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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권의 SF를 읽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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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세 권의 SF를 읽은 지는 꽤 되었지만, 그냥 읽고 넘기기는 아까워서 블로그에 내용의 일부와 내가 느낀 생각을 공유한다.

 

한국 SF 대표 작가 단편 10선
김보영, 복거일, 이영도, 이영수(듀나) | 황금가지 | 2007.12.28 출간
 
『얼터너티브 드림』은 아시아 태평양 이론물리센터 웹저널 <크로스로드>에 연재되었던 10편의 한국 SF 중단편을 모은 것이다. 책 표지에 한국 SF 대표 작가 단편 10선이라고 나와 있다. 그런데 그 느낌은 여기에 SF 대표 작가라는 타이틀을 붙인다면 넘 약하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 SF는 별로 읽어본 적이 없다. 물론 외국의 것도 그러하지만... 듀나와 이영도, 복거일 정도가 눈에 뜨인다. SF를 읽을 때 내가 기대하는 것은 공상과학이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인데, 이 점에서 부족한 점이 보인다. 겨우 인간복제 수준에 머무는 빈곤한 상상력이 아쉽다. 앞으로는 좀 나아질까. 그랬으면 한다.
  
처음에 나오는 듀나의 '대리전(代理戰)'은 외계인과의 전쟁을 부천으로 가져와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부천에 가본 적은 없지만, 바로 근처에서 볼 수 있는 상당히 익숙한 설정으로 보여 처음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특히 숙주를 쓰고 등장하는 외계인과 이를 쫒는 주인공, 그리고 해결사들은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코가 빨갛고 피부가 엉망인 50대 중엽의 추리닝 차림 아저씨가 반쯤 헬륨이 든 둥근 풍선 같은 걸 계속 앞으로 밀면서 달리고 있었어. 그리고 그 뒤에 멀쩡하게 생긴 두 젊은 여자들이 지구 방위대 전자총을 휘두르며 그 남자를 쫓고 있었단 말이야.
자외선 가리개를 쓴 작달막한 중년 아줌마들이 작은 숄더백들을 휘두르며 달려오고 있었던 거야. 해결사들이었어.

 
뒤의 단편에서도 언급되지만, 이제 르귄의 소설에서 보았던 앤시블이 대중화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웬만큼 SF를 접하지 않은 사람들이 과연 앤시블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을까.
 
오경문의 '오래된 이야기'는 성경의 창세기를 SF로 만든 것인데, 나는 처음 보는 것이지만, 아마도 외국에서는 이런 류의 것들이 이미 많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식상하다는 것.
 
이영도의 '카이와판돔의 번역에 관하여'는 그나마 흥미롭고 또한 생각할 점도 있었던 것이다. '드래곤 라자'의 작가라는 타이틀을 다시한번 떠올리게 했다. 이는 미래의 통일 한국을 배경으로, 외계인의 문학작품인 동화를 번역해야 하는 경상도 출신의 번역가 할머니와 그를 경호하는 북한군 출신의 경호원이 겪는 얘기를 다루고 있다. 외계인이 언급되고 있지만, 오히려 현실얘기를 하고 있달까.
 
이를테면 동화를 통해 외계인과 교류를 시작한다는 설정은 꽤 그럴듯하다. 이를 자녀들의 성숙과정과 비교한 대목이 그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외계인만큼이나 이질적인 자들의 방문을 경험했다. 그들은 고통과 함께 찾아오며, 도무지 의사가 통하지 않고, 우리의 안정된 생활을 서슴없이 파괴한다.
그 불청객들이 어느 정도 지구의 언어를 익히고 나면 우리가 그들에게 건네주는 첫 번째 정보가 무엇인가? 지구에서 태어나는 그 외계인들에게 우리가 주는 것은 말을 할 줄 아는 동물들과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마법, 오래전에 사라진 신분 계급 같은 것들이 등장하는 오류투성이의 정보들이다. 외계인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바로 동화다.
그들은 우리의 아이로 행동하길 원했고, 우리 또한 그들의 아이로 행동해야 했다. 우리의 동화를 들려주고 그들의 동화를 읽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영어 제국주의를 꿰고 있는 번역가 할머니가 경호원에게 들려주는 대목은 바로 지금의 상황이다. 그녀는 경호원에게 자신이 한글로 '위탄어'로 된 외계 동화를 번역하는 게 언어의 세력 판도를 봤을 때 부질 없는 짓이라고 끊임없이 투덜댄다. 경호원인 박대위는 통일이 되면서 과거 북한의 문화어를 쓰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작업을 재촉하지만, 번역가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
 
"외계의 지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지구의 모든 시각을 동원한다? 내 눈엔 반대로 보여. 그런 짓을 하는 것 자체가 내재된 위기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이야. 그 다양한 시각들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지. 다른 말을 쓰는 자들이 현실에 등장했으니까. 지난 세기에 자본이 그랬고, 이제 외계인이 그렇지. 둘 다 인간의 말이 아닌 다른 말을 써. 자본은 경제학의 언어를 섰고 외계인은 자기네 빌어먹을 말을 쓰지. 다른 말을 쓰는 오랑캐가 나타나면 사람은 단결하고 개성을 살해하는 법이야. 이 최후의 저항이 끝나고 나면 지구의 언어는 급속하게 하나로 통일될 거야. 영어일 가능성이 높지."
"사라지는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특별한지는 중요치 않아. 오직 세력만이 중요하지. 내가 화를 내거나 저항하지 않는 것도 이것이 자연법칙이기 때문이지. 저항이나 혁명 따위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거야."

