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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좌파에게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장석준, <시민과 세계> 2008년 하반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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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에서 뒤늦게 주대환 의장과 장석준 동지의 논쟁(?)을 다룬 기사를 내보냈다. 논쟁이라고 할 것도 없는데, 화제거리로 삼았달까. 이 논쟁 자체보다는 장석준 동지가 <시민과 세계> 2008년 하반기호에 발표한 글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 싶어 여기에 올린다. 물론 주된 내용은 주대환 의장의 글을 계기로 좌파가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논한 것이다.
  
촛불투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여부 말고는 그와 그리 다르게 파악하는 것은 없다. 특히 국가장악론이나 국가분쇄론이 아닌 국가변형론은 이미 전진의 대안사회세미나에서 공유했던 것이다. 구체적인 현실의 사안들을 분석하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시각을 녹여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장석준 동지가 결론으로 내린 것에도 동의한다. 다만 대중권력이 조직화된 노동자계급에 기반하지 않고서 어떻게 가능할지 의문이다. 3.1운동이나 4.19혁명이 향후에 귀감은 되었을지언정 실패이거나 미완인 이유는 바로 주체의 문제에 있다고 본다. 그리고 시대적인 상황도 좌우하였고... 
 
이 글을 가지고 주변의 동지들과 토론을 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또는 주대환 의장의 글과 함께 보면서 비교해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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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당성’ 논쟁 진보 안에서 점화 (한겨레, 이세영 기자, 2008-12-17 오후 06:48:10)
 
친일·독재의 유산을 상속받은 한국의 보수세력이, 자신들의 역사적 정당성을 문제삼는 진보진영의 공격에 대응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하나의 ‘역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인가.’ 진보진영은 이런 역공 앞에 머뭇거렸다. 그들의 질문에 ‘아니오’ 혹은 ‘예’라고 답하는 것은, 분단체제에 편승해 반세기 가까이 국가권력을 장악해 온 반공·보수 세력의 과오를 묵인하거나, 진보세력 스스로 ‘국체’를 부정하는 반국가 세력임을 자인하는 것으로 간주될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대한민국사’를 둘러싼 논쟁이 진보세력 내부에서 점화됐다. 발단은 주대환(54)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이 뉴라이트 계간지 <시대정신> 겨울호에 기고한 ‘이념으로서의 사회민주주의’라는 글이었다. 주 전 의장은 이 글에서 “사회민주주의자는 대한민국을 긍정한다”고 밝혔고, 이런 ‘선언’은 진보진영 내부에서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언젠가 매듭지어야 할 문제였다”며 그의 ‘커밍 아웃’을 반기는 이도 있었지만, 다수 의견은 “좌파로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석준(37) 진보신당 정책실장이 <시민과 세계>에 기고한 ‘진보 좌파에게 대한민국은 무엇인가’라는 글을 통해 주 전 의장의 ‘대한민국 긍정론’을 공개적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두 사람의 논쟁은 진보정당 내부에서 10년 넘게 이어져 온 ‘개혁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노선 대립을 반영하지만, 한편으로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정당운동을 대표하는 신구 이론가의 대결이란 점에서도 관심을 끈다.
 
주 전 의장이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다당제와 삼권분립,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민주주의 규칙을 헌법 원리로 채택함으로써 민주화의 제도적 기초를 수립”하는 한편, “효율적인 농지개혁을 통해 이후 경제발전의 역사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정부수립기에 대한 우호적 평가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진다.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했던 것처럼 부국강병을 추진하면서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고 복지제도의 기초를 닦았다”는 이유다.
 
이런 주 전 의장의 평가를 장 실장은 ‘원칙 없는 투항’으로 받아들인다. 주 전 의장이 민주공화국을 바람직한 정체로 간주하면서 대한민국을 긍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긍정해야 할 대한민국의 정체가 무엇인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장 실장은 “민주공화국은 핵심은 헌법조항이나 국가기구가 아니라, 투표행위와 개인적 항의, 대중운동으로 나타나는 ‘시민들의 권력행사’에 있다”고 규정한다. 따라서 “민주공화국을 긍정한다는 것은 그 권력의 최종 근거인 ‘대한민국 시민의 힘’을 긍정하는 것이지, 국가기구나 그것을 운영해 온 특정세력의 정당성을 승인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런 장 실장의 논리는 “진보 좌파가 할 일은 대한민국 60년사에서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민주공화국’에 대한 열망을 통해 현실의 대한민국을 움직여 나가는 것”이란 결론으로 이어진다.
 
