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드디어 나오다

View Comments

드디어 <거대한 전환>이 출간되었다. 그렇게 뜸을 들이더니 7월에야 나온 것이다. 그 만큼 신경을 많이 썼다는 의미일 터다.
 
사실 책을 번역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자신이 그 분야에 대해 어느 정도 전문성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어설픈 번역이 새로운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 경우조차 있다. 물론 원저자는 자신의 책이 이렇게 오역되고 엉뚱하게 수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를 것이고...
 
그런 점에서 이번 번역은 나름 가치가 있다. 그 만한 공을 들인 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를 접하고 자신의 이론적 무기로서 벼리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를 수용할 만한 층이 얼마나 될런지는 의문스럽다.
 
예전에 헌책방에서 민음사 본을 사두었는데, 이를 선배에게 빌려주었다가 결국은 4-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돌려받지 못하고, 새로운 번역본을 접할 처지가 되었다. 폴라니의 책을 봐야 한다면 걍 예전 책은 깨끗하게 잊고 새로 번역된 것을 봐야겠지. 그런데 여유가 있으려나. 우선은 사두고 부분부분 참고하는 수밖에 없겠지.
 
게다가 나는 아직 홍기빈이 이미 지나쳤다고 하는 마르크스의 원전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상태라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내 형편에서는 그 원전들에서 얻을 것이 훨씬 더 많을 것이기에 굳이 시간을 낸다면 이게 먼저다. 당분간은 장식용이다.
 

-------------------------------------------------------------
[책과 삶]“자본주의는 사탄의 맷돌 ‘자기조정 시장’은 없다” (경향, 김학순 선임기자, 2009-07-10 17:46:03)
ㆍ국가가 개입…진정한 경제는 인간의 ‘자유’에 토대 둬야
▲거대한 전환 | 칼 폴라니 | 길

  
진정으로 바른 생각은 위기를 맞아서야 비로소 빛을 발한다. 요즘 들어 새삼 주목받는 비주류 경제학자 칼 폴라니가 그렇다. 전 세계적 경제위기 속에서 기존 시장경제에 대한 회의가 피어오르자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서가에서 먼지만 잔뜩 머금고 있던 폴라니의 노작을 다시 꺼내들기 시작했다.
 
폴라니의 대표작이 1991년 <거대한 변환>(원제 The Great Transformation)이란 제목으로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뒤 곧 절판됐으나 개정판이나 새로운 번역본이 나오지 않았던 것도 수요가 많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영문판 해제를 쓴 프레드 블록의 말대로 냉전기간 자본주의 옹호자와 소련식 사회주의 옹호자들 사이에 지극히 양극화된 논쟁에서 폴라니의 복잡하고도 섬세한 논리가 설 자리를 찾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거대한 전환>은 어느덧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존 메이나드 케인스의 <고용·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법·입법·자유>와 <노예의 길>에 버금가는 역작으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칼 폴라니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묘사하기 위해 차용한 '사탄의 맷돌(satanic mill)'이란 용어는 윌리엄 블레이크가 시 '저 옛날 그분들의 발자취가'에서 쓴 표현이다. 사탄의 맷돌은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장책해 1769년에 세운 '알비온 밀가루 공장'과 연관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이 공장은 블레이크의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이 공장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제분업자들이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화재로 1791년 전소됐다. 당시 화재를 묘사한 그림 중에는 불길을 공장 위에 올라앉은 악마로 그린 것도 있었다고 한다. 사진은 돈과 기계에 얽매인 현대사회를 풍자한 찰리 채플린 감독·주연의 1936년 영화 <모던 타임스>의 장면들.
 
폴라니는 이 책에서 ‘자기조정 시장’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유토피아’라고 일축한다. 그런 제도는 잠시도 존재할 수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라도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돼 있다는 것이다. ‘자기조정 시장’은 오로지 시장가격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경제다. 그는 애덤 스미스가 언급한 이윤을 추구하는 인간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원시시대부터 존재했다는 가설에도 반기를 든다. 폴라니는 스미스가 <국부론>을 쓴 1776년을 자본주의의 원년으로 보지 않는다. 1834년의 스피넘랜드법(빈민구제법)의 폐지에 따라 인민들이 먹고 살 길은 임금노동으로만 가능하게 되고 노동시장의 형성과 함께 ‘자기조정 시장’이 완성돼 현재의 자본주의가 도래했다고 여긴다.
 
그는 목가적인 공동체를 해체하고 만 시장경제를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을 빌려 ‘사탄의 맷돌’이라고 흥미롭게 표현한다. ‘사탄의 맷돌’은 산업혁명이 인간을 통째로 갈아서 바닥 모를 퇴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는 공포의 상징이다. 폴라니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시장 스스로 자유시장 영역을 만들지 않았으며 국가가 시장을 구축해왔다고 주장한다. 물론 국가의 개입이 해결책은 아니다. 국가, 정부, 시장이 아닌 ‘사회’가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게 폴라니의 핵심사상 가운데 하나다. ‘사회’에는 생활협동조합, 노동조합, 지방자치단체, 등 다양한 집단이 포함된다.
 
그의 또 다른 핵심 사상은 노동·토지·화폐는 상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노동, 토지, 화폐는 인위적으로 조작해서는 안 된다. 재화뿐 아니라 노동, 토지, 화폐도 교환하는 시장이 존재한다. 그렇더라도 이를 시장에서 ‘자유방임’으로 거래하면 곧바로 재앙이 시작된다는 게 폴라니의 견해다. 노동, 토지, 화폐를 상품으로 묘사하는 것은 전적으로 허구임에도 현실에서 이들이 거래되는 시장은 허구의 도움을 얻어 조직된다. 그는 진정한 경제가 인간의 ‘자유’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65년 전인 1944년 초판이 나온 <거대한 전환>이 지금 조명을 받는 이유는 좌우의 이념에서 벗어나 치밀한 비판적 접근을 거쳐 독특한 해법을 펼쳐 보였기 때문이다. 폴라니는 하이에크나 마르크스를 모두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그들이 발견하지 못한 경제 현상분석을 통해 세기가 바뀐 오늘날에도 유용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함으로써 위력을 발휘한다. 케인스주의로 돌아가자는 목소리도 들리는 가운데서 폴라니가 시장경제 자본주의 이후에 대한 완벽한 대안을 제시했다기보다 새로운 길을 찾는 논의의 실마리를 던진 것으로 받아들이면 좋을 듯하다.
 
옮긴이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의 꼼꼼한 번역과 세밀한 주석, 친절한 해제가 책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한다. 추가된 해설만 100쪽이 넘는다. 홍 위원은 국내 최고의 폴라니 전문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3만8000원 
 
▲ 칼 폴라니는 누군가
평생을 인간의 고통 근원에 대해 고민
시장 만능주의에 맞선 비주류 경제학자

 
헝가리 출신 유대계 경제학자인 칼 폴라니(1886~1964)는 주류 경제학계에서는 그리 널리 언급되지 않은 인물이다. 그의 경제이론은 애덤 스미스에서 출발해 알프레드 마셜에 이르러 체계적인 틀을 갖춘 자본주의 경제학은 물론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해 체계화된 사회주의 경제학과도 차별성을 지니고 있어서다. 그렇지만 경제 자체를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간과하기 힘들다. 시장, 상품을 비롯해 경제학적 개념의 기원과 인간의 ‘살림살이’로서 경제활동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타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인간의 도덕적, 윤리적 선택을 중시했다. 그가 평생 고민했던 것은 인간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가였다. 그 고통은 경제적 궁핍만이 아니었다. 그의 이론은 경제 민주주의 운동의 기반이 됐다.
 
빈의 저명한 경제주간지 <오스트리아 대중경제>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부터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그의 수제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주도하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시장 만능주의에 맞섰다. 그후 나치의 위험을 피해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와 런던대에서 강의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교수 자리를 얻었으나 아내 일로나 두크즈네카의 공산주의 전력 때문에 입국 비자를 얻지 못해 캐나다에 살면서 ‘방문교수’로 활동했다.
 
<세계체제론>으로 유명한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그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공정, 호혜에 대한 폴라니의 생각은 월러스틴의 ‘세계체제이론’과 스티글리츠의 ‘공정무역’ 개념에 접목됐다. 국내에 번역된 주요 저작으로는 <거대한 전환> 외에 <초기제국에 있어서의 교역과 시장>(민음사), <사람의 살림살이>(풀빛) 등이 있다.
 

 

2009/03/29 08:21 
한겨레21 제753호는 칼 폴라니를 머리기사로 올렸다. 한 인물에 대해 이런 식의 기획기사를 한겨레21이 올린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참 이례적이다. 홍기빈이 폴라니의 <거대한 변형>을 번역해서 내놓겠다고 하였음을 들은 것이 1년이 넘은 듯한데, 드디어 5월에 나올 모양이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현재의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칼 폴라니 이론를 살펴보는 게 의미있어서 이런 기획이 마련되었겠지.
 
안수찬 기자는 1991년에 일어판을 번역한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 간행되긴 했지만 곧 절판되었고, 한국에서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는 많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만 하더라도 폴라니의 이론을 접한 다음부터 그에 대해 알고 싶어했고, 이런 욕구를 가진 이들이 적지 않았으리라 본다. 지금까지는 홍기빈이 2002년에 번역하여 내놓은 책세상문고의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정도가 폴라니 이론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하고 있는 문헌이라고 하지만, 그 외에도 <현대 정치경제학의 주요 이론가들>(아카넷, 2003)에서도 폴라니에 대해 요령있게 정리하고 있다. 
 
아래의 글들에서는 마르크스, 케인즈, 하이에크에 이어 이제는 폴라니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얘기한다. 글쎄다. 과연 그러할까. 폴라니를 경제사학자로서 시장에 대한 날카로운 식견을 보여준 것은 인정하지만, 그를 하나의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이전 3명의 인물들에 대비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홍기빈이야 자신이 폴라니에 대해 석사논문을 썼으니 그의 관심은 당연한 것이며, 그가 정리하고 있는 것을 신뢰하긴 하다만, 기존 이론의 미흡한 부분을 보완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아래 기사들에서 공정무역을 폴라니 이론의 핵심으로 놓은 것도 의외다. 좀더 폴라니의 이론을 구체적으로 접해보면 수긍하게 되려나. 최근 경제/시장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 정리하고 있는데, 폴라니의 이론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자본주의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끊임없이 확산되어 온 과정을 제대로 살피고자 한다면 시장/경제/자본주의와 민주주의와의 관계를 검토할 수밖에 없으며, 여기에 '자기조정시장'이라는 허구를 폭로하고 있는 폴라니 이론이 기여할 바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시장을 의심하는 당신 떠나라, 폴라니의 세계로 (한겨레21 2009.03.27 제753호, 안수찬  정인환 기자)
고3 교실 같은 회사에서 세계 경제를 비관하는 애널리스트와 무덤에서 불려나온 폴라니의 대화 
 
세상이 바뀌고 있다. 신자유주의 30년, 자본주의 100년의 기틀이 거대한 전환의 초입에 들어섰다. 인류 문명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창간 15주년을 맞은 <한겨레21>은 정치경제학자 칼 폴라니로부터 해답의 실마리를 찾는다.
 
우선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와 폴라니의 가상 대화를 꾸몄다. 이어 폴라니의 삶과 사상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고, 21세기적 함의를 짚는 좌담도 마련했다. 그와 함께 개척할 우리의 미래도 그려보았다. 이제 시장과 자본은 더 이상 인간이 기댈 것이 못 된다고 당당하게 선언할 때가 왔다.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용기 있게 펼칠 때가 왔다. 용기를 갖고 당당하게 말하자면, 칼 폴라니가 새 시대의 출발점이다. 편집자 

  
애널리스트: 출근하면 회의실부터 가요. 갈색 원탁이 있고 붉은 의자가 있고 백색 칠판이 있어요. 아침 7시면 회의가 시작돼요. 그전에 담배부터 피워요. 단 몇 초나마 우울과 긴장을 눅이지요. 공식적으로야 서울 여의도 모든 건물은 금연 빌딩이에요. 그래도 담배마저 못 피우게 하면 사달이 날 거예요. 스트레스가 워낙 많거든요. 애꿎은 청소부 아줌마만 꽁초 치우느라 욕을 봐요. 
 
돌아와 자리에 앉으면 책상 위에 컴퓨터 모니터 두 대가 있어요. 하나로는 지난밤 미국 증시를 살피고, 다른 하나로는 뉴스를 봐요. 비관과 낙관 사이를 자맥질하죠. 최근에 눈여겨봐둔 기사들이 있어요. “앵글로색슨 자본주의 체제 전체가 의문시되고 있다.” 2008년 10월 <뉴스위크> 기사예요. “서구식 자본주의 모델이 실패했다.” 격월간지 <포린어페어스> 2009년 1·2월호죠. 국제통화기금(IMF)은 3월6일 정책보고서에서 “시장만능주의의 가정이 실패했다”고 했어요. “앞으로는 과거 30년과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3월9일 <파이낸셜타임스> 보도죠. “자유방임주의 시대는 끝났다.” 3월16일 <가디언>에 실린 브라운 영국 총리 인터뷰예요.
 
