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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자, 애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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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한국의 진보세력에게 애국이 금기의 언어였던가. '소수' 좌파세력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운동권들은 애국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였다. 1989년 백산서당에서 나온 조해문의 『애국시대』라는 소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물론 조국해방문학의 약어인 듯한 저자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소설은 북에서 나온 것을 펴낸 것이다) 그리고 스스럼 없이, 아니 자랑스럽게 자신을 '애국자'라고 밝히는 이들이 많았다.
 
보수꼴통들도 애국자임을 자임한다는 점에서 '애국'이라는 말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이들이 꽤 있었지만, 단발마에 불과했다. 이런 애국주의 프레임 안에서 독도문제, 중국의 동북공정 논란이 자리잡고 있다.  
 
송영선 의원이 “전시 작전통제권 문제는 목숨을 걸고 사수해야 한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 미국을 붙들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김용갑 의원은 “송의원은 애국자다, 애국자”라고 거들었다. 박진 의원도 “한·미 간에 손뼉이 맞는 와중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말은 잘못된 패배주의”라며 “미국 대통령과 국방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판단을 잘못하고 있는 미국에 할 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6. 8. 29 '한나라당 주요당직자회의'에서)
 
장은주 교수가 '진보적 애국주의'에 대해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뉴라이트가 '진보'라는 말을 사용하고자 하는 논리와 그리 다르지 않다.

 
덧붙이는 생각.
애국주의라는 용어에 대해 다루고 있어서 하는 말인데, 이러한 사회과학적 용어의 프레임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즉 사회과학적인 용어들이 우리나라에서 서구와는 달리 사용되는 경우가 상당히 있고, 한국적 현실에 맞게 짜여진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애국주의나 자유주의의 경우는 조금 모호하지만, 민족주의가 그러하고, 요새 한참 뜨고 있는 공화주의가 그러하다. 민족주의라고 하면 서구에서는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지만, 한국적 현실에서는 진보적인 가치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 공화주의도 아직 대중화가 되지 않아서 그렇지 만약 그 유용성이 확인된다면 공화당을 창당했던 박정희의 딸이 가만놔두진 않을 것이다. 미국에서도 공화당은 보수의 상징이다. 다시 말하면 최근 진보진영 일각에서 논의되는 공화주의가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해도 공화당 프레임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용어에 대해서 검토하면서 좀더 문헌연구를 할 필요가 있겠다. 경로의존성과 프레임 이론에 대해서도 정리해야 하고...

 
공화국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다를 것이다. 장은주 교수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합창하던 이들이 '공화국'에 대해 나름의 신심을 가질 것이라고 판단하지만, 홍세화 선생과 같이 프랑스식 공화국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테고, '태백산맥'이라는 빨치산 노래에 나오듯이 공화국이라고 하면 '북조선'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많은 이들이 공화당을 떠올리지 않을까. 
 
예전에 네이버 블로그에 올렸던 '애국자'라는 글이 생각난다. 거기에 권정생 선생의 '애국자가 없는 세상'이라는 시를 옮기고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권정생 - 애국자가 없는 세상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테고
대포도 안 만들테고
탱크도 안 만들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애국자가 싫다
 
내가 애국자라는 단어를 싫어하게 된 것은 상당히 된 듯하다.
이제는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것들에 진저리가 난다.
아니 자신이 애국자라는 사람, 애국자가 되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나에게 덜 떨어진 인간으로 보인다.
이러한 나의 의견이 치기로 보일지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 연장에 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한겨레신문에 얼마 전 나온 '애국주의' 이론 논쟁 확산 기사가 불편하다. 물론 애국주의에 대해 차분하게 성찰할 기회가 된다면 모르겠지만, 진보적 애국주의라고 해도 거기서 거기 아닐까. 
예전에 관련하여 블로그에 옮겨놓았던 글들도 가져온다.
    
 

‘촛불 시민’에게서 진보적 애국주의 가능성 발견 (한겨레, 이세영 기자, 2009-07-22 오후 08:14:17)
‘애국주의’ 이론 논쟁 확산
 
지난해 역사교과서 파문을 계기로 촉발된 ‘대한민국사 논쟁’의 후폭풍이 예사롭지 않다. 12월 주대환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원장과 장석준 진보신당 정책실장의 논쟁을 통해 진보진영 내부로 옮겨붙은 논쟁은 최근 학계 전문가들이 가세하면서 이른바 ‘애국주의’를 둘러싼 이론 논쟁으로 확산되는 형세다. 장은주 영산대 교수(법학과·사진)가 이달 초 발간된 반년간 <시민과 세계>(참여사회연구소 펴냄)에 ‘대한민국을 사랑한다는 것-진보적 애국주의의 가능성과 필요’라는 글을 발표한 데 이어 박명림 연세대 교수, 신진욱 중앙대 교수 등도 유사한 주제의 기고와 발표문을 준비하고 있다. 다음달 12일 <경향신문>과 웅진지식하우스가 함께 여는 ‘공화주의’ 토론회의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도 ‘애국주의’다.
   
기실 한국의 진보세력에게 ‘애국’은 오랫동안 금기의 언어였다. ‘유신’과 ‘5공’으로 상징되는 극단적 국가주의가 그들의 뇌리에 ‘억압하는 아버지’라는 국가 이미지를 확고하게 각인시킨 탓이었다. 그들은 권위에 순응해 안위를 찾기보다 ‘분단된 민족’과 ‘억눌린 민중’의 이름으로 불의한 아버지에 저항했다. 그들에게 민족과 민중은 아버지의 폭정에 신음하는 어머니, 형제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절차적 민주주의가 일정하게 확보된 뒤에도 그들의 무의식은 ‘과거의 아버지’를 상기시키는 어떤 말이나 상징도 용납하지 않으려 했고, ‘자애로운 아버지’에 대한 대중의 갈망 역시 비판과 극복의 대상으로 여겼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을 사랑하라’는 것은 가슴으로도 머리로도 수용하기 힘든 부당한 강요이자 또다른 억압이었다.
 
장은주 교수는 진보세력의 이런 완강한 ‘반(反)애국주의’가 놓치고 있는 지점들에 주목한다. 그것은 대중들의 정치적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국가적 긍지’와 관련된 문제다. 예컨대 서울광장에 모여 앉아 “대~한민국”을 외치는 시민들의 행위를 비합리적인 국가주의적 열정의 분출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개인이 자존감 없이는 정상적 삶을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국가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인민의 ‘국가적 자부심’이 필수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의 법철학자 마사 너스봄의 말을 빌려 말한다. “애국주의는 대체로 나쁜 것이다. 그러나 애국주의가 위험할 수 있다고 해서, 또는 우파들이 즐겨 이용하는 정치적 수단이라고 해서 진보정치가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진보정치는 오히려 올바른 애국주의로 무장하고 우파가 독점하고 있는 정치적 공간을 확보할 수 있어야만 한다.”
 
장 교수는 ‘진보적 애국주의’의 가능성을 지난해 여름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합창하던, 광장의 그 시민들에게서 발견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선언을 통해 국가의 독단적 권력행사에 저항하는 그들의 행동이야말로, 애국의 근거를 ‘공화국’이 보장하는 ‘모든 사람의 평등한 자유와 참여’에서 찾는 ‘공화주의적 애국주의’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우리가 대한민국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공화국’이란 정치체제를 통해 모든 사람의 평등한 자유를 보장하고 실현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한민국이 과연 인민의 사랑을 요구할 만한 ‘공화국’의 이념에 충실해왔냐는 것이다. 장 교수는 “아니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애국을 거부해야 할 이유는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가 무엇보다 주목하는 것은 공화주의의 이념을 성문화한 제헌헌법이다. “우리나라가 스스로 민주공화국이라고 선언하는 헌법을 가지는 순간, 그 헌법은 지배의 합리화와 민주적 법치주의의 완성을 향한 내재적-규범적 동학을 발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독재에 저항했던 민주화 투쟁 역시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이념의 실현되지 않은 가치를 환기시키고 새롭게 해석하면서, 그것을 실현하려고 했던 운동”에 다름 아니다. 이를 통해 장 교수가 진보세력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이렇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이라는 현실적인 토대에 대한 솔직한 수용 위에서 갖게 되는 ‘미래에 대한 책임의식’ 같은 것으로 표현돼야 한다. 대한민국의 현재 모습을 부정하고 조롱하면서 그 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실천을 ‘체제 내적’이라고 평가절하하는 것은 현실을 조금이라도 의미있게 바꿔 나가는 데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
 
이런 장 교수의 주장에 대해선 반론 역시 만만찮다. 장석준 진보신당 정책실장은 장 교수의 주장을 “기원론적 사고”로 몰아붙인다. 장 교수는 “지금의 시점에서 과거를 재구성하면서 현재의 소망을 과거에 투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 실장은 말한다. “대한민국의 과거에는 도저히 납득하고 수용할 수 없는 부정적 현실들이 존재하며, 그 현실은 아직까지도 살아남아 미래의 발전을 가로막는 질곡이 되고 있다. 그것을 무시한 채 대한민국을 자기준거적, 규범적 현실로 인정하라는 것은 또다른 폭력이다.” 앞으로 전개될 논전의 치열함을 예감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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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주의 논쟁, 뉴라이트가 제기…촛불시위 계기로 고민 본격화 (한겨레, 이세영 기자, 2009-07-22 오후 08:11:53)
애국주의 논쟁의 지형
정치권 유시민·노회찬 등 ‘관심’
진보진영 일각선 위험성 경계도
   
‘애국’의 문제를 먼저 제기한 것은 뉴라이트 진영이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뉴라이트 학자들은 2000년대 중반부터 ‘국가적 자긍심’을 고취한다는 명분으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기적의 역사’ ‘승리의 역사’로 추어올리는 한편,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각각 ‘건국의 아버지’ ‘근대화 혁명가’로 미화함으로써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불기 시작한 젊은 세대의 ‘대한민국 열기’를 보수주의 프레임 안으로 흡수하려는 시도에 나섰다.
 
