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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촛불-복지연합,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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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부터 새록새록 나오더니 노무현 전 대통령 사후 민주주의, 파시즘X, 정당연합 등의 논의가 쏟아져 나온다. 여기에 노무현 정권에 대한 재평가 논의와 진보의 재구성, 그리고 독재에 대한 정의 등 다양한 부가적인 논의가 추가된다. 작년 촛불정국에 대한 환상이 부채질하는 점도 있으리라. 이에 대해 좌파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눈에 띄는 것들만 모았는데도 꽤 된다. 아래 글들 중에서 이광일, 김원, 손호철(애매하긴 하나), 조희연의 글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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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여, 다양한 세력 모아 한국형 뉴딜연합 만들라” (한겨레, 이세영 기자, 2009-03-26 오후 07:29:35)
진보-보수 합동 심포지엄
정책포럼-선진화재단 주최
‘감성의 정치’ 실현 등 제안

 
“감성의 연대가 필요하다.”(홍성민 동아대 교수), “밥 먹여주는 좌파로 거듭나라.”(주대환 사민주의연대 대표), “친북이 아닌 애북(愛北)·지북(知北)이 필요하다.”(김근식 경남대 교수)
 
진보세력의 회생을 위한 다양한 처방전이 제시됐다. 26일 중도좌파 두뇌집단(싱크탱크)인 좋은정책포럼(이사장 변형윤)과 뉴라이트 그룹 한반도선진화재단(이사장 박세일)이 공동주최한 심포지엄에서 참석자들은 진보적 정치 주체를 형성하기 위한 다양한 ‘연대 전략’을 제안했다. 성장과 세계화, 북한 문제 등 진보의 ‘약한 고리’에 대한 성찰도 이어졌다.
 
‘한국의 진보, 그들은 누구인가’를 주제로 발표한 홍성민 교수는 진보세력을 향해 “보통 사람들의 정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아파트 부녀회, 전업주부, 노인, 취업준비생처럼 학문적으로 범주화하기 어려운 집단들이 한국의 현실정치에서 막강한 결집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홍 교수는 “감성과 취향 등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이것을 정치변혁의 역량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며 “이를 위해 계급과 이념, 옳고 그름에 호소하는 ‘이성의 정치’에, 정체성과 취향, 좋고 싫음에 주목하는 ‘감성의 정치’를 융합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정완 성공회대 교수는 최근 진보진영에서 두드러진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모델에 대한 선호 현상의 배경과 한계를 조명했다. 그는 “북유럽 모델은 진보진영이 전통적으로 강조해온 평등과 연대의 가치에 부합하는데다, 최근의 경제 실적도 양호한 편이어서 특별한 관심을 끄는 것 같다”며 “문제는 이 모델과 관련한 논의가 지나치게 모델 확립 이후의 작동 방식과 성과에 집중돼 있다는 점”이라고 꼬집었다. 요컨대 한국이 어떤 경로를 통해 이런 모델과 유사한 방향으로 진화해갈 수 있는지에 대한 탐색이 없다는 것이다.
 
김윤태 교수는 다양한 진보세력이 하나로 결합하는 ‘정치연합’의 형성을 제안했다. 사소한 이념적 차이를 떠나 다양한 진보세력이 하나로 결합하는, 미국 루스벨트 정부의 ‘뉴딜연합’과 같은 연대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거 전통과의 과감한 단절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었다. 주대환 대표는 “먹고사는 문제를 중심 과제로 삼고, 민족민주운동으로 상징되는 ‘후진국형 진보’에서 벗어나 선진국형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채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토론자들은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애정어린 비판을 쏟아냈다. 보수 쪽 토론자인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는 주대환 대표의 ‘밥 먹여주는 진보’ 개념의 편협성을 지적했다. 그는 “사람들의 욕망에는 ‘밥’으로 포괄할 수 없는 탈물질적 영역들이 얼마든지 존재한다”며 “녹색이나 탈근대적인 다양한 가치들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장덕진 서울대 교수는 “진보세력이 진보정당과 진보 유권자 사이에 가로놓인 ‘정치의식의 거리’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고, 강명세 세종연구원 연구위원은 “진보정당의 착근을 가로막는 지역주의 문제와 적극적으로 대결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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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먹여주는 민주주의를 해야” (서울, 이순녀기자, 2009-03-25  23면)
국민과 소통에 실패한 한국의 진보
 
“한국의 진보그룹이 가지고 있는 관습적인 사고방식은 민주·독재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홍성민 동아대 교수)  
“지금까지 진보는 먹고 사는 문제에 무관심한, 혹은 무능한 진보였다. 민주노총과 전교조는 자기들끼리의 논쟁에 갇혀 진보 진영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진보진영은 비판과 반대의 목소리만 높일 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김윤태 고려대 교수)
 
자기 반성의 목소리는 냉철했다. 26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한반도선진화재단(이사장 박세일)과 좋은정책포럼(이사장 변형윤) 공동주최로 열리는 심포지엄 ‘한국의 진보를 말한다’에 발제자로 나서는 인사들은 미리 내놓은 발표문에서 현재 진보 진영이 처한 위기를 날카롭게 진단했다. 이들이 지적하는 위기의 원인은 일맥상통한다. 진보의 가치는 시대 변화에 따라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는데, 진보 그룹은 그 흐름을 읽지 못하고 경직된 대결구도에 매몰돼 국민과의 소통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을 지낸 주대환 대표는 ‘한국 진보에 미래는 있는가’란 글에서 “노동운동이 자기 조합원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해 국민적 지지를 잃은 탓에 진보 전체가 국민의 지지를 잃었다.”고 지적했다. 김윤태 교수는 ‘한국 진보의 비교사적 고찰’에서 “1987년 이후 민주화운동은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정당은 국회의 권력 게임에 매몰됐고, 노동조합은 점점 쇠퇴했다.”고 말했다. 홍성민 교수는 ‘한국의 진보,그들은 누구인가’에서 “민주주의 모델을 상정하고 그것이 아니면 이단이고, 비겁한 타협이라고 매도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이러한 자기 반성을 전제로 새로운 진보운동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주 대표는 ‘진보의 재구성’을 위한 뉴레프트 운동을 제안한다. 그는 “도덕적 우월감이 없는 좌파를 지향하고, 대한민국을 긍정하며, 국가의 역할을 인정하는 등 사상적 전환과 관점의 변화를 통해 진보는 환골탈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새로운 진보는 사회경제적 문제의 해결을 중심과제로 삼아 “밥 먹여주는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윤태 교수는 “2008년 촛불시위는 정부와 국회가 아닌 거리와 가상공간에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잠재력이 표출됐다는 점에서 새로운 진보의 지평을 확대한 중요한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촛불을 들고 거리에 모이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서 “사회운동의 역동적 힘은 정치사회의 현실적 대안과 긴밀하게 연결돼야 하며, 정당과 사회운동은 함께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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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논쟁..혁신된 진보가 필요하다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2009-03-26 19:11)
한반도선진화재단.좋은정책포럼 개최
 
"요즘 내가 내부고발자처럼 인식돼 있다"면서 운을 뗀 주 대표는 '한국 진보에 미래는 있는가'에서 해묵은 진보나 보수보다는 복지국가를 기반으로 한 사회민주주의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민족·민주운동은 이미 낡은 가치"라고 일축하고 "양극화가 심각해지고 노동자 간 임금격차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복지국가의 이상은 필요하고, 또 이를 정치화할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주 대표는 "새로운 진보뿐 아니라 새로운 보수도 나와야 한다.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보수주의자가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보수도 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윤태 고려대(사회학) 교수는 '한국 진보의 비교사적 고찰'에서 "진보 진영이 두 번이나 집권하고 나서 진보 진영의 위기가 나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인 현상"이라며 "이는 진보 진영이 권위주의에 맞서서 저항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민주화 이후에 무엇을 할지 구체적인 계획이나 비전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국가가 통제하는 획일적인 평등주의는 이제 더는 작동하지 않는 원리다. 개인의 능력을 강화하면서 사회적 협력 방안을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거버넌스(통치체제)를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덕진 서울대(사회학) 교수는 토론에서 정치 집단과 일반 시민 사이의 불일치를 언급했다. 그는 "한국의 진보는 연령이 젊고, 소득 수준과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다. 반면 보수는 고연령, 저소득, 저학력 계층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장 교수는 이어 저소득, 저학력 계층이라면 복지를 강조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정치세력을 지지해야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기득권 세력을 옹호하는 정책을 옹호하는 보수집단을 지지하는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강명세 세종연구소(정치학) 수석연구위원은 장 교수가 지적한 정치집단과 일반 시민 사이의 이 같은 불일치의 원인으로 지역주의를 꼽았다. 강 연구위원은 "밖에서는 노동운동을 하다가 동네에 오면 향우회 활동을 한다. 지역주의가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며 "정책적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총선에서 비례대표를 늘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김일영 성균관대(정치학) 교수는 토론에서 "한국진보가 범했던 중요한 실수가 주된 전투의 전장을 과거에서 찾았다는 것"이라며 "한국의 진보와 보수가 싸워야 할 전장은 과거가 아닌 미래"라고 주장했다.
 
이밖에 홍성민 동아대(정치학) 교수는 '한국 진보, 그들은 누구인가'에서 "계급이라는 단위로 보수나, 진보라는 주체를 설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이 이제는 진보의 의미가 됐다"고 진단했고,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경제학) 교수는 '한국의 진보, 글로벌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글로벌화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무조건 개방을 많이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여러 부작용을 통제하는 범위 안에서 (개방을) 해 나가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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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 속의 한국, 어디로 가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8호] 2009년 05월 05일 (화) 20:19:32 필리프 퐁스/<르몽드>도쿄특파원, 번역 최서연)
경제위기와 신뢰상실, 이명박 정부의 '이중고'
국민들 지나친 비관론 빠져 우파에 몰표
해법은 우경화 아닌 직접 참여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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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촛불, 일상의 역동적 저항 (한겨레21 2009.05.22 제761호, 안수찬 국내 부편집장)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5월호] 기획 / 혁명은 왜 일어나는가
87년 체제에서 진화한 ‘호모 칸델리스’의 탄생
풀뿌리 주민단체가 주도, 정치 플랫폼으로 접속

 
혁명분자들에겐 실망스런 일이지만, 광장의 저항이 의회의 권력으로 곧장 이어지는 일은 좀체 없다. 대부분 우회로를 거친다. 1917년의 러시아혁명 정도가 거의 유일한 예외일 것이다. 1789년의 프랑스혁명조차 그 직후 거대한 반동의 시기를 볼거리처럼 싸매고 나자빠졌다.
  
권력 잉태의 우회로를 걷고 있다는 점에서 2008년 4~8월의 ‘촛불 항쟁’도 예외가 아니다. 2008년 4월 어느 주말, 서울 청계광장에서 일군의 여중생들이 촛불을 들었다. 고등학생, 대학생, 직장인, 주부 등이 그들을 따라 촛불을 들었다. 5월 2일 제1회 촛불문화제가 시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뒤이어 8월 무렵까지 촛불의 물결이 거리를 덮었다. 그 사람들, 그 시간들을 통틀어 우리는 ‘촛불’이라 불렀다. 그리고 촛불은 흔적도 없이 꺼져버렸다.
 
20세기의 저항은 중앙권력에 집중했다. 그러나 촛불은 달랐다. “잠 좀 자고, 밥 좀 먹자”는 지난해 촛불 항쟁의 구호는 “개별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유럽 68혁명의 구호와 정확히 일치한다. 삶의 구속을 거부한 젊음의 역동적 반란이었다는 점에서도 흡사하다. 일상의 혁명성에 주목한 새로운 저항 인류의 정념이 촛불 이후 한국에서 꿈틀거리는 것이다.
 
1년 전 촛불 항쟁은 민주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 심지어 시민단체까지 당혹시켰다. ‘호모 칸델리스’, 즉 촛불 시민들은 ‘중앙의 지도’에 순응하지 않았다. 청소년이 성인을, 온라인이 오프라인을, 시민들이 시민단체를, 시민단체가 기성 정당을 이끌었다. 그 역주행은 작동하지 않았다. ‘중앙’·‘지도’·‘계획’· ‘국가’의 강박은 사라졌고, ‘지역’·‘참여’·‘토론’·‘일상’에 대한 환호가 유쾌하게 번졌다. 이에 대해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촛불집회와 한국 사회>(문화과학사)라는 책에서 “촛불집회에서 활성화된 시민세력이 풀뿌리 수준에서 여론 변화를 이끌어내고 제도정치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모색하지 못할 경우, 정치위기의 기본 구조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일찌감치 지적한 바 있다. 이번 경기도 교육감 선거는 신 교수가 비관을 섞어 전망했던 촛불 정치의 등장을 우리 눈앞에서 구현한 사례다.
 
한국 풀뿌리 주민단체의 역사는 세 시기로 구분된다. 그 가운데 3세대 주민단체가 촛불 정치를 지피고 있는 주역이다. 1987년 6월항쟁을 이끌었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풀뿌리 주민단체의 요람이었다. 당시 국민운동본부는 전국 시·군·구 단위로 지역 조직을 뒀는데, 6월항쟁 이후 주로 빈곤 지역에 남아 있던 조직들이 자생적인 풀뿌리 주민단체로 발전했다. 서울 관악·구로 등 노동자 주거 지역이 대표적인데, 이들 1세대 주민단체는 노동·빈민·농민 등 전통적 재야 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자생적 주민조직의 두 번째는 넓은 의미의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 회원들이 일구었다. 기성 정치에 염증을 느낀 시민들이 정치인 노무현을 중심으로 일종의 팬클럽을 형성했고 2000년대 들어 전국 단위 조직으로 발전했다. 이들은 이후 ‘시민참여 정당’을 내세운 개혁당의 지역적 근간이 됐다. 참여정부의 부침과 함께 이들의 활동은 사실상 수면 아래로 침잠했지만, 노무현 개인에 대한 호감과 별개로 제대로 된 시민정치를 꿈꾸던 사람들이 과거 개혁당 지역조직에 많이 참여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대통령제를 위시한 ‘중앙정치’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풀뿌리 조직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마지막 3세대가 오늘날 전국에 걸친 풀뿌리 주민단체를 이루고 있다. 공동육아조합, 방과후교실모임, 공부방모임, 먹거리 생활협동조합, 생태공동체 등이 2000년대 중반 이후 곳곳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났다. 육아, 교육, 먹을거리 등 일상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주민들의 자생적 모임이다. 1·2세대 주민단체는 ‘동원’의 질서에 강하게 긴박돼 있었다. 반독재 운동의 거대한 명분에 ‘복무’한다는 이념을 갖춘 ‘전업 운동가’들이 주를 이뤘다. 3세대 주민단체는 본질적으로 ‘참여’의 정서가 강하다. 내 아이의 문제를 당신 아이의 문제와 함께 풀기 위해 품앗이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전업 운동가는 없다. 굳이 표현하자면 생활 운동가가 있다.
 
이들에겐 광우병 쇠고기, 탁아·육아 시절, 입시 교육, 주택 가격, 대학 등록금 등이 가장 큰 고민이다. 이 ‘3세대 풀뿌리 주민 모임’들이 1년 전, 촛불 시위의 주역이었다. 이들의 고민이 곧 지난해 촛불의 슬로건이었다. 이제는 촛불 정치의 동력이 되고 있다. ‘개별적인 것’에 주목했던 시민들이 ‘정치적인 것’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어느 통계에 따르면, 2000년 무렵 전국의 시민단체가 2만여 개였고, 2003년에는 2만5천여 개로 늘었다. 2000년 이후 새로 생겨난 5천여 개 단체의 대부분은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활동하는 풀뿌리 단체로 추정된다. 게다가 2000년과 2004년의 낙천·낙선 운동을 거치면서 지역 시·군·구 단위의 주민단체들은 더 급증한 것으로 보인다. 2009년 현재 풀뿌리 주민단체는 5천~1만여 개로 전국 곳곳을 점점이 장악하고 있다.
 
결국 촛불 후보의 등장은 풀뿌리 주민단체들의 개미군단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 결과다. 경기도 시흥시에서 ‘범시민 후보’가 탄생한 과정은 이를 생생하게 웅변한다. 촛불 시위가 한창이던 지난해 7월, 시흥시에는 작은 촛불이 켜졌다. 시장에 대한 주민소환운동이 시작됐다. 당시 각종 개발사업 관련 뇌물 수뢰 혐의로 구속된 이연수 시장이 감옥에 갇혔으면서도 월급까지 받아가는 상황이었다. 시흥의 풀뿌리 주민단체들은 한여름철 두어 달 동안 4만6천여 명의 서명을 받아냈다.
 
풀뿌리 정치의 전통이 깊었던 것도 배경이 됐다. 이 지역에서는 2005년 급식조례제정 운동을 하며 석 달 동안 2만여 시민들의 서명을 받은 경험이 있다. 1997~98년 시화호 개발 반대, 2007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2008년 촛불문화제, 그리고 최근까지 지속됐던 주민소환운동을 거치면서 주민들의 연대는 넓어지고, 구성원은 다양해지고, 정치적 각성도 비등했다.
 
이 중 소금창고 복원 운동의 경험은 각별했다. 한 회사가 철거해버린 일제시대 소금창고를 지역문화재로 복원하기 위해 지역단체들이 ‘소금창고시민행동’이란 이름으로 뭉쳤고 2007년 6~8월 촛불문화제가 이어졌다. 이념을 넘어선, 범시민운동의 ‘결정체’였다. 중앙정치적 시선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생활 의제’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사 때는 진보단체는 물론 지역예총·문학회 등까지 울력해 1만여 명의 시민이 모였다. 결국 시와 회사로부터 복원 약속도 받아냈다. 이들이 이듬해 주민소환운동의 지지자·서명자가 됐을 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시장은 올 1월30일 대법원에서 뇌물수수죄로 시장 자격을 박탈당했다. 주민소환운동에 뒤이어 “우리의 후보를 직접 내세워야 하지 않느냐”는 목소리들이 자연스레 모아졌다. 시흥시장 선거에 ‘범시민 후보’로 나선 최준열 후보는 주민소환운동본부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최준열 후보 캠프 관계자는 “지난 2월, 예비후보 등록 당시 후보 개인에 대한 인지도는 5%에 불과했지만, (범시민 후보라는 사실만으로도) 지지율이 16%가 넘었다”고 말한다. 16%는 유권자 대비 주민소환운동 서명자의 비율과도 일치한다.
 
풀뿌리 주민단체가 없었다면 1년 전 촛불도 없었을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촛불’만 봤다. 지금 광장에는 촛불이 없다. 그래서 촛불이 사그라졌다고 생각한다. 정작 촛불을 지폈던 풀뿌리 주민단체는 지난 1년 동안 더욱 정력적으로 활동해왔다. 1년 전의 ‘촛불’이 전국에서 지역 단위로 낙하해 생활 영역에 밀착하고 기존 대의정치를 견제·혁신하려고 정치 영역에 뛰어든 것이다. 그 일부가 이번 경기교육감 선거와 4·29 재보선에서 등장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 ‘촛불 후보’의 움직임이 더 긴박해질 것은 불문가지다.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촛불의 진화를 관찰하며 내년을 준비하고 있다.
 
뚜렷한 결론을 내리진 못했지만, 대체적 방향에 대한 공감대가 있다. 기초지자체는 물론 광역지자체 선거에 시민 후보를 내는 ‘큰 그림’을 구상하고 있다. 민주당은 물론 진보 정당까지 아울러 ‘시민 후보 중심의 선거 전략’을 펼치겠다는 정서가 강하다. 경기도 교육감 선거는 그 모범 답안이었다.
 
전국 440여 개 단체가 참여해 시민사회 진영을 두루 포괄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는 지난 2월 총회에서 ‘지방선거 기획단’을 구성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 시민운동 진영이 어떤 방식으로 참여할지를 집중적으로 논의해, 오는 6월께 보고서를 제출하는 ‘특임’을 맡았다. 서울의 주요 시민단체와 지역 주민단체의 상근활동가 10여 명이 지방선거 기획단에 참여하고 있다. 오광진 연대회의 정책팀장은 “지방선거에 참여할지 말지를 포함해 백지 상태에서 여러 가능성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대회의는 이 보고서의 내용을 토대로 내년 지방선거 전략을 토론해 확정지을 방침이다.
 
시민운동가 출신의 후보가 선거에 참여했던 과거 사례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몇몇 명망가들이 개인 자격으로 기존 정당에 영입되거나, 일부 단체 차원에서 무소속 후보를 배출하는 방식이었다. 최근 논의는 정당 영입 또는 정당 건설은 배제한다는 전제 위에 진행되고 있다. 실현 가능성은 아직 점칠 수 없으나, 가장 적극적인 시나리오는 서울시 등 ‘전략 지역’에 시민 후보를 출마시키는 것이다. 경기도 교육감 선거 때처럼, 주민단체와 시민단체들이 내세우는 후보에 대해 민주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시민 주도의 촛불 연합 후보’ 모델이다.
 
이처럼 ‘촛불 후보’는 대의정치 내지는 제도권 정당에 대한 불신과 저항을 기본 동력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것이 정치 전체에 대한 혐오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는 과제로 남아 있다. 경기교육감의 투표율은 12.5%에 불과했다. 역대 최저치다. 중앙정치에 대한 혐오가 선거 불참으로 이어졌다. 유권자들의 정치적 관심을 총체적으로 불러세우지 못하면 결국엔 공멸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범시민 후보의 파괴력이 작용한다 해도, 뒤이은 총선·대선 등을 감안하면 ‘정당’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아래로부터의 연대라는 시민 후보 모델은 대단한 의미가 있지만, (풀뿌리 세력 내부에서) 정책을 합의하고 신뢰를 구축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고 말했다.
 
삶의 바닥부터 전복시키려는 촛불 시민들이 꿈틀대고 있다. 거리의 축제가 정치의 플랫폼으로 연결되는 것은 철학자 마루쿠제의 표현을 빌리면 미적인 것의 정치적인 것으로의 침입이다. 촛불 시민은 조금 멀지만, 가치 없지 않은 우회로를 택해 조금씩 지역정치와 중앙정치로 진입하고 있다. 촛불 시민, 호모 칸델리스가 광장을 지나 의회와 청사를 향하고 있다. 2009년 현재, 한국 사회에 저항이란 게 존재하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손가락을 들어 동네 골목길을 가리키면 된다. 그 길 역시 청와대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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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명박’ 넘어 ‘대안정부’ 준비해야 (한겨레, 최장집(미국 스탠퍼드대 교환교수), 2009-06-01 오전 10:50:17)
‘노무현 이후’ 남겨진 과제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원리와 제도를 존중하고 이를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제 그것에 반해서는 정치 안정도, 사회 안정도, 정권 유지도, 정책 추진도, 경제 발전도 가능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규모 촛불시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안타까운 죽음, 전국적인 애도와 정부 비판의 큰 흐름은 이를 실증한다. 이명박 정부의 가장 큰 문제는 이 평범하지만 자명한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한국의 서민, 소외 세력이 배출한 대통령의 인간적 고뇌와 굴욕감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분노를 일으켰고 그가 지키고자 했던 이상과 가치는 깊은 공명을 가져왔다.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정치적 출로도, 어떤 정신적·심리적 의탁도 갖지 못한 보통의 시민들에게 그의 죽음은 말할 수 없는 상실감을 가져다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따지고 보면 한국의 민주화는 권위주의 체제를 타파하는 데까지만 허용되고, 사회 여러 부문과 정당 체제, 나아가 체제의 운영 원리를 새롭게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으로서 노무현 개인에 대해 과도하게 책임을 물었던 때도 많았다. 사실 그의 성취와 한계는 넓게는 한국 민주주의 전체, 좁게는 민주화 세력 스스로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민주화 세력 사이에서도 지난 정부, 지난 정치인들에 대해 지나치게 책임을 따지는 것보다 다음 시대를 준비하는 데 힘이 모아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선택이 가능한가?
 
