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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노동부문 최고위원 보궐선거 찬반투표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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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강남구위원회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올라온 한 동지의 글을 수정하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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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8월 25일부터 진행되는 노동부문 최고위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이영희 후보에 대한 찬반투표에 참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울러 제가 아는 다른 동지들께도 개인적으로 투표 불참을 권유할 생각입니다. 이는 이영희 후보 개인에 대한 호불호 이전에, 당의 기강과 자존심에 관한 문제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이영희 후보는 노동부문 후보로 단독출마하여 찬반투표로 진행되는 까닭에, 투표율만 50%를 넘으면 당선은 확실할 것입니다. 저간의 사정이 유권자 당원에게 충분히 알려지기 어려운 상황에서 유일한 방법은 과반수 이상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것뿐일 터입니다. 


제가 이영희 후보에 대한 투표에 반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영희 후보는 지난 번 울산북구 재보궐 선거 이후 당의 전반적 문제에 공동으로 책임을 지고 사퇴한 1기 최고위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최고위원 중 누구는 잘하고 누구는 못했을 수도 있겠으나, 그 정치적 책임은 공동으로 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민주노총의 정치위원장이라는 이름으로, ‘관행’에 따라 찬반투표라는 요식행위를 통해 최고위원으로 다시 들어가려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저는 같은 이유로 2기 지도부에 다시 출마했던 1기 최고위원들(주대환, 박인숙 후보)에 대해서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쉽게 말해 백의종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의 반성과 쇄신을 위한 과정과 결의의 확인이 필요한 게 아니었을지요. 그러나 이영희 후보의 경우 1기 시절의 부족함에 대한 인정과 진단조차 없다는 점에서 분노마저 느낍니다.
 
둘째, 이른바 자질론을 주요한 이유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영희 후보는 이러한 점에서 자격 미달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기 최고위원 때에도 이영희 후보는 당 지도부의 일원으로서 자질을 의심케 하는 에피소드를 수차례나 연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04년 11월경 정책위원회에서 본을 만든 조세개혁안에 대하여 (이영희 후보를 포함한) 최고위원 일부가 국민감정을 이유로 브레이크를 걸어 혼선을 빚은 것과, 2005년 무상의료 무상교육 부유세 운동본부장을 맡은 후 9월 분회장수련회에서 무상의료 운동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무상의료 로드맵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음을 폭로하여 거기에 참석한 분회장들에게 많은 실망감을 안겨준 것을 말합니다. 담당 최고위원이 뭘 담당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이에게 무엇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당 최고위원회에 해당하는 십수인에 들어갈만한 사람이 그다지도 없는 것일까요? 좀 거칠게 말해서, 그렇잖아도 위기에 처해있다는 당에 무능한 최고위원을 또 한명 추가시키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셋째, 그러한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의 정치위원장이 민주노동당 노동부문 최고위원을 맡는 것이 ‘관행’이라는 이유로 밀어붙이는 이 행태에 저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비를 3천만원이나 들여 당원 직선으로 ‘선거’는 무엇 때문에 하겠습니까?
 
이영희 후보는 한 인터뷰에서 비정규직 투쟁 등 노동 사업이 급한데도 “당에 노동부문 최고위원도 없느냐”는 이야기를 듣는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민주노총에서는 적절한 인물을 정치위원장으로 선임하고, 뒤늦은 노동부문 보궐선거에 참여해줄 것을 당원들에게 설득력있게 호소했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관행이라니요? 이러한 점에서 저는 민주노총이 당을 너무 경경히 본다는 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넷째, 지금 이영희 후보가 공약으로 제출한 주장들의 부적절함의 문제입니다. 대표적으로 레이버투데이의 인터뷰에 나와 있는 '민중참여경선제를 통한 대선후보 선출' 주장이 그렇습니다. "한달 정도의 당비만 받고 투표권을 준다면 당의 외연을 확대할 수 있다", "투표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5천원, 1만원씩만 걷어도, 선거공영제를 통한 경선이 가능할 것이다". 민중참여경선제를 하지 않아서 투표율이 낮은 건가요? 게다가 내놓은 공약 대부분이 당의 위기를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 있어 뜬금없다고 느껴질 지경입니다. 
      
물론 적잖은 당비를 쓰는 절차이며, 또 고생하며 투표를 독려하는 선관위에 맞서 투표반대를 이야기하는게 우스운 꼴입니다. 그리고 만약 이영희 후보가 낙선하거나 투표율 미달로 선거가 무효화된다면 당과 민주노총 사이에 '심각한' 긴장과 파문이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바로 그러한 긴장과 파문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유지되어온 '비정상적'인 절차의 대의자 선출을 재고하고, 당과 대중조직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진지하게 논의하는 계기, 정치적 세력관계에 안주하여 자격없고 자질없는 인물을 내세우는 '몰상식한' 행위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울시당 대의원대회장에서 이영희 노동부문 최고위원 후보의 유세를 들어보신 분은 이 글의 요지를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이러한 저의 의견에 대하여 순탄치 않은 현재의 당에 또 소동을 일으키거나 개인을 공격하는게 아닌가하고 불편하거나 언짢게 보시는 동지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혹시나 투표에 참여하여 반대하는 것이 떳떳하지 않은가라고 생각하는 동지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2005년 12월 30일에 있었던 자이툰부대 파병연장동의안 처리과정을 떠올려봅시다. 처리를 무산시키려던 민주노동당의 표결 '보이코트' 호소를 무시한 채, 민주당과 열우당의 파병반대파 의원들은 퇴장하지 않고 꿋꿋하게 표결에 참여하여 31표의 반대표를 이끌어내었지만, 파병연장 동의안은 158명 재석에 110명 찬성으로 국회를 통과하였습니다. 그 31명 중 10명만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어도, 민주노동당의 호소대로 자리를 떴더라도, 정족수 미달로 파병연장 동의안은 처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대표를 던지는 것이 결국은 동의안 통과에 힘을 보태는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파병연장에 반대했다는 생색을 내고 말이죠. 
   
제가 이번 노동부문 최고위원 보궐선거에 참여하지 않고 투표 보이코트를 당원 동지들에게 호소하는 이유는 바로 위의 파병연장동의안 처리과정에서 얻은 교훈 때문입니다. 저는 보궐선거 찬반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당우로서의 권리를 행사할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고민에 관악구위원회 동지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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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3 01:26 2006/08/23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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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진보적 지방정치 사례 (장석준, 200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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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의 지방정치 길 찾기
진보정치연구소 지방정치연구회
  
장소: 민주노동당 중앙당 4층 대회의실
일시: 2005년 7월 26일(화) 늦은 7시
사회: 홍준호(구로구의원, 지방정치연구회장)
발제:    
외국의 진보적 지방정치 사례(1p~37p) - 장석준(연구소 상임연구위원)
민주화 이후 지방정치와 풀뿌리(38p~49p) 보수주의 - 박철한(당정책위원회 정책국장)
지방자치 관련 법과 제도 개선방안(50p~66p) - 황기룡(당정책위원회 정책연구원)
지방자치운동 강화를 위한 제언(67p~75p) - 김성기(성동구위원회 지방자치위원장)

 

위의 내용 중에서 장석준의 글만 일부, 아니 거의 대부분 담아왔다.

장석준의 글을 읽게 되면 지방정치를 보는데 있어서 새로운 사례들이 다수 존재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진보적 지방정치의 역사적 사례들

장석준 (진보정치연구소 상임연구위원)

 

1. 진보정치와 지방정치의 상관관계

 

① 지방정치는 풀뿌리 시민사회를 형성할 수 있는 장이다.   

진보정치는 기득권 세력이 지배하는 기존의 시민사회를 놔두고는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를 통해 시민사회 자체를 바꾸면서 권력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연대의 출발점은 노동자·민중이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지역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진보세력은 지방정치를 통해 자신의 토대를 굳건히 다져야 한다. 

  

② 지방정치는 중앙권력의 변화 이전에 진보의 이상을 펼칠 수 있는 장이다. 

진보세력은 중앙의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이전에라도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다양한 진보적 정책들을 펼칠 수 있다. 물론 지방자치단체는 권한과 재정에 커다란 한계가 있다. 따라서 현재의 권력구조에서 지방권력만으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갈 수는 없다. 그러나 진보세력이 중앙권력을 장악하기 전에 자신의 집권·변혁 능력을 대중들에게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장이 지방자치단체라는 것도 분명하다. 진보세력은 지방정치를 통해 발전의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  

  

지방정치는 기존의 권력 형태를 넘어서는 자치민주주의를 실험할 수 있는 장이다.

지방정치가 단순히 중앙권력으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적 역할, 중앙권력에 진출하기 전의 과도적 임무만을 맡는 것은 아니다. 지방정치는 노동자․민중의 일상생활과 밀착해 있기 때문에 기존 민주주의의 한계를 뛰어넘는 자치민주주의를 실험할 수 있는 최적의 장 역할을 한다. 진보세력은 지방정치를 통해 끊임없이 민주주의를 재활성화해야 한다.  

  

④ 지방정치는 21세기 대안사회의 모색에서 핵심적 중요성을 지니는 장이다. 

더 나아가 지역은 대안사회를 건설하는 데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회민주주의나 국가사회주의의 한계가 드러난 21세기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21세기의 진보세력은 지역 내의 대중 참여 활성화, 지역 내에서 선순환하는 경제구조, 생태적 지탱가능성, 문화적 창의성 등에 주목해야 한다. 진보세력은 지방정치를 통해 새로운 사회의 밑그림을 그려나가야 한다. 

  

2. 진보적 지방자치의 역사적 전개 과정

  

1) 지역에서부터 약자들이 뭉치다: 초기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사회 만들기 

  

○ 기득권 세력의 지역사회가 아닌 노동자·민중의 지역사회 만들기

  

19세기 말 유럽 각 나라에 노동자정당들이 처음 등장할 무렵 지역사회는 보수세력에게 장악돼 있었다. 특히 보수적인 교회나 자유주의적 시민단체가 노동자 포섭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노동운동 세력은 이에 맞서 소비자 협동조합, 문화 단체, 스포츠클럽 등을 조직해 독자적인 노동계급 지역사회를 만들어 나갔다(프로테스탄트 국가에서는 진보적인 노동자 교회도 한 몫을 했다). 당, 노동조합, 협동조합, 문화 단체, 스포츠클럽들을 하나로 잇는 노동자회관을 건립해 지역사회의 새로운 구심으로 부각시키기도 했다. 당시 유럽은 아직 20세기형 소비사회·대중문화가 등장하기 전이라 이러한 노력이 지금의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쉽게 성공할 수 있었다.

  

이 때 형성된 노동계급 지역문화는 유럽 많은 나라들에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질 정도로 그 뿌리가 튼튼하다. (그 한 예로, 19세기 말에 이탈리아 사회당의 주요 거점이었던 에밀리아-로마냐 지방은 지금도 이탈리아에서 좌파 지지세가 가장 강력한 곳이다.)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 노동자코뮌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SAP)의 지역조직인 ‘노동자코뮌’은 이탈리아의 ‘노동회의소’와 유사한 지역 노동자 단체들의 연합이었다. 노동자코뮌에는 SAP 지부들, 노동조합의 지역조직들뿐만 아니라 자유교회운동(국교회에 반대하는 진보적 개신교 운동), 금주운동 등의 당대의 다양한 사회운동 단체들까지 결합했다. 본래 SAP에는 독자적인 지역조직들이 있었다. 그러나 SAP는 1901년부터 아예 지역조직들을 없애고, 노동자코뮌이 당의 기초단위 역할도 겸하는 것으로 당헌을 바꾸었다.  

노동자코뮌은 이탈리아 노동회의소의 ‘노동자회관’과 마찬가지로 ‘민중의 집’이라는 건물을 짓고 이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민중의 집 사업 중 단연 으뜸은 교육·문화활동이었다. 민중의 집에서는 지금도 면면히 이어져오는 스웨덴 노동자교육협회(ABF)의 노동자 강좌뿐만 아니라 노동조합학교나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학습모임들이 열렸고, 당과 노동조합의 잡지사, 신문사들이 입주해 있었다.  

“지방에서 노동자코뮌이 단순히 정치적 활동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 조직들은 노동조합운동을 지도하며 각종 문화적 행사를 주도하였다. 노동자코뮌은 ‘민중의 집’을 설립하였으며, 이 안에 영화관, 도서관 등을 설치하였고, 문학강좌도 개설하였다. 민중의 집 수는 1890년에 2개, 1900년에 22개, 1905년에 53개 그리고 1910년에는 112개로 각각 증가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노동자들, 특히 노동조합원들이 민중의 집이라는 문화적 공간의 활용을 통하여 사민당에 대한 정체감을 확고히 하였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다. 요컨대, 민중의 집은 노동자들에게 일종의 공공영역으로 기능하였다.” - 안재흥, 「스웨덴 노동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선택」. 안병직 외 『유럽의 산업화 노동계급』 401쪽에서.   

  

이탈리아 사회당: 노동회의소


이탈리아 사회당의 성장에는 ‘노동회의소’라는 독특한 기관이 큰 역할을 했다. 노동회의소는 지역 노동자 단체들의 연합이라고 할 수 있는데, 흔히 지역 노동자회관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노동자회관에는 노동조합, 협동조합, 사회당 지구당, 당 기관지 지사 등이 입주해 있었고, 노동자들을 위한 식당과 술집, 진료소까지 갖추고 있었다. 각 노동자 조직들은 이 회관에서 일상적으로 접촉하며 ‘노동회의소’라는 이름 아래 회의를 갖고 공동 행동을 모색했다. 이러한 노동회의소는 1902년까지 전국에 걸쳐 76개소가 건설되었다. 

 

○ 아직은 낯선 영역, 지방자치

  

대부분의 유럽 나라들에서 아직 노동자와 여성들에게 중앙의회 선거권도 주어지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방자치에서도 노동자․민중의 참여는 제한되어 있었다. 지방자치제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가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으로 독일에서는 1860년대부터 남성 노동자들에게 제국의회 선거권이 부여되고 1890년부터 사회민주당이 제국의회 내 제1당으로 자리잡았지만, 주의회 선거에서는 여전히 보통·평등선거가 아닌 계급별 선거가 실시됐다. 한때 남성 보통선거권이 인정되던 작센 주의회도 중앙정부와 보수파의 압력으로 다시 계급별 선거로 회귀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다른 유럽 나라들에서는 중앙의회의 보통선거권 쟁취가 노동자정당의 주된 당면 과제였던 데 반해 독일에서는 주의회의 보통선거권 쟁취가 당면 현안이었다. 이를 위해 로자 룩셈부르크 등 당내 좌파는 정치총파업 전술까지 제시한 바 있다. 

  

○ 일부 민주국가의 선구적 사례 - 프랑스, 영국, 미국

  

하지만 상대적으로 민주주의의 역사가 깊은 프랑스, 영국, 미국에서는 다른 나라보다 일찍 진보세력의 지자체 진출이 이뤄졌다. 이들 나라에서는 이미 기득권 세력 내의 수구파와 개혁파 사이의 대립이 중앙정치를 양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세력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 중요한 경로로 지방정치를 주목하게 됐다.

  

프랑스에서는 1890년대 초부터 북부 공업 지대와 남부 광산촌을 중심으로 진보세력이 지자체에 진출했다. 1893년 총선에서 50여 명의 사회주의 국회의원이 배출된 데는 이 때 등장한 노동자 지자체의 역할이 컸다.

  

영국에서는 1898년 노동당의 전신 중 하나인 사회민주연맹이 런던 동부의 웨스트 햄 구의회를 장악(영국은 지자체도 의원내각제이기 때문에 지방의회의 다수 의석을 장악한다는 것은 지자체 행정부를 구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한 것을 필두로, 노동당 창당 후 첫 지방선거(1903)에서 노동당이 울위치 등의 여당이 됐다.

  

미국에서는 1910년 위스콘신 주의 밀워키에서 사회당 후보가 시장으로 당선된 데 이어 미시건 주의 플린트, 오하이오 주의 리마, 캘리포니아 주의 버클리 등에서 사회당 시장이 배출됐다.

    

○ 지방자치 사회주의(municipal socialism)의 등장

    

지자체에 가장 먼저 진출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지방권력 장악을 통한 대안사회 건설 구상이 처음 등장했다. 프랑스에서 최초로 개혁적[개량적] 사회주의 노선을 주창한 폴 브루스가 그 선구자였다. 브루스는 1880년에 발표한 <지방자치 강령>에서 다음과 같은 목표들을 제시했다.

    

① 주민 자치: 경찰·지방 사법 당국·지역 주둔군에 대한 통제, 지자체들이 서로 연대할 수 있는 권리

② 지역의 민주화: 여성 보통선거권 도입, 지방의원 유급화(노동운동 세력에게는 지방의원 유급화가 굉장히 중요한 요구 사안이었다. 그래야 노동자들이 생계 걱정 없이 지방의원으로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방의회 공개, 위원회 임원들에 대한 소환권, 예산안에 대한 주민 투표, 고위 관료의 선출직화, 행정 법정을 민중 심판·중재재판소로 대체, 경찰을 시민 방범대로 대체

③ 공기업: 공공재 영역의 거대 사기업을 공영화, 공공재의 무상 공급, 제빵 및 도축 산업에 새로운 공기업 수립, 전반적인 공공부문 확대

④ 공공서비스: 21세까지의 무상공교육, 고용조건에 대한 조례 제정, 협동조합 지원, 파업 노동자 지원

⑤ 재분배 정책: 누진 소득세 및 고율의 상속세 

    

또한 독일 사회민주당의 개혁적 사회주의자 E. 베른슈타인은 진보적 지자체의 강령으로 다음의 목표들을 내걸었다. 

① 지자체의 사유재산 수용권 강화(몰수 등)

② 자연 독점 영역(공공재 등)에서 공기업 확대

③ 지자체의 공공서비스 확대

④ 친노동 정책: 노동조합 및 조합비 징수 인정, 지자체 내 노동국 설치, 지자체와 노동조합이 협력하여 사회보험제도 구축

    

2) 지역에서부터 복지국가의 기틀을 쌓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 지방자치 사회주의 시도들 

    

○ 본격적인 진보적 지자체의 등장

    

1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비로소 유럽 각 국에서 진보정당이 중앙정부의 여당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단독으로 집권하기는 힘들었고 대개 자유주의 세력과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비록 좌우연정 내에서 처음에는 좌파가 주도권을 쥐었다고는 해도 진보세력이 사회주의적 정책을 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지방자치제도의 개혁 같은 민주개혁은 대부분 달성되었다. 그 결과, 유럽의 주요 국가에서 다수의 진보적 지자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 지방자치 사회주의의 시작

    

중앙정부 차원에서 사회주의적 정책을 펴기 힘든 상황에서 진보적 지자체가 그러한 개혁의 담당기관 역할을 하게 되었다. 특히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장기 집권한 비엔나 시(‘붉은 비엔나’라고까지 불렸다)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독일, 오스트리아에서는 이미 1차 대전 전부터 지자체가 공공재 영역에서 공기업을 설립하고 공공서비스를 확대하는 게 일반화되었었다. 진보세력이 지자체를 장악하기 전부터 보수세력이 이런 정책을 폈던 것이다. 그래서 진보세력이 지자체의 여당이 된 뒤 급진개혁 정책을 펼치기가 훨씬 수월했다. ‘붉은 비엔나’에서는 무상의료․무상교육의 확대와 함께 야심 찬 주거정책이 추진됐다. 사회민주노동당 시정부는 상류층의 불로 소득에 대해 주택건설세를 징수해서 이 재원으로 1933년까지 총 6천 여 가구에 노동자 아파트 단지를 공급했다. 노동자 아파트 단지에 입주한 노동자들은 모든 일상생활의 요구를 노동계급 공동체를 통해 해결했고 다시 사회민주노동당의 탄탄한 지지층을 형성했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 ‘붉은’ 비엔나

   

비엔나에서 사회민주노동당이 거둔 성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붉은 비엔나’, ‘비엔나의 기적’ 등등의 말들이 널리 회자되었다.

“행정 면에서 비엔나는 아마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게 움직이는 도시일 것이다. 준엄하면서도 교묘한 세제(지방세 강화-인용자주)에 의해서 비엔나 사회민주노동당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유례없는 온정적 개혁을 실시하기 위한 재원을 조달했다. 그들은 건강진단소, 목욕탕, 체육관, 결핵요양소, 학교, 유치원 및 거대하고도 채광이 잘 되는 주택을 지었다. 그 주택들은 호화스럽다고는 할 수 없어도 외관이 수려하고 청결했으며 6만 세대―사회민주노동당원의 가족들―를 수용할 수 있었다. 그들은 빈민굴을 일소하였고 결핵 발병율을 격감시켰으며 여유 있는 사람으로부터 돈을 징수하여 그것을 마땅히 빈민을 위하여 사용했던 것이다. 비엔나 사회민주노동당의 업적은 전후 유럽 각국을 망라하여 가장 위대한 사회적 위업이었다.” - John Gunther, Inside Europe, A. 스터름달, 『유럽 노동운동의 비극』, 212쪽에서 재인용.

그 결과, 200만의 비엔나 시민 중 50만 명이 사회민주노동당의 당비 납부 당원이 되었고, 비엔나 유권자의 2/3가 사민당을 지지했다! 전국적으로도 1923년 총선부터 사회민주노동당의 상승세가 회복되었다. 당은 다음 총선에서 30만 표를 더 얻어 재집권에 성공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1933년에는 런던의 대부분의 구의회에서 노동당이 여당이 돼(당시에는 런던 광역시의회가 아직 없었다) 다음과 같은 정책들을 추진했다: 빈민가 재정비, 서민층을 위한 주택 공급; 빈곤층에 대한 사회부조 확대; 학교 보건 서비스 강화; 공원 확장·공공 여가서비스 제공; 학교 신축·노동자 자녀의 입학률 제고; 보건 등 복지 서비스 재원 확충; 도로·상수도 확충; ‘그린벨트’ 설치; 도시 계획 강화 등. 이러한 공공재 확충 중심의 정책 때문에 영국의 지방자치 사회주의는 ‘가스관과 수도관의 사회주의’라고까지 불렸다. 

   

○ 공산당도 지자체에 진출하다

   

지자체에 진출한 진보세력은 사회민주당뿐만이 아니었다. 혁명적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한 공산당도 지방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공산당은 반파쇼 인민전선 운동의 호응에 힘입어 1935년 5월에 다수의 시장을 당선시켰다. 특히 노동자들이 밀집한 파리 근교의 위성 도시들에서 성공을 거뒀다. 이 때 등장한 공산당(혹은 공산당·사회당 연합) 지자체들은 1936년의 대중파업 당시 파업 노동자들에게 무상급식을 제공하고 경찰의 개입을 막는 등의 활동을 했다.   

   

○ 지방자치 사회주의의 성과와 한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에 등장한 진보적 지자체들은 중앙정부 차원에서 사회복지 확대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전에 지방정부 차원에서 이를 선구적으로 실시했다고 할 수 있다. ‘붉은 비엔나’는 2차 대전 후에 들어설 복지국가의 예고편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 당시의 지방자치 사회주의에는 한계도 명확했다. 첫째, 공공부문의 확대가 다분히 관료적인 방식으로 이뤄졌다. 공공부문의 구축과 운영 과정에서 노동자·민중의 광범한 참여를 북돋으려는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후 전국 단위 복지국가가 건설되는 과정에서도 동일한 양상이 나타나게 된다.

   

둘째, 지방정부의 권한과 재원의 한계가 커다란 벽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한계에 정면 도전한 예외적인 사례가 1918년 등장한 런던 시 포플라 구(현재의 독스랜즈)의 노동당 지자체였다. 한편 ‘붉은 비엔나’의 경우는 극우적 중앙정부의 공세 앞에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독일 프로이센 주의 사회민주당 주정부도 극우파의 공세로 무너졌다.

    

포플라 구 vs. 영국 중앙정부

   

1921년에 노동당 좌파인 조지 란즈베리가 포플라 구의 단체장이 됐다. 포플라 구와 란즈베리 사이에는 깊은 인연이 있었다. 그가 처음 선거로 당선된 공직은 포플라 구빈원(영국의 지역 단위 빈민구제기관) 운영위원 자리였다. 그는 동료 운영위원들과 함께 구빈원을 빈민들에게 생색내는 자선기관에서 말 그대로의 복지기관으로 바꾸는 데 앞장섰다. 구빈원에 배정된 예산으로 농장을 만들어서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중앙정부가 포플라 시를 주목하기 시작한 게 이 때부터였다. 중앙정부는 포플라 구빈원 운영위원회가 세금을 낭비하고 있다고 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이 때는 일단 ‘경고’ 조치 정도로 그쳤다.

   

하지만 말썽꾸러기가 단체장이 돼서 돌아오자 상황이 달라졌다. 란즈베리는 부임하자마자 지자체에서 지급하는 실업수당 수준을 인상했다. 이것만으로도 중앙정부를 충분히 자극하는 것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지방세 문제로 정부에 싸움을 걸고 나섰다. 빈민층 거주 지역의 지방세율이 부유층 거주 지역보다 오히려 더 높은 데 항의하며 지방세 징수를 거부한 것이다. 법원은 중앙정부의 입장을 받아들여 란즈베리를 포함한 30명의 구의원들의 구속을 결정했다.

