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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환. 2001. 국가와 공공부문 노사관계: “공공성의 정치”의 제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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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공부문 노사관계에 대한 함의
 
노동조합운동의 관점에서의 국가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국가에 대한 이론적 관심 이상의 것일 수밖에 없다. 사실상 국가는 사회에 그 영향을 간접적으로나마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노동조합운동은 불가피하게 국가와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하물며 국가의 직접적인 영향력이 미치는 사회 영역인 공공부문에서 노동조합운동은 국가와 특히 중요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공공부문 노사관계는 공공부문이라는 사회 영역 위에서 존재하고, 이 공공부문은 국가와 사회 사이의 관계 위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공부문 노사관계에 대한 접근은 국가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전제로 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은 사회적 합의를 통한 공공성의 확대를 위한 투쟁을 그 존립근거로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투쟁은 현재의 국가를 공공성의 확대를 담지하는 주요한 제도로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알튀세와 초기 풀란차스는 자본주의 사회가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인 세 수준·구조가 중층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며, 이 때 국가는 자본주의사회의 질서를 유지를 보장하고 전반적인 통일성을 보장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조직으로 보았다. 이 때 국가는 사회의 계급 관계로부터, 특히 지배계급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틀을 벗어나지는 않는 “자본주의국가”이다. 그람시는 “헤게모니 국가론”을 제기함으로써 도구주의적 국가론의 일면적인 국가규정, 즉 (피지배) 계급억압의 도구로서의 국가 개념의 일면성을 지적하고, 피지배계급을 이데올로기적·문화적으로 지배하는 국가의 기능을 강조함으로써 국가에 대한 기존의 이론적·실천적 논의의 틀을 확장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헤게모니 국가론”도 결국은 국가는 “포위”되어 붕괴되어야 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기본적으로는 도구주의적 국가론과 동일한 맥락에 서 있다. 이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국가이론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기능주의적이라는 데에 있다. 즉, 자본주의는 유지되어야만 하는 것이었고, 그 필요는 국가의 기능에 의해서 충족되어 왔다고 보는 것이다.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은 그 자체로 공공성의 문제라는 사회적 제약 하에 놓여 있으며, 그 공공성 유지·확보의 제도적 장치는 기본적으로 국가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맑스주의 국가론에 따르면 그 국가는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 질서의 유지를 자신의 기능으로 하기 때문에 공공성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계급인 자본가계급의 관점에서만 승인될 수 있는 공공성일 수밖에 없다. 어느 사회에서든지 공공성은 노동자계급·대중의 관점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요구되어 왔고, 따라서 공공성의 확대, “공공부문”의 확대가 자본주의적 질서를 유지·강화하기 위한 자본주의 국가(또는 자본가계급의 국가)의 기능이 외화된 결과로만 볼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며, 오히려, 공공성의 확대는 사회의 여러 세력들의 갈등·타협의 결과로서 국가 활동에 제도적으로 반영된 것이다. 이 때 국가는 사회의 분업적 발전의 제도화된 결과물로서, 사회의 계급적·비계급적 갈등의 제반 양상들과 상호작용하면서 해당 사회의 한 영역으로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홍주환, 2001: 107). 
 
3. 국가-사회관계의 변화와 공공부문 노사관계
 
공공부문 노사관계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던 공공부문 노사관계가 “갈등적 노사관계”의 핵으로 등장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주로 2차 대전 이후 서구 선진자본주의 사회들에서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의 등장에 따라 공공부문이 확대되고, 그 위에서 공공부문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노사관계를 유지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의 위기와 신자유주의적 국가형태의 등장에 따라 기존의 공공부문의 사회적 지위가 흔들리면서 공공부문 노사관계의 안정성에 균열이 발생하게 되었다. 따라서 공공부문 노사관계에 대한 논의는 결국 한 사회에서 공공부문이 차지하는 위상의 변화에 대한 추적을 토대로 하여야 한다.
 