진보진영에서는 2008년 촛불시위를 계기로 ‘애국주의’에 대한 고민이 본격화했다. 2002년 미선·효순양 사건, 2004년 탄핵반대 집회 직후에도 이른바 ‘대한민국주의’의 실체에 대한 논의들이 있었지만, 깊이 있는 학문적 담론의 차원으로 승화되진 못했다. 논의가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올라선 것은 2000년대 중반 ‘공화주의’와 ‘애국주의’에 대한 서구 학계의 심화된 논의들이 소개되면서부터다.
 
박명림(연세대)·김상봉(전남대)·장은주(영산대)·안병진(경희사이버대)·신진욱(중앙대) 교수 등은 ‘시민적 공화주의’라는 차원에서 ‘국민적 정체성’과 인권과 소수자 보호 같은 ‘보편주의적 가치’의 통합을 시도하고 있다. 이들이 그리는 애국주의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로 경사되지 않으면서, 철저하게 보편적 인권과 개인의 자율을 보호하고 신장시키는 것을 지향한다. 반면 진보진영 일각에는 여전히 ‘애국주의’가 갖는 종족적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경계하는 흐름 역시 존재한다.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와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 장석준 진보신당 정책실장 등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모든 구성원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참여를 보장하는 공화주의의 이념에는 동의하면서도, 그것을 국민 정체성 형성의 매개로 삼으려는 시도에는 비판적이다. 민주공화국을 긍정한다는 것은 그 권력의 최종 근거인 ‘대한민국 시민의 힘’을 긍정하는 것이지, 헌법의 역할을 과대평가하거나 현실의 국가를 자기준거적이고 규범적인 현실로 인정하는 것으로 이어져선 안 된다는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등이 ‘공화주의적 애국’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구 단체 중에서는 참여사회연구소가 공화주의와 애국주의 논의에 적극적이다. 참여연대는 조만간 ‘민주공화국’을 주제로 한 시민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이다.

 

 아래의 글은 누구의 글일 것 같은가. 신자유주의 시장개혁이 일상 깊숙히 파고드는 이 나라에서 시대착오적으로 "왼쪽으로, 좀더 왼쪽으로"를 말하는 이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현실 사회주의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의 대안은 이미 붕괴했다고 하면서 현실을 인정하고 참여 속의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는 이들이 득세하는 이 시기 이 땅에 좌파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는 제 정신인 사람일까. 
 
시장의 절대성을 외치던 사람들이 애국주의, 국가주의의 화신이 되어 독도수호를 얘기한다. 투철한 국가관의 확립과 경제적 자유의 신성불가침이 소위 자유주의자의 이름으로 공존가능한가.
   
진보정당을 표방하면서 독도에 군대주둔을 얘기하고 일본에게 매운 맛을 보여주겠다고 이벤트를 벌이는 민주노동당의 모습도 이 자유주의자의 눈으로는 이해되지 않을 성 싶다. 어쩌면 글의 말미에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이라는 민주노동당의 슬로건을 인용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에 대해 쪽팔리는 하루하루가 계속되고 있다.
글쓴이의 이름은 글의 말미에 있다.
 
왼쪽으로, 좀더 왼쪽으로 (한국일보, 2005/03/16 17:38)
자유·국가주의 기괴한 '통정'
복지 취약한 한국엔 좌파 필요

 
한국의 이념 지형에서 기괴한 것은 흔히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자유지상주의(근본주의적 자유주의)가 유사 파시즘적 국가주의와 만들어내고 있는 맥놀이다. 시민사회 영역에 대한 국가의 개입에 경기를 일으키는 자유지상주의자와, 국가를 의인화해 충성스럽게 섬기는 유사파시스트가 서로에게 아무런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자유지상주의자는 대수롭지 않게 박정희를 찬양하고, 박정희 숭배자는 거리낌없이 최소정부론을 외친다. 정치학자 로버트 달이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에서 민주주의의 두 적으로 거론한 무정부주의와 수호자주의가 통정하고 있는 꼴이다.
 
이 두 세력은 단지 정을 통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지상주의와 국가주의는 드물지 않게 한 입에서 발설된다. 아침에는 시장의 거룩함을 주장했던 사람이 저녁에는 애국주의의 화신이 되고, 어제는 투철한 국가관의 확립을 선동했던 신문이 오늘은 경제적 자유의 신성불가침을 외친다. 이것은 자유지상주의와 국가주의의 이념적 친화를 뜻하는가? 그럴 리는 없다. 개인적 선택을 절대시하는 자유지상주의와 집단을 물신화하는 국가주의는 물과 기름이다. 그 둘을 동시에 주장한다는 것은, 그 주장이 진심이 아니거나 주장자가 정신분열증 환자라는 뜻이다.
 
그러면 어쩌다가 한국에서 이 둘은 한 몸뚱이를 이루게 됐는가? 그것은 이념적 간극을 가뿐히 넘어서는 인적 연속성 때문이다. 박정희 시대의 국가주의자들은, 제 몸에 국가주의의 흔적을 남긴 채 민주화 시대의 자유지상주의자로 변신했다. 왜? 그것이 ‘세계화’라는 대세의 공식 이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가운데 완고한 일부는 아직도 국가주의에 매달려 있고 또 다른 일부는 세련된 자유지상주의자로 완전히 전향했지만, 상당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이형동질의 낭만적 파토스를 오가며 이 화해할 수 없는 두 이념을 한 몸으로 부둥켜안고 있다.
 
한국의 국가주의와 자유지상주의는 ‘박정희의 친구들’이라는 동일 인구집단에 혈연적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 때문에 쉬이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이 한국에서 우파와 극우파를 구별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들이 함께 내세우는 것은 타락한 ‘자유’의 구호다. 이 범우파 블록 안에서 시간은 자유지상주의 편일 것이다. 세계화의 해일은 이내 국가주의자들의 기를 꺾어놓을 것이고, 분열증적 개인들의 내면에서도 자유지상주의는 국가주의를 이길 것이다. 국가 위세를 특별히 중시하는 초강대국이 아닌 나라에서, 동원된 애국심이 계속 자본에 맞먹는 결기를 유지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국가보안법이 자본 운동의 걸림돌이라고 판단되는 순간, 우익 진영의 폐지 반대 목소리는 쑥 들어갈 것이다. 자유지상주의는 한국의 전통적 수구 기득권층만이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경쟁자들도 꽤 개종시켰다. 지금 한국에서 자유지상주의는 개혁의 이름으로 관철되고 있고, 여권의 주류는 총자본에 굴복한 듯하다. 이것은 물론 우리만의 사정은 아니다. 자유지상주의의 범람은 세계화에 시큰둥한 유럽에서까지 목격되고 있다. 그러나 서유럽 국가들에 맞먹는 경제규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나라들이 두세 세대 전에 이룩한 복지시스템이 없는 한국에서 이것은 재앙이다. 서유럽과 달리 우리에게는 줄일 복지 자체가 없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위한 복지시스템 구축과 공동체구성원 사이의 연대를 핵심 가치로 삼는 좌파적 감수성이 우리 사회에 특히 긴요한 것은 그래서다.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이라는 슬로건은 한 정당의 선거구호를 넘어 우리 사회를 운영하는 기술적 근본원리가 돼야 한다. 세법 손질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부자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좌파 세상이 왔다고 호들갑 떠는 야당과 우익언론이 민생을 얘기하는 것은 뻔뻔한 일이다. 민생은 본디 좌파적 가치다. 우리 사회에는 좀더 많은 좌파가 필요하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독도문제는 그냥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광기어린 민족주의 열풍은 소위 진보를 표방하는 이들에게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같은 당적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보다 당 밖에 있는 좌파나 사회당에 더 정서적 친밀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단순히 예전 NL-PD 논쟁의 연장선상에 있어서도 아니고 자주계열에 반감이 있어서도 아닐 것 같은데...
 
갈수록 도를 더해가는 일본의 우익세력도 그렇지만, 이에 장단을 맞추는 남한의 우익세력도 마찬가지로 역겹다. 많은 얘기를 하기는 싫다. 그냥 글 몇개를 링크하면서 그 중에서 주목할 부분만 지적하기로 한다.
 