 
결국 외계인과의 교류에 반대하는 지구주의자의 습격을 받고 난 후 번역가 할머니와 경호원은 카이와판돔이 일종의 사투리임을 알게 되면서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게 된다. 사투리로 상징되는 사라지는 것들, 소수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보이면서 말이다.
 
김보영의 '땅 밑에'도 가끔씩 꿈꿔보는 상상력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땅 밑으로 가는 것을 등산에 비교하는 것은 쉬운 발상은 아니다. 하긴 정상이 있다면 정하(頂下: 가장 낮은 곳)도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땅 밑으로 가는 건 앞뒤 외에는 다 막혀 있다는 점에서 그리 생각하고 싶지 않다.
과연 땅 밑에, '모든 것'이, '만물과 무한한 시간과 공간'이 있을까.
 
책의 제목이기도 한, 김덕성의 '얼터너티브 드림'은 이런 게 어떻게 실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신비로운 물을 마시고 자각몽을 꾸는 게 얼터너티브 드림이 될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있다고 치는데, 꿈 속에서 죽으면 현실에서 죽는다는 설정이 황당하다. 결국 수만의 사람들이 살육당하고, 자신의 가족도 죽고,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통해 알게 된 여친마저도 자신이 꿈에서 살육한다(당연히 현실에서도 죽었겠지). 이런 장면을 어떻게 상상해볼 수 있을까. 도대체 이게 뭐야. 뭘 말하고자 하는 걸까.
 
이는 우파적인 성향을 넘어 반사회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과연 그렇게 살육 장면을 묘사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 넘의 물레방아 표시가 관악산에 있다니...
 
이한범의 '사관과 늑대'는 말을 하다 만 느낌. 상상력이 그럴싸하여 이를 장편으로 만들면 쓸만한 그림이 되겠다 싶었다.
 
고장원의 '로도스의 첩자'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도스 섬 공방전'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이 선집에서 흥미롭게 본 것 중 하나. 아마 작가는 막판의 반전을 포인트라고 내세우고 싶겠지만, 중간쯤 읽다보면 결말을 알 수 있게 된다. 역시 시간여행은 무한한 상상력의 보고. 주인공의 말을 통해 나오는 저자의 시각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논쟁여지가 있지만. 이를 테면 이슈마엘 교수가 "인류가 공존공영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쓸모 있는 기술을 발견하고도 그 위력에 압도되어 뒷걸음치는 것만이 능사일까? 역사가 말해 주고 있듯이 이미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진 기술을 아예 본 적도 없는 것처럼 방치해 둘 수 있을까? 문제는 역사복원학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네. 역사복원학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다면 원자력은 물론이고 어떤 신기술도 우리의 편이 되어 주지 않을 것이네."라고 말할 때 들었던 복잡한 감정.
역사복원학, 시간안전국 이런 것이 현실화될 시기가 올까. 아니 오는 게 바람직할까.
  
복거일의 '꿈꾸는 지놈의 노래'는 생명공학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자체로 흥미가 반감되었던 작품. 게다가 여자친구의 딸로 나오는 신지가 자신을 데리고 결혼식장에 들어갈 사람으로 외삼촌인 자신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자유주의자 복거일의 보수적인 면모가 보이더라. 미래에서도 여성은 아버지 같은 사람이 남편에게 인계하는 물건인 모양.
 
노성래의 '향기'는 흥미진진한 작품. 돼지인간이 된 주인공이 돼지의 몸을 가졌을 때의 장점인 향기를 분별해지는 능력을 발휘하고, 그에 집착해서 인간으로 돌아가기를 연기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에 실려 있는 신윤수의 '필멸의 변'은 용두사미식의 전개를 보여 아쉬웠다. 초반에 그렇게 벌려놨으면 제대로 수습할 것이지. 상당한 분량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다 소화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인간복제 문제는 괜시리 꺼려지기 때문에... 
 
도대체 하진석은 뭐하는 넘일까. 필멸인이었으면서도 할 일이 있다고 죽음을 미루고 불멸자로 되었으면서, 그리고 그 와중에 엄청난 부하들의 희생을 치루었으면서 기껏 애들 데리고 아프리카 가서 편하게 사는 것으로 마무리하다니... 하긴 설정 자체도 조금 이상하긴 하더라만...
 
아무튼 얼마 전에 읽었던 스타메이커에 비해서는 그럭저럭 재미도 있고 (이럴 때 보면 내가 철학 같은 것을 싫어하는 걸 재확인할 수 있다) 술술 잘 넘어가지만, 이 정도로 만족하기엔 약하다. 다음 단편집은 수준이 좀더 향상될까.

 

그렉 이건. 감상훈 옮김. 2003. 행복한책읽기.
 
해설 중에서:
하드 SF란 하드 사이언스, 즉 자연과학에 밀접한 事象을 주요 소재로 다룬 이공계 성향을 SF이다.
사이버펑크 운동가들이 주창한 급진적 하드 SF와 전통적인 하드 SF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뉴에이브적인 ‘스타일’의 유무라고 할 수 있다. 사이버펑크의 표면적인 특징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하이테크 소도구 및 패션으로서의 반체제였으며, 이것은 컴퓨터로 대표되는 과학기술의 산물이 인간의 일상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1980년대적 상황에 대한 사이버펑크 특유의 문학적인 해답이었다.
 
