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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영. 2006. 『협력형 통치: 원효ㆍ율곡ㆍ함석헌ㆍ김구를 중심으로』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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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영. 2006. 『협력형 통치: 원효ㆍ율곡ㆍ함석헌ㆍ김구를 중심으로』. 서울: 열린책들.
 
[고전과 행정학]이라는 강의를 하면서 이문영 교수의 책을 읽게 되었다. 이 강좌가 개설된 것도 이문영 교수가 강의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재로 하려고 했던 『논어ㆍ맹자와 행정학』(나남, 1996)을 사서 읽으면서는 이걸로 강의해서는 그렇지 않아도 재미없는 강의가 쫑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7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이 논어, 맹자 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이문영 선생의 민주화운동 경험까지 얽혀서 학생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동안 정리했던 행정학의 각 분야별로 강의안을 배포하고 여기에 관련된 고전의 내용을 인용하기로 하였다. 
 
지금까지 공공성, 민주주의, 방법론으로서의 관계론, 조직론까지 강의를 했다. 나중에 거버넌스에 대해서도 강의를 하겠다고 했고, 이문영 교수의 『협력형 통치』가 나름 이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고, 또한 관료조직과 민회를 비교하면서 서술한다는 점에서 시사점이 있을 것으로 보았는데, 한 삼일동안 700여페이지 되는 이 책을 읽고 나니 내가 이걸 왜 읽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논어ㆍ맹자와 행정학』보다 더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오기로 일단 보기 시작한 것을 끝을 보겠다고 했는데, 역시 오기는 부릴 것이 못 된다. ㅡ.ㅡ;;
 
특히 이 책을 읽으면서 이문영 교수에 대한 환상이 많이 깨졌다. 70년대의 민주화 운동의 한계를 이 책에서 발견한다. 물론 이문영 교수는 과거와 다른 행태를 보이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하에서의 여권인사들에 대해 비판하고 있기는 하지만, 곳곳에서 구태의연함이 드러났다. 어쩌면 이것은 이문영 교수가 여든이 넘은 나이 때문일 수도 있겠다. 
 
분명 유교와 기독교 등의 고전을 묶어서 자신의 개인사와 관련시켜 서술하는 그의 시도는 참신한 것임에 틀림 없다. 또한 박사학위 논문에서부터 일관적으로 일, 방법, 사람의 범주에 따라 비폭력, 개인윤리, 사회윤리, 자기희생으로 이어지는 분석들은 그 독자성을 인정해주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이 책이 학술서적인지, 아니면 교양서적인지가 불분명한 것이다. 게다가 독자도 모호하고... 
 
서론에서 이문영 교수는 자신의 많은 제자들(대부분 행정학 교수다)과 지인들이 관련 분야에 대해 코멘트를 해주고 인식의 폭을 넓혀주었음을 밝히고 있다. 물론 연세가 있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러한 류의 책에 대해 진지한 비판을 해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지인들이 그러한 비판적인 언급을 했다는 사실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아래에는 이문영 교수의 책 중에서 나름 뽑아놓은 것을 옮겼다. 물론 고전을 인용한 부분도 옮기긴 했는데, 아래에서는 뺐다. 아래의 인용문 다음에 코멘트를 한 것이 있는데, 그 외에도 코멘트할 것이 상당하지만, 나중에는 귀찮아서 내버려두었다. 여기서 코멘트할 내용이란 주로 나와 의견이 다른 것들이다. 사회주의에 관한 내용, 한국사에 관한 사항,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보는 관점 등.

 


○ 『논어ㆍ맹자와 행정학』(나남, 1996)에는 <신인의예지(信仁義禮智)>가 통치조직을 푸는 대안으로 나오는데, 신(信)이 봄이고, 지(智)가 여름이고, 인(仁)이 가을이고 의(義)가 겨울이다. 신인의예지의 순서를 계절의 순서대로 해 <信智禮仁義>로 본 것이 이 책이었다. 그 책에서 봄을 비폭력, 여름을 개인 윤리, 가을을 사회 윤리, 그리고 겨울을 자기희생으로 보았다(이문영, 2006: 14).
 
○ 원효는 나라를 준비할 때의 인물이며, 율곡은 관료 조직 시대의 인물이며, 함석헌은 민회 시대의 인물이며, 김구는 관료 조직과 민회가 형성된 이후 시대의 인물이다(이문영, 2006: 18).
 
○ 관리(management), 정치(politics), 그리고 통치(governance)의 순위가 좀 더 고급화해 온 행정 행위를 나타낸다. 따라서 제일 차원이 낮은 행정 행위가 관리이다. 정치는 관리를 포함하며, 통치는 관리ㆍ정치를 포함한다.
 