   

그러나 포플라의 단체장은 감옥에서 더 의기충천했다. 그는 감옥을 둘러싼 채 농성을 벌이는 지지자들을 향해 연설했고, 동료 구의원들과 함께 당당하게 업무를 봤다. 재소자들에게 사회주의 이념을 선전하고, 간수들에게 노동조합에 가입하라고 설득했다. 포플라에 온 나라의 이목이 집중됐고, 다른 지자체도 포플라의 입장에 동조하고 나섰다.

  

결국 중앙정부와 대법원 쪽이 백기를 들었다. 란즈베리를 비롯한 구의원들은 석방됐고, 지방세율은 재조정됐다. 다음 해인 1922년 란즈베리는 ‘포플라 운동’의 열기를 배경으로 총선에서 승리, 10년 만에 하원에 다시 진출했다.

    

* 포플라 지자체의 주요 정책들

① 평균 임금 수준 혹은 그것을 상회하는 수준의 실업급여 제공(복지국가 이전 영국의 자유주의 전통에서는 복지급여는 반드시 시장임금 수준보다 낮아야 한다는 게 철칙이었다. 그래야 노동시장이 유지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② 포플라 구 산하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최저임금 인상

③ 파업노동자 지원

④ 불평등한 지방세 징수에 대한 의도적 방기

   

3) 지역에서부터 냉전을 깨다: 2차 대전 이후 공산당 주도의 지방정치 

   

○ 주인이 바뀐 지방자치 사회주의의 횃불

   

2차 대전 후 사회민주당 주도로 중앙정부 차원에서 복지국가가 건설되자 지방자치 사회주의는 더 이상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됐다. 지자체는 중앙정부 중심으로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부차적인 역할만을 부여받았다. 진보적 지자체의 사회복지 확충 방식 자체가 중앙정부의 관료적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사회민주당이 아니라 공산당이 진보세력을 주도하는 나라들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이들 나라에서는 공산당의 권력 접근을 막기 위해 강력한 반공 지배연합이 구성됐다.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일본과 인도는 조금 다른 사례지만, 어쨌든 공산당이 중요한 일부를 이루는 진보세력이 오랫동안 중앙권력에 접근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비슷했다.

   

이러한 나라들에서는 두 가지 점에서 지방자치 사회주의가 여전히 중요한 의의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첫째,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진보세력이 중앙권력으로부터 배제된 상황에서 이들이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경로는 지자체의 집권이었다. 둘째, 우파가 정국을 주도했기 때문에 사회민주당이 집권한 다른 나라들에 비해 복지국가 건설이나 사회개혁의 속도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 나라의 진보세력은 지자체 차원에서라도 지체된 개혁에 착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2차 대전 후 지방자치 사회주의의 횃불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에서 공산당(더 정확히는 유로콤 정당들)으로 주인이 바뀌게 됐다.

   

○ 이탈리아: 중소기업 중심의 발전 네트워크

     

이탈리아 공산당은 2차 대전 후 에밀리아-로마냐, 토스카나 등의 중북부 주에서 지자체의 여당으로 장기 집권했다. 그래서 이 지역은 ‘붉은 벨트’(장화 모양의 이탈리아 반도를 두른 붉은 띠)라고까지 불렸다. 원래 이 지역은 19세기 말부터 사회당의 거점 역할을 한 지방인데, 그 지역문화가 그대로 공산당에게 이어진 것이다. 특히 에밀리아-로마냐 주에서는 전체 인구의 절반이 공산당 지지자였다. 에밀리아-로마냐 주의 주도인 볼로냐 시는 공산당 지방자치의 모델케이스로서 널리 선전되었다(볼로냐 모델 혹은 에밀리아 모델).

   

에밀리아-로나먀에서 공산당 지자체들은 당의 전국적 전략인 ‘반독점 동맹’ 정책을 지역 차원에서 전개했다. 독점자본에 맞서서 노동자․농민과 중소자본 사이의 동맹을 형성한다는 게 그 골자인데, 이 덕분에 이탈리아 중북부 지방은 독특한 사회 발전 경로를 밟게 된다. 즉, 대기업이 아니라 협동조합 네트워크로 묶인 중소기업(주로 섬유산업)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좌파 지자체는 중소기업간 협력을 장려하고 에밀리아-로마냐 섬유정보센터(CITER) 등을 건설해 이를 지원했다. 그래서 대기업 중심의 발전 모델을 보인 북부의 금속산업단지, 남부의 석유화학산업단지와 구별해서 이 지역을 ‘제 3 이탈리아’라 부르기도 한다.

   

1975년에 지방마다 둘쭉날쭉하던 지방자치제도가 전국적으로 정비되고 전국 동시 지방선거가 실시되자 수십 년에 걸쳐 지방정치에 기울인 공산당의 노력이 활짝 꽃을 피웠다. 공산당은 전국적으로 32.4%를 득표했고, 로마, 토리노, 나폴리 등 주요 대도시에서 시장을 당선시켰다. 이탈리아 인구의 2/3가 공산당이 집권한 지자체에서 살게 되었다.

   

75년에 등장한 좌파 지자체들은 다음과 같은 성과를 거두었다. 첫째, 주민 참여를 북돋기 위해 대도시에 구 단위 주민평의회를 설립했다. 이는 대중 참여를 촉진하기 위한 분권화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라틴아메리카를 중심으로 등장하는 참여 분권화 시도의 선구적인 사례인 것이다.

   

둘째, 문화 정책에서 탁월한 면모를 보여줬다. 특히 로마 시가 선도적인 창의력을 보였다. 로마 시정부는 로마의 유서 깊은 광장에서 영화 축제, 음악회, 무도회, 전시회 등을 개최했다. 이는 그 동안 문화로부터 소외돼온 서민들에게 많은 호응을 받았다. 1979년 7월에 열린 영화 축제에는 5만 명이 참여했고, 70여 차례 개최된 연극 공연 및 음악회는 총 21만 명의 관객을 끌었다. 이러한 로마 시의 사례는 다른 지자체에도 전파되었고, 진보세력이 문화적 헤게모니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한계도 많았다. 우선, 에밀리아-로마냐 등에서 진보적 지방정치의 토대 역할을 하던 노동계급 공동체 문화가 산업화의 진전, 대중문화의 확산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는 대중의 참여를 촉진하고 시민사회를 조직하는 데 커다란 장애로 작용했다.

   

둘째,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사이의 관계가 역시 문제였다. 특히 1976년~1979년 사이에 이탈리아 공산당은 기독교민주당 주도의 국민연대정부를 내각 바깥에서 지지하는 ‘역사적 타협’(기독교민주당과의 그림자 연정) 노선을 걷고 있었다. 중앙정부 차원에서 우파와 연합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방정부 차원에서 좌파 지자체가 중앙정부를 거슬러 공세적인 개혁을 추진하기 힘들었다. 더구나 70년대의 경제위기 때문에 중앙정부는 긴축 정책을 펼치는 상황이었다. 전반적인 예산 제약 때문에 지자체 차원에서 공공복지를 확대하기가 더욱 힘들 수밖에 없었다.

   

셋째, 공산당 지자체가 유권자들에게 자랑한 것 중 하나는 ‘청렴’이었다. 전후 이탈리아에서는 기독교민주당의 장기 집권으로 인해 부패가 전 사회에 만연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당은 자신을 ‘반부패’의 상징으로 내세웠고, 실제로 이는 커다란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공산당이 주도하는 지자체에서도 차츰 부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이는 우파나 사회당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공산당에게는 치명적인 상처로 작용했다.

   

넷째, 당의 입장에서 보면, 공산당이 다수의 지자체에서 여당이 되면서 지자체 행정 요원들이 당 활동가의 상당수를 차지하게 됐다. 이로 인해 공산당은 전투적인 야당보다는 여당 아닌 여당 비슷하게 됐고, 대중들에게 혁신적이기보다는 뭔가 또 하나의 낡은 정당 정도로 치부되기 시작했다.

   

1975년 지방선거 대승이 있고 10년 뒤인 1985년 지방선거에서 공산당은 많은 대도시를 잃었다. 에밀리아-로마냐 등에서는 여전히 굳건한 지지세를 유지했지만, 다른 지역에서의 좌파 지자체 바람은 일단 한 차례 썰물을 경험해야 했다. 

   

이탈리아 공산당과 지구주민평의회

   

영국과 브라질의 참여민주주의적 실천 내용 중 상당수(주민 참여의 양적·질적 확대, 분권적 계획의 수립 등)는 이미 70년대 초반에 이탈리아에서도 시도되었던 것들이다. 이탈리아 공산당이 추진한 지구주민평의회가 그것이다.

   

이탈리아 혁신 지자체의 전통

   

1899년 중부 에밀리아 로마냐 지방의 레기오 에밀리아 시에서 사회당이 처음 시장을 배출한 이래 이탈리아 중부 지방에는 오랜 좌파 지자체의 전통이 자리잡았다. 에밀리아 로마냐의 사회당 지부는 지자체를 통해서 노동계급과 소농을 위한 개혁 정책을 펴려고 노력하였는데, 특히 당내 개량주의 분파의 지도자인 필리포 투라티 하원의원이 그 선두에 섰다. 그러한 개혁 정책 중 대표적인 것은 생산자 협동조합, 소비자 협동조합에 대한 집중적인 지원이었다. 그 덕분에 중부 이탈리아의 노동자들은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 노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풍요롭고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이에 대해서는 사회당 내에서도 이견이 적지 않았다. 이후 사회당에서 갈라져 나온 공산당의 지도자로 유명하게 된 안토니오 그람시는 당시 사회당의 청년 당원으로서 에밀리아 로나먀 사례에 대한 개량주의 분파의 선전을 강력히 비판했다. 주로 북부에 포진한 이탈리아 자본가계급은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통해서 남부의 대토지 소유자들과 야합했고, 그에 따른 생필품 가격 등귀는 광범한 대중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다. 이탈리아 노동계급은 불만에 가득 찬 남부의 소농들과 연합해서 북부 자본가계급에 대항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북부 자본가계급이 던져주는 떡고물 때문에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농민들과의 연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당내 개량주의 분파가 중부 이탈리아에 건설한 노동자 협동조합의 ‘섬’은 북부 자본가계급의 보호무역주의 정책의 부수적 산물로 이탈리아 노동계급 일부에게 던져진 바로 그 떡고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람시 등의 비판이었다.

   

하지만, 아무튼 북·중부 지역을 중심으로 좌파 지자체는 계속 확장됐다. 특히 1차 세계대전 직후 소위 ‘붉은 2년(노·자간의 계급투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공장평의회운동이 있었던 1919-20년)’의 마지막에 치러진 1920년 지자체 선거에서는 사회당이 전국 지자체의 1/4을 장악했는데, 이 중 다수가 북·중부 지역에 분포했다. 이 흐름은 파시즘 세력의 등장으로 한때 단절됐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 강력하게 부활했다. 2차 대전 후 이탈리아 공산당은 중앙 정치로부터 장기간 소외된 와중에도 중부 이탈리아에서만은 만년 여당으로 자리잡았다. 그것은 북·중부 이탈리아가 좌파 주도의 반파쇼 레지스탕스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기 때문이었는데, 그 이유는 다시 세기초 좌파 지자체의 전통으로 소급될 수 있는 것이었다.

   

주민들 속에 파고든 좌파 정치세력

  

지역사회 속에서 좌파의 영향력은 ‘노동회관’이라는 기관을 통해서 이뤄졌다. 이는 그야말로 지역 노동자들의 힘으로 건설된 공공건물로서, 노동조합, 사회당 지부, 사회당 신문, 각종 협동조합, 민중학교 등이 이 건물에 한 데 입주했다. 아직 정부 주도의 사회복지정책이 미미하고 공공 교육이나 대중적 언론 매체도 발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노동회관은 노동계급의 공장 밖 삶을 풍요롭게 하는 모든 활동과 관련됐다. 글을 모르는 노동자들은 노동회관에서 읽고 쓰기를 깨우쳤고, 다른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회관에 입주한 술집에서 신문을 읽고 토론하면서 여가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노동자들과 접촉하는 것 자체가 사회당과 노동조합의 조직활동이기도 했다. 1920년 파시스트 세력이 광분하기 시작하면서 처음에 노동회관부터 공격한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20년간의 파시즘 시기와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좌파의 주도권이 레지스탕스의 핵심 세력인 공산당으로 넘어간 뒤에 공산당이 각 지역에서 제일 먼저 추진한 것은 이 노동회관의 전통을 되살리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70년대까지 이탈리아 전국에 1000여 개 이상으로 확장된 ‘민중의 집’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민중의 집의 기능은 노동회관과 거의 같았다. 공산당과 사회당의 지부, 노동조합들이 입주하고 노동계급을 기반으로 한 각종 청년․문화․취미 단체들이 이 공간을 활용했다. 민중의 집에서도 노동회관과 마찬가지로 술집은 중요한 토론 장소로 제 역할을 다했다. 민중의 집과 노동회관의 결정적 차이는 그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민중의 집이 과거 노동회관보다 더 적극적으로 보다 광범한 민중에게 자신을 개방했다는 점이다.

    

1950년대에는 이탈리아의 전후 재건과 맞물려 노동계급의 자발적 결의로 민중의 집 건설이 붐을 이뤘는데, 당시 상황은 국내에도 이미 소개된 바 있는 영화 <돈 카밀로와 페포네>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영화에는, 공산당 출신 읍장인 페포네가 민중의 집을 통해 읍민들의 지지를 넓혀 가자 기독교민주당을 지지하는 신부 돈 카밀로가 이에 대항하기 위해 기독교회관을 건설하는 모습이 나온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통해 이탈리아 정치 세력들은 주민들의 삶에 깊이 뿌리박게 된 것이다.

   

또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페포네 읍장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로마로 상경하려 하자 공산당 당원을 비롯해서 돈 카밀로 신부와 기독교민주당 지지자들까지 그가 읍장으로 남아 있길 애원한다. 이들을 뿌리치고 로마행 기차에 올라 탄 페포네는, 그러나, 결국 발길을 돌려 읍장의 자리로 돌아간다. 국회의원보다는 시골 읍장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좌파, 그것이 바로 이탈리아 공산당이었던 것이다.

   

1970년대, 지구주민평의회의 건설

   

60년대말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이탈리아 국민들 사이의 풀뿌리 수준의 급진화도 놀랍게 진행됐다. 공산당의 득표율은 1970년대 중반 전 국민의 1/3 수준으로까지 성장했다. 하지만, 기독교민주당-바티칸-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냉전반공체제는 공산당의 중앙정치 진출을 철저히 차단했다. 공산당은 원내 제 1당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에서 항상 소외되어야 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공산당이 취한 노선 중 하나가 중앙정치에서 펼쳐 보일 수 없었던 개혁을 지자체 수준에서 전개하는 것이었다. 특히 중부 이탈리아의 중심 도시인 볼로냐는 공산당이 지자체를 통해 자신의 수권 능력을 입증해 보이려 한 정치 실험장이었다.

   

공산당은 무엇보다도 청렴성 면에서 두드러졌다. 단지 공산당을 배제한다는 점에서만 이해를 같이 하는 다양한 정당들 사이의 야합 정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전후 이탈리아의 공공 생활은 부패로 얼룩졌다. 이에 대해 유일하게 ‘깨끗함’을 주장하고 실천해 보일 수 있었던 세력이 바로 공산당이었다. 공산당이 오랫동안 지자체를 장악한 중부 이탈리아 지방은 지금도 이탈리아 전역에서 공공 기관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높은 지역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현격한 지역적 차이에 공산당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데 대해서는 보수 사회과학자들도 인정하는 바다.

  

이러한 70년대 좌파 지자체 실천 중 최선두에 자리한 것이 바로 지구주민평의회다. 1975년 지자체 선거에서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가 압승을 거두자 이탈리아 국회는 진보적인 지방분권법을 통과시키는데, 지구주민평의회의 건설이 이 법안의 핵심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그 동안 지자체의 주요 단위였던 시 밑에 지구가 신설돼 지구 단위로 평의원들을 뽑는 지구주민평의회가 시의회와 같은 임기로 활동하게 됐는데, 굳이 말하자면 우리의 기초 의회와 유사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데, 주민 대표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평의원(무급이었지만)의 수가 우리의 기초 의회보다 훨씬 많았고, 주민평의회는 단순한 입법 기능 외에도 지자체의 행정 기능 일부를 위임받아 수행했다. 그리고, 특정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주민 회의 등을 소집해 주민들의 참여 속에 사안이 결정되도록 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지구주민평의회가 실제 제 역할을 다한 것은 공산당 주도하의 지자체에서뿐이었다. 하지만, 이 당시 실천을 통해 얻은 결론들--주민들의 참여를 진작시키기 위해서 주민들의 참여 ‘능력’ 자체를 제고시켜야 한다는 요청, 진정한 경제·사회생활의 계획화는 분권화된 참여적 계획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깨달음--은 이후 영국, 브라질 등지의 좌파 지방자치 실험에 핵심 강령이 되었다.

   

이탈리아 사례의 한계

  

그러나, 지역으로부터 중앙을 포위한다는 그런 전략은 결코 실현되지 못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실책은 주로, 기독교민주당과의 좌우연합을 받아들이겠다는 ‘역사적 타협’이라는 중앙 정치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공산당은 ‘역사적 타협’이라는 기치 아래 우파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긴축 재정 등을 받아들임으로써 이탈리아에 대처주의적 신우파의 헤게모니가 뿌리내리는 데 일조했던 것이다. 공산당 지자체들도 이의 연장선상에서 중요한 한계들을 노출했는데, 그 중에서도 공산당의 책임성을 보여준다는 미명 아래 지역의 신좌파 투쟁들(특히 실업 청년들의 투쟁)을 오히려 억압했던 것은 치명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지역 사회운동의 중심이 공산당 주도의 민중의 집에서 신좌파 주도의 사회 센터들(주로 빈집을 무단 점거하여 만들어졌다)로 넘어가기도 했다.

  

한때 세계 진보세력의 부러움을 한 몸에 샀던 이탈리아 공산당의 지방자치 활동이 종내 이탈리아 사회 전체의 변혁의 발판이 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이에 대해서는, 위에 제시한 것처럼, 중앙 정치 전략의 오류, 그리고 이로 인해 성공적인 지방자치 활동 또한 전국적 성과로 집약되지 못한 것을 주된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혁신적 실험이 주로 중부 지방을 중심으로만 이뤄지고 이탈리아 사회문제의 온상인 남부에서는 제대로 된 개혁을 관철하지 못한 것을 치명적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겠다. 그람시의 당은 그람시의 필생의 과제(남부문제, 즉 북부 자본주의의 급성장 속에서 오히려 더욱 더 낙후하고 기형화되어야 하는 남부 이탈리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국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 프랑스: 주택 등 공공복지의 확대 

   

프랑스 공산당도 중앙정치에서의 전략적 교착 상태를 주로 지방선거의 성과로 보완했다. 이미 30년대부터 파리 근교의 노동자 밀집형 위성도시들(프랑스의 ‘붉은 벨트’라 불렸다)에서는 강세를 보여왔지만, 70년대에는 이러한 전통적 거점이 아닌 곳에서도 공산당 시장을 배출했다. 특히 1977년 지방선거에서 대승을 거둬 9백만 명의 프랑스 국민이 공산당 단체장을 경험하게 됐다.

   

공산당(혹은 공산당-사회당 연합) 지자체들은 재분배 정책에 집중했다. 우파 지자체들이 대개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많은 재원을 쏟은 반면 좌파 지자체들은 보건, 교육, 보육 등 사회복지 확대에 주력했다. 특히 노동자 가구에 저렴한 임대 주택을 공급하는 데 힘썼다. 프랑스에서는 임대주택 건설을 법률상 중앙정부와 민간기업이 담당한다. 지자체는 독자 예산으로 임대주택을 지을 권한은 없지만, 임대주택위원회에 참여해 영향을 미칠 수는 있다. 공산당 지자체는 임대주택위원회 내의 영향력을 통해 중앙정부에 공공임대주택 건설을 압박하고 민간주택업자의 임대료 설정에 개입했다. 

   

○ 인도: 토지개혁

   

인도에서는 공산당(인도의 두 개의 공산당 중 공산당-맑스주의파, CPI(M))이 서벵골과 케랄라 두 주에서, 중앙정부 차원에서 지체된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1957년 케랄라 주에서의 집권은 서방 진영에서 공산당이 선거를 통해 광역단위 지방정부를 장악한 최초의 사례였다.

   

인도 공산당(M): 지방정부 안팎에서의 토지개혁 투쟁

   

1957년에 케랄라의 공산당은, 인도 최고의 득표와 함께, 비사회주의권에서 민주적 선거를 통해 주정부를 장악한 최초의 공산당이 되었다. 이 승리는 지난 25년간 민중의 요구를 중심으로 하층 계급의 운동을 일궈온 당 활동의 이정표가 되었다. 1957년의 선거 승리를 시발로 케랄라 공산당은 혁명적인 토지·노동·교육 개혁을 통해 기득권에 대항하는 30년간의 새로운 여정에 착수했다.

  

CPI(M)은 현존 착취 제도를 해체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다원적이고 참여민주적인 정치관을 지방의 조건에 대한 세심한 고려와 결합시켰다. 현존 착취 형태들을 타파하기 위한 노력들(예를 들어, 토지와 노동 관련 입법)은 의회 영역과 의회 바깥의 영역 모두에서 추진되었다. 의회 영역에서 CPI(M)은 진보적 개혁을 입법화하기 위해 투쟁했다. 그리고 의회 바깥의 영역에서는 노동조합과 풀뿌리 조직들을 교육하고 동원하는 데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간단히 말해, 이 시기 동안 CPI(M)은 정부의 안과 바깥에서 시민사회와 당 사이의 연계를 심화․강화했다.

  

1960년대 이후 입법 활동은 의회 바깥의 행동들로 보완되었다(예를 들어, 파업, 토지 점거, 시위, 문맹 탈피 운동, 대중 교육, 민중 토지 계획 등). 가령 1970년대에 CPI(M)은 토지 개혁을 위하여 합법성에 대한 강한 집착을 버리고 법이 허용하는 테두리를 넘어서는 대중 행동을 주창했다. CPI(M)은 의회 바깥의 정치 행동이라는 원칙을 반영하여, 새 입법안의 통과를 압박하기 위한 농촌 선동 캠페인에 착수했다. 농촌 선동을 통해 당은 쿠디이리뿌(kudiyirrippu, 지주로부터 집터와 농지를 임대해 살아가는 오막살이 주민들)로 하여금 지주에게 소작료를 내지 말고 지주들의 과잉 소유 토지를 강제 점거하라고 권했다. 이 운동에는 수많은 대중이 참여했고, 결국 개혁의 성공적인 관철을 이뤄냈다.

    

봉건적 생산양식에 대한 이러한 투쟁을 통해 다수 대중이 경제 변혁이라는 공동의 깃발 아래 단결했다. 그 궤적은 법안(法案)에 대중의 욕구를 충실히 반영하려는 노력으로 각인되었다. 대중행동 캠페인의 성공은 빈농의 의식과 정치화가 고도로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는 합법 영역과 의회 바깥 영역 모두에서 정치 행동으로 다시 나타났다. 합법 영역에서는 1964년의 농업 입법 이후 법적 토지 소유권에 대한 소작인들의 요구가 세 배나 증가했다. 그리고 의회 바깥의 영역에서는 참으로 막대한 규모의 토지가 무단 점거되었다. <과잉 소유 토지에 대한 점거 선동>의 유산은 단지 토지 소유권의 회복만이 아니다. 물론 이는 토지 분배의 혜택을 입은 농민들에게는 중대한 의의를 지니지만 말이다. 진짜 중요한 것은 농촌 공동체의 거대한 동원과 정치화다.

   

봉건적 생산양식은 1980년대 중반에는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노동·교육·보건 영역에서도 중요한 개혁이 실시되었다. 이 성과들은 지난 50여 년에 걸친 공산당의 지속적인 풀뿌리 조직화를 논외로 하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혁명적 개혁이 성공적으로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선거 정치와 풀뿌리 조직화, 대중 동원을 서로 결합한 CPI(M)의 전략 덕분이었다. 광범한 유권자들의 능동화와 권력 강화는 지난 50년간 공산당의 전략의 주된 특징이었고, 이 덕분에 시민사회에 대한 당의 헤게모니적 지위가 확고히 유지되었다. 실제로 시민사회에 대한 CPI(M)의 헤게모니는 케랄라의 정치가 왼쪽으로 기울도록 만들었다. 심지어 보수 정당들조차 무상의료․무상교육 같은 좌파의 정책과 프로젝트들을 지지할 정도였다.

-미셸 윌리엄스,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 인도 케랄라의 실험」, <이론과 실천> 2004년 12월호

   

○ 일본: 혁신자치체운동

   

일본 혁신자치체의 성과와 한계

   

1968년 드디어 일본의 국민소득은 서독을 능가하여 세계 제2위가 되었다. 대중은 이제 외교문제가 아니라 물가, 복지, 공해 등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자민당은 바로 이 때 사회복지 확장에 선수를 쳤다. 반면 사회당은 70년 안보투쟁만 바라보았다. 결국 복지의 확대 과정은 노동계급 형성의 계기가 되기는커녕 자민당의 수혜층·지지층만 양산하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사회당은 항상 전투적 야당이었다. 「길」은 대중투쟁을 무엇보다 강조했다. 사회당 의원들은 의장석을 점거하고 자민당 의원들과 난투극을 벌이는 데 이골이 났다. 그러나 과장된 원내 활동은 사회당이 진정한 대중정치투쟁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었다. 대중운동의 바람은 중앙정치의 바깥에서 불어왔다.

