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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르뚜알레그리 새로운 민주주의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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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의 참여예산제 실험을 상세히 소개한 책자입니다. <민주주의>(이소)라는 책과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될 듯하네요. 참여예산제 자체가 심의 민주주의에 대한 하나의 실험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임혁백 교수도 심의(토의) 민주주의의 예로서 포르투 알레그레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이 책은 특히 지방자치를 고민하는 동지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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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르뚜알레그리 새로운 민주주의의 희망  
: 마리옹 그레 외   : 김택현   : 박종철출판사  

정가 :  9,000 원  
출간일 :  2005년 02월 25일  
쪽수 :  216 쪽  ㅣ 판형 : B6 ㅣ 판수 : 1  
  
참여 예산제를 통해 뽀르뚜알레그리는 제4의 권력- 즉 시민이 직접 결정권을 갖는 시민의 권력- 을 창출하기 시작했다. 이 경험은 매혹적이다. 물론 이것이 완성된 모델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유와 민주주의가 참여 없이도 아주 훌륭하게 구현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에 맞서서, 뽀르뚜알레그리의 경험이 확인해 주는 것은 민주주의의 동맥이 근대 사회를 관통한다면 그 심장은 바로 참여자라는 점이다.

서문

1 "붉은도시"' 뽀르뚜알레그리
2 참여 예산제, 민주주의의 혁신
3 효율성과 참여
4 제도화와 범위
결론 다른 민주주의를 향하여

참고문헌 
 


 



1988년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 노동자당이 주도한 좌파연합, 즉 "인민전선"이라는 이름의 좌파 연합이 놀랍게도 뽀르뚜알레그리의 시 정부를 장악했다. 초기의 약간의 산통을 거친 뒤, 새로운 시 정부는 혁신적인 시도에 착수했는데, 몇 년 사이에 그들의 시도는 예상치 못한 비중을 갖게 되며, 마침내 실질적인 하나의 제도가 되었다. 바로 시 주민들이 시 예산을 짜는 데 참여하는 제도가 그것이다. 15년이 지난 뒤 브라질의 지방자치단체 백여군데와 라틴아메리카의 곳곳에서 뽀르뚜알레그리의 실험을 배우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이 실험에 대한 논평이 나왔고, 노동자당과 그 연합 세력이 지방자치단체장에 네 번이나 연이어 당선되는 데 이 실험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5년 1월에, 뽀르뚜알레그리는 제5회 세계사회포럼을 개최한다. 이 도시는 마치 "다른 세계"의 중심이 된 것만 같았고, 스스로를 "민주주의의 수도"로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이러한 매혹의 이유들을 이해하기란 별로 어렵지 않다. 거의 모든 곳에서, 지배 계급과 시민 사이의 간격은 더 벌어지고 있고, 여기에 정치 체제의 잠재적인 정당성 위기가 수반된다. 게다가 민중에 대한 엘리트들의 아주 오래된 편견은 점점 더 정당화되기 어려워지고 있다. 여성들은 책임 있는 공직을 맡을 수 없다는 생각을 공공연히 옹호하는 일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것만큼이나, 보통 시민들은 시정의 전반적인 문제에 어둡기 때문에 직접 정치적 결정을 내릴 수도 없다는 생각도 더 이상 수용되지 않는다. 정말이지 "이 세상의 고통은 대중들보다는 그 지도자들 탓이다"라는 것을 역사의 경험이 보여 주지 않았는가? 선출된 공직자나 전문 관료에게만 전적ㅇ로 의지하는 것는 특히나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들끼리 그 의미를 정의했던 "진보"라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파국으로 귀착되었고, 훨씬 더 많은 경우에느 사회를 양극화시켜 왔다.

이런 맥락에서, 참여 민주주의라는 전망은 점점 더 호소력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유럽에서는 지역 수준에서 참여 민주주의가 두 가지 메커니즘을 통해 실행되었다. 먼저, 모든 주민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주민자문위원회가 있거나 아니면 좀 더 형식(지역활동가들의 선임, 선거, 기타 등등)을 갖춰서 구성되는 주민자문위원회가 있다. 이것을 통해 지역의 사안들이나 시정에 관한 특정 문제들에 대해 평범한 시민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위원회는 2002년에 프랑스에서 8만명 이상의 주민이 거주하는 모든 도시에 법률에 따라 설치되었다. 다음으로, 추첨에 의해 선출되는 "시민 배심원"들이 있다. 이는 고대 아테네에서 널리 알려졌고 여러 현대 국가에서도 형사 배심원의 구성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원리를 따른 것인데, 지난 수십년 동안 정치에도 다시 도입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실험들이 유럽의 나라들, 가령 영국, 독링, 에스빠냐 등지에서 시도되었다. 대부분, 이 배심원들은 자문 역할을 맡았을 따름이다. 물론 지방 민주주의는 위로부터의 정치보다는 "함께하는 정치"를 약속하며, 제도적 출구를 제공함으로써 주민들이 자유롭게 발의할 수 있도록 하고, 선출된 공직자들을 시민들이 소환할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매우 자주, 주민들이 개진하는 견해는 순전히 자문의 값어치만 가지며, 이론 인해 참여자들은 곧 지루해하며 그만두게 된다. 자신들에겐 진정으로 중요한 일이 맡겨지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참여 과정에서 방치되는 부류는 청년들, 가장 불안정한 계층들, 이주민들이다. 중간층들이 이 참여 과정을 독점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들은 주민 전체를 별로 대표하지 못한다. 더욱이, 유럽에서는 참여 체계가 지역의 미시적인 문제들이나 아주 특수한 문제들만 다룬다. 정치는 경웅으로 축소되는 경향을 띠며, 참여는 무엇보다도 공공 정책의 현대화를 지향할 따름이다. 권력 관계를 문제 삼는 역동적인 참여는 아주 드물다. 갈등이 표현되는 새로운 특을 제공하기보다는 갈등을 피하려 할 뿐이다. 그에 비하면 뽀르뚜알레그리는 훨씬 더 앞선 것으로 보인다. 따르쑤 젱루(Tarso Genro)는 브라질의 자치단체가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민주화"하고 있는 중이라고 공헌한다. 유토피아적인 지평이 이제 현실로 구현되는 것으로 보인다. 2004년의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 좌파가 패했어도 참여예산제를 재고하는 일은 없었다. 신임 시장인 죠세 포가까(Jose Fogaca)는 자신이 "노동자당 경영의 성과"라고 간주하는 참여예산제를 유지하겠다고 약속했다. 대체로 뽀르뚜알레그리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와 그 외 유럽 국가들에서도 점차 진정한 참여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있다. 진정한 토의 명령의 등장에 대해 운운할 수 있었던 그곳에서 말이다. 50여 군데 유럽의 지방자치단체들이 참여예산제의 실험에 뛰어들었다. 다른 참여체계를 시도하는 곳도 있는데, 그런 체계도 유망해 보인다.

