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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계급정당 건설 토론회에 바란다

[운동평론]‘변혁적 현장실천과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을 위한 토론회’에 바란다 

통진당 사태를 계기로 노동자들의 직접행동 정치가 가시화 되고 있다. '변혁적 현장실천과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을 위한 토론회'가 지난 6월 9일 첫 번째 모임에 이어 7월 14일 두 번째 모임이 민주노총 대전지역본부에서 열렸다. 

처음에는 금속노조 현장 활동가들 중심으로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전국 각지의 현장 활동가들을 비롯하여 공공운수노조, 전교조, 공무원노조, 좌파노동자회, 전국비정규노조연대회의, 사회주의 정치세력, 진보신당 등이 대거 참여하는 등 세(勢)가 확산되고 있다.  

기획단은 제안서를 통해, 노동자 계급정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 현장 활동가들의 고민과 결의가 시작되어야 하며, 노동해방과 사회변혁을 열망하는 노동현장의 활동가들이 만나, 노동자 자신이 노동자 계급정치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제안은 비록 통진당 사태가 발단이 되긴 했지만, 우리 사회의 기존 정당들 중에는 노동자 계급정치와 유관한 정당이 실제 전무하다는 참담한 현실을 말해준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직접 나서서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계급적 정당을 만들어 보겠다는 참신한 시대정신의 반영이기도 해 토론회를 지켜본 필자는 다음 두 가지를 제언하고 싶다.   

첫째, 민중운동 진영에도 제안서를 보내자.
이날 토론회에 참관한 한 인사는 필자에게 소감을 이렇게 전했다. 
"활동가와 조직노동자는 자신들이 힘없는 이들을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적인 어떤 발언권도 없는 미조직노동자 등 가난한 이들을 잊기 쉬우며, 상대적으로 극빈자들의 상위계급이라는 사실을 놓칠 우려가 있습니다. 노동자 정치운동이 제대로 된 변혁운동이 되려면 이 같은 사실을 깨닫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에 빈민과 같은 민중들이 결코 소외되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겨우 초동단계인 토론회 기획단에 이러한 주문은 시기상조인 듯 하지만 그 만큼 기대감이 크다는 반증이다. 주지하다시피 노동자와 민중은 상호 교차하므로 ‘노동자 중심성’이라는 개념의 외연을 넓혀 이른바 민중운동 진영에 제안서를 보내는 구체적인 행동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온갖 수사(修辭)로 민중진영 포섭에 혈안인 기존 정당에 향후 훌륭한 파열구로 발전하게 된다. 

둘째, 토론회를 ‘回자형’의 열린 공간으로 배치하자.
토론회에서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소개한 한 여성노동자는 당시 토론회 분위기를 ‘가부장적’이라고 비판했다. 여기서 필자는 내용과는 별개로 공간 배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노동자 계급정당을 제대로 건설하려면 ‘평의회’처럼 무엇보다 그 정체성에 부합하게 논의 구조가 활짝 열려야 한다는 주문이다. 우리는 공간의  유형과 마이크의 위치에 따라 발생하는 왜곡된 권력 현상을 주의해야 한다.      

이번 토론에서 택한 이른바 ‘교실형’ 공간 배치(단상 위에 한 사람의 선생님이 있고 다수의 학생들이 그 아래에서 배우는 식의)는 일방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구조이므로 평등한 토론을 치명적으로 방해한다. 더욱이 지금은 기획단 수준으로 ‘주체’를 형성하는 예민한 시기이므로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상호 대면하며 논의할 수 있는 구조인 ‘回자형’의 열린 공간 배치가 바람직하다. 

열린 공간의 토론회에서 기획단의 역할은 준비된 압축적인 제안 이외에는 논의의 물꼬를 트는 짧은 사회로 참가자들의 견해가 최대한 제출될 수 있게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도와주고 정리하는 수준에 그쳐야 한다.  

이번 토론회 진행에서 드러난 다소 미흡했던 점이 개선돼, 향후 각급 단위의 논의의 틀과 오는 9월 1일 열리는 ‘변혁적 현장실천 노동자 계급정당 전국활동가대회’ 부터는 그간 기존 정당들과 사이비 진보좌파세력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이/단위들이 서로 마주보며 제출하는 대안적인 함성이 메아리로 번져 명실상부한 노동자민중들의 계급정당으로 도약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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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노동운동 보고서] 한겨레21 "나는 성노동자다" 계기로 본

http://www.k-hnews.com/home/bbs/view.php?id=column&no=160

 

 

[성노동운동 보고서] 한겨레21 "나는 성노동자다" 계기로 본 2012·07·09 11:53
 

최덕효(대표겸기자)

1.
2012년 7월 2일. 이날은 국내 성노동/성노동자운동(이하 성노동운동)의 분수령이 되는 날이다. 가장 신뢰도가 높은 언론(좌파진영에서 보면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으로 일컬어지는 한겨레신문에서 발생하는 주간지 『한겨레21』이 본격적으로 ‘성노동’ ‘성노동자’란 용어를 사용한 심층기사를 내놓은 날이기 때문이다. 그간 금지주의 쪽에 편향되었던 한겨레가 이번 기사에서는 비범죄화를 기조로, 이 분야에 대한 보수언론의 선정적인 혹은 시혜적인 접근과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상당한 수준의 운동적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한겨레21』은 2일자(917호)에서 특집으로 성노동 관련 남은주 기자의 표지 기사 《“‘나는 성매매를 선택했다’ 성노동자 4명 자신의 노동을 말하다… ‘창녀’라는 낙인에서 구해준 것은 탈성매매가 아니라 노동자라는 자각이었다”》와 《“쉬쉬하다가 성노동자만 범죄자 ‘성매매특별법’ 둘러싼 멈춰선 7년 논쟁… 한국 성산업 시스템 도외시하며 성매매 여성만 처벌해, 적어도 비범죄화해야”》 두 꼭지를 실었다.  

국내 성노동운동의 출발은 노무현 정권 당시 이라크 파병반대 운동에 참여해 진보진영에 만민공동회를 제안했던 기독민중연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단체는 2004년 9월 23일 성매매특별법(‘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과 ‘성매매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이하 성특법) 시행 직후 조직한 ‘성특법반대시민모임’을 거쳐 지금의 한국인권뉴스(이하 인권뉴스)로 개편되었다. 

필자가 포함된 당시 ‘성특법반대시민모임’은 전국 17개 지역 집창촌 여성들이 모인 청량리역 광장 집회 발언(인터넷 한겨레 2004년 10월 20일자)을 통해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전국조직을 추진(경향신문 2004년 11월 6일자)하다 평택에 소재한 민주성노동자연대(이하 민성노련)를 중심으로 운동의 연대 주체로 나서게 된다. 이를 계승한 인권뉴스는 초기에는 연대단위 모임인 성노동운동네트워크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내부 이견으로 독자적인 운동을 진행하게 된다. 

이번『한겨레21』기사에서는 매우 알찬 내용들을 접할 수 있으나 부분적으로는 미흡함이 군데군데 보이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따라서 인권뉴스는 크게는 진보적인 성담론 이론 및 실천을 지향하는 주체의 하나로서 운동의 재편성을 돕고, 작게는 성노동운동 주체의 하나로서 이 운동의 발전을 위해 『한겨레21』기사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성노동’에 대한 추가적인 이야기를 그동안의 현장 경험을 토대로 언급하고자 한다. 


2. 
‘성노동/성노동자’란 용어는 2004년 10월 파주에 있는 집창촌인 속칭 용주골에서 그곳의 일하는 여성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채택되었다. 당시 인권뉴스는 집창촌 몇 곳에 좌파진영의 활동가들과 함께 실태조사 등 현장 활동을 진행했는데, 경기도 파주에 소재한 용주골 방문에는 사회진보연대 활동가 두 명이 동행했다. 

