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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 지구를 뒤덮다』(마이크 데이비스, 2007)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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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크 데이비스가 쓴 이 책의 토대가 된 논문(창비에 실렸음)을 가지고 꽤 진지한 토론을 했던 것 같은데, 그 토론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책의 내용과 관련 서평만 발췌하여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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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데이비스, 김정아 옮김. 2007. 『슬럼, 지구를 뒤덮다: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돌베개. Kike Davis. 2006. Planet of Slums. Verso.
 
○ 한국의 독자들에게
 
이 책의 많은 주제들이 한국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사실, 근대 도시 가운데 서울만큼 극적인 변화를 겪은 도시는 없습니다. 전쟁의 폐허만 남았던 도시가 이제 뉴욕에 버금갈 비참함과 화려함이 공존하는 거대 자본주의 메트로폴리스로 변모했으니까요.
국가와 기업이 사적 이윤을 위해 민중의 공간을 불도저로 밀어내고 부유층 문화를 확산시킬 때, 서울의 주민은 도시에 대한 권리를 지키고자 학생운동, 노동운동과 연대해 국가와 기업의 철거 책략에 맞섰던 영웅적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는 서울의 역사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데이비스, 2007: 8).
 
옮긴이의 말
 
○ 데이비스가 밝히는 전지구적 도시 빈곤의 가장 큰 원인은 세계은행과 IMF 주도로 1970년대 후반에 시작된 제3세계 구조조정이다. 20세기 후반에 구제국 금융자본 주체들은 정치적 독립을 이룩한 제3세계를 다시한번 자본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여기에는 식민지 해방 이후 집권한 탈식민 엘리트의 부패와 무능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빈민과 공공부문 중간계급을 짓밟았던 구조조정은 민간 사업자, 외국 수입업자, 마약상, 군 장성, 정치가들에게는 대박을 터뜨릴 기회였다.”
진보적 정치 세력들도 일단 집권한 후엔 중간계급 헤게모니에 편승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수정했다. 공공주택 사업 등 복지 정책이 실시되는 경우에도 그 열매는 대부분 중산층에게 ‘가로채기’ 당했다. 요컨대, “도시계획은 유산계급의 이익과 욕심을 강화시키는 수단이자 빈민의 주변화를 심화시키는 도구로 전락했다.” (307-08쪽)
 
○ 『슬럼, 지구를 뒤덮다』에 대한 가장 큰 비판은, 슬럼 주민을 수동적인 피해자로 설정함으로써 도시 빈민의 주체적 역량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UN을 비롯한 여러 국제 기관과 정부 기관의 통계를 근거로 사용하면서 빈곤에 대한 행정적 시각에 물든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사실상 이 책은 주체적 저항의 측면을 간과한다기보다는 오히려 포스트모던 저항 담론과 대결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특히 저자는 비공식 노동의 확신으로부터 다중적 주체를 끌어내는 포스트 이론에 대해 반감을 숨기지 않는다. 이는 일종의 패러디 형태를 띠고 있다. 유목민은 포스트모던 주체의 대명사로 쓰이지만, 돈이라는 초영토에 편입하여 세계 시민을 자처하는 제3세계 도시 엘리트가 디지털 유목민이라면, 일거리를 따라 끊임없이 이동하는 이주 노동자도 유목민이고, 상시적인 퇴거의 위협 속에 살고 있는 변두리 빈민도 유목민이다. 들뢰즈의 계열 개념도 슬럼에 적용되면 불길한 의미를 띠게 된다. 카프라의 수평화나 만델브로의 프랙탈 등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의 전형적인 개념들도 제3세계 슬럼에 적용되면서 비슷한 방식으로 뒤틀린다. (308-310쪽)
 
○ 실제로 이 책이 말하는 파국은 언제나 조건부 파국이다. 즉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파국이 닥칠 것이다. 그러니 상황이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상황이 바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우리가 동의하기 때문이다. (3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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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도시의 갱년기
 
○ 증가한 인구의 95%는 개발도상국 도시 지역에 집중될 것이다.
도시화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인구 800만 이상의 신흥 거대도시(megacity)와 2,000만 이상의 초거대도시(hypercity)가 출현한 것이다.
엄청난 규모의 빈곤 집중 지역이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생태학적으로 지속 가능할 것인가는 미지수다. (16-19쪽)
 
○ 도시화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시-농촌 연속체에 걸쳐 있는 모든 지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도시화란 연속체 전체의 구조적 변형인 동시에 각각의 지점들 사이의 상호작용 강화를 뜻한다. 시골은 엄청난 규모의 이주민을 양산할 뿐 아니라 그 자체로 도시화된다. 도시가 농촌으로 파고드는 상황이다. (22-23쪽)
 
○ 도시경제의 규모와 도시인구의 규모는 놀라울 정도로 서로 무관해진다. 산업화 없는 도시화가 생산 증대와 고용 증대 사이의 관계를 끊어버린 실리콘 자본주의의 냉혹한 추세를 보여준다고 하는 주장도 있으나,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중동, 그리고 상당수 아시아 지역에서 나타나는 성장 없는 도시화는, 테크놀로지 선진화의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 전지구적 정치위기―1970년대 후반의 전세계적 채무위기와 뒤이은 1980년대 IMF 주도의 제3세계 경제 구조조정―의 유산이다. (27-28쪽)
 
○ 미래의 도시는 유리와 강철로 이루어진 도시가 아니라, 손으로 찍어낸 벽돌, 지푸라기, 재활용 플라스틱, 시멘트 덩어리, 나뭇조각 등으로 지어진 도시다. 21세기 도시 세계는 하늘을 찌를 듯 빛나는 도시가 아니라, 공해와 배설물과 부패로 둘러싸여 덕지덕지 들러붙은 슬럼 도시일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슬럼에 살고 있는 10억 주민은 9000년 전 도시생활 여명기에 세워진 아나톨리아 정착촌 차탈회위크의 튼튼한 진흙집 잔해를 부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돌아보게 될 것이다. (33쪽)
 
2장 슬럼이 대세다
 
○ 슬럼의 유형 (46쪽)
A. 도심
 1) 공식 슬럼: 셋집(용도변경 주택, 빈민용 셋집), 공공주택, 합숙소, 간이숙소 등
 2) 비공식 슬럼: 스쿼터(허가, 무허가), 노숙자
B. 변두리
 1) 공식 슬럼: 사적 임대, 공공주택
 2) 비공식 슬럼: 해적형 분양지(주인 거주, 임대), 스쿼팅(허가(택지개발 시행), 무허가), 난민 수용시설
  
○ 오래된 건물을 주택으로 전용하는 도시의 가장 특이한 예는 카이로의 ‘사자들의 도시’(City-of-the-Dead): 무덤을 창조적으로 개량하여 일상의 문제를 해결. 공동묘지의 비석과 묘석을 책상이나 침대머리, 탁자나 선반으로 사용했고, 묘비들 사이에 줄을 매어 빨래를 말렸다. 유골함 뚜껑을 뜯어내고 유골함을 옷과 냄비와 컬러 TV를 수납하는 편리한 붙박이 선반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제3세계에서 더 흔한 것은 용도변경 주택이 아니라 셋집이나 영구 임대주택이다. 인도 뭄바이의 경우, 15㎡의 방에 6인 가족이 보통 거주하며, 변소 1개를 7가구가 공동으로 사용한다. (50-51쪽)
 
‘간이숙소’는 미국에서는 한물간 주거 형태지만, 대부분의 아시아 대도시에서는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서울을 예로 들면, 전통적인 무단 점유 정착지에서 쫓겨난 사람들이나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이른바 '쪽방'으로 몰려든다. 서울의 쪽방은 5000개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곳에서는 하룻밤 단위로 잠자리를 임대하고 화장실 1개를 15명이 공동으로 사용한다. (53쪽)
 
○ 전 세계 도시 빈민의 대다수가 사는 곳은 이제 도심이 아니다. 1970년부터 전 세계 도시인구 증가분을 흡수해온 곳은 제3세계 도시변두리에 위치한 슬럼 마을이다. 스프롤현상은 북아메리카의 독특한 것이 아니다. (54쪽)
 
○ 전 세계적으로 임대제도는 슬럼 생활에서 나타나는 근본적으로 분열적인 사회관계 그 자체다. 임대제도는 도시 빈민이 자신의 (공식ㆍ비공식)지분을 화폐화하는 주된 방법이지만, 한편으로는 더욱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착취의 수단일 때가 많다. (61쪽)
 
