(delegate)은 대리를 부탁한 사람의 명령과 지시에 따라서 행동하는데, 18세기의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은 대리인이 선거구민들의 의사와 이익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과 선호에 의지한다면, 결국 대리인 자신의 이익과 선호를 표현하게 된다는 우려 때문에 이 대리모델을 옹호하였다. 이러한 대리로서의 대표개념을 사용했던 이들은 특히 대의원들과 일반 시민들 사이의 이익이나 견해의 차이가 최소화되는 제도적 장치를 선호했다. 대표자의 임기를 아주 짧게 정한다든지, 국민소환(recall)이나 국민발의(initiatives), 국민투표(referendum)와 같은 직접민주정치의 제도들을 도입함으로써 대표자들에 대한 시민의 통제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그와 같은 제도적 장치의 예이다.
 
오늘날의 지배적인 대표개념은 근대 정당제도가 발전하기 시작한 프랑스 혁명 전후기에 등장하였다. 이때부터 대표자들은 개인의 자질과 능력보다는 특정한 정당의 이념과 정책에 충실한 ‘정당인’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일반 시민들은 선거기간을 통해 정당이 제시하는 정책에 지지를 보냄으로써 그 정책을 실천할 수 있는 권위를 위임한다. 그러므로 대표개념은 이제 개별 정치인들과 일반 시민들의 관계로부터 일반 시민들과 정당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에 따르면, 대표자는 선거구에서 선출되지만 전체 국민의 위임을 받으려고 경쟁하는 정당의 일원으로서, 특정 선거구민의 뜻과 이익이 아닌 전체 국민의 뜻과 이익을 대표하는 신탁자로서 자유롭게 판단하고 행위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또 하나의 근대적인 대표개념으로 ‘유사’(resemblance)가 표현하는 것이 있다. 유사라는 용어로 설명되는 대표개념은 의회와 정부의 대표는 계급, 종교, 성, 인종 등 다양한 집단들로 균열된 사회구조를 그대로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치란 사회의 균열상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맑스주의 시각에 기초한 대표개념이다.
유사 용어를 사용하여 대표개념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의회와 같은 대표제도는 계급, 성, 인종 등과 같은 사회집단별로 할당되어야 하고, 따라서 투표자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 내보낸 후보자에게 투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와 정치제도의 변화에 따라 신탁, 대리, 위임, 유사의 네 가지 대표 개념들은 서로 교차하고 중첩되기도 하면서 변화하였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신탁이나 대리로서의 대표개념이 적지 않게 거론되고 있다(김비환, 2000: 143-146).
 
25. 민주주의는 정당정치?
 
‘정당은 정치적 견해를 같이 하고,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행동함으로써 주로 선거를 통해 정부를 통제하려고 노력하는 시민들의 조직’으로 정의할 수 있다. 정당은 국가의 공식적인 제도이고 정치적 이익과 견해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며, 공직을 위해 경쟁하고 정권의 획득을 목표로 노력한다는 네 가지 특징이 있다. 정당의 현대적 기능은 ① 이익의 대표, ② 정치 엘리트의 육성과 충원, ③ 목표의 설정, ④ 이익의 결집, ⑤ 정치적 사회화와 동원, ⑥ 정부의 조직 등이다(김비환, 2004: 147-149).
  
26. 지방정치, 민주주의의 실험장
  
27. 참여민주주의, 공동선 발견과 배움의 장
 
대의민주주의는 국민의 대표들이 주체가 되어 공동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정치형태이기 때문에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구성된 의회가 가장 중요한 기관이다. 그러나 오늘날 의회는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함으로써 대표성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이에 국민의 직접적인 정치참여를 활성화시킴으로써 대의민주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참여민주주의자들은 대의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대의민주주의의 성격 자체에서 찾는다.
 