그 동안 공공부문의 존립근거에 대한 논의는 주로 국가와 시장과의 관계의 문제, 즉 국가의 경제적 역할 문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국가의 시장 개입에 대한 논의는 “시장의 실패” 또는 “국가(정부)의 실패”라는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케인즈주의 복지국가의 등장 및 발전은 1930년대를 휩쓸었던 경제공황이 보여준 “시장 실패”를 국가의 개입을 통해서 극복하고자 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면, 신자유주의 국가의 등장은 케인즈주의 복지국가가 1970년대 이후의 경제위기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국가의 실패”를 근거로 시장으로의 복귀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국가형태의 이러한 변화는 한 사회의 “공공부문”의 지위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요구하는 것이었으며, 특히 신자유주의 국가는 기존에 공공부문을 통해 국가가 수행하던 경제적 역할을 상당한 수준 철회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공공부문 노사관계는 존립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케인즈주의 국가의 위기와 함께 국가의 경제적 역할(국가의 경제개입)에 대한 좌우에서의 비판적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 양 진영의 비판들이 이론적․이데올로기적 토대는 분명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양자 사이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국가 역할의 한계에 관한 것이었다(홍주환, 2001: 108).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케인즈주의 국가의 위기를 살펴보고 있는 이론들은 국가의 경제 개입을 자본주의 재생산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이에 의하면 자본주의 국가는 원활한 자본축적과 사회적 불안정의 해소라는 두 가지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즉 국가는 축적기능과 체제정당화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자본주의의 독과점화는 시장의 원활한 작동을 방해하며(시장의 실패), 따라서 국가가 등장하여 시장에 개입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원활한 작동을 가능하게 한다(예를 들어서 공기업의 등장은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기 위해 국가가 직접 생산자로서 경제에 개입한 결과다). 한편 자본주의 사회에는 그 특성상 “계급갈등”을 내포하고 있다. 계급갈등은 자본주의의 재생산에 필요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정당성에 대한 위험요소이며, 따라서 국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개입을 하여 체제정당성을 확보하는데 기여한다(예를 들어, 복지국가의 등장에 따른 비기업적 공공부문의 확대는 국가가 체제 정당화를 위해 경제·사회에 개입한 결과다). 그러나 국가의 경제개입의 케인즈주의적 형태는 국가의 재정위기를 낳고, 경제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는 등 항상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케인즈주의적 개입국가에 대한 비판은 신자유주의적 사회·경제이론으로부터도 매우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반(反)국가주의적 관점은 80년대 신자유주의 국가의 표상인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반국가주의적 시장중심주의이다. 이에 따르면, 시장은 경제적으로 효율적일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정당화된다. 시장은 개인들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를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장이 되고, 또한 가격기구를 통해서 가장 효율적으로 사회적 자원들을 배분한다.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국가는 반드시 실패하도록 되어 있다.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인들과 관료들은 공공의 이익보다는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극대화시키고자 하기 때문에, 그들의 사적 이익 추구의 통로가 되는 국가의 경제에 대한 개입은 경제의 비효율성을 극대화시킬 뿐이다. 또한 각종 규제를 국가의 경제 개입은 경제 전체의 이익을 증대시키기보다는 일부 집단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며, 낭비적인 독점적 지대만을 발생시킬 뿐이다(그런데, 신자유주의의 이러한 작은 국가론은 또한 강한 국가를 제안한다. 왜냐하면, 기존의 비효율적인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작지만 강한 국가가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좌우의 양극단에 서 있는 정치적으로 서로 다른 이론·실천이 모두 같이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에 대해서 “적대적”이었던 것은 매우 아이러니컬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반대의 근거는 서로 다르다. 맑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국가는 자본주의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다른 계급적 기반을 갖는 국가로 대체되어야 하고, 궁극적으로 국가 자체가 소멸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던 반면에, 신자유주의자들은 이 자본주의 국가가 다른 자본주의국가로 전환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노동자계급·대중의 관점에서의 공공성의 확장적 제도화 전략의 맥락에서 보면, 맑스주의적 국가론은 현존 국가가 그러한 공공성을 궁극적으로 담보할 수 없는 것으로 봄으로써 공공부문 노사관계를 제도적 매체로 하는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의 근거를 이론적으로 빼앗아버린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신자유주의 국가론은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으로부터 공공성의 정치의 공간을 박탈해버리고자 하였다(홍주환, 2001: 110).
 