   

1963년 지방선거에서 78명의 좌파 시장(‘혁신 시장’이라 불림)이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는 그 동안 지역 수준의 공동전선 활동으로 다져진 각지의 진보 역량이 복지, 공해 등의 새로운 쟁점을 바탕으로 선거에서 힘을 발휘한 덕분이었다. 사회당, 공산당, 노동조합, 시민운동이 공동후보를 냈고 자민당을 이겼다. 좌파 시장들은 전국혁신시장회를 결성했고, 언론은 이들을 ‘제3당’이라고까지 불렀다. 1967년에 실시된 다음 지방선거에서는 좌파 공동후보인 미노베가 도쿄 시장으로 당선됐다. 1973년 지방선거에서는 좌파 시장이 이끄는 도시가 전체 도시 인구의 43.5%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전국 지자체의 1/4이 전국혁신시장회에 가입했다. 중앙의 우파정부에 대해 지방의 좌파정부가 대립하는 양상이 되었다.   

물론 좌파 지자체는 가능성보다는 한계가 많은 것이었다. 아무리 시장이 좌파라고 해도 시의회는 여전히 풀뿌리 보수세력의 지배 아래 있었다. 하지만 혁신자치체운동은 중앙정치에서 실현되지 못한 구조개혁론의 문제의식이 우회적으로 시도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혁신자치체들은 사회당이 놓치고 있던 복지나 환경 문제를 끌어안았다. 실제로 사회당과 공산당 양쪽으로부터 배척당한 구조개혁론자들이 이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혁신자치체의 한계:

첫째, 이 시기의 시민운동과 혁신자치체가 지향했던 것은 고도성장에 따르는 부정적 요소들을 시정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시정하기 위한 재원도 역시 고도성장에 의한 세금의 증수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고도성장의 틀 안에서의 운동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1973년 석유파동으로 고도성장기가 끝나고 저성장기로 전환하게 되자 시민운동이 정체하고 혁신자치체의 발전도 멎어버린 것이다.

둘째, 60년대 혁신자치체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보수 측에서도 공해, 복지, 도시문제 등을 해결하는 데 노력을 쏟고 시민 참가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대응하게 되어, 구호에 있어서는 (적어도) 보수, 혁신의 차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혁신자치체의 정책적 승리가 보수의 추적을 촉발하여 쟁점을 애매하게 만든 것이다.

셋째, 아직 자치체 경영 능력이 낮은 혁신정당들은 공해, 환경, 도시문제를 해결하는 데 풍부한 재원을 투입한 대증요법에만 급급했을 뿐 장기적으로 체계적인 정책 비전이나 생활 비전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 뿌리에는 자치체를 시민 자치 내지 국민 주권의 기초 기구로서가 아니라 국가 권력의 말단 기구로 보는 진부한 좌익적 사고가 자리잡고 있어서 혁신자치체나 시민 운동의 가능성에 대한 과소 평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중략)

넷째, 주민운동 측에도 진정이나 요구형 운동, 행정(정부) 의존형 운동이 많아서 혁신자치체가 공해대책이나 복지대책에 예산을 과감하게 배분하면 거기서 운동이 정체되어 버리는 약점이 있었다. 이런 ‘수익자 민주주의’를 넘어서서 지구환경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스스로 삶의 자세를 변혁시키고 자치체를 시민 참가형, 시민 주도형으로 개혁해 가는 ‘참가형 민주주의’의 지도력과 에너지가 결여되어 있었다.

- 구보 다카오, 「일본 시민운동의 발전과 지방자치」, 한국사회교육원 엮음, 『일본 시민운동과 지방자치』, 한울.에서

   

○ 전환기의 진보적 지방정치

   

2차 대전 후 등장한 공산당 주도의 진보적 지방자치 사례들은 고전적 지방자치 사회주의와 신좌파 지방정치 사이의 과도기적 성격을 띤다. 이들의 복지 확대 시도도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관료적 방식으로 이뤄졌다. 따라서 1970년대 세계 경제 환경의 변화와 함께 중앙정부의 긴축재정 기조가 짜여지자 지방 차원의 진보적 정책들도 커다란 제약을 받고 결국은 좌절하고 말았다.

   

물론 새로운 시대를 예비하는 창조적 시도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구 단위 주민평의회나 대중의 참여를 통해 토지개혁을 추진한 인도 케랄라 주의 사례는 이후 케랄라를 비롯해서 세계 곳곳에서 추진된 참여 분권화 시도의 첫 발을 내딛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공산당이나 일본 사회당․공산당 등은 이러한 새로운 모색을 본격적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4) 지역에서부터 신자유주의와 대결하다: 고전적 지방자치사회주의에서 신좌파 지방정치로의 이행

   

○ 신좌파의 등장과 문제제기

    

60년대의 인종차별반대운동·반전운동·학생운동, 70년대의 공공부문 노동운동·환경운동·여성운동 등은 지방정치 영역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다. 지방정치에서도 신좌파적 문제의식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첫째, 국가관료기구 전반에 대한 회의와 불신이 증대했다. 그것은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대중의 구체적 요구와 괴리된 관료적 수혜 방식에 대한 불만이 나타났다. 영국에서 노동당 좌파가 전통적인 지방자치 사회주의, 즉 수도관과 가스관의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나선 것이나 미국에서 버클리의 신좌파 세력들이 경찰 폭력 문제를 제기하면서 지방정치에 데뷔한 것이 다 이런 맥락이었다.

   

둘째, 대중의 전반적인 참여가 강조됐다. 신좌파의 핵심 주장에는 항상 ‘참여 민주주의’가 있었다. 노동 현장과 생활 현장에서 대중이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는 게 물질적 평등보다도 더 강조되었다. 여기서 참여는 엘리트들이 설계한 제안에 대한 사후 심사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기획 자체를 대중이 직접 담당해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확산됐다.

   

셋째, 전통적인 계급동맹 정책을 넘어서는 다양한 주체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다. 대개 백인 남성인 조직 노동자 외에도 여성, 유색인, 장애인, 소수자 등이 사회운동의 새로운 주체로 떠올랐다. 따라서 진보적 지방정치의 관심 영역도 크게 확대됐다. 

   

○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대안경제모델의 추구

   

1970~80년대는 신자유주의가 막 등장하던 시점이었다. 중앙정부가 대개 신자유주의 우파에 장악돼 있거나 중앙정치에서 좌파정당이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던 시기에 진보세력의 일부는 지자체 차원에서 신자유주의와 구분되는 새로운 대안경제모델을 추구했다. 이는 복지 영역의 공공부문에 제한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사회적 소유의 확대와 대중 참여 계획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특히 영국 노동당 좌파가 주도한 1981~86년의 런던광역시정부(GLC)가 주목된다. 첫째, GLC는 단순히 도시의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 공공재를 확대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소규모나마 사기업을 사회화하고 생산활동의 계획화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런던광역시기업위원회(GLEB)의 활동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둘째, GLC는 과거 사회민주주의의 전통과는 달리 대중들에게 뭔가를 ‘선사’한다는 입장에서 시정(市政)을 펼쳐나간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광범한 영역에서 대중의 ‘참여’를 전례 없이 고양시켰다. 81년부터 5년간 GLC는 관료기구라기보다는 다양한 사회운동들의 마당과도 같았다. 적어도 자치단체 수준에서, ‘국가의 민주화’라는 것이 실제 가능하며 또한 그것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 것인지를 잘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는 ‘국가의 실패’를 부각시키며 시장지상주의를 대안으로 내세운 대처식 신자유주의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대응이기도 했다.

  

영국 노동당 좌파 런던광역시정부의 사례

   

1980년대 초반 노동당 좌파 지방자치체의 등장

  

1980년대 초반 영국 사회는 정치적 격변의 와중에 있었다. 세계적인 불황 속에 1974년 ‘대안 경제 전략’이라는 급진적 강령을 내걸고 집권한 노동당 정부는 당내 우파와 중도파의 전횡으로 인해 개혁에 실패했다. 아니 개혁은커녕 외환위기의 와중에서 이제까지의 케인즈주의 경제정책을 포기하고 시장지상주의 경제학을 받아들임으로써 노동조합(특히 공공부문 노동조합)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이런 가운데,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이 18년 장기 통치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권좌에서 밀려난 노동당 안에서는 패배의 책임을 묻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애초의 선거강령을 실천하는 데 훼방을 놓은 당내 우파 세력들에 대해 공격이 집중됐다. 특히 정부  안에서 산업부 장관으로 개혁을 주도하다가 정치적 희생양이 됐던 토니 벤 하원의원을 중심으로 비판세력이 결집했는데, 이들을 흔히 ‘벤 좌파’라 부른다. 이들 벤 좌파는 사회주의 강령의 채택, 당내 민주주의의 신장, 대중운동에 기반한 정치활동 등을 주장하면서 노동당의 낡은 체질에 일대 혁신을 가하려 했다. 전투적인 노동조합운동 세력과 당내의 청년 좌파 세력, 그리고 60년대의 베트남 반전운동과 70년대의 여성운동, 흑인운동, 환경운동을 통해 등장한 다양한 신진 세력들이 벤 좌파에 결합했다.

  

1983년까지 벤 좌파는 당내 우파, 중도파들과 엎치락뒤치락하는 대결을 계속한다. 하지만, 지역 차원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1968년 지방자치 선거에서 노동당이 대패하면서 2차대전 이후 지방자치체를 꿰차고 앉았던 노동당의 구세대들이 자연스럽게 물갈이되는 상황이 빚어졌는데, 이 덕분에 벤 좌파 세대들이 지역 차원에서는 비교적 쉽게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노동당 지구당과 각 지회가 지방정치 영역에서 단순한 선거 조직에 머물지 않고 일상적인 정책 수립과 투쟁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시작한 ‘지방당 조직의 민주화’ 과정과 함께 이루어졌다.

  

중앙정부를 대처의 보수당이 장악하면서 그 반대로 런던과 주요 산업도시들의 지자체 선거에서는 노동당이 압승을 거두기 시작했는데, 이들 지역의 대부분에서 지방당 조직은 이미 청년 좌파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따라서, 중앙정부는 역사상 유례없는 극우 정권이 차지하고 있는 반면 주요 지방정부는 급진적인 노동당 좌파가 장악하는 긴장된 상황이 벌어졌다. 켄 리빙스턴이 주도하던 런던광역시정부가 그랬고, 리버풀, 셰필드 같은 영국의 대표적인 산업도시들이 그랬다.

    

노동당 좌파 지방자치체의 사회주의 실험

   

새로이 지방권력의 중심에 등장한 노동당 좌파는 이중의 곤경에 마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는 우파 중앙정부의 강력한 도전자로 등장한 지방자치체에 대한 대처 보수당 정부의 노골적인 공격이었다. 애초에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에서도 대처 정부는 지방정부의 사회복지 지출에 대해 극히 적대적이었고, 선거를 통한 단체장의 선출이라는 민주주의 절차도 경제적 효율성에 부합하지 않는 눈엣가시로 여겼었다. 어느 나라에서나 지방정부에 대한 공격의 핵심 고리일 수밖에 없는 재정 교부금 문제를 통해 중앙정부는 좌파 지방정부들을 압박했다. 대처 정부는 정부 보조금을 대폭 감축해나갔을 뿐만 아니라 지방세를 확충하려는 지방정부의 모든 활동을 제약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한편, 노동당 좌파는 지방정부의 복지 지출을 압박하는 보수당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노동당의 오랜 전통과도 대결해야만 했다. 2차대전 이후 노동당은 애틀리 정부 아래서 이뤄진 양대 사회복지정책을 통해 노동계급의 확고한 지지를 받아왔다. 그 하나는 중앙정부 차원의 복지정책인 국영보건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 NHS)라는 (사실상의) 무상의료체계였고, 다른 하나는 지방정부 차원에서 이뤄진 공공임대주택의 대대적 건설이었다. 노동당은 지난 50년간 이 두 개혁의 성과를 갖고 ‘먹고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런데, 이제까지 노동당 지방정부를 주도한 우파 세력은 관료기구를 통한 시혜에만 강조점을 두었지 이런 복지서비스에 노동자·민중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만드는 데는 무관심했다. 이는 대처 정부의 공격에 좋은 기반이 되어주었다. 대처 정부는 기존 복지서비스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공공복지정책 자체에 대한 공격으로 호도했고 이에 따라 광범한 민영화의 일환으로 공공임대주택 정책의 해체가 뒤따랐다.

   

노동당 좌파 지자체들은 우선 공공부문의 이점이 확연히 드러날 수 있는 부분에서 공세적인 정책을 펴는 것으로 시대의 역류에 대응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공공교통정책이었다. 런던광역시정부는 런던시가 운영하는 공영버스와 지하철의 요금을 대폭 인하했다. 지금까지도 런던 시민들이 켄 리빙스턴을 ‘교통문제의 해결자’로 기억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정책은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80년대 초 한때 런던시는 자가용 승용차의 범람으로 인한 교통 정체가 사라진 전 세계의 유일한 거대 도시였다.

   

두 번째로 좌파 지자체들은 1974년의 노동당 정부가 중앙정부 차원에서 그 실현을 약속했다가 불발로 그친 ‘대안적 경제 전략’을 지방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려 했다. 이들 강령의 핵심은, 민간부문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계획 당국을 건설해 이를 통해 친노동자적인 구조조정과 고용확대, 더 나아가 공공부문의 확장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런던광역시정부는 런던광역시기업위원회를 만들어 런던광역시 차원의 경제계획을 수립·추진했다. 자본가가 수익성을 이유로 폐쇄시키려는 작업라인을 단체협상을 통해 살려내고 이에 대해 자주관리를 추진하려 한 루카스항공회사의 실험에 공적 자금을 지원하는가 하면, 협동조합을 획기적으로 확장하려는 계획이 추진됐다. 마침 초국적 자본의 해외 이동으로 인해 고용 대란을 경험하기 시작한 산업도시 셰필드에서도 시정부 차원에서 고용확대정책이 모색됐다.    

     

또 다른 인상적인 조치는 참여민주주의 실험이었다. 좌파 지자체들은 기존에 노동당 지자체가 의존했던 관료주의, 후견주의(특정한 대중 단체의 경제적 요구를 들어주고 그 대가로 선거에서 표를 얻는 정치 관행)를 극복하기 위해 시의 주요 행정에 노동조합, 공공임대주택 거주자 조직, 여성운동 조직, 흑인 지역사회 등을 결합시켰다. 런던광역시정부의 경우, 동성애자 조직에게도 문호를 여는 선구성을 보였다.

이것이야말로 80년대 초반 노동당 좌파의 ‘지방자치 사회주의’의 혁신적 측면이었다. 영국 좌파 전통 안에는 이미 그 전부터 ‘지방자치 사회주의’라는 구상이 존재했지만, 이는 대개 중앙정부의 관료주의와 다를 것 없는 지방정부의 ‘위로부터의’ 개혁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어왔다. 또한, 중앙정부 차원의 급진적 변혁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개량주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도 강했다.

  

그러나, 80년대 초반에 등장한 ‘지방자치 사회주의’는 전국적인 차원에서 노동당을 급진적으로 개혁하려던 벤 좌파 운동의 일환으로서, 전국적 변혁의 필요성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았다. 지자체 차원의 실험이 가지는 ‘진지전’으로서의 제한된 성격을 분명히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무엇보다 지역 공동체 수준의 참여민주주의적 실험을 강조함으로써 사회주의의 중요한 숙제였던 ‘국가의 민주화’라는 문제를 풀기 위한 실마리를 적극적으로 모색했던 것이다.

  

이는 두 가지 결과를 낳았는데, 그 하나는 보수적인 지방 관료들의 제압이었다. 비록 시의회를 좌파가 장악하고 있다 하더라도 지자체의 행정 라인을 장악한 소위 전문 관료들은 자신들의 ‘전문적’ 지식을 내세우며 젊은 지방 정치가와 사회운동가들의 개혁 조치를 훼방놓는 데 지칠 줄 몰랐다. 지방정부의 노동당 좌파는 계획의 수립과 실천 과정에서 대중운동 세력들을 참여시킴으로써 이들을 일정하게 제압했다. 

   

또 다른 결과는 노동당이 전국적인 차원에서 수세에 몰리던 상황에서 당의 풀뿌리 토대를 새로이 구축했다는 것이다. 노동당 좌파의 시정부 행정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대중운동 세력들이 노동당의 든든한 토대로 결합했다. 셰필드 같이 아직도 전통적인 산업 노동계급이 다수인 곳에서 이는 노동계급의 지지를 확고히 하는 효과를 낳았고, 런던 같이 산업 노동계급이 수적으로 열세인 곳에서는 전문직, 사무직 노동자들이나 여성운동, 흑인운동 등 새로운 사회운동 세력을 노동당의 정치적 연합에 초대하는 성과를 낳았다.

   

80년대 초반의 실험과 현재

  

1981년 당대회에서 벤 좌파가 정치적 패배를 겪으면서 좌파 지자체의 실험은 더욱더 영국 진보세력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런던광역시정부의 켄 리빙스턴, 그리고 맹인이면서 셰필드 시정부를 이끈 데이빗 블렁켓(리빙스턴과는 달리 그는 이후 블레어 지도부에 투항했다)이 전국 차원에서 영국 정치의 새로운 총아로 부상했다. 중앙정부가 IRA(아일랜드공화군)에 대해 마냥 사냥에 광분하는데도 오히려 IRA를 지지하고 나서는 수도의 시장은 과연 자본주의 국가가 견딜 수 없는 커다란 스캔들이었다.

  

1985년 결국 대처 정부는 두 가지 결단을 추진한다. 그 하나는 런던광역시정부의 해체이고 다른 하나는 지방정부 재정 교부금의 대폭 삭감이었다. 처음에 좌파 지자체들은 이에 격렬히 반대했지만, 이후 과정은 확실히 지자체 차원의 실험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당시는 1984년 광부파업에서 노동운동 세력이 이미 결정적 타격을 입고 이에 총파업으로 대항하자던 벤 좌파의 주장이 노동당 내에서 패배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전국적인 세력관계가 극도로 악화돼 있었다. 또한, 대처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노동당 시의원들이 제도권 정치의 제한을 벗어나는 대중투쟁에 나서야 했는데, 일부 좌파 의원들조차도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가장 다양한 세력에 의해 구성된 런던광역시정부가 제일 먼저 항복을 선언했고, 셰필드 등의 산업도시들도 결국은 굴복하고 말았다. 리빙스턴이나 블렁켓은 하원에 진출하는 것으로 정치적 생명을 유지했지만, 진보적 지방자치체 실험의 성과는 현실정치가 아니라 사회주의 학자들의 저서 속에만 남게 되었다. 당시 폐지된 민선 런던광역시정부는 2000년에야 부활했고, 리빙스턴이 그 첫 번째 직선 시장으로서 복귀했다. 15년을 기다린 귀환이었다.

   

미국 버몬트 주 벌링톤 시의 사례

  

1. 의의

  

○ 진보세력이 취약한 미국에서 그것도 레이건 정부 시기에 이뤄진 진보적 지방자치 경험

○ 비슷한 시기에 추진된 영국 노동당 좌파의 ‘도시 사회주의’ 실험과 유사한 사례 

○ 세 차례 벌링톤 시장을 역임한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는 지자체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하원에 진출(현재 하원 내의 유일한 무소속 의원)

     

2. 배경

    

○ 버몬트 주: 미국 북동부에 위치한 주

○ 벌링톤 시: 조그만 전원도시이면서도 유수한 대학과 종합병원이 소재. 경제활동도 왕성하여 GE 같은 전통 제조업과 IBM 같은 신흥 첨단산업이 공존. 미국에서 가장 살고 싶은 도시 10위 안에 들곤 한다.

   

3. 선거운동 과정

   

○ 1981년 시장선거: 공화당-민주당-샌더스(무소속) 3파전. 민주당이 오랫동안 장기집권했기 때문에 주로 민주당과의 싸움이었다. 

○ 샌더스 측의 초기 지지 기반: 노동조합에 조직된 블루칼라 노동자, 저소득층, 퇴직자 등

○ 샌더스 측의 주요 선거 공약

  - 민주당 소속 전임 시장이 내건 재산세 인상안에 반대. 반대의 이유는 기존 재산세가 역진적이어서 저소득층과 퇴직자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기 때문.

  - 챔플레인(Champlain) 호반에 대한 무분별한 민간 개발(대개 부유층의 향락 시설 건설) 반대

  - 전원 공간을 파괴하는 종합병원 확장 공사 반대

○ 승리의 결정적 계기: 전임 시장의 반노조적 태도 때문에 공무원 노조, 소방관 노조, 경찰 노조 등이 샌더스를 공개 지지.

○ 결과: 12표 차로 당선. 작은 도시의 선거 결과였음에도 불구하고 샌더스 당선자가 선거운동 과정에서 공공연히 자신은 ‘사회주의자’라고 밝히고 다녔기 때문에 전국적인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음. ‘벌링톤 인민공화국’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4. 첫 임기(1981~1982)

  

1) 시의회와의 투쟁

  

○ 시의회 내의 샌더스 지지자는 단 2명 뿐. 그래서 시의회와 지속적으로 투쟁하는 수밖에 없었다.

○ 시의회에 대한 투쟁 전술

  - 일단 시의회의 승인이 필요 없는 사업에 주력

  - 보수정치인들의 무능과 부정을 폭로

  - 샌더스를 지지하는 진보세력이 제3당을 건설. 처음 명칭은 ‘독립연합’. 지금은 ‘진보연합’ 혹은 ‘버몬트 진보당’

  - 나중에는 ‘페어플레이를 위한 시민위원회’(Citizens for Fair Play Committee)를 결성하여 대중의 힘으로 시의회를 압박. 시장이 지지자들과 함께 직접 시를 돌며 만 장의 리플렛을 나눠주기도 했다.

  

2) 레이건 정부의 수사를 활용하다

  

○ 당시 레이건 정부의 주요 구호: 재정 건전성, 정부의 복지 지출을 줄이기 위한 시민 자원활동 장려

○ 샌더스 시정부는 이러한 시대 분위기를 진보적인 방향에서 적극 활용했다.

  - 재정 건전성 확보: 조세·예산·행정 개혁을 통해 수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 모든 계약은 공개입찰을 의무화해 단가를 낮추었다.

  -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각종 지역사회 프로그램을 만들어 실시 (대표적인 사례: Operation Snow Shovel)

  

3) 문화정책을 통해 시민들에게 다가가다 

  

○ 영화감독 도린 크래프트의 주도 아래 시장 직속의 문화위원회(Council on the Arts) 설립. 각종 사업 추진.

  - 배터리 공원 콘서트를 매년 추진. 그 전에 배터리 공원은 청소년 범죄의 온상이었다. 그러나 이 사업이 시작되면서 문화의 장으로 변신. 매년 1만 명의 시민이 참여.

  - 예술가들에게 시립 시설과 시청 벽(벽화용)을 개방.

○ 적극적인 문화정책을 통해, 그간 문화활동에 접근하지 못했던 블루칼라 노동자와 저소득층에게 문화 향유의 기회를 주고 동시에 예술가 등 중간층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레이건 정부 아래서 문화예술 지원 예산이 삭감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샌더스의 정책이 더욱 커다란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5. 둘째, 셋째 임기(1983~1986)

 

1) 세력구도의 변화

 

○ 샌더스 시장은 1983년 시장 선거에서 52%를 득표.

○ 또한 시의회 선거에서 ‘진보연합’이 13석 중 6석을 차지. 비록 과반수는 아니지만 비토권은 행사할 수 있게 됨. 또한 민주당과 공화당 시의원 중 한 명만 포섭하면 조례를 통과시킬 수 있게 됨.  

○ 지지층이 중소기업가, 여피, 지식인, 환경운동가, 예술가 등으로 확대되었다.

  

2) 보다 적극적인 개혁

  

○ 조세 개혁

  - 버몬트 주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산세 조례를 개정. 

  - 식당 소유자들에게 1%의 특별세 부과.

  - 상업 및 공업용 자산에 대해 재산세를 120% 인상.

  - 지역 케이블 방송사에 과세하고 반면 노인들의 시청료는 인하.

  - 병원과 대학에 대한 경비 비용 및 소방 서비스 비용을 인상해서 사실상 조세 인상 효과를 낳기도 했다.

  

○ 행정 개혁

  - 시정부 내의 비선출직 위원회들(commissions)을 폐지

  - 경찰들에게 생활임금을 지급하여 시정부 내의 보수파를 회유

  

○ 시민 참여 프로그램

  - 여성위원회(Women's Council)를 통해 여성들이 여성 정책의 입안 과정에서부터 참여할 수 있게 했다.  

  - 어린이보호센터, 10대 센터들을 설립해서 방과후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또한 어린이 신문, 극장 프로그램, 청소년 고용 프로그램, 여름 캠프 프로그램, TV 쇼 방청 등을 추진했다.

  - 가장 성공적이었던 사업은 샌더스의 부인이 추진한 Operation Snow Shovel: 독거 노인과 장애인을 위해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자원봉사로 눈을 치우는 프로그램.  * 버몬트 주는 미국에서 눈이 가장 많이 오는 지방이다. 

