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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연합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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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거리가 있을 것 같은 큰판이 벌어지려고 하니 다시 때아닌 연합 논쟁이 촉발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논쟁에 대다수의 민중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 하지만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서는 이러한 연합 논쟁이 어떻게 정리되느냐가 사활이 걸린 문제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자유주의 보수세력이 해왔던 행태를 감안하면, 그리고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작금의 연합논쟁의 결론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진보신당 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건 그 만큼 맛이 갔다는 증거일 수 있겠다. 장석준 동지가 언급한 것처럼 진보의 재구성이 화제가 되었던 것이 불과 몇 년인데 말이다. 하긴 진보의 재구성도 어떤 사람이 어떠한 시각에서 전개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고집도 『진보의 미래』라고 제목을 붙여놓았지만, 그가 꿈꾸었던 진보의 미래가 내가 바라는 진보의 미래와 같은 것일지는 잘 모르겠다. 이게 단순한 정도의 차이 문제일까.
 
2010 <시사IN> 신년 강좌 "진보의 미래를 묻다"에서도 '진보의 재구성'을 강좌로 만난다고 하면서 6명의 강좌진을 꾸렸다. 이찬근 인천대 교수, 김윤태 고려대 교수, 정태인 경제평론가, 홍기빈 지구정치경제 칼럼니스트,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 이상이 제주대 교수가 나온다. 시사IN을 통해 '진보의 재구성'과 관련된 글을 썼던 이들이다. 이들이 과연 진보의 재구성을 대표할 수 있을까. 이들이 말하는 '진보의 재구성'에서 변혁의 가능성은 아예 배제되어 있다. 잘해야 그 이념적 지향이 사민주의에 불과하고, 그 왼쪽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더이상은 그 왼쪽의 가치를 추구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이들이다. 이렇게 대중화된 '진보의 미래'가 어떠할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진보재구성' 정치가 선거논리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장석준 동지의 주장이 의미있게 다가온다.
 
오늘자 중앙일보에는 '진보시대여, 안녕'이라는 제목으로 송호근 교수가 칼럼을 썼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지난 10년간은 100년 한국정치사에서 진보정치가 소용돌이를 일으켰던 이색적인 시대였으며, 진보의 설득력은 빛을 바래고 있단다. 그들의 재임기에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진보의 두 주역이었고, 민주당은 진보의 전초기지였다고 이야기한다. '진보의 재구성'이 이런 것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나름 지켜볼 수 있겠으나, 몇몇을 제외하고는 진보의 재구성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그러하지는 않는 듯하다. 그래서 연합 논쟁보다 제대로 된 진보재구성 논쟁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고...    
 
옆길로 샜다. 진보의 재구성론은 물론 연합 논쟁이라는 게 많이 불편하게 다가온다. 현실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할 뿐더러 최소한 내가 바라는 진보의 미래를 더 어둡게 하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심을 끄려 하는데도 그게 쉽지 않다. 그래서 레디앙과 프레시안의 관련글을 발췌해서 옮겨왔다. 이 중에서 서영표, 이대근, 장석준의 글을 추천한다. 물론 당연히 발췌량도 이들의 글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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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재구성' 정치, 선거논리보다 우선 (레디앙, 2009년 12월 28일 (월) 16:00:56 장석준 / 상상연구소 연구기획실장)
[연합 논쟁] "단기 정치 위해 장기 정치 희생시키지 말아야" 
 
요즘 범진보 진영의 뜨거운 쟁점은 진보대연합, 민주대연합, 반MB연대 등 이른바 ‘연합’의 문제다. 더 나아가 진보정당들의 ‘통합’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불과 2년 전인 2007년만 해도 범진보 진영의 화제는 ‘진보의 재구성’(이하 ‘진보 재구성’)이었다. 이제 진보 재구성 운운하는 논의는 사치스럽고 한가한 이야기 취급을 당한다. 그것은 한나라당 정권을 겪어보기 전 일일 뿐이고, 이명박 정권 때문에 신음하는 지금 상황에서는 어떻게든 최대 다수 연합을 만들어 비한나라당 정권을 만드는 게 우선 급하다는 식이다. 그러니 진보 재구성은 그 이후 과제로 미루고, 당장은 연합 혹은 통합을 고민하자?
 
이게 앞으로 2-3년 동안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길일까. 아니, 이게 바람직한지 아닌지는 차치하고, 도대체 일이 이렇게 풀려나갈 수 있는 것일까.
 
진보신당은 진보 재구성을 자신의 사명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렇다고 이게 진보신당만의 전유물일 수는 없다. 진보 재구성에 접근하는 서로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고, 따라서 여러 정치 세력이 진보 재구성을 얼마나 잘 실현하는지를 놓고 서로 경쟁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적어도 진보 재구성을 목표로 내세우는 한, 그 정치 세력의 시야는 여태껏 한국 정치 체제가 강요하던 것보다는 훨씬 더 먼 곳을 향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진보 재구성은 앞으로 지속될 지구 자본주의의 혼돈을 헤쳐 나갈 힘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것은 상당한 시간을 요구하는 과업이다. 더구나 한국의 경우는 진보 세력이 그간 걸어오던 길을 그 방향에서 계속 걸어가기만 하면 될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교육, 주거 등 생활 문제에서부터 금융, 국제관계 등 거시 쟁점에 이르기까지 대중의 신뢰를 받으면서 동시에 한국 사회의 진로를 크게 바꿀 정책과 전략들을 구비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전을 대중적 명망을 지닌 집권팀으로 육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더구나 이 집권팀은 중앙의 몇몇 장관직 정도나 채울 일개 소대 병력이 아니라 지역 곳곳과 대중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칠 군단 규모여야 한다.
 
정치세력의 형성은 사회적 지지 기반의 구축과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단순히 득표 기반을 늘리는 수준을 넘어서 조직된 대중의 힘이 필요하다. 사회 변화를 꾀하는 정치세력으로서는 단순히 기존 국가기구만으로 정책을 집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양한 대중운동이 집권의 공동 주체로서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
 
이 점에서 노무현 정권의 실패 경험은 더없이 좋은 반면교사다. 노 전 대통령 자신 이를 절감해서인지 유고의 결론 부분에서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 힘이 ‘무엇에 맞선’ 것인지는 여전히 분명하지 않다. 이것은 그가 마지막까지 넘어서지 못한 한계다. 우리는 그에게 그 답을 말해주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자본의 거대 권력에 맞설’ 깨어 있는 조직된 힘이라고.
 
그럼 도대체 이 힘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질 수 있을까? 중단된 노동운동의 전진을 다시 시작하는 데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현재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가로놓인 골을 넘어서 공동의 꿈과 연대감을 형성해야 한다. 민주노조 투쟁을 경험한 기성 노동자들과 앞으로 노동자가 될 젊은이들이 서로 대화하고 연대해야 한다. 그래서 비로소 한국 사회 노동‘계급’의 실체를 등장시켜야 한다. 이런 노동운동의 힘이 중심에 버티지 않는 한, 다른 국지적 시도들만으로는 결코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없을 것이다.
 