세입자들은 흔히 슬럼 주민 가운데 가장 눈에 띄지 않는 힘없는 계층이다. 재개발과 강제퇴거에서도 세입자들은 보상이나 재정착의 대상에서 제외될 때가 많다. 오늘날의 슬럼 세입자들은 단체를 조직하거나 집세 파업에 돌입할 능력이 없는 것이 보통이다. 소규모 임대와 轉貸는 빈민의 주요 축재 전략이며, 집이 있는 사람들은 좀더 가난한 사람들의 착취자로 신속하게 변모한다. (63쪽)
 
“한 사람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은 그가 사는 주택의 위상에 따라 형성되는 것 같다.
거주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집단적 대응력이 약화된다. 토지획득 방식, 마을 형성의 ‘단계’, 설비에 대한 주민들 사이의 우선권, 마을지휘구조, 사회적 계층, 그리고 무엇보다 보유관계를 기반으로 정착지가 분할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택보유 형태의 차이로 인해 선거구의 정치적 성향은 더욱 다변화된다.” (Peter Ward, 1990: 197)
 
3장 국가의 배신
 
○ 급속한 도시 성장을 가로막는 제도적 방해물을 제거했던 것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경우에는 식민지 내란 진압과 국가 독립의 역설적 결합이었고, 라틴아메리카의 경우에는 독재정권 및 저속성장 체제의 전복이었다. (78쪽)
 
○ 중앙정부가 주택 공급에서 담당하는 역할이 최소화되는 상황은 최근 들어 IMF와 세계은행이 세워놓은 신자유주의 경제강령에 의해 더욱 악화되었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에 채무국에 부과된 SAP는 모든 종류의 정부 주도 프로그램을 축소하도록 요구했고, 주택시장 민영화를 요구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제3세계 사회국가는 SAP가 복지국가 정책에 조종을 울리기 전에 이미 쇠퇴하고 있었다. (87쪽)
 
○ 방콕의 경우에도 빈민들의 압도적 다수는 새로 지은 고층건물 단지보다 과거의 슬럼을 선호한다.
 
슬럼 퇴거를 계획하는 대행업자들은 값싼 고층 아파트를 주민들을 위한 대안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슬럼 주민들은 슬럼에서 퇴거당해 이러한 아파트에 살게 되면 재생산 수단이 축소되고 생계형 생산의 가능성도 낮아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 이러한 아파트 위치로 인하여 일자리 확보는 더 어려워진다. 슬럼 주민들이 슬럼을 떠나지 않고 강제퇴거에 맞서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런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이들에게 슬럼이란, 환경은 낙후되어가지만 생산은 아직 가능한 곳이다. 그러나 도시계획자에게 슬럼이란, 그저 없애야 할 도시의 해악을 불과하다. (90쪽)
 
1970년대 후반이 되면서 좌파 연합이 권력을 획득한 콜카타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인도공산당(CPI(M))이 오랫동안 슬럼 주민 ‘해방’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당은 중산층과 상류층의 표밭을 일구는 데 혈안이 되었고, 빈민에게 새집을 준다는 애초의 약속은 완전히 잊었다. “빈민의 요구에 주목해야 한다는 ‘립서비스’는 여전히 나오고 있지만, 예산의 절대다수의 콜카타의 중소득층과 고소득층 주민의 욕구를 채우는 데 사용된다. 콜카타 메트로폴리스개발청의 투자액 가운데 부스티 개선에 쓰이는 자금은 10%에 불과하다.” 베트남의 경우에도 혁명적 주택 정책은 국가 엘리트에게 혜택을 주는 방향으로 조작되고, 실제 빈민에게까지 흘러들어가는 자금은 거의 없다. (92쪽)
 
○ 아프리카, 남아시아,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에서 도시 부유층에 대한 지방정부의 과소 과세는 지나친 정도를 넘어서 범죄적이다. 또 재정이 어려운 도시들은 퇴행적 판매세와 공공시설 이용료 징수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아지기 때문에 세부담이 부자 쪽에서 빈자 쪽으로 일방적으로 옮겨가는 현상도 심화된다.
 
책임의 일부는 IMF에 있다. 제3세계 재정의 감시자를 자처하는 IMF는 관여하는 국가마다 공공시설에 대해 이용료를 부과해야 한다는 퇴행적 주장을 펴는 반면에, 재산이나 과시적 소비, 부동산에 과세하는 것과 같은 반대급부적 조세 정책을 제안하는 경우는 전혀 없다. 세계은행은 제3세계 여러 도시에서 ‘좋은 통치’(good governance) 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실제로 진보적 조세를 지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좋은 통치’의 가능성을 조성하기보다는 그러한 가능성을 차단한다고 할 수 있다.
 
제3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다수의 빈민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도시 민주주의는 상례라기보다는 예외에 가깝고, 아프리카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슬럼 빈민이 투표권을 갖고 있는 예외적인 경우에도, 투표에 의해서 지출이나 세원의 의미 있는 재분배가 실현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실제로 도시의 의사결정권을 대중 참정권에서 분리하기 위한 다양한 구조적 전략이 동원되어 왔다. 메트로폴리스의 정치적 파편화, 지방당국 및 중앙정부에 의한 예산관리, 각종 독립 기관 설립 등이 이러한 전략에 해당한다. 도시개발을 전담하는 세력은 지방 권력을 무력화시키게 마련이다. (94-95쪽)
  
4장 자조라는 거짓말
 
○ 부드러운 제국주의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은행, 유엔개발계획(UNDP), 기타 원조 기구들은 정부라는 다리 없이 직접 지역 단위 및 주민 단위 NGO와 연결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국가의 중재 역할이 약화되면서, 대형 국제기구들은 대형 NGO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수천 개의 슬럼 및 도시 빈민 집단에서 민중 기반을 확보했다. 세계은행, 영국국제개발부(UK Department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포드재단, 프리드리히에베르트재단 등 국제적인 대부ㆍ기부업체는 대형 NGO를 중개자로 삼고, 대형 NGO는 지역 NGO나 토착민 수혜자에게 전문지식을 제공하는 것. 이제는 이것이 도시개발 원조의 일반적인 방식이 되었다. 이러한 조직 및 자금 확보의 3단체제는 흔히 ‘권한부여’(empowerment), ‘시너지’, ‘참여통치’의 결정판으로 간주된다. (103쪽)
 
울펀슨이 이끄는 세계은행은 제3세계 정부로 하여금 NGO들과 각종 옹호 단체들을 ‘빈곤축소전략보고서’(PRSP, Poverty Reduction Strategy Papers) 작성에 합류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는 원조가 실제로 표적집단에게 돌아갔다는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울펀슨은 반세계화 운동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1994년 마드리드 정상회담의 적들을 만찬 손님으로 만드는 데 대체로 성공을 거두었다.
  
PRSP 프로세스는 ‘시민사회’의 힘을 세력화한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동일하고 외부에 대하여 배타적인 ‘철의 삼각’(프랑스 등 주요국 내각에 기반한 초국적 전문가들, 다자간ㆍ양자간 개발대행업체들, 국제 NGO들)을 공고히 했을 뿐이다”(Abrahamsen, 2004: 185).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세계은행 수석경제학자로 재직할 때 ‘포스트-워싱턴 컨센서스’가 부상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차라리 ‘부드러운 제국주의’라고 해야 마땅하다. (104쪽) 
  
민주화와 자조, 사회자본, 시민사회 세력화 등의 온갖 화려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NGO계의 실질적 권력관계는 전통적인 후견주의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더구나 제3세계 NGO는 지역사회 리더십을 전용하고 이전까지 좌파가 차지했던 사회 공간을 패권화하는 데 있어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이는 1960년대에 지역사회 조직들이 ‘빈곤과의 전쟁’으로 혜택을 입었던 상황과 흡사하다. 세계사회포럼(WSF) 창설에서 핵심을 담당했던 전투적 NGO를 비롯한 훌륭한 NGO들이 예외적으로 있기는 하지만, NGO와 ‘시민사회 혁명’이 도시 사회운동 전반을 관료화ㆍ탈급진화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은 일부 세계은행 연구진도 인정한 바 있다. (105쪽)
 
25년 이상 자카르타 빈민을 연구해온 레아 엘리넥(Lea Jellinek): “마을에는 규모는 매우 작지만 유명한 은행이 있었다. 이 은행은 마을 여성 주민들의 필요와 역량으로 운영되는 소규모 풀뿌리 프로젝트로 시작했지만, 결국은 프랑켄슈타인처럼 거대한 괴물로 변하고 말았다. 즉 애초에 은행의 기반을 형성했던 저소득층에 대한 신용 제공 및 기타 지원을 축소하면서, 거대하고 복잡한 상명하달식ㆍ기술지향적 관료주의 체제로 변질된 것이다.”
 
