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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 위한 행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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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대체하기 위해 추진한 ‘5·18 기념곡’ 제정 사업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보훈처는 11월 말부터 5·18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5월의 노래’ 가사를 공모하겠다고 하고, 여론조사를 통해 이를 추진할지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하는 등 '임을 위한 행진곡'을 깔아뭉개는 행태를 보였는데, 결국 중단한 것입니다. 보훈처는 “5·18 단체들의 공모 유보 요청이 있었고, 여론과 국민정서 등을 고려해 추진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돼 이같이 결정했다”고 밝혔습니다.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나긴 했지만, 여전히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는 없습니다. 이런 논란까지 야기된 것은 그 만큼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겠지요. 내년이 30주년인데도 말이죠.
 
이 노래가 광주항쟁, 운동권의 노래로 협소화되는 것이 바람직하진 않지만, 그 의미가 희석되는 것은 더 문제인 듯 합니다. MB정부 하에서의 현실을 감안하면 대중성을 획득한다는 의미가 그리 크지도 않고요. 그래서인지 아직은 하림이 연주하고, 한대수가 노래한 [아가미] 앨범의 버전이 귀에 익숙하지 않고, 최도은의 버전을 거리에서 힘차게 부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림 연주/한대수 노래 - 임을 위한 행진곡

 

최도은 - 임을 위한 행진곡
 
관련해서 네이버 블로그에 올려놓았던 '임을 위한 행진곡' 소개 글을 옮겨옵니다. 

 

2008. 6. 9

서영은씨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네요. 저번에 어디서인지 모르겠지만 이 노래를 들었을 때 '서영은의 목소리와 비슷하기는 한데, 설마...'했었습니다. 그런데...
 
앞에 혼자서 부르는 부분도 괜찮고, 뒷부분의 힘찬 합창 및 악기반주와 함께 나오는 부분도 들을 만 합니다. 
 
아래 동영상에서는 지난 2008년 5월 31일에서 6월 1일 사이의 청와대 앞 가두시위와 관련된 영상과 함께 서영은의 임을 위한 행진곡이 흘러 나옵니다. 저도 이날이 역사적인 날이 될 듯하여 현장에서 날을 샜는데, 그렇게 시위대가 청와대 가까이에 가본 것은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2004/06/12 19:26

작년인가요? 5월 18일에 5.18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한 후 처음 열린 5.18추모행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연주되었던 것. 한총련 등의 시위로 노무현 대통령이 식장에 늦게 도착해서 파문을 일으켰었죠. 작년에는 군악대의 연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리워졌습니다. 이 노래를 나름대로 편곡해서 그렇게 부르니 조금은 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꼭 구 소련에서 인터내셔널가를 붉은 군대 합창단(Red Army Chorus)의 연주로 부를 때의 그 박제화된 느낌 말이죠. 물론 그 때의 인터내셔널가는 소련공산당가로 사용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올해 5. 18에서도 어김없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리워졌습니다. 그리고 총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젊은 국회의원들이 청와대 앞마당에서 당선을 자축하는 의미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샥스핀을 먹으면서이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주먹을 흔들면서 말이죠. 이 노래가 그렇게 공식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 나쁜 것인지 여부는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이게 운동권의 전유물인 것도 아니고요.
 
특히 올해는 김규항님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리고 이 글이 여기저기 퍼지면서 이 노래가 유명해졌습니다.

 

가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백기완 작시/ 김종률 작곡)

 

이 노래는 백기완선생의 [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1980년 12월)에서 가사를 따왔습니다. 원래의 시는 대략 이러합니다.

 

(상략)
무너져 피에 젖은 대지 위엔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리리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하략)

 

 

'임을 위한 행진곡'은 80년 5월 광주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82년 당시 광주지역에서 문화운동을 하고 있었던 황석영님이 구성하고 지하에서 제작 배포한 `자유 광주의 소리' 테이프에 실린 것으로, 5.18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하다가 27일 전남도청 회의실에서 서른 살의 나이로 전사한 윤상원열사와 그의 야학 동료로서 79년 겨울 노동현장에서 일하다 공장 옆 자취방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숨진 박기순열사 - 두 사람은 1978년 광주지역 최초의 노동야학인 ‘들불야학’의 ‘강학(講學)’ 출신입니다 - 의 영혼 결혼식을 내용으로 하는 노래굿 [넋풀이]에서 영혼 결혼을 하는 두 남녀의 영혼이 부르는 노래로 작곡되었습니다. 결혼식에 사용된 15곡 가운데 하나로 말미를 장식하는 노래인 '임을 위한 행진곡'은 진혼가(鎭魂歌)였던 것입니다.
 