 

리우그란디두쑬 주의 주도인 뽀르뚜알레그리가 2005년 1월에 다른 형태의 지구화를 옹호하는 이들을 네 번째로 불러 모았다면, 이는 그곳에서 발전해 온 참여 민주주의가 그만큼 모범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시민들에게 권력을 되돌림으로써, 이 실험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쇠망을 선고해 버린 것만 같았던 정치를 소생시켰다. 시 정부의 차원에서, 뽀르뚜알레그리의 참여예산제도는 가난한 이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공공 정책의 "우선순위를 뒤집는" 도구다. 유엔에 따르면, 1960년에는 세계 인구 중에서 가장 부유한 20%가 전체 소득의 70.2%를 가져갔고, 가장 가난한 20%는 2.3%만으로 버텨야 했다. 1997년에는 이런 불평등이 더 심해져서, 그 수치는 가각 86%와 1%를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뽀르뚜알레그리는 이러한 과정이 겉보기처럼 그렇게 바꿀 수 없는 과정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면서, 다른 지구화를 향해 투쟁하는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제시해 주고 있다. 정녕 이 경험에서 보편적인 교훈을 끌어낼 만하지 않은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손발을 맞춰 가고 있는 저 끔찍한 부의 집중 흐름을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반전시키는 데 필수적인 에너지를 모을 수 있게 된 것은 정치가 시민들과 가까워졌고 진정으로 참여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 아니겠는가? 세계사회포럼의 시도들이 사회 정의, 사회들의 민주화, 지속가능한 발전 등을 가능하게 해줄 지구적 차원의 대안들을 정교화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현실의 증거들에 근거해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는 우리에게 결국에는 실체를 드러내기 마련인 눈부신 신화들을 조심하라고 가르쳐 왔다. 이 경험은 세밀하게 검토해야 하는 바, 그 저변의 논리들, 그 경험이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들, 그 경험이 제공했던 답변들 등 이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한다. 공적 경영에 참여하는 주민들이 진정으로 그것의 유효성을 강화할 수 있었는가? 그들은 민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경향으로 후퇴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는가? 소수의 집단들이나 중간계급이 본질적으로 권력을 독점하지 않는 진정한 참여는 가능한가? 시민 사회에서 시작된 운동들이 관료화되거나 자신들의 뿌리와 유리되지 않으면서 제도화될 수 있는가? 주민들의 동원이 공익에 기여하고 편협한 애향심을 넘어설 수 있을까? "참여예산제"라는 이름의 제도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할 만큼 복잡하다. 그것은 주창자들에 의해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실제 실천은 이론과 부합하는가? 참여예산제가 기반을 두고 있는 메커니즘은 정확히 어떤 것들인가? 참여 민주주의를 확립하려는 그와 같이 급진적인 시도를 특징짓는 동력은 무엇인가? 그 강점과 한계는 무엇인가? 정치적 참여의 실상은 어떠하며, 실제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참여하는가? 그들은 누구인가? 대의체제는 어떻게 참여 피라미드와 결합하고 공존하는가? 시 정부의 예산 전체가 정말로 주민 참여라는 틀 안에서 결정되는가? 뽀르뚜알레그리의 참여예산제와 유럽의 참여 메커니즘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반대로, 해당 맥락 특유의 요인들이 일반화될 수 있는 요인들과 어떻게 구별될 것인가?

 

요컨대 뽀르뚜알레그리의 경험은 언뜻 보았을 때처럼 그렇게 진정으로 모범이 될 수 있을까? 기계적으로 모방해야 할 모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사유를 촉진시키는 시도라는 의미에서, 즉 이를 기반으로 다른 곳들의 프로젝트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모범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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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가요? 재미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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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07 16:10 2005/03/07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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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시민참여예산제의 도입필요성 연구 Tracked from 2005/03/08 22:30

    <FONT color=#008000>복지 얘기를 하다가 참여예산제 얘기가 나와서 한국정책학회 2003년 동계학술대회에서 내가 발표한 논문을 소개한다.<BR></FON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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