폴 J. 맥컬리, 이언 맥클라우드 스티븐 박스터, 에릭 브라운, 그렉 이건 등의 가장 눈에 띄는 작가적 특징이라면, 스털링이 사이버펑크 작가들에게 요구했던 ‘첨단기술에 대한 교양’에서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첨단기술에 대한 전문지식’(hi-tech fluency)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뉴웨이브나 사이버펑크 작가들이 보여준 정치적인 결속력 대신 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수학과 생물학과 컴퓨터 사이언스의 학위이며, SF의 코드에 대한 전통적인 고민에 잠기기보다는, 그 핵을 이루는 문학 기술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독자 앞에 내보일 수 있는 ‘내부 기술인’으로서의 자세이다.

 
소설의 대체적인 윤곽은 파악할 수 있었지만, 제대로는 아니었는데, 해설을 보고 나서야 전체적으로 이해가 되었다. 물론 해설에 언급된 것처럼 『쿼런틴』을 읽기 위해 특별한 전문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며, 소설 본문에서 닉과 포콰이의 대화에 녹아들어간 형태로 설명되어 있는 양자론의 기본 명제들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긴 한데, 조금 귀찮다. 나의 경우에는 대략 스킵.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하드SF에 얼마나 관심을 가질지 의문이다. 나도 전직경찰인 주인공이 모드를 둘러싸고 고민하는 대목, 즉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 꽤 흥미로워서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이 서술하는 만큼의 전문적인 내용이 필요했을까. 아니 이에 대한 흥미로운 각주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면 좋았을 수도 있으니 번역자의 책임으로 돌려야 할까.
 
2034년 11월 15일 ― 어느날 지구의 밤하늘에서 별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지름이 명왕성 궤도의 두 배나 되는 정체불명의 검은 구체 버블이 태양계를 완전히 감싸버렸던 것이다. 세계 각지에서 혼란과 폭력을 불러온 이 초유의 사태도, 몇십 년이 지난 지금은 이미 일상생활의 일부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과학자들이 내놓을 수 있었던 설명은 단 하나였다 ― 상상을 초월한 과학기술 능력을 가진 외계 종족의 간섭에 의해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 전체가 ‘격리’(quarantine) 당한 것이다.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
 
2066년 ―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주의 주도 퍼스의 사립탐정인 닉 스타브리아노스는 익명의 의뢰인으로부터 24시간 엄중하게 감시받고 있는 병원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린 젊은 정신지체 여성 로라 앤드류스의 행방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21세기도 이미 반이 지난 지금, 대뇌 생리학을 위시한 생명공학과 나노공학의 눈부신 발전에 의해 인류는 자신의 능력이나 감정을 자유롭게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을 손에 넣고 있었다. 나노머신으로 인간의 뇌신경을 재배션하는 형태로 뇌의 일부를 수정(modify)함으로써, 제한적이나마 일종의 생체 컴퓨터로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이 실용화된 것이다. 모드(mod)라고 불리는 이것들은 현재의 개인용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능가하는 영향을 인간에게 끼치고 있다. 전직 경찰관이었던 닉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워크스테이션급의 가상 컴퓨터에서 정신 상태를 ‘최적화’하는 경찰용 프로그램을 망라하는 가지각색의 모드를 머리에 ‘깔아놓은’ 상태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남부의 신흥 독립국인 <뉴홍콩>에서 단서를 찾은 닉은 추적을 시작하는데….
 
모든 경찰관들은 예외없이 P1에서 P6에 이르는 표준적인 ‘강화 모드’(priming mod)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장 근무에 적합한 정신 상태를 만들어 내서, 진정한 의미에서 당사자를 ‘강화’하는 것은 P3다. P3가 하는 일이란 나의 뇌를 불구로 만드는 일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이것이 효율적이고, 가역적이며, 또 사용자를 이롭게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모드에 관해 신경질적이 되거나 에둘러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강화 모드는 경찰관의 질을 높이고, 인명을 구한다 ― 그리고 강화모드는 일시적으로 우리를 인간 이하의 존재로 만든다.
나의 인생을 가르고 있던 칸막이는 단순했고, 명쾌했으며, 절대적이었다. 근무 중에는 강화 상태였고, 비번일 때는 그렇지 않았다. 여기서 모호한 부분은 전혀 없고, 한쪽이 다른 한쪽을 침식할 염려도 없다.
(79쪽)
 
닉은 테러를 당해 집에 폭탄이 터져서 아내 카렌을 잃는다. 닉도 폭발의 와중에 집밖으로 튕겨나갔으며, 강화 모드들이 자동적으로 가동되었다. 이런 상황은 강화 모드로 상징되는 과학기술이 과연 인간적인 것인가를 질문하게 한다.
 
P3를 불러냈다. 이 모드가 의식 아래로 슬그머니 끼워 넣는 고양감이 평소보다 더 노골적이다. 정신 강화야말로 합당한 존재 방식이다. 머리 회전이 빨라지고,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마음이 흐트러지는 일도 없다. 이것들 모두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P3가 장려하는 분석적 마음가짐은 이런 태도가 독단적으로 강요된 것이라는 사실을 숨기는 일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인격을 변화시키는 모드들은 거의 예외없이 이 모드를 쓰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생각을 사용자들에게 인식시킨다. 비강화상태의 나는 이 테크놀로지를 이기적인 프로파간다라고 부르는 시니컬한 견해 쪽의 손을 들어준다. 강화 상태일 경우에는 이런 주장들을 평가해서 결론을 낼 만한 정보도, 전문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판단한다. (91쪽)
  
