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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서평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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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세상]재벌 개혁과 사장 직선제 (경향, 강수돌 | 고려대 교수·경영학, 2012-07-11 21:13:31)
오는 12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아무래도 경제민주화 이슈가 가장 큰 화두가 될 것 같다. 그것은 경제민주화가 ‘민생 경제’의 핵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민생 경제란 한마디로 ‘살림살이’ 경제다. 기존의 돈벌이 경제 논리와 다른 논리 위에 선다는 말이다.
보수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새누리당은 경제민주화 이슈를 선점한 듯 보이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 내용이 ‘무늬만’ 경제민주화일 가능성이 높다. 일례로, 최근 뉴스에 많이 등장한 ‘일감 몰아주기 근절’ 등 불공정 행위 규제를 통한 공정 거래 확립은 경제민주화가 아니라 시장 경제 질서 강화에 불과하다. 이것은 마치 사냥할 때 정작 목표물은 겨냥하지 않고 덤불 언저리만 때리는 꼴이다.
 중산층이나 서민층을 대변한다는 민주당은 그보다 한 발 더 나아간다. ‘재벌 개혁’을 초점으로 하여 경제력 집중 완화, 지배구조 개혁을 꾀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최근 발의된 9개 법률 개정안에는 재벌 문제의 핵심 중 하나인 대기업 순환출자를 금지하고 출자총액을 제한하는 제도를 다시 도입하기, 금산 분리 강화와 재벌 범죄의 사면 제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에 대해 새누리당은 민주당더러 재벌 개혁이 아니라 재벌 해체를 지향한다고 비난하고, 민주당은 새누리당에 대해 알맹이가 없이 말로만 경제민주화를 외친다고 비난했다. 내가 볼 때, 민주당의 여러 정책이 추진된다고 해서 재벌이 해체될 리 만무하고 새누리당의 시장 질서 확립이 된다고 해서 경제민주화가 될 리 만무하다. 참된 경제민주화는 기득권을 가진 양당 자체가 자신의 기득권을 온전히 버림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대 정당이 기득권을 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두 정당만 그렇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가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모든 기득권 구조 자체를 허물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참된 경제민주화를 이루려면 거대 양당부터가 스스로의 기득권에 대해 포기할 각오까지 하면서 사회 전체가 묵인하고 있는 기득권 구조 자체를 근원적으로 수술해야 한다.
일례로 나는 김상봉 교수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에서 제안된, 재벌을 비롯한 주식회사 사장을 노동자가 선출하는 미래를 상상한다. 봉건주의 시대에 왕은 하늘의 뜻이나 선친의 뜻에 의해 군림했다. 민주주의 시대라면 당연히 온 백성이 대통령을 뽑는다. 이런 맥락에서 경제민주화 시대엔 주식회사 같은 기업체나 학교 같은 곳에서 일반 직원이나 노동자, 평교사가 그 대표를 뽑아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는 공장 문 앞에서 멈춘다’는 말도 사라진다. 대부분의 노동자나 가족을 떨게 하는 고용 불안 또는 정리 해고 문제, 비정규직, 성차별이나 학력 차별도 사라질 것이다. 물론 과연 그 노동자나 교사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중요하다. 따라서 경제민주화가 완성되려면 ‘보통’ 사람들의 철학이 중요하다. 어릴 때부터 삶에 대해 어떤 태도를 배우는가가 중요한 셈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인문학적 깊이가 있는 학습이 필요한 까닭이다. 게다가 나 혼자만 깨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친구나 이웃들과 소통하고 토론하며 공론을 만들어가야 한다. 소모임이나 네트워크가 중요해지는 까닭이다.
한편, 최근에 국립대 네트워크 구축을 통한 서울대 학부제 폐지안이 부각되기도 했지만, 실은 이것도 기득권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꾀하는 것은 아니다. 제2의 서울대가 분명히 나올 것이고 이미 몇몇 대학들이 속으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태의 핵심은 일류대 출신들이 정치경제적 기득권을 장악한 현실이다. 이를 허물기 위해서는 기업이나 학교 등에서 사람을 구할 때 출신 학교나 학위, 지역을 물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보아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개인 행복을 넘어 사회 행복에 기여할 것인가, 학벌이나 직업에 무관하게 비슷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결국, 고교평등화를 넘어 대학평등화, 또 이를 넘어 직업평등화가 되면서도 교장 및 사장 직선제까지 이룰 때 비로소 사람들은 신바람이 날 것이고 경제민주화도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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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3대 세습'보다 더 괴이한 '이재용 3대 세습'! (프레시안, 최종덕 상지대학교 교수, 2012-05-18 오후 5:17:30)
[철학자의 서재] 김상봉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세속화된 형이상학

철학은 형이상학을 품기도 하며 논리학으로 드러나기도 하며 윤리학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 무엇이건 간에 철학은 세계와 우주를 조우하며 동시에 인간에 대한 질문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 인간을 묻는 질문이 없다면, 철학이 만나는 세계란 공허하고 유명무실한 존재일 뿐이다. 인간에 대한 질문은 자아 내부를 깊숙이 비추는 반성력과 자아가 세상을 보는 비판력에서 생긴다.
인간의 토대 위에 구축된 세계 인식을 나는 '세속화된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다. 공허하거나 순수 논리적이거나 인간 없는 형이상학, 즉, '신성화된 형이상학'과 대비되는 삶의 철학이라고 보면 된다. 철학은 신성화된 형이상학을 극복해야 하지만, 형이상학 없는 철학은 자칫 유사 과학 수준에 머물 수 있다.
나의 철학 공부는 신성화된 형이상학 대신에 세속화된 형이상학을 주요한 커리큘럼으로 하고 있다. 신성화된 형이상학이란 인간이 배제되어서, 색깔이 없으며 차가우며 건조한 형이상학이다. 반면 세속화된 형이상학이란 인간의 시선 안으로 투영된 형이상학을 뜻한다. 어떤 때는 인간의 역사와 사회의 구조가 묻어난 존재의 서사시처럼 비춰질 수도 있다.
이렇게 세속화된 형이상학 안에는 인간의 실존과 세계의 실재가 뒤섞여 있다. 세속화된 형이상학은 혼돈과 중첩, 비규정성과 불확실성이 스며들어 있다. 마치 논리학처럼 질서정연한 신성화된 형이상학 공부는 수학자나 신학자에게 맡기고, 나는 혼돈의 세속 형이상학을 공부하려 한다. 그런 나의 공부 커리큘럼에는 김상봉의 책들도 목록으로 있다. 
김상봉의 책에는 세계 형이상학과 인간 윤리학이 날줄과 씨줄처럼 치밀한 구조로 짜여 있다. 특히 최근에 출판된 그의 책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꾸리에 펴냄)에서는 거대한 관습과 문명적 오류를 붕괴시킬 만한 세속적 형이상학의 범례를 제시하고 있다. 거대한 자본의 우상을 깨고 삶의 윤리를 재구축하려는 범례이다. 형이상학과 현실학의 페이지로 구성된 철학적 선언서이기도 하다.
김상봉의 선언 명제는 한국형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 의심 없이 통용되는 주주 경영 구조의 허구와 모순을 밝히는 철학적 프로토콜이다. 주식회사는 주인이 있을 수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는 주장이다. 사회가 진보하기 위하여 재벌 기업의 주식회사는 그것이 크면 클수록 폴리스 민주제 즉 공화제처럼 되어야 한다는 설명을 자세히 해주고 있다.
주식회사에는 주인이 없기 때문에 그 누구든 주식회사의 경영자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은 단순한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경제사적이며 철학사적인 근거 위에 배선된 분명한 사실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노동자가 주식회사의 경영자로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이런 주장이 뭇사람들에게 큰 당혹감을 줄 수 있지만, 실은 아무도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사실 명제를 언급했을 뿐이다. 김상봉은 그런 진실을 조금이라도 교조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철저한 역사적 근거와 철학적 논증을 통하여 주주 자본주의 사회의 허구를 설득시켰다. 그래서 이 책은 정말 읽을 만했다. 정말 그런지 하나하나 책 내용을 따져보겠다.
국가 위에 재벌
국가 권력보다 더 커진 한국의 재벌 기업들은 이미 기업 국가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저자는 기업 국가의 무수한 부패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국가가 기업에 동화되면 일어나는 전형적인 변형은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독재적이고 권위적인 문화가 확산되는 데 있다. 여기서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을 지적했다. 즉, 자본주의 경제 제도와 자유 민주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라는 오판들이다.
한국의 재벌 기업 문화는 그들의 이익 구조를 위하여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26쪽). 재벌 기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런 기업들이 있어서 대한민국이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이 아니냐고 항변한다. 그러나 재벌 기업의 이윤 행위는 공적으로 국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적으로 그들만의 개인 이익을 위한 착취 수준이라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너무나 당연한 논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런 모순을 덮어버리곤 한다. 재벌이 우리를 잘 살게 해줄 것이라는 마약 같은 믿음을 조작하고 있다. 이명박이 대통령 되면 우리 모두 재벌처럼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마약의 환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남 부자들이 대한민국의 부를 상승시킬 것이라는 믿음이 횡행하고 있다. 빈부격차는 더 많이 벌어지고 있는 당면한 현실에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눈감아 버린다. 재벌 기업에게 더 많은 돈을 몰아주면 끝내는 우리들 대중들에게도 혜택에 돌아올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은 재벌과 그 공조자인 정부 공무원이 만들어낸 가짜 유토피아일 뿐이다.
나는 이런 희망을 '의존적 희망'이라고 말한다. '주체적 희망' 반대편에 놓인 허망한 믿음의 결과이다. 앞서 말한 기만의 믿음, 즉 부자들에게 돈을 우선적으로 몰아주면 넘쳐나고 난 이후, 끝내는 대중들에게 떡고물이 똑똑(trickle) 떨어질 것이라는 믿음은 전형적인 트릭클다운(trickle-down) 현상의 귀결이다. 트릭클다운 정책은 미국에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1990년 전후로 시행했던 부자 혜택 정책이다. 한국은 이런 부자 혜택 경제 정책을 미국 이상으로 노골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부자들에게 더 큰 파이의 혜택을 돌리고 난 후 그 파이 아래로 똑똑 떨어지는 떡고물조차 서민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재벌 2세들이 그 남은 떡고물까지 깡그리 흡수해 버리기 때문이다. 재벌 2세, 3세에게 기업을 불법적으로 물려주는 현실을 법관들까지 모른 척하고 있으며 관련 상급 공무원들은 한 발 더 나가 재벌 비위 상하지 않도록 미리 알아서 기고 있다.
자본과 기술면에서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삼성전자의 대표이사라는 사람이 자본 독재자 이건희에게는 물론이거니와 그 아들에게도 벌벌 기는 장면을 아마 유럽 기업인들이 보았다면 무슨 영화 찍고 있냐는 신기한 생각으로 물어볼 것이다. 가부장적인 권위에 독재자의 폭압성이 더해져서 주주법상으로 아무 직함도 없는 이건희에게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한다. 그 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 3대로 이어지는 북한 권력 세습을 보고 있으면 한숨이 푹푹 나오거늘, 소위 자유 민주주의라는 국가에서 재벌 기업의 세습 권력은 북한 정권 이상으로 더더욱 괴이한 모습이다. 전 세계 자본주의 국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형 독재 권력이려니 하고 쉽게 생각하려 해도, 여전히 가슴이 더 깊게 패이고 만다. 김상봉은 그의 책에서 이런 괴이함을 재미나게 표현했다. "북한에서는 국가 위에 당이 있다면 남한에서는 국가 위에 재벌 기업이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225쪽)
경영자가 이사회를 주물럭거리는 것이 한국 주식회사의 기현상이다. 이사회 위에 경영진이 있고, 경영진 위에 절대권력 회장님이 있다. 그런 재벌 기업의 규모는 국가 예산을 넘어설 정도로 방대해졌지만 그 지배 방식은 동네 식당을 운영하는 수준이다. 그들의 세습 권력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재벌이라는 조직 자체가 독재의 잔존이라는 점을 김상봉은 잘 설명해주고 있다.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재벌이 없다는 말이 너무나 당연하여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재벌 떨거지들, 맹목적 재벌 자본 추종자들이 우러러 받들어 모시는 미국에도 재벌 개념은 없다. 최근 무섭게 융기하는 친일 세력들이 좋아하는 일본에서조차도 재벌 조직이 없다는 것을 저자는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독재 세습 한국형 재벌은 재벌 기업식 주주 자본이 현대 자본주의의 주류라고 서민을 속이고 있다. 미국 기업 사회 자본가들은 이미 미국 사회에서 발생한 독재적 주식회사의 전횡과 몰락을 많이 보아왔다. 2001년 전 세계 경제를 혼란에 빠뜨린 "엔론 사태가 경영자 지배의 극단이라면 포드의 경우는 소유주 지배의 극단이다. 그리고 주주 자본주의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언제나 동요할 수밖에 없다."(204쪽)
책에 쓰인 대로 이재용은 1994년 아버지 이건희로부터 61억 원을 물려받았다. 증여세를 납부하고 나니 44억 원이 남았다고 한다. 당시 매스컴은 소박한 상속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이재용의 돈 44억 원이 불과 15년 만에 2조2000억 원이 되었다. 더군다나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계열사 기업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었다. 전 지구적 차원의 불법적 행위가 일어났지만, 대한민국 법원이 내린 그에 대한 법정 판결은 결국 그 부자에게 면죄부를 준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저자가 쓴 다른 한 구절을 보자.
"예를 들자면, 정몽구 회장은 2006년 10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해 빼돌린 협의로 구속 기소당해 보석으로 풀려나기까지 두 달 가량 감옥 체험을 해야 했다. 미국이라면 정 회장은 어쩌면 아직도 감옥에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 나라에서는 100만 원을 훔쳤다는 죄로 감옥에서 썩는 사람들은 많아도 1000억 원을 훔쳤다고 징역을 살지는 않는다. 그리고 정몽구 회장도 여전히 회장으로 건재하고 있다." (256쪽)
노동자 경영권
그래서 김상봉은 재벌 기업의 지배 구조를 민주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너무 당연한 말이다. 여기서 민주적이라는 뜻의 실속은 그 구성원들이 공동체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데 있다. 기존 방식대로라면 참여하는 구성원이 주주나 경영자에 제한되었지만 그런 제한이 바로 주식회사법을 어기고 있는 셈이다.
김상봉은 이제라도 노동자 대표가 참여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증명한다. 노동자가 경영자도 될 수 있고 그런 노동자는 마치 기업이라는 공화국의 시민인 셈이다. 이런 방식이 바로 김상봉이 전개하는 폴리스로서의 기업이다. 이런 주장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난리법석을 떨며 자본의 생리를 조금도 모르고 까부는 말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원시 공동체 같은 헛소리를 하고 있냐고 핀잔을 하기도 한다. 현대 사회는 국가 간 치열한 경쟁력의 전쟁터와 같은 곳인데 웬 꿈같은 로맨스에 빠져 있냐고 극단적으로 몰아붙이는 사람들도 있다. 재벌 기업을 하는 사람들, 많은 경제학자들, 정부 관료들이 바로 그런 비난과 조롱을 퍼붓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진보적이라는 지식인조차 기업 공화제 구조를 실현 불가능한 이상주의라고 일축하면서 그런 비난에 적극적으로 가세한다.
저자 김상봉이 그런 비난을 모르는 채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노동자 경영권으로 압축된 그의 주장이 낭만적 이상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상세히 쓰고 있다.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기 위하여 생겨났다는 기업의 본능적 생리에 대하여 김상봉이 모르는 바도 아니고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런 자본의 생리를 무시했다면 그는 기존의 낡은 유토피아 경제학자와 별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의 탄생은 그들이 투자한 모든 자산보다 훨씬 더 많은 잉여 가치를 얻어내는 데 있다는 점을 저자는 절실하게 알고 있다. 그런 절실한 인식이 있었기에 그는 우리들의 행복한 공동체를 구현하려는 의지와 설계를 분명히 제시할 수 있었다. 철학사의 관점에서, 경제 사상사적 관점에서 그리고 유럽이나 일본의 가까운 실증적 사례들을 통하여 김상봉은 노동자 경영권의 실현이 가능한 이유를 소상하게 보여 준다.
헤겔에서 좀바르트에 이어가면서 철학사와 경제사를 결합하여 소유 개념을 설명하는 그의 분석력이 돋보인다. 소유에 대한 헤겔의 개념이 너무 추상적이라는 오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주식회사에 대한 법적인 보기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소유권이란 쉽게 말해서 (1) 나만 가질 수 있고 (2) 내 마음대로 늘리거나 (3)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그런데 주식회사의 주주는 자기가 소유한 주주의 한도 안에서만 주주의 배당과 손실을 받을 뿐, 회사의 경영에 대하여 책임질 필요가 없다.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말이다.
김상봉은 다양한 현실 사례를 들어 주식 기업의 소유가 불가능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 2008년 <파이낸셜타임스>가 선정한 시가 총액 1위 기업 엑손모빌을 사례로 들어 주식회사가 소유 혹은 지배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161쪽).
"주주의 몫은 배당금이며, 노동자의 몫은 임금이고, 채권자의 몫은 원금과 이자이며, 소비자나 계약자의 몫은 계약에 따라 지불한 금액에 상응하는 상품이나 서비스이다. 하지만 경영권은 누구의 몫도 아니다. 그런 까닭에 주식회사에서 누가 경영을 맡느냐 하는 것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문제로서 원칙적으로 주식회사의 본질적 특성으로부터 연역되지 않는 문제이다. 아니 주식회사의 경영권이 누구에게 속하느냐 하는 것이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야말로 주식회사의 고유한 특성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183쪽)
노동자 경영권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별 문제 없는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진보 지식인조차 노동자 경영권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주식회사에 주인이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노동자가 그 경영권을 가져야 한다는 분명한 명분이 있겠느냐는 자조적 의심 때문에 그렇다.
김상봉은 이에 대하여 책의 마지막 장을 할애하고 있다. 노동자는 기업으로부터 받는 임금이 그들의 최후 생활 보장에 대한 경제적 권리이기 때문에 기업에 대하여 진정으로 책임감을 갖는 주체는 바로 노동자이다. 이러한 김상봉의 주장에 대하여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주식회사의 주주는 책임을 지지 않으며, 경영자는 원칙적으로 경영을 잘하여 수익을 많이 남기라는 주주들 대표에 의해 임명된 사람이므로 전적인 책임을 질 수도 없다. 주주의 권한을 넘어선 재벌은 공적 책임보다는 그들만의 사적 잉여금을 챙겨가는 데에 여념이 없다. 그래서 노동자의 책임은 소중하며, 노동자가 기업 경영에 참여하는 것이 당위적이다.
노동자 경영권에 대한 실질적인 사례도 많다. 독일이나 일본에서 노동자 경영권의 관행과 제도가 있다는 것을 저자는 본보기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경제사적인 측면에서 그 정당성을 증명해 보였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관습적 사유를 깨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1) 어찌 감히 노동자 경영권을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2) 기업의 창업자가 있는데, 어찌 감히 그들의 재산을 간섭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순응되어진 두려움에 우리는 휩싸여 있다. 그런 두려움의 관습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지식 학습보다 더 우선하며 더 중요하다.
철학이 필요한 이유
여기서 철학이 요청된다. 이 책은 겉보기에 노동자 경영권이라는 현실 경제 주장을 담은 책 같지만, 실은 자본 권력 즉 돈의 힘에 순치된 우리의 자화상을 내부로부터 깨부수려는 철학적 선언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치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처럼 말이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라는 것도 후대로 지나고 보니 혁명이라는 칭송을 받게 된 것일 뿐이다. 남들 다 천체가 돈다고 할 때 지구가 돈다고 했으니 당대에 코페르니쿠스는 정말 비난과 조롱을 받았었겠지.
남들 다 하는 대로 나도 쫓아가는 것이 뭐가 문젤까? 한때 유행했던 할리우드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누구에 의해 프로그램되어진 세상 속에서 가짜의 세계, 허구의 세계, 조작된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짜 세계에서 안주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여겨질 수 있을지 의심을 품고 되묻는 것 그것이 바로 철학이다. 박사 학위에 교수라는 최고의 철학 전공 지식인이라도 그 조작된 세계에 안주하거나 조작에 가담했다면 그는 철학과 동떨어진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자 김진숙이 크레인에 올라 자본 권력의 허구에 항거했을 때 김진숙으로부터 우리는 가장 철학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의심을 하지 않고 주어진 틀에 안주하도록 많은 사람들이 순치되었다. 조금만 참으면 희망찬 미래가 올 것이라는 감언이설에 빠져 가짜의 현실을 그냥 인정하고 마는 허구의 믿음들이 넘쳐난다. 그런 믿음들은 일종의 '의존적 믿음'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의존적 믿음'이 아니라 '주체적 믿음'이 요청된다. 그런 '주체적 믿음'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바로 철학이다.
대학 법인은 공적 법인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대학 이사장들은 대학의 사적 주인을 당당하게 자처하고 있다. 또 대학 재벌 권력의 비리와 부패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들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 노동자와 국민을 무시한 채 국민의 세금으로 세워진 고속철도나 국제공항도 그들 마음대로 주인을 기업에게 넘긴다고 한다. 4대강을 그네들 개인 관광지처럼 결정해서 억지 주인 행세하며 자연으로부터 빼앗고 우리 모두의 것으로부터 빼앗아 토건 정부답게 그들 마음대로 파헤치고 있다. 보수 신문의 비호 아래 제주도 강정 마을을 빼앗아 해군 기지를 세워서 미군에게 안주인을 넘겨주고 있다. 그네들끼리 마음대로 주인을 만들거나 바꿔치기에 능숙해졌다. 오래 전부터 주식회사가 법적으로 주인이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재벌이 주인을 자처하고 또한 재벌을 주인으로 모셔온 그들의 관행에 우리들이 침묵했기 때문이다.
시각을 조금만 넓혀 유럽이나 일본 아니면 금융 자본주의의 극치를 달하는 미국을 바라본다면 한국의 세습적 주주 자본이 얼마나 변태적인지를 느낄 수 있다. 시선을 조금만 달리하여 자본의 역사 및 한반도 제국주의의 역사를 되새길 수 있다면 현행 기업 권력이 왜 국가를 넘어서게 되었으며 나아가 왜 국가가 나서서 재벌을 옹호해 주는지를 알 수 있다.
불법의 관행에 침묵으로 동참한다면 우리 역시 누구에게선가 프로그램된 게임 캐릭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기업을 그네들 마음대로 하고 싶다면 주식회사 형태 말고 사적 기업으로 운영하라고 해라, 그러면 아무도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대학을 세워 명예 권력을 쥐고 돈을 벌고 싶다면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개인 기업형 학원을 차리라고 해라, 그러면 어느 누구도 말리지 않을 것이다. 법인의 이름을 도용하여 공중 이익을 침식하고 그네들 이익을 지수 함수적으로 늘려가고 있는 현실을 관행이라고 옹호하는 비호 세력에 무력해져서는 안 된다고 김상봉은 제동을 걸었다.
그런 관습이 가짜라는 것을 그의 책에서 읽을 수 있었다. 김상봉의 책에 나온 대로 우리는 그들이 가짜 주인이요 진짜 주인은 우리 모두라는 항변을 해야 한다. 이러한 항변이 바로 철학함의 출발이다. 여기서 김상봉의 철학이 고귀한 박제된 형이상학이 아니라 현실을 섭동하며 극복하는 실천적 형이상학임을 알게 되었다. 실천적 형이상학이란 조작된 의존적 희망으로부터 탈출하여 주체적 희망을 되찾는 삶의 매뉴얼이다. 그런 매뉴얼을 읽을 수 있다면, 김상봉의 노동자 경영권 주장이 낭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 관통하는 실천적 지표임을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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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철학적 몽상에 관하여 (레디앙, 남종석 진보신당 부산 동래당협 부위원장, 부산대 경제학 강사 / 2012년 5월 2일, 5:04 PM)
[비판과 모색] 김상봉『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비판①
1. 당의 지식인

선거 후 홍세화 진보신당 대표는 당원들에게 보낸 공개편지에서 진보신당의 두 지식인이 새로운 저서를 발간했다고 썼다. 그 중 하나가 김상봉 선생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이다. 이 책은 철학자로서 그가 한국 사회의 변혁을 위한 상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른다면, 이 책은 “자본주의 체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종합적 답변이다.
그간 김상봉 선생은 이런 저런 강연을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구체적인 정책개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쟁점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제시해 왔다. 삼성 반대, 서울대 폐지 등 진보신당의 정책이 그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가 당 강령 전문을 작성한 지식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성향과 진보신당의 정책 방향이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책에서 제시된 자본주의 극복 방향은 진보신당의 노선 결정에도 큰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자본주의적 소유제도의 특징과 주식회사의 구조분석에서 출발하여, 노동자들을 노예화시키고 있는 경영의 본질을 밝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서의 노동자 경영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노동자들 스스로 경영권을 갖고 노동을 자주적으로 통제하며, 잉여를 자율적으로 배분함으로써 예속의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의 변혁 없이도 노동자들이 경영권만 장악할 수 있다면 기업을 만남의 공동체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의 주장이 과연 창조적 발상이 될 것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몽상에 불과한지를 알기 위해서는 꼼꼼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 글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에 대한 비판적 논평이다. 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김상봉 선생의 진단과 처방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철학적 상상력은 창조적 문제 제기라기보다는 고립된 철학자의 몽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후의 장들에서 내가 왜 이렇게 판단했는가를 제시해볼 것이다. 나의 문제 제기는 김상봉 선생이나 그의 입장을 옹호하는 진보신당 내의 세력들과의 생산적 대화를 위한 것으로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2. 소유권과 분리된 경영권?
이 책은 현대 사회의 노동자들은 노예와 같은 처지로 전락했다고 진단한다. 노동자계급이 노예의 상태가 된 것은 현대 기업 체제에서 사용자가 경영권을 독점하고, 이를 토대로 노동과정에서 노동자들을 이윤 추구의 수단으로 활용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경영권은 “노동자에게 자신의 지위와 명령에 복종할 것을 요구할 수 있는 사용자의 권리”(122쪽)로서, 사용자는 이 권리를 통해 “노동자들의 인격”을 지배할 수 있고 “착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123쪽) 이는 인간을 “수단이자 목적”으로 대해야 하는 칸트식의 도덕적 명령에 위배되는 것으로 인간의 도구화만을 부추길 뿐이다. 경영권은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권력이기도 하다. 비록 노동자는 자유로운 계약을 통해 고용되지만 노동과정에서 자본착취의 도구로 전락하고, 그의 인격은 경영주에게 예속됨으로써 노예와 같이 되었다고 한다.
경영주는 노동자들을 그들의 자유 의지와 상관없이 명령하고 강제함으로써 인격적 억압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 이후 시민들은 법 앞의 평등을 획득했지만, 노동과정에서 예속됨으로써 노예의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기업의 경영권은 자율적인 개인들의 동의에서 벗어난 외부적 강제 수단일 뿐이다.
노동과정에서 노동자가 노예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는 주장은 별로 새로울 것도 없고 특별한 것도 없다. 김상봉 선생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듯이, 이 책이 진정 독창적인 점(?)은 경영권을 자본주의적 소유와 분리여 사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상봉 선생은 기업의 경영권은 자본주의적 소유와 필연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에 소유권의 전환 없이 경영권만 노동자들이 장악하면 노동자들은 노예 상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주주들이 기업을 소유하더라도 경영권만 노동이 지니게 되면, 노동자들은 기업을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고 잉여의 사용을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노동자는 경영권을 장악함으로써 자율적인 사회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소유 없는 자유”를 제시한 것이야말로 그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증표인 듯하다.(107쪽)
그는 주식회사의 구조분석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주식회사는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어 있다. 주주들은 비록 배당권과 주식평가차익을 얻고자 하지만 어느 누구도 기업을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경영권에 대해서도 대부분 무관심하다.
주주들은 이사를 선임하고, 이사회에서는 대표이사를 선출한다. 이렇게 선출된 사용자들은 경영권만 지니고 있을 뿐 실질적인 소유권을 행사하지 않으며 행사할 수도 없다.(257쪽) 왜냐하면 주식회사는 법인으로서, 자본의 결합물이지 인간적 결합물이 아니며, 주식회사가 자유로운 인격(법인격)으로 간주되는 것은 회사 스스로가 주인이지 다른 어떤 인간의 독점적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147쪽) 그러므로 주식회사의 소유구조는 그대로 두고 경영권만 노동자들이 장악하면, 주주들은 배당이익을 받고 노동자들은 인격적 예속에서 벗어나 기업을 만남의 공동체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소유권과 분리된 경영권 장악이라는 김상봉 교수의 주장은 언뜻 독창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그가 부르주아적 소유에 대한 기본적 이해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다. 소유란 생산관계의 법적 표현일 따름이다. 그것은 특정인이 무엇을 소유했기 때문에 임의적으로 처분하거나 혹은 처분할 수 없다는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적 소유법칙은 부르주아 계급의 생산수단의 독점과 재생산을 보증하는 것이다. 자본가는 사적으로 소비하고 생산수단을 감가시켜도, 잉여가치를 생산에 재투자함으로써 생산수단을 지속적으로 소유할 수 있게 된다. 잉여를 재생산에 투자함으로써 생산수단에 대한 부르주아의 소유는 지속되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소유법칙이다.
문제는 자본가의 소유가 재생산되려면 생산과정에서 잉여가치가 추출되어야 하고, 잉여가치를 추출하려면 노동과정에서의 자본의 지배는 필수적이다. 부르주아들이 경영권을 장악해야 하는 이유는 생산과정에서의 지배를 통해서만 잉여가 추출될 수 있고, 잉여가 추출되어야만 소유가 재생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본가가 계급으로서 자신을 재생산하는데 필수적인 부분이며, 노동과정에서의 지배야말로 계급투쟁의 핵심적 사안이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소유는 노동과정에서의 부르주아의 지배(경영권)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주들은 경영에는 관심이 없고 배당에만 관심이 있다는 분석은 전혀 맞지 않는 주장이다. 주주들이 경영에 무관심한 것은 경영권을 장악한 부르주아들이 잉여의 생산을 감독함으로써 부르주아적 소유가 재생산된다는 가정 하에서 그런 것이다.
특정 주주가 주식 평가차익에만 관심을 두는 것을 두고 부르주아 일반이 경영권에 관심이 없다고 일반화시키는 것은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의 본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소치일 뿐이다. 부르주아들이 소유권만 갖고 경영권은 노동자들에게 넘겨줄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려면 부르주아들이 노동자들의 도전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지만 살펴보면 된다. “곤봉을 맞아보면 정신을 차린다.”
물론 김상봉 교수는 나의 이런 비판에 대해 노동자들이, 소유권의 변동 없이도 경영에 참여한 역사적 사례가 있다고 반박할지 모르겠다. 그가 제시하는 대안 가운데 하나는 독일의 노동자평의회이다. 그는 독일에서는 노동자들이 사용자에게 “제안하고 협의하고, 동의할 권리”를 지녔다고 쓰고 있다.(186쪽) 노동자들 스스로 주체적으로 노동과정에 참여한 역사적 선례인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사례는 전혀 근거가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독일의 노동자 경영참가는 부르주아의 경영권에 대한 자발적 동의였지 그 반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전후 미국 법인자본을 따라잡기 위한 전형적인 ‘노사협조 문화’일 뿐 노동자의 경영권 분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이는 3절에서 다룬다). 그것은 부르주아 경영권에 대한 자발적 종속의 다름 아니었다.
부르주아들이 소유권에만 관심을 두고 경영권에는 무관심하다는 사고는 김상봉 선생의 심오한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현실의 부르주아들은 결코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 부르주아들은 잉여의 생산과 소유의 재생산은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노동과정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계급투쟁을 언제나 능동적으로 조직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부르주아적 소유관계의 철폐를 주장하는 이유는 소유관계(생산관계의 재생산)와 노동과정에서 자본가의 지배(경영)는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상봉 선생은 “마르크스는 겉으로는 자본주의적 소유를 경멸하는 허세를 부렸으나 마음속으로는 은밀하게 자본주의적 소유를 부러워했다”(104쪽)고 마르크스를 비판한다. 참으로 코믹스런 비판이지 않는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소유를 은밀하게 부러워해서” 부르주아적 소유관계를 전환시키려고 했다는 해석이야말로 김상봉 교수의 전무후무 한 독창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3.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주주자본주의의 대안인가?
김상봉 교수는 주식회사(법인자본)에 대한 분석을 보충하여 법인자본의 구체적 형태에 대한 비교 분석을 제시한다. 그는 독일, 일본, 미국, 한국의 법인자본의 특징을 비교 분석한다. 그는 미국 자본주의가 주주자본주의에서 경영 자본주의로 이행함으로써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졌다고 주장한다.
경영자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이해를 추구함으로써 주주의 지배권을 전복시켰으며, 경영자(대표이사)가 이사들을 선임함으로써 이사회를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고 주장한다. 주주권과 경영권의 대립이 미국 자본주의의 심각한 문제라는 지적이다.(197쪽)
반면 독일 법인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이 직장별로 존재하는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경영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노동자의 자주 관리의 전범이 된다고 주장한다. 노동자들은 경영주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킴으로써 생산과정이 주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주식회사에 대한 예찬도 빠지지 않는다. 일본 기업들은 종업원들에게 종신고용을 보장하고, 경영자는 종업원 출신이 많으며, 기업은 종업원을 운명공동체로 여긴다고 주장한다.(228쪽) 반면 한국은 일본 재벌의 껍질만 가져왔을 뿐 일본 기업의 ‘종업원 중심주의’는 전혀 수용하지 않고 있다고 덧붙인다.
김상봉 교수의 법인제도의 비교는 1990년대 초반 한국 사회 일각에서 미국의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변종이다. 몇몇 진보주의자들은 미국식 주주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전거로 독일 자본주의를 가져 왔던 것이다. 더불어 일본의 ‘종업원 중심주의’까지 결합시킴으로써 자본주의적 시장체제 내에서도 노동자들의 지위는 혁신적으로 개선될 여지가 있음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미국식 법인자본은 경영권의 과잉이라는 측면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져있으며, 한국의 재벌은 제왕적 지배자가 독재를 하는 악의 근원인 것처럼 제시된다.
그러나 김상봉 교수가 독일이 노동자평의회를 찬양하지만 20세기 법인 혁명의 중심지는 미국이다.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등장한 법인자본은 생산(라인이라 한다)과 스텝을 결합시킴으로써 거래비용을 내부화했다. 미국 법인 기업들은 컨베이어벨트로 라인을 혁신했을 뿐만 아니라 부품산업을 내부화하고, 생산과 인사-재무-마케팅(판매)을 결합시킴으로써 시장의 불안정성을 내적으로 통제하는 새로운 혁신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지오바니 아리기가 『장기 20세기』에서 논하고 있는 20세기 미국 법인혁명이다. 미국은 법인혁명을 통해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가 될 수 있었다. 김상봉 교수가 법인체제에 대한 분석을 하고자 했다면, 가장 표준적인 사례인 미국 법인자본주의의 혁신을 제대로 분석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제시하는 표준적인 사례는 독일이다. 전후 독일은 미국의 생산성에 한참 뒤쳐져 있었다. 이런 와중에 미국과의 경쟁을 위해서는 노사협력이 필수적이었다. 기업들은 노동자들에게 일자리 안정과 경영에 참여를 보장하는 대신 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을 억제하고, 파업을 자제하며, 기업의 경영전략에 적극 동참할 것을 결의한다.
1948년부터 1968년까지 무려 20년간의 무파업 행진이 이를 상징하고 있다. 로버트 브레너가 『혼돈의 기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는 독일 노동자 운동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것이지 결코 진보적인 무엇이라 할 수 없다. 경쟁력 향상을 위한 노동자들의 자발적 종속을 어떻게 ‘진보’라고 할 수 있겠는가?
1990년대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이 독일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산별노조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독일 금속노조를 모델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2010년 비교자본주의는 온 데 간 데 없다. 유럽은 붕괴되고 있고, 독일이 유지되는 것은 유럽 주변부의 부를 착취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독일 노동조합은 노사협조주의의 전형이었지 노동운동의 독자성과는 별반 상관이 없었다. 물론 노사협력의 문화가 정착되면서 노동자들의 경영참여가 보장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의 자율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노조는 부르주아의 축적 전략에 보수적으로 통합되어 있었을 뿐이다. 이와 같은 보수적 타협체제의 근원은 비스마르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김상봉 교수의 분석에서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일본 법인기업에 대한 분석이다. 그는 일본 기업의 종업원 중심주의를 찬양한다. 일본 기업들은 오랫동안 헌신한 종업원에게 승진의 기회를 보장하고 종업원의 안정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본기업의 종업원 중심주의는 ‘정규직 노동자’에 한하여 그렇게 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 기업체계는 다층적인 하청체계를 통해 다수의 노동자들을 계층화시켰으며, 기업의 위기는 하청 노동자들을 조절함으로써 외부화했다.
정규직은 기술적 신축성의 대상이 되고 비정규직 하청고용 노동자들은 산술적 신축성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도요티즘이다. 도요티즘의 린 생산방식은 1980년대 미국과 유럽으로 수입됐고, 이는 다시 세계로 번져 나갔다. 한국의 재벌체제의 하청 계열화와 비정규직화는 이런 도요티즘을 극단화시킨 것이다. 그 표준적인 사례가 동희오토와 같은 ‘꿈의 공장’이다. 정규직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에서 꿈의 공장이다.
김상봉 교수가 기이한 것은, 그가 진보신당 내에서 비정규직 투쟁을 가장 열심히 주장하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분이 일본의 기업문화를 찬양하고 있다. 그 일본의 기업문화가 바로 린 생산방식, 노동의 불안정성을 세계적으로 수출하는 표준적인 모델이 되었는데 말이다.
이런 기이한 주장을 할 수 있는 이유도 그가 현대 노동과정과 관련된 쟁점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기초적인 문헌 학습만 했어도 그는 린 생산방식이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비정규직 확대의 모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한국 기업들이 다른 모든 것은 일본을 따라하면서도 기업문화는 일본을 따라하지 않는다고 타박하는데, 한국 기업들이야말로 일본식 생산방식의 가장 반동적인 수입자들 중 하나이다. 너무 잘 따라 해서 문제이지 따라하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마르크스 극복? 170년 전으로 퇴행” (레디앙, 남종석 진보신당 부산 동래당협 부위원장, 부산대 경제학 강사 / 2012년 5월 4일, 4:50 PM)
[비판과 모색] 김상봉 교수『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비판②
4. 자본주의 극복인가 시장 예찬인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노동자의 경영권 장악으로 주식회사가 만남의 공동체가 되면 부르주아적 소유관계의 극복 없이도 자본주의는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노동자가 기업의 경영권을 갖게 되면, 기업은 잉여가치 착취를 하는 공간이 아니라 노동자의 주체성이 실현되는 곳이 되며, 개별 기업들은 각자 자신의 판단에 따라 시장에 필요한 제품을 공급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시장은 그대로 두되 기업 경영만 전환시키면 자본주의적 착취 질서는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장을 보는 김상봉 선생의 시각은 매우 독특하다. 그에게 있어 “시장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장소”이다. 자유란 “타자와의 만남에서 한편에서는 수동적으로 당하고 받아들이면서도 그 작용에 능동적으로 응답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시장은 “내가 타인의 결핍을 채워주는 대가로 나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수동성이 교환되는 장소”(73쪽)이기 때문에 자유가 생겨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개인들은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결핍을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시장은 나와 타자의 만남의 공간이자 자유 실현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상봉 선생의 입장에서 시장은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된다. 시장이 존재한다면 경쟁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경쟁에서 실패할 경우 기업은 퇴출된다고 말한다. 노동자들이 경영하는 기업도 경쟁에 노출될 것이기 때문에 기업 생존을 위해서 노동자들은 잉여를 아무렇게나 처분하지 않고 기업의 유지 존속을 위해 합리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62쪽) 더 나아가 노동력이 상품이 되는 사회적 질서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며, 시장에서 화폐가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분석도 없다. 노동력을 판매하고 화폐를 통한 교환은 자생적 질서의 일부인 것이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오로지 경영권뿐이다.
김상봉 선생은 스스로의 입장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 있는 어떤 독특함으로 분류하고 있다. 누군가는 그를 두고 공산주의라고 비판하고 누군가는 그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고 비판하고 있다고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입장이 ‘새로운 길’(87쪽)이라고 평가한다. 
시장이 자유의 영역?
기업 경영권을 소유권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다고 주장한 점에서 김상봉 선생이 ‘독창적’일지 몰라도 그가 그리고 있는 경제체제는 전형적인 시장 사회주의 체제로서 이미 많은 논자들이 주장해 왔던 것이다. 여기서 시장 사회주의란 중국과 같은 현실 경제체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시장 사회주의란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도 시장이라는 제도를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이론적 조류는 매우 다양하다. 신고전파 이론가였던 왈라스와 랑게는 시장이 일반 균형 달성에 유리하다는 점에서 계획경제에서 활용할 수 있다고 했고, 분석마르크스주의 로머는 시장의 경쟁이 사회주의 체제에게 역동성과 혁신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시장 사회주의자들 어느 누구도 김상봉 선생처럼 시장을 ‘자유의 영역’이라고 치켜세우지 않는다. 그들은 시장이 사회주의 체제의 한계를 보조할 수 있다고 주장할 따름이지 시장 그 자체가 인간의 자유가 이뤄지는 곳이라서 시장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시장을 자유의 영역이자 자생적 질서의 공간이라고 찬양하는 자들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마두 하이예크이다. 하이예크는 『자유의 길』에서 시장이야말로 개인들의 자율적인 조정을 통해 만들어진 자생적 질서이기 때문에 인간 자유의 근원적 공간이라고 했다. 가장 반동적인 철학자나 시장을 자유의 영역이라고 떠들지 사회주의자들 중 어느 누구도 시장을 자유와 연결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김상봉 선생은 시장 사회주의가 어떤 모순을 안고 있는지 자문하지 않는다. 시장체계에서는 고정자본을 많이 투자한 기업(기술경쟁력이 우월한 기업)이 그렇지 못한 기업이 생산한 잉여를 영유한다. 평균이윤율을 매개로 경쟁력이 우월한 기업이 그렇지 못한 기업의 잉여노동을 가져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기업에게 부를 넘겨주지 않으려면 기업은 지속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노동자가 경영하든 누가 경영하든 시장경쟁은 기업으로 하여금 축적을 강제한다. 마르크스는 이를 ‘축적을 위한 축적’이라고 했다.
김상봉식 독창성 또는 몽상
노동자가 경영하는 기업도 경쟁에 노출되면 축적을 위한 축적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더불어 파산하는 기업이 나올 것이며, 시장의 변동은 경기 순환을 만들어 낼 것이다. 축적을 위한 축적은 이윤율의 저하를 야기하고, 경제의 불안정도 지속될 수밖에 없다. 기업이 망하면 경영의 주체였던 노동자들은 실업 상태로 전락한다. 김상봉 선생이 제시하는 체제에서라면 이 모든 것들이 그대로 작용한다. 거기다가 경제학의 기초만 알아도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사적 생산과 사회적 실현의 모순에 대해서도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김상봉 선생이 제시하는 체제는 경영만 노동자가 할 뿐이지 자본주의와 거의 같게 움직인다.
대부분의 시장사회주의자들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두고 그들 나름의 해법을 제시한다. 로머는 중앙계획기구가 부를 공정하게 배분하여 독점이나 부의 편중을 원천적으로 봉쇄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로머의 주장에 동의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쟁점이 아니다. 시장 사회주의자들은 시장의 모순을 어떻게 지양할 것인가를 두고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김상봉 선생은 자신이 시장사회주의 전통 속에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장 사회주의의 고유한 모순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당연히 시장사회주의의 한계에 대한 자각도 없다. 문헌 리뷰는 아예 없다. 기초적인 문헌 조사도 없이 그저 자신의 ‘몽상’을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이게 김상봉식 독창성의 핵심이다.
 