물건을 만들기 위하여 심할 때는 사람이 사람을 눌러서 행정하는 단계가 관리이다. 따라서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협력 없이 강압으로도 성과가 잘 나올 수 있다.
일하는 사람 아닌 국민 일반의 여론을 의식하는 단계가 정치의 단계이다. 정치의 단계에서는 통치자는 인간을 목적시해 기본권을 가진 인간으로 생각한다기보다는 정권을 지지하는 표를 가진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이어서 이간을 수단시한다고 볼 수 있다(이문영, 2006: 42).
 
○ 행정학은 인간의 도덕과 수양을 다룰 뿐 아니라, 인간의 도덕과 수양을 전제로 한 통치 이론을 다루는 학문이다. 『논어』, 『맹자』를 행정학의 틀에서 조명한다는 것은 『논어』, 『맹자』를 내면화하고 비역사화한 성리학에 대한 하나의 이견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문영은 주자의 주석에 반드시 동의하지는 않았고, 다만 『논어』와 『맹자』의 본문이 풍기는 따뜻함에 매료되었다(이문영, 2006: 50).
 
행정학은 결코 물질일 수 없고 나아가 홀로 존재하는 존재인 ‘사람’이 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좋게 하는 ‘일’을 하되, 사회적 능률의 행정을 도모하면서 수행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학문이다(이문영, 2006: 103-4).
 
○ 『논어』, 『맹자』를 통틀어서 그 취지를 요약하는 문장(이문영, 2006: 51)
不得而非其上者非也 爲民上而不與民同樂者亦非也  ―「梁惠王」下 4장의 2
못 얻었다고 그의 상(上)을 비난하는 자도 안 되며, 백성의 위에 있으면서 백성과 더불어 함께 즐기지 않는 자도 안 된다.
 
○ 『논어』, 『맹자』의 원문이 심하게 왜곡된 사례(이문영, 2006: 51-52)
1) 『논어』, 『맹자』에는 충(忠)자도 있고 효(孝)자도 있지만 충효(忠孝)라는 집권 이념을 적지는 않았다. 충효라는 개념은 효를 가정에서 행하게 하되 효하듯이 왕에게로의 충성을 훈련코자 하는 조선조의 집권 이념이었다. 이러한 조선조의 왜곡 때문에 충과 효도 원문의 따뜻함이 왜곡되었다. 원문의 충은 마음을 다한다는 뜻이지 마음이 없는데도 살기 위해 두려워한다는 뜻이 아니다.
2) 모든 백성에게 3천 평의 토지를 보장하라는 맹자의 항산책(恒産策)이 조선조에는 없었다.
3) 지방 분권이 조선조에는 없었다. 『논어』에 보면 이웃 나라를 공격하기를 즐기는 제자를 공자는 미워한다. 중국은 지방 분권의 전통이 있어서 수많은 이민족이 자치구를 만들어 산다. 이에 비해 한국의 수도 서울에는 차이나타운이 하나도 없다.
4) 조선조는 여자를 차별해 이른바 칠거지악(七去之惡)을 정했는데, 이런 말이 『논어』, 『맹자』에는 없다.
요약하면 조선조는 『논어』, 『맹자』를 실천한 나라가 결코 아니었다.
 
○ 조선조의 전통을 이어받은 오늘날에는 관료주의(bureaucraticism)는 있어도 관료제도(bureaucracy)는 없다. 관료 조직이란 최고 통치자 밑에 계층별로 직위가 배열되어 있되, 각 직위에서 일하는 공직자가 맡은 직무의 난이도에 알맞은 권한을 부여받고 있는 조직을 말한다. 관료주의 조직 문화만 있고 관료 조직이 없기 때문에 ‘국민의 정부’ 시대에 대통령 밑에 장관ㆍ국장ㆍ과장ㆍ계장의 계층 질서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 친인척, 가신, 가신의 부하 등이 있고 그 아래에 장관이 있게 된 것이다(이문영, 2006: 52-53).
 
○ 공자와 맹자의 주장은 은나라의 전제 정치를 극복한 주(周)나라의 약 8백여 년간의 경험과 역사를 흠모해서 묘사해 낸, 옛것을 사모해 새것을 안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한 글이며, 좋은 것을 그대로 베끼되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술이부작(述而不作)한 글이다(이문영, 2006: 53).
 