오늘날 대의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의 실천적 형태이다. 자유주의 시대의 국민들은 점점 더 사적인 생활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으며, 정치참여는 정기 선거와 같은 일회성의 행사에만 국한되고 있다. 또한 자유민주주의자들은 국민들의 정치참여를 장려하기보다는 사적인 자유를 보호하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대의민주주의자들은 국민의 직접적인 정치참여는 오히려 정치적 불안정을 가중시킬 우려가 있다고 하면서 국민들을 정치적으로 무능하게 평가하는 한편, 은근히 국민들의 직접적인 정치참여를 제한하고자 하는 논리를 제공해왔던 것이다.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에서는 정치참여가 특권이 아닌 부담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으며, 고상한 인간의 특징을 나타내지도 않는다.
 
하지만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오늘날의 정치적 대표성의 위기가 참여의 결핍에서 온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고대 아테네 민주정치의 풍요로웠던 시민생활의 이상을 오늘날의 상황 속에 다시 복구하기를 원한다. 그래야만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고, 인류가 잃어버렸던 공공생활의 풍요로움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람들이 서로 관심사를 공유하고 만나서 토론하는 가운데 삶이 풍부해진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참여민주주의자들이 대의민주주의가 단지 국민의 의사를 정확히 대표하지 못하고 행정부에 비해 무기력하다는 이유만으로 참여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공적 생활에의 참여가 인간의 삶을 한 단계 고양시켜 주는 가장 좋은 삶의 방식이며, 공적 생활에의 적극적인 참여는 비참여적인 삶이 줄 수 없는 공적인 자유와 행복을 체험하도록 해주기 때문에 옹호하는 것이다.
  
참여민주주의는 자유주의적 대의민주주의와 결부되어 있는 다양한 문제점들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사적인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일반 국민들은 정치적인 관심도 높지 않고 정치에 관한 지식도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국가권력이 적절히 통제되지 않을 경우 권력이 비교적 쉽게 남용될 수 있다. 권력기관들 사이에 권력을 분할함으로써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지만, 이런 제도들은 그 자체로서 권력의 남용을 완벽하게 막아주지는 못한다. 만일 권력간의 타협과 담합이 이루어지거나 한 권력기관이 권력을 독점하게 되면 행정부의 독재로 전락하든지 의회의 독선이 초래될 수 있을 것이다.
참여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의 이런 결함을 보완해주거나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즉 국민의 직접적인 정치참여는 권력의 남용과 공무원의 부패를 막아줌으로써 공화국을 민주적으로 유지시킬 수 있음은 물론 부정부패가 없는 깨끗한 행정관행을 창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참여민주주의자들은 정치에 관한 국민들의 이해와 관심을 제고하는 배움의 방법으로 참여를 이해한다. 공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할수록 사람들은 공적인 문제에 대해 처음에는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되고, 그렇게 되면 정보를 바탕으로 어떤 결정과정에 참여하기 때문에 올바르거나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참여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이해관계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된다. 공적인 공간에서 서로 만나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경청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넓힐 수 있으며, 자신의 이해관계를 바꿀 수도 있다. 그런 가운데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관용이 싹트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적대감이나 이기심을 가지고 공적인 모임에 참여하게 되지만, 대화와 토론 과정에서 자신의 협소한 이기심을 털어버리고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의 이익과 행복에 관심을 갖게 될 수 있다.
 
참여민주주의는 사람들의 매너를 세련되게 하고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 반복된 참여를 통해 익숙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 접하면서 세련된 행동과 에티켓을 배우는 것이다. 참여는 사람의 생각과 이해관계에 변화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그들의 외면적인 태도와 행동도 변화시키는 전인적인 학습의 장인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복잡하고 거대한 사회 속에서 모든 시민들이 공적인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토론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참여는 대의민주주의를 통해서는 성취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길을 열어줄 뿐만 아니라, 자기 중심적이고 폐쇄적인 삶을 사는 현대인들의 인생관과 행복관을 바꾸도록 해줌으로써 보다 풍요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김비환, 2000: 158-162).
  
→ 김비환은 참여민주주의를 토의민주주의와 비슷한 것으로 파악하는 듯하다.
 