저는 예전과 다름없이 매주 보고서를 내요. 불길한 예감은 절대로 실현될 리 없다고 꽁꽁 힘주어 스스로를 속이면서 말이죠. 그런 기사들 가운데 당신을 만났어요. 1년 전이었지요. 지난해 3월 <뉴욕타임스>에 브래드퍼드 드롱 버클리대 교수의 경제 칼럼이 실렸어요. 그 칼럼에 이런 문장이 있었어요. “폴라니의 말처럼, 시장은 인간의 교류와 대화와 상호 의존이라는 오래된 토대에 기초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토대는 이미 충분히 힘든 시간을 보냈다. 신자유주의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사람들은 시장의 종말을 말하기 시작했어요. 몇몇은 당신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어요. 제가 발 딛고선 이 땅, 금융자본주의의 붕괴를 경고했다는 칼 폴라니, 당신은 도대체 누구죠? 
 
폴라니: 나는 한국 신문 이야기를 하지. 2008년 10월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악마의 맷돌’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어. “시장경제의 재앙은 경제를 다시 사회적 통제 안에 가두어둠으로써만 피할 수 있다고 칼 폴라니는 보았다.” 경제평론가 정태인이 2008년 12월 <경향신문>에 ‘대전환’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지. “케인스와 하이에크가 차례로 30년간을 지배했고 이제는 폴라니의 시대다.” <중앙일보>는 2008년 9~10월에 세 차례에 걸쳐 나를 인용하는 칼럼을 실었어.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윤영관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등이 내 개념과 분석을 빌려 “월스트리트의 붕괴” “시장만능의 신화”를 비판했어. 2009년 2월 <한겨레> 시민포럼에서 우석훈 연세대 강사는 “이제 폴라니의 시대가 온다”고 발표했어.
 
2000년 이후 2007년까지 ‘칼 폴라니’를 직접 인용한 칼럼은 중앙일간지를 통틀어 두세 건에 불과해. 그런데 2008년 하반기부터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나를 갑자기 들먹이기 시작한 거야. 내 책 <거대한 변형>이 5월에 새로 완역돼 나온다는 이야기도 들었어. 연세대 사회학과에서는 나를 주제로 잡은 공개 연쇄 강좌도 열리고 있다는군. 오히려 내가 물어야지. 1964년에 죽은 나를 무덤에서 되살리는 당신들, 도대체 무슨 일을 겪고 있는 거야?

» 시대별 패러다임과 폴라니의 비판
  
아주 오랫동안 폴라니는 잊혀진 이름이었어. 나는 케인스·하이에크와 같은 시대를 살았지. 그들은 20세기를 차례로 지배했어. 학계에 그들의 제자가 생겼고, 미국과 영국의 정부가 움직였지. 케인스는 루스벨트에게, 하이에크는 레이건에게 영감을 줬어. 그런 대접, 나는 못 받았어. 유럽에서조차 내 이론은 경제학 커리큘럼에서 곧잘 빠졌지.
 
70년대 이후 미국 대학에서는 케인스마저 공부하지 않는다지? 미국 유학파가 지배하는 한국 학계에 칼 폴라니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야.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미국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비미국인’의 10%가 한국인이었어. 결국 한국 경제학자들의 절대다수는 하이에크의 자식들이야. 지금 하이에크 세계의 붕괴 앞에서 그들은 당혹스럽겠지. 그래도 폴라니의 존재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겠지.
 
마르크스의 <자본론>, 케인스의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하이에크의 <법·입법·자유>에 버금가는 내 주저는 <거대한 변형>이야. 1944년에 처음 출간됐지. 이게 한국에 번역된 게 1991년이야. 일어판을 번역한 것인데 그나마 절판됐다더군. 프랑스에서도 1983년에야 번역됐어. 국제학회인 ‘칼 폴라니 정치경제학회’가 만들어진 것이 1987년이야. 이후 사회학·정치학·인류학 분야에서 나를 인용하는 사람들이 간간이 생겼지. ‘세계체제론’으로 유명한 이매뉴얼 월러스틴도 내 영향을 받았어.
 
그래, 나는 8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조금씩 부활한 거야. 이유가 있어. 나는 마르크스·케인스·하이에크를 차례로 베어버렸거든. 그들의 이상과 프로그램이 현실에서 차례로 파국을 맞기 전까지는 내 자리가 없었던 거야. ‘경제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관념을 나는 끝까지 부정했어. 반면 마르크스·케인스·하이에크는 정확히 그 지점에서 만나지. 그럼 경제결정론의 칼자루를 누구한테 쥐어줄까? 노동자? 경제관료? 금융자본가? 그런 식의 접근을 나는 반대해. 그들의 후예가 학계를 지배하는 곳에서 나는 경제학자 축에도 못 끼었던 거지.
 
‘폴라니의 아이들’은 9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자라고 있어. 유럽에서는 내 접근법을 기초로 하는 ‘경제인류학’이 독립 학과로 만들어지고 있어. 미국에서도 기존 경제학과 별개의 ‘사회경제학’을 공부하는 학과를 세우려는 노력이 생겨났지. 결정적인 것은 2006년 의회를 장악한 미국 민주당 내부에서 새로운 세계 경제체제의 대안으로 ‘공정무역’이라는 개념을 끌어온 일이야.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조지프 스티글리츠라는 학자의 영향을 받아 그런 논의가 시작됐다는데, 경제에 ‘공정’의 개념을 들여온 게 바로 나거든. 공정·호혜에 대한 폴라니의 이론이 바야흐로 세계 체제에 접목되는 순간이 시작된 거야. 스티글리츠는 2001년 <거대한 변형> 영문판의 서문도 썼는데, “자기 조정 시장경제(라는 신화)에 특별한 결함이 있다는 폴라니의 생각은 아주 최근에 와서야 토론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했어.
 
하이에크식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단순해. ‘시장이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러니 시장을 가만 놔둬라.’ 거짓말이야. 오히려 시장은 인간을 옥죄지. 실현되지 않을 장밋빛 미래만 약속하지. 만약 네가 폴라니에 대해 궁금해지고 있다면, 그건 시장주의의 주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야. 환영해. 폴라니의 세계에 들어온 것을.
 
애널리스트: 우리 사무실은 고3 교실 같아요. 몇 주 뒤면 주요 경제 일간지에 ‘랭킹’이 발표되거든요. 업종별 애널리스트 순위가 매겨져요. 펀드매니저들이 애널리스트들을 평가해요. 인간이라는 상품에 공개적으로 등급을 매기는 거죠. 6개월에 한 번씩 있어요. 피가 말라요. 순위에 따라 연봉이 조정돼요. 공개되는 랭킹은 분야별로 5명 또는 10명인데, 요즘은 주식시장이 좋지 않으니까 10등 안에 못 들면 쫓겨날 각오 해야 돼요.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어요. 흔적이 없어요. 달팽이들처럼 소리도 내지 않고 사라져요. 여의도를 아예 떠나는 것 같아요.
 
점심 때 밥 먹으면 병신이래요. 제 담당 업종에는 애널리스트가 30여 명 정도 있어요. 그 친구들은 회의 시간에 맞추느라 아침도 못 먹고 시장 분석하느라 점심도 거르겠죠. 대신 저녁에는 펀드매니저를 만나 ‘접대’를 하겠죠. 룸살롱도 가고 골프도 칠 거예요. 저는… 그냥 하루 종일 담배만 피워요. ‘진짜 잘나가는’ 애널리스트는 1년에 2억~3억원씩 벌어요. 그만큼은 아니어도 많은 연봉을 받으려면 랭킹에 들어야죠. 그 랭킹은 펀드매니저가 매기는 거고요.
 
“ㅇ사 2008년 4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15.2% 증가했습니다.” “이유가 뭔가.” “4분기가 전통적으로 이 업종 성수기입니다.” “보고서에 그렇게 쓸 건가?” “아닙니다.” “그럼 이유가 뭔가.” “저가 신상품 ‘ㅋ’에 대한 구매가 늘어난 것이 주요 원인인 것으로….” “틀렸어. 경쟁사들도 저가 상품은 내놓았잖아. 이유가 뭔가.” “….” “좀 돌아다녀. 사람들도 만나고. 이유를 알아내란 말이야. 다음, 반도체 부문 브리핑해.”
 
보세요. 회의 시간만 되면 저래요. 다들 ‘논거’를 대지만 실은 ‘직관’이죠. 솔직히 경제가 끝장나버렸다는 식으로 분석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 분석을 해서는 ‘랭킹’에 들어갈 수 없어요. 어머니는 종로에서 구멍가게를 하세요. 그렇게 제 뒷바라지를 하셨지요. 빈궁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 않아요. 애널리스트니까 돈 많이 벌겠다고 주변에서 부러워하지만, 그게 다 암세포를 만드는 일이에요. 그동안 번 돈은 홀어머니와 함께 살 집을 마련하고, 올가을로 예정된 결혼 준비를 하느라 다 썼어요. 그래봐야 신접살림 차릴 전세 아파트 값도 남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늙으시면 병원비 부담도 적지 않겠죠. 장래를 계획하는 일이 모두 목돈을 마련하는 일로 연결돼요.
 
제가 절대로 시장 보고서에 쓰지 않는 이야기가 있어요. 이대로 가면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일어날 거예요. 지금 세계 경제는 벼랑에 몰렸어요. 그냥 가면 빠져 죽을 테니까 일단 핸들은 꺾어야겠지요. 그게 돈을 찍어 뿌리는 거예요. 체제 붕괴 조짐이죠. 뿌린 돈은 결국 인플레를 일으킬 거예요. 그러면 정규직·비정규직, 고액·저액 가리지 않고 모든 급여 생활자는 거리로 나앉을 거예요. 이건 저 혼자 속으로만 생각하는 비밀이에요.
 
가끔 대학 때 생각이 나요. 미국 유학 다녀온 교수들이 가격을 결정하는 시장 요소에 대해 설명했어요. 그리고 덧붙였지요. “그런데 시장이란 게 사실은 ‘불가지’의 영역이야.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지.” 예측할 수 없는 영역의 법칙을 설파하면서 그 방식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구시렁대는 학문을 제가 공부했던 거죠. 그 교수들도 비밀을 알고 있었을 거예요. 비관을 털어놓을 수 없으니 억지로 낙관했던 거 아닐까요. 그들도 박사 학위 받으려고 미국 교수들을 접대했던 거 아닐까요.
 
폴라니: 마르크스는 당신의 계급을 저주했겠지. 케인스는 당신 같은 금융분석가를 휘하에 부리려 했을 테고. 하이에크는 당신의 역할을 찬양했지만, 실제로는 그리 행복하지 않지? 당신의 노동이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느낌, 돈을 벌어도 행복하지 않다는 느낌, 이 경쟁에서 언제 밀려날지 두렵다는 느낌…. 인간의 그런 불안과 공포까지도 위로해주는 것이 진짜 경제학이야.
 
“시장을 사회에 착근시켜라.” 내 이론의 핵심이야. 어떤 경우에도 ‘상품화’시키면 안 될 것이 세 가지 있어. 노동·자연·화폐야. 재화를 교환하는 시장은 필요해. 그렇다 해도 노동·자연·화폐를 시장에서 ‘자유방임’으로 거래하면 곧바로 재앙이 시작되는 거야.
 
노동은 인간의 다른 이름이야. 인간을 사고판다고? 인간은 상품 가치와 경제적 이익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존재야. 토지를 비롯한 자연은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시장에서 버려지거나 낭비되면 복구할 수도 없어. 화폐는 구매력의 징표야. 구매력은 개인이 뜻한 대로 늘리고 줄일 수 있는 게 아니지. 오히려 국가 또는 세계 금융 체제에서 ‘생겨나는’ 것이야. 인간·자연을 상품화한 뒤에 화폐까지 사고팔 수 있다는 환상을 심은 게 바로 ‘시장 자유’, 즉 ‘자기 조정 시장’의 결정적 폐해야.
 
노동·자연·화폐의 상품화로 피해받는 건 인류 문명 전체야. 노동자·농민은 물론 생산기업까지도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신화의 피해자야. 금융시장에서 화폐가 거래되는 방식 때문에 생산기업은 주기적으로 파산될 수밖에 없어. 그 기업이 만들어내는 재화가 아무리 가치 있는 것이라 해도 말이야. 그러니까 자유시장 경제체제에서는 일하는 사람, 기업하는 사람 모두 항상적인 빈곤과 불안에 시달리는 거지.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내버려만 두면 인류의 자유가 증대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완전히 거짓말이야. 실제로는 그 반대의 일이 거듭되고 있는 거지.
 