“‘당신’과 ‘당신 육체’ 사이의 선 말이에요… 당신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충동과, 육체에 의해 강요된 것이라고 간주하는 충동들 사이의 경계선. 공복감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그건 성욕에도 해당되는 얘기가 아닌가요? 양심의 가책은? 동정심은? 아니면 논리 그 자체는? 만약 당신이 우선순위를 스스로 알아서 결정한다면, 그 순위를 결정하고, 향유할 사람이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 나는 대답했다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은 당신을 변화시킵니다. 먹는 행위는 당신을 변화시키고, 안 먹는 행위도 당신을 변화시킵니다. 목에 진통제를 분사한다는 행위도 당신을 변화시킵니다. 모드를 써서 공복감을 없애는 행위와, 약물을 써서 통증을 없애는 행위의 차이는 뭡니까? 모두 똑같은 일입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식으로 모든 일들을 똑같이 하찮은 일로 치부할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모든 것이 그보다 좀더 덜 극단적인 것과 ‘똑같은 일’이 되어 버릴 테니까. 그러나 신경 모드는 진통제와 ‘똑같은 것’이 아녜요. 모드 중에는 인간의 가치관을 바꾸는 것조차―”
“그렇다면 사람의 가치관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얘깁니까?”
“서서히 변화하죠. 좋은 이유에 의해.”
“혹은 나쁜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아예 이유가 없든가. (…)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생에서 경험하는 일들에 의해 농락당하며 그냥 살아가고 있을 뿐이고, 그들의 인격은 자기들이 제어할 수 없는 영향에 의해 형성됩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뭐가 나쁘단 말입니까 ― 본인이 그것을 원하고, 또 그것에 의해 행복해질 수 있다면?”
“하지만 누가 행복해진다는 거죠? 모드를 쓴 사람은 아녜요. 그 인물은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을 테니까.”
“그건 상당히 고풍스러운 생각이군요. 변화는 자살과 마찬가지라는 식의.”
“흐음, 그럴지도 몰라요.” 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위선자의 말처럼 들렸는지도 모르겠군요. 약간의 나노 외과수술만으로도 완전히 다른 사람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내가 가진 유일한 모드의 경우에는 아마 나를 완전히 새로운 종의 일원으로―”
(140-142쪽)
  
‘진정한 <앙상블>’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뇌손상을 입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캐넌>(전범, 규범)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들 모두가 충성 모드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 모두 자신들의 충성의 대상인 ‘진정한 <앙상블>’은 현재 그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조직이 아니라는 점을 확신하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진정한 <앙상블>’이란 무엇인가? <캐넌>의 멤버들의 대답은 각자 달랐다. 그들이 의견의 일치를 본 것은 단 한 가지, <앙상블>을 자처하는 연구기관의 연합은 가짜이며, 사기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이 기괴한 사고방식을 옆에서 계속 떠받쳐 주던 뤼가 사라지고 다시 혼자가 된 지금, 그것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신적인 곡예를 내가 실제로 터득했는지 안 했는지 자신이 없어졌다. 현재의 <앙상블>은 진정한 <앙상블>이 아니다 ― 도대체 이런 터무니없는, 시시콜콜한 궤변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떻게든 그것을 믿을 수 있다면, 그것은 진실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상식이나 일상적인 논리가 끼어들 틈은 없다. 내게는 <앙상블>에게 충성을 다할 합리적인 이유 따위는 없는 것이다 ― 내게는 오로지 충성 모드라는 해부학적인 사실이 존재할 뿐이다. 이 모드가 가리키는 진정한 <앙상블>이란 나의 몸이 그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존재를 의미하고― 이것은 터무니없는 난센스이다….
현재의 <앙상블>은 진정한 <앙상블>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앙상블>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진정으로 <앙상블>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건 미친 짓이야. 만약 <캐넌>의 모든 멤버들이 자신들의 충성의 대상을 기존의 권위와는 상관이 없는, 일종의 개인적인 양심의 문제로서 자유롭게 해석해도 된다면… 그것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 때 머릿속에 해답이 번득였다. 이제는 어떻게 그것을 이해해야 하는지, 어떻게 나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나는 발을 내딛던 중에 동작을 멈추고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종교개혁에 참가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188-290쪽)
 
