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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석의 『대한민국 원주민』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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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규석. 2008. 『대한민국 원주민』. 서울: 창비.
 
“내 누이들의 이야기를 하면 도시에서 자란 그 또래의 사람들은 신기해했다. 어째서. 농활도 가고 노동현장에 투신할 만큼 그러한 이웃들에게 특별한 애착을 가졌던 세대들이 어째서 내 누이들을 신기해하는지 나는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그들이 본 것은 농민이고 노동자일 뿐 ‘사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내 누이들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그것은 나의 외로움이고, 모든 ‘원주민’들의 외로움일 것이다. 그들이 제 이야기 하나 제대로 내놓지 못한 채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없지만 내 마음 깊숙한 곳에는, 도시에서 태어나 유치원이나 피아노학원을 다녔고 초등학교 때 소풍을 엄마와 함께 가봤거나 생일파티란 걸 해본 사람들에 대한 피해의식, 분노, 경멸, 조소 등이 한데 뭉쳐진 자그마한 덩어리가 있다.
부모님이 종종 결혼을 재촉하는 요즘 이전에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어쩌면 존재하게 될 지도 모를 내 자식을 상상하게 된다.
상상하다보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 아이의 환경이 부러운 것도 아니오,
고통 없는 인생이 없다는 것을 몰라서 하는 소리도 아니다.
다만 그 아이가 제 환경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제 것으로 여기는,
그것이 세상의 원래 모습이라 생각하는,
타인의 물리적 비참함에 눈물을 흘릴 줄은 알아도 제 몸으로 느껴보지는 못한
해맑은 눈으로 지어 보일 그 웃음을 온전히 마주볼 자신이 없다는 얘기다.”
 

최규석은 77년생이다. 이제 30대 초반인 그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삶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게 꼭 나의 형이나 누나뻘 되는 이들의 이야기 같았다.
 
최규석의 분류대로라면 나는 도시에서 자란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약간은 생경함이 있었다. 이것은 내 출생지의 문제도 있고, 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유치원에 다닌 적도 없고, 무슨 주산, 피아노, 태권도 학원에 다닌 적도 없으며, 티브이가 어렸을 적의 내 일상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해할 구석도 없지 않다.
 
어머니가 이 책을 보신다면 그깟 만화책을 돈 주고 샀느냐라고 뭐라 하실 것 같다. 내 어머니는 최규석의 어머니처럼 너무 알뜰하시기 때문이다. ‘엄마의 경제’에 보면 미더덕을 2천원어치 받아다 2만원에 팔고 나서 “똑 도둑질한 거맨치로 가심이 벌렁벌렁”해하는 어머니 얘기가 나온다. 그 어머니를 닮아서 자신도 협상을 잘 못한다는 말과 함께... 내 어머니도 그러하신데, 협상을 잘 못하는 것도 그래서일까. 그래도 고지식한 내가 별로다.
 
책을 보면서 어머니의 삶이 겹쳐서 보였다. 그래서 한편으로 낄낄대기도 하면서도 괜시리 울컥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버스가 거부한, 나뭇짐이 있는 자신을 태워준 트럭 운전사가 고마워서 몇 번을 기도하는 어머니.
뭔가 극적이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기대했지만 도통 시시한 것들뿐인 엄마와의 인터뷰.
50년을 하루도 빼지 않고 아파서 죽을 것 같으면 기어서라도 아침밥을 지었던 어머니의 삶.
보리가마니가 있어서 배는 안곪겠다 싶어서 좋다는 것으로 정리되는 시집살이.
촌놈인 것이 죄라서 도시 사람에게 아무 말 못하는 어머니.
공사판에서 일하다가 점심으로 나온 우동을 아들에게 주고 국물이라도 좀 남기겠지 했지만, 국물까지 싹 비운 그리 쿨하지 않은 아들에게 아무 말 않는 어머니.
 
아마 우리네 어머니도 비슷할 듯하다.
 
자신의 삶을 그림으로 남길 수 있는 최규석이 부럽다.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내 삶을 정리한 적이 있었던가. 어머니와의 대화도 많이 부족했던 것 같은데... 물론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동생에게 물어보면 과거사를 어느 정도 복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그림에 담긴 소소한 코멘트 중에 심금을 울리는 글귀가 많다. 아마도 공감하는 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나의 꿈’에서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미술학원에 다니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오랜 동안 ‘안 간다’라고 애써 덮어두었던 것이 ‘못 간다’라는 본래 모습을 드러낸 것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괜히 서러웠다”라고 쓰고 있는 것. 자신을 뒷바라지한 셋째 누나가 만기가 된 적금으로 자신의 학원비랑 물감 값을 댄 것을 보고 “어디 옷과 화장품 뿐이겠는가. 그것의 존재를 느낄 새도 없이 본능적으로 잘라내버린 그녀의 꿈까지 내 알량한 재주 아래 어딘가 가만히 묻혀 있을 것이다”라고 한 부분.
 
최규석은 개고기를 먹는 것에서도 자신이 변하는 것을 보여준다. “살았을 때의 메리는 순하고 귀여웠다. 그리고 죽은 메리는 맛있었다,” 이러던 것에서 덫에 걸려 죽어가는 쥐에게마저 연민을 느끼게 되면서 “이것이 성장인지 도시화의 결과인지 아니면 원래의 심성인지”를 의아해한다.
 
참, 빼먹을 뻔 했는데, 한국전쟁을 얘기하는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안긴 것은 미군의 비행기였음을 보여준다. 실제 현대사를 다룬 드라마를 보면 많은 이들이 피난을 가다가 미군의 폭격이나 기총사격에 의해 사망하는 걸 본다. 그게 민간인들이 한국전쟁에서 사망한 많은 이유일 텐데, 우리의 기억은 왜곡된다. 최규석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역사투쟁이 중요한 것일 게다.
 
‘변하는 건 없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최규석은 당연히 대학까지 마친 그들과 운 좋게 중학교에 들어간 내 누이들은 같은 세대지만 다른 시대를 살았다고 얘기한다. “결국 불행은 그것을 겪는 자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그들이 상상하는 만큼의 불행을 우리는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행이란 놈은 친절하게도 인간의 상식을 불행 수준으로 떨어뜨려 불행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 않도록 배려해 준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일에도 분노하지 않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나는 최규석이 말하는 ‘그들’에 포함될 것 같다. 하지만 조금 별난 것 같기도 하다. 최규석과 비슷하게 “자고로 위를 보며 살라 했는데, 자꾸 아래를 보니 부정적인 생각만 드는,” 그런 류이기 때문이다.

 

김규항의 블로그를 둘러보다가 최규석의 <대한민국 원주민>이라는 책이 나온 것을 보고 냉큼 주문을 해버렸다. 최규석의 그림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김규항의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다.
 
김규항이 창작과 비평에 쓴 <대한민국 원주민>에 대한 서평과 함께, 이전에 논란이 되었고, 김규항의 서평에도 나오는 '불행한 소년' 관련 글과 그림을 옮겨온다. 서평 중에 밑줄을 그은 부분은 내가 왜 불행한 소년 관련 글을 담아오는지를 잘 설명해줄 것이다.
 
이와 더불어 가능한 이번 촛불 시위 동안에 벌어졌던 폭력-비폭력 논란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참고로, 나중에 <대한민국 원주민>을 읽고 난 다음의 소감을 쓴다면 아마 진보블로그에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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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야유를 잃어버린 사람들 (김규항 블로그, 2008/08/09 09:55)
 
내가 발행인 노릇을 하고 있는 어린이잡지 <고래가그랬어>에 최규석이 ‘코딱지만 한 이야기’라는 꼭지를 연재했었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보는 우화 같은 것이었는데 분량은 짧아도 함축과 은유가 많은 쉽지 않은 작품이었다. 연재를 쉬기 얼마 전에 실린 ‘불행한 소년’이라는 작품이 말썽이 나서 몇몇 독자가 항의하고 정기구독을 취소하는 일이 있었다. 내용인즉슨 아주 불행한 환경에서 태어나 참고 또 참으며 평생을 죽도록 노동했으나 결국 비참하게 인생을 마치게 된 사내가 제 정당한 분노를 늘 삭이게 했던, 그리고 이제 죽어가는 그에게 “비참해하지 말아요. 당신의 삶은 가치 있는 삶이었어요.”라고 말하는 천사를 죽인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천사는 그저 천사의 탈을 쓴 악마에 불과했지만 기독교(개신교)가 비공식적 국교이다시피 한 국가인 한국에서 발행하는 어린이 잡지에서 천사를 죽이는 장면을  실었다는 것은 문제가 될 만한 일이었다.
 
실은 그 작품이 편집부에 들어왔을 때 편집장이 걱정이 된다며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문제가 되겠지만 문제없는 작품”이니 싣자고 했다. 싣지 않았으면 말썽도 없었을 테니 작가에겐 책임이 없었지만 <고래가그랬어>의 지지자인 최규석은 독자수를 늘이는 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줄였다는 데 대해 몹시 미안해했다. 그때 최규석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게 그렇게 충격적인가요? 저는 늘 소 잡고 돼지잡고 하는 것 보고자라서 그런지 잘 모르겠는데..” 미안해서 하는 말이었지만, 그 말 속엔 얼마간의 야유가 들어 있었다. 제 새끼들을 볼 것 안 볼 것 들을 것 안 들을 것 알뜰하게 다 가려가며 키울 수 있는 안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야유. 최규석은 그런 야유를 할 만한 사람이다. 그는 늘 소잡고 돼지잡고 하는 것 보고자란 사람, 볼 것 안 볼 것 들을 것 안 들을 것 다 가리며 키울 수 없는 조건에서 성장한 사람이다. <대한민국 원주민>은 바로 그 기록이다.
 
나는 이 책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게 보았다. 잡지에 연재될 때 몇 번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책을 보니 본 게 거의 없었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그보다는 전체적으로 매우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오래 전, 만화가 후배의 소개로 대학 졸업작품집에 실린 최규석의 작품을 본 이후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습지생태보고서> 등 그의 주요한 작품들을 모두 보아왔지만 이번처럼 강한 인상을 주는 적은 없었다. 두어 시간 그렇게 빠져서 책을 다 보고나서야 난 그 두어 시간 동안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참, 이게 다 지 이야기지.’ 그 이야기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한 아이의 체험임을 되새기며 난 가슴이 저렸다.
 
그리고 이삼십년 전이었다면, 말하자면 한국의 인텔리들(이를테면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민중이 각별한 의미를 갖던 시절이었다면 이 책은 지금과는 다르게 받아들여졌겠구나 싶었다. 어쩌면 이 책은 ‘민중의 자식이 그린 가슴 아픈 성장기’라 수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90년대 이후 한국의 인텔리들은 더 이상 민중이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고, 대신 시민이라는 말을 즐겨 쓰게 되었다.(그렇게 된 사연과 과정은 생략하기로 하자. 다만 분명한 사실은 민중은 예나 지금이나 민중이라는 것. 그리고 민중은 인텔리들이 자신들을 위해 ‘투신’하던 시절이나 자신들을 ‘배신’하고 시민을 말하는 지금이나 그들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인텔리들의 민중과의 관계는 실재했던 게 아니라 단지 인텔리들끼리의 가상극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오늘 한국의 인텔리들에게 민중은 그들이 오래 전 외치던 대로 ‘역사의 주인공, 생산의 주인공’이 아니라 단지 부인할 순 없지만 애써 외면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런 변화한 상황에서 <대한민국 원주민>은, 이른바 진보적인 성향의 인텔리들이 즐겨 읽는 잡지에 연재되고 역시 진보적인 인텔리들을 주요한 독자로 하는 출판사에서 발행된 이 책은,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사실 이런 질문은 매우 싱거운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이미 그에 대한 답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은 ‘한 민중의 자식의 가슴 아픈 성장기’를 이젠 제 세계관이나 사회적 실천에 결코 연결시키지 않은 채 잠시 구경하려는 인텔리들에 대한 야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미덕은 그 야유가 작가 자신에게까지 뻗어있다는 점이다. 최규석은 이젠 모든 면에서 ‘원주민이 되어버린 민중’에서 떨어져 나와, 단 한 번도 입신양명을 꿈꾼 바 없으나 어느 새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만화가가 되어버린 자신에 대한 야유를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야유는 사회적 지위와 문화자본이 갈수록 늘어가는 제 삶의 추이와 속도에 정직하게 맞추어져 있다. 부모와 누이들과 형에 관한 이야기들을 가까스로 마친 작가는 책의 끝 무렵 제 옆얼굴을 그린 페이지 왼편에 ‘어쩌면 존재하게 될지도 모를, 나와는 꽤 다른 환경에서 자랄 내 아이’에 대해 적는다.
 
“그 아이의 환경이 부러운 것도 아니요, 고통 없는 인생이 없다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리도 아니다. 다만 그 아이가 제 환경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제 것으로 여기는, 그것이 세상의 원래 모습이라 생각하는, 타인의 물리적 비참함에 눈물을 흘릴 줄은 알아도 제 몸으로 느껴보지는 못한 해맑은 눈으로 지어보일 그 웃음을 온전히 마주볼 자신이 없다는 얘기다.” ‘근래 보기 드문 민중 출신 작가’가 제공한 ‘모처럼의 민중 구경’이 되었을지도 모를 이 책은 작가 자신에 대한 야유, 심지어 자신의 미래에 대한 야유를 포함하면서 ‘그들’에 관한 책이 아니라 ‘우리(인텔리들)’에 관한 책이 된다.
 