두 사람의 논쟁은 표면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정당성’에 대한 역사적 승인 문제를 둘러싸고 형성됐지만, 그 기저에 ‘국가’와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관점 차이가 존재하는 까닭에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이에 대해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논의 구도를 국가와 민주주의에 대한 철학과 관점의 차원으로 추상화시키기보다는, 구체적인 정치 전략과 관련된 생산적 논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문한다. 촛불시위에 태극기를 들고 나오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확인되듯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에 대한 시민들의 소속 욕망은 엄연한 현실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진보진영은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 좌파에게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1. 대한민국 긍정론 - 주자학적 역사관의 부활인가?

 
요즘 역사 논쟁, 더 정확히 말하면 한국 근현대사 논쟁이 한창이다. 이명박 정부의 한 축인 뉴라이트 세력이 불붙인 이 논쟁 때문에 대한민국사가 느닷없이 정치 쟁점으로 부상했다. 뉴라이트는 대한민국을 긍정하지 않는 역사관은 대한민국에 발붙일 수 없다고 핏대를 높이며 그간의 한국 근현대사 연구를 규탄하고 역사 교과서에 가위를 들이댄다. 또한 이러한 공격이 김대중, 노무현 전 정권에 대한 ‘부관참시’임을 숨기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러한 바람이 진보 좌파 내부에까지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평소 사회민주주의의 전도사로 자처해온 주대환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이 뉴라이트 계간지 <시대정신>에 투고한 글에서 “이제 좌파는 대한민국을 긍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주대환, 2008). 그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한국 근현대사 논쟁이 한창일 때 다른 곳도 아닌 뉴라이트 잡지 지면에 자칭 ‘뉴레프트’의 주창자가 이런 주장을 발표했으니 파란이 일지 않을 리 없었다.
 
뉴라이트나 주대환이나 모두 대한민국을 ‘긍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대한민국을 긍정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무엇을 긍정해야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부정하는 것인가?
 
뉴라이트는 그 긍정의 대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뉴라이트의 도식에 따르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긍정은 이승만에서 박정희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전 정권들에 대한 긍정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어쩌면 이것이 더 핵심적이다. 아무리 추상적인 수준에서 “나는 자유민주주의자요”라고 해도 뉴라이트에게는 그것만으로는 성에 안 찬다. 반드시 ‘국부’ 이승만, ‘중흥조’ 박정희에 대한 입장이 따라붙어야 한다. 그들을 존숭해야 한다. 그래야만 대한민국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뉴라이트는 글로벌 시대의 새로운 우익을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미국 문명을 숭배하는 정도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미국 네오콘과의 유대감도 사뭇 긴밀하다. 하지만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태도를 놓고 보면, 이들은 오히려 17세기 조선 주자학자들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 21세기의 최첨단 외피를 둘러싼 그 이면에 숨은 모습은 송시열과 노론 사대부들의 썩은 시신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역사 속에서 어떤 기원적 사건을 찾고 그것으로부터 정통성의 계보를 작성하는 것은 전형적인 주자학자들의 역사관이다. 주자학자들에게 지금 이 시대의 올바름은 과거 역사 속 올바름의 계보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 계보와의 연관성 속에서만 이 시대의 올바름도 판가름할 수 있다.
 
17세기 조선 사회에서 노론 벌열(閥閱)들이 보수적인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해나갈 때 내세운 이념적 무기들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역사관이었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정통 주자학자들의 입장에서는 사상적으로 결코 주자에서 벗어나선 안 되었고 역사적으로는 중국 왕조사의 정통으로부터 벗어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자와 조금이라도 다른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문난적으로 몰았고, 멸망한 명나라 황제를 모시는 사당을 짓기까지 했다. 그들은 이러한 역사관으로부터 집권의 정당성을 확인했던 것이다.
 
이승만-박정희 전 정권의 계보와 대한민국 역사를 동일시하고 전자에 대한 긍정만이 대한민국의 현재에 대한 긍정이라는 뉴라이트의 역사관은 과연 이러한 17세기 조선 주자학자들의 역사관과 얼마나 다른가? 뉴라이트 역시 이승만의 건국 행위라는 기원적 사건을 출발점으로 삼아 박정희의 산업화, 작금의 세계화로 이어지는 어떤 정통성의 계보를 그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이 계보의 연장선 위에 서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단으로, 즉 대한민국 안의 반(反)대한민국 분자(‘친북좌익’)로 몰아붙이고 있지 않은가? 300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정신적 근친성은 참으로 놀랄만하다.
 
그런데 우리는 주대환의 글에서도 비슷한 정신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 역시 남한 좌파의 역사에서 우선 기원적 사건부터 찾는다. 그리고 그 기원으로부터 이어지는 특정한 계보들을 그린다. 여운형에서 조봉암을 거쳐 자신의 사회민주주의로 이어진다는 계보와, 김일성, 박헌영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또 다른 좌파의 계보들을. 그러면서 전자의 올바름과 후자의 그릇됨을 대비하면서 결국 전자의 계보 위에 자리한 자신의 올바름을 주장한다.
 