참, 독도 얘기를 하려면 빼먹어선 안될 것이 있다. 정세에 맞는 노래를 쏟아내는 윤민석이나 우리나라에 대한 것이다. 지난 탄핵 때는 윤민석이 노래를 내어놓더니 이번에는 우리나라이다. 우리나라는 이전에도 나에게 찍힌 바 있다. 이라크 파병철회와 반전평화를 목놓아 외치던 작년 여름, 그들이 내놓았던 '못가'라는 노래는 못내 거슬렸다. 일부에서는 그게 무슨 대수냐라고 했지만 말이다.
 
'독도는 우리의 땅이다'라는 작사/작곡한 백자라는 분은 지난 대선 시기에 권영길 후보의 로고송을 몇개 만들기도 했는데, 맘에 드는 노래도 있었지만, 차라리 만들지 않았으면 하는 노래도 있다. 이번 노래 또한 그렇다. 우리나라의 홈페이지에 가면 이 노래의 다운 횟수가 8만회가 넘어서 다른 노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임을 볼 수 있다. 이 노래의 컬러링을 홍보하면서 나오는 멘트. "독도는 우리땅, 대마도도 우리땅!"
 
쪽바리라는 일본인 일반을 비하하는 말을 쓸 필요가 있었을까. 김규항이 지적한 대로 '일본의 비정규 노동자와 극우 정치인'은 같은 쪽발이 새낀가? 나와 이건희는 같은 민족인가. 같은 민족이라서 어떻다는 건가?
한번 붙자고? 끝장을 내주겠다고? 전쟁을 하자는 것인가.
가사에서 대마도도 우리땅이라고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전형적으로 우익의 관점을 가사에 나타내고 있다.  게다가 가락은 이전에 만들었던 우리나라의 노래와 별로 차이가 있지도 않다. 이런 노래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근거에서 그러는 것일지...     
 
1. '독도'에는 없다: ‘패권’에 맞서는 ‘진보’의 길
4월 4일에 발행된 전진통신 제1호(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준)의 소식지)에 실린 독도 관련 글이다. 이는 접하기 어려우니 글을 전재한다. 구체적인 실천지침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내의 우익세력과의 각을 세운 것도 아니지만, 원칙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 동안 독도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주한 일본 대사의 추방'과 '독도 군대 파견'이라는 민주노동당 최고위원회의 입장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았다. 이런 와중에 한국 진보운동의 큰 스승인 리영희 선생은 3월 29일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쉽게 동요하고 흥분하면, 싸우기도 전에 저들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이라며 "그런 대응으로는 절대로 일본을 따라 갈 수 없다"고 일갈했다. 더불어 "지금 일본의 행보 뒤에는 미국이 있으며" 따라서 "표피적으로 드러난 일본 우익에 대한 감정적 대응보다는 미국이 일본을 앞세워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 목적, 흉계, 전략을 확실히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리 선생의 말씀은 과연 정곡을 찌르는 것이다. 왜 일본 우익이 한편으로는 독도, 댜오위다오釣魚島문제 등을 터뜨려 한 중과의 국경 분쟁 양상을 만들면서 다른 한편으로 역사 교과서 왜곡을 추진하는지, 이 점을 잘 봐야 한다.
 
역사 교과서 왜곡은 일본이 동아시아의 군사 패권 국가로 재부상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자기 정당화 수단이다. 과거 제국주의의 범죄 행위를 무(無)로 만들어야만 새로운 제국주의의 출발을 축복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우겨대는 것은 자기네가 보기에도 결코 폼 나는 일은 아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한 게 한국 중국을 일본의 피해자가 아니라 대등한 적대자로 만드는 새로운 쟁점, 즉 영해 문제다. 과거사가 아니라 영해 문제가 주된 쟁점으로 떠오른다면, 일본은 더 이상 피고被告의 자리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다. 자기들도 원고原告의 자격임을 강변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재판의 쟁점도 이제 더 이상 '제국주의'가 아니게 된다. 일본 우익이 납북자 문제를 과장 왜곡하여 북 일 갈등을 조장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나온 책략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민중들이 시마네현 조례에 대한 감정적 대응으로만 일관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장은 일본에 맞서 민족의 결의를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되겠지만 자신도 모르게 일본 우익의 장단에 놀아나는 꼴이 될 것이다.
 
일본의 제국주의 패권에 대한 투쟁, 그 길은 '독도'에는 없다. 우리는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판에서 싸워야 한다. 우선 그것은 동아시아의 현대사를 바로 놓기 위한 차분하고 끈질긴 대응이어야 한다. 일본의 과거 범죄 행위들(위안부 문제, 한국인 원폭 피해자 문제 등)을 분명히 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교과서 왜곡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일본의 좌파 세력과 굳게 연대해야 한다. 비록 80년대 말을 거치면서 사회당과 총평이라는 좌파의 버팀목이 무너지긴 했지만, 일본 사회 저변에는 아직 사회당 잔류 세력들 노동조합 반핵평화운동 풀뿌리 시민운동 등 진보적인 역량들이 남아 있다.
     
우리는 시마네현 조례로 고양된 감정적 흥분에 편승해서 영해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고 그래서 일본 내 좌파의 입지를 좁히기보다는 이들과 연대해서 미 일 제국주의를 고립시킬 쟁점들을 제기해야 한다. 원폭 투하 60주년을 맞아 한 일 양국에서 동시에 동아시아 비핵화와 군비축소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대중적인 운동을 벌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바로 여기에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한국 진보 세력의 과제가 있다.
 
2. 독도로 간 호랑나비 (2005년 03월 18일 17:01)
미디어참세상 기자인 molot님이 자신의 블로그에 쓴 글이다. 사건이 터졌을 때의 어떤 쇼가 벌어졌는지를 잘 묘사해놓고 있다. 이 가사의 마지막을 따서 메신저의 대화명으로 3-4일을 사용하였다.
molot님의 미디어참세상글 --> 독도 둘러싼 긴장,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듯, 극우를 극우로, 제국주의를 파시즘으로 막을 수는 없어 
 
하여튼 난리다. 남녀노소, 남북한 해외, 보수 개혁 할 것 없이 독도로 대동단결이다. 누가 한 마디 쓴소리를 할 법한데 월드컵 때 쓴소리 했던 인권운동사랑방이 거의 린치 당하다 시피 했던걸 본 탓인지 아니면 워낙 일본이 헛소리를 하는 탓인지 한 목소리 일색이다. 그런데 상황이 점입가경에 접어들고 있다. 북핵저지연대랑 한총련이 한 목소리로 한자리에서 시위하는 것이야 그렇다 손 치더라도 단지, 할복, 투신에 이어 분신까지 등장했다.
 
게다가 상황은 급기야 코미디의 반열에 접어들고 있으니 모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일본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지정에 맞서 대마도의 날을 지정하겠다고 나섰다. 결혼 서비스 회사 선우에서는 '독도 수호 미팅' 상품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다. 오늘 들었던 가장 압권인 뉴스는 독도는 우리땅을 불렀던 정광태와 콧털 김흥국이 손을 잡고 "독도로 간 호랑나비" 앨범을 제작하기로 했단다.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다시 잘 팔린단다. 출판사는 작가는 이 사태를 예견하고 이 소설을 썼다는 카피로 공세적 광고를 재개했다.
 
제국주의와 파시즘이 정말 나쁜 것은 상대방의 그것을 촉발시키고 강요하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세계 대전 당시 유럽의 노동계급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옆 나라의 노동계급과 제 목숨들을 버려가며 싸운 전례가 있지 않은가? 지금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의 국수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마 양국의 파시스트들을 슬며시 웃음을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파시즘으로 제국주의를 막을 수는 없지 않은가? 
 
3. 독도는 괭이갈매기와 바다제비의 것이다! (2005년 3월 17일 14시 13분)
녹색평론 편집장인 변홍철님이 '녹색평론 읽는 사람들'에 올린 글의 일부다. 글의 뒷부분에 진보정당의 성명서인지 의심스러운 민주노동당의 3월 16일 성명이 나와있다. 근래 들어 내가 민주노동당원임을 부끄럽게 했던 글 중의 하나이다. 변홍철님의 이 글은 정리되어서 한겨레신문의 의견란에도 실렸다. 실천적인 대응방침은 뚜렷하지 않지만, 민주노동당 성명에 대한 적절한 비판으로서 의미가 있다. 아마 이 글이라도 빨리 나오지 않았으면 정말 쪽팔려서 돌아버리는 줄 알았을 것이다.    
 