말하자면 이 책은 우리의 잃어버린 야유를 복원하는 책이다. 이 책은 우리가 민중에 대해 ‘우리끼리’ 해치운 개연성 없는 투신과 배신에 대해 정당한 야유를 받은 바 없이 살아왔으며, 우리의 삶이 이렇게 욕지기가 날 만큼 졸렬해진 것 역시 우리가 세상에 대해 스스로에 대해 야유하는 능력을 잃어버리면서부터였음을 복원하게 한다. 모든 ‘우리’에게 이 책을 권한다. 모처럼의 구경은 어느새 모처럼의 정화가 될 터이니. (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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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석 - 불행한 소년, 천사를 죽이다 2007/04/25 00:57
 
<고래가 그랬어>에 실린 최규석 님의 '불행한 소년'이라는 우화는 몇몇 독자들의 절독까지 야기하는 등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는 많은 논쟁점이 들어있다.
하지만 지금 이에 대해 깊게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김규항 님의 블로그에 실린 관련글과 최규석 님의 우화를 담아온다.
그리고 맥락은 약간 다르지만 한겨레21에 실린 박노자의 글을 링크한다.
  
‘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 (한겨레21 2007년04월12일 제655호,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이완용 테러를 막다가 죽은 인력거꾼 박원문과 윤봉길의 홍커우 의거에서 무고하게 죽은 일본인들
 
 
천사를 죽이다 (2007.03.04 Sun)
최규석은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로 출발한 문제적 만화가다. 고래 창간 때부터 그의 작품을 싣고 싶었으나 그의 형편(한동안 거처를 마련하는 일에 전념하기로 한) 때문에 미루어지다가 지난해 말부터 ‘코딱지 만한 이야기’로 고래에 참여하고 있다. ‘코딱지 만한 이야기’는 아이와 어른이 함께 보는 우화다. 짐작대로(혹은 기대했던 대로) 최규석의 우화엔 모순과 불의로 가득찬 현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그런 태도와 ‘어린이잡지’는 문제를 일으키기 십상이다. 어른들, 특히 한국의 어른들은 ‘아이들에겐 맑고 깨끗한 것만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고래 40호의 코딱지 만한 이야기 ‘불행한 소년’에 대해 몇몇 독자들이 항의했고 몇몇 독자들이 절독했다. 발행인의 해명을 요구해온 분들도 있는데 그에 대한 답장 형식으로 내 생각을 조금 적어본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천사는 천사가 아니라 천사의 탈을 쓴 악마입니다. 세상엔 그런 가짜 천사들이 참 많습니다. 무작정 운명에 순응할 것을 강요한다든가 현실의 모순에 눈을 감고 내세에만 관심을 갖게 한다든가 억압받는 사람들의 저항을 폭력이라 몰아붙인다거나 하면서 힘센 사람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가짜 천사들 말입니다. 아무 죄없는 사람이 일생을 그 가짜 천사에 속아 살았다면 그에겐 분노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현실의 추악함을 되도록 보여주지 않고 싶어 합니다. 하긴 누가 그게 즐겁겠습니까? 그러나 아이들에게 현실의 추악함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 추악함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단지 그 추악함을 감출 뿐입니다. 그것은 늘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설명되지만 실은 우리 속을 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추악함을 만든 게 바로 우리라는 것, 아이들은 그 추악함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그 아이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그 지옥에 빠질지 우리는 모릅니다. 아이들은 그런 가짜 천사들이 죄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 현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겐 그 추악함을 아이들에게 알려줄 정직함의 의무가 있습니다. 물론 그 방법은 가장 신중하고 사려깊어야 합니다. 예술작품은 그런 면에서 매우 훌륭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예술작품을 통해 그런 현실의 추악함을 간접 체험하면서 스스로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이 작품을 보고 어른들이 걱정하듯 심각한 충격이나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나쁜 천사네’ 할 뿐입니다. 천사는 무작정 착하고 좋다는 판타지가 깨지는 건 아이들의 마음을 더럽히는 걸까요, 현명하게 하는 걸까요? 어른들, 특히 한국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맑고 깨끗한 것만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습니다. 그런 강박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실은 매우 위험합니다. 현실은 그렇게 맑고 깨끗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강박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면 아이는 그런 추악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당하기만 하는 사람이 되거나 그런 추악한 현실에 같은 추악함으로 적응하는 비루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지금 수많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듯 말입니다. 중요한 건 우리의 불편함이 아니라 아이들의 인생입니다. 천사를 죽이는 장면에 집착하지 않고 다시 한번 이 작품을 보시길 권합니다. 이 작품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을 것입니다.
 
폭력메모 (2007.03.14 Wed)
 
최규석 만화와 관련한 이런저런 의견들을 읽다가 조금씩 마음이 답답해졌다. 다들 일리가 있는 말들인데 공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 ‘폭력은 나쁘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그 만화가 ‘아이들에게 보여주기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아이에게 살해 장면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이야기할 건 그런 지당한 말씀이나 논평이 아니라 아니라 그 만화에 그려진 주인공의 참혹한 인생과 그 인생을 그렇게 만든 가짜 천사,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가짜 천사들에 둘러쌓여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의 인생, 에 대해서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트랙백에 붙은 한 의견이 참으로 반갑다. 그 주인공이 바로 나라고 생각하면 더이상 지당한 말씀이나 논평은 불가능한 법이다. 안그래도 폭력(과 비폭력)에 대해 한번 쓸 생각이지만, 메모 삼아 몇자 적어본다.
 
1. 세상에 모든 폭력주의자들은 비폭력주의자다. 다들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폭력을 사용한다고 말할 뿐이다. 이를테면 지금 지구를 대표하는 폭력주의자라 할 부시도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폭력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그저 “폭력은 나쁘다”라고 말하는 건 하나마나한 일이다. 어떤 폭력주의자도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다.
 
2. 진정한 비폭력주의는 ‘현장’에서만 주장될 수 있다. 진정한 비폭력주의는 일년 내내 뺨한번 맞을 일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긋이 눈을 내려깔고 설파하는 게 아니라, 폭력의 현장에서 그 폭력에 함께 노출된 사람들만이, 분노와 원한을 넘어 이루는 숭고한 경지다. 역사 속에서 위대한 비폭력주의자들이 반드시 폭력에 희생 당한 건 그래서다. 목숨이 위협당하고 있지 않다면 진정한 비폭력주의자가 아니다.
 
3. 현장에서 벗어난, 현장을 구경하고 논평하는 비폭력주의는 폭력주의자들(역시 비폭력주의자인)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들이다. 그런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 게릴라나 똑같아!”라는 말은 이스라엘 극우세력을 향한 가장 흐뭇한 선물이자, 미사일에 맞아 찢겨진 새끼를 부둥켜 않고 오열하는 가난한 팔레스타인 어미의 가슴에 꽂는 더 끔찍한 미사일이다.
 
4. 폭력의 실체는 폭력 자체가 아니라 ‘이해관계’다. 폭력은 강자가 약자를 상대로 제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한 가장 분명한 수단이다. 폭력의 목적은 폭력이 아니라 ‘빼앗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극악한 폭력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빼앗는 것’이다. 그런 폭력은 폭력적으로 보이긴커녕 이런저런 명분과 대중 조작으로 아름답게 포장된다. 애석하게도 모든 순진한 비폭력주의가 그 포장지 노릇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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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9 19:12 2008/09/19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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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로버트 라이시의 '슈퍼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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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클린턴 행정부 시절 노동부 장관을 지냈던 로버트 라이시가 오바마의 경제정책에 지지를 보냈다. 그는  매케인과 오바마가 근본적으로 다른 경제철학을 제시하고 있다면서, 매케이노믹스는 위에서 아래로(하향식)의 경제노선이라면, 오바마는 아래에서 위로의(상향식) 경제노선이라고 파악한다. 부자와 기업을 위한 정책이 모든 미국인에게 혜택을 줄 것이라는 '매케이노믹스'는 세계화된 경제에서는 타당성을 잃어가고 있으며, 오바마노믹스가 더 이치에 맞다는 것이다.
 
이러한 라이시의 견해는 올해 5월에 번역되어 나온 <슈퍼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불리면서 세계화된 자본주의를 의미하는 '슈퍼자본주의' 하에서는 투자자와 소비자에게 권력이 쏠리면서 '시민'은 실종되어 민주주의적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위협받는다고 하면서, "시민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업들이 룰을 정하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 것이고, "정치에 개입하는 기업, 민주주의에 침투하는 슈퍼자본주의를 저지하고, 소비자·투자자뿐 아니라 시민으로서 우리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 책에서 주목할 부분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된 부분인 듯하다. 그동안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민주주의적 자본주의를 위한 해답으로 인식되었고, 공공성이 확장될 수 있다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으로 언급되는 것들을 포함해야 한다고 파악하는 이들이 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라이시는 기업은 도덕성과 무관하며, 기업의 목적은 소비자와 투자자에게 좋은 거래를 제공하는 것이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전략적 선택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기업들이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건 자신의 이익 증대를 위해서다. “기업 이미지를 개선하고 좋은 홍보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기업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강요하는 것은 좋은 방안이 아니며, 정부가 나서서 기업들이 지켜야할 사회적 법규나 질서 등을 만들고 이행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그의 주장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그는 법인세에 대해서도 독특한 주장을 펼친다.
 
<슈퍼자본주의>에 대한 서평들을 살펴보면 보수언론의 경우는 민주적인 자본주의를 위한 진정한 해결책은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 데 있다거나 법인세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만을 싣고 있다. 사실은 그 궁극적 함의가 더 중요한데 말이다.
 
아무튼 아래 담아놓은 서평들만 보면 <슈퍼자본주의>는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인 듯하다. 라이시 또한 독특한 사람으로 보이고... 읽어볼 여유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네이버 블로그에 옮겨놓았던 한겨레와 서울신문의 서평들에 다른 신문의 서평을 추가하면서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글린의 <고삐 풀린 자본주의>도 흥미로울 듯 싶다. 참, Reich를 읽을 때 라이히가 맞나, 라이시가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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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자본주의'시대 민주주의를 지켜라 (서울=연합뉴스, 조채희 기자, 2008-05-07 13:35)
'슈퍼자본주의' 출간 
 
하버드대 정치경제학과 교수를 거쳐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는 자본주의가 고도화한 '슈퍼자본주의(supercapitalism)' 시대에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소비자ㆍ투자자로서의 권리가 충돌하는 현상에 주목한다. 평균임금 하락을 걱정하면서 자국민의 임금과 일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중국산 제품에 관심을 갖는 것, 자영업자의 몰락을 한탄하면서 대형 유통점과 인터넷에서 쇼핑을 하는 것도 모두 두 권리의 충돌현상이다.
 
그는 책 '슈퍼자본주의'(김영사 펴냄)에서 슈퍼자본주의가 정치로 흘러들어가 민주주의를 해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진단하면서 자본주의가 정치를 침범하는 문턱을 지켜야한다고 주장한다. "무생물인 기업에 인격을 부여해 시민의 권리를 침해할 여지를 주지 말자"는 것으로 요약되는 대안은 일견 통념을 뒤집는 것들이지만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기업에 법인세를 물려서는 안된다", "기업에 애국심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더 나은 이익을 위해서는 생산 기지를 어디로든 옮기는 것이 기업의 속성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허구이며 결국은 이익증대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기업이 인격을 갖는 순간 막대한 자금을 들여 로비스트를 정치권에 투입해 시민의 권리를 제약하는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낸다고 경고한다. 저자는 기업들이 정치권을 향해 경쟁하는 것은 기업들의 힘이 강해졌기 때문이 아니라고 본다. 슈퍼자본주의 시대 개별기업들은 1960-1970년대 기업이 갖던 영향력을 잃었고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로비를 한다.
 
"슈퍼자본주의는 경제와 정치를 구분하는 그 인위적인 경계에서 멈추지 않았다. 소비자와 투자자의 압력에 처한 현대 기업의 목표는 경쟁력을 얻기 위해 무엇이든 하는 것이다. 워싱턴을 비롯한 전세계의 정치 중심지들은 이제 경쟁력을 놓고 싸우는 전장이 됐다. 이곳에서 결정되는 정책들이 특정한 기업이나 산업들에 도움이 되고 경쟁자들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205-206쪽) 결론은 "게임의 규칙을 바꿔야한다"는 것이다. 매출과 수익 창출이라는 지상과제를 위해 기업들이 벌이고 있는 노력은 현행 규칙 아래에서는 합법적이므로 이를 비난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것이다. 
 
기업을 의인화하는 것을 중단하고 철저히 계약의 묶음으로 간주해 법인세를 없애자는 제안은 레스터 서로우 매사추세츠공대(MIT)교수의 아이디어를 따왔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법인세는 기업의 소득세다. 소득세는 사람만 내는 것이다. 법인세를 폐지하는 대신 기업이 주주들을 대신해 벌어들인 모든 소득에 대해 주주들이 개인적으로 세금을 내게하면 기업의 실체는 있는 그대로 드러나고 주주들의 결사체라는 기업의 본래 속성에도 잘 맞는다. 이렇게 되면 기업이 세금을 내기 때문에 정치과정에 당연히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잘못된 인식도 뿌리 뽑히게 된다. 민주주의의 권리나 의무는 오직 사람에게만 속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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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해고 가해자’ 당신, 시민으로 돌아가라 (한겨레, 한승동 선임기자, 2008-05-07 오후 06:13:31)
로버트 라이시 교수 ‘슈퍼자본주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에게 익숙한 ‘신자유주의’ 체제를 미국 빌 클린턴 정부 때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 버클리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는 ‘슈퍼 자본주의’라는 말로 설명한다. 그의 책 <슈퍼 자본주의>(슈퍼캐피털리즘)(형선호 옮김, 김영사 펴냄)에서 말하는 슈퍼 자본주의를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이후 급속히 미국화한 한국 경제에 적용해 보더라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라이시가 꼽은 슈퍼 자본주의의 특징은 권력이 ‘시민’의 손에서 ‘소비자’와 ‘투자자’ 쪽으로 이동하면서 민주주의가 쪼그라들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를 “민주주의적인 자본주의를 슈퍼 자본주의가 대체했다”고 했다.
 