5. 이행의 길인가 과거로의 퇴행인가?
사회변화는 변혁 주체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 모델을 제시한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변혁운동 진영은 새로운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가도 고민해야지만 이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김상봉 선생도 자신이 구상한 체제를 실현하기 위한 나름의 방안을 제시한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그는 노동자들이 경영권을 장악하고, 민주적 과정을 통해 사장을 선출하고, 노동자가 기업 활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기업 속에서 민주공화정을 수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베를린 필과 같은 오케스트라도 지휘자를 선거로 선출하고, 지휘자와 연주자들이 서로주체성을 실현하고 있듯이, 기업이라고 공화정의 원리를 실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단 두개의 법률 조항”이다.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 “주식회사의 감사는 주주총회에서 선임한다.” 이 두 개가 법조항을 넣음으로써 주식회사의 노동자들을 회사의 노예에서 회사의 주권자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308쪽) 남은 일은 입법투쟁이다. 노동자 경영권을 법제화함으로써 노동자를 예속의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김상봉 선생은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그의 이행전략은 말 그대로 의회주의다. 노동자들의 예속을 반대하는 좌파들이 의회의 다수파를 장악하고, 노동자들에게 경영권을 부여하는 법률 두 조항을 입법화함으로써 노동자들은 자주성을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계급성 무시
김상봉 선생에게 있어 국가 그 자체는 중립적인 존재이며, 공화정의 구현체이다. 그에게 있어 국가의 계급성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민들은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고 권력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민주적 과정을 통해 권력을 장악할 수 있고 자신들의 이상을 법제화할 수 있다. 문제는 민주적 과정을 통해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것이다. 다수 대중들이 좌파를 지지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노동자 경영권을 입법화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간단명료한 이행 전략이다. 사회체제가 이렇게 쉽게 바뀔 수 있다면 모든 활동가들의 우울증도 단번에 날려 버리겠다. 체제변화가 이렇게 쉬운데 고민할게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의회를 통한 이행이라는 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의회는 부르주아 국가 장치의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고, 의회권력은 부르주아 권력의 일부에 불과하다. 의회를 장악하는 것도 쉽지는 않지만 의회과정 자체가 부르주아의 소유권/경영권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절에서 나는 부르주아의 소유권은 경영권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부르주아들은 결코 경영권을 노동자들에게 이양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만약 노동자들이 의회를 통해 기업 경영권을 공격하게 된다면, 부르주아들은 의회를 해산해서라도 노동자 계급의 요구를 파괴시켜 버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르주아 국가의 계급성이다. 더군다나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김상봉 선생의 이해는 조잡하다. 그는 대학에서 교수들이 대학총장을 선출하거나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이 지휘자를 선택할 수 있다면서 기업도 종업원들이 사장을 선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마르크스는 음악에 대해 “전혀 무지하기 때문에”(106쪽) 교향악단 단원이 지휘자의 노예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김상봉 선생은 기업의 운영체제와 대학이나 교향악단의 운영이 동일한 원리에 따라 작동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스스로는 이것이 대단한 독창적인 발견처럼 쓰고 있다.
대학과 예술단체는 이데올로기적 장치
그러나 마르크스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기업과 대학, 사장과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의 관계를 잘 몰라서 사장을 민주적으로 선출하자는 제안을 하지 않은 것일까? 아시다시피 마르크스는 경제적 장치와 국가권력, 특히 이데올로기적 장치의 작동을 구별하여 분석했다. 경제가 잉여노동이 착취되는 체제의 토대라고 한다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체제의 재생산을 담당한다. 당연히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작동원리와 경제의 작동원리는 다르다. 경제는 생산과정에 대한 지배를 통해 구성되지만, 이데올로기적 장치는 참여와 자율성이라는 외피를 걸치지 않을 수 없다.
그람시가 시민사회 내에서는 강제보다 헤게모니가 주요하게 작동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를 두고 한 말이다. 헤게모니는 근본적으로 강제에 토대를 두고 있지만 윤리적 동의 또한 무시하지 않는다. 당연히 이데올로기적 장치에는 참여와 자율성이 보장된다. 그러나 경제는 그렇지 않다.
대학과 예술단체는 그것이 사적으로 소유된 것이든, 공적인 것이든 이데올로기적 장치이지 경제적 장치가 아니다. 부르주아들은 이 두 곳에서 대표가 자율적으로 선출되는 것을 허용하지만 그들의 계급적 이익의 토대가 되는 기업 조직에서는 결코 그와 같은 운영을 수용하지 않는다. 대학교와 기업을 동일한 지반 위에 놓고 같은 원리가 적용될 수 있다는 김상봉 선생의 주장은 경제적 장치와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다른 성격의 것임을 무시할 때나 가능한 것이다.
경제의 작동원리와 문화의 작동원리를 다르게 분석한 것은 비단 마르크스주의만의 주장은 아니다. 뒤르켐이나 탈코트 파슨즈와 같은 주류 사회학자도 사회를 구별하여 기능을 분석했고, 위르겐 하버마스 같은 중도좌파 사회학자도 사회체제를 구분한다. 하버마스는 경제는 이익의 논리가, 행정은 권력의 논리가, 생활세계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논리가 작동한다고 보았다.
사회작동 원리 차이 무시
부르주아 사회체제를 이렇게 구별하여 인식하는 것은 정치와 경제, 사회는 비록 하나의 구성체로 밀접히 결합되어 있지만 그들은 고유한 작용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과학의 상식 수준에서도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작동원리의 차이를 무시하고 오케스트라와 기업을 동일한 수준에서 논한다면 과학이 될 수가 없다.
김상봉 선생의 ‘참으로 순박한 이행전략’은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를 연상시킨다. 로버트 오웬이나 생시몽주의자들은 부르주아들에게 사회주의 장점을 잘 보여주면, 누구나 사회주의가 더 우수한 체제인 것을 인식하고 그 과정에 동참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사회관계 내에서 계급투쟁을 무시했으며, 근원적으로 폭력에 의존하는 부르주아 체제의 본질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언젠가 홉스봄은 ‘맑스, 엥겔스와 맑스 이전의 사회주의’라는 논문에서 이들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과 마르크스를 구별하며, 마르크스주의는 적어도 두 부분에서 그 이전의 사회주의와 다른 질적 진보를 이끌어 냈다고 썼다. 하나는 마르크스가 경제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 이행을 위한 구체적 전략을 제시하려 했다는 것이다.
김상봉 선생은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에 대해 무지하다. 그의 정치적 이행전략은 유토피아주의자들만큼이나 단순하다.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전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판단으로 인해 스스로 새로운 사회변화의 상을 제시하고자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프로그램들은 마르크스주의에 한참 미달하는 조잡한 수준에 불과하다. 그는 시장경제의 고유한 모순에 대해서도, 자본주의적 노동과정의 본질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경제적 장치와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동일한 수준에서 분석하고, 이행을 “단 두 개의 법률 조항”으로 대체한다. 그 스스로는 마르크스를 극복했다고 주장하지만 나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논쟁의 수준을 170년 전의 상태로 돌려놓고 있다는 느낌이다.
 
6. 메타과학으로서의 철학?
어떤 주장이 독창성을 지니려면 해당 분야의 현대적인 쟁점들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해당 분야의 현대적인 논의들을 완전히 섭렵해야 한다.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제일 먼저 하는 것은 문헌 리뷰이다. 자신이 다루는 분야의 쟁점은 무엇이고, 현대적인 논의가 어디에 도달해 있는가를 정확히 알아야 그 이상의 진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학자라면 누구나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다.
김상봉 선생은 이 책에서, 책의 부제도 알려주고 있듯이 철학을 통해 자본주의를 뒤집는다. 그는 권력의 본질을 논하면서도 칸트를 언급하고(124쪽), 생물학의 한계를 이야기하면서도 칸트를 논하며(267쪽), 소유의 의미를 심오하게 분석한 것도 헤겔이라고 쓰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철학으로 환원하고, 철학적 논리 속에서 비판과 대안을 구성한다. 과학에 대한 그의 편견은 놀랍다. 그는 생물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생물학은 다양한 생명체들이 보여주는 수많은 현상들을 분석하고 기술하려 할 뿐, 생명현상 또는 생명체를 하나의 통일된 원리 속에서 파악하려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그가 과연 어떤 생물학 저작을 읽었는지 의심스럽다. 몇몇 유명한 진화생물학의 저작들만 보아도 생명현상을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다루는 탁월한 대중적 과학 저작들만 해도 부지기수이다. 이들 대부분의 저작들은 생명체를 통일된 원리로 파악한다. 심지어 사회생물학은 생명현상만이 아니라 정치/사회/문화/윤리적 문제마저 생물학의 논리로 설명한다. 윌슨의 『통섭』은 이런 부류들 중 가장 급진적인 흐름을 대변한다. 나는 물론 윌슨류의 메타생물학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물학이 생명체를 하나의 통일된 원리 속에서 파악하는데 관심이 없다는 김상봉 선생의 주장은 억측을 넘어 지적 편견일 뿐이다.
억측을 넘은 지적 편견
그는 철학을 메타 과학의 지위에 올려놓고 다른 과학을 재단한다. 철학이 경제학보다도 경제에 대해 더 잘 설명하며, 생물학보다도 생물의 본질을 더 잘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의 입장은 알튀세르가 『과학과 과학자들의 자생적 철학』에서 “철학의 이데올로기화”라고 비판했던 바로 그 이데올로기를 대변한다. 과학을 통제하고 과학 위해 군림하는 철학! 경제도, 정치도, 생물학도 철학으로 환원하여 재단하는 이런 지적 폭력을 해방을 추구하는 철학자가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의아할 따름이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그의 이해도 1930년대의 스탈린주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는 타자와의 만남이야말로 서로주체성이 실현되는 조건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스스로는 철학의 타자인 과학을 만나지 않고 있다. 그가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만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어도 이런 이상한 저작을 발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기 동일성에 매몰된 존재, 홀로 주체성으로 고립된 존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이다. 만남을 그렇게나 강조하는 철학자가 철학의 자궁 속에서만 웅크리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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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야, 문제는 기업의 민주화야 (한겨레, 장정일 소설가, 2012.04.27 20:41)
[장정일의 독서일기]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김상봉 지음/꾸리에·1만5000원
개인이 출자하거나 창업한 회사의 주인은 출자를 하고 창업을 한 본인이다. 그러나 허다한 주주가 출자를 한 주식회사는 누구의 것일까? 김상봉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꾸리에, 2012)는 대표적인 법인 기업인 주식회사는 주식회사 자체에 인격이 부여되어 있으므로, 자연인이 자신의 인격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로 어느 한 사람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2010)가 그 실상을 널리 폭로한 바와 같이, 주식회사의 외양을 띤 우리나라 재벌의 총수는 순환출자로 조성된 쥐꼬리만한 지분을 가진 지주회사를 통해 자기보다 더 큰 그룹 전체에 무제한의 경영권을 행사할 뿐 아니라, 왕국을 물려주듯이 자식에게 주식회사를 물려준다.
주식회사는 공공재다. 그런데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오늘의 자본주의 양식을 대표하는 주식회사가 총수의 사유물이 됨으로써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기업의 노예가 되었다. 지은이는 그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자금을 출자한 주주와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를 소유권자와 경영권자로 분리할 것을 제안한다. 노동자의 경영권 법제화를 촉구하는 지은이의 가열한 주장은 “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이라는 전언 속에 온전히 담겨 있다. 여기에는, 기업이 국가보다 더 커진 오늘의 현실에서는 “정부가 아니라 기업을 민주화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 시대의 진보적 과제”라는 지은이의 평소 신념이 반영되어 있다. ‘삼성 공화국’이 은유가 아니라 실재라면, 그 공화국을 민주주의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자본주의자나 사회주의자 모두에게 불편한 책이다. 우선 주류 경제·경영학자들은 주주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어느 특정인이 불가피하게 경영을 도맡게 된 것이라고 항변하면서, 노동자의 경영권 접수는 사유재산 침탈이라고 반박할 것이다. 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이라는 주장을 빼다 박은 조합주의적 수사로 치부하면서, 노동해방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국가적 기획에 의해서만 완수될 수 있다는 교조적 이론을 되풀이할 것이다.
지은이는 양쪽의 비판을 어수룩이 넘기지 않는다. 먼저 주류 경제·경영학자들의 논리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주식회사법과, 우리나라의 주식회사 구조와 운영 체계를 미국·독일·일본의 주식회사 체계와 세심히 비교하는 것으로 충분히 해명하고 있다. 또 마르크시스트의 비난에 대해서는, 자본주의의 극복이 노동자를 기업에서 해방시켜 국가의 월급쟁이로 만드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응답한다.
1990년대부터 기승을 부렸던 신자유주의는 많은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었다. 예컨대 신자유주의 초기에는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회유와 협박에 못 이겨, 구조조정과 비일용직 양산을 용인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의 위세가 한풀 꺾이고 폐해가 드러나면서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라는 담론이 유행처럼 번진다. 하지만 정치를 배제한 경제 담론이 우리에게 희생을 강요한 것처럼, 경제가 없는 정치 담론 역시 유권자를 동원하려는 정치인들의 ‘뽐뿌질’에 지나지 않는다. 더 이상 바보가 되고 싶지 않다면, ‘정치경제’에 대한 동시 접근이 필요하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그것을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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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가 회사 주인이며 경영권 갖는다는 건 만들어진 믿음” (경향, 황경상 기자, 2012-03-23 19:54:52)
ㆍ‘기업은 누구의…’ 김상봉 교수
‘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되는가?’ 김상봉 전남대 교수(52)가 펴낸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꾸리에)의 문제의식은 간명하다. 다만 갸웃거림을 넘어 비난까지 들을 게 뻔하다. 그 스스로도 “불가능하다는 논거를 더 열심히 찾았다”고 썼을 정도다. 그럼에도 주류 경제학자들조차 노동자의 경영권 행사를 처음부터 부정하는 이는 없었다. 역사적·법적·철학적 분석을 통해 그가 내린 결론은 “주식회사의 주인이 주주이며 그들에게 경영권을 줘야 한다는 믿음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지난 17일 전화 인터뷰에서 “오늘날 우리는 정치적으로는 자유로운 시민이지만 경제적으로는 기업의 노예”라며 문제제기의 배경을 설명했다. 우리 시대는 노동이 임금벌이를 넘어서 ‘사회적 존재’를 결정하고 있다. 국가는 날로 세계화하고 있는 기업을 통제하기에 역부족이다. 되레 ‘기업국가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민주주의는 후퇴하기 마련이다. 세상에서 가장 ‘독재적인 조직’인 기업의 문화가 사회로 배어든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나아가 자본주의를 극복하자고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없어요. 마르크스-레닌의 상상력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건 생산수단의 국유화 같은 실패한 정책을 되풀이하는 셈이죠. 반면 복지 모델은 자본주의의 모순에 손대지 못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김 교수는 차라리 ‘공장’을 ‘공화국’으로 만들어 나가자고 제안한다. 외부의 통제보다 내부를 민주주의화하는 전략이다. 이미 1985년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노동자들이 집단 소유·운영하는 ‘자치 기업’을 제안했다. 최근에는 협동조합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이들도 많다. 김 교수는 노동자가 대규모 기업을 인수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모든 기업이 협동조합이 될 수도 없다는 점에서 이들과 거리를 둔다. 그러면서 일반 주식회사 자체를 노동자들이 경영해야 한다는 논지를 전개한다.
이는 ‘사유재산 부정’이 아니다. 동네 식당처럼 개인 출자 기업이라면 소유권을 인정해야 하지만 주식회사는 다르다는 생각이다. 간단한 몇 가지 사실로도 주주가 주인이라는 신화는 깨진다. 우선 주주가 납입한 자본은 회사로부터 되돌려받을 수 없다. 재산권도 행사할 수 없는데 과연 ‘소유’라 볼 수 있는가. 게다가 1인이 모든 주식을 소유한 주식회사라도 주주는 투자금 외에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주주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물질’로 기업이라는 공동체에 참여할 뿐이다. 이 무책임함에 ‘소유’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김 교수는 주식 소유와 기업의 경영권 사이에 필연적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주식회사가 주주만의 것이라면 국가가 공공성을 고려해 이해관계도 없고 주주도 아닌 사외이사를 두게 하는 것도 비상식적이다. 결국 김 교수는 주식회사라는 법인은 ‘법적 인격체’이므로, 인격체를 누군가 소유하거나 지배할 수 없듯 소유·지배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법으로 주주들이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도록 규정했지만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절대다수의 주주들은 기업 경영에 아무 관심이 없고,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대다수의 회사는 “주식회사라는 옷을 걸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개인 소유의 기업”으로 남게 된다. 극히 작은 비율의 주식을 소유하고도 이건희 회장은 78개 거대 기업집단의 ‘오너’로 전권을 행사한다. 법적 등기이사가 아니어서 경영 실패에 책임도 지지 않는다. 독재자보다 나은 지위다.
김 교수는 주식회사라는 공동체에서 ‘물질’로 남아버린 주주가 몸이라면 노동자야말로 활동하는 주체라고 말한다. 주주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노동자에게 의존해야 한다. 아니면 또 다른 ‘이건희’가 주식회사를 사유화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주주가 노동자와 서로를 통해 주체성을 확립할 때만 건강한 상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실현은 간단하다.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는 단 하나의 법률 조항만이 필요하다. 주주는 배당금을 받고 노동자는 경영을 이끈다.
이런 논지의 바탕에는 만남이 주체성을 형성한다는 김 교수의 ‘서로주체성’ 철학이 있다. 김 교수는 소유를 늘려야만 자유가 커진다는 신자유주의, 사적 소유의 철폐만이 자유를 가져온다는 마르크스주의를 모두 부정한다. ‘기업’을 소유하지 않아도 ‘자기통제’만으로 노동자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
독일과 일본은 이미 ‘노동자 경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제도나 관행이 있다. 김 교수는 노동자 기업이 당장의 임금과 복지 지출로 고갈돼버릴 것이라는 주장도 편견이라 본다. “시장 경쟁 속에서 자신의 목줄을 죌 리 없다”는 것이다. 파산 뒤 노동자들이 인수해 키워낸 키친아트 같은 기업이 모범을 보여준다. 그는 일단 공기업에서부터 노동자 경영을 실천해보자고 제안한다.
이번 책에는 ‘거리의 철학자’로 불리며 거대 재벌과 투쟁을 벌여온 김 교수의 삶이 녹아 있다. 그에게 철학과 경제는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지금은 경제가 모든 삶의 철학이 돼버렸는데 우리 삶의 총체적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은 다시 철학이 돼야 합니다.”
 
"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되나" 철학자, 주식회사를 사유하다 (한국, 김범수기자, 2012.03.23 21:57:59)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유한 책임만 지는 주주는 주식회사의 소유주가 아니다 주주엔 배당금, 노동자엔 경영권"
재벌이 장악한 한국 현실 감안 공기업 사장 선출권 우선 도입 등 당장 실현가능한 방법 제안

1960년 경동산업으로 출발한 키친아트는 알려진 대로 숟가락이나 국자 같은 주방용품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기업이다. 프레스 작업 중심이어서 일 하다가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산업재해가 많은, 한국의 열악한 노동 현실을 대변하는 이미지를 가진 기업이었다. 양식기로 제법 돈을 번 이 회사는 자동차 부품, 종이컵 제조 등으로 투자를 확장했다가 경영전략이나 재무관리 부재로 2000년에 법정관리에 들어가고 말았다. 파산 당시 빚만 1,000억원. 이 회사를 노동자들이 체불임금과 퇴직금, 위로금 등을 모아 76억원에 인수해 주식회사 키친아트로 새 출범시켰다. 노동자 기업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공동소유, 공동책임, 공동분배'를 사훈으로 내건 이 회사는 그 뒤 매출 700억원대의 탄탄한 기업으로 성장했고 해마다 주식 배당금 10%를 사회에 환원한다.
자본주의 기업의 소유와 경영 문제를 재검토한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의 이 책을 한국 재벌기업의 1인 전횡 구조를 비판하거나 협동조합 같은 식의 노동자 경영 참여를 모색한 책으로 지레 짐작했다. 책의 앞부분에 키친아트 사례 같은 것이 나와서 더욱 그랬다. 하지만 저자가 노동자의 경영 참여를 검토한 뒤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협동조합처럼 노동자의 삶의 질 개선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당위'라는 사실이다.
저자의 질문은 '경영자를 왜 노동자가 직접 선출하면 안 되는가'에서 출발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로 국민의 이해를 대변할 의원을 뽑고 대통령을 선출하듯, 기업의 구성원인 노동자가 경영자를 뽑아서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
문제의 핵심은 '소유권'이었다. 물건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이용할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당연하듯, 기업을 가진 사람이 회사를 경영하는 것은 마땅하다. 중요한 것은 지금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해가는 물적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주식회사에 이 같은 상식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주식회사는 주주의 자본금 납입으로 설립되지만 등기를 마침과 동시에 그 자체로 하나의 법적인 인격체가 된다. 노예사회가 아닌 이상 한 인간을 다른 인간이 소유할 수 없듯, 주식회사 역시 누구에게 소유되는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주체'라는 것이다.
이를 법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주식회사의 소유주로 흔히 착각하는 주주의 유한 책임이다. 식당이 망하면 주인이 가게 인테리어며 임대를 위해 은행에서 빌린 대출금을 어떻게든 갚아야 한다. 하지만 주식회사는 망해도 주주가 그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주주는 기업이 잘 되면 주가 상승의 이익이나 배당금을 받고 못 되면 주가 하락에 따른 손실을 볼 뿐이다. 더구나 주주 경영권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유는 기업이 크면 클수록 주주의 다수가 주가를 통한 이익 실현에만 관심이 있지 실제 경영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대로 주식회사가 '오늘날 우리의 삶을 가장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지평'이라면, 그것이 '일종의 유기체이면서 구성원들이 서로를 도구로 활용하면서 동시에 목적으로 대접하고 다시 그들이 하나의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는 통일성을 실현하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면, 이런 주주를 기업의 주인으로 믿고 그들에게 경영을 맡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는 '생각하는 주주가 주식회사의 몸이라면 노동자는 활동하는 주체'라고 규정한다. 협동조합처럼 굳이 노동자가 주주가 되지 않더라도 주식회사의 경영권은 주체인 노동자가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자본의 사적 소유를 국가 소유로 전환하려는 마르크스의 기획에도 반대한다.
책에서 삼성을 대표 사례로 꼽아 신랄하게 고발하듯 미국식 주주자본주의에다 봉건적 의식에 사로 잡힌 재벌이 장악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 앞에서 그의 주장은 언뜻 공허하게도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노동자가 기업의 주체가 되기 위해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하고 주주와 함께 활동의 주체가 되기 위해 '주식회사의 감사는 주주 총회에서 선임한다'는 상법 개정을 최종 목표로 하면서도 저자는 당장 실현가능한 방법들을 제안한다. 우선 공기업 사장 선출권을 노동자들에게 위임하고 원칙적으로 법인이 운영하는 기관은 그 기관에 소속되어 일하는 종업원들이 기관장을 선출하도록 하는 것이다. 주식회사의 경우도 성격상 공익적인 회사에서는 노동자 경영권을 도입한다. 대표적인 기업으로 요즘 파업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언론사를 꼽았다. 기관투자가들이 주주권을 행사해 노동자 경영권 도입을 앞당기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한다. 노동자들의 유보된 임금이라고 할 수 있는 연기금이 어떤 기업의 최대주주라면 그것은 실질적으로 익명의 노동자들이 최대주주라는 말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한 그가 아리스토텔레스며 칸트의 철학 이론과 법학, 경제학의 논리를 다양하게 인용해가며 펴는 이런 논리 전개에 실은 모델이 있었다. 베를린 필 같은 세계 수준의 교향악단들이다. 그 조직은 주식회사든, 재단법인이든 단원들이 통치하는 작은 공화국이라고 한다. 지휘자를 선출하는 것도 물론 단원들이다. 교향악단의 이윤을 창출하는 핵심적인 존재인 단원이 주체가 되는 이런 체제에 아무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주식회사가 교향악단처럼 운영되면 안 될 까닭 역시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만약 주식회사가 이런 오케스트라가 될 수 있다면, 우리가 사는 세계의 진리가 가장 탁월하게 표현되고 실현되는 장소라면, 모든 주식회사가 오케스트라가 된다는 것은 이 세계에 넘쳐 흐르는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아름다운 음악소리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일 것이다.'
 
재벌 개혁, 하려면 진보신당처럼 (진보신당 정책위원회, 2012/03/27 09:24) 
총선 시작하기 전, 새누리당까지 포함해서 모든 정당이 재벌을 개혁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진보정당만의 주장처럼 되어 있던 ‘경제 민주화’가 모두의 구호가 되었다.
하지만 막상 총선 공약으로 나온 것을 보면,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새누리당 공약은 굳이 길게 언급할 필요도 없겠다. ‘경제 민주화’라는 거창한 표제 아래 담긴 내용은 “대기업의 무분별한 중소기업 사업영역 진출방지” 정도가 고작이다. 공약으로 낼 것도 없이 지금 당장 정부, 여당이 해야 할 일들을 생색내듯이 나열할 뿐이다.
민주통합당은 이런 새누리당을 비판하면서 “출자총액제한제도 재도입, 순환출자 금지, 금산분리 강화 등”을 공약한다. 이러한 공약은 민주통합당이 바라보는 재벌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그것은 총수 일가가 자신들이 실제 소유한 주식 지분보다 훨씬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해결책은 모든 주주가 자신이 소유한 지분만큼만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는 것이다. 즉, ‘1주 1표’의 주주자본주의 질서를 철저히 확립하는 것이다.
지난 2월에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가 발표한 ‘맞춤형 재벌개혁 로드맵’도 민주통합당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각 재벌 그룹에 대해 맞춤형 처방을 내놓는다고는 하지만, 일관된 것은 민주통합당과 마찬가지로 “출총제 부활, 순환출자 금지 등”을 통해 재벌의 경제집중력을 억제하겠다는 것이다. 이정희 대표의 방안이 실현된다면, 10대 재벌 그룹은 해체되고 총수 일가는 다른 대주주와 마찬가지의 지위가 된다. 
민주통합당 공약이나 이정희 대표 로드맵은 새누리당 공약에 비해서는 ‘재벌 개혁’이라 할 만한 측면이 있다. 재벌 권력에 손을 대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재벌 개혁’이 곧 ‘경제 민주화’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의 방식대로 하면, 재벌 권력은 약화되는 대신 전체 대주주 집단의 권력은 더욱 강화된다. 즉, 주주자본주의가 강화된다.
우리가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경제 현실의 미시적 기초가 되는 기업 단위 질서가 주주자본주의다. 위의 ‘재벌 개혁’안들은 경제 민주화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강화의 통로가 되고 말 것이다.
최근의 ‘재벌 개혁’론에 대한 장하준 교수의 다음과 같은 비판은 이러한 맹점을 짚고 있다. “재벌, 특히 삼성은 참 나쁘다. 자식들에게 편법 상속을 했고, 우리 사회 엘리트들을 매수했다. 여기에 대해선 법에 따라 단호하게 처벌을 해야 한다. 하지만 삼성그룹을 해체하자는 주장은 동의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삼성 계열사의 주인이 누가 되나. 국가가 주인이 된다면, 그건 차라리 낫다. 하지만 실제론 해외 투기자본이 주인이 될 게다.” (장하준 교수 인터뷰, <프레시안> 2012. 3. 25.)
그렇다면 ‘어떤’ 재벌 개혁이어야만 하는가? 진보신당은 ‘탈삼성 공약’을 통해 그 대안을 제시한다. 삼성을 비롯한 재벌 대기업에서 이사의 절반 이상을 노동자가 뽑자는 것이다. 그래서 총수 일가의 전횡도 아니고 주주들의 ‘1주 1표’도 아닌 노동자의 ‘1인 1표’로 운영하는 기업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러한 공약은 재벌 문제에 대한 진보신당의 독자적 진단에서 비롯된다. 재벌 문제의 밑바탕에는 주식회사의 근본 구조가 있다. 주식회사 본래의 문제가 한국적 형태로 나타난 게 바로 재벌 문제다.
주식회사는 주인 없는 사회적 자산이다. 그런데도 자본주의 법체계는 이 사회적 자산의 경영권을 주주라는 특정 집단에게 맡긴다. 하지만 주주는 사실 일종의 채권자에 불과하다. 이들에게는 경영의 의지도, 능력도 없다. 그러다보니 실제로는 대주주들의 묵인과 담합 아래 소수 과두 세력이 기업을 지배한다. 한국에서는 이 과두 세력이 총수 일가로 나타날 뿐이다.  
최근 출간된 김상봉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이사장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꾸리에)는 이러한 진보신당의 재벌관을 깊이 있게 정리한다. 그 몇 구절이다. “[이건희 일가가] 대규모 기업집단을 단돈 41억 원으로 지배할 수 있게 해주는 나라가 이 나라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지극히 역설적인 일이지만 주식회사에는 처음부터 주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나 주인일 수 있는 것이다.”(221쪽)
“주식회사에서 활동의 주체는 노동자들이니, 오직 노동자들만이 주식회사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주체일 수 있다. (중략) 그렇다면 더 무슨 말이 필요한가? 주식회사를 참된 의미의 생산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노동자들에게 주식회사의 주체성을 돌려주는 일만 남았다. (중략) 필요한 것은 단 하나의 법률조항이다. -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307-308쪽)
이사회의 다수를 노동자들이 선출하자. 노동자야말로 그 기업의 장기적인 생존과 발전에 가장 깊은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고 따라서 책임의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요하다면, 이와 함께 다른 이해관계자들, 즉 소비자, 지역사회, 유관중소기업(하청업체 등) 대표들도 이사회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주식회사의 기업지배구조가 이렇게 바뀌면, 주주의 독점권이 약화되면서 동시에 재벌의 권력도 자연스럽게 해체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몇몇 ‘진보적’ 재벌 개혁안은 노사공동결정제를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먼 미래의 과제로 미뤄두거나 혹은 출총제 재도입, 순환출자 금지 등에 따르는 보완책 정도로만 제시한다. 이에 반해 진보신당은 주장한다. 노동자 경영권이야말로 재벌 개혁의 몸통이고 가장 먼저 추진되어야 할 과제라고. 순환출자 금지 등은 오히려 이것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이를 보완할 수단일 뿐이다.    
바야흐로 ‘재벌 개혁’의 백가쟁명의 시대다. 하지만 같은 ‘재벌 개혁’ 구호 아래서도 나머지 정당들과 진보신당 사이에는 이러한 차이가 존재한다. 한 마디로, 신자유주의 ‘이후’의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 지금부터 과연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에 대한 입장 차이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번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진보신당을 눈여겨볼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주식회사 경영권 주체는? 철학자의 대답은 ‘노동자’ (한겨레, 최원형 기자, 2012.03.27 20:39)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 특히 주식회사는 이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삶의 장소다. 그러나 이윤을 만들어내는 도구로서의 가치만이 주목받았을 뿐 이 장소의 본질에 대해서는 따져물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철학자 김상봉 전남대 교수가 최근 펴낸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철학자의 눈으로 주식회사의 본질을 파고들어간 책이다. 공화국의 이상을 강조해온 지은이는 우리 삶을 지배하는 공간인 주식회사가 ‘공동체’가 되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선출하듯 주식회사에서 노동자가 사장을 선출할 수 있는 근거들을 따지고 들어간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라고 생각하고, 기업의 소유와 경영은 같은 것으로 치부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겠다는 사람들도 국가가 소유권을 넘겨받도록 하거나, 노동자들이 소유권을 갖게 하는 등 기업의 소유관계를 변화시키는 데에서 그 방법을 찾곤 한다.
그러나 철학자인 지은이는 소유를 통해서 자유를 확보하려는 생각에 비판을 가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업의 주인을 바꿈으로써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겠다는 유혹에 빠지는 까닭은 인간의 자유가 소유에 기초한다는 전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가 볼 때 자유는 사물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활동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의미한다. 그는 이로부터 노동자의 자유를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기업의 소유권이 아니라 경영권이라는 명제를 도출해낸다.
그렇다면 경영권은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을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는 인식은 경영권도 마찬가지로 소유할 수 있다는 인식을 이끌어낸다. 삼성그룹의 경영권이 3대째 세습되는 이유도 이른바 ‘오너’들이 소유한 지분에 근거한다. 그러나 지은이는 주식회사가 과연 사사로이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인지 따져묻는다. 개인이 차린 식당이 그의 소유물인 것과는 다르게 주식회사는 사람의 결합체가 아닌 자본의 결합체로서 ‘법인격’을 부여받은 주체이기 때문에, 그 누구의 소유물도 될 수가 없다고 한다.
지은이는 이로부터 ‘주주 경영권’을 배격하고 ‘노동자 경영권’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생산활동은 언제나 노동자의 몫이기 때문에 노동자만이 회사가 다치면 함께 고통받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주체일 수 있다는 것. 이에 따라 그는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는 단 하나의 법률조항만 도입하더라도, 주식회사를 참된 의미의 생산공동체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주주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 “주식회사의 감사는 주주 총회에서 선임한다”는 조항을 덧붙일 수 있다고 한다. 지은이는 이런 논의를 ‘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이란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주주자본주의 문제점 조목조목 지적 (세계일보,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2012.03.30 17:10:57)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철학 자본주의를 뒤집다/김상봉 지음/꾸리에/1만5000원
선거를 앞두고 너도나도 ‘재벌개혁’을 내세운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또다시 독자들은 실망할 것이다. 전남대 철학과 교수인 저자가 ‘주주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저자는 15.9%의 지분을 가지고 오너로 군림하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예를 들면서 주주자본주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먼은 “기업은 기업을 소유한 주주들의 도구일 뿐”이라고 했고,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석좌교수인 마이클 젠슨과 도널드 츄는 “경영자들의 목적은 그 기업을 소유한 주주들의 목적과 자주 충돌한다”고 했다. 이들은 모두 주주들이 기업을 소유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듯 전제하고 있다. 이들이 설파하는 주주자본주의의 교리는 미국이나 이를 추종하는 한국사회에서 오랜 시간 종교와도 같은 위력을 발휘해 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가 주식회사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마치 당연한 듯이 주주들이 주인 아니냐고 반문한다.
영·미권에서 학위를 받은 한국의 경제학자들 역시 이 주주자본주의 체제를 불변의 현상으로 간주한다. 당연한 반응이다. 저자는 “이들은 체제 내의 경제운용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그 체제가 만들어내는 모순과 파행을 극복해야 할 필요성도 가능성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들이 국가의 경제정책을 결정하고 주도해온 탓에 이 나라는 기업 특히 재벌 기업 지배국가가 돼 버렸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무릇 모든 위대한 사고는 무심히 지나쳐온 ‘상식적인 현실’로부터 시작된다. 자본주의 경제학은 물론이고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도 정면으로 묻지 못했던 자본주의 내부로부터 자본주의의 극복의 길 찾기를 시작하자”고 촉구한다. “기업을 참된 의미의 생산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경영권을 돌려주는 일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의 법률조항, 바로 이것이다.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는 것이다.”
 