○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는 행정부에서 볼 수 있는 관료 조직의 면도 있지만 수평적 정권 교체로 탄생한 정부이기에 자신이 민회를 이해했어야 했고, 일단 집권 후엔 민회라는 야당 조직과의 경쟁을 기대하는 민회 문화 속에 있어야 했다. 관료 조직이 힘을 모으는 방법은 수직적 관계에서의 상(上)의 합리적인 지시에 따르는 하의 복종이다. 이 지시는 상의 자의(恣意)에 맡겨지기 마련이어서 횡포가 되어 관료 조직이 아니라 관료주의 조직으로 만들기 마련이다. 한편 민회가 힘을 모으는 방법은 수평적 관계에서의 합리적 민간인의 이견 제시, 항의, 그리고 협조 등을 통한 구성원과 통치자 간의 합의이다(이문영, 2006: 55).
 
○ 김구의 사상에서 세 가지가 통치 제도의 요소로 발견된다. 하나는 해당 통치 체제 밑에서 가장 비천한 피치자가 철저하게 나라의 주인이 되며 또한 돌봄을 받는다. 둘은 통치 체제의 규모는 최소한이다. 셋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협의망이 넓고 크다(이문영, 2006: 66).
 
○ 향후 민주화 운동을 개화하는 것이 과제이다. 여기에는 분권형 통치를 하여 ‘문민 정부’가 못다한 일을 하고, 부패를 척결해 ‘국민의 정부’가 못다한 일을 하고, 과다한 참여를 억제해 ‘참여 정부’의 과제인 민회 문화를 창달하는 것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제 수행은 동시적으로 국제 간의 협력을 도모해 미래의 세계 정부에 기여하는 일이 될 것이다(이문영, 2006: 67).
→ 노무현 정부에서 과다한 참여가 문제였었나. 과다한 참여 억제로 달성되는 민회가 타당한 것인지 의문이다.
 
○ 이 책의 시대 구분을 한 근거는 좀더 협력적 통치를 가져오는 통치 조직의 등장 순서를 따른다. 제1부 <통치의 여명>에서의 통치 조직은 아직 관료 조직 국가도 정확하게 등장하지 않았던 시기이다. 원효 때만 하더라도 자신의 자식 설총을 나라를 떠받드는 기둥으로 길러 내고자 하여 자신과 같은 승려로 만들지 않았고, 관료 조직 이론이 갖고 있는 유학의 대학자로 설총을 만들었던 시기가 통치의 여명기이다.
상급자라고 하급자에게 함부로 자행하는 관료주의적 조직이 아니라 상하 간에 부여된 직무에 순응하는 고유한 권한이 상급자로부터 위임된 관료 조직이 제2부의 과제이며, 여기서 앞세운 인물이 율곡이다. 제3부의 과제는 이미 형성된 관료조직에 중첩적으로 민회가 부가된 좀 더 고급의 기능을 갖는 단계이다. 제3부에서도 물론 함석헌을 앞세우고 있다. 제4부의 제목 <세계 정부>는 제3부의 제목 <민회>보다도 좀 더 비현실적 제목일 수 있다. 미래의 정부이기 때문이다. 제4부의 첫머리에 내세운 인물은 김구이다(이문영, 2006: 67-68).
 
○ 좋은 통치 현상의 특성은 행정이나 통치의 방법, 수행하는 일, 그리고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다. 즉 행정 방법은 유연해야 하며, 행정이 하는 일은 피치자의 살아 숨 쉬는 일상적인 삶에 직결해야 하며, 일하는 공무원 담당자는 행정 계층에 매인다기보다는 일 고유의 요청에 매여야 한다(이문영, 2006: 75).
 
○ 두 개의 질문 <왜 협력형 통치이며, 왜 이를 고전으로 읽나?>는 두 개의 질문이 아니고 하나의 질문이다. 무릇 권위형 통치를 불식해야만 협력형 통치가 되는데, 인류가 협력형 통치를 맞이하게 되는 현상과 책을 거듭 많이 읽는 현상이 동전의 양면과 같은 동일 현상이기 때문이다(이문영, 2006: 78).
 
○ 관료 조직 문화와 민회 문화는 두 개의 큰 통치 조직 문화이다. 전자는 기원전 약 1100년경에 독재 정부 은(殷)을 전복하고 주(周)나라를 약 8백 년 동안 관료 조직으로 유지한 문화이다. 『논어』, 『맹자』는 이 주나라 제도의 붕괴를 아쉬워해 쓴 관료 조직 문화의 이론서이다. 한편 민회 문화는 기원전 약 1200년경에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유대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해 나라를 세운 경험에 근거한 문화이다. 민회 문화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사실부터가 탈출한 새 조직이 노예이기를 멈추고자 한 시민이 조직한 통치 조직이기에 관료 조직이 아니라 민회이다. 민주 국가에서 보는 노동조합, 대학, 국회 등은 세속 사회에서 교회의 닮은꼴로 만든 민회의 전형적인 예이다.
 