28. 일터민주주의를 생각한다
  
우리는 중대한 국가의 일을 논의하고 결정할 때나 동료들 사이에서 공동의 문제를 결정해야 할 때 민주주의 방식을 도입하곤 한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적 문제해결 방식이나 의결방식은 많은 시간을 일하며 보내는 일터에서도 적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일터에서의 민주주의는 법으로 강제할 일이 아니며, 따라서 기업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
  
만일 민주주의가 그렇게 좋은 집단적 의사결정 과정이라면 왜 직장에서는 민주주의를 실천하지 않을까. 물론 꽤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일을 진행하는 일터도 있지만, 흔하지 않으며, 설령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도입했다 하더라도 민주주의 원칙은 그리 철저하게 관철되지 않는다. 국가도 하나의 결사이고, 직장도 하나의 결사이며, 민주주의가 좋은 집단적 의사결정 방식이라면, 왜 국가 차원의 민주주의는 법적으로 강제하면서 일터에서는 강제하지 않을까.
 
국가의 시민이 되는 것과 직장의 노동자가 되는 것은 처음부터 다르다. 보통의 경우 우리의 선택에 의해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출생에 의해 정해진다. 하지만 특정 국가의 시민이 되는 것과는 달리 엄청나게 다양한 직종 중에서 특정 직종을 선택할 수 있으며, 또 언제든지 다른 직종으로 바꿀 수 있다. 즉 한 국가의 시민이 되는 것은 비자발적인데 반해, 직장을 선택하고 바꾸는 것은 자유롭고도 자발적인 선택에 달려 있다는 점이 다른 것이다.
 
그런데 직장을 마음대로 선택하고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은 일터에서도 민주적으로 의사결정이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의 당위성을 크게 약화시킨다. 국가의 정치적 결정은 다른 곳으로 이민을 가는 과격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에 강력하고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와 반대로, 직장 생활과 관련하여 개인이 자유를 누리는 정도는 훨씬 크고 - 직장에서의 의사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경영자의 관리방식이 참을 수 없다고 판단될 경우 개인은 언제든지 그 직장을 떠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 직장에서의 의사결정은 선택적으로만 영향을 미친다.
  
국가의 공적인 문제는 민주적으로 결정되고 처리되어야 국민들이 그 정책의 결과를 용인하고 감내할 수 있으나, 국민 자신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정책에 의해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경우 이는 견딜 수 없고 고통스럽게 된다. 따라서 국가 정치에 있어 민주주의는 어떤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실현시켜야 할 절박한 과제이지만, 일터의 경우 그와 같은 절박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유럽국가들처럼 서로 문화가 비슷하고 인접해 있는 지역에서는 국가의 선택도 비교적 용이하므로 직장을 선택하는 것과 거의 차이가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또한 어떤 특수한 지역에서는 직장이 거의 없어서 국가를 선택하는 것보다 직장을 선택하는 것이 더 어려울 수도 있다. 탄광촌과 같이 다른 직장이 거의 없기 때문에 광부 일이 아니면 다른 일을 찾아보기 힘든 경우가 그 예이다. 이와 같이 극단적인 경우를 가정한다면 일터에서도 어느 정도의 민주주의는 강제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극단적으로 억압적인 의사결정 과정과 노동자에게 불리한 정책집행은 민주주의 국가가 헌법에 보장하고 있는 기본적인 권리를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일반화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대체로 민주사회의 시민들은 다양한 직종과 직장을 어느 저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임금은 그다지 높지 않지만 정책결정이 민주적으로 이루어지는 직장을 선호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정책이 다소 권위적으로 결정되더라도 임금수준이 높은 직장을 선호할 수 있다. 만일 국가가 국가 차원의 정치에서처럼 일터에서도 민주주의를 강제한다면 그것은 기업가들과 근로자들의 선택범위를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기업가가 모든 정책결정 과정에 노동자들을 참여시키고 동등한 자격으로 정책결정을 하도록 강제한다면 적지 않은 기업가들이 기업을 세우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민주주의 국가라 하더라도 민주주의가 모든 곳에 적용되지 않으며, 또 그래서도 안된다. 기업가들이 개인들의 자율성과 합리성을 존중하여 의사결정 과정에 노동자들을 참여시키는 것이 바람직하겠으나, 이것은 그 기업의 자유재량에 맡기는 것이 원칙일 것이다. 일터에서는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할 정도의 위험이 없는 한 어느 정도의 비민주주의적인 의사결정 절차도 용인될 수 있다(김비환, 2000: 163-168).
 