'독도 문제'를 두고, 우리사회가 갑자기 좌와 우도, 여와 야도 없이 획일화된 목소리로 '반일'을 외치는 이같은 상황을 결코 건강한 사회적 반응이라고 두고 보기에는 우려스러운 점도 없지 않다. 특히 어제(3월 16일) 민주노동당의 소위 '지도부'가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제정' 사태와 관련해 발표한 성명서의 내용은 평소 관심을 가지고 민주노동당의 활동을 지켜보던 한 시민으로서, 참으로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그 내용은 한마디로, 국가주의/민족주의적 열기(광기에 가까운)의 확산에 부화뇌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소위 진보정당의 역사적/사회적 책무에 대한 치열한 고뇌와 팽팽한 긴장 대신, 은근슬쩍 분위기와 시류에 편승, 영합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다른 것은 두고라도, 독도문제와 관련해 정부에 '강력한 조치'를 촉구하면서, '독도 국군주둔', '독도 개발' 따위를 주문했다는 것을 읽고는, 차라리 수치스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전통적으로 '진보' 혹은 '좌파'의 관점과 입장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국가주의를 바탕으로 한 성장과 개발 논리, '국익'이라는 허황된 이데올로기와 유착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로부터 배워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민주노동당 '지도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사회 전반의 인식과 현재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게는 좀더 근원적이고 비판적인 상상력과 언어와 실천이 필요하다. 이러한 때에 '국익'의 이데올로기적 광기에 합류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임을 알아야 한다.
 
독도는 원래 괭이갈매기와 바다제비, 수많은 물고기와 파도의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풀뿌리 민중들은 그러한 자연의 섬인 독도를 인간의 탐욕과 국가주의적 논리로 '소유(영유)'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으며, 오히려 어리석은 자본과 국가의 개발/팽창 논리로부터 이 아름다운 섬과 바다를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그동안 생각해왔습니다.
 
우리 한국 민중은 이번 독도에 관한 당신들 지도자들의 움직임이, 과거에 그랬듯이 또다시 동북아시아와 세계에 '제국주의적인 힘'으로써 팽창해 나가겠다는 터무니없고 부도덕한 야심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 언제나 그랬듯이 팽창과 정복, 전쟁에의 유혹은 어느 나라든 민중의 피를 빨아먹는 지배세력과 권력엘리트들의 것이지, 하루하루를 노동하여 정직하게 먹고사는 풀뿌리 민중의 이해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는 것을 일본의 형제 여러분도 너무나 잘 아실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제발 평화를 사랑하고 자연을 소중히 여기는 양국 풀뿌리 민중의 오랜 지혜와 전통에 입각하여, 독도가 독도로서, 자연이 자연으로서 그냥 아름답게 보존되고 유지될 수 있도록 하십시다. 그것은 국가를 뛰어넘어 우리 모든 민중의 의무입니다. 제발 자연을, 독도를, 국가주의와 군국주의라는 더러운 명분으로 같이 짓밟는 어리석음에 동참하지 맙시다. 독도는 독도이기도 하고, 당신들에게는 '다케시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인간이 붙인 이름일 뿐, 독도는 원래 괭이갈매기와 바다제비, 수많은 물고기와 파도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도 전세계 풀뿌리 민중의 국제주의와 평화주의에 대한 신뢰와 연대의 원칙을 결코 저버려서는 안되며, 더구나 "생태적으로 지탱가능한 사회로의 전환"이라는 인류보편의 비전을 놓쳐서도 안된다
 
일본의 군국주의와 팽창주의를 경계하고, 한-일 민중과 평화주의 세력의 연대로 이러한 '도발'에 맞서 싸우는 것은 물론 긴급한 우리의 과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과제와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 대응(처방)'은 전혀 인연이 없는 것이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이라크 침략전쟁에 우리 군대를 파견해 놓고, 그것을 우리의 힘으로 철군시키지도 못하고 있는 '전범국가의 국민'으로서의 부끄러움을 고스란히 지고서, 우리가 지금 어떻게 일본의 팽창과 군국주의화만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천성산과 새만금 파괴, 골프장과 기업도시 열풍과 같은 반환경적, 반민중적 거대국책사업으로, 우리 땅 전체와 민중의 삶을 황폐화시키고 있는 이 참혹한 '일상의 전쟁상황'을 우리가 제지하지도 못하면서, 독도의 영유권을 확인하기 위해 독도를 '개발'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우리사회 진보정당의 수준인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일본의 파렴치함과 야욕을 무조건 비난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4. 독도문제에 대하여 (최종 편집: 2005년 03월 25일 19:15:53)
최근에 진중권님이 인터넷 경향신문 언바세바의 칼럼 [진중권의 좌향좌]에 올린 글 중에서 돌을 던진 사람보다 꽃을 던진 사람이 많은, 몇 안되는 글 중의 하나이다. 의외의 결과이다. 독도문제에 대해 쉽고 재미있게 잘 썼다.  
 
끓어오르는 민족감정에 편승하는 것은 진보정당이 할 일이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이런 분위기가 자칫 낡은 민족주의의 고양으로 흐르지 않게 견제해야 한다. 이번 사태를 ‘일본 대(對) 한국’의 대립이 아니라 ‘한일우익 대(對) 한일 두 나라의 개혁진보세력’으로 바로잡는 역할. 거기에 진보정당의 과제가 있다. 어느 나라 진보정당에서 “군대를 보내자”는 맛이 간 헛소리를 하던가. 진보는 내셔널리즘의 광기에 내셔널리즘으로 맞설 게 아니라 내셔널리즘에 인터내셔널리즘으로 맞서야 한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일본을 ‘섬’으로 고립시켜 그들의 우경화 야욕을 저지해야 한다면,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은 국제주의의 관점에 서서 일본 내의 양심세력과 연대하여, 그 사회 내에서 일본의 우익을 고립, 약화시켜야 한다.
 
네티즌들 역시 이제는 과거와 달리 좀 차분해질 필요가 있다. 이것은 흥분할 문제가 아니라 풍자를 할 문제다. 가령 일본 시마네현이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선포한다면, 우리 쪽에서는 “시마네현의 울릉군으로의 편입을 축하합니다”라고 대꾸해주며, 시마네현을 시마네면으로 개칭하여 울릉군 시마네면(面)의 면민들에게 울릉군의 명예 군민증을 선사해주면 될 일이다. 일본 우익의 도발에 같은 수준으로 대응할 필요 없다. 그들의 머리 꼭대기 위에 앉아서 점잖게 그들의 망령을 비웃어주면 될 일이다.
 
5. 독도문제에 대한 당의 대응에 관하여 - 진보정당의 고민은 달라야 한다. (2005-03-25   18:55:01)
21세기 진보학생연합이 중심이 된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 당원 일부가 당과 학생위원회의 독도문제에 대한 당의 대응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였다. 이주희 학위장 등은 독도에서 일장기를 불사르고 울릉도 농성에 돌입하는 등 도대체 한나라당 학생위원회인지, 자유총연맹 산하 학위인지 그 정체를 알지 못하게 하는 행동을 저질렀다. 적어도 여기에 있어서는 반핵반김어쩌고 저쩌고 하는 분들과 동일하다. 이런 사안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없다고?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아니던가?
 
6. 민주노동당 부산시당 등의 공동보도문 (2005-03-25  16:44:32)
중앙당보다 훨씬 나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은 이런 것을 앞장서서 만들어나가야 하지 않는가.
 
일본 시마네현의 독도의 날 제정 조례와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등은 일본 내 극우세력의 군국주의 부활 움직임에 다름 아니다.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공동의 입장을 밝힌다. 
-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나 실효적 점유상황을 보더라도 한국의 영토임이 명백하다.
- 따라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일본 내 극우 세력의 팽창주의적 야욕의 발로이며, 일본의 우경화와 군국주의화를 부추기는 불순한 시도에 불과하다.
- 나아가 일본 정부가 독도 영유권 주장에 동조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한일간의 미래지향적 교류에 찬물을 끼얹고, 비생산적인 긴장과 극우 민족주의의 발호를 부추기는 퇴행적 외교술에 불과하다.
- 특히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으로 한국 국민들의 분노가 고조되어 있는 상황에서 미국무부장관의 일본의 UN, 상임이사국 진출지지 발언은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묵인함으로써 동북아의 긴장 고조를 방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나아가 일본 군국주의를 지렛대로 중국을 견제하려는 불순한 국제정치공학적 발상인 바 우리는 일본의 UN, 상임이사국 진출를 명백히 반대한다.
- 한일 진보세력은 차제에 독도의 영유권 문제뿐만 아니라 일본의 전범국가로서의 국제적 책임을 묻고 일본이 동북아의 평화를 위협하지 않는 평화애호국으로 상호 선린을 도모하는 이웃으로 거듭나기를 촉구한다.
 
7. '독도수호'는 민중의 요구가 될 수 없다! (2005년03월29일 13:59:13)
한·일 지배계급이 공명하는 <(대미)군사동맹>을 분쇄하는 민중적 연대를 구축하자!
사회진보연대의 [사회화와 노동] 257호에 실린 것이다. 이건 길더라도 읽어봤으면 좋겠다. 앞부분만 발췌하고 뒷부분은 전재했다. 요새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가 독도에 간 것에 대해 다함께가 옹호하고 나선 것에 대해 논란이 있다. 다함께는 항상 무슨 사안이 있을 때 일관된 입장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어찌보면 대중추수주의적으로 왔다갔다 한다. 그렇다고 해서 대중적인 세를 얻는 것도 아니고... 다함께가 제대로된 국제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였으면 좋겠다. 이건 진영논리가 아니다. 
 