“우리는 NL은 김일성주의자들이라면, PD는 박헌영주의자들이라 할 수 있다고 본다. 박헌영은 전형적인 스탈린주의자로서, 소련의 지령을 충실하게 따라서 국민 정서로부터 먼 정치적 판단과 결정을 여러 차례 내렸다. 그러니까 해방 당시로 소급해 본다면 PD파는 박헌영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대환, 2008)
 
“우리는 민족사의 정통성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만 있고 대한민국에는 없다는 인식에서 벗어나고,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긍정하면 좌파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부정하고 대한민국을 긍정하면 우파라는 잘못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사상적 조상, 정치적 족보의 연원을 김일성, 박헌영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여운형, 조봉암에게서 찾아야 한다.” (위의 글)
 
이런 사고방식은 과연 조선 주자학이나 뉴라이트의 역사관과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 것일까? 정말 역사는 이렇게 ‘올바른’ 계보와 ‘그렇지 않은’ 계보들 사이의 쟁투인 것일까? 그렇다면 자신이 이 중 어느 계보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찌 해야 하는가? 이를테면 17세기의 윤휴나 박세당 같은 사람은 어찌해야 하는가? 유학자이면서도 종내 주자학자는 아니었던 정약용 같은 이는 역사의 어느 곳에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하는가? 
 
당장 필자 같은 사람만 해도 그게 걱정이다. 필자는 지금의 정치적 입장으로 따지면야 진보 좌파 내에서 주대환과 대척점에 서 있다. 주대환의 역사관에 따르면 필자는 ‘박헌영주의자’다. 하지만 필자는 박헌영에게서 자신의 올바름의 뿌리를 찾지도 않을뿐더러 박헌영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필자 역시 주대환이 우러러보는 여운형이 당대에 박헌영보다 더 뛰어난 좌파 정치인이었으며 현재 우리의 귀감이라고 평가한다(장석준, 2006). 그렇다면 필자는 한낱 역사의 미아일 뿐인가? 제 계보도 못 찾는 반편이인가? 혹은 윤휴나 박세당처럼 사문난적으로 몰리기를 각오해야 하는 것인가? 정약용처럼 당대의 정치에는 발도 들여놓지 말 일인가?
 
이 대목에서 필자는 도리어 이런 의문을 던져본다 ― 어쩌면 주대환의 역사관은, 그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박헌영의 정신적 태도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박헌영이야말로 10월 혁명의 기억과 코민테른 동방노력자대학 수학 경험에서 정치적 올바름의 기원을 찾았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원으로부터 이어지는 역사의 계보를 너무도 소중히 여겼기에 해방 정국에서 소련의 모든 지령을 묵묵히 따랐다. 스탈린주의자 박헌영의 머릿속에서도 맑스-레닌주의는 조선 주자학의 문화적 DNA와 불건전한 교잡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주자학적 역사 정통론을 동원해 ‘뉴레프트’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논자로부터 우리가 어떻게 ‘박헌영주의’의 기이한 재림을 연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이번에는 ‘소련식 사회주의’의 자리에 ‘서유럽식 사회민주주의’가 들어섰다 할지라도 말이다.
 
도대체가 현실의 어떤 국가(그게 소련이든 대한민국이든)를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는 식으로 질문하고 여기에 답하라 강요하는 것 자체가 전형적인 스탈린주의자의 태도다. 게다가 대한민국을 통째로 ‘긍정’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부정’한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이것 역시 전형적인 종교재판 이단 심문관의 물음이다.
 
2. 국가를 바라보는 좌파의 시각
 
그럼 진보 좌파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대한민국 안에서 그 한 정치 세력으로서 고민하고 활동하는 좌파에게 과연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뉴라이트나 주대환 류의 구도에서 벗어나 다시 원점에서부터 따져보자.
 
대한민국은 국가다. 자본주의 세계의 한 국가다. 따라서 좌파가 대한민국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이야기하자면, 좌파가 국가, 그것도 자본주의 세계의 국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부터 점검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좌파의 국가관은 두 입장으로 나뉜다. 그 중 한 가지 입장은 좌파가 국가를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껏 국가가 자본가계급의 이해에 봉사해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을 뒤엎을 무기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보통선거제도다. 노동자, 민중 세력 역시 선거를 통해 국가 권력에 접근할 수 있으며, 그러면 그간 자본가계급의 이해에 복무해온 국가기구를 노동자, 민중의 것으로 전취할 수 있다. 그 논리적 결론이 곧 선거 사회주의, 개혁적 사회주의 노선이다. 이것이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뿌리이자 논리적 토대다.
 