중동의 관점을 취하는 바야트의 지적에 따르면, “NGO가 독립적ㆍ민주적 기구로 자리 잡을 가능성은 실제보다 과장되는 경향이 있었다. NGO가 전문화됨에 따라, 풀뿌리 운동으로서의 동원력은 약화되는 한편, 새로운 형태의 후견주의가 정착되는 양상이 드러났다.” 프레더릭 토머스는 콜카타에 대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더구나 NGO는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다. 은퇴한 공무원과 사업가가 NGO 고위층을 꿰찼고, 고학력 실업자 중에서 선택된 사회사업가나 슬럼에 가본 적도 없는 주부 등이 NGO 하위층을 채우고 있다.”
 
뭄바이의 주택문제 활동가 P.K. Das는 슬럼 NGO들에 대해 좀더 가혹한 비판을 내놓는다(Das, 179-80). “NGO가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주민들 사이에 혼란을 일으키고 잘못된 정보를 흘리고 이상을 박탈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계급투쟁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것이다. NGO가 채택ㆍ선전하는 실천 방안은 억압받는 주민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깨닫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에 대한 동정심과 인도주의적 감상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외부의 회의를 구걸하는 것이다. 사실 주민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할 때 이들 대행업체 및 조직들이 체계적으로 개입하는 이유는 주민들이 선동적인 방식을 취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조직들은 주민들이 거시적인 차원에서 제국주의의 정치적 해악들을 경계하게 하는 대신, 지역사회의 문제들에 매몰되어 적과 동지를 구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105-06쪽)
P.K. Das. 1995. “Manifesto of a Housing Activist.” in Sujata Patel and Alice Thorner (eds.). Bombay: Mosaic of. Modern Culture. Bombay: Oxford University Press.
 
○ 제3세계 전역에서 가난한 스쿼터가 무상 토지를 개척하던 시대는 끝났다. ‘희망의 슬럼’이 사라진 자리에는 도시 라티푼디아와 정실 자본주의가 들어섰다. 경계 지역에서 비매 정착지(non-market settlement)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 내지 차단되면서 가난한 도시들의 안정성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제3세계 슬럼에서 발생한 가장 극적인 결과는 세입자 비율의 증가와 인구밀도의 폭등이다. (124쪽)
 
인구변화가 역동적이고 일자리가 부족한 메트로폴리스에서 주택과 차세대 도시 부지의 상품화 현상은 예외 없이 집세 상승과 인구과밀의 악순환을 유발한다. 세계은행이 제3세계 도시 주택위기의 해법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른바 시장의 힘이란, 사실은 예로부터 이러한 위기를 초래했던 원인일 뿐이다. 그러나 시장이 저 혼자 위기를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늘날까지 국가가 능력을 발휘해온 분야는 대규모 주택 건설보다는 대규모 주택 파괴 쪽이었다.”(126-27쪽)
 
5장 불도저 도시계획
 
○ 도시 내 차별분리란 이미 만들어진 현실을 일컫는 이름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해서 진행되는 계층 간 전쟁을 일컫는 이름이다. 이 전쟁에서 국가는 ‘진보’, ‘미화’, 나아가 ‘사회정의’라는 미명하에 개입을 시도하며, 이를 통해 땅 주인ㆍ외국인 투자자ㆍ엘리트 주택소유자ㆍ중간계급 통근자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경계를 재편한다. 도시재개발은 사적인 이윤과 사회적 통제를 동시에 극대화하려 한다. (132쪽)
 
○ 제3세계 도시 빈민들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국제 행사―컨퍼런스, 국빈 방문, 스포츠 행사. 미녀 선발대회, 페스티벌―를 두려워한다. 이로 인해 당국이 주도하는 도시 대청소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세계가 자기네 나라의 슬럼을 보는 것을 싫어하고, 슬럼 주민들도 정부가 자기들을 ‘쓰레기’ 내지 ‘그림자’ 취급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근대 올림픽은 특히나 어두운, 그러나 거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갖고 있다. 나치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노숙자들과 슬럼주민들을 베를린 지역에서 무자비하게 쓸어버렸다. 이후 멕시코시티, 아테네, 바르셀로나 등의 올림픽에서도 도시재개발 및 강제퇴거가 수반되었다. 그러나 가난한 주택소유자, 스쿼터, 세입자에 대한 공권력의 폭력적 진압이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로 이루어진 것은 단연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 남한의 수도권에서 무려 72만 명이 원래 살던 집에서 쫓겨났다. (141-42쪽)
 
○ 메트로폴리스 공간이 근본적으로 재편되면서, 부유층과 빈민층의 교류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요새화된 폐쇄형 테마파크 주택단지와 가장자리도시는 자국의 사회적 풍경에서 이탈하여, 디지털 세계화의 하늘을 떠다니는 사이버캘리포니아로 통합된다. 시브룩에 따르면, 이러한 “도금된 새장”에 살고 있는 제3세계 도시 부르주아 계급은 “자국의 영토를 벗어나 ‘돈’이라는 초영토(superterrestrial)에 속하는 유목민이 되었다.” 한편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도시 빈민들은 진흙탕 같은 슬럼의 생태 속에서 절망적으로 허우적거리고 있다. (158-59쪽)
 
6장 슬럼의 생태학
 
○ 도시 빈민의 가장 큰 걱정은 지진이나 홍수보다 훨씬 흔한 위험인 화재다. 사실상 세계 제일의 화재 발생 지역은 슬럼이다. 가옥이 불에 타기 쉬운 자재로 되어 있고, 인구가 엄청나게 밀집되어 있으며, 난방과 취사를 위해 옥외 화력에 의존해야 하는 슬럼은 자연 발화를 위한 최적의 조건이 갖춰진 곳이기 때문이다.
슬럼 화재는 단순한 사고가 아닐 때가 많다. 지주들이나 개발업자들은 사법처리 비용을 감당하거나 공식적인 철거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방화라는 간편한 방법을 선호한다. 마닐라는 미심쩍은 슬럼 화재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특히 악명이 높다. (168쪽)
베르너에 따르면, 필리핀 지주들이 즐겨 사용하는 이른바 “뜨거운 철거” 방식은 “들쥐나 고양이를 등유에 흠뻑 적신 후에 불을 붙여 말썽 많은 슬럼가에 풀어놓는 것이다. 개는 너무 빨리 죽기 때문에 잘 쓰지 않는다. … 불쌍한 짐승들은 죽기 전까지 수많은 판잣집에 불길을 옮기기 때문에, 불을 끄기가 매우 어렵다”(Berner, 1997: 144).
Berner, Erhard. 1997. Defending a place in the city: localities and the struggle for urban land in Metro Manila. Quezon City : Ateneo de Manila University Press
 
○ 대부분의 제3세계 도시의 거리들은 교통 혼잡으로 마비 상태다. 도시는 스프롤현상을 보이며 성장하는데 그에 상응하는 대중교통이나 입체교차 고속도로 등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교통은 공중보건의 측면에서 재앙 그 자체다. 개도국의 도시에서는 악몽 같은 교통 혼잡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사용량이 급증한다.
자동차 인구의 폭발적 증가를 조장하는 강력한 힘은 바로 불평등이다. 대중교통의 질이 낮아지면 자가운전자가 늘어나고, 자가운전자가 늘어나면 대중교통의 질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172-74쪽)
 
○ 국제적인 개발대행업자들은 철로보다 도로에 투자하고 지역 교통 민영화를 부추기며, 이를 통해 파괴적인 교통 정책을 조장한다. 중국은 한때 자전거의 고향이었지만, 지금 도시계획 담당자들은 자동차에 상식에 넘어서는 우선권을 부여하고 있다.
제2세계 교통사고 사망자는 매년 100만명 이상이며, 그 중에 2/3가 보행자, 자전거 이용자, 대중교통 승객이다. 라고스에서는 버스를 ‘단포’ 혹은 ‘몰루에’라고 부른다. 각각 ‘날아다니는 관’, ‘움직이는 시체실’이라는 뜻이다. 차들이 거북이 걸음이라고 해서 치사율이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카이로 전역에서 자동차와 버스는 평균 시속 10km 미만으로 기어다니지만, 해마다 차량 1,000대당 8명의 사망자와 60명의 부상자라는 사고율을 유지하고 있다. (174-75쪽)
 
