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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이후의 민주주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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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다 읽었다.

저자들은 대단한 사람들이다.

귄터 그라스, 데이비드 헬드, 알랭 뚜렌느, 지그문트 바우만, 클라우스 오페, 피에르 부르디외, 울리히 벡, 그리고 프랜시스 후쿠야마...

그런데 별로 남는 게 없다.

분명 민주주의에 대해 뭔가 얘기한 것 같은데 그리 와닿지 않는 느낌이다.

그래서 밑줄 그은 것도 별로 없고, 이걸 정리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렇다.

  

귄터 그라스 외(2005), 『세계화 이후의 민주주의』. 평사리. Thomas Assheur and Werner A. Perger ed. 2000. Was wird aus Demokratie?

 

각 글의 제목들은 근사하다.

최전선의 민주주의, 시민사회에 대한 찬사, 신뢰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권력문제, 정치로의 귀환, 자본주의를 길들이자! 등.

 

번역상의 문제일까. 아무래도 내가 관심이 참여민주주의 쪽으로 가있다 보니 너무 대충 읽어서 그러한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여유가 되면 다시 한번 읽어봐야지. 그렇다고 독일어 원본을 볼 수는 없잖아. 

 

옮긴이 후기에 그래도 쓸만한 대목이 있다.

 

근대주권국가가 자신의 권력을 상실함에 따라 근대 서구 국민국가의 절대이념으로서의 민주주의 역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제도화된 민주주의의 절차와 과정에 대한 강조는 여론을 형성하고, 형성된 여론에 기초하여 정책적 의사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따라 정치를 행함으로써 내용적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정치적 과정이 일부 소수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대다수 사람들의 여론이 무시되거나 조작되고, 제도적 절차와 과정이 소수에 의한 결정에 형식적 정당성을 제공해주는 역할에 머무르게 되면, 사람들은 정치를 불신하게 되고,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게 된다. (180쪽)

 

우럽 국가들은 복지국가를 통한 삶의 질 개선과 기본적인 생활권 보장이라는 기존의 이념을 버림과 동시에 시장의 자유경쟁논리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고 자국민에 대한 보호자로서의 기존의 국가의 정치행위에서 한발 뒤로 비켜섬으로써, 민주주의의 논리를 자본의 논리로 대체하고 있다.

 

민의의 대변을 통한 통치라는 민주주의적 정치질서가 자본과 권력을 위한 소수의 통치로 바뀌어가고 있는 현실이 바로 민주주의의 위기인 것이다.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해체가 아니라 민주주의 정착(공고화)의 위기이다. 김영삼의 문민정부에서 시작하여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를 거쳐 노무현의 참여정부에 이르는 과정은 서구 민주주의의 수백 년에 걸친 정착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과정이다. 소수권력과 자본의 지배로부터 모든 사람의 참여에 의한 실질적 민주주의를 달성하고자 했던 민주주의적 정신이 사회민주화운동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이러한 운동정신이 한국의 정치를 복원시키고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왔다.

 

그러나 한국은 대외적으로 세계화라는 경제주권의 박탈과 대내적으로 참여의 소멸이라는 정치부재와 민주주의의 위기를 맞고 있다. 민주주의적 제도와 틀을 안착시키고, 그 속에서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겠다는 국정운영 방향을 들고 집권에 성공했던 노무현 정권은 국민참여 정부를 내세웠지만, 현실은 국민 '참어' 정부에 가까운 처참한 형상을 하게 되었다.

 

참여를 내세운 정권하에서 정당들은 참여에 기초해 대의를 모으고 여론을 수렴하는 정책정당이 아니라 이전과 마찬가지로 권력자를 중심으로 모이는 권력정치를 답습하고 있다. 광범위한 자발적 참여에 기초해 한국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노무현의 국정운영은 극렬지지층을 중심으로 참여를 조직하고 대다수를 배제하는 일방적 정치행태로 변질되어 갔다.

 

정치적 민주화에 기초한 경제의 민주화는 재벌의 헤쳐모여를 거치면서 삼성이라는 거대재벌을 중심으로 하는 거대자본의 이해가 오히려 정치를 좌우하는 역전을 초래하게 되었다.

 

지역주민의 자발적 참여를 통한 지역자치를 위한 지방자치제는 권력과 자본의 여론독점과 조작이 난무하면서 대다수의 주민이 배제되는 권력과 자본의 자치구역으로 변질되고 있다. 거주민의 참여를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가 거주민을 정치적인 동원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행정권위주의에 길을 내주고 있다. 방폐장 유치를 둘러싼 지역주민투표야말로 이러한 퇴행적 정치행위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자본유치를 위해 개발과 성장의 논리를 내세워 행정권력을 동원하는 지역권력과 지역자본의 행태 앞에서 제도적 민주주의는 실질적 민주주의로부터 유리되어 본래의 내용성을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제도와 규칙을 갖추었다고 곧바로 민주주의가 정착되지는 않는다.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주체들의 행위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성립되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행위란 참여를 전제할 때만 성립할 수 있다.

 

참여를 통한 정치와 민주주의의 복원만이 현재 위기에 처해 있는 민주주의를 되살릴 수 있다. 하버마스가 말하는 공론장이란 바로 사회구성원이 자유롭게 참여하여 여론을 형성하는 공간이다. 다수가 공론장에 참여하여 자유로운 토론과 대화를 통해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소통의 결과가 정치로 이어질 때 참다운 대의적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 (184-187쪽) 

  

후기의 결론이 좀 아닌 것 같다. 하버마스식의 토의민주주의를 얘기하는 듯한데, 이에 대해서는 본문에 거의 언급이 되지 않았던 듯하다. 그런데 뜬금없이 왜 나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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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30 02:23 2007/04/30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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