또 다른 입장은 자본주의 국가는 오직 ‘분쇄’될 수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국가는, 그것이 아무리 민주적 외피를 쓰고 있더라도, 애초부터 자본가계급의 이해에 맞게 만들어진 기관일 뿐이다. 좌파정당이 선거에 승리해 내각을 구성하거나 대통령 자리를 차지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국가를 통째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기구는 노동자, 민중의 대표들을 포위하거나 무력화시키고 결국은 기존 국가 운영 방향의 포로로 만들어 버린다. 따라서 변혁 세력은 자본주의 국가를 철저히 파괴해야 한다. 이것은 혁명적 사회주의의 출발점을 이루는 국가관이다.
 
이 중 어떤 입장이 올바른 것으로 판명되었는가? 역사의 검증 결과는 어떠했는가?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는, 지난 세기의 역사를 통해 드러난 사실은 두 입장 모두 정답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여러 나라에 보통선거권이 도입되자 실제로 많은 좌파 정당들이 선거로 집권당이 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집권이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 변화로 이어졌냐 하면 그렇지 않다. 물론 복지국가라는 커다란 역사적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자본주의 자체의 변화는 아니었다. 더구나 복지국가의 건설 자체가, 스웨덴 정도를 예외로 한다면, 한 나라 안의 선거 정치의 결과였다기보다는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 세계적 격변의 산물이었다.
 
또한 선거로 집권한 좌파가 일단 몇몇 복지제도 도입 이상의 급진적 조치들을 취하기만 하면, 그들은 반드시 국가기구 내부로부터 격렬한 저항에 맞닥뜨리곤 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에 걸쳐 칠레, 영국, 스웨덴 그리고 프랑스 등에서 집권 좌파가 겪은 일련의 좌절과 패배가 바로 그 사례들이다. 그리고 이 패배의 잿더미 위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본격 시작되었다. 이것만 보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국가관이 옳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허나 그들의 성적표 역시 그렇게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국가를 파괴한 뒤에 실제 닥친 현실이 충격적인 것이었다. 새로 등장한 당-국가는 오히려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억압적이었다. 물론 이것은 혁명 과정의 어떤 일탈(당 관료들의 ‘배반’) 때문이었다고, 그래서 애초의 출발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국가 ‘분쇄’ 이후의 결과를 결코 낙관할 수 없다는 사실 확인을 가리거나 지워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혁명을 성공시키는 데 실패했다. 일단 보통선거권이 도입, 정착된 사회에서는 10월 혁명 식 대중 봉기가 좀체 재연되지 않았다. 그런 사회에서는 대중이 선거제도에 냉소를 보내기는 할망정 그것이 국가권력에 접근하는 가장 덜 나쁜 방식이라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 ‘분쇄’ 전략은 그 올바름을 입증하기 이전에 진보 성향의 대중들 사이에서 다수를 획득하는 데에도 실패하곤 했다.
 
물론 범좌파 안에는 여전히 국가 장악론이나 분쇄론 중 어느 한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국가관이 아직 채 검증이 끝나지 않았을 뿐이지 근본적으로는 올바른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주대환은 사회민주주의(그것이 베른슈타인이나 조레스의 사회민주주의인지, 블레어나 슈뢰더의 사회민주주의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를 한국 좌파의 유일한 선택지로 내세우는 것이며, 지금도 우리 곁에는 코민테른형 혁명 정당을 건설하려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21세기의 좌파에게는 국가 ‘장악’도, ‘분쇄’도 아닌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확신한다. 이전에 발표한 글에서도 계속 주장한 것처럼(장석준, 2007; 2008), 필자가 보기에, 그 출발점은 니코스 풀란차스의 후기 입장이다(Poulantzas, 1978).  
  
풀란차스에 따르면, 국가란 장악하거나 분쇄할 수 있는 어떤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세력관계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계급과 계급분파들 사이의 세력관계의 물질적 응축”이다. 즉, 국가는 사물이 아닌 관계다. 여기에는 당연히 지배 계급의 권력이 관통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피지배 계급이 완전히 부재한 것은 아니다. 피지배 계급의 힘 역시 각인되어 있다. 따라서 지배 계급조차도 국가라는 무대에서 끊임없이 피지배 계급에 대한 자신들의 힘의 우위를 확인함으로써만 현존 국가를 자본주의 국가로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피지배 계급도 국가라는 무대를 통해 자본주의의 지배를 불안정하게 만들 힘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민중투쟁이 국가의 제도적 물질성 안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민중투쟁은 표면화된 그리고 다양한 투쟁의 흔적을 남기는 물질성에 각인된다.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정치투쟁은, 보다 일반적으로 권력장치에 대한 모든 투쟁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대해 외재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며, 국가의 전략적 배치에 의존한다. 결국 국가는, 모든 권력기구와 마찬가지로 관계의 물질적 응축인 것이다.” (Poulantzas, 1978)
 