○ 전 세계적 위생위기의 심각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위생위기의 원인은 식민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럽 제국은 식민지에 현대식 위생설비 및 상하수도 인프라를 제공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인종구역과 방역선을 통해 전염병이 주둔군과 백인 교외에 침입하는 것을 차단하려 했다.
키베라에 위치한 라이니사바 슬럼에서는 1998년 4만 명의 주민이 구덩이 변소 10개를 공동으로 사용했고, 마타레 4A에서는 2만 8,000명이 공중화장실 2개를 함께 썼다. 결국 슬럼 주민들은 “날아다니는 화장실”이나 “스커드 미사일”에 의존하게 된다. “배설물을 비닐봉지에 담아 가까운 지붕이나 골목으로 던지는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렇듯 여기저기 널려 있는 배설물은 새로운 형태의 도시형 생계수단이 되기도 한다. “패트병 음료를 입에 문 10살짜리 꼬마들은 나이로비 통근자들에게 인분 덩어리를 휘두르며 위협한다. 운전자가 통행료를 지불하지 않으면 인분을 열린 창문으로 던져넣겠다는 것이다.”
“1990년 델리에 관한 자료에 따르면 1,100개 슬럼에 거주하는 48만 가구가 사용할 수 있는 시설은 변기 160개와 이동식 변소차 110개가 고작이다. 화장실이 부족해 슬럼 주민들은 공원 같은 야외 공간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고, 이로 인해 슬럼 주민들과 중간계층 주민들 사이에는 배변권을 둘러싼 긴장관계가 조성된다.” (182-83쪽)
 
○ 식수와 식량이 온통 하수도와 쓰레기로 오염되고 있으므로, 슬럼 주민들이 아무리 철저하게 예방조치를 취해도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콜카타의 경우 엄마들은 악명 높은 옥외 변소시설을 사용하게 된다. 옥외 변소는 흙 대야가 들어 있는 작은 벽돌 헛간을 말하는데, 흙으로 만든 변기를 정기적으로 청소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로 인해 “부스티의 옥외 변소 주변의 똥 덩어리들은 곧장 연못과 물탱크로 흘러든다. 사람들은 다시 이 물로 몸을 씻고 옷을 빨고 설거지를 한다.” (187쪽)
나이로비에서 수도설치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부유한 가구들은 상수도를 매우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반면, 정치적 인맥이 있는 기업들은 시정부의 상수도를 엄청난 가격으로 슬럼에 되판다. (188-89쪽)
 
○ 슬럼 주민의 이중고. “도시 빈민은 저개발과 산업화 사이의 접촉면이며, 도시 빈민의 질병 패턴은 저개발과 산업화를 동시에 반영한다. 도시 빈민은 저개발로 인해 전염병과 영양실조라는 무거운 부담을 지게 되는 한편으로, 산업화에 따르게 마련인 다양한 만성적ㆍ사회적 질병에 시달린다.” (191쪽)
 
○ 채무국이 IMF와 세계은행에 자국의 경제권을 넘겨주는 것을 골자로 하는 조약인 SAP는 “흔히 보건비 지출을 포함한 공공지출 삭감을 요구한다.” 가나에서는 ‘구조조정’으로 인해서 1975∼83년 사이에 의료 재정과 교육 재정이 80% 축소했을 뿐 아니라, 전국에 있는 의사의 절반이 무더기로 이민을 떠나는 사태가 발생했다. 세계 곳곳에서 국제 채권자들은 의료비 삭감, 의사와 간호사의 이민, 식량 보조금 중단, 생계형 농업에서 수출용 작물 생산으로의 전환 등을 요구한다. (192쪽)
 
7장 구조조정이라는 흡혈귀: 제3세계 빨아먹기
 
○ 제3세계의 거시경제 정책이 워싱턴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이는 상황에서 “제3세계는 가상(virtual)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 포괄적ㆍ참여적 민주주의를 포기했고, 사회민주주의 프로젝트에 수반되었던 공공복지 확대의 가능성마저 완전히 포기해버렸다.”
“1980∼90년대에 빈곤과 불평등이 증가했던 원인을 하나만 꼽는다면, 그것은 국가의 후퇴다”(『슬럼의 도전』). SAP이 직접적인 공공부문 지출 및 소유 축소를 강제하고 있다는 점과 함께 이 책이 문제로 지적하는 것은 국가가 보조금 지급 권한을 상실하면서 국가 역량이 축소되고 있다는 점이다. (199쪽)
 
8장 잉여 인간?
 
○ 비공식 노동계급, 이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계급이자 역사상 유례없는 계급이다. 1980년대에 비공식 부문 고용은 공식 부문보다 2∼5배 빠르게 성장했다. 제3세계 대다수 도시에서 비공식적 생존 지상주의(survivalism)가 주요 생활양식으로 새롭게 자리 잡았다. (227쪽)
 
에필로그 도시의 묵시록
 
○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 같은 이들은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엄숙한 사변을 통해 세계화의 ‘리좀 공간’ 내에서 ‘다중’의 새로운 정치학을 타진하고 있지만, 현실을 토대 삼는 정치사회학에서는 이에 대한 근거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슬럼 주민이 구조적 방치 및 박탈에 반응하는 방식은 한 도시 안에서도 엄청나게 다양하다. 전 세계 슬럼에는 획일적 주체나 일방적 경향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양각색의 무수한 저항운동이 존재한다. 실제로, 인류 연대의 미래는 새로운 도시 빈민이 전지구적 자본주의 내 최악의 밑바닥 위치를 전투적으로 거부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256-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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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그늘 '슬럼' 지구를 뒤덮다 (서울=연합뉴스, 조채희 기자, 2007-07-03 11:43)
 
가슴을 옥죄는 묵시록과 같은 책이다. 도시의 팽창과 함께 악성종양처럼 커져가는 슬럼, 그 속에서 기본권을 박탈당한 채 사는 인간군상이 다큐멘터리 필름처럼 펼쳐진다. 슬럼은 후기자본주의가 솎아낸 잉여인간을 담는 쓰레기장이자 똥통으로 각종 질병과 분쟁, 전쟁의 무대로 철저히 유린되다 결국 폭발해버리면서 지구의 미래조차 산산조각낼 것이라는 경고메시지가 이어진다.
 
마이크 데이비스는 저서 '슬럼, 지구를 뒤덮다'(돌베개)에서 도시의 슬럼화는 1970년대 미국식 시장경제 체제를 제3세계의 발전모델로 삼도록 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이 이런 자본주의 혁명의 시녀로 제3세계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했지만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는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 킨샤사를 거대 슬럼도시의 표본으로 제시한다. 킨샤사에는 주민이 600만명이지만 자동차나 대중교통이 거의 없다. 정기적으로 임금을 받는 인구는 주민의 5%도 안되고 주민이 살아남는 방법은 "사방에 널린 채마밭, 꾀, 장사, 불법반입, 무리한 흥정, 임시변통, 절도"등이다. 평균소득은 연간 100달러 이하이며 인구 3분의2가 영양실조이고 성인 5명중 1명이 HIV바이러스 양성이다. 모부투 독재정권이 32년간 통치하면서 중간중간에 들어온 미국과 IMF, 세계은행의 지원을 가로채 자신들만의 배를 불린 결과였다.
 
도시 슬럼화의 원인으로 개발도상국들의 무리한 도시계획도 지목됐다. 올림픽 등 대규모 이벤트도 영향을 미쳤다. 저자는 그 예로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1987년에 대규모 철거가 있었으며 베이징올림픽을 준비 중인 중국 정부도 비슷한 계획을 추진 중이라고 지적한다. 아울러 슬럼을 개선하려는 시민단체들의 노력은 구호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며, 정부들은 슬럼을 주류경제로 편입시키려는 노력을 잊은지 오래라는 지적도 나온다.
 
저자가 제시하는 슬럼의 미래는 참담하다. 제3세계 야생의 도시들, 실패한 도시들인 슬럼은 전쟁기획자들로부터 21세기 특유의 전투공간으로 낙점된다. 그래서 이 지역들은 '어둠의 힘', '악의 축', '테러분자의 은신처', '악당들을 지원하는 소굴' 등으로 낙인찍혀 밤낮없이 무장 헬리콥터가 날아다니고 정체모를 적들을 추적하는 지옥불이 떠도는 곳이 된다.
 