야당을 강화하여 현 정부를 대체할 대안 정부가 될 수 있는 길을 찾는 일의 중요함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기 어려울 것 같다. 방향에 대한 선택은 이처럼 비교적 간단하지만,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방법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무척 어려운 것이 오늘의 정치 현실이다. 지난 경험을 통해 우리는 집합적 열정을 불러일으켜 권력에 항거하는 것보다, 이를 정치적으로 조직하여 집권파의 권력 남용을 견제하고 궁극적으로 차기 정부가 될 강력한 대안 세력을 형성해가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사실을 배웠다. 권력에 항거하는 열정의 분출이 반이명박 정서를 최대화할 수는 있지만, 이러한 대칭적 양분 구조가 가져올 정치적 효과는 기대와 다를 수 있다. 국내외의 수많은 역사적 사례가 보여주듯이, 운동과 제도의 체제가 분리된 양극화된 갈등 구조는 보수의 장기 집권에 기여하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제1야당으로서 민주당이 대안 정부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의 보수정부가 할 수 없는 영역을 대표하고, 정책 대안을 개발하고, 지지 기반을 다져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당은 외부로부터 인적 자원을 수혈하는 데 훨씬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또한 지금과 같은 보수적 이념에서 훨씬 더 개방적이고 유연해야 하고, 실현 가능한 성장 정책을 추구하는 동시에 사회 경제적 이슈와 노동문제를 회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다뤄야 하고, 기존의 진보적 정당이나 노동운동과도 적극적인 연대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의 요구들은 새로운 리더십의 창출과 병행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 과정은 정치의 방법을 통해 대중적 에너지를 어떻게 결집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하나의 모델이었다. 그가 오늘의 정치 지도자들, 정치인들, 정치 지망생들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의 하나는, “모나면 정 맞는다”라는 말로 압축된 보수적 정치 규범에 순치되지 않고 보여준 과감함이다. 정치에서 비난받을 일은 대중의 에너지를 허비하는 일이다.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는 7년 전 노무현이 이룩한 일을 성취해낼 또다른 노무현을 요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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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최후의 꿈 ‘진보의 재구성’ (시사IN [90호] 2009년 06월 01일 (월) 14:21:13 박형숙 기자)
 
노 전 대통령은 비공개 인터넷 카페를 만들어 참모들과 함께 질문을 던지고 의견을 덧붙이고 자료를 올리고 책도 추천하면서 주제에 접근해갔다. 학자 출신 참모들이 전공별로 ‘독선생’ 노릇을 하기도 했다. 참여정부 시절 국가균형발전위원장을 지낸 성경륭(사회학),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정치학), 정책특보를 맡았던 이정우(경제학),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정치학), 국정홍보처장을 지낸 김창호(철학) 등 전·현직 교수가 참여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들에게 “같이 공부하자. 월급은 못 주고 차비는 드릴 테니 자주 오시라”고 열의를 보였다. 김창호 전 처장은 “처음에는 나와 소수의 사람이 책과 참고자료를 지원하는 수준에서 시작했지만 점차 참여하는 분이 늘어나면서 인터넷 소통 공간도 마련되고 시스템화되었다”라고 말했다.
  
“한 가지 주제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그 주제 속으로 파고들어 애초의 줄거리에서 일탈하는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그다지 흔치 않았던 일이었다.”(윤태영 전 대변인) 최종 수렴지는 ‘진보주의’였다. 5년 대통령 경험을 바탕으로 노무현은 국가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기존 틀로는 자신의 생각을 담아낼 수 없다는 생각이 그리로 이끌었다. 의외였다.
 
임기 말 참여정부의 정체성에 대해 그는 “진보를 지향한 정부”라고 규정했지만 수사처럼 들렸다. ‘유연한 진보’ ‘실용 진보’ ‘합리적 진보’라며 기존 진보와 차이를 드러내려 했지만 ‘노무현=진보주의자’라고 인정하는 좌파는 별로 없었다. 되레 민주노동당 같은 진보 진영에서는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하는 사이비 진보”라고 비판했다.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말은 참여정부의 모호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노무현의 대표 어록이었다. 특히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은 그런 비아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뒤 노무현은 국가의 역할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을 시작했다. 국가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난관에 처했다. 그 자신 탈권위주의와 시민권력을 주창해온 주인공. 사회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국가의 역할도 있지만 동시에 경계하고 뛰어넘어야 할 위치에 국가가 있다는 점을 깨닫고, ‘내 고민을 진보라는 틀에 담아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노무현식 진보는 달랐다. 국가 영역의 ‘복지’, 시장 영역의 ‘성장과 경쟁’, 시민사회 영역의 ‘공존의 가치’를 어떻게 진보로 재구성하느냐가 핵심. 주체는 시민이었다. 하지만 시민사회가 위기에 빠졌다는 게 그의 현실 인식이다. 지난 10년 민주정부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는 탈권위주의 사회로 이동하고 있지만 국가가 후퇴한 ‘빈자리’를 시장과 소수 독점 미디어가 차지하면서 시민사회 영역은 더 좁아지고 위축되었다. 여기에서 노무현이 왜 기를 쓰고 조·중·동과 법정 소송을 불사하고 언론 개혁을 부르짖었는지 그 이유가 드러난다. 시민에 의한 사회 재구조화의 전제는 합리적 토론과 논쟁이었다. 공론장이 살아야 시장의 지배, 독점 미디어의 지배를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을 쥐어줘도 왜 휘두르지 못하냐는 비난, 또 무능한 정권, 아마추어 정권이라고 낙인찍히는 수모를 감수하면서도 권력을 동원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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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그 이후', 지금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프레시안, 양문석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 2009-06-01 오후 7:24:08)
[기고] 전혀 새로운 조직의 등장이 필요하다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뭘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논객이고 운동가고 일반 시민들 할 것 없이, 먼저 자신들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 주장들 속에 우리가 채택할 것은 채택하고 버릴 것은 버리면서 '교집합'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 또한 지금 시국에서, 아니 이명박 정권의 치하에서 계속되어야 하는 실천이며, 계속되어야 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지금. 민중들의 분출하는 분노가 기존의 분노와 사뭇 다르다. 그 원인들이 몇 가지 있다. MB악법으로 인한 공공성 파괴를 목격해야 할 비정규직, 교육관계, 공기업사유화 대상들, 언론관계 등에 종사하는 당사자들의 분노가 있다. 또한 경제환경을 재벌 중심으로 몰아가면서 일상의 삶을 파괴하거나 훼손하는 각종 경제관련 악법을 목격해야 하는 종소기업가들부터 소속 노동자 등 당사자들의 분노가 있다. 그리고 검찰이나 경찰의 행태에 대한 분노다. 권력의 주구로서 부끄러움을 상실하고, 국민과 시민들을 적대시하며 오로지 이명박 정권 유지수단으로 자청하는 검찰과 경찰에 대해 격렬히 분노하는 시민들이 많다. 또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로 몰아간 주범인 청와대와 법무부 검찰 뿐만 아니라 조중동 등과 같은 수구언론들의 작태에 분노하는 민중들이 있다. 겹치기도 하고 또 따로따로, 다양한 의제 속에서 일어나는 분노는 한 곳을 지목하고 있다. 그곳이 바로 '청와대'이다.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현실의 맥락을 짚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해야 할 것 같다. 지난 해 6월 전국적으로 수백만 명이 모였던 촛불집회는 '저들'에 의한 어이없는 대반격에 밀려 지난 해 하반기부터 올 상반기 내내 시민사회뿐만 아니라 노동계 등에 깊은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평가는 다양했고, 여전히 촛불을 타고 있다고 말했지만, 지난 해 겨울부터 시작된 한나라당의 2차에 걸친 '도발적 입법전쟁'에 속수무책이었다. 다만 언론노조가 소속된 미디어행동 정도가 칼바람 부는 여의도에서 투쟁을 깃발을 올렸을 뿐이다. 반면 저들은 '경찰계엄령'을 내린 듯, 철통같은 경찰방어막 뒤에 서서 촛불집회 참여자들을 탄압하는 수순을 잊지 않았다.
 
인터넷상의 표현의 자유는 '인터넷모욕죄'로 아예 법제도를 개악하자는 데까지 비화하면서 반격을 가했다. 상대적으로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구조를 지닌 '공영방송'은 스스로 무릎 꿇고 투항했다. MBC마저 정치권력으로부터 직접적인 압력이 있었던, 스스로 알아서 했던 '기는 모양새'를 현 정권에서 노골적으로 전시하기도 했다.
 
또한 투쟁의 구심으로서 민주노총, 아니 금속노조를 비롯한 민주노총의 주력부대들은 한결 같이 침묵함으로써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의 전반적인 시대반동 사회반동의 작태를 그냥 방관했을 뿐이다. 저들이 할 수 있는, 준비된 투쟁역량과 더불어 준비된 연대투쟁의 자각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저항세력들의 기대와 달리 무기력했다. 그렇다고 딱히 새롭게 대오를 정비하기 위한 치열한 노력을 한 것 같지도 않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은 더 한다.
 
그 동안 각종 현안마다 깃발을 들고 저항의 중심으로 역할했던 유명한 시민사회단체들도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언론노조가 속한 미디어행동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민단체나 연대체들이 지난 겨울부터 지금까지 거의 모든 투쟁에서 무기력함을 노출하면서 투쟁의 현장 밖으로 나 앉아 있었다. 할 수 있는 역량도 싸워야겠다는 의지도 부족했고 박약했다. 딱 한 번, 화려한 불꽃놀이를 하듯 싸운 6월을 제외하고 이명박 정권 집권 내내 무기력증을 호소함으로써 전체 사회운동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로 지난 1년 반을 보내고만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채 진행했던 전면전이었고, 진행하면서 준비하지 못했던 전면전'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채 진행됐던 전면전이 자발적인 시민들에 의해서 발생한 불가항력이었으면, 진행하면서 준비하지 못했던 전면전은 시민사회의 무능력이었다. 전술적 과제를 확정하고, 조직적 과제를 논의하는 장을 열지 못했던 시민사회단체의 무능력과 더불어 전술적 조직적 오류에 기인한다. 그 결과 자발적인 시민들의 자발적인 분노를 한 곳으로 집중할 수 있는, 전술적 과제와 전략적 과제를 구분할 수 있는, 조직적 포괄로 안정적인 민주주의 수호투쟁을 계속 할 수 있는 지도력은 순식간에 사그라 들었고, 저들의 공권력을 기반으로 한 폭력적 반격과 국회를 지배하고 있는 한나라당의 법제적 반격을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전혀 새로운 조직의 등장이 필요하다. 몇 몇 명망가들이 자신들의 인맥으로 구성하는 전국단위의 투쟁체 구성방식은 20여 년 전인 1987년 6월 항쟁을 이끌었던 '국민운동본부' 구성방식을 전혀 탈피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다. 그 명망가들은 구성하는데만 의미있는 요소였을 뿐 운영하고 책임지는데까지 그 의지나 역량은 '진화'하지 못한 것이다.
 
이제 일반 시민들이 참여해 촛불을 들었다가 부당한 처우를 당해도 하소연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 하소연뿐만 아니라 체포되거나 구속되어도 홀로 외로이 고립감에 고통당하지 않도록 전 과정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 시민들과 함께 밤을 새고, 시민들과 함께 투쟁하며, 시민들과 함께 동고동락을 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해 왔던 것 처럼, 몇몇 명망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뚜렷하고 합의된 전술적 목표, 조직적 대오, 권위있는 지도부를 구성하는 방식부터 달리 가야 한다는 의미다. 진격의 시점과 퇴각의 시점에 다수가 따를 수 있는 권위있는 지도부의 구성은 이제 긴급한 과제가 되었고, 이를 관철시킬 수 있는 헌신적이고 민주적인 핵심역량을 구성하는 것이 긴급한 과제가 되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시민들과 함께 공개적으로 토론하고 공개적으로 구성해야 한다. 비밀주의 밀실주의 안면주의 정실주의 일방주의적 조직구성방식은 이제 낡은 것을 쓰레기통에 내던지듯 내 던져버려야 한다. 일방적으로 위로받고 배려받는 조직, 일방적으로 위로해주고 배려해 주는 조직이 아니라, 소통의 건강함을 바탕으로 함께 위로하고 받고 더불어 배려하고 받는 그런 살아 숨 쉬는 조직이 필요하다. 이것이 기존의 조직과 자발적 시민들이 융합함으로써 새로운 운동적 열정이 넘실대는 조직을 구성하는 원칙이다. 이런 조직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집단지성과 더불어 집단실천이 반드시 필요하며, 이런 집단지성과 집단실천은 공개적인 시국대토론회 등을 통해서 '교집합'을 찾아내고, 그 교집합을 중심으로 투쟁의 내용을 한정함으로써 상호이해와 상호인정을 확보해야 한다. 
 
지금 전국 방방곡곡에서 경제적인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국민들이 널려 있고, 반민주적 작태에 분노하면서 자신의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가 억압당하는 국민들이 쉴새없이 분노를 토하고 있다. 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분노를 표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다양한 생각을 공유하고 걸러 낼 수 있는 공간으로서, 새로운 소통의 공간이 절실해지고 있다. 이들이 와서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덕수궁 대한문 앞이다. 정치권력으로부터 일정하게 쟁취해 놓은 공간, 거의 유일하게 시민들간 국민들간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현재 시점에서 덕수궁 대한문 앞 작은 공간밖에 없다.
 
이 공간에서부터 이제 우리는 '만인공동회'를 선언하고 실행해야 할 것이다. 직접민주주의 모범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부문별 쟁점토론에서부터 종합적 시국토론을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인터넷 공간의 논객들부터 출전해서 토론하고, 글쓰고, 또 토론하고 글 쓰며 네티즌과 소통하고 일반시민들과 소통하자.
 
비정규직 문제 북핵문제 언론악법문제 건강의료문제 교육문제 경제문제 문화문제 등 각 부문이 고민하고 있는 각종 문제를 드러내 시민들과 함께 토론하고 시민들과 함께 공유함으로써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넘어 새로운 진보의 정책과 방향을 설정해 보자. 당연히 투쟁과 저항의 구심점을 조직하는 조직논쟁도 이 공간에서 '선수'들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발언함으로써 함께 민주주의 발전과 경제적 불평등 해소 대안을 마련해 보자. 한국경제의 성장방법론도 논의해 보자. 분배방법론도 토론해보자. 작지만 크게 보고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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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복지연합’으로 나가자 (레디앙/참여사회연구소 <시민과 세계> 2009년 하반기호, 2009년 06월 01일 (월) 15:47:11 이재영 기획위원)
[좌파의 위기, 위기의 정치] "범야권 2010 촛불 프라이머리를" 
  
1. 이명박의 위기 아닌 위기
이명박 정권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파시즘’이라는 예단에서부터 ‘노무현 2기’라는 평가까지로 다양하다. ‘파시즘’이라는 평은 대체로 자유주의파, 문화적 관점, 비관적 경고에서 나오고, ‘노무현 2기’라는 평은 대체로 사회주의파, 경제적 관점, 냉소적 분석에서 나온다. 
 
이명박 정권 스스로의 동인, 그리고 그 정권에 대한 일반의 인식에서 보자면 이명박 정권을 가장 먼저 규정하는 것은 노무현 정권 ‘다음’의 정권이라는 점이다. 국민들은 이 정권이 하는 일이 노 정권과 ‘다르기’를 바라고, 이 정권의 정치 기획은 노 정권과 ‘다르게’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출발하는 듯하다. 그 ‘다름’이 사실인가 아닌가, 좋은가 나쁜가는 정권이든 국민이든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하다.
 
노무현과 민주당은 2004년 국가보안법과 언론법, 과거사 등에서 ‘개혁적’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했고, 이명박과 한나라당은 2008년 국정원법과 미디어법, 교과서 등에서 ‘보수적’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한다. 이것은 대립자와의 차별화를 통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적 정체(正體)를 확인하는 것이 노무현과 이명박 정치행위의 근간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경제적 포만을 줄 수 없어 이데올로기적 위무로 대체할 수밖에 없는 한국 보수의 위기를 반증한다.
 
이명박 정권은 노무현 정권과 많이 다르지만, 노무현 정권이 김대중 정권과 다른 정도보다는 작게 다르다. 조금 긴 관점을 들이대면 김영삼 김대중 정권이 비슷하고, 노무현 이명박 정권이 비슷하다.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대목은 그 정권들이 일종의 붐(boom)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노와 이는 공히 각각의 당 안에서는 취약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386’으로 불리는 수도권 고소득 노동자 가족군(群)의 선도적이고 일관된 지지로 집권에 다다른다.
 
다른 점이 있다면, 노무현에 대한 지지는 민주주의의 심화에 대한 열망이었고, 이명박에 대한 지지는 그 민주주의에 대한 배신감이 사회경제적 욕구로 급속히 전화된 점이다. 그러나 노무현의 경제사회 정책이 수도권 고소득 노동자 가족군의 욕구 실현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경험적으로 증명되면서 그의 지지세력은 팬클럽과 삼성 일족으로 협소화, 견고화된다. 이명박 정권 역시 촛불집회를 거치며 수도권 386과 절연되고, 결국 그 정권에는 교회, 우익인사 등 공신(功臣)만이 남게 됐다. 이렇게 해서, 한나라당 안에서 색깔을 의심받기조차 하던 이명박이 ‘수구 꼴통’이 돼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3김 시대에 뒤이은 ‘노무현+이명박 현상’이란 [ ① 기성정당 지지기반의 이완 ② 수도권 고소득 노동자 가족군의 여론 주도성 ③ 그 인구집단 욕구의 급격한 변화 ④ 기성정치권의 욕구 수용 불가에 의한 괴리 ]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이 무능하다거나 한국 정치가 장기파동(long waves) 국면에 들어섰다는 판단이 곧 급격한 정치변동을 예고하는 것은 아니다. 촛불집회가 거리에서의 아노미와 감성적 일탈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운동의 한계가 아니라, 그 운동이 처해있던 정치적 조건으로부터 기인한다. 민주당들은 이미 촛불시위자들의 눈 밖에 났고, 사회주의 정파들은 ‘정치’에 입문하지 못한 상황, 이명박 정권만이 유일한 국가 정치세력이라는 사실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즉, 보수우익의 위기는 그 상대자들의 침묵으로 인해 현상하지 못하고 잠재한다.
 
2. 좌파 위기의 뿌리
위기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것은 어느 기준에서 어찌 보느냐에 달려 있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모색되기 시작한 한국 좌파정치의 장기 관점에서 보자면 지금을 굳이 위기라 할 필요도 없겠다. 짧은 시간에 꽤 커졌고, 더 커져야 할 미래의 도상에서 잠시의 정체나 퇴보를 피할 도리는 없으므로, 지금 한국 좌파정치가 보이는 지지부진함이란 정상적 발전과정의 한 시점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반토막난 국회 의석 수, 저조한 지지율,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분당 같은 것이 우연적 요소들에 의한 일시적 머뭇거림이라기보다는 그 운동 자체가 안고 있는 구조적 약점이 표출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좌파정치의 위기는 자못 심각하다. 
 
어떤 사람들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분당을 진심으로 아쉬워하며, 조만간 재통합할 것을 빌어 마지않는다. 어느 나라 어느 정당에서든 내부 정파가 있어 왔으니, 민주노동당파와 진보신당파가 한 당 안에서 어울려 놀지 말란 법은 없겠지만, 1997년부터 2007년까지 민주노동당 10년의 역사는 양자가 결코 융화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비당적인 조직이었음에도 민주노동당이 10년이나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 당의 미개척 영역이 워낙 광대했던 덕분이다. 초기에 수십 개의 지구당을 장악하고 있던 정파들은 백여 개의 지구당으로 진출하면서도 다른 정파와 심각한 충돌을 빚지 않았고, 어느 누구든 민주노총이라든가 사회운동의 여러 영역에서 ‘민주노동당’으로 행세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미개척지가 점차 줄어들면서 당 성장이 포화에 이르고, 지구당과 분회 차원에서까지 정파끼리의 충돌이 빚어지고, 당 밖에서 누가 민주노동당을 대표할 것인가가 ‘모의’가 아닌 ‘실탄(實彈)’의 문제가 된다. 
 
처음에는 어느 누구도 ‘그깟 강령 따위’에 개의치 않았지만, 나중에는 당 권력을 경과하면 공중파 TV에서 “북핵은 자위권이다”라거나 “민주노총이 각성해야 한다”고 외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당선 가능성도 없는 출마가 고역이었지만, 나중의 민주노동당에게는 적어도 비례명부 상위권은 정파들의 명운과 장래를 좌우하는 뜀틀이 되었다. 당 이념을 대신한 유일한 규율은 지극히 형식화된 다수표였는데, 그나마도 ‘북조선식 강권 투표’나 ‘남한식 매수 투표’가 횡행하며, 다수파든 소수파든 ‘민주주의’로 후퇴하게 되었다.
 
애초 쌍방 누구도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고사는 모면하였으므로 동거의 이유가 사라졌고, 가족이 불었으니 더 이상 비좁은 집에 동거할 수도 없다. 민주노동당은 처음부터 그만큼만 기획됐었고, 결국 성공했다. 형해화된 강령 쪼가리가 아니라 통일된 이념을 가지지 못한 것이 민주노동당의 실패라면, 노동계급 통일을 이루어내지 못한 것이 민주노총의 오늘이다. 민주노조운동은 노동계급 다수자에게 자신의 존재 의의와 정당함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민주노조운동은 민주화 이전의 가족주의와 민주화 이후의 경쟁논리를 내면화했고, 그를 노동조합운동이라는 형식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선도적 조직 가담자들의 ‘고성장기 과실 분배형 노동운동’으로 출발하여, 조직 외부의 불안정노동에 대항하는 ‘저성장기 과실 배제형 노동운동’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에 따라 민주노조운동은 그 공개적 지향과는 무관하게 실질적으로는 자본독점운동의 한 축으로 편입되었다.
 
3. 상상의 확장, 정치로의 집중 : 촛불프라이머리
좌파정치의 위기가 이념의 부재와 세력 형성의 실패로부터 기인한다는 진단은 별스럽지 않다. 다만, 민주노동당의 정체와 분당, 민주노총의 퇴락을 거치며 그런 문제의식이 첨예화되고 있을 뿐이다. 
 
지금, 주대환과 단병호는 진보정당들 밖에서 ‘사민주의’와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이루기 위해 힘쓰고 있다. 물론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사회당 같은 당들 중에 딱히 적을 둘만한 곳이 없어서일 수도 있지만, 두 사람의 최근 행보는 다분히 ‘탈정당적’이다. 하지만, 이런 근원적 문제의식이 현실 타개에 도움이 되기는 대단히 어렵다. 이념부터 세우자는 주대환의 주장, 노동자정치세력화를 다시 시작하자는 단병호의 진술은 몇 줄짜리 강령과 수백 명의 노동자들밖에 가지지 못한 150여 년 전의 독일 망명객들이 공산당을 창건한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주대환의 이념은 노동자들에 의해 실험 실천되지 못할 것이고, 단병호의 노동자들은 이념에 의해 모이거나 이끌어지지 못할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의 주장은 우리 운동을 꼬리에 꼬리를 무는 되먹임 자폐선(feedback loop)에 갇히게 할 뿐이다.
 
1847년 공산주의자동맹, 1869년 독일사회민주노동당의 창당 이래 사회주의 운동의 본령이란 이념운동도 아니고 노동운동도 아니다. 그것은 도전적 정치다. 정치는 이념을 유예시킬 수 있지만, 이념이 정치를 자연스레 불러오지는 못한다. 정치가 세력을 대체할 수는 있지만, 세력은 정치를 넘어서지 못한다. 정치는 이념과 세력의 구성에 필요한 시간의 누적을 지혜로운 선택으로 단축시키는 것이다. 대자적 계급은 진보정치 아래에서만 형성되고, 급진이념은 도전적 정치에 의해서만 조탁될 수 있다
 
지금의 한국 정치는, 이명박 정권의 지지 기반 취약과 동시에 민주당의 지리멸렬함, 즉 부동(浮動)하는 민심에 의해 정치재편이 내연(內燃)하는 형국이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비판적 여론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답보하는 것은 유권자들이 경험을 통해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초록동색’이라 인식하고 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최근 몇 년 동안 유권자들의 정파성은 일관되게 약화되고 있는데, 이는 전통적인 정당 지지세력이 소멸하는 한편, 보수정당들이 근친수렴한 결과이다. 결과적으로 민주당의 재기 가능성은 높지 않으며, 정치재편은 야권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2012년까지의 정치 상황은 민한당에서 신민당으로 제1야당이 교체되던 상황과 비슷할 가능성이 크다.
 
이와 함께 촛불현상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를 여러모로 해석할 수 있겠으나, 진보정당까지 포함되는 정치세력이 촛불집회를 제대로 수용치 못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와 같은 사회문화적 폭발은 어떤 식으로든 정치에 반영될 수밖에 없으며, 어느 때일지는 모르겠지만, 정치재편의 동력으로 재등장할 것이다. 
 