삼성 회장 선거로 뽑는다면, 이건희 아닌 ○○○가 주인! (프레시안, 장석준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부소장, 2012-03-30 오후 5:26:37)
[장석준의 '적록 서재'] 김상봉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1990년대 초에 나온 <우리 시대의 사회주의 당>(민맥 펴냄, 1993년)이라는 책이 있다. 저자는 '민중회의'라는 좌파 정치 조직에서 활동하던 김종박이었다. 이 책의 요지는 1992년 백기완 민중 후보 운동의 성과를 모아 사회주의 지향의 진보 정당을 건설하자는 것인데, 흥미로운 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설명 방식이었다.
김종박은 이 책에서 '사회주의'를 "국민이 대통령을 투표로 뽑듯, 노동자가 사장을 투표로 뽑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회주의=프롤레타리아 독재+국유화'라고 이해되던 당시로서는 사뭇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관련된 몇 구절을 인용해보자.
"우리 당이 주장하는 재벌 회사의 공장을 노동자에게 맡기자는 말은 무엇인가? 말 그대로다. 그 기업의 대표를 노동자들이 직접 뽑자는 것이다." "기업보다 더 큰 게 나라다. 나라의 대통령도 국민이 뽑는다. 그래도 나라는 잘 유지되고 있다. 하물며 재벌 회사의 대표를 공장 노동자들이 뽑는 것은 대통령을 뽑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아쉽게도 김종박의 이런 주장은 새로운 사회주의관으로 발전하거나 현실 운동과 결합되지는 못했다. 한때의 기발한 선전 아이디어 정도로만 사람들 뇌리에 남았다.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1992년 대선 이후, 한국의 진보 세력에게 자본-노동 관계의 근본적 변화는, 점점 더, 현실 정치 의제가 될 수 없는 먼 미래의 이상이 되어갔으니까.
그리고 20여 년이 지나고 나서, 난 한 권의 문제작과 마주하고 있다. 김상봉(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이사장)의 신간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꾸리에 펴냄)가 그 책이다. 1980년대 사회과학 서적을 연상시키는, 거의 디자인이라 할 것이 개입되지 않은 흑백 표지가 이 책의 민낯이다. 그리고 이 표지 하단에는 단정적인 어조의 한 문단이 구호처럼 선명히 박혀 있다. "기업을 참된 의미의 생산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에게 경영권을 돌려줘야 한다. 이를 위해 많은 일을 할 필요는 없다. 필요한 것은 하나의 법률 조항, 바로 이것이다!-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
철학, 주식회사를 뒤집다
김상봉은 철학자다. 전공은 칸트 철학이지만, 서양 철학 전반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통해 독창적인 사유 체계를 발전시켜온 우리 시대의 사상가다. 그는 서양 철학의 주체 개념을 '홀로주체성'이라 비판적으로 정리하면서 그 대안으로서 '서로주체성' 개념을 탐색해왔다. 이러한 사색 작업에서 그의 주된 영감의 원천은 서양 철학자들보다도 오히려 함석헌의 '씨알' 사상 그리고 한국 근현대사의 민중 투쟁이었다.
그런 그에게는 별명이 있다. '거리의 철학자'. 실제로 그는 왕성한 실천가다. 이미 오래 전부터 '학벌 없는 사회'라는 교육 운동 단체를 만들고 키우는 데 앞장서왔다. 게다가 진보 정당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진보신당의 강령 제정 작업을 주도했고 지금도 그 부설 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래서 철학자인 그가 주식회사, 기업 지배 구조, 노동자 경영권 등을 다루는 신간을 낸 것이 아주 낯설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특히 김상봉은 최근 몇 년 새 '삼성 공화국'의 현실을 비판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일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이들이라면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가 지난 몇 년간 그의 삶의 궤적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저작이라고 느낄 법하다.
그런데 이것은 영 틀린 짐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확한 것도 아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전개하는 사유의 발단이 반(反) 삼성 운동보다 훨씬 오래된 것임을 밝힌다. 한국에서 대통령 직선제가 쟁취되고 뒤이어 노동자 대투쟁이 폭발한 1987년에 당시 독일 유학 중이던 김상봉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다고 한다. "공장의 폴리스(polis)화. 폴리스로서의 공장. 즉, 하나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단위로서의 공장. 이때만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왜 사장은 선거를 통해 뽑으면 안 되는가?"
"왜 사장은 선거로 뽑으면 안 되는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분명 반 삼성 운동 등의 정세로부터 촉발된 것이기는 하되 그 뿌리는 1987년의 거대한 투쟁들의 여진 속에서 솟아난 이 물음에 있다. 그 해 이후 한국의 민주화가 먹은 나이 꼭 그만큼의 세월과 함께 숙성된 물음인 것이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제1장 제목 자체가 "바보 같은 물음-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이다. 제1장은 이 질문을 던지면서 또한 이 질문의 답을 얻으려던 과정에서 저자가 맛본 실망과 좌절에 대해 토로한다. 저자가 보기에 카를 마르크스를 포함한 기존 좌파 이론가들은 모두 이 문제에 대해 속 시원히 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1장은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신랄하며 논쟁적인 어조를 취한다. 기존 이론의 권위에 상당한 애착을 지닌 독자라면 이 장을 읽으며 혈압이 좀 올라갈 수도 있겠다.
제2장에서 저자는 철학자답게 자유, 소유, 권력 등의 근본적 개념들을 재검토하며 앞 장의 비판을 발전시켜나간다. 자유는 소유로부터 나올 수 없다는 것, 사람은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권력 역시 소유의 대상일 수 없다는 것을 차근차근 논증한다. 얼핏 진부한 상식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의 일상인 자본주의 현실은 이런 상식의 정반대를 진리로 전제하며 존립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철학적 비판 작업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백미이자 압권은 제3장부터다. 이 장에서 저자는 자본주의 기업의 가장 발전되고 일반화된 형태인 주식회사를 철저히 검토하고 그야말로 '해체'한다. 그리고 독일, 미국, 일본 등에서 발전한 주식회사의 여러 변형태들을 검토하는 제4장이 제3장의 이런 중심 논의를 뒷받침한다.
주식회사는 노동자와 사회의 다른 부분에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며 주식회사 자체가 상품이 되어 시장에서 팔리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주주 집단이 엄청난 이익을 향유한다.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다. 이 모든 현실의 밑바탕에는 주식회사를 존립시키는 제도적 중핵들이 존재한다. 그 중 하나가 자본주의 법체계에서 주식회사에 부여되는 법인격이다. 김상봉은 법철학적 논의를 통해 이러한 제도적 중핵들을 사정없이 파헤친다. 그래서 그것이 결국은 한 더미의 무의미하고 허술하며 모순된 명제들의 조합에 지나지 않음을 밝힌다.
결론은 무엇인가? 주식회사에는 주인이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자본주의 법체계에서 주식회사의 주인인 것처럼 전제되는 주주들도 사실은 주인임을 내세울 아무런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 주식회사는 본래부터 그렇게 주인 없이 성립된 생산 공동체다. 따라서 주주 소유권을 전제하고 그로부터 연역되는 경영권이라는 것도 거짓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가 보기에는 한국의 재벌 문제도 바로 이 근본적 문제에서 파생하는 것이다.
"(이건희 일가가) 수많은 주주들이 주식을 소유하고 있고 국가 경제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대규모 기업 집단을 단돈 41억 원으로 저렇게 간단히 사유화하고 지배할 수 있게 해주는 나라가 이 나라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지극히 역설적인 일이지만 주식회사에는 처음부터 주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나 주인일 수 있는 것이다." (220~221쪽)
저자는 이렇게 기존 현실의 논리적 토대들을 해체한 뒤에 제5장에서 자신의 오래된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소유에 따른 권력 행사의 논리가 원천 부정된 자리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과제는 이제 이 주인 없는 공동체를 어떻게 참다운 공동체로 만드느냐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김상봉의 '서로주체성' 개념이 등장해 제 역할을 한다.
주식회사의 자산 제공자가 주주일지는 몰라도 주주는 결코 주식회사의 활동 주체는 아니다. 그런 활동의 주체로 우리는 노동자 말고 다른 어떤 집단도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경영권은 주주 '소유'권이라는 허상에서 의제될 것이 아니라 이들 활동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어야 한다. 노동자와 경영자가 '서로주체'로서 마주할 때에 주식회사는 비로소 실체를 갖춘 공동체, 폴리스('공화국'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가 된다. 즉, 노동자가 경영자를 선출해야 한다.
그럼 주주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그는 이제 금융 투자자로서 자신의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 김상봉은 이들 '수탈자들에 대한 수탈'로서 지극히 문명적인 방식을 제시한다. 소유권과 경영권 사이의 고리를 확실히 끊는 조치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배당권이 여전히 인정된다. 하지만 경영권과는 안녕이다. 이들의 역할은 경영 감사 정도로 족하다. 그래서 드디어 이 책의 최종 결론이 완성된다. "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
현대 자본주의의 지배 메커니즘
다소 길지만,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논지를 쭉 소개해봤다. 이 책의 성취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나는 우선 마르크스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에서 마르크스는 주로 과거 논의의 한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출연한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마르크스를 다시 보게 되었고, 그간 주목하지 못했던 측면들을 새로 발견할 수 있었다. 가령 <자본> 3권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고도로 발전한 결과 만들어진 이것(주식회사)은 자본이 생산자 소유로 재전화―그러나 이제 소유는 개별화된 생산자들의 소유가 아니라 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즉, 직접적인 사회적 소유]로서의 생산자 소유이다―하기 위한 필연적인 통과점이다. 또 다른 한편 그것은 재생산 과정에서 지금까지 자본 소유와 결합되어 있던 모든 기능이, 단지 결합된 생산자들만의 기능[즉, 사회적 기능]으로 재전화하기 위한 통과점이기도 하다." (<자본 3-1>(강신준 옮김, 길 펴냄), '제27장 자본주의의 생산에서 신용의 역할', 586쪽)
주식회사는 분명 마르크스에게도 중요한 연구 주제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에게 주어진 역사적 시간은 이 주제를 탐색하기에는 너무 제한적이었다. 마르크스가 말년에 이르러서야 주식회사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일반적 기업 형태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자본> 자체의 체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시대적 상황 때문에도 주식회사는 3권에서야 중요한 주제로 부상한다. 하지만 그조차도 충분히 자세히는 다뤄지지는 못한다.
그 결과로 <자본>의 독자는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자본> 1권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자본가는 19세기 중반 영국 자본주의의 전성기에 자본가의 일반적 유형이었던 가족 기업 경영자다. 이 자본가 유형은 소규모 기업의 창업주이자 실질 소유자였고 경영에서는 무자비한 독재자였다. <자본> 1권을 접한 한국의 독자들이 이 책의 자본가 상(象)에 한국의 재벌을 쉽게 오버랩시킬 수 있었던 것(사실은 오인인데)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본>의 끝머리(제3권)에 다다라서 우리는 전혀 다른 자본가 유형을 마주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화폐 자본가와 생산 자본가가 서로 나뉜다. 화폐 자본가란 은행가, 주식시장 중개인, 주식 소유자 등으로서 현실의 자본가 계급은 점점 더 이들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그러면서 자본가 계급의 다수는 직접적 생산 기능으로부터 유리된다. 반면 생산 자본가가 담당하던 감독 기능은 점차 전문 경영인이 담당하게 된다.
"주식회사(신용 제도와 함께 발달한다)는 일반적으로 이 관리 노동을 점점 더 자본(자기 자본이든 차입 자본이든)의 소유와 분리된 기능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 한편으로 자본의 단순한 소유주인 화폐 자본가에 대해서 기능하는 자본가가 대립해 있고, 또 신용의 발달과 더불어 이 화폐 자본 자신이 하나의 사회적 성격을 취하면서 은행으로 집중되어 이제는 직접적인 소유주들로부터가 아니라 바로 이 은행들로부터 대부됨으로써,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 차입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어떤 명목의 자본도 소유하지 않은 단순한 관리자가 기능하는 자본가 그 자신이 수행해야 할 모든 실질적인 기능들을 수행하게 됨으로써, 이제 기능인만 남게 되고 자본가는 별로 쓸모없는 사람으로서 생산 과정에서 사라진다." (<자본 3-1>, '제23장 이자와 기업가 수익', 509~510쪽)
주식회사는 이러한 역사 발전 과정에서 등장하고 정착된 기업 형태다. 마르크스도 언급하고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도 조목조목 따지고 있는 것처럼, 이것은 영락없는 사회적 자산이다. 어느 누가 배타적인 사적 소유를 주장할 수도 없고 단순히 주주들의 사적 소유의 총합이라고 하는 것도 어불성설인 그런 물건이다. 그런데도 현실의 주식회사에서는 여전히 사적 소유의 논리가 지배한다. 그래서 이것은 반드시 모순의 현장이 될 수밖에 없다.
"주식 제도 안에는 사회적 생산 수단이 개인의 소유로 나타나는 낡은 사회 형태에 대한 대립이 이미 존재한다. 그러나 주식 형태로의 전화 그 자체는 아직 자본주의적 한계 내에 묶여 있다. 그래서 그러한 전화는 사회적 부와 사적 부의 성격 간의 대립을 극복하기보다는 그것을 새로운 형태로 바꿀 뿐이다." (<자본 3-1>, '제23장 이자와 기업가 수익', 590쪽)
사실상 이미 극도로 사회화된 자산의 사적인 전유(일상어로는 차라리 '횡령')―이것이 주식회사에서 작동하는 지배의 메커니즘이다. 마르크스는 이미 이것을 예감했고, 더 나아가 신용 제도의 발전과 함께 이러한 지배 메커니즘이 기업 울타리를 넘어 사회 전체로 확대될 것임을 내다보았다. 주인 없는 주식회사 안에서 주주들이 주인 노릇 하는 것처럼, 금융 과두 세력이 사회 전체의 저축을 농단하리라는 것이었다.
"주식 제도―이것은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적 사적 산업의 지양이며, 또 그것이 확대되어 새로운 생산 영역을 장악할 정도가 되면 사적 산업을 아예 절멸해버린다―이외에도 신용은 개별 자본가[혹은 한 사람의 자본가로 간주될 수 있는 사람]에게 일정 범위 내에서 타인 자본과 타인 소유 그리고 그럼으로써 타인 노동에 대해서까지 하나의 절대적인 처분권을 제공한다. 자기자본이 아닌 사회적 자본에 대한 처분권은 그에게 사회적 노동에 대한 처분권을 부여해준다.
(…) 이제 수탈은 직접적 생산자로부터 중소 자본가들에게까지 널리 확대된다. 이러한 수탈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출발점이다. 그러한 수탈의 관철은 곧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목표이며 궁극적으로는 생산 수단을 모든 개인들로부터 수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 3-1>, '제23장 이자와 기업가 수익', 588~590쪽)
마르크스 사후 주식회사 형태는 계속 발전했고, 신용 제도도 더욱 발전했다. 사회화된 자산의 사적 전유를 통한 지배의 작동도 가일층 확대되고 치밀해졌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어쩌면 그 극단적 발전태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막상 마르크스의 후계자들은 이 논의와 분석을 그다지 심화시키지 못했다. 혁명을 주장하는 진영이든 개혁 노선을 취한 진영이든 마찬가지였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가 남겨놓은 정도의 주식회사 비판이라면 선동의 재료로서 이미 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에게 그 다음 과제는 결코, 각 나라에서 주식회사가 작동하는 구체적인 방식을 분석하거나 그에 따른 대안을 발전시키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단지, 존재가 입증된 자본가 '계급' 전체와, 아니 사실은 그들의 대변자로 지목된 국가와 맞서 싸우는 일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선호한 '국유화' 방식의 사회주의 이행 노선도 이런 무관심에 크게 일조했다.
한편, 개혁주의자들은 또 다른 방향에서 고민을 지워버렸다. 이들은 기업 단위에서부터 자본-노동 관계를 뒤집는다는 과제를 먼 미래의 이상 정도로 계속 뒤로 미루거나 아니면 현실 정치 의제에서 아예 배제했다. 물론 루돌프 마이드네르와 스웨덴 노동 운동이 1970년대에 시도한 임노동자 기금 같은 예외가 있기는 했다(<복지 자본주의냐, 민주적 사회주의냐 : 임노동자 기금 논쟁과 스웨덴 사회 민주주의>(신정완 지음, 사회평론 펴냄)). 하지만 이런 사례들은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이었다. '제3의 길' 노선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많은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주식회사는 복지 국가와 공존해야 할, 대안 없는 선택지였다.
이렇게 다소 길게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 이야기를 한 이유는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성취를 제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두 가지다. 하나는 주식회사를 둘러싼 여러 제도들의 봉합점 역할을 하는 법인격 개념의 철저한 해체이고, 다른 하나는 소유가 아니라 관계(서로주체성)에 바탕을 둔 노동자 경영권의 근거를 철학적으로 정초한 것이다.
이 중 첫 번째 성과는, 기존 이론들과의 관계 속에서 본다면, 마르크스가 단편적으로 언급하는 데 그친 현대 자본주의의 지배 메커니즘 비판을 좀 더 완성된 형태로 전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법인 조직을 둘러싼 제도들의 비판을 통해 사회적 자산이 사적으로 전유되는 구체적 양상을 포착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법인 제도(주식회사를 비롯한)를 통한' '사회적 자산의 사적 전유' 메커니즘의 규명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시대의 성격을 더없이 선명하게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사회의 살아 있는 주체들이 실질적인 결정권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주인 아닌 자들이 사회의 모든 처분권을 행사하는 시대, 어떤 임계점에 달한 인류사적 과도기다.
노동자 경영권 없는 재벌 개혁은 신자유주의 강화!
'법인 제도를 통한' '사회적 자산의 사적 전유'에 대한 이러한 비판과 분석은 지금 당장 한국 사회의 현안을 살피는 데도 유용한 나침반이 되어준다. 그것은 이번 총선에서도 쟁점 중 하나로 부상한 재벌 문제다.
총선 시작하기 전, 새누리당까지 포함해서 모든 정당이 재벌을 개혁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진보 정당만의 주장처럼 되어 있던 '경제 민주화'가 모두의 구호가 되었다. 물론 막상 총선 공약으로 나온 것을 보면,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가령 새누리당 공약은 공약으로 낼 것도 없이 지금 당장 정부, 여당이 해야 할 일들을 생색내듯이 나열한 것일 뿐이다.
민주통합당은 이런 새누리당을 비판하면서 "출자 총액 제한 제도 재도입, 순환 출자 금지, 금융-산업 분리 강화 등"을 공약한다. 이러한 공약은 민주통합당이 바라보는 재벌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지금 재벌의 문제는 총수 일가가 자신들이 실제 소유한 주식 지분보다 훨씬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해결책은 모든 주주가 자신이 소유한 지분만큼만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는 것이다. 즉, '1주 1표'의 주주 자본주의 질서를 철저히 확립하는 것이다.
지난 2월에 통합진보당 대표 이정희가 발표한 '맞춤형 재벌 개혁 로드맵'도 민주통합당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각 재벌 그룹에 대해 맞춤형 처방을 내놓는다고는 하지만, 일관된 것은 민주통합당과 마찬가지로 "출자 총액 제한 제도 부활, 순환 출자 금지 등"을 통해 재벌의 경제 집중력을 억제하겠다는 것이다. 이정희의 방안이 실현된다면, 10대 재벌 그룹은 해체되고 총수 일가는 다른 대주주와 마찬가지의 지위가 된다.
민주통합당 공약이나 이정희 대표 로드맵은 새누리당 공약에 비해서는 '재벌 개혁'이라 할 만한 측면이 있다. 재벌 권력에 손을 대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재벌 개혁'이 곧 '경제 민주화'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의 방식대로 하면, 재벌 권력은 약화되는 대신 전체 대주주 집단의 권력은 더욱 강화된다. 즉, 주주 자본주의가 강화된다.
우리가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경제 현실의 미시적 기초가 되는 기업 단위 질서가 주주 자본주의다. 주주 자본주의의 강화란 다름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강화다. 그렇다면, 위의 '재벌 개혁' 안들은 경제 민주화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강화의 통로라는 이야기가 된다. 최근 '재벌 개혁' 논의에 대한 장하준의 다음과 같은 비판은 이러한 맹점을 잘 짚고 있다.
"재벌, 특히 삼성은 참 나쁘다. 자식들에게 편법 상속을 했고, 우리 사회 엘리트들을 매수했다. 여기에 대해선 법에 따라 단호하게 처벌을 해야 한다. 하지만 삼성그룹을 해체하자는 주장은 동의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삼성 계열사의 주인이 누가 되나. 국가가 주인이 된다면, 그건 차라리 낫다. 하지만 실제론 해외 투기자본이 주인이 될 게다."
대개의 '재벌 개혁'론이 한국의 재벌 문제를 주주 자본주의의 모순과 별개로 바라본다. 그래서 일단 재벌을 해체하여 '정상적인' 주주 자본주의 질서를 수립해야 하고 주주 자본주의의 문제는 그 다음부터 고민하면 된다는 식의 태도를 보인다. 여기에는 자본주의적 근대화 이후 사회과학의 표준적 틀이 되어온 '보편'-'특수' 구도도 작동한다. '보편적인' 자본주의와 '특수한' 한국 재벌 문제 식의 구도 말이다.
그러나 재벌 문제는 그런 '특수한' 질병이 아니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이 문제가 오히려 보편적인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이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한 형태라고 분석한다. 그 보편적인 모순이란 곧 '법인 제도를 통한' '사회적 자산의 사적 전유'다.
주식회사는 주인 없는 사회적 자산이다. 그런데도 자본주의 법체계는 이 사회적 자산의 경영권을 주주라는 특정 집단에게 맡긴다. 하지만 주주는 사실 일종의 채권자에 불과하다. 이들에게는 경영의 의지도, 능력도 없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는 대주주들의 묵인과 담합 아래 소수 과두 세력이 기업을 지배한다. 한국에서는 이 과두 세력이 총수 일가로 나타날 뿐이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이렇게 재벌 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그래서 대안도 민주통합당 류와는 전혀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 경영권이 당면 중심 과제가 된다. 노동자가 이사를 선출하자, 그래서 총수 일가의 전횡도 아니고 주주들의 '1주 1표'도 아닌 노동자의 '1인 1표'로 운영하는 기업을 만들자는 것이다.
물론 몇몇 '진보적' 재벌 개혁안은 노사 공동 결정 제도를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출자 총액 제한 제도 재도입, 순환 출자 금지 이후의 다음 단계 과제로 미뤄두거나 혹은 이러한 조치들에 따르는 보완책 정도로만 제시한다. 이에 반해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결론은 이렇게 주장한다. 노동자 경영권이야말로 재벌 개혁의 몸통이고 가장 먼저 추진되어야 할 과제라고. 순환 출자 금지 등은 오히려 이것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이를 보완할 부분적 수단일 뿐이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이후'의 과제들
나는 "주식회사의 경영은 노동자가 한다!"는 것이 우리 시대 노동 운동과 사회 변화의 중심 구호가 되어야 한다는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결론에 깊이 공감한다. 그래서 감히 이 책을 이 시대 모든 깨어 있는 노동자와 민주 시민의 필독서로 추천한다. 이 책의 독자가 변호사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어본 이들의 숫자만큼만 되어도 한국 사회의 균열이 지진으로, 화산으로 폭발하는 것을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다만, "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이라는 이 책의 결론에 동의하더라도 그 결론에 수반되는 수많은 의문점들, 더 해명되어야 할 숱한 쟁점들은 남는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기업 내의 민주화를 강조하다 보니 이러한 또 다른 고민거리들은 굳이 부각시키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한 가지 사례만 들자면, 이런 것이다. 노동자가 이사를 선출하기 시작한 주식회사가 이제 그 다음에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느냐는 문제. 당연히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이사를 일상적으로 감시하고 주요 경영 사안을 숙의하기 위해 노동자 평의회 같은 현장 대의 기구를 만들고 운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는 필수 과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러한 끊임없는 감시와 요구가 향할 방향, 그것이다.
만약 노동자 경영 기업이 지금과 마찬가지 정도의 경쟁 압력 속에서 생존해야 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주식회사를 우리 시대의 아테네로 만들었더니, 그 아테네가 끝없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격랑 한 가운데에 놓여 있다면? 이렇게 되면 노동자 스스로 노동 시간을 연장하고 사회적, 환경적 비용을 늘리더라도 당장의 수익 기준을 충족시키는 데 골몰하게 되지는 않을까? 억압과 착취를 이제는 자본가의 명령이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의 투표로 결정할 뿐인 상태가 출현하지는 않을까?
노동자 경영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 경영 기업이 활동하는 경제 생태계 전반의 변화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노동자 경영 기업이 작은 공화국들로 지속, 발전하기 위해서도 영구 평화에 가까운 경제 생태계가 만들어져야한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이런 문제까지는 짚지 않는다. 하지만 '경제 민주화'라는 21세기의 숙제를 완수하려면 이런 물음을 생략하거나 우회할 수는 없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좀 더 총체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확고한 출발점이 필요하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분명 그런 시작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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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2 22:16 2012/08/12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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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서비스 전자바우처 관련 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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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서비스 전자바우처 프로그램 전개과정과 활성화 과제 
저자 : 이재원(부경대 행정학과 교수)
발간년도 : 2012. 5,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이 보고서는 정부정책에서 사회서비스 개념을 본격적으로 도입하였던 2006년 말부터 최근까지 보건복지부에서 추진하였던 사회서비스정책(특히 사회서비스 전자바우처 프로그램)의 내용과 전개과정, 그리고 각종 쟁점들을 분석하고, 국민들의 생활보장을 위한 제3단계 복지정책으로서 사회서비스정책이 담아야 할 과제들을 제안하고 있다.
1990년대 말 IMF 금융위기 후 저출산, 고령화, 근로빈곤, 청년실업, 양극화, 가족해체 등과 같은 새로운 사회 병리 현상이 급속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신사회위기의 확산에 따라 전통적인 사회적 보호 대상이었던 저소득 취약계층뿐 아니라 일반 서민들을 비롯한 모든 사회 계층이 잠재적으로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회적 위기 인식이 높아지게 되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효과적인 대안으로 이용 욕구가 있는 잠재적 수요자들에게 서비스 이용의 자격을 확대하는 ‘보편적 사회서비스’가 주목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일반 서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 사회서비스 정책을 추진하면서 기존의 NGO 기반의 공급자 중심 방식과 달리 시장과 이용자 중심의 새로운 전달체계를 모색하게 되었고, 그 결과 2007년부터 전자바우처 제도가 도입되었다.
비영리복지기관들을 중심으로 저소득 취약계층에 국한되는 잔여적 사회복지서비스 공급체계에서 이용 대상자의 소득 수준을 대폭 높이고 바우처를 통해 공급기관을 선택하도록 하였던 사회서비스 전자바우처 제도는 처음에 기대 이상의 성과를 창출하였지만, 정책 자체가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면서 사회서비스정책의 내용과 타당성 등에서 많은 문제점들이 나타났다. 사회기반 투자에 대한 정책이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 가운데 사회서비스 전자바우처 사업은 사회복지정책의 독특한 형태로 인식되면서 시작 당시의 사업 논리들을 일관성 있게 전개시키지 못하였고, 매년 정책의 기조가 변화하면서 일종의 정책 유행 혹은 상징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자바우처 사업의 정책관리 기조가 소극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었는데 2011년 말 사회보장기본법이 전부 개정되면서 사회서비스 전자바우처 사업에 대해 지금보다 넓은 범위로 적극적인 역할이 요구되고 있어 전자바우처 사업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 보고서는 이러한 정책수요에 따라 우선 사회기반투자 강화와 관련된 이론적 배경을 정리한 후, 사회서비스 개념을 본격적으로 도입하였던 2006년 말부터 정부가 추진하였던 사회서비스정책 및 전자바우처 사업의 내용과 전개과정, 그리고 각종 쟁점들을 분석하고, 국민들의 생활보장을 위해 사회서비스정책이 담아야 할 과제들을 제안하고 있다. 보고서의 구성을 보면, 2장에서는 신사회위기, 보편적 사회서비스 공급과 새로운 정책 접근, 사회서비스에 대한 새로운 정책거버넌스 등 보편적 사회서비스 정책의 주요 이슈에 대한 이론적 고찰을 하고 있다. 3장에서는 사회서비스 전자바우처 사업의 전개과정과 쟁점에 대해 분석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4장에서는 사회서비스 전자바우처 사업의 활성화를 위해 필요한 과제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재원._2011-wp-15._사회서비스_전자바우처_프로그램_전개과정과_활성화_과제.pdf (2.42 MB) 다운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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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 1. 6
지은구 교수의 글을 보니 내가 애용하는 만연체 문장이 사람들에게 참 어렵게 다가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좀더 쉽고 짧게 쓰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나저나 지은구 교수는 아래 칼럼에서 전자바우처의 문제점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칼럼] 사회복지서비스 그리고 전자바우처 (2012.01.05, 지은구 | 계명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복지동향 2011년 12월, 통권 제 158호)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사회복시서비스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는 전자바우처(이용권)는 국가가 재정을 지원하는 방식중 이용자에게 직접 재정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이용자들이 기관들이 제공하는 특정 재화와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다는 장점과 이로 인해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들은 더 많은 이용자를 확보하기 위하여 경쟁하는 선택과 경쟁이라는 시장의 가치를 중심으로 한다. 즉, 바우처는 국가가 이용자들에게 직접 특정 사회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도록 재정지원하고 서비스전달(공급)은 민간시장에 맡기는 원리를 따른다.
바우처를 지불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바우처의 성격상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첫째, 이용자가 스스로 자신에게 적합한 서비스가 무엇이고 그 서비스가 자신에게 어떠한 효과를 가져다 줄 것인지 등에 관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고 둘째, 선택할 서비스가 시장에 많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위의 기본전제가 충족되는 전 분야에서 바우처가 활용되는 것은 아닌데 이는 바우처가 시장을 통해서 교환됨으로 제공기관들이 이용자들을 선별하는 이용자선별과 정보비대칭, 이용자추가부담 등 영리기관들이 포함되는 시장에서 이용자들이 차별을 받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바우처 사용에 따른 문제점들을 극복하고 바우처를 이용 편리한 지불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정책에 반드시 고려되어 있어야 한다.
첫째, 이용자가 스스로 자기결정능력과 본인부담능력을 고려하고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서비스가 무엇인지를 선택할 수 있는 인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둘째, 이용자가 선택할 수 있는 많은 경쟁할 수 있는 기관이나 서비스가 있는가? 셋째, 이윤만을 목적으로 하는 기관이 사회복지서비스시장에 진입하는 경우 이를 막는 시장진입장벽의 존재여부와, 제공기관이 경제적 부담능력만을 가지고 이용자들을 선별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제 장치가 존재하는가? 넷째, 영리기관들의 이윤추구에 의해서 나타날 수 있는 인력감축이나 사회복지서비스의 품질저하를 막기 위한 관리통제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는가? 다섯째, 서비스제공기관이나 서비스에 대한 적절한 정보가 이용자들에 제대로 전달되는가를 관리하는 전담기구가 있는가? 여섯째, 제공기관들이 이용자들에게 제공하는 기본서비스 이외에 추가적인 비용을 지불하여야 하는 추가서비스 판매를 금지하는 적절한 규제 장치가 있는가?
현재 바우처를 지불수단으로 사용하는 국가는 위와 같은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있는 적절한 규제 장치를 설치 운영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판단아래 전체 복지국가들 중에 일부에 불과하며 미국과 영국이 대표적이었지만 최근 영국은 바우처의 문제점으로 인해 현금을 직접 이용자에게 지불하는 직접지불제도나 예금계좌를 만들고 구좌에 현금을 지원하는 개인예산제도 등으로 정책적 전환을 시도하고 있고 미국도 저소득층 아동이 사립학교를 진학할 수 있도록 재정 지원하는 교육바우처나 주택임대비 보조바우처 그리고 음식교환바우처(푸드스템프) 등으로 그 영역을 제한하고 있다.
바우처의 가장 큰 장점은 이용자의 선택권확보이지만 이용자의 선택이 특정재화나 서비스로 구매가 제한되고 관리 감독하기가 어려운 바우처보다는 직접 현금을 지원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수 있기 때문에 선진복지국가에서 바우처 이외에 선택권이 보다 강화될 수 있는 다양한 지불방식이 시도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수 있다. 선진 복지국가들이 바우처의 사용을 제한하는 가장 큰 이유는 위에서 제시한 관리 감독의 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서비스이용자들이 사용하면서 느끼게 되는 낙인 때문이다. 현금지불보다 바우처를 이용하는 것이 이용자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고, 일반구매자보다 상대적인 차별이나 무시를 당할 수 있으며 복지수여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어 자기존중감이 낮아지게 되고 그리고 서비스가 일정 품목으로 제한됨으로 다양한 사회복지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이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위에서 지적한 문제점들 이외에 전자바우처라는 특징으로 인하여 상당한 정도의 거래비용을 지불하여야 하는 또 다른 추가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데 대표적인 문제점들은 첫째, 전자카드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카드발급비용, 둘째, 정부가 은행에 지불하여야 하는 관리비용, 셋째, 카드를 만들고 발급받기 위해 들어가는 시간노력비용, 넷째, 전자바우처 이용을 전산화하기 위해 들어가는 전산 및 관리비용과 인건비 등이다. 2012년 정부는 전자바우처 관리비용으로만 약 99억을 사용할 예정이며 전자바우처를 사용하는 지역사회서비스투지사업의 사업비 약 1,300억 중에서 시중은행에 지불하여야 하는 전자카드사용료 16억으로 총 예산 약 1,420억원에서 115억(사회서비스 전체 사업비 중 약 8%)을 사회복지서비스와 관련없는 전자바우처 관리 및 거래비용으로 지불할 예정인데 이 비용은 1년간 월 18만원씩 보조하는 서비스를 5,324명에게 추가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예산이다. 여기에 이용자들이 전자바우처카드 신청 및 발급(또는 재발급) 등을 위해 지불하여야 하는 시간노력비용까지 계산한다면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동안 소외되었던 많은 소외계층의 국민들에게 사회복지서비스제공은 가뭄에 단비같이 기쁨일 수 있지만 사회복지서비스사업에 대한 국민의 만족이나 효과는 단지 하나의 지불수단인 전자바우처 때문이 아니며 그동안 제공되지 않았던 국민들을 위한 사회복지서비스사업이 제공되었다는 그 자체 때문이라는 점을 정부는 반드시 인지하여야 한다. 사회복지서비스는 확대되어야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지불수단으로 통용되는 전자바우처는 이용자의 특성을 고려하며, 사회서비스의 특성을 고려하고, 지역특성이나 시장상황을 고려하며, 공급체계에 대한 관리나 통제시스템 등을 고려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점검하여야 하며 특히, 국민들에게 혜택이 되는 직접적인 서비스와 관계없는 지속적인 관리감독비용의 증대가 과연 합당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사회복비서비스분야에서 전자바우처를 사용한지 4년이 지나는 시점에서 전자바우처 사용에 따른 장단점을 면밀히 분석하여 제도적 개선을 시행하여야 하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책무라고 할 수 있다.

 


 

"사회복지서비스는 국민의 권리" (참세상, 홍권호 기자 2011.02.23 09:39)
'사회복지서비스 신청권 현황과 과제' 토론회 열려
복지는 국민의 권리다. 따라서 복지서비스가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이를 신청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회복지사업법의 사회복지서비스 신청권에는 이미 이러한 원칙을 천명하고 관련 절차를 자세히 마련해 놓았다. 이 신청권을 활발하게 작동시켜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22일 늦은 3시 이룸센터 이룸홀에서 열린 ‘사회복지서비스 신청권 현황과 과제’ 토론회에서 첫 발제자로 나선 탈시설정책위원회 임성택 위원(변호사)은 중증장애인 3명이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자립해 살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며 진행한 행정소송의 경과와 판결의 의미를 설명하며 이같이 강조했다.
지난 2009년 12월 16일 장애인생활시설인 석암베데스타요양원(현재 향유의 집)에 거주하는 황인현 씨(뇌병변장애 1급)와 음성 꽃동네에 사는 윤국진(뇌병변장애 1급), 박현(뇌병변장애 1급) 씨는 각각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주거편의 등의 복지서비스를 제공해달라’, ‘대도시에서 자립생활을 하게 해달라’라며 관할관청인 양천구청과 음성군청에 사회복지서비스 변경신청을 했다.
하지만 사회복지서비스 신청제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관할관청은 민원으로 처리해 회신하는 등 이들의 변경신청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황 씨는 양천구청장을 상대로 서울행정법원에, 윤 씨와 박 씨는 음성군수를 상대로 청주지방법원에 관할구청의 거부처분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의 소송은 ‘탈시설 자립생활’을 청구한 사건이자, 사회복지사업법에서 사회복지서비스 신청제도를 도입한 이래 처음으로 제기한 소송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사회복지사업법 41조의2 등에 따라 관할구청이 시설입소에 우선해 지역사회에서 가정을 이루고 살 수 있도록 지원할 의무가 있으며, 이를 거부한 관할구청의 처분은 헌법, 사회복지사업법, 장애인복지법, 장애인차별금지법, 장애인권리협약을 위반한 것으로 위법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법원의 판결은 엇갈렸다. 지난 2010년 9월 30일 청주지방법원은 음성군수의 거부처분이 절차법상, 실체법상 하자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특히 대도시의 자립생활에 관한 서비스를 조사하고 연계해줄 의무가 없다고 판단해 원고 패소판결을 내렸다. 반면 지난 1월 28일 서울행정법원은 양천구청장의 거부처분은 적법한 복지요구조사를 하지 않은 절차적 하자가 있으며, 나아가 재량권 남용에 해당하는 위법성이 있다고 판단해 원고 승소판결을 내렸다.
임 위원은 “청주지방법원 판결은 사회복지가 국가의 의무일지라도 예산, 인력 등의 제한으로 국가에 재량이 있다고 판단해 사법적 개입을 자제하는 일반적인 관행을 따른 것”이라면서 “반면 서울행정법원 판결은 사회복지에 대해 국가가 재량을 가진다고 해도 절차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충실한 심사를 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임 위원은 “청주지방법원은 음성군청이 다른 지방자치단체가 관할하는 구역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를 연계해 제공할 의무가 없다고 보았다”라면서 “반면 서울행정법원은 사회복지서비스 신청제도를 기본적으로 원스톱 복지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하고, 특히 장애인들의 경우 사회적 약자이고 활동능력이 제한되므로 양천구청이 원스톱 복지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창구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라고 설명했다.
임 위원은 “현행 사회복지서비스 신청제도는 당사자 중심의, 원스톱 복지서비스 제공을 위한 훌륭한 전달체계”라고 강조하고 “하지만 아쉽게도 현실에서 사회복지서비스 신청제도는 거의 활용되지 못하고 있으며, 현장에서 보면 사회복지는 여전히 권리의 영역이 아닌 국가의 조치 영역에 머물러 있다”라고 지적했다.
임 위원은 “사회복지서비스가 권리로서 인정되고, 권리의 영역에서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사회복지사업법이 마련한 사회복지서비스 신청권이 활발하게 작동해야 한다”라면서 “이를 위해서 사회복지서비스 신청제도와 절차에 대한 정보제공이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회복지서비스는 시혜와 동정이 아닌 권리라는 인식을 확산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밖에도 임 위원은 △행정청이 복지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확인해 직권으로 복지서비스제공신청을 하는 ‘직권신청규정’의 작동을 위한 노력 △사회복지서비스 실시절차의 실질적 구현을 위한 활발한 활용 및 행정소송 등 권리구제절차의 적극적 진행 △사회복지서비스 신청제도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규정의 명확화 등도 앞으로의 과제로 지적했다.
한편 현재 윤국현 씨와 박현 씨는 원고 패소판결 이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주거복지사업으로 시설에서 나와 서울에서 자립생활을 하고 있고, 황 씨는 양천구청이 항소하지 않아 이들의 소송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황 씨는 앞으로 양천구청이 어떤 처분을 내리는가에 따라 다시 소송에 돌입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기사제휴=비마이너)

 


 

박광동. 2011. 바우처제도의 표준입법모델 및 합리적 정비방안 연구: 사회서비스 바우처제도를 중심으로. [연구보고] 2011-02. 한국법제연구원.
A Study on a Standard Legislative Model for a Voucher System and Plans for Rational Reform -Focused on a Social Service Voucher System-
 원문: http://cafe.daum.net/jinbopa/5Byq/44 
Ⅰ. 배경 및 목적
□ 연구의 배경
° 최근 우리나라 여러 재정사업에 선진국에서 다양하게 활용되어 온 정책집행수단의 하나인 바우처(Vouchers)제도가 도입되거나 확장되는 추세에 있음
° 현재 「사회복지사업법」과 동 시행령을 근거로 사회보장·사회복지·교육행정 등 급부행정의 영역에서 사회서비스 바우처(Voucher)제도가 광범위하게 도입되어 시행되고 있음
° 바우처제도는 일정한 공공서비스를 공급함에 있어서 공공성 확보보다는 시장경쟁원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법제도적 측면에서 고려되어야 할 점이 많음.
□ 연구의 목적
° 사회서비스 관련 바우처제도와 관련한 주요국가의 입법례와 우리나라의 다양한 입법안의 내용 및 각 사회서비스 관련 바우처 제도의 운영현황을 파악하고자 함
° 「사회서비스 이용 및 이용권 관리에 관한 법률」 및 하위 법령안의 내용을 검토하여 표준적인 입법모델 및 합리적 정비방안의 도출을 목적으로 함.
 