이들을 ‘영혼 결혼식’으로 묶은 것은 소설가 황석영씨. 황씨는 1981년 여름 광주항쟁을 전국에 알릴 목적으로 문화선동대 ‘일과 놀이’를 조직하고, 그 아래 ‘자유광주의 소리’팀을 구성했다.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 결혼을 주제로 한 소리극 ‘넋풀이’를 카세트 테이프로 녹음하여 전국에 보급한 것이었다. ‘넋풀이’의 녹음은 광주 운암동 산중턱에 있는 황씨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그날을 이렇게 회상한다.
“보안상 녹음실을 사용할 수도 없어서, 술 먹고 친구들끼리 떠들썩하게 노는 척 하면서 녹음을 했지. 보통 일제 녹음기에 마이크를 꽂고 녹음한 게 원본 테이프야. 거기에는 우리 이웃집 개가 짖는 소리, 열차의 경적 소리까지 들어 있어.”
 
넋풀이의 마무리를 장식한 곡이 지금의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작사는 황석영씨가, 작곡은 1980년 ‘영랑과 강진’으로 제1회 대학가요제 은상을 차지했던 김종률씨(현 소니 BMG 뮤직 대표이사)가 맡았다.
“녹음날 전에 종률이가 기타로 멜로디를 들려줄 때, 떠오른 것이 백기완 선생이 고문 후유증을 겪으면서 썼다는 시 ‘묏비나리’의 한 구절, ‘산자여 따르라!’였어.” 원제목인 ‘산자여 따르라’는 83년 실제로 치러진 ‘영혼 결혼식’의 동참자들에 의해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변경된다.
( [민중가요의 발자취를 따라서] ① 임을 위한 행진곡, 열사의 넋을 기리는 영혼 결혼식, 대학신문, 최지원 기자, 2005년 09월 05일 15:57:44)
  
기타와 괭과리의 반주가 함께 어우러지는 분위기가 호탕하면서도 투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지금은 우리가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라고 부르는 마지막 구절이 원래는 '앞서서 가나니'였다는 점은 이 노래의 맥락을 짐작하게 합니다. 지금은 남아 있는 우리들이 주체가 되어 외치는 노래이지만, 원래는 두 영혼이 '우리는 앞서서 가니, 살아 있는 자들이여, 기운을 내어 뒤를 따르라'고 독려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다짐하는 내용이었던 것이죠. 곡 중에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는 가사 또한 원래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였다고 합니다. 

 

결국 80년 당시부터 불리워진 것은 아니고 82년경부터 보급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황석영 씨의 집에서 카세트 리코더를 이용해 녹음된 '자유 광주의 소리' 테입이 여기저기서 복제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는데, 수록되었던 노래 중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만이 살아남아서 지금까지 국가행사에 쓰일 정도로 파급된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를 영어로 번안해서 부른 것도 있는 줄 압니다. 필리핀 등지에서 불리워진다고 하더군요.

 

「임을 위한 행진곡」은 노찾사의 편곡에서도 보이듯이 원래 단조풍의 노래입니다. 노래굿에서도 그렇고요. 어쩌면 광주 대학살의 아픔과 패배감,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자괴감과 죄의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요.

 

하지만 이 노래가 현장에서 불리워지면서는 힘찬 투쟁가로 변모하였습니다. 80년대 초 광주항쟁의 패배감과 좌절감을 극복하고 승리의 의지와 투쟁적 역동성을 담아내는 노래로서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87년 6월항쟁 이후일 것입니다. 저 또한 단조풍으로 흘러나오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버전보다는 힘찬 최도은 님의 버전이 훨씬 더 와닿습니다. 물론 단조풍의 노래가 가슴을 적실 때도 있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87년 대선 당시 민중후보로 출마했던 백기완 선생의 로고송 비슷하게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백선생이 단상에 등장하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선동구호! "가자, 백기완과 함께! 민중의 시대로!" 그러면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서 함께 이 구호를 반복한 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고 합니다.
 