우리는 현장 여성들과의 만남에서 그녀들이 자신을 뭐라고 호칭해야 좋을지 고민하는 모습을 접하게 되었고 그녀들은 자연스레 논의를 진행했다. ‘여성종사자’란 말도 있었지만, 그녀들은 “우리는 생계를 위해 일하는 거니까 ‘노동’이고요, 그 중에서 성적 분야니까 ‘성노동자’가 맞겠네요.” 라면서 만장일치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그렇게 정리·결정했다. 이 일과 관련, 필자는 해외에서 흔히 사용하는 개념인 ‘sex-worker’를 그 자리에 소개했다는 이유로 한 활동가(여성)로부터 ‘폭력적’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필자는 지금도 그 비난의 근저에는 물질노동을 중심으로 노동/노동자에 대한 신성성(노동주의/노동자주의)이나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기반한 전통좌파의 생각이 ‘성노동’을 반대편에 차별적으로 자리하게 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러한 쟁점은 비단 여성계만이 아니라 진보좌파진영에서 여전히 뜨거운 논란의 한 가운데 서 있다. 따라서 이번『한겨레21』기사는 ‘성노동’에 대한 운동진영의 분명한 입장을 강제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계기가 된다.

‘매춘 - 매매춘 - 성매매’로 이어지는 용어 변천사는 여성계의 성주류화 전략과 깊이 맞닿아 있다. ‘봄을 판다’는 단순한 뜻의 매춘에서, ‘행위 당사자를 지목하고 죄를 추궁’한 것이 매매춘이란 용어였다. 그리고 “성매매는 사람의 신체를 폭력적으로 지배하는 관계”(2009고단 3339호 판결문)라는 사법적 개념 규정이라고 쓴 『한겨레21』기사에서 보듯, 인신매매를 함의한 개념에 이른다. 따라서 성매매는 장기매매나 살인적 폭력과 같은 극악한 범죄로까지 동일시하고 비약된다.

이러한 '성매매'란 용어는 예전 한국여성연구원에 재임 중이었던 원미혜(여성학자)의 “우리는 왜 성매매를 반대해야 하는가” 제하의 논문에서 제안되었다. 여기서 원미혜는 "'성매매'라는 용어는 아동 매매, 인신매매 등과 같이 '거래'되는 측면을 강조하여 담을 수 있는 용어"이므로 "적극 권하고 싶다"고 주장했고 후일 성특법에서 그대로 관철되었다. 

성노동운동이 한창일 때 한 성노동자는 원미혜로부터 보내온 소소한 문자를 필자에게 보여주곤 했다. ‘성매매=인신매매’라는 식의 개념을 제출한 그가 성특법 시행 후 분노한 성노동자들의 시위에 놀라 성노동자들에게 다가간 게 아닌가 한다. 그는 활동가들과 함께 펴낸 <경계의 차이 사이 틈새-성매매 공간의 다면성과 삶의 권리>란 책에서 "성매매를 둘러싼 합법·불법 논쟁을 떠나, 논쟁에 가리기 쉬운 성매매 집결지 여성들의 삶의 다면성을 보자"며 애매한 변신을 시도했지만, 후배들은 지금도 성매매 금지주의자 원미혜를 배운다. 


3.
『한겨레21』은 기사에서 성노동에 대해 “어찌됐든 급진주의적 페미니즘과 자유주의적 페미니즘, 여성계의 두 시각에서도 일치점은 있다. ‘성매매 여성의 비범죄화’다.“라면서 “적어도 비범죄화해야”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나 성노동과 페미니즘의 관련성에 대한 『한겨레21』의 설명이 불충분한 까닭에, 조국의 논문(성매매에 대한 시각과 법적 대책)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좀 더 풀어보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성특법을 탄생케 한 성노동에 대한 현행 ‘금지주의’는 도덕주의적 접근 방식으로 “단순 성매매 행위를 포함하여 성매매 조장․알선행위 등 일체의 성매매 관련행위를 처벌”하는 까닭에 “단순 성매매의 경우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 처벌대상이 되는 ‘범죄인’”으로 간주된다.  

성특법을 주도한 주류여성계는 《급진적 여성주의》의 성격을 지녔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본디 《급진적 여성주의》에서는 ‘선택적 비범죄화’를 주장하므로 성노동자는 피해자로 보호하고 “성구매자만을 처벌”하는 것을 기조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류여성계는 성노동자들을 보호하지도 않았고, 그들과의 대화도 외면한 채 《도덕적 여성주의》가 주장하는 ‘금지주의’와 공생하고 있으므로 매우 모순적인 위치에 처해 있다. 

《자유주의적 여성주의》와 《사회주의적 여성주의》에서는 ‘비범죄주의’나 ‘합법적 규제주의’를 정책으로 주장한다. 여기서 비범죄주의는 “단순 성매매행위 쌍방을 처벌하지도 않고 합법화하여 관리․통제하지도 않으며, 다만 이를 조장․착취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입장”을 말한다. ‘합법적 규제주의’는 “단순 성매매를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이에 대한 세금을 징수하며, 등록증과 의료감시체계를 의무화하거나 특정지역 지정을 통해 성매매를 규제하는 입장”이다. 

성특법을 추진한 주류여성계의 여성주의 정체성이 불분명하듯, 성특법을 반대하며 성노동운동에 연대하는 진보좌파 진영의 여성주의 또한 급진적·자유주의적·사회주의적 여성주의가 혼재된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성노동운동을 계급적 관점을 중심으로 접근한 인권뉴스는 여성주의 경향의 네트워크와 따로 운동을 진행하게 된다.) 

이에 대한 상징적인 일이 있다. 2007년 6월 28일 서강대에서 열린 맑스코뮤날레 학술문화제 '영 코뮤날레' 세션에서, ‘비범죄화’를 전제한 이황현아(노동자의힘 여성활동가모임)의 주장(발제문: 성노동자의 성별화된 권리를 위하여)에 대해 민성노련은 ‘특정지역 자율관리제’를 주장하며 정면충돌한다. 
▒ 이황현아 발제문에 대한 민성노련의 입장

이황현아는 “'특정구역 비범죄화',는 민주성산업인연대와 민주성노동자연대가 2006년부터 구사하고 있는 비범죄화의 구체적인 주장”이라며 “모든 성노동자를 주체적 대상으로 하는 비범죄화가 아니라, 특정구역-평택만 비범죄화하자는 건 성노동자운동의 의의를 훼손하는 논리적 모순이자 실리에 기댄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민성노련은 “‘특정지역 자율관리제’는 ‘평택만’ 이 제도를 택하자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전국의 집창촌을 대상으로 한 것”이며 “자율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경찰력 등의 관리를 전제하는 이른바 공창제 형태의 '합법주의'와 차이가 있으며 조직적으로 자율적 관리가 어려운 '비범죄주의'와도 구별”된다고 밝혔다. 그리고 “성특법의 가장 큰 목적은 집창촌 폐쇄에 있으므로 현 시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집창촌을 사수할 수 있는 방어논리”이며 “따라서 집창촌 성노동자들이 일차적으로 투쟁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으며 그 점에서 한국사회의 모든 성노동자를 주체적 대상으로 설정한 비범죄화와는 시점과 관점의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황현아는 “민성노련과 같은 성노동자 자신의 주체적 운동은 한편에서 경제적 빈곤을 주축으로 한  노동운동/빈민운동임을 역설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자신의 운동 내용에서 급진적 여성주의를 비판한다는 명목으로 애써 페미니즘적 요소를 걷어내려고 한다.”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성적억압에 대한 접근, 성적자기결정권에 준거한 자유주의적 태도, 성매매의 궁극적인 폐절 경계 등에 대해 민성노련은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민성노련은 “대다수 전업형 성노동자들은 ‘빈민’이며 ‘여성’”이지만 ““성노동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하는 다른 ‘노동자’와 다를 바가 없다”면서 “이 세 가지 성격을 동시에 포괄하며 이 중 어느 것도 결코 후순위에 두려고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또 “민성노련이 투쟁전술로 ‘주류여성계’에 집중하는 것은 그들이 성특법을 만들고 추진하는 실제 주역들이기 때문”이며 “고로 우리가 걷어내려는 것은 ‘페미니즘적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기층민들을 억압하는 '반페미니즘적 요소'”라면서 주류여성계는 “몸만 ‘여성’인 비현실적 도덕주의자들인 동시에 기득권자들의 한 분파”라고 반박했다.  