도대체 이런 일들이 일, 이 년 안에 가능한 것이겠는가. 아무리 한국 사회가 역동적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10년 정도의 시간은 필요할 것이다. 아니, 보다 정직하게 말하면, 그 이상의 시간을 요할 가능성이 더 높다. 진보 재구성의 시간 지평이 이러하다. 따라서 진보 재구성을 추진하겠다는 정당이라면, 이 정도 시간 지평을 바라보며 자신의 프로그램을 묵묵히 추진해가야 한다.
 
그런데 최근 대세인 각종 연합 및 통합 논의들은 이것과는 완전히 다른 시간 지평을 전제한다. 이들이 염두에 두는 것은 다음 번 선거, 다음 다음 번 선거의 시간 지평이다. 이들 선거에서 한나라당을 패배시키고 결국에는 다음 정권을 한나라당 아닌 정권으로 만드는 게 과제다. 진보 재구성에 비해서는 확실히 단기적인 시야이며, 따라서 훨씬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으로 보인다.
 
작금의 연합 및 통합 논의들은 이 단기 시간 지평을 정치적 고려와 선택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럴 경우, 차기 혹은 차차기 선거에 승리할 가장 효과적인 세력 결집과 배열에 도달하는 게 가장 바람직한 일이 된다. 이게 진보정당 무조건 통합론이고, 민주대연합론이다.
 
그런데 이것은 필연적으로 진보 재구성이 요구하는 장기 시간 지평의 정치를 희생시킨다. 매번 다음 선거 승리를 위해 이합집산을 거듭한다면, 5년, 10년 뒤를 내다보며 묵묵히 자신의 프로그램을 실천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단기 시간 지평을 중요시하다 보면, 장기 시간 지평은 사라지고 단기 시간 지평의 연속적인 매듭만 남게 된다. 이 경우 10년의 시간은 2년마다 찾아오는 선거 정치의 시간이 5번 반복되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10년이 지난 뒤라도 한국 정치는 분명 지금의 한국 정치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거대 보수 양당이 권력을 주고받는 것도 현재 모양 그대로일 테고, 이와 함께 사회 세력들 역시 현재의 정체와 교착 상태를 이어갈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태로 한국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혼란스럽게 격동하는 지구 자본주의 질서에 마주해 있을 것이다. 이명박, 박근혜 수준의 정치가들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선택지만을 제시하고 있을 테고, 한국 정치는 지구적 수준의 위기에 속수무책이리라. 나침반도, 키도, 선장도 없이 폭풍을 마주한 배, 그것이 한국호의 모습일 것이다. 결국 대중의 삶만 지금보다 더 고통스러워질 게 뻔하다.
 
이런 어리석음을 범할 수는 없다. 한국 정치의 주류가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의 선택을 반복한다 할지라도, 모두가 다 여기에 부화뇌동해서는 안 된다. 단기 시간의 정치를 위해 장기 시간의 정치를 희생시키지는 말자. 선거만이 아니라 시대를 내다보고 이에 답하는 정치를 만들어가자. 이것이 곧 진보 재구성이라는 애초의 올바른 문제의식을 대중 정치로 살려낼 유일한 길이다.
 
미래 집권팀과 사회적 지지 기반을 형성할 전략이 서로 다르다면, 당을 달리 하는 게 맞다. 저마다 정치 실험을 지속하면서 서로 경쟁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리고 그 성과를 놓고 그 때 그 때 대중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진보 재구성은 이렇게 서로 다른 프로젝트가 경쟁함으로써 보다 역동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따라서 진보정당 무조건 통합론은 답이 될 수 없다. 진보신당 내 대다수가 과거 민주노동당의 분열을 낳은 이 당의 특정 경향과는 집권팀을 함께 구성할 수 없다고 확신하는데, 어떻게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두 당의 단순 통합이 가능하겠는가. 이것은 여전히 민주노동당에 아무 문제도 없었다고 믿는, 민주노동당 내 상당수 흐름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한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흐름이나 사회당에게 자신의 프로젝트를 포기하고 통합정당의 한 분파가 되라는 것 역시 무례하고 무리한 공세일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연합전선’의 가능성과는 별개의 문제다. 서로 다른 당들이 공동 행동을 모색하는 연합전선은 지금도 충분히 가능하며, 또한 필요하다. 지금 진보 진영에게 필요한 것은 진보정당 무조건 통합론이 아니라 바로 이 연합전선 논의를 활성화하고 이것을 실현시키는 일이다. 연합전선은 전혀 생소한 정치 현상이 아니다. 이것은 진보 좌파 정치에서 아주 고전적인 정치 행위다. 이탈리아에서는 1990년대부터 범진보 세력이 ‘올리브 동맹’이라는 연합전선을 만들어 선거에 뛰어들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어느 나라든 진보 정당, 정치조직들이 수십 개가 되지만, 이것이 분열로 매도당하지 않는다. 이들이 서로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광범한 연합전선을 형성해 현실 정치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례로는 우루과이의 현 집권당인 확대전선을 들 수 있다. 이 조직은 사실은 사회당, 민중참여운동, 공산당 등 여러 개의 정당, 정치조직들의 연합이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확대전선이라는 연합전선을 통해 선거에 대응한다. 물론 우루과이의 독특한 선거 제도 때문에 이런 조직 형태가 가능한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참신한 참고 사례임에 분명하다.
 
한국의 경우에도 지금 필요한 것은 진보 정당, 정치조직들이 복수인 것을 인정하고 이들 사이에 연합전선을 활성화화는 일이다. 자본 권력에 맞서 싸우는 세력들이 연합전선을 결성해야 한다. 여기에는 단지 진보신당, 민주노동당, 사회당뿐만 아니라 앞으로 건설될 예정인 사회주의노동자정당까지 함께 해야 한다. 연합전선의 각 당들은 주요 당면 과제에 대해 일상적으로 협의하고, 필요한 경우 공동 실천을 벌일 것이다. 물론 공동 실천 목록에는 선거 대응도 포함된다.
 
이 대목에서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연합전선을 할 거라면 왜 당을 함께 하지는 못하는가? 이 물음에는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다. 연합전선이란 게 애초에 당이 다르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서로 공통점도 있지만 또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차이도 존재하기 때문에 당을 달리 하는 상황에서, 경쟁을 전제로 한 협력을 모색하는 게 연합전선의 정치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딱 이렇지 않은가.
 