2006년에 출간된 후 많은 지지와 논란을 함께 일으켰던 책이다. 옮긴이 김정아씨는 "일부에서는 비판도 없지 않았는데 가장 큰 비판은 슬럼 주민을 수동적인 피해자로 설정함으로써 도시 빈민의 주체적 역량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고 소개했다. 저자는 2006년 판 책머리에 "책의 속편으로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슬럼 기반 투쟁의 역사와 미래를 연구할 것"이라고 말했고, 한국어판 서문에 "근대 도시 가운데 서울만큼 극적인 변화를 겪은 도시는 없다…책의 많은 주제들이 한국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으리라 믿는다"고 적었다. 원제 'Planet of Slums'. 344쪽.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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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 지구를 뒤덮다/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서울, 이문영기자, 2007-07-06  23면)
 
슬럼. 짧게는 ‘도시의 빈민굴´, 길게는 ‘도시사회 병리현상의 하나로 빈민이 많거나 주택환경이 나쁜 지구´라 정의되는 곳. 한국에서 슬럼은 분명 정치적 현상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길이 없다.
 
‘슬럼, 지구를 뒤덮다’(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돌베개 펴냄)는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현상을 진단한 책이다. 용도변경 주택, 야영 및 노숙, 난민수용소, 무허가 토지개척, 해적형 분양지, 슬럼 지주들의 셋집 등 세계 곳곳의 슬럼을 유형별로 분류했다. 각 나라가 처한 정치·경제·사회적 상황이 슬럼 형태에 어떻게 스며들었는지도 분석했다. 지은이는 전지구적 슬럼화 이면에 도사린,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정치’와 국경 안의 ‘국민국가 정치’의 상호공조를 폭로한다.
   
지은이의 지적은 한국 상황에 빗대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저자 또한 세계 슬럼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한국에 각별히 주목한다. “가난한 주택소유자·세입자에 대한 공권력의 폭력적 진압이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로 이루어진 것은 단연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거나 “한 가톨릭 NGO는 남한이야말로 ‘강제퇴거가 가장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이루어지는 나라, 남아공보다 나을 것이 없는 나라’라고 했을 정도”라는 등의 서술은 한국의 슬럼화가 세계적인 수준임을 보여준다.
 
저자가 예견하는 슬럼화의 앞날은 가히 ‘묵시록적 미래’라 할 만하다. 2030∼2040년이면 슬럼 인구가 20억에 육박하고, “경제적 지구화에 전지구적 공중보건 인프라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파국이 닥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경고한다. “슬럼, 준슬럼, 슈퍼슬럼, 이것이 도시진화의 결과”라는 도시계획전문가 패트릭 게디스의 섬뜩한 말도 아예 책 첫 장에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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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세계화에 내몰린 달동네의 세계화
(경향, 임영주 기자, 2007-07-06-15:40:01)
 
슬럼의 광범위성과 심각성을 세계 각 도시의 사례와 통계 수치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이 책은 이미 하나의 문제 제기를 하는 셈이다. 책은 또 슬럼의 원인과 효과를 추적한다. 슬럼화의 원인에 대한 분석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미국식 시장경제체제로 개발도상국을 구조조정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빈민과 슬럼을 증가시켰다. 내몰린 빈민의 현실은 1976년부터 1992년 사이 19개 채무국에서 146건의 IMF 폭동이 일어났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외부적 요인뿐 아니라 해당 국가내 탈식민 엘리트의 부패와 무능도 슬럼화를 부추겼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자신들이 누리던 계급적 특권과 독점적 공간을 반납할 생각이 없는 이들에게 구제금융은 자금을 확보하는 호기가 됐다. 탈세와 적은 세금 부담으로 빈민층보다 오히려 혜택을 많이 받는 ‘중간 계층의 가로채기’도 상황을 악화시킨다. 대형 NGO의 과시형 프로젝트는 세계은행 같은 국제기구의 전달자 역할만 할 뿐 슬럼화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들은 비정규직 도시 프롤레타리아트가 양산되는 결과로 수렴된다. 이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나 신자유주의 이론 양자 모두가 포착하지 못한 새로운 현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제3세계 농촌의 몰락, 워싱턴 정치경제 권력의 비대화, 고실업 및 비정규직의 증가, 중산층의 탈정치화·개인주의화 등 신자유주의의 다양한 문제들과도 연결돼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낳은 괴물, 슬럼을 둘러싼 현실이다. “후기자본주의는 이미 인간 선별 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고 저자는 무섭게 말한다. “미래의 전투가 벌어질 지역은 전 세계의 붕괴한 도시들을 구성하는 길거리, 하수구, 고층 건물, 판자촌 등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문명의 충돌’이다”라고 덧붙인다. 전지구적 슬럼화로 인한 파국을 피하기 위해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강조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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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의 음지, 슬럼이 우리 미래라면?
(한국, 이훈성 기자, 2007/07/06 19:19:40)
'슬럼, 지구를 뒤덮다' 심화되는 경제 구조조정으로 제3세계 도시 빈민 급속 확산
 
“슬럼, 준슬럼, 수퍼슬럼. 이것이 도시 진화의 결과”라는, 도시계획가 패트릭 게디스의 글귀로 문을 여는 이 사회과학서엔 묵시록적 정조가 짙다. 저자는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의 도시에서 하층민의 비합법적 주거지대인 슬럼이 급속히 확장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 원인을 산업 성장에 따른 이촌 향도에서 찾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그는 일갈한다. 농촌 인구가 유입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은 도시에 일자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농촌 경제가 몰락했기 때문이라는 것. 결국 1980, 90년대 심화된 제3세계의 채무 위기와 강요된 경제 구조조정이 슬럼 확대와 맞닿아있다는 진단이다.
 
유엔의 보수적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의 슬럼 인구는 10억 명 이상이다. 도시 주민 25%가 도시 면적 5%에 밀집돼 있다는 또 다른 통계는 슬럼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지역차는 있지만 슬럼 주민은 공통적으로 인구 과밀, 열악한 주거, 공공설비 부재 등의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슬럼이 개발 지역으로 편입될 때 생기는 이익은 다른 주머니로 흘러 든다. 남의 땅을 불법 점유해 슬럼을 지었던 ‘스쿼터’ 중 일부는 개발의 혜택을 입지만, 대부분의 이득은 지주, 사업가, 공무원 등 상류층의 몫이다. 이들 중엔 정부 보상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슬럼을 조성하는 경우도 있다.
 
‘슬럼의 생태학’이라 이름 붙인 장에서 저자가 나열하는 빈민가 주거 환경은 아연하다. 식민지 해방 이후 집권한 엘리트의 무능과 부패, 재산권ㆍ생존권을 놓고 한 치의 양보도 거부하는 상류층의 행태에 슬럼 확대의 책임을 묻는 저자는 열악한 위생과 경제적 배제가 계속될 경우 인류의 미래는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라 경고한다. 입주민에 대한 배려 없는 ‘도시 정비 사업’으로 사라져간 달동네, 쪽방, 비닐하우촌 등을 떠올리며 우리에게 슬럼은 이미 지나간 역사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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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인구 3명 중 1명 슬럼 거주…2030~40년 2배로
(한겨레, 한승동 선임기자, 2007-07-06 오후 09:03:23)
신자유주의 세계화·기득권층 부패가 확장 부추겨
 
마이크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학 어바인캠퍼스 역사학 교수의 〈슬럼, 지구를 뒤덮다〉가 예측하는 미래도시는 처참하다. “21세기의 도시세계는 하늘을 찌를 듯 빛나는 도시가 아니라 공해와 배설물과 부패로 둘러싸여 덕지덕지 들러붙은 슬럼도시일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슬럼에 살고 있는 10억 주민은 9000년 전 도시생활 여명기에 세워진 아나톨리아 정착촌 차탈회위크의 튼튼한 진흙집 잔해를 부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돌아보게 될 것이다.”
 
현재 60억을 넘긴 세계인구 가운데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살고 있다. 10억 인구라면 그 도시인구의 3분의 1 정도에 해당한다. 도시인구 3명 가운데 1명이 슬럼가에 사는 셈이다. 지금 이미 그런 상태다.
평균이 그런 만큼 나라에 따라서는 도시 슬럼인구가 99%를 넘는 곳도 있다. 에티오피아가 99.4%고 탄자니아가 92.1, 수단이 85.7%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84.7%, 파키스탄 79.2%, 인도 55.5%, 베트남 47.4%, 터키 42.6%, 중국 37.8% 등이다. 한국은 이 부류와는 별 상관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남한’도 도시 슬럼인구 비율이 37.0%나 된다. 멕시코가 19.6%로 돼 있어 이 통계수치를 어느 정도로 믿어야 할지 의문이지만, 저자 역시 멕시코의 수치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다는 점을 자세히 지적하고 있다.
 