또 “민성노련이 고객과의 관계를 여성에 대한 ‘성적억압’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만약 우리가 성인들 사이의 필요에 따른 성거래를 '억압'으로 간주한다면 난데없는 인신매매 논리에 스스로 갇혀버리는 셈”이 된다고 말하고, “성거래에서 이뤄지는 상호간의 선택은 물질적인 제 조건이 매우 까다로운 가족이데올로기보다 훨씬 자유롭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민성노련이 경계하는 것은 ‘자발적인 성노동(성거래)’을 인신매매와 동일시하여 쉽게 ‘폐절’을 논하는 것”으로 “이는 성노동의 폐절을 지구상의 모든 임노동의 폐절과 같은 맥락에서 논하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라고 밝혔다. 


4.
이상은 당시 네트워크의 일부 활동가들이 성노동운동 연대 초기 민성노련에게 이들이 채택한 강령 12개항 중 “한국사회의 급진적 여성주의를 개혁한다”는 부분에 대해 제외할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한 사실과 관련하여 이념적으로 많은 차이점을 시사한다. 민성노련은 급진적 여성주의가 지닌 성(性)분리주의 사고가 성노동운동에 하등 도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듯하다. 
▒ 민성노련 12대 강령

반면, 네트워크는 합법화 및 비범죄화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적 공론화를 통해 정책을 수정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한 민성노련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네트워크는 자의적으로 ‘비범죄화’를 운동 기조로 천명함으로써 현장 주체인 성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그리고 운동을 자신들의 취향에 맞게 사유화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어쨌든 이들 양자는 ‘성특법 반대’라는 기조 하나로 연대를 힘겹게 꾸려 나갈 수 있었다.  

『한겨레21』은 이번 심층기사에서, 성인들 사이의 단순한 성적 거래에서 일(성노동)하는 주체를 ‘성노동자’라고 부르는데 동의할 수 있냐고 묻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정책 전환으로 ‘비범죄화’를 제안했다. 그러나 ‘비범죄화’라는 말은, 위에 적었듯이 성노동운동에 연대했던 복잡한 정체성을 지닌 여성주의 경향의 네트워크 입장만을 되풀이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는 운동도 진보적 언론도 ‘금지주의’라는 도덕주의적 강박이나 ‘성매매 폐절’이라는 공허한 명분론을 넘어야 한다. 좌파적 관점에서 여성주의 전반을 검증하면서 국가주의 페미니즘을 전면 비판하고 마르크스 페미니즘까지 발전적으로 논해야 성노동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상이 그려진다. 그리고 비범죄화건 합법화건 특정지역 자율관리제건 활동가들은 모든 이야기를 현장 주체들과 노동자민중들 앞에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소통해야 한다. 

『한겨레21』은 “‘창녀’라는 낙인에서 구해준 것은 탈성매매가 아니라 노동자라는 자각“이었다고 유의미한 제목을 뽑았다. 우리는 성노동운동 8년 만에 ‘87년 체제’에 갇힌 ‘갑갑한’ 한겨레를 이 정도까지 변화시키는 성과를 일구고 있다. 운동진영이 성노동자들에 대한 낙인 제거와 그들의 노동권·생존권·건강권 쟁취를 위해 연대하고 대안 마련에 나서는 것은 공황기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당연한 의무이다. 

아마도 민성노련 성노동자들이 없었다면 국내 성노동운동은 출발이 어려웠을 것이다. 갈 길은 멀지만 성노동운동의 밀알이 된 민성노련 성노동자들에게 깊이 감사 드린다. 그리고 연대 동지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면서 성특법 폐지를 향해 논의의 장을 활짝 펼칠 수 있도록 투쟁력을 더욱 강화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인권뉴스는 그 길에 항상 함께 할 것임을 약속드린다.    

[한겨레21 바로가기] "나는 성매매를 선택했다"
[한겨레21 바로가기] 쉬쉬하다가 성노동자만 범죄자

[한국인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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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국가, 저개발 국가, 공산권이 매춘 (성매매) 금지주의 경향

 

종교국가, 저개발 국가, 공산권이 매춘 (성매매) 금지주의 경향 2012·03·21
 
 

본성해방net

 

100개국과 그들의 매춘 정책 - ProCon.org   

『프로콘』은 비판적 사고를 위한 자원을 제공하며 편견 없는 교육을 지향하는 미국의 비영리 공익단체로, 논쟁적인 문제를 제시하고 이와 함께 정보시민권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프로콘 프로그램은 현재 미국의 2,150개 학교와 41개 국가에서 사용 중이다. 

『프로콘』의 100개국 매춘(성매매)정책 조사에 따르면, 전면적인 금지정책을 취하고 있는 곳은 종교성이 강한 국가와 구 공산권 지역 그리고 저개발 국가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선진적인 나라들에서는 합법화나 제한 적법(비범죄화 포함)을 통해 국가가 성인들의 사생활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미국은 통상 매춘 금지주의 국가로 알려져 있으나 미국 내 매춘 자유특구에 해당하는 네바다주가 있는 관계로 프로콘은 미국을 ‘제한 적법’ 국가로 분류했다. 

한편, 대만은 금지주의를 폐지하고 지난해 11월부터 합법적인 매춘(성매매)특구 설치를 허용해 주목된다. 합법화 논쟁은 중국에서도 뜨겁다. 2010년 중국에서는 합법화를 주장하며 서명운동을 벌이던 활동가들이 체포된 적이 있었다. 올 3월 중국 전인대(全人大)에서는 인민대표인 츠쑤성(遲夙生. 여) 변호사가 “매춘 행위가 사회에 어떠한 위해도 끼치지 않으며 단속해도 수요는 줄지 않는다”고 공식 제안, 합법화 논쟁에 불을 붙였으나 결론은 내지 못한 상태다. 그녀는 9년째 매춘 합법화 투쟁에 앞장 서 왔다. 

다음은 ‘100개국의 매춘 정책’(매춘, 매춘업 소유, 매춘 알선)에 대한 『프로콘』의 조사 결과(2009년 11월)이다. 조사에 따르면 합법화가 50%, 제한 적법이 11%로 도합 61% 국가들이 매춘을 인정하고 있다. 매춘 정책 항목 모두를 불법으로 규정한 국가들은 39%였다. 