게다가 연합전선이 당을 함께 하는 것보다 결코 ‘하등한’ 정치 행위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연합전선이 급조된 당보다는 여러 모로 훨씬 바람직하다. 과거 민주노동당처럼 급조된 당 안에서는 모든 중요한 차이와 경쟁이 당 내 파벌 정치로 귀결된다. 이것은 대중의 시야 바깥에서 이뤄지는 가장 불건전한 정치 행위다. 이런 행위를 반복하면서 성장한 정치 세력은 파벌 정치의 능력만 과잉 발달하게 된다.
 
반면 연합전선의 정치에서는 차이와 경쟁이 당과 당 사이의 협상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대중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공개 정치이고, 그 심판자는 결국 여론이다. 연합전선 내의 협상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대중 정치이고, 이런 정치 행위의 반복은 연합전선 참가 세력들의 집권 및 사회 변혁 능력을 강화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런 협상 정치를 반복하는 가운데, 하나의 당으로 발전적으로 통합할 가능성이 높아질 수도 있다. ‘통합’은 이런 노력의 시간 뒤에야 비로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우선 해야 할 것은 제대로 된 연합전선을 실천하는 일이다.
 
요즘 이야기되는 ‘진보대연합’론이 바로 이러한 연합전선의 구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반MB연대를 이야기하는 ‘민주대연합’론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이 둘은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는 구상들이다. 물론 진보대연합 노선과 민주대연합 노선이 서로 경쟁한다 할지라도, 어떤 상황에서는 둘 사이의 대화와 협력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특정한 국면에 아래로부터 대중의 요구가 빗발친다면, 한시적인 협력의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반드시 확실히 해야 할 게 있다. 선거 대응이라는 단기 정치를 위해 장기 정치의 목표와 전망을 희생시키는 게 아니라 반대로 철저히 후자를 위해 전자를 활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단기 시간 지평의 대응을 장기 시간 지평의 정치를 추진하는 한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선거 정치는 진보 재구성의 정치에 종속되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게 의제를 중심으로 한 대화와 협력이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 첫 반응은 대체로 비웃음일 것이다. 대개 다음과 같이 반문하며 콧방귀를 뀔 것이다. “한국 정치에서 의제가 뭐가 중요하냐, 후보(혹은 힘, 혹은 실리 등등)가 중요하지.” 하지만 우리가 하자는 게 바로 그러한 정치판을 바꾸자는 것이다. 이미지 경쟁과 이합집산만이 판치는 한국의 선거 정치에서 의제가 대중의 관심사로 떠오르는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런 상황이 예외적인 게 아니라 일상적인 것으로 정착될 때 진보 정치의 전반적 성장도 가능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단순히 선거의 게임 논리에 따라서 후보 단일화만을 이야기하는 ‘민주대연합’론에 강력히 반대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 그런 유혹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첨예한 의제들을 공개적으로 논의, 협상하고 그 합의에 따라 정치 행위를 펼치는 것만이 진보 세력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다.
 
의제에는 제한이 없어야 한다. 지방 선거가 가깝다고 해서 지방 정치와 직결된 의제만 논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지방 선거는 한 계기일 뿐, 앞으로 한국 사회의 방향을 결정할 과제들을 확인하고 그 과제들을 해결할 주체를 형성하는 게 목표라면, 한국 사회의 바람직한 변화와 관련된 모든 사안들을 쟁점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2009년 8월에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가 묻지마 반MB연대가 아니라 반MB ‘대안’ 연대여야 한다며 제시한 정책 합의 기준들이 여전히 중요하다. 그것은 “(1) 비정규직 문제 해결 - 기존 기간제보호법 및 파견법 폐지와 기간제 사용 사유 제한 도입, (2) 복지 확대 - 부자 증세와 실업부조제도 도입, (3) 토건국가 해체 - 4대 강 살리기 사업 저지와 토지 및 주택 공개념 도입, (4) 독일식 비례대표제 도입”이었다. 노 대표는 12월 16일에 “진보진영의 전면적 선거연합”을 제안하는 기자회견에서는 “노동시장 유연화 반대, 한미 FTA 저지, 고교 및 대학 평준화를 통한 교육대혁명, 무상의료 확대, 대선 결선투표제와 총선 비례대표제 전면 도입 등”을 공동 강령의 내용으로 제시한 바 있다.
 
하나같이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들이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과 한미 FTA 저지 등은 지난 시기에 ‘민주’ 정권들이 잘못 했던 것을 반성하고 시정하는 핵심 조치들이다. 교육대혁명, 무상의료 확대, 토지 및 주택 공개념, 실업부조제도 도입 등은 앞으로 우리가 건설해가야 할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를 놓는 일이다. 그리고 대선 결선투표제와 총선 비례대표제 전면 도입은 민주화 이후 오히려 민주주의를 퇴보시켜온 정치제도들을 혁파하자는 것이다. 이들 중 대부분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의 유고 『진보의 미래』 에서 참여정부의 대표적인 오류와 한계였다고 회고한 것들이기도 하다.
 
이런 걸 공동의 과제로 논의하고 합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생경한 이념의 뒤를 따르자는 게 아니다. 전 정권의 최고 책임자가 전 정권의 가장 커다란 한계였다고 스스로 인정한 내용들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단지 한나라당 아닌 정치인이 단체장에 당선되고 국회의원이 되는 일이 아니다. 얼어붙은 대중의 열정을 다시 깨워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시대가 바뀌고 있다는, 새로운 시대가 움트고 있다는 메시지뿐이다. 온갖 고상한 수식어로 치장한 선거 정치의 게임의 논리는 그런 메시지가 될 수 없다. 의제에 바탕을 둔 경쟁과 협력만이 그런 메시지의 발원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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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만 정의로운가? (프레시안, 정상호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2009-12-20 오후 12:57:43)
[기고] 노회찬 대표의 정세 인식에 대한 비판 
 
지난 주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내년 지방선거에 대비하여 '민주당을 뺀 진보대연합'을 제안하였다. 이를 보고 한국정치 전공자로서 적지 않게 당황하였다. 거기에는 평소 존경하여왔던 소신에 찬 정치인이자 내년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 예비 후보로서 자격을 의심하게 만드는 부적절한 상황 인식과 적지 않은 논리의 오류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첫째, 노회찬 대표의 발언은 연합정치의 원칙과 정신을 훼손한 정파적 분열정치의 소산이다. 아무리 읽어봐도 '대연합'에 걸맞은 정치주체를 찾아낼 수 없었다. 진보신당은 누구와 정치연합을 하겠다는 것인가? 정치학 교과서에서 대연합(grand coalition)은 이념적 유사성에 근거한 소연합과 달리 다소 이질적 정치세력간의 느슨한 연대를 상정한 개념이다. 대연합은 A에서 Z에 이르는 모든 항목의 엄격한 최대 강령의 완전한 사전 협약(pact)이 아니라 최소한의 합의에 근거한 다수 정당들의 느슨한 연대를 추구한다. 노회찬 대표의 주장은 민주대연합이든 진보대연합이든 연합정치가 아니라 비타협 노선의 선명한 진보를 주창하는 독자 노선의 천명으로 독해될 수밖에 없다.
 