‘독도’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공방이 점차 전사회적으로 ‘반일여론’을 확산시키는 가운데 과연 남한의 사회운동은 이번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개입할 것인가?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번 사태는 미국과 일본이 한 축이 되고 남한이 적극적으로 조응하는 동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적 재편전략에 대한 비판의 현재성을 분명하게 부각하고 있다는 것이며 사회운동은 바로 이러한 현재적인 의의에 착목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반미반전 투쟁에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독도 영유권 논란’은 현재적인 동아시아의 제국주의적 재편과 관련되어 있으며, 둘째 ‘독도수호’를 외치며 ‘반일’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지배계급과 별 다를 바 없는 국가주의적 동원전략에 무비판적으로 조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도’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갈등은 식민지적 사회·경제적 관계를 청산하기는커녕 유지·온존하는데 급급했던 미국의 동아시아 전후 처리의 부산물인 것이다. 일본에서 국가주의/민족주의의 발호의 특징은 대부분 주변 국가와의 ‘과거사(근현대사) 왜곡’ 혹은 ‘영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극우세력의 발언권이 강화되고 있다는 데 있다. 압도적인 지지로 지방선거에서 재선된 도쿄 지사 이시하라 신타로가 다른 무엇보다도 중점적으로 추진한 사업은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원노조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행한 초·중·고등학교에서 국기게양과 국가제창의 의무화였다. 일본 내 우익세력의 목청이 커진 이유에는 장기불황과 청년층의 실업자 급증, 강력한 대중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던 총평-사회당 블록을 주축으로 한 이른바 ‘혁신세력’의 몰락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1990년대 냉전의 종식 이후 미국의 세계전략에 조응하는 일본의 대외정책의 기조가 그동안 극우세력이 꾸준히 주장하던 방향과 일맥상통함으로써 일종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는 쟁점이 이른바 ‘보통국가론’인데, 이는 군대의 보유와 집단자위권을 금지하는 현재의 ‘평화헌법’을 개정하자는 것이다.
 
일본의 ‘우경화’는 점차로 일본의 ‘재무장’을 필요로 하는 미국의 동아시아 재편전략, 나아가 세계전략 속에서 점차 힘을 얻고 있으며 이에 대한 우리의 비판은 동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적 군사재편에 대한 반대, 한-미-일 삼각동맹에 대한 비판, 나아가 ‘무한전쟁’과 ‘무한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사회운동의 반전-대안세계화의 과제 속에서 위치 지어져야 할 것이다. 이를 비판하지 않는 ‘반일’은 민중의 생존을 담보로 추진되는 현재의 제국주의적 폭력을 간과, 내지 은폐하고 오히려 민중의 시선과 관심을 오로지 과거의 일제의 침탈에만 맞춘다는 점에서 퇴행적일 수밖에 없다.
 
일본의 우익세력은 독도 뿐 아니라 주변 국가와 영유권 분쟁에 휘말려있는 모든 지역이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움직임을 ‘군국주의 침략의 부활’로 규정하고 즉각 ‘영토수호’ 캠페인을 전개하는 것은 언뜻 보면 가장 직접적이고 정당한 대응인 듯 하다. 그러나 첫째, 이는 무엇보다 사태를 ‘정략적으로’ 활용하려는 지배계급의 동원전략에 호응한다는 점에서, 둘째로, 무엇보다 동아시아 차원에서 진행되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재편전략에 공조하는 한·일 지배계급의 동일한 논리를 무력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국가주의/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정당화는 방식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
 
혹자는 독도는 일제의 침략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아니냐고, 따라서 ‘독도의 영유권’을 ‘수호’하는 것은 민중의 요구를 정당하게 드러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적으로 돌이켜볼 때 어떤 특정한 지역에 대한 배타적인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민중들 스스로의 권리를 주체적으로 쟁취하려는 것이었다기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영광’을 위해서 지배계급에 의해 ‘동원’되는 것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 ‘동원’의 성과는 민족/국가에 대한 ‘상징’을 중심으로 애국심을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어떤 ‘경계’를 중심으로 그 외부의 집단에 대해 ‘단결’을 고취하고 내부의 ‘모순’과 ‘적대’에 대해서는 은폐하는 것은 지배계급이 급진적이고 저항적인 민중들의 운동을 무력화하는 가장 고전적인 수법이다. 민족주의/국가주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언제나 지배계급에 대한 비판세력은 ‘반역자’나 ‘스파이’로 매도당해왔다. 물론 ‘독도’는 제국주의 열강들 간의 영토분쟁과는 다른 경우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회운동이 배타적인 ‘영유권’을 주장하자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일본의 우익들의 요구를 ‘제국주의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과연 이에 대한 남한 민중들의 대응이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적합한 것인가의 질문을 던져야한다. 우리는 ‘영유권’ 주장의 논리가 첫째는 지배계급의 ‘동원전략’에 조응하는 것이라는 점, 둘째는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방식으로는 제국주의적 군사재편에 조응하는 일본의 ‘우경화’(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공명하는 것은 비단 이들만이 아니라 남한의 지배계급 역시 마찬가지이다)에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들어 운동진영 일각에서 제기되는 ‘독도수호’를 위한 캠페인을 반대한다.
    
이번 ‘다케시마의 날’ 제정 이후 국내의 운동진영 역시 이러한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 논리에서 그다지 자유롭지 않다. 막연하게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구호만을 가지고 극우보수 단체들과 그다지 구별되지 않는 국가주의적·민족주의적 논리에 기대어 대응하는 것은 일시적으로는 어필할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사회운동의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올가미로 남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전(<사회화와 노동>241호, ‘친일파 청산인가, 식민지배/제국주의 청산인가?’)에 식민지/제국주의 잔재의 청산은 ‘친일파 청산’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 ‘제3세계’ 국가들이 빈곤과 질병에 시달리는 오늘날 지극히 현재적인 과제이며, 나아가 식민지 시기부터 자리잡고 있는 사회구조 자체를 바꾸는 문제라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사회운동은 제국주의라는 지극히 현재적인 쟁점을 ‘친일파 청산’이나 ‘독도 수호’에 가두어버리는 지배적인 논리에 맞서야 한다. 민중이 배타적인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에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평화에 대한 보편적인 권리를 옹호하고 확장하기 위해 발언하고 투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독도는 과연 누구의 영토인가?”라는 질문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한·일 양국의 지배계급을 동시에 비판할 수 있는 제국주의 군사폭력에 대한 반대, 즉, 동아시아에서의 광범위한 반미반전의 민중적 연대를 추구하는 것이 사회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메이데이날 정말 답답해서 그냥 광화문의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있을 수 없었다. 사방에서는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는 목소리로 넘쳐났지만, 도대체 무엇을 기념하겠다는 것인지,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집회의 기조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앉아있을 때에는 유인물이나 책을 읽었고, 그것도 모자라 아는 사람들을 찾아 얘기를 나누는데 집중하고, '연대를 걸고' 테이프를 팔러 돌아다녔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남북의 노동자가 한소리로 독도문제에 대해 낭독하는 순서에서는 발걸음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 성명은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단다. 만국의 노동자가 연대하고 단결하여 투쟁하자는 날인 세계노동절에 '우리민족끼리' 도대체 뭘 어쩌자고?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것 말고도 지적할 것이 너무 많아서 아예 신경을 끄고자 했다. 이수호 민주노총 집행부의 입 이수봉 씨는 언론에 대고 폴리스라인이 잘 지켜져서 잘되었다는 발언을 했다. 아마 그들 눈과 귀에는 같은 날 청주에서 벌어진 사태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냥 사회적 교섭만 잘되면 장땡이었겠지.
 
이런 내 마음을 담아서 장귀연님이 민중언론 참세상에 좋은 글을 써주었다. 그냥 내 의견이라고 보면 된다. 거참, 내가 교시를 내린 것도 아닌데... 세계노동절 날 민족과 국가를 강조하는 그 짓에 대해서는 정말 지적하고 싶었다.
 
그만큼 우려스러운 일은, 외세에 대해 전국민 전민족이 똘똘 뭉쳐야 한다는 또다른 애국주의의 발상이다. ... 전국민과 전민족은 똘똘 뭉쳐 통일된 목소리를 낼 수가 없고 내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국가간 경계와 민족이라는 상상적 공동체를 가로질러, 자본과 노동이라는 심대한 계급 분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른바 국민적·민족적 목소리는 짐짓 이러한 계급 적대를 은폐하고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기 마련이다. 