이런 국가관은 무엇보다도 현대의 민주공화국에 들어맞는다. 우선 국가 장악론과 견주어보자.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민주공화국이라 하더라도 지배 계급과 다수 대중의 힘이 서로 불균등하게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선거를 통해 피지배 세력의 이해와 영향력을 국가기구 안에 쉽게 관철시킬 수 있다는 것은 유치한 환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를 분쇄의 대상으로만 바라볼 수도 없다. 민주공화국에서는 누구보다도 대중 스스로 자신들의 투쟁을 국가라는 무대로 확장하는 방식으로 권력에 접근하려 하기 때문이다. 자신도 주역이라고, 혹은 주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무대 자체를 파괴하자는 데 동의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럼 이러한 새로운 국가관을 뒤따르는 좌파의 정치 전략은 무엇인가? 풀란차스는 국가의 ‘장악’도, ‘분쇄’도 아닌 그 ‘근저적 변혁(변형)’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국가의 ‘변형’이란 “국가 조직망에서 대중이 항상 가지는 분산적인 저항의 중심이 국가라는 전략적 지형에서 실질적인 권력의 현실적 중심이 되는 형태로 새로운 저항의 중심을 창출, 발전시키고, 보급, 발전, 강화, 지도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의제 민주주의의 제도 및 자유(인민대중이 획득한 성과)의 확대, 심화와 직접 기층 민주주의의 확장 및 자주관리적 거점의 분산, 확대를 접합”한다(Poulantzas, 1978).
 
앞으로 필자의 논의는 이러한 후기 풀란차스 이론에 바탕을 둘 것이다. 그런데 이 이론 자원으로도 채 풀리지 않는 국가 문제의 또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 위의 시각들은, 사회민주주의나 레닌주의의 국가관이든 풀란차스의 그것이든, 모두 맑스주의 전통에 입각해 있다. 맑스주의 전통은 국가를 항상 ‘안으로부터’, ‘아래로부터’ 접근해왔다. 즉, 시민사회라는 토대로부터 국가에 접근하곤 한다.
 
그런데 실제 국가는 시민사회로부터 규정될 뿐만 아니라 국가들 간의 관계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국가는 국가 내부의 여러 세력관계들의 응축일 뿐 아니라 그 국가와 다른 국가들 사이의 관계의 응축이기도 하다. 즉, 국가는 ‘아래로부터’나 ‘안으로부터’뿐만 아니라 ‘위로부터’, ‘바깥으로부터’도 접근해야 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들이 자본주의-국민국가 형성에 가장 앞섰던 나라(영국) 혹은 나라들(영국-프랑스)과의 경쟁 과정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만 돌이켜봐도 이미 분명하다. 현존 국가들 중 다수가 2차 대전 이후 비로소 독립한 나라들이고, 이들 나라의 등장이 탈식민지 성향을 갖는 미국 헤게모니의 부상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는 점 역시 그 한 사례다. 
 
사실 맑스, 엥겔스도 당대 국제 정세를 분석한 짧은 신문 기고용 원고들에서는 국가 간 체계의 존재와 그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착상을 이론 수준으로까지 정연히 전개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약점은, 1917년 당시 레닌의 세계혁명 전망과 같은 몇몇 예외에도 불구하고, 이후 맑스주의 전통에서 그대로 반복됐다. 최근 들어서야 비판적 지구정치경제 이론 등을 통해 뒤늦게, 국가 문제에서 국가 간 체계가 차지하는 중요성이 주목받기 시작하는 형편이다(Cox, 1996; Gill, 1993).
 
아무튼 이제는, 어떠한 국가도 전 지구적인 권력 사슬을 시야에서 지운 채 그 전모를 파악할 수는 없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그리고 대한민국도 여기에서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3.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주대환은 사회민주주의자는 민주공화국을 바람직한 정체(政體)로 생각하며 따라서 대한민국을 긍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긍정해야 할 그 ‘대한민국’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그것은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것 같은 과거 정권들의 정통성인가? 대한민국 헌법 조문들인가? 대한민국의 국가기구들인가?
 
어쩌면 주대환 류의 사고방식은 국가 장악론과 뉴라이트 식 역사관의 기묘한 조합일지도 모른다. 이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어떤 사물이다. 그리고 선거로 집권한 세력이 이 사물을 계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그 물질성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아마도 보통선거 같은 몇몇 제도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뉴라이트가 하는 것처럼 상상의 계보를 작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논리의 귀결이 결국 대한민국을 ‘긍정’ 혹은 ‘부정’할 수 있다는, 그런 이분법이 가능하다는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국가는 도무지 그런 물건이 아니다. 민주공화국이란 무대일 따름이다. 우리가 사는 나라를 ‘민주’‘공화’국이 되게 하는 것은 헌법 조항도 아니고, 국가기구도 아니다. 그것은 공화국 시민이다. 인민 대중이다. 투표 행위로 나타나기도 하고 개인적 항의로 나타나기도 하며 대중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그들의 권력 행사다. 이러한 민중의 권력이 국가 안에 새겨지고 그래서 국가의 이곳저곳에서 지배 세력의 권력과 끊임없이 맞설 때 우리들의 나라는 ‘민주’‘공화’국이 된다. 국가는 투쟁이자 타협이고 세력관계다.
 