  

○ 환경 개선 및 보호

  - 조세·행정 개혁을 통해 확보한 예산을 하수도 보수, 도로 보수, 나무 심기 등에 투입

  - 주정부의 쓰레기 소각장 건설 계획을 백지화시켰다.

  

○ ‘사회주의적’ 개발 정책?

  - 시정부 내에 지역사회경제개발청(Community Economic Development Office, CEDO)을 설립하여 대안적 개발 정책을 추진.

  - 뜨거운 쟁점은 챔플레인 호반 개발이었다. 이 곳은 벌링톤의 마지막 미개발지로서 민간업체의 주도로 부자들의 콘도가 들어서고 있었다. 

  - CEDO는 25 에이커에 달하는 호반에 공공 개발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호반 지역의 개발권을 쥐고 있던 올든 워터프론트 사(Alden Waterfront Corporation) 및 각 구의회와 긴밀히 협력했다.

  - CEDO의 3대 원칙

  ① 입안 단계에서부터 민중들이 적극 참여

  ② 올든 사에 대한 규제․감독

  ③ 초기 단계부터 민간업체에 시정부의 요구를 적극 제기

  - 재원은 연방정부의 도시개발사업보조금(Urban Development Action Grants, UDAG)으로 충당. 총 8천만 달러 소요. 이 중 2천3백만 달러는 벌링톤 시정부가 UDAG로부터 받은 지원금을 올든 사에 대부하는 형태로 투입되었다. 올든 사는 그 원금과 이자를 상환. 결국 시정부는 추가 세부담 없이 개발 사업을 벌이고 이자 수익까지 얻은 셈이 되었다.

  - 결과: 호반에 3개의 박물관, 자전거 도로, 산책로, 9 에이커의 공원, 보트 선창, 낚시터, 저소득층·중간층·부유층을 위한 주거 단지(각각이 모두 1/3씩 할당됨), 식당, 상가, 예슬 센터 등을 건립.

  - CEDO는 이외에도 벤처 자본 지원, 새로운 제품 개발에 대한 기술 지원, 중소기업 금융 지원 등의 활동을 벌였다.

  - 비판: 그래도 결국 개발은 부유층을 위한 것. 새로 생긴 일자리도 주로 서비스 부문의 저임금 일자리.

  - 문제점: UDAG를 삭감하려는 레이건 정부의 시도.  * 런던광역시 좌파 정부에 대한 대처 정부의 공격과 유사.

  

○ 주거 정책

  - Land Trust Fund를 설립. 연방정부 재원을 통해 최대 125만 달러를 축적.

  - 위의 기관이 민간 건물 소유주들로부터 건물을 사들여 시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노동자 가정에 분양했다. 

  - 미국 최초로 지방정부 차원에서 주거복지정책을 펼친 사례. 

  

○ 지자체 차원의 외교 정책

  - 레이건 정부가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여 니카라과 혁명을 방해하는 상황에서 니카라과 연대 운동을 펼쳤다. 레이건 정부에 시의회 명의의 항의 서한 발표. 샌더스 시장이 니카라과를 방문하여 푸에르토 카베자스 시와 자매 결연을 맺었다.

  - 레이건 정부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는 상황에서 소련을 방문하여 야로슬라블 시와 자매 결연을 맺었다.

  

○ 기타

  - 프로야구 마이너리그 팀인 Vermont Reds 유치

  - Burlington Local Ownership Advisory Board: 지자체 산하 공기업 설립

  - Burlington Revolving Loan Program

  - Worker Pride Week 후원

 

6. 현재

  

○ 버니 샌더스는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현재 무소속 진보파 의원으로 하원에서 활동하고 있다.

○ 벌링톤 시는 지금도 버몬트 진보당이 시정을 장악하고 있다.

○ 버몬트 진보당은 버몬트 주의 주요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여 현재 주의회에 다수 진출해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 시의 사례

   

1. 버클리 시의 특성

  

○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 분교가 있는 대학 도시. 그래서 학생 인구가 많다. 그 외에도 백인 중산층, 흑인 저소득층이 각각 인구의 1/3씩을 형성.   

○ 버클리 대학이 60년대 미국 학생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기 때문에 미국의 다른 어떤 도시보다 진보적인 성향이 강하다. 더구나 흑인 거주 지역은 ‘흑표범당’(Black Panther Party)의 본산이기도 했다.    

○ 전통적으로 공화당 세가 미미하기 때문에 일찍부터 민주당 대 진보세력의 구도가 형성되었다.

  

2. 버클리 진보세력의 성장

 

○ 1964년 버클리 대학에서 자유언론운동(Free Speech Movement) 등장. 60년대 미국 최초의 좌파 학생운동.  

○ 1966년 진보세력의 독자 후보인 Robert Sheer가 처음으로 하원의원 출마. Sheer는 비록 낙선했지만 그를 지지했던 세력이 1967년 독자 정치조직인 Community for New Politics(CNP)를 건설.

 

* CNP의 강령

- 지자체에 대한 대중 참여 촉진             - 다양한 지자체 소유 기업 건설

- 민간 배전회사의 시영화                     - 민관합작을 통한 부동산 및 주택 개발

- 민간기업에 대한 시 차원의 규제 강화   - 조세·복지를 통한 재분배 정책

  

○ 진보세력의 성장을 촉진한 계기들:

 ① 경찰 폭력 문제: 베트남 반전운동에 대한 경찰의 폭력 진압을 놓고 시 정부에 대한 개입 필요성 절감

 ② 민중공원 사건: 1969년 4월, 버클리 대학 소유의 유휴지에 무단으로 시민들의 참여 아래 공원을 건설하려는 운동이 벌어졌다. 5월 15일 당국이 개입해 무산. 그러나 시민이 직접 참여하여 도시를 설계한다는 이상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③ 버클리 임차인조합(BTU): 1969년 민중공원 사건을 계기로 시민들을 조직하려는 다양한 운동들이 나타났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BTU. BTU는 임차인들을 대거 조직하여 임대인들과 집단교섭을 벌이려 하였다. 1970년 2월에는 임대료 납부 거부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 진보세력의 공동 강령의 발전: 위의 운동들을 계기로, 진보세력의 공동 강령이 형성되었다. 그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시민이 도시 설계에 직접 참여           - 임차인과 임대인의 집단교섭

 - 공공재의 시영화                             - 주택 및 생산 협동조합 장려

 - 임대료 통제

  

○ 진보적 전문가 그룹의 형성: 학생운동 출신의 도시 공학자들이 진보적 강령에 따른 도시 계획 방안을 마련. Cooperative Ownership Organizing Project. 이들이 진보세력의 정책 수행에 큰 도움을 주었다.

  

3. 버클리 진보세력의 시의회 진출

  

○ 초기에 CNP는 시의회 진출에 번번이 실패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급진적인 학생층이나 흑인들의 선거 불참이었다. 그러나 1971년 흑표범당이 흑인들의 선거참여운동에 나서자 상황이 달라졌다. 선거 당시 주요 쟁점은 ‘경찰개혁안’(Oakland idea)이었다. 자치경찰을 대학 지역, 백인 거주 지역, 흑인 거주 지역으로 나눠 각각 따로 운영하자는 것이었다. 

   

○ 1971년 시의원 선거를 앞두고 새로운 선거연합을 구성. April Coalition. 9인의 시의회에 4인을 당선시켰다. Loni Hancock: 전 CNP 활동가, Rick Brown: 대학생, Ira Simmons, D'Army Bailey: 이상, 흑표범당. 시장은 민주당의 Warren Widener.

  

○ 시의회 내에서 진보파가 소수인데다가 나중에는 이전 CNP 세력과 흑표범당이 서로 분열되었기 때문에 시의회 내의 활동에는 제약이 따랐다. Loni는 시의회에서 확보한 정보를 바탕으로 대안예산을 작성하는 운동을 벌였다. 비록 시의회에서 통과되지는 못했지만, 진보세력의 정책을 개발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 1971~1979년, 시의회 내 April Coalition의 의석이 1~3석 수준. 이 시기의 입법 성과: 1972년 임대료 통제 조례(1976년 법원 판결로 뒤집혔다), 주민보호조례, 1973년 정책평가위원회 구성, 1974년 지역 정치자금 상한선 부과, 1975년 공정대표조례 등.

  - 사례1: 1971년 각 운동 단체들을 규합해서 공정임대료위원회를 구성, 임대료 통제 조례안을 작성. 주민 발의로 1972년 6월에 통과시켰다. 5명의 선출직 위원들로 구성된 임대료통제위원회를 구성. 임대료 수준과 강제 퇴거를 규제. 처음에는 진보세력이 위원의 다수를 차지했으나 1973년부터는 세력 구도가 바뀌었다. 그래도 위원회는 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임대인들의 반발로 법정에서 위법 판결을 받았다. 1980년에야 보다 온건한 형태의 새로운 임대료 통제 조례가 다시 통과되었다. 

  - 사례2: 1973년 주민보호조례 통과. 투기 목적으로 아파트를 다수 건설하려는 주택업자들에 대해서는 저소득층뿐만 아니라 중산층도 불만을 갖고 있었다. 주민 발의로 통과된 새 조례는 건축 허가 권한을 시 공무원으로부터 조정위원회로 옮김으로써 난개발을 규제하도록 했다. 중요한 규제 내용은 환경 보호, 그리고 최소한 25% 이상은 서민용 주택으로 건설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 사례3: 1972년 시의회의 지명에 따라 56명으로 구성된 시헌장개정위원회 발족. 이 위원회에서 시정 개혁안을 제출. 그 주요 내용은, 정당명부비례대표제 도입, 시의원 확대, 시의원의 유급 전일 근무, 공무원들의 결정 권한을 유급 선출직들로 구성된 행정위원회들로 이양할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 안은 부분적으로만 수용되었다. 그 결과, 1974~1975년 시 정치자금 상한선이 부과되었고, 1975년에는 시 산하 위원회에 시의회의 각 정당별 의석 분포를 비례적으로 반영하는 제도가 도입되었다. 이 정도의 개혁도 진보세력의 약진에 큰 도움이 되었다. 

  

○ 시의회 내 진보세력과 진보적 도시 공학자들이 결합하여 대안적 발전 프로그램을 추진. 원칙 - 1. 시 소유 및 공동 소유의 확대, 2. 민간기업은 최대한 규제, 3. 기획 단계에서부터 시민들이 직접 참여.

  - 사례1: Salvo Island. 노동자 및 흑인 거주자들을 협동조합으로 조직해서 서민 주택 건설 추진. 1972년부터 운동을 시작하여 결국 1979년에 착공.

  - 사례2: 협동조합 형태의 식료품 상점 개점

  - 사례3: 1974년 민간배전회사의 시영화를 놓고 주민투표 실시. 근소한 차로 패배.     

  

4. 버클리의 진보적 시정부 탄생

 

○ April Coalition이 독자 정치조직인 Berkely Citizen Action(BCA)으로 전환. 1981년 현재, BCA는 30개 이상의 주민 조직과 2,300명의 회비 납부 회원으로 구성.

 

○ 1979년 선거에서 BCA의 Gus Newport(흑인)가 시장으로 당선. BCA는 또한 시의회에서 4석을 차지. 무소속 시의원 한 명이 BCA의 입장을 지지했기 때문에 시의회 내에서 다수파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 승리의 배경: 1978년에 캘리포니아 주에서 주민투표로 통과된 Proposition 13의 영향. Proposition 13의 내용은 자산세 부과 상한선을 설정한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임대인들이 임대료를 그만큼 낮추리라 예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자체 재원만 줄어들고 임대료는 오히려 경쟁적으로 인상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이 때문에 캘리포니아의 많은 지자체에서 임대료 통제 장치를 다시 모색하게 되었고, 진보세력이 힘을 얻게 됐다.

  

○ 시 정부의 주요 정책  

 - 사례1: 1980년부터 임대료 통제 다시 시작

 - 사례2: 대안발전전략 수립. BCA의 The Cities' Wealth는, 대규모 주거개선사업, 임대료 통제, 자산세 대신 누진 소득세 및 법인세를 통한 재원 조달 등을 제시. 1976년부터 Loni의 제안으로 시의회 내에 경제발전위원회 구성. 하지만 1978년 이 위원회에서 제시한 안은 민주당 시장에 의해 거부되었다. 1979년부터 다시 대안발전전략을 작성. 그 주 내용은, 청년·여성·흑인·장애인·노령층을 위한 일자리 창출, 환경보호 및 대안에너지 등의 신기술 개발 및 도입, 작업장 내 소외와 착취 개선, 민간기업·공기업·협동조합이 공존하는 혼합경제, 지역사회로부터의 자본 도피의 통제 등. 약간 완화된 안이 1980년에 시의회에서 통과. 하지만 1981년 선거에서 BCA가 패함으로써 무산되었다. 

 - 사례3: Proposition 13으로 인한 예산 제약에 대한 대응. 자산세 세입이 23.5%에서 7.1%까지로 떨어졌다. 시의회는 시민예산평가위원회를 구성해서 진보적인 방향에서 수지를 맞추려 노력. 중·저소득층의 세 부담을 늘리기보다는 공영 주차장의 주차료, 고층 건물 분담금, 법인세 등의 인상으로 재원을 확보.

 

5. 총평

 

○ 진보적 지방자치에서 주택 문제의 중요성  

○ 시민 참여와 대안발전전략의 수립이라는 측면에서 비슷한 시기의 영국 노동당 좌파 지자체, 미국 버몬트 주 벌링톤 시의 사례 등과 유사. 

  

○ 지방 사회주의의 성과와 한계    

   

신좌파 성향의 진보적 지역 활동가들은 과거의 지방자치 사회주의(municipal socialism)와 자신들을 구별하여 지방 사회주의(local socialism) 혹은 도시 사회주의(city socialism)라는 용어를 선호했다.

   

지방 사회주의는 전통적인 지방자치 사회주의에 비해 다음과 같은 특성을 보였다. 첫째, 자본주의를 넘어서서 대안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보다 과감한 지역 차원의 조치들(사실 한 세기 전 브루스나 베른슈타인이 제시한 강령은 이런 수준에 가까웠다)을 추진했다. 둘째, 참여 민주주의를 본격적으로 시도하여 계획의 심의뿐만 아니라 기획과 입안, 결정 등 모든 영역에서 대중의 참여를 촉진했다. 셋째, 전통적 노동계급 외에 여성·유색인종·소수자 등 다양한 주체들의 연대를 추구했다.

   

하지만 지방 사회주의도 결국 진보적 지방자치의 고전적 한계, 즉 권한과 재정의 제약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1986년 영국의 대처 중앙정부가 재정 교부금으로 좌파 지자체들을 계속 압박하다가 결국 GLC를 해체해버린 것은 유혈투쟁만 없었을 뿐이지 ‘붉은 비엔나’가 극우파 정부에 의해 분쇄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5) 지역에서부터 새로운 민주주의를 일구다: 라틴아메리카 등을 중심으로 한 자치민주주의 실험 

   

○ 제3세계가 횃불을 이어받다

   

진보적 지방정치의 횃불은 제3세계로 넘어갔다. 라틴아메리카 등지에서는 1980년대부터 군부독재로부터 완만한 민주화가 이뤄졌다. 그 과정에서 지방자치제도가 재도입되고 수십 년만에 지방선거가 실시되었다.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성장한 새로운 진보세력들은 지방자치 영역을 민주주의를 보다 확대·심화하고 부의 불평등을 시정할 중요한 발판으로 여겼다. 그래서 이들 신흥 좌파들은 자신들이 집권한 주요 대도시에서 유럽의 지난 100년간의 전통을 뛰어 넘는 과감한 실험을 펼치기 시작했다. 특히 신좌파 지방정치의 경험이 남겨놓은 참여 민주주의의 화두에 창의적으로 도전했다. 

   

○ 참여 분권화의 다양한 실험들

   

라틴아메리카의 좌파정당들과 인도 케랄라 주의 공산당은 법에 규정된 것보다 더 작은 단위의 직접민주주의 내지는 새로운 대의기구를 수립하고 여기에 상당한 권한과 재정을 분배했다(분권화). 이는 단순히 관료기구의 하부 단위에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게 아니라 대중들이 기획 단계에서부터 직접 참여하는 통로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참여). 이러한 참여 분권화 실험은 제3세계 곳곳에서 벌어졌고 나라마다 그 성과도 달랐다. 브라질의 포르투 알레그레나 인도의 케랄라 주처럼 성공적인 곳도 있었고, 페루의 리마나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처럼 실망스러운 곳도 있었다.  

   

① 페루: 1983년에 통합좌파(트로츠키주의 세력 등 좌파 정파들의 연합)의 후보 알포소 바란테스가 수도 리마의 시장으로 당선됐다. 통합좌파 시정부는 라틴아메리카 최초로 참여 분권화를 시도했다.

② 브라질: 1989년부터 포르투 알레그레의 노동자당 시정부가 참여예산제를 추진했다.

③ 우루과이: 1989년 수도 몬테비데오의 시장으로 당선된 확대전선의 타바레 바스케스 시정부가 참여 분권화를 추진했다.

④ 베네수엘라: 1992년 ‘급진적 대의’(La Causa R, 신흥 좌파정당)가 수도 카라카스의 여당이 돼 참여 분권화를 시도했다.

⑤ 인도: 케랄라 주에서 공산당(M) 주도의 주정부가 1996년부터 참여 분권화를 추진했다.

   

○ 포르투 알레그레의 참여예산제의 성과와 한계

   

1. 참여예산제의 성과

   

○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참여예산제는 다음과 같은 성과를 거뒀다.

 

① 시 차원의 공정한 분배가 실현됐다. 

  - 1989년에 49%에 그쳤던 상수도 보급률이 1995년에는 85%로 늘어났다. 노동자당 시정부 이전에 건설된 상수도관이 1100㎞에 그친 데 반해 노동자당 시정부가 8년 동안 건설한 상수도관은 900㎞였다. 공립학교는 1988년 29개에서 1995년에 86개로 늘어났고, 초등학교 학생 수가 2배로 늘어났다.

  

② 참여 인원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 1996년 현재, 참여예산제와 관련된 모든 모임에 참석한 시민 수는 10만명(전체 시 인구의 8%).

  - 참여 시민 중 66%가 주민회에서 활동. 참여예산제를 통해 주민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경우가 대부분.

  - 참여 시민 중 40%가 국졸 이하의 빈민층. 참여예산제의 성과가 분명히 나타나자 중산층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③ 노동자당 시정부 지지율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 1988년 선거: 34.3% ---> 1992년 선거: 40.8% ---> 1996년 선거: 56%

  

  ④ 풀뿌리 시민사회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

  - 주민회가 1986년의 180개에서 1998년 540개로 늘어났고, 협동조합과 민중 평의회는 새로이 각각 51개, 11개가 생겨났다.

  - 지역 명망가들이 지배하던 주민회 대신 진보적 주민회들이 등장하고, 기성의 주민회도 민주화되었다. 그리고 새로이 지역사회를 주도할 진보적 활동가들이 등장했다.

  - 지역개발을 미끼로 거래를 통해 특정 보수정당을 지지하던 정치문화가 사라지고, 탄탄한 진보적 시민층을 기반으로 노동자당과 기타 좌파정당의 공동전선인 <민중전선>이 안정적으로 집권하고 있다.

 

 * 참여예산제는 조례화된 제도가 아니라 하나의 관행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제도’로서 인정받는 것은 시민들이 직접 참여한다는 정당성을 보수파 시의원들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COP가 제출하는 예산안은 거의 예외 없이 시의회에서 통과된다.

 

○ 참여예산제 등으로 쌓인 노동자당에 대한 민중의 신뢰는 결국 2002년 노동자당 룰라 대통령 후보의 당선이라는 결실을 낳았다.

 

2. 참여예산제의 한계

 

○ 주요한 한계들:

 

예산 확보와 신자유주의 사이의 모순 - 브라질 중앙정부가 IMF의 요구에 따라 긴축재정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에 지방정부 예산도 긴축 기조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참여예산제를 통해 결정할 예산의 크기 자체가 작다. 신자유주의와 정면으로 싸우지 않고는 참여예산제만으로 이룰 수 있는 진보에는 한계가 있다.

  

참여를 모든 방면으로 확대해야 할 필요성 - 민중의 참여가 예산안 작성에 집중되다보니 예산이 집행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관료제의 문제, 자본의 개입 가능성 등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했다. 민중의 참여는 기획과 집행, 평가의 모든 과정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 참여예산제의 이후 발전 가능성: 참여예산제가 전국적으로 확대될 경우, 필연적으로 신자유주의에 제한된 공공투자 예산 규모와 민중들의 요구 사이에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 모순을 놓고, 공공투자의 축소로 나아가는 게 70년대 이후 서유럽 사회민주주의가 걸어간 길이라면, 더 많은 민중의 참여와 의식화․조직화 속에 체제 자체에 의문을 던지는 또 다른 길이 가능할 것이다.

  

3. 우리에게 참여예산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1) 더 나은 민주주의는 가능하다  

  - 참여 민주주의란 것은 이상에 불과하다는 진단들이 있다. 민중에게 적극적 참여를 요구하는 것은 과도한 이상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참여예산제는 기존의 민주주의보다 한 걸음 앞선 실천을 보여주었다. 이를 위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의 여러 장치들을 지혜롭게 활용했고, 시민들이 예산 관련 지식을 획득하도록 다양한 교육의 기회를 마련했다. 운동 세력의 의지만 있다면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제2차 세계사회포럼의 구호)’. 

  

2) 냉소주의는 깰 수 있다   

  - 포르투 알레그레에서도 시민들은 애초에 참여예산제에 시큰둥했다. 하지만, 일단 참여의 결과로 더 나은 삶의 질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게 드러나자 점점 더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번 참여한 사람들은 지역사회의 민주적․진보적 활동가로 거듭났다. 신자유주의가 조장하는 가장 위험한 이데올로기인 냉소주의는 충분히 극복될 수 있다.

 

3) 대안 사회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 준비되어야 한다  

  - “참여예산제는 자본주의 사회의 틀 내에 미래 사회주의의 제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좌파정당인 PRC 사무총장 파우스토 베르티노티의 말)

  - 노동자·민중의 결정적 집권 이후에야 대안 사회를 추진할 수 있다거나 그 이전에는 자본주의의 지엽적인 부분만을 고칠 수 있다는 과거의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기존의 대의민주주의를 넘어서는 풀뿌리 민주주의(흔히 평의회 민주주의로 나타나는)를 시도해야 한다.  

 

4) 변혁의 핵심은 무슨 청사진의 실현이 아니라 민중의 참여와 토론·상호교육 과정이다  

  - 참여예산제는 민중들의 참여와 토론을 통해 세계에 대한 더 나은 이해와 지향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파울로 프레이리의 민중참여교육론을 정치 노선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참여예산제의 얼개 자체가 끊임없는 갈등과 긴장 속에서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공동의 지혜로서 구축된 것이다. 진보정당(PT)이 의지와 책임감을 갖고 이 과정을 시작했지만, 그 주인은 대중 자신이었다. 이는 <대중의 주체적 역할>을 강조하는 최근의 흐름에 부합한다(사파티스타 등 참고).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시의 사례

  

1. 참여분권 실험의 추진

  

<1단계>

○ 1989년 군정 종식 이후 첫 시장 직선에서 ‘확대전선’(FA)의 타바레 바스케스가 당선

○ FA는 ‘참여 분권’을 주요 공약으로 제시

○ FA 내 논쟁:

  · 사회당, ‘아티가스주의 경향’: 지역위원회, 심의총회, 각 구별 행정 책임자의 삼각 구조. 지역위원회를 통해 각 정당의 참가를 보장.

  · 공산당, 투파마로스 민족해방전선: 심의총회만의 일원 구조. 정당 참여 배제.

  · 우파 정당들의 반발도 있고 해서, 전자의 입장으로 모아짐.

○ 1990년 첫 조치로 참여분권 조례 제정. 이에 따라 시 전체를 18개 구역으로 구획한 뒤 각 구역마다 District Communal Centre 건설. 시장이 행정 책임자를 임명. 우리의 행정구에 해당?

 

<2단계>

○ 심의총회 소집. 공교롭게도 브라질의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참여예산제가 실시된 것과 같은 시기. 심의총회는 각 구별로 진행. 참여예산제의 주민총회와 거의 같은 역할. 바스케스 시장이 총회에 직접 참여. 총 25,000명의 시민이 참석.

 

<3단계>

○ 심의총회에 대한 우파 정당들의 공세: “소비에트다, 쿠바식 인민위원회다.”

○ 의회 내에서 몬테비데오 참여분권 조례에 대한 위헌 논란. 1991년 특별위원회를 구성해서 분권화 문제를 논의.

○ 1993년 시의회 내 각 정당의 합의로 새로운 분권 모델 등장

○ 새 모델:

  ① 지역위원회: 구 단위에서 정책결정권 행사. 5명의 위원으로 구성. 3명은 시의 집권당(즉, FA)에서, 2명은 시의 야당(콜로라도당과 블랑코당에서 한 명씩)에서 지명.

  ② 주민평의회: 심의총회를 폐지하고 대신 주민평의회를 신설. 우리의 기초의회격? 2년 반 임기의 25~40명의 선출직 평의원으로 구성. 심의총회의 직접민주주의 성격에 비해 대의민주주의 성격이 강화됨. 또한 그 권한이 순수한 자문역에 한정됨.