그렇다고 국가의 개입이 해결책인 것은 아니야. 굳이 표현하자면 나는 국가 대신 ‘사회의 개입’을 내세우는 셈이야. 그런 점에서 나는 사회주의나 파시즘을 싫어했지. 시장을 사회로부터 떼내어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를 떼내어 절대화하는 것을 나는 용납할 수 없었어. 두 방식 모두 인간 사회를 황폐화하는 것은 똑같잖아.
 
원래부터 경제는 인간 사회의 한 부분이야. 마치 정치와 문화가 사회의 한 부분인 것처럼. 그런데 왜 유독 경제만 정치·문화와 달리 사회적 합의 구조에서 예외가 되어야 하지? 경제는 사회 구성원의 소통·도움·합의 등에 의해 얼마든지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어. 요즘 말로는 ‘시민사회’를 생각하면 되겠군. 시민사회에는 노동자, 농민, 생산기업가 등이 모두 포함되지. 이들의 경제 문제를 ‘사회적으로’ 푸는 세 가지 방식이 있어. 공동체·협동조합을 통한 상호부조, 시장을 통한 재화의 교환, 국가를 통한 사회적 서비스 제공 등이야. 이런 요소의 공존이 ‘폴라니의 세계’를 가능케 하는 뼈대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매일 여의도 금융가에 쏟아지는 수많은 분석과 지혜의 다만 일부라도 다양한 사회 요소의 공존과 소통을 위해 할애한다면 어떨까? 아침 6시에 일어나 밤 10시에 퇴근하는 당신의 노동 가운데 일부를 공존·호혜의 질서를 만드는 데 쓴다면 어떨까?
 
애널리스트: 학창 시절, 대학 교지 편집실에 있었어요. 편집장까지 했지요. 마르크스를 공부했어요. 군대 갔다와서 복학하니까 소비에트는 붕괴했고 마르크스의 시대도 끝나고 있었어요. 편리한 머리들이 잊어버려서 그렇지 그런 시절이 있었어요. 고시 공부를 시작했어요. 재경부 공무원이 되고 싶었죠. 국가권력을 빌려 부자들의 돈을 거둬들이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그 돈을 쓰고 싶었어요.
 
수업 시간엔 하이에크를 배웠지만 마음으로는 케인스가 되길 꿈꿨어요. 하이에크는 자유경쟁을 믿었고, 케인스는 정부 개입을 믿었죠. 저는 고시에 합격할 거라고 믿었어요. 무성한 플라타너스 사이로 매미가 찌릉찌릉 우는 여름을 세 번 보낸 뒤에 시험 공부를 접었어요. 2001년 중소기업에 취직해 2천만원 정도 받았어요. 대기업으로 옮겨 그 두 배를 받았죠. 3년 전 증권사로 옮기면서 다시 몸값을 높였어요.
 
사무실 입구에는 백색 칠판이 있어요. 이름을 적고 시간을 적고 목적지를 적어요. 서로 경쟁을 시키는 거죠. 기업에 찾아가 정보를 구하는 일을 ‘탐방’이라고 해요. 잘나가는 애널리스트는 ‘탐방’할 일이 많죠. 기관투자가에게 전화 걸어서 시장 정보를 직접 브리핑하는 걸 ‘콜 넣는다’고 해요. 잘나가는 애널리스트는 콜 넣을 일도 많죠. 하루에 50통씩 콜 넣는 사람도 있어요. 저는 회의실 가서 담배를 피워요.
 
금융이라는 게 원래 돈이 필요한 사람과 돈 있는 사람을 연결해 생산적인 곳에 쓰이게 하는 장치죠. 그런데 돈이 돈을 따먹는 일이 반복됐죠. 미국은 그런 식으로 돈을 벌었고 신흥국은 그들에게 물건을 팔았죠. 모래 위의 집이었어요. 이제 무너지고 있지요. 저도 거기에 한몫했죠. 그래도 펀드 가입한 임금 생활자들에게 좋은 일 한다고 생각하며 지내고 있어요.
 
여의도에는 집회가 많이 열려요. 저는 그냥 지나쳐요. 달리 뭘 할 수 있겠어요. ‘월드비전’에 기부금을 내요. 진보신당에 가입해 당비도 낼 생각이에요. 지난 10여 년 동안 제 몸의 세포는 모두 바뀌었어요. 마르크스의 것도, 케인스의 것도 아니지요. 365일 가운데 360일을 일하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래도 가끔 옛날 생각이 나요. 플라타너스 그늘 무성한 벤치에 앉아 내 미래와 사회의 미래를 함께 꿈꾸었던 때가 가끔 기억나요. 칼 폴라니, 당신에게 기대를 걸어도 되는 건가요. 그런 세상을 당신이 품고 있는 건가요.
 
폴라니: 한국의 학자들이 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는군. “금융경제는 탐욕인데, 폴라니는 탐욕을 경계한다. 최근 금융위기와 관련해 새롭게 조명할 수 있다.”(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시장에 대한 폴라니의 사회적 접근은 다양한 대안에 대해 풍부한 영감을 준다.”(김동춘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 “민주주의의 심화를 통한 사회경제의 재조직화의 방향을 제시해준다.”(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
 
이병천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는 하이에크주의자들이 판치는 한국 경제학계에서 여러모로 독보적인 학자야. 스스로를 ‘급진적 제도주의 경제학자’라고 부르지. 이 교수는 “폴라니를 새로 읽는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어. △성장에 대한 강박을 떨쳐냈다는 점에서 시장주의는 물론 케인스주의,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와 구분된다 △삶의 기본 터전을 파괴하는 시장주의를 비판하면서 협동조합 등 공동체적 연대규범에 주목한다 △산업과 국가를 거부하는 무정부 생태주의와는 달리 돌봄·협력·소통의 질서를 국가·세계 체제 차원으로 확대한다 △시장을 폐기하지 않고 ‘살림살이 경제’와 ‘시장경제’의 공존을 주장한다 등으로 폴라니 사상의 핵심을 설명했어.
 
한국 사람들은 폴라니를 몰랐지만, 실은 폴라니적인 일을 꽤 벌여놓았어. 노동운동은 모든 협동조합의 기초야. 영농조합이나 중소기업중앙회 같은 것은 생산자 조합으로 발전할 수 있지. 환경운동은 생태적 가치를 확산시켜왔지. 생태 공동체를 만들겠다고 귀농한 사람들도 있잖아. 공동육아나 생협도 ‘살림살이 경제’의 기초가 되지. 희망제작소나 아름다운재단에서 펼치는 사회적 기업 운동, 사회 기부 운동도 마찬가지야. 이들을 종횡으로 엮는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은 내가 설파한 ‘토론 민주주의’의 출발이야. 진보정당이 그런 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며. 창비그룹에서 주창해온 ‘동아시아 공동체’의 이상은 풀뿌리 민주주의와 살림살이 경제를 세계 체제 차원으로 확대하는 씨앗이 될 수 있어. 심지어는 공동체적 전통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자와 사회 연대를 중시하는 진보주의자가 새롭게 대화할 수 있는 지평도 마련할 수 있어.
 
한국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 일궈온 ‘좋은 사회’를 위한 작은 성과를 계속 덧대고 엮어내는 일이야. 이제, 질문을 돌려줄게. 너는 그런 일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니? 파국을 두려워하며 당장의 연봉을 올리는 경쟁에 머리를 파묻는 대신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연대에 나설 자신이 있니? 그런 일을 2009년 한국 사회에서 네가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걸어도 좋을까? 그런 세상을 정말 네가 품고 있는 걸까?
 
 

---------------------------------------------
2039년 폴라니언이 세상을 바꿨을 때 (한겨레 2009.03.27 제753호, 안수찬 기자)
공정가격에 수출하고 수익은 녹색사업에 재투자하는 사회적 기업인이 ‘세계공정무역연합 총회’ 다녀오는데… 
 
--------------------------------------
시장경제의 사멸은 자유·평등의 개막 (한겨레21 2009.03.27 제753호)
출간에 앞서 미리 살펴본 칼 폴라니의 혁명적 노작 <거대한 변형>
 
인터넷 포털 구글의 검색창에 ‘자본주의’(Capitalism)란 단어를 입력한다. 찰나의 순간, 눈앞에 2960만여 건의 정보가 펼쳐진다. 홍수처럼 쏟아진다. 정보의 수명은 그렇게 갈수록 짧아진다. 그래서다. 고전이 사라지는 시대, 칼 폴라니의 노작 <거대한 변형: 우리 시대의 정치적·경제적 기원>의 내구성이 새삼스럽다. 1940년대 쓰인 책이 60여 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진정한 빛을 발하고 있다. 위기의 시대를 꿰뚫어본 그의 예지에서 새로운 시대로 가는 영감을 얻어낼 수 있을까? <한겨레21>은 오는 5월 발간 예정인 폴라니의 저서 <거대한 변형>(홍기빈 옮김·도서출판 길 펴냄)의 완역본 원고를 미리 입수해 그 일부를 발췌해 싣는다. 편집자
 
이 책에서 주장하려는 명제는 다음과 같다.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다. 그런 제도가 잠시나마 존재하면 사회의 인간적·자연적 실체는 없어지고 만다. 인간은 그야말로 물리적으로 파괴당할 것이며, 환경은 쑥밭이 될 것이다. 사회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지만, 그렇게 하는 족족 시장의 자기 조정 기능은 손상을 입고 산업의 일상적 작동이 무너지는 등 다른 방향에서 사회는 위태롭게 됐다. 시장 체제의 발전은 바로 이런 딜레마 사이에 정해진 길을 따라 흘러가, 마침내 그 시장 체제에 기반한 사회조직 전체를 무너뜨리기에 이른 것이다.

 
허구로 조작된 시장   
시장에 의해 통제되는 경제란 우리 시대 이전의 그 어떤 때에도 심지어 원리 차원에서나마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 19세기 내내 학문의 이름으로 지겹게 울려퍼졌던 주문(呪文)과는 달리, 교환을 통해 이익과 이윤을 얻는다는 동기가 인간의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물론 시장이라는 제도는 후기 석기시대 이래로 아주 일반적인 것이 됐지만, 경제생활에서 시장이 부수적인 역할 이상을 차지한 적은 결코 없다. 역사나 민족지를 뒤져보면 다양한 종류의 경제형태들이 보이며 또 그 대부분은 시장 제도를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시장에 의해 통제되고 조절되는 경제란 우리 시대 이전에는 엇비슷한 모습조차 찾을 수 없다.
 
노동·토지·화폐는 분명 상품이 아니다. ‘매매되는 것들은 모두 판매를 위해 생산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가정은 이 세 가지에 관한 한 결코 적용될 수 없다. 노동이란 인간 활동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인간 활동은 인간의 생명과 함께 붙어 있는 것이며, 판매를 위해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 활동은 생명의 다른 영역과 분리할 수 없으며, 비축할 수도, 사람 자신과 분리해 동원할 수도 없다. 그리고 토지란 단지 자연의 다른 이름일 뿐인데, 자연은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현실의 화폐는 그저 구매력의 징표일 뿐이며, 구매력이란 은행업이나 국가 금융의 메커니즘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 중 어떤 것도 판매를 위해 생산되진 않는다. 그러므로 노동·토지·화폐를 상품으로 묘사하는 것은 전적으로 허구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노동·토지·화폐가 거래되는 시장은 바로 그런 허구의 도움을 얻어 조직된다. 따라서 이런 ‘상품 허구’는 사회 전체와 관련해 결정적인 조직 원리를 제공하는 셈이며, 이 원리는 사회의 거의 모든 다른 제도에도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끼친다. 즉 이 원리에 따르면, 시장 메커니즘이 현실 세계에서 상품 허구의 원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어떤 제도나 행위도 결코 허용돼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토지·화폐에 관해서는 이런 원리를 적용할 수 없다. 인간과 자연환경의 운명이 순전히 시장 메커니즘 하나에 좌우된다면 사회는 완전히 폐허가 될 것이다. 구매력의 양과 그 사용을 시장 메커니즘에 따라 결정하는 것도 똑같은 결과를 낳는다.
 