한편, 케인즈주의 국가형태(또는 폭넓게 말해서 개입주의 국가)의 등장에 대한 맑스주의자들의 설명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공공부문의 급속한 성장에 대한 설명이 될 수도 있다. 공공부문의 성장은 자본주의의 원활한 재생산을 위해서 국가가 직접 사회․경제에 개입한 결과물인 것이다. 그러나 케인즈주의적 국가개입은 본래적으로 실패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공공부문의 사회적 지위는 항상 확고한 것이 아니다. 케인즈주의적 국가개입이 일시적인 성공을 구가하고 있을 때에는 공공부문이 안정적으로 유지․확대되었고, 그에 따라서 공공부문 노사관계도 안정적일 수 있었지만, 그것의 한계․실패는 국가의 사회․경제에 대한 개입의 중요한 한 축인 공공부문의 사회적 지위의 불안정화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바로 공공부문 노사관계의 불안정화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자본주의 국가의 본래적 한계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적 국가형태의 등장은 기존의 경제 개입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상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바로 공공부문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으로 이어져 공공부문 노사관계의 폭발을 유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서구에서 케인즈주의적 국가형태에서 신자유주의적 국가형태로의 전환과 공공부문의 사회적 지위의 관계는 아주 분명하다. 케인즈주의적 국가형태가 지배적이었던 시기에 공공부문은 국가의 개입주의적 정책을 수행하는 가장 직접적인 도구가 되는 사회적 영역이었고, 따라서 그것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확고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국가형태가 자리잡게 되면 공공부문의 기존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약화될 수밖에 없다. 국가의 경제적 역할의 축소, 시장으로부터의 철수는 개입의 직접적인 수단이었던 공공부문의 축소 및 민영화, 더 나아가 잔존 공공부문에 대한 민간 경영기법의 도입 등을 가져왔고, 결국 공공부문은 새로운 사회적 지위를 강요받게 되었던 것이다(홍주환, 2001: 110-11).
→ 공공부문과 공공성은 구별되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서술이 모호하다. 공공부문과 공공성을 연결시켜 파악할 경우 공공성을 이른바 조직론적으로 파악하는 데 따른 문제가 발생한다.
 
서구 사회에서 공공부문이 성장하고 쇠퇴하는 과정이 우리의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에 대해서 갖는 함의를 제대로 도출하고자 한다면,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은 자신이 서 있는 기반의 특수성(즉, “공공부문” 위에 서 있다는 점)을 확고히 인식하고,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 하에서 확장된 공공성의 영역이 단지 자본주의적 질서의 유지·강화를 위한 것으로가 아니라 노동자계급·대중의 투쟁의 결과, 즉 사회의 민주주의적 발전의 제도화된 영역으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홍주환, 2001: 111). 
 
국가-사회관계에 대한 규정은 그 사회의 공공부문의 지위(및 공공부문 노사관계)의 안정성의 폭(공공부문-민간부문의 균형의 정도)에 대한 규정을 포함한다. 따라서 국가-사회관계는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의 목표 설정에 중요한 근거가 된다. 민간부문과 달리 공공부문은 넓게는 해당 사회의 국가형태가 무엇인가, 좁게는 집권 정부의 성격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그 규모와 역할이 규정되어 왔다. 만약 공공부문의 지위가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그에 따라서 공공부문 노동조합이 그 틀 위에서 자신의 명확한 정책목표를 갖고 활동할 수 있다면,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은 사회발전의 중요한 동력이 될 수 있다. 그렇지 못하고 공공부문의 사회적 지위가 불안정할 뿐만 아니라 왜소한 것이 된다면,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은 사회적 전망을 갖기 쉽지 않다.
 