 


100 개국과 그들의 매춘 정책 - ProCon.org

1. 아프가니스탄 : 모두 불법 
2. 알바니아 :  모두 불법
3. 앙골라 :  모두 불법
4. 앤티가바부다 :  모두 불법

5. 아르헨티나 :  매춘 합법 - 업 소유 불법 - 알선 불법 
6. 아르메니아 :  매춘 합법 - 업 소유 불법 - 알선 불법
7. 호주 :  매춘 제한 적법 - 업 소유 제한 적법 - 알선 제한 적법     
8. 오스트리아 :  매춘 합법 - 업 소유 불법 - 알선 불법  
9. 바하마 :  모두 불법 
10. 방글라데시 : 매춘 제한 적법 - 업 소유 합법 -  알선 적법  

11. 바베이도스 :  모두 불법 
12. 벨기에 :  매춘 합법 - 업 소유 합법 - 알선 불법
13. 벨리즈 :  매춘 합법 - 업 소유 불법 - 알선 불법
14. 볼리비아 : 매춘 합법 - 업 소유 불법 - 알선 불법 
15. 브라질 : 매춘 합법 - 업 소유 불법 - 알선 불법
16. 불가리아 : 매춘 제한 적법 - 업 소유 불법 - 알선 불법
17. 캄보디아 : 모두 불법 
18. 캐나다 : 매춘 합법 - 업 소유 불법 - 알선 불법
19. 칠레 :  매춘 합법 - 업 소유 불법 - 알선 불법
20. 중국 :  모두 불법 

21. 콜롬비아 :  매춘 합법 - 업 소유 합법 - 알선 불법
22. 코스타리카 :  매춘 합법 - 업 소유 합법 - 알선 불법
23. 크로아티아 :  모두 불법 
24. 쿠바 :  모두 불법

25. 키프로스 :  매춘 합법 - 업 소유 불법 - 알선 불법
26. 체코 공화국 :  매춘 합법 - 업 소유 불법 - 알선 불법
27. 덴마크 :  매춘 합법 - 업 소유 불법 - 알선 불법
28. 도미니카 연방 :  모두 불법
29. 도미니카 공화국 :  매춘 합법 - 업 소유 불법 - 알선 불법
30. 에콰도르 :  매춘 합법 - 업 소유 합법 - 알선 합법
  
31. 이집트 :  모두 불법 
32. 엘살바도르 :  매춘 합법 - 업 소유 합법 - 알선 불법
33. 에스토니아 :  매춘 합법 - 업 소유 불법 - 알선 불법
34. 에티오피아 :  매춘 합법 - 업 소유 불법 - 알선 불법
35. 핀란드 :  매춘 합법 - 업 소유 불법 - 알선 불법
36. 프랑스 :  매춘 합법 - 업 소유 불법 - 알선 불법
37. 독일 :  매춘 합법 - 업 소유 합법 - 알선 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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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세인트 빈센트 그레나딘 :  모두 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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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싱가포르 :  매춘 합법 - 업 소유 합법 - 알선 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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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슬로베니아 :  모두 불법 
87. 남아프리카 공화국 :  모두 불법
 
88. 스페인 :  매춘 비범죄 - 업 소유 일부지역 불법 - 알선 불법
89. 수리남 :  모두 불법 
90. 스웨덴 :  매춘 제한 적법(구매 범죄) - 업 소유 불법 - 알선 불법 
  
91. 스위스 :  매춘 합법 - 업 소유 합법 - 알선 불법
92. 태국 :  모두 불법 
93. 트리니다드 토바고 :  모두 불법
 
94. 터키 :  매춘 합법 - 업 소유 제한 적법 - 알선 불법
95. 우간다 :  모두 불법
96. 아랍 에미리트 :  모두 불법
 
97. 영국 (스코틀랜드 포함) :  매춘 비범죄 - 업 소유 불법 - 알선 불법
98. 미국 :  매춘 제한 적법 - 업 소유 불법 - 알선 불법 (네바다주 합법)
99. 우루과이 :  매춘 합법 - 업 소유 불법 - 알선 불법 
100. 베네수엘라 :  매춘 합법 - 업 소유 합법 - 알선 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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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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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평론] 노사과연의 파쇼적 행태와 성노동운동의 지형

[운동평론] 노사과연의 파쇼적 행태와 성노동운동의 지형 2011·07·08
 

최덕효(대표겸기자)

 

운동(movement)에서 소통은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고자 일하는 활동가들은 소통을 통해 상대의 생각을 읽는다. 그리고 쟁점을 찾아 토론하고 논증함으로써 진보적 가치의 일치를 향해 나아간다. 때로는 지지부진한 논제도 있지만 명백한 논제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분명한 논제라 할지라도 기득권에 가로막히면 수면 아래 잠기거나 반동화 현상으로 나타난다. 기득권은 우파만이 아니라 좌파들의 세계에도 엄존한다.

7월 6일 노동사회과학연구소(노사과연) 자유게시판. 한국인권뉴스(인권뉴스)가 올린 ‘[정책자료] 독일의 성매매 상황과 합법화 관련법 제정과정’ 제하의 문건이 돌연 사라졌다. 스팸이나 상품광고 외에 진보적 이슈에 대한 ‘삭제’는 좌파사이트에서는 절대 금기사항인데 이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노사과연 측에 의해 최근 삭제된 본지 문건은 이 외에도 몇 건이 되지만, 평소 삭제 사유를 올리는 친절한 이들이 유독 인권뉴스에는 아무런 해명이 없었다.  


    
     ▲ 인권뉴스 자료(A)를 삭제한 자리에 노사과연 자료(B)가 올려져 있다.  


여기에는 노사과연과 아니 정확히는 이 단체의 채만수 소장과 성노동운동 진영의 악연(?)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 지난 2005년 채소장은 노사과연 사이트를 통해 「'성노동자운동'이라는 현실주의」라는 문건을 발표했다. 부제는 “성매매 찬성하는 포주들의 압잡이 '진보 허깨비'는 가라 - 사회진보연대, 노동자의 힘 편집팀, 고정갑희 교수는 틀렸다”였다. 당시 채만수는 성노동운동 단체들을 향해 감정을 드러내놓고 이렇게 질타했다.  

“포주의 '생존권'이 아니라 그들 불우한 처지로 영락한 여성들의 생존권이 문제라면, 어떤 방향을 취해야 할까?.. 진실로 '좌파' 이론가다운 '좌파' 이론가, '좌파' 활동가다운 '좌파' 활동가라면, '성노동'이니 "성인인 성노동자 자신들의 자율의지"니, "성적자율권"이니, "신체의 자유권"이니 하는 양두구육을 내걸면서 포주들의 추잡한 이익에 봉사하는 대신에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구제와 자활 정책을 요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매매 여성들의 주체적 투쟁이 문제가 된다면, 바로 그러한 자활정책을 요구․쟁취하는 투쟁으로 그들을 조직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저들의 행태, 저들의 몰골은 어떤가? 포주들의 어리석은 앞잡이, 바로 그것 아닌가?”
(전문 바로가기)

채소장에게 관심 있는 대상은 오직 포주들이었다. 그는 성특법이 사실상 집장촌 폐쇄법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오갈 곳 없는 성노동자들에게는 실효성 없는 “구제와 자활 정책”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계급성을 가장 강조하는 그가 부르주아 통치기제인 성특법을 주도한 이른바 주류여성계의 구제·자활 입장과 궤를 같이 한 것은 여간 아이러니한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해 성노동운동을 펼치고 있는 필자는 이렇게 비판했다.

