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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知)와 열정 - 경향20100209

[고미숙의 行설水설]지(知)와 열정  / 고미숙 고전평론가

 

 

새해 벽두, 폭설이 내렸다. 설상가상으로 혹심한 한파까지 몰아닥쳤다. 방송에선 70년 만의 대기록이라고 했다. 연구실(‘수유+너머’ 남산)이 있는 곳은 서울 남산 중턱. 워낙 고지대라 마을버스나 택시가 올라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필 그날 김윤식 선생님 강의가 열렸다. 과연 이 폭설을 뚫고 사람들이 올까? 살을 에는 추위에 저 아래 지하철역에서 이 중턱까지 한참을 걸어와야 하는데….

하나 기우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눈을 툭툭 털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주제는 ‘이광수와 고아의식’. 40, 50대 수강생들에겐 남다른 감회를 불러일으킬 만한 테마였다. 한데, 아주 특이하게도 수강생들 중에 10, 20대가 상당수 섞여 있었다.

70대 노대가와 10대 학인의 소통

그들은 ‘김윤식’이라는 이름을 알지 못했다. ‘이광수’는 이름만 겨우 알 뿐 대체로 무관심했다. 하긴, 일제나 식민지라는 말도 생소하기 그지없는 세대들이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유는 비슷했다. 아버지가 꼭 들으라고 해서, 혹은 선배와 선생님들이 이 절호의 기회를 놓지지 말라고 해서. 그 말들이 하도 절실하여 ‘대체 어떤 분이기에?’ 하는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이렇게 ‘울퉁불퉁’한 학인들을 앞에 놓고 강의가 시작되었다. 이광수의 생애를 밑그림으로 헤겔에서 루카치로, 향가에서 야나기 무네요시로, 숫타니파타하에서 자본주의 맹아론으로, 평소에 공부하는 내용을 단 하나의 여과도 없이 그대로 쏟아내셨다. 무려 네 시간에 걸친 강의가 끝난 뒤 10대들이 보인 첫 반응,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어른들이 막 웃는데 따라 웃을 수가 없어서 괴로웠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아이들은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다시 남산 중턱을 찾아들었다. 이때부터는 호기심이 아니라, 자발적 선택이었다. 신기했다.

한 마디도 못알아 들을뿐더러 4시간 동안의 집중력을 요하는 이 힘든 강의를 대체 왜? 홈피에 올린 그들의 후기. “선생님이 살아온 세월과 그에 따라 켜켜이 쌓인 내공, 기운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먹어 기력이 떨어지더라도, 김윤식 선생님처럼 멈추지 않고 열정적으로 공부하고 생각하고 그렇게 계속 여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17살 해완) “ ‘교수는 항상 새롭게 공부하고 그것으로 항상 새로운 강의를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왠지 모르게 울컥했어요.”(21살 우준) “당신 자신의 시대는 식민 사관을 극복하는 것이 인문학의 과제였고 고민이었다. 각 시대마다의 과제가 있다. 그런데 지금 세대는 아무런 의무도 사명감도 부여받지 못한, 그냥 던져진 세대이다. 그래서 매우 불안에 떨고 있지만 그 불안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지도 모른다.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 ‘어떻게 저렇게 시대를 크게 바라볼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들어 놀라웠습니다.”(22살 윤의) “들을 때는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는데, 신기하게도 선생님의 강의 내용이 어떤 세미나에서든 한 번씩은 꼭 나오고 있거든요! 어디로든 흐를 수 있는 이야기를 전해주신 선생님, 뒷북 감동입니다.”(21살 윤미)

배움이란 열정과 기운의 전승

요컨대 이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강의를 들었던 것이다. 강의의 내용이 아니라, 강의가 야기하는 특별한 기운과 감응하고 있었던 것. 평생을 구도자처럼 공부를 해온 70대 ‘노대가’와 머리에 피도 안마른 ‘애송이들’의 이 특이한 소통법! 아, 그렇구나! 세대를 가로질러 소통한다는 건 바로 이런 거로구나.

그리고 새삼 깨달았다. 지식이란 정보를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열정과 기운을 전수하는 것임을. 너무나 평범해서 잊혀진 명제, 그리고 벼랑 끝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 시대의 대학과 지식인들이 반드시 환기해야 하는 명제 또한 이것이 아닐지. “지(知)는 열정이다, 배움이란 스승으로부터 그 열정을 ‘훔치는!’ 것이다”라고 하는. 5일 연속강의가 끝나는 토요일, 그날도 눈이 내렸고, 그날 강의 역시 밤 11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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