둘째, 노회찬 대표의 발언을 읽다보면 마치 과거 공안검찰의 기소문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노 대표는 민주당을 배제해야 한다는 논리적 근거로서 양극화를 초래한 민주정부 10년의 과오를 준열히 꾸짖고 개과천선하지 않으면 진보의 자격을 영구히 박탈할 것이라 위협하고 있다. 노 대표의 말대로 민주정부 10년은 정치적ㆍ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된 10년이었다. 그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과(過)이자 한계였으며,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세력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문제를 보다 솔직하게 구조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진보개혁세력의 총체적 역량과 지혜의 부족에 본질적 원인이 있다. 그렇게 본다면 진보정당과 진보지식인, 노동운동을 비롯한 진보진영은 상대방에게 일방적 사죄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함께 성찰하는 자세로 국민들에게 임해야 한다.
 
솔직히 말해 진보정당의 분열이 노무현 탓인가? 보수언론인 조갑제가 민주화운동세력에게 좌경용공세력이라고 몰아붙이는 것과 함께 진보운동을 하였던 오랜 동지들에게 종북주의라는 주홍글씨를 붙이고 분당하는 것 사이에 어떤 도덕적 차이가 있을까? 민주노동당이 진보신당과의 합당의 전제 조건으로 분당 당시 종북주의 논쟁을 제기한 정치적ㆍ도의적 책임을 묻는다면 연합정치가 가능하겠는가? 연합정치의 기본 정신과 원칙은 우리만이 옳았다는 과거의 정당성이 아니라 그래도 척박한 현실보다 조금은 나아질 미래의 희망에 대한 공유이다.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지 못한 소수 정당으로서 연합정치는 단기적으로는 독자적 노선 추구의 걸림돌이 되거나 거대 정당에 유리한 안전장치가 될 확률이 크다. 더구나 연합정치를 제도적으로 가능하게 만들 비례대표제가 부실하고 타협의 문화와 경험의 축적이 허약한 한국의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원칙과 가치의 정치를 추구하는 진보신당이나 노 대표의 입장에서 연합정치에 적극 나서지 못하는 이유 또한 헤아릴 수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정희 의원의 주장처럼 지방선거 이전 진보정당의 1단계 통합이 더더욱 필요하다. 지금 당장 착수해야 할 것은 민주대연합을 가능하게 만들 여건 조성과 구체적으로 이를 실현할 공정한 후보선출 방식 등의 제도적 고민이다.
 
연합의 원칙과 참여의 범위는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의 정파에 의해 선언되거나 통보되는 것이 아니다. 정치연합이 추구해야 할 원칙과 가치, 참여의 범위와 후보 또는 정부 구성 방식 자체가 협상의 가장 중요한 의제이며, 그것은 참여자들의 합리적 소통과 토론을 통해 구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연합정치는 지고지순한 순혈주의나 계급정치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타협과 협상의 산물이다. 정치인으로서 당면한 현안으로 부각된 연합정치에 대한 당과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정치적 활동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론의 집약을 걸친 민주적 과정이자 상대방을 고려한 신중하고 사려 깊은 결정이어야 한다. 어쨌든 이왕 제기된 이상 연합정치의 가치와 방식에 대한 보다 개방된 사회적 공론화가 이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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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 '쪽수 대연합론자'의 자기도취 (프레시안, 서영표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사회학), 2009-12-22 오후 4:55:00)
자유주의 10년 정권의 오류를 진보진영이 분담하라고?
 
지방선거를 앞두고 거세지고 있는 '진보대연합'에 대한 논의는, 그렇지 않아도 제도정치와 미디어 정치에 익숙해지고 있는 진보신당의 주류적 흐름에 독이 될 가능성이 있다. 결국 민주노동당 등 진보정당들 사이의 진부한 노선투쟁이 재연되고 민주당과 국민참여당과의 선거연합이 정치의 모든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자신의 노선을 실현할 사회적 토대를 가지지 못한 진보정당들 사이의 노선투쟁은 차이만을 확인하는 지루한 공방일 수밖에 없으며, 민주당/국민참여당과의 선거연합 논의는 반(反)이명박 전선이라는 '근시안적' 상황인식을 넘어서지 못하게 할 것이다.
 
정상호 교수의 주장은 진보신당으로 하여금 최악의 길을 가기를 요구하고 있는 바, 그의 입장을 거꾸로 읽으면 역설적으로 진보신당이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정 교수의 논지는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1987년 이후 지겹도록 들어 온 '비판적 지지론'의 변형된 판본이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진보신당이 연합정치의 원칙을 저버렸다고 주장한다. '연합'은 모든 것을 합의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합의에 근거한 느슨한 연대이어야 하는데, 진보신당의 주장은 "비타협 노선의 선명한 진보를 주장하는 독자 노선의 천명"이라는 것이다. 교과서에 그렇게 적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정 교수의 주장은 연합의 형식은 지적했지만 내용은 말하지 않았다. 정작 중요한 것은 연합의 내용에 있음에도 말이다. 우선 정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최소한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 일단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은 놔두기로 하겠다. 사실 그의 관심은 두 당의 통합에 있지도 않다.
 
문제는 진보신당(그리고 민주노동당)이 자유주의자들과 가질 수 있는 합의 지점이 무엇인가이다. 진보정당에게 대연합을 제의하면서 원칙 고수를 꾸짖으려면 최소한의 '진보'를 내보여야 한다. 그런데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의 진보란 무엇인가? 고작해야 '반이명박'과 '반한나라당'을 넘어서지 못한다. '4대강 정비사업'과 '언론법 개악'에 반대하는 것을 '진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에 반대하는 근거에 있다. 이 점에서 최소한 원칙상 진보신당의 입장은 분명하다. 진보신당 '당헌 전문'은 "진보신당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남성 지배 체제와 생태 파괴 문명을 극복하고 평등, 생태, 평화, 연대의 새 세상을 열고자 한다. 진보신당은 이제까지의 진보운동의 성과를 계승하면서도 시대에 어긋난 낡은 유산들은 과감히 쇄신할 것이다. 진보신당은 한국 사회의 근본 변화를 위해 새로운 진보의 길을 열어가는 정당이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10년간의 자유주의 정권은 진보신당이 제시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정권들이었다는 데 있다. 새만금과 방폐장 건설에게 드러났듯이 반생태적이었으며, 시장만능주의를 사회 곳곳에 유포함으로써 불평등과 빈곤을 양산했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축소했으며 국제관계를 핑계 삼아 부도덕한 전쟁에 파병했다. 당헌에 명시되어 있는 진보신당의 입장에 비추어 보면 자유주의 정권과 이명박 정권은 차이만큼이나 공통점도 많이 가지고 있다. 자신의 의지를 몰라주는 국민을 탓하는 대통령과 정치인들의 오만한 태도도 닮은꼴이다. 결국 그들이 말하는 '반이명박'과 '반한나라당' 투쟁은 진보와는 거리가 먼 정권을 둘러싼 정치투쟁을 벗어나지 않는다.
 