“유럽에서 미국 일본까지 기득권자들과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자행한 기층민 탄압의 한 방식이었던 도덕주의 ‘폐창운동’. 그 유럽 1백년 역사와 일본 80년 역사를 우리는 불과 1년 만에 논의 중이니 가히 놀랄만한 ‘압축 근대’라 할 수 있다. 유럽의 비범죄화와 합법주의는 인류가 선택한 깊은 성찰의 결과임을 다시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여타 사회구조는 유럽의 예를 본받아도 좋지만, 성(性)문화 만큼은 미국식 금지주의를 수입해야 한다고 우기는 진보라면 분명 가짜 진보다.. 오늘 한국에서와 같이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하는 잘못된 여성권력계의 의지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뜻있는 인사들은 감정은 최대한 절제하고 충분한 이성으로 철저하게 공부해야 한다.”
(전문 바로가기)

뿐만 아니라, 운동진영 넷 활동가들의 반론도 이어졌다.

zerg “좌파 지식인이라면 기본적으로 빅토리아 왕조로 인한 성매매에 대한 도덕적 타락 규정, 노동자도 민중도 아닌 부르주아 페미니스트, 기독교 그리고 정치 커넥션으로 이루어진 금지주의 등에 대한 기초 소양은 있어야 할텐데.... 채소장은 기초 소양도 없으니 저런 황당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
신칸트 “금지주의는 노동자 민중의 획득물이 아니다. 성매매 목적의 강요와 인신매매는 앞으로도 강력한 처벌의 대상이 되지만, 자발적인 단순 성매매는 비범죄화 시켜 봉건적 도덕률 또는 경찰국가적 금지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채만수 소장은 성노동 문제를 토론할 기초 지식조차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 상태로 보인다.”



    
     ▲ 금지주의 외 성매매 기사가 금기인 기독교뉴스에도 해외정책 자료가 올려진다.  


현재까지 진행된 성노동/성매매 관련 논쟁 지형에서, 그간 금지주의 논리에 포섭된 세력은 비범죄화 및 합법화 논리를 제시한 성노동운동 진영과의 이론 투쟁에서 참담하게 패배했다. 전자가 급진적 여성주의에 기반한 성(性)분리주의와 천편일률적인 모럴 테러리즘에 머무른데 비해, 후자는 세계사적으로 그리고 사상사적으로 매춘이 대거 발생할 수밖에 없는 자본의 양극화 현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했기 때문이다.

이번 경우, 노사과연은 해외 정책을 소개한 본지 기사자료를 참고하거나 반론을 준비하는 것이 운동단체다운 처신이다. 그러나 노사과연은 일방적인 삭제로 나왔으며 이러한 파쇼적 행태는 좌파 기득권 유지를 위한 일종의 열등감과 트라우마 증세와 유사하다. 진보운동은 사회변혁을 향한 모든 물음에 답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노사과연이 일방적 삭제로 대응해 쟁점을 ‘회피’한 것은 이미 패배를 자인한 셈이 된다. 운동은 이론이나 실천에서 논리상 치열할 수밖에 없으므로, 활동가들은 쟁점에 대해 보다 성실하게 소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성노동운동 외연 넓히고, 금지주의·비범죄화·합법화 토론해야

사실 성노동자운동의 의미는 단순히 성노동자들의 생계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애초 성노동자운동에 연대한 단체들 중에는 “성노동인가 성매매인가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여성들’이 고생하고 있으며 그녀들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날 위기에 있다는 것”이라며 이들을 ‘구제’ 대상으로 사고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자발적인) 매춘 종사자를 노동의 주체로서 성노동자(sex-worker)로 그리고 전문가(experts)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할 정도로 진보적 성담론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성특법이 자본과의 관계에서 구제 불가능한 제도라는 걸 익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 7.3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6.29 성노동자의 날‘ 기념 문화제


물론 과제도 있다. 지난 시기 성노동자 운동에 혼성(混性)으로 폭넓게 연대했던 분위기가 이후 성노동운동에 동의하는 특정 여성단체의 전유물처럼 퇴행한 점이 그것이다. 운동행태가 만약 지금처럼 계속 진행된다면 성노동운동은 특히 ‘비범죄화’를 주장하는 소수 비주류 여성운동에 갇힐 수밖에 없으며 이는 운동의 외연을 대폭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비주류라 하더라도 성(性)분리주의는 운동에서 있어선 안 될 반동적 경향을 필연적으로 지니며, 이같이 운동전선을 교란시키는 부문주의에 대한 경계가 각별히 요구된다.  

지난 7월 3일 오후 1시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6.29 성노동자의 날‘ 기념 문화제(주최: 성노동자권리모임 지지GG)가 열렸다. 비주류 페미니스트들로 이루어진 GG는 행사 개최에 앞선 웹자보 홍보에서 그간의 성노동운동에 동의하는 여성주의 입장에서 더 나아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동지들과 함께 하자고 말했다. 따라서 이날 행사에는 남성 활동가들이 포함된 다양한 좌파 단위가 참여하게 됐는데 이는 수와 무관하게 현 시기 성노동운동에서 상징적인 큰 의미를 지닌다. 다만, 향후 행사에는 GG가 좌파 단위와 공동개최할 정도로 문호를 활짝 열어야 운동에 대한 기득권과 부문주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GG가 운동 기조를 ‘성노동 비범죄화’라고 선포한 것은 현 금지주의 아래서 물론 상당한 의미가 있다. 이날 필자는 GG에서 활동하고 있는 고정갑희(한신대), 김경미(이대), 임옥희(경희대) 활동가에게 제안했다. ‘비범죄화’로 고착시키기보다는, 지금 진보진영에서는 금지주의와 비범죄화 그리고 합법화에 대한 개념을 모르는 분들이 많으므로, 이 세 가지 입장에 대한 전면적인 토론을 펼쳐 운동에너지를 꾸준히 모아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겠다는 게 요지였다.  


    
     ▲ 2008년 민주성노동자연대(민성노련)에서 열린 성노동자의 날 3주년 행사


이제 국내에서도 성노동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진보단체 및 인사들은 날로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전 지구적인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서 대거 발생하고 있는 매춘 현상에 대해 비범죄화 및 합법화 대책으로 가닥을 잡고 있는 국제사회의 흐름과 더불어 멈추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음은 2004년 9월 23일 성특법 시행 이후부터 2011년 7월 현재까지 성노동운동에 연대한 단체 및 주요 단체 소속의 개인 명단이다.  

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 사회진보연대, 노힘 여성활동가모임(현 사노위), 연분홍치마,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성노동연구팀, 전국철거민연합, 한국인권뉴스, 성노동자율공동체를위한연대(성자공연), 한국양성평등연대(현 한국성평등연대), 노점노동조합연대(현 노점노동연대), 독립프로덕션 빨간눈사람, 대만성노동자조합 코스와스, 동성애자인권연대, 성노동운동번역네트워크 부유인, 노동가수 박준, 민중가수 박향미, 고려대 몸짓패 '단풍‘, 노동자혁명당 추진모임 회원들, 진보신당 민철식 중앙대의원, 국민참여당 강민호 당원, 서울버스 시민대책위 한성영 사무국장, 새로운기독교운동연대(새기운) 회원들.

[한국인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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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값 등록금 투쟁의 날,조선일보는 성매매 반대가 톱

 

[언론비평]반값 등록금 투쟁의 날,조선일보는 성매매 반대가 톱 2011·06·11 23:11
 

 

세상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 누군가가 한사코 귀를 닫고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이는 뭔가 캥기는 게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를 달군 지난 2008년 6월의 촛불. 명박산성과 경찰 군화발과 소환·벌금형에 억압당한  촛불들이 3년이 지난 2011년 6월 10일 다시 3만개가 모여 들불로 번지기 시작할 조짐이다. 이른바 ‘반값 등록금 투쟁’에서 우리 사회의 시민들은 살아있는 주권을 말하기 시작했다. 청계광장이 시대의 중심으로 돌아오고 있다.  

6월 11일 한겨레신문은 이날 누가 봐도 가장 큰 뉴스인 ‘반값 등록금 투쟁’과 관련하여 톱기사에 "3년만에 붉게 물든 청계광장 '오늘은 MB 제적의 날" 제하의 광화문 촛불집회 소식을 실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난데없이 “'주거 매춘 도박' 복합빌딩 돼버린 도심 오피스텔 (부제: 강남 일대에 소문난 '성매매 오피스텔' 가보니)”이란 기사를 톱으로 올렸다.