2차대전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 미국은 독점적인 소수 거대기업들과 거대노조, 정부간 협상을 토대로 적절한 통제 속에 높은 생산성과 수익을 달성했다. 그리고 그 성과를 비교적 골고루 분배함으로써 두터운 중산층이 형성되고 예측 가능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대기업 독점 탓에 신참들의 진입장벽은 높았고 여성들과 소수민들은 여전히 2등 시민 대우를 받았으며 매카시 의원의 공산주의 마녀사냥도 상처를 남겼으나 ‘황금기에 가까운 시대’였다. 슈퍼 자본주의는 이를 승리한 자본주의, 패배한 민주주의로 해체해 버렸다
 
이 슈퍼 자본주의로의 전화를 설명하는 라이시의 시각이 독특하다. 그는 영국의 마거릿 대처나 미국 로널드 레이건 정권이 주도한 신보수주의나 신자유주의, 또는 워싱턴 컨센서스, 신고전파 경제학 등이 슈퍼 자본주의를 낳았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미 시대상황이 그렇게 변했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들은 변화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그것을 합법화시켰을 뿐”이라는 것이다. 탈규제는 레이건이 1981년 백악관에 입성하기 10년 전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라이시는 슈퍼 자본주의의 시초를 냉전시기 미 국방부가 주도한 전쟁기술 개발에서 파생된 신기술의 민간전용에서 찾았다. 인터넷, 반도체, 컴퓨터, 광섬유, 인공위성, 자동변환장치 등이 대표적인데, 컨테이너의 사용도 베트남전 때 본격화했고 보잉 707여객기나 747점보제트기는 각각 폭격기와 군수송기 기술을 토대로 만든 것이다.
 
이들 신기술이 탈규제, 세계화를 촉진하고 동시에 서로 결합되면서 생산과 운송비용을 급격히 낮췄고, 전지구를 커버하는 통신망이 그 효과를 증폭시켰다. 비용절감을 통한 경쟁력 높이기 무한경쟁이 시작돼 싼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는 부품·서비스의 전지구적 공급체계가 등장했다. 오로지 최저가주의로 성공한 월마트가 말단을 이루는 이 전지구적 공급체계가 신참들이 틈입할 수 있는 구멍들을 만들어 주면서 난공불락의 거대기업 독과점체제가 축을 이룬 ‘민주주의적 자본주의’를 근저에서 무너뜨렸다. 이것은 유럽·일본의 재건과 함께 미국 경제의 절대우위가 무너진 데 따른 결과라는 따위의 시각과는 다르다.
 
어쨌든 승자 독식의 슈퍼 자본주의는 소비자에게 더 많은 선택권을 부여했으며 투자자에게는 더 나은 수익을 가져다 주었다. 여기서 대다수 서민들까지 투자자·투기꾼으로 나선 슈퍼 자본주의의 위선과 딜레마가 발생한다. 예컨대 월마트가 싸게 팔려면 물품 공급자에게 가격인하를 압박하고 직원들 임금을 깎아야 한다. 이는 저임금과 해고를 일상화하고 자원남획에 따른 환경파괴를 부른다. 대량소비에 길든 소비자는 환경파괴를 걱정하면서도 스포츠실용차(SUV) 구입을 주저하지 않는다. 저물가 혜택을 누리는 소비자는 이렇게 해서 장기적으로 자신의 존립근거인 사회 전체의 자산을 파괴한다.
 
주가에 울고 웃는 투자자도 마찬가지다. 대량해고를 주저하지 않았던 제너럴일렉트릭의 잭 웰치의 예에서 보듯 주가를 올리지 못하는 기업이나 최고경영자들은 설 자리가 없다. 주식을 사서 차액을 남기려는 투자자는 결과적으로 대량해고의 가해자가 되고 다수 서민들의 희생으로 고수익을 누리면서 사회적 비용을 키운다. 게다가 문제는 그 소비자와 투자자가 바로 ‘나’요 ‘당신’이라는 점이다.
 
모두가 이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회에서 ‘공익’은 어디로 가나? 라이시는 슈퍼 자본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게임의 규칙을 바꿔 강자들을 규제하고, 규칙에 따른 손해는 각자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안의 ‘소비자’나 ‘투자자’가 아니라 ‘시민’에게 더 큰 발언권을 주자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업들한테 수익 추구의 자유를 보장하되 “그들이 룰을 정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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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에 도덕성을 요구하지 말라” (서울신문, 이문영기자, 2008-05-09  23면)
슈퍼자본주의/김영사 펴냄
 
사회양극화와 소득·재산 불평등은 자본주의의 결함이 아니다. 노동자 대량해고는 자본주의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결과다. 자본주의 폐해의 책임은 자본주의가 아닌 민주주의에 있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 버클리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가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를 ‘슈퍼자본주의’라고 규정한다. 슈퍼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 속성이 극대화된 상태, 민주주의적 견제와 균형이 해체된 상태의 자본주의다. 왜소하게 쪼그라든 민주주의가 슈퍼자본주의를 가속화하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라이시는 자신의 책 ‘슈퍼자본주의’(형선호 옮김, 김영사 펴냄)에서 슈퍼자본주의의 출발을 냉전에서 비롯된 신기술 개발에서 찾는다. 화물선과 수송기, 광섬유 케이블과 위성통신 시스템은 전지구적 공급 체계를 탄생시켰고,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발전을 촉진시켰다. 낡은 생산체계는 무너졌고, 금융 탈규제는 기업에 높은 수익창출을 압박했으며, 가열된 기업간 경쟁은 노동자 임금삭감과 대량해고를 초래했다. 슈퍼자본주의는 개인의 ‘시민성’도 탈각시켰다. 슈퍼자본주의 하에서 개인은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시민으로서의 능력을 잃고 소비자와 투자자로서의 능력을 키웠다. 라이시는 “실상을 말한다면 우리 대부분은 슈퍼자본주의에서 엄청난 덕을 보고 있다.”며 개개인의 삶에서 일상적으로 발견되는 이중적 삶의 태도를 꼬집는다. 노동자 평균 임금 하락을 걱정하면서도 자신의 일자리까지 희생시킬 수 있는 값싼 중국산 제품을 선호한다. 재래시장과 영세 자영업자 몰락을 한탄하면서도 쇼핑은 대형마트에서 하고, 지구온난화를 걱정하면서 SUV(스포츠형 다목적 차량)를 구입한다.
 
개인만 이중적인 것은 아니다. 대형 유통업체인 월마트는 제품 가격을 떨어뜨려 고객들에게 혜택을 주는 듯하지만, 제품 단가 하락의 이면엔 직원들에게 제공하는 낮은 급여와 열악한 복지혜택이 도사리고 있다. 라이시는 “‘우리 안의 시민’이 ‘우리 안의 소비자와 투자자’를 억제하는 유일한 방법은 법과 규제를 통해 우리의 구매가 투자자 개인적인 선택일 뿐 아니라 사회적인 선택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라이시가 제안하는 ‘개인과 사회의 시민성 회복’을 위한 방법론은 독특하다. 그는 기업에 도덕성을 요구하지 말라고 거듭 말한다. 기업의 임무는 소비자를 만족시키고 투자자에게 돈을 벌어주는 것으로, 도덕의 관점에서 기업을 바라보는 것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슈퍼자본주의의 부정적 결과는 기업이 소비자와 투자자에게 더 좋은 거래를 제공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의 산물”이란 지적도 마찬가지다. 월마트 같은 기업이 비도적적이라기보다 자본주의가 짜놓은 게임의 규칙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을 뿐이란 주장이다.
 
중요한 것은 게임의 규칙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기업을 인격화해 사회적 책임을 강요하지도 말고, 공익을 위해 활동한다는 기업의 말을 믿지도 말라.”며 라이시가 강조하는 것은 기업의 역할에 대한 분명한 경계 설정이다. 기업이 정치에 개입함으로써 슈퍼자본주의가 민주주의로 흘러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법인세를 물리지 말아야 한다는 ‘뜻밖의’ 주장도 제시한다. 법인세를 폐지하는 대신 주주 개개인에게 소득세를 물리면 ‘인격화된 기업’이 아닌 ‘주주 결사체’로서의 기업의 실체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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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질된 자본주의 민주주의 목조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민호 기자, 2008.05.09 17:39)
슈퍼자본주의/로버트 라이시/김영사
고삐 풀린 자본주의/앤드루 글린/필맥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전 CEO 잭 웰치. 그에게는 달갑지 않은 별명이 하나 있다. '중성자탄 잭'으로 직원들을 싹쓸이 해고했다는 비아냥이다. 실제로 그가 CEO에 취임한 1981년부터 4년간 4명 중 한명 꼴로 직원을 내보냈다. 그 인원만 무려 10만명이다. 이뿐만 아니다. 웰치는 비용 절감에도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독성물질 처리 비용까지 가차없이 줄였다. 주주가치의 극대화란 '정언명령' 앞에서 환경과 공존의 이념은 터럭만한 가치도 갖지 못했다.
 
"1997년 매사추세츠 피츠필드의 주민들은 GE 공장 근처에 있는 자기 마을의 토양이 독성화학물질인 PCB(폴리염화비페닐)로 오염되어 있음을 알았다. 이들은 또 GE가 이 사실을 1980년대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자신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웰치의 임무는 주주가치를 극대화 시키는 것이었지, 업계의 정치인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금세기의 경영자'라고 창친받지 않았는가."(112쪽)
 
잭 웰치의 등장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드러낸다. 웰치 이전만 하더라도 완전고용과 정년 보장은 일종의 관행이었다. 적어도 미국에선 그랬다. 이윤을 향한 자본의 무한질주는 각종 민주주의 장치를 통해 적절히 통제되고 제어됐다. 그러나 상황은 1970년대 후반부터 급속도로 변했다. 신기술, 세계화, 탈규제란 약물은 자본의 얼굴을 흉측하게 일그러뜨렸다. 이른바 '슈퍼자본주의'의 등장이다. "1970년대 이후로 모든 것들이 급격하게 변했다. 대기업들은 훨씬 더 경쟁적이고 지구적이고 혁신적이 되었다. 슈퍼자본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탄생한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의 과정속에서, 소비자와 투자자인 우리의 능력은 크게 향상되었지만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시민으로서의 능력은 퇴보했다."(13쪽) 
 
로버트 라이시는 기형적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의 목을 조르고 있다고 우려한다. 가장 큰 문제는 시민의 변절이다. 공동체의 이익과 공공선을 추구했던 시민들은 이제 영악한 소비자와 투자자로 전락했다. 목하 이익에 갈급한 영혼들에게 환경오염이나 빈부격차를 역설하는 것은 열흘 굶은 사람에게 '네 빵을 나누어 주라'고 설교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슈퍼자본주의가 승리를 거두면서, 그것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사회적 결과들도 더 크게 부상하고 있다. 경제성장의 이득이 최상층으로 갈수록 점점 더 커지는 불평등성, 일자리 안정성의 감소, 공동체의 불안정 내지는 상실, 환경오염, 해외에서의 인권 유린, 그리고 우리의 저급한 욕망에 영합하는 수많은 제품과 서비스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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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여, 왜곡된 자본주의에 질식한 민주주의를 구하라 (한국, 2008/05/10 02:42:37, 남경욱 기자)
슈퍼자본주의/로버트 라이시 지음ㆍ형선호 옮김/김영사ㆍ364쪽ㆍ1만7,000원
 
2차대전후 1950, 60년대 미국 경제는 황금기를 구가했다. 유럽과 일본 기업이 등장하기 이전 미국의 소수 거대기업들은 과점체제를 구축해 막대한 이익을 누렸고, 그 과실은 대기업뿐만 아니라 납품업체, 유통업체, 노동자들에게 골고루 돌아갔다. 기업인들은 국가적 관심사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가졌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조화를 이루는 듯했던 이 상태를 저자는 ‘민주주의적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외국 기업들이 저임금을 바탕으로 부상하면서 미국 기업들이 경쟁력을 잃었다는 것이 상식적인 견해이지만 저자는 다르게 분석한다. 구소련과의 경쟁에서 미 국방부와 나사(NASA)에 의해 개발된 반도체, 광섬유, 레이저, 인터넷 등의 신기술이 민간으로 흘러 들어가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면서 기존 과점체제를 흔들기 시작했다는 것. 여기에다 운송비를 극적으로 줄인 대형 화물선과 수송기, 컨테이너, 인공위성 등 운송과 통신의 신기술이 세계화의 불을 당겨 기업들간 경쟁이 격화되었다. 레이건 전 대통령 등 보수적인 인물이나, 신자유주의 같은 이념의 영향보다는 신기술과 조직의 현실적 욕구가 경제 변화의 원인이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신기술의 보급은 탈규제를 촉진시켰고 특히 금융분야에서 개인들을 단순한 저축자에서 투자자로 변화시켰다. 이런 흐름에 따라 월마트는 가장 싼 가격에 상품을 팔게 됐지만, 직원들의 임금과 복지수준은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 증시는 80년대 초부터 2000년대까지 계속해서 올라갔다. 슈퍼자본주의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가득하지만 사실 미국인들은 소비자와 투자자로서 엄청난 득을 보았다는 저자의 분석이 날카롭다.
 
문제는 기업들이 번 막대한 돈이 워싱턴 정가로 흘러 들어가 시민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슈퍼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저해하지 못하도록 시민으로서 미국인이 해야 할 일은 기업들이 게임의 룰을 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저자의 제안은 한국에도 해당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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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합리적 균형을 위하여 (조선, 정운찬 전 서울대총장, 2008.05.30 17:14)
정치권·기업 사이 새로운 법과 제도 필요
사회적 책임 강요는 이윤추구 원칙에 어긋나 

 
적어도 2차 대전 후 1970년대 중반까지의 미국은 경제적 자본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가 손에 손을 잡고 간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 후 그 관계는 균형을 잃어버렸다. 자유시장의 자본주의는 승리했을지 몰라도 민주주의는 오히려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국가의 일》(The Work of Nations)로 널리 알려진 로버트 라이시(Reich) 교수는 이 책에서 '슈퍼자본주의'가 민주주의적인 자본주의를 대체했다고 선언했다. 슈퍼자본주의란 무엇을 말하는가? 라이시 교수가 말하는 슈퍼자본주의란 소비자와 투자자가 각각 낮은 소비재가격과 높은 투자수익률을 가능한 한 극대로 추구하는데 성공한 상황, 그리고 계속해서 그것을 추구하고 있는 상황을 말한다.
 