슬럼인구는 지금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특히 못사는 나라들에서 더욱 그렇다. 상파울루의 슬럼가 파벨라는 1990년대에 연평균 16.4%씩 증가했는데, 아마존 지역 도시의 80%가 판자촌이다. 베이징에는 해마다 20만명의 ‘망류’(도시로 불법 유입한 빈곤층 농민)들이 들어와 슬럼가를 채우고 있으며 그 총수는 1억을 넘길 것으로 추산된다. 남아시아 쪽은 도시가구 성장의 90%가 슬럼지역에서 이뤄졌다. 뭄바이의 연간 유입인구 50만 가운데 40만이 슬럼가에 정착하는 인도의 슬럼가 인구는 전체 인구보다 2.5배 빠르게 성장하며, 아프리카 쪽 도시 슬럼가의 성장속도도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도시 전체 성장속도의 2배에 이른다. 지구상에는 이미 20만개 이상의 슬럼가가 존재하는데, 유엔 해비탯은 슬럼인구가 해마다 2500만명씩 늘고 있다고 밝혔다. 2030~40년 무렵이면 도시인구의 45~50%가 슬럼화해 그 수가 20억에 이를 것이다.
 
슬럼이 이처럼 급속히 확대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다. 영국과 미국에서 신보수주의 정권이 등장해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 펼치기 시작한 시기와 겹친다. 70년대 중반에 이미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은 오일 쇼크로 휘청거리던 제3세계에 대한 대출을 늘리면서 구조조정을 압박했다. 예컨대 “워싱턴(파리도 포함시킬 수 있다)·국제통화기금·세계은행이 잉태하고 발육시킨 프랑켄슈타인”이라 했던 콩고민주공화국의 모부투 독재정권에 대해 채권국 모임인 파리클럽은 어떻게 했던가.
“파리클럽은 모부투의 채무상환 기간을 연장해주는 대가로 공공부문을 더욱 축소할 것, 시장을 더 개방할 것, 국영기업을 민영화할 것, 외환규제를 없앨 것, 다이아몬드 수출을 늘릴 것 등을 요구했다. 수입품이 홍수처럼 콩고로 밀려왔고 국내산업은 문을 닫았으며, 킨샤사에선 또다시 1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세계은행은 아프리카를 냉전전략 차원에서 접근한 미국이 눈치를 줄 때마다 모부투를 부추겨 외국계은행에서 엄청난 돈을 꿔쓰게 했는데, 그 돈이 대부분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로 직행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랬다. 그들의 그런 부패와 냉전, 그리고 내전이 콩고를 초토화했다. 나라마다 꼭 같진 않았지만, 1997년의 ‘아이엠에프 사태’를 기억하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못사는 나라들을 압박하는 이런 구조조정을 지휘하는 야전사령부가 국제통화기금이다. 농업보조금 없애라는 게 구조조정의 단골품목 가운데 하나다. 그 결과 제3세계의 소규모 자작농들은 “엄청난 보조금 혜택을 여전히 누리고 있는 제1세계 농기업이 지배하는 세계 상품시장 틈바구니에서 쫄딱 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너진 농촌 주민들이 갈 곳은 도시밖에 없다. 그리하여 식민지시절에도 제국주의 종주국들의 사악한 계산 때문에 저지당했던 도시화가, 그것도 노동력 수요가 늘지도 않은 불황기에 폭발적으로 진행됐다. 대책 없는 도시 팽창은 당연히 슬럼 폭발로 이어졌다.
 
하지만 슬럼 폭발 책임이 그들 ‘외부’에만 있는 건 아니다.
정치가, 고위관리, 공무원, 군인, 건설업자들 등 상대적으로 가진 ‘내부’의 기득권층이 부동산 투기, 임대사업, 심지어 화장실사업까지 벌여 빈민들의 고혈을 짜냈다. 동남아 16개 도시 상위 5%의 지주가 53%의 토지를 소유하며, 인도에서는 도시공간의 약 4분의 3을 도시가구 6%가 장악하고 있다. 나이로비는 한 슬럼가 주택의 57%를 정치가와 공무원들이 소유하고 있다. “(워싱턴 컨센서스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공중화장실을 외채상환을 위한 현금인출기로 만든 것이다.” 이 말은 48만 가구가 사용할 화장실이라고는 160개의 변기와 110개의 변소차밖에 없는 델리, 화장실 하나를 6천명 이상이 함께 사용해야 하는 베이징, 이마저도 없어 “악취를 풍기는 거대한 똥통”이 된 나이로비, 라고스, 뭄바이, 다카 등에서 그나마 국제통화기금 혜택을 본 가진 자들이 화장실 임대업으로 떼돈을 벌고 있는 걸 두고 하는 얘기다. 요금은 한 가족 한 번 사용에 기본급의 절반. 1회 6센트 하는 곳도 있다. 어린이 노동, 장기매매도 횡행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빚은 비극이다.
  
저자가 동원하는 방대한 자료들은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역자가 인용한 서평 구절을 재인용한다. “이 책은 논증이라기보다는 묵시록이다. 그러나 당신이 묵시록을 원한다면, 이 책의 저자보다 훌륭한 묵시록을 쓰는 사람은 없다. 솔직히, 묵시록을 원치 않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엉망진창 세상을 묵시록이 아니라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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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제3세계 슬럼 비참한 현실 고발
(동아, 유성운 기자, 2007-07-07 03:06)
  
멕시코시티는 50년 안에 인구 5000만 명의 메트로폴리스가 된다는 예상이 나올 정도로 제3세계의 도시인구는 급속도로 팽창 중이다. 그러나 문제는 물, 하수시설 등 주거에 필요한 인프라 구축이 인구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 슬럼의 극빈층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이런 상황을 이용한 각종 불법의 횡행.
 
저자가 분석한 원인 중 흥미로운 것은 슬럼가의 악순환의 요인으로 대형 비정부기구(NGO)들의 성과주의를 지목한 것. 저자는 인도의 인도레 프로젝트나 아라냐 재정주 프로젝트처럼 세계은행이 지원하는 대형 NGO 프로젝트의 관련자들은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상을 받지만 수혜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저자가 몇 년간 수집한 많은 자료와 함께 이뤄지는 제3세계 슬럼의 비참한 현실 및 비리의 고발과 냉철한 분석은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 하지만 결말에서 도시 슬럼가 주민들의 군사적 연대를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은 순식간에 저자의 시각에서 균형을 잃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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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슬럼…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낳은 괴물
(세계, 조정진 기자, 2007.07.06 (금) 17:21)
‘산업화·도시화의 그림자’ 도심 빈민가 확산
美 경제모델 모방·고실업·양극화 등 원인
중산층 거주지는 요새화 … ‘계급투쟁’ 양상
   
‘공동묘지의 비석과 묘석을 책상·침대·탁자·선반으로 쓰고 묘비 사이를 연결해 빨랫줄로 사용하는 카이로 ‘사자들의 도시’ 주민들, 옥상에서 맨몸뚱이로 야영하는 프놈펜·알렉산드리아 빈민과 노숙마저 경찰과 폭력조직에 월세를 바쳐야 하는 로스앤젤레스·뭄바이 홈리스들, 하룻밤 새 세워졌다 철거됐다를 반복한다는 이스탄불 판자촌 ‘게체콘두’(‘하룻밤 사이에 세운다’라는 뜻)의 스쿼터(무단점유자)들*, 화장실 하나를 6000명이 쓴다는 베이징 달동네 주민들….’ 
*짓고 부수고를 반복하는 정부와의 37일간의 공방 끝에 결국 쓰레기 언덕 하나를 얻어내는 하층민의 인생. 터키 작가 라티페 테킨의 작품 ‘베르즈크리스틴: 쓰레기 언덕의 이야기’의 내용이다.
  
이들에겐 생존의 필수품인 물과 하수시설, 화장실도 사치다. 화재·지진 등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대형참사로 이어지는 건 당연한 일. 위치도 송유관·화학공장·정유공장·쓰레기매립지·화장장 등 혐오시설 인근이다. 그나마 올림픽, 미인대회, 국빈 방문, 국제회의 개최, 신도시 건설 등의 이유로 불도저의 밥이 되기 일쑤다.
  
