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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다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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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을 샐 때 가끔씩 생각나는 노래 중에 <시다의 꿈>이라는 노래가 있다. 여기에는 타이밍이라는 잠이 안오는 약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어릴 때만 해도 도저히 잠을 이길 수 없어서 시험공부를 할 때면 이 타이밍을 먹었다. 그래도 올 잠은 오더라만...
 
그러다가 언제부터인지 날을 새서라도 반드시 해야할 일이 생기게 되면 타이밍 같은 걸 먹지 않아도 날을 새게 된다. 소위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인데, 그렇게 하고 나면 그 다음날은 체력이 바닥이 나서 골골거린다. 물론 밖으로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지만...
 
민중문화운동연합 노래모음 제10집 누이의 서신에 실린 <시다의 꿈>은 박노해의 시에 서울대 노래패 출신인 김보성이 곡을 부친 것이다. 역시 박노해의 시에 곡을 부친 여느 시들처럼, 시보다는 노래가 나에게는 훨씬 익숙하다.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 출간 20주년이 되던 해에 이 시집에 헌정하는 음반에도 실려 있는데, 역시 그 맛이 민문연의 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느껴진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지난 6월 청계광장에서 열렸던 제13회 인권영화제 두번째날에 보았던 김태일 감독의 다큐 영화 <효순씨 윤경씨 노동자로 만나다>를 보고난 후에 이 시다의 꿈 노래를 떠올렸다. 7-80년대 노동자로 일했던 효순씨가 바로 시다였고, 그 흔적은 2000년대 후반 이랜드에서 해고당한 노동자 윤경씨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시다를 들먹이며 '귀족노조 민주노총' 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 시다의 꿈을 부족하나마 지금의 노동운동이 잇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곤 한다. 이 비난이 부당한 것임에도 먹히고 있는 현실, 이것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고민할 때다.    

 
2004/09/24 01:10
오늘 연구실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시다의 꿈>을 웅얼거렸다. 고3 때 타이밍을 먹으면서 밤새워 공부를 했던 기억과 함께, 그 뒤 대학에 들어와서는 타이밍이 없어도 날을 샐 수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타이밍이라는 것이 다른 용도로 사용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을 떠올렸다. 지금도 타이밍이 나올까?
 
2004/08/31 13:37
올림픽이나 월드컵 때면 항상 등장하는 것이 다국적 기업의 제3세계 노동착취에 대한 비판이다. 지난 월드컵 때는 축구화와 축구공을 만드는 데 투입되는 제3세계 국가의 아이들이 위험한 노동환경 하에 노출되어 착취당하고 있다는 글이 나왔다. 그들의 눈물이 축구공에 서려있다는 것이다.
 
종목과 장소는 바뀌었지만, 아마추어리즘, 평화의 제전이라는 이름하에 진행되는 올림픽의 이면을 까보이면서 이를 해결하지 않은 채 과연 웃고 즐길 수 있는지 반문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8월 27일자 한겨레신문 데스크칼럼에 권오상 님이 이에 대해 글을 썼다. 다른 신문에서는 볼 수 없었던 내용이다. 당위론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겨레에서 이런 글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권오상님의 글을 보면서 불현듯 학교 다닐 때 가끔 읊조리곤 했던 노래가 떠올랐다. 시다의 꿈! 한국의 70년대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들도 전태일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제 목표량은 시간당 바지 120벌입니다. 그 삯으로 1.25~1.50달러 정도 받습니다. 평일엔 960벌을 꿰맵니다. 목표를 채우기 위해 화장실 가는 것도 참습니다. 화장실에 가려면, 감독관의 도장을 받아야만 합니다. 초과 근무는 오후 4시부터 6시까지이지만 저녁 8시에도 끝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늦게 일이 끝나면 어두워져 겁이 납니다. 오토바이 택시(모토덥)들이 저를 태우려고 하지만, 타기 싫어서 집까지 뛰어갑니다. 초과 근무를 모두 하면, 월급은 60~65달러가 됩니다. 방값에 5달러를 쓰고, 가족에게 10~20달러를 보냅니다. 나머지는 음식과 약값으로 들어갑니다. 제 월급에서 저축할 것은 전혀 없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버린 뒤 홀어머니와 여섯 형제를 부양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프놈펜에서 아디다스 옷을 바느질하는 25살 된 한 캄보디아 여성 의류 노동자의 고백이다. 이 글은 아테네 올림픽이 개막되기 직전 세계적인 구호단체 옥스팸, 세계 의류업계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국제연합단체 깨끗한 옷 입기 캠페인, 그리고 국제노동조합운동 기구인 글로벌 유니언스가 펴낸 <올림픽 페어플레이> 보고서에 실린 내용이다.
 