노래공장 - 인터내셔널가 (편곡 박태승)

 

 

뒤바뀐 연대와 적대 (참세상, 장귀연, 2005년05월02일 11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위기에서 나라마다 난무하는 강한 국가와 민족이라는 수사가 전세계적 자본과 노동의 적대와 대립을 은폐하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 노동자와 노동 대표들의 임무일 터다. 그러나 노동절대회에서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백번 양보해서 자본이 잘 나가면 노동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이 많아질 가능성이 그나마 높아진다 하더라도, 자본의 경쟁력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것이 노동자 대표가 할 소리인가? 이 말이 성립되려면 또다른 국가주의의 기반 위에서만 가능하다. 우리나라 국가경쟁력이 높아지면 노동자들도 잘 될 거라는 생각. (‘강대국 건설’을 외치는 일본 우경화의 대중적 기반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하여 국가의 경쟁력 자본의 경쟁력을 위해, ‘우리나라’ 정부와 손을 잡고 ‘우리나라’ 자본과 손잡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연대 속에서 계급의 분열과 적대는 환상적으로 사라진다.
 

 

 저번주 한겨레21에 실린 이용석 선생님에 관한 글을 읽고 학부모들이 참 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국기에 대한 경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이제는 우리 안의 국가주의에 대해 고민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 또한 어렸을 때 멋모르고 배운 <향토방위군의 노래> 등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내가 정말 싫다.
 
생각할 꺼리가 있을 듯하여 담아왔다.
 
“세계와 함께 살아야 하는 어린이들에게는 (국기에 대한 맹세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자랑스런 조국과 민족’은 개인이 스스로 느껴야 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때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하지 않을까요?”
 
선과 악의 보편적 윤리조차 제대로 서 있지 않은 아이들에게 애국심을 가르치는 건 폭력이다.

 
국기 경례 거부, 중징계당하는가 (한겨레21, 남종영 기자, 2006년07월13일 제618호)
학부모들의 진정으로 경기도 교육청 징계위에 회부된 현직교사 이용석씨…“국기·국가 부정하는 교육했다”는 이유지만 실제론 사설 모의고사 거부 탓


쪼국과 민족의 장스런 태극기 앞에… (한겨레21 2006년07월13일 제618호, 남종영 기자)
월요일마다 애국가를 부르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는 어린이집들…“서너 살배기에게 전체주의 교육하나” 소수 부모들의 항변은 묵살돼 
 
“나는 장스런(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쪼국(조국)과 민족의 뭉한(무궁한) 영광을….” 지난해 봄 경기 구리에 사는 유키코 오노(31·가명)는 3살짜리 아들 진한(가명)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한국인 남편과 국제결혼을 한 뒤, ‘국기에 대한 맹세’를 처음 들은 것이 그때였다. 진한이는 어린이집에서 배웠다고 했다. 애국주의에 심한 거부감을 느껴 일본에서 한 번도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고 히노마루 앞에서 절하지 않았던 유키코는 아이 입에서 ‘무궁한 영광’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이라는 표현이 나오자 섬뜩했다. 진한이는 ‘국기에 대한 맹세’ 외우기를 재밌어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되는 애국가도 신나게 불러댔다.  얼마 뒤 유키코는 어머니회의 자리에서 이 문제를 꺼냈지만, 이상한 사람 취급만 당했다. “다 하는데, 뭐가 문제냐?” “괜찮다. 나도 초등학교 때부터 다 하고 자랐다” “일본인이라서 그러는 거 아니냐?”는 수군거림만 들렸다.
 
과연 한국인과 일본인의 민족적 차이 문제일까. 혹은 식민지와 피식민지 국가의 역사적 체험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일까. 적어도 경기 성남에 사는 수민(3)이의 아버지 김진수(32)씨는 그렇지 않았다. 김씨 또한 지난 5월 36개월밖에 되지 않은 딸이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듣고 어린이집과 한바탕 싸움을 벌였다. “어디서 배웠냐고 넌지시 물어봤는데, 어린이집에서 배웠다고 하더군요.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들한테 벌써 이런 것을 가르치다니요.” 한 걸음 더 나아가 수민이는 가슴에 손을 얹고 국기에 대한 맹세 흉내까지 냈다. 교사에게 물어보니, 일주일에 한 번씩 애국조회를 한다고 했다. 수민이는 월요일 아침마다 태극기 앞에서 경례와 맹세를 하고, 애국가를 불렀다.
 
애국조회는 ‘애국조회’나 ‘주례’라는 이름으로 대다수 어린이집에서 이뤄지고 있다. 주로 월요일에 강당이나 큰 교실에 전체 원생이 모여 줄을 선 뒤, 태극기 앞에서 경례와 맹세를 하고 애국가를 부른다. 국민의례가 끝나면 원장은 아이들 앞에서 훈화를 한다. 수도권의 한 어린이집 원장은 “독도 문제나 월드컵 같은 애국심과 관련한 시사적인 주제를 고른다”고 말했다. 운동장 열병과 주번 교사의 엄한 호통이 없을 뿐이지 애국조회의 골격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유성희 서울 노원구립어린이집 연합회장은 “국공립 어린이집에서 대부분 애국조회가 실시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라며 “실제 생활에서 나라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지 소방서나 교통안전시설 견학 등을 통해 체험하는데, 애국조회도 이것과 연계해서 자율적으로 이뤄진다”고 말했다. 문제는 애국조회와 같은 애국심 교육이 서너 살배기 아이들에게 바람직한가라는 점이다. 국기에 대한 맹세에 나오는 전체주의적 문구가 아이들에게 적합한지도 논란거리다. 선과 악의 보편적 윤리조차 제대로 서 있지 않은 아이들에게 애국심을 가르치는 건 폭력이라는 게 유키코와 김진수씨의 생각이다. 임재택 부산대 유아교육학과 교수(생태유아교육학회장)는 “이런 관행은 아이들을 국가주의에 매몰시킬 수 있다”며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가치를 가르치는 것은 몰라도 ‘국가는 무조건 옳고 충성해야 한다’는 맹목적 관념을 가르치는 건 온당치 않다”고 지적했다.
   
한국과 일본의 학부모는 공통적으로 “내 아이에게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우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유키코는 “맹목적인 충성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히노마루·기미가요 강제와 다를 바 없다”고 말했고, 김진수씨는 “애국가와 국기에 대한 맹세는 가장 나중에 따라 배우고 외우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국가주의에 대한 유키코와 김씨의 촉각이 너무 예민한 것일까. 지난해부터 올 초까지 이어진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 때 인터넷에서 ‘황우석 살리기’에 나선 상당수 네티즌은 청소년들이었다. 청소년들은 월드컵 기간에는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를 외치며 국가주의 축제에 흥분했다. 유키코와 김씨는 여기서 자식들의 미래를 본다. 임 교수는 “독일 발도로프 프로그램을 따르는 유치원에선 아침마다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시를 낭송해준다”며 “판단 능력도 없는 아이들이 일방적인 국가주의 교육을 받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어린이집은 모두 자발적으로 애국조회를 실시한다. 취재 도중에 만난 교사들도 “날로 공동체 정신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애국심을 가르치는 게 뭐가 문제냐”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국가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고 시작하는, 군사정권이 심어준 한국인의 내면 의식이 이런 어린이집의 관행을 만들었다는 분석이 설득력이 크다.

 

2009. 08. 14
민주적 애국주의에 관한 글이 의외로 논쟁이 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 아마도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 전후로 - 대한민국이라는 말이 한국, 남한을 대체하더니 드디어 이를 긍정하면서 이론화하는 흐름까지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은주 교수를 잇는 다른 논의가 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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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주의’에 바치는 진보진영의 위험한 짝사랑 (한겨레, 권혁범/대전대 교수·정치학, 2009-07-29 오후 08:12:21)
반론|장은주씨 ‘민주적 애국주의’를 경계한다
‘대동’ 앞세운 주장 ‘전체주의’ 우려…“세계시민주의가 더 큰틀” 

 
지난 23일 <한겨레>에 소개된 장은주 교수의 ‘민주적 애국주의’에 관한 글은 나라를 사랑하고 그것에 충성을 바치는 것 자체를 죄악시할 이유는 없으며, 인권·정의·자유 등의 보편 가치를 내장한 애국주의가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2002년 월드컵 이후의 ‘대한민국주의’ 열풍은 주목해야 할 현상이며, 진보진영이 그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우파에게 운동의 유력한 무기를 헌납하는 꼴이라는 그의 주장에선 ‘진보적 애국주의’를 공론화해 진보세력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려는 의지가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장 교수가 정치적으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엇보다 장 교수 희망대로 다수의 시민들이 민주적 애국주의에 동화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유사시 그것은 장 교수가 그렇게 비판하고 거부하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쉽게 동원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위기 담론 속에서 민주적·진보적 가치는 밀려나고 국가가 전면에 나서게 되리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물론 장 교수는 보편적 인권과 개인의 자율성은 보호돼야 하고, 개인이 희생돼선 안 된다는 단서를 단다. 하지만 그가 “국민국가적 수준의 하나 됨”이나 “대동의식”을 얘기할 때는 전체주의의 냄새마저 풍긴다.
 