민회가 관료 조직 문화를 내포하기에 협력형 통치를 설명하는 문장은 예수가 마지막 유언으로 남긴 말이라 할 수 있다(이문영, 2006: 79).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의 복음서」13장 34절
 
제1부 통치의 여명
 
○ 원효는 나라 안의 사람들과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이문영, 2006: 117-118). 1) 동물같이 잇속을 따라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특성을 살려 사는 것, 즉 옳음을 따라서 살라는 것이다. 2) 정치인에게 하는 가르침으로, 권력을 잡으려고만 하지 말고 나라 안 사람들과 협력해서 그 결과로 권력을 잡으라는 것이다. 3) 원효는 나라 안의 사람들과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준 후에 정권으로부터 이득을 얻지 않는 것을 나라 안 사람들과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1. 나라가 믿게 하는 신 같은 교조적 이념이나 주의 같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신을 부인해서 불이익을 받을 정도의 비판 정신을 소유한 자들이 해당 사회 안에 많이 있어야 한다.
2. 서로 죽이고 나만 사는 정치가 아니라 나라의 가장 비천한 자와도 서로 협력하는 모습의 정치가 있어야 한다.
3. 정권을 쥔 정치로부터 자율적인 지식인 활동을 포함한 여러 종류의 활동이 해당 사회 안에 있어야 한다.
 
○ 당에 대한 항전에 신라는 홀로 당과 싸웠다. 3국과 연합해 당과 싸움으로써 외적으로는 당으로부터의 독립도 쟁취하고, 내적으로는 삼국 연합 정부를 만들 수 있는 성숙한 정치를 펴지 못했다. 이 점은 미국 건국을 통해 외적으로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도 얻고 내적으로는 여러 주들의 연합 정부로 만들 수 있었던 미국의 협력형 통치와 대비된다(이문영, 2006: 121).
→ 이문영 교수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파악한다. 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한 민족이 세운 국가라는 전제 하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삼국이 이러한 단일민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을지 의문이다. 고대사회에 대한 제대로 된 고증 위에서 분석이 나와야 한다.
 
→ 위 1과 관련하여 이문영 교수는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재판이 법률학을 전공한 법관이 판결하는 것이 아니라 5백 명의 배심원이 판결했던 것이라고 하면서 오늘날의 비판적 지식인에 비추어 살펴보고 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사상 계보를 이은 플라톤의 『국가론』은 사람의 혼과 혼 속에 있는 이성을 믿는 사람이 보는 국가관이라고 한다. 배심원의 판결과 법관의 판결을 대조할 때 어느 것이 더 타당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지를 가늠하기 어렵다. 
  
○ 플라톤 『국가론』 제8권(이문영, 2006: 143-44)
네 가지 유형의 대표적인 잘못된 정체(政體)들은 최선자 정체가 점진적으로 쇠퇴되어 감으로써 생기는 형태들인데, 이는 우생학적으로 훌륭한 자질을 가진 아이들의 출산에 실패하여, 통치자들 속에 이질적 성향을 지닌 자들이 섞이게 된 데서 비롯된다.
그래서 처음으로 변질된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정체가 ‘명예 지상(至上) 정체’ 또는 ‘명예 지배 정체’라 불리는 것으로서, 이는 최선자 정체와 과두 정체의 중간에 있는 것이다. 이 정체에서는 이성적인 것보다도 격정적인 것이 우세한 탓으로, 승리와 명예에 대한 사랑이 지배하는데, 축재에 대한 욕구도 대단하다.
그 다음으로 생기게 되는 것은 과두 정체인데, 이는 평가 재산에 근거하여 통치자들을 갖는다. 따라서 이 정체에서는 끝없이 재산을 끌어 모으는 부류와 이들에게 재산을 넘겨주게 된 가난한 부류가 대립하는 양상을 보인다. 민주 정체가 탄생하게 되는 것은 이 대립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이김으로써 가능했는데, 이들은 과두 정권을 장악했던 자들을 숙청한 다음, 모두가 평등권을 누리며 관직도 추첨에 의해서 배정한다.
민주 정체에서는 자유가 넘쳐, 무슨 말이든 할 수 있고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다. 그러나 부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이 과두 정체를 몰락시켰듯, 이번에는 자유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과 그 밖의 다른 것에 대한 무관심이 민주 정체를 몰락시키고, 참주 정체를 탄생시킨다. 개인적 야망의 달성을 위해 가진 것이 별로 없는 민중을 교모하게 이용하여 참주가 된 자로 인해서 결국에는 나라 살림이 거덜나고 만다.
 