백번 양보해서 이명박 정부의 민주주의적 퇴행이 도를 넘어서고 있는 상황에서 반이명박 투쟁이 어느 정도의 진보성을 띤다고 해도 정 교수의 태도는 너무나 자기중심적이다. 연합의 기준은 연합에 참여하는 세력이 무언가 이득을 얻을 때 가능한 것인데, 현 정세에서 반이명박 투쟁에 참여함으로서 진보세력이 얻을 수 있는 '득'이 무엇인지가 불명확하다.
 
현재 자유주의 세력이 보여주는 정도는 기껏해야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정비 사업의 예산 편성을 저지하거나, 야당 정치인에 대한 비리수사를 표적 수사로 반비판하는 정도에 머물고 있다. 어떤 비전과 원칙 아래서 이명박 정부에 반대하는지가 불명확한 것이다. 민주당은 이명박과 결탁된 지역 토호와 개발자본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민주당은 온 나라를 탐욕스럽고 자기 파괴적인 경쟁으로 몰아넣은 시장만능주의에 대해 얼마나 비판적인가? 민주당은 국민에게 스스로의 주장을 개진하게 하는 참여 민주주의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지 못한 정치세력이 대연합을 주장하는 것은 진보의 원칙이 아닌 쪽수로 자신의 옳음을 강변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국민들은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이 실력으로 4대강 정비사업을 저지하고 이명박 정부에 대한 대안세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면 진보정당은 사안에 따라 그들을 지지하면 된다. 너무나 다른 원칙과 전망을 가지지만 4대강 정비사업에 대한 반대에는 동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진보정당에 대해 이렇게까지 '친절한 배려'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정 교수는 원칙도 내용도 없이 민주당을 따라오라는 오만한 다수파의 논리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약간의 과장을 허용한다면 자유주의의 정권들은 이명박 정부 출범의 초석을 닦아 놓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러한 책임에서 벗어나는 정 교수의 논리가 참으로 궁색하다. 그는 정치적·사회적 양극화의 책임이 일차적으로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세력에게 있다고 말한 후 얼버무린다. 분명 진보세력은 자기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반성을 촉구하는 주체가 잘못되어 있다. 10년 동안의 자유주의 정부 시절 진보세력은 자유주의 정권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비판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고 보수파와 진보적 의제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그리고 시장맹신주의를 자연스럽게 수용했던 자신들의 오류를 비판세력에게 분담하자는 것이 아닌가?
 
정 교수를 비롯한 자유주의자들은 과거의 오류를 덮어둠으로써 자신들만이 옳다는, 자신들을 중심으로 대연합을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기도취'를 반복한다. 또한 진보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 꿈꾸는 미래의 희망을 공유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그들이 꿈꾸는 미래의 희망이 무엇인지가 불명확하다. 대북관계와 몇몇 절차적 민주주의의 퇴행을 제외한다면 그들이 과거에 보여주었던 '희망'은 이명박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제 다르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보여주지 못한다. 아니 없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20년간의 배반의 역사는 그들의 진보의 희망은 결코 우리의 것과 같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진보정당은 그 어떤 정치세력보다 앞장서서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고 투쟁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명박 개인의 통치스타일과 그를 둘러싼 정치집단을 대상으로 한 비판과 투쟁이 아니라 그들을 집권하게 했고 이 정도까지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통치할 수 있게 만든 한국의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이며 투쟁이어야 한다.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정권을 교체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진보정당은 사회구조에 대한 총체적 비판을 원칙으로 사회 곳곳에서 생겨나는 민중의 불만과 저항이 스스로 조직화되어 자기 목소리를 내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투표장의 민주주의, 국회의사당과 지방의회의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급진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이다. 진보신당은 이러한 입장을 확인했을 뿐이다. 이 원칙에 동의하는 정치세력과 연합을 마다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이것을 '연합정치의 원칙과 정신을 훼손한 정파적 분열정치의 소산'으로밖에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은 자유주의자들이 꿈꾸는 진보는 내용이 텅 비어 있는, 전혀 진보적이지 않는 '진보'임을 증명해 줄 뿐이다.
 
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과의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후보조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선거 때만 되면 나타났다고 사라지는 그런 정당이 아니라 지역에 뿌리 내리고 있는 사회운동과 공동체운동으로부터 신뢰를 얻는 뿌리 내리기 작업에 함께 해야 한다. 이 길은 정상호 교수가 요청한 정치집단 간의 이합집산, 즉 좁은 의미의 연합정치가 아니라 평범한 시민을 정치의 주체로 세우는 넓은 의미에서의 연합정치일 것이다. 이것이 진보진영의 원칙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이제 정상호 교수가 주장하는 "독점과 배제"가 아닌 "소통과 협상"의 정치를 보여주어야 한다. 남의 원칙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원칙을 확인하고 공통분모를 찾는 노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준엄한 자기비판이 결여된 대연합의 제기는 소통과 협상의 출발점인 진정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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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뜨거운 칼럼'을 쓰다 (레디앙, 2009년 12월 23일 (수) 09:27:49 레디앙 기자)
"MB 시대, 민주-반민주 구도 유효"…연합논쟁 기폭제 될까?
 
그는 <한겨레> 23일자 칼럼 ‘민주-반민주 대립구도와 오늘’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오늘 스스로 민주를 표방하는 세력이라면 적어도 ‘연합’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실천해야 한다”며 “그러지 않는다면 민주의 자격이 없다고 말해야 할 만큼 엄중한 때라는 점을 지방선거가 있는 2010년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홍 위원은 칼럼을 통해 “현 집권세력이 ‘잃어버린 10년’을 말했을 때 우리는 그 참뜻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게 아닐까?”라고 자문하고, 이 말은 현 집권세력이 “다시 반민주세력의 시대로 되돌아갔다는 선언이었다는 점”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만약 그렇다면 민주-반민주의 대립구도는 오늘날에도 버젓이 살아있는데, 민주세력은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민주-반민주 대립구도에서 스스로 벗어나 무장해제한 셈이 된다.”고 말해 민주-반민주 구도를 ‘철지난 옛 노래’로 정의하는 시각과 다른 입장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오히려 용산참사, 4대강 사업 밀어붙이기, 언론 관련법 밀어붙이기, 세종시 뒤집기, 전교조·공무원노조 등 민주노조 죽이기, 비판·반대세력에 대한 철저한 배제 등 거듭되는 반민주적 통치 행위는 한편으로 시민사회가 민주-반민주의 대립구도에서 스스로 벗어났기 때문에 큰 저항 없이 관철된다고 말할 수 있다.”며 민주대연합 전선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는 이와 함께 민주-반민주 구도가 설정됐다면 ‘대학생들의 강력한 저항’과 ‘노동계의 저항’이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져 시민사회의 연대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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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당 해체, 민주당 분파하라 (레디앙, 2009년 12월 23일 (수) 15:46:57 정상근 기자)
정파적 분열정치…함께 성찰해야 
민주연합 vs 진보연합, 담론 전쟁…"진보양당 내홍 가능성"
 