최근, 야권 일각에서는 지방선거에서 범야권이 출마 선거구를 조정하자는 구상이 조심스레 검토되고 있다. 4대 동시 지방선거의 경우 선거구와 출마자가 워낙 많고, 그 대부분인 기초의원 선거에서 이른바 ‘범야권’이 심각하게 경합하는 경우가 많지 않으므로, 이런 구상은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 문제는, 광역단체장처럼 정치적 상징성이 크고 경쟁이 치열한 선거에서도 그런 ‘조정’을 할 것인가이다. 첫째, 그런 조정이나 연합을 할 필요성이 있는가? 야권 전체가 워낙 열세이므로, 조정이나 연합은 필요하다. 둘째, 그런 조정이 바람직한가? ‘범야권’이라 통칭되지만, 정책적 스펙트럼이 넓으므로, 정책 차이까지 묻어버리는 연합이라면 바람직하지 않다. 셋째, 그런 조정이 가능하도록 할 방법이 있는가? 모든 야당이 수긍할 만한 공정한 룰(rule)은 없다. 양보를 강요할 수 있는 명분은 ‘촛불프라이머리’ 정도가 유일할 것이다.
 
주경복 모델과 김상곤 모델을 따라 할 수 있다. 물론, 지방선거에서는 정당을 배제할 수 없고, 후보를 만드는 과정도 훨씬 대중적이어야 한다. ‘경제민생 위기극복 연석회의’를 이룬 민주당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과 광우병대책회의, 촛불집회를 주도한 네티즌들이 함께 서울시장, 경기도지사, 부산시장 선거 등에서 촛불프라이머리를 치루는 방안을 연구해야 한다. 그 틀 안에서 일정한 기준과 자격 요건으로 선거관리위, 선거인단, 후보자를 정할 수 있다면, 다음 지방선거가 또 한 번의 촛불축제가 될 수도 있다.
 
4. 한국 정치의 위기, 변화의 위기 : 복지연합으로 나가자
촛불프라이머리가 성사된다면 그 안에서 공동공약을 도출할 수도 있겠고, 일회성의 선거연대이니 선출된 후보 측에 공약을 일임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런 시도가 ‘촛불연합’쯤으로 불릴 수도 있겠는데, 이런 구상을 해보는 이유는 그동안의 좌파운동이 이념이나 세력을 형성하기에는 부적절한 노선을 밟아오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들고, 만약 그렇다면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촛불연합 같은 것으로 판을 흔들어야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근래 한국 사회를 이끈 주요 변화, 노무현의 집권, 이명박 정권의 등장, 촛불집회는 흔히 ‘중산층’으로 불리는 고소득 노동자 가족군의 욕구 표출에서 시작됐다. 이들은 눈부신 경제성장과 급속한 민주화의 산물이고, 경제주의 노동운동과 자유주의 시민운동에 의해 고무되었다. 그런데 이런 사실(史實) 속에는 불안정 노동계층과 영세 자영업자가 빠져 있다. 지금 한국 좌파운동을 형성하고 있는 세력은 유럽의 공산당이나 사회민주당들이 태동할 때보다 훨씬 더 부유하다. 그래서, 색깔로는 ‘사회주의’이고 형식으로는 ‘노동운동’인 한국의 좌파운동이 말이 아니라 행동에서 급진적이지 못하고, 정치적 비약점(jumping point)을 넘지 못한 채 고립돼 있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물론, 정치와 노동운동에서 이미 조직돼 있는 좌파운동으로부터 섣불리 이탈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한, 촛불연합이 제대로 된 하층연대도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운동엘리트집단보다 더 깊고 넓은 풀(pool)인 것은 분명하다. 중산층화된 좌파운동은 그 풀 안에서 우리 운동이 포섭하지 못한 불안정 노동계층을 만날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 기업임금과 기업복지 선점구조에서 벗어나, 다양한 하층 계층과 사회복지연합을 맺으면서, 세력과 이념의 재구성을 도모해야 한다
 
1995년이었던가 삼성 이건희는 한국 정치는 후지고, 저희 자본가들이 다 이룬 것이라 우겨댔었는데, 경제를 포함한 한국 사회의 급격한 변화는 언제나 정치의 급격한 변화와 호응해왔다. 군사주의적으로 조직된 영남권의 중화학공업 노동자들, 박정희와 전두환 그리고 전투적 노동운동이 조직한 노동력이 1990년대 초반까지의 성장을 이끌었다. 이 세기 들어서는 창의적이면서도 값싼 IT노동자들, 김영삼과 김대중 그리고 개방적 대학문화가 쏟아낸 노동력이 한국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 
 
지속성장은 ‘생태’나 ‘신성장동력’ 따위에서만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성장이란 바로 정치 변화에 의한다. 그런데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김영삼으로, 김대중으로, 노무현으로 끊임없이 변화해온 흐름이 끊기고 있다. 뻔히 보이는 한국 정치의 미래는 한나라당의 장기집권이거나 중도수렴된 보수양당의 지리한 정권교체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여러 사회지표가 OECD 최고라는 둥, 최저라는 둥 운위되는 상황은 한국 사회가 여전히 길고 긴 변화의 도정을 앞두고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정치가 현재처럼 요지부동이라면 사회적 불균형과 불안정은 다른 통로를 향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 한국 사회의 위기란 바로 정치적 변화의 정지이고, 좌파정치의 정체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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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화두 ‘민주주의’ (한겨레21 2009.06.05 제763호, 조혜정 기자)
[표지이야기-기억의 미래] 퇴임 뒤 시민주권운동 제안하며 누리꾼과 열띤 토론… “정치가 썩었다고 고개 돌리지 말라”던 그 말
 
“정치가 썩었다고 고개를 돌리지 마십시오. 낡은 정치를 새로운 정치로 바꾸는 힘은 국민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2002년 대선 직전 노무현 전 대통령은 마지막 텔레비전 광고를 통해 이런 말을 했다. ‘국민이 만드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고민은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했다. 재임 기간엔 권력 분산을 시도했고, 퇴임 뒤엔 시민에겐 ‘시민주권운동’을 제안하는 한편, 민주주의·진보주의를 성찰하는 책을 남기고 싶어했다. 화두는 던졌으되 완성하지 못한 ‘노무현의 민주주의’는 남겨진 이들에게 숙제로 남았다.
 
노 전 대통령이 그린 민주주의의 모습은 그가 제안한 시민주권운동 개념이 어떻게 정리되고, 어떤 방식으로 유통됐는지에서 엿볼 수 있다. 대통력직에서 물러나 고향 봉하마을로 돌아간 직후인 지난해 3월 노 전 대통령은 공식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에서 “시민주권운동, 앞으로 제가 여러분에게 함께 하자고 말씀드리고 싶은 운동입니다”라며 토론을 제안했다. 노 전 대통령은 “시민주권운동의 개념을 저보다 잘 설명한 글”이라거나 “저보다 한 수 위의 글입니다. 저도 이렇게 배웁니다”라고 토론 글을 소개하면서 일독을 권했다. “우리가 함께 참여해 이런 글들을 정리하고 편집하면 ‘시민주권운동’과 ‘민주주의 2.0’에 관한 훌륭한 설명이 완성될 수 있을 것 같다”며 ‘집단지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수백, 수천 건의 댓글·관련글로 토론이 확산되면서 시민주권운동엔 살이 붙었다.
 
“결국 세상을 바꾸자면 국민의 생각을 바꾸어야 하고, 국민의 생각을 바꾸는 데는 미디어가 중요하다. 인터넷에 들어가보면 정보는 넘쳐나지만 내용이 부실하다. 협업으로 역량을 확대하고, 토론과 검증을 통해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는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의 주장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시민주권운동의 목적지가 참여와 권력 견제였음을 설명해준다. 이런 구상은 노 전 대통령이 재임 때부터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가까운 교수와 참모들에게 진보주의 연구를 해보자며 만든 비공개 인터넷 카페에 지난 4월13일 ‘한국은 지금 몇 시인가?’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좌파 신자유주의자 노무현’이 자신을 포함한 민주정부 10년을 어떻게 성찰했는지를 보여준다. “한국에도 진보주의의 역사가 있었는가?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는 진보의 정권이었는가? 제3의 길, 유럽의 진보주의 기준으로 평가해보자. 그래도 한계는 분명하다. 본시 그들의 좌표는 어디에 있었을까? 과거의 말과 이력을 살펴보자. 무엇이 발목을 잡았을까?” 같은 날 쓴 ‘세계는 진보의 시대로 가는가? 진보주의의 미래?’라는 글에선 진보주의의 방향을 고민했음이 드러난다. “진보의 시대라는 개념이 정태적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경제의 위기와 그 이후 세계의 질서. 세계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진보 진영의 전략은 새로운 경쟁의 환경과 경쟁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런 노 전 대통령의 활동을 두고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은 홈페이지에 카페를 열고 시스템을 만들어 공동창작을 모색했다. 시스템을 만들고 그 안에서 각종 문제를 제기하고 댓글을 다는 순간, 대통령은 분명 미래를 꿈꾸며 사는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양정철 전 홍보기획비서관은 “자신의 연구와 탐구를 시민 노무현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치열하고도 절박한 실천의 끈으로 여겼다는 점이 느껴진다”고 평가했다.
 
민주주의 구현을 위한 제도 정비는 그의 대통령 재임 시절을 관통하는 과제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개헌이다. 노 전 대통령은 2007년 1월9일 대국민 특별담화에서 ‘원포인트 개헌’을 제안했다. 그는 왜 ‘안 될 일’을 굳이 추진했던 것일까? 의문을 푸는 열쇠는 정치개혁의 핵심인 권력 분점과 정당 책임정치에 있다. 2005년 7월28일 열린우리당 당원들에게 쓴 글을 보면 그런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당정분리 제도는 대통령의 권력을 제한하자는 국민적인 여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통령에 대한 당과 국회의 위상과 권위가 더욱 높아질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 총리에게 보다 많은 권력을 이양함으로써 당을 정권의 중심에 서게 하는 것이 시대정신에 맞는 국정 운영이라 생각한다.” 책임총리제를 도입해 국정 운영의 많은 권한을 총리와 나누고, 당 중심의 국정 운영을 하려고 애썼다는 자부심이 묻어난다.
 
하지만 4대 개혁입법을 비롯해 그가 추진한 일은 사사건건 야당의 반대에 부닥쳤다. 종합부동산세 등 각종 정책도 효과를 내기도 전에 수시로 치러지는 선거 때마다 ‘정권 심판’의 소재가 됐다. 그로선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 불일치가 불합리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더해 노태우 전 대통령 이후 모든 대통령이 임기 중반 이후 레임덕에 시달리고 결국엔 탈당을 강요당했던 것도 대통령 단임제와 임기 불일치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인식했다. 두 기관의 임기를 맞춰 국정 운영을 맡기고, 그 평가는 다음 선거 때 받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원포인트 개헌 제안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당시 이백만 청와대 홍보특보는 “(노 대통령이 청산하겠다고 약속한) ‘낡은 정치’는 낡고 닳아 효율성이 현저하게 떨어진 국가 운영 시스템을 의미한다. 헌법은 국가 운영 시스템의 최고 규범이므로, 헌법을 손질해야 한다는 의미다. 개헌안은 이런 의미에서 낡은 정치 청산의 핵심이자 정치개혁의 화룡점정”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개헌 발의를 할 경우에 대비해 노 전 대통령이 직접 작성해두었던 대국회 연설문을 보면, 이런 문제의식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글에선 평소 자신이 구상했던 내각제 개헌과 관련한 내용까지 언급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에게 지역주의 극복은 “정치 생애를 건 목표이자 대통령이 된 이유”였고, “정권을 내놓고라도 반드시 성취해야 할 가치가 있는 일이며 역사에 대한 의무”였다. 지역주의 해소를 위해 구체적으로 선거구제 개혁, 대통령 결선투표제와 내각제 도입 등을 검토해볼 시점이 됐다는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 한나라당에 제안한 대연정은 그렇게 지역주의의 벽을 무너뜨려보자는 ‘노무현식’ 해법이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놓을 테니, 지역구도만은 벗어나보자는 주장이었다. 소문상 전 청와대 정무기획비서관은 “노 전 대통령이 내내 붙잡았던 화두는 민주주의였다. 상대방을 인정하고 대화·타협하는 게 민주주의인데, 이를 가로막는 것이 적대적 지역구도와 권력 독식이라고 여겼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대연정을 제안했던 건 대화와 타협을 위한 연합정치를 모색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연정 제안도 실패했다. 정치권 안팎에선 지역주의 극복이야말로 제도 개선이 우선돼야 할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정치외교학)는 “특정 지역을 한 정당이 독식하는 구조를 깨는 건 사실 노 전 대통령을 떠나서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다. 그래야만 새로운 정치세력의 유입도 가능하고, 정치가 국민의 요구에 더 잘 반응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중대선거구제를 채택하든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확대하든 비례성이 높은 투표제가 도입돼야 한다. 대선에서도 결선투표제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면서도 “하지만 이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격이라 국회가 쉽게 제도를 바꾸려 들지는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서복경 참여연대 실행위원은 “유권자는 선택할 대안이 있어야 투표를 한다. 정치·사회·심리적 친밀감과 안정감을 주는 대안이 되도록 정당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17대 총선에서 유권자가 열린우리당을 선택했던 건 ‘개혁’을 내세운 새로운 대안이었기 때문인데, 이 대안이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실패하고 해체돼버리면서 유권자는 배신감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정치 무관심층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정치 무관심은 한국 사회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의식의 확대도 필요하다.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덕수궁 돌담길에 늘어서 힘겹게 그를 보내던 시민들 사이에선 희망의 싹도 보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내는 마지막 길, 당신께 이것만은 약속드립니다. 평생 투표를 꼭 하겠습니다.” 누군가 마련한 붙임판엔 ‘평생 투표’를 약속하는 색색의 스티커가 빈틈없이 붙어 있었다. 다시 노 전 대통령의 말을 되새길 때다. “정치가 썩었다고 고개를 돌리지 마십시오. 낡은 정치를 새로운 정치로 바꾸는 힘은 국민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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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야권의 진보는 ‘노’의 신자유주의보다 떳떳한가 (시사IN [91호] 2009년 06월 09일 (화) 14:38:05 이종태 기자)
노 전 대통령은 공격적 개방과 복지로 한국을 지구적 신자유주의 시스템에 적응시키려 했다. 결과는 현실 정치 공간에서의 패배. 그러나 노무현을 비판해온 야권 세력은 그를 능가할 수 있는가. 
 
2003년 대통령에 취임한 노무현이 5년 동안 끌어안고 뒹굴었던 것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대외적 조건이었다. 이런 대외 조건에 노무현이 대응한 방법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적극 적응’이었다. 박정희와 전두환도 시도하지 못했던 자본시장 개방(국내 기업의 소유권을 외국인이 보유하거나 거래할 수 있게 하는 조처)을 김대중이 완료했다면, 노무현은 공격적인 개방을 통해 경제성장을 성취하려 했던 정치가였다. 개방과 자유화를 가장 급진적으로 추구한 정치가는 민주화운동 출신인 김대중과 노무현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동북아시아 금융허브’와 그 수단인 자본시장통합법을 추진했다. 해외의 유수 금융기관을 국내로 유치하기 위해 한국투자공사를 설립한 것도, 골드만삭스나 리먼브러더스 같은 투자은행을 육성하자는 주장이 국정 지표처럼 부상한 것도 노무현의 집권기였다. 은행에서 보험상품을 팔고, 증권사가 지급결제권을 가지게 하는, 이른바 금융기관의 겸업화와 대형화를 본격 추진한 것도 참여정부였다. 한국 제조업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전망하면서 금융을 비롯한 교육·의료·법률·회계 등 ‘고급 서비스업’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한국의 대외 의존도 역시 노무현 시대에 오히려 크게 심화되었다. 국민총소득(GNI)에서 수출입이 차지하는 비중은 노무현이 취임한 2003년 70.6%에서 2007년에는 85.9%로 급증했다. 내수를 중시하는 정부인데도 그랬다.
 
노무현은 신자유주의 성장 전략을 추구하면 양극화가 깊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경험을 앞서 겪은 미국 민주당(클린턴 이후), 영국 신노동당의 1990년대 이후 ‘신노선’을 벤치마킹한 흔적이 보인다. 이 신노선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폭넓은 계층이 함께 성장하는 동반성장 모델을 선호한다. 부유층이 성장해서 하위 계층으로 부를 확산시킨다는 ‘트리클 다운’ 효과에는 회의적이다. 둘째, 우파 세력으로부터 시장과 성장이라는 가치를 빼앗아 자기 세력의 의제로 삼았다. 노동자나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라 해도 좀처럼 시장을 규제하거나 제한하려 하지 않는다. 셋째, ‘복지’의 개념을 바꿨다. 이들에게 복지는 ‘세금을 걷어서 소외층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적 투자’다. 예컨대 교육 부문에 집중 투자해 지식정보사회에 적합한 인재를 많이 키움으로써 경제발전에 이바지한다는 식. 이 경우 복지는 경제의 일부분이 된다. 넷째, 기회의 평등이다. 사회투자 혹은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는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국민에게 같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사상이다.
 
한국의 복지 지출은 노무현 재임 기간에 크게 늘어났다. 공공부조(생활유지 능력이 없거나 생활이 어려운 국민의 최저생활을 보장하고 자립을 지원하는 제도)인 기초생활보장제도 예산은 노무현이 집권한 2003년 1조9600억여 원에서 2007년에는 2배에 가까운 3조4300억여 원으로 급증했다. 의료보험 보장 수준도 김대중 재임 시의 50% 내외에서 64%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노무현이 미국 민주당과 영국 신노동당의 사회·경제 철학을 정책에 본격적으로 반영한 것은 집권 후반기다. 특히 보육 부문은 영미의 사회투자 개념을 거의 직접적으로 벤치마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07년 4월부터 시행 중인 아동발달지원계좌는, 저소득 어린이 측에서 이 계좌에 일정한 금액을 적립하면 18세까지 같은 금액을 정부가 넣어준다. 18세 이후에는 이 돈을 학자금, 기술습득 비용, 창업이나 주거마련 비용 등으로 사용할 수 있다. 또한 희망스타트 프로젝트는 저소득층의 0~12세 아동을 대상으로 건강·복지·교육 등에서 맞춤형 통합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런 보육 예산은 2003년 3428억원에서 2007년에는 1조4178억원으로 4배 이상 늘어났다. 2007년 6월의 참평포럼 1차 월례강연회에서 노무현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회투자는 우리 국민을 경쟁력 있는 국민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사람이 경쟁력이다. 어린이에게, 그리고 불편하거나 조건이 불리한 사람들에게 집중 투자를 해서 그 사람들에게도 사람다운 삶을 보장함과 더불어서 우리 사회의 부담을 없애가자는 것이다.”
 
결국 노무현 정부는 ‘적극적 개방을 통한 강력한 성장’이라는 기조 아래에서, 사회통합 및 성장 인프라 육성 차원으로 인적 자본에 투자한 것이다. 이는 기실 영국과 미국 중도 진보 세력의 정책을 한국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무척 엄혹했다. 그 이유를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대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 당시에 틀 지워진 복지제도를 대대적으로 확충했다. 그리고 복지를 사회 기본권으로 간주하게 한 공로가 있다. 그러나 그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은 오히려 양극화를 극대화하고 재생산하면서 복지를 억압했다. 사실 경제 부문에서 진행되는 양극화를 복지로 막기는 힘들다.”
 
‘뉴민주당 선언’의 내용은 기실 노무현의 후기 노선과 대동소이하다. 경쟁력 및 가치의 원천을 자본이 아닌 사람에게서 찾는 것이 그렇고, 일자리 창출과 사람에 대한 투자를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삼는 것도 그렇다. 성장을 상대적으로 강조하지만 노무현도 성장주의자였다. 사실 뉴민주당 선언과 노무현의 후기 노선은 미국 민주당과 영국 신노동당의 쌍생아다. 그러나 이 노선에는 치명적 결함이 있다. 중도진보 세력이 이 노선으로 집권하고 경제성장에 기여한 나라는 영국과 미국이라는 금융패권 국가였다. 또 이 노선은 지난해 가을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본격화한 세계 금융위기 이후 운명이 불투명하다. 영국 신노동당은 지지율이 급락하는 추세다.
 
‘불판을 갈자’거나 ‘뉴민주당 선언은 부도수표’ 등 은유와 비아냥은 멋지다. 그러나 먼저, 노무현이 오르기 위해 버둥거리다 떨어지고 만 그 ‘벽’을 진보 정치의 현실적 제약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을 넘을 자신이 없다면 노무현을 비판할 자격도 없다. 그 ‘벽’의 이름은 신자유주의 세계체제라는 엄혹한 대외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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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행정부·의회 권력분배해야” (한겨레, 김지은 기자, 2009-06-11 오후 09:08:33)
‘6월포럼’…‘한국민주주의 퇴행’ 잇단 제기
‘반대통령제’ ‘유럽식 비례대표제’ 등 제안

 
6월 항쟁 22돌을 맞은 10일 저녁 <한겨레> 후원 6월포럼 연속토론회에서는 흔들리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진단과 우려, 대응 모색을 둘러싸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발제자로 나선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서울 정동 레이첼카슨홀에서 열린 이날 토론회에서 “선거를 통해 평화적· 정상적인 정권교체가 이뤄진 상황에서 보수정권이 들어섰다고 민주주의가 과연 후퇴하겠느냐는 질문 앞에서 자성하고 있다”며 “6월 항쟁 22돌을 맞은 시점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다시 어려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지난 10년 한국정치의 가장 큰 변화를 “밑으로부터 참여의 급증에 따른 직접 민주주의의 확대”와 “아래로부터의 지방화인 ‘협치’(거버넌스)의 증대”로 꼽았다. 반면 한국 정치의 또다른 특성으로 ‘정당 민주주의, 대의제 민주주의의 더딘 발전’을 들었다. 박 교수는 “직접 민주주의를 수용하지 않고는 대의체제, 민주정부가 안정적이기 어렵다”며 대통령과 총리, 행정부와 의회가 권력을 적절히 분배하는 ‘반대통령제’를 대안의 하나로 제시했다. 박 교수는 ‘전자 민주주의의 확대’도 변화의 큰 축으로 꼽고, 대의 민주주의가 투명성과 공개성을 핵심으로 하는 전자 민주주의를 반영할 것을 제안했다.
 
박 교수는 신행정수도 문제처럼 ‘불법’이 존재하지 않는 ‘정치문제’를 사법의 영역으로 다루는 ‘정치의 사법화’ 현상은 민주주의를 위축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또 “시장성, 효율성이 민주성, 시민성의 가치를 압도하고 있고, 정치가 특정 기업 일부 최상층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며 사회 공공성의 파괴를 우려했다.
 
토론자로 나선 조현옥 이화여대 교수 역시 ‘민주주의의 퇴보’를 우려하며 한국 정치 발전을 위해 정당체계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당 발전이 시민 의식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지만, 너무 직접 민주주의를 강조하면 정당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할 수도 있다”며 “소수 정당이 제도권 안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유럽식 비례대표제를 전면적으로 도입하는 등 선거 제도를 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전자 민주주의의 중요한 의미 가운데 하나로 ‘엘리트와 대중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을 짚었다. 그는 또 한국 정치의 특성으로 ‘속물주의’를 꼽으며 “속물주의는 우리 사회가 모든 문제를 경제 우선주의로 보면서 도출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우리 사회가 80년대 이후 정치적·절차적 민주주의에 매달렸는데, 경제적 민주주의는 등한시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며 “내용적인 민주주의가 채워지지 않은 게 우리 사회를 속물주의로 이끄는 게 아닌가”라고 덧붙였다.
 
황인성 통일맞이 집행위원장은 “6월 항쟁과 한국 민주주의는 앞으로도 진전한다고 생각하며, 불가역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앞선 토론자들이 ‘정당정치 복원’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과 달리 현 상황에 대해 “시민단체의 책임이 더 크다”며 “시민단체들이 일상적 참여정치를 기본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해 집중적으로 정치행동을 할 수 있는 그룹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 정치에서 남북한 문제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북한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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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불붙는 ‘민주주의 논쟁’ (경향, 김진우기자, 2009-06-08 17:29:27)
ㆍ盧 전대통령 서거, 6·10항쟁 22돌 맞아 점화
 
‘민주주의’가 다시 말해지고 있다. 지난해 촛불시위에서 터져나왔던 민주주의 논쟁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다시 불거지고 있다. 최근 잇따른 시국선언에서도 현 정부 들어 ‘민주주의 원칙들’의 후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 때 마침 ‘역사비평’ ‘문화과학’ 등 계간지 여름호에선 민주주의 관련 특집들을 마련했다. 6·10 민주항쟁 22돌을 맞아 한국민주주의의 현실을 성찰하는 토론회도 잇달아 열리고 있다.
  