이렇게 본다면, 민주공화국의 긍정에 뒤따라야 할 것은 대한민국의 긍정이 아니라 그 권력의 최종 근거인 대한민국 시민(인민)의 힘의 긍정이다. 뉴라이트 기관지에 “대한민국을 긍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발표할 일이 아니라 2008년 늦봄과 초여름 거리에 메아리친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노래에 목소리를 더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뜻밖에도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에 훌륭히 표현돼 있다. 헌법 전문은 명확한 개념들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추상적 개념들보다 오히려 더 가슴에 와 닿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들로써 인민 주권의 심오한 의미를 잘 전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문장이다.
 
어떤 이들은 여기에서 ‘법통’이라는 고색창연한 말부터 주목할지 모르지만, 이 문장을 꿰뚫는 기본 정신은 그런 제한된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두 사건 모두 그 당시의 현실 국가에 맞선 대중 봉기였다. 3‧1 운동 당시 국제법으로 인정받던 한반도 내 합법 정부는, 우리는 인정할 수 없지만, 일본 정부 기관(조선 총독부)이었다. 3‧1 운동은 이에 맞선 혁명적 봉기였다. 4‧19는 또 어떠한가? 당시의 이승만 정부, 제1공화국 체제에 맞선 대중 혁명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역설에 맞부딪힌다. 대한민국이라는 한 국가의 헌법이 이 나라의 역사적 뿌리로 제시하는 사건들은 그 당시의 국가에 맞선 대중 운동들이었다는 것. 철학자 김상봉 교수는 이를 “‘불완전한 국가’를 국민 주권의 힘으로 끊임없이 부정하고 극복”하려 한 사건들이라 정의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참된 헌법 정신”이라고 단언한다(2008. 8. 18. 참여사회연구소 등 공동 주최 토론회 “대한민국사의 재인식: 48년 체제와 민주공화국”에서). 필자는 이것이야말로 좌파가, 혹은 모든 민주파가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근본 관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게 만드는 것은 당대의 국가(4월 혁명 당시에 그것은 분명 대한민국 정부였다)를 부정하고 극복하는 대중의 힘이라는 것, 민주공화국의 참된 긍정은 그 현존 형태를 부정하는 힘을 긍정하는 데 있다는 것 ― 이것은 확실히 하나의 역설이다. 대한민국의 검인정 교과서가 가르쳐주는 명제도 아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역사는 대중들이 스스로 이 역설을 깨쳐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광주 항쟁, 6월 항쟁, 노동자 대투쟁 등이 그 과정의 중요한 계기들, 즉 또 다른 헌법적 사건들이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다면,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현존 국가의 불완전성을 부정하고 극복하는 대중 행동이 보장받고 적극 행사되어야 한다. 즉, 시민(인민)의 제헌적 권력을 이 나라의 미래 역사에서도 끊임없이 되불러내야 한다. 이것은 “이제 좌파는 대한민국을 긍정해야 한다”는 언명으로는 도저히 감싸 안을 수 없는 역동적인 진실이다.
 
우리가 민주공화국을 사랑하면서도 대한민국 긍정론에 무작정 따를 수 없는 이유는 이것만이 아니다. 앞 장에서 지적한 것처럼, 모든 국가는 전 지구적인 권력 사슬로부터 규정받는다. 대한민국도 그렇다. 대한민국의 탄생은 2차 대전 후 미국 헤게모니의 등장 그리고 그것과 소련 사이의 대립 없이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과거 한반도에 등장했던 그 어떤 국가의 영토 구성과도 다른 두 국가(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가 등장한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밖에 없다. 이 점에서 대한민국의 탄생과 이후 성장은 다른 어느 국가보다도 더 강력하게 세계 질서로부터 규정받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두 분단국가의 등장이야말로 여운형이나 김규식 같은 사람이 가장 피하고자 한 역사의 전개 방향이었다. 주대환이 자신의 이념적 뿌리로 드는 여운형에게 대한민국은 오히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국가’였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둘 다 양대 진영의 피후견 국가였고, 따라서 그 탄생 신화는 결코 남에게 내세울만한 게 못 된다.
  