→ 일터민주주의를 기업의 선택에 맡긴다면 공공부문에서는 어떠해야 할까. 국가의 선택에 따라서 결정되어야 할 텐데.
결국 선택의 자유가 중요한 요소인 것인가. 탄광촌의 사례가 극단적인 경우일까.
일터에서는 민주주의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논리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29. 전자민주주의, 낙관만 할 수 있을까?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이 일방적으로 민주주의 혹은 전체주의를 결정지을 수 없고, 현재의 정치형태(또는 과정)가 정보통신기술의 사용을 일방적으로 규정할 수도 없다. 중요한 문제는 정보통신기술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어떤 정치형태를 발전시키는 데 보다 유리한지 아니면 불리한지를 철저히 검토해서, 그 잠재력을 가능한 한 민주주의를 촉진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설계, 분배, 활용, 통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제는 당연히 한 사회의 문화적 특수성, 정치발전 수준, 경제구조 및 국제적 상호의존성의 정도에 관한 논의를 포괄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요소(또는 변수)들이 정보통신기술의 사회․정치적 활용의 방향과 목적을 상당부분 조건짓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이해할 경우, 즉 시민의 적극적인 정치참여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경우 아터튼(C. Arterton)의 연구결과와 같은 경험적인 연구들은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이 참여지향적인 민주정치의 필요조건일 수는 있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정보통신기술이 민주정치를 촉진시키는데 기여하기 위해서는 다른 전제조건들과 매개변수들을 거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정보의 양과 질, 정치 행위자들의 의식과 태도, 비용과 노력의 문제 등 다른 조건들이나 매개변수들에 따라 정보통신기술이 민주정치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이 좌우된다. 유석진 교수는 『정보화와 민주주의』(1997)에서 아터튼의 경험적인 연구를 요약한 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명제를 제시하였다.
 
첫째, 정보화가 민주주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아직 이론적 경험적 차원에서 확립된 결정적인 인과관계를 설정할 수 없으며, 앞으로 많은 학술적 논의를 필요로 한다.
둘째, 정보화가 민주주의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질적인 고양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줄 수 있다는 환경변수로서의 역할 정도에 한정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한 걸음 더 나아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가정하여도 정보화는 민주주의의 질적 고양을 위한 필요조건에 불과하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충분조건은 다시 ‘정치적’인 매개변수의 작동을 통해 만족될 것이다.
 
이 명제들은 정보통신기술의 발전 자체가 곧 적극적으로 이해된 민주정치의 심화를 가져온다는 기술결정론적 명제의 타당성을 부인하고 있다(김비환, 2000: 171-173).
 
30. 초국가체제에서 민주주의는 생존할 수 있는가?: 세계화의 문제
 
31. 유교와 민주주의가 만났을 때
 
유교민주주의는 유교로부터 자유주의, 다원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와 양립 가능하고 자유주의의 한계와 결함을 보완해줄 수 있는 요소들을 발굴하여 자유민주주의와 접합시킨 형태이다. 그것은 유교로부터 그 형이상학적․우주론적 내용을 제거하는 한편 - 왜냐하면 그것은 현대의 다원주의와 자유․권리 의식과 충돌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 공동선을 고려하여 자유와 권리의 일방적인 행사를 절제할 수 있는 시민의 덕성 함양에 적용할 수 있는 요소들을 발굴하여 자유민주주의에 접합시킨 형태인 것이다(김비환, 2000: 186).
 