○ 헬라스(그리스)의 故事에서 찾을 수 있는 교훈(이문영, 2006: 145-6)
1. 그리스는 만인이 만 가지의 척도를 하나의 진리 탐구를 위하여 서로가 토의하는 소피스트의 문화였다. 민주 체제에서는 무슨 말이건 입에 오르는 것을 말하는 나라이다. 이 점이 만인이, 심지어는 사법연수원 학생들까지 하나의 정책 결정을 위하여 성명서를 내는 오늘 우리의 실태와 유사하다.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소피스트의 말에 비하면, 극히 절제된, 통치자의 이성이 감히 거절할 수 없는 최소한의 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늘은 집권자의 이성이 받아들일 수 없는 과다한 요구를 하는데도 주장자들은 불이익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이익을 얻고 있다. 따라서 지금은 ‘참여’의 시대가 아니라 ‘과다한 참여’의 시대이다. 
2. 그리스에는 절제, 지혜, 용기 등 개인 윤리적 덕목이 중요시되었지만, 박애, 평등과 자기희생과 같은 사회 윤리적 덕목이 강조되지 않았다.
→ 동의하기 어렵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문영 교수의 시대에 대한 인식은 1970년대의 민주-반민주의 대립구도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는 엘리트주의에 대한 용인 및 대중의 역량에 대한 불신이 전제되어 있다. 이 책을 읽지 않았으면 과거 행정학 교수로서는 드물게 해직되고 민주화투쟁을 했던 이문영 교수에 대한 환상을 그대로 지니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최근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문영 교수의 인식은 그 성과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제9장 민회에 나오는 세 개의 조직은 대학교라는 지(知), 노동조합이라는 이(利), 경쟁적 야당이라는 귀(貴)에 각각 해당하는 조직들이다(이문영, 2006: 158). 
 
○ 『도덕경』 제80장
小國寡民 使有什伯之器而不用 使民重死而不遠徙
雖有舟輿 無所乘之 雖有甲兵 無所陳之
使民復結繩而用之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
隣國相望 鷄犬之聲相聞 民至老死 不相往來
 
신영복 교수 해석: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다. 많은 기계가 있지만 사용하지 않으며, 백성들로 하여금 생명을 소중히 여기게 하고 멀리 옮겨다니지 않도록 한다. 배와 수레가 있지만 그것을 탈 일이 없고, 무기가 있지만 그것을 벌여놓을 필요가 없다. 백성들은 결승문자를 사용하던 문명 이전의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며, 그 음식을 달게 여기고, 그 의복을 아름답게 여기며, 거처를 편안하게 여기며 풍속을 즐거워한다.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볼 정도이고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로 가까워도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내왕하지 않는다.
 
이문영 교수 해석: 작은 나라 적은 백성의 열과 백의 그릇이 있어도 쓰지 않게 한다. 백성의 목숨을 중히 여겨 먼 곳으로 가지 않게 한다.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타고 갈 데가 없고,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 적을 향하여 진을 치지 않는다.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새끼줄을 꼬아 쓰게 하며, 먹는 것을 달게 여기며, 옷을 아름답게 여기게 한다. 사는 곳을 편하게 여기며, 풍속을 즐기게 한다. 이웃 나라가 서로 바로 보아 닭과 개 짖는 소리가 들려도 백성이 늙어 죽음에 이르도록 서로 가고 오지 않는다.
 
제2부 관료 조직
 
○ 『논어ㆍ맹자와 행정학』 제4장 <현상학적 접근>은 『논어』「공야장」편에 나오는 27개의 인물을 노동부의 한 공무원이 모두 구비한 것으로 가상해 하나의 사례를 만들고, 이 자료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일반화한 것이다. 이 일반화가 곧 현상학적 접근이 무엇인가를 요약한다. 실존주의를 포함한 현상학은 사실의 세계에 집착하지 않고 가치의 세계로 옮겨 가기 위하여 남들이 흔히 하는 판단을 중지한다. 책임지며 사는 삶의 태도로서 일관성 있는 지조를 강조하는 것이 현상학인 것이다. 현상학자가 실천을 할 때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위기감에서 행동한다. 한편 현상학은 지위가 높고, 재력이 있고, 학식 높은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의 일상생활의 행복을 준거로 하여 가치 판단을 한다. 현상학적 접근은 먼 데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아는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이 점을 『논의집주』의 「향당(鄕黨)」서두에 “성인의 이른바 도(道)란 것은 일상생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聖人之所謂道者 不離乎日用之間也)로 말한다. 한편 현상학에서는 이를 평범한 사람의 일상생활(daily life of ordinary man)로 말한다.
 
『대학』의 8조목도 바로 현상학적 접근 중 겉으로 나타나는 것만을 보곤 사람을 알 수 없으며,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을 보아서 진면목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이문영, 2006: 203). 
 