Ⅱ. 주요 내용
□ 바우처제도 개관
° 특 성
- 바우처는 형태의 다양성, 공적-사적 계약 관계의 혼합성, 수급자의 선택권, 사용용도의 제한성, 양도의 제한성 등의 특성이 있음
° 법적 성격
- 바우처신청권은 종전까지의 국가의 시혜적 조치제도라는 인식에서 국민권리의 영역이라는 측면으로 전환되고 있음
° 효 과
- 직접적인 효과는 수급자가 사회서비스 바우처 종류의 선택에 의해 본인에게 적합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임
□ 주요 외국의 바우처제도
° 정책분야
- 교육ㆍ훈련, 보육, 가사, 고령자간병, 주택 등이 중심
- 약자에의 배려나 신규참여의 촉진이라고 하는 관점의 정책입안 및 설계 여하에 따라서는 선택의 자유를 억제하고, 재정지출을 확대시킨 사례가 있음
° 입법례
- 대부분의 국가는 바우처 제도만을 위한 개별 법률보다는 개별 법률에서 관련 조항을 두고 하위 법령으로 위임하고 있음
□ 우리나라의 현황과 법체계
° 현 황
- 사회서비스 이용권과 관련된 법률관계 관련 당사자는 크게 정부(보건복지부, 문화체육관광부 등), 지자체, 제공기관, 대상자로 구분할 수 있음
° 법체계
- 2012년 2월 5일 전까지는 사회서비스 바우처의 기본적인 근거법은 「사회복지사업법」이고, 그 이후에는 「사회서비스 이용 및 이용권 관리에 관한 법률」에 의해 운영될 것임
□ 기본법 제정 검토
° 내 용
- 바우처 관련 기본법은 제도·정책에 관한 이념·원칙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함.
- 기본법 제1장 총칙장에 목적, 정의, 기본이념, 사회서비스 제공 주체들의 기본책무, 필요한 조치 등을 규정
- 기본법 제2장에는 사회서비스 정책의 기본시책 장에서는 공공서비스를 위탁한 경우의 역할분담과 책임의 명확화, 국민의 의사 반영 등, 공공서비스의 실시에 관한 배려, 공공서비스 종사자의 노동환경 정비 등에 대한 규정
□ 현행 법령의 개선방안
° 법령제명의 명확성 및 간결성
- 「사회서비스 이용 및 이용권관리에 관한 법률」이 국민적 이해성 제고 및 법체계상 사회서비스이용권 안에 사회서비스 이용에 관한 사항을 포섭할 수 있는 간결한 법령 제명이 필요
° 사회서비스 범위와 제공계획 수립·시행 주체
- 사회서비스 범위에 대해 시행령안에서 사회복지서비스, 보건의료서비스 외에 이 법의 적용대상이 될 사회서비스의 종류를 추가 규정할 필요가 있음
- 사회서비스 제공계획 수립·시행 주체를 보건복지부로 한정하는 규정보다는 ‘정부’로 규정하는 방안이 필요
° 중복규정
- 「사회서비스 이용 및 이용권 관리에 관한 법률」 제16조제4항(제공자 등록정보 고지)과 제29조(제공자에 관한 정보공개)는 중복규정이 되므로 이에 대한 수정이 필요
° 다른 법령과의 관계에 관한 규정
- 「사회서비스 이용 및 이용권 관리에 관한 법률」 제3조는 적용범위보다는 다른 법령과의 관계에 대한 규정임
° 사회서비스 제공계획
- 서비스 이용자의 권익을 보호하고, 안정적이고 품질 좋은 서비스가 제공되도록 하는 모든 방안이 포괄될 수 있도록 가급적 법률에서 구체적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음
° 출입 및 검사 절차의 명확성
- 법적 안정성 및 국민 권리의 보호의 강화를 위해서 이에 대해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음
° 사회서비스이용권 발급절차 등
- 사회서비스이용권의 발급 신청 등에 필요한 사항, 이의신청 등에 필요한 사항, 등록에 관한 사항, 사회서비스 제공자가 공개하여야 할 사항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필요함
 
Ⅲ. 기대효과
□ 사회서비스 바우처 관련 법제의 기반자료
° 내 용
- 사회서비스 바우처제도와 관련한 주요국가의 입법례와 우리나라의 입법안의 내용 및 각 사회서비스 관련 바우처제도의 운영현황에 대한 검토자료 제공
□ 사회서비스 이용 및 이용권 관리에 관한 법률 개선방안
° 내 용
- 「사회서비스 이용 및 이용권 관리에 관한 법률」 및 하위 법령안에 대한 법체계 및 내용 검토를 통한 입법안 및 개선방안 제시

  


 

[심층분석 2] 사회서비스 바우처 사업의 현황과 성과 (월간 복지동향 115호(2008년 5월호), 2008/05/20 13:44, 김윤수 사회서비스관리센터 연구조사팀장)
Ⅰ. 들어가며
사회서비스는 대인적 성격을 지니므로 대상별, 내용별, 기능별, 성격별로 다양한 서비스제공과 관리가 요구되기 때문에 민간과 공공부문이 적정선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즉 사회서비스 제공대상이 여성, 아동․청소년, 장애인, 노인인가에 따라 정책방향이 달라지며, 서비스 내용이 교육, 돌봄, 상담, 건강 등 사업 성격에 따라 정책관리의 주무부처가 달라진다. 또한 사회서비스 이용객체가 대인적이고 개별적인가 혹은 집합적이고 단체적인가에 따라 전달시스템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회서비스는 지역사회에서 유용하고 공급가능한 서비스들을 스스로 발굴하고 개발하여 이용자의 선택을 반영할 수 있는 바우처제도에 대한 도입여부를 고려할 수 있다.
 
Ⅱ. 사회서비스와 전자바우처의 방향
1. 점차 확대되는 사회서비스
전통적인 복지서비스들은 국가 표준적인 관점에서 수직적인 행정관리계통 중심의 공급자 방식으로 전달된다. 반면, 사회양극화, 저출산 고령화 등 새로운 사회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사회투자정책의 혁신적인 전달체계 구축을 위해 기존방식과 구분된 수요자 및 시장 중심 관점을 적용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기존 기초복지서비스에서는 지자체의 역할이 빈곤층에 대한 서비스 적격자 관리 등에 국한되는 규제위주 정책이었다. 지자체에서는 상대적으로 인구비중이 낮은 저소득층에 대한 복지재정 부담을 선호하지 않고 대신 일반 주민들이 보편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지역개발사업에 대해 우선적으로 재원을 배분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따라 경제개발과 사회개발 부문간 재원배분의 불균등 문제가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 서비스는 일반서민들이 공통적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지역주민들의 수요에 바탕을 두고 지방예산과정에서 재원배분의 우선순위 구조를 전환할 수 있는 분배정책의 유인들이 있다. 또한 주민들의 일상생활을 지원하는 사회서비스는 지역별로 다양하기 때문에 사업의 계획과 정책의 성과관리에서 지자체의 주도적 역할이 부각될 수 있다.
2. 운용수단으로서의 바우처(Voucher)
1) 바우처의 특징과 방식
바우처는 정부지정의 특정 재화나 서비스를 구입할 수 있는 이용권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이용자에게 서비스 또는 재화의 선택권을 보장하기 때문에 다양한 제공기관의 사회서비스가 존재하여야 한다.
기초사회복지사업은 공급기관에서 사회서비스를 일괄적으로 제공하는 공급기관 지원방식을 채택하였으나 2007년 이후 전자바우처 사업에서는 수요자 지원방식을 도입하였다. 서비스 비용적인 측면에서 공급기관 지원방식은 전액 국가가 지원하는 반면에 수요자 지원방식은 일부 본인 부담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바우처시스템의 운영은 기존 복지서비스 지원방식인 공급기관 지원방식보다 수요자지원방식에 적합한 운영시스템이다. 기존 공급기관 지원방식이 저소득층을 수급 대상으로 하여, 서비스의 획일적인 공급에 초점을 맞춘 일방적인 서비스 지원방식이었다면, 수요자 지원방식은 서비스 대상범위를 서민 및 중산층까지 확대하는 한편 비용의 일정부분에 대한 부담을 수급자에게 지움으로써 소비자인 수급자가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여 공급자간 경쟁을 유도할 수 있는 방식이다. 이런 소비자주권주의(Consumerism)을 통해 이용자는 기존의 획일적인 서비스가 아닌 공급자들의 다양한 서비스 제공을 요구할 수 있다. 바우처사업이 유용한 부문은 주체는 민간부분이 담당하고 수단적인 요소에서 시장의 방식과 행정행위 방식의 두면이 공존하는 영역이다. 즉 바우처 사업의 영역에도 다수의 공급기관이 존재하여 경쟁이 가능한 부문과 인프라가 부족하여 민간위탁의 형태로 직접적인 지원을 하는 방식이 효과적인 부문이 있다.
2) 사회서비스 가격과 품질
특정 사회서비스의 합리적인 가격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소가 고려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정부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유사한 사회복지서비스와 일반시장상품의 중간 수준에서 사회서비스 전자바우처 상품 가격이 설계되어야 한다. 또한 민간복지기관이 보호시장에서 경쟁하는 노인돌보미바우처 사업의 경우에는 가격 설계에서 돌보미의 임금 수준도 주요한 변수로 고려해야 한다. 특히 전자바우처 서비스 가격의 경우,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균형가격이 아닌 정부가 인위적으로 설계하는 가격이기 때문에 초과수요와 초과공급의 문제가 쟁점으로 항상 제기될 수 있다. 또한 정부의 가격 보조를 통해 인위적인 시장 공급자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지역의 노동시장과의 균형 조정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
상품 가격이 높아지면 사회기반확충 효과나 소비자의 만족, 그리고 사회서비스 시장 일자리 창출 효과는 크지만 지역 노동시장의 균형이 깨져 자원배분의 왜곡이 발생할 수 있다. 반대로 상품가격이 낮아지면 노동시장 균형에 대한 부정적 효과는 적지만 사회투자로서의 기능이 취약해질 수 있다. 결국 자원배분의 효율성 관점에서 새로운 시장과 가격균형과정이 합리적인지 여부에 대한 지속적인 모니터링이 필요하다. 아동인지사업의 경우 서비스공급기관의 진입·탈퇴 여부를 통하여 바우처의 가격을 조정하기도 하였다.
3. 전자바우처의 효과
과거 사회복지 전달체계로서의 바우처가 사용된 실례가 선진국 등에서 있었지만, 바우처의 관리부족과 오남용으로 인한 부정적인 시각이 대다수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과거의 바우처방식을 개선하여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으로서 전자바우처제도를 도입하게 되었다. 전자바우처는 종이바우처에 비해서 실시간관리가 가능하고 오용가능성이 비교적 적다는 점에서 그 편리성과 유용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또한 모든 관리가 전자화되어 있기 때문에 보조금으로 지급되는 자금의 흐름이 투명하다는 장점을 갖고 있어, 정부 보조금 운용의 투명성을 제고할 수 있다. 아울러 전자바우처의 도입으로 나타날 수 있는 변화는 서비스전달의 투명화, 결제의 신속화, 통합정보시스템 네트웍화를 들 수 있다. 특히 통합정보시스템의 네트웍화는 일반이용자에게 나타나는 정보의 비대칭에 관한 문제를 완화하는데 일정부분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1) 서비스 전달의 투명화
전산시스템의 도입으로 어떤 서비스가 누구에게 적실하게 전달되었는지에 대한 서비스 전달과정의 투명성이 확보될 수 있다. 특히 바우처제도에서는 사후관리체계가 적실하게 운영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서비스이용자에게 현금으로 지급할 경우, 정부가 의도한 필수 서비스를 구매하기 보다는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려는 유혹을 받기 쉽다. 그래서 국가는 바우처로 지원되는 사업이 본래 설계한 대로 관련 서비스의 구매에 이용하는지의 여부를 정밀하게 추적해야 하는 모니터링 업무 부담을 가지게 된다. 전자바우처 제도는 민간금융기관의 신용카드나 체크카드 결제방식을 활용하여 이와 같은 서비스 전달과정을 실시간으로 관리할 수 있다.
2) 결제의 신속화
전자바우처 서비스의 전산운용은 시장의 개별 주체들 별로 프로세스가 이루어진다. 과거 종이바우처로 운영된 서비스의 경우 결제 업무가 장기간 소요되던 것에 반해 전자바우처 운용으로 결제업무가 5일 이내로 단축된 것에 대하여 일선 제공기관들은 이에 대해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3) 통합정보시스템의 네트웍 
바우처통합시스템은 2007년 2월 바우처 포탈, 제공기관운영 및 통합정보시스템의 구축 등 기본적인 시스템이 구축된 이래로, 바우처 이용자와 시군구 운영자들의 편의를 위한 기능을 부가시켰으며, 크게 바우처포탈시스템, 제공기관운영자시스템, 통합정보운영자시스템, 시군구업무지원시스템의 4부분으로 구성된다. 
바우처포탈시스템은 바우처 이용자들을 위한 시스템으로 주요사업안내, 대국민 홍보, 서비스이용자의 계약사항과 서비스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제공기관운영자시스템은 제공기관의 편의를 도모한 도우미 관리 및 서비스를 계약하고 제공하며 관리할 수 있도록 전산화한 것이다. 통합정보운영자시스템은 사회서비스관리센터에서 바우처사업에 대한 전반적인 흐름과 사업의 진행상황을 모니터링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현재 바우처방식으로 진행되는 사업에 대한 관리와 데이터를 통계처리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시군구업무지원시스템은 시군구담당자가 관내 제공기관 및 서비스 이용자에 대한 현황을 파악하고 관리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사회서비스관리센터에서는 통합정보시스템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바우처 이용자 및 서비스 공급기관에 대한 정보를 구축하고 관리한다. 바우처시스템의 흐름을 모니터링 할뿐만 아니라, 이후의 관리에도 대비하고 있어, 바우처시스템의 처음 도입으로 인해 예상되는 기술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 밖에도 사회서비스 및 전자바우처에 대한 대국민 홍보 및 안내 등 지원업무를 실시간 담당함으로써 이용자들의 정보비대칭에 대한 문제를 줄이는데 기여하고 있다.
 
Ⅲ. 전자바우처 제도안의 참여자들
전자바우처제도와 관련된 이해관계자들은 이용자, 공급자, 지자체, 보건복지부, 사회서비스관리센터, 금융기관 등으로 구성된다.
1. 전자바우처 이용자의 변화
사회서비스는 취약계층을 넘어 평균소득이하의 일반 서민 모두를 대상으로 한다. 일반 서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 사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관련서비스를 이용하는 잠재 수요자의 규모와 서비스 욕구와 내용의 다양성이 충족되어야 한다.
서비스의 욕구와 내용이 다양화되는 현실상황에 발맞추어 전자바우처는 지원대상자의 관리를 용이하게 하고, 서비스 구매와 정산의 편리성을 높였으며, 바우처 발급부터 이용까지의 전 프로세스에 대한 모니터링을 가능하게 했다. 이런 편의성은 서비스 확충에 안정적인 기반을 제공해주어 다양한 사회서비스의 개발 및 확충을 용이하게 하였다. 그 결과 300여개의 지역맞춤형 사업을 개발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바우처 대상자가 2007년 5월 3000여명에서 11월 현재 32만 3천명으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한편, 진행되는 서비스의 양적 확대도 중요하지만 질적인 측면에서도 제고가 요구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바우처시스템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수요자의 선택폭을 확대하여 수요자로 하여금 소극적인 구매자에서 능동적인 구매자로 변화하게끔 만든다. 그 결과 수요자는 자신이 원하는 서비스를 선택하게 됨으로써 서비스 이용도를 제고할 뿐만 아니라 만족도까지 높아지는 결과를 낳았다. 
2. 사회서비스 공급자
1) 제공기관의 다양화
사회서비스 제공과 이용의 효율성을 증대하기 위하여 서비스 공급기관의 독점보다는 참여의 다양화가 요구된다. 그동안의 복지 서비스는 대부분 정부에서 지정한 비영리 공급자가 일방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이었으나, 바우처제도를 통해 비영리기관 외에도 민간기업이나 대학 등 기타 유형의 기관이 서비스 공급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공급되는 서비스의 내용이 다양해지고, 품질이 제고되어 이용자가 만족할 수 있게 유도되었다. 전자바우처 사업안에는 비영리기관 외에 민간기업·대학 등 다양한 공급기관이 출현하였는데, 지역사회서비스혁신사업이 538개소, 노인돌보미가 472개소, 장애인활동보조가 458개소가 존재한다. 지역사회서비스혁신사업의 공급기관의 유형을 살펴보면 비영리기관이 53%, 민간기업 35%, 교육기관10%, 컨소시엄등 기타가 2%를 차지하였다.
2) 제공인력의 변화
복지부는 바우처 사업 초기에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 바우처 관리 문제, 근무여건의 열악함 등을 지적하였다. 취약계층의 일자리 창출사업으로 포장되었던 바우처 사업은 한시적인 부업으로밖에 기능을 못 하고 있으며, 이 사업에만 참여해서는 생계를 보장받기가 힘들다는 지적이 있었다(자활정보센터, 2007). 그러나 보건복지부 바우처사업을 통해 여러 형태의 사회서비스 일자리사업이 대폭 확대되었다(노동부 포럼, 2008). 이러한 사회서비스 일자리창출사업이 저임금의 단기계약직 일자리만 양산하였다는 견해가 있지만, 여가시간을 활용한 시간제 근무, 놀이치료·음악치료·언어치료 등 정서장애 전문가의 확대 등 일자리의 다양화측면에서는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취약계층에 적합한 일자리가 창출되었는데, 그동안 노동시장에서 약자로 인식되어 왔던 40세 이상의 여성취업이 두드러지게 늘어났다. 돌봄서비스 제공자 1만2천명 중 여성이 88%이며, 41세 이상이 67%에 해당된다. 일자리의 양적 확대에서 독서지도관련 지역사회서비스혁신사업의 W사와 I사는 각각 1600명과 1900명 정도 07년 신규로 고용하였던 사례가 있다. 결국 좋은 일자리는 노력하는 기업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밖에 없는 현실을 고려하여야 한다.
3. 바우처제도 관리자들의 역할
 현재 운영되고 있는 사회서비스 바우처사업은 기존의 정부보조금사업과 다른 전달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일선 시군구 기능 및 운영방식과 차이가 나타난다. 즉 다른 보조금사업들에서 지방자치단체의 일선행정업무에서 보조금 집행내역을 관리하고 중앙행정기관에 보고해야 했지만, 전자바우처사업은 업무지원기구인 사회서비스관리센터가 보조금의 운영업무를 총괄 담당한다. 각 참여자별 행정절차를 살펴보면, 보건복지부는 전자바우처 사업을 설계하고 지자체별로 관련 보조금을 교부한다. 그리고 지자체는 분담금을 사회서비스관리센터와 금융기관이 운영하는 은행계좌에 예탁하고 서비스 신청자의 적격 여부를 판정한다. 이후 행정절차는 사회서비스 관리센터가 담당하여 지불정산 및 모니터링 그리고 지역별·사업별 집행 현황 자료를 제공한다. 해당 지자체에서는 전산자료를 토대로 해당 지역 주민들의 서비스 이용상황을 정기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바우처제도 관리자들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전자바우처를 통해 제도운영의 효율성 및 투명성을 제고할 수 있는 측면이 장점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모든 과정에서 지불 및 정산업무를 전산화함으로써 지방자치단체의 행정부담 및 행정비용을 줄여 효율성을 증가시켰다. 기존  업무는 공문시행과 자료 회수에 걸리던 시간이 2-3주 였지만 전산화로 하루이내에 처리되게 되었으며, 중앙정부는 지원된 보조금의 흐름을 수시로 모니터링 할 수 있어 불법사용감시에 대한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또한 전자바우처는 대상자별로 서비스 이용 실태를 추적할 수 있는 시스템(Client Tracking System)을 갖춤으로써 서비스의 오․남용 및 공공재정의 중복지원가능성을 차단하여 투명성을 제고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Ⅳ. 나오며
 보건복지가족부 사회서비스 바우처 사업의 대상자는 최저수준소득에서 평균이하 소득자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사회서비스에 대한 다양한 컨텐츠와 요구수준이 다를 수 있다. 이 사업은 수요자의 요구와 의사결정이 중요시되므로 지역사회의 잠재적 수요자들의 욕구와 지역 특수성을 반영하여 진행된 사업이었다. 즉 사업별로 대상자가 한정적으로 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제공가능한 사회서비스들을 스스로 발굴하고 상품으로 개발하여 고객의 선택을 중시하였다. 바우처 제도의 취지와 같이 이용자의 다양한 선호에 따라 서비스 내용과 제공형태가 다양하게 나타났다.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의 유형은 과반수가 비영리단체이지만 비영리단체를 비롯한 영리단체, 학교, 컨소시엄 등도 다양하게 분포되었다.
다만 지역별 서비스별 사회서비스에 대한 기초인프라가 부족한 지역 및 분야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를 위하여 지속적으로 새로운 사회서비스를 개발하고 서비스공급을 확대할 수 있는 인프라를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사회서비스 바우처 사업이 낮은 임금수준과 비정규직인 일자리를 유도하였다는 시각도 존재하지만, 여가를 활용할 수 있는 시간제 근무의 활성화 및 서비스업의 다양화를 가져왔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또한 전자바우처 도입으로 인해 제도운영의 효율성과 투명성을 한차원 높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중앙 및 지방정부의 지불정산과 통계자료작성등의 업무를 사회서비스관리센터와 금융기관에 위탁하여 행정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통합정보시스템을 통하여 이용자 및 제공기관에게 전자바우처제도에 대한 안내·홍보 및 운영현황을 실시간으로 살펴보도록 하여 정보비대칭현상을 줄이고자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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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2 21:27 2012/08/12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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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전의『콘크리트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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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사물의 대화를 엿듣는 디자인 예언자 (프레시안, 최수태 문화평론가, 2012-01-06 오후 5:59:25)
[최수태가 좋아하는 작가] 박해천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의 <콘크리트 유토피아>(자음과모음 펴냄)는 등장과 함께 눈 밝은 독자들의 환호성을 불러왔고, 여러 매체로부터 호의적 서평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지면에서 굳이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콘크리트 유토피아> 이전에 <인터페이스 연대기>(디자인플럭스 펴냄)를 쓴 작가 박해천을 통해, 위 문단에서 꺼낸 문제의식을 다루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거대 담론 없는 시대의 거대 담론'은 어떻게 시도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지금까지 한국 지성계가 시도하지 않은 경로의 도전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거창한 논의를 위해 잠시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가장 자주 인용된 문장이 담긴 그 대목을 다시 불러와보자.
결국 비판의 화살들은 내 몸에 수북이 박혀 생매장의 말 무덤을 만들지만, 나를 향한 욕망의 불도저는 막지 못한다. 나는 담론의 가상 세계에선 언제나 패배하지만 현실 세계에선 백전백승이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일까? 물론 내 비판자들은 나름 전문가이긴 하다. 지면만 허락된다면, 그들은 거시 경제학자의 시선으로 아파트 분양가나 매매가의 상승 추이에 따라 유동 자산의 흐름을 분석하고 사회 경제적 함의를 밝혀낼 것이며, 문화사회학자의 관점에서 '강부자'로 표상된 특정 계층의 속물적 행태를 분석하고 가속화된 공간의 계급적 분화에 관해 울분을 토해낼 것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56쪽, 강조는 인용자)
하지만 해당 장의 화자인 '아파트'는 곧이어 이렇게 당당하게 선언한다. "그런데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것뿐이다. 고작." 여기서 일반적인 독자들이 예상할 수 있는 논의의 흐름은, 앞서 '아파트'가 직접 말한 "욕망의 불도저"에 기대어, '사람들은 아파트를 욕하지만 다들 아파트에서 살고 싶어 하니까', '이론은 말뿐이지만 먹고 사는 것은 중요하니까' 정도로 향할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반론을 절묘하게 회피하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한국의 담론계에서 '사회적 논의'에 거의 도입되지 않은 무언가를 꺼내든 것, 그것이 바로 박해천이라는 작가에게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미셸 푸코의 이름이 한국의 지성계에서 떠돌기 시작한지 20여 년이 지났고, 그의 논의를 비판하거나 이어받은 여러 학자들도 덩달아 수입되었다.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 역시 그런 이름 중 하나다. 그리고 박해천은 바로 그 아감벤의 '장치'라는 개념을 원용하여, 군사 독재 정권에 의해 대량 생산된 아파트가 당시에 떠오르던 신중산층을 흡수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습속"을 불어넣는 기제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습속의 확산, 바로 이것이 앞서 언급한 내 비판자들이 헛물만 켠 채 백전백패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치명적 함정이다. 그들은 내가 지닌 공간의 논리가 거주자들의 신체와 정신과 맺고 있는 관계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내놓는 해결안 대부분은 그들 자신의 무능을 증명할 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그들은 아파트 투기 열풍이 부동산 거품 붕괴를 재촉해 결국엔 경제적 대재난을 초래할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정부의 주택 정책이 소유 중심에서 거주 중심으로 전환해야 하며 부동산 관련 세제 정비, 임대 주택 공급, 분양가 상한제 등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도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67쪽)
아파트라는 공간, 즉 '장치'가 그 속에 사는 이들의 신체 및 정신을 뒤바꿔놓는 방식. 그로 인해 발생하는 한국 사회의 욕망의 정치학. 이런 종류의 논의를 담아낼 수 있는 담론적 양식은 아직까지 한국의 지성계에서 개발되어 있지 않았고, 그래서 박해천은 '픽션'이라는 표제 하에 본인이 아닌 아파트의 목소리를 끌어와야 했던 게 아닐까? 박해천은 인간 대 인간, 정당 대 정당, 권력 대 권력의 정치학이 아닌, 인간과 사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양상에 대해 사회적인 차원에서 서술하기 시작한 최초의 한국어 화자다(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그렇다).
인간과 사물의 관계, 그것은 다른 말로 (몇 단계의 논의를 생략해서) '인터페이스'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인터페이스 연대기>의 서문에서 그는 "이 개념(인터페이스)은 컴퓨터 스크린의 표면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행동반경을 넓혀가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인공 환경의 접촉면을 지시하는"(8쪽)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피부 바깥에 있는 것, 심지어 잘 '관리'된 피부마저도 인터페이스의 영역으로 수렴될 수 있다.
요컨대 인터페이스는 '인간'이 '인간을 뺀 모든 것'과 만나는 방식이 되며, 그리하여 한 디자인 연구자는 자신의 전문 영역으로부터 나선형으로 발걸음을 넓혀나간다. 그런데 그가 만나게 되는 것은 이미 거대 담론이 전부 죽어버리고, 그 거대 담론의 빈자리를 메우겠다고 도입된 온갖 현대 철학들이 제 쓸모를 잃고 주례사 비평에 소진되어버리고 있는, 혹은 그 잘난 '번역 논쟁'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고 있는, 속된 말로 '고자'가 되어버린 한국의 담론계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전혀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지식인 한 명을 얻게 된 것이다.
▲ <인터페이스 연대기 : 인간, 디자인, 테크놀로지>(박해천 지음, 디자인플럭스 펴냄). ⓒ디자인플럭스 
<인터페이스 연대기>로 되돌아가보자. 이 책은 디자인과 테크놀로지의 공진화(共進化)를 다루고 있지만, 내용을 검토해보면 그 이면에는 '전쟁'과 '자본주의'의 공진화가 깔려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전쟁 상황실의 디자인적 측면에 주목한 1장 '전쟁과 디자인 : 정보의 병참학'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20세기 중후반에 걸쳐 사회 전반의 군사화가 강화된 결과, 정체 상태에 놓여 있던 디자인 담론은 군사 전략적 상상력을 경유해서만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었"(52쪽)다는 시각은 <인터페이스 연대기>에 속한 텍스트들의 기저음을 형성하다가,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아파트라는 매개를 통해 '우리의 현실'에 매끄럽게 안착한다. 그 모든 과정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직접 두 책을 읽어보며 확인해보기 바란다.
우리가 살아온 20세기 후반, 그리고 21세기 초까지, 이 모든 '현재'를 지배하는 구조는 결국 제2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의 담론계는 그 세계사적 사건을 '민족 동란'으로 축소하거나, '자본주의의 연속적 진행 과정'으로 지나치게 확장하는 두 가지 선택지 안에서 맴돌고 있었다. 전자와 후자 모두 수입된 이론을 통해 한국 사회에 대한 이론을 구성하고 그것으로부터 현실을 해석하는 방법론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 역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 박해천은 디자인의 역사에 등장한 핵심적인 '사물'들을 먼저 검토한다. 그것이 앨런 케이가 디자인한 최초의 GUI(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건, 대한민국을 욕망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양산형 콘크리트 유토피아건, 그 사물들은 이론보다 앞서 우리가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할 수 있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브루노 라투어의 용어를 빌자면) '행위자(actor)'로서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과도 네트워크되어 있다. 인간과 사물 사이의 위계를 먼저 설정하고 그것들의 구성과 변화를 추적해야만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사람이 아니라 사물들을 먼저 해석함으로써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질서, 즉 미국의 주도 하에 만들어진 전후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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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2. 24
박해전의『콘크리트 유토피아』를 2011 올해의 책으로 뽑은 안은별 기자의 서평을 보고,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찾아보니 이를 서평으로 자세히 다룬 기사가 거의 없다. 이전에 김영글 작가가 쓴 프레시안의 서평을 읽어본 기억이 있는데, 그 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던 듯하다. 그런데 안은별 기자의 서평을 보고 다시 보니 김영글 작가의 글이 색다르게 다가온다.
그러고 보면 나 또한 아파트에 대한 막연한 반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빌라형 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기존의 아파트를 다룬 책들은 이러한 면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고 하는데, 사실 한국의 아파트를 다룬 책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외국과는 다른 한국의 아파트의 상황을 단지 예외적인 것으로 다루기보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천작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박해전 샘의 책은 의미가 있겠다.
다만 서평만으로는 분명한 대안이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아파트에 적응하면서 점진적으로 바꾸는 수밖에 없는 걸까. 아니 아파트 자체를 한국적인 양식, 한국인의 경로의존적인 기호라고 파악하고 이를 바꾸는데 들이는 품을 다른 것에 쏟는 게 나은 걸까. 아무튼 보편성을 전제로 아파트문화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보다는 이를 제대로 분석하려는 태도가 우선되어야 할 듯 싶다.

 

아파트가 들려주는 시트콤 혹은 잔혹극? (프레시안, 안은별 기자, 2011-12-23 오후 6:46:21)
[2011 올해의 책] 박해천의 <콘크리트 유토피아>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토건 경제나 자연 경관에 기댄 흔한 아파트 비판서가 아니며, 그 점에서 일차적으로 독자를 흡인한다. 아파트는 담론의 영역에선 늘 투기의 온상이라는 빤한 악역을 맡아 왔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저자는 아파트의 입을 빌려 "나는 담론의 가상 세계에선 언제나 패배하지만 물질의 현실 세계에선 백전백승"이라고 자못 거만한 투로 본질을 발설한다.
저자가 집중한 것은 아파트 스스로가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주조하는 요체였다는 사실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파트란 주거 모델이 어떤 사람들을 흡수했고 그들에게 어떤 기회를 제공했으며, 그들이 살아가면서 새로운 습속을 어떻게 확산시켜 갔는지를 조망한다. 나아가 그 확산이 거주자에게 어떤 윤리를 갖게 했는지, 어떤 정치적 입장을 취하게 했는지, 어떤 취향을 익히게 했는지-종합하자면 '어떤 사람이 되도록' 만들었는지를 추적한다. 이 과정엔 어항, 화초라는 자연을 닮은 인테리어 장식품의 유행부터 방문 판매 형식으로 각 거실에 침투했던 '미제' 가전제품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선 피아노, 태권도 학원과 가든 형 갈빗집에서의 가족 외식 등 우리가 아파트 안팎에서 겪었던 모든 행위와 기억들이 총동원된다.
시대가 정치적 '사태'나 '사건'을 분출시키고 몇 번의 버블과 버블 소멸을 거듭하는 사이, 기술의 결과물이 상품으로 쏟아졌고, 아파트 역시 진화와 장소적 확장을 거듭해 갔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은 아파트의 진화와 함께 커간 이들에 대한 세대론적 고찰이다.
가족 성장담을 4·19나 5·18, 6월 항쟁 같은 정치적인 사건을 중심에 둔 세대론보다 훨씬 그럴듯하게 그려내는 것, 그래서 조심스럽게 내 부모가 가졌던 아파트 사(史)와 그들의 탈정치성의 이유를 돌아보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이 책의 힘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1부는 각기 다른 화자가 등장하는 '픽션' 4개로, 2부는 언론 기사와 공식 기록 등을 편집한 '팩트'로 이루어져 있다. 픽션의 주인공은 군인과 건축가의 그것이 뒤섞인 '변종의 시선'과 '아파트' 자신, '강남 중산층인 1940년대 생 남자', 그리고 '꽃무늬'다.
픽션 형식의 1차 효과는 일단 재미로 나타난다. 인용 문장이 거의 문학 작품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물론 4개의 글은 빽빽한 증거를 함께 끌고 나가야 하기에, 만일 단편 소설 같은 강약 조절 능력을 기대하고 읽는다면 숨 고르기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저자가 '소설 쓰기'에 실패했다기보다 오히려 다른 수까지 포함해 목적을 초과 달성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화자의 위악과 과장이 그들이 하는 그럴듯한 이야기에 독자들이 완전히는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때문이다.
2부 '팩트'는 그 장황한 변호 너머의 무엇을 유추해내는 데 길잡이 구실을 해준다. 한강을 중심으로 시작된 중요한 아파트 확장의 역사를 종으로, 인테리어와 자녀 교육, 쇼핑과 여가라는 생활양식을 횡으로 엮었다. '픽션' 파트의 인용문이 주로 문학 작품인 것과 달리 '팩트' 파트는 대부분이 월간지의 르포나 사진 자료, 일간지 생활면 기사가 차지하고 있다.
저자는 이 '픽션'과 '팩트' 사이의 빈 공간을 "책이 마련한 독자의 자리"라며 독자 개개인이 "길 찾기의 해법을 구하는 과정에서 아파트에 관한 자신의 '진짜' 경험담으로 채울" 자리라 강조했다. 그 상호 보완적인 독서, 자기 내러티브를 개입시키는 과정을 통해 저자가 기대하는 것은 "아파트가 구축해놓은 매혹의 자장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의 주거 공간과 일상 사물을 상상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올해의 책으로 꼽은 이유는 여러 가지다. 아파트와 한국 시각 문화라는 주제와 아파트 속 삶이 잡혀질 듯한 생생한 묘사, 이를 가능하게 하는 훌륭한 자료들, 뛰어난 문장 등등. 그러나 특히 감동했던 건 이 책이 결론에 이를 때까지 완벽한 '디자인'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어떤 가설을, 이렇게 웅장하면서도 치밀하게, 조심스러우면서도 흥미롭게 다루는 경우는 별로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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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리도 궁금한 한국 아파트의 미스터리 (한겨레21 2011.06.06 제863호, 고나무 기자)
[표지이야기] 세계와 사뭇 다른 한국 아파트의 3대 미스터리… 부유층이 선호하고 가격 불패 신화 자랑하며 농촌에도 지어지는 이유는?
한국의 부유층이 단독주택보다 아파트를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 여러 분석이 제기됐다. 서정렬 영산대 교수(부동산·금융학)는 ‘순환구조론’을 근거로 제시했다. 서 교수는 전자우편을 통해 “아파트가 전체 주택 가격 상승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주택 가격 상승을 이끌 능력과 의도가 있는 계층이 아파트를 선호하는 순환 구조가 형성돼 있다”고 분석했다. 아파트 가격 상승으로 이익을 보는 계층이 자연스레 아파트를 선호한다는 취지다. 부유층이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 대신 아파트를 선호할 만큼 경제적 이익이 크다는 취지다.
김주경 오우재 건축사사무실 대표도 ‘경제적 이익’을 꼽았다. 특히 아파트가 자산으로서 지니는 환금성에 그는 주목했다. 김 대표는 “환금성이 가장 큰 요인이다. 모든 주택은 감가상각을 당하지만 아파트는 한 번도 감가상각이 문제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건물이나 물건 등 형태를 가진 모든 자산은 시간이 지날 때마다 물리적·경제적 가치가 조금씩 감소된다. 이를 계산하는 과정이 감가상각이다. 아파트도 거주자가 살다 보면 낡고 헐어 감가상각 요인이 발생한다. 그러나 한국의 아파트는 비정상적으로 높게 형성된 아파트 가격 탓에 자산가치를 떨어뜨리지 않으며 환금성을 보장받는 매력적 자산이라는 게 김 대표의 분석이다.
김 대표는 호화주택에 부과되는 무거운 세금도 근거로 덧붙였다. 현행 세법상 ‘고급주택’으로 분류되면 일반 주택 취득세의 5배를 내야 한다. 단독주택의 경우 △실거래가액 9억원 이상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집 △66㎡(20평) 이상의 수영장이 딸린 집 등이 고급주택으로 분류된다. 외국 영화에 등장하는 수영장이 딸린 호화로운 단독주택을 지으려면 한국의 부유층이 상당한 세금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이다. 박재룡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생활의 편의성’을 근거로 제시했다.
아파트가 한국 사회에서 ‘부유함의 상징’이 됐기 때문이라는 문화적 분석도 나온다. 디자인 연구자인 박해천 홍익대 연구교수는 전자우편을 통해 “한국의 초창기 아파트 단지들로부터 연원하는 ‘어떤 전통’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의 설명을 종합하면, 1970년대 초반 ‘한강맨션’, ‘여의도 시범아파트’, 구반포 등 ‘맨션의 트라이앵글’이 존재했다. 이 ‘아파트 트라이앵글’은 한국 부유층이 전통적으로 거주하던 사대문 안에서 바깥으로 팽창하는 과정의 산물이었다. 부촌 팽창의 흔적에 평창동의 고급주택가도 포함된다. 박 연구교수는 “실제로 1930년대 전후 태생의 서울 토박이 출신의 젊은 중·상류층 상당수가 (아파트로) 이주했다. 1970년대 중·후반에는 이들 중 상당수가 다시 압구정 현대아파트로 이주했다. 1970년대의 한강맨션, 1980~90년대의 압구정 현대아파트로 이어진 흐름은 2000년대의 타워팰리스로 연결된다”고 지적했다. 이런 아파트의 팽창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 사태 이후 용인을 중심으로 한 고급·대형 아파트와 강남·분당을 중심으로 한 주상복합의 건설로 다시 이어진다.
세계의 부동산 가격이 하락해도 한국의 아파트 가격이 하락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분석이 갈렸다. 김주경 대표는 수요가 늘 창출되기 때문이라며 ‘수요지탱론’을 제기했다. 김 대표는 “요즘 추세는 인구는 주는데 가구수는 늘어난다. 수요가 꺼지지 않는다. 수요가 있는 상황에서 환금성이 뛰어난 아파트 가격이 떨어질 이유가 없다. 요즘 금값이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라고 분석했다. 다만 김 대표도 최근 주택 소유자 사이에서 아파트의 환금성에 회의론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서정렬 교수도 “세계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 아파트 가격 하락폭이 크지 않은 것은 우리나라 전체로 보면 중산층 계층이 집중된 서울 및 수도권의 아파트 수요가 꾸준해 가격 하락폭을 최소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해천 연구교수도 “현재의 아파트 가격은 버티기에 가깝다”면서도 “강남의 아파트 가격이 유지되는 것은 수요 때문이다. 외환위기 때도 강남 아파트 가격 하락은 상대적으로 그리 크지 않았다. 강남 주택 수요가 있고, 동시에 강남 아파트 수요자층의 자산 토대가 튼튼하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했다.
농지와 야산에 아파트가 솟은 한국의 농촌 풍경은 ‘아파트 신화’의 상징이다. 박해천 연구교수는 “농촌 거주민들조차 아파트가 지닌 신화적인 면모에 매혹돼 있다”고 지적했다. 자본주의가 일찍 시작한 유럽에서 아파트는 노동자와 빈민의 주택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고안된 주거 형태였다. 빈곤과 비위생에 시달리는 노동자계층에게 주거복지를 제공하며 가족 단위로 구별된 주택을 제공함으로써 계급의식과 단체행동을 제약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한국에서 아파트 문화는 애초에 ‘편리한 것’ ‘우월한 것’으로 수입됐다. 박 연구교수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아파트의 평수 차이가 거주자가 속한 계층의 차이로 곧바로 연결되는 간단한 게임의 규칙은 1967년에 건설되었던 용산 이촌동의 공무원 아파트 바로 옆에 한강맨션이 들어서는 순간부터 자연스레 만들어졌던 것”이라고 썼다. 아파트가 지닌 문화적 힘 때문에 농민들이 주위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아파트를 선택한다는 게 박 연구교수의 논지다. 김주경 대표도 “농촌에서는 아파트의 환금성이 중요하지 않다. 도시에서의 아파트 선호가 농촌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도시 사람들은 (아파트에 거주)하는데 우리는 왜 못해?’ 같은 정서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실용성론’이 반론으로 제기된다. 박재룡 수석연구원은 “농촌에도 ‘나 홀로’ 아파트가 많다. 이는 양면성이 있다. 농민들이라고 생활 편의를 추구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며 “주위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 있지만, 생활 편의 측면에서 보면 (아파트에 거주)할 수 있다. 농촌에 나이 드신 분이 많아서 단독주택이 살기에 불편하다”고 주장했다. 서정렬 교수는 상대적으로 땅값이 저렴한 농촌 토지를 기반으로 아파트 사업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건설업체의 논리가 반영된 결과로 봤다.