“그 모드는 나를 행복하게 해줬습니다. 흥분이나  고양감, 혹은 도취감을 주지는 않습니다. 단지… 카렌이 살아 있을 때 그랬던 것과 똑같이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뜻입니다.”
“설마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겠죠.”
“물론 진심입니다. 사실이니까요. 그건 견해의 차이 운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모드가 실제로 하는 일을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건 신경 해부학상의 문제입니다.”
“그럼 아내가 죽었을 때, 당신은 상쾌한 기분으로 있었다는 얘긴가요?”
“냉혹하게 들린다는 걸 잘 압니다. 물론 지금도 아내가 살아남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했고, 그런 사실에 대해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내의 죽음에… 신경을 쓰지 않기로 한 겁니다.”
포콰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당신은 혹시 한 번도…?”
“혹시 뭐란 말입니까? 내가 한 일이 소름끼치는 농담이라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느냐는 뜻입니까? 이런 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지 궁금하다는 겁니까? 내가 자연스러운 슬픔의 절차를 통과해서, 본래의 자연스러운 정서적 욕구를 고스란히 지닌 채로 슬픔을 극복했어야 했다는 겁니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 모드는 완전무결한 하나의 패키지이고, 이 문제의 모든 국면에 관련된 신념들 일체를 자체적으로 갖추고 있습니다 ― 그 모드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신념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좀비 보이스카우트를 과소평가하면 안 됩니다. 조금이라도 모순이 있다면 모든 것이 무너져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미비한 부분을 단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던 겁니다. 나는 나의 선택을 결코 농담으로 간주할 수 없고, 후회할 수도 없습니다. 그 선택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겁니다.”
“하지만… 만약 모드가 없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할지, 또 어떤 감정을 느낄지 궁금해했던 적은 한 번도 없나요?”
“왜 그래야 합니까? 왜 그런 데 신경을 써야 합니까? 당신은 지금과 완전히 다른 뇌를 가지면 어떤 기분일까, 하고 궁금해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까? 지금의 내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인위적인 상태의―”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사람은 모두 인위적인 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뇌는 자체적으로 배선을 바꿉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자기의 이상에 맞춰 형성하려고 합니다. 신경 모드가 그런 일을 실로 효율적으로 수행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정말로 가져다준다는 이유만으로―그걸 괴물 보듯이 할 수 있는 겁니까? 자연도태나, 우연한 사건이나, 자력으로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바꿔 보려고 하는 사람들의 헛된 시도가 불러오는 뇌의 재배선이, 완벽한 인생의 시금석이라도 된다고 당신은 정말로 믿고 있는 겁니까? 좋습니다. 과거 몇천 년 동안 인류는 자기들이 통제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이 왜 다른 것들에 비해 최상의 선택인지를 증명하기 위해, 어리석기 그지없는 종교와 의사 과학적 이유들을 발명해 왔습니다. 신의 행위는 언제나 완벽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신이 아니라면 진화가 그것을 대신했습니다. 어느 쪽을 믿든 간에, 그걸 건드린다는 건 신성 모독이었죠. 그리고 인류의 문화 전체가 이런 헛소리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앞으로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진실을 직시하십시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손에 넣을 수 없는 것들을 포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구태의연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내가 지금 내 상태에 행복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극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흐음, 적어도 나는 왜 내가 행복한지를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나는 몇 조에 달하는 무작위적인 사건들의 최종 결과에 지나지 않는 인간의 뇌가,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진화의 정점인 것은 명백하다는 주장으로 나 자신을 기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273-275쪽)

 

그렉 이건 외 지음|김상훈ㆍ이수현 옮김, 행복한 책읽기
The Hard SF Renaissance Edited by David G. Hartwell & Kathryn Cramer
 
○ 유전자 전쟁 Gene Wars |폴 맥콜리|
 
「유전자 전쟁」은 통제를 벗어난 생명공학, 과학기술의 정치학, 포스트 인류의 등장을 소재로 삼고 있으며, 계속적이고 동시 진행되는 변화를 다루고 있다. 이는 세계화와 유전자 변형 농작물에 반대하는 정치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폴 맥콜리 소개에서)
 
주인공 에반은 어릴 때부터 유전자를 끼고 살아온 인물이다. 여기에 나오는 돌고래인간이나 ‘자유롭게 신체 형태를 재조정하는 수많은 극미 기계들에 감염되어 점점 더 기괴해지는 사람들’의 모습은 생각해보면 능히 상상할 수 있는 미래이다.
 
에반이 아내에게 하는 말. “인간이란 어떤 것인지를 기억하고 있었을 무렵의 당신이 생각나는군.” “오래된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거든.” (22쪽)
 
○ 내가 행복한 이유 Reasons To Be Cheerful |그렉 이건|
 
합당한 이유가 있어 보이는 행복감이 공허하고 병적인 행복으로 바뀌는 기준이란 무엇일까? (68쪽)
 
뇌종양에 걸렸다가 치료를 받고 완치되었으나 어떠한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 - “아무 것도 도움이 안 되고,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아.” - 가 된 주인공은 다시 수술을 받고 스스로 온갖 충동과 감정을 조절할 수 있게 된다. 행복과 즐거움을 느끼는 능력을 복구한 것이다. 그러나 무차별적인 행복밖에는 느낄 수 없었던 탓에 자기가 원하는 쾌락의 대상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 또한 부여받는다. 다시 말하면 세계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 것이다. 행복이나 쾌락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를 프로그램해서 네트워크의 개량을 당신에게 맡길 수는 있어요. 당신을 즐겁게 하는 것들을, 의식적이고 신중하게 직접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당신에게 줄 수 있다는 뜻이에요.” (64쪽)
 
하지만 해설에 나오는 것처럼 세계가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제어할 수 없다면 한계는 분명하다. 그러한 충동이나 감정이 나 자신이 느끼는 것이 아닌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의학적 치료 후 알게 된 줄리아와의 관계가 애매하게 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그렉 이건은 이런 식의 글을 자주 쓰는 것 같다. 쿼런틴에서도 주인공은 여러 모드 속에 있을 때 본래의 자신이 아니라고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본래의 자신을 추구하지도 않고... 과연 행복하다고 느끼는 나는 누구일까.
 