한겨레신문은 자본의 물적 토대는커녕 생존하기에도 급급한 진보일간지라 잃을 게 없어서인지 시대정신을 그대로 반영했다. 반면 수구·보수 지향의 조선일보의 재력은 언론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리고 방우영 조선일보 전 회장이 연세대 재단이사장을 맡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닌지라 자신들과 이해관계가 직결된 ‘반값 등록금 투쟁’보다는 엉뚱한 “성매매” 관련 뉴스를 톱으로 올린 듯하다.

생뚱맞기는 하지만 “성매매 반대운동”은, 양극화 사회에서 자신들만의 풍요한 자본으로 모든 걸 누리고 있는 자들이 노동자민중들의 공세에 방패막이로 내세울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도덕적 통치기제다. 여성주의자들이 ‘성매매 특별법’이라는 성주류화 전략으로 성정치를 성공적(?)으로 주도한 것을 이번엔 조선일보가 잘도 차용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요상한 개혁과 수구·보수의 이해하기 힘든 합창이다.    

한겨레와 조선일보 그리고 TED에서 여성주의를 조소한 넬리 멕케이의 노래를 감상해보자.

      

      
    
      

[한국인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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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위 토론회] 부르주아 여성주의자들과 결별하라 !!

[사노위 강령 토론회 발표] 사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여성주의자들과 결별하라 !!

 

5월 14일 오후 민주노총 서울본부 강당에서는 사노위 강령 토론회가 열렸다. 다음은 이 자리에서 ‘여성해방’을 주제로 발표한 혁사무당파의 발언 내용(요지)이다

 

새로 건설될 사회주의 정당 강령에는 남한사회 자본주의를 관통하고 있는 ‘성정치’를  분명하게 정리해 구체적으로 그 입장이 표명되어야 한다. 이를 성매매 특별법(성특법) 사례를 중심으로 보자.

 

2004년 9월 23일 시행된 성특법이 특히 사회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 법이 우파들의 도덕적 성정치에 의한 ‘대 국민 순치용’으로 자본의 모순을 은폐하는데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특법이 국회를 통과할 때 우파는 물론 이른바 좌파들은 동의하거나 거의 손을 놓았다. 명분은 성매매 금지라 해도 결혼과 같은 합법적 성관계 외에는 사실상 인신을 규율하는 성격을 지닌 파쇼악법(매춘은 빈곤이 주원인인 사회현상이다.)을 좌파들이 저지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은, 성정치에 관한 한 이 땅의 좌파는 좌파가 아니거나 ‘유교좌파’로 불리어도 할 말이 없다는 얘기가 된다.

 

*국제사회에서 ‘성매매’란 말은 없으므로, 일반적인 용어인 ‘매춘’(prostitution)을 사용키로 한다.

 

오는 11월부터 대만에서는 매춘 합법화가 시행된다. 매춘 금지주의를 시행해 대만 성노동자들을 자살케 하는 등 벼랑으로 내몰던 천수이볜(전 대만 총통)과 그 일족이 천문학적인 부정부패 스캔들로 그 마각이 들어났기 때문이다. 천수이볜에게 매춘 금지주의는 자신과 가족의 치부를 덮기 위한 위장용 통치기제였다.

 

(참조) 국내 성노동자운동 단체인 민주성노동자연대는 연대 운동단체들에 합법화와 비범죄화에 대한 공론화를 요구했으나, 연대단체들 -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사회진보연대, 구노힘여활모 등 - 은 일방적으로 비범죄화 기조를 통보함으로써 운동은 지속되지 못했다.

 

노무현은 전임자인 김대중 당시 매춘 금지법이 입안되어 이후 통과·시행되는 위치에 있었으며, 타락한 천수이볜과 차이가 나긴 하지만 이 법이 (여성계의 힘을 업은) 도덕적 통치기제라는 점에서는 맥락에서 다르지 않았다. 스캔들로 요란한 프랑스 사르코지 또한 매춘 금지주의를 도입하려 애쓰는 것도 그의 반동적인 대내외 정책과 견주어 볼 때 흥미롭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 배경에는 당시 부시가 있었다. 자본가(의 대리인)이며 기독교 근본주의자인 부시는 중동 지역에 대해 십자군식의 무자비한 공격을 자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 순결이데올로기 정책으로 자신과 당과 미국의 이미지를 도덕으로 위장했다. 이에 부시는 ‘인권’ 운운하며 이른바 매춘 금지주의 입법을 각국에 요구한다. (역설적으로 수많은 아프간, 이라크의 미망인들이 매춘으로 생계를 잇게 된 것은 오로지 부시의 공로?다.)

 

좋은 예가 미국과 브라질 관계이다. 2005년 브라질 정부는 부시 행정부의 제안인 매춘반대서약에 반대하며, 에이즈 및 에이즈바이러스(HIV) 퇴치를 위한 미국의 4천8백만달러의 원조금을 거부했다. 그 때 룰라 정권은 자국내 성병관리를 하는데 있어 필요한 것은, (불법적 성관계를 하지 않겠다는) 선서가 아니라 ‘콘돔’이라고 못밖았다.

 

남한은 달랐다. 브라질이 거부한 부시의 매춘 금지주의를 덥석 물어 탄생한 것이 국내 성특법인 것이다. 이는 부르주아 여성주의자들의 권력 욕구와 이를 통치기제로 받아 안은 정치권력의 산물이다. 국내 성특법이 스웨덴 모델이라고 하지만 이는 거짓이다. (스웨덴은 생계형 매춘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나름 복지천국의 대명사인 나라로 애초 우리 사회와 비교대상이 아니다.)

 

그럼, 사회주의자들이 지향해야 할 ‘여성해방’에 있어, 과연 연대해야 할 ‘여성’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예를 들어 허구를 살펴보자.

 

이화여대에서 있은 지난 사노위 여성주의 강좌에서는, 연대의 범위가 명시되어 있다. “자유주의자나 급진주의자들과 사안에 따라 연대활동을 할 수 있으며, 또한 사안에 따라 노동계급 여성 뿐 아니라 ‘여성 일반’을 포괄하는 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도 있음(예: 성폭력이나 낙태 등)”이라고. 물론 그 뒤에는 “노동계급 여성이야말로 진정한 해방의 담지자이자 주체가 될 수밖에 없음”이라고 부언하고 있다.

 

사안이 괜찮으면 연대한다? 이들이 ‘여성’이란 이름으로 우파까지 포괄하려는 무원칙한 연대가 과연 가능하기나 한 얘기일까. 콜론타이와 캐슬린 배리를 강제로 연대시켜 보자.

 

러시아의 여성 정치가이며 세계 최초의 여성외교관으로 ‘붉은 사랑’등 여성해방에 관한 저서를 남긴 알렉산드라 콜론타이(Alexandra Kollontai)는, 계급 모순에 기초한 사회 내에서 단일한 여성운동이 존재할 수 있는지에 회의한다.

 

따라서 “보편적인 '여성 의제'"란 처음부터 현실에서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는 환상이니 집어치우라고 부르주아 여성운동가들을 질타했다. 콜론타이는 너무나 열악했던 당시 여성노동자들과 아이들의 참담한 현실에서 영감을 받아 혁명가와 여성운동가의 삶을 살았지만, 그 해법은 성을 넘은 노동자들의 강고한 연대였다.

 

‘캐슬린 배리’(Kathleen Barry)는 매춘 반대운동의 선구자격인 급진적 여성주의 학자다. 여성주의 필독서로 알려진 그녀의 책 ‘섹슈얼리티의 매춘화‘를 리뷰한 정희진(여성학 강사)의 글에서 배리의 생각을 엿보자.