 

[명강의를 찾아서] 박해천 홍익대 BK 연구교수 '콘크리트 유토피아' (한국, 김진각 편집위원, 2011/06/10 21:46:08)
한국에서 아파트란 무엇인가… 그 역사와 문화
아파트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디자인 연구 전문가인 박해천 홍익대 BK 연구교수는 "아파트는 우리의 삶과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라고 강조했다. 단순한 주거공간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의미, 즉 역사성과 문화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지난 2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비주얼아트센터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한국의 아파트가 갖고 있는 의미를 독특하게 풀어냈다. 그는 "아파트는 주거 유행을 창조했고, 사람들이 따라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고 말했다.
60년대는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라는 주거 공간이 가능한지 실험하는 기간이었다. 여러 세대가 모여 사는 공동주거지 개념이 생소했던 시대에 주택공사가 처음 시도한 아파트는 뜻밖에 중산층들이 찾으면서 성공을 거뒀다. 박 교수는 "주공이 그때 뿌렸던 마포아파트 홍보물을 보면 교복을 입은 초등학생들이 뛰어 노는 모습이 있다"면서 "당시 교복은 사립학교만 입었기 때문에 마포아파트에 중산층이 꽤 살았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6개 동 모두가 'Y'자 형태로 똑 같은 모양이어서 틀에 박힌 군사문화를 연상시키는 측면도 있었다고 했다.
박 교수는 마포아파트의 성공이 70년대 서울시가 추진한 시민아파트 건설로 이어졌으나, 접근 방식은 전혀 달랐다고 말했다. 마포아파트는 아파트라는 주거공간의 가능성 여부를 시험하는 무대였던데 반해 시민아파트는 달동네를 개조하기 위한 측면이 강했다는 것이다. 시민아파트는 출발부터 도시 빈민 거주지라는 계획하에 추진됐다는 설명이다. 그래서였을까. 시민아파트인 와우아파트가 부실시공으로 70년 4월 무너졌다.
이로 인해 아파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급속도로 확산되자, 대안으로 70년대 초반부터 전망 좋고 품질 좋은 고급아파트가 등장했다. 그게 여의도와 용산구 이촌동 일대, 옛 반포 지역 등 한강 주변에 들어선 소위 한강 맨션아파트들이다. 그는 이 3곳을 '맨션의 트라이앵글'이라고 했다. 이는 당시 경제 상황과 맥이 닿아 있었다. "한강 맨션은 기존의 아파트와는 달랐다. 이전까진 60㎡ 정도가 가장 컸으나 한강 맨션은 99㎡에서 165㎡까지 지어졌다. 일본은 이때 경제호황을 누렸고, 우리도 고속도로가 만들어졌고 국산 포니차가 선을 보이는 등 고속성장기에 접어들었다. 경제발전이 중ㆍ대형 아파트를 짓게 만든 동력이었던 셈이다."
75년께부터 시작된 강남 개발은 '한강 맨션의 트라이앵글'이 기여한 부분이 적지 않다고 박 교수는 설명했다. 반포, 서초, 잠실, 압구정 등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의 아파트가 속속 등장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주목하라고 했다. 맨션의 트라이앵글과 강남의 아파트 단지를 잇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아파트에 대한 관점을 크게 바꿨다. 한강 맨션이 주거목적이었다면 현대아파트는 자산가치를 염두에 둔 소유, 투자의 측면이 강했다. 현대아파트를 분양받은 사람의 20~30%가 용산과 여의도 거주자들이었다."
70년대 이런 강남지역 아파트 입주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40년 이후 출생자로 지방의 명문고 출신에 꽤 큰 기업체에 다니거나 고급공무원이 적지 않았다. 한국의 경제발전을 주도한 세대였는데, 이들이 내 집 마련을 하는 시점에 강남에 정착한 것이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한강 맨션과 강남의 아파트 단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왔다. 박 교수의 분석은 명료했다. "한강 맨션이나 여의도 아파트촌은 서울 토박이 출신의 젊은 중상류층이 기존의 계층 질서를 재생산하는 과정의 산물이었다. 반면에 강남의 아파트 단지는 서울에서 대학교육을 받은 지방 출신의 젊은 세대들이 내 집 마련과 함께 신흥 중산층으로 진입하는 과정의 산물이라고 봐야 한다. 이들이 80년대 중반까지 주로 서울 외곽 지역에서 강남 아파트로 진입해 경제 성장을 주도하면서 이른바 '영동 문화'를 형성했다."
그는 90년대 이후 형성된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화에서도 아파트의 역할은 빼놓을 수 없다고 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때 부모를 따라 처음 강남 아파트에 발을 들여놓은 70년대생, 90년대 학번들이 우리 문화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서태지, 김현철, 성시경, 싸이 같은 가수들은 모두 강남 2세대다. 이들의 공간 감각과 시각적 감각은 일반인과 확연히 다른 부분은 쉽게 목도된다." 강남 8학군의 교육열 또한 아파트가 초래했다고 파악했다. 학력과 경제력이 비슷한 중ㆍ상류층들이 강남 아파트 단지에 대거 입주하면서 자녀를 좋은 학교로 보내기 위한 부모 간의 경쟁이 자연스럽게 시작됐다는 것이다. 조기유학의 진원지도 따지고 보면 아파트라는 게 그의 판단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의 아파트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박 교수는 역할이 점점 무뎌지고 있다고 했다. 금융위기가 몰아닥친 2008년 이후엔 자산형성 수단으로서 아파트의 비중은 약해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중산층이 아파트를 통해 자산을 축적하는 흐름이 차단됐고, 특징적인 아파트 문화도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쯤 되면 아파트가 아닌 다른 주거에 눈을 돌려도 괜찮을 것 같다"는 말로 강연을 마무리했다. "요즘 세대들은 도시에 대한 나름의 관점을 지녀야 한다. 다양한 주거문화, 형태에 그들만의 시각을 갖는 것이다. 다양한 주거 공간들이 나와야 하는 상황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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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늬의 고백, "이것은 왜 '유토피아'가 아니란 말인가" (프레시안, 김영글 작가, 2011-04-22 오후 6:35:00)
[프레시안 books] 박해천의 <콘크리트 유토피아>
<콘크리트 유토피아> 역시 아파트를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얻게 되는 아파트에 관한 방대한 양의 정보에도 불구하고, 단연코 이 책은 아파트에 관해서 말하고자 쓰인 책이 아니다. 여기서 아파트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한국의 정치, 문화, 역사 전반을 관통하는 하나의 열쇳말로 작동한다.
저자 박해천은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책을 설명한다. "아파트는 한국의 시각 문화를 어떻게 변모시켰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법을 탐색하는 과정이었다고. 그러니 이 책의 여정은 아파트의 변천사를 설명하고 주거 풍속도를 훑어보는 수준에서 멈출 생각이 애당초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아파트에 투영된 현대인의 심리와 욕망, 그 작동 원리까지 그려내고자 하는 야심찬 기획이다.
악취 나는 투전의 장으로 전락한 아파트의 표면적 행보를 비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담론의 세계에서와 달리 물질의 세계에서 그러한 비판은 별 쓸모가 없다. 현실의 아파트는 여전히 대중을 매혹시키고 있다.
아파트 비판은 백전백패한다. 저자는 바로 그 이유를, 아파트가 교묘하게 구축해 놓은 시각 문화의 대중적 호소력을 간과한 데서 찾는다. 압축적 근대화의 과정에서 아파트는 단지 몸집만 불린 것이 아니다. 거주자의 생활양식 뿐 아니라 감각 양식까지 조직하면서, 우리가 특정한 시각 논리를 갖추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파트는 더 이상 주거 상품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다. 시각 문화 전반에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급기야 도시 생활자의 시선과 인지 방식 자체를 변화시켜 왔다.
꽃무늬는 곧 꽃무늬와 함께 했던 주부들인 것이다. 실내 장식에 애정을 쏟는 것으로 삶의 가치를 확인하고 자기실현을 도모했던. 소비 유행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는 정체성의 나침반을 따라 우왕좌왕했던. 산업화의 역군이라 불린 가부장 집단과 다를 바 없이 욕망의 숨바꼭질을 통해 나름의 역사를 써온 그녀들. 집이라는 공간이 가족의 정체성을 투영하는 거울이자 타자의 인정을 받기 위한 전시용 스크린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은 아파트 성공 신화를 이해하는 열쇠 중 하나다. 그렇다면, 그녀들의 노력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개인의 기억을 소환하는 책이다. 그 안에서 나는, 강남 1세대와 386세대 사이에 낀 '이름 없는 세대'의 자식으로 출생해 외환 위기의 불안한 학창 시절을 거치고 비정규직 900만 시대를 고스란히 살아가고 있는 내 세대의 역사까지도 덤으로 읽고 만다.
아파트에 관해서 사람들은 극단적이기 쉽다. 열광하거나, 경멸하거나, 혹은 무심하다. 세 경우 모두, 아파트가 가진 힘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 아파트와 함께 재편된 도시적 시각 질서 속에 있다. 우리는 언제나, "네가 어디 사는지를 말해봐, 그럼 네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줄 테니"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아마도 이것이 조르조 아감벤의 '장치'라는 개념을 불러들이는 저자의 의도일 것이다. '아파트' 스스로 대담하게 고백하듯이, 아파트는 그저 아파트가 아니다. 그는 '우리 내면의 윤곽을 주조하는 거푸집'이었던 것이다.
저자는 아파트에게 "비판의 법정에 선 용의자가 아니라 자기 옹호의 모노드라마를 연기하는 배우의 역할"을 맡김으로써, "아파트가 지닌 매혹적인 힘의 핵심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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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2 19:01 2012/08/12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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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노동부 조직개편 관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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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노동' 아니라 '불법고용'으로 불러야하는 이유" (프레시안, 장지연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2012-05-01 오전 11:10:11)
[시민정치시평] 노동절에 다시 생각하는 '고용'노동부
조직이나 제도, 사건의 명칭은 그 정체성이 가장 잘 드러나도록 정하는 것이 상식이다. 본질과 동떨어진 이름을 지어 붙이게 되면 사람들은 당연히 혼란스러워지게 마련이다. 게다가 가끔은 이런 혼란이 애초에 의도된 것일 때도 많아서 조심해야한다.
얼마 전 외국인과 한국의 정치상황을 소재로 담소를 나누게 되었다. 그 사람이 진보에서 보수까지 스펙트럼별로 어떤 당이 있는지 설명해 달라고 하길래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을 하는데, 새누리당 이름이 나오자 외국인들이 다같이 웃음이 터졌다. 이름이 독특하기도 하지만, 보수정당이라면서 이름이 왜 그렇게 진보적인 뜻을 가졌냐고 하면서. 그제서야 '새로운 세상' 이런 말은 흔히 진보가 들고 다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정부에서 노동부가 고용노동부로 이름을 바꾼 것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다 명확하게 알리려는 노력으로 보아야할까? 아니면 정체성 혼란을 드러낸 것으로 보아야할까? 고용이나 노동이나 뭐가 다르다고 노동 앞에 고용을 붙였는지 궁금하게 여긴 사람들도 있을 듯하다. 필자가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보자면, 영국은 고용부이고 미국이나 일본, 프랑스는 노동부이다. 누구는 고용부라고 쓰기도 하고 누구는 노동부라고 쓰기도 하는데, 우리는 왜 둘 다 갖다 붙였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어느 편의 관점을 더 반영하는 행정을 펴느냐'를 전달하는 뉘앙스의 차이가 있지 않나 싶다. 원래 노동부가 주로 임금노동의 영역을 관장하기 때문에, 노동부라는 명칭에 이미 노동자와 사용자라는 당사자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노동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름이 지어진 듯하고, 노동을 시키는 사람은 명칭에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음직하다. 또한 '고용' 즉, '일자리를 창출'이 노동부의 주요 업무 영역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고용'이라는 단어를 붙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노동부는 스스로를 약칭으로 '고용부'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고용을 창출하는 일은 정부부처로 보면 산업정책과 관련된 일이지 노동부가 어찌해 본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일은 아니다. 한편 일자리와 개인을 연결해 주는 역할, 그리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일자리의 질을 관리하는 역할은 분명히 가장 중요하고도 일차적인 노동부의 책임이다. 이 역할은 노동부라는 명칭에 충분히 담겨있다. 고용이라는 단어를 앞에 갖다 붙인 것은 좋게 평가해도 기계적인 형평을 맞춘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백번을 양보해도, 약칭으로 부를 때는 보다 핵심적인 기능인 노동부로 부르는 것이 맞다. (아니면 고노부라고 부르던지...) 다시 강조하건대, 노동부의 일차적인 역할은 일자리 창출이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여 나쁜 일자리, 불법적인 일자리에서 일하지 않게 하는 일이다.
정확한 명칭을 붙이는 일은 때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이름이 우리의 판단을 이끄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떤 사업장에서 노동자를 고용해 놓고 신고하지 않거나 축소하여 신고하고 세금과 사회보험료를 내지 않는 경우를 우리는 '비공식 노동'이라고 부른다. 최저임금 미만의 임금을 받는 노동도 그냥 '저임금 노동' 또는 '최저임금 미만 노동'이라고만 부른다. 학원강사를 개인사업자로 등록하게 하여 학원에 속한 임금노동자가 아닌 것으로 만들어 놓은 경우를 비롯해서, 자기 회사 사람을 자영업자로 둔갑시켜놓은 상태에 대해서는 충분히 잘 알려져 있지도 않고 전형적으로 불리는 명칭도 없다. (물론 특정한 고용형태에 대해서 '특수고용'이라는 명칭을 붙여 면죄부를 준 바는 있다.) 자기회사 일을 시키고 지휘명령도 하면서 남의 회사 사람이라고 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불법파견'이라는 어려운 전문용어가 있다.
이 모든 것들을 한데 묶어 정확하게 명칭을 부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불법고용'이다. 명확하게 법 위반인 것을 놓고 비공식이니 뭐니 하는 것은 본질을 흐리는 일이다. 유럽에서는 정부의 위원회에 '불법고용근절위원회(프랑스)'가 있고, '불법고용과의 투쟁 백서(독일)'를 펴내기도 한다. 위에 언급한 미신고 일자리, 최저임금 미준수, 근로자를 자영업자로 등록하는 경우, 불법파견, 그리고 외국인노동자를 불법으로 사용하는 경우를 모두 합하여 '불법고용'이라는 범주로 정의하고 이를 근절하겠다는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불법을 불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를 근절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표명하는 분명한 의사표시가 된다. 반대로 지금 우리처럼 명백하게 법을 어기면서 노동자에게 일을 시키는 경우도 그저 '비공식노동'이라 부르며 두둔하는 것은 나쁜 일자리 정도가 아니라 명백히 불법적인 일자리를 양산하는 시스템을 유지하겠다는 의사표시가 된다.
'불법'이라는 용어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고용'이라고 쓰느냐 '노동'이라고 쓰느냐하는 것이다. 유럽 국가들이 불법노동근절이라고 하지 않고 불법고용근절이라고 하는 것은 '고용'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비공식으로 일하는 것이 노동자의 책임인가? 최저임금을 못 받는 것이 노동자의 책임인가? 사내하청 노동자로 들어가서 원청이 시키는 대로 일 하는 것이 어디 노동자의 잘못인가? 불법노동이라고 하면 이런 노동을 하는 노동자가 없어져야한다는 뉘앙스를 풍기게 되므로 이건 잘못이다. 이들을 합법적인 형태의 고용으로 전환하라는 것이 메시지이므로 불법고용이라고 불러야 맞는 것이다.
우리나라 일자리의 질이 낮다는 사실은 흔히 지적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나가야 할지는 막연하게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첫걸음은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는데서 시작된다. 우리 주변에 흔히 보이는 일자리의 고용주들이 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인지하고나면, 묻게 된다. "노동부는 뭐 하고 있나?" 노동자를 보호하고 불법적인 일자리에서 일하지 않게 해야 할 임무를 맡은 정부부처가 노동부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판단을 하려면 먼저 사건이나 현상을 부르는 명칭이 본질을 명확하게 드러내야한다. 불법고용은 근절되어야한다.

 


 

KEC 농성에 '대책 없는' 노동부 (매노, 김학태 기자, 2010-11-01 오전 9:33:21)
“불법점거 먼저 중단해야” 기존 입장만 되풀이
구미 KEC 노사갈등이 분신사태로까지 치달은 가운데 노사관계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가 노조에 불법 점거농성 중단을 요구하는 것 외에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31일 노동계에 따르면 민주노총 구미지부와 금속노조 등은 지난 21일 금속노조 KEC지회가 공장점거 농성을 시작한 뒤, 노동부 구미지청과 구미시청에 사측이 대화에 나서도록 중재할 것으로 요청했다.
그러나 구미지청 등은 “불법점거를 먼저 풀어야 한다”거나 “노사가 자율교섭으로 해결할 사안”이라는 입장만 되풀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동부가 노사갈등 사업장에서 통상적으로 진행해 온 대화 중재 등 노사조정 업무를 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나온다.
반면에 노동부는 그렇지 않다는 입장이다. 노동부 고위관계자는 “노사가 대화를 재개하도록 부단히 물밑대응을 해 왔다”며 “김 지부장이 분신한 날 진행된 노사 면담도 노동부 개입 없이는 이뤄질 수 없었다”고 말했다. 노동부는 그러나 ‘불법 점거농성 해제’를 강조하는 것 외에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 관계자는 “징계나 사법처리 최소화 등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노조가 불법적인 생산시설 점거를 해제하기 전에는 정부가 개입할 여지가 많지 않다”고 말했다.
한편 30일 노사대화가 끝난 직후 경찰병력이 농성 중인 지도부 체포를 시도한 것에 대해 노동부는 "사전에 경찰의 계획을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노동부는 노사 대화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경찰력이 투입된 것과 관련해 "이례적"이라며 "경위를 파악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노동부의 해명대로 경찰의 체포계획을 사전에 몰랐다면, 노사관계 주무부처가 노사갈등 현장을 제대로 체크하지 못했다는 비난이 불가피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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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세계 주도? 노동권은 여전히 후진국! (매노, 조현미 기자, 2010-10-20 오전 10:20:02)
한국, G20 국가 중 ILO 협약 비준 하위권 … ILO 권고 이행도 '저조'
최근 정부는 다음달 11~12일 서울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개최를 계기로 선진국 반열에 오르겠다는 의지를 숨기지 않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권은 여전히 후진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G20 국가 중 ILO 협약 비준 하위권=19일 고용노동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G20 정상회의에 참여하는 20개국 가운데 유럽연합 의장국을 제외한 19개국 중 한국은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비준수에서 하위권에 머물렀다. 총 188개의 ILO 협약 가운데 우리나라가 비준한 협약은 24개에 불과하다. G20 정상회의에 참가하는 국가 중 ILO 협약을 가장 많이 비준한 나라는 프랑스로 모두 101개 협약을 비준했다. 이탈리아(92개)와 브라질(81개)·독일(73개) 등도 상위권을 차지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미국(14개)·인도네시아(18개)·중국(22개) 등과 함께 하위권을 차지했다. 19개국의 평균 ILO 협약 비준수가 49개였는데, 우리나라는 평균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표 참조> 특히 우리나라는 ILO 기본협약인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87호)과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원칙의 적용에 관한 협약’(98호)을 비준하지 않고 있다. 87호를 비준한 나라가 150여개국, 98호를 비준한 나라가 160여개국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이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 하기엔 부끄러운 수준이다.
◇ILO 권고사항 이행실적도 미흡=ILO가 한국정부에 권고한 사항에 대해서도 이행실적이 저조하다. ILO는 공무원노조와 관련해 5급 이상 공무원을 포함한 모든 직급에 대해 예외 없이 단결권을 보장하도록 권고한 바 있다. ILO 권고에 따르면 소방관과 교도관·근로감독관에 대해서도 단체를 설립하고 가입할 수 있어야 한다. 파업권은 국가의 이름으로 권한을 행사하는 공무원과 엄격한 의미에서 필수사업에 종사하는 공무원에 한정해야 한다.
그러나 현행 공무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공무원노조법)에 따르면 6급 이하 공무원만 노조에 가입할 수 있다. 6급일지라도 다른 공무원의 업무를 총괄하는 업무를 하는 공무원은 가입범위에서 제외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경찰노조 추진 움직임이 일고 있지만 현행법상 경찰은 노조를 결성할 수 없다. 교대근무 등으로 노동조건이 열악한 소방관들도 마찬가지다.
이 밖에도 ILO는 한국 정부에 실직자·해고자의 노조가입과 비노조원의 임원출마를 허용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고용노동부는 “우리나라의 경우 기업단위 노조가 대부분인 상황에서 해당 기업의 근로자가 아닌 자의 조합원 자격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태도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산별노조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는 것이다. 실직자·해고자의 노조가입이 허용되면 청년유니온·공무원노조의 설립 문제도 한결 수월해질 수 있다.
ILO는 불법·합법 여부를 떠나 모든 이주노동자에게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완전히 보장할 것을 권고했다. 서울고법은 2007년 “불법 체류 외국인도 노조를 결성할 수 있다”며 이주노조의 설립을 허용하는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대법원은 4년 가까이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 유례없는 일이다. ILO는 또 대학교수의 단결권 보장을 위해 관련법을 개정하고, 정부가 교수노조를 인정할 것을 권고했다. 노동부는 그러나 “대학교수노조 허용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사회적 합의와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다소 추상적인 이유를 들며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유병제 교수노조 부위원장은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정부가 일반적인 교수들의 생활상을 모르고 국민 여론을 호도하는 것”이라며 “실제 노동자로서의 권익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유 부위원장은 “정부가 교육의 공공성을 포기하면서까지 국립대를 법인화하려고 하는 상황에서 노조까지 허용하지 않아 교수들의 노동조건이 더 악화될 것으로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김 철. 2010. 고용도, 노동도 만족스럽지 않은 고용노동부: 고용노동부 출범의 문제점과 과제. 이슈페이퍼 10-08. 사회공공연구소. [이슈페이퍼10_08_고용노동부출범과제20100802.hwp (245.00 KB) 다운받기]
□ 고용노동부 출범의 의미와 내용
▪ 고용노동부 출범은 그 동안 “일자리 창출이 정부의 최대 목표”라고 강조해온 이명박 정권의 결정판으로, 이를 계기로 고용정책 방향을 전환하겠다는 것. 고용노동부는 ‘고용정책 총괄' 주무부처의 역할을 담당하고, 고용정책 추진방향도 수요자 입장에서 재설계할 계획임
▪ 하지만 고용노동부 스스로가 부여하고 있는 부처 출범의 의미는 현장에서 그리 설득력 있게 수용되지 않고 있으며, 노동부가 제작 배포한 ‘타임오프한도 적용 매뉴얼’은 고용노동부 출범이 노동자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음
□ 해외 주요 국가의 노동행정 관련 부처의 명칭 검토
▪ 고용노동부로의 개칭의 주요한 근거 중 하나는 전 세계적으로 노동행정 관련 부처 업무의 중심이 ‘고용’으로 바뀌고 있으며, 부처 명칭에 고용(Employment)을 명시하여 고용정책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것이나, OECD 주요 국가들의 노동행정 관련 부처들의 업무현황을 살펴보면 업무의 중심이 ‘고용’으로 바뀌고 있는 것은 일반적 추세라고 보기 어려움
▪ 31개 OECD 회원국들 중에서 미국, 노르웨이, 뉴질랜드 3개 국가가 노동부라는 명칭을 고수하고 있으며, 14개 국가는 노동에 복지 관련 명칭을 추가하여 노동행정 관련 부처의 명칭을 정하고 있고, 이 경우 노동을 다른 가치보다 우선시하여 앞쪽에 위치시키고 있음. 고용보다 노동을 앞에 위치시킨 룩셈부르크를 포함하면 노동중심적인 노동행정 관련 부처 명칭을 가지고 있는 국가는 OECD 31개국 중 18개국이나 됨
▪ 이에 반해 ‘고용’을 명시하고 있는 국가는 한국을 포함하여 11개국으로 35% 가량 정도이지만, 대부분 소국으로 분류되는 국가들이어서 한국의 노동부가 이를 벤치마킹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음. 또한 명칭만으로 볼 때 고용을 강조하고 있는 국가는 7개국밖에 되지 않으며, 더욱이 한국의 ‘고용노동부’와 같은 부처 명칭은 전혀 보편적이지 않음
□ 고용노동부 출범의 문제점
▪ 전술적 편의에 의한 부처 명칭 변경: 고용정책의 총괄부처로서 역할을 다하려면 그에 걸맞는 기능과 역할보강이 이루어져야 하나, 국 단위 조직 하나만이 늘어났을 뿐 관련 기능의 확충이나 인력ㆍ예산의 증가는 수반되지 않았음. 이명박 정부 들어 고용정책 예산을 포함한 고용노동부의 예산과 기금은 계속 축소되고 있는 상황에 있음. 결국 일자리 창출에 대한 아무런 개선책 없이 단지 부처 명칭만 바꾸어 부처 명칭에 ‘고용’을 명시한 것은 ‘고용문제 해결’에 대한 정부의 의지와 역량을 보여주기 위한 전술적 편의에서 나온 것일 뿐임
▪ 고용노동부로의 명칭 전환은 노동행정 관련 부처의 정체성과 패러다임 자체를 바꿈: 고용서비스 선진화 방안은 정부의 규제를 대폭 완화하여 민간 고용서비스업을 활성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이는 불안정한 일자리를 양산하고, 고용구조를 왜곡시킬 것임. 고용정책이라고 한다면 그 만큼 정부의 역할이 제고되어야 하고, 공공부문을 먼저 활성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나, 오히려 이에 역행하고 있음
▪ 사회부처가 아닌 경제부처로의 자리매김: 이미 노동부는 경제부처로서의 위상을 가져왔고, 장관 또한 경제부처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부처를 운영해왔음. 김영삼 정권 이후의 15명의 노동부 장관 중에서 보면, 5명이 경제부처 관료 출신이고, 2명이 경제학 교수 출신임. 또한 일련의 경제부처 회의에 노동부 장관이 참여한 것도 노동부가 경제부처로 분류되었음을 보여줌. 향후 노동의제 자체가 아예 의제화되지 않는 무의사결정이 행해질 가능성이 높음
▪ ‘고용부’ 약칭의 문제: 고용은 사용자의 입장에서 노동자를 부려 쓰는데 초점을 두고 있으며, 노동은 노동자의 입장에서 스스로 일을 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관점의 전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줌. 과거 노동부는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한 고용(雇傭)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왔고, 고용(雇傭)정책을 펼쳤다면, 이제는 삯을 주고 부리는 사람 입장에서 본 고용(雇用)정책을 펼치겠다는 것임
▪ ‘노무관리부’로서의 성격 강화: 타임오프 매뉴얼을 만들고, 각 사용자를 찾아가 7월 이후로 단체협약 타결 날짜만 넘기면 된다고 종용하는 등의 타임오프와 관련한 고용노동부의 일련의 양태나, 덤프, 레미콘 등 특수고용 노동자들을 건설노조에서 배제시킬 것을 요구한 것, 그리고 공무원과 교사들이 가입한 노조의 단체협약에 대한 시정명령 등은 노동자의 권익보호를 외면하고 노무관리에 앞장서는 양태를 드러내고 있음
□ 고용노동부의 과제
▪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있고, 앙상한 사회안전망은 갈수록 축소되고 있는 현실에서, 여전히 고용보다는 노동에 대한 주문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 주목하여 고용노동부의 약칭이라도 ‘고용부’에서 ‘노동부’로 정식 환원해야 함
▪ 산업수요에 부응한 인적자원개발을 위해서는 노동시장의 총괄부서인 고용노동부가 인적 자원개발을 총괄할 필요가 있으며, 평생ㆍ직업교육 기능이 교과부에서 이관되어야 함
▪ 노동안전보건 사무를 비롯한 주요노동업무의 지방이양 결정은 고용노동부가 부처 명칭 변경과 관련, 산업재해 예방 및 근로자 건강보호 등 중요성을 고려하여 “산업안전보건” 기능을 추가하였다고 밝혔으면서도, 이러한 기능을 할 역량이나 의지가 부족함을 보여주고 있음. 고용노동부는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산업안전보건 기능을 자신의 주요한 기능으로 유지하려는 책임감 있는 조치를 보여주어야 함
▪ 고용노동부 스스로 노동기본권을 챙기고, 노동환경에 개선에 나설 수 있도록 하는 여건 마련과 함께 고용노동부 공무원 자신의 의식 전환이 수반되어야 함
▪ 노동유연화 정책 기조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정노동 확대 중단 및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위한 고용노동부의 입장 전환이 요구됨

양종길ㆍ김 철. 2010. 고용노동부의 탄생: 목표의 상실 혹은 전환? 한국산업노동학회 2010년 가을 학술대회 <위기 이후의 노동: 노동운동의 발전과제>(2010. 9. 3) 자료집.
[고용노동부의_탄생__목표의_상실_혹은_전환.hwp (156.00 KB) 다운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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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노동부, 바뀐 게 뭔가” (매일노동뉴스, 김학태 기자, 2010-09-24 오전 7:59:02)
정체성 고민하는 노동부 … 박 장관, 평가·반성 지시
고용노동부가 고민에 빠졌다. 지난 7월5일 부처이름을 바꾼 뒤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23일 노동부에 따르면 박재완 장관은 최근 실·국장단 점검회의에서 “고용노동부가 출범한 뒤 뭐가 달라졌는지 평가·반성해 보고 앞으로의 추진방향을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이름이 바뀐 지 두 달 남짓 됐는데도 “체감되는 것이 없다”는 게 박 장관의 지적이다.
노동부는 고용노동부로 이름을 바꾸면서 ‘고용정책 총괄부처’로서의 위상을 지향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고용정책의 경우 기획재정부나 지식경제부 등 이른바 힘 있는 경제부처와의 조율이 불가피하다. 예산권도 없다. 노동부가 주도권을 쥐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름만 바뀌는 것이 아니냐”는 냉소적인 반응이 적지 않은 배경이다. 실제 국가고용전략이나 청년종합고용대책 등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른 부처와의 의견조율이 쉽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노동부 관계자는 “우리가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고, 다른 부처와 일일이 협의해야 한다”며 “각종 고용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기가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게다가 노동부가 약칭을 ‘고용부’로 불러 달라고 공식적으로 밝혔지만, 이마저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고 있다. 박 장관은 최근 위기관리대책회의에서 “고용노동부를 고용부로 불러 달라”고 다른 부처 장관들에게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노동부 직원들에게도 “노동부로 약칭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부터 고용부로 불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처 명칭부터 시작해 주요 정책까지 고용노동부의 위상을 바로잡는 성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박종길 대변인은 “(박 장관의 뜻이) 이름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과 영역을 확실히 찾자는 것”이라며 “조만간 발표할 국가고용전략이나 청년종합고용대책 등에서 정책적인 성과를 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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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부공무원 노동환경 ‘악’소리 난다 (한겨레, 전종휘 기자, 2010-07-07 오전 08:58:59)
월평균 25시간 초과근무…민원인 폭언도 다반사
6급이하 조사결과 전출자 증가율 부처평균의 5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한국처럼 임금 체불 민원으로 이렇게 많은 시간을 쓰는 나라는 없어요. 노동부 직원이 자기의 노동권조차 못 누리는 상황에서 현장에 나가 뭘 할 수 있을까요? 노동행정이 유명무실하다는 걸 반증하는 셈이죠.”(최근 그만둔 지방노동청 7급 남성 직원 ㄱ씨)
“한 지방노동청에서 일하는 직원이 250명가량 되는데, 어떤 직원은 하루에 100여명의 민원인을 상대하기도 했어요. 민원인들에게 욕을 얻어먹는 일도 다반사죠. 가임기 여성이 많은데, 얼마 전엔 여직원이 10명 일하는 다른 부서에서 4명이 잇달아 유산을 한 적도 있어요.”(서울의 한 지방노동청에서 일하는 여성 직원 ㅊ씨)
임금체불, 해고, 산재보험, 고용보험 등 노동자들의 각종 민원 업무를 도맡고 있는 노동부 공무원들이, 정작 자신은 매우 열악한 노동환경에 놓여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노동부 공무원직장협의회는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에 의뢰해 지난해 8월부터 2달 동안 6급 이하 노동부 공무원 158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2.8%의 직원이 “업무 중 욕설이나 폭언을 들은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고 6일 밝혔다. 연구소가 작성한 ‘노동부 공무원 근무환경 및 건강실태 조사보고서’를 보면, 욕설이나 폭언 가해자의 94.6%가 민원인이었다. 응답자의 월 평균 초과 노동시간은 25.3시간으로, 굵직한 비교업종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에 해당한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이 때문에 스스로 그만두거나 다른 부처로 옮기는 직원이 다른 중앙 행정부처에 비해 월등히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1999년부터 2007년까지 다른 부처 공무원 가운데 퇴직한 인원은 연 평균 6.7%가량 줄어든 반면, 노동부는 2.3%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퇴직자 가운데 스스로 원해서 퇴직하는 의원면직자의 비중도 다른 부처의 경우 32.3%로 명예퇴직(36.6%)에 이어 두 번째였으나 노동부는 무려 60.4%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다. 또 같은 기간, 몸담고 있던 부처에서 다른 행정부처로 옮긴 전출자의 수도 다른 부처 공무원의 경우 평균 증가율이 11.5%에 그쳤으나 노동부는 55.9%로 5배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럼에도 공무원노조에 가입한 노동부 공무원은 극소수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국공무원노조 관계자는 “부처 차원에서 워낙 탄압이 심하다보니, 정작 노조에 가입한 노동부 공무원은 다른 정부부처보다도 훨씬 적다”고 전했다. 
 
노동부 공무원 이직자 증가율, 다른 부처의 5배 (매일노동뉴스, 조현미 기자, 2010-07-07 오전 10:34:07)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연구결과 … “과도한 업무 때문”
“수험생활을 했을 때는 답답해서 그렇지 훨씬 사람답게 살았어요. 공부도 하고 규칙적으로 운동도 하고…. 그런데 여기 오니까 시간이 안 나서 그렇게 할 수도 없네요.”(고용노동부 고용지원센터의 한 여성 공무원)
고용노동부 공무원의 평균 전출자(이직자) 증가율이 다른 부처에 비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부 직원들은 지난 1년 전과 비교해 업무량이 증가하고 직무스트레스가 높아진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6일 녹색병원·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노동부공무원직장협의회의 의뢰를 받아 실시한 ‘노동부 공무원 근무환경 및 건강실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8년 사이 노동부 공무원의 평균 전출자 증가율은 55.9%로 중앙부처의 평균 이직자 증가율(11.5%)의 5배에 이르렀다. 노동부 직원들은 "1년 전보다 전체적으로 업무량이 증가했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작업으로 인한 육체적·정신적 피로도가 높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노동부 직원 중에서도 고용지원센터 직원은 업무량·업무 분야, 작업으로 인한 육체적·정신적 피로도 등 모든 측면에서 다른 직원들에 비해 노동조건이 악화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노동부 근로감독관의 사건 접수 건수도 지난 5년 사이에 34.7% 증가했다.
연구소에 따르면 1년 전과 비교했을 때 민원인 스트레스(65.78점·중간점이 50점)와 일 스트레스(67.9점)가 동료 스트레스(52.8점)·관리자 스트레스(55.03점)보다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고용지원센터 직원은 동료로 인한 스트레스를 제외한 스트레스가 매우 많이 증가했다고 밝힌 반면, 본부 직원은 상대적으로 동료로 인한 스트레스가 다른 직원에 비해 높아졌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월평균 초과 근무시간은 25.3시간에 달했고, 월평균 휴일 근무일수은 1.35일로 파악됐다. 현재 주어진 업무량이 실제로 얼마나 수행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에는 "60~80% 가능하다"는 응답이 45%였고, "80~100% 가능하다"는 답변은 39.9%에 그쳤다. 또 우울증상 조사에서는 증상 완화를 위해 심리상담사 면담이 필요한 경우가 30.1%(475명)이었고, 이 중 정신과 전문의 상담이 필요한 고도 우울증상자도 12.6%나 됐다. 이는 카지노에서 일하는 노동자나 버스노동자·징계해직자보다 높은 수준이다. 연구소 관계자는 “노동부 공무원의 스트레스 중 가장 큰 원인은 과도한 업무량”이라며 “업무량을 평가해 적정인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조사에는 노동부 전체 공무원 4천120명 중 6급 이하 직원 1천580명이 참여했다.