3부. 민주주의, 그 끊임없는 인간의 열망
  
32. 높낮이 없는 민주적 유대를 위해: 평등의 문제
 
33. 너와 나의 차이, 공존할 수 있다: 관용의 원리
 
관용은 관용하는 자의 입장에서 볼 때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는 신념과 행위 또는 관행을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성요소: 1) 관용하는 자가 못마땅해 하는 어떤 행위나 신념이 존재해야 한다. 2) 관용하는 자는 강제적인 방식으로 이 행위나 신념을 방해해선 안된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제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려는 관용의 태도는 단순한 묵인이나 체념보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관용은 그릇된 것이라고 믿어지는 신념이나 행위와 관련될 때 더 중시되는 동시에 문제가 될 수 있다. 관용이 잘못된 신념이나 행위까지도 존재하도록 허용할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을 허용하는 것이 옳다는 판단을 내포하게 되기 때문이다. - 관용의 역설
 
관용은 반드시 관용되는 대상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이나 느낌을 포함한다.
그리고 관용은 못마땅한 신념이나 태도에 대해 강제적으로든 아니면 다른 수단을 통해서든 개입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선택할 때 실천된다.
   
로크는 『관용에 관한 서한』에서 관용에 대해 옹호하였다.
볼테르(Voltaire): “나는 당신이 말하는 것에 반대하지만, 당신이 그것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죽을 때까지 변호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자유론』: 자유의 가치를 옹호하는 일환으로 관용을 강조하였다. 관용은 사회의 개선과 지적인 진보, 그리고 지식의 성장을 위해 필요하며, 개인의 도덕적․정신적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김비환, 2000: 196-199).
  
34. 정의로운 사회의 윤곽
  
35. 법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법의 지배
  
36. 신뢰와 불신, 민주주의의 두 척후병
  
37. 민주적 절차의 조건들
 
민주적 절차의 포괄적인 특징
1) 정치적 평등의 기준. 공도엧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복종과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권위적인 결정은 정치적인 평등의 기준에 따라 내려진 결정이라는 것이다. 정치적 평등은 결정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발언권과 투표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어떤 절차가 정치적 평등의 기준에 잘 부합한다는 것은 결정과정에 참여자들의 선호가 잘 표현되고 동등하게 반영된다는 뜻이다.
 
2) 효율적 참여의 기준. 시민들은 의제를 설정하고 결정하는 단계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시민들의 선호와 의지가 정확히 반영되지도 않고 고려되지도 않을 것이다.
 
다알(R. Dahl)은 어떤 결정절차가 이러한 두 가지 기준을 충족시키면 어느 정도 절차적 민주주의에 부합한다고 말한다. 그는 보다 완전한 민주적 절차는 이외에 ① 참여자들의 ‘계몽된 지성’이 필요하고, ② 의제의 통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완전한 절차적 민주주의는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만 적용되면 안되고 중요한 문제들에도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사회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포용의 기준’(criterion of inclusiveness)도 요구된다. 누가 시민에 포함되는가에 대한 문제는 지역적, 역사적으로 큰 차이가 있으나, 보다 많은 사람들이 시민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상에서 설명한 다섯 가지 기준을 완전히 충족시키는 절차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김비환, 2000: 220-223).
  
38. 여론정치로서의 민주주의, 과연 신뢰할 만한가?
 
39. 민주주의의 생명선인 선거, 그 빛과 그림자
  
40. 정치적 무관심의 부메랑: 프라이버시가 위협받고 있다!
  