라이시 교수에 따르면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시대에는 대기업, 정부, 노동자, NGO들이 안정적인 과점(寡占)체제를 이루며 생산자, 소비자, 노동자들에게 성장의 과실을 고루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효율성은 정체됐고 조세프 슘페터(Schumpeter·오스트리아 출신 하버드 경제학자)가 이야기하는 이른바 혁신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정부는 달랐다. 미국의 경우 밀월기의 안정적인 과점체제가 근본적으로 새로운 기술의 개발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 소련과의 경쟁이 국방부와 NASA로 하여금 신기술 개발에 매진하게 했다. 새로이 개발된 아이디어와 기술들은 민간부문으로 흘러 들어갔고, 세계화, 새로운 생산방식의 출현, 탈규제 등의 변화를 일으키며 시장에 경쟁의 바람을 몰고 왔다. 이 과정에서 과점체제를 위협하는 다수의 잠재적 경쟁자들이 출현했고 황금기의 안정적인 과점체제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웠다.
  
금융부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연금기금과 보험회사가 안정성이 높은 회사채와 국공채뿐만 아니라 주식에도 자산을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금융의 탈규제는 사람들의 심리를 바꾸어 각각의 개인들을 단순한 저축자에서 투자자로 변화시켰다. 이로 인해 금융기관들은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유치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게 됐다. 특히 각종 펀드들은 투자자들의 수익을 올려주는 경쟁을 하면서 투자자들의 수익률이 사상 최고로 올라갔다. 결국 투자자들도 덕을 보고 소비자들도 덕을 보았으며 그에 맞게 기업들도 과거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면서 혁신적이 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성공의 이면에는 점점 더 낮아지는 임금과 복지혜택, 일자리 상실, 불평등의 심화, 공동체의 상실, 지구온난화, 추잡한 제품 등과 같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라이시 교수는 이런 과정에서 민주주의적인 자본주의의 중심적인 기관들, 즉 거대 과점기업, 거대 산별 노조, 그리고 법적 규제를 통해 지역의 이익을 대변하던 정부 기관들이 해체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권력은 소비자와 투자자들로 이동했고, 슈퍼자본주의가 민주주의적인 자본주의를 대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슈퍼자본주의가 너무도 효율적이고 역동적이어서 시민으로서의 욕구는 오히려 전보다 커졌지만 우리가 시장에서 행사하는 갖가지 선택은 시민으로서의 우리의 가치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 소비자-투자자와 시민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이루는 사회적 방식 혹은 법과 제도 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지만 이런 논의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미국인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잃고 있다. 정치권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기업들의 로비활동에 포섭됐다. 정치권에서 대기업으로부터 나오는 돈의 역할은 점점 더 커졌고, 경쟁적인 기업 이익들의 충돌 이외의 다른 문제들은 정치권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역설에 답이 될 수 있다는 견해가 사회 일각에서 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 목표인 기업에게 도덕성을 요구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게임의 규칙,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라이시 교수에 따르면 슈퍼자본주의의 승리는 뜻하지 않게 민주주의의 쇠퇴를 초래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활기찬 자본주의와 함께 활기찬 민주주의도 누릴 수 있다. 그렇게 하려면 이 두 영역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목적은 소비자와 투자자에게 좋은 거래를 제공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목적은 소외 계층을 배려하면서 우리가 개별적으로 이룰 수 없는 목표들을 사회적 합의를 통해 달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게임의 규칙을 바꾸기 위해 라이시 교수는 노동조합의 강화와 정치 헌금의 제한을 제안하고, 나아가 기업은 법률적인 허구로서 많은 계약들을 함께 묶은 것에 불과하다면서 기업에게 민주주의의 권리나 의무를 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법인세가 비효율적이고 또한 불평등하므로 법인세를 폐지하고 기업이 주주들을 대신해 벌어들인 모든 소득에 (그것이 기업에 유보됐거나 배당금으로 지급됐든지 간에) 개인적인 세금을 내게 하자고 말했다. 대신 그는 기업에 대한 형식적 기소를 중지하고 기업에게 법정에서 다툴 제소권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만이 시민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만이 민주주의적인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이시 교수의 현대 자본주의 분석은 날카롭고 또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훌륭한 진단이 반드시 명쾌한 처방을 가져오지 않을 수 있듯이 라이시의 슈퍼자본주의에 대한 대책이 현실적인 것인지, 그리고 바람직한 것인지는 선뜻 장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은 한국 경제가 당면한 현실을 이해하고 앞으로의 전개방향을 가늠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오늘날 '슈퍼자본주의'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별로 없으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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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ㆍ기업 위한 정책이 모두에 좋다? (프레시안, 이승선·기자, 2008-07-24 오후 4:36:53)
[해외시각] 오바마의 경제노선을 지지하는 이유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 시절 노동부 장관을 지내고 최근 <슈퍼자본주의>라는 저서로 주목을 받은 로버트 라이시가 미국의 대선 D-100일(26일)을 앞두고 양대 후보인 공화당의 존 매케인 상원의원과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의 경제정책을 간결하게 비교하며, 오바마의 경제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라이시에 따르면, '슈퍼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로 불리는 세계화된 자본주의를 의미하며, 이 체제 하에서는 투자자와 소비자에게 권력이 쏠리면서 '시민'은 실종돼 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무너지는 위협에 놓인다.
  
그는 7월 22일(현지시간) 자신의 홈페이지에 '매케이노믹스'와 '오바마노믹스'를 간결하게 요약 비교하면서 '오바마노믹스'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부자와 기업을 위한 정책이 모든 미국인에게 혜택을 줄 것(이른바 '트리클 다운 효과')이라는 '매케이노믹스'는 세계화된 경제에서는 타당성을 잃어가고 있으며, 오바마노믹스가 더 이치에 맞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국내에서도 현정부의 노선은 매케이노믹스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이 글은 주목된다.
 
다음은 'A Short Primer on McCainomics Versus Obamanomics'라는 글(원문보기)의 주요내용이다. <편집자>
  
매케인과 오바마는 근본적으로 다른 경제철학을 제시하고 있다. 매케이노믹스는 위에서 아래로(하향식)의 경제노선이라면, 오바마는 아래에서 위로의(상향식) 경제노선이다.
  
하향식 경제노선의 논리는 이렇다.
1.부자에게 관대한 감세정책을 편다면, 그들은 더 열심히 일하고 투자할 유인을 갖게 될 것이다. 그 결과 더 많은 일자리와 더 빠른 경제성장이 이뤄져 일반 국민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  
2. 기업에게 관대한 감세정책을 실시하고, 임금 인상을 억제하고, 규제를 완화한다면 국제경쟁력이 높아질 것이다. 그 결과 미국인을 위한 일자리가 많아지고 경제성장도 촉진된다.  
3. 미국의 평균 에너지 비용을 줄이는 최선의 방법은 석유기업들에게 채굴할 더 많은 땅을 제공하고, 세금을 깎아주고, 자본조달 비용을 낮춰주는 것이다. 이런 조건을 준다면, 그들은 더 많은 석유를 공급해서 유가를 낮추게 될 것이다.  
4. 금융시장의 위기를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월가의 대형 투자은행, 그리고 패니매와 프레디맥(미국의 양대 국책 모기지업체)의 손실에 대해 정부가 보장해주는 것이다. 그 결과 더 많은 대출이 보다 낮은 금리로 일반 미국인들에게 제공될 것이다. (그들에게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것이 '도덕적 해이'를 초래한다는 위험이 있지만, 유동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면 조그만 대가다).

  
이런 전제들은 그 타당성이 매우 의문스럽다. 특히 세계화된 경제에서 그렇다. 부자들이 감세로 인해 추가로 얻어진 수익을 미국에 투자하리라는 법이 없다. 그들은 가장 높은 대가를 얻을 수 있는 곳이라면 세계 어디에건 투자한다. 미국에 기반을 둔 대기업들은 전세계에서 활동한다. 생산성이 있으면서도 값싼 노동력이 있는 곳을 찾아 세계 어느 곳이건 확장하고, 구매자가 있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든 판매한다.
  
석유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수급 상황에 맞춰 가격을 결정한다. 미국 영토에서 채굴을 더 많이 하는 것은 미국에 환경 파괴의 위험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이득은 중국, 인도, 유럽 등도 함께 누린다. 금융시장도 세계화됐다. 따라서 구제금융의 잠재적 부담(도덕적 해이도 포함해서)은 미국 납세자들이 지지만, 그 이득은 전세계가 공유한다.
  
하향식 경제노선이 완전히 엉터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경제이기 때문에 미국의 상층부에게 이득이 되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어느 정도 혜택이 될 것이며, 그들에게 손실이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부담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세계화된 경제에서 상향식 경제노선이 보다 이치에 맞다.
   
상향식 경제노선의 논리는 이렇다.
1. 미국의 경제성장은 노동자의 생산성에 달렸다. 그들은 미국에 삶의 터전을 갖고 있지만, 세계화된 자본과 미국의 대기업은 그렇지 않다.  
2. 미국 노동자의 생산성은 교육, 건강, 기반시설에서 나온다. 이런 분야에 대한 공공투자는 미래의 번영을 위해 필수적이다.  
3. 세계의 자본이 미국에 들어와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미국의 세금이나 임금, 규제 비용이 싸기 때문이 아니다. (미국보다 싼 곳은 다른 곳에도 많이 있다) 미국 노동자들의 생산성이 높기 때문이다.  
4. 에너지 비용에 대한 해답은 다국적 석유기업들이 더 많은 석유를 채굴하는 것이 아니라, 석유와 탄소 연료가 아닌 친환경연료와 에너지 보존 수단을 개발하려는 미국인의 창의력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대안을 찾는 기초연구개발을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  
5. 경기후퇴와 경기 악화를 피하려면 부채와 압류의 늪에 빠져들고 있는 일반 미국인들의 금융상황을 개선해 줄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 경제가 만들어내는 상품과 서비스를 흡수할 구매력이 받쳐주지 않게 된다.(도덕적 해이 논란이 있지만, 그들에게 대출해준 금융기관들이 대출을 받은 사람들보다 리스크에 대해 주의할 책임이 더 컸다)
  
매케이노믹스와 오바마노믹스를 둘러싸고 앞으로 벌어질 논쟁에 귀를 기울이자. 그리고 오바마노믹스가 실시돼 앞으로 성과를 거둘 것을 기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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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기업’이 경제 위기 극복의 희망이라고? (시사인 [76호] 2009년 02월 23일 (월) 15:01:31 고동우 기자)
‘친환경 경영’을 강조하면서 자연환경 파괴에 앞장서고, 사회적 약자 보호를 말하면서 최저임금 인하를 촉구하는 기업을 어떻게 봐야 할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둘러싼 논란을 살펴봤다. 
 
위기의 시대, 그 어느 때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다. 가까운 예로,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월15일 “정부가 여러 대책을 세우지만 대기업도 사회적 책임을 다 해줬으면 좋겠다”라며 일자리 확충 노력을 요청한 바 있다. 2월17일에는 중소기업중앙회 등 13개 중소기업 단체가 ‘사회적 책임 이행계획’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김기문 중기중앙회 회장은 “중소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라며 일자리 나누기, 윤리경영 정착에 적극 나서겠다고 밝혔다.
 
대기업부터 중소기업, 그리고 정치권과 시민단체·노동조합까지 말하지 않는 곳이 없는 사회적 책임은 이제 기업 경영의 ‘기본’으로 정착된 듯 보인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최근 매출액 상위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체 응답 기업의 90% 가까이가 경기 한파 속에서도 ‘사회 공헌’ 활동 규모를 현재 수준으로 유지(45.1%)하거나 더 확대(42.2%)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국민 다수는 기업의 이러한 활동을 ‘이미지 높이기용’으로 본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있긴 했지만 그 자체를 비딱하게 볼 필요는 없어 보인다. 진정성을 떠나, 어쨌든 중요한 사회 이슈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사회문제 해결의 ‘핵심 대안’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선 논란이 적지 않다. 우선 해당 기업의 ‘실체’가 왜곡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민주노총 한 관계자는 “기업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러 비판 여론이 빗발칠 때, ‘면죄부’를 받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사회적 책임을 거론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비판한다.
 
최근에도 마찬가지다. ‘함께 살자’는 외침도 잠시, 다른 한편에선 사회적 책임과 별 상관없어 보이는 노력 또한 줄기차게 진행된다. 재계가 추진하는 비정규직 기간 연장, 최저임금 인하, 해고 요건 완화 시도가 대표적이다.
 
제2 롯데월드, 인천 계양산 골프장 건설 추진으로 ‘환경파괴 기업’이라는 비난을 듣는 롯데는 그 어느 기업보다 ‘친환경’을 강조한다. 에너지 절감에 힘쓰고 어린이 환경학교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고 소개한 롯데백화점의 2007년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보면, 환경단체가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다.
 