정육점 직원·트럭 운전사를 하며 공부한 학생운동권 출신 도시사회학자 마이크 데이비스는 ‘슬럼, 지구를 뒤덮다’를 통해 문명시대를 자부하는 21세기 최대 부끄러움이자 모순인 도심의 빈민층 거주지 ‘슬럼(Slums)’ 문제를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조망하고 있다. 한국에선 슬럼이라고 하면 1950년대 해방촌을 메운 달동네 판자촌을 떠올린다. 그러나 국제적인 기준으로 보면 반지하방, 옥탑방, 고시원 거주자들도 모두 슬럼 주민이다. 또 IMF 환난 이후 급속도로 늘어난 노숙자들, 쪽방 주민들, 각종 쉼터 생활자들까지 합하면 그 규모와 내용은 더 확장된다. 우리나라는 유엔이 제공한 ‘국가별 슬럼 인구 순위’ 자료에서 페루보다 한 단계 높은 세계 12위를 기록하며, 도시의 슬럼 인구는 37%로 추산된다. 게다가 88서울올림픽을 1년 앞두고 자행된 대규모 철거는 세계 슬럼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이 책은 비록 미국 학자가 썼지만 타워팰리스와 쪽방으로 상징되는 우리의 건강하지 못한 도시 구조를 바라보는 근본적이고도 급진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지은이는 탁월한 통찰력과 방대하고 정밀한 데이터, 세계 현실에 대한 섬세한 이해를 바탕으로 세계 각지의 다양한 형태의 슬럼들을 분석했다. 
전 세계적 문제인 슬럼의 원인을 지은이는 ▲제3세계 농촌의 몰락 ▲미국식 시장경제체제를 개발도상국 발전모델로 합의한 워싱턴 컨센서스 ▲경제의 비공식화 ▲고실업 및 비정규직의 증가 ▲중산층의 탈정치화·개인주의화 등 신자유주의가 낳은 다양한 문제 ▲식민주의의 유산을 물려받은 독재정부의 무능과 부패 ▲중간계급의 배신 ▲IMF가 강요하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으로 인한 양극화 현상 등이 빚어낸 총체적 결과임을 논증하며 분노를 표출한다. 한마디로 슬럼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기획이 낳은 괴물 그 자체’ ‘비정규직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것. 그는 또 신자유주의적 가치에 굴복한 기만적인 대형 NGO(비정부기구)들의 책임을 지적하는 것도 빠뜨리지 않는다.
 
지은이는 제3세계 도시계획은 계급투쟁 양상을 띤다고 진단한다. 중산층은 공권력의 도움을 받아가며 마천루·호화아파트단지·강변 산책로·관광객 편의시설 등을 건설하기 위해 빈민들의 생존권을 짓밟고, 빈민은 슬럼이라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상황을 새로운 ‘계급투쟁’으로 규정한 것이다. 지은이는 도시가 슬럼화되면서 중산층 거주지는 요새로 이원화되기 때문에 중산층과 상류층은 이러한 도시의 끔찍한 실상을 점점 모른 척하며 살게 됐다고 판단한다. 그는 앞으로의 전쟁은 정규군과 빈민들이 벌이는 유격전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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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세상]배설물 · 쓰레기 '아비규환' 슬럼가에선 악몽 아닌 현실
(부산일보, 이상헌기자, 2007. 07.07.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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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팰리스 vs 쪽방'…한국, 세계 12위 슬럼대국
(프레시안, 강양구 기자, 2007-07-09 오전 8:54:53)
[화제의 책] '슬럼, 지구를 뒤덮다'
 
"21세기 도시는 하늘을 찌를 듯 빛나지 않는다. 손으로 찍어낸 벽돌, 지푸라기, 재활용 플라스틱, 시멘트 덩어리, 나뭇조각으로 지어진 공해, 배설물, 부패가 덕지덕지 들러붙은 '슬럼' 도시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슬럼에 사는 전 세계 10억 주민은 9000년 전 도시 생활 여명기에 세워진 진흙집 잔해를 부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돌아볼 것이다."
 
▲ <슬럼, 지구를 뒤덮다>(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돌베개 펴냄). ⓒ프레시안
 
최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도시 인구가 농촌 인구를 넘어섰다. 제3세계의 도시를 둘러본 이라면 누구나 실감하듯이, 도시는 그 자체로 '괴물'이 됐다. 
애초 '슬럼(slum)'은 '사기'를 뜻하는 속어였으나 19세기 중반부터 가난한 이들의 거주지를 뜻하는 단어로 변했다. 물론 서울을 비롯한 한국의 도시에서는 제3세계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대규모 슬럼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슬럼은 1950년대의 '추억 속의 풍경'이 아니라 지금도 끊임없이 확대하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이 책을 읽는 이들 중 상당수조차도 슬럼에 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아시아 대도시에서는 '간이 숙소'의 형태가 남아 있다. 서울을 예로 들면, 전통적인 무단 점유 정착지에서 쫓겨난 사람들이나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이른바 '쪽방'으로 몰려든다. 서울의 쪽방은 5000개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곳에서는 하룻밤 단위로 잠자리를 임대하고 화장실 1개를 15명이 공동으로 사용한다."
  
많은 사람은 경제 발전에 따른 도시화는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슬럼은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언젠가는 없어질" 부산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낭만적인 생각은 현실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아프리카, 동아시아, 서남아시아, 라틴아메리카에서 나타나는 '성장 없는 도시화'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프리카는 극단적인 예다. 탄자니아, 가봉, 앙골라 등 경제성장률이 매년 2~5%씩 후퇴하는 나라에서 도시 인구가 매년 4~8%씩 증가하고 있다. 산업의 몰락으로 도시가 활기를 잃었는데도 제3세계의 도시는 '미친 듯'이 성장하고 있다. 대도시가 앞장서면 소도시가 인근 농촌을 흡수하면서 뒤를 따른다. 성장 없는 도시화의 결과는 슬럼의 확대로 나타난다.
 
성장 없는 도시화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농촌의 몰락 탓이다. 자급자족할 수 있었던 제3세계 농업은 전 세계적인 구조 조정의 물결 속에서 급격히 경쟁력을 상실한다. 1970년대 중반부터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은 채무국으로 하여금 농업을 지원하던 정책을 중단하여 달라고 요구했다.
 
"구조 조정의 결과 제3세계 농업으로 가던 보조금이 끊어졌다. 그 결과, 소규모 자작농은 엄청난 보조금 혜택을 받는 제1세계 농업기업이 지배하는 세계 상품시장의 틈바구니에서 쫄딱 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도시의 고용 창출이 중단된 후에도 농촌의 인구가 고향을 탈출해 도시 슬럼으로 몰려가는 대탈출 현상은 멈추지 않았다."
 
일단 슬럼이 도시를 덮기 시작하자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특히 1980년대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국가의 미덕"이라는 이른바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유행을 국가들이 좇기 시작하자 이런 슬럼의 확대는 더욱 가속화했다. 그 결과 슬럼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21세기 지옥'이 됐다. 강제 퇴거의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2~3㎡의 땅을 얻는 대가로 고향을 등진 가난한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대가는 바로 생명을 잃을지 모르는 온갖 위협이다. 이 책이 6장에서 생생하게 묘사하는 '슬럼의 생태학'은, 슬럼을 그냥 내버려둘 경우 전 지구적 재앙의 진원지가 바로 도시가 될 수 있음을 설명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방치된 쓰레기로 뒤덮인 도시의 공터는 들쥐나 모기 같은 해충의 천국이다. (…) 다르에스살람에서 평균 쓰레기 수거율은 25%에 미치지 못하며, 카라치는 40%, 자카르타는 60%에 불과하다. (…) 아크라에서 끝없이 쌓여가는 쓰레기더미는 검은 비닐봉지로 가득한데, 이 속에는 아크라의 가난한 여성의 자궁에서 낙태된 태아들이 담겨 있다." "가장 극심한 의료 격차는 이제는 도시와 시골 사이가 아니라 도시 안에서 발생한다. (…) 케이프타운에서 가난한 흑인들이 결핵에 걸리는 비율은 부유한 백인에 비해서 50배 높다. (…) 대체로 농촌 지역에서만 제한적으로 나타나던 전염성 질병이 도시에서 나타나고 있다. (…) 오늘날의 거대 슬럼은 신종 질병이나 옛날 질병을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로 키워서 전 세계로 확산시킬 인큐베이터다."
 
굳이 전 지구적 전염병과 같은 재앙이 아니더라도 이미 슬럼은 부글부글 끓고 있다. "노동 과정에 편입되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 영원한 잉여 대중으로 찍혀 현재에도 미래에도 경제와 사회에 편입될 수 없는 쓸모없는 짐으로 여겨지면서" '도시의 묵시록'을 넘어 '세계의 묵시록'을 예고한다.
 
이런 파국의 징후 앞에서 이른바 '주류'의 대응은 사태를 더 악화하는 쪽으로 치닫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교외의 폐쇄형 주택 단지나 무장한 '안전 마을'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한 예다. 한국의 '타워팰리스'와 같은 맥락에 놓인 이런 새로운 공간에 거주하면서 '주류'는 "자기네가 뒤에 남긴 도시의 암흑가에 대한 도덕적ㆍ문화적 통찰을 잃게 된다."
 