 

“남성에게 여성의 몸은 쾌락과 담론의 대상이지만, 여성은 남성의 (벗은) 몸을 공포와 폭력으로 경험한다.. 만일 성매매가 ’더러운 것‘이라면 더 더러운 집단은 남성이다.” 15년전 북경여성대회에서는 성인간 합의에 의한 매춘과 강제적 (성적)인신매매가 구분되었지만 배리에게는 모두 ’인신매매‘로 간주된다. 배리는 성性분리주의로 먹고 산다.

 

당신은 사회주의자인가. 그리고 여성(노동자민중)주의자인가. 그렇다면, 부르주아 여성주의와 단호하게 결별함으로써 전선 교란행위를 멈출 수 있다. 선거 표심에 흔들리는 의회주의에 갇히는 한 자칭 운동에서도 진실은 종종 실종된다. 사노위는 진정 전위정당을 만들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강령에서 ‘성정치’와 같은 금기를 분명하게 정리 명시해야만 한다.

 

(낙태, 성소수자 문제 등은 이후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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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심리학이 어떻게 문제를 볼 수 있는가

대중심리학이 어떻게 문제를 볼 수 있는가

 

빌헬름 라이히

 

이제, 대중들의 경제적 상황과 이데올로기적 상황이 꼭 일치될 필요가 없으며, 또한 사실상 둘 사이에는 상당한 균열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논의를 시작해 보도록 하자.

 

경제적 상황은 직접 그리고 즉시 정치적 의식으로 변환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사회혁명은 벌써 오래 전에 일어났을 것이다.

 

사회적 조건과 사회적 의식의 이분법에 발맞추어 사회에 관한 연구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방향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심적 구조(psychic structure)가 경제적 존재로부터 도출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상황은 성격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과는 다른 방법을 통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즉, 경제적 상황은 사회-경제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성격구조는 생물-심리학적(bio-psychologically)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간단한 보기를 통하여 이 점을 설명해보자.

 

배고픈 노동자가 임금착취(wage-squeezing)때문에 파업을 할 때, 그들의 행동은 경제적 상황의 직접적 결과이다. 배가 고프기 때문에 음식을 도둑질한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배가 고파서 도둑질을 하거나 착취당하기 때문에 파업을 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 심리학적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두 경우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와 행동은 경제적 압력에 비례한다. 경제적 상황과 이데올로기는 서로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반동적 심리학은 비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동기의 측면에서 절도와 파업을 설명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 즉 그 설명의 결과는 틀림없이 반동적 합리화인 것이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전혀 다른 문제를 파악한다. 즉, 설명되어야 할 것은 배고픈 사람이 도둑질했다든가 착취당한 노동자가 파업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들 중의 대부분은 왜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착취당하고 있는 사람들 중의 대부분은 왜 파업을 하지 않는가라는 사실이다.

 

사회경제학(social economy)은 합리적 목적에 이바지하는 사회적 사실-즉, 사회적 사실이 즉각적인 요구를 만족시키고 경제적 상황을 반영하며 또한 확대시킬 때-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인간의 사고와 행동이 경제적 상황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 다른 말로 하면, 비합리적일 경우 사회경제학적 설명은 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심리학을 인정하지 않은 통속적 마르크스주의자와 편협된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모순에 직면할 경우 전혀 손을 쓸 수 없다.

 

사회학자들이 기계론적이고 경제학주의적으로 되면 될수록, 그들은 더욱 더 인간의 심적 구조에 대해 모르게 되며 더욱 더 대중선전의 실천에 있어서의 피상적인 심리학주의(superficial psychologism)에 희생되기 쉽다.

 

그들은 대중들의 각 개인 속에 있는 심적 모순을 파헤쳐 해결하기보다는 무미건조한 꾸에이즘(Coueism: 어떤 한 문장을 외우게 하여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의존하거나, 민족주의적 운동을 '대중의 정신이상'(mass psychosis)에 토대를 두어 설명한다.

 

따라서 대중심리학의 논리 전개는 즉각적인 사회-경제학적 설명이 엉뚱한 것을 지적하고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 말이 대중심리학과 사회경제학이 반대 목적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당면한 사회-경제적 상황과 모순이 되는 대중들의 사고와 행동 즉, 비합리적인 사고와 행동은 예전의 사회-경제적 상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른바 전통이라는 말로 사회적 의식의 억압을 설명하는 데 익숙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통'이 무엇이며, 전통에 의해 어떤 심적 요소(psychic elements)가 만들어졌는가 하는 점에 관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편협한 경제학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노동자들의 사회적 책임의식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자명하다!) 그러한 책임의식의 발전을 금지하는 것이 무엇인가와 관련되어 있음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국민 대중들의 성격구조를 모르면 쓸데없는 질문만 하게 된다. 보기를 들어, 공산주의자들은 파시스트들의 권력 장악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회민주당의 오도된 정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러한 설명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환상을 퍼뜨렸던 것이 바로 사회민주당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회민주당은 새로운 행동양식을 만들어 내지 못하였다. 파시즘의 형태로 나타난 정치적 반동이 대중을 ‘몽롱하게 하고‘(befogged) ’타락시키고‘ ’최면‘에 빠지게 했다는 것은 다른 설명과 마찬가지로 쓸모없는 설명이다.

 

파시즘이 존재하는 한 이 점이 파시즘의 기능이며 계속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벗어날 길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쓸모없다. 우리는 경험에 의해 그러한 폭로가 아무리 반복된다 할지라도 대중들을 확신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경제적 연구 그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대중들 속에 무엇이 진행되고 있었기에 대중들은 파시즘의 기능을 인식할 수도, 인식하려고도 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더 표적에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노동자들은 깨달야만 한다’든지 혹은 ‘우리는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떠한 목적에도 봉사하지 못한다. 왜 노동자들은 깨닫지 못했는가? 왜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는가? 노동자운동에 대한 좌,우익 사이의 논쟁의 토대를 형성한 질문 역시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익은 노동자들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좌익은 그러한 주장을 거부하고, 노동자들은 혁명적이며 우익의 주장은 혁명적 사고에 대한 배신이라고 주장했다.

 

양측의 주장은 모두 문제의 복잡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엄격히 기계론적이었다. 현실적인 평가는 평균적 노동자들이 자신의 내부에 모순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했어야만 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선명하게 혁명적이거나 선명하게 보수적인 것이 아니라 분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노동자의 심적 구조는 한편으로는 (혁명적 태도의 토대를 갖춘) 사회적 상황으로부터,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주의적 사회의 전체 분위로부터 도출된다. 그런데 양자는 서로 서로 불화관계에 있다.

 

 

이러한 모순을 깨닫는 것 그리고 노동자들 속의 반동적인 것과 진보적-혁명적인 것이 어떻게 서로 서로 대항하게 되는가를 명확히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물론 이 점은 중산계급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들이(노동자들) 위기에 빠진 ‘체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미 경제적으로 비참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진보를 두려워하고 극단적으로 반동적이 된다는 사실은 사회-경제적 관점에서는 쉽사리 이해될 수 없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들은 반란적 감정(rebellious feelings)과 반동적 목표 및 내용(contents) 사이의 모순을 그들 내부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보기를 들어, 우리가 전쟁의 직접 원인이 되는 특정한 경제적, 정치적 요인을 분석하면, 전쟁을 사회학적으로 완전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1914년 이전의 독일의 병합 야망이 브리이(Briey)와 롱기(Longy)의 금속광, 벨기에의 산업 중심지, 극동에 있어서 독일의 식민지 소유의 확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는 것은 부분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또한 히틀러의 제국주의적 이해가 바쿠(Baku) 유전이나 체코의 공장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독일 제국주의의 경제적 이해가 직접적인(immediate) 결정요인이었다는 것은 틀림없으나, 또한 우리의 관점 속에 세계전쟁의 대중심리학적 토대도 적절하게 포함시켜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대중들의 심리구조가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를 흡수할 수 있었으며, 또한 어떻게 제국주의적 구호가 독일 주민의 평화적이며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태도에 정반대되는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었는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이러한 것이 ‘제2차 인터내셔날의 지도자들의 결함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유를 사랑하는 무수한 대중들과 반제국주의적인 노동자들이 왜 스스로를 배반당하게 허용하였는가? 양심적 거부에 따르는 결과에 대한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은 약간만을 설명해 줄 뿐이다.