포털 사이트 다음의 경우를 보자. 다음 측은 지난해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아고라를 ‘토론의 메카’로 표현하면서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발전하길 기대한다”라고 밝힌 바 있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디지털 민주주의 성지’라고 추앙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다음은 그저 인터넷 기업일 뿐이었다. 몇 달 뒤,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의 신상 자료를 검찰에 ‘아무 저항 없이’ 넘김으로써 표현의 자유와는 무관한 조직임을 스스로 고백했기 때문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풍조가 낳을 수 있는 더 큰 문제는 ‘더 근본적인 대책’을 무력화한다는 점이다. 미국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낸 바 있는 로버트 라이시(UC버클리 교수)는 저서 <슈퍼자본주의>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사회적으로 책임을 지겠다는 기업들의 약속은 더 엄격한 법률이나 규제로부터 대중의 관심을 떼어놓을 수 있고, 혹은 처음부터 문제 같은 건 별로 없었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도 있다.” 쉽게 말해 기업들이 자율성이 제약되는 정부 규제 등을 회피하기 위해 사회적 책임을 ‘앞장서’ 강조하는 경향도 있다는 이야기다. 지난 2005년 한 해외 언론이 실시한 조사에서 기업들의 절반 가까이(45%)가 사회적 책임의 중요한 기대 효과로 ‘정부 규제 감소’를 꼽은 것은 이같은 지적이 단지 ‘의심’이 아님을 입증한다.
 
이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지난 1월 전경련은 ‘상생’을 말하며 대기업들이 중소기업에 대한 현금 결제 비중을 높일 것이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 단체는 중소기업들과 금속노조가 제시하는 근본 대안인 ‘납품단가 연동제’에는 “시장경제 원리에 어긋난다”라며 격렬히 반대한다. 모든 규제가 선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기업의 자율적 약속에만 맡겨둘 경우 생길 폐해는 자명하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소속 기업의 지난해 4분기 판매대금 중 어음 결제 비중을 조사한 결과, 2002년 조사를 시작한 이래 최고치이자 같은 해 1분기보다 9% 포인트 이상 높은 45.1%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얼마 전에는 환경부가 주유소나 산업시설 등에 대한 토양오염도의 검사 주기를 완화할 것이라고 밝혀 환경단체의 반발을 샀다. 에너지 기업들의 규제 완화 요구를 수용한 것인데, 이들 기업 또한 다양한 환경오염 방지 활동을 ‘스스로’ 하고 있다고 내세운다. 하지만 “대중에 대한 기업의 책임성은 기업 내부 이사회보다 법과 규제 등 민주적인 과정 속에서 더 잘 다루어질 수 있다”라는 라이시의 주장에 따르면, 이는 위험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한 경제단체의 핵심 관계자는 사회적 책임에 대해 이렇게 속내를 밝힌다. “사회적 책임을 규제화로 유도하거나 기업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쪽으로만 해석하려는 일각의 시각이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사회적 책임 활동의 출발점은 이윤 추구라는 기업 고유의 목적 달성에 기반해야 한다. 규제를 통해 강제해서도 안 된다. 기업은 정부의 대안이 될 수 없으므로 정부가 할 일을 대신하려 해서도 안 되고, 그러한 구실을 기업에 강요해도 안된다.”
 
관련 시민단체 쪽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촉진하는 운동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라는 견해이다. 최정철 기업책임시민센터 이사는 “강력한 규제가 중요하다는 데 동의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업의 행동 지향점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잡아주는 구실을 외부에서 해야 한다. 이를테면 현재 같은 경제 위기 속에서는 규제로만 고용을 지킬 수 없다. 사회적으로 지속적 고용이 가능하게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것이 ‘사회적 책임’의 역할이다”라고 말한다.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기업을 무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몇몇 사례만으로 그 기업을 ‘착한 기업’이라 운운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2001년 회계 부정 사건으로 미국 경제와 노동자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엔론은 사회 공헌을 강조하는 미국의 대표 기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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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업은 착한 기업?' 논쟁 다시 불붙어 (머니투데이, 김유림 기자 | 2008/09/09 13:14)
 
좋은 기업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인가 이익을 많이 내는 기업인가. 기업의 역할에 대한 해묵은 논쟁이 클린턴 행정부 시절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히의 새 저서를 통해 다시 불붙고 있다고 이코노미스트가 최신호에서 보도했다.
 
지난 10년간 선진국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CSR)'이라는 단어가 기업들이 가져야만 하는 사명감처럼 따라 붙었다. 최근에는 이머징마켓 국가의 기업들 조차 CSR을 무시하고서 기업활동을 하면 비난을 받는다. 밀턴 프리드먼의 후예를 자처하는 자유 시장론자들은 이에 대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오직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라면서 CSR에 부정적 입장을 보여왔다.
 
하지만 라이히 UC버클리대교수의 비판은 전혀 새로운 방향에서 시작됐다. 그는 지난 3일 출간한 '슈퍼자본주의(Supercapitalism)'에서 자유로운 시장이 자유로운 사회를 보장하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요지는 자본주의를 수용하고도 민주주의를 보장하지 않는 나라가 여전히 많으며 오히려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잠식한 측면도 있다는 것. 보통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민주주의가 보장될 것이란게 보편적 믿음이었지만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라이히 교수는 러시아나 멕시코 등을 예로 제시했다.
 
그는 기업들이 노동과 환경 등 기본 권리 보장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CSR'도 사실은 민주주의를 갉아먹게 하는 위험한 인식의 전환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업은 사실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존재 자체가 될 수 없는데 기업에 이런 의무를 부여하고 준수하도록 강제하면서 사실 정부가 해야 할 일들을 희석시켜버렸다고 분석했다. 오히려 정부가 기업들이 지켜야할 사회적 법규나 질서 등을 만들고 이행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지만 기업들이 직접 이를 행하게 함으로써 결과는 더 나빠졌다는 주장이다.
 
라이히 교수는 "월마트나 구글이 나쁘냐 좋으냐를 논쟁하는 것은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게 만든다"면서 "그 시간에 정부에 공정거래법을 만들라고 요구함으로써 기업들이 사회적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못하게 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기업들이 CSR을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역으로 우롱하는 사례도 많다고 지적했다. 월마트가 환경보호에 앞장선다며 사용하는 재활용 쇼핑백은 사실 비용절감을 위한 선택이며 스타벅스가 파트타임 직원들에게까지 의료보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역시 이직을 막아 노동 효율성을 높이려는 전략적 선택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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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것은 ‘착한 기업’ 아닌 ‘각성한 개인’ (시사IN [98호] 2009년 07월 25일 (토) 00:14:08 이찬근 인천대 교수·무역학)
슈퍼자본주의의 역동성은 그대로 살려나가면서 개인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를 복원할 방법은?  
 
미국발 서브프라임 위기로 세계 자본주의가 휘청거리고 있다. 자본주의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슘페터는 일찍이 1942년에 출판한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자본주의는 물질적 생산력에서 너무도 큰 성공을 거둔 결과 마침내 붕괴되고,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시민사회의 욕구에 의해 사회주의로 이행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세기가 지난 후 슘페터의 가설은 오류로 판명되었고,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와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했다.
 
클린턴 행정부의 핵심 브레인이자 노동부 장관을 역임한 미국의 탁월한 경세가 로버트 라이시는 오늘날의 지구화한 자본주의가 마치 터보 엔진을 장착한 듯 초강력 ‘슈퍼자본주의’로 구동함으로써 물질적 풍요가 확산되고 인류의 다수가 절대 빈곤으로부터 해방되기에 이르렀지만, 기존 공업국에서는 일제히 일자리가 파괴되고 빈부 차가 날로 심해짐으로써 민주주의가 위협받기에 이르렀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라이시는 슘페터와 달리 자본주의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견하지 않는다. 그는 슈퍼자본주의의 역동성은 그 자체로서 살려나가되, 거대 자본이 정치권력을 잠식해 들어가는 통로를 차단함으로써 개인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이시에게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여전히 공존할 여지가 존재하는 것이다. 
 
라이시는 진보 학자이지만 거대 자본을 결코 ‘악’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거대 자본의 가혹한 이윤 논리로 인해 생산 공간이 전 지구적으로 재배치되고 노동자들은 심각한 일자리 불안에 처하게 되었지만, 소비자로서의 개인은 더 싸고 더 다양한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또 투자자로서의 개인 역시 금융시장에 참여함으로써 다수가 자산 소유 계층의 반열에 오르고 투자소득을 올려 근로소득을 보전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것이 바로 슈퍼자본주의가 기획한 탈산업화·탈계급화 시대의 새로운 사회상이다. 개인의 정체성은 더 이상 ‘노동 대 자본’이라는 대립 구도에 갇혀 있지 않다. ‘나’ 안의 노동자는 탈산업화 시대를 불안으로 인식하지만, ‘나’ 안의 소비자와 투자자는 탈산업화 시대를 긍정한다. 
 
문제는 앞으로 제조업에 기대어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없으므로 어떻게든 개개인이 장기를 살려 차별적 경쟁력을 확보하고, 지구적 노동시장에서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 개인의 역량이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일자리의 내용이 소득을 결정짓는 구조이므로 개인은 치열하게 완성도를 높여 대응해야 하고, 국가는 제로 베이스의 교육 개혁으로 개인을 지원해야 한다
 
이처럼 라이시의 관심사는 개인이다. 그는 탈산업화 시대에 문제 해결의 핵심 축은 기업이 아니라 개인이므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같은 모호한 개념에 기대지 말라고 강력히 주문한다. 기업은 법적 행위의 주체로서 편의상 법인격이 부여되어 있지만, 결코 도덕적 가치 판단의 주체가 아니므로, 기업에게 사회적 형평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사명감을 기대하는 것은 난센스라는 것이다. 오히려 기업을 이윤 창출의 기제로서 명확히 선을 그어 인식하고, 기업이 정교한 로비전이나 선거자금 제공을 통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차단하는 일이야말로 개인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거대 자본은 이미 국적성을 상실했고, 국민경제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본과 노동이 한 배를 탔던 시대는 저물었다. 탈산업화 시대의 불안을 개인의 역동성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정치의 중심은 개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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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9 19:02 2008/09/19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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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불법파견에 대한 원청의 고용 책임 명확하게 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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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허용하는 업무 이외의 불법파견이라도 파견기간 2년을 넘기면 원청업체가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은 18일 성명대신 보도라는 이름으로 권두섭 변호사의 해설글을 홈페이지에 싣는 등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이 같은 의미있는 판결에 대해 조중동은 19일자 지면에서 다루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이 사건의 대법 판결에 대해서 노동계가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왔는데도 말이다. 
 
한겨레는 예상보다 크게 19일자 1면 <법개정전 불법파견도 2년 넘기면 원청업체에서 직접 고용해야>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지형 대법관)는 18일 이아무개씨 등 2명이 부당해고임을 인정하지 않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대법관 14명 전원일치로 원고 패소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며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파견 기간이 2년을 넘길 경우 직접 고용으로 간주하는 옛 파견법을 이른바 '적법한 파견'에만 적용된다고 축소해석한 원심의 판단은 파견법의 입법취지에 비춰 근거가 없고 타당하지 않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다른 신문과는 달리 12면 <대법 '불법파견도 고용책임' 판결 의무/간접고용 사업주 법적 책임 회피에 제동>에서 이 판결에 대해 "사업주들이 파견·도급 등 간접 고용 형태를 악용해 직접 고용 책임을 회피하려는 움직임에 제동을 건 것으로 풀이된다"고 평가기사를 올렸다. 
 
경향신문, 한국일보와 서울신문도 각각 이 기사를 다뤘다. 하지만 한나라당, 민주당은 물론 진보정당인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도 이에 대해서는 성명이나 논평 등이 나오지 않았다. 이것이 무관심 때문인지, 아니면 이 사안을 잘 모르기 때문인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중대 노동현안 판결에 대해 논평이 없다는 사실은 그 만큼 비정규직 문제에 소홀함을 잘 드러내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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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불법파견 시 원청이 직접고용 해야” (참세상, 이꽃맘 기자, 2008년09월18일 17시57분)
불법파견 시 고용의제 논란 일단락, 민주노총 “상식적 판결”
 
大法 '불법 파견'도 2년 지나면 직접 고용해야 (프레시안, 여정민/기자, 2008-09-18 오후 5:30:40)
'파견 노동자 보호' 입법 취지 살려 불법파견에도 파견법 적용한 첫 판결 
 
  불법 파견의 경우라도 2년 이상 일한 경우에는 직접 고용한 것으로 봐야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18일 나왔다. 불법 파견에 대해 이미 직접 고용된 것으로 보는 '고용 의제'가 적용된 대법원 판례는 처음이다. 같은 불법 파견 건에 대해 정반대의 엇갈린 판결을 내려 온 하급심의 혼란을 대법원이 말끔하게 정리한 것이다. 이날 판결은 코스콤 비정규직 등 현재 법적 다툼을 벌이고 있는 각종 사업장의 소송 결과에도 막대한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1심·2심과 달리 "불법파견에도 파견법 적용 가능"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대법원장 이용훈, 주심 대법관 김지형)는 18일 옛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파견법)이 허용하고 있는 26개 업무 이외의 업무에 파견된 노동자도 2년 넘게 일했다면 직접 고용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는 용역업체 소속으로 도시가스 소매업체인 (주)예스코에서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일했던 이모 씨(30)가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을 상대로 낸 부당해고 구제 재심판정 취소 소송에 따른 것이다. 대법원은 이날 원고 패소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밝혔다.
 
  이 씨 등은 총 5년 7개월 동안 이 업체에서 일을 했지만 소속은 계속 바뀌어 왔다. 지난 2005년 11월 30일 이 업체가 이들에게 해고 통보를 했고 이들은 서울지방노동위와 중노위에 차례로 구제 신청을 했으나 모두 기각 당했다. 끝내 이들은 중노위 위원장을 상대로 '부당해고 및 부당해고구제 재심판정 취소' 소송을 낸 것이다.
 
  이 씨 등의 주장은 "파견 근무 기간 2년이 지나면 자동으로 사용 사업주 즉 원청이 직접 고용한 것으로 간주하는 파견법을 우리에게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심과 2심 재판부는 불법 파견은 인정하면서도 파견 허용 업무가 아닌 곳에서 파견 근로자를 사용한 만큼 파견법을 적용할 수 없다며 이들의 요구를 거절했었다.
 