대체 “나라를 미워하고 부정”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게” 왜 나쁜가. 민주주의는 국가를 비판하고 심지어 그 존재를 부인하는 권리까지도 포함하는 것 아닌가. 물론 장 교수의 주장처럼 나라를 “아름답게 바꾸려는” 노력의 중요성을 나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유일한 공동의 대지”이며, 따라서 그것을 사랑해야 한다는 장 교수의 주장은 전지구적 이동과 소통이 증대함에 따라 다문화적 정체성이 확산되는 오늘날의 현실과도 모순된다.
 
장 교수는 보편주의와 애국주의가 결합되는 이상적 상태를 꿈꾸지만, 이 역시 매우 인위적이고 관념적인 조합처럼 여겨진다. 후자가 전자를 압도하면서 장 교수가 우려하는 ‘종족주의적 애국주의’로 퇴행하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가 민족주의를 반대한다지만, 애국주의가 어떻게 민족주의와 분리될 수 있는지도 궁금하다.
 
장 교수가 강조하는 ‘공화주의적 애국주의’의 실체 역시 의문스럽긴 마찬가지인데, 과연 모든 시민이 정치에 자발적으로 평등하게 참여하는 공화주의의 이상이 현대 사회에서 실현 가능한 것인가. 오히려 나는 한나 아렌트 식의 공화주의에서 어떤 억압성을 본다. 정치 참여에 대한 거부와 무관심조차도 나는 민주주의 사회의 필수적인 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민족에 대한 사랑과 자긍심이 부재한 사회는 없다. 따라서 그것을 없앤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교육과 계몽, 시민운동을 통해 그것을 세계시민주의의 하위단위로 끌어내리거나, 마을이나 생태공동체, 국가연합 같은 비국가적 공동체의 경쟁·조력자로 공존하게 만드는 것은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 국가를 비판하는 “비민족주의적 진보적 민주주의자들”이 나라를 사랑해야 하는 “좋은 이유”가 과연 “국가적 삶 속에서 참된 인간과 도덕적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인가. 나는 이런 장 교수의 견해 역시 국가의 괴물적 속성을 애써 외면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본다.
 
분명 ‘대한민국주의’로 축약되는 새로운 애국주의 물결은 우려되는 현상이며, 그저 외면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앞서 열거한 이유들 때문에 그것을 ‘민주적 애국주의’에 담아보려는 시도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세계시민주의로 그것을 견제하고 제어하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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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목조르는 국가? 인권을 수호하는 국가! (한겨레, 장은주/영산대 교수·철학, 2009-08-05 오후 10:32:52)
권혁범씨 ‘애국주의’ 비판에 답한다
민주공화국선 인권-공화주의 ‘쌍두마차’
정치적 실천 위해 국가토대 인정 불가피
 
 
핵심적인 논점 몇 가지만 명확히 해 두려 한다. 우선 문제를 ‘세계시민주의 대 애국주의’라는 구도에서 이해해선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권 교수와 나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규범적 지향을 갖고 있다. 나 또한 누구보다 보편적 인권의 가치를 옹호하고, 국가주의나 전체주의를 혐오하며, 종족주의적 애국주의의 위험성을 경계한다. 다만 권 교수는 선험적이고 본질주의적 방식으로 국가와 애국주의의 문제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그에게 국가는 그 자체로 ‘언제나’ 괴물이고, 애국주의는 ‘반드시’ 정치적으로 부패할 수밖에 없는 이념인 모양이다.
 
나는 권 교수처럼 문제를 ‘형이상학적’이거나 ‘도덕주의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국가를 그 자체로 어떤 형이상학적 실체로 파악해서 그것을 신성화하거나 역으로 악마화해서는 안 된다.  
 
나는 ‘정치’를 사회 성원들이 집합적인 의견과 의지의 형성을 통해 사회적 삶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문제들을 공동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국민국가와 그 안에서 형성되는 연대 의식은 오늘의 조건과 한국적 맥락에서는 그런 정치적 실천을 위한 우회 불가능한 지반이다. 이런 이해는 국가의 절대화나 전체주의와는 무관하다. 핵심은 집합적 실천의 문제해결적 합리성과 그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토대를 확인하자는 것이지, 국가를 무시하고 부정할 권리를 부인하거나 다문화주의적 상황을 외면하자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정치적 실천의 양식이 규범적으로 올바른 모습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나는 한갓된 애국주의가 아니라 공화주의적인 ‘헌법 애국주의’를 이야기한다.
 
애국주의는 자칫 위험한 나락으로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회피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더 위험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국가를 무시하면서 정치 자체를 부정하거나 실천적으로는 공허할 수도 있는 세계시민주의 같은 이념에 매달릴 게 아니라, 정당한 애국주의를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다행히 ‘민주공화국 대한민국’과 민주적 헌정주의는 우리의 그런 정치적 실천의 올바른 양식을 충분히 담보해 줄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기획과 그에 대한 헌신은 ‘모든 사람의 평등한 자유’의 실현이라는, 오늘날 규범적으로 유일하게 정당한 정치적 지향에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권과 공화주의를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파악하는 것은 매우 낡고 잘못된 이해다. 인권과 민주주의적 실천은 서로가 서로의 전제이자 귀결이기 때문이다. 그 점은 민주공화국의 참된 이상이, 다수의 힘을 앞세우며 보편적 인권을 무시하는 뉴라이트식 대한민국주의나 이명박식 법치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적 정체성과 근본적으로 모순된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 줄 수 있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 장석준 진보신당 정책실장의 우려(<한겨레> 7월23일치)와 달리, 내 논의의 초점이 대한민국의 모든 면모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에 있지 않다는 것도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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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주의’ 화두가 잊은 ‘비민주공화국’ 정치현실 (한겨레,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문학, 2009-08-12 오후 08:05:27)
‘민주적 애국주의 논쟁’ 진전을 기대하며
미성숙한 시민사회서 ‘진보적 애국주의’는 공허한 목표 

 
원래 장 교수의 의도는 국가에 대한 진보진영의 원칙론을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해체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장 교수의 주장은 ‘진보도 대한민국을 사랑하자’는 건데, 내 생각에 도대체 이 ‘사랑’이 모호하다. 물론 장 교수는 대한민국의 모든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소위 뉴라이트의 ‘대한민국주의’를 비판한다. 장 교수 입장에서 “뉴라이트의 대한민국주의는 제대로 된 애국주의”일 수 없다. 그 이유는 “비민주적이고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그 근본에서 부정하는 반-대한민국주의”이기 때문이다. 이런 진술을 토대로 유추했을 때, 장 교수가 말하고 있는 ‘애국주의’의 속성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민주주의’이다. 말하자면, 장 교수가 긍정하고자 하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 것이다. 아니 다른 말로 표현하면, 민주공화국이어야 한다! 
 
그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나라사랑이라는 당위명제가 사실명제로 별다른 증명 없이 자리바꿈하는 걸 목격할 수 있다. 그런데 장 교수가 문제제기하고 있는 그 진보적 민주주의자의 태도야말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말을 당위명제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장 교수나 진보적 민주주의자들이나 사실은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장 교수는 진보적 민주주의자들과 동일한 가치판단을 전제하고 있으면서 왜 다른 결론을 도출하는 것인가? 기본적으로 장 교수가 논리적 혼란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장 교수는 지금 두 가지의 당위명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어야 한다’는 명제와 ‘대한민국을 사랑해야 한다’는 명제를 아무런 고민 없이 그대로 치환해버리는 것이 장 교수의 논법이다. 장 교수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동원하는 하버마스와 로티의 실용주의적 관점들은 말 그대로 ‘실용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실정과 맞지 않는다. 하버마스가 유럽적 전통을 옹호하는 것이라면, 로티는 미국적 전통을 옹호하는 것이다. 그래서 각각 전자는 공화주의와 복지국가에서, 후자는 존 듀이의 이념에서 긍정적인 측면들을 추출한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이 근거하고 있는 이런 ‘시민사회의 상식’을 한국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시민사회의 상식은 도래할 것이지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버마스나 로티가 유럽적 전통과 미국적 전통에서 진보적 논의를 출발시키고자 하는 까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전통이 ‘인민’의 경험으로 ‘국가’에 축적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쁜 국가나 좋은 국가는 존재할 수가 없고, 국가는 초월할 수 없는 정치의 절대지평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장 교수의 고민은 이 지점에 맞닿아 있는 것이지만, 그의 주장이 힘을 얻으려면 애국주의에 대한 원론적 옹호와 ‘대한민국을 사랑하자’는 한국적 요구가 어떻게 서로 결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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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우리들의 대한민국’ 진보정치 토양 될 것 (한겨레, 신진욱/중앙대 교수·사회학, 2009-08-27 오후 08:56:36)
기고 ‘민주적 애국주의론’ 의의는 
 
<한겨레> 지상에서 ‘애국주의’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념 논쟁이 구체적 맥락에서 분리되면 도대체 왜 이 논쟁을 하는지 그 이유를 찾지 못하고 겉돌게 된다. 진보 진영에서 ‘대한민국’ 정체성 문제가 화두로 등장하게 된 내외적 맥락이 있다. 그중, 외적 맥락은 뉴라이트식 대한민국사 해석이 공식화되는 과정이다. 뉴라이트가 주도하는 역사담론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그것은 지배자의 역사다. 이들은 통치세력과 재벌, 엘리트가 주도하는 ‘대한민국 성공 신화’를 그린다. 독재와 인권 유린, 불평등은 질서유지와 경제성장을 위한 필요악으로 간주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민족적·국가적 경계의 해체다. 일본의 점령통치, 미국에의 종속 등은 결과적으로 이 나라의 경제 근대화에 이바지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무제한적 시장개방의 정당성이 도출된다. 이 두 가지 특징을 합치면, 명목적으로 대한민국의 주권자라고 하는 ‘국민’은 힘도 없고(정치적 배제), 집도 없는(정치공동체 해체) ‘고아’다. 
 