요즘은 민중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시민이 들어섰다. 그러나 나는 민중이라는 말을 좋아한다.그 뜨끈하고 울컥거리는 감동과 때로는 노도와 같이 휩쓸려가는 거대한 힘, 그리고 그 거대함속에 개인이나 개인이익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는 그 익명성의 단어를...
87년 6·29선언이 있고 나는 오 이럴수가 이렇게 좋을수가 이런 날이 오다니 노상 마음을 잡지 못하고 들떠있었다. 그해 겨울 양김과 또다른 김과 노태우씨 모두 대통령후보로 나선뒤, 마음이 허전하고 지리멸렬한 가운데 충동적으로 아이의 손을 잡고 동숭동 대학로의 민중후보 백기완 유세장에 갔다. 빼곡히 나무위까지 올라선 수십만의 젊은이들 틈에서 `가자 백기완과 함께 민중의 시대로' 외쳤을때의 감동과, 민중이라는 말이 뜨겁게 달구어내던 열기를 잊지 못한다. 그리고 결단에 찬 긴장감으로 장중하게 울려퍼지던 노래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아침햇발] 다시, 그 노래를 부르며, 김선주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2000-05-27)
 
제가 대학교에 입학한 것은 88년도였는데, 88년에 백기완 선생이 학교의 도서관 앞 광장인 아크로폴리스(백선생은 새뚝이마당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는데, 학내시위가 감소하면서 지금은 도서관 앞 광장으로 불리워질 때가 많습니다)에서 강연이라도 하려치면, 그 강연 시작 전에 어김 없이 그 선창과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러워졌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하나되는 느낌도 함께요..

 

지금은 무슨 민중의례를 할 때면 애국가 대신 당연히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릅니다. "민중의 영원한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을 힘차게 부릅시다!"라고 하면서요. 하지만 88년만 해도 민중의례를 할 때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이 당연하지는 않았습니다. 학생운동 진영만 해도 총학생회 출범식이나 집회가 있을 때 다른 노래를 불렀습니다. 물론 애국가는 아니었습니다. 무슨 노래였을까요? 민족해방가였습니다.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싸우고 또 싸워서 찾은 이 나라
쪽발이 앙키놈이 남북을 갈라
매판파쇼 앞세운 식민의 나라
이 땅의 민중들은 피를 흘린다
동포여 일어나라 해방을 위해
손 잡고 백두산에 해방기 휘날리자

 

술자리에서는 여기에 덧붙여 "손 잡고 광화문에 붉은기 휘날리자"라는 후렴구를 붙이기도 했던 것이 기억나네요. 암튼, 그랬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운동진영에 노동자 중심성을 강조하는 세력들이 힘을 얻게 되면서 그렇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민중의 사랑을 받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가 항상 애창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재작년 여중생 범대위에서 주관했던 촛불집회에서 이 노래가 거의 불리워지지 않았던 것이 기억나네요. 운동권들만 있으면 반미반전가, 퍼킹 유에스에이 등의 노래를 부르면서 온갖 과격하고 생경한 구호를 외치다가, 밤에 광화문의 촛불집회만 하면 1970년대의 분위기로 돌아가서 아침이슬, 광야에서 등을 부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조차 금기시하면서 참여의 수준을 후퇴시켜 놓고서는 대중성을 획득했다고 얘기되는 집회가 촛불집회였습니다. 그런데 올해 탄핵무효 촛불집회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자주 흘러나왔던 것으로 압니다. 같은 촛불집회라도 탄핵무효 집회가 더 왼쪽에 있었던 걸까요? 그래서인지 저는 여중생 추모촛불집회에 몇 차례 참여했지만, 재미도 없었고, 내용도 없어서 꾸준히 참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군요. 

 

노찾사 3집 - 임을 위한 행진곡

 

지난 3월 탄핵무효집회 때 촛불을 든 군중들에 의해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리워지는 것을 알았을 때는 좀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이 또한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의 일환이었기는 하였지만, 이 노래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잘 알고 있으며, 제가 이 노래를 부를 때 어떠한 마음이었는지를 떠올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적어도 광주와 윤상원 열사를 기억하는 이라면 신자유주의적 시장개혁의 선봉에 선 노무현 대통령을 구하려는 탄핵반대, 민주수호의 함성 속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나오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지 않았을까요?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반대, 노동자의 비정규직화 지지, 이라크 파병 고수 등 요즘 노무현 대통령이 말하는 발언을 보면 당시의 생각이 전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차라리 그 때 민중탄핵을 주장할 걸 그랬나 싶구요.  
 

뒤늦게나마 임을 위한 행진곡을 되뇌이면서 5월 광주의 마지막날 도청에서 산화한 동지들을 떠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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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8 15:33 2009/12/18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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