  ③ 구 행정 책임자, 지역위원회 서기: 지역위원회 서기는 사실상 시장이 지명. 정치적으로 가장 막강한 영향력 행사.

  

<4단계>

○ 새 모델 아래서 시정은 계속 혁신되었으나 시민 참여도는 계속 떨어짐. 포르투 알레그레의 참여예산와 다른 점.

○ 주민평의회 선거 참여자는 1998년 10만 명 이상으로까지 늘어났으나 2001년 다시 9만 명 선으로 떨어짐(월드컵 예선전 때문?).

○ 주민평의회는 아무런 결정권도 지니지 못하고 다만 주민들의 요구를 시청에 전달하는 역할만 함. 예산·정책 수립은 시장의 역할로 남음.

○ 또한 주민평의원들의 성분은 대개 중간계급.

  

<5단계>

○ FA 내에서도(사회당) 참여 측면의 취약점에 대한 반성 대두

○ 참여분권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2000년 말 ‘구 단위 발전을 위한 전략 계획’ 토론을 실시. 1만 명의 시민과 4백 개의 사회 단체들이 참여하여 향후 5년의 발전 계획을 수립.  

   

2. 몬테비데오 좌파 市政의 성과들

 

○ 빈민 거주 지역의 공공서비스 향상: 가로등 설치, 쓰레기 수거, 하수도 가설, 도로 포장 등

○ 주거: 주택조합과 주민단체들에 토지를 제공해서 5,000 가구에 주택 제공.

○ 보건: 보건소 네트워크를 통해 빈민 거주 지역에 무상공공의료 제공. 보건소의 운영에는 지역주민 대표가 참여.

○ 청소년: 공공어린이집 네트워크 건설. 또한 NGO들을 통해 실업 청소년들에게 쓰레기 수거, 환경 개선 등의 일자리 제공(공공노조의 반대).

  

3. 현황과 과제

  

○ 비록 대중 참여라는 점에서는 포르투 알레그레 시의 참여예산제 실험이나 케랄라 주의 참여분권 실험에 미치지 못하나 몬테비데오의 시정이 지속적으로 혁신된 것은 사실(good governance). FA가 장기 집권. 한 여론조사에서는 73%의 시민이 만족을 표시.

○ FA 내의 사회당은 몬테비데오 모델을 수정 보완해서 우루과이 전국으로 확산하자고 주창. 정당들, 지방 공무원들, 시의원과 중앙의원들의 반발. 특히 주민평의회의 전국적 신설에 반대.

   

인도 케랄라 주의 사례

  

1. 발단: 서벵골

 

○ 1977년 인도 공산당(M)이 주도하는 좌파전선이 서벵골 주정부를 장악.

○ 서벵골 주의 숙제인 토지개혁을 실시하면서 민중 동원의 주요 단위로서 판차야트(Panchayats, 촌락, 우리의 경우 동․리?)에 주목. 판차야트(의회)에 많은 권한을 부여.

○ 1988년 판차야트에 공공개발사업에 대한 결정권 부여. 각 판차야트에 200만 루피 상당의 공공개발 재원 할당.

○ 1993년 주헌법 개정. 3대 개혁 실시

  · 판차야트 수준의 행정기구인 그람 판차야트(Gram Panchayat)에 더 많은 재정 권한 부여. 특히 독자적인 세금 징수 권한 부여.

  · 판차야트 의회의 1/3 이상을 여성과 불가촉천민에게 할당

  · 판차야트 단위의 직접 민주주의 기관으로서 그람 사바스(Gram Sabhas, 주민총회)를 설치. 그람 서비스의 참여 대상은 흔히 1만 명 정도이며, 매년 12월에 1회의 모임을 가진다. 여기에서 판차야트 의원들이 공공사업 예산과 집행 등에 대해 보고하고 토론한다.

 

2. 발전: 케랄라

 

○ 인도 공산당(M)은 이미 1957년부터 케랄라 주정부의 여당으로 진출. 60년대에는 토지개혁을 주로 추진, 70년대에는 문맹 탈피 프로그램을 주로 추진.

○ 1996년 인도 공산당(M)이 케랄라 주에서 재집권하면서 서벵골의 실험을 케랄라로 확대하기 위해 ‘권력분산위원회’(사티야브라타 센 박사가 주도해서 ‘센 위원회’라고도 불림)를 구성, 제도 설계.

○ 참여·분권화의 첫 단계로서 일단 주 예산의 40%에 이르는 공공개발사업 예산의 결정권을 판차야트로 이전

○ 판차야트 단위의 개발 계획 수립 과정을 정착시키기 위해 1997년부터 ‘민중 캠페인’을 추진.

  · 1단계: 1997년 8월-9월. 판차야트 별로 그람 사바스 소집. 주민들의 요구 사항 취합. 총 250만 명 참여.

  · 2단계: 1997년 10월-12월. 개발 계획 수립 역량을 다지기 위해 ‘개발 세미나’를 주최. 각 판차야트에서 파견한 30만 명의 대의원들이 교육에 참여.

  · 3단계: 1997년 11월-1998년 3월. 10만 명의 자원활동가들로 태스크포스를 구성하여 분야별 계획을 수립.

  · 4단게: 1998년 3월-6월. 판차야트의 대의원들과 2만5천명의 자원활동가들이 판차야트 단위의 계획을 수립.

  · 5단계: 1998년 4월-7월. 판차야트의 대의원들과 5천 명의 자원활동가들이 판차야트보다 상급 단위의 계획을 수립.

  · 6단계: 1998년 5월-10월. 판차야트별 전문가위원회 회의에서 계획을 최종 성안. 

 

3. 케랄라 주 참여·분권화 실험의 특성

 

대의제와 직접민주주의, 주민 참여와 전문가들의 지원을 서로 결합: 그람 사바스와 판차야트 의회의 결합. 4천 명 규모의 자원기술단을 운용하여 주민들에게 전문 지식을 공급.

주민총회의 실질화: 최소한 수 백 명이 모이는 그람 사바스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여러 개의 분임조로 나눠 토론하게 함. 특히 여성들의 참여를 북돋는 데 기여. 주민 토론 과정에 미리 토론 주제를 배포하고 토론 진행자를 배치하여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

○ 민중 교육의 중요시: 실질적인 아래로부터의 계획 수립을 위해 민중 교육을 중요시. 주 단위의 전문가 6백 명에게는 20일의 교육을 실시. 기초지자체 단위의 전문가 만2천 명에게는 10일의 교육 실시. 판차야트 단위의 전문가 10만 명에게는 최소 5일의 교육을 실시.

○ 판차야트별로 지역의 개발 현황과 계획안을 보고서 형태로 제출

○ 판차야트에 할당된 예산 중 40-50%는 생산 부문에, 40%는 사회복지에, 30%는 도로·에너지 등 사회간접자본에 쓰게 함. 의무적으로 10%는 여성 발전 기금으로 사용.

○ 판차야트마다 1인의 집행관(공무원)을 두어 집행관에게 예산을 지급하고 계획의 수행을 총괄하게 함. 예산은 분기별로 나눠 지급. 3분기까지의 예산 60% 이상이 적절히 지출된 다음에야 마지막 분기 예산을 지급. 필요한 경우, 은행 대출도 알선해주었다.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도 선정위원회를 두어 투명성을 기했다. 공무원들은 선정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할 뿐 자의적으로 업체를 선정할 수 없음. 초기에는 선정위원회 내에도 외부 업체들과 연결되는 문제점들이 나타났으나(이를 막기 위해 감사위원회 등이 구성됨) 그래도 과거와 같이 공무원들에게 맡겨 두는 것보다는 훨씬 투명하다는 게 드러남.

 

4. 효과

  

○ 첫 해는 전체 프로세스가 6개월이나 늦어지고 야당들의 비판이 빗발치는 등 진통이 있었다.

○ 유권자의 10% 가량이 전체 과정에 참여. (여성은 25%를 차지)

○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으며 공공재가 잘 갖춰진 남부보다 민중운동이 발전하고 빈곤한 북부에서 훨씬 활발한 참여가 나타났다. 참여·분권화 실험을 통해 북부에 두터운 시민사회가 형성되었다는 평가.

○ 활발하게 참여하는 지역에서는 그람 사바스를 활성화하기 위해 40-50가구로 이뤄진 주민조직들이 만들어짐.

○ 초기에는 상수도, 주거, 화장실, 도로, 숲 등의 현격한 개선 효과. 점차 무상공공보육, 교육 환경 개선, 보건 센터 증설, 전기선 가설 등으로 중심이 이동.

  

○ 참여 분권화 실험들의 의의

   

라틴아메리카 각 국의 참여 분권화 사례는 다음과 같은 의의를 지닌다. 첫째, 새롭게 등장한 진보정치세력이 집권․변혁 능력을 대중으로부터 인정받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브라질 노동자당의 집권, 우루과이 확대전선의 집권은 지방정치에서의 성과가 없었다면 상상하기 힘들다.

   

둘째, 라틴아메리카의 전통적인 포퓰리즘적 정치 행태를 뛰어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진보세력조차도 지도자 개인의 역량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포퓰리즘적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러나 참여예산제 등의 시도는 대중들 자신의 역량을 강화함으로써 사회 발전의 굳건한 토대를 놓는 데 일정하게 성공했다. 

   

이러한 의의는 라틴아메리카나 인도에만 그치지 않는다. 실제로 참여예산제 모델은 유럽 좌파에게 수출돼 이탈리아 공산주의재건당, 프랑스 공산당 등이 지방정부에서 이를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참여 분권화의 성공 사례들은 아래 박스에 소개한 것과 같이 새로운 대중 민주주의 모델로까지 확장․정리되고 있다. 

   

권한부여형 심의민주주의(Empowered Deliberative Democracy, EDD):

  

대의제·관료제가 일정하게 필요하기는 하지만 이는 참여민주주의에 의해 최대한 대체되어야 하며, 그 근본 구조 자체가 참여민주주의의 강화를 위해 변형되어야 한다는 입장. 또한 참여와 심의의 과정을 실질화하기 위해, 자원의 평등한 분배, 지식․정보의 민주화, 사회운동의 중요성 등을 강조한다.

  

미국의 진보적 사회학자 E. O. 라이트는 브라질의 참여예산제와 인도의 분권화 등을 검토한 뒤 권한부여형 심의민주주의는 다음과 같은 원칙과 특성을 갖는다고 밝힌다(Fung, Archon and Erik Olin Wright. (2001). "Deepening Democracy: Innovations in Empowered Participatory Governance." Politics and Society 29(1): 5-42)

   

3대 원칙

①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쟁점들을 다룬다. 

② 이러한 쟁점들로부터 영향을 받는 일반 시민이, 관료들과 함께, 참여한다.

③ 심의(토의)를 통해 해법을 마련한다.  

  

3대 특성

① 공적 결정권을 역량 강화된(empowered) 기초 단위로 분산시킨다.

② 책임, 자원 분배, 소통의 공식적 연계를 형성하여 각 기초 단위를 서로 연결하고 다시 이를 보다 집중화된 상급 단위와 연결한다. 

③ 참여와 심의 과정을 촉진하기 위해 새로운 국가기구를 창출하고 이를 활용한다.

   

3. 몇 가지 교훈 - 결론을 대신해서 

   

1) 한국에서 진보적 지방정치의 어려움

   

○ 가장 근본적인 문제 - 지방정치에 대한 대중의 욕구 자체의 부족

   

일련의 시민항쟁으로 민주화 과정을 거친 중앙정치와는 달리 지방자치제도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 없이 위로부터 도입되었다. 그리고 도입되자마자 지역주의 정당들과 결합된 지역 토호들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래서 대다수 노동자·민중이 지방정치를 통해 뭔가를 이뤄내겠다는 욕구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형편이다. 진보적 지방정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대중들로 하여금 이러한 욕구를 갖도록 만드는 데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 역사적 배경 - 불모의 지역 시민사회 (유럽, 특히 스웨덴․이탈리아 등과의 차이 비교)

   

식민지기, 해방 공간의 혼란 등 단절기를 겪으면서 대부분의 지역에서 노동자․민중의 공동체가 정치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진보적 사상·문화가 일상생활에 뿌리내리지 못했다. 그 빈 공간을 지역 토호를 중심으로 한 풀뿌리 보수주의가 점령했고, 다시 개인의 원자화를 낳는 소비사회·대중문화가 채웠다. 원자화된 지역 주민들은 집단적 주체로서 공동의 삶의 문제에 개입하는 데 소극적이었고, 그 가운데서 지역지배연합은 온갖 비리와 부패의 자유를 만끽해왔다.

    

○ 최근의 조건 - 신자유주의적 개발주의

   

전 세계적으로 지자체가 외부 자본의 투자를 유치해 실업 문제 등을 해결하려는 개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특히 노무현 정부에 의해 기존의 지역지배연합을 여당 지지세력으로 포섭하기 위해 이러한 개발 경쟁이 부추겨지고 있다. 이는 진보세력이 뛰어들어 대중의 지지를 얻기 쉽지 않은 경쟁 구도다.  

   

○ 주체의 문제 - 진보세력의 지방정치 전략 부재 (브라질과의 차이 비교)

   

한국 진보세력의 주체적 문제도 크다. 우리 진보운동은 그간 중앙권력을 대상으로 한 운동 방식에 익숙해져왔기 때문에 지역사회에 뿌리내리는 데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이는 역으로 지역주의 정당들의 토대를 그대로 유지시켜주는 결과를 낳아 중앙정치에서의 보수 헤게모니를 더욱 강화시켜 주었다. 이제는 중앙정치에서 진보세력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서도 지역에서의 토대를 적극 고민해야 한다.

   

2) 민주노동당의 반성과 주목 지점들  

   

○ 민주노동당의 지방정치 전략이 있었는가?

   

지역조직들에 모든 게 내맡겨졌을 뿐 전국적 차원에서 진보정치를 발전시키기 위해 지역 차원에서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비전과 전략이 없었다. 이로 인해 울산 등 가장 앞서 나간 지역에서도 지자체 등에서의 실천이 대개 기성 정치세력들이 하는 것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데 그치곤 했다(언론의 단체장 평가 등등). 하지만 진보정당이 보여 줘야 할 것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우리는 다른 것을 한다’는 것이다. ‘다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상상력이 없기에 이를 향해 나아갈 수도 없었던 것이다.

   

○ 기존의 거점 중심 전략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나마 당의 지방정치 전략이 있었다면 울산, 창원 등을 중심으로 한 영남 벨트 전략을 들 수 있다. 노동계급 밀집지역을 거점으로 삼아 진보적 지방정치의 공간을 넓혀 나가는 것은 분명 합리적인 전략이다. 한 세기 전의 유럽 진보정당들도 그랬고, 최근의 브라질 노동자당도 비슷한 경로를 밟았다. 그러나 이 전략이 충족되려면 초기 거점인 울산, 창원 등에서 전국적 관심을 끌만한 적극적 실험을 펼쳐야만 한다(영국의 포플라, 이탈리아의 볼로냐, 브라질의 포르투 알레그레 등의 사례들). 민주노동당 1기 지방정치 활동에서 결정적으로 부족했던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이제부터라도 애초에 거점으로 상정했던 지역에 전 당 차원에서 의식적으로 공세를 펼치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거점들을 찾아야 한다.

   

○ 지방정치 영역에서도 우리는 ‘여러 시대’를 한 번에 살고 있다.

   

다른 경우에도 그렇지만 지방정치 영역에서도 민주노동당은 앞선 진보정당들이 수 세대에 걸쳐 경험했던 과제들을 한꺼번에 마주하고 있다. 19세기 말의 초기 진보정당들처럼 지역에 풀뿌리 시민사회를 건설해야 하며, 그러면서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의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처럼 지역에서부터 공공복지를 확대해나가야 한다. 또한 신자유주의와 맞서 복지 영역을 넘어선 대안적 지역발전전략을 모색해야 하며, 이 모든 시도를 관료적인 방식이 아니라 최근 라틴아메리카·인도 등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은 대중 참여를 통해 추진해야 한다. 이 점을 정확히 이해해야만 우리의 정세·풍토에 맞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

   

3) 몇 가지 실천적 제언

   

○ 지방정치에 대한 대중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지방정치를 통해 뭔가를 실현시키고 싶다는 욕구, 지방정치를 통해 뭔가를 얻어낼 수 있겠다는 확신을 대중들 사이에 뿌리내리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떠한 쟁점을 다루든 이것을 중심에 놓고 실천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역에서 무상공공의료 캠페인을 펼친다면 지역에 무상공공의료가 확장되길 바라는 대중의 구체적인 욕구를 촉발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지역의 의료수요자들을 접촉․조직하고 이들이 지역에서 가장 바라는 게 뭔지를(아동 보건인지 혹은 중증 질환에 대한 서비스인지, 혹은 노인 전문 의료인지)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보건소 확대·강화, 지역 2차 진료기관 강화 등 주요 과제를 선정해서 실천해야 한다.

   

○ 지역사회 만들기 운동에 나서야 한다.    

유럽의 진보세력이 19세기 말부터 했던 것처럼 지역에 노동자·민중 주도의 새로운 공동체·사회 관계·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우리에게 지방정치의 핵심 과제는 지방자치라는 좁은 ‘제도’에 매몰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지역 ‘사회’라는 너른 들판을 일구는 게 되어야 한다. 전자는 오히려 후자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 노동운동이 산별 노조 중심 체계로 개편되면 산별 노조의 지역 활동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조합원의 의무적 지역 활동, 지역 차원의 교섭에 지역 의제 반영 등). 그래서 노동조합과 진보적 지방정치가 밀접히 결합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스웨덴, 이탈리아 등의 ‘노동자의 집’을 모델로 하여 지역민중운동센터를 건설하는 것도 생각해볼만하다. 각종 협동조합운동의 가능성도 계속 타진해봐야 한다.  

   

○ 전국적 정치 쟁점과 지방정치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전국적 정치의 쟁점들(부유세, 무상 의료·교육 등)이 따로 있고, 지역적 쟁점들이 따로 있다는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전국적 정치 쟁점들을 지역 차원에서 보다 구체화하고 실물화하여 전개하는 게 민주노동당 지방정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향후 수년간은 지역 차원에서 공공복지를 확대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당 지방정치운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 지역의 대안발전전략을 적극 고민해야 한다.    

개발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지역지배연합에 대항한다고 해서 지역 발전 문제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은 옳지 않다. 개발주의와는 다른 방향에서 대안적인 발전 전략을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을 대중에게 설득해야 한다. 지역 내의 선순환 구조,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한 고용 확대 전략, 토착산업·대안 에너지·지역문화에 기반한 산업 전략 등을 지금부터 고민해야 한다. 울산, 창원 등 산업도시에서는 독점자본에 의한 제조업 공동화에 맞서 지역 차원의 산업 전략을 제출해야 한다.

   

○ 대중의 ‘대리자’보다는 ‘분출구’가 되어야 한다.   

민주노동당이 지방정치의 새로운 자동판매기가 되어선 안 된다. 당이 지자체에 진출하는 가장 중요한 의의가 대중들이 스스로 지방정치의 주인공으로 나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는 주민권력으로 나아가는 길”). 당은 대중이 직접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힘을 조직하며 모든 과정에 참여하게 만드는 일종의 ‘분출구’가 되어야 한다(사회운동정당). 당이 이러한 자세를 취한다면 지역 내의 광범한 민주·진보적 경향들·세력들을 규합하는 데에도 이니셔티브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참여예산제 등의 가장 커다란 의의는 바로 이러한 당 활동 철학에 있다.  

   

○ 진보적 쟁점으로 중앙정부 대 지방정부의 대립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     

○ 여성 등 새로운 운동 주체의 성장 (일본 가네자와의 생활자클럽 사례 등)    

○ 외국 사례의 토착화    

참여예산제를 “반상회에서 광역·기초 지자체 예산을 짠다”고 표현하는 등 외국의 진보적 지방정치 사례를 토착 언어로 번안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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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1 04:42 2006/08/21 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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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사회보고서 -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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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의 대안사회팀에서 토론끝에 작성한 대안사회보고서 중 민주주의에 관한 부분이다. 2005년도에 토론하여 2006년 4월에 나온 것이다.

자치민주주의에 관한 것을 정리하면서 다시 한번 살펴보았는데, 장석준 동지가 정리한 때문인지 매끄럽게 잘 쓰여졌다.

줄여서 정리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다. 



1. 민주주의를 다시 본다


1.1 민주주의는 ‘수단’이 아니라 ‘목표’다


민주주의를 협소하게 이해해선 안 된다. 민주주의의 말뜻부터 살펴보자. 民主주의, 즉 民(인민·민중)이 주인 되는 사회라는 이야기다. 영어로는 Democracy. 그리스말의 Demos(인민·민중)와 Kratia(통치)가 합쳐진 것이다. 민중이 통치하는 사회라는 말이다. 신도 아니고, 왕도 아니며, 부유한 자도, 유식한 자도 아니다. 나, 너, 우리, 이런 저잣거리의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라는 말 안에 사실은 사회주의, 여성주의, 생태주의의 이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이다. 민중이 스스로 통치한다는데 과연 그 민중이란 어떠한 사람들인가, 민중의 자치를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민중의 자치를 위해서는 민중 자신이 어떻게 단련되어야 하는가, 이런 것들을 살펴 들어가는 게 사회주의, 여성주의, 생태주의 등속이다. 말하자면 민주주의가 어떤 수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런 사상․운동들이 민주주의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 혹은 ‘수단’이라 해야 맞는 게 아닐까.


여기서 이런 의문을 던질 수 있다. 민주주의에 이 정도의 가치를 부여하는 게 과연 온당한 걸까?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 ... 행복의 꿈은 사람들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 어떤 특정 집단의 꿈을 다른 이들에게 무작정 강요할 수 없다. ... 그래서 이제 모든 현대인의 공통의 신념은 민주주의다. 현대 사회의 가장 밑바탕을 이루는 근거는 민주주의다. 이 때 민주주의란 단순히 선거나 의회, 표현의 자유 등에 한정되는 게 아니다.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와 능력을 지니며 행복의 교향악을 합주하는 남녀 시민들의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 사람들은 저마다의 능력을 갖고 동등하게 공동체 생활에 참여한다. 그리고 ‘나’만이 아니라 ‘너’와 ‘우리’를 위한 제안을 내놓으며 서로 설득하고 토론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삶을 틀 짜고 수놓는다.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공산당 선언」)라는 맑스, 엥겔스의 말만큼 위의 이상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사례도 없을 것이다. ... 민주주의 시민 공동체에서는 남을 지배하는 자나 어떤 지식․신앙․이념을 독점하는 자 혹은 남보다 더 많은 부를 누리는 자가 인생의 보람을 느끼거나 존경받지 않는다. 자신의 삶에 충실한 만큼이나 타인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의 삶에 뭔가를 제안하거나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이 가장 존중받을 것이다.


1.2 민주주의는 ‘제도’이기 전에 ‘운동’이다


두 번째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민주주의는 ‘제도’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어떤 시대의 민주주의든 그것을 보장할 특정한 제도들을 수반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한 헌법이 있고, 선거제도와 선출직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있으며, 지방자치제도가 있다. 또 언론의 자유가 있고,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들이 있으며, 요즘에는 인터넷도 민주주의의 없어서는 안 될 수단이라 한다. 하지만 이런 제도들이 아무리 갖춰져도 소수 자본가와 엘리트들의 독재는 충분히 가능하다. 다수의 대중이 이러한 과두 세력의 선동에 쉽게 넘어가는 것도 숱하게 볼 수 있다.


민주주의는 ‘제도’이기 전에 ‘운동’이다. 민주주의는 무엇보다도 대중운동이다. 대중의 권리는 대중들 스스로 그것을 청구할 때만 보장된다. 대중의 자치는 대중들 스스로 그것을 행사할 때만 실체를 갖는다. 아무리 그럴듯한 법조문들을 갖추고 이러저러한 제도들을 외국에서 수입해와도 대중이 그것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욕구가 없고 그럴 의지가 없다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겉껍데기에 불과하다. 모든 민주적 제도는 민중 투쟁의 산물로 쟁취될 때만 오랫동안 실제 민중의 무기로서 제 역할을 한다. 그리고 민중 투쟁이 폭발할 때만 화석 같던 제도들, 죽어 있는 것만 같던 법조문들도 어느새 생명을 되찾아 민·주·주·의, 이 네 글자를 실감나게 한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수준 높은 민주주의 시민 공동체는 항상 혁명 운동의 절정기에 그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고대 아테네의 놀라운 직접민주주의도 이 도시의 시민들이 귀족·부자와 맞서 싸우는 과정에 꽃핀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비슷하게 1894년 동학농민혁명 와중에 각 고을에 설치된 집강소는 마을 수준에서 농민들의 자치 능력을 보여줬다. 1980년 광주 항쟁 당시 도청 앞 집회는 민주주의가 정부의 상투적 선전 문구가 아니라 해방의 감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줬다. 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등장한 민주노동조합들에서는 조합원들이 직선으로 집행부를 뽑았고 다시 그 집행부를 소환해 불신임할 수도 있었다. 파업 투쟁을 거듭하면서, 한국사회의 다른 어느 부분보다 앞선 민주주의를 선보인 것이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결코 진화론의 도식을 따르지 않는다. 민중 투쟁은 패배했을 때만이 아니라 승리하고 나서도 잊혀질 수 있다. 대중의 민주적 역량도 단순히 축적되기만 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쉽게 쇠퇴하거나 해체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사회 교과서와 법전, 국회 의사록만으로 세월을 이기고 세대를 이어 전승되지 않는다. 그것은 세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역사적 경험을 통해 재확인되고 재음미되어야 한다. 그것은 처음부터 대중운동을 통해 육체와 영혼을 부여받아야 하고, 다시 대중운동을 통해 매번 부활해야 한다.