이런 체제 아래서 인간의 노동력을 그 소유자가 마음대로 처리하다 보면 그 노동력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사람’이라는 육체적·심리적·도덕적 실체도 소유자가 마음대로 처리하게 된다. 인간들은 갖가지 문화적 제도라는 보호막이 모두 벗겨진 채 사회에 알몸으로 노출되고 결국 쇠락해간다. 악덕, 인격 파탄, 범죄, 굶주림 등을 거치면서 격심한 사회적 혼란의 희생물이 되어 죽어갈 것이다. 자연은 그 구성 원소들로 환원돼버리고, 주거지와 경관은 더럽혀진다. 또 강이 오염되며, 군사적 안전이 위협당하며, 식량과 원자재를 생산하는 능력도 파괴된다. 마지막으로, 구매력의 공급을 시장기구의 관리에 맡기면 영리기업들은 주기적으로 파산하게 될 것이다. 인간과 자연이라는 사회의 실체 및 사회의 경제조직이 보호받지 못하고 시장경제라는 ‘악마의 맷돌’에 노출된다면, 무지막지한 상품 허구의 경제체제가 몰고 올 결과를 어떤 사회도 단 한순간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자유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의 연합   
자유방임이란 전혀 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인간 만사를 그야말로 제 갈 길 가도록 내버려두기만 한다면 자유 시장이란 결코 나타날 수 없었다. 자유무역과 직결된 주도적 산업이던 면화제조업만 하더라도 보호관세, 수출장려금, 간접적인 임금보조금 따위의 도움을 빌려 나타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자유방임이라는 것 자체도 국가에 의한 법령과 집행을 통해 나타난 것이었다. 자유방임 경제가 의도적인 국가 활동의 산물이었던 반면, 그 뒤에 나타난 자유방임 제한 조치들은 완전히 자생적으로 시작된 것들이었다. 자유방임은 중앙 계획에 의한 것이었지만, 중앙 계획은 중앙의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사회조직의 세속 종교 교리로서 온 문명 세계를 품 안에 넣었던 경제적 자유주의이기에, 지난 10년 동안 여러 사건들이 벌어졌다고 해서 즉시 물러날 리는 없다. 사실 그 원리가 부분적으로 빛을 잃어버리면 오히려 그 원리에 대한 사람들의 신앙이 더욱 강화되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이런 경우에는 항상 자유방임 원리의 신봉자들이 앞으로 나서, 모든 어려움은 사실 자유방임의 여러 원리들을 모두 완전하게 적용하지 못해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할 여지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이야말로 오늘날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이 마지막으로 붙들고 있는 주장이다.
 
통속적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의 발전을 설명하면서 조야한 계급이론에 갇히고 말았다. 무수한 시장을 만들어내자는 사회적 압력과 그를 둘러싼 여러 세력들의 지형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도 이윤에 눈먼 한 줌의 금융가들의 움직임으로 모두 설명하려 하는 것이다. 제국주의라는 엄청난 사건조차도 자국 정부를 꼬드겨 (국가를) 대자본의 이익을 위한 전쟁으로 끌어넣으려는 자본가들의 음모로 설명해버렸다. 자유주의자들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적대적으로 맞서는 계급들로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관점에 선다는 점은 매한가지다. 이렇게 이 둘은 서로 어깨를 겯고서, 시장 사회의 성격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러한 사회에서 보호주의가 맡는 기능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포괄적인 조망을 할 가능성을 거의 완벽하게 차단해버리는 것이다. 

 
시장에서 생겨난 긴장이 정치로
계급적 이익이란 사회의 장기적 운동을 설명하는 데 제한적인 도움밖에 되지 않는다. 누구나 무수한 방식으로 다양한 이익들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기에 교회·지자체·각종 결사체의 분회·동호인 모임·노동조합·폭넓은 단결 원리에 기반한 정당 등 거의 모든 종류의 지역적·기능적 결사체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출하게 된다. 이제 인구의 서로 다른 여러 부분들에 걸친 광범위한 사회적 이익이 시장의 작동으로 인해 위협에 처하게 됐다. 다양한 경제적 계층에 속하는 개인들이 그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계층의 차이를 넘어 힘을 합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집단주의 운동이라는 것의 원천은 어떤 단일한 집단이나 계급이 아니었다. 물론 그 운동의 결말은 관련된 계급 이익의 성격에 따라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따져볼 때 그 모든 사건들이 일어나게 한 것은 사회 전체의 이익이었다. 이런저런 개별 계급의 이익이 아니라, 시장에 의해 재난에 처한 여러 사회적 이익의 내용을 묶어나가는 것이 더 합리적인 일이라고 본다. 경쟁적 노동시장은 노동력의 담지자, 즉 인간에게 타격을 가했다. 국제 자유무역은 자연에 의존하는 최대의 산업, 즉 농업에 대한 위협이 됐다. 금본위제는 여러 가격 수준의 상대적 변화 추이를 보면서 사업 여부를 결정할 수밖에 없는 생산조직들에 재난을 가져왔다.
 
긴장은 시장의 영역에서 생겨나지만 곧 그것을 넘어 정치 영역으로 확산되며, 이로써 전 사회를 휘어감게 된다. 하지만 세계 경제가 계속 기능하는 한 개별 국가들 내에서는 그 긴장이 잠복된 형태로만 남아 있게 된다. 그러나 세계 경제가 해체되자 시장 문명 전체가 그 소용돌이 속에 말려들게 됐다. 영혼도 무엇도 없이 그저 물질적 안녕의 자동적 증대라는 것 하나만을 목표로 삼는 제도들이 눈먼 기차처럼 달려가게 됐고 마침내 그로 말미암아 한 문명 전체가 파괴됐다.
 
‘낡은 세계’는 무너졌으며, 그 폐허로부터 각국 정부가 자신들 국내 제도를 뜻대로 자유롭게 조직하면서 서로 경제적 협력을 이루는 ‘새로운 세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시장경제와 금본위제가 지배하고 있던 당시, 세계연방의 창설이라는 생각은 중앙집권화와 획일화라는 악몽으로 여겨진 바 있다. 이는 옳은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시장경제가 종말을 고하자 각국이 국내에서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서로 효과적인 협력을 이뤄나가는 새 시대의 시작이라고 볼 만한 상황이 나타난 것이다.
 
자유주의경제는 자유라는 우리의 이상을 그릇된 방향으로 오도했다. 시장경제에서 대량 실업이나 빈곤이 발생하면 실로 야수적인 자유의 제한이 함께 나타나지만, 투표자·생산자·소비자 그 누구에게도 이런 사태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어떤 집단이 생존하려면 모든 성원이 일정한 정도로는 집단의 결정에 순응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권력의 기능이다. 그리고 권력의 궁극적인 원천은 개개 성원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의견이다. 일단 마음속에 의견이나 욕망을 가지면, 우리 모두가 권력의 창출 과정 그리고 경제적 가치 평가의 구성 과정에 참여하게 되는 셈이다. 이를 빠져나갈 수 있는 자유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시장경제에서는 자유도 평화도 없다
시장경제 아래서는 자유도 평화도 제도화될 수 없었다. 그 체제가 목표로 삼는 것은 이윤과 물질적 안녕을 창출하는 것이었지 평화와 자유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의 사멸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자유의 시대’의 개막이 될 수 있다. 소수만의 사회적 특권에 부수적으로 딸려오는 그런 원천적으로 오염된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산업사회가 우리 모두에게 주는 여가와 안정을 빌려서 새로운 자유를 탄생시킬 것이고, 그 새로운 자유의 덩어리에다 다시 옛날부터 존재하던 여러 자유와 시민적 권리들을 추가할 것이다.
 
이제 인간은 자신의 모든 동료들이 누릴 수 있도록 풍족한 자유를 창조해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됐다. 인간이 그러한 과제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권력이나 계획과 같은 것을 도구로 삼아 자유를 건설하려 한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의 원수로 변해 자유를 파괴하게 될 것이라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복합사회에서의 자유의 의미다.
 
------------------------------------
유목하는 ‘세계인’ (한겨레21 2009.03.27 제753호, 정인환 기자)
폴라니의 폭풍 같은 삶… 파시즘·세계대전 겪으면 저작 완성, 강단 생활은 주로 미국에서 
 
“내 삶은 곧 세계인, 나는 세계의 시민으로 살아왔다.”
칼 폴라니는 1958년 1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격동의 시대, ‘세계인’의 삶은 유목민의 삶이었다. 어디 한 군데 정착하지 못했고, 쫓기듯 대륙과 대륙을 넘나들었다. 생계는 불안정했지만, 사상은 풍요로웠다. 말하자면, 시대를 앞서 산 게다.

 
루카치·만하임과 교류하며 인문학 섭렵
폴라니는 1886년 10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이던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엔지니어 출신인 아버지는 철도사업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한 자산가였고, 문학과 예술에 조예가 깊던 어머니는 비엔나 사교계의 중심인물로 꼽혔다. 제국의 또 다른 수도였던 부다페스트에서 보낸 대학 시절엔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대가로 성장할 죄르지 루카치와 ‘지식사회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될 카를 만하임과 교우하기도 했다. 급진적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인문학 전 분야를 두루 섭렵한 그는 1912년 변호사 자격을 따냈지만, 법조인의 안정적인 삶에는 애초 관심이 없었다. 그는 1914년 헝가리 급진당을 창당해 서기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제국군의 기병장교로 참전해 인류 역사상 첫 번째 ‘세계대전’을 목격한 그는 1924년 비엔나로 활동 무대를 옮겨 저명한 경제주간지 <오스트리아 대중경제>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폴라니 필생의 ‘맞수’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의 질긴 인연은 이 무렵 싹텄다. 당시 비엔나에선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 사회주의의 대두로 상처 입은 시장론자들이 ‘자본의 자유’를 부르짖고 있었다. 대표적인 이론가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였고, 그의 수제자가 바로 하이에크였다. 폴라니는 <오스트리아 대중경제>의 지면을 통해 미제스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시장 만능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쏟아냈다.
 
이 시기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휘청이고 있었다. 19세기 자본주의의 발달을 지탱해온 금본위제도 무너지고 있었다. 이내 대공황이 닥쳐왔다. 이 모든 혼란을 자양분 삼아 파시즘이 독버섯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비엔나도 안전하지 않았다. 영국으로 거처를 옮긴 폴라니는 1937년부터 옥스퍼드와 런던대학이 개설한 ‘노동자교육협회’(일종의 평생교육원)에서 강의를 시작하는 한편 당시 ‘세계의 공장’이던 영국 경제에 대한 연구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뉴딜 정책이 대공황의 어둠을 걷어내기 시작할 무렵 절정에 이른 파시즘은 또 다른 세계대전을 불렀다. 폴라니는 두 차례의 전쟁이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고 믿었다. 시장을 우상으로 떠받든 자본주의의 출현이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사회적 관계의 일부에 불과했던 경제활동(시장)이 자본주의의 도래와 함께 모든 사회적 관계를 복속시키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미 버몬트주 베닝턴대학에서 ‘방문 연구원’ 신분으로 집필에 몰두한 폴라니는 58살이 되던 해인 1944년 마침내 <거대한 변형>을 세상에 내놓는다.
 
노작 출간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를 부른 것은 미 명문 컬럼비아대학이었다. 이번엔 미국행이 쉽지 않았다. 열혈 사회주의자였던 그의 부인 일로나 두친스카의 ‘전력’이 문제였다. 때는 1947년, 바야흐로 냉전이 막을 올렸고 미국 사회는 매카시즘 광기에 눈이 먼 채였다. 두친스카의 입국사증(비자)은 거부됐고, 폴라니 가족은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 외곽의 피커링에 터전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폴라니는 배편으로 피커링과 뉴욕을 오가는 생활을 이후 6년여 이어갔다.
 
하이에크와의 질긴 악연
‘방문교수’란 불안정한 신분으로 컬럼비아대에서 그가 가르친 과목은 경제제도의 기원을 탐구하는 ‘일반경제사’였다. 1953년 67살의 나이에 은퇴할 때까지 그의 ‘신분’엔 변화가 없었다. 강단을 떠난 뒤에도 그의 연구열은 식을 줄 몰랐고, 1957년엔 또 다른 노작 <초기 제국의 무역과 시장>을 펴냈다. 말년엔 대안 학술지인 <공존> 창간 준비에 정열을 기울이기도 했다. 칼 폴라니는 1964년 4월 피커링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폭풍 같던 삶을 조용히 마감했다.
 
<거대한 변형>이 출간된 1944년, 하이에크도 자신의 대표작 <노예로 가는 길>을 펴냈다. “모든 집단주의는 전체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다”며,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강력 비판한 이 책은 훗날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토대가 됐다. 하이에크는 1974년 화폐와 경기변동에 관한 연구를 인정받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고, 그의 후예인 밀턴 프리드먼도 2년 뒤 같은 상을 받았다. 1992년 4월 숨질 때까지 그는 냉전의 종말과 소비에트의 붕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물결이 지구를 뒤덮는 모습을 지켜보는 호사를 누렸다. 그 시대가 이제 저물고 있다. ‘거대한 변형’이다.
 

-----------------------------------
위기의 시대, 상상력의 원천 (한겨레21 2009.03.27 제753호, 사회 안수찬 기자, 정리 정인환 기자)
  
일시적인 위기가 아니다. 참고 견디면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꿈꾸지 마라. 옛 체제는 무너졌다. 우리가 아는 형태의 자본주의는 막을 내렸다. 그 체제를 수호해온 이들도 무겁게 인정한 바다. 미래는 우리가 살아보지 않은 자본주의, 어쩌면 자본주의 이후의 체제일 터다. 바야흐로 ‘거대한 변형’의 시대다. 그러니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한겨레21>은 정태인 성공회대 겸임교수·우석훈 연세대 강사·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등 3명의 경제학자에게 ‘위기 이후의 체제’에 대해 물었다. 지난 3월16일 오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4층 회의실에서 2시간 남짓 진행된 좌담에서 세 사람은 “칼 폴라니에게서 새로운 시대를 위한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사회: 현실 진단부터 해보자. 우리가 겪고 있는 작금의 위기는 폭과 깊이 면에서 어느 정도나 심각한 수준인가?  
 