이와 같은 세계관과 역사담론에 대항해서 진보 진영이 오랫동안 동원해 온 정신적 자원은 저항 민족주의였다. 하지만 이런 ‘코리아 민족주의’의 관점은 점차 진보적 시민사회 내에서조차 낡고, 일면적이며, 폐쇄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왜일까? 87년 민주화 이후,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시민들의 정치적 정체성이 근본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 나라에는 이제 깨뜨려야 할 것만이 아니라, 또한 지켜야 할 많은 것들이 있게 되었다. 문제 많고, 살기 힘들고, 아직은 불완전하지만, 대한민국은 시민들이 함께 만드는 ‘내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정치적 자의식이 성장했다.
 
나는 이 새로운 정체성을 ‘애국주의’와 연관시키는 것에 무척 조심스럽다. ‘애국’은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에 국면적으로 결합되는 집단귀속감이지, 그것의 중핵이나 토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가 나(우리)의 삶의 무대며, 내(우리)가 주인 되는 공동체라는 의식은 여전히 정당하고 중요하다. 그것은 진보 정치가 민중적이면서 동시에 국민적인 세력이 되기 위해 굳건히 발 디뎌야 하는 토양이다. 그 땅에서 발을 뗀 선구자가 바로 식민지 근대화론자와 세계화 예찬론자들이었음을 잊지 말자.
 
규범적으로는 세계시민적 보편주의가 모든 특수한 정체성의 기초가 되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특수한 정체성이 보편적 가치의 생성과 실현을 위한 기초가 된다. 추상적 가치가 ‘내 삶의’ 실제적 원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그 가치의 의미를 구체화하고 실현할 ‘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집이 없는 세계시민은 우주 공간에서 부유하며 세계를 관조하는 존재와 같다. 우리가 ‘나라’라고 일컫는 공동체는 비록 정치적 삶을 살기 위한 유일한 무대는 아니지만, 매우 중요한 무대임에는 틀림없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시민들은 ‘대한민국’을 외쳤다. 2008년 촛불시위에서 시민들이 외친 것은 ‘함께 살자 대한민국’이었다. 대한민국이 ‘유기체’에서 ‘공동체’로 전환된 사건이다. 이러한 연대의식은 우리 역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4·19 혁명, 광주항쟁, 6월 항쟁의 역사적 순간에 사람들은 언제나 태극기를 휘날렸고,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을 태극기로 감쌌다. 이들은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고 조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들의 대한민국’이라고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미성숙한’ 시민사회를 유럽이나 미국의 ‘성숙한’ 시민사회와 대비시켜, 진보적인 대한민국 정체성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나는 아메리칸 징고이즘이나 게르만 내셔널리즘보다 한국 시민사회의 대한민국 정체성이 훨씬 더 건강하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역사 위에서, 시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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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탈민족주의 확산 본격 제동 나섰다 (한겨레, 이세영 기자, 2009-08-27 오후 08:58:11)
가을호에 앤더슨 저작 강도높게 비판한 글 게재
“상상의 공동체, 신자유주의·학문우경화에 일조” 
 
창비 진영이 탈민족주의 담론의 원류 격인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론’을 정조준했다. 지난주 출간된 <창작과 비평> 가을호를 통해서다. <창작과 비평>은 1990년대 말부터 확산되기 시작한 탈민족주의 담론에 대해 특집·논단 등의 꼭지를 통해 그 ‘현실적 공허함’을 이따금 지적하긴 했지만, 앤더슨의 저작을 겨냥해 직접 비판을 가하기는 처음이다. 창비의 달라진 행보 뒤에는 남북관계가 위기에 봉착하고 시장근본주의에 따른 사회적 부작용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탈민족 담론의 확산을 방치할 경우 자칫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노력이나 국가를 매개로 한 공공적 실천의 중요성을 망각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가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이런 창비의 문제의식은 ‘상상의 공동체론’을 논박하기 위해 게재한 라디카 데사이 캐나다 매니토바대 교수의 글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데사이 교수의 비판은 민족주의를 ‘문화적 구성물’로 보는 앤더슨의 시각과 그 안에 내장된 ‘유럽중심주의’에 맞춰져 있다. 민족주의의 내용은 “해당 사회의 경제적·정치적 과제들이 요구하는 바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실재임에도 앤더슨은 그것을 오직 문화적인 조성물로 간주할 뿐 아니라, 제3세계 민족주의를 아메리카와 유럽의 선행 모델에 대한 ‘표절’의 산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한층 견고한 유럽중심주의의 단면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물론 앤더슨의 민족주의 연구에 담긴 성과를 데사이 교수 역시 긍정한다. 민족주의의 기원을 19세기 중반의 유럽이 아닌, 18세기 후반 미국의 탈식민화 과정에서 찾음으로써 “민족주의를 언어나 종족 또는 다른 원초적 요인들에 의존해 설명하는 오랜 설명방식”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해줬다는 것이다. 하지만 데사이 교수가 볼 때 상상의 공동체론이 거둔 ‘성공’은 학술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인 것이다.
 
요컨대 <상상의 공동체>는 신자유주의가 제3세계를 경제적으로 재식민화하는 상황에서 “학문을 탈정치화하고 민족주의를 가당찮은 문화적 박식의 일부로 만듦으로써 학문의 우경화에 일조”하고 “진보정치가 민족문제를 중심으로 신자유주의에 반격할 필요가 절실해지는 중요한 시점에 민족주의 연구를 유럽중심적인 것으로 만들고 제3세계의 민족주의를 서구의 구성물로 규정해 그 정통성을 박탈”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데사이 교수는 <상상의 공동체>가 거둔 인기의 일부는 “신자유주의와 그것의 파생물인 ‘지구화’의 소산이었다”고까지 말한다.
 
이런 데사이 교수의 말은 창비가 앤더슨에 대한 비판을 통해 얻으려는 효과가 무엇인지를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신자유주의와의 ‘결과론적 공모’ 혐의를 추궁함으로써 탈민족주의 담론의 확산에 확실한 제동을 걸 필요가 있었다는 얘기다. 데사이 교수의 글을 발굴해 게재를 추천한 사람이 편집인 백낙청 교수였다는 점도 주목된다.
 
염종선 <창작과 비평> 편집장은 26일 “지난 3월 <아시아-퍼시픽 저널: 저팬 포커스>라는 해외 잡지에 실린 글을 백 교수가 발견해 번역게재를 추천했다”며 “편집위원들도 이 글이 탈민족주의 담론의 편향된 부분에 대한 교정 효과가 있다고 판단해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데사이 교수의 원문은 창비 영문판 누리집(www.changbi.com/english)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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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7 22:56 2009/07/27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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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M 2009/07/29 01:34

    애국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도 그렇고... 좀 더 포괄적으로 내놓으신 문제제기도 그렇고... 상당히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 같네요. ^^ 그러나 좀 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개념이란 기본적으로 현실적인 것들을 사후적으로 간명하게 포착해주는 도구일 것인데... 우리나라에선 반대로 개념을 너무 앞세우는 경향이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런 행태 자체가 개념들의 수입국으로서는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애국주의에 대해선... 개인적으로는 장은주 교수와 장석준 실장 사이엔 대립하기보다는 상호보완적으로 서로 상대방으로부터 흡수할 내용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자꾸만 이야기가 대립구도로 나아가는 것 같아 좀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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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벽길 2009/07/30 22:40

      저도 이쪽으론 잘 아는 게 아니라서요.^^ 다만 촛불에 많이 데어서 그런지 그것을 예로 들어 애국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더라구요. 당연히 상호보완적으로 보이지도 않고요. 근데 서로가 열어놓고 소통을 할 필요는 있을 듯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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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에밀리오 2009/07/29 08:49

    음... 그 보수라는 사람들 지극히 민족주의적 관점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진보진영 일각에서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소위 애국적 행위들이 보수의 그것과 사실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구요. 중요한 문제인거 같은데, 부차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더라구요 에휴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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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벽길 2009/07/30 22:42

      그 애국에 대한 관점이 작은 차이인 것 같으면서도 어떨 때 보면 근본적인 것 같기도 하거든요. 저야 비타협적이지는 않아서리 두루뭉실하게 넘어가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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