1.3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마지막으로 재검토해야 할 상식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다. 현실사회주의가 관료 독재로 전락하면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가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다. ... 사실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말은 일종의 동어 반복이다. 원래 사회주의는 민주주의 운동의 일부, 혹은 그것의 가장 앞선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또 다른 현실을 대입해봐야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자본주의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 속에서, 민주주의 운동의 가장 원칙적인 표현으로 사회주의가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발전해야만 민주주의가 보장된다고 말한다. 실제 세계사를 들여다보면 이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인 것도 같다. 서유럽에서 산업자본주의가 등장하고 그것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가운데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 운동이 분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등장과 확산이 민주주의 운동의 폭발을 수반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곧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의 토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의 성장․확산이 민주주의 운동을 부추기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자본주의의 확산은 항상 전통적 사회 질서의 붕괴․해체를 낳는다. 전통 신분사회의 붕괴는 민주적 시민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배경이 된다. 그러나 여기까지 만이다. 신흥 자본주의가 곧바로 민주주의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자본주의가 등장하면 민주주의 운동이 폭발하는 이유는 오히려 자본주의가 노동자·민중의 생활 그리고 이들의 이상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이게 자본주의의 성장·확산과 민주주의 운동의 발전이 거의 함께 이뤄지는 두 번째 이유다. 전통 사회에서 막 벗어난 대중은 새로운 불만의 대상인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하기 위해 민주주의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심어줘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와 싸우려면 민주주의라는 무기를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동시 성장이 관찰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모순 관계다.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의 심화·확대를 가로막으며 그것의 한계로 작용한다. 근대 세계사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민주주의 세계운동 사이의 투쟁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도대체 자본주의가 어떤 점에서 민주주의의 심화․확대를 제약하는가?


첫째, 정치적 민주주의를 끊임없이 축소하거나 형식화한다. 이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사례들에서부터 드러난다. 장사치에서 출발한 부르주아지가 승리한 것은 도시의 하층 시민·농민들 같은 민중과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민중들은 왜 부르주아지와 함께 싸웠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의 하나는 부르주아지가 내건 민주주의의 약속이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처음에는 민중들에게도 선거권을 약속했다. 하지만 승리한 부르주아지는 일정 액수 이상의 재산세를 납부하는 자들에게만 선거권을 인정했다. 그렇게 해서 의회는 부르주아 계급의 사유물이 되었다. 이름하여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원초적 형태다.


물론 노동계급은 참정권을 요구하며 계속 싸웠다. 100년 넘는 투쟁 끝에 지난 세기 초가 되어서야 겨우 보통선거권이 도입되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제 정치적 민주주의의 제약 요건은 다 사라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일단 보통선거권을 인정한 뒤에는 과거보다 훨씬 교묘한 구조적 장애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기존 부르주아 정당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자․민중 세력에게 극히 불리한 선거제도나 정당제도가 유지된다. 또한 의원이 민중의 대표라면서도 의원들이 민중의 의사에 반해 활동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한다. 게다가 주류 언론을 비롯한 시민사회의 부르주아 기관들이 원군 역할을 한다. 이들은 항상 자신들의 ‘여론’이라는 것을 만들어 선출직 공직자들이 기득권 세력의 이익을 거스르지 않는 방향에서 제 역할을 하도록 받쳐준다. 


이 때문에 노동자·민중 세력은 보통선거권의 도입으로 정치적 민주주의가 ‘완성’됐다는 데 동의할 수 없다. 민주주의 혁명은 계속돼야 한다. 이제는 민주주의 자체가 민주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노동자·민중운동은 항상 대의민주제의 굳은 틀을 깨고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즉 민중 참여와 직접민주주의를 강화하려 한다. 선출직 공직의 범위를 엘리트들의 전유물인 고위 관직이나 사법부 등으로 확대하려 한다. 일단 선출된 공직자라 하더라도 시민들의 의사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 소환하여 불신임할 수 있는 권리(소환권)를 요구한다. 또한 주요 정책과 예산안은 민중이 직접 참여해서 기획·결정하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가와 보수정치인들로서는 결코 잠자코 받아들일 수 없는 무엄한 도전이다. 거리 집회에서 외쳐지는 구호가 일상 정치에 곧바로 반영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결국은 자본주의의 골간이 위협받으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두 번째, 민주주의는 결코 경제 영역으로는 확대될 수 없다. 민주주의는 공장 문 앞, 회사 로비에서 더 이상 출입 금지다. 애당초 우리가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즐겨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그나마 민주주의가 허용된 예외 구역이 ‘정치’ 영역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곳, 소위 ‘경제’ 영역에 감히 민주주의의 ‘민’자도 들이밀어선 안 된다.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요체는 ‘1인 1표’다. 시민 누구나 일정 연령이 되면 동등하게 한 표씩의 결정권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공장에서도 통용되는가? 사장을 선거로 뽑기도 하지만, 그 투표권은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소위 주주라고 불리는 소유권자들만이 투표권을 지니며, 그것도 1인 1표가 아니라 ‘1주 1표’다. 실제 공장을 돌리고 회사를 움직이는 것은 노동자들이지만, 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은 대주주들이다. 경제 영역의 핵심인 생산 현장이 이런 구조이기 때문에 공장 담벼락을 넘고 회사 문을 나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거기에서는 ‘1원 1표’의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4년에 한 번 찾아오는, 동등한 권리의 확인은 허망하기만 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경제 영역은 자본가계급의 독재가 관철되는 거점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권리는 어쩔 수 없이 양보한다 하더라도 이 경계만은 허물 수 없다. ... 당연히 노동자․민중들은 경제 영역으로까지 민주주의를 확대할 것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요구 중의 일부가 자본주의 세계의 몇몇 나라들에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시민들이 살아가는 데 가장 절실한 문제들, 의료, 보육, 교육, 주택, 노후 생활 등에 대해서는 1원 1표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는 조치들이 단행됐다. 그게 바로 복지국가다. 이나마 이뤄진 것도 민중 투쟁의 성과였다. 하지만 노동자․민중운동이 공장 안의 근본 문제, 즉 1주 1표의 부조리까지 문제삼고 나서면 그 때는 이야기가 전혀 달랐다. 1970년대에 복지국가의 일부(영국, 스웨덴 등)에서 자본가들의 소유 독재에 손을 대려 한 몇 가지 시도들은 모두 용두사미로 끝나버렸다. 그리고 일단 진보세력 쪽의 기세가 수그러들자 자본가계급의 역사적 반격이 시작됐다. 복지국가라는 양보조차 다시 빼앗을 수 있다는 게 드러났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공세의 시작이었다.


사회주의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서로 충돌하는 이 두 지점에서 자본주의라는 한계를 넘어 민주주의의 지속적인 확대·심화를 추구하려는 이념·운동이다. 즉 사회주의란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역사적 한계선을 넘어서려는, 민주주의 운동의 가장 원칙적인 부분이다. 이것이 사회주의의 출발점(알파)이고 그 지향점(오메가)이다.


지난 세기 사회주의 운동에는 수많은 과오와 한계가 있었다. 세계 역사상 가장 수준 높은 민주주의의 분출로 나타났던 혁명(10월 혁명)이 가장 반민주적인 체제로 귀결된 뼈아픈 경험도 했다. 그래서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길고 거추장스러운 간판까지 필요한 상황이 됐다. 하지만 전 지구 위에 신자유주의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지금, 인류의 상황은 다시 사회주의가 시작된 그 상황으로 회귀했다.


자본주의(그 벌거벗은 얼굴인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를 제약하고 축소하며 와해시킨다. 민주주의는 이제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한계들을 과감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넘어서야 한다.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분출시키고 이를 경제 영역으로까지 확대할 역사적 운동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사회주의 운동이다.


- N. 우드, 『미국의 종말에 관한 짧은 에세이』, 홍기빈 옮김, 개마고원, 2004: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 논한다.


2. 민주주의는 하나가 아니다 - 역사 속의 다양한 민주주의‘들’


민주주의는 하나가 아니다. 다양한 민주주의‘들’이 있다. 역사 속의 수많은 민주주의 운동들이 저마다의 특징과 사상·제도들을 낳았고, 이것들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서로 경합·투쟁하고 있다. 그 중에는 민주주의 자체의 발전을 위해 이제는 무대에서 빨리 사라져야 할 유령이나 좀비도 있다. 반면에 먼 옛날 지금과는 전혀 다른 역사적 상황에서 처음 등장했으면서도 지금까지 그 의미를 상실하지 않은 전통들도 있다.


- D. 헬드, 『민주주의의 모델』, 이정식 옮김, 인간사랑, 1993: 절판 상태.

- 한국정치연구회 사상분과 편, 『현대민주주의론』 1,2, 창작과비평사, 1992.


2.1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는 한 마디로 자본가계급의 민주주의 사상이다. 영국의 명예혁명,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 대혁명 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시기에 부르주아 계급이 내세운 이념이 바로 이것이다. 이후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들의 새로운 적 노동계급과 싸우거나 타협하는 가운데 그 내용이 좀 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본 골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원조 자유주의는 본래 만인의 평등을 믿지 않았다. 시민으로서 민주적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일정 액수 이상의 세금을 내는 남성들뿐이었다. 이러한 관념은 20세기 초 보통선거권이 도입되고 나서야 헌법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러니까 아직 지구상에서 사라진 지 채 100년이 안 됐다는 것이다. 더구나 자본주의의 상식 속에서는 이 관념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시민을 납세자와 사회복지 수혜자로 나누고 전자를 ‘일등 시민’, 후자를 ‘이등 시민’으로 취급하는 대처나 레이건 식의 사고가 그 대표적인 예다.


지금까지 면면이 이어오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원리들은 국왕·귀족과의 투쟁을 통해 부르주아 계급이 쟁취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다음의 원리들을 들 수 있다.  


첫째,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자율성. 초기 자본가들이 가장 바라던 것은 국왕과 귀족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돈벌이를 하는 것이었고, 구체제에 대항할 세력을 규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가의 직접 간섭을 받지 않는 다양한 사회 활동 영역을 확보하는 게 중요했다. 사기업, 각종 협회, 사교 서클, 언론, 교회 등등. 이들을 흔히 ‘시민’사회(당시 ‘시민’은 곧 부르주아지였다)라 부른다. 시민사회에서는 현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도 자유롭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양심․사상의 자유, 언론․표현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다.   


둘째, 대의제. 적어도 헌법에는 이제 이렇게 씌어 있다, 주권은 시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그래서 시민들이 투표로 위정자를 뽑는다. 복수의 정당이 있고 이들이 선거를 통해 의회에 진출하며 다수당이 집권당이 된다. 그런데 일단 한 번 의원에 당선되거나 여당이 되면, 임기 동안은 그 권한을 완전히 보장받아야 한다. 이번 선거와 다음 번 선거 사이에 주권은 시민들 자신이 아니라 선출직 공직자들에 의해 행사된다. 장사에 여념이 없어서 미처 정치까지 돌볼 시간이 없는 자본가들에게는 그게 편했다.


셋째, 국가 내의 권력 분립, 소위 ‘3권 분립’. 이건 부르주아지가 건설한 새로운 권력 기관들이 국왕․귀족의 전유물이던 국가 안에 들어와 그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르는 과정에서 나타난 원리다. 뿌리가 다르고 사연이 다른 기관들, 즉 관료기구와 의회․사법기관이 국가 기관이라는 이름으로 공존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서로 권력을 나누고 그 영역을 확실히 해야 했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원리 중 일부는 여전히 유효하다. 부르주아지가 한때 체제의 도전자일 때 들고 나왔던 논리들은 지금 그 부르주아지가 만들어놓은 세상을 바꾸려는 세력에게도 소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양심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 같은 기본권들,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자율성, 복수의 정당들이 서로 경쟁하며 집권이 보장되는 대의제의 기본 규칙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중요한 원리들이 자본가계급의 세상에서 지배의 논리로 바뀌었다는 사실도 똑바로 보아야 한다. 한 예로, 대의제의 원칙을 보자. 선거권이 확대돼 노동자도, 여성도 투표를 할 수 있게 되자, 대의제의 원칙은 새삼 더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다. 투표일 이외 나머지 364일은 세상 이치(자본가들 혹은 ‘시장’에 좋은 게 좋은 거라는)를 잘 아는 신사들이 투표일의 약속이나 지금 창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아우성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들이 터득한 그 이치에 따라 주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선출직 공직자들은 이제 민중의 대표라는 것보다는 선거라는 요란한 행사를 거쳐 권력의 정당성을 인정받은 엘리트라는 점이 더욱 강조된다. 


2004년 총선 때 열린우리당이 국민소환제를 공약으로 내세우자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대의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직접민주주의’를 공격하며, 국회의원을 ‘군중의 힘과 거리의 구호’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부르짖는다. ‘군중’을 무서워하고 ‘거리’를 혐오하는 이 ‘민주주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바로 이 시대에 군중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사람들, 즉 기득권 세력의 낡은 무기가 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한 얼굴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정작 양심․사상의 자유 같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들은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사상의 자유를 가로막는 악법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막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전통에서 정작 계승해야 할 것은 번거롭게 여기고, 그 가장 시대착오적인 대목들에서 힘을 얻는 게 바로 우리 시대의 ‘자유민주주의’ 추종자들이다.


2.2 급진 민주주의 혹은 공화주의적 민주주의


하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당시부터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구별되며 이와 투쟁하던 또 다른 민주주의 사상․운동이 존재했다. 이것은 비록 왕정과 싸우는 데는 부르주아지와 협력했지만 부르주아 계급이 만들려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대안을 꿈꿨던 하층 민중의 사상이며 운동이었다. 그 대표적인 운동들로는, 청교도 혁명 때의 급진파(‘수평파’라 불렸다), 미국 건국 초기에 토마스 제퍼슨 등이 대변했던 소농 민주주의, 프랑스 대혁명 시기의 자코뱅파(M. 로베스피에르 등)를 들 수 있다. 이념적 대변자로는 톰 페인과 장 자크 루소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공화주의자들은 재산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모든 시민들이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주의자들이 어쩔 수 없이 어렵게 받아들인 보통선거권이 이들에게는 처음부터 당연한 것이었다.


공화주의자들이 모든 시민의 참정권을 강조한 이유는 평등의 이상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공화주의자들에게 정치란 단지 번거로운 세상사 중 하나에 불과한 게 아니다. 공동체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데 참여해 일리 있는 의견을 내고 토론과 설득의 고단한 작업을 거쳐 공동의 결론을 이끌어낸다는 것만큼이나 멋있고 뜻깊은 일은 없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런 활동에 참여할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그래서 공화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 폴리스의 직접민주주의를 이상으로 여기고, 이러한 민주주의 시민 공동체가 현대에도 실현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민주주의의 본령이 시민 공동체라는 이상에 있다는 걸 분명히 한 것은 공화주의자들의 공(功)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화주의적 민주주의에서 주권은 누구에게 주거나 빌려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권자인 시민들 자신이어야 한다. 투표일만이 아니라 1년 365일 항상 그래야 한다. 그래서 되도록 모든 결정이 시민 총회에서 결정될 수 있는 소규모 사회가 바람직하다. 어쩔 수 없이 공직자들을 뽑아 일을 맡긴다 하더라도, 중요한 사안은 역시 총투표로 결정해야 한다. 또한 공직자가 다수 대중의 뜻에 어긋날 때에는 그 권한을 박탈하고 선거를 새로 실시할 수 있어야 한다. 대의제에 의지하는 것보다는 민중들이 직접 참여하는 게 더 민주적이라는 생각은 바로 공화주의적 민주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공화주의적 민주주의의 이상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루소의 고향인 스위스에서는 지금도 중요한 정책들을 국민투표로 결정한다. 미국의 작은 동네·마을에서는 여전히 주민 총회(town meeting)를 소집해 대소사를 논한다. 사실은 현대 민주공화국의 헌법이 보통선거권을 못 박는 것 자체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원리를 공화주의적 민주주의의 원리로 크게 수정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 공화주의적 민주주의는 이 시대 민중들의 상식이다. 2004년 1월, 16대 국회가 다수 대중의 뜻과 상관없이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했을 때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을 뜨겁게 달군 것은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여부가 아니라 국회가 민의와 다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데 대한 생래적인 반감이었다.


하지만 공화주의적 민주주의는 그 첫 탄생 때부터 커다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민주주의 혁명과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주의가 무럭무럭 크고 있다는 것의 의미를 깊이 새기지 못했다는 점이다. 시민 중의 누구는 자본가가 되어 다른 시민보다 더 많은 권력을 쥐고 나머지 대다수의 시민은 그 자본가들에게 고용돼 일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처지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한 시민의 자격으로 정치 활동에 참여한다는 공화주의의 이상은 점점 더 무력한 이상주의로만 다가왔다. 자본주의가 낳는 시민들 내부의 불평등에 대한 처방이 없으면 시민 공동체의 이상은 백일몽에 불과했다. 하지만 공화주의자들은 이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하지 못했다.


프랑스대혁명 당시인 1790년의 로베스피에르의 연설 한 대목은 공화주의적 민주주의의 이러한 약점을 잘 보여준다. 재산의 불평등은 ‘불가피’한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리의 본질적인 평등’을 회복하겠다는 것 ― 이것이 곧 공화주의자들의 위대함이면서 동시에 그 한계였다.  

그래서 공화주의적 민주주의의 영광과 좌절로부터 민주주의 운동의 또 다른 흐름이, 자본주의를 직시하며 그에 맞서 공화주의적 민주주의의 이상을 새롭게 추진할 세력이 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사회주의 운동이다. 


2.3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이상과 그 배반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에 의해 쟁취되어야 한다”(맑스, 「국제노동자협회 임시규약」). 이것이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대원칙이다. 해방은 민중들 자신의 손으로 쟁취해야 한다. 다수 대중이 스스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여기에서 수많은 의미들을 뽑아낼 수 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다수 대중의 동의 아래 이뤄져야 한다는 것(다수자 혁명), 항상 대중이 직접 참여하고 주도해야 한다는 것(민중 자치), 국가나 정당의 역할은 대중들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비하면 부차적이어야 한다는 것(국가의 사멸) 등등.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에 부과하는 한계들의 극복, 즉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와 경제 영역으로의 민주주의의 확대이다. 여기서는 그 역사적 실례를 살펴보자.


1871년 프랑스 파리의 노동자들은 세계 최초의 노동자 정부 ‘파리 코뮌’을 수립했다. 비록 파리라는 한 도시에 고립되기는 했지만(우리의 광주 항쟁과 비슷했다), 그래도 3개월 동안 지속되면서 참으로 놀라운 실험들을 펼쳤다. 당시 런던에 망명해 있던 맑스는 ꡔ프랑스의 내전ꡕ이라는 저서를 통해 파리 코뮌을 높이 평가했다. 어떤 이론가의 지침이나 계획이 아니라 순전히 파리 노동자들의 창의력만으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모범을 펼쳐 보였다는 것이다.


파리 코뮌은 우선 기존 대의제와 관료제를 뛰어넘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추구했다. 파리 코뮌의 대의원들은 구 단위에서 보통선거로 선출되었다. 당시는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에서 아직 보통선거가 실시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진짜 놀랄 일은 코뮌이 입법기관이면서 동시에 행정기관이었다는 점이다. 행정부와 입법부의 분립이라는 미명 아래 비선출직 관료들이 국가를 좌우하는 게 아니라 철저히 선출직 공직자들이 주도권을 쥐었다. 게다가 지역구민들은 대의원들을 소환하고 불신임할 수 있었다. 기존의 경찰과 상비군은 폐지됐고, 코뮌이 직접 치안 업무를 관장했다. 사법부도 선출직으로 바뀌었고, 역시 소환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공직자들은 노동자 임금만큼만 봉급으로 받았다. 공직자들이 무슨 특권층이 아니라 공직 ‘노동자’임을, 민중의 한 명임을 철저히 확인한 것이다.    


또한 코뮌은 민주주의를 경제 영역으로 확대하려 했다. 우선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데 앞장섰다. 제빵공 직인들의 야간 잔업을 철폐했고, 고용주들이 임금 삭감을 위협하며 노동자들을 옥죄던 관행에도 벌금형을 물렸다. 더 나아가, 코뮌 봉기 후 자본가들이 버리고 떠난 공장들을 노동자 협동조합이 인수했다. 물론 은행도 공공의 통제를 받았다. 비록 초보적 수준에서나마 자본가들의 소유 독재를 넘어서 경제 생활에서도 민중 자치가 이뤄지는 사회를 향해 한 발을 내디딘 것이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이상과 원칙을 이보다 더 생생히 전개한 사례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후 사회주의 운동의 양대 줄기는 이 이상과 원칙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했다.


우선 개혁적 사회주의, 즉 사회민주주의의 흐름부터 보자. 사회민주주의는 한 마디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수준 그 이상으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공공복지의 확충 외에는 사회적 소유의 확대나 노동자 자주관리의 촉진 같이 자본의 독재에 도전하는 적극적 조치도 없었다. 물론 적어도 스스로 앞장서서 민주주의의 발전 수준을 되돌리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대의제의 좁은 울타리를 감히 넘어서려 하지 않는 상황에서 수많은 위험한 독버섯들이 자라났고 역사의 절호의 기회들을 놓쳤으며 미래의 야만을 방조하는 결과를 낳았다. 때로는 파시즘의 등장을 속절없이 지켜보기만 했고, 요즘은 신자유주의 공세에 멍석을 깔아주고 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비록 서유럽 몇몇 나라에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복지국가와 대중의 관계는 전통적인 관료기구와 대중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자연히 대중의 불만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고, 바로 이 점을 주목한 게 신우파, 즉 신자유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복지국가의 ‘관료주의’에 맞서 시장의 ‘자유’를 위해 떨쳐 일어서자고 선동했고, 이는 상당히 먹혀들었다. 복지국가의 전성기에 참신한 민주주의 실험들을 벌였더라면, 상황이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우파정당들보다도 더 순진하게 의회정치의 틀만을 고집한 탓에 신우파의 반격에 대응하기도 힘에 부쳤다. 반면에 대처나 레이건 같은 신우파 정치가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보다 훨씬 능란하게 의사당 안과 밖을 넘나들며 대중정치의 화려한 기술들을 구사했다.


10월 혁명과 함께 시작된 현실사회주의의 한 세기는 더욱 비극적이었다. 이 사례가 ‘더욱 비극적’인 것은 혁명이 시작될 당시의 그 위대한 희망과 놀랍던 가능성 때문이다. 이 때 러시아의 도시 노동자·민중이 보여준 민주주의 수준은 인류 역사상 보기 드문 것이었다.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는 파리 코뮌의 적자였다. 한데, 20년 후 러시아의 현실은 그 정반대였다. 자본주의 국가들을 뛰어넘는 수준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일당독재, 더 나아가 개인독재가 등장했다. 


고전 사회주의 이론가들의 저작 어디를 찾아봐도 ‘일당독재를 해야 한다’는 말은 없다. 10월 혁명의 현장에서도 일당독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10월 혁명은 과거 국가기구의 계승자인 임시정부를 대신해 새로운 대의기구인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었다.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파(‘볼셰비키당’)가 주도적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당시 혁명에 찬동한 정당은 볼셰비키당만이 아니었다. 소비에트에만 해도 볼셰비키당 외에 사회민주노동당 멘셰비키파가 있었고 또 다른 좌파정당인 사회주의혁명당이 있었다. 아나키스트들도 있었다. 소비에트가 직접 권력을 쥐는 데 동의한 것은 이중 볼셰비키당과 사회주의혁명당 좌파였다. 멘셰비키당 내 일부인 국제파도 초기에는 소비에트에서 철수하지 않았다. 소비에트 안에는 부르주아 정당들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복수의 정당들이 존재한 것이다. 즉, 다당제다. 더구나 혁명 후 첫 번째 정부는 볼셰비키당과 사회혁명당 좌파의 연립정부였다. 


그런데 왜 일당독재 체제가 된 것일까? 우선 제헌의회 문제가 있었다. 임시정부는 제헌의회를 소집해서 헌법을 제정하겠다고 선포했다. 혁명정부도 제헌의회 소집 계획을 이어받았다. 그런데 농촌에서는 10월 혁명의 여파가 미처 닿기도 전에 제헌의회 선거가 실시됐다. 그래서 다음 해 초 제헌의회를 소집해놓고 보니 혁명정부에 반대하는 정당들이 혁명 지지 정당들보다 의석이 더 많았다. 혁명정부는 곧 제헌의회를 해산해버렸다. 당시의 급박한 상황에서 이것은 불가피한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을 인정한다 해도, 민의를 제대로 반영할 새로운 제헌의회를 구성하기 위해 곧바로 재선거를 실시해야 했다. 한데, 혁명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제헌의회는 결코 다시 소집되지 않았다. . 