계간지 ‘역사비평’ 여름호도 현재 한국 사회가 급격한 민주주의 후퇴와 사회경제 정책의 혼돈을 목도하고 있다는 문제의식 아래 특집 ‘경제위기와 민주주의-대공황기 사회경제 정책의 함의와 한국의 미래’를 마련했다.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는 ‘한국의 경제위기, 민주주의와 시장만능주의’라는 글에서 비슷한 시기 경제위기에 직면해 각각 시장만능주의와 경제민주주의의 길을 택한 미국과 스웨덴의 사례를 제시하면서 “스웨덴의 경제위기 극복 및 경제와 민주주의 동반 발전으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고 밝혔다. 경제위기를 단시간 내에 극복하겠다는 조급주의를 버리고 구조개혁의 기회로 받아들인 점, 정부와 재계가 노동자를 대등한 동반자이자 경영의 협력자로 받아 들여 산업 평화와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꾀한 점 등이다. 이 교수는 “이명박 경제 정책의 본질은 서로 모순되는 관치경제·개발주의와 시장만능주의가 혼합된 것이므로 집권 5년은 관치경제·개발주의와 시장만능주의 사이를 우왕좌왕할까 걱정”이라고 덧붙였다.
 
‘나치의 일자리 만들기와 재무장’이라는 글을 발표한 이진모 한남대 교수(사학)는 “나치 독재정권에 의한 일시적 경제회복은 비극적인 ‘막다른 골목’ 세계대전으로의 길이었다”면서 “심각한 세계적 경제위기에 직면해 독재는 신속하고 효과적인 해결을 약속했지만 그들이 남긴 것은 단지 전쟁과 파멸이었다”고 말했다.
 
‘문화과학’ 여름호는 한 발 더 나아갔다. “최근 경찰폭력의 증가, 악법 입법, 극우세력 준동 등 다양하게 파시즘적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면서 전체 특집을 ‘파시즘’으로 잡았다. ‘역사적 파시즘과 파시즘 X’라는 글에서 편집위원회는 “역사적 파시즘의 특수한 배치를 가능하게 했던 여러 조건들과 요소들이 이명박 정권과 함께 다시금 현저하게 부상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 정권이 장담하는 것과 달리 한국경제가 금년 하반기에 U자형으로 전환하지 못하고 L자형 패턴을 취하고, 대다수 국민들이 탈정치화되어 먹고 사는 문제에만 매몰될 경우 이 두 조건을 우파가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파시즘 X’가 출현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밝혔다. “북한과의 긴장관계 강화는 파시즘 체제 구축을 위한 정세적 변수로 활용될 수 있다”고도 했다. 편집위원회는 “한국은 제3세계의 지역적 군사독재와는 달리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를 유지하면서도 경찰력에 의존하는 ‘정보파시즘’이 결합된 ‘신자유주의 파시즘’과 같은 양상을 취할 수 있다. 이런 변종 파시즘 체제는 과거와 같이 군사력을 굳이 동원할 필요 없이 법률적 정보 통제를 통해서 구축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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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한국민주주의의 현실을 논한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6. 4)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월민주항쟁기념 학술대토론회 개최
 
6월민주항쟁 22돌을 맞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는  6월민주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고 한국민주주의의 현황을 점검하는 학술대토론회를 오는 6월 9일(화) 오후 1시 30분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개최한다. “한국민주주의와 87년체제”라는 주제로 개최되는 이번 토론회에는 손호철(서강대), 박명림(연세대), 정일준(고려대), 이영훈(서울대), 이병천(강원대) 교수와 원희룡(한나라당), 김부겸(민주당) 의원 등 한국사회의 지식인으로, 정치현장에 있는 현직 국회의원으로 저마다의 다양한 시각을 펼치는 이른바 ‘영향력 있는 지식인’들이 모여 한국민주주의의 현황에 관한 견해와 전망을 펼칠 예정이다.
   
한국사회는 1987년 6월항쟁 이후 일련의 민주화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지만 그 당시 성립된 (대통령 5년 단임제를 골자로 하는) 9차 개정헌법의 헌정체제와 사회문화의 기조를 지금까지 큰 틀에서 유지하며 이것이 여러 가지 사회적 역학관계(dynamics)를 만들어온 것이 사실이다. 이른바 ‘87년 체제’ 이후의 한국사회는 여야간 정권교체, 시민사회 활성화, 남북 긴장완화와 같은 성공적인 민주주의 발전 요소도 있었던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화의 도전이나 새로운 정치질서를 갈망하는 시대정신에 맞게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한국 민주주의가 정체 또는 위기를 맞고 있다는 부정적인 평가 역시 존재한다.
 
정일준 교수는 “통치성을 통해본 한국현대사: 한국의 사회구성과 ‘87년체제’”라는 주제로 보다 색다른 관점의 체제론을 제시한다. 정교수는 87년체제에서 현 정부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뿐만이 아니라 53년 체제, 61년체제의 한국사회가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전지구적 관점에서 볼 때 자유주의적 시장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정교수는, 사회과학에서 흔히 말하는 국가의 개입 정도나 시장의 형성 상태가 아니라, 사회적인 것을 해체하고 있는 통치성의 저발전을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척도로 봐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손호철 교수는 ‘체제논쟁’ 자체에 충실한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손교수는 48년체제(극우반공체제)로부터 61년체제(개발독재체제), 이의 정치체제(관료적 권위주의내지 종속적 파시즘)를 해체한 87년체제를 거쳐, 이를 정치경제체제(발전국가)를 해체해 신자유주의로 대체한 97년체제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다. 특히 97년체제를 한국사회를 규정하는 사회체제로서 그 의미를 크게 받아들이고 있다. 87년체제는 헌정체제 등 일부 부분체제로서의 의미만 남았을 뿐 이미 97년체제로 대체되었고 08년체제 역시 제한적 정치적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를 갖고 있다는 면에서 97년체제의 틀 내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그는 앞으로 ‘너무 큰 체제론’이 아니라 정당체제, 사회운동체제, 분단체제 등 부분체계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가 보충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박명림 교수는 민주화 20년의 발자취에 대해 성과와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문민화, 지방화, 엄정한 선거와 그 결과의 준수, 시민사회 발전, 남북화해 진전, 인권과 양성평등의 증진, 동아시아 협력 주도 등 적지 않은 성과를 가져왔지만 많은 문제를 낳아오기도 했다. 박교수에 의하면 (‘전부 아니면 전무’ 식의 대통령제 권력구조, 지역주의의 과잉대표, 노동의 과소대표, 사법통치사회, 반복되는 개헌논의 등으로 표출되는) 제도적 불안정성, (민주화될수록 기업, 언론, 교육, 종교 등의 사회경제 권력의 자율성이 커짐에 따라 양극화가 심화되는) 사회경제적 역진(逆進) 현상, (자유․시민․개혁 세력/담론과 노동․민중․급진 세력/담론 사이의 연합이 해체되는 대신) 경제유일주의․시장만능주의, 그로 인한 속물화 등이 부각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박교수는 “사회정책(social policy)과 시장경제(market economy)를 결합”한 “사회국가”, 공적 시민을 양성하기 위한 시민교육, 헌정구조의  개편(4년 중임의 반대통령제(semi-presidentialism), 감찰관련 기구의 독립 및 중립화를 통한 감독부(監督府)의 신설 등),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를 결합하는 반(半)직접민주주의의 실현, 개혁세력의 최대연합을 민주화 의제로 설정하고 실천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 발표 요약문
< 통치성을 통해본 한국현대사 : 한국의 사회구성과 ‘87년 체제’ >
- 정일준(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이 글에서는 통치(governing)라는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개괄하면서, ‘87년 체제’ 담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자 한다.
 
우리는 ‘통치성(governmentality)’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의 현재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사회의 국가화 또는 시장화가 아니다. 바로 국가의 ‘통치화’(governmentalization)가 문제이다. 통치성의 문제설정과 통치테크닉은 정치투쟁과 경쟁의 유일한 쟁점이자, 유일한 실제 공간이다. 국가의 통치화는 동시에 국가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것이며, 국가가 오늘날과 같이 된 것은 동시에 국가의 안팎을 규정하는 바로 이 통치성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국가의 능력 안에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등등을 끊임없이 정의하고 재정의 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통치기예이기 때문이다.
  
국제관계의 역사사회학이라는 시각에서 한국의 국가와 시장의 역사적 형성과 변형을 지구정치경제체제와의 관계 속에서 추적함으로써 한국의 사회구성을 입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나아가 ‘한국사회’의 역사로서의 현재에 작용하는 안팎과 위아래의 힘들을 자유주의적 민주화,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효과로 파악하면서 ‘87년 체제’ 담론을 ‘53년 체제’, ‘61년 체제’ 또는 ‘97년 체제’와 상호관계 속에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자유주의 통치성이 뿌리내리지 못한 가운데 신자유주의 통치성으로 과속질주함으로써 현 정부는 권위주의적인 신자유주의 통치성(authoritarian neoliberal governmentality)이라는 특징을 보인다. 국가의 과잉개입이나 과소개입도, 시장의 전횡이나 미비도 아니다. 바로 사회적인 것(the social)을 해체하는 통치성의 저발전이 문제이다! 비판은 통치에 선행하지 않는다.
 
< ‘한국체제’ 논쟁을 다시 생각한다.-87년 체제, 97년 체제, 08년 체제론을 중심으로> - 손호철(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87년체제론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체제논쟁은 그동안의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정치경제체계와 정치체계의 결합체라는 ‘사회체계(social system)’와  헌정체제, 사회운동체제, 노동체제, 정당체제, 젠더체제, 분단체제 등 다양한 ‘부분체제들(partial regimes)’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체계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이같은 문제의식에서 바라볼 때 87년체제는 헌정체제 등 일부 부분체제로서의 의미를 아직도 갖고 있지만 한국사회를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사회체계(열린 총체성)로서는 그 의미가 소멸됐고 현재는 97년 체제라고 규정하는 것이 맞다. 한국의 사회체계는 48년체제(극우반공체제)로부터 개발독재체제인 61년체제, 이의 정치체제(관료적 권위주의내지 종속적 파시즘)를 해체한 87년 체제를 거쳐 정치경제체제(발전국가)를 해체해 신자유주의로 대체한 97년체제에 이르렀다.
  
그러나 동시에 정치경제체제의 단절이 없었다는 이유로 61년 체제와 97년 체제만이 존재하며 87년체제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는 일부의 견해는 경제환원론으로 잘못된 것이다. 나아가 일부에서는 08년체제의 등장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역시 잘못이다. 이명박정부들어 정치적 재권위주의화와 경제체제의 우경화(‘우파 신자유주의’)가 나타나고 있지만 이것이 97년체제의 특징인 제한적 정치적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벗어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08년체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다. 다만 97년체제의 하위체제로서 08년체제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사회체계 분석과는 별개로 다양한 수준에서의 부분체제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바 이글에서는 그 예로 헌정체제, 노동체제, 분단체제, 정당체제, 정치균열체제, 민주화체제, 사회운동체제 등을 예시적으로 살펴보았다. 예를 들어 분단체제의 경우 적대적 분단을 특징으로 하는 48년체제에서 평화공존적 분단을 특징으로 하는 2000년체제를 거쳐 다시 적대적 분단으로 회귀하는 08년체제로 나가고 있다.
  
정당체제는 좌우 이념정당이 난립했던 45년체제에서 보수정당들만 남은 53년체제(보수정당독점체제), 이 보수정당들이 지역정당으로 변모한 87년체제(보수지역정당독점체제)를 거쳐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이 이루어진 현재의 04년체제(보수지역정당우위체제)에 이르고 있다. 사회운동도 좌우운동이 난립한 45년체제, 분단후 자유주의적 반독재민주화운동만 남은 53년체제, 5.18이후 진보운동이 살아난 80년체제, 민주화이후 자유주의적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이 분화되는 90년체제, 뉴라아트같은 냉전적 시민운동이 등장해 민중운동, 시민운동, 뉴라이트의 3분구도가 이루어지는 2000년체제, 효순, 미선 촛불시위이후 조직화되지 않은 네티즌들이 주도하는 02년체제로 변화해 왔다. 한국의 체제논쟁은 앞으로 이 같은 다양한 부분체제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뚜렷이 한 뒤 이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를 많이 축적해 나가야 한다.   
  
< 한국민주주의; 온 길, 선 곳, 갈 길 > - 박명림(연세대 지역학 협동과정 교수. 정치학)
 
처음으로 경험하는 건국 이래 최초의 진보정부에서 보수정부로의 평화적 정권교체는 한국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해 수많은 이론적 현실적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한국 민주주의 후퇴의 정도가 훨씬 심각하고, 속도가 빠르며, 범위가 전사회적이라는 점이다. 과연 민주화 20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고, 무엇이 문제였는가? 현실구조와 정치에서 항상 거시는 미시로 발현되고, 미시는 거시로 응축된다.
  
한국민주화의 긍정적 성취로서는 탈군사화와 군부의 정치개입 전면금지 및 문민화 고착, 주기적 선거 및 결과승복 전통 확립, 사법부 독립, 인권증진, 정치사찰의 중단, 돈 안드는 선거 실시,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 최소한의 공공성·형평 정책의 추구, 시민사회와 참여의 폭발적 성장, 양성 평등의 진전 및 지방자치·지방분권 증진, 내적 민주화의 남북관계로의 파급효과로 인한 대북화해협력 정책의 시도, 동아시아 협력 이니셔티브 주도 등의 성과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성취는 쉽게 폄하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발전이 지금 거의 모든 영역에서 역전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성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민주화는 많은 문제를 안은 채 진행되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한국 민주화의 제도적 불완전성, 불안정성이다. 무엇보다도 정치의 탈정당화, 지역화, 대통령-여당 갈등의 반복, 사법화·형사화, 헌법적 문제의 반복적 출현이 지속되었다. 87년 이후 한국정치의 대의기능은 정당을 넘어 시민단체, 사법부, 인터넷, 언론으로 5분(五分)되었다. 정당의 역할은 그만큼 축소되었다. 게다가 ‘모든 민주정부들’이 대통령탈당으로 인해 세계 정당민주주의 국가 역사상 유례없이 반드시 비정당·무정당 통치기간을 가질 정도로 정당체제는 불완전·불안정하였다. 모든 여당은 갑자기 대통령당화하였다가 급격하게 탈대통령화하였다. 동시에 대통령의 권력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위치로 급변하길 반복한다. 대통령(현재권력)과 여당(미래권력)의 갈등 역시 필연적이었다. 노태우-김영삼, 김영삼-이회창 갈등 이래 현재의 이명박-박근혜 갈등에 이르기까지 현행헌정구조에서 현재권력과 미래권력의 갈등은 필연적이다. 선거균열과 정당체제는 지역주의·지역정당체제와 같이하며, 이는 일반적 사례와는 달리 대통령제와 다당제가 만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역정당체제와 노동의 배제·과소대표가 병행된 것은 주목할만하다. 보수정부는 말할 필요도 없이 김대중·노무현 집권조차 상당 부분 지역연합에 기초하였음을 고려할 때 이 요소는 헌정구조·정당체제와 관련해 심각히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상 삶과 정치의 사법화와 형사화(criminalization) 역시 중요한 현상이었다. 즉 민주화 이후 법원-헌재의, 헌법적 법률적 권한을 넘는, ‘정치적’ 비중과 역할의 현저한 증대이다. 대통령 탄핵소추, 행정수도, 병역의무, 호주제, 환경문제(새만금), 삼성승계를 포함한 중요한 정치·사회·경제·인권·생활 의제들이 법원의 독립을 넘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헌법재판소를 포함한 법원에 의해 결정되는 “법원에게 물어보는 사회”, “헌재에게 물어보는 사회”, 즉 ‘사법통치사회’(juristocracy)가 되었다. 검찰의 기소 및 법원의 재판이 국민대표의 당락을 좌우하는 형사화 역시 점점 증대되고 있다. 의회와 법원의 상호독립과 균형을 범위를 넘는, 비선출직인 법원의 과도한 사회개입과 결정권한은 대의민주주의의 위협요소가 아닐 수 없다.
   
헌법의제와 개헌문제 역시 빈발하였다. 중간평가 약속(노태우), 3당합당과 권력구조 개헌 합의(김영삼), DJP 연합과 개헌 약속(김대중), 개헌제안(노무현), 집권시 개헌 약속(한나라당)....을 포함한 모든 정부들이 개헌을 약속하거나 제안할 만큼 87년 헌정체제는 불안정하였다. 지금도 18대의회는 개헌문제를 계속 논의하고 있다. 어떤 형태로든 이 문제를 극복하거나 정리하지 않으면 매 정부마다 개헌을 추진하거나 반대하는 상시개헌제안과 실패 상태가 반복될 것이다.
 
둘째 시장만능주의로 인한 사회경제적 이념적 정서적 양극화였다. 이제 사회경제적으로 한국은 시장유일주의로 인해 정부의 시장화·사사화·탈공공화로 인해 시장의 경제적 불평등이 그대로 사회적 시민적 공공적 교육적 불평등으로 고착되는, 마치 부자 한국, 서민 한국의 두 개의 한국인 것처럼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통계를 따르면 양극화를 넘어, 민주주의의 기저조건으로서의 사회통합(social integration)을 위협하는 거의 사회해체 수준에 돌입하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게다가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의 정서적 이념적 거리 역시 너무나 멀어져 진보 한국과 보수 한국의 두 한국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통합은 고사하고 두 이념은 지금 두 조직, 두 노선, 두 시위, 두 지향을 갖고 모든 이슈에서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셋째는 한국민주주의의 사회적 경제적 역진현상이었다. 즉 정치와 사회경제의 심각한 부조응-탈구(dislocation)현상이다. 기실 이점은 한국민주화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은 정부·정치와 시민사회만이 민주화되어 민주정부를 갖는 일종의 기형적 돌출적 민주화였다고 할 수 있다. 민주정부만이 시민사회의 지지로 등장하고 지탱한, 마치 섬처럼 포위된 민주화였던 것이다. 게다가 민주화가 시장화로 치달으면서 모든 나라에서 국가의 민주주의를 밑받침하는 경제와 사회, 특히 기업, 언론, 교육, 종교의 핵심 4 부분은 민주화가 진전될수록 증대되는 자율성에 바탕해 더욱 양극화·과두화(사실상 半獨占化)·보수화하였다. 우리는 자율화에 따른 거대한 힘의 역전과 포위, 이점을 포착하지 못했던 것이다. 민주화로 인한 자율화, 즉 민주정부로부터 자율성을 부여받을수록 더욱 과두화하며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역설의 병행이었던 것이다. 즉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사회적 역민주화가 함께 진행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미 보수적 과두적인 경제사회 영역에다가 정부마저 투표를 통해 다시 보수정부로 바뀌자 모든 영역에서 일거에 역전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넷째는 담론적 지적 문화적 헤게모니 현상 및 이의 전사회화-정치화였다. 일종의 좌우 모두의 단일표제주의로서의 경제유일주의 현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점은 특히 김대중, 노무현 정부 하에서 두드러졌다. 특별히 자유-노동, 시민-민중, 개혁-급진 담론의 분열 - 양측 모두의 한계로 인한 - 과 후자의 전자에 대한 경제정책-분배정책 실패에 대한 거센 공격은 공교롭게도 보수언론을 통해 기업과 보수정당의 담론 장악 - ‘잃어버린 10년’ ‘경제가 문제다’ ‘CEO 대통령이 필요하다 ’- 에 크게 기여하였다. 자유-노동연합, 시민-민중연합, 자유-사민연합을 통해 보수파를 견제하고 사회정책-복지정책을 강화할 수 있었던 역사적 경로에 비해 이 분열은 경제사회의 과두화와 성장연합-발전연합의 재구축에 기여하는 역설적 역할을 수행하고 말았다. 급진파, 노동계층의 투쟁 및 자유-노동연합이 보수주의를 견제하고 자유주의-사민주의-복지연합을 갔던 경로들과 반대를 갔던 것이다. 보다 거시적 비교 연구가 필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끝으로 경제유일주의, 시장만능주의로 인한 속물화 역시 지적되어야한다. 인종, 지역, 종교적 요인을 빼고 한국에서 특정 상류층 구역의 선거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몰표현상을 보이고 있다. 시장화의 진전과 함께 삶의 거의 모든 가치가 경제적 물질적 부의 크기에 의해 좌우되면서 인간적 사회적 삶의 다른 중요한 가치들이 급격하게 쇠락, 축소되고 있다. 심지어 “부동산”, “복부인”, “투기”와 같은 부정적 용어들조차 시장화의 흐름 속에 성공의 징표로 받아들여지는 가치전도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들로 인한 재빠른 부의 창출이 과거와 달리 이제는 아무런 도덕적 부끄러움과 장애를 느끼지 않는 가운데 삶의 빠른 외면적 성공을 자랑하는 전국가적 전사회적 전세대적 현상으로 확산되고 있다. 가장 상징적인 언표는 아마 “초등학교 때 1억 만들기”와 같은 가공할 시장주의=물질유일주의(유물주의)=속물주의일 것이다. 민주시민은 고사하고 여러 기본자질을 갖춘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재화창출의 주체를 만들려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수단의 목적화로의 완전한 전도인 것이다. 재화의 크기가 삶의 성공 여부를 가르는 거의 유일한 기준이다보니, 절차와 방법에 관계없이 가장 속물적인 삶조차 가장 성공적인 삶으로 받아들여진다. 더욱 큰 문제는 공적 시민과 사적 삶, 공적 요구와 사적 욕망의 (성공과 실패의) 기준과 무게의 완전한 소멸이다.
 
대안은 비교적 분명해보인다. 발표자는 이를 다섯 가지로 요약해보고자 한다.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의 최소 존재 이유의 복원, 즉 형평성, 공공성의 회복이랄 수 있다. 그것은 시장의 극심한 양극화 과두화와 불평등을 교정하기 위한 정부의 형평성·공공성 회복, 분배역할을 말한다. 자본주의에서 민주주의와 민주정부의 존재이유는 시장의 창의력을 보장하는 동시에 불평등을 교정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시장과 정치는 존재의 이유가 같지 않으며 서로 보완적 역할을 통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사회적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왔음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발표자는 삶의 질과 복지를 추구한, 한국 정도의 경제성장 이후 거의 모든 선진 민주국가들이 갔던 “사회정책(social policy)과 시장경제(market economy)의 결합”, 또는 “사회국가”를 바람직하면서도 실현가능한 대안으로 제시해왔다. 현재 OECD 평균 1/6-1/7로서 최악에 불과한 정부의 공적 지출, 재분배역할을 최소한 OECD 평균수준이라도 수행해야하는 것이다. 사회정책과 분배역할에 관한한 한국은 정부 역할이 없거나 그대로 시장에 맡겨놓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특히 수많은 사례에 대한 거시적 역사적 비교연구들이 보여주었듯 사회권력자원의 분산과 형평 없이 극심한 과두사회나 양극화 상황에서 지탱가능하고 발전하는 민주체제는 존재하기 어렵다. 민주정부는 전적으로 사회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둘 중의 하나, 즉 과두체제로 치닫거나 또는 민중저항을 통해 붕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의 공공성 형평성의 회복은 지금 한국민주주의는 물론 한국사회와 체제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정말 화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민중혁명과 급진주의를 넘었던 서구부르주아처럼, 한국 보수정부와 세력의 보수적 지혜가 절실한 부분이다.
 
둘째는 시민덕성의 제고를 통한 사회적 공준, 공동선, 공동가치 기준의 확립을 위한 노력이다. 좌우, 진보와 보수를 넘어 합의가능한 공준을 창출하는 문제는 민주주의를 정의하고 추구하는 문제보다 더욱 중요하다. 그리고 기실 인간과 사회문제의 많은 것들은 두 이념의 극단적 편향으로는 외려 풀리지 않으며, 거꾸로 그 중간 어느 지점에서인가의 중용, 합의를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것이 훨씬 더 많다.
  
물론 사회문제와 인간문제, 개별성과 전체성은 분리될 수 없다. 시민 개개인 삶의 발전을 위한 사회전체 문제의 해결은 필수적이며, 전체 사회문제의 바람직한 개선의 목표 역시 개별적 삶을 행복하게 하고 평안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발전을 위한 공적 시민의 양성과 시민덕성의 제고·교육은 그 자체 사회적 가치이자 개인적 행동규범을 포괄한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좋은 시민없이 좋은 민주주의, 좋은 사회는 어렵다. 좋은 민주주의는 곧 좋은 시민을 양성하는 체제이기도 하다.
  
셋째는 헌정구조의 근본적 개혁이다. 이제 현행 단임 대통령제는 더 이상 지속되어서도, 지속될 수도 없다. 한국민주주의는 고사하고 한국의 체제 자체가 더 이상 발전하기 어려운 것이 현행 5년단임제이기 때문이다. 발표자는 행정부와 의회, 대통령과 국무총리(또는 부통령)가 권력을 분점하는 동시에 책임성을 제고하며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는 4년 중임의 반대통령제(semi-presidentialism)를 제안한다. 또 국회의원 보수와 특권을 축소한 뒤 국회의원 숫자를 선진국 수준으로 대폭 늘려 대표성을 강화한다.(현재는 선진국의 1/2 수준) 그때 비례대표는 지역대표의 1/2 수준으로 대폭 증가시킨다.
  