  
노동부, 제식구도 못 챙겨…노동행정 하락 당연 (메디컬투데이 문병희 기자, 2010-07-19 07:44:28)
우울증 정도, 일반인보다 높아…업무조치 필요 수준
서울의 한 고용지원센터에서 일하는 한 여성 공무원은 다른 고용지원센터에서 한 직원이 쓰러진 것을 상기하며 본인도 보니 목, 어깨가 항상 뭉쳐 있고 손목 같은 곳에는 파스를 많이 이용한다고 밝혔다. 또 이 여성은 “최근에는 고혈압이 생겨서 고혈압 약을 먹고 있다”며 “다른 직원들도 병원에 많이 다녀 다들 환자”라고 토로했다.
문제는 노동자를 먼저 생각하고 노동자를 위해 존재하는 노동부공무원의 이 같은 말이 일부 노동부공무원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부 전체의 문제라는 데 있다. 이에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을 감시하고 책임져야 할 노동부공무원들의 노동환경이 타 정부부처에 비해 열악하고 이로 인해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악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문제점이 제기됐다.
◇ '철밥통'은 옛말…퇴직사유 1위, 의원면직 60.4%
노동부공무원직장협의회가 녹색병원·노동환경건강연구소와 공동 실시한 노동부공무원 근무환경 및 건강실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업무량이 크게 증가한 반면 인력은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최근 9년간 공무원 퇴직인원 증가율은 중앙부처 평균이 6.7% 감소한 반면 노동부의 경우 2.3% 증가했다. 정부부처는 지속적으로 퇴직인원 증가율이 떨어지고 있지만 노동부는 증가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와 관련해 2008년 퇴직사유를 살펴보면 스스로 그만두는 의원면직 비율이 60.4%로 중앙부처 평균 32.3%을 크게 웃돌았다. 또 8년간 전출자 평균은 노동부가 55.9%로 정부부처 평균 11.5%에 비해 5배가 높았다. 이에 대해 노동건강환경연구소는 “철밥통이라는 일반 공무원에 대한 국민 인식과는 달리 노동부 공무원들이 의외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노동부 공무원의 퇴직과 전출이 높은 이유에 대해 과도한 업무량을 비롯해 노동시간, 직무스트레스 등이 그 원인으로 꼽혔다.
◇ 노동행정 서비스질 향상 기대는 사치
문제는 이러한 요인이 노동부공무원의 정신건강상태를 위태롭게 하는 데 있다. 노동부공무원의 정신건강 상태를 조사한 결과 우울증의 경우 심리상담사의 면담이 필요한 경우가 30.1%인 475명으로 나타났다. 이 중 전문의의 상담이 필요한 정도의 고도 우울증상을 보인 경우가 199면을 조사대상의 12.6%를 차지해 일반인의 중등도 우울증상이 15.2%인 것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이다.
이에 대해 노동건강환경연구소 한인임 연구원은 “노동부는 노동자 및 자영업자를 포함한 2000만명에 대한 행정서비스를 책임지는 주체인데 정상적인 서비스를 받기가 어렵다”며 “절대다수를 책임지는 사람들이 최악의 상황에서 일하는데 서비스가 좋겠는가. 최하의 서비스를 가져올 거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울증 환자그룹이 너무 많아서 업무조치가 필요한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조사에 따르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의심되는 경우가 106명으로 약 6.7%에 달했다. 이 수치는 모카지노 딜러들을 조사한 결과인 6.7%와 같은 수치였으며 지하철기관사들의 6.5%와 근소한 수치다. 이에 대해 노동건강환경연구소는 노동부공무원들의 업무 수행조건을 감안해 볼 때 비교집단과 유사한 수치라는 것은 놀라운 것이고 전했다.
이 같이 열악한 노동부공무원의 노동환경에 대해 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공노) 조창형 대변인은 “노동부 근로감독관, 직원들 열악한 환은 사실이 일선의 노동현장을 감독해야 할 사람들이 이런 현장에서 정상적으로 노동자들의 실태조사를 잘 할 수 있을지 의문시 된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하지만 노동부공무원의 노동환경 개선 가능성에 대해서는 그리 밝지 않은 상황이다. 노동부공무원이 노동환경과 관련해 그들의 권익을 내세우기에는 현재 노동부공무원직장협의회의 역할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전공노 조 대변인은 “노동부의 경우 전공노에 가입돼 있지 않고 자체 협의체에서 공무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데 이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노동부는 이번 실태 조사 결과가 문제점으로 지적한 부분에 대해 노동부 조직 특성상 어쩔 수 없다고 해명했다. 노동부 관계자는 “전체적으로 6~7000명이나 되는 노동부공무원을 중앙부처와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일축했다. 하지만 그는 “현재 고객만족팀에서 근무환경 개선 또는 업무추진 절차를 개선하기 위해 불필요한 일을 줄이거나 절차를 간소화를 진행 중이며 이외 노동부 전체에 공통적으로 제도개선 중이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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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부가 ‘고용노동부’로 이름을 바꾸는 까닭 (공감코리아, 문화체육관광부, 2010.07.02)
국정 최우선 과제 ‘일자리 문제’에 정책 집중
7월5일 노동부가 ‘고용노동부’로 다시 태어난다. 최우선 국정과제인 고용정책을 책임지는 부처로 거듭나기 위해서다. 현재 국정 최우선 과제로 ‘고용’ 문제가 계속 거론되는 만큼 고용노동부의 출범은 단순한 명칭 변경이 아니다. 1948년 11월 사회부 노동국으로 출범한 고용노동부는 급격한 행정 여건의 변화와 노동행정에 대한 수요 증가로 질적, 양적인 발전을 거듭해왔다.
노동국·노동청 시절이던 1981년까지는 근로조건 보호, 노사관계 지도라는 전통적 노동행정의 집행 기능에 중점을 뒀으나 1981년 ‘부’ 승격 이후 노동정책 수립 기능을 강화해나갔다. 이후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고용정책이라는 새로운 노동정책을 발전시켜왔다.
고용정책 추진 방향 ‘수요자·시장’ 중심으로 변모
이제 고용 문제는 전 국가적 해결과제가 됐다. 노동시장에서 ‘고용없는 성장’ ‘일자리 없는 성장’이 계속되면서 청년부터 중·장년, 심지어 노년에 이르기까지 고용이 가장 절실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 이러한 상황에서 고용노동부의 출범은 노동행정의 중심축을 노사문제에서 고용중심으로 바꾸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앞으로 고용노동부는 정부 정책이 고용 친화적(Employment-Friendly)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실행하는 고용정책 총괄 주무부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지난 6월 23일 부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고용노동부 출범과 2010년 고용노동정책 방향’ 강연에서 임태희 고용노동부 장관은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임 장관은 “기존의 관념으로 보면 안 될 일들이 긍정적인 발상의 전환을 통해 얼마든지 새롭게 변할 수 있다”며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지만 다양한 정책과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다짐했다.
임 장관은 50~65세 장년층인 시니어 세대의 취업에 대한 생각도 털어놨다. 임 장관은 “이젠 평균수명이 늘어나 노동시장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다”며 “시니어 세대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사회적 기업과 같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 장관은 일자리 창출 문제와 더불어 고용노동부의 주요한 역할이 ‘노사관계의 새로운 틀을 만드는 것’이라고 밝혔다. 임 장관은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은 독립운동과 민주화 투쟁의 시발점이 됐을 만큼 그 역사적 가치가 깊다”고 설명하면서 “그러나 이런 노동운동이 점점 ‘성과 나누기’로 전락해 갈등이 발생했다”며 “앞으로 원만한 노사 상생을 위해 ‘성과 키우기’에 그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고용 친화적인 노사관계 구축 등 추진
임 장관의 말처럼 고용노동부가 추진하는 고용정책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점을 눈여겨볼 수 있다. 가장 첫 번째가 고객의 변화이다. 그동안 정책의 중심을 ‘일자리가 있는 국민’에게 맞춰왔다. 그러나 이제 ‘일자리가 없는 국민’, ‘일자리가 있어도 더 좋은 일자리를 원하는 국민’에게 맞추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방침에 따라 현재 각 부처·청에서 수행하고 있는 재정지원 일자리 사업(179개)의 종류와 전달경로를 단순화하고 통합·연계해 국민이 이용하기 쉽고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정비한다.
부처 간 산발적으로 나뉘어 있던 일자리 지원사업을 중소기업 고용창출사업, 청년 취업기능 확충사업 등으로 재정비하고, 청년층·고령자 뉴스타트 사업, 디딤돌 일자리 사업 등은 ‘취업성공 패키지 사업’으로 통합 연계해 취약애로계층이 좀 더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개선할 계획이다.
그동안 고용 문제에 대처해왔던 해결 방식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문제가 발생하면 정부의 ‘제도’를 중심으로 판단하고 해결했다. 그러나 이제는 민간이 주도하는 ‘시장’을 통해 문제를 풀어나갈 방침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민간 고용서비스 산업이 활성화된다. 고용노동부는 민간 고용서비스 선진화 태스크포스팀을 구축해 다양한 민간 고용서비스 산업 선진화 방안을 마련하고, 기존의 직업안정법을 고용서비스촉진법으로 전면 개정할 예정이다.
또한 지역·시장 친화적 풀뿌리형 사회적 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와 민간이 앞장설 수 있도록 중앙정부가 밀어주는 협업시스템을 구축할 방침이다. 아울러 지방대학을 지역.산업의 훈련수요에 맞는 직업능력개발기관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된다.
노사정책 역시 고용 친화적인 노사관계 구축에 초점을 맞췄다. 성과 배분 중심에서 성과 확대와 일자리 창출을 일궈내는 ‘생산적 노사관계’로 전환하는 것이다. 7월부터 전면 실시되는 개정 노동조합법을 기점으로 노사문화 선진화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도록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와 복수노조 허용의 시행과 관련한 교육과 홍보를 강화할 예정이다.
한편 고용노동부는 출범 이전 조직역량 강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인사제도 혁신과 정책컨설팅 중심의 감사제도 도입 등을 통해 분위기를 쇄신하고 정책들을 추진력 있게 이끌기 위해서다. 임 장관은 “고용노동부 전환은 단순한 명칭 변경이 아닌 노동부의 역할과 사명의 변화이며 정책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강조하면서 “국민이 원하는 더 많은, 더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데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7.5부터 고용노동부로 새롭게 출발합니다. (노동부 홍보기획팀, 2010-07-02)
고용노동부 전환은 단순한 명칭 변경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부의 역할과 사명의 변화이고 정책의 패러다임의 변화로 보아야 한다. 일자리정부를 국정 최우선과제로 하는 정부의 정책의지를 천명하는 의미를 가지며, 국민들이 가장 간절히 원하는 더 많은, 더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는데 최선을 다해 나갈 것이다
< 전문 >
고용이 화두인 지 오래다. 청년층은 청년층대로, 장년층은 장년층대로, 여성은 여성대로, 취약계층은 취약계층대로 취업전선에서 고전하고 있다. 고용 문제는 사회를 유지하는 근간이다. 고용정책을 총괄하고 있는 노동부가 이를 위해 거듭난다. 우선 이름부터 고용노동부로 바꾼다. ‘고용노동부’라는 새로운 이름에는 몇 가지 비전과 정책의 변화가 담겨 있다. 고용 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끌어안음으로써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사회의 안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노동부의 바람과 의지를 볼 수 있다.
< 본문 >
일자리가 모자라 아우성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개인에게는 경제활동이고 생활의 바탕이 되는 일자리, 사회로서는 경제를 발전시키고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일자리, 하여 일은 개인과 사회에게 들숨과 날숨처럼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마음과 달리 세계경제는 위기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했고, 그 여파의 끝에서 사회의 문을 두드리거나 문 밖으로 밀려난 이들은 다시 사회에 진입하기가 어렵다. 해결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노동부의 이름이 7월 5일부터 고용노동부(이하 고용노동부)로 바뀐다. 새로운 이름은 새로운 의지를 반영한다. 일자리 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것이다. 
패러다임의 전환
“고용노동부 전환은 단순한 명칭 변경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부의 역할과 사명의 변화이고 정책의 패러다임의 변화로 보아야 한다. 일자리정부를 국정 최우선과제로 하는 정부의 정책의지를 천명하는 의미를 가지며, 국민들이 가장 간절히 원하는 더 많은, 더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는데 최선을 다해 나갈 것이다.” 
임태희 고용노동부장관이 최근 한 언론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국정의 최우선 과제가 되었고, 그에 따라 노동부의 역할이 달라졌으며, 결과적으로 노동부가 고용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겠다는 뜻이다.
고용이 국정과 사회의 최대 화두가 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미래학자 제레미 리프킨은 이미 1995년 <노동의 종말>에서 ‘고용없는 성장’을 주장했다. 선진국일수록 사람의 노동을 필요로 하는 산업(노동집약형 산업)은 인건비가 싼 나라를 찾아 해외로 진출하고, 기술의 발달로 인해 제품을 만드는 과정이 자동화된 데다, 제조업보다 정보통신(IT)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다. 이에 따라 국민경제는 성장하고 있지만 국민이 일할 수 있는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고 되려 줄어드는 역설적인 현상이 벌어진다. 이처럼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하는 성장이 계속될 경우, 경제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소비자가 무너질 수도 있다. 경제의 몸집은 커졌지만 순환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용문제는 우리 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이고, 그 주무부처인 노동부의 고민은 그만큼 더 깊을 수밖에 없다.
‘고용’이 국정 최대 과제가 됨에 따라 노동부는 고용 정책을 총괄하는 부처로 거듭나기 위해 노동행정의 중심축을 노사문제에서 고용 중심으로 바꾸기로 했고 부처의 명칭도 ‘고용노동부’로 개칭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고용노동부의 정책 패러다임이 바뀌게 되었다. 가장 첫 번째가 고객의 변화다. 그동안은 정책의 중심을 ‘일자리가 있는 국민’에게 맞춰왔다. 그러나 이제 ‘일자리가 없는 국민’, ‘일자리가 있어도 더 좋은 일자리를 원하는 국민’에게 맞추고자 한다. 두 번째는 문제해결 방법이다. 지금까지는 문제가 발생할 경우 정부가 가진 ‘제도’를 중심으로 판단하고 해결해왔다. 그러나 고용노동부는 민간이 주도하는 ‘시장’을 통해 문제를 풀어나갈 것이다. 세 번째는 정책 추진의 변화다. 기존에는 제도를 운영하는, ‘공급자 중심’의 정책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앞으로는 근로자·기업 등 ‘수요자 중심’의 서비스를 펼쳐 나갈 것이다.
바뀌는 조직, 높아지는 효율성
고용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 맞게 고용노동부의 조직과 정책도 달라진다. 사실 고용노동부의 조직은 올해 초인 지난 2월에 개편되었다. 고용과 관련해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고용정책실을 확대한 것. 확대개편 과정에서 기존에 있던 직업능력정책관, 고용평등정책관, 고용서비스정책관 외에 노동시장정책관과 인력수급정책관을 신설했다. 노동시장정책관은 노동시장을 분석하고 현실에 맞는 정책을 세워 고용을 창출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인력수급정책관은 전반적인 인력수급정책 외에 청년고용대책과와 외국인인력정책과를 별도로 두어 전문성을 더했다. 새로운 관의 신설은 고용시장 전반적인 흐름을 읽기 위함인데, 정부가 주도하는 제도 위주의 정책이 아니라 민간이 주도하는 시장 위주의 정책을 펴겠다는 고용노동부의 의지가 반영된 대목이다.
새로이 개편된 조직에 맞게 사업내용도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전면 조정할 계획이다. 지난 1995년, 취업 취약계층에게 일자리를 마련하고 근로자의 실업 예방과 기업의 고용을 창출하기 위해 도입된 고용안정산업은 사업이 중복되고 복잡하다는 평가가 있었다. 고용노동부는 개인과 기업에 대한 지원금을 통합하고 구조조정을 거쳐 고용창출 효과를 배가시키기로 했다.
우선 중소기업에게 지원된 네 가지 지원금은 ‘고용창출지원사업’으로 통합된다. 취업이 어려운 취업애로계층의 재취업을 지원하기 위한 신규고용촉진장려금은 고용촉진지원금으로 이름을 바꾸고 기업이 정부와 민간의 취업애로계층 취업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을 채용할 경우에 지원한다.
지원금의 지급 현재 지원기간 1년 중 처음 6개월은 높은 수준(월60만원)으로 지급하고 이후 6개월은 낮은 수준(월30만원)으로 지급하던 것에서 지원기간 경과에 따라 지원수준을 높게 지원하는 방식(처음 6개월은 연간 지원액의 40%, 이후 6개월은 60%)으로 변경 되었다. 또한 민간의 역량을 십분 활용하기 위해 재량지출사업(고용창출지원사업, 전직지원장려금, 건설근로자퇴직공제부금)은 민간 전문기관에 위탁운영해 업무도 간소화하고 효율성은 높일 방침이다. 그리고 일단 고용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감원방지기간을 늘리고 지원 대상도 확대한다는 계획 아래 세부 추진 일정을 마련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 변화와 관련하여 엄현택 고용정책실장은 “사중손실(재화나 서비스가 효율적으로 배분되지 못하여 그 가치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 발생하는 손실)을 줄이고 취약계층의 고용을 촉진함과 동시에 일선 기업의 현장 수요에 맞는 제도로 정착시키기 위한 개편”이라며 향후 일자리 창출과 고용안정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전망했다. 
고용, 봄날은 온다
2010년 4월 기준 OECD 회원국 실업률 동향을 보면, OECD 전체 회원국 평균 실업률은 8.7%이다. 프랑스는 10.1%, 미국은 9.9%로 평균치를 웃돌고 독일이나 덴마크는 7%대로 평균치보다 조금 낮다. 반면 우리나라는 3.7%로 회원국들 가운데 실업률이 가장 낮은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임시직이나 비정규직 등 통계치에 반영되지 않은 고용의 불안정성이 없진 않지만, 향후 고용시장이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인다면 상황은 그리 비관적이지 않다. 더구나 주무부서인 고용노동부가 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으니 더욱 기대해 볼만하다.
이번에 출범하는 고용노동부는 지난 1963년 노동청으로 발족한 이후 1981년 노동부로 승격되어 직업안정과 고용, 실업, 노사안정 등 노동계 전반에 관한 업무를 다뤄왔다. 이번 개편은 노동부 승격 이래 30년 만의 변화로, 그만큼 고용시장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이름의 변화와 더불어 조직을 개편하고 정책에 가다듬은 고용노동부의 노력, 불안정한 세계경제의 환경 속에서 작은 희망을 발견하는 이유다. 고용시장의 봄날은 머지않았다.
 
노동부에서 '고용노동부'로 (레디앙, 2010년 07월 05일 (월) 10:34:29 이은영 기자)
"일자리 창출 중심"…노동계 "명칭 변경보다 실질 고용정책을"
고용노동부는 이날 오전 정부과천청사에서 임태희 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현판식을 갖는 가하면, 명칭 변경을 기념해 5일부터 오는 7일까지 '국민과 함께하는 출발(Start with you)'을 주제로 '인터넷 토론회 - 고용노동부에 바란다'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할 계획이다.
고용노동부로의 명칭 변경과 관련해 노동계는 "전시행정이 아닌 고용 창출을 위한 실질적인 정책"을 주문했다. 한국노총은 “노동부가 부처 명칭을 고용노동부로 변경하며 ‘고용’을 강조하고 있지만 고용시장의 한파는 계속되고 있다”며 “노동자 서민의 절박한 과제인 고용문제의 해결을 위해 ‘고용 없는 성장’이 아닌 ‘고용을 통한 성장’으로 고용전략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이어 “청년실업 해결을 위해 공기업에 대한 일률적인 인력감축 가이드라인을 철회하고, 공기업에 대한 신규채용을 확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민주노총 역시 “이명박 정권이 올해 들어 ‘고용’을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노동자’는 보이지 않고 ‘종업원’만 보이는 편향적 시각을 보였다”며 “성장 없는 고용이 초래한 파국적 상황에서 부서의 명칭을 바꾸는 것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전형적인 전시행정이며 탁상공론에 불과하다”며 실질적인 행동을 주문했다. 이어 “문제는 노동의 가치에 대한 존중”이라며 “노동을 천시하고 노동자를 멸시하며 노동조합을 말살하면서 어떠한 고용문제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성명] 이름만 고용노동부 (사회당, 2010년 7월 5일) 
노동부가 고용노동부로 이름을 바꿨다. 노동행정의 중심축을 ‘노사문제’에서 ‘고용문제’로 바꾸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의지의 표현물이란다.
이명박 정부가 제대로 짚고 있듯이 대한민국의 고용문제는 대단히 심각하다. 실업률만 높은 것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가 그동안 양산해 온 공공부문 일자리를 포함한 대부분의 일자리는 저임금 중노동의 열악한 일자리다. 사회생활의 첫출발부터 실업자, 비정규직이라는 딱지를 붙여야 하는 20대 국민들에게 ‘고용’이야말로 최대의 관심사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사업에 ‘살리기’라는 이름을 덧붙였다고 해서 4대강이 살아나지 않는 것처럼 노동부가 고용노동부가 됐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고용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의 그 동안의 치적을 살펴보면 고용노동부가 오히려 ‘희망근로’와 같은 열악한 임시직 일자리만 늘리고 기업에 저임금 비정규직 채용만 독려하는 고용착취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충분한 가계소득의 확실한 보장조치 없이 기업에 신규채용 압박을 하는 것만으로 고용문제가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양질의 사회적 일자리를 적극적으로 창출해야만 고용문제 해결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다. 즉, 고용불안을 일소하는 효과적인 방안은 공공서비스의 강화를 통한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고용문제가 다 해결될 수는 없다. 그래서 기본소득을 통해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사회 전체적 수준에서 일자리 나누기가 가능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명박 정부의 국정 기조는 서민수탈, 부자감세, 복지축소라고 말할 수 있다. 기본정책이 바뀌지 않는 한에서 그 동안 노동탄압의 도구였던 노동부를 고용노동부로 바꿔 부른다고 사태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름만 바꾼다고 노동탄압이 줄어들지 않는 것처럼 고용창출이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이름만 바꾼다고 대한민국이 일자리 걱정 없는 나라가 된다면 차라리 국호를 극락, 천국, 유토피아로 바꿔라.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되지 않겠는가!
 
<포럼> 고용노동부, 개칭 걸맞은 정책 보여야 (문화, 김태기 / 단국대 교수·경제학, 2010-07-06 13:52)
고용노동부가 고용 문제 해결의 총괄조정 역할을 하려면 구성원 모두가 정책 역량을 키우는 데 진력해야 한다. 고용 관련 정부 부처들과 정책 협의를 함에 있어 리더십을 보이려면 의욕만으로는 어렵다. 고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업이 나서야 하는 만큼 그 역할을 존중하고 노동 수요의 원리를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고용의 기회가 국민에게 골고루 돌아가도록 노동력 배분과 투입의 낭비 요인을 찾고, 노동력에 대한 불공정 보상의 요인을 해결하는 등 노동시장 기능의 왜곡을 해소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고용노동부 출범, “일자리 중개 서비스 확대” (참세상, 김용욱 기자 2010.07.05 12:35)
임태희 장관 고용지원서비스 확대 강조, 노사관계는 기조 유지
노동부는 7월 5일 오전 정부과천청사에서 공식명칭을 ‘고용노동부’로 바꾸고, 소속ㆍ산하 기관장을 비롯해 본부 간부와 직원, 국민대표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현판식과 출범식을 개최했다.
이날 출범식에서 임태희 고용노동부 장관은 “기존의 산업사회적, 근대적, 노동중심적 사고에서 과감히 탈피해 과거의 정책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자”며 “조만간 발표예정인 국가고용전략, 재정지원 일자리사업 효율화 방안은 이러한 시작을 여는 첫 단추가 될 것”이라고 자평했다.
임태희 장관은 “일자리 이동이 점점 많아지고 인적자원의 중요성이 높아지는 시대”라며 “일자리 중개 서비스를 유망한 산업으로 키우기 위해 끊임없는 자기개발을 지원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이명박 정권 집권 후반기를 파견노동자 허용 업무범위 확대와 직업소개 수수료 자율화, 민간기관 지원확대를 골자로 한 고용지원서비스선진화 방안과 사회서비스 시장화를 담은 ‘사회서비스 선진화 방안’을 적극 추진해 나가겠다는 계획으로 읽힌다.
노동계는 “정부가 고용지원서비스 시장을 키워 이윤을 창출하겠다는 정부의 야심찬 정책은 노동자들을 더 불안정하게 하고 더 착취할게 된다”며 “새로운 시장 형성도 아닌 데다 노동자들의 더 많은 이동을 통해서 수수료가 발생하는 것이라 노동자들의 고용은 더욱 단기간화 될 것”이라고 지적해 왔다. 단기적 일자리가 더 늘어나기 때문에 고용은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고, 다단계 공급 구조가 늘어날 것이라는 설명이다.
임 장관은 또 “선진 노사관계는 아무리 환경이 변해도 일자리 창출의 가장 필수적 기반”이라며 “지난 7월 1일부터 시행중인 노조전임자 근로시간 면제제도는 합리적 노사관계의 기틀을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해 노사관계는 기존 정책기조를 유지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고용노동부는 이날 출범을 계기로 △“고용노동부에 바란다” 전문가 토론회 △청년을 대상으로 한 강연콘서트 △주요 대기업 인사담당 임원 및 경제5단체 상근 부회장과 함께하는 청년고용 확대를 위한 간담회 등의 행사를 연다.
 
고용노동부로 새출발 했지만… 노동계 “노동행정 약화” 우려 (경향, 유정인 기자, 2010-07-05 18:14:24)
ㆍ임장관 “노동중심 사고 탈피”
노동부가 5일 고용노동부로 명칭을 바꾸고 새롭게 출범했다. 1963년 노동청으로 발족해 81년 노동부로 승격한 뒤 29년 만이다. 변화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일자리를 만드는 주무 부처로 변신하기 위한 것이라고 고용노동부는 강조했다. 하지만 노동계는 노동자에 대한 보호와 배려는 등한시하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이날 오전 정부과천청사에서 현판식을 열고 소속·산하 기관장과 직원, 국민대표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출범식을 했다. 임태희 장관은 기념사에서 “경제·사회의 변화에 맞춰 정책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기존의 산업사회적, 근대적, 노동중심적 사고에서 과감히 탈피하자”며 “우리의 중심고객은 ‘일자리를 찾는 사람, 더 나은 일자리를 원하는 사람’임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고용노동부는 각 부처의 일자리 정책이 현장에서 제대로 집행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부처로서 모든 정부 정책이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창조적 해법을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제시해야 한다”며 “조만간 발표될 예정인 국가고용전략, 재정지원 일자리사업 효율화 방안이 그 첫 단추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용노동부는 앞으로 행정의 중심축을 ‘노동’에서 ‘고용’으로 옮겨 일자리 정책 주무부처로서 거듭나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노동계에서는 정부 안에서 노동계의 입장을 가장 많이 반영해야 하는 노동부가 이름을 바꾸면서 역할까지 바꿀 것을 우려하고 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소장은 “현재 우리나라 노조 조직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저 수준인 10%대로 헌법이 보장하는 단결권이 약화되고 있는 실정”이라며 “노동부가 해야 할 역할이 많은 상황인데 고용노동부로 명칭을 바꿔 고용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하니 자칫 기존의 영역들을 소홀히 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한편 고용노동부는 이날 지난 1일부터 시행된 타임오프(유급인정 노조활동) 관련 교섭 진행현황을 공개했다. 고용부에 따르면 지난 4일 기준으로 올해 상반기 단체협약이 만료된 사업장 1320곳 중 362곳이 타임오프 한도와 관련한 단협을 체결하거나 잠정합의했다. 이 중 타임오프 법정 한도를 적용하기로 한 곳은 현대중공업과 쌍용자동차 등 341곳(94.2%)으로 나타났으며, 초과한 곳은 금속노조 산하 사업장 16개를 포함해 21곳(5.8%)이었다고 고용부는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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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부, 고용정책을 총괄하는「고용노동부」로 (노동부 보도자료, 2010. 5. 19)
- 정부조직법 개정안 국회 통과 -
□ 노동부 명칭이 「고용노동부」로 바뀌고, 고용정책의 총괄기능이 한층 강화된다. 국회는 5월 19일 본회의를 열어 이 같은 내용의 “정부조직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의결했다.
 ○ 동 정부조직법 개정법률안은 앞으로 정부로 이송되어 국무회의 의결 및 대통령 재가를 거쳐 공포될 예정이며, 공포 후 1개월이 경과한 7월 초경 시행될 예정이다.
□ 노동부의 역사
 ○ 노동부는 1948년 11월 사회부 노동국으로 출범한 이래 급격한 행정여건의 변화와 노동행정에 대한 수요 증가로 질적ㆍ양적  발전을 거듭해 왔다. 노동국ㆍ노동청 시절이였던 1981년까지는 노동행정의 태동기로 근로조건 보호, 노사관계 지도라는 전통적 “노동행정의 집행기능”에 중점을 두었으나 1981년 「부」 승격 이후 “노동정책 수립기능”을 강화하는 한편,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고용정책이라는 새로운 노동정책을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다.
 ○ 2010년 「고용노동부」로 개편됨에 따라, 경제ㆍ산업ㆍ복지ㆍ교육 등 정부정책이 고용친화적(Employment-Friendly)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등 “고용정책 총괄” 주무부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 「고용노동부」 출범을 계기로 고용정책 방향 전환
 ○ 고용노동부 출범을 계기로 고용정책 추진방향도 수요자ㆍ시장중심으로 바뀔 전망이다.
 ○ 우선, 정부의 재정지원 일자리 사업이 ‘일자리가 있는 사람’보다는 ‘일자리가 없는 사람’ 중심으로 운영되도록 수요자 입장에서 재설계할 계획이다. 현재 각 부처·청에서 수행하고 있는 재정지원 일자리 사업(179개)의 종류와 전달경로를 단순화하고 통합적으로 연계하여 국민이 이용하기 쉽고 국가 전체적으로 효율적 운영될 수 있도록 정비해 나갈 계획이다.
 ○ 또한 종합고용서비스산업 육성 및 민간위탁 확대를 통해 민간고용서비스시장을 활성화하여 시장친화적 고용정책의  전달 기반을 마련하고 지자체 및 민간의 참여를 통해 지역·시장친화적 풀뿌리형 사회적 기업을 확산하여 고용문제를 시장중심형으로 해결할 계획이다.
 
□ 노사정책도 ‘고용친화적’으로 추진
 ○ 「고용노동부」 출범에 맞춰 노사정책도 ‘고용 친화적 노사관계’ 구축에 초점을 맞춰 추진한다. 현장과 지역 중심의 파트너십 구축을 통해 ‘성과 배분 중심’에서 ‘성과 확대와 일자리 창출’ 중심의 「생산적 노사관계」로의 전환을 유도할 방침이다.
 ○ 아울러, 노사문화 선진화의 토대가 될 전임자․복수노조 제도가 산업현장에서 안착될 수 있도록 교육·홍보 등을 강화하고, 불합리한 노사문화와 관행 개선, 법과 원칙을 바탕으로 한 노사문제 자율해결 원칙 등도 견지할 계획이다.
 
□ 최고의 고객만족 구현을 위한 조직역량 강화
 ○ 한편, 노동부는 「고용노동부」로 출범을 앞두고 정책역량과 고객서비스를 획기적으로 높이기 위한 조직역량 강화 프로젝트를 추진 중에 있다. 인사제도 혁신과 정책컨설팅 중심의 감사제도 도입 등을 통해 신상필벌을 확립하고 일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동시에 「고용노동부」의 비전을 정립하여 전 직원이 공유하고 직원 사기진작과 간부들의 역량강화를 통해 긍지와 보람의 고성과 일터를 만든다는 계획이다.
 ○ 임태희 장관은 “「고용노동부」가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최일류 부처로 다시 태어나는데 장관 이하 전 직원이 합심하여 최선을 다해 나갈 것”임을 강조했다.
  
고용노동부 약칭 ‘고용부’…‘노동 홀대’ 논란 (한겨레, 남종영 기자, 2010-05-23 오후 07:32:09)
노동계 “차라리 ‘고(된)노(동)부’”
고용노동부로 부처 이름이 바뀌는 노동부가 약칭에서 노동을 빼고 ‘고용부’로 부르기로 확정한 것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노동부는 23일 “최대 국정과제인 고용정책을 총괄하는 부처로 거듭나겠다는 차원에서 고용노동부의 약칭을 고용부로 쓰기로 확정했다”고 밝혔다. 개정된 정부조직법안이 지난 19일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오는 7월부터 노동부의 명칭은 고용노동부로 바뀐다.
이 명칭을 어떻게 줄여 부를 것인지를 놓고 노동부는 그동안 ‘노동부’, ‘고용부’, ‘고노부’ 등 후보작들을 검토해왔다. 부처 내부에선 노동부란 이름이 국민에게 친숙하니 약칭으로 해야 한다는 의견과 새 출발을 하는 뜻에서 고용부로 하자는 의견이 맞서왔다. 그러다 임태희 노동부 장관이 최근 “고용노동부로의 전환은 노동부의 역할 변화이자 정책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말한 뒤 고용부가 약칭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노동부의 이런 방침에 노동계는 노동의 가치나 노동자를 홀대하는 현 정부의 가치관이 드러난 것이라며 불만의 목소리가 높은 상황이다. 약칭이 법적 효력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중앙부처의 이름에서 ‘노동’이란 단어가 빠진 것은 노동청이 노동부로 승격한 1981년 이후 처음이다.
정승희 한국노동조합총연맹 부대변인은 “노동이 경영과 함께 우리 사회를 이끄는 두 축임에도 불구하고, 주관부서인 노동부마저 ‘노동’이라는 단어를 경원시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민주노총은 이날 논평을 내어 “자칭 시이오(CEO) 아래에서 노동자는 고된 노동을 감내할 수밖에 없음을 다시 확인한 셈”이라며 “차라리 고용노동부를 ‘고된 노동’을 의미하는 ‘고노(苦勞)부’로 부르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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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부 2010. 4. 29 보도자료
노동부는 노동부 명칭변경과 고용정책의 총괄기능 강화를 골자로 한 ‘정부조직법 일부개정법률안'이 4월 29일 국회를 통과했다고 밝혔다. 노동부는 1948년 11월 사회부 노동국으로 출범한 이래 노동국·노동청을 거쳐 1981년 노동부로 승격돼 노동정책을 담당해 왔다.
이날 개정법률 통과로 인해 명칭이 ‘고용노동부'로 바뀌면서 경제·산업·복지·교육 등 정부정책이 고용친화적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등 ‘고용정책 총괄' 주무부처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노동부는 고용노동부 출범을 계기로 고용정책 추진방향도 수요자·시장 중심으로 바뀔 것으로 보고 정부의 재정지원 일자리 사업이 ‘일자리가 있는 사람' 보다는 ‘일자리가 없는 사람' 중심으로 운영되도록 재설계할 계획이다.
종합고용서비스산업 육성 및 민간위탁 확대를 통해 민간고용서비스 시장을 활성화해 시장친화적 고용정책의 전달 기반을 마련하고 지방자치단체 및 민간의 참여를 통해 지역·시장친화적 풀뿌리형 사회적 기업을 확산, 고용문제를 시장중심으로 해결할 방침이다.
노동부는 노사정책도 ‘고용 친화적 노사관계' 구축을 위해 현장과 지역 중심의 파트너십을 구축, 전임자·복수노조 제도가 산업현장에서 안착될 수 있도록 교육·홍보를 강화하게 된다.
임태희 장관은 “인사제도 혁신과 정책컨설팅 중심의 감사제도 도입 등을 통해 신상필벌을 확립하고 일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겠다”며 “고용노동부가 국민에게 사랑받는 부처로 다시 태어나는데 전 직원이 합심해 노력해 달라”고 말했다.
 
[정책논평] 고용노동부 명칭변경에 부쳐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 2010.04.29 23:05:05)
어제(29일) 국회 본회의에서 '정부조직법 일부개정 법률안'이 의결되어 6월 중순부터 현재 '노동부'의 명칭이 '고용노동부'로 변경된다. 이 개정 법률안이 다음 달 국무회의 의결과 대통령 재가를 거쳐 공포되는 것은 기정사실화되었다. 지난 2월 24일 ‘노동부와 그 소속기관 직제 개정령안’을 통과해 ‘인력수급정책관’을 신설한 이후, "일자리 창출이 정부 최대 목표"라고 강조한 이명박 정권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은 4대강 사업, 언론법 개악, 영리병원 허용 등 온갖 시책에 일자리 창출의 포장을 하여왔다. 그러나 정작 고용사정이 변화되었다는 그 어떤 증거도 발견할 수 없었다. 오히려 고용률이 57.1%로 지난 경제위기시보다 -2% 악화되었을 뿐이다.
고용노동부로 바꾸면서 내놓은 대책은 더욱 가관이다. “민간위탁 확대를 통해 민간 고용서비스 시장을 활성화해 시장친화적 고용정책의 전달기반을 마련할 것"이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국가가 당연히 제공해야할 고용서비스마저 포기하는 고용정책의 후퇴마저 예고되고 있다.
“재정지원 일자리 사업 179개의 종류와 전달경로를 단순화하고 통합적으로 연계할 것"이라고 강조는 무의미한 언어유희에 불과한 것이다. 고용정책실이 실장1명을 비롯해 노동시장정책관ㆍ인력수급정책관ㆍ직업능력정책관ㆍ고용평등정책관 및 고용서비스정책관이 고작인 현실에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이들이 국가고용정책을 수립하고 통합집행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뿐이다.  국가고용서비스 기관(고용지원센터)이 독일의 830개, 일본의 600개의 거의 1/10에 불과한 81개에 불과하고, 직원 1인당 8,293명을 담당해야하는 현실(09.3월 현재)에서 이에 대한 아무런 개선책없이 ‘고용노동부’로 명칭을 바꾼다고 될 일이 아니다.
고양이가 아무리 살이 쪄도 결코 호랑이가 될 수 없듯이, 이명박 정권의 반노동정책이 바뀌지 않는 한 고용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이명박 정권이 국민들의 ‘고용안정’을 정부차원에서 진정으로 추진할 의사가 있다면, 지금 당장 해야할 것은 독립적인 ‘국가고용청’의 신설이다. 이를 통해 국가가 책임져야할 고용전략수립과 통합집행, 그에 따른 고용지원센터의 확대와 관련 인력의 확충 및 고용예산의 대폭확충이다. 명패바꾸는데 수억원을 들일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노동부로부터 독립된 고용청 신설이 우선이다.
일반회계는 10%에 불과하고 90%는 노사가 충당한 각종 기금으로 사업해온 노동부, 고용행정의 전달체계역할에 불과한 노동부, 노동탄압에 앞장서온 노동부로부터 ‘고용’을 떼어내 독립시키는 것이야말로 지금 당장 일자리 창출과 안정을 위해 해야 할 첫 번째 과제이다. 노동부에 ‘고용’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명패까지 다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이며, 결코 일자리 안정을 기할 수 없다. 시간이 이를 증명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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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부, 고용 중심으로 조직 개편…노사관계 선진화 추구 (서울=뉴시스, 서유정 기자, 2010-02-16 10:33)
노동부가 2010년 최대 현안인 '일자리창출'과 '노사관계선진화'에 역량을 집중하기 위해 큰 폭으로 조직 개편을 실시한다고 16일 밝혔다. 노동부는 노사협력정책국·근로기준국·산업안전보건국을 통합해 노사정책실을 신설하고 고용정책실에 인력수급정책관을 두기로 했다. 정부는 16일 국무회의에서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노동부와 그 소속기관 직제' 개정령안을 의결했다.
노사정책실 신설은 전임자·복수노조 개정법 시행 등을 앞두고 노사관계 선진화에 필요한 조직과 인력을 뒷받침하고 범 부처간의 협력과 공조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노동부는 노사정책실에 2010년 말까지 '노사관계선진화 실무지원단'을 한시적으로 두어 전임자·복수노조 개정법 시행과 제도의 연착륙을 지원키로 했다고 밝혔다.
고용정책실 확대 개편은 국가고용전략회의 지원 등 일자리창출과 관련된 정책 역량을 집중·강화하기 위한 취지로 마련됐다. 고용정책관을 노동시장정책관으로 변경하고 국가고용전략 등 중장기 고용정책과 고용친화적인 경제·산업정책 수립을 지원하기 위해 '고용전략과'를 신설하고 또 산업별·지역별·세대별 인력 미스매치 해결에 집중하기 위해 인력수급정책관을 신설했다. 이와함께 감사 기능을 적발·징계에서 정책 컨설팅 중심으로 전환하고 민원업무·옴부즈만 제도 등을 담당하는 기획조정실 소속 고객만족팀을 감사관실로 이관키로 했다.
한편 지방노동관서 고용지원센터의 역할과 기능을 대폭 강화하기 위해 일선 조직을 개편했다. 취업지원 및 기업서비스 기능을 확충하기 위해 지원부서인 지방노동관서의 관리과 기능을 고용지원센터로 통합하고 기능통합에 따른 절감인력을 사업부서의 조직·인력보강에 활용할 예정이다. 6개 지방노동청에는 '지역협력과'를 신설하고 '취업지원과' 16개를 증설하는 등 고용서비스의 질적 향상을 추구키로 했다.
노동부는 이번 조직 개편을 '효율적인 정부 구현'이라는 정책기조에 맞춰 인력증원 보다는 현 정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으로 추진 (5726명→ 5740명) 했으며 직제 개편에 맞춰 본부와 소속기관 전체에 대해 유동정원제를 실시할 계획이다.(4·5급 이하 4940명의 5% 수준인 247명) 임태희 노동부장관은 "이번 노사정책실 신설로 상생협력하는 노사관계를 촉진, 기업의 생산성 향상을 통해 일자리 유지 및 창출을 유도하고 고용정책실 확대개편으로 노동시장 정책을 적극 펼침으로써 정부 최대 목표인 일자리 창출에 큰 힘을 실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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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부 대신 ‘고용노동부’…‘일자리 역점’ 이름 바꾸기로 (경향, 강병한 기자, 2010-01-06 00:56:05)
노동부의 고용 관련 기능과 업무가 강화·확대되고 명칭도 ‘고용노동부’로 바뀐다. 정부는 이르면 2월 임시국회에 이 같은 내용의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제출할 예정이다. 한나라당 신상진 제5정조위원장은 5일 “지난주 임태희 노동부 장관과 당정협의를 하고 노동부의 일자리 창출 기능을 대폭 확대하기로 했다”며 “노동부가 이제 과거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고용을 핵심업무로 삼아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고용 문제를 1~2년 사이의 단기 과제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국가적 아젠다 차원에서 장기적, 체계적으로 풀어나갈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방침은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4일 신년 국정연설을 통해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 국정과제로 규정하고 고용 증대를 적극 추진하기로 하는 등 ‘고용 없는 성장’ 극복에 중점을 두기로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와 관련해 노동부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구직·구인 중개회사 설립을 추진하기로 했다. 졸업 예정자 80만명과 우량기업 6만개의 정보를 취합하는 인력중개 포털 사이트도 개발할 예정이다. 노동부는 지난달 14일 2010년 업무보고에서 전국 150여개 대학에 인사나 노무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춘 대기업 출신 은퇴자를 채용해 구직 상담 등을 도울 ‘취업지원관’을 신설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행정플러스] 고용노동부로 명칭 변경 (서울, 2010-03-31  24면)
노동부는 30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부처 명칭을 고용노동부로 변경하는 내용을 담은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의결됐다고 밝혔다. 행정안전부가 제출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은 명칭 변경과 함께 고용노동부의 업무 영역에 고용정책과 산업안전보건을 추가하고 기존 직업훈련 업무를 직업능력개발훈련 업무로 변경했다. 임태희 장관은 “고용노동부로의 전환은 노동부의 역할과 사명의 변화이자 정책 패러다임의 변화로 봐야 한다.”면서 “더 많고 더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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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인동窓] 노동부의 수난시대 (노동법률 10월호, 2009/09/07 12:59, 이병훈 참여연대 노동사회위원회 위원장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요즘 노동부가 그 존립 가치를 의심받고 있다. 과연 노동부가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대변하는 정부 부처로서 제 기능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해 문제 삼는 목소리가 폭넓게 메아리치고 있다.
1981년 4월 노동청으로부터 정부 부처의 하나로서 승격된 노동부가 그동안 경제부처의 주도권에 밀려 정부 정책 결정에 있어 노동자 대변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는 지적이 적잖게 제기되어 왔지만, 이명박정부의 출범 이후에는 아예 하는 일 마다 노동자들의 권익에 반하는 정책 만들기에만 몰두하고 있는 듯하여 무척 황당하기만 하다. 아무리 친기업 정권이라고 하지만 노동부가 노동자 보호보다는 기업들이 원하는 고용유연성과 인건비 절감만을 성취하기 위헤 애쓰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스스로 자신의 존립 근거를 허무는 데에 열중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근 노동부의 반노동자적인 실체는 무엇보다 비정규법의 개악시도에서 잘 확인되고 있다. 경제위기를 맞이하여 올해 초 노동부는 마치 비정규직들의 고용불안을 걱정하는 듯 “100만 비정규직 실업대란설”을 주장하며 기간제의 사용기간을 현행의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는 법개정을 공공연히 추진하였다. 지난 6월말 현행 비정규법의 시행 2년 시한을 앞두고는 사용기간 2년 법조항의 시행을 유예하려는 한나라당의 방침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시금 “70만 실업대란”을 내세우며 야당과 노동계-시민사회단체의 반대여론을 잠재우려 애쓰기도 하였다.
하지만, 7월을 지나 9월이 되는 현시점까지 노동부가 그토록 부산스럽게 걱정하였듯이 비정규직법으로 인한 대량실업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상당수 사업장에서는 조용히 법취지에 맞추어 2년 이상의 장기 근속 기간제 근로자들을 정규직 또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노동부의 ‘엉큼한’ 걱정을 무색케 하고 있다.
지난 9월 4일 노동부가 발표한 「사업체 기간제근로자 실태조사」결과에서도 비정규직법의 기간제한 규정이 적용된 7월 시점에 계약기간이 만료된 기간제 근로자 19,760명 중에서 정규직 전환이 36.8%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도자료를 통해 노동부는 고용계약 종료 37.0%와 정규직 미전환 26.1%를 일컬어 마치 법 때문에 고용불안에 놓인 비정규직이 63.1%에 이르는 것으로 주장하며 이전의 “실업대란”설이 정당하였다는 듯이 항변하고 있다.
그런데, 그 조사결과를 곰곰이 따져보면 실업대란의 거짓주장을 덮으려는 매우 옹색한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기타”로 분류되어 있는 26%의 정규직 미전환자는 현행법에 따르면 이미 무기계약직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이므로 사용자의 정규직 전환 여부에 관계없이 법상 고용안정을 보장받고 있는 것이며, 고용계약이 종료된 37.0% 역시 사업장의 여러 사정이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모두 법 때문에 그리 된 것으로 간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노동부는 억지로 비정규직법의 개악을 추진하려고 실업대란의 허위사실을 유포한 점에 대해 불안에 떨었던 수많은 비정규직들과 국민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뜻을 밝히려 하기는 커녕 자체 조사결과를 아전인수식으로 왜곡하면서 또다른 거짓을 내세우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럽기만 하다.
노동부가 반성치 않고 이런 처사를 계속해서 보이고 있는 것도 문제되지만, 보다 고약스러운 점은 정작 비정규직들을 구제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노동부는 의도했던 법개정이 무산되었다면 국회에서 놀고 있는 추경예산 1,185억원을 활용하기 위해 중소사업체의 정규직 전환을 지원하도록 하는 관련 법개정을 서둘러 추진했어야 하는데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고 있지 않다. 또한, 이번 사업체조사결과에서 드러나듯이 적잖은 사업장-주로 중소사업체에서-에서 2년 계약기간을 넘긴 기간제 근로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 노동부는 이들의 고용불안만을 문제 삼을 게 아니라 이런 탈법 상황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규직 전환을 계도하는 현장근로감독을 대대적으로 벌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조치도 취하고 있지 않다. 아울러, 2010년 예산편성에 있어서도 노동부는 15.5% 삭감된 예산안을 제출하여 사회적 일자리·청년실업대책·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 등과 같이 취약노동계층을 위해 확보되어야 할 사업예산을 스스로 포기하는 태도를 보여 직무유기의 무책임함을 드러내고 있기도 한다.
MB정부의 1년 반을 지나는 요즘 노동부는 그동안 그릇된 정책 추진, 허위사실 유포, 그리고 직무유기 등으로 인해 여론의 호된 비판 대상으로 전락되고 국민의 신뢰를 잃고 있다. 이렇듯, 노동부가 수난의 시대를 겪고 있는 것은 따지고 보면 스스로 자초해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정부의 노동부는 친기업의 국정기조에 맞추느라 궤변의 정책논리를 내세우며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제 역할을 전연 소홀히 하고 있으니 스스로 제 존립의의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제라도 노동부가 제 이름에 걸맞는 위상과 권능을 회복하려면 그동안의 노동정책이 보여온 난맥과 왜곡에 대해 국민과 노동자들에게 책임성 있게 사과하고 노동자를 보호-대변하는 본연의 책무로 되돌아가려는 진정한 반성의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번 장관의 교체를 통해 노동부가 수난시대를 마감하고 국민과 노동자들로부터 신뢰를 되찾는 부처로서 거듭나는 변화의 계기를 마련해주기를 간절히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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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보장제도의 효율적 운영을 위하여 보건복지부와 노동부를 통합하여야 한다.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1998-01-21)
국가부도위기라는 초유의 경제위기상황은 일찍이 우리사회가 경험해 보지 못한 대량실업사태를 초래하고 있다. 5%를 상회할 것으로 예상되는 대량실업사태는 그나마 발달된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최소한의 삶의 질을 보장하고 있는 선진국의 실업문제와는 그 차원을 달리하여 엄청난 사회적 문제를 초래할 것으로 예상된다.
생존권의 위협, 사회적 갈등의 증폭, 범죄등 각종 사회적 병리현상의 심화등 대량실업사태가 몰고올 사회적 파장은 현재로서는 예측하기 조차 어려울 지경이다. 더욱이 "저성장 - 고실업"구조와 기업 및 가족의 복지기능의 약화라는 상황에서 취약한 우리사회의 사회복지제도는 더 이상 사회적 안전판의 역할을 할 수 없다.
따라서 고용안정대책과 더불어 사회보장제도의 근본적 개혁과 정비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당면과제가 되고 있다. 이에 참여연대에서는 지난 1월 7일 법국민적인 사회보장제도개혁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
최근 김대중당선자측과 정부는 정부조직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정부조직개편을 진행하고 있는 바, 참여연대는 취약한 사회보장제도를 정비·확충하고 효율적인 사회보장제도운영을 위하여 반드시 보건복지부와 노동부의 통합이 이루어져야 함을 지적하고자 한다.
기존의 공적연금제도, 퇴직금제도, 고용보험제도, 의료보험제도, 생활보호제도 등 각종 소득보장 및 의료보장 관련 제도는 대량실업과 저성장(임금삭감)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상황에 대응하여 유기적, 혁신적으로 재편되어야 하며, 의료보험조합, 국민연금관리공단, 근로복지공단 등 수없이 쪼개져 있는 기존의 사회보험 행정체계도 최대한의 효율성을 갖출 수 있도록 대대적인 통폐합을 단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수십조원에서 수조원에 달하는 각종 사회보험의 기금운용방식도 사회적 안전망의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혁신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회보장제도의 근본적 개혁을 위해서는 보건복지부와 노동부의 통합이 필수적인 바, 각 사회보험별 관리운영주체가 각 부처로 분리되어 있는 한 부처이기주의로 인해 제도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당면한 복지행정과 노동정책의 핵심과제가 사회보장정책이라는 점에서 사회보장제도의 효율적 운영과 확충을 위해서 유관부처의 통합은 제도개혁의 선행과제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더불어 중앙부처의 사회복지 행정체계 개편은 사회복지 지방행정체계의 개편과 함께 추진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사회복지서비스의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전달을 위해서는 지방 일선행정체계의 보강이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보훈처와 노동부의 지방사무소와 보건소 조직의 활용방안, 그리고 정보, 복지, 고용 등 다양한 서비스의 제공센타로서 읍·면·동 사무소의 기능을 전환하는 방안 등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분리 운영되고 있는 사회보험 관리운영체계는 사회보험청 혹은 사회보험관리공단으로 단일화하여 통합관리운영되도록 하여야 하며, 통합된 조직은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의 전환, 운영효율성 향상 그리고 민주성, 투명성, 전문성 확보의 원칙하에 관리운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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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2 16:27 2012/08/12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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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지역정치의 대안 - 민중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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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민중의 집을 나름의 대안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각 지역에 맞는 모델이 필요한 것은 사실인데, 구체적으로 그게 뭘지 상이 안 잡힌다. 민중의 집도 하나의 모델은 될 수 있을 텐데, 마포사례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는 없을 듯 싶다. 마포 민중의 집이 여전히 잘 운영되고 있다면, 정경섭이라는 헌신적이고 걸출한 활동가, 중앙 문화운동단체의 지원, 지역주민운동의 기반, 진보적 지역정치 대안으로서 마포사례에 대한 운동진영의 관심과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지, 다른 지역에도 가능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대안을 관악에서도 만들어가고 싶은데, 관악의 활동가들은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더라. 