4, 한국 공공부문 노사관계의 지형 변화와 공공성의 정치
 
세계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역할의 구조에 중요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변화의 궁극적인 원인은 소위 세계화의 심화에 있으며, 공공부문과 관련해서 그것은 민영화와 경영개념의 도입으로 표출되고 있다. 서구 선진자본주의 사회들의 경우, 좌파 정부들이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우파 정부들이 잡아 놓았던 국가의 경제적 역할의 변화 방향은 그렇게 크게 바뀐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러한 상황은 기존의 개입주의적 국가형태들에서 나타났던 국가-사회관계의 내용이 구조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볼만한 근거가 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또한 기존의 개입주의적 국가-사회 관계가 더 이상 작동하기 쉽지 않은 모종의 구조 변화가 전지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국의 경우, 그것은 이미 (짧게 잡아서)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으며, 최근의 외환위기는 국가-사회관계의 변화를 급속도로 빠르게 진행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물론, 기존의 한국의 국가를 서구의 케인즈주의적 국가와 동일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한국의 국가에 대해서는 “발전국가론”적 이론틀이 적합할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한국의 국가-사회관계의 변화, 그에 따른 공공부문의 사회적 지위의 변화는 발전국가의 쇠퇴와 그 뒤를 잇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신자유주의) 국가가 등장한, 또는 등장하고 있는 것에 기인한다고 판단하여야 할 것이다.
 
그 결과는 공공부문의 축소(민영화)와 민간기업의 경영기법의 도입이 급속하게 진행된 것이다. 문제는 공공부문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변화가 단순히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공세에 의한 일시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세계화를 배경으로 한 사회구조적 변화에 의한 구조적 변화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는 점에 있다. 만약 이러한 판단이 옳다면, 우리가 겪은, 그리고 겪고 있는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은 일정 정도 불가피하였던 것이고, 단지 그 범위, 속도 및 방법 등(즉, 민영화 대상기관의 선정, 구조조정 추진 주체, 사회적 합의 정도, 구조조정 방식 등)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상황 판단이 현 시점에서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에 대해 갖는 함의는 무엇인가. 특히 공공성의 정치와는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홍주환, 2001: 112).
→ 동의하기 어렵다. 당시의 시기에 공공부문 구조조정이 불가피했던가.  
 
공공부문 노사관계를 검토할 때 '정치적 상황성'(political contingency)이 중요하다는 논의가 있다. 정치적 상황성은 “공공부문의 각 기관들의 목표과 그것의 운영상의 규칙, 정부 부처의 개입, 정당들의 정책, 대중의 여론, 여타 국가 기구들의 요구, 그 공공기관이 생산하는 재화 및 서비스를 사용하는 공적 기구들 및 민간부문의 이익집단들의 제반 압력 및 요구 등”을 포함하는 개념으로서, 공공부문을 둘러싸고 있는 구체적인 조건들이 계속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것은 공공부문의 지위 변화는 이 정치적 상황성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공부문 노사관계를 다루는 경우 이러한 측면을 주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홍주환, 2001: 1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은 일정한 한계가 있다. 이 정치적 상황성 개념은 공공부문의 운영이 주변 상황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는 것으로 간주되며 각 공공부문 기관의 직접적 당사자인 노사, 특히,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공공부문 노동조합의 능동적·주체적인 측면을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의 관점에서 이 개념을 바라본다면,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의 목적의식적인 활동을 통해서 정치적 상황을 주도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공성의 개념을 진보적 사회발전의 관점에서 노동자계급·대중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보장하는 내용으로 채우고, 이렇게 구성된 공공성을 통해서 정치적 상황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공공성의 정치의 핵심이다(홍주환, 2001: 112-13).
 