또 대통령 선거와 동시에 지역대표 의원 선거를 실시하며, 대통령 임기 중간에 비례대표 의원 선거를 실시하여 임기 중간에 중간평가를 결행, 직접 참여와 저항 이외에는 임기 내내 평가의 기회가 없는 현재의 선거주기를 혁신한다. 즉 책임성을 획기적으로 제고한다. 권력구조는 4권분립체제를 지향한다. 검찰·감사원·국세청·공정거래·금융감독기구 등 감찰관련 기구의 독립 및 중립화를 통한 감독부(監督府)의 신설을 통한 입법-사법-행정-감독의 4권분립을 제안한다. 이제 3권분립은 더 이상 맞지 않는다.
   
넷째는 민주주의 구성원리의 수정이다. 87년 이후가 보여주듯 인민주권과 국민주권, 직접민주주의와 간접민주주의, 참여와 대의의 결합 없이는 후자, 즉 대의민주주의조차 안정될 수 없다는 점이다. 국민주권을 넘어 인민주권과 참여를 제도화하는 민주정부 구성 노력이 절실하다. 즉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를 결합하는 반(半)직접민주주의의 실현이다. 특히 주요 사안에 대한 시민직접결정의 원칙을 도입하여 확장할 필요가 있다.
  
정당과 대표들(의회)의 대표행위에 대한 시민통제 역시 강화되어야한다. 이제 시민참여, 시민발의, 시민청원, 시민소환, 시민입법, 시민의회(공회)제도에 대한 다양한 모색을 통해 참여와 대의의 결합 없이는 6월항쟁, 촛불, 탄핵반대, 추모 열기 등을 수용하여 직접 민주주의를 확장하고 시민의사를 제도적으로 수렴·반영하지 않고는 대의정치와 정당체제를 안정시킬 방도가 존재하질 않는다.
  
다섯째는 정치연합을 향한 진보개혁진영의 지혜, 중용, 공존, 인내를 강조하고 싶다. 야당-재야-노동-시민 사이의 최대민주연합을 통해 반군부독재 민주화를 이루었듯 이제 다시 최대진보개혁연합, 또는 최대복지연합, 자유-사회-개혁연대를 결성하여 2단계 민주화를 달성해야할 것이다. 강조할 필요도 없이 한국에서 자유-노동, 시민-민중 세력, 온건 개혁과 진보 개혁 세력과 정당 사이의 기원, 네트워크, 노선, 지향은 (기존 민주개혁, 또는 급진담론의 주장과는 달리, 그리고 금번 정권교체로 드러났듯) 그들과 보수세력 사이의 차이보다 훨씬 작다. 아니 크더라도 보수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줄 정도로 강조되거나 최대강령주의·근본주의를 고수해선 안된다. 진보에서 보수로의 정권교체 효과를 목도한 이제 이 차이는 과거처럼 반복되거나 과장되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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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민주주의’ 후퇴인가 ‘97년 신자유주의’ 심화인가 (한겨레, 이세영 기자, 2009-06-11 오후 02:31:26)
한국사회 체제논쟁 재점화
‘반신자유주의’-‘반이명박’ 정치논쟁으로 확대
손호철 “IMF뒤 양극화·비정규직 등 근본 변화”
  
‘87년 체제냐, 97년 체제냐.’ 진보 사회과학계에 다시 한번 ‘체제논쟁’이 점화될 조짐이다. 논쟁의 중심에는 1990년대 후반 노사관계 연구자들에 의해 처음 사용된 뒤, 2000년대 중반 계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특성을 총괄하는 용어로 공론화된 ‘87년 체제’가 자리잡고 있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9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한국 민주주의와 87년 체제’라는 주제로 마련한 토론회에서 “87년 체제론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체제논쟁은 더이상 ‘주먹구구식’ 논쟁이 아닌, 경제체제와 정치체제의 결합체인 ‘사회체제’와 헌정·노동·정당·젠더 체제 등 다양한 ‘부분 체제들’을 구분하는 체계적 방식으로 진행돼야 한다”며 논쟁의 방향 전환을 촉구했다.
 
지금의 한국을 규정하는 총체적 사회질서가 1987년 불완전한 민주화를 통해 형성됐다고 보는 ‘87년체제론’에 대해선 6월항쟁 20년을 전후한 2007년 무렵부터 다양한 논의들이 쏟아졌다. “87년체제는 없다”는 전면부정론이 나왔는가 하면, “87년체제는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종결됐다”는 시효소멸론도 주목을 받았다.
 
대선과 이명박 정부 출범을 거치며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논쟁은 촛불시위와 미디어법 파동, 용산 참사 등을 계기로 꿈틀대기 시작했다. 공고화 단계에 진입했다고 여겨지던 정치적 민주주의가 퇴행 양상을 보이면서 이른바 ‘민주화 체제’로서 87년체제가 갖는 과도기적 불안정성이 거듭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창비그룹이 최근 87년체제를 둘러싼 학계의 논의를 <87년체제론>이란 책으로 묶어낸 것이 발화점 구실을 했다. 책의 서문에서 김종엽 한신대 교수는 97년체제의 우위를 주장하는 손 교수 등의 주장을 “우파의 ‘선진화론’과 동일한 프레임에서 87년체제를 평면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는데, 이번에 손 교수가 작심한 듯 창비의 87년체제론을 반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손 교수의 비판은 창비그룹이 1987년의 질적 전환에만 집착한 나머지 그 이후의 전환, 곧 1997년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 체제의 전면화가 갖는 의미를 부당하게 축소하고 있다는 데 맞춰져 있다. 비정규직의 주류화와 청년 실업, 사회 양극화 등 “97년 이후 나타난 근본적 변화를 목격하면서도 한국의 사회체제가 여전히 87년체제라고 주장하는 것은 현실에 눈먼 ‘색맹 사회과학’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손 교수가 볼 때, 87년체제는 헌정체제 같은 부분 체제의 의미는 있지만, 사회를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사회체제의 의미는 소멸됐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의 변화에 주목하는 ‘08년체제론’에 대해서도 손 교수는 “권위주의 회귀와 경제의 우경화가 나타나고 있지만, 97년체제의 특징인 제한적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벗어난 것이 아니란 점에서 08년체제를 말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일축한다.
 
이번 논쟁의 무게가 간단치 않은 것은 체제 성격을 둘러싼 이론적 경합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반신자유주의 연합’(97년체제론) 대 ‘반이명박 연합’(87년체제론) 같은 정치전략과 연동된다는 데 있다. 1980~90년대 엔엘·피디간 사회 성격 논쟁이 ‘민주대연합론 대 독자세력화론’이라는 정치 논쟁과 짝을 이뤄 진행된 것과 같은 이치다.
 
손 교수는 헌정·노동·민주주의·분단·젠더 체제 등 다양한 부분 체제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손 교수의 논의에서 이들 체제는 사회체제의 ‘하위체제’ 성격이 짙다는 점에서 그 안에 담긴 정치적 의미는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97년체제가 요청하는 반신자유주의 연합을 기축으로 다양한 ‘하위연합’을 접합시켜야 한다는, 일종의 반헤게모니 전략이다. 손 교수의 97년체제론을 ‘신자유주의 환원론’으로 비판해온 반대 진영의 반응이 기다려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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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X의 탄생 (한겨레21 2009.06.12 제764호, 안수찬 기자)
[표지이야기]유사 파시즘, 신자유주의 공안국가, 파시즘 프렌들리…
규정은 아직 이르지만 ‘파시즘 경향’은 급증해
 
청와대 한 수석실 관계자는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 열기가 좌파 방송 때문이므로 절대로 흔들리면 안 된다는 게 내부 분위기”라고 최근 상황을 전했다. “미디어법 통과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국정 방향에도 변함이 없다”고 덧붙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금 시민들의 추모 열기, 교수들의 시국선언, 정부에 비판적인 여론조사 결과 등을 모두 배척하고 있다. ‘독주’다. 이를 ‘독재’라 칭하는 이도 늘고 있다. 비판 여론은 안 듣는다. 집회·시위는 금지한다. 그들은 현재 조작당하고 있을 뿐이므로, 조만간 대중을 조작하는 자들을 처벌하면 된다…. 청와대의 이런 인식에서 ‘파시즘’을 읽어내는 목소리도 마침내 터져나오고 있다.
 
“두 조건과 하나의 전략이 결합할 경우 이명박 정권은 새로운 ‘파시즘 엑스(X)’ 체제로 전환할 가능성이 있다.”(계간 <문화과학> 2009년 여름호) <문화과학> 편집위원회 공동 명의의 글이 최근호에 실렸다. 이명박 정권이 ‘파시즘 엑스’로 돌변할 가능성을 경고했다. 학자들이 집단적으로 ‘파시즘’의 개념을 빌려 현 정부를 공식 호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학계에선 파시즘을 함부로 규정하는 것을 꺼린다. 우파 세력을 모욕주려고 파시즘이라는 용어를 쉽게 사용하면, 진짜 파시즘의 등장을 흘려버리는 ‘양치기 소년’이 될 수 있다.
 
‘파시즘 엑스’는 조금 다르다. 일단 유보적인 개념이다. 이명박 정권이 곧 파시스트 정권인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그렇게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그 형태가 과거 독일·이탈리아의 파시즘과는 조금 다를 것이라는 점에서 미지의 것을 경고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문화과학>은 현 정부가 ‘파시즘 엑스’로 변화할 “여러 조건과 요소들이 현저하게 부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우선 한국 경제가 올 하반기에 ‘U’자형으로 전환하지 못하고 ‘L’자형으로 침체할 경우, 또 대다수 국민들이 탈정치화돼 먹고사는 문제에만 급급할 경우, 그리고 우파가 억압·통제를 통해 이런 상황을 돌파할 경우, “세계 최초로 신자유주의 해체기의 ‘파시즘 엑스’가 한국에서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과학>의 설명은 이렇다. △장기 침체로 인해 시장에서 퇴출되고 있는 600만 명 이상의 자영업자 △100만 명에 이르는 실업자 및 850만 명에 이르는 비정규직 △잠재적 실업자이면서도 소비자본주의에 익숙한 20대 등이 우익 사회운동의 기반이 될 수 있다. 여기에 이명박 정부 지지율 30%를 떠받치는 견고한 보수층(우익 개신교·50대 이상 노년층·영남)이 중핵이 되고, 뉴라이트 단체들이 불쏘시개 역할을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난 3월 국민행동본부 산하 ‘애국기동대’의 출범은 작지만 눈여겨볼 대목이다. 해병대·특전사 출신 90여명으로 이뤄진 애국기동대는 출범 선언에서 “반헌법적 좌익 폭도들과 싸운다” “좌익들의 패륜적 테러에 대해 정당방위적 자위권을 행사한다” “연방제 통일을 주장하는 종북 반역 세력을 공동체의 적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제거하는 일에 목숨을 바친다” 등을 ‘맹세’했다. 선언문만 보자면, 극우 돌격대를 연상시킨다. 출범식 직후에는 무술 시범도 보였다.
 
파시즘은 강력한 국가 통제를 특징으로 한다. <문화과학>은 ‘MB 악법’에 주목한다. 국정원법 개정(국내정보 수집권한 확대·국가비밀 범위 확대), 집회·시위법 개정(마스크 착용 금지), 신문·방송법 개정(신방 겸영 허용·대기업 지상파 지분 확대), 통신비밀보호법 개정(감청 권한 강화) 등은 개인의 자유와 밀접히 관련돼 있다. 관련법 개정이 이뤄지면 표현의 자유의 모든 영역을 ‘합법적으로’ 틀어막을 수 있다. 여기에 최근 북핵 위기로 인한 남북 대결 국면은 ‘외부의 적’을 동원하는 공포정치의 바탕이 될 수 있다. <문화과학> 발행인인 강내희 중앙대 교수(영문학)는 “히틀러의 나치즘은 정권을 먼저 장악하고 나중에 우익 대중운동을 일으켰다”며 “이명박 정부의 집권 기간에도 ‘국면’에 대한 판단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 엑스’가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자유주의와 좌파에 대한 적대감, 적으로 규정한 대상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서슴지 않겠다는 의지를 매개로 탄생한 합성물이 파시즘 정권이다.”(로버트 팩스턴, <파시즘>)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현 정권이 정말 파시스트 정권이라면 모든 세력이 연합해 이를 막아야 하는데, 그렇게 강하게 규정하면 좌파 세력 내부의 건강한 ‘차이’가 사라지고 일종의 ‘반파시스트 전선’만 득세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다만 “민주주의에 두려움을 느끼면서 대중을 동원해 반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권력이 판단한다면, 이를 ‘유사 파시즘’이라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
 
고세훈 고려대 교수(공공행정학)도 “권위주의를 오랫동안 경험한 한국 시민들의 저항을 염두에 둔다면, 노골적인 파시즘이 한국에서 등장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억압은 “전체주의건 권위주의건 파시즘이건 (민주주의의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로서 심각한 상황”이라고 본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는 파시즘 대신 ‘신자유주의 공안국가’라는 말을 쓴다. 이명박 정부 들어 언론·집회·사상·결사의 자유가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고, 검찰·경찰·감사원 등 권력기관도 과거처럼 ‘정권의 하수인’이 됐다. 그는 “파시즘이라고 규정짓는 일보다는 이미 진행되고 있는 ‘파쇼화’를 우려하고 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경제학자 로버트 레커먼은 ‘프렌들리 파시스트’(friendly fascist)라는 말을 썼다.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 정권이 ‘선한 얼굴로’ 정치적 반동을 재촉했다는 것이다. ‘파시즘 프렌들리’의 맥을 잇는 아들 부시 대통령 시절, 미국의 사회비평가 나오미 울프는 <미국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파시즘 이행기’라는 표현을 썼다. 부시 정권이 민주주의에서 파시즘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마련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었다. 그는 “파시스트 체제로 옮아가는 것은 여러 행위들이 합쳐져 민주주의를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는 형태를 취한다. (그 결과) 어느 순간 민주주의가 급작스럽게 퇴보한다”고 봤다. ‘파시즘 이행기’를 판별할 몇 가지 잣대를 제시했는데, 이명박 정부 시기의 한국 시민들에게도 유용할 것이다.
 
△집회·시위에 나서거나 비판적 발언을 하면 신체적 위협을 가한다. 시민들의 무차별 체포와 투옥을 꺼리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민간의 ‘준군사조직’이 등장한다. △일반 시민을 사찰한다. 도청을 합법화하고 개인의 전과와 정치 성향, 사생활 등을 기록한 개인 자료를 활용한다. △교수·공무원·언론인·문화예술인 등 비판적 인사들을 전략적으로 겨냥해 직장에서 쫓아내거나 경력을 파괴한다. △시민단체에 첩자를 심어 조직을 파괴하거나 국세청의 세무조사 등으로 괴롭힌다. △비판적 검사를 해임하는 등 법의 지배 방식을 뒤엎는다. 인격모독을 포함한 고문, 근거 없는 고발, 저지르지 않은 범죄에 대한 마구잡이 기소 등의 사법독재가 등장한다. △정치적 압박으로 자유언론을 탄압한다. 언론인을 모독하거나 수치심을 주고, 해당 언론의 책임자들이 언론인을 해고하게 만든다. △시민들의 사상·행위·표현을 범죄로 만들기 위해 불법행위의 범주를 새롭게 만들어낸다. 새로 법을 만들거나 개정해 ‘법의 이름으로’ 처벌한다. △일련의 과정에서 안팎의 위협을 부각시킨다.
 
나오미 울프는 파시즘이 소리 없이 진행된다고 말한다. 그가 제시한 ‘파시즘 이행기’의 잣대는 어쩐지 낯익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22년이 지난 2009년 6월, 한국의 시민들은 파국의 징후를 날마다 발견한다. 경찰·검찰·언론 등에서 일어나는 그 징후를 돋보기로 들여다볼 때다. 안 그러면 ‘파시즘 엑스’가 정말 온다.
 
파시즘이란 ‘경고 표지’를 세심히 읽어라
 
2009년은 파시즘 탄생 90주년이다. 파시즘은 1919년 3월23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무솔리니가 퇴역군인, 언론인, 지식인 등을 모아 “민족주의에 반하는 사회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자신들을 ‘파시 디 콤바티멘토’, 즉 전우단이라 불렀다. 이때부터 파쇼 또는 파시즘은 내부의 적을 만들어 악마화하고 이에 가차 없는 폭력을 휘둘러 축출하는 정치·사회 운동을 일컫게 됐다. 파시스트 정권은 이런 일을 국가와 법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경우다. 그 어원은 ‘도끼’다. 고대 로마의 집정관이 시가 행진 때 나뭇가지에 싸인 도끼를 들었다. 그걸 ‘파스케스’(fasces)라 불렀다. 국가의 권위와 결속을 상징했다.
 
학자들은 파시즘을 독재, 권위주의, 전체주의 등과 구분해 쓴다. 학문적 의미에서 파시즘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만 발생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반동’ 또는 민주주의의 ‘실패’가 파시즘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화 이전 단계의 제3세계 독재는 파시즘이 아니라 권위주의 또는 전체주의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파시즘은 대중운동의 특성을 띠고 있다. 민주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에 대한 강력한 분노를 띤 광범위한 대중이 파시즘을 옹립한다. 다만 이탈리아와 달리 독일은 나치 정권 수립 이후 본격적인 ‘나치 국민운동’이 전개됐다. 이 때문에 학자들은 파시스트 대중운동이 선행해야 파시스트 정권이 수립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 반대의 방식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분야의 고전인 <파시즘>의 저자 로버트 팩스턴은 “미래의 파시즘은 굳이 고전적 파시즘의 외적 특징이나 상징을 그대로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파시즘 등장의 ‘경고 표지’를 더 세심하게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협을 느낀 보수 세력이 적법 절차와 법의 지배를 포기할 태세를 갖추고 더 강한 동맹 세력을 찾아헤매며 국가주의적 선동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얻고자 할 때, 파시스트들은 벌써 권력에 아주 가까이 접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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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같은 방식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한겨레21 2009.06.12 제764호, 신윤동욱·임지선 기자)
[표지이야기] 들끓던 애도가 잦아든 거리, 강경 진압에 저항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슬픔은 켜켜이 쌓이고 쌓이네
   
“아직은 애도의 시간.”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역사학)는 그렇게 말했다. 애도의 행렬이 거리로 나와서 분노의 구호를 외치기보다는 각자가 슬픔을 삭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박진 다산인권센터 활동가는 덧붙인다. “그러나 마음에 저축된 분노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아가 한홍구 교수는 사람들이 촛불의 교훈을 되새기고 있다고 말한다. “탄핵 저지의 촛불은 민주세력에 다수당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개혁의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지난해 촛불은 아무리 거리에서 외쳐도 이명박 정부가 듣지 않는단 사실을 알려줬다. 그렇게 촛불은 두 번의 실패를 통해서 교훈을 얻었다. 의회에 맡겨서 안 되니까 거리로 나왔는데, 거리로 나와도 안 되니 다시 의회로 눈길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촛불은 똑같은 방식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역시나 투표다. 수많은 조문객은 종이에, 가슴에 꾹꾹 눌러썼다. ‘평생 꼭 투표하겠습니다.’ 한홍구 교수는 그것을 “유권자의 의식과 기준을 확 바꾼 혁명”으로 평가한다. 장석준 실장도 “민심이 정치에 스며든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촛불이 지난 4월의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 결과에 영향을 끼쳤던 것처럼. “촛불의 효과는 2007년 대선, 2008년 총선의 보수적 선택이 당분간 지속될 것이란 전망을 바꿔놓았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던 수도권 중도층의 민심을 2007년 이전으로 되돌렸다. 노 전 대통령 서거로 수도권의 변화가 부산·경남 등 지방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장 실장의 분석처럼, 실제 6월3일 실시된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지지율은 대구·경북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한나라당을 앞섰다.
 
안진걸 참여연대 민생희망팀장은 “합법적인 조문으로 이미 사람들은 촛불을 들었다”며 “지금도 지지 정당을 바꾸는 것으로, 한국방송 <뉴스9>를 보는 대신에 문화방송 <뉴스데스크>를 보는 것으로 유·무형의 저항을 이어가고 있다”고 보았다. 안진걸 팀장은 “대규모 시위로 드러나지 않아도 반이명박 정서가 더욱 깊어지고 넓어졌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물론 강경 진압의 침묵 효과도 있다. 박진 활동가는 “수많은 전경에 첨단장비를 동원하고 법률 조항까지 활용해 단순 집회 참가자도 범법자로 만드는 물리력의 겁주기 효과가 분명히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강력한 물리력 동원의 이면에서 자신감의 결여를 읽기도 한다. 박 활동가는 “분향소가 마련된 서울역 광장 곳곳에 숨어 있는 경찰을 보면서 동의받지 못한 권력의 자신감 상실이 애처로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반감이 곧바로 정권의 위기로 이어지진 않는다. 민주화의 역설적 혜택을 보수 세력이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장석준 실장은 “쇠고기 정국의 촛불도 정권을 바꾸자는 요구는 아니었다”며 “1987년 민주화 이후에 형식적 민주주의에 대한 동의가 이뤄져, 정권이 반민주적 수단을 동원해도 최소한의 민주적 원칙을 깨지 않는 한에선 정권 교체 요구까지 나아가진 않는다”고 분석했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문화콘텐츠학)는 또 다른 측면을 지적했다. 그는 “한국의 수구 세력은 국민이 말로는 저렇게 하지만, 선거에선 정작 다르게 나타날 것이라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촛불집회의 성과와 더불어 한계를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문학)는 “지금 상실의 대상은 단순히 노무현 개인을 넘어서 노무현을 죽음으로 몰고 간 무엇”이라며 “그러나 대의제 민주주의 틀을 넘어서기 꺼리는 한국의 중간층은 불만의 원인인 이명박 정부라는 기표를 제거할 방법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촛불을 민주화 이후로 추구해온 정상 국가에서 벗어난 이명박 정부에 대한 항의로 보았다. 그러나 중간층의 이러한 열망은 새롭게 등장한 기득권 정권 앞에서 꺾였다. 이 교수는 “한국의 기득권층은 사익 추구를 곧 공공성으로 착각하는 집단”이라며 “87년 이후로 민주주의 룰을 만들어온 중간층의 자부심은 기득권 정부의 벽 앞에서 무너졌다”고 지적했다. 그렇게 촛불은 중간층에 좌절의 경험으로 남았다. 그래서 대의제 안에서 좌절된 욕망을 위무하는 굿 같은 촛불을 다시 들기는 어렵단 것이다. 여기에 장석준 실장은 촛불 방식의 한계도 지적한다. “촛불은 누구나 참여 가능한 수준의 저항으로 대중의 동의를 얻었다. 그런데 정권의 강경 진압에 맞서 이런 방식의 저항이 유지되기 어렵다는 딜레마에 부딪혔다. 그래서 집회가 유지되려면 다른 방식이 필요한데 그것은 대중의 동의를 얻기 어렵다.”
 
그러나 잠복한 슬픔은 당장의 행동을 넘어서 사람들 가슴에 깃발을 세우고 있다. 한홍구 교수는 “유관순의 죽음이 3·1 운동을, 순종의 죽음이 6·10 만세운동을, 김주열의 죽음이 4·19를, 박종철의 죽음이 6월 항쟁을 낳았다”며 “그의 서거도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크나큰 변화로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더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고종이나 순종 같은 조선시대 임금보다 훨씬 친근한 존재여서 사람들이 느끼는 일체감이 더하고 슬픔이 깊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까지 더해져 광주보다 더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조문객이 느낀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그는 네댓 시간을 기다려 조문을 했던 이들을 “조문객이 아니라 상주”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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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문제는 대중이다 (프레시안,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 2009-06-15 오전 9:31:21)
[손호철 칼럼] 탄핵정국-MB집권-촛불집회-조문정국, 그리고…
 
'광기의 순간'. 대중이 일상으로 벗어나 광장으로 뛰쳐나온 '광장의 정치'가 '제도정치'를 압도하는, 역사에 드물게 나타나는 '아름다운 순간'들을 지칭한다. 그렇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생겨난 '광기의 순간'과 조문정국은 6.10 민주항쟁 기념행사를 단락으로 하여 끝나가고 있는 것 같다.
 
지난 재보궐 선거에 나타난 한나라당의 참패를 시작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한나라당의 추락은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이후 가속화된 데다가 민주당의 지지도가 급등해 최근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지지도가 역전이 됐다. 그러나 이 같은 지지율의 변화가 현재 의석에서 차지하고 있는 한나라당, 나아가 친박연대와 자유선진당을 포함한 냉전적 보수세력의 압도적인 우위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속도전이라는 국정운영방식을 바꾸지 않을 경우 6월 국회에서 언론관련법의 강행처리 등 최근 일련의 사태로 잠시 주춤했던 이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을 막을 수 있는 길은 거의 없다.
 