=홍기빈(이하 홍): 역설적이게도 지금은 위기의 폭과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위기다. 문제의 심각성을 예측·진단하고, 과거와 비교할 수 있어야 리스크(위험수위) 계산도 가능하다. 그런데 현재로선 파장이 어디까지 갈지 예측조차 할 수 없다. 존 케인스가 말한 ‘불안’의 고전적 상황을 맞고 있다. 리스크 계산은 고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전문가들이 이런저런 의견을 내놓고는 있는데, ‘U자형’이니 ‘L자형’이니 말들만 많지 어느 한쪽으로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시장 상황도 마찬가지다. 위기의 폭과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 얼마나 심각한지도 모를 정도니 정말 심각한 상황이다. 우리가 어떤 상황인지 말할 수 없을 정도라면, 그것 자체가 증후적으로 어떤 상황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본다.
 
=정태인(이하 정): 현 상황은 콘드라티예프의 경기순환 사이클로 치자면 경기순환의 맨 밑바닥이다. 파생상품에 얽힌 자금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알 수 없다. 부실자산을 정리할 ‘배드뱅크’를 만든다 해도, 정확한 부실자산의 규모조차 파악되지 않으니 무용지물이다. 말 그대로 경기하강 국면의 맨 밑바닥으로 내려간 상태다. 국제정치적으로 미국 패권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달러가 일시적으로 강세를 보이곤 있지만, 곧 혼돈 상황이 올 텐데 그 다음 패권을 누가 쥐게 될지도 불분명하다. 위기에서 가까스로 빠져나간다 해도 에너지 가격 급등이란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 기후변화도 한계에 도달해 있다. 자본주의의 위기를 넘어 그 이상의 위기가 올 수도 있다. 정확히 말할 순 없지만, 대혼돈의 시기가 올 것만은 확실하다.
 
=우석훈(이하 우): 20세기의 역사를 돌아보자. 1929년 대공황으로 수정자본주의가 생겨났다. 1970년대 초반 제1차 석유파동이 나면서 케인스식 수정자본주의는 ‘영광의 30년’을 마감했다. 1980년대 이후 대처리즘이 나오면서 새로운 국제무역 질서가 만들어졌는데, 지금 그 체제가 위기를 맞은 것이다. 지난 100년을 한 사이클로 봤을 때, 세 번째 다가온 근본적 위기다. 위기를 맞으면 이른바 ‘레짐’(체제)이 바뀌게 된다. 첫 번째 위기 때는 케인스의 이론이 있었고, 두 번째 위기 때는 하이에크의 이론이 있었다. 현재의 위기를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해선 이론을 내놓은 사람이 없다. 근거가 있건 없건 다들 한마디씩 하고는 있는데, 세계 자본주의가 다음엔 어디로 가야 할지를 말한 이론가 자리가 비어 있는 상황이다.
 
=홍: 현 경제위기는 물질적 차원을 넘어 사회와 경제의 조직원리 차원으로 확대돼 있다. 지난 30~40년 동안엔 신자유주의가 전 지구적 차원에서 합의된 경제원리였다. 시장이 가장 합리적인 사회조직이라고 합의하고 모든 문제를 시장에 맡겼다. 적절한 가격을 산정할 수 있는 건 시장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시장원리를 통해 균형이 만들어졌을 때 가장 뛰어난 사회적 조직을 이뤄낼 수 있다는 사회철학이 지배한 시기였다. 그 정점이 바로 금융시장이었다. 금융시장은 어느 시장보다 정보 이동이 훨씬 빠르다. 시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정보가 금융시장으로 몰려들었다. 따라서 금융시장에 최대한의 자유를 부여하면, 사회 전체가 가장 완벽한 균형 상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금융시장은 정보를 모을 뿐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미래의 위험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합리적인 미래 계획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1929년 공황은 농업 불황이 촉발시킨 것이란 주장이 정설이다. 이번 위기는 사람이 만들어낸 파생상품 때문에 나온 것이고, 그것이 어마어마한 부채가 돼 지구촌을 누르고 있다. 지난 30~40년 동안 지구촌을 지배해온 시장 우위라는 틀이 논리적으로 파산한 셈이다. 시장이 완벽하지 않다면 경제와 사회를 다시 어떻게 조직해야 할 것인가? 내놓을 만한 대안이 없다. 그런 점에서 이번 위기는 지적인 위기이기도 하다. 주주 가치 경영의 창시자라 할 잭 웰치도, 지난 10년간 영국의 재무장관을 맡으며 지구적 금융 체제의 설계를 주도했던 고든 브라운도 자신들이 지금까지 믿어왔던 바를 완전히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대쪽에 1930년대의 마르크스 경제학이나 케인스주의 등과 같은 대안적인 지적 틀이 준비돼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현재의 지적 위기는 더욱 깊어진다.
 
=정: 지금 지구촌이 겪고 있는 위기는 기실 미국 경제가 예전부터 스스로 예고해온 바다. 1980~90년대 저축대부조합(S&L) 사태나 2001년 말 터져나온 엔론 사태가 전조였다. 문제가 불거졌을 때 금융시장에 제동을 걸었어야 하는데, 되레 규제 완화를 더욱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결국 한없이 파장이 커지고 말았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 컬럼비아대 교수는 신자유주의의 종언을 선언했고, 위기의 원인 제공자라 할 수 있는 앨런 그린스펀 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마저 자신의 경제학이 틀렸음을 고백했다. 아직도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시장만능론에 미련을 가지고 있지만, 위기의 장기화가 곧 이들이 틀렸음을 증명할 것이다.
 
-사회: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가 케인스주의적 경기부양책을 내놓고 있다. 지금 상황에서 케인스주의적 해법이 대안이 될 수는 없을까?
 
=우: 한동안 케인스 해법이 신자유주의 방식의 대안으로 거론되기는 할 것인데, 45~75년의 30년 기간처럼 전면적인 수요 진작에 의한 ‘대량생산 대량소비’ 방식의 포디즘으로 복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단 생산 방식 자체가 포디즘에서 탈포디즘으로 이행한 상태이고, 여기에 생태적 제약조건이 걸려 있으며, 국가의 작동 방식도 훨씬 다원화된 상태라서, 전성기 때의 케인스의 발전모델로 복귀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정: 오바마 행정부의 경제정책은 월스트리트 금융질서를 제압하지 못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이나 로런스 서머스 국가경제위원회 의장 등은 ‘월스트리트의 자식들’로 부를 만하다. 이들을 데려다 금융 개혁을 하려다 보니 굉장히 미적거리고 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위기를 맞아 기득권층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그렇게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위기가 오래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오바마가 루스벨트보다 불리한 것은, 루스벨트는 미국 패권 확립기에 집권했기에 개혁의 성공에 대해 곧바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게 돼 있었지만, 오바마는 미국 패권 쇠퇴기를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달러와 함께 유로나 아시아 통화가 공존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는 영국이 과거에 그랬듯이 미국민이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홍: 오바마 행정부의 경제팀 면면을 보자. 금융 쪽 ‘올드보이’를 불러모았다. 어쩔 수 없는 측면은 있다. 워낙 상황이 복잡하게 꼬였으니, 사정을 잘 아는 인사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클린턴 행정부 시절 재무장관을 지낸 로버트 루빈의 인맥이라 할 가이트너 재무장관이나 서머스 의장 등이 발탁된 측면이 있다. 이들이 강력한 달러화를 바탕으로 월스트리트의 현 체제를 디자인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프로그램에 생긴 버그를 잡으려면 그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거다. 현재로선 금융 시스템 안정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이른바 ‘녹색뉴딜’을 통해 공격적이고 진취적인 재정정책을 추진하는 측면도 있다. 대공황 직전까지 세계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버팀목인 금본위제를 유지·관리해온 금융 전문가들은 어마어마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공황과 함께 은행가들은 길바닥으로 내던져졌다. 금융 전문가가 무시당하는 상황이 온 거다. 오바마 행정부는 현재로선 금융 시스템도 살리고, 적극적인 재정정책도 취하면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쫓고 있는 모양새인데, 1930년대였다면 금융계는 모두 날아갔을 것이다. 미 금융권의 정치적 입지가 어떻게 되는가를 살펴보면, 미래를 가늠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우: 오바마 행정부도 기술적으론 대안이 없어 보인다. 임기 6개월 정도를 맞으면 국제 통상체계와 금융체계와 관련해 뭔가 나와줘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나온 것이 없다. 달러본위 체제가 바뀌는 순간이 오면, 지금까지 갖고 있던 금융자산은 무의미해질 수도 있다. 대규모 자산 파기 현상이 벌어질 텐데, 그 규모를 몰라 무서우니 일단 뒤로 미루고 있는 모양새다. 그새 금융위기는 더욱 가중되고 있다.
 
=정: 금융·재정 정책상 쓸 만한 것은 다 쓰고 있는 것 같다. 잘못하다간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갈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금융 마비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유동성을 공급하고 있을 뿐이다. 공적자금이 무한정 들어가고 있는데, 시간이 흘러도 부실채권이 스스로 줄어들지는 않는다. 빠른 속도로 일단 드러난 부실채권부터 상각해야 할 텐데 가이트너나 서머스 모두 미적거리고 있다. 부실채권을 매입할 투자자를 모은다는 게 가이트너나 버냉키의 해법인데 부실채권의 규모를 몰라서 가격을 정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누가 투자를 할까. 방법은 자의적이라는 비판을 받더라도 정부가 기준을 정해 부실채권을 빨리 정리하는 것뿐이다. 또한 새로운 금융규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설계를 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이래저래 위기는 길어질 것이다.
 
재정정책은 일정한 효과를 나타내서 경제 붕괴와 사회 혼란으로 들어서는 걸 막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엄청난 돈을 들이붓는 의료개혁은 별로 성공할 것 같지 않다. 현재의 민간보험과 병원을 그대로 둔 채 건강보험을 새로 만들어 경쟁시키는 것은 효과적이지 못하다. 건강보험이 고사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린 뉴딜은 획기적인 발상이다. 특히 스마트 그리드와 단열재 시공 등을 통해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재생에너지 생산을 늘리는 계획이라면 일자리도 꽤 많이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계획에 민간의 돈이 투입되도록 하기 위해 파생상품 시장을 만든다면 그건 또 하나의 혼란을 만들어낼 수 있다. 현재 구체적인 계획이 없어 단언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홍: 케인스 얘기가 새삼 나오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지금 미국의 경제학자 가운데 케인스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이 거의 없다. 1970년대부터 미 대학에서 사실상 케인스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해서 케인스 경제학 하면 무조건 정부가 나서 돈을 푸는 것 정도로 이해하는 이들이 많다. 이는 물론 케인스의 사상과는 사뭇 다르다. 이런 기류는 이른바 ‘트리클다운’(부유층과 거대기업에 대한 감세와 규제 완화로 경제성장을 이룩하면 저소득층에게도 그 혜택이 돌아간다는 주장) 이론과 결합될 위험이 있다. 시장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데 가장 필요로 하는 급소에 돈을 풀어야 하는데, 무조건 은행과 GM 같은 거대기업에 돈을 풀어 금융자본과 대기업만 안정시키면 된다는 식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오바마 정권이나 조지 소로스 등이 생각하고 있는 녹색 뉴딜을 통한 경기 회복도 아직 불투명하다. 무엇보다도 녹색 담론이라는 것이 아직도 재난 담론의 성격을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 90년대 말의 닷컴 붐과 같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정: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이 꼭 그런 식인 것은 아니다. 긴급 편성한 경기부양 자금 8천억달러 가운데 노동자들에게 직접 지원하는 몫도 있고, 의료보험 개혁용 예산도 그렇다. 이런 건 이명박 정부와는 정반대다. 금융 부문의 위기는 해결되기 어려울 것으로 본다. 현재는 일종의 유동성 함정에 빠진 상태다. 이자율이 너무 낮아서라기보다 금융 시스템에 대한 불신으로 각 금융기관이 최대한 현금을 확보하려 하기 때문에 생긴 유동성 함정이다. 어느 정도 금융위기가 지나가면 전세계가 동시에 불려놓은 유동성 때문에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생길수도 있다. 특히 유가와 곡물가가 위험하다. 그래도 정답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것 말고는 없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가 말한 ‘보텀업 경제학’(아래로부터 성장을 이뤄내야 한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오바마는 로버트 루빈과 로버트 라이시를 두 명의 ‘밥’(Robert의 애칭)이라고 부르는데, 노무현 정부 시절 이헌재 경제부총리와 이정우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이 생각난다. 둘 사이의 조정이 쉽지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더구나 지금 ‘루빈 사단’(서머스·가이트너 등)은 정부와 백악관에 있고 라이시는 그렇지 않다. 이 차이는 굉장히 크다.
 