이런 비판적 성찰의 부재를 뒤따르는 것은 바로 21세기 판 '아마겟돈'이다. 미국의 전략가들은 이미 '황폐화된 국내 도시'야말로 미래 전쟁을 대비하는 최적의 훈련 장소라고 제안한다. 그들에게 슬럼은 "디트로이트와 로스앤젤레스의 슬럼에서 훈련받은 미래의 군인"들이 활약할 새로운 전장이다.
 
그렇다고 슬럼의 가난한 사람들이 새로운 저항의 주체로 거듭나리라고 낙관할 수도 없다. 그들은 오히려 "얼마 되지 않는 비공식 경제의 찌꺼기를 놓고 경쟁하는 상황"에서 약육강식의 야만 상태를 가져올 수도 있다. '유목민'과 같은 낭만적인 저항의 주체는 '먹물'의 머릿속에는 있을지언정 슬럼에는 없다.
  
이 책을 쓴 마이크 데이비스의 대안은 무엇일까? 이미 "1988년 72만 명이라는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로 가난한 주택 소유자, 세입자에 대한 공권력의 폭력적 진압"을 통해 세계 슬럼 퇴거의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한국 독자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언급한 서울의 역사를 우리는 벌써 망각한 게 아닐까?
 
"이 책의 많은 주제가 특히 한국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사실, 근대 도시 가운데 서울만큼 극적인 변화를 겪은 도시는 없습니다. 전쟁의 폐허만 남았던 도시가 이제 뉴욕에 버금갈 비참함과 화려함이 공존하는 거대 자본주의 메트로폴리스로 변모했으니까요. 국가와 기업이 사적 이윤을 위해 민중의 공간을 불도저로 밀어내고 부유층 문화를 확산시킬 때, 서울의 주민은 도시에 대한 권리를 지키고자 학생운동, 노동운동과 연대해 국가와 기업의 철거 책략에 맞섰던 영웅적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는 서울의 역사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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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도시 슬럼화는 재앙의 전주곡
(이코노믹리뷰, 권춘오 네오넷코리아 편집장, 2007-07-13 10:57)
 
도시의 스카이 라인이 바뀌고, 우선 첫눈에 보기에도 말쑥하고 또 요즘 건물이 얼마나 멋진가. 하지만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은 어디로 가는가. 한쪽에서는 새롭게 재개발된 지역의 아파트나 오피스텔, 상가 청약으로 시끌벅적하지만 원주민들의 상당수는 불도저와 용역 직원들에 맞서 보상과 이주 문제로 처절하게 싸운다. 서울의 발전은 이러한 과정의 끊임없는 연속이었다.
 
《슬럼, 지구를 뒤덮다》(돌베개)는 비단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슬럼화 현상의 원인과 효과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슬럼이 향하는 재앙적 수준의 종착점을 고발한 책이다. 자본주의에 있어 빈부의 격차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슬럼은 국지적인 현상이며, 저개발 국가가 감당해야 하는 과정상의 고통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외신에서 간간이 볼 수 있는 인도나 중국, 남미의 비참한 슬럼 지역…, 이것이 이 세계의 극히 일부분이고 세계는 점점 더 좋은 쪽으로 발전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저자는 단호히 ‘아니오’라고 말한다. 우선 도시 슬럼화는 국지적인 현상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엄청난 속도로 벌어지고 있으며, 그 규모와 인구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슬럼이 준슬럼화되고, 준슬럼이 다시 슈퍼 슬림화되는 것, 이것이 도시 진화의 결과라는 것이다.
 
슬럼화의 고통은 슬럼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가된다. 상상 초월의 고통이다. 슬럼의 형성 지대는 최악의 거주장소다. 세계 최악의 풍수(風水)에 시달리는 아르헨티나의 ‘비야미세리아’ 주민들이 사는 곳은 바닥난 호수, 쓰레기장, 공동묘지 등으로 이루어진 범람지대로 해마다 집들이 통째로 홍수에 쓸려가기 때문에 가재도구마다 자기 대문번호를 일일이 새겨놓아야 한다. 이들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대부분의 슬럼 지대는 습지, 범람지대, 쓰레기장, 화학폐기물 처리장, 철도변, 사막 가장자리를 개척한 곳이다.
 
상파울루의 ‘오염계곡’으로 불리는 쿠바탕에서 송유관이 폭발하는 사고로 인글 파벨라에서 500명 이상이 불에 타 죽었고, 멕시코시티의 산후아니코 지역에서는 액화 천연가스가 마치 원자폭탄같이 폭발하는 사건으로 무려 2000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수백 명이 자다가 목숨을 잃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지 못한 채로 죽었다. … 사람들은 불덩이에 휩쓸려 흔적 없이 사라졌다. … 해가 뜨기 전이었지만, 화염의 불빛이 이 처참한 광경을 대낮처럼 환히 비췄다.”
 
위생은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다. 케냐의 키베라에 위치한 라이니사바 슬럼은 1998년 4만명의 주민이 구덩이 변소 10개를 공동으로 사용했고, 마타레 4A에서는 2만 8000명이 공중 화장실 2개를 함께 썼다. 인도의 방갈로르 슬럼에 사는 여성들은 씻거나 용변을 보기 위해 밤을 기다린다. 이들이 이용하는 지대는 습지대거나 들쥐 등의 설치류가 출몰하는 방치된 쓰레기장으로 이들은 밤에 용변을 보기 위해 낮에 아무 것도 먹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슬럼에 산다는 것은 이렇듯 재난과 죽음, 그리고 질병과 동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 지구적 슬럼화의 주범은 무엇인가. 저자는 엄청난 속도의 도시화를 추동하는 힘이 주범이며 또한 그 힘은 산업 발전으로 인한 고용 증대가 아니라 제3세계 채무위기와 뒤이은 IMF 주도 구조조정으로 불거졌다고 말한다. 즉 제3세계 농촌의 몰락, 워싱턴 정치경제 권력의 비대화, 경제의 비공식화, 고실업 및 비정규직 증가, 중산층의 탈정치화·개인주의화 등 ‘신자유주의’의 요소들이 낳은 괴물이 바로 암울한 슬럼화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특히 고실업과 비정규직의 증가는 파국으로 가는 폭탄이다. 2002년 CIA는 “1990년대 후반 세계 노동력의 1/3에 해당하는 10억이라는 노동자가 실업·준실업 상태가 되었다”고 밝혔다. 이들을 누가 흡수하는가. 지하 경제의 정부 역할을 하는 무장 반군이나 범죄 조직들이다.
  
전 세계적 슬럼화가 가져올 위기와 절망은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는 불과 1세기 만에 슬럼화의 위기에 직면했다. 이미 세계화를 부르짖고 편입되어 있는 우리에게는 1세기가 아니라 10년, 20년 내에 닥칠 심각한 위기가 아닐까 싶다. 저자는 이러한 위기를 조건부 파국이라고 한다. 상황을 바꿀 것인지 말 것인지의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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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슬럼, 지구를 뒤덮다
(매일신문, 석민기자, 2007년 07월 14일)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슬럼, 지구를 뒤덮다/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스스로 '국제사회주의자'이자 '마르크스주의-환경주의자'라고 밝힌 저자 마이크 데이비스(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어바인 캠퍼스 역사학 교수)는 '세계 도시의 슬럼화'라고 부를 수 있는 전지구적 현상의 구체적인 풍경들을 하나하나 조망하며, 그 원인과 효과를 추적하면서 '제3세계 농촌의 몰락' '워싱턴 정치경제 권력의 비대화' '경제의 비공식화' '고실업 및 비정규직의 증가' '중산층의 탈정치화·개인주의화' 등 신자유주의의 다양한 문제들을 만나게 된다. 다시말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기획이 낳은 괴물 그 자체가 '슬럼'이라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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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6 20:34 2009/07/06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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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은하철도 2009/07/07 12:22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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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아이티 지진을 보는 어떤 시각 Tracked from 2010/01/25 14:40

    새벽길님의 [『슬럼, 지구를 뒤덮다』(마이크 데이비스, 2007) 정리 ] 에 관련된 글. 아이티 지진을 보면서 아래 글에서 언급된 마이크 데이비스의 책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리고 명색이 행정학을, 그것도 공기업론을 주된 전공으로 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아이티의 재난에서 국가의 역할과 공공부문의 문제를 심도 있게 살펴보지 못했다. 이럴 때 보면 도대체 나는 독서를 왜 하나, 무슨 공부를 했나 스스로에게 한심함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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