  "불법 파견이라고 파견법 적용 안 된다는 주장은 입법 취지와 위배"  
  하지만 대법원은 "파견의 상용화와 장기화를 방지하고 그에 따른 파견 근로자의 고용 안정을 도모한다"는 파견법의 입법 취지에 무게를 두고 하급심과 다른 판단을 내렸다. 비록 파견법에 명시된 업무가 아니라 할지라도 실제 파견의 형태로 일해 왔다면 똑같이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1심과 2심의 결론대로라면, 파견법을 위반한 사업주가 오히려 직접 고용 성립의 부담을 지지 않는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처음으로 대법원이 불법파견에 대한 고용의제 적용에 대해 판단을 내린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 동안 비슷한 경우의 사건에 대해서 대법원이 "위장도급이니 원청이 사용자"라는 판결을 내린 적은 있지만, 불법파견에도 파견법을 적용할 수 있는지 여부는 가리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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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간접고용 사업주 법적책임 회피에 제동 (한겨레, 황예랑 기자, 2008-09-18 오후 09:17:07)
대법 ‘불법파견도 고용책임’ 판결 의미 
파견노동자 고용안정에 무게…노동계 환영 
 
‘불법’ 파견 노동자에 대한 원청업체의 고용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의 18일 판결은, 사업주들이 파견·도급 등 간접 고용 형태를 악용해 직접 고용 책임을 회피하려는 움직임에 제동을 건 것으로 풀이된다. 법원은 ‘노동시장의 유연성’보다는 파견 노동자의 ‘고용 안정과 보호’에 무게를 실어 줬다. 
 
원고 이아무개씨 등은 도시가스 공급업체에서 파견-도급-계약직 등으로 5년7개월 동안 일했다. 이들은 파견법이 허용하지 않은 전화 접수 업무 등을 했다. 회사가 2005년 계약을 해지해 해고하자 이들은 “2년 이상 일했으니 직접 고용해야 한다”며 소송을 냈다. “2년 이상 일한 파견 노동자는 원청회사에 직접 고용된 것으로 본다”는 옛 파견법의 ‘고용 의제’ 조항이 근거였다. 하지만 1·2심은 “불법 파견이기 때문에 옛 파견법의 이 조항을 적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처럼 파견 노동자를 허용하지 않은 업무에 쓰거나, 무허가 파견업체 노동자를 쓰는 등 ‘불법’ 파견 노동자를 사용한 사업주의 고용 책임에 대해 그동안 하급심 판결들은 엇갈렸다. 법에 2년이란 파견 기간만 정하고 다른 요건들은 명시하지 않아서 빚어진 혼선이다.
 
대법원은 이날 적법·불법 여부와 상관없이 “파견 노동자를 2년 넘게 쓰면 원청회사가 직접 고용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못박았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불법 파견 노동자를 써 법을 어긴 사업주가 적법한 사업주와 달리 직접 고용 부담을 지지 않는 것은 형평에 어긋난다”며 “사업주가 오히려 무허가 파견업체로부터 노동자를 받는 쪽을 선호하게 만들어 파견제도의 근간을 무너뜨릴 염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판결이 당장 노동시장에 끼칠 직접적 영향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7월부터 시행된 개정 파견법은 고용 의제 조항을 ‘고용 의무’로 바꾸면서, 2년 이상 파견 노동자를 사용하면 직접 고용할 의무를 지웠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사건처럼 개정 파견법 시행 전에, 2년 이상 일하다가 해고된 불법 파견 노동자들은 회사를 상대로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 등을 낼 수 있다.
 
노동계는 대법원이 지난 7월 ‘현대미포조선이 위장 도급 계약을 맺은 사내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실질적 사용자’라고 인정한 데 이어 이번 판결을 내놓은 것을 반기는 분위기다. 파견 노동자 규모는 지난해 노동부가 7만5천명, 노동계가 17만5천명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도급을 위장한 파견이나 무허가 파견 등 ‘불법 파견’은 통계에 잘 잡히지 않아, 정확한 규모는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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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개정전 불법파견도 2년 넘기면 원청업체에서 직접고용해야 (한겨레, 김남일 기자, 2008-09-18 오후 07:10:38)
  
법이 허용하는 업무 이외의 불법파견이라도 파견 기간 2년을 넘기면 원청업체가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직접 고용을 회피하려는 원청회사의 행태에 경종을 울린 것으로, 지난 7월 위장 도급의 법률적 기준을 제시한 대법원 판결에 이어 ‘간접 고용’의 악용을 제한하려는 의지를 밝힌 판결로 받아들여진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지형 대법관)는 18일 이아무개(30)씨 등 2명이 부당해고임을 인정하지 않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대법관 14명 전원일치로 원고 패소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파견 기간이 2년을 넘길 경우 직접 고용으로 간주하는 옛 파견법을 이른바 ‘적법한 파견’에만 적용된다고 축소 해석한 원심의 판단은 파견법의 입법취지에 비춰 근거가 없고 타당하지 않다”고 밝혔다.
 
2000년부터 도시가스 공급업체인 예스코에서 고객 상대 업무를 해 온 이씨 등은 2005년 회사가 업무 감소 등을 이유로 일방적으로 고용계약을 해지하자 ‘파견 기간이 2년을 넘겼기 때문에 파견법에 따라 직접 고용된 관계로 봐야 한다’며 노동위원회에 구제 신청을 했지만 기각당하자 소송을 냈다. 1·2심 재판부는 컴퓨터 전문가, 조리사 등 26개 업무로 파견 대상을 제한한 옛 파견법을 근거로 “법에서 정하지 않은 일을 해 온 이씨 등의 경우는 불법파견이므로 파견법 적용 대상이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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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대법원, 불법파견에 대한 원청의 고용 책임 명확하게 판시 (2008.9.18.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불법파견도 2년이 넘으면 구 파견법 제6조 3항 고용의제 규정 적용된다. 
 
1.대법원 판결의 의의와 남은 과제
 
1) 의의
- 불법파견을 한 원청회사가 사용자로서 고용상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에 의의
-특히 중간착취를 위해 불법파견을 남용해 온 사용자들에게 고용책임을 분명하게 제시하여 불파를 근절할 수 있는 계기.
- 엇갈리던 하급심 판결들로 인한 혼란을 정리한 것임
- 구 파견법 시행이 1998. 7. 1.부터이고 이미 해당 조항(구 파견법 제6조 3항)은 개정되어 없어진 상태(현행 파견법은 파견법 제6조의 2에서 불법파견 2년 경과시 직접고용의무 조항으로 규정)로 대법원이 10여년이 지난 지금에야 너무 늦게 입장을 밝힌 점은 아쉬움이 있음
- 다만, 구 파견법은 합법파견의 경우에도 2년 경과하면 직접고용이 의제되는데, 불법파견의 경우에는 당연히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상식을 확인한 판결
- 간접고용 형태를 이용하여 고용관계상의 법적 책임을 회피하는 것에 경종을 울리는 판결로서 의미가 있고 이에 대한 대법원의 의지를 읽을 수 있음(최근 현대미포조선 판결 참조 : 위장도급, 직접근로관계 인정)
 
2) 남은 과제
더 중요한 문제는 도급계약으로 고용관계를 회피하는 것을 엄격하게 막는 것임. 즉 지난 번 현대미포조선 판결처럼 원청업체와 직접 근로관계를 인정하는 것을 확대하거나, 최소한 파견근로관계로 인정하여 법적 책임을 지우는 것이 필요한데, 결국 파견과 도급의 구별기준에 대하여 대법원이 어떻게 판단하는가가 매우 중요함. 사용자가 외형을 조금 바꾸었다고 쉽게 ‘도급계약’으로 인정하게 되면 이 사건 판결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 즉 간접고용에서 ‘도급계약’ 인정은 아주 엄격한 요건 아래에서만 인정해야 함 
 
② 2007. 7. 1.자로 파견법이 개정됨, 고용의제 조항은 삭제되었고 지금은 불법파견으로 2년이 경과한 경우에는 직접고용의무로 규정, 사용자가 직접고용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에 그 법적 효과는 어떻게 되느냐. 즉 근로자는 불법파견을 한 원청회사를 상대로 어떤 청구를 할 수 있는가가 문제임. 즉 개정법의 ‘직접고용의무 조항’의 효력에 대한 해석 문제가 남아 있음. 즉 “근로자파견법 제6조의2는 그 문언에 따라 사용사업주는 파견근로자에 대하여 고용의무를 부담하고, 파견근로자는 이를 사법상 권리(고용의무 이행 청구 가능)로서 행사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함이 타당할 것임”
 
도급계약이든, 아니면 파견근로관계이든 간접고용에 있어서 원청회사는 최소한 노동 3권에 있어서는 사용자로서 책임을 질 필요가 있음,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경우에 원청회사와 하청회사가 도급계약관계라고 하더라도 하청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사업장 내 노조활동을 좌우하는 것은 원청회사임은 분명함. 원청회사의 단체교섭 의무, 하청 근로자의 사업장 내 노조활동 보장, 부당노동행위 금지 필요, 이 부분에 대하여는 원청회사의 사용자로서 책임 인정 해석 필요함.
 
2. 판결 요지
 
대법원은 2008. 9. 18. 구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2006. 12. 21. 법률 제8076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6조 제3항에서 사용사업주가 2년을 초과하여 파견근로자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파견근로자를 고용한 것으로 의제한 직접고용간주 규정이 파견근로자보호법 제5조 제1항에 정한 파견대상업무가 아니거나, 파견근로자보호법 제7조의 허가를 받지 않은 파견사업주가 행하는 근로자파견의 경우에도 적용된다는 내용으로 재판관 전원 일치로 전원합의체 판결(재판장 대법원장 이용훈, 주심 대법관 김지형)을 선고하였다.
 
3.사건의 개요
 
- 원고 : 이경수외 1 / 피고 중앙노동위원회, 피고보조참가인 주식회사 예스코(구 극동도시가스)
1) 2000. 4. 3. ~ 2002. 4. 2. : 원고들은 A파견회사 소속으로 비서, 타자원 파견계약에 따라 주식회사 예스코에 파견되었으나, 실제로는 고객지원팀에서 근무
☞ 허용되지 않는 업무에 불법파견
 
2) 2002. 4. 3. ~ 2003. 11. 30. : 주식회사 예스코는 구 파견법에 따라 2년이 경과되자 직접고용 책임을 회피할 목적으로 이번에는 B회사(용역업체) 소속으로 종전과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도록 함(예스코는 B회사와 도급계약을 체결함)
☞ 도급계약을 체결하고 있었으나, 실질은 파견근로관계로 판단, 허용되지 않는 업무에 도급계약을 위장하여 불법파견을 행함 
 
3) 2003. 12. 1. ~ 2005. 11. 30. : B회사(용역업체)의 도산을 이유로 예스코는 원고들과 계약직 근로계약을 체결한 후 1회 갱신한 후 2005. 11. 30.에 예스코는 원고들을 계약기간만료를 이유로 해고
 
4) 원고들은 주식회사 예스코를 상대로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구제신청, 이후 중앙노동위원회, 서울행정법원, 서울고등법원을 거침
- 이 사건 하급심(서울행정법원, 서울고등법원)은 위와 같은 불법파견 사실을 인정하였으나, 불법파견에는 구 파견법 제6조 3항(2년이 경과하면 직접고용 의제)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여 원고들의 주장을 배척
 
5) 대법원은 2008. 6. 19. 이 사건에 대한 공개변론을 실시하였고 오늘 판결을 선고함
 
4.사건의 주요 쟁점과 대법원 판단
 
1) 원고들의 주장
- 불법파견에도 구 파견법 제6조 3항 고용의제규정이 적용되므로 2년이 경과한 2002. 4. 3.부터는 주식회사 예스코의 근로자로 고용이 의제되었음
- 그리고 고용의제가 된 경우에는 근로계약 기간을 정한 바도 없으므로 원고들과 주식회사 예스코와는 ‘기간을 정한 근로계약’을 체결한 지위에 있음
- 주식회사 예스코가 2003. 12. 1. 원고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지 않고 계약직 근로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기망 내지 중요한 사실의 착오에 기인한 것으로 무효임, 따라서 원고들은 여전히 기간을 정하지 않은 근로계약을 체결한 상태(정규직)에 있으므로 예스코가 기간만료로 해고한 것은 부당한 해고임
- 위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불법파견으로 3년 7개월, 계약직으로 2년, 도합 5년 7개월동안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업무 수행하였고, 예스코가 해고제한 조항 잠탈 목적으로 위와 같은 고용형태를 취한 것으로 계약직 근로계약은 형식에 불과하고 원고들은 기간을 정하지 않은 근로자의 지위에 있다고 보아야 함, 따라서 기간만료로 해고한 것은 부당해고임
 
2) 쟁점
 1. : 불법파견에도 구 파견법 제6조 3항(2년 경과후 직접고용 의제)이 적용되는지
 2. : 직접고용이 의제된 경우에 그 근로자는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상의 지위에 있는 것인지 여부(고용 의제되는 경우에는 근로자와 사용자 사이에 근로계약기간에 대하여 아무런 의사합치가 없게 되므로)
 
3) 대법원의 판단 :
[요지] 직접고용간주 규정은 파견근로자보호법 제2조 제1호에서 정의하고 있는 “근로자파견”이 있고 그 근로자파견이 2년을 초과하여 계속되는 사실로부터 곧바로 사용사업주와 파견근로자 사이에 직접근로관계가 성립한다는 의미이고, 이 경우 그 근로관계의 기간은 기한의 정함이 있는 것으로 볼 만한 다른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원칙적으로 기한의 정함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이유] ① 직접고용간주 규정은 사용사업주가 파견기간에 관한 제한 규정을 위반하여 계속적으로 파견근로자를 사용하는 행위에 대하여, 행정적 감독이나 형사처벌과는 별도로 사용사업주와 파견근로자 사이의 사법(私法)관계에서도 직접고용관계 성립을 의제함으로써 근로자파견의 상용화·장기화를 방지하고 그에 따른 파견근로자의 고용안정을 도모하는 데에 그 입법취지가 있다.
 