민주당은 이 대통령의 사과 등이 없으면 6월 국회에 응할 수 없다는 강경입장을 밝힌바 있다. 나아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창조한국당 등도 전의를 불사르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 등이 언제까지 등원을 거부하고 장외투쟁에 전념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그리고 일단 국회가 열리게 되면 다수당인 한나라당의 횡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그리 많지 않다.
 
정치권 밖으로 나가, 민주노총을 비롯한 민중운동과 진보적 시민운동이 또 다른 변수이다. 특히 진행되고 있는 쌍용자동차의 총파업을 비롯해 민주노총이 예고하고 있는 7월 총파업, 그리고 한나라당이 방송법을 강행처리하려 할 경우 일어날 MBC 등 언론노동자들의 총파업, 아직도 별 성과 없이 지난한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용산참사 관련 투쟁 등 다양한 시민사회수준에서의 투쟁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해 이명박 정부의 새로운 공세를 막아낼 수 있을 지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이 투쟁 역시 일반 대중들의 지지가 없는 한 고립되어 각개 격파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향후 정국을 좌우할 것은 다시 한 번 대중이다. 대중이 노대통령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자성하지 않는 이명박 정부의 오만에 분노해 다시 한 번 일어선다면 이 같은 공격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다시 광장을 비우고 집으로 돌아가 광장을 외면한다면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결국 '찻잔속의 태풍'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문제는 대중이 예측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최근의 역사만 해도 그러하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에 분노한 대중은 질풍처럼 거리로 달려 나와 노 전 대통령을 구해줬다. 그 결과 열린우리당은 자유주의세력으로는 처음으로 국회의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고 한나라당은 대중의 분노를 누그러트리기 위해 천막당사 생활까지 해야 했다.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른 사회적 양극화와 노무현 정부의 실정에 실망한 대중은 "무능보다 부패가 낫다"며 이명박 대통령에게 사상 최대 표차의 승리와 한나라당에 총선에서의 압승을 선사했다.
 
이도 잠시,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전면 개방은 다시 대중을 거리로 내몰았다. 장마도, 장대비도 꺾지 못한 대중의 분노 앞에서 이 대통령은 청와대에 올라 끝없이 이어지는 촛불을 보며 자성을 했다는 굴욕적인 사과를 해야 했다. 그러나 촛불이 사그라지자 이명박 정부는 민주주의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용산참사와 여러 비극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침묵했다. 이명박 정부의 공격은 결국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을 가져왔고 이에 다시 대중은 일어나 끝없는 조문 행렬을 이루었다.
 
조문 정국에서 나타난 국민들의 애도와 분노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는 또 다시 민심에 귀를 닫고 속도전을 시작하려 하고 있다. 이 같은 MB의 오만에 대중이 분노해 일어날 것인지, 아니면 지난해 촛불 이후처럼 조용히 집으로, 일상으로 돌아갈지, 그것이 문제다. 그리고 해가 져야 비상을 시작하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대중의 움직임에 대해 사후적 해석만을 할 뿐, 언제 대중은 분노하고 언제 대중은 침묵하는지, 알 수 없는 나의 무력함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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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단계 '진보개혁세력'의 과제는? 역시 '연합'이다 (프레시안, 조성대 코리아연구원 기획위원/한신대 교수, 2009-06-15 오후 3:38:14)
[기고] 수도권 선거연합 합의가 출발점
 
Ⅰ. 역주행시대와 구동존이(求同存異)

무엇보다 MB정부가 탄생한 후 후퇴만을 거듭하는 소위 '거꾸로 가는 민주주의'를 바로잡아 세워야 한다. '민주회복 국민위원회'의 당면한 과제는 22년 전 6월 항쟁의 피와 땀의 결실인 87년 체제를 지켜내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정세는 민주주의회복을 위한 반MB전선만을 요구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현 단계 반MB전선의 요체는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양산하는 MB식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진보적 사회정책연합을 통해 대안적 정치세력을 구축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87년 체제가 생산해낸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를 계승함과 동시에 진일보시키는 작업인 것이다.
 
이른바 사회양극화해소를 위한 진보정책연합은 결국 공적 영역의 회복을 통해 양극화를 해소하고 MB식 신자유주의 정치로 인해 허물어진 한국사회를 복원하는 중요한 원칙을 제공해줄 것이다. 이것은 민주당만으로 혹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모두에게 공동의 과제일 수밖에 없으며 서로가 크게 다르지 않은 공통된 과제로 구체화할 수 있는 그런 대(大)정책들이다.
 
그러나 그동안 진보정치세력은 서로의 차이를 강조하고 결별하는데 너무 익숙해왔다. 몇몇 정당 지도자들의 당파적 결정에 의한 분당 및 신당창당의 반복, 혹은 민노당과 진보신당 사이의 종북주의 논쟁은 분열과 결별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진보진영이 분열할 때 대중들은 우리로부터 이탈하며 결국 MB식 정치만이 살아남을 뿐이다. 따라서 진보개혁진영은 사회양극화해소를 위한 진보적 정책연합을 구성함에 있어서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즉, 차이는 유보하고 공통점을 확대발전시키는 넓은 진보로 세력을 재구성해나가야 하며, 이는 당면한 반MB 진보연대의 실천과제이기도 하다.
 
Ⅱ. 사회양극화 해소를 위한 정책연합의 길
4·29 재보선은 한국사회 진보개혁세력에게 대단히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첫째, "MB식 정치는 아니다"는 정치적 심판이었다는 점이다. 둘째, 단결하면 승리한다는 교훈을 주었다는 점이다. 4·29 재보선은 MB정권에 대한 중간평가였다. 한나라당에게 0대 5라는 참패를 안겨준 이번 재보선은 분명 MB정권에 대한 심판이었다. 그러나 보다 주의 깊게 짚어봐야 하는 대목은 선거가 "MB식 정치냐 아니냐"라는 질문지에 국민들이 단지 "MB식 정치는 아니다"고만 판정해 주었을 뿐이라는 점이다. 이는 정치노선과 정치세력이라는 양 측면에서 MB식 신자유주의 정치노선을 심판하고 퇴출시킬 수 있는 통일적인 정치적 대안이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MB식 정치는 행정부 출범초기의 집권 정치연합을 유지하지 못하고 해체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4·29 재보선이 '단결하면 승리한다'는 교훈을 진보개혁세력에게 안겨주었다는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문제는 이와 같은 단일화에 이은 반MB진영의 정치적 승리를 어떻게 향후 지속적으로 발전·확대 시킬 것인가에 있다. 4·29 재보선에서 승리한 각 정당이 그 승리를 당파적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존립과 독자적 발전에 대한 유권자의 위임으로 아전인수 한다면 진보개혁진영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정치지형을 의제적으로 다당제화해서 결과적으로 진보의 분열을 정당화하고 보수·수구적 정치세력의 정치적 재기와 독주에 협력하게 될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향후 민주당의 행보는 대단히 중요하다. 4·29 재보선 당시 민주당은 한마디로 말해 반MB진영의 구심 역할에서 낙제 점수를 보여줬었다. 전주지역 공천을 둘러싼 당 지도부의 분열과 DY의 무소속 출마는 그 진의야 어떠했던 간에 민주당이 과연 대안정당일 수 있는가에 심각한 의심을 품게 했다. 부평과 시흥에서의 민주당의 승리 또한 수도권 개혁블럭 유권자들이 출구(exit)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MB심판의 선택지로 민주당을 활용한 것이지 진정한 대안정당으로 신뢰하고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 조문정국을 맞아 민주당은 약 5년 만에 처음으로 한나라당에 앞선 당지지율과 서울광장에서 끓어오르는 민심에 다소 고무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모든 진보개혁세력이 공유할 수 있는 의제를 제안하고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을 포함한 제반 진보적인 사회세력과 소통하며 반MB전선을 폭넓게 재구성하려고 노력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에 실패하게 된다면 국민들은 민주당을 차갑게 외면하고 현재의 지지율은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나버릴 것이다.
 
6월 광장의 성과를 아전인수로 해석할 경우 촛불 민심이 차갑게 등을 돌릴 것이라는 점은 민주당뿐만 아니라 민노당과 진보신당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아울러 현재 회자되고 있는 친노진영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도 여론의 차가운 뭇매를 맞게 될 것이다. MB식 정치에 분노한 시민들이 민주당, 민노당, 진보신당 등으로 분열되어 있는 진보개혁진영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회의적임을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
 
Ⅲ. 2010 지방선거와 '진보적 연립자치'의 방향
그렇다면 진보개혁진영은 '반MB 진보개혁연대'의 통합을 어떻게 실현해 나갈 수 있는가? 첫째, 시기적으로는 2010년 지방선거를 단기적 목표지점으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가오는 10월 재보선을 목표지점으로 순행하기 위한 징검다리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통합의 형식으로 연립(자치)정부를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통합의 진원지를 우선 수도권 개혁블록의 형성에 두고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10월 재보선과 2010년 지방선거가 진보개혁진영의 통합의 기점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조건 승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방선거는 아래로부터의 통합을 통해 종국적으로 상층부의 통합을 이룰 수 있는 민주주의적 연대의 좋은 시험장이 될 수 있다. 반MB 정치통합의 사회적 요구가 높은 이 때 우리는 가장 하위의 지방정부 단위부터 서로의 정치적 차이를 인정하고 공통분모를 확대해나가는 연립자치를 실현해야 한다. 그리고 다가올 2012년 대선에서는 명실상부한 진보개혁진영의 연립정권을 실현해야 한다. 물론 그 전까지 진보개혁진영이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될 수만 있다면 연립정권이 아니라 진보개혁진영의 단일정부가 구성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통합의 내용은 사회양극화 해소를 위한 진보적 사회정책연대이며, 구동존이(求同存異로)의 지혜가 이 과정에서 더 없이 중요한 자세임은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통합은 어떤 형식적 틀을 지닐 수 있는가. 한마디로 표현하면 연립자치, 즉 각 지방정부를 진보개혁세력의 연립정부로 구성하자는 것이다. 연립의 지분은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각 정당 혹은 정파가 얻는 국민적 지지도를 기준으로 하면 될 것이다. 아울러 광역의회 또한 연정을 구성할 것을 목표로 교통정리를 해나가면 된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합의를 기초자치단체와 기초의회로 확산시켜 나가면 된다.
 
이 밖에 진보적 연립자치를 목표로 형식적 틀은 다양하게 고민할 수 있다고 본다. 이를 위해 민주당, 민노당, 진보신당 및 필요하다면 진보적 시민단체를 포함해 대표자 연석회의를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당장 10월 재보선을 위해 가장 바람직하게는 아래로부터의 후보단일화를 추진해야 한다. 이러한 학습과 훈련은 내년 지방선거에서 연립자치를 실현하는 중요한 실험장소가 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연립자치를 실현하기 위해 각 정당은 현재의 정당의 울타리를 뛰어 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이 과정에서 각 당은 파당적 이해를 과감하게 포기해야 한다. 특히 민주당의 선명한 정치노선은 민노당과 진보신당을 통합의 틀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가장 중요한 시험지가 될 것이다. 물론 진보적 연립자치를 전국적으로 실현해나갈 수 있다면 좋은 일이나 그 마저도 난관에 봉착한다면, 수도권에서나마 후보단일화를 통해 진보개혁진영의 통합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수도권이 개혁블록 형성의 핵심적 지역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지역주의로부터 자유롭다는 것 외에 향후 대선과 총선 가두에서 반MB 정치의식이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개혁의 진원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수도권에서의 승리는 진보개혁진영에게 모멘텀을 부여할 것이다. 특히 서울시장 선거는 내년 지방선거를 평가하는 리트머스지로 작용할 것이며, 따라서 진보개혁진영은 무조건 단일화된 후보를 내놓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을 비롯한 모든 정당과 정치세력이 일체의 기득권을 포기해야함은 두말한 나위가 없다 하겠다.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현재 민주당, 민노당, 진보신당을 포함한 진보개혁세력은 민주주의회복과 양극화해소를 위한 진보적 사회정책 과제의 도출과 해결을 위한 건설적 토론과 대안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 과정에서 넓은 진보로의 재구성을 추진하는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내야 한다. 첫째, 현시점 한국사회 진보개혁세력에게 요구되는 것은 진보적 사회정책연합을 기치로 반MB 진보연대를 넓은 수준에서 재구성하는 것이다. 둘째, 10월 재보선과 내년 지방선거를 반MB 연립자치의 승리로 몰고 가야 한다. 10월 재보선에서의 후보단일화와 내년 지방선거에서 연립자치를 위한 연합공천과 후보단일화를 실천해야 한다. 셋째, 최소한 진보개혁진영은 수도권 개혁블록의 형성 즉 수도권 선거연합에 합의해야 한다. 수도권의 승리는 전국승리의 키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모든 정당 및 정파는 자신의 당파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민주당을 비롯한 모든 정당과 정치세력의 기득권 포기는 진보연대 구축에 있어서 민감하지만 과감하게 접근해야 하는 통합의 전제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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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노무현'이 산 '이명박'을 이길 유일한 방법은? (프레시안, 최병천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사회민주주의연대 회원, 2009-06-16 오후 12:00:01)
[복지국가SOCIETY] 노무현 이후, '초록-복지 동맹'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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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를 ‘파시스트’로 부를 것인가 (시사IN [92호] 2009년 06월 15일 (월) 10:59:05 이종태 기자)
경찰 폭력,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 극우 세력의 준동. 파시즘을 연상케 하는 현실. 한국은 파시스트 국가로 가고 있는가.  
 
6월8일 전국은행연합회관에서 열린 심포지엄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뉴라이트 계열의 사단법인 시대정신 개최)에서는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안병직 시대정신 이사장은 취지문에서 “광우병 파동, 용산 참사 및 노무현 국민장 등에서 주장하는 민주화 요구는 실체가 전혀 없는 유령과도 같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예컨대, 한국은 민주 절차에 따라 선출된 합법적 정부가 통치하는 국가이다. 그렇다면 야당과 진보적 시민단체가 요구하는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안 이사장은 ‘사상적 포장에 불과하다’라고 아주 명확하게 정리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포장했나? ‘종북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통일지상주의, 반미주의’ 등이다. 결국 안 이사장에 따르면 현재 민주주의 논쟁은 극좌 세력의 위장전술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임혁백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실제로 “한국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정당에서는 제왕적 총재가 부활하면서 사당화(私黨化)가 진행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후보 경선이 사라졌다. 제왕적 대통령이 부활하고 투표율이 낮아지는 것도 민주주의 후퇴의 징후이다. 임 교수는 정치 부문 외에서도 민주주의의 후퇴를 읽어낸다. 경제·복지·교육 등에서 시장원리만이 강조되면서 공공성과 사회통합 기능이 상실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위협이다. 그래서 임 교수에게 촛불시위는 “자기 파괴적인 시장의 운동에 저항해서 사회를 보호”하려는 민주수호 운동이 된다.
 
그러나 이런 논지가 김주성 한국교원대 교수에게는 “현행법상 불법 시위를,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정당화하는 주장”에 불과하다. 김 교수에 따르면 “인민들은 (주권자로서) 헌법을 제정하는 제헌 권력을 가진다.” 그러나 일단 헌법이 제정되면 인민은 그 헌법에 따라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그러므로 현행 법규의 위반을 정당화하는 것은 “법치주의·입헌주의의 후퇴이고 따라서 민주주의의 후퇴를 의미한다.”
 
이에 대해 강정인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단순히 ‘법의 지배(입헌주의)’ 차원에서만 진단할 수는 없다”라고 비판한다. 또한  △촛불 시민과 시민단체들에 대한 보복성 수사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 △미네르바 기소 및 장자연 관련 수사 등 사례에서 ‘법의 지배’라는 원칙 자체가 유린된 증거를 찾는다.
 
사실 이런 논쟁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이미 2004년 탄핵 정국 당시 ‘의회권력 대 거리 민주주의’라는 형태로 제기된 바 있다. 대의민주주의 대 직접민주주의의 구도다. 분명한 것은 ‘대의민주주의 대 직접민주주의’라는 추상적이고 이념적인 틀만으로 구체적 현상을 재단하기는 힘들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런 추상적 논의의 틀을 벗어나 이명박 정부를 구체적 개념으로 규정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김세균 서울대 교수나 이광일 성공회대 연구교수 등은 ‘신자유주의적 경찰국가’라는 패러다임으로 우리 사회를 읽으려고 시도한다. 예컨대 이들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사회 전반을 시장경제 일변도로 재편하면서, 민중을 억압하고 배제하는 시스템이다. 이 과정에서 형식적 민주주의 제도까지 훼손하거나 후퇴시키기도 한다. 한국의 신자유주의 개혁은 이명박 정부 이전인, 10여 년 전부터 추진되었다. 그러나 추진 주체가 김대중·노무현 등 민주화운동 세력이었기 때문에 민주주의 제도의 후퇴가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성향상 경찰 기구를 통해 사회적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고 저항을 분쇄하는 방법으로 신자유주의적 사회 분열을 해결하기 쉽다. 자본에는 약하지만 대중에는 강하고, 자본에 대한 규제는 폐기하지만 대중의 저항은 제도적 폭력으로 완강하게 저지하는 국가이다.
 
한편 최근에는 이명박 정부로부터 파시즘의 조짐을 읽어내려는 시도까지 나오고 있다. 한완상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6월 초에 발간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제9호와의 인터뷰에서 이명박 정부의 ‘비즈니스 프렌들리’에 대해 “그 자체가 파시즘적”이라고 비판한다. 문화이론 전문지인 <문화과학> 2009 여름호는 ‘파시즘 X’라는 용어를 통해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파시즘적 경향성’을 짚어보려고 했다. ‘파시즘 X’는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파시즘(독일·이탈리아·일본)과 다를 수 있는, ‘미지의 형태의 파시즘’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두 가지 조건과 한 가지 전략이 공고히 결합하는 경우 이명박 정권은 언제든지 새로운 ‘파시즘X’ 체제로 전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그 두 가지 조건이란 바로 △한국 경제가 올해 하반기에 U자형으로 전환하지 못하고 L자형 패턴을 취하는 경우와 △대다수 국민이 탈정치화되어 먹고사는 문제에만 매몰되는 경우다. 이런 정세를 우파가 잘 이용하기만 하면 “‘파시즘 X’가 출현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라고 <문화과학> 편집위원회는 주장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6월11일 6·15 남북공동선언 기념식에서 ‘행동하는 양심’을 강조하며 이명박 정부를 사실상 ‘독재자’로 규탄했다. 이에 따라 민주당을 제외한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 등 보수 정치세력으로부터 “공산주의자” 등 원색적 비난을 듣고 있다. 그런데 특정 세력에 대한 규정으로 파시스트, 파시즘, 경찰국가 등은 ‘독재’보다 훨씬 강한 개념이다.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독재자’와는 타협하고 거래할 수 있지만, 파시스트와는 어렵다. 파시스트는 ‘타도의 대상’일 뿐이다. 이런 강한 규정들이 지식인 사회에서 나온다는 것 자체가 이명박 정부에 대한 사회적 적대감이 위험수위로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집권 1년4개월여 만에 엄청나게 많고 폭 넓은 정적 집단을 만들었다. 그러나 파시스트처럼 ‘공포와 숭배’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밑으로부터의 파시즘’이라는 대중운동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애국운동(우파 대중운동)’은 대중뿐 아니라 그들이 지지하는 정부·여당으로부터도 진지하게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자칫하면 지식인 사회가 이명박 정부를 호명하는 방식들(파시즘·경찰국가)은, 극우집단이 다른 세력에 퍼붓는 저주(예컨대 친북 좌파)처럼 ‘배제의 논리’로만 작동할 수도 있다. 냉정하고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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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문제는 ‘반MB 연합’과 ‘반신자유주의 연합’의 결합이다 (한겨레, 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2009-06-17 오후 09:33:25)
한겨레를 읽고
 
<한겨레> 6월11일치 “‘87년 민주주의’ 후퇴인가 ‘97년 신자유주의’ 심화인가”라는 기사는 내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한국 민주주의와 87년체제’라는 토론회에서 발표한 글을 중심으로 ‘87년체제’ 논쟁을 잘 소개해주었다. ‘87년체제’는 헌정체제 등 일부 ‘부분 체제’의 의미는 있지만 경제체제와 정치체제의 결합체인 ‘사회체제’라는 면에서는 ‘경제체제’가 신자유주의적으로 완전히 바뀐 1997년 이후 시효가 다 되어 현재는 ‘97년체제’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해당 기사가 논쟁을 정치전략과 연결시킨 부분은 문제가 있다. 기사는 ‘97년체제론’이 반신자유주의 연합론과, 87년체제론이 반이명박 연합과 연동된다고 분석했으나 이는 내 생각과 다르다. 기사에 소개되지 않았지만 제 글이 구체적으로 분석했듯 97년체제론이 반신자유주의 연합론과 관련된 것은 사실이지만, 반이명박 연합은 87년체제가 아니라 08년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반이명박 연합은 크게 보아 첫째 이명박 정부 집권 후 나타난 정치적 민주주의의 후퇴, 둘째 감세 등 극우적 경제정책, 셋째 냉전회귀적인 대북정책과 관련되어 있는 바, 이는 모두 87년체제와는 거리가 멀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후퇴는 ‘08년체제’의 정치체제와 관련된 것이고, 감세 같은 이명박 정부의 ‘우파 신자유주의’ 정책(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좌파 신자유주의’와 구별되는)은 ‘08년체제’의 경제체제와 관련된 것이다. 나아가 부분 체제인 분단 체제라는 시각에서 보면 2000년체제가 ‘평화공존적 분단’이었다면 ‘08년체제’는 군사독재 시절의 ‘적대적 분단’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에 반대하는 것이 반이명박 연합이다.
 
진짜 중요한 문제는 ‘97년체제’냐, ‘08년체제’냐가 아니라, ‘97년체제’와 ‘08년체제’의 관계, 즉 반신자유주의 연합과 반이명박 연합의 관계다. 전자만을 강조하는 것은 좌익 소아병으로 문제가 많다. 반대로 후자만 강조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정규직 확대, 신자유주의 정책 등에 대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반이명박을 위해 무조건 대동단결하자는 것은 역으로 우편향이다. 결국 반이명박 연합과 반신자유주의 연합을 정세에 따라 적절히 결합해 나갈 수밖에 없다.
 
일례로 민주당은 최근 재보궐 선거에서 한-미에프티에이 본부장 출신을 인천 부평을 후보로 출마시켰는데,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민주노총 등은 반이명박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지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엠비(MB)악법 반대투쟁,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등과 관련된 반이명박 투쟁에서 이들이 민주당에 대해 “너희는 한-미에프티에이 본부장을 공천한 신자유주의 세력이니 같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당장 눈앞의 투쟁인 ‘08년체제’의 문제, 나아가 보다 심층적인 문제인 ‘97년체제’의 문제를 적절히 결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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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바보 전태일과 '벌거벗은 용산' (프레시안, 이광일 성공회대 연구교수, 2009-06-19 오전 11:45:58)
[기고] '인간적인 것'에 대하여
 
노무현 정권을 둘러싼 이런저런 평가들, 그 시시비비를 가리는 언술들도 제법 눈에 띕니다. 한 가지 특징적인 것은 그 평가들 가운데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노무현'을 나누어 말하는 언술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서민적인 인간 노무현'과 '개혁가로서 정치인 노무현'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언술이 그리 낯선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막걸리 한 사발 걸치며 논에서 모를 심는 인간 박정희'와 '민족과 국가의 진로 앞에서 결단해야 하는 정치인 박정희'라는 언술을 오랜 동안 들어 왔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을 비교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언술에 주목하는 이유는 추모라는 이름 아래 바로 그 '인간적인 것'이 '정치인 노무현'?혹은 '정치인 박정희'?의 역사적 과오와 오류들에 대한 비판을 차단하고 걸러내는 망으로 기능하는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것이 미래의 삶에 대한 사유와 그것을 향한 크고 작은 실천을 봉쇄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측면이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사이에는 종종 분신한 전태일을 생각하곤 합니다. 노무현과 달리 이 가난한 노동자에 대한 평가들에서는 '인간 전태일'과 '노동운동가 전태일'을 구분하는 언술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인간적인 것'은 개별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그 어떤 고유한 특성이 아닙니다. 애초 그런 것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타자들과 이런저런 모순과 갈등을 매개로 관계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역사적 존재들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그 관계들에는 모순과 갈등을 해소하려는 시도들, 즉 정치들(운동들)이 이미 내재되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가 지니고 있다는 '인간적인 것들'이 그가 맺고 있는 이런저런 관계들, 따라서 그에 내재된 정치를 매개로 평가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들에게는 '인간적인 것'으로 다가온 것이 다른 이들한테는 자신들의 희망과 꿈을 빼앗아간 '비인간적인 것'으로 기억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어느 분들에게는 파격적이고 반권위주의적인 말투와 행동이 다른 분들에게는 무례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민주적인 것'이 또 다른 이에게는 '독재인 것'으로 인식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인간적 평가'가 다르게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결코 서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이분법은 인간을 역사적인 관계들의 밖으로 밀어내어 마치 '모두에게 준거로 적용될 수 있는 그 어떤 인간적인 것'이 실존하는 것처럼 추상화시킨다는 점에서 현실을 가리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입니다.
 