일단은 다양한 경험들을 취합해보자. 

  


 

“위기의 진보 구할 아름다운 집 둘러봤죠” (한겨레, 엄지원 기자, 2012.08.08 19:50)
[이사람] 유럽 진보거점 순례기 펴낸 정경섭 민중의 집 대표
100년 전 시작된 ‘민중의 집’ 답사
술·이웃·토론·배움이 있던 큰 공간
“풀뿌리운동 모아 기초체력 다져야”

“로마의 원형경기장보다, 스페인 알함브라 궁전보다 제겐 더 아름다운 곳입니다.” 최근 <술과 이웃, 토론과 배움이 있는 세상에서 가장 큰집, 민중의 집>을 펴낸 정경섭(40) 민중의 집 대표의 얘기다.
20세기 초반 유럽 전역에서 민중의 집은 하나의 사회현상이었다.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노동자 조직, 정당, 협동조합, 시민단체들의 거점이 자생적으로 우후죽순 생겨났다. 막 생겨난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정당은 정부의 탄압을 피해 민중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초기 싼 값에 빵과 와인을 제공해 노동자들의 마음을 열 수 있었던 민중의 집은 밥만이 아니라, 병원과 약국 등 의료서비스, 연극과 음악회 같은 예술 공연, 정치 교육과 직업 훈련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민중의 집은 쉴 곳 없는 노동자들에게 안식처가 됐다. 정 대표는 “자본주의 사회의 대안적인 생활양식을 만들려 했던 사람들의 노력이 삶의 모든 영역을 껴안는 민중의 집으로 구현된 것”이라고 말했다.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유럽 민중의 집에선 밤엔 왁자한 파티가 열리고 낮엔 열띤 정치 토론이 벌어진다. 정 대표는 2010년 8월 꿈에 그리던 ‘성지 순례’를 감행했다. 이탈리아, 스웨덴, 스페인 민중의 집을 45일동안 둘러봤다. 국내에 민중의 집과 관련된 자료가 없어 외국 자료를 번역하는 데에만 1년이 넘는 기간이 걸렸다. “진보진영에서 유럽의 진보정당사나 노동운동엔 관심이 많았지만 유럽 진보의 일상사를 밝힌 건 처음일 거에요. ”
정 대표가 홍세화 진보신당 창당준비위원회 대표와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마포 민중의 집은 2008년 11월 망원동에 문을 열었다. 처음 마포에 문을 열 땐 ‘민중의 집’이라는 개념을 알리는 일조차 힘겨웠지만 지금은 후원회원 450명에 6곳의 노동조합, 6곳의 상인회, 16곳의 지역단체가 뜻을 모으고 있다. 지난해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이 파업할 땐 홍대 앞 지역상인회가 밥과 반찬을 실어 날랐다. 마포 가든호텔 노조 요리사들은 민중의 집에서 지역 주민을 위해 요리교실을 열고 있다. “노동자들이 서로 이웃이 돼 먹고 놀고 즐기는 일상생활을 함께 하며 풀뿌리 진보운동의 정치·사회적 의미를 체험합니다.”
최근 진보신당은 해산됐고 통합진보당에선 내홍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정 대표는 “우리 진보 진영이 부침을 거듭하는 건 기초체력이 없어서”라고 진단했다. “현장에서 대중과 소통하고 지역의 풀뿌리 운동을 결집시키는 민중의 집이야말로 진보진영이 위기를 겪는 지금,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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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집』: 세상에서 가장 큰 집 (레디앙 / 2012년 8월 7일, 12:29 PM)
좋은 유럽을 만든 주춧돌 ‘민중의 집’을 가다
“스웨덴 민중의 집은 대부분의 스웨덴 사람들 가슴에 살아 있고 남아 있으며, 민중의 집이 없이는 살아 있는 마을도 고립되고 황폐해질 것이다. 한마디로 민중의 집이 없이 스웨덴은 존재할 수 없다.” (16쪽)
김영삼 정부 시절인 지난 1996년 국책연구기관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발표한 <문화의 집 모델 및 운영 방안에 관한 외국사례 조사연구>(정갑영·임학순) 논문에 나온 구절이다.
스웨덴 모델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민중의 집 얘기를 들어본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스웨덴에는 크고 작은 민중의 집이 전국적으로 500개 이상이 있으며, 이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 숫자만 연간 5천만 명으로 스웨덴 인구의 5배가 넘는다. 놀라운 수치다. 민중의 집이 그만큼 사람들 일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주는 수치다. 이뿐 아니다. 국민의 70퍼센트가 민중의 집과 긴밀한 관계인 노동자교육협회를 통해 시민 교육이나 강의에 참여한다. 거기다가 ‘민중공원’ 이야기는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다.
“민중공원은 다른 나라와 다른 스웨덴만의 독특한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민중공원은 민중의 집처럼 지역사회 공동체가 직접 만든 놀이공원이다. 지역별로 이런 공원을 만들어서 지역 주민이기도 한 노동자와 시민들은 자기 자신과 가족에게 쉼터를 제공했다. 우리로서는 잘 상상이 가지 않는 규모의 사업이다.” (162쪽)
민중의 집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유럽 전역에 생긴 풀뿌리 민중운동의 산물이다. 당시 진보정치운동과 노동자운동이 이 사업의 핵심 주체였다. 민중의 집은 주민으로서 노동자와 민중의 일상생활과 정치 경제 사회적 활동이 복합적으로 연결되는 장소였다. 또한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만남은 물론, 노조·정당 등 다양한 조직이 공식, 비공식적으로 회합하는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뿐 아니라 민중의 집은 값싼 와인과 빵 같은 생필품을 공급해주는 곳이자, 병원·약국 역할도 했다. 연극 공연, 음악회 개최, 영화 상영, 스포츠 경기 등 다양한 문화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토론과 예술이 함께 어우러지는 곳이다.
이 같은 공간은 유럽 전역에 걸쳐 만들어졌으며, 각 나라마다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발전했다. 그러나 명칭만은 모두 ‘민중의 집’이었다. 물론 100년이 지나는 사이 어느 나라에서는 과거의 일이 돼버렸고, 초기와 성격이 달라진 곳도 있으며, 노동조합 사무실을 ‘민중의 집’으로 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민중의 집은 여전히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비자본주의적’ 공간을 지향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거점이다.
『민중의 집』은 풀뿌리 생활 진보정치 현장활동가로 뛰고 있는 저자가 스웨덴, 스페인, 이탈리아 유럽 3국의 ‘민중의 집’을 45일간 방문한 후 쓴 기록이다. 저자는 100여 년 역사를 가진 민중의 집과 그 집에서 일하고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 모습을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가감 없이 우리에게 보여준다. 유럽 민중의 집의 기원을 비롯해 역사적인 변천 과정, 진보정당과 노동운동의 관계, 유럽 민중의 집의 교훈 등에 대해 현장활동가의 눈으로, 주민 중심의 시선으로 설명해주는 책이다.
저자는 지난 2008년 국내에서 최초로 서울 마포에 ‘민중의 집’을 열어 지금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민중의 집이라는 공간을 전국에 확산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책이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기행문이나 방문기 수준을 넘어, 한국에서 적용 가능한지를 염두에 두고 깊게 관찰한 내용으로 채워진 것은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당연한 결과다.
저자가 활동하는 마포 민중의 집의 경우 2010년만 보면 각종 지역단체 67곳에서 233차례 공간을 이용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주민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온 ‘화요 밥상’을 비롯한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꿈이 이 땅에 수백, 수천 개의 민중의 집을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마포 민중의 집도 아직은 역사가 일천해 한 일보다는 할 일이 더 많다. 구로나 중랑 등 서울의 다른 지역에 세워진 민중의 집과, 농촌 지역에서 만들어진 ‘농민의 집’도 걸음마 수준이다.
최근 붕괴 수준에 가까운 진보정당이 당면한 참담한 현실, 노동운동의 대중적 신뢰도 저하 등 이른바 진보의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여기저기서 ‘현장 중심, 생활 중심’을 외치고 있으나, 말로만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민중의 집』이 현장 중심의 풀뿌리 운동을 하고 있거나 하려는 이들에게 많은 영감을 줄, 좋은 ‘참고서’가 되리라 저자는 기대하고 있다.
“이 책은 지역에서 풀뿌리 진보운동을 하고 있거나, 하려는 사람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이자 훌륭한 참고서이다. …… 민중의 집은 지역 협동조합과 노동조합, 시민단체 및 진보정당이 함께 만들고 운영했으며, 이들 조직은 민중의 집을 통해 서로 융화되고 동질감을 형성하며 자신들의 공간을 창출했다. 민중의 집 100년 역사를 소상하게 밝혀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유럽에서 진보를 꿈꾸던 사람들이 지역에서 민중의 집을 통해 어떻게 소통하고 관계를 맺었는지를 살필 수 있으며, 한국사회에서 지역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많은 이에게 이탈리아, 스웨덴, 스페인 민중의 집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이 커다란 영감을 줄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홍세화)
이 책은 이탈리아, 스웨덴, 스페인 민중의 집을 각 장으로 나눠 현실의 모습과 역사적 변천 과정, 미래에 대한 전망 등을 다뤘으며, 마지막에는 저자가 주도적으로 참여해서 만든 마포 민중의 집 사례가 자세하게 소개돼 있다. 특히 저자가 45일 동안 방문한 다양한 형태의 민중의 집에 대한 구체적 묘사는 한국에서 지역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상상력과 힌트를 줄 것으로 기대된다. 스웨덴의 정치사회 구조, 복지정책 등에 관한 책은 꾸준히 출판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민중의 집에 대해서 소개한 책은 없다. 그 점만으로 이 책은 의의가 있다.
 
책 속에서
성별, 나이, 직업, 피부색이 다른 주민들이 만나고 즐기고 생활하는 공간이자 지역사회단체들의 네트워크 구조로서 민중의 집은 분명 우리에겐 찾아볼 수 없는 인상적인 장소였다. 우리는 또 지역 주민들의 생활에서 시작하여 새롭게 ‘정치’를 정의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젊은이들도 만났다. (본문 47쪽)
이탈리아에서 민중의 집이 생길 당시 ‘잔돈의 집’으로도 불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노동자들이 잔돈을 푼푼히 모아서 지은 집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본문 95쪽)
좌파 대학생 치르콜로, 민주당과 재건공산당, 사회당의 리프레디 지역지부가 이곳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해외원조 단체, 스포츠 단체, 영화 관련 단체 등 다양한 사회 문화운동 단체 사무실도 있었고, 여성들만으로 구성된 영화 모임과 같은 풀뿌리 모임을 위한 방도 있었다. …… 당구장과 카드놀이 방이 있다. 작은 회의실 겸 도서관에는 학생들이 모여 공부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본문 106쪽)
여길 어떻게 알고 왔냐고 묻기에 인터넷에서 웹사이트를 찾아봤다고 하니 루까가 깜짝 놀란다. 홈페이지 관리자인 루까가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한국 아이피로 접속한 기록이 있어 의아해 했다는 것이다. 그 방문자가 실물로 나타났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본문 147쪽)
“스웨덴 민중의 연합회는 칠레와 우루과이뿐 아니라, 필리핀 민중의 집 운동을 지원한 적이 있다. 또한 보스니아에 민중의 집 건설을 지원하는 국제연대 활동을 했다. 북유럽 지역 민중의 집 간에 협력을 모색하고 있다. 핀란드와 노르웨이 민중의 집을 초청하는 행사도 했었다. 그곳 민중의 집이 여기보다 100배 더 크다.” (본문 181쪽)
노동자교육협회를 통해 공부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리 많을 수 있나. 안네는 이 질문이 좀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너무 당연하게 여긴 스웨덴 사회의 ‘문화’라니 그럴 법도 하다. 스웨덴에서 시민교육이나 강의에 참여하는 것은 매우 일상적이라 국민의 70%는 언제나 하나 이상의 스터디 서클에 참여한다. (본문 233쪽)
 
목 차
1장 이탈리아
민중의 집과 정당
-대안 사회의 새싹
-이탈리아 좌파 정당 약사
-21세기에 공산당을 재건하려는 정당
-좌파생태자유와 니키 벤돌라
민중의 집과 노동조합
-노동자의 집, 노동회의소
-파티하자, 정당Party하자
피렌체 : 130년을 이어온 리프레디 SMS
-무솔리니도 탐냈던 민중의 집
-삶을 즐기는 공간, 저항의 거점
-130년을 이어온 리프레디 SMS
블로냐 : 전통의 붉은 도시
-좌파 정당 분열, 민중의 집 축소
-민중의 집은 노인회관?
-젊은이들이 오고 있다
-이탈리아를 떠나며 : 잊을 수 없는 산타 리베라
2장 스웨덴
“민중의 집 없는 스웨덴은 없다”
-민중공원과 민중의 집 : 기원과 역사
-민중의 집 총본산, 연합회를 가다
-정책 생산에서 뮤지컬까지
-민중의 집 연합회 운영 구조와 사업
-정당, 노동조합과 관계 및 연대활동
-100년 동안의 진화와 새로운 길
스톡홀름 인근 : 다채롭게, 젊게, 새롭게
-니나삼 : 복합 문화예술 공간
-락스베드 : 2007, 새로운 민중의 집
-란케비 : 이주민의 집
스웨덴 총선 한가운데서
-차분한 선거운동, 어디에나 있는 투표소
-여성 정치인, 모나 살린에 반하다
-좌파연합 vs 우파연합
-사민당의 역사적 패배
스터디 서클 민주주의와 노동자교육협회
-노동자교육협회의 10가지 과제
-국민 70퍼센트, 스터디 서클 참여
-모든 것이 교육 주제
예테보리 : 대형화된 민중의 집
-함마쿨렌 :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
-예테보리 : 노총 수익사업의 공간
말뫼 : 다시 만드는 미래
-공동체 극장과 민중공원
-소피엘룬트 : 지역사업의 박람회
-루센고드 :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곳”
3장 스페인
그 많던 민중의 집은 어디로 갔을까?
안달루시아, 치명적 절도의 추억
-노조 사무실을 민중의 집으로 불러
-프랑코 정권과 민중의 집 파괴
-그라나다 : 미조직 노동자 사업
마드리드 : 노총회관이 민중의 집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 재단
-민중의 집 사라지다
-과거의 흔적들
-노총회관과 민중의 집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운동, 그리고 새로운 기운
-다시 쏠 광장으로
스페인 사회주의 마을 마리날레다
에필로그를 대신하여 – 마포 민중의 집

 

 


 

 

구로 민중의집, “주민 노동자가 정치적 주체” (참세상, 천용길 수습기자 2011.10.25 16:28)
[인터뷰] 강상구 구로민중의집 준비위원장
지난 15일 구로 민중의집이 문을 열었다. 마포, 중랑에 이어 세 번째다. 민중의집은 이탈리아, 스웨덴, 스페인에서 노조와 진보정당 등이 시작한 운동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지역 주민, 노동자들의 자발적 교육·생활·문화 공동체를 지향하며 2008년 7월 마포 민중의집이 문을 열었다.
구로 민중의집 건립의 주축은 진보신당 구로당원협의회 당원들이었다. 강상구 전 구로당협위원장이 민중의집 건립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강상구 위원장은 지난 7월 진보대통합 논의 당시 “민중의집을 거점으로 계급적 단결을 하자”며 ‘진보의 재구성’에 대한 입장을 밝혀왔다. 진보정당 간 통합은 무산됐다. 하지만 그는 상층의 진보통합 논의와 관계없이 꾸준히 구로 민중의집을 건립까지 진행해왔다. 지역 풀뿌리 운동을 통해 진보의 재구성을 구상하는 강상구 준비위원장을 만났다.
민중의집을 찾아간 21일은 정식으로 문을 연지 일 주일이 채 되지 않아 완성된 모습은 아니었다. 민중의집에서 상근하는 박은희 간사는 “주민노동자들과 함께 조금씩 채워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어린이 도서관으로 운영할 계획이라는 소회의실에서 강상구 준비위원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강상구 위원장은 “구로 민중의집은 지역 주민이자 노동자인 주민노동자의 공동체”라며 “주민노동자의 주체적인 요구를 모아낼 때 노동자 정치세력화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민중의집이 서로 다른 일을 하는 노동자들끼리 웃고 떠들고 놀 수 있는 곳이 되고자 한다"며 "이 주민노동자들의 공통의 요구를 모아 지역을 상대로 싸움을 하겠다"고 민중의집 계획을 밝혔다.
다음은 강상구 위원장과 인터뷰 전문이다.
구로 민중의집은 어떻게 만들어 졌나
흔히 노조에서 사업장 담벼락을 넘어서자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노동자가 계급적 단결을 해 정치세력화 하자고 한다. 그런데 막상 그게 잘 안 된다. 작은 사업장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 더더욱 쉽지가 않다.
큰 산별노조도 있고 지역 단위의 일반노조 형태도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내고 이들을 조직하자고 하지만 한계가 있더라. 교섭 하러 다니기 바쁘고, 그러다보니 일상적 사업이 없더라. 서로 다른 노동자들끼리 잘 섞이지도 못하고... 지역에 사는 대다수의 주민들도 노동자인데 이들이 서로 만나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다른 ‘주민노동자’들이 뒤섞여서 웃고 떠들고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중의집이 그 역할을 하고자 한다.
그럼 주민노동자들이 모이고 나서 무엇을 할 생각인가
민중의집을 준비할 때 주변에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내가 어린이 도서관운동 10년 동안 해봤는데 그거 가지고 안돼” 등등... 중요한 것은 지역사업에 대한 목표다. 기존 노조가 포괄할 수 없는 미조직된 주민노동자들이 스스로 정치세력화 되는 것이 목표다.
첫 번째로, 민중의집이 서로 다른 일을 하는 노동자들끼리 웃고 떠들고 놀 수 있는 곳이 되고자 한다. 그 다음은 이렇게 모인 노동자들에게 공통의 요구가 있을 것이다. 이 요구들을 모아서 지역 권력을 상대로 투쟁을 할 계획이다. 지역사장들 연합체가 될 수도 있고, 주민노동자의 공통의 요구를 가지고 구청을 상대로 싸울 수도 있다.
올해부터 주민참여예산제가 시행됐다. 여기에 주민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생각이다. 단순히 요구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민노동자가 직접 의논하고 판단하는 과정이다. 구청에 요구해서 잘 안 될 경우 싸움도 하고.
주민참여예산제에 참여가 어떤 변화를 가져올거라 생각하나
구청에서 하는 행사에 가 보면 우파 단체 사람들 밖에 없다. 좌파들은 풀뿌리 조직 자체가 부실하다. 기존의 우익 조직을 뒤집을 수 있어야 한다. 지역 자체를 좌파적으로 만드는 거다.
주민참여예산제 통해서 직접 참여하는 경험을 가지면 정치의식이 올라갈 것이다. 권력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 풀뿌리 차원의 힘이 필요하다. 기존 우파 조직들처럼 조기축구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유명한 사람과 명망가 강연을 한다고 정치의식이 성장하지는 않는다. 스스로 참여하고 결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민중의집 운영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민중의집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총회-운영위-프로그램기획모임 형태로 운영할 계획이다. 마포 민중의집이랑 협의도 하고 소식지도 같이 내고 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민중의집 개소식 때 참석한 방문간호사분과 전화 통화를 했다. 그 분이 “여러 가지를 많이 느꼈다. 학교에서 밥 타는 아이 사진을 보면서 아이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배식하는 노동자와도 함께하겠다는 말에 새로운 걸 느꼈다. 나도 아이를 가진 엄마라 아이 얼굴만 보이더라”고 말씀하더라. 이 분도 10개월 계약직이다. 이러한 주민노동자들이 주체로 나설 수 있도록 하겠다.
이 곳 회의실을 어린이도서관으로 운영하자는 이야기가 있다. 어린이도서관을 운영하더라도 노동자인 부모들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자 한다. 또 경제교육을 하더라도, 주민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목표로 하고 운영할 생각이다. 수요밥상을 준비하고 있다. 함께 섞여 밥 먹는 것은 참 중요하다. 누구를 초대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잘 섞일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
민중의집은 그간 활동가들이 주장과 설득, 설명하려고 하는 모습에서 공감과 소통의 매개 역할을 하는 공간이 되고자 한다. 주민노동자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매개가 되어주는 것이다.
또, 진보적 공간들의 네트워크 역할도 하고자 한다. 구로에도 여러 노조들의 사무실이 있는데 자기들만 쓴다. 지역노동자와 공동체에서 이를 활용할 수 있으면 좋지 않겠나. 민중의집에서 만난 사람들은 노조위원장이던 진보정당 위원장이건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진보정당과 민중의집은 어떤 관계가 있나
선거철만 되면 진보정당 후보들이 유세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유독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안 나오면 만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 지역 노동자들과 잘 몰랐던 거다. 노조와 진보정당, 민중의집은 각기 다른 역할을 할 수 있지 않겠나.
민중의집 운동으로 기존 지역정치를 혁신하고자 한다. 주민노동자가 스스로 정치의식화 되지 않으면 우리를 지지할 순 있지만 생각이 바뀔 수는 없다.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방식의 운동을 만들고자 한다. 지역사회가 바뀌어야 중앙권력도 바뀐다. 아무토대 없이 바꾼다면 의미가 없다. 이렇게 바꾸어 나가는 것이 진보정당이 노동자운동에 기여하는 것이다.
현재 구 별 당원협의회 체계도 바뀌어야 한다. 당원협의회 상근자들이 민중의집 상근자가 돼야 한다. 그래야 대중의 실질적 요구를 받아서 현실을 반영한 정책이 만들어 질 수 있다.
다음 달에 진보신당 대표단 선거가 있다
대표 선거에 출마할지 부대표로 출마할지 확실히 정하지는 못했다. 민중의집에 완전히 집중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다만, 민중의집 운동을 전국적으로 퍼트리기 위해 대표단 선거에는 출마할 생각이다.
활동가들의 상이 달라져야 한다. 노조와 진보정당 활동가가 똑똑하고 말 잘하는 이미지에서 저 사람 있으면 재미있다, 즐겁다, 뭔가 결정이 난다는 사람이 돼야 한다.
자기 관념만 급진화해 과격한 입장을 내는 것은 세상을 바꾸는데 도움이 안 된다. 주변사람들이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치적 지지를 받으려면 민중의집을 통해 지역운동을 해야 한다. 급진적이냐 개량적이냐 논쟁만 할 것이 아니다. 민중의집은 새로운 실험이다. 책임을 가지고 지역정치 혁신을 해보겠다. 지켜봐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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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 최전선, 구로 민중의집 활짝 (레디앙, 2011년 10월 17일 (월) 10:30:23 황종섭 / 구로 민중의집 준비위원)
[기고] "주민 노동자들의 진보적 네트워크…풀뿌리 보수와 경쟁"
2011년 10월 15일, 구로에 ‘민중의집’이 정식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마포, 중랑에 이어 세 번째 민중의집이 생긴 것입니다.
지역에는 다양한 형태로 일을 하고 있는 노동자가 있습니다. 노동조합을 통해서 모이는 노동자도 있지만 대다수는 노조가 없는 곳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가깝게는 구로 민중의집이 세들어 있는 ‘은하수 빌딩’에서 청소하는 노동자, 민중의집 바로 옆에 있는 ‘하나로 마트’의 계산원 등 수많은 비정규·미조직 노동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멀게는 이날 행사에도 참석하셨던 오셨던 구청 소속의 방문간호사, 그리고 도서관 사서, 공원 관리원 등 구청에서 일하는 수많은 일용직, 계약직 노동자가 있습니다.
이분들을 저희는 ‘주민노동자’라 부릅니다. 즉 지역에 살면서 지역에서 일하는 분들이죠. 이러한 주민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포함한 기존 정치의 바깥에 놓여 있습니다. 발언권도 없고 힘도 없죠. 정치 세력들 또한 이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에게 잃어버린 목소리와 스스로 힘을 갖도록 하자는 문제의식이 민중의집의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민중의집은 주민노동자의 생활 공동체이자 노동조합이 되려고 합니다.
혹자는 민중의집에 대해 이런 비판을 합니다. 지금은 민중의집 같은 공동체 사업보다 정치를 해야 한다고 말이죠. 여기서 말하는 정치는 물론 진보정치겠죠. 이러한 비판의 바탕에는 공직에 당선이 되어 좋은 정책을 펼치면 이들의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에 상당한 의문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지역에는 수많은 주민 네트워크가 있습니다. 흔히 3대 관변단체라고 이야기하는 새마을(새마을운동본부), 자총(한국자유총연맹), 바살협(바르게살기중앙협의회)부터 통반장 모임, 심지어 종교라는 고리로 모인 네트워크도 있지요. 이들의 대다수가 보수적인 입장을 대변한다는 것은 아실 것입니다.
지역 밖에서 볼 때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지역에서 이들의 입김은 상당합니다. 특히 관청에서 하는 행사나 사업에도 굉장히 열성적으로 참여하지요. 사실 보수정치의 힘은 이들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에서 실제로 움직이며 여론을 만드는 사람들이죠. 이러한 ‘풀뿌리 보수 네트워크’는 진보정치의 큰 장애물입니다. 설사 공직에 진출하여 진보적 정책을 실현하려 하더라도 이들의 방해 혹은 거부를 넘어야만 합니다. 올해 서울시 모든 구에서 처음으로 시행하는 주민참여예산제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주민참여예산제의 취지는 이름에서 드러나듯 주민들이 예산 책정에 참여할 수 있는 좋은 제도입니다. 하지만 참여예산위원을 신청하고 등록하는 이들은 주로 이 ‘풀뿌리 보수 네트워크’에 소속된 주민입니다. 나중에는 최초의 문제의식과 취지와는 상관없이 시스템 스스로 보수화될 것입니다. 구로구는 좀 상황이 나아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진보적 활동가들이 최선을 다해 참여해도 힘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게다가 주민노동자 네트워크 같은 토대 없이 좋은 정책이나 시스템을 짤 수도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데이터를 보고 만든 정책과 주민노동자가 스스로 만든 정책은 굉장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저희도 지역에서 노동자들을 만나기 전에 자료와 데이터를 보고 연구를 합니다. 그리고 문제점과 대안을 고민해서 미리 초안을 들고 갑니다. 하지만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면 저희가 머리로 생각했던 것들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구로 민중의집은 지역에 이미 존재하는 어떠한 시민단체와도 다릅니다. 구로 민중의집은 단순히 지역에서 착한 일을 하는 단체가 되는 것을 경계합니다. 구로 민중의집은 지역과 노동이라는 고리를 통해 진보정치를 재구성할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민노동자 네트워크가 일정한 궤도에 오르면 지역에서 확실한 변화를 담보할 것이라 믿습니다. 처음에는 직업도 다르고 관심사도 다른 노동자들이 모입니다. 생각을 나누고, 연대를 이룹니다. 그 과정에서 공통의 요구를 찾고, 이를 쟁취하기 위해 현재의 권력에 민중의집 이름으로 함께 대항합니다. 진보정치가 우리 주변에 산재해 있는 목소리 없는 사람들에게 힘을 갖게 하는 것이라면 민중의집은 진보정치의 최전선입니다.
물론 민중의집을 짓는다고 이런 것들이 자동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제 겨우 큰 꿈, 새로운 실험의 첫 발을 내딛었을 뿐입니다. 앞으로 더 많은 곳에 민중의집이 생겨 지역으로부터 진보의 재구성을 함께하길 바랍니다.

 


 

→ 강상구 동지의 제안에 동의하는데, 아직은 일반론에 그치고 있다. 사회서비스 협동조합 구상과 잘 섞어보면 뭔가 나올 것 같기도 한데... 더욱이 지역에 일을 하고 싶어 하고 능력이 있는 진보적인 인사들이 상당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쪽에 있는 사람들은 이들과 함께 사업하는 걸 꺼려한다. 당협에서 의사결정권을 가진 이들은 나중에 선거 출마를 예정하고 있고, 그래서 경쟁자들이 생겨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먼저 깃발을 꽂는 사람이 지역 진보정치계에서는 임자인 셈이다. 사무국장은 보통은 당협위원장, 당직후보로 나아가는 통로가 되고 있다.
활동가의 재생산문제도 쉽지 않다. 자신의 자리를 넘보지 않으면서도 정당활동도 열심히 하는 이들이 필요한데, 정작 이런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당원 조직화, 당원 교육의 문제는 심각하다. 민중의 집 프로젝트가 주민조직화의 한 방편이라면 이를 위해 나설 수 있는 당원들은 과연 어떻게 교육되고 활동가가 될 수 있을까. 경향신문, 희망버스 소식, 프레시안, SNS 등을 통해 의식화되는 이들이 좀더 정치의식이 심화되고 고양될 수 있는 기제는 무엇일까. 민주노동당이, 그리고 진보신당의 실험이 실패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바로 당을 통해 당원이 단련되지 못했다는 것 때문이다. 대부분은 자신의 역량을 소모하는 데 그쳤다. 정작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는 이루어지지 못한 셈이다. 민중의 집 프로젝트는 "오마이뉴스가 뭔지도 모르고, 경향신문이나 조선일보나 똑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희망버스가 어디 관광회사 이름인 줄 아는 노동자들, 어버이연합이 효도 캠페인 하는 시민단체인 줄 아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접근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미 어느 정도 당원으로 조직된 이들이 학습되고 단련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이들을 대상화하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고, 이들은 정치에 대해 흥미를 잃게 되거나 유력인물의 팬클럽 활동에 머물게 될 것이다. 술마시고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으로, 그러면서 가벼운 잡담과 뒷담화를 하는 것으로 끝나선 안 된다.