② 그러한 입법취지를 가진 직접고용간주 규정은 근로자파견이 파견근로자보호법 제5조에 정한 파견의 사유가 있는 경우라거나 또는 파견근로자보호법 제7조에 정한 근로자파견사업의 허가를 받은 파견사업주가 행하는 이른바 적법한 근로자파견에 한정한다는 것을 고용간주의 요건으로 들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용성립의제는 사용사업주가 파견기간의 제한을 위반한 데 따른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③ 직접고용간주 규정이 적법한 근로자파견’의 경우에만 적용된다고 축소하여 해석하는 아무런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파견근로자보호법이 규정한 제한을 위반하여 근로자파견의 역무를 제공받은 사용사업주는 오히려 직접고용성립 의제의 부담을 지지 않는 결과가 되어 법적 형평에 어긋나고, 사용사업주로서는 당연히 근로자파견사업의 허가를 받지 아니한 파견사업주로부터 근로자파견을 받는 쪽을 더 선호하게 될 것이므로, 파견근로자보호법에 위반하는 행위를 조장하고 근로자파견사업 허가제도의 근간을 무너뜨릴 염려가 있으므로 타당하지 않다.
(민주노총 법률원 권두섭변호사 017-36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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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주)예스코는 즉각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를 직접고용 정규직화라! (공공노조, 2008-09-19)
불법파견 사용자의 직접고용 책임을 못박은 대법원 판결을 환영한다
 
지난 18일 대법원에서는 불법파견의 경우라도 2년 이상 일한 경우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현재 해고되어 법적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두 명의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공공노조는 이번 대법원 판결을 환영하며 (주)예스코는 대법원 판결에 따라 즉시 비정규해고노동자들을 직접고용 정규직화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공공노조에 가입되어있는 이경수, 김미주 조합원은 6년여 가까이 용역회사 소속으로 도시가스 공급업체인 (주)예스코(구 극동도시가스)에서 일해왔다. 수차례 용역업체가 바뀌었지만 파견법에 따라 2년 이상 근무할 경우 원청회사인 (주)예스코에서 직접 고용한 것으로 인정되므로 고용안정 문제에 대해 큰 걱정을 하지 않고 성실히 근무해왔다. 그러나 (주) 예스코는 지난 2005년 11월 30일 두 조합원을 해고하였고, 부당해고 구제신청 등을 통해 불법 해고임을 호소하여 왔으나 모두 기각된 바 있다. 그 이유는 이들이 맡았던 업무가 파견법에서 정한 업종에서 벗어난 불법파견에 해당되기 때문에 고용의제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1심, 2심 판결을 깨고 지난 18일 불법파견이더라도 파견 노동자가 2년 이상 일했다면 직접 고용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판결을 냈다. 이는 불법파견을 한 원청회사가 사용자로서 고용상의 책임을 져야한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으로 그동안 불법을 저지르고도 오히려 법망을 피해 직접고용 책임을 교묘히 회피해왔던 악질 사용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판결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1,100일의 기나긴 투쟁, 100여일의 단식을 버텨왔던 기륭전자분회 노동자, 1년이 넘게 투쟁하고 있는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온몸에 쇠사슬을 건채 투쟁을 전개했던 KTX - 새마을 승무지부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 우리는 지난 김대중 정권으로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 정책이 바로 비정규직, 그것도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줄을 가장 먼저 옥죄어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목도하고 있다.
 
이번 판결이 고통받고 있는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어지길 바라며 이제는 정부가 나서서 불법파견을 자행한 사용자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실질적 조치가 마련되고 이로 인해 고통받은 노동자들이 직접고용 정규직화 될 수 있는 강제방안이 취해질 수 있도록 법 개정을 비롯한 근본적 대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한다. 이와 더불어 2007년 개악된 2년 이상 파견 근무시 ‘고용의제’조항이 삭제되고 ‘고용의무’ 조항으로 대체되면서 사용자의 고용책임을 완화시킨 근로자파견법은 반드시 이번 대법원 판결 정신에 맞게 재개정되어야 한다.
 
그동안 (주)예스코에서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소송이 진행중인 3년여의 시간동안 생계의 어려움속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고통받아왔다. 그러나 이들이 포기하지 않고 3년여의 시간을 버텨왔던 것은 바로 상식이 상식으로 통해야 한다는 투쟁의 정당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예스코는 불법파견을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이중삼중으로 착취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들을 해고하여 삶의 토대를 나락으로 빠트렸던 지난 과거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지금 즉시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들을 직접고용 정규직화하라!
 
산별노조로 출범한 이래 공공노조는 송파구청 비정규직 투쟁, 광주시청비정규직 투쟁, 송파시설관리공단분회투쟁, 장애인콜택시지회 투쟁, 그리고 얼마 전 승리로 끝난 성신여대분회 투쟁 등을 통해 해고의 위협과 고용불안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조직하고 앞장서왔다.
 
앞으로도 공공노조는 그동안의 성과를 바탕으로 공공성을 훼손하고 노동자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민간위탁, 외주용역화를 저지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직접고용, 정규직화 하는 투쟁을 전개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만일 (주)예스코가 이번 판결의 의미를 축소해석하고 과거를 반성하지 않은 채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들을 직접고용 정규직화하는 것에 시간끌기로 대처한다면 우리 노조는 (주)예스코를 상대로 한 전면적인 투쟁을 전개할 것임을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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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9 15:18 2008/09/19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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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주의와 한국정치’ 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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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보수, 이념적 체계화 과정 필요"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2008-09-17 11:39)
양승태 교수 한국정치사상학회 학술대회서 주장
 
한국의 보수세력이 한 단계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단계에서 벗어나 보수이념을 체계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양승태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보수주의와 한국정치-무엇을 보수할 것인가?'를 주제로 20일 서강대에서 열리는 한국정치사상학회 학술대회에 앞서 17일 미리 배포한 기조연설문을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
 
양 교수가 바라보는 한국 보수주의는 사상적으로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씨앗단계'다. 전쟁으로 촉발된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과 '낙인찍기'가 적어도 6공화국 이전까지 한국사회를 관통하고 있었던 탓이다. 이에 따라 경쟁을 통한 이념적 발전이라는 측면을 보수세력에게 기대하기 힘들었다고 양 교수는 설명했다. 그러나 진보세력이 집권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그나마 진보와의 대결을 통해 보수주의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그렇다면 한국의 보수주의는 어디쯤 와 있는 걸까. 양 교수는 뉴라이트운동과 건국 6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역사의 긍정적 부분을 부각하려는 '역사바로세우기' 노력 속에 보수주의의 현실 좌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예로 뉴라이트운동의 중심이념인 '공동체 자유주의'가 "정치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에 토대를 두기보다는 정치적 상황에 대응키 위해 급조한 정치적, 수사적 성격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다시말해 공동체 자유주의는 인권, 개인의 존엄과 자유, 시장경제, 공동체적 연대감 등 온갖 좋은 '메뉴'만을 표방하고 있는데 이는 개념간 상호 상충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진보세력도 거부하는 이념이 아니기 때문에 보수 세력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이념이 아니라는 얘기다.
 
또 역사바로세우기와 관련, "한국의 산업화를 이룬 인물들의 업적에 수반하는 부패나 공인의식의 결여 등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한 설득력도 없고 보수주의의 이념화에도 기여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보수주의는 현재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철저한 이해 및 보수해야 할 가치의 이념적 근거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토대로 구축할 수 있는 것"이라며 "지킬 만한 것들을 발굴하고 그것들을 이념적으로 체계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최치원 고려대 평화연구소 연구교수도 '한국에서 보수주의적 근대화와 민주주의의 문제'라는 발제문을 통해 "한국 보수세력의 세계관은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근대화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며 "보수세력은 그간 정치적 상황을 성장의 적극적 기회로 활용해 이득을 취해왔다는 점에서 정치적 성격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강정인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개혁적 민주정부 출범 이후(1998) 한국의 보수주의'라는 논문에서 "뉴라이트운동 등으로 쇄신한 한국의 보수세력은 민주주의의 핵심요소인 참여의 확산과 사회경제적 평등의 심화를 거부하고 단지 신자유주의의 원리에 따른 최소한의 민주주의, 곧 슘페터적인 엘리트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밖에 김비환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와 김동하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은 각각 '영국 보수주의 형성과 전개'와 '독일 바이마르 시기의 '보수혁명' 담론에 나타난 공동체의 이념과 민주주의'를 통해 서구 보수주의 역사를 개괄했고, 장인성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는 '현대 일본의 보수주의'를 통해 보수세력의 심리와 논리를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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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이념, 급조한 정치적 수사일뿐” (한겨레, 안수찬 기자, 2008-09-18 오후 02:09:37)
‘보수주의와 한국정치’ 학술대회 
 
‘뉴라이트’로 대표되는 21세기 초엽 한국 보수주의의 약진은 의미심장하다. 시민사회를 일구어 마침내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이에 대한 학계의 논점은 결국 하나로 귀결되는데, 뉴라이트가 그 이름처럼 정말 새로운 것인지 아니면 친일·반공·독재의 과거 수구세력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인지의 문제다. 정치사상의 맥락에서 이를 따져보는 자리가 20일 낮 12시30분부터 서강대 김대건관에서 열린다. 한국정치사상학회가 ‘보수주의와 한국정치- 무엇을 보수할 것인가’를 주제로 여는 학술대회다. 
 
‘공동체 자유주의’는 기존 주장을 재구성한 것
시민사회 조직·동원엔 성공…정체성모색 실패
 
 
강정인 서강대 교수는 발표문에서 민주정부 이후 한국 보수주의 세력의 변화 양상을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 보수세력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출범과 함께 분단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상실”했다. 민주정부가 내건 ‘탈냉전·민주화·다원화’의 가치는 한국 보수주의자들에게 반공주의의 약화와 반미 감정의 확산으로 비쳤고, 이는 “보수주의자들의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는” 일이었다. 이것이 한국 보수주의의 자기 쇄신의 출발점이다.
 
쇄신의 노력은 두 갈래로 나타났는데, 보수 행동주의와 뉴라이트 운동이 그것이다. 김대중 정부 시기인 2003년 ‘반핵반김 국민대회’를 비롯한 각종 대중집회를 통해 전통적 보수집단의 ‘행동주의’가 돌출했다. 강 교수가 보기에 이런 보수 행동주의는 “민주화 이후 발생한 다양한 시민운동과 (진보 진영의) 행동주의를 모방한 것”이다.
 
보수 행동주의를 주도한 것은 전통적 보수세력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4년 이후 ‘뉴라이트’가 출현했다. 강 교수는 이를 “본격적인 보수주의 운동”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뉴라이트의 기치를 내건 이른바 ‘전향 386’들이 “보수언론의 적극적 지원을 받아 단골 논객으로 초대받았고, 보수언론을 대신하여 보수여론을 조성하고 확산하는 선봉장으로 급부상했다”고 분석했다.
 
뉴라이트가 펼친 담론 공세의 핵심은 ‘포퓰리즘’에 대한 것이었다는 게 강 교수의 생각이다. 전통적 보수세력이 내걸었던 ‘빨갱이’라는 이념 공세와 비교할 만한 이 담론은 “더 이상의 민주화는 필요하지 않으며,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추구하는 ‘더 많은’ 민주주의는 타락한 민주주의인 중우정치에 불과하다”는 논리를 함축하고 있다.
 
민주화의 성과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뉴라이트의 담론은 전통적 보수주의와 구분된다고 강 교수는 평가한다. 다만 그것은 ‘엘리트주의적 민주주의’다. 아울러 사회적 자유주의와 평화공존형 자유주의를 거부하고, 신자유주의와 반공자유주의를 옹호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혁신의 요소가 추가된 것이라기보다는 기존의 주장을 좀 더 일관되고 체계적인 논리를 통해 엮어낸 것”이다. 오히려 뉴라이트의 새로움은 정치 자원의 동원 양상에 있는데, “과거처럼 국가에 기대지 않고 시민사회의 다양한 보수세력을 자발적으로 동원·조직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 보수세력의 자기 쇄신의 핵심이다.
 
그런 점에서 양승태 이화여대 교수의 발표문은 한국 보수의 진정한 사상적 성찰을 주문한다. 양 교수는 “그동안 한국 정치에서 보수주의라 불릴 수 있는 이념은 없었다”고 지적한다. 혁신세력과 논쟁을 하며 자기를 정립한 서구의 보수주의와 달리 혁신세력을 아예 절멸시킨 한국 보수주의는 “스스로 지키고자 하는 제도·체제를 뒷받침하는 가치를 능동적으로 파악하면서 이를 이념적으로 체계화하려는 노력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
 
비록 위기의식에서 비롯하긴 했지만 그런 점에서 뉴라이트는 “한국의 보수진영이 이념적 정체성을 본격 모색하기 시작한” 결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강 교수와 마찬가지로 양 교수 역시 그 진전이 대단치 않다고 지적한다. “뉴라이트가 중심 이념으로 내세우는 ‘공동체 자유주의’는 체계적 이념이기보다는 정치적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즉흥적으로 급조한 정치적 수사”라는 것이다.
 