공공성의 정치는, 해당 사회의 현실적인 조건을 충분히 고려하여, 공공부문의 범위를 설정하고, 그것의 운영을 민주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공공부문 노사관계에서 국가의 사회적 역할들 중에서 “공적 재화 및 서비스의 생산” 및 “그것을 직접적으로 담당·수행하는 노동자의 고용”이라는 두 가지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재화 및 서비스를 공공부문에서 사회에 제공할 것인가 하는 공공부문의 사회적 범위의 문제와 우선 관련되고, 또한 이것의 확정 및 변화는 공공부문 고용의 규모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민간부문과는 달리 공공부문에서는 공공성의 정치가 다른 무엇보다도 선차적인 중요성을 갖게 된다. 한편으로, 구조조정의 시기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쟁점이 되는 고용안정의 문제는 공공부문의 사회적 지위의 변화에 따라서 유동적일 수밖에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 공공성의 정치가 허용하는 한계 이상의 공공부문 노동조합·노동자의 요구는 공공성의 정치가 노동조합․노동자에게 불리한 것으로 진행될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이다(홍주환, 2001: 113).
 
공공부문 운영의 민주화는 공공성의 정치를 제도화하는 것과 관련된다. 공공성의 정치의 제도화는 구체적으로는 공공부문의 각 기구들의 존재 목적을 공적으로 설정하고, 그것의 운영이 민주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공공참여적 전문책임경영체제를 확립하는 것, 공공부문 노사관계가 그러한 틀 안에서 형성되는 것, 공공부문 노동조합이 공공기관의 운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 등을 의미하는 것이되, 그러한 제도적 틀이 공공성의 정치 안에 묶이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책임자율경영이 공공부문에 도입되어야 한다는 것의 한계가 계속적으로 지적되는 것은 바로 공공부문 노사관계 등 공공부문을 둘러싸고 있는 제반 제도적 틀이 “공공성의 정치”로부터 벗어나 “공공성” 그 자체를 훼손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 
 
결국, 정부에 의해서 공공부문의 일방적인 구조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 상황을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이 올바르게 돌파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은, 공공성의 정치를 활성화시킴으로써 공공부문의 범위를 확정하는 문제를 사회적인 의제로 설정하고 대중적 토론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공공부문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다(홍주환, 2001: 114).
 
5. 맺음말
 
공공성의 정치가 국가라는 제도적 틀 속에 각인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때 공공부문은 공공성의 정치가 제도화된, 국가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후기 풀란차스의 말처럼 “국가가 정치권력 행사의 중심”이라면, 그리고 또한 “국가가 계급들 사이의 세력관계의 응축”이라면, 그 연장선상에서 공공부문은 제도화된 정치권력인 국가의 영역이며, 그 안에는 공공성의 정치를 통해서 사회의 세력관계가 응축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공공부문 노사관계는 공공성의 정치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제도적 장치가 되며,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은 그 공간에 참여하는 주요한 세력이 되는 것이다. 이 때 국가는 궁극적으로 제2의 국가에 의해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계급적) 내용으로 채워지는 제도적 응축물이 된다.
 
맑스주의적 관점에서의 논의들은 구체적으로 “공공성”의 정치와 거의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은 탈자본주의적 사회 발전의 길을 모색하는 있으며, 공공부문이 그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고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논의에서는, 단편적으로 국가 및 공공부문에 대한 노동자계급․민중적 통제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지만, “국가”의 문제가 어떻게 취급되고 있는지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나의 주장은 이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다. 
 
공공성의 정치에 대한 주장은 사적 영역을 인정하는 논의와 연결된다. 이 때 사적 영역이란 시장의 영역을 말한다. 즉, 국가가 일정 정도 이상으로 개입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직접 모든 것을 관장하지는 않는 상황에서 시장을 통한 경제활동은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국가와 시장이 유기적으로 결합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시장을 자본주의의 전유물로만 보는 것은 불합리한 발상이다. 시장도 이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매우 중요한) 제도이며, 따라서 새로운 규칙이 적용되는 제도로서의 시장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홍주환, 2001: 114).
 
공공성의 정치의 결과, 공공부문의 범위가 규모상으로 축소될 수도 있고 확대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공공성의 정치는 단지 “공공부문”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공공성의 정치 그 자체는 공공성의 사회적 영향력의 강화, 질적 측면에서의 심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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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4 05:36 2009/06/24 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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