‘제헌의회’는 결정적 전환점이 된 10월 혁명의 훨씬 전에 선출·구성되었고, 새로운 사회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고 사라진 과거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볼셰비키]은 지체 없이 새로운 제헌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를 실시해야만 했었다. (중략)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고 트로츠키는 10월에 소집된 ‘제헌의회’가 부적합하다는 특수한 사실로부터, 혁명과정에서 보통선거를 통해 구성된 인민대중의 대의체는 무엇이든 간에 부적합하다는 식의 일반적인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 로자 룩셈부르크, 『러시아 혁명』, 두레, 1989, 77~78쪽. 


소비에트가 새로운 대의기구로서 제 역할을 다하면 굳이 제헌의회를 거치지 않아도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높은 수준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볼셰비키당을 제외한 다른 모든 정당들의 활동이 하나 둘 금지됐다. 이 대목에서는 볼셰비키당만을 탓하기 힘들다. 공동 여당인 사회혁명당 좌파는 볼셰비키당이 독일과의 혁명 전쟁에 나서지 않는다며 쿠데타를 시도하는가 하면 레닌의 암살을 기도했다. 멘셰비키당과 아나키스트들은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사정이 이러니 일종의 비상사태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때만 해도 야당 활동의 금지는 어디까지나 ‘임시적’ 조치였다.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돌아갔다. 1921년에 내전은 일단 끝났지만, 오랜 전쟁의 결과로 러시아 사회는 너무도 피폐해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혁명을 지지하는 노동자·민중 사이에서 생활고 해결을 내세우며 봉기가 일어났다. 볼셰비키당 안에도 노동자반대파라는 의견그룹이 등장해 정부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바로 이 때 볼셰비키당은 10차 당대회를 통해 최악의 결정을 내리고 만다.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니 이제는 당 안의 분파 활동까지 당분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도 ‘당분간’이라는 게 강조됐다. 당 내 분파 활동의 금지가 어떤 규범이 되어야 한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치 활동의 자유는 영영 회복되지 않았다. 소비에트 내의 다당제는 복구되지 않았다. 소비에트가 아무리 뛰어난 장점을 가진 대의기구라 하더라도 그 안에 당이 하나 뿐인 상황에서는 결코 제대로 된 대의기구가 될 수 없다. 소비에트 대의원들이 다 볼셰비키당(이후 소련 공산당) 소속이면, 당대회나 중앙위원회에서 모든 걸 결정하면 되지 굳이 소비에트 회의를 열 필요가 없다. 결국 볼셰비키당 일당 체제 아래서 소비에트는 자본주의 국가의 의회들보다도 못한 허수아비 대의기구로 전락해버렸다.


한편 이제 볼셰비키당 안에는 서로 경쟁하는 의견그룹들(분파)조차 존재하지 않는 형편이었다. 당대회나 중앙위원회조차 점점 더 거수기에 가까워졌다. 자연히 당권은 일부 당 관료들에게 집중되었고, 그 정점에 바로 당 사무총장(‘서기장’) 요제프 스탈린이 있었다. 그런데 당권은 곧 군 지휘권을 포함한 일체의 국가 권력을 의미했다. 결국 스탈린을 중심으로 한 당권파가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쥔 것이다. 이 상황을 영속화하는 교리가 바로 일당독재였다. 일당독재는 관료독재를 보장했고, 최악의 경우 개인독재의 수준으로까지 추락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8년에 벌써 이러한 결과를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하게 예언했다.



일반적 대중선거로 창출된 대의기구 대신에 레닌과 트로츠키는 노동하는 대중의 유일한 대의체로서 소비에트를 내세웠다. 그러나 전반적인 국내의 정치활동을 억압함에 따라, 소비에트 내의 생활은 점점 더 기형화될 것이다. 보통선거, 언론 결사의 자유, 여론을 끌어들이기 위한 자유로운 투쟁이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모든 공공기관 내의 생활은 파괴되고, 단지 관료제만이 판을 치는 껍데기뿐인 정치활동만이 유지된다. 공공생활은 점차 동면에 들어가고, 지칠 줄 모르는 정력과 무한한 경험을 지닌 소수 당 지도자들만이 명령하고 지배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는 그 중에서도 몇몇 탁월한 당 지도자가 전권을 행사할 것이며, 노동계급 엘리트들은 가끔씩 회의에 초대되어 당 지도자의 연설에 박수를 치고, 이미 결론 내려진 제안을 이의 없이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들러리가 될 뿐이다 ― 이 때 밑으로부터는 파벌이 생긴다. 확실히 이러한 독재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아니라 한 줌밖에 안 되는 정치가들의 독재일 뿐이며, 부르주아적 의미 또는 자코뱅적 의미에서 독재일 뿐이다(소비에트 의회 소집 기일은 3개월에서 6개월로 연기함!). 우리는 더 나아갈 수도 있다. 즉 이러한 상황은 불가피하게 공공생활의 유혈화―암살과 저격 등―를 초래하게 된다.

- 로자 룩셈부르크, 위의 책, 91~92쪽


이러한 정치 질서를 사회주의의 정치 교과서인 양 떠받들던 체제들은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대부분 지상에서 사라졌다. 그것도 무슨 제국주의 세력의 간섭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민중 자신의 궐기로 무너지고 말았다. 일당독재가 애당초 사회주의 운동의 원칙도 아니고 더구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은 이제 더 반복해서 강조할 필요도 없는 진리다.


이게 현실사회주의의 정치 체제에 대한 최종 평가라면, 그럼 경제 체제의 경우는 어떨까? 그래도 사회주의인데, 이 영역에서만은 좀 성과가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정치’와 ‘경제’는 본래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정치권력이 ‘당=국가’에 집중돼 있는데, 경제 영역에서만 민주주의가 꽃필 수는 없었다. 기업이 국가 소유가 되고 시장 대신 계획이 경제 활동을 지배했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생산 현장의 노동자 민주주의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국유화도, 경제 계획도 원래 경제 영역에서 민중 자치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들이다. 만약 이러한 목표를 이루는 데 실패한다면, 이러한 조치들은 그것 자체만으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한데 현실사회주의에서 국가 소유는 관료 권력의 토대 구실만 했고 계획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대신해 노동자들을 쥐고 흔드는 ‘보이는 주먹’ 역할을 했다.


사실 현실사회주의의 경제 체제를 평가하려면, 바람직한 탈자본주의 경제 대안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있는 토론을 벌여야 한다. 하지만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 전이라도, 다음의 교훈만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현실사회주의는 그 경제 체제 면에서도 민주주의의 확대․심화라는 애초의 이상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최소한의 정치적 민주주의도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사회 전반에 걸친 민주주의의 전진은 불가능하다는 것.


- K. 맑스, 「프랑스의 내전」: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4』(박종철출판사)에 수록.

- R. 룩셈부르크, 「러시아 혁명」: 『룩셈부르크주의』(풀무질)에 수록.

- J. 리드, 『세계를 뒤흔든 열흘』, 서찬석 옮김, 책갈피, 2005: 러시아 10월 혁명의 생생한 기록. 


2.4 현대 민주주의의 상황 - 민주주의의 ‘위기’


보통선거권의 도입이 역사의 큰 획을 그은 것은 사실이고, 그 이전과 이후는 확연히 다르다. 하지만 보통선거권 도입 이후라 하더라도 민주주의가 누적적으로 발전해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끊임없는 위기에 노출돼 왔다. 그리고 그 위기의 원인은 자본주의에 있다.


자본가계급의 항구적 욕망 중 하나는 민주주의의 영역을 최소 면적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보통선거 실시 이후 이는 무엇보다도 의회를 비롯한 선출직 공직의 권한을 사실상 유명무실한 것으로 만들고 관료기구의 재량권을 넓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법과 정책, 토론과 감사의 대상에서 면제되는 소위 ‘전문’ 영역들이 늘어난다. 금융, 외교, 안보, 비밀정보, 과학기술 등등. 또한 지식 엘리트들과 주류 언론이 좌우를 막론한 모든 정당들에게 결코 넘어서 안 될 정책적 한계선을 강요한다. 정당들이 이 한계선 안에 머무는 한, ‘선거’는 진정한 ‘선택’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항상 어떤 보다 근본적인 선택지는 투표용지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비록 민주주의 제도는 늘 그렇듯이 존재하더라도, ‘정치’라 불릴만한 것은 차츰 사라진다.


대의정치라는 유일한 통로가 점차 무능을 노출할 때 대중은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 마땅히 더 큰 희망으로 그 절망을 압도해야 할 진보 세력조차 위와 같은 게임의 법칙들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파시즘은 최신형의 극우 선동 정치다. 파시즘이 민주주의의 가장 강력한 적인 근본 이유는 이것이 다름 아니라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민주주의의 실패를 터전 삼아, 그것을 공격하면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정치’랄 만한 게 사라진 세상에서 파시즘만은 화끈한 ‘정치’를 보여준다. 파시즘은 우선 민주주의 운동의 모든 형식을 적극 활용한다. 대중정당, 민중의 조직화, 언론의 활용, 가두시위와 집회 등 좌파 운동의 전통적 수단들을 채용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기성 민주주의의 아픈 곳을 정면 공격한다. 시민사회 안에 이미 존재하는 분열과 증오를 확대시켜 유대인이나 이주 노동자 등 특정 소수 집단을 모든 악의 원흉으로 손가락질하게 만든다. 공화주의적 민주주의의 중요한 덕목들이 보편성․연대성인데, 자본주의 아래서 이런 것들은 허깨비에 불과함을 잔인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 파시즘이 대중의 지지를 얻었던 것은 진보 세력이 이 정도로 적극적인 자신들의 ‘정치’를 펼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공세는 대중의 불만을 자극한다. 그리고 이 불만은 이번에도 자본주의 틀 안의 민주주의가 보이는 기만과 무능 앞에서 더욱 증폭된다. 그런데도 대다수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선배보다 더 노골적으로 자본가계급의 게임에 자신을 적응시킨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정책 한계선 안에 당을 가두는 것을 ‘현대화’니 ‘제3의 길’이니 ‘신중도’니 하는 말로 치장한다. 이것은 그 동안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수준에 갇혀 있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이제는 사회주의의 마지막 잔재조차 완전히 벗어 던지고 자신들이 자유주의 가족의 일부임을 고백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과거의 좌파들까지 한 덩어리가 되어 모두 신자유주의 A형, B형, C형만 제시하는 이런 상황에서 대중은 투표소 안의 ‘선택’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회의하게 된다. 이 때 다시 고개를 들이미는 게 파시즘이다.


신자유주의의 파도가 더욱 거세고 진보 세력이 유럽에 비해 훨씬 미약한 한국사회에서 파시즘은 어쩌면 더욱 빠른 속도로, 더욱 강력하게 성장할 수 있다. 21세기 민주주의의 이 ‘위기’ 앞에서 진보 세력의 과제는 무엇인가? 진정한 선택의 제시, 상투적이지 않은 결단, 사람들로 하여금 뭔가 생각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정치 행위, 이런 것들이다.


3. 대안적 민주주의의 이상과 원칙


3.1 민주주의의 역사적 전통을 이어받는다: 다당제, 시민사회의 자율성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 운동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이상과 원칙을 재확인하고 지난 세기의 그 실패와 비극에 대해 철저히 성찰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 성찰에는 과거 민주주의 운동의 전통들 중 앞으로도 계승해야 할 인류의 자산은 무엇인지 짚어보는 것도 포함된다. 여기서는 그 전통들 중에서도 다당제나 언론·표현의 자유, 시민사회의 자율성 같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들에 대해 짚어보겠다. 


특히, 다당제, 즉 복수의 정당들이 결성돼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고 어느 정당이나 선거를 통해 집권당이 될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다당제는 각종 민주주의 제도가 제 역할을 하도록 만드는 중요한 전제 조건이 된다. 지금과 같은 의회든 아니면 코뮌이나 소비에트 같은 새로운 형식의 대의기구든, 그 안에 복수의 정당이나 그룹이 존재해 서로 경쟁하지 않는 한, 그것은 민주주의 제도로서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항상 관료기구의 거수기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민중들이 정치적 자유를 온전히 누리며 다양한 조직을 통해 자신들의 의사를 표출하지 않는다면, 직접민주주의도 쉽게 겉껍데기로 전락해버릴 수 있다.


다당제는 시민사회의 활력과도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정치 영역에서 다원주의가 막혀 있는데, 시민사회 안에서만 다양한 견해가 꽃필 수는 없다. 국가와 구별되는 대중 조직들이 존재하다가도 결국은 ‘당=국가’에 흡수돼 버리고 만다. 여기에는 노동계급의 조직들, 즉 노동조합 등도 포함된다. 하나의 집권당만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시민사회의 여러 의견 차이가 당 내 분파들 사이의 투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집권당으로서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고 결국은 그 당의 폭발을 낳고 만다.


복수의 정당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당연히 일상적으로 숱한 정치적 논란과 투쟁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집권당의 교체에 따라 국가 정책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비록 좀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대중들이 적극적으로 정치 생활에 뛰어들어 스스로 세상을 바꿔 가는 게 가장 견고한 방도다. 반대 의견을 배제하고 법령과 지침만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 한다면, 그 속도는 빠른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정작 대중의 생활과는 따로 놀기 마련이고 역사 속에 뿌리내리기도 힘들다. 다당제를 보장하여 대의기구가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하고 시민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이 모든 사례를 통해 볼 때 민주적 제도의 ‘성가신 메커니즘’이란 것이 이른바 대중의 살아있는 운동이라든가 끝없는 대중적 압력과 같은 강력한 교정도구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제도가 민주화되면 될수록, 대중의 정치적 생명의 맥박은 더욱 생생하고 강력해지며 ―비록 선거인 명단, 엄격한 정당의 기치 등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당에 대한 영향력은 더욱 직접적이고 더욱 완전해진다. 확실히 모든 민주적 제도도 모든 다른 제도와 공통되는 나름대로의 한계와 결점과 문제가 있다. 그러나 트로츠키와 레닌이 발견한 바와 같은 민주주의를 완전히 제거하는 식의 처방은 치료될 수 있는 질병 그 자체보다 더욱 나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처방은 모든 사회제도의 선천적 결점을 유일하게 치료할 수 있는 바로 그 살아있는 원천을 차단시키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원천이란 인민대중의 활동적이며 자유롭고 활력에 찬 정치활동이다.

- 로자 룩셈부르크, 위의 책, 80~81쪽.


위 인용문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판 대상이 된 트로츠키도 이후 혁명의 변질을 목격하고 난 뒤에는 생각이 바뀐다. 뒤늦게나마 다당제, 비밀투표 등의 중요성을 인정한 것이다. 


실제로 계급은 내부 구성이 이질적이다. 그리고 계급 내부의 적대에 의해서 찢겨져 있으며 경향, 그룹, 정당 등이 그 내부에서 진행하는 투쟁을 통해서만 공동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약간의 유보조항을 덧붙일 경우 “당이 계급의 일부이다”라고 인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계급은 많은 구성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미래를 바라보는 진보적인 부분과 과거를 회상하는 반동적인 부분이 있다. 따라서 똑같은 계급이 여러 개의 정당을 만들 수도 있다.

- 레온 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갈무리, 1995, 267~268쪽.


관료적 전제체제는 소비에트 민주주의로 대체되어야 한다. 비판의 자유를 회복시키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거를 실시하는 것이 나라의 발전에 필요한 조건이다. 이것은 볼셰비키당을 비롯한 소비에트 내 정당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회복시키고 노동조합을 부활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 트로츠키, 위의 책, 287쪽.


그럼 대안 사회에서 정치적 다원주의가 허용되는 범위는 어디까지여야 하는가. 트로츠키는 자본주의의 극복에 동의한다는 이념적 범위 안에서만 정당 활동의 자유를 인정하자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 그 범위를 벗어나는 우파 정치세력은? 그들의 정치 활동은? 이들이 선거를 통해 집권한다면 역사가 뒤로 후퇴할 텐데, 이런 위험도 감수해야 하는가? ― 그렇다. 바로 그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이것까지 받아들이는 게 정치적 다원주의의 핵심이다.  


친정부 인물만을 위한, 일당의 당원만을 위한 자유는 ―그들의 수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전혀 자유가 아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자유도 인정하는 것이 진짜 자유다. ‘정의’라는 개념에 매료되어서가 아니라, 정치적 자유는 정의에 입각할 때만이 비로소 온전하기 때문이다. ‘자유’가 어떤 특권이 된다면 자유의 효용성은 없어지고 만다. 

- 로자 룩셈부르크, 위의 책, 88쪽.


20세기의 혁명 중 이러한 길을 걸은 유일한 사례가 바로 1979년의 니카라과 혁명이다. 소모사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승리한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은 FSLN 외의 다른 정당들에게도 정치 활동의 자유를 보장했고, 여기에는 우파정당도 포함되었다. 1984년에는 혁명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와 총선을 실시했고, 여기서 FSLN 후보가 65%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1990년 2월의 대선에서는 우파 후보가 승리했다. 당연히 정권은 우파에게 넘어갔다. 선거 결과가 이렇게 나온 데는 미국의 간섭 탓이 컸다. 미국이 극우 게릴라들을 지원하여 계속 무력 간섭을 했기 때문에 니카라과 사회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고 그래서 민중들도 좀 ‘편한’ 삶 쪽을 선택한 것이다.


선거로 권력을 내준 FSLN이 어리석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니카라과의 역사는 일보 후퇴했다. 하지만 노동계급의 이름을 내세운 정당이 노동자․민중의 궐기 앞에 무너지고 만 소련·동유럽의 경우만큼 처참한 후퇴는 결코 아니었다. 그에 비하면 니카라과의 후퇴는 차라리 미래의 가장 확실한 전진을 위한 일시적 퇴각이라 해야 할 것이다. 니카라과 혁명 세력이 비록 당분간은 권력에서 멀어졌을지 몰라도, 이들이 뿌려놓은 민주주의의 씨앗이 견실히 자라는 한, 민중들은 언제고 다시 이들과 손을 맞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간과하면 안 될 것은 1990년 선거 당시 FSLN이 선거에 져서 권력을 내놓기는 했지만 이게 그림의 전부 다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선거로 쉽게 바뀔 수 없는 보다 깊숙한 수준에서는 혁명세력의 주도권이 의연히 유지됐다. 군대나 경찰 같은 핵심 국가기구에 FSLN의 영향력이 지속됐고, 사회 전반에 걸쳐 튼튼한 좌파 지지층이 버티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니카라과 사회에 뿌리내린 진보 세력의 ‘헤게모니’였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파가 선거에 승리했다고 해서 쉽사리 최악의 반혁명을 시도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우파와 좌파 사이의 서로 밀고 밀리는 기나긴 진지전이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 시의 사례도, 규모는 작지만, 비슷한 교훈을 던져준다. 이 도시에서는 지난 80년대 말부터 노동자당 시정부의 주도로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시 예산안을 짜는 참여예산제가 실시됐다. 참여예산제는 한 번도 조례로 입법화된 적이 없지만, 그래도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확고히 자리잡았다. 참여예산제의 주창자인 노동자당은 불행히도 2004년 지방선거에서 포르투 알레그레의 시장직을 상실했다. 시장 자리는 십 수년만에 처음으로 노동자당 아닌 다른 당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새 시장의 첫 번째 공약은 ‘참여예산제 만큼은 건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공약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지켜지고 있다. 참여예산제가 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기에 당장의 선거 결과만으로 이것을 쉽게 뒤집을 수는 없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 대중들 사이에 너무도 당연한 상식으로 뿌리내리게 하는 것,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따라서 돌이키기도 힘든 수많은 진지들을 건설하는 것, 그래서 누가 집권당이냐는 사실만으로는 대세를 거스르기 힘들게 만드는 것, 이것이 21세기 사회주의 운동이 역사를 전진시키는 방식이어야 한다.  


- L. 뜨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김성훈 옮김, 갈무리, 1995: 10월 혁명 지도자의 스탈린주의 비판.

- E. 만델, 『페레스트로이카를 넘어』, 차혁 옮김, 태백, 1990: 트로츠키의 입장을 이어받아 구 소련 체제를 비판한 책. 이 책은 현재 절판 상태.

- 『제4인터내셔널 12차 대회 결의안』, 논장, 1990: 이 중 “프롤레타리아독재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이 책은 현재 절판 상태.

- 이범준 외, 『사회주의 실험: 쿠바와 니카라과』, 인간사랑, 1992: 절판 상태.

- 강문구, 『포위된 혁명: 니카라과 혁명 10년사의 현대적 조명』, 나라사랑, 1993: 절판 상태.


3.2 민주주의의 미래를 일군다: 자주관리․자치


하지만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 운동이 되살려야 할 가장 소중한 전통은 뭐니뭐니해도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가 분출했던 역사적 경험들이다. 1871년 프랑스의 파리 코뮌; 1894년 동학농민혁명 중의 집강소; 1917년 러시아의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 1918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등장한 노동자․병사 평의회(독일어로는 ‘레테’); 1919년~1920년에 걸쳐 이탈리아의 북부 산업지대를 휩쓴 공장평의회와 자주관리 생산;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와 노동자 자주관리 운동; 1956년 헝가리 혁명 중의 노동자평의회; 1972년 칠레의 인민연합 정부와 자본가 세력이 맞붙는 가운데 모습을 드러낸 산업코르돈과 지역자치지도부; 현재 베네수엘라에서 나타나고 있는 노동자 자주관리와 민중 자치의 시도들 등등.


이들 경험은 시간의 선후로 보면 우리의 ‘과거’에 속하지만, 그 의의는 오히려 ‘미래’ 쪽을 향한다. 위의 사건들 속에서 당시의 노동자․민중이 시도한 생산 현장의 노동자 자주관리, 전 사회적 수준의 민중 자치는 바로 지금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의 이상이기도 하다. 과거의 민주주의가 의회를 건설하고 시장을 확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혁명 속에서 등장했다면, 이제 새 시대 민주주의의 핵심은 자주관리와 자치를 추구하는 노동자․민중의 거대한 운동을 통해 등장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자주관리․자치의 실현은 단지 역사의 우연한 폭발을 기다리기만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어찌어찌 해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진보 세력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면 실질적인 권력 중심으로 부상하기 힘들 것이다. 우리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먼 미래에 벌어질 꿈 같은 일로만 바라볼 게 아니라 지금부터 그 싹을 키워가야 한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노력들이 필요하다.


첫째,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가 마치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하는 것처럼 보여도 항상 기존 사회의 태 안에 이미 그 맹아가 존재한다는 점을 잘 봐야 한다. 1919~1920년의 이탈리아 공장평의회는 노사간의 일상 교섭을 위해 존재하던 내부위원회 제도가 발전한 것이다. 이것은 A. 그람시를 비롯한 이탈리아 사회당의 젊은 운동가들이 일찍부터 내부위원회에 주목하여 이를 노동자 자주관리 기관으로 발전시키려 한 노력의 결과였다. 우리도 단순히 자주관리․자치가 필요하다는 추상적 주장에 머물 게 아니라 이렇게 일상의 삶 속에서 대안 사회의 싹을 찾아내야 한다. 때로는 진보 세력이 의식적으로 그 싹을 만들 수도 있다. 참여예산제가 좋은 사례다.


둘째, 미래의 민주주의는 일정한 견습 기간을 거쳐야 한다. 새로 등장한 자주관리․자치 조직들이 기존의 대의기구나 관료기구가 담당하던 기능들을 갑자기 모두 떠맡게 된다면, 커다란 혼란이 나타날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성숙시키기 위해서는 기존의 민주적 제도들을 그 인큐베이터로 적극 활용하지 않을 수 없다.


상당한 기간 동안은 민주화된 대의기구들이 민중 자치 조직들과 서로 협력과 긴장의 관계를 맺으면서 공존해야 할 것이다. 사실 파리 코뮌이나 평의회도 일종의 대의기구였지 그것 자체가 곧바로 직접민주주의였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이들 새로운 대의기구는 기존의 의회에 비해 대중의 직접 참여에 적극적으로 열려 있다는 결정적 차이점을 갖고 있었다. 혹자는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를 추상적으로 대립시키고 일체의 대의제를 불신하거나 직접민주주의만이 대안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런 논리는 현실에 들어맞지도 않을뿐더러 바람직한 입장도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민중 자치의 이상에 가장 근접하도록 민주적인 대의제와 일상 생활의 대중 참여나 대중운동을 서로 결합시킬 최적의 방식이 무엇인지, 그것을 고민해야 한다.


이로부터 세 번째 과제가 제기된다.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가 지속적인 생명력을 지니는 하나의 ‘체제’(system)로서 작동할 방안을 연구하는 것이다. 사회 곳곳에서 민중 자치가 실현되려면, 참으로 다양한 형태의 조직들이 필요할 것이고, 이들이 서로 복잡한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소위 정치적 문제만은 아니며, 경제·사회적 대안과도 직결된다.


마지막으로 제시할 과제는 바로 대중들 자신의 훈련이다. 자주관리·자치의 성패는 대중들의 역량에 달려 있다. 사회의 주요 쟁점들을 숙고하고 토론하며 합의할 수 있는 능력이 성숙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지속적으로 발전해야 한다. 정보와 지식을 개방하고 적절히 다루는 능력; 모든 진지한 토론의 전제인 인간의 존엄성이나 보편성에 대한 감각 혹은 윤리적 공감의 능력; 복잡하고 골치 아픈 문제를 머리를 맞대고 끈기 있게 숙고하는 능력; 자기 집착이나 감정적 충돌 없이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고 의견을 제시하며 설득하는 능력 등등.