다행히도 이러한 기원이 이후의 역사를 홀로 결정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달리 대한민국은 그래도 ‘민주’‘공화’국됨에 어느 정도 충실한 궤적을 보였다. 위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역설적으로 현존 국가에 대한 대중적 부정이 반복적으로 분출한 덕분에 이렇게 될 수 있었다.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이러한 부정이 없었다 ― 적어도 아직까지는.
 
허나 그렇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이제 한반도에 가장 적합한 국가 형태로서 절대적인 안정성을 확보했다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대한민국 60년 역사의 가장 강력한 배경 역할을 한 미국 헤게모니가 지금 흔들리고 있다. 2008년 가을의 금융 위기는 그 결정적 신호탄이다. 이 위기와 혼란 속에서 어떠한 새로운 세계 질서가 그 모습을 드러낼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전환의 시대가 이미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 헤게모니와 운명을 함께 한 대한민국 60년 역사에 닥친 가장 심원한 단절의 계기일지 모른다.
 
과거에 남한 좌파는 남북이 하나의 민족국가로 통일돼야만 한반도에 ‘정상 국가’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故) 박현채 선생은 굳이 남한 국민경제와 구분되는 ‘민족 경제’라는 경제 단위를 설정하기까지 했다(박현채, 1989). 즉,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구성이 불안정하며 모순적이라고 보고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국가 구성을 상상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것을 단지 대한민국을 ‘부정’한 것으로 이해하거나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 논리이자 흑백 이분법이다.
     
물론 한반도에 하나의 민족국가를 구성하는 것(통일)이 과연 최종 해결책일 수 있을지는 이제 의심의 대상이다. 앞으로는 남북의 통일도 아시아 차원의 보다 폭넓은 통합 과정의 일부가 되어야만 적극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 아닌가 싶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구성 자체가 무슨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뭔가 새로운 정치 구성체들(한반도 연방이든 아시아 연합이든)이 다층적으로 등장해야 한다는 점만은 분명하다(박순성, 2007; 구갑우, 2007; 진보정치연구소, 2007).
   
이 대목에서도 우리는 어떤 역설과 만나게 된다. 오늘날 세계사의 거대한 전환기에 대한민국은 ‘자기 변신하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 즉,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아닌 것을 지향해야 한다. 탈남한의 연방, 탈한반도의 지역 통합을 상상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시점에 남한 진보 세력 일각에서 난데없는 대한민국 긍정론이 등장한 것이다. 이것보다 더 퇴행적인, 시대와의 어긋남을 상상할 수 있을까? 하필 봄기운이 완연해질 무렵 두꺼운 겨울 외투를 찾는 기행(奇行)이 유독 분단 체제의 저 북쪽만의 현상은 아니라는 증거인 셈인가?
 
4. 민주공화국을 위해 대한민국을 넘어서자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이렇다. 남한 진보파 일각에는 민주공화국을 긍정한다면 대한민국을 긍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하지만 이에 반해 필자처럼, 민주공화국을 긍정하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대한민국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좌파도 있다.
 
전자 입장에서 자신의 역사적 뿌리로 여운형, 조봉암을 들곤 하는데, 필자는 오히려 후자의 시각에서 보아야만 이들의 진면목을 제대로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운형이 누구인가? 단적으로 말하면, 대한민국이 등장하는 것을 최대한 막아보려 한 사람이었다(마찬가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등장 역시). 대한민국과는 다른 영토와 인민으로 구성되며 또한 상이한 국제적 맥락에 놓인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려 한 사람이었다. ‘여운형’이 상징하는 것은 한반도에 대한민국과는 다른 민주공화국이 출현할 수 있었던 소실된 가능성에 대한 안타까움이자 되살아나는 희망이다.
 
조봉암은 또 어떤가?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이 내세웠던 핵심 공약 중 하나는 ‘평화 통일’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 불과 3년밖에 안 된 당시에 북진 통일도 아닌 평화 통일이란 곧 제헌 과정을 새로 시작하자는 것, 국가를 새로 구성하자는 이야기였다. 이승만 세력이 여기에서 공산주의 선전 선동보다 더 불온한 냄새를 맡은 것은 어쩌면 과잉 반응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 이승만의 국가 건설 노선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조봉암’이 상징하는 것 역시 또 다른 민주공화국의 불발된 가능성에 대한 추념이다.
   
그렇다면 여운형, 조봉암의 정신에 충실한 진보 좌파가 할 일은 대한민국 60년 역사에서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일 수 없다. 우리가 아낌없는 사랑을 바쳐야 할 것은 지난 60년의 역사가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공화국’이다. 이 미래의 민주공화국에 대한 열망만이 현실의 대한민국을 조금이라도 앞으로 이끄는 힘이 될 수 있다.
 