○ “행정학은 정부라는 특정한 조직체 안에서 그 구성원인 공무원들이, 국가에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협조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므로 정부 행정은 행정이라는 대과목에 소속되는 하나의 분과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특정한 조직체가 바로 관료 조직이다. 관료 조직은 일 맡은 사람에게 일하기에 알맞은 권한이 부여된 조직이어서 아무리 아랫사람이라 하더라도 일의 난이도에 알맞은 권한이 부여되는 조직이다. 그러하기에 관료 조직은 사람이 있는 조직이다. 이에 비해 제도화가 안된 관료주의적 조직에는 정상의 바로 아래에 있는 장관에게도 고유 권한이 없어 정상과 장관 사이에 정상의 측근ㆍ친인척 그리고 친인척의 부하가 득실거리는 조직이다. 따라서 관료주의적 조직은 일할 ‘사람’이 없는 조직이다.
 
관료 조직의 행정을 정의하는 세 범주가 곧 사람, 일, 방법이다. 사람에 해당하는 것이 ‘정부라는 특정한 조직체 안에서 그 구성원인 공무원들’이다. 일에 해당하는 것이 ‘국가에 부여된 임무’이다. 방법에 해당하는 것이 ‘협조’이다(이문영, 2006: 214-5).
 
형태론도 충족시키며, 동시에 『논어』ㆍ『맹자』의 가치와 내용도 충족하는 행정학의 정의: “행정학은 결코 물질일 수 없고 홀로 존재하는 ‘사람’이, 그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좋게 하는 ‘일’을 하되, 사회적 능률의 향상을 도모하면서 수행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학문이다”(이문영, 2006: 252).
 
○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 To Have이며, 일하는 것이 To Do이며, 방법의 진수는 To Be인데, 이것이 ‘사람ㆍ일ㆍ방법’에 해당하는 가치이다.
 
여기에서 방법은 혼자서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방법이 아니라 타인과, 즉 두 사람이 이상이 같이 공동으로 행위하는 상황에서의 방법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이상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새 be 그것 자체가 곧 두 사람이 이상의 조직이 추구해야 할 최대의 방법이 아니겠는가? 이런 점에서 이 책은 타인과의 합의 준수를 방법의 최고봉으로 내세우며, 이러한 기초 위에서 조직 외부와의 올바른 관계 맺기를 유의미하게 보고 있다(이문영, 2006: 219).
 
○ 주돈이(周敦頤)의 『通書』제1권, <聖學>편
聖可學乎, 曰可, 有要乎, 曰有, 請問焉
曰一為要, 一者無欲也. 無欲則靜虛動直. 靜虛則明 明則通, 動直則公 公則溥 明通公溥 庶矣哉
 
성인은 배워서 이를 수 있습니까? 이를 수 있다.
배워서 이를 수 있는 요체가 있습니까? 있다. 들려주십시오.
하나가 요체인데, 하나라는 것은 욕심이 없는 것이다. 욕심이 없으면 고요해서 잡념이 없게 되고 움직임이 곧다. 고요해서 잡념이 없으면 밝고 밝으면 사리에 통달하며, 움직임이 곧으면 공변되고 공변되면 넓어진다. 밝으면 통달하고 공변되면 넓어지게 되나니, 성인의 경지에 거의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 生而知之者 上也 學而知之者 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  ―「季氏」9
통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 배워서 아는 사람, 곤란을 통해 배우는 사람, 곤란을 겪고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
이문영 교수: 살면서 안 사람이 상이며, 배워서 안 사람은 다음이요, 통하지 못하는 바가 있어서 배우는 사람이 또한 그 다음이며, 통하지 못하는 바가 있어도 배우지 않는 사람은 백성으로서 하이다.
 
○ “하지 않아야 할 것은 하지 않으며, 욕심내서 안 될 것은 욕심내지 않아야 하니, 이와 같을 뿐이다.” (無爲基所不爲 無欲基所不欲 如此而已矣  ―「盡心」上 17)
 
○ 주자의 주석에 의하면 「盡心」上19는 인품에는 네 등급이 있음을 적은 글.
임금 섬기기만 하는 자가 있으니, 임금을 섬기면 임금에게 안색을 부드럽게 하여 기뻐하게 하는 자이다. (有事君人者 事是君 則爲容悅者也(칙위용열자야))
사직을 편안케 하는 신하가 있으니, 사직을 편케 함을 기쁨으로 삼는 자이다. (有安社稷臣者 以安社稷爲悅者也)
하늘의 백성인 자가 있으니, 천하에 도가 행해질 만한 뒤에야 행하는 자이다. (有天民者 達可行於天下而後 行之者也)
대인인 자가 있으니, 자기를 바르게 함에 모든 것이 바르게 되는 자이다. (有大人者 正己而物正者也  ―「盡心」상19장)
 
○ 방법이란 사회적 능률(social efficiency)을 말한다. 두 사람이 이상이 한 조직에서 협동해서 일을 추진하는 것이 행정인데, 사람과 사람 간의 협동이 상호 간에 마찰이 덜 있으면서 협동되면 될수록 능률이 더 좋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의 능률을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형성되는 사회라는 말을 사용해 표현하여 사회적 능률이라고 칭한다(이문영, 2006: 235).
→ 이게 어떻게 사회적 능률인지? 
  