 

통합파, 지역 주목-현실적 집권전략으로 (레디앙, 2011년 08월 08일 (월) 09:48:11 강상구 / 진보신당 구로 당원)
[to 진보신당 통합파] '독자파'와 접점 찾으려면 '통합론' 재정비를
사실 저의 구상에 대한 가장 큰 지적은 '민중의 집'이라는 개별 사업을 지나치게 확대해서 의미 부여를 과도하게 한 측면이 있고, 구상 자체도 좀 황당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지적은 일리가 있습니다. ‘민중의 집’이 무엇인지 잘 알려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너무 강조를 많이 했다 싶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제안문을 잘 보시면 제가 강조한 것은 ‘민중의 집’이라기보다는 지역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생활의 거점이 필요하다는 점이었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비정규직 노동자인 민중들의 일상적인 ‘만남의 장소’를 광범위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민중의 집’이 단순히 무슨 무슨 문화센터처럼 개별 장소를 말한다거나 전국적으로 이미 여러 개 있는 노동복지센터처럼 ‘상담 역할’ 등에 집중하는, 이미 다수가 존재하기 때문에 별로 새로울 것 없는 그런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름다운 가게’는 가게에 불과하지만 분명히 하나의 운동이자 경향입니다. 동네에 있는 생협 매장은 역시 단순한 가게이지만 나름의 지향을 담은 커다란 운동입니다. 저는 ‘민중의 집’을 통해서 지역노동정치혁신운동을 제안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민주노총과 진보정당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지역에서 새롭게 만나고 지금껏 손도 대보지 못한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커다란 운동에 제대로 매달려 보자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구상 자체도 좀 황당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꿈꿔왔던 새로운 세상은 늘 ‘황당한 구상’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불가능한 것을 사고’하지 않으면 세상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런데 제 구상은 사실 그렇게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황당 축에도 끼지 못합니다.
제가 관심이 있는 것은 ‘집권 전략’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 토대 없이 집권해서 하고 싶은 일 못하거나 쫓겨나거나 혹은 무능이 탄로나는 그런 식의 집권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실 정치 지형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면서 집권의 가능성을 높이자는 주장은 경청해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이런 주장은 아마도 진보운동 ‘상층의 능력과 적응력’을 극대화시키고 이를 통해 대중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자는 주장일 텐데요. 저는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기보다는 대중 자신이 새로운 사회의 주체로서 탈바꿈하고 성장하는 과정이 동시에 진행되는 집권을 하고 싶습니다. 이 두 가지가 다른 게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 이 두 가지 방식은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최근에 진보신당 서울시당은 민주노총 서울본부 일반노조와 함께 학교급식조리 노동자 조직사업을 했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많은 당 활동가들은 이 과정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겁니다. 노동자들을 만나고, 요구 사항을 가지고 집회를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활동가들이 집회 나오라고 하니까 집회 나오고, 구호 외치라고 하니까 구호 외쳤습니다. 저는 기회 있을 때 마다 “여러분들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조리 노동자 분들은 집회나 모임이 끝날 때 마다 이렇게 얘기하셨습니다. “잘 좀 해결해주세요.” 저는 이 얘기가 가장 듣기 싫었습니다. 우리가 무슨 민원 처리해주는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급식조리 노동자들은 마치 관공서에 방문한 순박한 주민처럼 늘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모든 상황은 그들이 아니라 활동가들이 만드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열심히 일해주니 참 고맙다.”고 했습니다. 단언하건데 운동 이런 식으로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활동가가 주도하고, 활동가가 계획하고, 활동가가 해결하는 그런 식으로는 새로운 주체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일이 꼬여서 구로지역 학교급식 노동자들과 긴급회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지역 교장들은 모두 노동조합에서 요구하고 서울시 교육청에서 지시한 대로 따랐는데 구로 지역은 안 그랬습니다. 학교 급식 노동자들이 화가 났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우리 으쌰으쌰 한 번 해요.”
그렇게 해서 쫓아간 남부 교육청에서 급식조리 노동자들은 함께 소리 지르고 몸싸움하면서 그 동안과는 다른 표정의 사람들이 됐습니다. “싸우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를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부터는 싸움의 주인은 기존 활동가들이 아니라 노동자들입니다.
저는 작은 노동조합 활동부터 집권을 향한 전략까지 그 모든 과정에서 민중들이 스스로 주체로 서는 것이 활동의 원칙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리 답을 알고 있고 먼저 고민했다고 해서, 대중이 결정하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싸움을 대신해주는 것은 상층의 능력은 키울 수 있을지 몰라도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는 애초부터 불가능해집니다.
아래가 없는 상태에서 진행하는 집권전략, 비정규 노동자 등을 ‘보호해야 하는 대상’ 정도로 생각하고 대중운동을 대리해서 혹은 대신해서 정치가 역할을 해야 한다는 방식의 집권전략은 장기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런 방식은 잘못하면 당은 살고 대중운동은 약해지는 방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대중운동이 발전하고 당도 발전해야 합니다. 대중운동의 성장이 당의 성장을 가져와야 합니다. 반대로 당의 성장의 과정에서 대중운동의 성장도 함께 도모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운동이란 ‘새로운 사람들을 운동의 주체로 만드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비정규 노동자들이 운동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게 아니라 이들이 스스로 싸우고 쟁취하며 자신들도 크고 작은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을 도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들을 보조할 뿐입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대중들이 스스로 단결할 수 있도록, 그리고 계급적 힘을 경험할 수 있도록 옆에 함께 있어 주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집권 전략은 사회를 획기적으로 바꿈으로서 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전략입니다. 진보적인 사람들이 새롭게 대거 출현하고 그 사람들의 압도적인 힘으로 집권을 하는 전략이 저는 훨씬 현명하며 동시에 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확실한 집권 전략은 ‘지역을 바꾸는 것’입니다. 중앙은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전체 그 자체는 아닙니다. 오히려 지역이 곧 전체입니다. 지역을 바꾸자는 것은 국가 전체를 그 뿌리부터 촘촘히 통째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지역은 누구나 아는 것처럼 풀뿌리 우익 조직들의 망으로 장악되어 있습니다. 진보정당의 지역 조직은 분명히 지역에 존재하기는 하는데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물 위에 떠 있는 기름처럼 주민들 위에 그냥 떠 있습니다.
진보정당 지역조직의 행동패턴은 대개 몇 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 활동가들이 동네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당원들도 이웃들과 친하지 않은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 지역 당 조직은 대부분 ‘선전전’ 같은 걸 합니다. 중앙당이나 시당의 지침을 동네에서 그대로 실행하는 정도의 역할을 합니다. 혹시 근처에 노동자들이 파업하는 사업장이 있거나 아니면 한진중공업 같이 큰 일이 터지면 열심히 찾아다닙니다.
두 번째, 지역에 파고들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지역 우익 조직이 장악하고 있는 각종 모임에 들어갑니다. 조기 축구회에 나가고, 교회나 성당에 다니고, 심지어 이름만 들으면 금방 우익 조직임을 알 수 있는 조직에 나가서 ‘기회’를 엿봅니다.
세 번째, 주민들이 한 번에 많이 모일 수 있는 프로그램 같은 걸 기획하고 여기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을 잘 관리하면서 선거운동 조직 관리하듯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명 인사들 불러서 강연시키고 그걸 매개로 주민들을 만나는 방식이 이런 경우입니다. 위원장은 동네 주민모임이나 행사는 가리지 않고 인사 다니면서 자기 얼굴 알리기에 바쁩니다.
네 번째, 지역 주민들의 생활 속에 보다 깊숙하게 들어가기 위해서 지역 조직 자체를 스스로 만듭니다. 진보적 주민 모임을 직접 구성하기도 하고 참여하기도 합니다. 어린이집도 만들고, 생활협동조합 마을 모임 같은 데 나가기도 합니다. 지역의 진보적 시민단체 및 노조를 네트워크로 묶으려 노력합니다.
저는 집권을 꿈꾸는 정당이라면 네 번째 경우를 대폭 늘려야 한다고 봅니다. 비정규직 조직화 같이 우리의 고민이 제대로 관철되는 그런 지역모임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지역모임은 주민들을 새로운 운동의 주체로 만드는 데 기여할 것입니다.
사실 한나라당, 민주당 같은 보수 정당들은 이미 이런 일을 오랫동안 해 왔습니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가치로 무장된 주민들이 보수정당이 따로 뭘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움직이고, 스스로 자기 논리를 옆 사람에게 알리고, 생각이 다른 사람과는 적극적으로 싸우고, 다른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드는 논리를 스스로 생산해서 퍼뜨려 왔습니다.
그 동안 우리라고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의 가치로 무장된 사람들이 스스로 움직이고 스스로 주체가 되어 싸워왔던 곳은 대체로 공장이나 회사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이제 지역으로 넓혀야 합니다.
그래서 진취적이고 도전적이며 때로는 황당하고 약간 미친 것 같은 기획이 필요합니다. 제 계획대로 하면 전국에 5년 안에 1,000개의 민중의 집을 만들 수 있습니다. 기초지자체별로 따지면 약 5개 정도의 민중의 집이 생깁니다. 이 거점들을 중심으로 5년이든 10년이든 활동을 해서 한 곳당 주민 3,000명 정도를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제가 구로의 한 동에 있는 어린이 도서관의 회원수를 봤더니 3,000명이 넘었습니다. ‘장난감 나라’라고 장난감을 대여해주는 곳이 있습니다. 여기는 회원이 1만 명을 훌쩍 넘겨 2만 명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구로에는 구로시민센터라고 구로 3, 4동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단체가 있습니다. 여기 회원이 역시 3,000명이 넘습니다. 동네 교회나 성당의 회원 역시 기천명이 넘는 곳이 부지기수입니다. 우리도 이 정도는 해야 합니다.
한 곳당 3,000명이면 5곳이면 15,000명입니다. 우리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15,000명이면 이를 통해서 지역사회의 진보적 재편을 모색하는 게 무조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이런 과정을 통해 지역을 바꾸고 그 성과로 국회의원을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진보정당 국회의원은 87년 이후 노동운동의 성과가 집중된 몇 군데 지역을 제외하면 모두 비례대표 의원이었습니다.
소선거구제하에서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을 돌파하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선거법을 바꿔서 또 하나는 야권연대를 통해 그리고 마지막은 지역을 근본적으로 바꿔서 가능합니다. 야권연대는 늘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선거법 바꾸는 노력은 당연히 계속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역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제가 보기에는 시간은 걸리지만 더 확실하고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저는 진보운동이 여기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지역에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층’의 활동 역시 여러 모로 중요합니다. 지역에만 몰두하다보면 국민들이 지역 활동은 인정하지만 중앙정치 무대에서 활약하기에는 미흡하다고 인식하는 정당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외국에 이런 정당들이 있습니다.
중앙의 역할로는 우선 제도를 바꾸는 게 있을 수 있습니다. 통합진보정당이 되고 선거에서 승리하면 1차적으로 비정규직법 같은 악법을 바꾸겠다는 주장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민주당이 몇 년 사이에 비정규직을 상당수 줄이겠다고 주장하고 나선 마당에 애초부터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외쳤던 진보정당이 그 가능성을 보고 민주당과의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서 혹은 보다 커진 힘으로 민주당이 약속을 지키도록 강제하기 위해서 통합진보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 또한 나름대로 논리적 일관성이 있습니다.
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도입이라는 제도의 변화로 가능했던 것을 보면 제도를 바꾸는 것은 확실히 유의미합니다. 그러나 중앙에서 제도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만약에 대중운동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라거나 진보정당이 지역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중앙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라는 식의 이유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제도 정치권이 중앙정치 활동을 통해서 해결하는 문제도 있지만 또 어떤 문제는 대중의 움직임이 정치권을 압박해서 해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값 등록금 문제는 제도 정치권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대중의 압박이 최근 상황을 주도했다는 데에는 의견이 같으실 겁니다. 2008년 촛불집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요한 국면마다 등장하는 다양한 ‘항쟁’들은 모두 대중투쟁이었습니다. 그 항쟁의 결과는 대한민국의 10년, 20년을 결정적으로 좌우합니다.
핵심은 우리가 어디에 중심을 둘 것인가에 있습니다. 진보정치의 토대가 되는 조직된 대중이 광범위하게 존재한다면 중앙정치 무대에서의 활동은 얼마든지 우리 마음먹은 대로 다양하게 가능합니다. 하지만 대중의 존재 없이 중앙정치 무대에서만 움직이는 것은 그것 말고는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움직일 수 있는 폭도 좁아지고 대중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기도 쉽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늘 정치적 이벤트, 이미지 정치, 그리고 선거가 가까운 시기에는 각종 정계 개편에 매몰될 수밖에 없습니다. 진보정당의 운명을 이런 것에 맡길 수는 없습니다. 물론 제가 정치적 이벤트, 이미지 정치 등에 전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정치는 늘 이미지이며 다양한 이벤트가 연속되면서 만들어지는 어떤 생각의 틀을 중심으로 대중들을 지속적으로 우리 편으로 만드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치밀한 정치적 기획을 통해 시기마다 여론을 주도하는 틀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대단히 훌륭한 능력이자 진보정당에게 특히 필요한 능력입니다. 다만 제가 걱정하는 것은 토대가 없으면 이런 능력 역시 제대로 갖추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만의 민중적 토대가 없으면 우리는 결국 신문 꽤나 읽고, ‘여론’에 늘 관심 갖는 사람들, 모이면 정치 이야기, 세상 이야기 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정치적 기획을 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오마이뉴스 보고, 경향신문 읽는 사람들, 희망 버스가 뭔지 아는 사람들, 어버이연합의 횡포에 분노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사람들 등이 대상이라는 겁니다. 뭔가 문제냐고요? 문제될 것 없습니다. 이 분들을 상대로 정치행위를 하는 게 뭐가 문제겠습니까. 다만 문제가 되는 건 오마이뉴스가 뭔지도 모르고, 경향신문이나 조선일보나 똑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희망버스가 어디 관광회사 이름인 줄 아는 노동자들, 어버이연합이 효도 캠페인 하는 시민단체인 줄 아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우리로부터 점점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드는 정치적 이미지, 우리가 하는 정치적 이벤트, 우리가 제시하는 여론형성의 틀은 ‘정치’로부터 언제나 멀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맞춰져야 합니다. 민주주의 얘기만 나오면 항상 지식인들 사이에서 잊지 않고 거론되지만 현실에서는 언제나 잊혀지는 사람들, 노동운동조차 챙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에게 맞춰져야 합니다.
저는 우리 운동이 만약 이런 ‘토대’의 구축 없이 진행된다면 나중에는 우리만의 생각의 틀을 제시하기도 힘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보정당만이 할 수 있는 정책 대안도, 정치적 이벤트도 그 어떤 것도 생산하기 힘들어질 것이라고 봅니다. 보수정당들이 하나 같이 좌클릭하는 최근 상황에서 진보신당이 별로 할 말도 없고 불안해지는 것은 우리가 보다 급진적인 정책을 미리 연구해 놓은 게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제대로 대중에 뿌리박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외국 사례 얘기하는 건 잘 알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지만 한 가지만 얘기를 하겠습니다. 스웨덴은 많은 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민중의 집이 예전부터 많이 건설되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민중의 집을 지은 것은 ‘노동자 코뮌’입니다. 그냥 ‘노동자 공동체’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은데요, 노동자코뮌은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 지부, 노동조합 지역조직 그리고 다양한 사회운동단체들이 모여 있는 조직이었습니다.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은 원래 자기 지역조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동자 코뮌이 점점 의미 있는 역할을 하자 아예 자기 지역조직을 없애고 노동자 코뮌을 당의 지역 단위 역할도 겸하는 것으로 당헌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같은 걸 도입하면 진보신당 같은 작은 진보정당이 국회에 더 많이 진출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정치가 보수정당 일색으로 되어 있는 구조를 많이 바꿀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 정치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한국 정치의 초중앙집권적 구조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한국 정치의 초중앙집권적 구조를 무너뜨리는 것이 보수정당 일색의 국회 구조를 바꾸는 보다 근본적인 처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래로부터 대중의 진보적 요구가 제대로 수렴되는 민주적인 구조가 갖춰지면 그 힘은 보수정당 독점 구조를 이대로 놔두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만약 스웨덴처럼 한다면 지역 노동조합 그리고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지역 노동자 공동체 혹은 지역 주민 공동체 같은 걸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 공동체는 민중의 집을 만들어서 활동을 하고 그리고 진보신당은 당협을 없애고 당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민중의 집에서 일하도록 해야겠죠.
저는 한국정치의 중앙집권적 구조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런 식의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게 당장 2012년에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더라도 뒤에 가서는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진보신당 독자파가 보다 현실적인 영민함을 가지고 최근 상황을 주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선명한 노선은 깃발을 든다고 더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전략과 계획, 이를 끈질기게 실천하는 활동가들의 노력이 있어야 선명해집니다.
동시에 저는 독자파보다는 통합파가 제 제안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로서 진보신당이 9월 4일 당 대회에서 통합안을 가결시킬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특히 최근처럼 민주노동당이 당권파, 비당권파 할 것 없이 국민참여당의 참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진보신당 통합파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단호한 입장으로 국민참여당 문제를 조기에 정리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국민참여당 문제가 확실히 정리될 수 있다면 그 다음 제 제안을 면밀하게 검토해주시길 바랍니다.
진보신당 독자파들과의 대화는 ‘국민의 요구’가 아니라 ‘계급적 요구’에 주목할 때 가능해집니다. ‘현실 정치 상황’이 아니라 ‘진보운동의 독자적 성장’에 집중할 때 의견의 접점도 찾아질 겁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진보의 재구성’의 문제의식이 통합 과정에서 얼마나 더 충실히 반영되는가 하는 점, 통합이 되면 진보의 재구성의 가능성이 더욱 크게 열릴 것이라는 사실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보여주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렇게 해서 통합론을 다시 재정비하지 않으면 진보정당 통합은 전혀 가능하지 않습니다. 단지 진보신당이 나눠지는 일만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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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통합, 노동운동 혁신과 함께해야 (레디앙, 2011년 08월 02일 (화) 08:49:33 강상구 / 진보신당 구로 당원)
지역노동정치 혁신, 민주노총 나서길 
[to 민주노총-독자파] "위기의 시대, 새로운 운동 등장시켜야"

우선 제가 5년 동안 민중의 집 등 지역노동정치 혁신거점 1,000개 건설을 제안한 것은 지금까지 꽤 오랫동안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 논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진보의 재구성’과 관련된 과제가 얘기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누차 거론했던 것처럼 ‘종북’ ‘패권’의 문제로 논쟁이 국한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문제의식을 살리고 싶습니다. 또한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 동안 대립만 해왔던 진보신당 내 통합파/독자파가 서로 더 이상 갈등하지 말고, 진취적인 계획을 가지고 생산적인 논의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을 믿을 수 없는 건 그들의 인간성이나 현재 드러나고 있는 ‘진정성 있어 보이는 태도’를 일부러 못 믿는 체 해서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한국자본주의의 취약함이 자유주의자들을 늘 동요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자본주의가 취약하다는 것은 한국경제가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세계경제 위기에 긴밀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고 또 비정규직 노동자 양산이나 4대강 사업 같은 인간 혹은 자연에 대한 약탈적 방식을 쓰지 않고는 경제성장을 지속하기가 힘들다는 뜻입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늘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겁니다. 자본의 이윤추구를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그걸 뛰어넘어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할 것이냐 하는 것 말입니다.
이런 상황은 계속 될 겁니다. 이럴 때마다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은 동요할 것입니다. 현실 정치 상황을 고려하여 진보적 가치를 내세울지 그 반대편으로 움직이는 게 나을지를 끊임없이 판단할 것입니다. 기회주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통합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만약 국민참여당이 새진보정당 흐름에 끼어든다면 그리고 그 속에서 민주노총이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면 제 구상은 전혀 현실화될 수 없습니다.
첫 번째 새진보정당 건설 과정에서 민주노총이 약속한 1년 100억원으로 5년 내 민중의 집 1,000개씩 건설하게 되면 그건 당에게는 좋지만 민주노총에게 좋은 건 아니지 않느냐는 문제 제기를 어느 분이 해주셨습니다.
진보정당의 분열이 노동운동이 위기에 빠진 근본적 원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진보정당이 통합만 되면 노동운동이 되살아날 것이라는 전망에 동의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통합 논의 과정에서 노동운동 혁신의 새로운 계획이 논의된다면 한 번쯤 기대를 걸어보는 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사실 제가 제안한 계획이 민주노총에게 얼마나 좋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87년 이후 기업별 노조 체제가 굳어지고 노동조합이 경제투쟁에 집중하는 양상을 극복하는 한 가지 방안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기는 합니다.
기업별 노조와 경제투쟁이 한 동안 큰 역할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한계가 계속 지적되고 있습니다. 제 얘기가 아니라 많은 분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이 두 가지를 극복하지 않으면 이제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 단결하는 것이 아니라 더 분열합니다.
대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실제로 힘든 경우가 있습니다. 정규직의 투쟁 성과가 비정규직으로까지 확산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업별 체제에 경제투쟁이 낳은 예상 못한 상황입니다. 이걸 극복 못하니까 이 문제를 오히려 보수언론이 이용합니다.
병원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면 동네 주민이자 비정규직 노동자인 사람들이 욕을 합니다. 지하철이 파업을 하면 출퇴근이 불편해지는 노동자들이 투덜댑니다. 기업별 체제와 경제투쟁으로는 노동자 파업이 더 이상 노동자이면서 국민인 다수 대중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노동자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계급적 단결입니다. 하나로 뭉쳐야 뭘 해도 합니다. 그런데 이게 늘 일어나는 아주 쉽고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단결을 이루기 위해서는 민주노조운동 전체가 달라붙어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제출된 많은 대안들 중 유력한 것이 바로 지역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지역에 집중한다는 것은 경제투쟁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역에 집중한다는 것은 기업별 노조와 경제투쟁이라는 지금 운동의 한계를 넘어보자는 고민의 산물입니다. 지역에 집중한다는 것은 파업을 욕하는 주민이자 노동자인 사람이 파업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파업으로 출퇴근에 불편을 겪는 노동자이자 국민인 대중이 노동자 투쟁을 옹호할 수 있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새 진보정당이 만들어지면 사업장마다 ‘현장 분회’를 복구하고 노동자 정치 교육에 집중할 수 있다는 구상도 들었습니다. 기존 현장이 발전할 수 있는 방안은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현장 분회는 예전에도 시도했고 딱히 성과가 있었던 방식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분위기가 달라지고 사람이 달리지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보다 요즘 민주노총 내에서 이뤄지고 있는 지역으로의 진출 사례들이 저는 더 눈에 띕니다. 그리고 새진보정당 건설을 통해 이런 노력이 극대화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청소노동자들이 홍대, 고려대 등의 투쟁을 거치면서 서울지역 전체 대학청소노동자들의 집단적 투쟁과 교섭을 향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 사업장을 넘어서 서울 ‘지역’ 전체를 고민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시도는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구로?가산디지털 단지에서는 민주노총 전략조직화 사업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업장을 뛰어 넘어 지역공단 중심으로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사업입니다. 이런 사업은 보다 더 많아져야 하고 문제의식은 더욱 커져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평가하는 것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지만, 대학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이 더 의미가 있으려면 서울지역 청소노동자들 전체의 권리보장을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대학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을 보면서 드는 고민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다른 민간 건물에서 일하시는 청소노동자들은 어떻게 하지?’ 하는 겁니다. 또 다른 하나는 ‘어차피 다 청소라는 똑같은 업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조직하는 건데 이게 과연 정말 기존 한계를 제대로 극복하는 건가?’ 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 투쟁을 담당하시는 공공노조 서울경인지부 활동가들도 이런 고민을 하고 계실 겁니다.
디지털단지 전략 조직화 사업도 주목은 되지만 공단 노조가 그 동안 아예 없었던 게 아니라는 점, 아직 현장에 제대로 파고들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구로에서 함께 이 일을 하고 있는 저도 일정한 책임이 있습니다.
동네를 다니다 보면 길 옆에 늘어서 있는 건물의 대부분에는 청소 노동자가 한두 분씩은 다 있습니다. 이 분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입니다. 출근하느라고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다가 가끔 청소 노동자분을 만납니다. 그런데 아파트 주민자치회장 출마자의 공약이 ‘인력 구조조정으로 관리비 인하’입니다. 고민입니다.
관리소장이 시켰다면서 해고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최저임금이 100% 적용되고 또 인상까지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서명을 집집마다 돌며 받는다는 경비아저씨들의 이야기에는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추석 연휴 동안 5일 연속으로 학교 밖을 한 번도 못 나갔지만 돈 한 푼 더 쳐주지 않았다는 어느 중학교 야간 경비원 노동자 앞에서 할 말이 없습니다. 다 제가 일하는 지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민주노총은 이 노동자들에 대해 대책을 내놔야 합니다. 같은 진보운동하는 사람으로서 제가 민주노총에게 이 정도 얘기는 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이 문제를 돌파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습니다. 민주노총이 호응해준다면 그래서 87년 이후 민주노조 운동의 성과로 쌓인 그 많은 사람들과 역량들과 자산들을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이 현실화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죽어라 일해야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노동자들과 함께 이들이 일상적으로 만나고 함께 놀고 이야기하면서 공통의 요구를 뽑아낼 수 있는 공간과 그러한 운동이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 공통의 요구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당운동하는 사람으로서 그건 아마도 진보정당이 평소에 제기하는 의제와 많은 부분 연결이 될 수 있겠다는 것을 감으로만 갖고 있습니다.
건강이나 교육 문제 같은 게 그런 예일 것입니다. 진보신당 녹색신좌파 동지들이 얘기하는 기본소득 같은 게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비정규중소영세노동자들이 ‘워킹푸어’이기도 하니까 이 분들에 대한 복지 의제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제를 중심으로 지방자치단체를 상대로 투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건 모두 그냥 하나의 구상일 뿐입니다. 무엇을 중심으로 단결할 것인지, 그건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라 노동자들의 만남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입니다.
물론 노동운동이 기존 현장조차 무너진다는 얘기가 들립니다. 노동운동의 당사자가 아닌 사람으로서 잘 알지도 못하는 문제를 함부로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제안을 할 처지도 아닙니다. 사실 기존 현장을 복구하는 건 지금 노동운동 하시는 동지들을 믿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제 구상의 의미에 대해서 민주노총 동지들이 함께 고민해주시길 간절히 요청 드립니다.
두 번째 민주노총은 떡 줄 생각이 없는데 혼자 너무 앞서 나간 것이라는 지적과 함께 민주노총이 진짜 10만 당원, 100억 정치후원금을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비판을 누군가 해주셨습니다. 또 민주노총이 약속을 지킨다고 해도 그건 지나치게 민주노총에 의존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지금 같은 때가 기회입니다. 위기의 시대는 커다란 재편이 나타나는 법입니다. 이때 새로운 운동을 등장시키느냐 못 시키느냐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떤 때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일, 내내 논의만 무성했던 일이 한 번에 실현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지금이 민주노총에게 이해를 구하고 함께 이 과제를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더 없이 적절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10만 당원, 100억 정치후원금 문제가 비현실적이라는 건 민주노총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새 진보정당 건설이 노동자와 현장의 절절한 요구라는 점은 민주노총이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한 사실입니다. 또한 그 요구에 걸맞게 새진보정당 건설에 민주노총이 조직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결합할 것이라는 점을 의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제 구상이 민주노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진보신당은 창당 때부터 민주노총과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선언했었습니다. 진보신당 녹색신좌파분들은 민주노총과의 단절까지도 각오한 구상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민주노총과 긴장 관계를 유지하자는 것이 민주노총과 사이 나쁘게 지내자는 말이 아닙니다. 아예 민주노총하고 작별하고 처음부터 새롭게 원칙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를 하나하나 조직해 나가자는 말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건 희망적일 수는 있지만 현실성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민주노총과의 단절이 민주노총의 활동가, 민주노총 조합원, 민주노총의 자산, 능력, 헌신성, 열정과의 단절을 얘기하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민주노총과 긴장관계를 유지하자는 것은 혹은 ‘민주노총과의 단절’이라는 표현을 수용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민주노총 자신도 극복하려고 노력했으나 아직 그렇게 하지 못한 ‘기업별 노조 운동’과 단절하자는 뜻입니다. 기업별 노조 체계에 의존하지 말자는 이야기이고, 기업별 노조 체계를 강화하는 식으로 운동하지 말자는 이야기이고, 이를 뛰어넘는 전략을 내오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민주노총 운동은 새롭게 전환되고 혁신되어야 하는 것이지 민주노총 자체와 결별을 선언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구상은 민주노총에게 의존하는 것이면서 민주노총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민주노총 동지들에게 말씀을 좀 드리겠습니다. 민주노총은 지금까지 통합정당에 대한 현장의 요구가 얼마나 큰지를 지속적으로 강조해 왔습니다. 또 ‘진보의 합창’을 통해 외부에서 진보정당 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그리고 10만 당원, 100억 세액공제 주장으로 통합 논의에 힘을 실어왔습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자기 위상에 걸맞게 더 많은 역할을 해주셔야 합니다.
민주노총 현장의 요구가 정말 크다면 그 현장을 대표하는 사업장의 노조 위원장/지부장/지회장들이 지역의 진보정당 위원장/당원들을 만나서 ‘통합 이후의 지역의 전망과 계획’에 대해 함께 논의하자고 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이 전국적으로 민주노총의 사업으로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저는 진보신당 구로위원장이지만 저희 지역의 민주노총 사업장 동지들이 저를 찾아와서 이에 대해 얘기해보자고 한 적이 없습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인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진보의 합창과 같은 방식으로 외부에서 ‘선언’하고 압력을 넣는 것이 아니라 진보신당이 주장해 온 ‘진보의 재구성’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방식, 진보신당 내 독자파를 이해하고 지원하는 방식으로 사업이 진행됐으면 더욱 좋았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의 구상을 진보신당이 아니라 민주노총에서 새진보정당 협상 테이블에 먼저 적극적으로 제안해주시면 정말 좋겠습니다.
민주노총 내부 의사 결정 구조를 봤을 때 그 정도 결정을 지금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민주노총 위원장께서 이미 10만 당원, 1년 100억 세액공제를 선언하셨기 때문에 추가 부담이 되는 결정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미 부담하기로 한 돈을 ‘지역노동정치 혁신기금’으로 사용하자고 결정하는 것은 민주노총이 모아 온 돈을 진보정당 내부를 위해서 쓰자고 하는 것 보다 훨씬 노동자 운동을 위해서 더 좋은 일입니다.
실제로 민주노총 내부에서 추가로 결정해주실 일은 지역노동정치 혁신위원회에 참여하고, 지역 중소영세비정규직 조직화에 새 진보정당과 함께 하겠다고 결의해주시는 것입니다.
현재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 논의는 막바지로 치닫고 있습니다. 국민참여당 변수, 패권주의 극복 방안이 ‘지분 다툼’ 위주로 흘러갈 수도 있는 상황 등 때문에 새진보정당 건설이 과연 얼마나 힘 있게 진행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새 진보정당 건설 논의가 노동자들에게 힘을 주고 있는 건지, 새 진보정당이 출현하면 노동현장의 분위기도 살아나고, 노동자 운동은 크게 혁신,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가 노동자들 사이에서 확고한 믿음으로 존재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되고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게 되지 않고 있다면 새 진보정당 건설 논의에 어떤 형식으로라도 개입하고 참여하고 있는 분들 모두가 다시 한 번 깊이 고민하고 성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저부터 깊이 반성하고 다시 고민하겠습니다.

  
"민중의 집으로 패권주의 제압하자" (레디앙, 2011년 07월 26일 (화) 18:48:28 강상구 / 진보신당 당원)
진보신당 ‘부속합의문2’ 유감…"싸우지 않는 룰 만들기 그쳐"
진보신당은 6.26 당 대회 이후 수임기관을 구성하고, 몇 차례의 회의 및 워크숍을 통해 ‘부속합의문2’에 대한 입장을 마련했습니다. 부속합의문2는 패권주의 극복 등 민주적 당 운영 방안을 다루고 있고 이 의제가 통합의 진짜 핵심 쟁점이라고 보는 견해도 많습니다.
부속합의문2는 △당 지도부 및 각급 당부별 공동 집행부 구성 △대의기관 구성 △총선과 대선 후보 선출 △당론 결정 등의 문제에서 새진보정당 내 각 세력간 균형을 맞추기 위한 장치들로 그 내용이 채워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속합의문2는 대체로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이 ‘싸우지 않기 위한 게임의 룰’을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부속합의문2가 이런 방향으로 마련되는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긴 하지만 이런 정도로 과연 패권주의가 극복되고 민주적 당 운영이 가능할 것인지 의문입니다.
두 가지가 빠졌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패권주의 극복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운동의 전망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정파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 다수가 당원으로 들어오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새로운 진보정당 안에서 당원들의 자발적 참여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답이 없다는 점입니다.
통합진보정당을 만드는 과정이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의 과정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부속합의문2에 위 2가지를 현실화시킬 수 있는 획기적 제안, 그것도 추상적인 전망이 아니라 이미 합의된 5.31합의문과 부속합의문1에서 담지 못한 구체적인 조직 활동 전망을 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부속합의문에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5. 새로운 진보정당과 민주노총 등이 함께 지역 노동정치활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이를 통해 다수 대중의 당 참여를 이뤄냄으로써 패권주의의 궁극적 극복을 위해 노력한다.
5-1. 민주노총은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 과정에서 10만 명의 신규 당원을 조직하고, 여기서 나오는 당비는 전액 ‘민중의 집’과 같은 지역 미조직·비정규 노동자의 조직 및 생활 거점을 건설하는 기금으로 사용한다.
5-2. 새로운 진보정당과 민주노총은 함께 ‘지역노동정치 혁신위원회(가칭)’를 구성하고 "매년 민중의 집 00개 건설"과 같은 구체적인 실천 계획을 마련하고 집행한다.
5-3. 새로운 진보정당과 민주노총은 지역 차원에서 새진보정당의 각급 당부 및 민주노총 산별·연맹·지역본부 등의 책임 있는 협력 아래 ‘지역노동정치 OO지역 혁신위원회’를 구성하여 공동으로 ‘민중의 집’ 등을 건설하고 운영한다.
6. 새로운 진보정당은 다양한 당 활동과 지역공동체 활동에 당원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정파가 아니라 당원이 실질적인 당의 주인이 되도록 하기 위해 ‘당원 참여 활성화 사업단’을 상설 기구로 둔다.
6-1. 당원 참여 활성화 사업단은 당원이 참여할 수 있는 당 활동과 지역 활동을 온라인-오프라인에 걸쳐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당내에 유통시킨다. 이를 위해 당원 참여 활성화 사업단을 중앙당-광역시도당에 걸쳐 구성한다.
6-2. 당내 정파의 건전한 경쟁과 진지한 논쟁을 위해 정파등록제 등 정파 양성화 방안을 도입하고, 각 정파의 정치적 입장의 취합 및 당내 소통을 당원 참여 활성화 사업단이 담당한다.
6-3. 당의 주요 간부 및 대의원이 정파간 이해관계를 넘어 당원들과의 소통을 통해 당 활동을 주도해 나갈 수 있도록 당원 참여 활성화 사업단이 상시적 지원 체계를 갖춘다. 지원 체계 안에는 간부 및 대의원에 대한 교육 훈련 프로그램을 포함한다.
진보신당은 2009년 당대회에서 채택한 ‘진보정치 10년 성찰과 전망’에서 패권주의가 민주노동당이 그 내부의 정치적 차이를 통합하고 통제할 수 있는 정치 전망, 그것을 지지하는 광범위한 대중 기반을 가지지 못한 점이 근본적 원인이 되어 발생했다고 명확히 평가하고 있습니다.
‘진보정치 10년 성찰과 전망’ 보고서에서는 새로운 진보정당이 민주노총이 포괄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에 대해 관심을 더 돌려야 한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통해 대다수 노동대중의 요구를 수렴할 수 있도록 혁신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진보적 대중들이 노동자이자, 소비자이자, 시민으로서 서로 소통하고 학습하고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고 과제를 정리했었습니다. 지역에서부터 비정규직 노동자 사업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고 노동자 정치운동의 새로운 전형을 밑으로부터 창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과제를 구체적으로 현실화시키겠다는 약속이 있어야만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 흐름이 진보의 재구성을 바라는 당원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과제의 핵심은 비정규직 주민노동자의 노조사무실이자 생활연대의 공간으로서의 '민중의 집' 등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에서 주민으로 생활하면서 동시에 노동자인, 하지만 그 동안 노동운동이 전혀 챙기지 못한 분들이 아주 많이 계십니다. 어떤 노동자들이 있는지 대강만 뽑아 보아도, 공공부문에는 청소 노동자, 정화조 노동자, 방문간호사, 공중화장실 관리 노동자, 주차 관리 노동자, 도서관 운영 노동자, 보육 노동자, 복지도우미 노동자 등이 있습니다.
최근에 당 내외에서 관심을 많이 갖고 있는 요양보호사, 간병인, 장애인 활동보조인 등은 사회서비스 노동자들이라 불리는 분들입니다. 건물청소 노동자, 학교급식조리 노동자, 기타 학교비정규직 노동자, 식당 노동자, 마트 근무 유통 노동자, 주택가 소규모 공장 노동자, 식당배달 노동자, 실업 노동자, 편의점 아르바이트 노동자, 폐지수집 노동자 같은 분들도 모두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노동자들이고 심지어 유급선거사무원, 인구 인구주택총조사 조사원 등도 사실은 돈이 없어서 짧은 기간 동안 ‘알바’를 뛰는 노동자이자 주민인 분들입니다.
어쨌든 이 분들의 특징은 고용보장이 관심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직장에 대한 애착이 정규직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집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을 하지 직장에 끝까지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직장별(기업별)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동네에 살면서 이 직업에서 저 직업으로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기업별 노동조합을 만들어 봐야 힘도 없습니다. 게다가 직장에서 이른바 ‘기업 복지’를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아무리 투쟁을 해도 높은 수준의 임금이나 처우를 기대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힘듭니다.
그래서 최저임금 같은 법·제도 자체가 바뀌거나, 교육?의료 등 분야에서 무상의료?무상교육 같은 제도가 실시되거나 지역에서 함께 생활협동을 하는 등의 방식만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노력하기에 따라서는 정치운동의 직접적 이해관계자가 될 가능성이 기업복지가 좋은 정규직 노동조합원에 비해 높습니다. 또한, 지역 생활연대의 가능성도 높습니다.
비정규직 조직화 자체가 기업과 업종을 넘어서 지역 중심 구조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지역별 조직화는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개별적 이해관계를 넘어 계급적 단결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그런데 이런 계급적 단결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서로 일하는 곳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조금 다르더라도 생활 속에서 알고 지내고, 친하게 되고, 신뢰가 쌓이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각종의 (비정규직)노동자로 존재하는 지역주민들이 서로 자주 만나고, 이해하는 계기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이런 게 돼야 그 다음에 계급적 단결이 모색될 수 있습니다. 사실 이해관계를 초월한 단결은 우익 세력들이 참 잘합니다. 대표적인 구호가 ‘우리가 남이가’ 같은 것이죠.
어쨌든 이런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생활에 결합한 각종의 활동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거점’이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 지역에 상주하는 진보정당 활동가들과 지역에 있지만 사업장 밖으로 나오지 않는 기존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동네에서 손을 잡아야 합니다. 민중의 집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고 그래서 민중의 집 건설과 운영은 진보정당 활동가들과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처음부터 같이 해야 합니다.
민주노총이 진정으로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의 의지가 있다면 앞의 제안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김영훈 위원장께서는 10만 당원, 100억 세액 공제를 여러 차례 공언하셨습니다. 10만 당원이 입당하면 당비가 연 100억이 됩니다. 이 돈이면 민중의 집을 만들 때 보증금, 인테리어 비용, 1년 간 운영비를 약 5천 만 원 정도로 봤을 때 민중의 집 200개를 만들 수 있습니다. 5년이면 민중의 집 1,000개를 만들 수 있습니다. 활동가들이 1년 동안 열심히 활동해서 회비 내는 회원들을 늘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1년 후에는 ‘자립’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이런 계산이 가능합니다.
또한 5-3항 ‘지역노동정치 OO지역 혁신위원회’ 구성 안이 받아들여진다면 이런 일이 벌어질 겁니다. 제가 구로 위원장이니까 구로의 예를 들어 보면, 민주노총이 조성한 지역 거점 기금을 가지고 구로지역에 있는 보건의료노조 고대구로병원 노동자, 사회보험 노조 소속의 건강보험공단 노동자, 지하철 노동자, 철도 노동자 등이 진보정당과 함께 ‘민중의 집 건설 추진위원회’를 만들고 재정도 운영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역의 비정규직 주민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과정은 동시에 기존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기 사업장을 넘어 지역으로 나오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자연발생적 투쟁에 지원하는 식의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이나 비정규직이 유사한 형태로 대규모로 모여 있는 공단이나 사업장을 조직하는 방식이 아니라, 수없이 다양한 별개의 직업을 가졌고 한 지역에 살지만 현재까지 조직화에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주민노동자들에 대한 의미 있는 접근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부속합의문2에 이와 같은 내용을 담는 것은 현재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 중심으로 진행됨으로 인해서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이 사실은 진보정당 단순통합에 머무를 수도 있는 상황에서 민주노총과 같은 대중단체에게도 담당해야 할 책무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자는 취지가 있습니다.
단순히 10만 당원, 100억 세액공제를 해주겠다고 선언하고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촉구하는 추진위원을 모집한다고 해서 진보의 재구성이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보정당운동의 대공장 의존성만 더 커집니다.
진보의 재구성 과정에서 노동운동이 스스로의 한계를 냉철하게 짚어보고 진보정당과 함께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를 통해 ‘종북’과 ‘패권주의’ 논쟁으로 가려진 진보의 재구성의 핵심을 진보정당통합 논의 과정에서 살려내고 당원들과 노동자들이 지금 진정으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 생각할 기회가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아울러 6항은 당원들이 당 사업과 지역 정치 활동에 최대한 참여하는 것이 정파의 패권주의를 막는 또 다른 유력한 방안이라는 점에서 적어 봤습니다.
그 동안 당은 ‘조직실’을 운영해 왔지만 조직실은 할 일이 산더미 같아서 당원의 당 사업 및 지역 참여에 집중해서 고민하고 계획하고 사업을 집행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조직실과 별도로 당원 참여 활성화사업단을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 정파는 사업계획이나 특정 사안에 대한 입장 등을 당원 참여 활성화 사업단에 제출하여 사업단에서 이를 취합하고 당원에게 공식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정파등록제는 최근 민주당까지 이야기하고 있지만, 과거 민주노동당 시절에 정파 양성화와 관련하여 이미 논의됐던 이야기입니다.
이런 제도를 당원 참여 활성화 사업단이 전반적으로 관할하는 것이 당원이 중심이 되는 당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은 진보의 재구성이 그 속에서 실질적으로 보장될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기존 정당을 통합하는 식으로 만들어지는 정당은 우리 시대의 과제를 책임지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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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2 02:20 2012/08/12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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