이정희 의원은 18일 <오마이뉴스> 기고에서 “민주대연합까지, 다 열어놓고 의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를 넘어선 더 큰 연대가 필요하면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하고 흔연히 우리 스스로를 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진보의 임무는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를 실현시키기 위해 헌신하는 것”이라며 “민주노동당이 가지고 있는 더할 나위 없는 장점은, 거름으로 썩어가도 누군가가 나를 딛고 올라서 더 잘 할 수 있다면 기꺼이 자신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의원은 “지역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서울을 비롯한 주요 지역에서 국민들의 요구는 민주당과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을 비롯해 모든 정치세력과 시민의 힘을 모으라는 것”이라며 “공정한 경쟁의 기준은 함께 만들어갈 수 있으며, 2012년 총선, 대선까지 국민들과 사이에 확고한 믿음을 쌓아나가는 단단한 연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종철 진보신당 대변인은 22일 <오마이뉴스>기고를 통해 “국민의 정부가 조금 모습을 바꾸거나, 참여정부가 이름을 바꿔 부활하는 것이 진보정당이 꿈꾸는 세상은 아닐 것”이라며 “이미 2007년 심판받았던 정권을 복원하기 위해 우리가 국민에게 ‘반MB연합’을 하자고 한다면 이만큼 황당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반박했다. 그는 이어 “‘반MB’로 모두 뭉쳐야 한다가 아니라, 어떤 내용으로 ‘반MB’를 할 것인가에 대한 진보정당다운 기준과 원칙이 있어야 한다”며 “이러한 기준도 없이 ‘현재 어떤 내용이나 원칙보다 중요한 것은 무조건 이명박 정권 극복’이라고 한다면 정말 당황스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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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민주연합' 주장, 당내 파장? (레디앙, 2009년 12월 24일 (목) 02:20:10 정상근 기자)
말 아끼는 분위기 속 "당론 위배 아냐"…후보들 "무조건 반MB 반대"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이 18일 <오마이뉴스> 기고에서 “‘민주대연합’ 까지 열어놔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당내 파장이 주목되고 있는 가운데, 주요 당직자들은 말을 아끼며 비교적 조용한 모습이다. 이미 출마 의사를 밝힌 민노당 후보들의 경우 “무작정 ‘민주대연합’은 안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의원의 주장대로 ‘희생’으로 점철되는 민주대연합에 대해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다만 후보들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이 있으면 민주대연합까지 열어놓고 논의할 수 있다”며 ‘민주대연합’의 문을 닫아놓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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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민주 대 시장독재 대립 구도" (레디앙, 2009년 12월 24일 (목) 11:50:46 이창우 / 진보신당 부산시 선대본부장)
[기고-홍세화 선생님께] "민주-반민주 주장 진일보 측면 있으나…"
 
홍세화 선생님이 어제 한겨레 칼럼을 통해 민주-반민주의 대립구도를 재정립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제가 이해하는 구도는 '민생' 민주-시장독재의 대립구도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민주의 문제는 반독재 민주화라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 심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10년간 집권했던 민주화세력은 신자유주의 시장독재체제에 투항함으로써 사회양극화를 부채질했습니다. 스스로 불러들인 시장적 가치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되면서 민주화세력은 무능 세력으로까지 낙인찍혔고, 결국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는 대중의 불만에 부딪히며 과거 개발독재의 향수에 기댄 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주었지요.
 
권위주의 정권과 다를 바 없는 이명박 정권의 일방주의 통치방식에 대해 제대로 된 저항이 조직되지 않고 있는 것이 시민사회가 스스로 민주-반민주의 대립구도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는 지적하셨는데 지나친 단순화가 아닐까요?   
 
힘없는 정의는 무책임한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대중의 선택도 그러했습니다. 진보정당을 선택하는 건 늘 '사표'로 치부되었고, 진보정당의 성장을 배제하는 선거 환경에서 늘 자기 실력 이하의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선택한 민주정부 10년의 결과가 바로 이명박 정권이었습니다. 힘을 선택했지만 그것은 정의가 아니었습니다. 정의냐, 힘이냐의 선택이 아니라 정의로운 힘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은 '진보대연합에 기초를 둔' 선거연대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범야권 선거연대에 나선다 하더라도 우선 가치에 기반을 둔 '진보대연합'을 통해 진보의 결집을 이루고 그 힘으로 자유주의 개혁세력과 제휴를 하든 타협을 하든, 독립적으로 가든 해야지 개별적으로 '신민주연합' 구도에 함몰되어서는 과거의 비판적 지지와 별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저는 민주당을 제외한 진보대연합이라는 명시적 표현이 불러온 후폭풍을 충분히 예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진보대연합'은 2010 지방선거에서 진보신당의 연대전략의 나아갈 방향을 밝힌 것이기도 하지만 선거 이후 진보의 재구성으로 나아가는 보다 전략적 수준의 지향이기도 하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도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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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논쟁에 앞서 해야 할 것 (레디앙, 2009년 12월 24일 (목) 20:27:10 임수태 / 진보신당 경남도당 고문)
[기고] 반한나라당 세력 '전면적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도입 연대를 
 
"반한나라를 외치는 모든 정치세력과 개인은 전면적인 정당비례투표제가 도입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나라당이 강행하는 4대강 사업, 세종시 원안 수정을 반대하며 싸우듯 이런 민주적 제도 도입도 싸워서 풀어야 할 과제 아니겠습니까?
 
기초나 광역의원 선거에서 전면적 정당비례투표제를 도입하면 어떤 국민의 정치적 의사도 사장되지 않고 어떤 정당이나 출마희망자도 불이익을 받지 않습니다. 한나라당 정권이 폭주를 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역행하기 때문에 반대해야 한다면 그런 주장을 하는 당이나 개인의 독선이나 민주역행도 반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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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진보정당 모두 패배하는 길" (레디앙, 2009년 12월 26일 (토) 07:50:37 이대근 / 경향신문 논설위원)
[연합논쟁] "민주대연합 바란다면 '민주당'을 향해 발언하라"
 
정권의 성격을 엄밀하게 규정하려고 한다면, 불가피하게 과장법을 필요로 하는 수사학으로는 안 된다. 독재 정권, 권위주의 체제는 정당한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정통성이 없는 권력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합리적 규칙과 절차가 아니라 자의로 권력을 행사하는 절대 권력자 혹은 독재자의 존재를 전제로 해야 하고, 그를 뒷받침하는 독재기관들이 있어야 하며, 야당이 선거를 통해 정권을 획득할 가능성이 차단되어야 하며, 의회는 형식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정당한 민주적 절차를 거쳐 권력을 획득했다. 이명박 정권은 정통성 있는 권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 권력이 곱든 밉든 상관이 없다. 이는 이명박 대통령이 민주주의적 질서 안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의미이자 선거를 통하지 않고는 그의 권력을 양도받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이명박 정권을 독재 정권이라고 정치적 비판은 할 수 있어도 이명박 정권의 성격을 독재 정권으로 규정할 수 없는 이유이다.
 