당연히 전태일에 대한 평가도 이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 다른 지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것은 노무현과 달리 전태일을 둘러싼 평가들에서는 이런저런 이견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를 죽인 구조적 폭력, 즉 자본과 권력은 다르게 평가하겠지요. 하지만 최소한 민주주의, 그리고 요즘 성숙하지 못한 이들의 화풀이 대상이 되곤 하는 '진보'를 말하는 이들에게 그는 '더불어 사는 삶을 죽음으로 추구한 사람, 노동자 전태일'로 기억될 뿐입니다. 아니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구조적 폭력 그 자체인 자본과 권력조차도 비록 표면적이겠으나 그의 삶에 대해 비아냥거리지는 못합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들의 적대감 속에 감추어진 그 어떤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비밀은 이른바 '인간적인 전태일'과 '노동운동가 전태일'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그 시대의 모순에 직면하여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었던 이 노동자는, 그래서 '단 한 사람의 지식인 친구가 있었으면'하고 희망했던 바로 그 노동자는 자본과 권력에 저항하며 자신이 그 일부이자 전체라고 생각한 노동자들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인간적인', 그리고 '운동적인(정치적인)' 모든 것을 다 하였기에 심지어 적대자인 자본과 권력조차도 그를 가벼이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즉 그 인식, 의도 여부와 무관하게 그가 '사적인 것을 상징하는 인간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상징되는 정치적인 것'을 구분하여 대중을 지배하고자 하는 자본과 권력의 이분법적 인식 틀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에게 새삼스레 '인간적인', '운동적인(정치적인)'따위의 수사를 붙이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 뿐입니다. 전태일이 인간적인 이유는 그가 진정 역사적이고 정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간적인 그 무엇'이 따로 존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500만 명 이상이 추모한 '정치인 노무현'의 '인간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진 자유주의 정권 10년 동안 국가경쟁력 제고라는 명분 아래 진행된 '신자유주의개혁'의 도상에서 죽어간 노동자들, 농민들, 가난한 자들에게 그 권력은 분명 '살아 있는 권력'이었습니다. 지금 그 바통을 이어받아 파시즘화 경향을 확대, 심화시키고 있는 신자유주의경찰국가 이명박 정권의 구조적 폭력 때문에 죽어나가고 있는 이들처럼, 그 당시에도 그런 이들이 있었습니다. '민주화운동의 적자'라는 것을 내세우며 그 주검들에게 내뱉은 언술들을 깨끗이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어찌되었든 그 언술과 행태들이 '인간적인 것'이었나요. 국회의원과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인간 노무현'의 그 어떤 언술과 행동에 호감을 지니기도 하였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가 속했던 정치세력이 집권 이전이나 이후에 가난한 대중에게 준 멸시, 억압과 삶의 고통을 상쇄할 만큼 그토록 '인간적인 것'이었는지 저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인격화된 자본과 권력'에게 '인간적인 것'을 바라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많은 경험들을 통해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들도 권력 이전에, 대통령 이전에, 정치인 이전에 인간들인데'라며 기대를 버리지 못하다가 삶 자체를 빼앗긴, 혹은 빼앗기고 있는 수많은 이들에게 그 '인간적인 것'이 의미하는 바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거기에 대고 지금 '인간적인 정치인, 인간적인 대통령' 운운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까. 만일 그것이 실존의 차원에서 망자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이 결국 노무현 정권 시대가 지금보다 더 좋았다는 것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면, 혹은 그 정권에 대한 객관적 비판을 무디게 하고 잠재우기 위한 것이라면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집권기에는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었느니, 민주주의의 대강이 완성되었느니 말하면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외치는 자들을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정도로 여기고 탄압하더니 지금 와서 다시 그것이 '역진'하였다고 한탄하며 이미 폐기된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자고 말하는 것이 정말 '인간적인 것'인가요. 이른바 '인간적인 것'이 '그 어떤 상식'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언술과 행태야말로 정말 비인간적이고 상식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도 지금 그 '인간적인 것' 운운하는 것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노무현 정권을 옹호하는 것은 정치적 자유이니 그 자체에 대해 누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래도 어찌됐든 '자신들의 인간적, 정치적 군주'를 잃은 그 애통한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기에, 그리고 최소한 실존적 죽음 앞에 명복을 비는 것이 그야말로 '인간적 도리'라고 생각하기에 그들이 다소 격한 감정을 토해대며 분노의 화살을 '진보'에게 돌리는 것에 대해서도 그것은 지성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정중히 말씀드린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에 그치지 않고 억지 논리와 해석, 천박한 지식으로 '진보'를 조롱하고 그것도 모자라 누군지 알 수 없는 이들에게 "협잡꾼"이라는 딱지마저 붙여 진보를 도매금으로 넘기니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자신들이 지지한 정치세력의 재집권 실패의 원인을 정치적 이념과 전망을 달리하는 진보의 탓으로까지 돌리는 그들의 언술을 접하는 순간 머릿속이 멍해지며 오히려 이런저런 연민이 증폭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그 이유는 이런 발상과 행태를 지닌 분들에게 둘러싸여 '반특권, 반권위, 반지역주의'를 모색하려 했으니 애초 그런 목표 자체가 (신)자유주의정권 아래에서 실현될 수 없었던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그래도 노무현 정권이 하고자 했던 최소한의 개혁조차도 제대로 될 수 없었던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은 이들이 기존의 그 특권, 그 권위, 그 지역주의에 기대어 자신의 그 알량한 지위와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은 아닐까라는, 장관과 고위 관료, 군 장성, 그리고 국영기업체 사장 등의 지역적, 학교별 안배를 따지면서 마치 그것이 지역주의의 완화 여부를 결정짓는 핵심 준거인 양 들이대다 자신들의 지분만 일정 정도만 보장되면 수탈, 억압받는 타인의 고통쯤은 나 몰라라 하는 식으로 처신하는 바로 그런 이들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역사적으로 자신들이 더 이상 민주주의자로 기능할 수 없는 그 지점에, 따라서 스스로 보수주의자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지점에 '인간적인 것'이라는 추상적인 언술을 가져다 놓고 자신들의 한계와 오류를 성찰하기보다 그것을 덮어버리고자 하는 그런 자들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진정 노무현정권의 지지자, 혹은 '이론적, 정신적 후원자'라면 오히려 그를 잘 보필하지 못한 반성과 함께 절필을 해도 부족할 판에 자신들의 천박한 붓끝을 놀려 딴에는 망자를 추모, 옹호한다고 하나 '망나니 춤'을 추어 정치적, 이념적 차원을 떠나 실존적 차원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진보에게까지 상처를 내고 있으니 이 어찌 '반인간적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인간적인 것'이란 진정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도대체 그것은 어디에 숨어 있는 것입니까. 저는 외려 용산에서 울리는 이름 없는 자들의 삶의 외침과 생동감 속에서 그것을 봅니다. 거기에서는 단순히 추모와 애도, 이명박 정권에 대한 분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삶과 새로운 사회관계들의 단면을 볼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영감과 감성의 흐름, 그것의 나눔과 공유, 그리고 그와 결부된 이성적이고 창조적 행위들이 어우러져 있기에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심지어 자본과 권력에 대한 팽팽한 긴장감마저도 순식간에 해학으로 전변시키는 그야말로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들의 단면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거기에서는 각자의 사상과 이념, 종교를 넘어 '자기지배의 실현으로서의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그 어떤 자발적 힘, 인간에 대한 애정이 존재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인가요, 거기에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벌거벗은 주권자들'에 대한 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과 거대 건설자본이 그 곳에서 빼앗을 수 있는 것이 또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이미 그들은 자신들의 육신의 일부인 부모, 자식의 생명조차 빼앗기고 그 불구덩이에서 살아 나온 또 다른 그들의 일부는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까 해서 그곳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그 무엇을 대가로 바라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권력과 부를 두고 싸우는 '주류와 비주류'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권력'과 그것을 자신의 목표로 하는 지금 '죽어 있는 권력'이 아닙니다. 그들은 거기에도 끼지 못하는, 아니 끼고 싶어 하지 않는, 진정한 자유를 꿈꾸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글로벌 건설자본과 결탁한 파시스트적 경찰국가가 내몬 '벌거벗은 주권자들'의 삶 그 자체를 지키기 위해 그 곳에 관심을 가지는, 아니 자기 자신을 벌거벗은 주권자라고 생각하기에 그로부터 눈과 귀를 뗄 수 없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들 또한 저 위임권력들을 통제하는 '주권자'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주권을 빼앗아 간 그들에 의해 자꾸만 죽음과 삶의 경계로 내몰리는 그런 허울뿐인 '벌거벗은 주권자'는 아닌지요.
 
사정이 이런데 그런 그들을 향해 권력과 자본이, 그 어떤 이들이 대중을 선동하는 진보, 좌파, 심지어 '빨갱이'라고 역설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오히려 사회구성원의 최소한의 삶과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국가가 바로 그들이 하고 있는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오히려 억압하고 탄압하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다양한 영역에 존재하는 부당한 사회관계들, 권력관계들을 해소,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라면, 그것을 무슨 수로 피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 비난이 무서워 수탈, 억압, 차별, 배제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약탈당하는 자연과 생태에 눈 감는다면, 그것을 어찌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자, 진보, 좌파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어찌 '인간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제2의 노무현'이 아니라 그 시대의 문제들을 진정 자기 것으로 삼은 너무도 아름다운, 너무도 인간적인 청년 전태일이 그리워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시공간을 넘어 '산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만큼 '인간적인 것'이, 따라서 '정치적인 것'이 어디에 있나요. 그것을 부정하는 모든 것은 반인간, 반정치입니다. 아직도 150일 이상을 병원의 차가운 냉동고에 보관된 용산의 주검들, 삶의 기로에 선 이 땅의 해고노동자들과 고통 받는 수많은 이들, 이미 찢기기 시작하여 신음하는 4대강과 같은 자연과 생태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저편에 많은 이들의 추모 속에 국민장을 마친 한 시대의 정치지도자이자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의 죽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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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독재’를 생각한다 (레디앙, 2009년 06월 22일 (월) 11:25:19 김원 / 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
[정치사회비평] 김대중-노무현 때도 비슷…추모 머문 대안의 후퇴 
 
노무현 사망 이후 민주주의, 독재 등 말이 등장하고 있다. '담론' 차원에서. 담론이라는 면에서 독재나 민주주의가 세력관계를 반영한 적이 오래되었는데, 좀 새삼스럽다. 그럼 '독재'란 무엇일까? 담론 수준에서 독재는 '군부지배', '일당-일인의 전횡적 통치', '억압적 통치' 등이 아닐까? 요즘 보수정당이나 일부에서 자주 쓰는 '소통의 부재'란 아마도 시민사회와 반대당의 의견을 무시하고 행정부와 다수 여당이 정책을 일방적으로 강행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이는 시민사회내 다양한 요구를 정당이나 정책을 통해 대변하지 못하는 '이익매개 기능'의 약화라고 해석 가능하다. 이는 곧바로 '정당정치의 미발전'으로 이어진다. 예전 말로 치자면, 대의제가 민의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되돌이켜 보면 이전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 시기에는 소통이 잘 이루어졌나 질문하면 그 역시 아니다. 포퓰리즘적 통치에 기초한 정당제와 대의제의 약화는 2000년대 내내 지속된 현상이다. 그래서 최장집이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라고 비판했고, 시민들에게 지적인 충격을 준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독재나 소통 결여란 문제가 제기될까? 표면적으로 드러난 현상을 보자. MB정권은 이전 정권에 비해 공권력으로 상징되는 억압적 국가기구의 사용이 잦다, 시민운동이나 사회운동 등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이 강력하다 등이 이를 보여주는 주된 현상들이다.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이전 정권에도 사회운동 등에 대한 탄압은 존재했고, 억압적 국가기구도 작동했다. 불안정노동, 구조조정, 노사관계로드맵 등을 기억하면 된다. 다만 우리는 너무 쉽게 잊을 뿐이다. 물론 억압적 국가기구 작동이 이전보다 노골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독재라고 부르는 근거는 아니다.
 
이는 '대안'과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독재를 부르는 순간, 그 대안은 민주주의가 되고, 대안-담론 수준의 민주주의는 정상적인 정당정치, 소통의 원활 등으로 좁혀진다. 다시 1987년 수준의 민주주의로 회귀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독재라는 담론을 사용하는 데 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본질적으로 보면 모든 자본주의 국가와 정권은 독재이다. 다만 정권 형태의 차원에서 '누가 집권'했냐에 따라, 반동적 부르주아지냐 아니면 자유 부르주아지냐에 따라 그 형태상 차별성이 나타날 뿐이다.
 
이런 엄밀한 논의를 떠나서, 담론 수준에서 독재에 대항해 투쟁하자고 대중들에게 외치면, 대중들은 '민주주의'를 요구할 것이고, 그 민주주의는 87년 제8차 개헌에서 규정한 수준 이상으로 나아가기가 어렵다. 즉 민주주의의 계급성이 아주 쉽게 망각된다는 것이다. 지금 운위되는 민주주의는 이른바 독점자본의 정치적 외피로서 민주주의이다. 그 외피에 상처를 내는 반동적 부르주아지들의 지배에 대항하자는 것이 현재 시점이다. 
 
이렇게 긴 이야기를 내가 해버린 하나의 이유는 '독재'란 담론이 지닌 자기 한계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사용하더라도 써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인지되지 않았을 때, 민주주의 투쟁은 대안을 스스로 형성하지 못하고 소멸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내친 김에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억압적 국가기구', 이른바 공권력의 문제다. 일단 전제해야 하는 것은 현재 국가기구의 작동은 80년대적인 것은 아니란 점이다. 이른바 국가-자본관계에서 자본의 지배력이 전일화된 상황에서, 공권력의 동원은 과대성장한 국가의 시민사회에 대한 탄압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은 자신의 장기적 정치이익 - 이른바 경제위기 극복이나 사회안정 등 - 을 위하여 공권력의 노골적인 사용을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총자본과 국가간 이해의 수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MB정권은 자본분파들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능력을 지녔기에, 공권력을 주로 하는 정책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18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국가=억압', '시민사회=헤게모니'라는 얼토당치 않은 말을 그람시가 말한 것처럼 해석했다. 물론 그람시 소개서 중에 그런 해석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람시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자본주의 국가는 늘 억압적이며, 최종 순간에 자본(총자본)을 방어하기 위해서 강제력을 준비하고 예비한다. 이것이 자본주의 국가의 본질이며 억압적 국가장치를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작동 메커니즘이다. 따라서 현재 억압적 국가기구의 작동은 '독재'가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가 총자본의 장기적 정치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자율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나타난 상황이다. 아주 '자연스러운 작동'이라고 할 수 있다.
 
시국선언이 확대되는 와중에 '시민사회는 독재에 맞서고 있다'는 주장이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시민사회는 이념적인 면에서나, 조직적인 면에서 분화가 공고화된 상태이다. 지금 시국선언은 시민사회내 MB정권의 공권력의 과잉 사용과 시민사회내 이익매개 기능의 단절을 비판하며 나온 - 모두가 아니지만 적어도 최대 반대연합이란 의미에서 - 현상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독재와 소통의 부재라는 현실 진단은 매우 제한적이고 현재 상황에서 사회운동의 대안을 스스로 제한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대안이 퇴영적인 만큼 설득력을 시민사회에서 좀 더 넓게 가지기 어렵다는 말이다.
 
혹자는 87년 6월 이전을 회고하며, '좀 더 대중적인 슬로건'을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별로 대중적이지도 못하고, 오히려 시민사회내 존재하는 대항세력의 입지를 좁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추모정국에서 형성된 민주주의-독재 전선을 이동시켜야 한다. 그 이유는 현재 전선이 가진 한계가 너무 명확하기에 그러하다. 그냥 민주주의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민주주의인지에 대해 대중들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역시 이 점에서 나는 죽음으로 형성된 추모정국의 생명력보다는, 금융위기 이후 형성되고 있는 대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제 죽음과 추모에서 한 발 떨어져서 추모 주위에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 냉정하게 살펴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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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춘 "누가, 왜 화해와 용서를 말하나" (프레시안, 강이현 기자, 2009-06-03 오전 9:51:19)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 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화해와 용서를 내세운 신문이 몇몇 있다. 화해, 용서, 해야 한다. 그런데 그 말이 어떤 상황에서,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지가 중요하다. 피해자냐, 가해자냐… 이것이 중요하다. 또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이 어떤 의도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가 중요하다."
 
지난달 25일 서울 통인동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열린 '월요민주주의학교'에서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다수의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퇴임 후 1년6개월도 되기 전에 자살했다는 것"이라며 "순수하게 개인적 이유가 아니라 검찰의 정치성 짙은 수사를 받다가 자살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무엇이, 왜, 어떤 상황이 국민의 대표였던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는지 우리 국민은 질문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김 교수는 "이는 김구, 여운형 암살부터 시작됐던 계속되어온 역사의 비극"이라며 "왜 우리나라 역사는 이렇게 비극적인가, 왜 한국 사회의 한 시대는 한 사람이 죽어야 끝이 나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는 "모든 사람을 낙인찍고,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적대시해서 죽게 만드는 우리 사회 체제가 어디서 온 것인지 성찰해봐야 한다"며 "한국이 처한 전쟁이라는 상황은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 역시 한국 사회의 전쟁, 그리고 군사주의 역사와 맥락이 닿아 있다는 것이다.
 
"현재 남·북한은 사실상의 전쟁 중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도 사실 전쟁 상황이었던 걸 고려하면 한국은 지난 100년 동안 계속 전쟁 상황이었다고 본다. 우리 사회 구성원 간의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김동춘 교수는 "현재 한국을 이끄는 주류 세력의 정신 구조를 이해하는 데에는 전쟁만큼 중요한 변수가 없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그는 "최근 짧은 10년을 제외하면, 한국은 오랜 세월동안 국민들의 자신의 의사를 정당하고 자유롭게 표현하더라도 무사할 수 있던 사회가 아니었다"며 "전쟁 체제는 기본적으로 만성화되고 구조화된 폭력의 체제였고, 그 체제에서 지배 질서의 기둥은 경찰과 군대였다"고 분석했다.
 
"경찰과 군대는 폭력기구다. 그들이 전면에 나서는 사회는 기본적으로 전쟁 체제다. 국가 예산 중 상당 부분이 군대에 지출되고, 국민을 처벌하고 감시하여 그들의 복종을 유도하는 사회, 그것이 바로 전쟁 체제라고 본다. 또 국회와 국민의 감시와 통제 밖에 있는 비밀 국가조직이 무소불휘의 힘을 발휘하는 사회 역시 전쟁 체제다."
 
김 교수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뒤 1961년에 설립된 한국의 국가정보원, 2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 미국의 FBI, 일본에 존재했던 '특별고등경찰' 등을 예로 들며 "비밀조직에게 명분을 제공하는 것은 전쟁"이라고 설명했다. 또 그는 "적과의 전쟁을 명분으로 권력자의 권력을 극대화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집단을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국민을 사찰, 테러, 감시를 묵인하는 체제가 전쟁 체제"라며 "그 극단적인 형태가 학살"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는 한국뿐 아니라 냉전에 있었던 여러 나라에서 나타났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당시의 학살이 멀리 떨어지고 야만적인 현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지금과 시기적으로 멀리 떨어지 않았을 뿐더러 지금 우리 사회가 한 걸음만 더 떼면 저렇게 간다"고 설명했다. 그는 "즉 적과 나의 이분법이라는 광기가 발동하면 그렇게 된다"며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상황 속에서 상대방을 덧칠하고 좌우 양쪽에서 서로를 죽이는 것은 무서운 행동이지만, 준 전쟁 상황인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그런 일이 계속 반복돼 왔다"고 덧붙였다.
 
김동춘 교수는 "국가보안법 등을 기반으로 한 기본적인 사찰 체제는 지난 60년 간 해체되지 않았다"며 "조용한 형태의 사실상의 학살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공권력의 이름을 빌린 합법적 폭력은 언제나 법의 경계를 넘어서 법 영역 밖에서 이뤄져 왔다"며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공권력의 불법성이 한 걸음만 더 나가면 고문과 불법 감금과 학살이 자행되던 그때와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빨갱이 죽이는 것이 뭐가 죄가 돼?' 이런 생각이 과연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사라졌는지 질문해보자. 정치적 반대 세력, 위험한 이의 목숨을 뺏는 것 자체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우리 사회의 문화와 지배 구조가 어디에서 왔는가?"
 
이어 김동춘 교수는 "이것은 곧 한국 지배세력의 문제와 연동돼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나라 국민과 군부, 그리고 경찰이 가지고 있는 좌익 공포증은 정치적 반대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며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자살로까지 몰아간 일종의 가해 매카니즘 역시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발 더 나아가 김 교수는 "자신의 정치적 반대 세력은 물론 회색지대에 있는 세력까지도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는 보수 세력의 태도는 이들이 갖고 있는 태생적 콤플렉스에서 오는 게 아닐까"라고 분석했다. 그는 "일차적으로는 친일 콤플렉스가 보수 세력 심성의 기원을 이룬다"며 "그 세대는 자연적으로 없어졌지만, 문제는 이 콤플렉스가 변형된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친일 세력 이후 스스로 도덕적 정당성을 결여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권력자로 등장했다. 국민을 설득할 어떤 정치적 명분도 없는 상태에서 권력이 주어졌고, 해방 이후에도 미군이 이들을 용인하면서 계속 권력을 쥐었다. 콤플렉스를 가진 이들은 자기들처럼 때가 묻지 않은 사람들이 아닌 사람, 즉 도덕성을 무기로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 그런 사람들이 저항하거나 대드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여기서 지배세력에게 관용과 타협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잘못한 사람이 사죄를 해야 하는데, 문제는 거꾸로가 된다. 자기의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 깨끗한 사람, 바른 말 하는 사람, 공격하는 사람을 용서할 수 없어 이들을 모두 빨갱이로 모는 것, 이것이 우익 콤플렉스의 기원이다."
 
따라서 김동춘 교수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포용력이 좁은 이유는 자신의 정치 도덕성 기반이 그만큼 좁다는 걸 의미한다"며 "흐르는 위기의식과 공포감으로 구성된 우리 사회의 만성적인 콤플렉스가 반대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가져오게 했던 이유가 아닐까"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것을 조금이라도 극복하려 했던 시기는 우리 사회에서 지난 10년 정도로 아주 짧았다"며 "이후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과거 정치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이어 김 교수는 "이런 식의 정치 문화와 지배 체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은 사실 국민"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국민들이 고발하지 않거나, 굴복하거나, 침묵하거나, 항복하거나, 도피하는 까닭은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 때문"이라며 "흔히 전쟁이나 폭력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학하면서 자기 파괴로 가는 과정과 같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지난 60년 동안 한국 사회를 움직여온 전쟁의 트라우마와 지배 체제에 대해 끊임없이 돌파구를 찾는 시도가 계속되어 왔고, 조금씩 변해왔다고 생각한다"며 "그러나 지배 세력이 관성을 쉽게 놓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것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단죄하고, 이를 통한 용서와 화해가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김동춘 교수는 마지막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와 같은 비극적 일을 보면서 너무 생생하게 우리의 현대사가 반복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며 "왜 이런 일이 계속 나타나는지 우리는 곰곰히 돌이켜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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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춘 "노조 운동하면 감옥 갈 각오하는 '민주 국가'?" (프레시안, 강이현 기자(정리), 2009-06-11 오전 6:36:29)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 ②]
 
"지난 20년 동안 한국 사회가 민주화 됐다고 한다. 그런데 노동의 관점에서 보면 과연 얼마나 민주화가 이뤄졌나. 노조 운동 열심히 하고 감옥 가지 않을 수 있는가. 기업 측의 손해배상소송 청구를 당해서 노동간부가 파산하지 않을 수 있는가. 부당노동 행위를 한 사용자가 처벌될 수 있는가."
 