-사회: 현실 진단도 그렇고 해법도 그렇고 온통 불확실성뿐이다. 폴라니 얘기를 해보자. 이론과 정책 측면에서 세계 경제와 한국 경제에 영감을 주는 게 있을 텐데.
  
=홍: ‘시장’ 대신 ‘투자자’로 말을 바꿔보자. 폴라니의 핵심 명제는 인간 세상의 만물이 상품화하고 있다는 거다. 무슨 말인가? 돈을 주면 모든 것이 맘대로 동원 가능해진다는 거다. 뒤집어 얘기하면, 돈이 안 되면 쓸모가 없어진다는 뜻이다. 돈으로 거래될 때만 상품이라는 게, 그게 사람이든 자연이든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된다. 아무도 사지 않으면 무용지물, 그게 바로 상품이다. 사람도, 화폐도, 자연도 마찬가지다. 내가 시장에 팔겠다고 그림을 그려 내놓았다가 팔리지 않으면 나 혼자 창피해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딴건 몰라도 사람과 자연, 화폐가 안 팔리는 상황이 오면 상황이 전혀 다르다. 폴라니가 경고한 것도 딴건 몰라도 사람·자연·화폐까지 상품화했다가 이게 시장에서 팔리지 않아 무용지물이 되면 사회 자체가 무너져내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실제 사회가 무너질 수는 없다. 그러니 사람이나 화폐, 자연이 알아서 먹고살아야겠다고 자기 길을 가게 된다. 결국 계속 상품화하는 움직임도 나올 것이고, 반대로 상품이 아니게끔 만들려는 움직임도 나오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가 파열음을 낼 수밖에 없다는 게 폴라니의 주장이다. 지금의 한국 상황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말하자면 큰돈이 돌 수 있는 판을 만들어내면 경제가 살아난다는 거다. 4대강 사업도 그렇고 영리법인을 뼈대로 한 의료 민영화 움직임도 그렇다. 이는 폴라니적 의미의 ‘상품화’다. 다시 말하지만 누군가 돈을 풀 때만 쓸모있는 게 상품화다. 노무현 정부 때부터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세상 만물을 모두 투자자가 돈을 투여해 더 많은 돈을 뽑아낼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지속되고 있다. 뭐가 돈이 되는지를 가장 잘 아는 게 투자자라는 주장이다. 사실상 ‘투자자 독재’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폴라니는 이런 게 부도덕한 것을 넘어 ‘유토피아’에 불과하다고 봤다. 실현이 불가능한 주장이란 얘기다. 인간·자연·화폐까지 상품화하면 사회가 견뎌내지 못하고 사달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다.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정비사업과 의료 민영화 추진은 물론, 교육도 ‘비즈니스’로 바꿨고 금산분리를 완화해 금융시장도 돈 놓고 돈 먹는 판으로 만들었다. 폴라니가 말한 만물의 상품화와 투자자 독재의 끝이 어떤 모습인지는 현 지구촌 경제위기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데도 말이다.
 
=우: 어떻게 보면 폴라니는 그동안 경제학이 놓치고 있던 사회적 요소 혹은 총체성에 관한 또 다른 지평을 상징적으로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시장이든 국가든 상당히 강력한 환원주의가 작동하고 있던 셈인데, 폴라니는 비환원주의 그리고 총체성에 대한 경제적 복원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시기가 비경제적 요소들도 경제적 요소로 환원시켜서 화폐나 금리 그리고 수익성 같은 것으로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라면, 폴라니 시스템은 그러한 경제적 요소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요소들을 다시 복원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정: 재화와 서비스를 가능한 한 많이 누리는 것, 즉 성장이 곧 행복(welfare)이라는 주류 경제학의 기본 사고를 뒤집어야만 인류는 생존할 수 있다. 기실 사회주의의 이론적 기초였던 마르크스주의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현대의 마르크스주의는 주류 경제학의 환경경제학(environmental economics, 예컨대 탄소배출권 같은 해법)을 뛰어넘는 생태이론을 모색하고 중앙 계획이라는 수단이 그린 뉴딜과 같은 정책을 단숨에 실행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과거의 실천이 보여준 것은 지극히 실망스러웠다. 대위기를 맞아 1930년대의 경험을 들춰보다가 폴라니에게서 희망을 찾았다. 굳이 얘기하자면 케인스 역시 이성의 힘이 가져오는 생산력 발전에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사람이었다. “장기에는 우리 모두 죽는다”며 위기 때의 정부 역할을 강조했지만 적절한 조정이 이뤄지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이 ‘선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굳게 믿을 만큼 그는 낙관적이었다. 그에게 시장은 적절히 다룰 수만 있다면 무한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인 것이다.
 
그러나 폴라니는 시장이라는 제도가 인간의 천성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인간과 자연을 파괴하리라는 사실을 30년대에 이미 꿰뚫었다. 그의 이론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재생에너지와 안전한 먹을거리가 그다지 넓지 않은 범위에서 호혜적으로 배분되는 지역 공동체를 능히 그려낼 수 있다. 호혜성(reciprocity)이야말로 우리가 내면 깊숙이 원하고 있는 생명복지(lifare·생명을 뜻하는 life와 복지를 뜻하는 welfare의 합성어로 정태인 교수가 만든 표현)의 원리일 것이다. 전기·가스·철도·우편 등 근거리를 넘어서는 전국적 네트워크, 그리고 교육·의료·주거 등 필수재는 국가가 재분배(redistribution)의 원리에 입각해 최대한 공공성을 확보해야 한다. 물론 여기에도 에너지를 최소화하는 녹색 가치는 철두철미하게 관철돼야 한다. 말하자면 ‘녹색 공공성’이 절실한 시점이다. 시장은 이런 기초 위에 사회의 일부로 착근돼야(embedded) 한다. 이 부문은 경쟁의 원리가 지배할 테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공정성이 강조돼야 할 것이다. 폴라니의 미완의 꿈을 지금 이루지 못하면 우리 모두의 끔찍한 공멸이 다가올지도 모른다. 어느 나라가, 누가 이런 사회를 먼저 만들 것인가? 우리 아이들의 생명이 달려 있는 일이다.
 
-사회: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폴라니가 줄 수 있는 교훈을 얘기해보자.

=정: 얘기할 게 뭐가 있나.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는데. (웃음)
 
=우: 케인스 좌파가 있고 케인스 우파가 있다고 설정한다면, 케인스 좌파는 주로 복지국가의 유형을, 케인스 우파는 재정정책을 전적으로 부자들과 특정 산업을 위해 활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명박 독트린은 고용과 복지에는 거의 흉내만 내는 단기 대책이고, 진짜 장기 대책은 10년씩 사업 기간이 되는 4대강 정비 등 토목사업 등에 집중돼 있다. 건설을 단기 대책으로, 복지를 장기 대책으로 사용하는 일반적인 케인스식 재정정책과는 장·단기의 배치가 반대인 셈이다.
 
=홍: 경제는 형식과 실질로 나눌 수 있다. 형식은 화폐로 표현되고, 경제적 범주는 무역량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실체는 바로 사람,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의 상황을 보자. 일자리가 없다고 난리지만 투자자는 돈을 풀지 않는다. 기업도 고용을 하지 않는다. 투자자가 투자를 하지 않고 기업이 고용을 늘리지 않으면 사람이 살 수 없게 된다. 화폐경제, 형식경제가 실질경제를 짓누르고 있는 상황이다.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애 낳고, 기르고, 가르치고, 살림하고 살아가는 데 굳이 투자자가 돈 풀기를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시장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모든 걸 상품으로 바꿔 팔 수밖에 없지만, 폴라니가 말한 ‘호혜성’에 기댄다면 달라질 수 있다. 사회적 관계라는 게 두 집단이 뭔가 주고받을 때, 사회적 신뢰나 구조를 바탕으로 화폐란 매개가 없이도 노동과 재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 협동조합을 보자. 참여하는 사람들이 신뢰와 인간관계를 바탕을 서로 도움을 준다. 국가기구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경제행위의 목적은 투자자의 돈을 불려주는 게 아니라 나라 전체의 번영이나 국민의 행복과 안녕이어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투자자가 돈을 풀어야 일자리가 생기고 실질적 경제가 가능하다고 세뇌당해왔다. 이를 한 꺼풀만 벗겨내면, 생활협동조합을 통해 일자리나 먹을거리 문제도 풀 수 있다. 이젠 시장이나 투자자에 의지해야 인간의 삶이 가능하다는 미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 미국은 극단적인 신자유주의의 나라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이클 무어 감독의 영화 <식코>다. 서유럽의 스웨덴이나 스위스·독일 등을 보면, 폴라니가 말한 ‘사회적 경제’가 국민경제의 10~20%를 차지한다. 노동조합의 역할이 적지 않다. 생산협동조합 형태로 많이 움직이고 있다. 이른바 ‘호혜적 경제’란 게 실제 존재한다. 우리도 1990년대까지 ‘곗돈’ 문화가 있었고, 품앗이도 있었고, 계층 간 연대도 존재했다. 이런 호혜적 문화가 사라진 게 불과 얼마 되지 않는다. 유럽은 예전부터 존재해온 이런 관계를 근대화시킨 거다.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재창조한 셈이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이 지속된다면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되는 차원의 공황으로 갈 가능성이 90% 이상이라고 본다. 이럴 경우 호혜성을 확대해나가면서 살아가는 게 한 가지 길일 테고, 저생산과 인플레이션이 높은 중남미처럼 일종의 파시즘 형태에 가깝게 가는 길도 있을 것이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도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파시즘이 발호했다.
 
정답은 없다. 열려진 길이다. 다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 그리로 가게 될 것이다. 케인스의 시대는 권모술수의 시대였다. 공무원이 사회적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선 군부 엘리트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하이에크의 시대엔 최고경영자(CEO)가 사회적 영웅이 됐다. 기업 경영자와 펀드매니저가 존경받는 시대였다.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가 마찬가지였다. 그 끝에서 우리 사회는 CEO 출신 대통령을 선택했다. 최근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 앞에 우리 사회가 보인 애도의 물결은 CEO 시대가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은 표시가 아닐까? 폴라니가 상정한 시대엔 성직자와 사회활동가, 예술가가 대접받는다.
 
=정: 이명박 정부로선 건설에 매달릴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미 공급 과잉 상태에서 더 많이 지으면 어떻게 될까? 가격 폭락이 일어나 우리 내부에 있는 금융 문제, 특히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100조원 규모), 부동산 가계대출(가계대출의 30%라면 200조원 규모)이 폭발하게 될 것이다. 결국 이명박 정부는 한편으론 공급을 늘리면서 한편으론 투기 수요를 최대한 부추기고 있다. 현재 상태에서 투기 버블을 일으키는 것은 성공하기도 어렵지만 만일 성공한다면 그 다음해쯤 대폭락을 겪을 수밖에 없다. 성장률이 마이너스 10% 이하로 떨어질 수 있다. 전세계가 모두 침체에 빠져 있는데 나 홀로 버블이 지속될 수는 없다. 복지를 확충해야 하는데 거꾸로 현재의 네트워크 산업이나 의료를 민영화하려는 것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킨다. 1년에 재정적자가 20조~30조원씩 날 텐데 세금을 더 거두거나 인플레이션을 일으키지 않고 적자를 메우는 방법이 공기업 민영화다. 전기·가스·철도·물·우편 등이 그 대상이 될 것이다. 내가 알기론 이미 가스공사 민영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세금을 투입해 일시적으로라도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해야 할 시점에 건강보험을 무너뜨리는 영리법인화, 병원 당연지정제 폐지 등을 꾀하고 있으니 보통 사람의 생활은 물론 생명마저 위협받게 될 것이다.
 
-사회: 한국 경제가 특히 위기에 취약한 이유는 뭔가?
 
=우: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유효수요 부족이다. 내수가 작동을 하지 않고 있다. 돈이 전부 부동산과 증권으로 몰리고 있다. 부동산과 증권이 경쟁한 게 지난 10년 세월이다. 한국 금융자산에서 연기금이 제일 큰데, 이게 증시로 흘러들어가 죽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국가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상황이 이런데 정부가 부동산을 포기할 수 있을까? 현 집권세력은 그렇게 못할 것이다. 결국 아래로 향해야 할 돈 상당 규모가 부동산·건설족에게 갈 것이다. 그리로 들어간 돈은 거기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혁신 능력이 워낙 떨어져 있으니 신상품도 나오지 않을 것이고, 버블로 들어가기 시작하면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결국 개인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더욱 협소해질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 세계 경제가 살아나면 우리도 따라간다는 게 이명박 정부의 시나리오일 텐데, 국제 경제의 어려움이 지속되는데다 국내 자본의 내부 모순까지 더해진다면 한국 경제는 갈수록 어려워질 게 뻔하다. 이런데도 4대강 개발에 막대한 자금을 뿌리면 땅값은 계속 올라갈 테고….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정: 내수가 적은 건 수출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경제가 나빠지면 내구 소비재부터 줄이기 마련이다. 선진 각국에서 내구 소비재 소비를 줄이면 수출로 버텨온 한국 경제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결국 건설을 빼고는 내수랄 게 없으니, 이명박 정부로선 이쪽을 유일한 살길로 볼 수밖에 없다. 그리로 가면 버블은 언제든 붕괴할 수밖에 없다.
 