○ 『논어』에서 말하는 일이란 사회적 관계를 좋게 하는 것을 지칭한다. 이는 이른바 일이라는 것이 일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물량화도 그 공동체의 사회적 관계를 좋게 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이문영, 2006: 237-38).
  
○ 『논어』에서 말하는 學의 내용
 
o 행정을 공부하는 것이 學이다.
o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學이다.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 「爲政」15
학(學)하되 사(思)하지 않으면 어둡고, 사(思)하되 학(學)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 신영복 선생은 思를 실천, 경험적 사고로 해석하고 있다.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며 동시에 특수한 경험에 매몰되지 않는 이론적 사고의 필요성에 대하여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o 몸으로써 하는 것이 學이다.
 
o 質과 文이 모두 있어야 하는 것이 學이다.
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 君子  ―「雍也」16
“바탕이 문채(文彩)보다 승(勝)하면 거칠고 문채가 바탕보다 승하면 사치스럽다. 형식과 내용이 고루 어울린 후라야 군자이다.”
이 글은 質이 속이요, 文이 겉이라고 관찰되는 글이라기보다는 質과 文이 조화됨을 논하는 글이다.
 
o 바른 역사를 잇고자 함이 學이다.
o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 學이다.
o 미를 추구함이 學이다.
o 세상의 변화를 예측하는 것이 學이다. 아래 글에서 易이란 세상과 앞을 내다보는 정책론이며, 변동이론이며, 전문가로서 가미 속에서 큰 미래를 예측하는 지혜라고 본다. 조선조 과거시험에서 ‘대책’을 못 세우는 학문은 학문이 아니었다(이문영, 2006: 244).
“공자는 ‘(하늘이) 나에게 몇 년의 수명을 빌려주어 마침내 『주역』을 배우게 한다면 큰 허물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子曰 加我數年 五十(卒)以學易 可以無大過矣  ―「술이」16)
 
o 늘 하는 것이 學이다. 아래 글에서 雅는 ‘항상’이라는 뜻이다.
“공자가 늘 말씀한 것은 詩와 書와 禮를 지키는 것이었으니, 이 모두를 늘 말씀하셨다.” (子所雅言 詩書執禮 皆雅言也  ―「술이」17)
  
○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전문화된 대학 교육의 불가피성을 논하였다. 그러나 베버는 대학 교육이 전문인 양성에 치중하지 말고 교양인 양성에 치중할 것을 권한다. 기사 정신, 금욕 정신, 중국에서와 같은 문학의 소양, 그리스에서와 같은 체육과 문학, 영국에서의 신사 교육 등이 교육의 이성으로서 지배 구조 또는 지배층에 속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조건으로 베버는 제시하였다. 영국은 고급 공무원 시험을 Oxford나 Cambridge 같은 명문 대학교 인문학 졸업생 등에서 선발하고, 일단 선발된 후보자들에게 비로소 전문인 교육을 시켰다(이문영, 2006: 288).
 
○ 학문으로서의 한국 행정학을 부정적으로 본다. 베버와 같은 문명론, 인문학적 조예, 사회과학적 엄격성이 결여된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오늘의 행정학과 교수들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지난 쿠데타 시대에 한국 행정학과는 독재를 미화하는 ‘발전 행정학’이라는 과목을 개설했고, 세상이 바뀌니까 이런 학자들이 이를 뉘우치는 글도 안 쓰고 이제는 새 과목인 ‘민주 행정’을 가르치고 있다. 이런 학과가 입학 커트라인이 높은 학과인 현 21세기의 한국은 어둡다(이문영, 2006: 296).
 