반민주적 독재 정권인지를 특정 정책에 대한 선호를 기준으로 정의해서도 안 된다. 일반적으로 이명박 정권을 비판할 때 용산 참사, 4대강 사업, 미디어법, 세종시 수정, 노조탄압, 공안 기관 동원, 파병, 무한 교육 경쟁, 민영화 및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등 신자유주의 정책, 성장 지상주의, 파병 등을 거론한다. 그러나 그 정책들이 반민주 독재정권으로서의 성격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할 수도 없다. 최소한의 민주주의적 절차에 따른 정책 결정 과정을 통과한 개별 정책을 두고 독재 운운은 무리이다. 만일 그것들이 민주와 반민주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있다면, 시민의 지지가 없는 정책을 추진하는 이 세상의 모든 정권은 반민주 독재정권이라는 단순화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노조탄압, 공안기관 동원은 이전 정권보다 후퇴한 것이 명백하고, 독재의 사고 방식이 반영된 권위주의적 행태이지만, 역시 권력 행사의 정통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재 정권의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여전히 부적절하다.
 
이명박 정권을 이같이 악마화하다 보면 이전 정권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들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그 가운데 어떤 것들은 매우 중요한 본질적인 것들이 있다. 가령 신자유주의, 성장 지상주의 같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은 이전 정권과 잘 분리되지 않는다. 이런 문제로 이명박 정권을 반민주 독재라고 한다면, 김대중? 노무현 정권도 같은 딱지를 붙여야 한다.
 
이명박 정권이 단순히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노선을 계승했을 뿐 아니라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러나 역시 그 차이로 민주 대 반민주 구도를 설정할 수 없는 것은 너무 자명하다. 사회적 시민권의 확산 정도, 사회 경제적 정책을 기준 삼아 이명박 정권을 반민주로 규정하고 싶다면 지난 10년 정권도 역시 반민주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만일 민주당이 차기 집권에 성공하면 '민주회복'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그 순간 한국 민주주의 과제도 해결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명박 정권을 반민주 독재로 규정하는 것은 진보 개혁 인사들의 지난 정권에 대한 관대함, 이명박 정권에 대한 엄격함과도 관계가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해 이명박 정권을 비판했던 정도로 이전 정권을 비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정권에 대한 평가가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진보정치 세력의 역량이 안 된다고 포기하기에는 잃을 것이 너무 많다. 민주당 중심의 민주대연합이 반드시 잃는 게임이라는 뜻이 아니다. 민주대연합의 축인 민주당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민주당의 혁신이 이루어진다면 민주대연합은 성공할 수 있다. 그런데 민주당 사정은 그렇지 않다. 우선 민주당은 홀로 지방 선거를 치를 능력도, 자기를 구출할 능력도 없다. 혁신을 통해 대안적 야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절박성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민주대연합을 바라는 세력들은 민주당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우선적인 과제로 삼아야 한다. 진보정당에게 요구할 것이 아니라 민주당에게 요구해야 한다. 민주당이 선거 연합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제시하고 그에 맞추도록 강제할 힘을 조직해야 한다. 그게 우선이다. 그런 전제가 충족되지 않으면 민주대연합은 이명박 정권에 맞설 능력도 없고 준비도 되어 있지 않는 민주당에 힘을 보태기 위해 진보정당 전체를 희생시키는 마이너스 연합으로 끝난다. 현재의 민주대연합 논의는 민주당을 대안정당으로 키우지도 못하고, 진보정당의 싹도 자르는 집단 자살의 위험을 안고 있다.
 
보수 정치로는 이 사회의 다수를 구성하는 시민들의 삶의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유주의적 보수 정당 10년 집권기를 통해서도, 이명박 정권을 통해서도 충분히 깨달았다. 어느 순간, 어느 계기에도 진보정치를 바로 세우고 키우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작은 차이만을 지닌 보수 정당들의 정권교체에 만족하면 우리의 삶은 그 차이만큼 밖에 바꿀 수 없다는 절망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이 절망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이명박 정권을 반대한다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어떻게 반대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진보정당은 그 ‘어떻게’를 고민해온 정치세력이다. 진보정당은 그런 고민을 생산적으로 발전시키는데 필수적인 존재이다. 이제 진보정치를 바라보는 시선도 바꿔야 한다. 늘 그렇듯이 진보정당을, 무너져가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디딤돌로 쓰고 버리면 그만인지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선거는 진보정당에게도 중요한 순간이지만, 현실은 정반대이다. 평소에는 진보정당의 중요성을 역설하던 이들도 결정적인 계기에 진보정당을 자유주의 정당에 새 피를 공급하는 수혈 정당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 결과는 오늘의 현실이 말해준다.
 
가장 치열하게 민생과 민주주의를 위해 고민해온 진보정당이 가장 중요한 때 가장 가벼이 쓸 수 있는 일회용으로 전락해도 괜찮은가. 민주당이라는 고목을 받쳐주는 버팀목이 진보정당의 역사적 사명인가. 자유주의 보수 야당이 진보정당을 선거 때 써먹을 외곽정당으로 인식하면 할수록 자유주의 보수 야당의 각성 수준도 낮아지고 그 결과 정말 쓸모없는 정치집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진보정당이 홀로 설 수 없는 민주당을 부축해주는 역할만 해야 한다면, 한국 민주주의는 영원히 반쪽짜리에 머물 수밖에 없고, 서민들의 무거운 어깨도 결코 가벼워 질 수 없다. 민주당을 바로 세우지 못하는 민주대연합은 민주당과 진보정당 모두에게 패배의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정녕 민주대연합이 절실하다면, 이제 진보정당이 아니라, 민주당을 바라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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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MB 대동단결론, 맞는 길일까요?" (레디앙, 2009년 12월 30일 (수) 03:01:23 박노자 / 오슬로대)
[연합논쟁-홍세화 선생께] "이명박 정권, 독재가 아닙니다"
 
민주와 독재에 대한 약간의 이론적 검토를 시도해보고 현 정권이 정말 제도권(부르주아) 야당하고라도 손잡아 반대해야 할 '독재'인지, 그리고 제도권 야당의 성격이 무엇인지 밝혀볼까 합니다. '현장'의 입장에서라기보다는 '사회과학'의 입장에서 말씀입니다.
 