“내 안에 묻혀 있는 행복 기계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되풀이해서 인식하고 있다. 지금 나는 두라니가 즐거움을 느끼는 인간의 모든 능력을 하나도 빠짐없이 내 두개골 속에 챙겨 넣었음을 명명백백하게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그 능력의 일부라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사실을 사실로―그 어떤 종양이 강요하는 것 이상으로 깊게―받아들여야 한다. 행복 그 자체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행복이 없는 인생은 견딜 수 없지만, 행복 그 자체는 목표가 되지 못한다. 나는 행복의 이유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또 그런 선택에 만족해 할 수도 있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자력으로 만들어 낸 나의 새로운 자아가 어떤 감정을 느끼든 간에, 나의 모든 선택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상존한다.” (69쪽)
 
○ 붉어지기만 하는 빛 An Ever-Reddening Glow |데이비드 브린|
 
“그토록 우주선이 많았다니. 자기들 생각만 하고 눈앞에 보이는 이익만을 추구하며 무작정 앞으로 내달리기만 하는 이런 우주선들 탓에 전 우주는 매일, 매년, 매이온―10억년― 단위로 변화하고 있다. 모든 천체들이 지금보다는 가까웠던 옛날 옛적에는 다른 종류의 이동수단으로도 그럭저럭 만족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시절에 살던 존재들은 절제할 수도 있었다. 그들이 절제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BHG 구동기관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가능한 한 빨리 많은 것들을 보고 많은 일들을 하고 싶어 하는 젊은이가 극기심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똑같은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전 우주의 팽창이라는 상상을 초월한 규모의 사건에 우리가 티끌만큼 기여한들 그게 뭐 대수겠는가? 우리가 여기서 멈춘다고 해도 사태가 더 나아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요즘 우리는 후방 미러를 보는 일이 거의 없으며…잠깐 멈춰 서서 마냥 붉어지기만 하는 빛을 바라보지도 않는다.”
(98-99쪽)
 
이 글을 공유지의 비극, 외부효과 등의 경제학적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는 항성 간 비행과 우주 팽창 사이의 관계가 논의된다. 우주가 팽창하게 된 원인을 BGH 구동기관 등을 써서 빨리 우주비행을 하려는 우주선의 영향이 쌓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개인의 욕심 때문에 사회 전체가 피해를 본다는 것. 그래서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윤리적 우주선들도 있지만, 이들의 간청과 논쟁과 협박은 설득력이 없었다. 해설에서는 환경 문제에 민감한 외계인들이 인류더러 더 책임 있게 행동하라고 요청하는 황당한 논리라고 얘기한다. 대략 비슷하기도 하지만, 다른 주제에 대해서는 그런 충고가 현실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자칫 인류는 공멸할 수도 있으니까...
 
○ 공룡처럼 생각하라 Think Like A Dinosaur |제임스 패트릭 켈리|
 
우리는 공룡을 굉장히 둔하고 멍청한 동물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단편에서 공룡은 인간 이상의 지능을 가진 외계의 생명체로 나온다. “초광속 물리학에 통달하고 지구를 경이로운 은하계 문명에 소개해 준 현명하고 고귀한 파충류라는 식”으로 미화되는 경향이 있다고 묘사된다.
 
주인공 마이클은 지성체 연구를 하는 학자이지만, 부업으로 지역 안내인도 한다. 공룡들이 사는 별로 사람들을 이주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다. 스캐너와 조립기를 통해 이전시키는 과정에서 방정식의 평형을 바로잡는 일을 한다. 그 과정에서 정신적인 외상이 발생하는데, 공룡들은 인간들의 ‘눈물 짜는 이주 공포’를 잘 참지 못하며, 하넨(공룡) 기술에 충분히 익숙해지면, 인간들도 공룡처럼 생각하는 법을 익힐 거라 믿는다. 기분 좋게 잉여 육체를 처분하는 것이다.
 
공룡과 다른 지적 생명체들이 이주할 때는 잉여 육체가 직접 자기 몸을 죽인다. 정말이지 조화로운 이들이다. 그들은 인간에게도 그런 과정을 시도해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것이다. (124쪽)
 
이 단편은 카말라 샤스트리를 공룡의 별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조화가 깨지면서 생겨난 잉여인간의 처리를 둘러싸고 마이클이 하는 고민을 드러낸다. 카말라는 공룡의 별인 겐드에 도착하여 재조립되었으나, 잉여인간은 남아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공포로 인해 더 이상 이주하지 않으려는 잉여물에 대해 그 처리를 못하겠다고 마이클이 주저하자 공룡들은 자신들끼리 언쟁을 벌이면서 마이클에게 간접적으로 상황을 알려준다. 물론 공룡은 조화라는 이름으로 살육을 즐긴다. 공룡들은 ‘인간에겐 조화에 대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많은 세계로 풀어 주는 건 잘못’이며, ‘인류 이주를 연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나에게 지금 내가 우주에서 인류가 누릴 미래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알려 주고 있다. 내가 그만두든 말든 대기실 D에 있는 카말라는 죽은 목숨이라는 것. 평형은 바로잡혀야 하며, 바로 지금 해야 한다는 것. (132쪽)
 
대기실 D에 있는 카말라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만, 그녀는 아무 권리도 없는 잉여물이었다. 그래서 마이클은 왕복선 밖으로 잉여물을 내몰아서 그녀를 제거했다. 망설이다가 결국 살인을 저지르고서도 이를 정당화하는 논리, ‘공룡처럼 생각하라!’. 하긴 그 대상이 단지 잔여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나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그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었을 듯. 이 글은 인간다운 게 무엇인지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쿵쿵 소리가 느려졌다. 멈췄다. 그리고 나는 영웅이 되었다. 내가 조화를 지키고, 별들로 가는 길을 열어놓았다. 나는 자랑스러운 마음에 킬킬거렸다. 나는 공룡처럼 생각할 수 있었다. (135쪽)
  