=홍: 부동산도 중요하지만 서비스 경제도 살펴야 한다. 노무현 정부나 이명박 정부나 의료·교육 등 인간이 생명 활동을 하다 보면 반드시 필요한 것들까지 돈이 된다고 생각한다는 게 공통점이다. 필수 서비스를 안정적인 수익이 들어오는 시장으로 본 거다. 내구 소비재야 안쓰면 그만이지만, 병원과 학교는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이를 상품화하자는 것, 기업 활동 할 수 있게 만들자는 것, 이를 토대로 한국을 국제적인 금융 허브로 키우겠다는 구상이었다. 투자법인화 얘기도 그래서 나온 거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단순히 경기침체나 버블 붕괴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이루는 각 영역이 침탈을 당하게 된다.
 
=우: 스웨덴 같은 나라에선 ‘돌봄 노동’을 인정하고, 이를 수행하는 개인이나 단체에 정부가 돈을 대준다. 한국에선 이를 기업화하려 하고 있다. 사교육 업체가 코스닥에 상장됐을 때, 한국의 서비스 부문 기업화가 갈 데까지 갔다는 점을 깨달았다. 사교육 업체가 증시에 상장된 나라는 지구상에서 한국밖에 없다. 이제 고용이나 육아의 상품화가 기다리고 있다. 유럽은 사회적 경제 영역에 두고 있는 것을 우리는 기업의 영역으로 보내지 못해 안달이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회로 치닫고 있다.
 
-사회: 보수 진영엔선 ‘선진화 전략’을 말한다. 선진국이 되면 경쟁이 치열해도 국가 경제가 버텨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몇 년 고생해서라도 빨리 선진국이 돼야 한다는 주장인데.
 
=우: 형식논리적으로야 가능하지만, 실제론 선진국이 되기도 전에 우리 사회가 안에서부터 붕괴될 것이다. ‘사람’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고찰했어야 한다. 사람은 먹여만 준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사회적 해체 과정에 급격한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일본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정부 시절 우정국 민영화를 밀어붙인 여파로 니트족(직업이 없고 직업을 구할 생각도 없으며 진학도 하지 않고 직업교육도 받지 않는 사람)이나 워킹푸어(일하는 빈곤층) 문제가 악화하면서, 영원히 집권할 줄 알았던 자민당 정권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다. 돌이켜보면, 노무현 정부가 너무 오른쪽으로 가다 보니 기존 보수파가 더욱 오른쪽으로 가게 된 것 같다. 역설적인 게 우리나라에서 복지사회를 처음 말한 게 독재자 전두환이다. 의료보험의 뼈대도 그때 만들어졌다. 의료보험 민영화가 이뤄지면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공적 장치가 해체되는 거다. 오바마의 미국과는 완전히 거꾸로 가는 셈이다.
 
=정: 망한 데 따라가는 거지. (웃음)
 
=홍: 보수 진영의 경제 담론의 비현실성이 완전히 폭로되는 대목이다. 그런 주장의 골자는, 세계 경제의 노동 분업의 위계 구조에서 가급적 높은 자리를 점해 거기에서 나오는 우위를 이용해 이른바 ‘공동체’에 해당하는 가치를 추구하는 데 드는 비용을 충당하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지금의 위기는 바로 그 세계 경제의 위계 구조가 근본부터 흔들리면서 그들이 타깃으로 삼았던 ‘금융 허브’니 ‘서비스 경제’니 하는 게 대몰락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슬란드·아일랜드·두바이 등의 현 상태를 보라. 단순한 현실적인 파산일 뿐이 아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지난 30년간 이뤄져온 지구 경제의 위계 구조를 정당화하던 이론적·지적 배경이 급격히 바뀌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내가 보기엔 현 정권이나 보수 진영은 현재 패닉 상태에 빠져 마땅하다. 그래도 이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믿어왔던 이른바 ‘인지 구조의 모순’이 벌어지는 게 두려워서 하던 일을 더욱 가속적으로 추구할 것이다. 이것이 지금 정부가 내걸고 있는 ‘위기를 기회로’라는 구호의 성격이다.
 
=정: 이 정부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정부다. 미국이 지금 위기의 모든 걸 보여주지 않나. 그런데 이 정부는 위기를 빌미로 시장만능 정책을 더 강화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발효시켜서 반영구적으로 만들려고 한다. ‘트리클다운’ 경제학은 전세계 어디서도 실현되지 않았다. 라이시는 보텀업 경제학으로 트리클다운을 뒤집었다. 이것이 올바른 방향이다. 박병원 전 경제수석이 물을 무서워하면 수영을 배우지 못한다며 금융 자유화 등 이른바 선진화 전략을 계속 추구하려 하는데 그건 수영 배우는 일이 아니다. 이미 난파선으로 판명난 배에 전 국민을 끌고 올라타는 것이다. 바로 눈앞에 낫을 보여줘도 기역자를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이끌고 있다. 그래서 더욱 절망적이다.
 
-사회: 폴라니가 대안 체제의 기초로 언급한 게 이를테면 소비자 협동조합이나 지방자치 같은 것이다. 이런 건 우리 사회에도 이미 씨앗이 뿌려졌다고 볼 수 있는데.
 
=우: 분명 ‘맹아’는 있다. 생활협동조합 조합원이 40만~50만 명가량 된다. 3인 가구를 평균으로 보면, 생협을 통해 식생활을 해결하는 인구가 100만 명이 넘는다는 얘기다. 지역경제는 두 가지 접근법이 있다. 기존의 새만금식 개발주의가 있을 수 있고, 지역 공동체를 복원하면서 농업·식품가공업·문화 등을 통해 지역경제를 키우는 방식도 있을 수 있다. 지역경제 측면에선 폴라니적 상상력이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이런 맹아를 어떻게 키워낼 것인가가 문제인데. 사회적 경제, 호혜적인 부문을 국민경제의 20~30%까지만 끌어올려도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 경제에서 사회적 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시민사회나 자활 공동체를 모두 합해도 국내총생산(GDP)의 1%, 총고용의 5% 정도나 될까? GDP 10%, 총고용의 20~25%까지만 끌어올릴 수 있다면 사회적 경제가 시장경제를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홍: 지금으로선 난망한 일이지만 사회적 경제, 특히 생협운동 진영이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 등 노조운동 쪽과 협력관계를 만드는 게 살길이라고 본다. 생협운동을 하다 보면 일정한 공간적 한계를 넘어서기 어렵다. 도시와 농촌으로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도시와 유기적으로 연계돼야 하는데, 조직된 노동자 집단은 도시를 대표하는 사회세력이다. 영국에선 노동조합이 생협과 유사한 형태로 운영된다. 노동자들이 생협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여러 가능성이 나올 수 있다. 거기에 희망이 있다. 폴라니가 절대 반대한 게 한 가지 있는데, 바로 하나의 논리로 인간경제를 제단하는 것이다. 시장만으로, 국가만으로 문제를 풀 수 없다. 여러 경제가 복합적으로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
 
사회와 시장, 국가가 공존하면서 질서를 만들어가는 게 폴라니적 해법이다. 한 가지 더 있다면, 폴라니는 노동조합, 지방자치체, 소비자 생산자 조합 등 다양한 인간 집단의 내부적, 또 상호간의 활발한 의사소통과 연대가 인간적이고도 효율적인 경제의 필수 요소라고 보았다. 범진보 운동의 다양한 세력들의 다양한 관점이 있지만, 그 어떤 하나로 전체를 통일시킨다는 생각을 버리고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보완할 수 있는가라는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접근한다면 현재와 같은 다급한 요청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연대가 그렇게 먼 일만이 아닐 것이다.
 
=정: 폴라니의 이론은 사회경제를 생태적으로 변모시키는 데 필요한 이론적 자원이 될 수 있다. 그의 이론체계는 노동운동, 환경운동, 공동체운동, 기부운동, 시민운동, 진보운동을 모두 아울러서 배치할 수 있는 논리이기도 하다. 특히 군 단위 풀뿌리 지역에서 사회경제(social economy)를 만드는 일은 위의 모든 운동이 힘을 합쳐서 해야 하는 일이다. 이것은 또한 아래로부터의 성장이며 복지이다. 풀뿌리에 기반한 호혜성이야말로 아래로부터의 성장의 밑걸음이다. 그걸 무너뜨린 게 새마을운동이었다. 복원해내야 한다.
 
=우: 사회운동이라는 관점에서 폴라니를 본다면 분산형·비국가형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성운동과 생태운동의 결합인 에코페미니즘 그리고 풀뿌리 민주주의와 같은 흐름들이 조금 더 사회운동의 전면으로 등장하고, 이들이 경제적 장치로서 사회적 경제라는 지향점을 비로소 갖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노동자들의 상호부조라는 노동조합의 전통을 환기해볼 때, 시민운동과 민중운동 그리고 지역운동이 폭넓게 결합할 수 있는 다리로서 작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정부만 장악하면 된다”는 간단한 운동론보다는 사회·경제·문화·윤리 등의 복합적 요소들을 이해하고 고려해야 한다는 비환원주의적 요소에 의해 운동 방식의 ‘단순화’에는 좀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사회: 경제에서 시작한 얘기가 민주주의와 재분배, 사회적 다원성으로 확대된 느낌이다.
 
=홍: 경제와 민주주의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보여주는 논쟁이 있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루트비히 폰 미제스 같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경제활동이 합리적으로 이뤄지려면 적절한 가격이 결정돼야 하는데, 정보가 가장 많이 모이는 시장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가격을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정부가 가격을 결정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폴라니는 시장도, 공산주의도 정답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떤 물품이 얼마나 필요한지에 대한 추상적인 수치만 나올 뿐 사람들이 뭘 원하는지, 얼마나 원하는지, 생산과정은 얼마나 고된지를 통계로 포착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필요한 것은 토론이다. 노동조합에선 생산에 대해 토론하고, 소비자 집단은 욕구와 선호체계를 말해야 한다. 경제활동 참여자 모두 가격이나 정부 관료에 의존하지 않고 토론을 하는 과정이 곧 폴라니식 민주주의다.
 
-사회: 그런 사회로 어떻게 하면 나아갈 수 있느냐가 문제일 텐데. 그 과정에서 저항도 만만찮을 것이고.
 
=우: 어떻게 이행하느냐는 내용은 폴라니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다만 하이에크 체제가 붕괴하지 않으면 폴라니식 체제로 갈 수 없다. 그래서 1980년대 중반 자크 데리다 같은 이들이 ‘해체’를 말한 것은 아닐까? 위기의 시대, 폴라니가 새로운 상상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정: 세계가 복지국가의 출현을 목도한 것은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겪은 뒤다. 어려운 시기가 좀더 계속될지도 모른다.
 
=홍: 폴라니가 여타 사회주의자들과 다른 것은 인간의 도덕적·윤리적 선택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폴라니는 시장자본주의가 태생적 모순 때문에 언젠가 파국을 맞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되면 사회가 작동을 멈추면서 정치 영역과 경제 영역이 서로 원수가 되고, 산업자본과 민중이 장악한 의회가 맞설 것이라고 봤다. 사회가 마비된 상태에서도 시장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그대로 무너질 것이냐, 아니면 기능이 멈춘 사회를 폭력적으로 움직여 다시 기능하게 할 것이냐가 남는 문제일 것이다. 후자의 논리가 파시즘이다. 폴라니는 인간이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형제자매와 연대해야 하고, 인간으로서의 형상을 기억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사회주의와 파시즘의 정치경제적 차이는 없다. 다만 윤리적 원칙이 다를 뿐이다. 이제 윤리를 말해야 할 때다. 여기에서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성격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정치란 철저히 경제와 분리된 사안이며 민주주의란 철저히 전자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는 고전적 자유민주주의의 사고 틀에 갇힌다면 인간 사회에 미래와 희망은 없다고 하겠다. 내가 함께 더불어 살아갈 나와 평등한 이웃이 실업과 빈곤과 인간 파괴를 겪는 현실을 외면하고 투표와 법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이 무슨 기괴한 드라마인가.
 
폴라니는 산업사회의 기능성으로 인해 인간이 스스로가 영혼을 가진 존재임을 망각하고 그 기능성의 톱니바퀴로 스스로 전락의 길을 선택할 위험이 크다고 보았고 파시즘이 바로 이러한 사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산업사회에서는 더 이상 예전처럼 자신의 개인성을 빌려서 영혼을 회복하는 것도 불가능하며, 오로지 사회라는 단위에서의 집단적 연대를 통해서만 인간의 영혼 회복이 가능하다고 보았으며, 이것이 바로 고전적 자유주의와 달리 산업사회에서의 민주주의가 떠맡아야 할 역할이라고 보았다. 시장지상주의로 조직된 현재의 경제체제가 과연 사람들 모두의 살림살이를 원만하게 해결해줄 수 있을지 지극히 불투명해진 지금, 민주주의를 사회경제적인 것, 나아가 인간의 영혼과 가치라는 정신적·내면적 문제로까지 확장해가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일 수밖에 없다.
 