싱가포르 등 약간의 예외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세계체제에서 핵심부에 속하거나 준핵심부 나라 중에서 핵심부와 아주 긴밀한 관계에 있는 거의 모든 국가들은 자유민주주의로 운영됩니다. 즉, 적어도 자본계급의 이해관계를 서로 약간 다르게 표방하는 제도권 정당 2개 이상이 경쟁하는 투명 선거를 통해야 권력에 정통성이 부여된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준핵심부에 진입한 1980년대 초반 이후로는 바로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에 이와 같은 구조를 본격적으로 이식시켜놓았습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요? 일면으로는 대기업 중심의 노동운동과의 손을 잡은 중산계급의 급진화된 전위(학생들의 민주화 운동 등)의 압력도 있었지만, 더 일면으로는 대한민국 영향력 1위의 집단인 대기업들에게도 '2개의 이상 제도권 정당의 투명한 선거경쟁'이라는 구도가 나름대로 편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과거에 군부 독재 집단의 우두머리에게 발길질이나 당하고 돈 상납을 강요 받아왔는데, 이제는 그 '투명 선거 경쟁'을 벌이는 2개 이상의 제도권 정당에게 '보험금'을 다 내며 잘 조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갖고 있는 돈, 그리고 지불한 돈 만큼 '공평하게' 대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만사형통의 시대인 셈이죠.
 
자유민주주의를 한다고 해서 사실 저들은 못할 일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미국처럼 '테러리스트'로 지목되는 자국의 시민들까지 영장도 없이 잡아다가 몇  년간 감옥에 썩힐 수도 있고, 아프간을 침략할 수도 있고, 이제 예멘 침략 준비까지도 할 수 있죠. 이를 비판하는 세상의 촘스키들이 물론 다소 있겠지만, 그들을 잡아 고문할 하등의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는 말을 폭스뉴스에 열광하는 다수의 미국인들이 어차피 구조적으로 들을 수도 없고, 들었다 해도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체코처럼 공산당이 총선에서 13%의 표를 얻는 위기의 동유럽 '민주' 국가에서 공산당 금지법을 논할 수도 있지만, 미국처럼 반체제 세력들이 대중화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곳에서는 그런 수고도 필요없는 것이죠. 피지배자들이 철저하게 원자화된 상태에서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돼 있는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제도권 거대 정당 위주의 제도적 민주주의는 지배계급으로서는 최적의 통치형태입니다.
 
피지배자들이 하나의 반체제 세력으로 뭉쳐 정말로 선거를 통해 집권해 체제를 바꾸거나 본격적으로 수정하려는 태세를 보인다면, 이야기가 달라져 갑자기 파쇼정당들이 각광을 받거나 세상의 피노체트들이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지만, 이는 아직은 한국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전혀 아닙니다. 좌파 민족주의와 온건 사회주의 정당 두 개가 각각 약 4%나 1~2%의 지지를 받는 나라, 진정한 의미의 급진세력이 잘해봐야 자그마한 섹트밖에 만들 수 없는 나라에서는 각종 재벌의 장학생들이 대리 운영하는 '민주주의'는 바로 적격입니다.
 
그러면, 이제 현 정권으로 눈을 돌립시다. 용산참사부터 아프간 재파병까지, 저 같은 사람에게 분통을 터지게끔 하는 모든 일들을 다 골라서 하는 사람들이지만, 저들이 대한민국의 선거법 등을 어긴 일이라도 있나요? 정확하게 묻자면, 선거법을 어길 필요라도 있었나요? 답은 자명하죠. 거대여당이 지속적으로 최고의 지지를 받는 나라에서는 그 나라의 진정한 주인네들에게는 민주주의적 절차를 파괴할 필요성조차 생기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행동의 내용을 보면, '독재'라는 수사는 자연스레 나오지만, 적어도 절차적으로는 (대단히 보수적이고 제한이 아주 많은) 자유민주주의는 맞습니다.
 
그 절차적 자유민주주의가 철거민부터 비정규직까지, 이 사회 피지배계급의 약자그룹을 전혀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은 내용적으로 다른 문제죠. 물론 동계 철거가 가능한 나라는 '가난뱅이에 대한 독재'를 실시하는 나라임에 틀림없지만, 가난뱅이 중에서도 이 자본의 독재를 지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부터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독재라고 하자면 정치영역의 독재가 아닌 사회영역에서의 독재에 준하는 계급적 역학관계라는 단서를 달아야 하지 않을까 라고, 홍세화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만약 정치적인 '자유민주주의' 하에서 사회적인 독재 관계가 확대재생산된다고 하면, 이 퇴치방법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지배세력의 정치적 대리인 중에서는 지금 일시적으로 수세, 약세에 처하게 된 민주당 등을 '상위 파트너'로 삼는다고 해서 과연 경찰의 장화 밑에서 밟히는 이들의 고통은 줄어들까요?
 
사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에 대한 '비판적 지지'는 '운동'의 세계에서는 거의 대세였습니다. 여태까지 지배세력 중에서 비교적으로 '덜 나쁘게, 더 민주적으로' 보이는 정파와 연합해온 역사는 꽤 깁니다. 그 결과는? 4대강 죽이기 등의 무리한 토건업 부양은 약간 새롭지만 이번 정권의 대부분의 행동은 이미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에 다 그 '기초'를 닦아놓은 것이었습니다. 파병이나 각종의 무리한 재개발부터 말씀입니다. 정치적 역학관계에서 이명박이 노무현의 정적이지만, 경제, 사회 정책의 차원에서는 많은 면에서 계승자에 가깝습니다. '차악'을 모색하는데에 이미 익숙해진 분들에게 아주 억울한 이야기일 순 있지만, 엄연히 현실입니다.
 
'계급'이라는 말 자체가 금기시돼온 나라,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계급투쟁보다 관리자에 대한 충성 경쟁이 더 자주 보이는 나라에서는 제도권 전체를 반대할 줄 아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안적 정당을 건설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바로 이 일은 미래에 대한 올바른 준비일 순 있죠. 지금 세계 평균보다 거의 2배에 가까운 무시무시한 수준의 부양책으로 경제지표들이 그럭저럭 괜찮아보이지만, '출구 정책'을 시작만 한다면 한국 경제는 다시 한 번 추락 일로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출구 정책을 계속 유보한다면 일본처럼 미래가 없는 과다채무국이 될 것도 뻔합니다.
 
생각보다 한국 지배계급의 미래는 그리 낙관적이지만 않기에, 저들에 대한 계급적 대안이 어쩌면 예상보다 훨씬 더 큰 사회적 지지를 받을 날도 언젠가 올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다시 한 번 과거의 '비판적 지지'의 늪에 빠지는 것보다, 미래를 지향해보는 것은 낫지 않을까요? 물론 이는 더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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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9 21:01 2009/12/29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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