해설 중에서: 「공룡처럼 생각하라」는 1996년 휴고 상 중편 부문을 수상했다. 이 글은 고전적인 하드 SF 형식을 취하며, 하드 SF 독서의 시금석이라 할 수 있는 톰 고드윈의 논쟁적인 글 ‘차가운 방정식’(The Cold Equations)과 문답을 이루고 있다. 이 글은 문학적인 정치 행동이며, 의문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고전 작품의 서브텍스트로 존재하는 성 정치 아래를 파고드는 진짜 하드 SF다. 그러나 이글은 오른쪽이나 왼쪽이 아니라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 그리핀의 알 Griffin's Egg |마이클 스완윅|
 
“다행히도 위기관리 프로그램에는 딱 이런 상황에 맞는 사고 계획이 있어요. 불완전할 수도 있겠지만, 현재 확인 가능한 기록에 따르면 여기 남은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군사 지휘 경험이 많습니다.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분 있습니까?” 예카트리나는 기다렸지만, 아무도 말이 없었다. “위기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준군사적인 조직으로 전환합니다. 어디까지나 관리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장교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은 없을 것이고, 현재 문제가 해결되는 즉시 군사 조직은 해체합니다. 그 점이 최우선입니다.” (209쪽)
 
그녀는 군터에게 성적인 의미는 없이 세게 입을 맞추고, CMP를 불렀다. “초기 계획을 다 다시 돌려. 감염자들을 다시 일터로 보낼 거야. 모든 작업 일정을 조정해.”
“지시대로 수행합니다.”
“이 상황이 장기적인 전망에 어떤 변화를 주지?”
프로그램은 몇 초 동안 말 없이 데이터를 처리하다가 말했다.
“필요하지만 무척 위험한 회복 단계에 들어서게 됩니다. 전망은 낮고 안정성은 낮은 상황으로 진입합니다. 여가가 생기면 비감염자들은 이 정부에 빠른 속도로 불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내가 그냥 그만두면?”
“전망이 극도로 나빠집니다.”
예카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좋아, 가장 긴급하게 다가올 새로운 문제점은 무엇일까?”
“비감염자들은 지구의 전쟁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요구할 것입니다. 미디어를 즉각 복구하고자 할 것입니다.”
(…)
그녀는 CMP에게 물었다. “내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지?”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는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계속 다른 일을 생각하게 하십시오. 사보타주 범인들을 추적해서 전범 재판을 여십시오.”
“그건 제외야. 마녀 사냥이나 희생양, 재판 같은 건 없어. 우린 모두 함께 갈 거야.”
CMP는 감정 없이 말했다. “폭력은 정부의 왼손입니다. 진지한 고려 없이 그 잠재력을 버리는 것은 성급합니다.”
“그 문제는 논의하지 않겠어.”
  (220-222쪽)
 
“바일, 너는 동료 시민들에 대한 범죄를 고발당하여 서 있다. 자기 변호를 위해 할 말이 있나?”
“들어봐, 당신들에겐 이럴 권리가 없어. 나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 정부조직이 있잖아.”
“모두가 이즈마일로바의 정부에 만족하는 건 아니다.”
판사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CMP를 통제하고 있고, 우린 CMP가 감염자들을 통제해주지 않으면 부트스트랩을 운영할 수 없어.” 두 번째 사람이 덧붙였다.
“그러니 그녀를 피해서 일하는 수밖에.”
“정확히 무슨 죄목으로 고발된 거지?” 군터는 절박한 심정으로 물었다. “좋아, 어쩌면 내가 뭔가 잘못했을지도 모르지. 가능성은 받아들이겠어. 하지만 당신들이 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르잖아. 그런 생각은 해 봤어?”
정적.
“말이지, 도대체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거야? 포스너? 그거라면 미안하지 않은데, 사과하지 않을 거야.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막 대할 순 없어. 그들은 여전히 사람이야. 권리가 있다고.”
정적.
“하지만 내가 무슨 첩자라거나 그렇게 생각하는 거라면, 내가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예카… 이즈마일로바에게 일러바친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그건 사실이 아냐. (…) 난 첩자도 뭣도 아니라고. 이즈마일로바에게 첩자 같은 건 없어. 첩자가 필요하지도 않고! 그녀는 그저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뿐이야.
맙소사, 그녀가 당신들을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지! 그녀가 얼마나 엉망이 됐는지 못봤을 거야! 이즈마일로바에게도 그만두는 게 좋아. 그런데도 버티는 건―“
무선으로 음산하고 어두운 전자음이 일어났고, 그는 상대방이 그를 비웃고 있음을 깨닫고 말을 멈췄다.
“달리 말하고 싶은 사람 있나?”
군터를 끌고 온 작업복 중 하나가 나섰다. “재판장님, 이자는 감염자가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우리의 지원과 지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지속적인 안녕은 우리의 끝없는 노동을 대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자는 자기 입으로 유죄 판결을 내리고 있습니다. 법정이 이 범죄에 대한 징벌을 내릴 것을 청원합니다.”
(…)
“바일, 제정신이라는 건 권리가 아니라 특권이다. 너는 유죄다. 그러나 우린 잔인한 사람들이 아니야. 이번 한 번은 경고만으로 풀어주겠다. 그러나 지금은 절박한 시기야. 다음에 또 불쾌한 짓을 하거나, 이번 만남처럼 사소한 일을 꼬마 장군에게 보고할 경우에는―공식적인 심리를 생략할지도 모른다.”
(238-240쪽)
 