한국 보수주의의 진정한 쇄신을 지체시키는 것은 이명박 정부라고 양 교수는 지적한다. 그가 보기에 이명박 정부는 “보수세력의 일부가 이념 정체성 모색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가치관과 이념에 근거하지 않은 실용성을 내세워, 오히려 보수주의의 이념적 발전 시계를 되돌리고 있다.” 새로움이 없지 않으나 지적 성찰과 이념 정립에는 여전히 실패하고 있고, 다만 새로운 조직 방식으로 국가권력 장악에만 성공했다는 데 뉴라이트의 특징이 있다는 분석이다. 다만 양 교수는 이런 글을 덧붙인다. “그 점에 관해서 진보 진영도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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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8 11:13 2008/09/18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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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대환의 레디앙 인터뷰에 대한 코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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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수 대표가 주대환과 나눈 인터뷰가 레디앙에 실렸다. 이전 레디앙 기고글에서 다 하지 못했던 말을 풀어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진 회원이었던 장태수 대표는 과거 주대환과 함께 활동한 적이 있는 만큼 아마도 오해의 소지가 없이 주대환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정리한 듯 싶었다.
 
그가 쓴 글과 그 글과 관련된 글들에 대해 이러저러한 논평이 오고가고 논란이 되는 것 자체가 사실 그리 바라는 상황은 아니다. 커밍아웃을 통해, 일련의 논쟁을 통해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려는 계획에 말려드는 것 같기 때문이다. 레디앙과 진보신당 홈페이지를 통해서 일부가 논란을 벌이고 있지만, 이에 대해 좌파가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지금 이에 대한 토론에 임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괜시리 판을 키우고 싶지 않은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실제로 『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이라는 책을 뉴레프트 기관지 첫 준비호라고 한 것에서 드러난 것처럼, 사민+복지 기획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사민주의연대와 복지국가 소사이어티, 그리고 장하준 패밀리 등이 모여 정치세력화를 도모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그들에 대해 본격적인 대응을 할 필요성은 없었다.
 
게다가 주대환이 시대정신에 발표했던 글은 이해하기 쉬운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지나친 단순화와 도식화, 사실의 과장 및 왜곡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본격적인 대응을 하는 게 타당한지도 의문이었다. 그 자체가 그들의 프레임에 말려드는 것이다. 물론 주대환이 대한민국의 긍정성으로 내세우고 있는 토지개혁이나 보통선거권 등의 개념들이 바로 뉴라이트의 것이라는 점에서 이미 프레임전쟁에서 한 수 접고 들어가고 있는 주대환의 논리는 너무 앙상해보였다.
 
그렇지만 그 동안 나름대로 주대환의 과거 행보를 긍정적으로 보았던 입장에서 이번 일련의 글들에 대해 한 마디 하고 싶었는데, 이번 인터뷰에 대해 간단하게 코멘트해보기로 했다.
 
1. 주대환은 자신이 죽은 김철순이 아니고, 살아 있는 주대환이라고 하면서 "진리의 근원이 인간의 이성이라고 믿었던 30대 이상주의자와 진리의 근거가 경험이라고 믿는 50대 실용주의자의 차이"이며, "맑스-레닌주의자와 페이비안 사회주의에 깊이 공감하는 사람의 차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사람이란 과거의 평가를 다 가지고 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가 페이비안 사회주의에 깊이 공감하는 걸 보면 고세훈 교수가 쓴 『영국노동당사』나 번역한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처럼 보인다. 페이비언 사회주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언급하는 게 조심스럽지만, 지금은 갈수록 맛이 가고 있는 영국노동당에만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페이비언 사회주의에 대한 깊은 공감을 표명하는 것은 더 넓은 이념적 조류를 간과한, 또 하나의 독선은 아닌지 묻고 싶다.
 
2. 주대환은 '1992년에 ‘노동당’ 노선을, 그리고 1987년에 ‘독자 후보(정당) 노선’을 주장했던 책임'을 언급하면서 자유의 몸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게 그러한 책임을 요구했던 이들이 얼마나 있었는지 의문이다. 주대환은 그 정도로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독자 정당 노선을 포기하겠다는 주대환의 결단에 박수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그 길이 사민주의의 길이라고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3. 뉴-레프트 운동은 한국 사회에서 이미 나름의 세력화도 하지 못한 채 구태의연한 이름이 되어 버렸다. 오히려 여전히 올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꼴보수들이 뉴-라이트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데 명분은 준다고나 할까.
 
더욱이 뉴-레프트라고 한다면 올드-레프트라는 실체가 존재해야 할 텐데, 그 실체 또한 명확하지 않다. 한국에 구태를 벗어야할 구좌파라고 할 만한 집단이 있던가. 더욱이 뉴-레프트 운동을 주창하면서 그것이 사회민주주의라고 하면 뉴-레프트에 대한 모독이라고 할 만하다. 적어도 서구식의 개념으로 뉴-레프트는 사민주의에 반발하여 나왔기 때문이다.
 
4. 한국사회에서 ‘운동권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운동권이라는 용어에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가 섞여 있기 때문에 그 중에서 부정적인 함의를 털어내려는 것이 그 핵심일 텐데, 이 중에는 보수언론에서 고의로 실체가 없는 것을 만들어낸 것들도 있다. 소위 'PT독재'나 '폭력혁명론' 등이 그런 것일 게다. 그런데 주대환 등의 사민주의 세력들은 운동의 혁신을 이야기하면서 이를 자신들의 단골소재로 삼는다. 나는 그들이 ‘운동권 이데올로기’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 그리고 그 중에서 혹시나 긍정적인 요소들까지 버린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운동권 물을 마신 것이 자랑은 아니지만, 도처에 자본주의의 모순이 널려있는 한국사회에서 비판의식, 저항의식(운동권 물을 이렇게도 포현할 수 있지 않을까)을 가졌다는 것이 죽은 개 취급을 당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
 
5. 주대환은 지난 10년 동안 정권에 참여했던 이들이 국정 운영에 참여한 경험은 소중하다고 파악한다. 그리고 "구여권이 이제는 야당이 되었으며, 야당 중에서도 아웃사이더가 된 분들이 많다"고 하면서 자유주의 좌파까지도 정치 연합의 대상으로 할 것을 주장한다. 하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관료들에 의해 휘둘렸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관료들의 국정 운영 참여 경험을 소중히 여긴 결과 기술관료경영주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물론 관료들의 국정 운영 참여 경험은 더 풍부하고 다양한 정보를 다루는 것에 기인한 것이지 전문성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하여간 영혼이 없는 관료가 아니라 견고한 영혼이 있는 자유주의 좌파들과 사안별 연대(이는 엔엘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몰라도 한 당을 하자는 주장은 그 안에 무슨 철학이나 근거가 있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아마 구여당 세력은 갈수록 여당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변화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며, 그들이 다시 집권할 경우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재판이 될 것임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그들과 선을 그으면서 좌파의 정체성과 정치노선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그들이 좌파의 정책에 동의하는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6. 주대환은 자신이 정치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언론 매체를 가릴 수 없다고 얘기한다. 여기에서 그의 정치관이 잘 드러난다. 대의민주주의를 긍정하는 한 어쩔 수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정치하는 사람과 정치하지 않는 사람이 구별될 수 있는가. 우리의 삶 자체가 정치가 아니던가. 단지 여의도만이 정치공간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주대환식 정치는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함의를 드러내고 있다. 소위 정권 획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식의 관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주대환은 '지식인들이 '안티조선 운동'에 참여하고 <조선일보>에 기고와 인터뷰를 하지 않는 것을 존경한다'고 하면서도 '안티조선 운동'의 함의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조선일보>와 재향군인회, 자유총연맹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고 있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조선일보는 평범한 매체가 아니다. 진보정치를 지향하는 이라면 각종 선거에서 당장은 도움은 되지 않을지라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나 기고 등을 하지 않아야 한다. <조선일보>가 진보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이나 이데올로기적 위치를 멀리 보고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7. "지구당 폐지 반대, 투명 회계, 당직공직 겸직금지, 일심회 사건, 분당 사태 등 중요한 순간마다 운동권 PD의 사고방식, 목소리만 들리고 보이는데, 그대들의 ‘운동권을 졸업했다’는 생각은 자기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 주대환의 이러한 발언은 주대환 및 사민넷 인사들 자신들에게 돌려줄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자신들만이 옳다는 도그마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8. 내가 현재 꿈꾸는 진보정당은 집권가능한 정당은 아니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정당이라고 생각하고, 이 땅에 녹색이 상징으로만 남지 않도록 하는, 유의미한 정치세력이 되어 정치판에 변수로서 작용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점에서 사민주의 세력의 집권을 도모하는 주대환 등과는 구별된다. 계속 그렇게 집권을 꿈꾸다 보니 자유주의 세력과의 연합마저 용인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집권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많이 있겠지만, 그 한계를 우리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이미 본 바 있다. 우리가 집권하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해선 안된다. 설사 좌파가 집권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정치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변화가 수반될 때 정치에서의 변화도 유의미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만드는 것이다. 좌파의 재구성이 아니라 제대로 성립되지 않은 좌파의 구성 자체가 필요하다.
 
9. 주대환은 지난 대선 시기 민주노동당 후보 경선에서 왜 오랜 동지 노회찬을 지지하지 않고 권영길을 지지한 이유로 민주노총의 간부들의 뜻이 권영길 후보에게 있었다는 점을 든다. 그런데 과연 권영길이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이라는 것이 그렇게 민주노총 간부들에게 어필되었을까. 민주노총 내의 다수인 국민파가 민주노총의 조직적 지지를 유도하였지만, 그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고, 많은 이들이 금속노조 사무처장을 지낸 심상정을 지지하기도 했다. 더욱이 민주노총의 국민파가 권과 노 사이에서 저울질하다가 입장을 정한 것은 2007년 7월이었는데, 주대환은 그 전부터 권영길 지지를 역설하고 다녔다.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을 역임했던 권영길이 자신의 역할과 입장을 얼마나 분명히 하고 노동자 중심적인 활동을 벌였는지에 대해 주대환은 좀더 평가했어야 했다. 주대환의 권영길 지지가 1992년부터 그가 걸어온 ‘노동당’ 노선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공감을 얻을 것인지 의문이다.
 
10. 주대환은 조봉암으로부터 유래하는 ‘대한민국 좌파’를 하자고 한다. 조봉암은 후대의 사람들이 자신을 좌파라고 떠받드는 것을 어떻게 바라볼까. 더욱이 지난 월드컵 이후 확고하게 자리잡은 '대한민국'이라는 용어를 좌파와 결합시키는 것 또한 어색해서 그의 의도대로 실용적으로 보기 어렵다. 영국노동당도 대영제국 노동당이라고 해야 하나.
 
농지개혁을 조봉암과 관련지어 파악하는 주대환의 인식도 문제가 있다. 물론 초대 농림부 장관이자 국회부의장을 지냈던 조봉암이 농지개혁에 있어서 나름의 역할을 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북한의 농지개혁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한국현대사에서 좌파가 모범으로 삼을 만한 인물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가상하지만, 좀더 한국현대사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얼마 전 이재유 평전 등을 통해 경성콤 등이 유명해지기는 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남한 좌파가 박헌영이나 여운형 등을 사상적 근원으로 내세운 적은 없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11. 지구당 폐지를 규정한 신정당법(이른바 오세훈법)에 대해 나는 이 기회에 정당법 등에 구애받지 말고 정치활동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지역편재를 마련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주장은 소광역 편재를 기본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주대환의 의견과도 비슷한 점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기존 보수정당의 지구당 운영상의 폐해를 들어 지구당을 폐지한 것은 지역정치활동을 공간을 축소한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보았고, 이는 정치에 있어서 정당의 역할을 역설하는 최장집 사단의 입장과도 비슷한 것이었는데, 주대환은 여기에서 입장이 달랐다. 특히 오세훈법을 지지하는 논리가 당시 보수언론의 것과 다르지 않아 의아했는데, 그에 대해 반성적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는 모습은 실망스럽다.
 
12. 국민건강보험, 공공부문, 상속세, 종부세를 지키자고 하는 주대환의 언급 속에서 미래지향적인 모습보다는 과거회귀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지금은 야당이 된 자유주의 좌파와 입장이 비슷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언급된 것들이 민중의 힘에 의해 도입되고 유지된 것이 아니라 개발독재와 자본, 자유주의세력들의 필요에 의해 생성되고 유지되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신자유주의적 시장화, 사유화의 광풍에 의해 위기에 처하게 되었어도 그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다.
 
(미국과는 달리) 우리는 있는 것을 지키고 발전시켜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 전에 왜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하는지, 기존의 관치나 국가의 이름으로 강요되어 온 것과는 어떻게 다른지 등을 설득하고 이해시켜야 하는 의무가 좌파진영에 존재한다. 이것은 사회공공성 강화의 과제를 국가에만 맡겨두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아가 프레임 싸움에서 이기려면 단지 지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통신, 정유, 인터넷 등에 있어서 재국유화 등을 제기하고 공공부문에 있어서도 민중과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민주적인 지배구조의 확립, 공영화(公營化)가 필요함을 공세적으로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증세 주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감세 정책의 문제를 폭로하면서 그에 대한 반대가 주 대치선인 현 상황이 답답하지만 말이다.
 
13. 이제 주대환과는 다른 길을 가야할 모양이다. 아니, 4-5년 전부터 그가 가는 길은 우리가 가야할 길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 명확하게 되었다. 아직 구체적인 정책에 있어서 어떻게 차이가 날지 모르겠지만, 주대환과 함께하는 이들이 정치세력화된다면 그들과는 사안별 연대는 할 수 있을지언정 함께 당을 하지는 못할 것 같다. 기회가 되면 『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을 읽어봐야겠다.  
 
그나저나 나는 구좌파인 걸까. 뚜렷하게 좌파인 적도 없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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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좌파와 전쟁 각오, 동지들에 미안 (레디앙, 2008년 09월 15일 (월) 07:36:27 장태수 / 대구 서구문화복지센터 대표)
'대한민국 좌파'하자, 야권재편 필연 
[인터뷰-주대환] "뉴레프트가 뭡니까"…"운동권 이데올로기 난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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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6 07:21 2008/09/16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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