미래의 민주공화국이라? 너무 막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미 위에서 우리는 그 최소한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근거들을 살펴본 바 있다. 그 첫째는 현실의 국가를 부정하고 극복하는 가운데 더 나은 정치적 구성체를 만들어내는 제헌적 힘을 지닌 대중이다. 추상적으로 표현하면, 인민 주권이다. 촛불 운동은 이것을 대중 스스로 재발견하는 출발점 역할을 해주었다. 하지만 아직 출발점 수준일 뿐이다. 비정규직 문제 등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들에 도전하는 대중운동 과정에서 이 힘은 더욱 거대하고 심원하게 증폭될 것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두 번째는 지금 현재의 국가 구성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며 인민 주권의 보다 효과적인 실현을 위해 그것은 끊임없이 변경될 수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다시 반복하지만, 우리는 지금 세계사의 대전환기에 들어서고 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낳았던 한 시대가 이제 완전히 저물어가고 있다. ‘국가 만들기’를 놓고 이승만, 김일성의 정치와 여운형, 김규식의 정치가 경합하던 신화의 시대가 다시 동터오고 있는지 모른다(장석준, 2006). 이 시대의 진보 좌파라면 이러한 새로운 혼란 혹은 가능성의 시대를 예비하는 정도의 안목과 예지, 깊이는 갖춰야 하지 않을까?
 
지금의 대한민국을 낳은 제헌의회에서 조봉암은 이승만의 대통령제 주장에 반대해 내각책임제를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뿐 아니라 그는 헌법 조문을 심의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국민’이라는 용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발언을 남겼다.
 
“총강에 특징적으로 주목을 끄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 표시와 인민을 일률적으로 ‘국민’이라는 어구로 표시된 점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 했는데 소위 민주공화국에 대한(大韓)이란 대(大) 자는 아랑 곳 없습니다. 한(韓)이란 말이 꼭 필요하다면 ‘한국’도 좋고 우리말로 ‘한나라’라고 해도 좋을 것을 큰 대자를 넣은 것은 봉건적 자존비타심의 발로이요 본질적으로는 사대주의 사상의 표현인 것뿐입니다. (중략) 그 다음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발한다’ 하여 세계 공통의 ‘인민’이라는 말을 기피했습니다. 지금 세계의 많은 나라 헌법에서는 모두 인민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도 ‘피플’이라 표시했고 ‘네숀’이라고 아니하며 불국에서도 ‘퍼퍼’라 하며 소련에서도 ‘나로드’라 해서 모두 인민으로 되어 있습니다. 최근에 공산당 측에서 인민이란 문구를 잘 쓴다고 해서 일부러 인민이란 정당히 써야 될 문구를 쓰기를 기피하는 것은 대단히 섭섭한 일입니다. 이 헌법 초안의 불비와 보수성은 이러한 불필요한 완고하고 고루한 생각에서 퍼져 나오기 때문에 소위 입법자의 태도로는 용허할 수 없는 편견입니다.”(조봉암, 1999)
 
민주공화국에 ‘대한(大韓)’은 어림도 없고 ‘국민’이 아니라 ‘인민’이 합당하다는 이 한 마디. 어찌 보면 용어 문제를 시시콜콜 트집 잡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근저에는 현실의 국가(이미 이승만이 건국을 주도하던 그 국가)를 조금이라도 민주공화국의 보편적 이상에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려는 선각자의 혜안과 열정이 꿈틀대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근본성’이며, 그것이 한 선각자의 몸짓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대중의 움직임으로 환생하는 새로운 제헌적 과정(좁은 법학적 차원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의 기틀 놓기라는 차원에서)의 시작이다.
 
<참고문헌>
구갑우. 2007. 『비판적 평화연구와 한반도』, 후마니타스.
박순성. 2007. “한반도 분단과 대한민국.” 참여사회연구소 엮음,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 한울.
박현채. 1989. 『민족경제론의 기초이론』, 돌베개.
장석준. 2008. “진보 좌파의 민주주의, 그 성찰과 전망.” 『기억과 전망』 제18호.
______. 2007. “21세기의 현실 대안 - 사회주의.” 참여사회연구소 엮음,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 한울. 
______. 2006. “한국현대사의 ‘잃어버린 리더십’ - 여운형 ․ 김규식을 중심으로.” 『미래공방』 제1호. 
조봉암. 1999. 『죽산 조봉암 전집 Ⅰ』, 정영태 외 엮음, 세명서관.
주대환. 2008. “민주노동당의 분당 사태와 좌파의 진로.” 『시대정신』 제39호.
진보정치연구소. 2007. 『사회 국가 - 한국 사회 재설계도』, 후마니타스.
Cox, R. 1996. Approaches to World Ord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Gill, S.(ed). 1993. Gramsci, Historical Materialism and International Relatio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Poulantzas, N. 1978. State, Power, Socialism, New Left Books. (국역: 박병영 옮김, 『국가, 권력, 사회주의』, 백의,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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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8 05:49 2008/12/18 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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