크리슈나가 설명하는 동안 이즈마일로바는 팔짱을 끼고 어깨를 비딱하게 기울인 채 듣고 있었다. 설명이 끝나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고결한 바보짓이지만, 그래도 바보짓에 불과해. 당신은 우리의 정신을 인간 진화 경로에 낯선 무엇인가로 고치고 싶어하는 거야. 생각의 자리를 제트기 파일럿의 소파로 바꾸려는 거지. 그게 해답이라고 생각해? 관둬. 일단 이 상자가 열리고 나면 그 내용물을 주워 담기란 불가능해. 그리고 당신은 그 상자를 열 만큼 설득력 있는 논증을 펴지 못했어.”
군터가 항의했다. “하지만 부트스트랩 사람들은! 그들은―”
이즈마일로바가 말을 끊었다. “군터,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 하지만 위험한 데다 윤리적으로 의심스러운 갱생에 대한 대가로 나머지 사람들이 인간성을 포기해야 한다면… 글쎄, 대가가 너무 높잖아. 미쳤든 아니든 지금은 그래도 인간인데.”
“내가 인간이 아닌가? 날 간질이면 웃지 않을 것 같아요?” 크리슈나가 말했다.
“당신은 판단할 위치가 못 돼. 당신은 자기 신경 배선을 바꾼 데다가 고결함에 고취되어 있어. 스스로에게 무슨 시험을 해 봤지? 인간 표준으로부터 일탈한 부분을 얼마나 면밀히 기록했지? 당신 수치는 어디 있어?” 그녀는 몇 주나 걸릴 분석을 들먹이고 있었다. 순전히 수사학적인 질문이었다. “당신이 완전한 인간으로 판명나더라도―그리고 난 그럴 것 같지 않지만!―장기적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누가 알지? 우리가 조금씩 조금씩 광기를 향해 걸어가는 걸 무엇이 막아주지? 광기가 무엇인지는 누가 결정해? 누가 프로그래머를 프로그램하고? 아니, 불가능해. 난 우리 마음을 가지고 도박을 하진 않겠어.” 그녀는 방어적으로, 화가 난 듯이 되풀이했다.
“예카트리나. 얼마나 오랫동안 깨어 있었던 거야?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약물이 당신 대신 생각하고 있는 거야.” 군터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는 됐다는 듯, 대꾸도 없이 한 손을 흔들었다.
해밀턴이 말했다. “실질적인 문제로 들어가서, 이게 없으면 부트스트랩을 어떻게 돌리려고? 지금 조직은 우리 모두를 꼬마 파시스트로 바꿔 놓고 있어. 광기가 걱정스럽다면, 지금부터 1년이 지났을 때 우리가 어떤 꼴일 것 같아?”
“CMP는 확―”
“CMP는 프로그램에 불과해! 아무리 쌍방향이라고 해도 유연한 사고방식은 아니야. 프로그램에겐 희망이 없어. 새로운 것을 판단할 수 없어. 오래된 결정, 오래된 가치들, 오래된 습관, 오래된 두려움밖에 강요하지 못한다고.” 해밀턴이 외쳤다.
갑자기 예카트리나가 날카롭게 외쳤다. “내 앞에서 사라져!”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그만, 그만해, 그만하란 말이야! 더는 듣지 않겠어!”
“예카트리나―” 군터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는 통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그녀는 무릎을 굽히고 천천히 가마를 향해 손을 내리기 시작했다. 군터는 그녀가 듣기를 멈춘 것을 알 수 있었다. 약물과 책임감이 그녀를 이 꼴로 만들었다. 모순되는 요구로 그녀를 몰아세우고 당황스럽게 만들다가 떨리는 몸으로 붕괴의 절벽 앞에 서게 만들었다. 하룻밤만 푹 자도 회복될 수 있을지 몰랐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이제는 말로 그녀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엔진을 파괴하기 전에 달려들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다. 그 순간 군터는 그녀에 대해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감정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예카트리나. 사랑해.”
그녀는 그쪽으로 고개를 반쯤 돌리면서 산란해진, 어쩌면 조금은 짜증스러운 투로 말했다. “도대체 지금―”
그는 작업 멜빵에 꽂힌 볼트건을 들어올리고, 조준하고, 쏘았다. 예카트리나의 헬멧이 산산히 부서졌다. 그녀는 쓰러졌다.
(251-253쪽)
 
「그리핀의 알」은 달 식민지에서 벌어진 사건을 그린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분량이 많다. SF 자체보다 위에서 옮겨놓은 대화가 말하는 정부조직, 권력, 이성에 대한 얘기들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었다고 하면 잘못 파악한 것일까.
 
거의 절반 정도를 읽을 때까지 무슨 내용인지 감을 잡지 못했다. 하지만 한차례 읽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대략 이해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약간의 역량이 있고 예카트리나 이즈마일로바의 위치에 서게 된다면 그와 비슷하게 행동할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바일 군터나 크리스나가 아니라...
 
○ 다른 종류의 어둠 Different Kinds of Darkness | 데이비드 랭포드|
 
휴고 상 단편부문 수상작이라는 「다른 종류의 어둠」은 아이들과 수학,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무기, 그 쓰임과 악용에 대한 하드 SF이다. 미래 사회를 그럴 듯하게 그렸다. 이런 식이라면 미래는 정말 끔찍할 것 같다.
 
‘죽지 않을 만큼의 고통은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그러다가 죽으면 어떻게 되나?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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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9 17:49 2009/07/19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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