이런 능력들은 ‘지금 여기’에서부터 훈련되어야 한다. 당이 바로 그 장이 되어야 하고, 노동조합이 그 장이 되어야 하며, 지방자치제를 비롯한 모든 민주적 제도들이 그 장이 되어야 한다. 당 사업을 기획하든 노동조합 활동을 설계하든 항상 이 점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당과 대중운동이 그 안에 대안 사회의 모습을 미리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이런 맥락에서다.


- R. 스위프트, 『민주주의』, 서복경 옮김, 이소출판사, 2004: 대안 민주주의의 방향을 짧지만 명쾌하게 밝힌 책. 강력 추천.

- A. 그람시,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이전』, 김현우·장석준 옮김, 갈무리, 2001: 공장평의회에 대한 그람시의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 김기원, 『미군정기의 경제구조: 귀속기업체의 처리와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을 중심으로』, 푸른산, 1990: 해방 공간의 노동자 자주관리 운동을 소개한 책. 이 책은 현재 절판 상태.

- C. 하먼, 『동유럽에서의 계급투쟁』, 김형주 옮김, 갈무리, 1994: 이 중 특히 제9장 “1956년: 헝가리혁명”.

- M. 그레 외, 『새로운 민주주의의 희망』, 김택현 옮김, 박종철출판사, 2005: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 시의 참여예산제 경험을 정리한 책.

- 가라타니 고진, 『일본 정신의 기원: 언어, 국가, 대의제 그리고 통화』, 송태욱 옮김, 이매진, 2003: 이 중 제3장 “투표와 제비뽑기-기쿠치 칸의 <투표>” 


3.3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과 그 새로운 과제 - 대안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사회적 능력의 구축 


우리는 6월 항쟁의 위대성뿐만 아니라 그 한계 또한 똑바로 봐야 한다. 현재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들은 바로 이 6월 항쟁의 한계와 직결된다. 역사적 경험이야말로 대중의 학교이고, 따라서 6월 항쟁이라는 대대적 수업에서 잘못되거나 누락된 부분은 곧 이후 우리의 민주주의 실천에서도 고스란히 공백과 약점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첫 번째로 지적해야 할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들의 상식이다. 그 해 6월의 거리에서 시민들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쟁취’를 외쳤다. ‘직선제 개헌’을 외친 입장에서만 보면 6월 항쟁은 확실히 민중의 승리였다. 6·29 항복 선언과 함께 군부 세력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으니까, 그래서 새 헌법이 만들어지고 제6공화국이 수립됐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새 헌법은 제헌의회의 소집 없이 군부독재정당과 보수야당 사이의 밀실 담합으로 만들어졌다. 반면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군부 독재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이룬 브라질에서는 제헌의회를 소집해 대중의 관심과 사회 세력들 간의 논쟁 속에 새 헌법을 만들었다.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제헌적 ‘사건’(6월 항쟁)과 함께 시작되기는 했으나, 그에 마땅한 제헌적 ‘토론’은 거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한계는 단지 헌법 내용에만 반영된 게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대중의 상식이 특정한 형태로 고정되고 그 민주적 행위 양태가 어떤 틀 안에 갇히게 되었다는 점이다.


6월 항쟁 이후 대중의 상식 속에서 ‘민주화’란 다른 무엇보다도 최고 집행 책임자를 직선으로 뽑는 것이었다. 일종의 ‘직선제형 민주주의’라고나 할까. 직선제형 민주주의에서 대중의 민주적 행위는 주로 직선 지도부에게 막중한 정치적 과제를 지우고 그 책임을 철저히 따져 묻는 양태로 나타났다. 이것은 대중들 스스로 토론과 숙고를 통해 골치 아픈 문제들의 해법을 찾아나가고 공동의 책임을 떠 안는 행위 양태로 보완되지 않으면, 직선 지도부에 대한 과도하고 수동적인 기대와 그것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의 일시적인 분노의 표출 정도로 협소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민주노조운동의 초기에는 대의원들의 활발한 활동, 조합원들의 분임 토론, 대중투쟁의 활력 등을 통해 이러한 위험을 예방할 수 있었지만, 이런 요소들이 하나 둘 눈앞에서 사라지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직선 간부직을 차지하기 위한 직업적 활동가들의 경쟁만이 치열해지고, 대중은 선거 시기 외에는 참여의 의욕을 보이지 않으며 민주주의를 실감하지도 못한다. 이것은 노동조합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사회 곳곳에서 비슷한 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도 유독 노동조합들에서 직선제형 민주주의의 한계와 변질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이유는 민주노조가 87년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앞선 실험장이었기 때문이다.


대중의 민주적 행위가 항상 좁은 틀에 갇힌 채로 나타난다는 것은 곧 대중의 역량이 성장하는 데 뭔가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종 선출직 공직자들에 대한 기대와 분노가 대중의 참여를 폭발시키곤 하니까 겉으로만 보면 아주 선진적인 민주 사회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와 분노는 대개 일회적인 축제나 분규로 끝나 버린다. 일단 투쟁의 클라이맥스가 끝나고 나면 예전과 다르지 않은 일상으로 돌아갈 뿐이다. 이런 경험이 몇 번 되풀이되다 보면 누구든 허무주의와 냉소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한국 민주주의의 또 다른 한계는 민주화가 극히 제한된 영역에 그쳤다는 것이다. 정치 영역에서 군부 독재의 청산은 군부 독재를 경험한 나라들 중에서는 가장 철저하게 이뤄진 편이다. 하지만 사회 전반의 민주화는 그 진행 속도가 너무나 더디다. 정당이나 고위 관료, 사법부, 언론, 대학 등은 여전히 민주화의 예외 지대로 남아 있다. 일상 생활의 민주화는 사실 시작의 시작 단계에 있다고 봐야 한다. 한국에서 가상 공간이 그토록 활성화된 원인은 실제의 일상 생활 공간에서는 아직 초보적 수준의 시민적 대화도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하지만 그 가상 공간에서조차 진지한 토론과 숙고는 소수의 미덕으로만 남아 있다.


특히 이른바 경제 영역은 민주화의 ‘절대 출입 금지’ 구역이다.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의 칼날을 가장 안전하게 피한 세력은 자본가들이었다. 자본은 더욱 오만해지는 반면, 기업단위 노동조합들은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며 좌절과 자괴감의 늪 속에서 허우적대는 형편이다. 지금 한국사회는 그 어느 때, 어느 곳보다 더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이상에 목말라 하지만, 막상 그것을 추진할 주체는 지극히 취약한 것이다.


이제 민주주의 운동의 제2막이 시작되어야 한다. 이 두 번째 막의 주제는 대안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사회적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고전적 사회주의 이론가들은 사회 발전의 경제적 측면에 주목했기 때문에 대안 사회 건설의 전제 조건으로 주로 ‘생산력’의 발전을 들었다. 그러나 지난 세기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배웠다, 대안 사회의 건설을 위해서는 생산력만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한 보다 광범한 ‘사회적 능력’의 성숙이 필요하다는 것을. 즉, 우리들 자신을 포함한 다수 대중의 인식·행위 능력이 성숙해야 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때로 사회 변혁의 주체적 요소에 대한 강조(가령, 로자 룩셈부르크)로 나타나기도 했고, 혹은 ‘문화혁명’의 구상(레닌, 「협동조합론」)이나 ‘대항헤게모니’ 개념(그람시, 『옥중수고』)을 통해 제기되기도 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민주화의 제1막의 한계와 신자유주의의 공세가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대중의 역량 자체가 퇴보하거나 해체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새로운 출발점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대중의 역량을 의식적으로 배양하는 것이어야 한다.


대중의 역량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몇몇 형식적인 민주적 제도를 확보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일단 대중조직을 발전시키고 나서 진짜 싸움은 그 다음에 한다는 식일 수도 없다. 사회적 능력은 무슨 계몽이나 추상적 선전 혹은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 활동의 연속만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중들 스스로 참여하는 역사적 경험들을 통해서만 발전할 수 있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경험들을 촉발시키는 게 지금 진보 세력의 관건적 과제라는 것이다. 그러자면 소위 ‘진보적 민주주의’ 수준의 과제들에 노동자·민중운동의 목표를 맞춰야 할 게 아니라 오히려 사회주의의 이상·원칙과 직결된 과제들을 지금부터 적극적으로 제기해야 한다.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부터 경제 영역의 철저한 민주화를 외쳐야 하는 것이다.


또 한 번의 87년이 있어야 한다. 또 한 번의 대규모 학습 기회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기업의 담벼락을 넘고 노동계급 안의 모든 차별을 짓밟으며 제2기의 민주노동조합운동이 사회적 세력으로 부상해야만 한다. 이번에는 겉껍데기 민주화나 지역 연고가 아니라 평등과 연대·평화의 의지로 똘똘 뭉친 한 덩어리(블록)의 민중이 등장해야 한다. 이번에는 대중 스스로 밑바닥으로부터의 토론을 통해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결의들을 만들어내는 게 민주주의라는 것을 실감해야 한다. 이번에는 다름 아닌 ‘경제’가 가장 뜨거운 쟁점이 되어야 한다.


-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5: 특히 “개정판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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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19 15:31 2006/08/19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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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6 민지네 서울번개 또다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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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어제 민지네 번개가 있었다 정도로만 남기려다 쓰다보니 길어져서 아예 따로 뺐다.

난나님이 민지네에 써놓은 후기글이 있어서 또다른 후기라고 했다.

민지네 번개에 참석한 사람들에 대한 인상비평이라고 해야 하나.

 

역시 민지네 사람들을 보면 그냥 좋다. 



어제 밤에는 갑작스레 민지네 번개에 참여하게 되었다.
유령의 사랑님이 설에 올라왔다고 난나님이 친 것이다. 시간이 없어서 가야되나 말아야 되나 하고 있는데, 이미 내가 참석한다고 공지가 되어 있었다.
나는 미끼였던 셈이다.


그래서 홍대 앞에서 민지네 사람들을 만났는데, 오랜만에 보니 다들 반갑다.
얼치기, 난나 님을 처음에 만났고, 그 뒤에 유령의 사랑, 새우, 뒷북 님이 왔고, 개굴왕자님이 1차 찜닭집에 왔다. 그리고 2차로 옮기는 도중 까꿍님이 왔고, 그 뒤에 2차 생맥주집으로 반겔리스, 유니님이 와서 총 10명이 모였다. 번개치고는, 그리고 지금의 민지네 상황을 봐서는 그럭저럭 많이 왔다.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에서 87학번이 대선배로 대접받는 것을 보고 자신도 나이먹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가 번개 내내 대선배님으로 취급되었던 뒷북님과는 이후에 말을 놓고 지내기로 했다. 그런데 나이먹어서 말을 놓기가 영 어색하다. 민지네에서도 거의 말을 놓은 적이 없는데...
사실 민지네에서는 부담없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니까 그래도 괜찮을 듯하다.
언제나처럼 대모로서의 기품을 전혀 잃지 않았고...
 
유령의 사랑과는 닮았다고 번개 내내 유령 1,2 또는 복길 1,2로 호칭되었다. 그리 닮았나.
유령님은 그 나이에 자기 빼고 나머지 8명 모두가 여성인 직장의 점장이라니... 설에 온 김에 좀더 뜯어먹었어야 되는데...
휴가라고 해서 설에 올라온 것인데, 그리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하필 어제 날을 새는 바람에 3차까지 가기는 무리여서 어쩔 수 없었다.
유령님의 영화 취향은 좀 색다른 것 같다. 남들이 별로라고 하는 한반도도 잼있게 봤다고 하고, 2차에서 영화 애기를 하면서 5위권 안에 톰 크루즈의 우주전쟁도 들어있고, 주윤발 주연의 영웅본색도 끼어 있고... 그 얘기를 20분이 넘게 했다 하니...
게다가 얼치기님 빼고 처음처럼보다 참이슬을 높게 치는 분위기에서도 처음처럼을 처음 먹는다고 싸간다는 둥 하는 오바를 하기도...
  
전교조샘인 얼치기님은 대구교사의 매질사건 땜에 계속 화제에 올랐다. 항상 웃는 낯이 보기 좋다.
방학중에도 보충수업 땜에 정신 없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무슨 시험관리실장인가 되어서 혼자 에어콘 빵빵하게 나오는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하는데, 그것도 보직이기는 한가.
그 무더운 날씨에 에어콘이 그리 세게 작동하지 않는 맥주집에서, 자신이 더운 탓을 옆에 앉은 나의 발열량 때문이라고 하여 심한 분노를 샀다. 솔직히 몸무게는 내가 좀 더 나가지만, 서로 비슷한 수준 아닌가.
 
개굴님은 결혼한 후 처음 본다. 코알라님은 아직 본 적 없는데...
말로는 결혼하기 전보다 살이 많이 쩠고, 코알라님은 공처럼 굴러다닐 정도라고 하였지만, 여전히 결혼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코알라님에게서 전수받아 번개 내내 나를 행님이라고 한다. 쩝...
누군가 선물로 줬다는 우산은 양산같이 조그마하고 깜찍했는데, 나오는 길에 비가 와서 써먹긴 하더라. 그런데 다들 우산을 챙겨오다니... 나는 일부러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개굴님 싸이에 자주 오는 처자 중에서 소개팅 좀 어떻게 주선해보라고 하려다 소개팅은 이제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포기했는데, 실은 새우님이 계속 나보고 눈이 높다는, 그래서 '당원이면서 얼굴이 이쁜' 처자만 된다는, 얼토당토 않는 말을 늘어놓는 바람에 이에 대한 해명을 하느라 말을 꺼내지 못한 것이다. 요새 발랑꽃하고 잘 되어간다고 그런 식으로 험담을 하는데, 두고 보자. 언젠가 행님의 얼끈한 맛을 보여주리라.
새우님은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 10시 20분경에 내일 아침에 의원 일정이 있어서 일찍 출근해야 한다고 먼저 나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나중에 사실관계를 확인해봐야겠다.
이런 새우님에게 운영진을 맡겨놔도 되는거야?
  
난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문자도 돌리고 전화도 했다면서 나에게는 단지 메신저로 오라고 밖에 하지 않았다. 메신저로 말했으니까 되었다고? 메신저하고 문자, 전화가 같나? 암튼 난나님 없었으면 이렇게 사람들 만나기도 어려웠을 꺼여.
뒷북님은 난나님 보고 날씬해졌다고 입에 발린 말을 했지만, 솔직히 무슨 날씬... 게다가 아줌마이면서도 여전히 미모 운운하는 배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대단한 난나.
 
반겔리스님과는 사실 거의 말을 트고 지낸다. 그리 말을 많이 하진 않지만, 그냥 통하는 느낌이 든다.
2차 때 개굴님이 얼치기님보다 반겔님이 더 어려보인다고 하면서 첨에 73년생으로 봤다고 했는데, 아니 이렇게 사람보는 눈이 없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코알라님을 잡았을까. 아니 코알라님에게 잡힌건가?
솔직히 귀엽기는 방겔보다는 얼샘이다.
 
까꿍님은 이번 번개에 서울에 와 있는 최정규 선배가 함께하지 못한 것을 많이 아쉬어하는 듯했다. 그날 최선배는 부천에서 다른 민지네 사람들하고 번개중이었다고 하던데...
현재 서울독립영화제던가에 관여하고 있다고 개막하면 오라고 한다. 시간이 될까.
 
유니님은 블로그에서 얘기되는 것과는 달리 아직 직장을 옮기지 않았나 보다.
뭐가 그리 바쁜지 제일 늦게 왔는데, 그리 많은 말을 나누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홍대 근처에 볼 이유가 없는데, 왜 홍대였을까. 역시 번개 제안자 맘이겠지.
3차를 떠났던 유랭님과 까꿍님은 몇시까지 있었을까. 그제 날만 새지 않았어도 함께할 수 있었는데...
아무튼 2차까지 했어도 차가 끊기지 않고 환승 덕에 택시타지 않고 집에 돌아올 수 있어서 다행이다.
 
유령님 덕분에 민지네 사람들을 볼 수 있어서 반가웠다. 
저번에 술을 진탕 마신 다음에 다시는 술을 먹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그 다짐이 이번 민지네 번개 때문에 깨져버렸다. 분위기 제고 차원에서 어쩔 수 없었다.
다시 금주선언을 해야 하나.

강치, 바람꽃, 황대장, 질풍노도, 신비 님 등은 개인 사정으로 못오거나, 또는 너무 늦게 온다고 하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했다. 나중에 뵐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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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17 15:29 2006/08/17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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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노조에 대한 연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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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노조에 대한 탄압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ILO 아태총회를 앞두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도 이러한데, 그 후에는 아마 거의 노조를 거의 무력화할 정도의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연대의 움직임은 어떠한가.

 

민주노총은 노사정대표자회의에 참여하여 공무원노조와 관련된 ‘공무원 교수 교사 등의 노동기본권 보장’을 의제화하지 못하였으면서도 부분타결의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한다. 노사관계 로드맵도 어영부영 추인해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노사정대표자회의에 참여한 것인가. 소위 노동운동 내 좌파가 지도부를 차지하고 있는 금속연맹, 공공연맹, 사무금융연맹도 어영부영 이에 함께하고 있는 꼴이다. 

민주노동당은 자기 집안도 제대로 못추스리고 있는 형편이니, 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다고 하여 공무원노조 내부 또한 상황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산별전환, 로드맵 저지, 민주노총 위원장 및 임원 직선제 쟁취 등 중요한 사안이 많긴 하다. 지금 당장 포항건설노조 투쟁에 연대도 필요하고... 하지만 지금 탄압받고 있는 공무원노조와 전교조의 투쟁에 대한 연대는 향후 노동운동의 미래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 이는 사회공공성 강화투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만큼 한국사회의 변화를 위해서도 의미가 있다.

 

그런데 좌파들은 왜 그 중요성을 감지하지 못하는 걸까. 서구에서도 공무원노조를 비롯한 공공부문이 운동의 주력을 이루고 있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노조같지도 않은 공노총이나 행공노가 행자부와 흥정을 하면서 세를 확장하고 있는 지금, 남한 노동운동의 미래를 담보하고자 한다면 지금과 같이 공무원노조를 고립된 상태로 놔두어선 안된다.

사실 비정규직 철폐투쟁과 특수고용직 노동자 및 교수, 교사, 공무원의 노동기본권 쟁취 투쟁이 다 별개의 사안은 아니지 않은가.

  



공무원노조 vs 정부 갈등 전면전 양상

정부, 노조 사무실 폐쇄 등 탄압강도 높여…공무원노조 "ILO 아태총회시 탄압 폭로할 것"

    

정부가 공무원노조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높여가는 가운데 공무원노조가 사면초가의 상황 속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법외노조를 고수하고 있는 공무원노조를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일제 대화를 거부하고 있으며, 공무원노조 또한 정부의 탄압에 투쟁의 의지를 높이고 있어 노조와 정부간의 갈등이 ‘전면전’으로 치닫고 있다.

     

행자부 지침, 노조 탄압 갈수록 '점입가경'
      
행자부는 지난달에 각 지방자치단체에 ‘전공노 가입 공무원 불이익 조치 협조’ 공문을 하달하고, 공무원노조 조합원에 정부 포상, 장관 표창은 물론 자체 시행하는 각종 포상도 배제하도록 지시했다. 또 지난 3일에는 공무원노조 사무실 폐쇄, 자진 탈퇴 적극 독려 등을 담은 공문을 내렸다. 행자부는 이같은 지침을 이행하지 않은 지자체에 대해서는 행정적 재정적 불이익을 줄 방침이라고 경고했다.

          
최근에는 김태호 경남도지사가 행자부의 지침을 실제로 시행하여, 공무원노조 사무실 폐쇄조치와 노조 핵심간부 3명에 대한 문책 등을 밝혔다. 공무원노조 경남지부도 이에 김 지사 퇴진운동을 전개하고, 도지사의 ‘인사비리’에 국민감사를 청구하여 맞서고 있다.
      
행자부의 이같은 탄압조치에 공무원노조는 “투쟁으로 탄압을 돌파할 것”이라며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 오는 9월 9일에는 경남 창원에서 공무원노조의 탄압을 규탄하는 결의대회도 개최한다. 최윤영 공무원노조 정책실장은 “정부의 공무원노조 탄압에 조합원들은 동요하지 않는다”며 “공무원노조 14만 조합원의 힘을 창원으로 결집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무원노조는 정부의 노조 탄압에 일부 조합원들이 이탈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언론의 보도에 대해서도 “사실과 다르다”며 반발하고 있다. 최 실장은 “(조합비를 내는) 조합원 수나 조합비는 변동이 없다”며 “언론이 일부 조합원들의 우려와 동요를 확대하여 보도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8월 초 현재, 행자부는 공무원노조특별법 상에 노조로 가입한 조합원은 2만여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는 행자부가 지난 4월에 발표한 조합원 수에 거의 변동이 없음을 보여준다.

            

'민주노조 사수'와 '대정부 요구안', 동시 쟁취 과제  
          
그러나 공무원노조가 계속해서 법외노조를 유지할 경우 직면하게 되는 과제 또한 산적한 것이 사실이다. 총액인건비제 철폐, 공무원연금법 개악 저지, 노동3권 쟁취 등 공무원노조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대정부 교섭과 협상이 전제돼야 하지만, 이에 대한 활로가 철저히 막혀 있는 상황에서 노조 탄압이 자행되고 있다.

           

공무원노조의 한 관계자는 “노조사수도 어려울 정도로 탄압이 극심하다”고 토로했다. 아직까지는 정부의 탄압을 공무원노조가 굳건하게 버텨내고 있지만, 이것이 장기화 될 경우 조합원들의 불만이 고조될 수 있다는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정부의 탄압에 맞서 민주노조를 지키고, 외부적으로는 당면한 공무원노조의 현안을 성취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에 직면한 것이다.

공무원노조는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공무원 교수 교사 등의 노동기본권 보장’ 의제를 논의하여 행자부를 대화로 이끌어 내려고 했으나, 행자부가 대화를 끝내 거부함에 따라 이마저도 어렵게 됐다.

                

노조 탄압 중단 없이는 전면전 계속될 것
            
이같은 공무원노조의 어려운 상황은 당분간 뾰족한 대안을 찾지 못한 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김정수 공무원노조 사무총장은 “오는 8월말에 개최될 ILO(국제노동기구) 아태총회에서 한국정부의 공무원노조 탄압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낱낱이 알려 투쟁수위를 높여 갈 것”이라고 말했다.

       

장기적으로는 내년 대선에서 현재 직면한 돌파구를 찾으려는 모색도 하고 있다. 김 총장은 “내년 대선국면에서 공무원노조를 인정하고, 현재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제안을 내놓게 되면 파열구가 생기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단기적으로는 대규모 결의대회를 개최하고, ILO 아태총회에서 공무원 탄압 실태를 폭로하는 한편, 내년 대선을 겨냥해 정치권에 공무원노조 인정 등을 얻어내겠다는 복안이다. 그러나 이같은 공무원노조의 계획이 정부의 전향적인 자세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는 아직까지 낙관하기 어렵다. 김 총장은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정부의 기만적인 태도가 계속되는 한 노조와 정부와의 전면전의 양상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공노총의 대정부 교섭 잘 될까?
         
행자부는 오는 9월 2일로 합법노조로 설립 신고를 하기로 한 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공노총)과의 교섭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행자부는 한편에서는 공무원노조에 대한 탄압을, 다른 한편으로는 합법노조로 전환하는 공노총에 대해 적극적인 포섭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최명규 행정자치부 공무원단체복무팀 서기관은 “공무원노조는 법외노조가 아니라 불법단체”라며 “노조법상으로 해석해도 임의단체이며, 불법단체는 처벌대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공무원노조의 사무실 폐쇄 방침, 인사상 불이익은 ‘불법단체’에게 적용되는 당연한 조치임을 강조하며, “공노총과의 교섭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공노총의 대정부 교섭이 순항을 거듭할 지는 미지수다. 공노총은 지난 26일 단체교섭요구안 158개를 확정하고, 공무원연금법 개악 반대, 정년연장, 임금 인상 등을 주요한 단체교섭 요구사항으로 제기할 것을 결정했다.
공노총이 제기하는 핵심 교섭 요구안은 공무원노조특별법에서 제한하고 있는 예산문제와 직결된 것이 많아 앞으로 교섭안의 내용을 둘러싸고 적잖은 마찰도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최명규 행정자치부 공무원단체복무팀 서기관은 “공노총에 대정부 교섭에 행자부는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면서도, 하지만 “현재 공노총이 제기하는 교섭안이 정부의 예산 정책과 관련된 부분이 많아 확정하는 것이 순탄치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전망했다.
            
공노총이 행자부와 단체교섭에 타결을 보았다 하더라도 최종 확정은 국회의 예산심의를 통과해야만 결정되는 것이어서 공노총의 대정부 교섭은 더욱 쉽지 않으리라는 전망이다. 특히, 공노총이 공무원노조에 비해 조직력과 투쟁력이 뒷받침되지 못한 상황에서 대정부 교섭이 힘을 받을 수 있겠느냐라는 우려도 높다. 최윤영 공무원노조 정책실장은 "공노총이 대정부교섭에서 얻을 것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레디앙 2006년 08월 14일 (월) 18:44:38                              문선영 기자  tathata@redi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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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15 18:24 2006/08/15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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