김동춘 교수는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민주화가 진행됐고,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이 당선됐다"며 "이들의 당선에는 어느 정도 노동세력의 힘이 작용했지만 결국 6월 항쟁의 성과로 봐야 하지 않을까"라고 분석했다. 그는 "더 거시적으로 얘기하면 1987년 이후 민주화가 많은 진전을 이뤘지만 질적인 측면을 들여다보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사회 세력은 시민운동과 민주노총 운동, 혹은 진보정당, 혹은 이들을 지지하는 소극적 지지세력 정도였다"고 말했다.
 
김동춘 교수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불평등 지수가 높아지는 것 역시 단시 신자유주의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상쇄시킬 수 없었던 내적 역량의 취약성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의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상황 속에서 외생적 형태로 진행됐다. 자본가도 국가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것이 지금까지도 어느 정도 계속되고 있다." 이날 '계급·계층의 변화와 사회운동의 미래'라는 주제로 강의를 맡은 김동춘 교수는 한국 자본주의의 탄생 배경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한국의 부르주아와 지배 세력은 태생의 한계가 있었다"며 "또 국가주도의 성장정책과 높은 수출의존도 때문에 자본은 국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설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김동춘 교수는 "국가의 후원이란 면세 조치, 수출 특혜 등 각종 혜택으로 자본이 외국 시장을 개척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준 것과 경찰과 검찰을 동원해 노동자들의 저항을 차단하는 것과 두 가지로 집중되었다"며 "이 두 가지로 초기 한국 자본이 성장해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의 대기업은 경제적 자유를 주장하면서도 필요할 때는 국가의 지원과 보호를 요청하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다"며 "또 초기 자본축적 과정에서 권력과의 결탁, 부동산 투기, 탈세, 노동자 탄압 등 온갖 부도덕한 과정을 거쳐서 부를 축적한 도덕적 취약성이 있으며 따라서 국민적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김동춘 교수는 한국 자본주의의 또 다른 특성을 두고 "기본적으로 2차대전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작품이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미·일·한 자본주의가 가진 특성이 있다. 우선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노동 배제 체제다. 미국 자본주의는 노동 운동과의 전쟁의 역사다. 일본도 마찬가지로 사실상 어용노조 밖에 없다. 한국 노조는 공식적으로 허용돼 있지만, 노조 운동은 감옥행을 의미했다." 그는 "또 다른 공통점은 진보정당이 없는 점, 사회 복지나 국가 복지라는 개념이 없는 점, 계급적 연대 대신 교육을 통해 가족이나 개인단위로 출세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도록 끊임없이 성취를 유도하는 사회라는 점"이라며 "특히 한국 사회는 이런 특징이 극우 반공과 함께 굴러가는 정치경제 체제"라고 설명했다. 이어 김동춘 교수는 1987년 6월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겪은 뒤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자본주의를 설명하며 그냥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 안일한 해석이며, "개발독재가 변형된 신자유주의"라고 지적했다. 그는 "남미와 한국처럼 개발독재형에서 신자유주의로 넘어간 나라는 사실상 자유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았다"며 "이는 어느 정도 복지 체제가 남아있는 서유럽 등과 다른 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1987년 이후 한국 자본주의를 설명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지구화"라며 "특히 서비스 부문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늘어났고, 이는 노동유연화와 연결되면서 비정규직의 숫자가 50%대까지 늘었다"고 말했다. 그는 "세 번째 특징은 주주자본주의"라며 "국민의 다수가 주식 투자자가 되면 이들은 자기의 정체성을 노동자로 생각하지 않고, 주주로 생각하게 되고, 노조의 파업에 반대하는 현상이 벌어진다"고 설명했다.
 
김동춘 교수는 1987년 이후 한국 사회의 또 하나의 특징으로 '비대칭적 계급구조화'를 들었다. 그는 "지배층으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의 계급으로 뭉쳐온 반면 사회적 약자, 소수자, 노동자는 계급으로 뭉치지 못하는 현상이 존재했다"고 설명했다.
 
"1992년이후의 총선과 대선을 분석해보면 소위 '강남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투표행태를 '여촌야도'로 설명했지만, 1992년을 계기로 서울에서도 부유한 지역에서는 일관되게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또 계급구조화가 진행된다는 것은 부가 세습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매개체가 결혼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재벌가는 재벌가 끼리만 결혼하고, 명문대 입학자의 출신 배경이 고착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김동춘 교수는 "반대로 노동 세력은 현실정치에서 하나의 세력이나 계급으로 단결하지 못했다"면서 지역주의와 낮은 계급의식이 중요한 원인이지만, "친노동 후보가 나오더라도 현실 정치의 한계 때문에 노동자들은 힘이 있는 쪽을 지지한다"며, 민주당의 애매한 노선도 노동세력의 취약성과 연관시켜 설명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정치 세력화가 되지 않는 노동 운동은 비정규직, 서비스화, 위로부터의 노동 탄압과 맞물리면서 조직률이 떨어졌다"며 "민주노동당이 2004년 10석을 얻은 것 역시 노동 운동의 힘보다는 선거제도의 변화 즉 비례대표제를 도입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노동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민주화는 아직 요원해보이기만 한다. 그러나 최근 한국 민주화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바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이어진 거대한 추모 행렬이다. 김동춘 교수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 18대 총선 결과 온 국민이 '경제 동물'이 된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다수의 국민들은 최소한의 양심과 정의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조문의 성격"이라며 그들은 "돌아가신 노 전 대통령을 애통해하고 그리워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자기 자신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고통을 슬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많이 가진 이들은 그렇게 슬퍼하지 않았다. 많이 슬퍼한 사람일수록 스스로가 많이 힘든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노 전대통령의 죽음과 자신의 처지를 같은 것으로 본다. 통칭 서민이라 불리는 약자, 당하고 산 사람들, 차별 받았던 이들이 더 많이 슬퍼했다고 본다."
 
김동춘 교수는 "더 많이 슬퍼한 바로 그 사람들이 정말 단결해야 할 사람들"이라며 "누가 자기를 대변할 수 있는지 깨달아야 할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런데 이들 대다수는 노조활동을 한번도 접해보지 못하고 시민단체는 잘난 사람들이 주도하는 것으로만 아는 사람"이라며 "조문한 수백~수천 만 명의 에너지를 어떻게 현실적 동력으로 전환시킬지는 결국 진보정당, 시민단체, 노조에 던져진 숙제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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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진짜' 노무현 기념 사업을 하고 싶다면…" (프레시안, 강이현 기자(정리), 2009-06-17 오전 8:23:23)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 ③]
  
정말 '노무현 대통령'을 기리는 일은 어떤 것일까?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아르헨티나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기념 사업도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 8일 서울 통인동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열린 '월요민주주의 학교' 강연에서 손호철 교수는 "문제는 노무현 정신"이라며 "질 줄 알면서도 올바르다고 생각하면 부딪혔던 용기를 가진 제2, 제3의 바보 노무현을 양산하는 게 그 첫 번째"고 지적했다. 아울러 그가 꼽은 두 번째 노무현 정신이 있었다. 바로 지역주의 극복이다. 이는 이날 강연의 주제이기도 했다.
 
"한국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1987년까지는 민주-반민주가 압도적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1987년 이후 불행히도 지역주의가 전면화됐다. 민주-반민주 구도는 약화됐지만 사라지지 않은 채 이어졌고, 지역주의의 압도적 우위가 계속됐다. 거기에다 부상하고 있지만 자리잡지 못한 진보-보수 구도가 결합된 상태, 이것이 한국 정치다."
 
우선 손호철 교수는 1987년 양김(김대중-김영삼)의 분열을 꺼내며 "지역주의에서 양김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며 "이로써 민주화가 5년 늦어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둘이 연합해서 민주화 운동을 해도 될까말까 했는데, 한 김이 군사세력과 연합해서 다른 한 김을 죽이는 3당 합당과 DJP연합이 나왔고, 결국 계속 캐스팅보드는 군사 세력이었다"고 말했다.
 
손 교수는 "한국 지역주의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호남-영남의 대결이었다는 인식"이라며 "부마 항쟁만 보더라도 TK와 PK는 전혀 다른 세력이었고, 부산-경남과 호남은 저항적 지역주의를 이뤘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양김이 분열하지 않았다면 민주-반민주의 구도로 TK 대 PK-호남의 대결이 치뤄졌을 것"이라고 "노무현의 비극은 이 속에 뿌리가 있다고 본다"고 분석했다.
 
"1987년 3김이 떨어져나오면서 4개의 지역당 구도가 나왔다.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민정당, JP를 중심으로 한 공화당, 이 두 개는 군사독재세력이었다. 그리고 YS와 DJ가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을 들고 나왔다. 호남과 PK는 저항적 지역주의였다. 그 지역구도 때문에 1988년 총선에서 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가 일어나게 됐고, 노태우는 정계 개편을 해서 야당과의 연정을 시도한다. 그러나 원래 생각과 다르게 3당 통합이 이뤄졌다. 이는 결국 군사독재 세력과 민주화운동 세력의 연합이면서 지역 연합이었다. 호남을 소외시킨 나쁜 연합이었다."

손호철 교수는 "이때 YS를 따르던 정치인 중 그를 따르지 않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노무현이 있었다"며 "또 제3의 길을 원하던 유권자들은 무주공산이 됐는데, 이들은 비호남 야성 유권자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반노(反盧)와 친노(親盧)의 뿌리는 거기에 있다"며 "제3후보의 가능성이 항상 남아있었고, 이는 1992년 정주영 이후 이인제, 노무현, 김두관, 유시민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문제는 이 유권자들이 지역구조의 우위 아래 민주-반민주를 선택했다는 점"이라며 "거기에서 열린우리당의 비극 등 모든 갈등이 시작됐다"고 덧붙였다.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은 떠나고 부산의 정치인 이기택이 민주당을 이어받아 지도부를 했다. 당시 민주당의 탈지역화가 어느 정도 일어났다. 그러나 1995년 지자체 선거에서 김대중이 나오면서 탈지역주의는 깨졌고, 노무현은 부산시장 선거에서 참패했다. 이후 DJ가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들어 나올 때 또 안 따라간 이들이 노무현을 비롯한 몇몇 개혁후보였다. 노무현의 정신, 3김정치의 극복과 지역주의의 극복을 내건 그의 첫 실험이 이것이었다."
 
손호철 교수는 "1997년 대선에서 노무현은 정권교체를 위해 자신과 대립했던 김대중 진영으로 갔고, 이후 해양수산부 장관을 거쳐 대선에서 당선됐다"며 "그러나 지역주의 극복은 그에게 버릴 수 없는 과제였고, 열린우리당을 통해 시도했지만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게 됐다"고 말했다. 손 교수는 "아무리 지역주의를 욕해도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갈등구조가 생기지 않는한 이는 영원할 것"이라며 "2004년에는 탄핵과 반탄핵이라는 중요한 이슈가 있었고, 1987년 이전엔 민주-반민주라는 압도적인 구조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 한국 정치는 초계급적 지역 연합이라고 생각한다"며 "그걸 깰 수 있는 방법은 거꾸로 가는 것, 바로 초지역적 계급 연합"이라고 말했다. 지역을 가리지 않고 '걸인'부터 '재벌'까지 자기 지역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 초계급적 지역연합이라면 지역을 넘어 노동자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 초지역적 계급연합이다.
 
그는 "진보 정당이 크고, 한국 정치가 진보 정치로 가는 것만이 지역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며 "노무현 정신을 실현하는 방법은 진보정당 키우는 것이 현실적인 답"이라고 덧붙였다. "노 전 대통령이 '이제는 진보 정당을 도와줘야겠다'고 말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딜레마는 지역주의를 깰 수 있는 강력한 해답이 진보정당인데, 다시 가장 커다란 장애는 지역주의라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전국 평균 3%를 얻었는데, 가장 득표율 낮은데가 대구가 아니라 광주였다. 그런 지역적 딜레마를 푸는 것이 한국 정치의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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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아직도 진보·보수 타령인가?" (프레시안, 강이현 기자(정리), 2009-06-24 오전 7:54:31)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 ④]
 
"더 이상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으로 한국 정치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지난 15일 서울 통인동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열린 '월요 민주주의 학교' 강연을 맡은 손호철 교수는 "한국 정치를 볼 때 진보, 보수, 개혁의 의미를 잘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한국 정치에서 핵심 화두는 개혁이었다. 그러나 개혁이라는 단어를 사회과학적으로 분류하지 않고 사용했기 때문에 혼란에 부딪혔다. 특히 한국에서는 두 가지 개혁을 뭉뚱그려 보고 있다. 민주 개혁과 신자유주의 개혁이 그것이다."
 
우선 손호철 교수는 "개혁은 부단히 재생산되고 다시 등장한다"며 '개혁'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의 역동성을 지적했다. 그는 "현재 한국 사회는 진보 대 (흔히 개혁 세력이라 부르는) 자유주의적 보수 내지 개혁적 보수 대 (흔히 보수라 부르는) 냉전적 보수의 삼분구도가 있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손 교수는 "민주주의 전선과 신자유주의 전선이라는 두 개의 개혁, 두 개의 전선이 있다는 것에 주의하라"며 보수 세력으로부터 '좌파'라고 공격을 받았던, 또는 '진보' 정권이었다고 일컬어졌던 노무현 정부가 진행했던 개혁의 성격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주문했다.
 
손 교수는 "2004년 총선에서는 탄핵의 역풍을 맞으면서 한국 헌정 사상 최초로 자유주의 세력이 과반수를 차지했다"며 "그 여세를 몰아 노무현 정부는 언론법, 국가보안법 폐지 등 자유권에 해당하는 권한을 확대하는 개혁 법안을 들고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노무현 정부 역시 오히려 집회와시위에관한법률(집시법)을 개악하는 등 자유권 확대 측면에서 많이 기여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손 교수는 "반면 신자유주의 개혁의 대표적 사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라며 "그때 지지층과 열린우리당 내에서 강한 반발이 일어난다. 사실 '한나라당과 우리가 별로 다르지 않다'고 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 정확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다른 예는 김근태 의원이 당 대표였던 시절인데 사실상 한나라당과 연정을 해서 비정규법안을 날치기 통과시킨 것"이라고 지적했다.
 
손호철 교수는 "즉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개혁은 '자유민주주의'로 가는 개혁이었지, 자유민주주의를 넘어 진보로 나가는 게 아니었다"며 "극우로 왜곡됐던 한국의 보수를 '글로벌 스탠더드'의 보수, 즉 정상적인 자유민주주의로 정상화하는 과정이었다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국가보안법 폐지에 찬성하면 진보인가? 자유민주주의는 틀린 주장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사회이다. 따라서 국가보안법 폐지 주장의 정체성은 자유민주주의가 된다. 국보법 폐지의 찬반 여부는 진보-보수가 아닌 보수-수구, 정상적 보수-극우의 갈림길이었다."
 
또 손 교수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경제 규제를 했으니까 좌파 정부였다"는 주장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최고 좌파는 박정희가 아닌가? 햇볕정책 때문에 좌파 정부였다? 그 정책은 페리보고서를 베낀 것이었다. 복지 정책? 김대중과 노무현 복지 정책의 수준은 유럽과 미국 신자유주의의 5분의 1 정도였다. 두 정부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적 세력이었다." 손호철 교수는 "이 둘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헷갈리는 것"이라며 "예를 들어 자본가 입장에서 보면 신자유주의 개혁은 좋은데 국보법은 폐지하지 않는 게 좋은 것이다. 앞으로 개혁이라는 말이 나오면 이게 민주 개혁인지, 신자유주의적 개혁인지 분류해보라"고 지적했다.
 
이어 손호철 교수는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대우자동차와 쌍용자동차 사태 역시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신자유주의 개혁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그는 "당시 정부는 경찰을 동원해 노동자들의 파업을 짓밟고 싼 값에 대우자동차를 GM에 팔았다"며 "국부를 거덜내는 방식으로 팔았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런데 그 장본인인 민주당이 대우를 살리겠다며 폼을 잡고 나오고 있다"고 질타했다.
 
손 교수는 "김대중 대통령이 지난해 경제위기를 봤다면, 신자유주의 정책이 잘못됐었다고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며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성이 일고 있는데 청개구리처럼 거꾸로 가는 건 이명박 정부만이 아니라 뉴민주당 플랜을 들고 나온 민주당도 똑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 역사성 정확히 알고 넘어가야 한다. 물론 그때의 국면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손호철 교수는 "결국 경제를 살렸지만, 결과로 무능보다는 부패가 낫다며 이명박 대통령을 찍었다. 원조 무능은 한나라당인데도 그런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국민 대다수는 경제위기가 아직 극복되지 않아서 못 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못 사는 이유는 경제 위기가 신자유주의적으로 극복됐기 때문"이라며 "이제 민생의 어려움은 경제위기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영원한 우리의 미래가 됐다"고 전망했다. "자유주의 10년, 결과는 민생 경제의 실패와 양극화가 됐다. 중산층과 서민 정부 표방하고 나섰지만 경제적 측면에서 반서민적 정권이었다. 전두환, 박정희보다 빈부 격차를 심화시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이 결국 박정희 향수를 불러오지 않았나."
 
손 교수는 "그런데 이명박의 중요한 공이 있다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가장 사회적 양극화를 심화시킨 반서민적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씻어준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민주당을 보면 신자유주의 개혁이 민주 개혁의 발목을 잡은 셈"이라며 "민주당으로서는 민주 개혁만이 한나라당과 구별한 자신의 정체성인데도, 신자유주의의 개혁에 발목을 잡히는 딜레마에 빠졌다"라고 지적했다. 끝으로 손호철 교수는 "결국 신자유주의 업보를 풀지 않는 한 우리 사회의 어려움들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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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그들은 민주주의를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프레시안, 강이현 기자(정리) , 2009-07-03 오전 8:49:37)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 ⑤·끝]
 
"한국에 파시즘이 오는가?" 정권은 더욱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고 있다. 서울광장, 광화문, 쌍용차 평택 공장, 용산 참사 현장 등 곳곳에서 경찰은 '철통 경비'를 서거나 정부에 비판적인 집회와 기자회견을 막고 참가자를 연행한다. 지하철과 버스정류장 곳곳이 '집회'를 막는다는 이유로 통제된다. 정부 정책 홍보를 위해서라며 극장에 '대한 늬우스'가 상영된다.
 
그러는 사이, 언젠가부터 '파시즘'이라는 단어가 다시 지면 위로 등장했다.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는 이명박 정부를 두고 "파시즘 초기"라고 일갈했다. 지난 6월 29일 손호철 서강대 교수가 진행한 강연의 주제도 바로 파시즘이었다.
 
손호철 교수는 우선 파시즘 논쟁에 앞서 파시즘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과거 파시즘 논쟁은 굉장히 감정적이고 정치 선동적 측면이 많았기 때문"이라며 "정치적 코드, 선정적 용어로서의 파시즘이 아니라면 파시즘에 대한 좀 더 과학적인 정의가 무엇일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우선 독일과 이탈리아를 파시즘의 전형으로 생각하는 시각이 있다. 손호철 교수는 "히틀러 동원에 움직이는 대중들을 연상하듯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와 동원, 그리고 파시스트당이 전형적인 파시즘에 대한 인식"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두 번째 시각은 파시즘이 독일과 이탈리아 등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1920~30년대 동유럽과 남유럽에서 전반적으로 일어난 광범위한 현상이라고 보는 관점"이라며 "파시즘에서 대중적 지지는 일반적 현상이 아니며 출현 과정은 나라에 따라 다르다고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손호철 교수는 "따라서 현재 한국에 파시즘이 오는가의 여부를 따질 때 억압성의 전면화냐, 또는 광범위한 대중의 자발적 지지에 기반하느냐라는 두 개의 이슈가 개입돼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러나 파시즘의 기본은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 여부가 아니라 20세기 초반에 나타난 독점자본주의로 성장하면서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반동적 재편이 있었느냐의 문제라고 본다"며 "이승만 정권을 두고 파시즘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그 정권이 덜 억압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독점 자본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파시즘이 나오게 된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며 "결국 경제 공황 속에서 자유주의 정권들의 경제 위기 극복 능력이 무능했고, 그것에 따라서 첨예한 계급 갈등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도 비슷하다. 민생의 위기와 양극화가 바로 파시즘이 나오게 된 계기라고 볼 수 있다"며 "자유주의 정권의 무능, 사회적 갈등의 첨예화라는 점에서 우리도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손호철 교수는 "MB 정부는 현재까지 두 시기로 구분될 것 같다"며 "집권 이후 2008년 광복절까지가 촛불 시위 방어에 급급했던 수세기라면 광우병 집회 이후 공세로 전환됐고, 월스트리트발 금융 위기를 핑계로 이같은 공세를 더욱 강화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2기를 중심으로 얘기한다면, 이명박 정부는 우파 신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적 토건 국가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파시즘 체제가 나오게 되는 기본적 틀은 국가의 경제 개입"이라며 "대공황을 가져온 것은 시장이었고, 미국이 그 위기를 뉴딜을 통해 해결했다면, 독일과 이탈리아는 억압적 국가 개입을 통해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은 그것과 전혀 다른 신자유주의적 방식이 이뤄지고 있다"며 "금산 자본 분리 완화, 비정규직 법안 추가 개악, 최저임금제 부분적 해제, 부유층 감세, 삽질 경기 부양책 등 기본적으로 친자본주의고 반동적인 경향을 동일하게 나타나지만 국가 개입이 아니라 규제 완화라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신자유주의 위기를 해결할 때, 부유층에 증세하고 빈곤층에 감세하는 부의 이전을 하는 오바마적 해법이 있다면 MB식 해법은 정반대"라고 지적했다. 그는 "오히려 부자를 감세하고, 재정 적자가 나니까 부가가치세를 높이는 방식을 통해서 부가 더욱 더 부유층에 이전되게 하며 위기를 극복하려 하고, 다양한 저항을 억압적 방식으로 누르는 신파시즘으로 가는게 아닐까"라고 덧붙였다.
 
손호철 교수는 "또한 정권의 성격과 상관없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게 되면 민중의 저항이 나오기 때문에 이를 누르고 진행하기 위해 경찰국가의 특성이 나타난다"며 "이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도 어느 정도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신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양극화를 가져오고, 그래서 경찰국가로 갈 수밖에 없다"며 "그래서 항상 레이건, 부시 정부가 작은 국가를 얘기하면서도 법과 질서, 경찰 증원을 요구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손 교수는 "결국 정부가 민주 정부이냐에 상관없이 신자유주의적 정치를 펴게 되면 경찰 국가 경향이 내재돼 있다"며 "그런데 MB 정부는 플러스 알파"라고 덧붙였다. 그는 "현재 정치적 민주주의의 핵심인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사상의 자유 모두 후퇴하고 있다"며 "더군다나 MB악법들이 통과될 경우 이는 더 가속화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뿐만 아니라 제왕적 대통령이 부활하고 있다"며 "최근 이뤄진 검찰청장, 국세청장 임명이 제왕적 대통령 부활을 또 다시 예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러나 그럼에도 아직까지 예외적인 파시즘 국가라고 보기에는 헌정 질서의 중단이나 의회 민주주의적 틀의 철폐와 같은 극단적 조치는 아직 없다"며 "나는 이것이 야금야금 갉아먹는 것 같은 '크리핑 파시즘(creeping fascism)의 경향으로 본다"고 주장했다.
 
손호철 교수는 "그런데 중요한 것은 파시즘이 MB 정권이 끝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다"라며 "또 우파 신자유주의도 꼭 MB 문제로 환원해선 안 된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는 한국적 특수성과 관련해 봐야할 문제"라며 "한국적 파시즘의 대중적 기반이 인구가 많은 영남에 있다는 지역주의적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손 교수는 "또 50대 노령층과 근본주의적 기독교층도 한국적 파시즘의 대중적 기반이 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손 교수는 "그러나 낙관적 요소도 있다"며 "한국의 경우 이념적 정체성이 뚜렷한 것이 아니라 최장집 교수의 표현대로 일종의 열망·실망의 사이클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즉 현 국면은 국민의 반동화가 아니라 실망의 사이클 때문이라고 본다"며 "10년쯤 뒤에는 다시 냉전세력에 대한 실망으로 국민의 재진보화가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이어 손호철 교수는 "또한 25~30%의 무당파가 계속 침묵하거나 한나라당을 지지할 경우 MB의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에도 70~75%가 지지 내지 침묵을 하는 것이 돼 '파시즘적 경향'이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25~30%를 어떻게 끌어내고 조직할지가 중요할 것"이라며 "단순히 상층부 연합이 아니라 오바마처럼 풀뿌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문제는 파시즘이 뭐냐에 대한 훈고학적 논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민주주의가 공격받고, 이에 대해 다수가 침묵한다면 이미 파쇼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체제로서의 파시즘은 아니더라도. 결국 민주주의냐 파시즘이냐는 것은 예측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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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8 19:43 2009/06/28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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