지구촌 한쪽에선 ‘인간 중심의 올림픽’, ‘상업화 지양’을 외치며 화려한 조명 아래 연일 올림픽 경기가 벌어지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선 올림픽으로 막대한 부를 챙기는 의류업체들의 부당 노동행위가 끊이지 않고 벌어지고 있다. 주당 45시간 초과노동은 흔한 일이고, 미성년 노동자들의 고용, 혹독한 노동환경, 산업재해, 성폭행 등 보고된 사례들의 실상이 심각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승리를 상징하는 그리스의 여신 ‘니케’는 스포츠 의류 생산이라는 ‘올림픽 경기’에서 올림픽 정신을 위반한 기업체들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국제구호·노동단체들은 올림픽 개막 직전 아테네를 찾아가 35개국 50만명의 서명이 담긴 노동조건 개선 청원서를 자크 로게 국제올림픽위 위원장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국제올림픽위는 “우리와 계약을 한 의류업체들은 법과 규칙, 안전 규정을 의무화하고 있다”며 발뺌을 했다. 돈을 대주는 후원자의 허물을 들춰낼 필요도, 그럴 의지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럴싸한 이념으로 포장한 무대에서 금메달을 따려고 혈안이 된 선수들의 대결을 성사시키고, 승자의 손을 들어주면 되는 ‘흥정꾼’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사실 그들의 관심은 변화와 개혁이 아니다. 체조 양태영 선수와 관련해 “오심은 인정하지만 판정 번복은 없다”는 국제체조연맹과 “판정에 개입할 수 없다”는 올림픽조직위 쪽의 태도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스포츠 의류 노동자들의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 시민단체인 새사회연대가 낸 이 보고서엔 캄보디아말고도 중국, 인도네시아, 터키, 불가리아 등 6개국 186명의 노동자 회견 내용이 실려 있다. 실제 지구상엔 제3세계에 수백만명이 넘는 스포츠 의류 노동자들이 부당 노동행위를 겪으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이런 문제를 뿌리뽑기 위해선 올림픽을 비롯한 스포츠 행사의 스폰서 선정 과정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기업들을 제외해야 한다. 건전한 노동에 바탕한 기업만이 페어플레이 정신을 추구하는 올림픽의 스폰서 자격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게 국제단체들의 주장이다.
 
이제 아테네 올림픽도 저물어가고 있다. 대회도 애초 우려했던 시설과 안전 등의 분야에서 큰 문제 없이 끝나가고 있는 분위기다. 그런데도 금지약물 양성반응을 보이는 선수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고, 판정을 둘러싼 시비도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게다가 올림픽에 가려진 채 지구촌 곳곳에서 스포츠 의류 노동자들이 겪는 비인간적인 생활상은 실로 비참하다. 국제올림픽위원회는 물론이고 대한올림픽위원회와 국내 스포츠단체들이 새롭게 관심을 기울여야 할 문제들이다.
 


민문연 - 시다의 꿈
 
긴 공장의 밤 시린 어깨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
드르륵 득득 미싱을 타고 꿈결같은 미싱을 타고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 손으로 장밋빛 헛된 꿈을 싹뚝 잘라
미싱대에 올린다 끝도 없이 올린다
 
떨려 오는 온몸을 소름치며 가위질 망치질로 다림질하는
아직은 시다 미싱을 타고 장군같이 미싱을 타고
갈라진 세상 하나로 연결하고 싶은 시다의 꿈
찬바람 부는 공단거리 휘청이며 내달리는 시다의 몸짓
파리한 이마 위로 새벽별 빛난다


        시다의 꿈 
                                        박노해
 
긴 공장의 밤
시린 어때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
 
드르륵 득득
미싱을 타고, 꿈결같은 미싱을 타고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 손으로
장밋빛 꿈을 잘라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
피 흐르는 가죽본을 미싱대에 올린다
끝도 없이 올린다
 
아직은 시다
미싱대에 오르고 싶다
미싱을 타고
장군처럼 당당한 얼굴로 미싱을 타고
언 몽뚱아리 감싸줄
따스한 옷을 만들고 싶다
찢겨진 살림을 깁고 싶다
 
떨려오는 온뭄을 소름치며
가위질 망치질로 다짐질하는
아직은 시다
미싱을 타고 미싱을 타고
갈라진 세상 모오든 것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싶은
시다의 꿈으로
찬바람 치는 공단거리를
허청이며 내달리는
왜소한 시다의 몸짓
파리한 이마 위으로
새벽별 빛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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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2 07:01 2009/07/12 07:01

댓글1 Comments (+add yours?)

  1. 신포이에르바하 2009/07/12 11:53

    두 노동자 시인이 있다.
    난 먼저 어느 시인보다
    현재 살아있는 노동자 시인을 생각해 본다.현재 시인도 시쓰기를 위해 살아있는 자신을 시인으로 정형화 하면 시다운 시,암송하며 가슴에 남는 시집이 나올지 모른다.그러나 그 시인은 현장에서 살아있는 시이다.

    민주화 시대,신자유주의가 만연하여 시민사회에서 노동자 처지의 현실이 계급적으로 이슈가 되거나 시민사회 민주주의 과제의 핵심적인 정치가 되지 못할때,나는 어쩌면 우리는 노동자 시인이 나와 주기를 바랬다.

    내가 그 시인의 시를 들었던 때가 바로 꽈메기가 나는 지역이었다.
    아,그렇다 그때 이후로 민중시인 노동자 시인이 현장에서 문학적인 역활로 나타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아마 그시인이 시를 쓴다고 조용하게 칩거하면 시인의 이름은 통명으로 알려지겠지만 살아있는 모습은 보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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