무역에 대한 폴라니의 비전은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시장지상주의적 사고가 낳은 것이 전 지구적인 자유무역이었다고 한다면, 국가권력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제체제의 상상력은 일국 경제의 폐쇄적 자급자족 혹은 일정한 크기의 폐쇄적이고 호전적인 지역적 블록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적어도 이것이 1930년대의 전환기에 나타난 선례였다. 현재의 세계무역의 구조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응당 바뀌어야 하고 바뀔 수밖에 없다. 엄밀하게 말해 이것은 미국·유럽 등의 서방 국가들에게 비서구의 근로 인민들이 물품을 제조해 바치도록 만들어진 지구적 산업체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화·용역·자본의 흐름 모두가 자연적인 지리적 조건에 의해 인근 국가들끼리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서방 국가들 및 그 앞잡이 역할을 하는 위성 지구들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도록 돼 있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독특한 무역투자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아직 확실하지 않으나, 이 지구적 불균형의 질서가 그대로 유지될 수 없다는 점은 누구나 입을 모아 말하고 있는 바다. 그런데 이 질서가 만약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 내에서의 국가적 개입의 강화로 나타난다면, 이는 필시 무역과 금융에 걸친 보호주의의 강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고, 그들과의 관계에 경제의 작동을 크게 의존하는 비서구 나라들에 더욱더 큰 고통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시장이나 국가를 통해서만 실물과 화폐가 오고 가야 한다는 이분법을 벗어나 사회적 경제라는 영역을 보게 된다면, 지리적인 인근 지역과의 경제적 협력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게 된다. 폴라니가 그의 1945년 쓴 논문 ‘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에서 발칸 지역의 안정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경제질서로 지역적 계획경제를 이야기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정: 국내 차원에서는 폴라니의 이론대로 어느 정도 정책을 만들 수 있다. 작년에 잠깐 화제가 됐던 ‘세 박자 경제론’이라는 게 이 틀에 맞춰져 있다. 문제는 국제 차원인데 폴라니는 30년대에 시장경제의 안정적 작동을 위한 골드스탠더드(금본위제)가 결국 인간과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공황이라고 파악했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달러본위제는 더 이상 작동할 수 없을 것이다. 거대한 글로벌 불균형과 달러 패권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현재의 핵심 과제다. 미국과 중국, 유럽연합(EU)이 끝없이 마찰을 하면서 새로운 국제 체제를 만들려고 할텐데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아마도 두 개 이상의 통화가 사실상의 기축통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배리 아이켄그린 미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의 예측에 동의하지만, 그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 않을 것이다.
 
=우: 폴라니 시스템에서는 대화와 이해와 같은 소통,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다시 중요하게 대두된다. 민주주의라는 담론의 영역에서는 누군가를 뽑고 그에게 모든 결정을 일임하는 경직된 대의제 민주주의 체계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스위스와 같이 직접민주주의를 상당 부분 정치 과정과 사회 과정에 복원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국민투표, 국민소환제 같은 직접민주주의의 요소가 실제로 작동하려면 지금보다도 훨씬 더 많은 대화와 사회 구성원 사이의 논의 과정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런 점에서는 중앙에서 많은 것을 결정하고, 이렇게 결정된 것들에 국민 모두가 따른다는 민주집중제의 생각과는 배치되는 측면이 많아 보인다.

----------------------------------------------
시장이라는 유토피아가 무너진 날 (시사IN [85호] 2009년 04월 28일 (화) 11:17:26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글로벌 금융 위기는 20세기를 지배했던 위대한 경제사상들의 묘비명이다. 마르크스·하이에크·케인스 등 ‘살아 있는 죽은 경제학자’와 상이한 시각에서 시장경제를 묘사했던 칼 폴라니라면 지금의 금융 위기와 시장이라는 주술을 어떻게 분석했을까.  
 
이 시장경제라는 목표는 과연 달성될 수 있는 것인가? 그 이상대로 실현되었던 적이 있었나? 혹시 카프카의 ‘성(城)’처럼 아무도 들어가 보지 못했지만, 모두 한번 들어가보려고 주변만 서성이다 늙어 죽고 마는 그런 곳은 아닐까. 30년간 지구를 지배해온 ‘과학적 진리’에 이렇게 허술한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동시장의 완전한 유연성’ 하나만 예로 들어보자.
 
시장경제 작동을 위한 필수 요소는 완벽하게 탄력적인 노동시장이다. 하이에크의 스승 미제스는 “실업이 발생하는 것은 노동자가 노동시장에 나온 일자리와 임금 수준에 그대로 순종하지 않고 감히 일의 성격과 임금을 놓고 가리고 흥정하려 들기 때문이다”라고 쏘아붙인다. 그런데 미제스 말대로 하면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예컨대, 경제학과 교수로 일하던 ㄱ씨는 수강생이 줄어들거나 더 적은 임금으로 교수 일을 하려는 자가 나타나면 그 즉시 문자로 해고를 통고받는다. 그러면 ㄱ씨는 수입이 거의 10분의 1로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면서 그 다음 날, 마침 일자리가 난 광주의 어느 아파트 수위직으로 가족을 버리고 옮겨간다. 서툰 재주에 그나마 다음 달 또 잘리자, 이번에는 강원도 어딘가로 광부 일자리를 찾아간다….
 
이런 세상이 정말로 있을 수 있을까? 필자는 경제학과 교수들을 단박에 불쾌하게 만드는 법을 안다. ‘노동시장 유연성’을 주장하는 경제학과 교수들부터 자신의 이론을 실천하려면 종신고용을 포기해야 한다고 우기는 것이다. 제아무리 선량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경제학과 교수도 이렇게 막돼먹은 주장 앞에 서면 즉시 낯을 붉히며 짜증을 내곤 한다.
 
너무 엽기적인 사례였나? 그렇다면 최근 미국이 단행한 ‘시가회계기준 완화’는 어떤가. 주지하듯 시가회계 아래서 모든 기업은 자신들의 모든 자산가격을 구입비용(역사적 원가)이 아닌 ‘현재 시장가치’로 기입해야 한다. 올해 정도부터는 거의 전 세계적으로 국제 시가회계기준(IFRS)이 적용될 것으로 예상되기도 했다. 그런데 모든 자산가치가 내려앉은 지금, ‘시가회계’를 적용했다가는 미국의 주요 은행이 모두 파산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러자 미국 정부와 월스트리트는 어색해하는 제스처조차 없이 주요 은행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자산가치를 ‘재량껏’ 산정해 장부에 올리라고 했고, 시가회계의 원칙은 졸지에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시장경제 창출의 최대 수혜자라 할 금융기관조차 그 시장경제의 원칙을 정말로 ‘무지막지하게’(juggernaut-like) 적용받게 되면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장경제’라는 이상은 본래부터 달성 불가능한 유토피아가 아닐까. 이런 유토피아를 앞세운 신자유주의란, 사실 생산력 발전으로 인류 진화의 새 장을 열겠다고 했던 공산주의 사상 이상으로 허망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것을 현실에 실현시키겠다고 우격다짐을 하게 되면 그 반대 방향의 우격다짐이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그래서 결국 아름답고 조화로운 시장의 자기 조정은커녕 사회 전체가 두 방향의 우격다짐 사이에 휘말려, 등이 터지고 가랑이가 찢어지게 되는 대혼란만 빚어지는 게 아닐까. 
 
바로 이것이 칼 폴라니가 그의 주저 <거대한 전환>에서 내놓은 핵심 주장이다. “이 자기 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이다. 그런 제도가 잠시나마 존재하게 되면 사회의 인간적·자연적 실체는 없어지고 만다. 인간은 그야말로 물리적으로 파괴당할 것이며 환경은 쑥대밭이 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사회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조처를 취했지만, 그렇게 하는 족족 시장의 자기 조정 기능은 손상을 입고 산업의 일상적 작동이 무너지는 등 다른 방향에서 사회는 위태롭게 되었다.”
 
시장 사회는 한편으로 완벽한 시장 기율을 확립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잔혹한 매질을 가한다. 그런데 채 몇 대 맞기도 전에 너무 가혹하다고 온갖 변칙을 만들어내 요리조리 몸을 뺀다. 그러다가 다시 스스로에게 너무 기율이 빠졌다고 시장 원칙을 강요하다가 다시 몸을 빼낸다. 전체 사회가 이렇게 어이없는 ‘골룸’과 ‘스미골’의 자작 2인극에 휘말려 들게 되면, 역사 전체는 엄청난 폭과 깊이의 변동을 겪는다. 폴라니는 산업혁명 이래 ‘자유무역-제국주의-파시즘과 사회주의-세계대전’으로 얼룩진 19세기와 20세기 미증유의 역사적 격동을, 시장이라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다가 벌어진 ‘거대한 전환’의 과정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폴라니가 스스로 인정하듯, 이토록 엄청난 규모의 역사를 이렇게 간단한 논리로 설명하는 것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단순해 보일 것이다. 그래서 폴라니는 인간 역사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 시장이 인간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해서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특징이 되었는지, 시장경제를 건설하는 것만이 인류가 번영과 문명을 유지하는 길이라는 유토피아의 신화는 왜 나타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신화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사단이 벌어지게 되었는지를 역사·인류학·정치학·국제정치학·경제학·사회학·철학과 사회사상 등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철저하게 논증한다.
 
1944년에 출판된 <거대한 전환>은 처음에는 거의 무시되었다가, 20세기가 끝날 무렵에야 사회과학의 고전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이 책을 꼼꼼히 읽고 침잠하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이에 근거한 사회적 운동과 담론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은 더욱 적었다. 이 점에서 폴라니의 대극에 서 있다 할 하이에크의 <노예로의 길>(이 책도 1944년에 출판되었다)과 크게 대조된다. 후자가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 운동의 지적·정신적 원천으로 작동했음에 반해, 폴라니의 시장 비판과 그가 대안으로 제시했던 ‘살림살이 경제학’(substantive economics)은 사실상 일부 경제인류학자 이외에는 거의 들어본 이조차 없었으니까.
 
그런데 과연 앞으로도 그럴까. 1930년대에 착공된 국가자본주의형 체제는 40년이 지난 1970년대에 와서 무너졌다. 그때 건설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 체제도 올해로 거의 불혹의 나이가 되었고 때맞추어 대규모 경제 위기가 시작되었다. 어쩌면 특정 형태의 정치 경제 체제의 평균수명이 40세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러한 주먹구구식 추측이 아니더라도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의 여러 교리가 현실 조직 원리로서 한계에 처했다는 지적은 사방에서 나온다.
 
주주 가치 경영의 창시자라 할 잭 웰치는 주주자본주의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생각’이라고 말하기 시작했고,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마저 ‘신자유주의는 끝났다’는 정치적 수사를 사용했다. 지금 누군가 현 사태 앞에서 지난 30년간 그랬던 것처럼 세금 감면과 탈규제만 하면 만사형통이라고 주장한다면 짜증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폴라니의 시각이 지금처럼 적실성을 가질 수 있는 시기를 만나기 힘들다.
 
물론 상황은 간단하지 않다. 어떻게 해서든 지난 30년간 번성해온 금융 체제와 질서를 회생시켜보려는 노력은 이미 진행 중이며, 노무현 정권을 이어 ‘한국형 신자유주의’ 건설에 전념하고 있는 현 정부의 정책도 요지부동이다. 그런데 이렇게 엉거주춤한 현재의 ‘인격 분열적’ 상황이, 1930년대와 같은 ‘거대한 전환’이 막 시작되는 찰나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심증을 강하게 만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07/11 04:33 2009/07/11 04:33

2 Comments (+add yours?)

  1. 행인 2009/07/11 14:14

    읽기 위해 샀는데, 일단 그 두께에 질리게 되는군요. 지금 읽고 있는 다른 책들(저는 한 번에 여러 책을 읽는 습관이 있어서...^^)을 제껴두고 읽어야 할지 고민 중입니다. ㅎㅎ
    새벽길님의 서평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Reply  Address

  2. 새벽길 2009/07/16 02:16

    오늘 서점에 가서 다른 책을 사면서 <거대한 전환>을 살까 하고 들춰봤는데요,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이더군요. 그런데 차례가 책의 맨처음에 나오는 게 아니라 거의 70여페이지의 발문 후에 나오도록 해서 실망했습니다. 이렇게 개념 없이 책을 만들었나 해서요. 아무튼 지금 읽고 있는 다른 책 대신에 이걸 먼저 볼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Reply  Address

Leave a Reply

트랙백0 Tracbacks (+view to the desc.)

Trackback Address :: https://blog.jinbo.net/gimche/trackback/769

Newer Entries Older Entries

새벽길

Recent Trackbacks

Calender

«   2021/09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