4부 행복한 민주시민, 정의로운 민주공동체
 
41. 시민사회, 밀레니엄 민주주의의 토양
 
킨(J. Keane)은 시민사회를 ‘법적으로 보호되는 비정부 제도들의 복잡하고도 역동적인 결합체’로 정의한다. 이에 따를 경우, 시민사회를 이루는 “비정부제도들은 비폭력적이며 스스로를 체계화하고 반성하며, 그들의 활동에 ‘테두리를 정하고’ 억누르며 또 권한을 부여하는 국가와 영구적으로 상호긴장관계에 있는 경향”을 보인다.
시민사회적 시작에서 볼 때, 민주주의는 단지 정기적인 선거나 경쟁적 정당체제, 다수지배와 같은 협소한 제도적 장치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국가제도들과 분리된 사회생활의 영역에서도 실질적인 민주적 원리들이 관철되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는 권력분점의 논리가 국가제도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제도 내에서도 관철됨으로써, 권력이 남용되지 않고 다양한 이해관심들이 공개적인 논의와 타협 및 합의에 따라 처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서로 긴장관계에 있는 두 영역간에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정착시켜 나가는 과정이며, 또한 각 영역 내에서 권력을 배분하고 권력행사를 공개적으로 감시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시민사회와 국가는 서로 긴장관계에 있으면서도 상호의존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 겔너(E. Gellner)는 시민사회를 “국가를 견제하기에 충분히 강력하고, 국가가 평화를 지키고 다양한 이해관계들을 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지만, 국가가 사회의 다른 부분들을 지배하고 원자화시키는 것을 막아주는 다양한 비정부 제도들의 집합체”라고 하였다(김비환, 2000: 244-245).
  
42. 시장과 민주주의: 반대로 뛰는 두 마리 토끼?!
 
43. 페미니즘, 자유와 평등을 향한 여성들의 행군
 
44. 사익과 공익이 어우러지는 사회, 그 풍요로움을 꿈꾼다
 
45. 국가로부터의 자유에서 국가로의 자유로
  
46. 공손함(civility), 그 보이지 않는 조화의 원리
 
민주주의는 인간의 자율성과 합리성을 실현하게 해주는 유일한 정치형태이기 때문에 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고서 항상 예민하게 신경을 쓰면서 조심스럽게 운용해야 한다면 이것은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민주적인 태도가 습관화되어 일종의 문화처럼 우리의 사고와 판단과 행위를 인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머리는 항상 무엇인가를 분석하고 판단하느라고 과부하가 될 것이다.
공손(civility)이라는 덕목은 일종의 문화처럼 민주시민의 ‘마음의 습관’이 되어 크게 의식하지 않아도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조절하여 부드러운 인간관계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크게 공헌하고 있다. 이 공손의 미덕은 민주제도의 한계를 보완해 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제도의 원활하고 온전한 운용에 필수적이다.
 
쉴즈(E. Shields)는 자유민주주의 제도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유지하는데 다소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면, 이 제도들은 공손의 미덕을 잘 구현하고 있다고 보았다. 즉 자유민주주의 제도들은 최소한의 공손의 미덕이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공손의 미덕을 태도이자 행위의 패턴으로 이해한다. 공손은 시민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제도와 사회의 모든 계층과 부문들에 대한 존중과 애착의 태도이다. 근본적으로 공손의 미덕은 자신의 개인의식이 부분적으로 집단적 의식에 의해 대체된 사람의 태도를 의미한다.
 
또한 쉴즈는 공손한 태도가 ‘개인들이 서로를 보고 서로를 들으며 서로를 직접 대하는 모든 상황에 두루 작용하며, 입법부와 정치적인 집회와 같은 정치적 공간에까지 자연스럽게 미친다’고 하였다. 나아가 공손의 미덕 그 자체는 개인의 자아를 집합체의 일부로 보는 집단 자의식에 입각해 있는 정치적 행위의 양식으로서, 개인적이거나 협소한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을 우선하는 규범을 내포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정착․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민주적인 제도를 구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민주적 덕성이 함양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운용주체인 민주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운용하기에 충분히 덕스럽고 헌신적이지 않다면 민주주의는 언제든지 타락하거나 권위주의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김비환, 2000: 271-275).
  
47. 유고의 忠恕,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48. 더불어 행동하는 행복: ‘공적 행복’
 
49. 정의로운 사회, 그 행복의 조건
 
50. 한국적 민주시민의 형성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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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3 17:37 2007/04/23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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