제3부 민회
 
○ 함석헌의 경험에서 찾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교훈(이문영, 2006: 325-6)
1) 외세에 의지하지 마라. 이는 나라 전체와 나라 안의 노동이니 기타 부분 운동에 적용된다. “외국 군대 힘을 빌자는 생각이 아니었던들 중국과 러시아파가 갈라지지는 않았을 것이고, 러시아에 갔던 사람들이 없었던들 이북 괴뢰 정권을 노리는 사람도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2) 악한 정부에 저항하는 쪽에 분열이 있어서는 안된다.
3) 폭력보다는 정신의 힘으로 운동을 해야 한다. 국민이 교육받을 때 폭력보다는 정신의 힘 있음을 안다. 또한 국민이 교육되어야 악한 정부의 지배를 벗어 버릴 힘이 자동으로 생긴다.
 
이상과 같이 함석헌의 씨알사상이 바로 주권 재민 사상이다. 함석헌에게 있어 씨알은 나라의 독립을 실현하는 주체이고, 악한 통치자에 대하여 저항하는 자들의 통일을 담당하는 자이기도 하며 이 두 가지의 실천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가능한 것이다(이문영, 2006: 327). 
  
○ 교회 조직을 포함한 노동조합, 초등학교, 경쟁적 야당의 네 개 조직 모두가 비폭력, 개인 윤리, 사회 윤리, 그리고 자기희생의 네 가지 덕목으로 설명되는 공통점이 있다는 점에서 교회 밖에 있는 3 개 조직은 교회의 닮은꼴이며, 교히는 예수의 닮은꼴이기도 하다(이문영, 2006: 419). 
  
→ 노동조합을 민회의 주요한 것으로 꼽고 있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여기에서의 노동조합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인지는 의문이다. 특히 미국의 AFL의 발족 이념을 인용하면서 이것이 기독교 이념의 네 개 덕목에 분류할 수가 있다고 한 대목(이문영, 2006: 434-5)은 이문영 교수가 노동조합운동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을 던진다.
 
○ 노동조합, 초등학교, 야당의 공통점, 이것이 조직들을 뛰어난 조직으로 있게 한 요소들이다(이문영, 2006: 447).
1) 이들은 모두가 권력의 밖에 존재한다.
2) 이들은 단순히 권력의 밖에 존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모양으로 권력의 부당한 욕심을 견제하며, 악을 비판하며, 심지어는 불법의 시정이 불가능한 권력의 교체를 요구한다.
3) 이들 조직 중 하나는 권력을 교체하기까지 한다.
4) 2),3)과 같은 행동이 있기 때문에 이 조직은 권력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
5) 권력으로부터 미움을 받지만 권력이 이들을 말살하지는 못한다.
6) 이들 조직 때문에 권력과 이들 조직들이 드디어는 함께 공존하여 전체 공동체가 좀 더 문명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 간디가 존 러스킨(John Ruskin)의 『이 나중 온 자에게도』(Unto This Last)에서 얻은 세 가지 교훈(이문영, 2006: 498)
① 개인의 선은 전체의 선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
② 변호사의 직업은 이발사의 직업과 똑같은 가치를 가진다. 모든 사람은 똑같이 제 직업으로 제 살아갈 것을 벌 권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
③ 노동자의 생활, 즉 밭을 가는 자의 생활, 손으로 무엇을 만들어 내는 자의 생활이 살 만한 보람 있는 생활이라는 것.
→ 러스킨의 이 책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라는 제목으로 2007년말에 한국말로 번역되었다. 
 
○ 제7, 8, 9장 등 3개 장은 예수의 행동을 중심으로 엮은 장들이다. 즉 예수의 행동을 잉태한 전제를 다룬 장이 제7장이었다. 제8장은 예수의 법정에서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었다. 제9장은 예수의 행동이 잉태한 민회의 모습을 설명하였다(이문영, 2006: 517). 제5장은 함석헌 선생의 행동원리, 제10장은 로크, 루소, 그리고 간디의 사상에 대해 다루었다.
 
제4부 세계 정부
 
○ 『논어ㆍ맹자와 행정학』(나남, 1996)은 일하는 조직인 관료 조직(bureaucratic organization)의 원형을 탐구한 책이며, 『인간ㆍ종교ㆍ국가―미국 행정, 청교도 정신, 그리고 마르틴 루터의 95개조』(나남, 2001)는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조직의 원형인 민회(citizen assembly)를 탐구한 책이다. 두 책이 다 자전적이며 반체제적이다(이문영, 2006: 565).
 
○ 이제는 누구와 협력하자는 것인가. 관료 조직 내 밑의 사람들, 관료 조직 외부에 있는 민회 사람들, 나라 밖의 다른 나라 사람들과 같은 세 가지의 협력을 정부가 하여야 정부가 야만성을 면하게 된다.
 
통치하는 사람도 사람이고, 이 통치하는 사람이 하는 통치란 물건이나 국민이 통치자를 선출하기 위하여 투표하는 표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를 관리하는 것이다(이문영, 2006: 5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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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6 16:44 2009/04/06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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