 

1914년의 동원령을 경험한 사람들은 일하는 대중들 사이에 여러 다양한 분위기(moods)가 분명히 있었음을 알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소수의 의식적인 거부로부터 다수의 운명에 대한 이상한 체념(혹은 이상한 무관심), 명백한 호전적 열광(martial enthusiasm)에 이르기까지 중산계급뿐만 아니라 다수의 산업노동자들에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무관심뿐만 아니라 열광은 분명히 대중들의 구조 속에 있는 전쟁 토대의 한 부분이었다.

 

양차 세계대전에 있어서 이러한 대중심리의 기능은 성-경제학적 관점 즉,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으로 일하는 대중들의 구조를 제국주의에 적합하도록 변화시켰다는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전쟁 정신이상’(war psychoses)이나 ‘대중의 혼미’(befogging)에 의해 사회의 파멸(social catastrophe)이 초래된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무의미한 글귀를 내던지는 셈이다. 이러한 해석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게다가 대중들을 쉽사리 몽롱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대중들을 너무나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모든 사회적 질서는 자신의 주요 목적 성취에 필요한 구조를 구성원 대중들 속에 만들어 낸다는 것이 요점이다.

 

어떠한 전쟁도 대중들의 이와 같은 심리적 구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지배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볼 때, 또한 정치의 실천적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한 사회의 경제구조의 모순이 종속적인(subjucated) 대중들의 심리구조 속에 깊이 새겨진다는 점에서 볼 때, 한 사회의 경제구조와 사회 구성원의 대중심리 구조 사이에는 본질적인 관계가 존재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한 사회의 경제법칙이 그것에 복종하는 대중들의 활동을 통해서만 구체적인 결과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독일의 자유운동이 이른바 ‘역사의 주관적 요인’에 대해 알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마르크스는 기계론적 유물론과는 달리 인간의 역사의 주체로서 인식하였으며, 레닌이 의지한 것은 바로 마르크스주의의 이러한 측면이었다.)

 

그러나 자유운동은 비합리적이며, 겉으로 보기에는 목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행위, 즉 다른 말로 하자면, 경제와 이데올로기 사이의 균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다.

 

우리는 신비주의가 어떻게 과학적 사회학에 대해 승리할 수 있었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설명으로부터 새로운 행위양식(mode of action)이 스스로 우러나올 수 있도록 논의의 방향을 이끌어 나갈 때만 이 과제는 달성될 수 있다.

 

일하는 인간이 분명하게 혁명적이거나 분명히 보수적인 것이 아니라 반동적 성향과 혁명적 성향 사이의 모순 속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모순을 정확하게 지적할 수 있게 된다면, 그 결과는 혁명적 힘을 가지고 보수적인 심적 힘을 상쇄하는 행위양식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모든 형태의 신비주의는 반동적이며, 또한 반동적 인간은 신비주의적이다. 신비주의를 비웃는다든가 신비주의를 ‘혼미’ 혹은 ‘정신이상’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신비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계획(programme)으로 이끌 수 없다.

 

그러나 신비주의가 정확히 이해된다면, 틀림없이 해독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상황과 구조적 형성체 사이의 관계가-특히 순수하게 사회-경제적인 토대 하에서는 설명될 수 없는 비합리적 이념(ideas)-우리의 인지수단(means of cognition)이 허용하는 한 완벽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 빌헬름 라이히 지음 『파시즘의 대중심리』 (오세철/문형구 옮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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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람시와 예수

 

 그람시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 중에서

 

 

불멸성

 

사람이 죽은 뒤에

 

그의 가장 고귀한 행동들이

 

반드시 되살아나고

 

인간의 의지를 넘어

 

역사의 보편적 과정으로 편입되는 것

 

 

▒  예수의 부활 개념과 그람시의 불멸성이 잘 어울린다. 

 

새로운기독교운동연대(준)  http://www.newchristianity21.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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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주의와 '현장지배권력화'가 운동 망친다

[운동평론] 조합주의와 활동가들의 '현장지배권력화'가 운동 망친다

 

신자유주의가 유난히 극성을 부리는 대한민국, 오늘도 어딘가에는 생존권을 두고 벌이는 노동자민중들의 고된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 그리고 민생의 처절한 현장에는 그들과 함께하는 열정적인 활동가들이 있어 애환 어린 투쟁을 신명나는 굿판으로 인도한다.

 

한편, 오랫동안 투쟁해온 한 중년 현장 활동가의 말은 요즘 운동을 아는 이들의 가슴을 시리게 한다.

 

“언제부터인지 투쟁현장에 가면 분위기가 좀.. 그래요. 썰렁해요. 바터제라고 있잖아요. ‘내가 너희한테 연대갔으니 너희도 우리한테 온 게 당연한 게 아닌가’.. 뭐랄까. 거래 비슷한 분위기가 있어요. 사무적이라고나 할까요. 세상을 바꾸자는 운동이 자본주의 시장처럼 소비되는 방식이면 안 되잖아요. 안타깝습니다. 운동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진정 ‘동지’라고 부를 수 있는 뜨거운 분위기가 살아나야 해요.”

 

활동가들 사이에는 철 지난 ‘87년 체제’처럼 화석화된 모습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연령과도 무관한 이들에게서 운동에 대한 열정과 지성을 찾아보기란 힘들다. 이 글은 운동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활동가들 중에서 이른바 ‘조합주의’와 ‘관료화’의 길을 걷고 있는 일부 활동가들의 행태를 성찰해보자는 취지로 쓰게 됐다.

 

이들 활동가들은 때로는 조직 내에서 현장지배권력과 중첩된다. 조직 내 권력이 된 이들에게 운동의 발전을 저해하는 원인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조합주의다.

 

여기서 조합주의는 대부분 조직의 단기적인 이익을 취하는 까닭에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도 될 수 있는 고무줄 같은 논리로, 이에 순응하는 것이 자신의 기득권에 도움 된다고 여기는 활동가들까지 가세해 상부상조하는 반/비운동적인 행태로 진행된다. 하지만 이들은 "운동판에서 조합주의로부터 자유로운 곳 있으면 나와 보라구"라며 외려 정당화에 급급하다.

 

또 생계형 활동가인 경우는 자리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증상도 있다. 몇몇 재력이 넉넉한 대기업 노조와 상급단체 외에는 그나마 최저생계비 수준이라도 활동비를 지급하는 운동단체가 희소하기 때문이다. 반면, 내 돈 써가며 진정성과 열정만으로 뛰는 자발적인 활동가들도 있어 큰 대조를 보이는데 이들은 늘 경계대상이 된다.

 

어쨌든 운동의 동력은 활동가들이 지닌 나름의 ‘신념’에서 나오며 따라서 매우 헌신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활동가들의 주변 환경은 상황이 투쟁 자체에 매몰되는 경우가 많아 학습한다는 건 어지간한 노력 없이는 어려운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신념’은 기본적으로 활동가 자신의 학습에서 비롯된다. 이는 또 자신이 속한 단체의 운동기조에서도 영향을 받는데, 기조가 불확실한 단체의 경우에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물론 기조가 있는 단체라 해도 특정 부문 등의 목적에 집착해 외연을 국한시킬 경우에는 운동 사이의 소통 가능한 연대의 문이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하물며 운동이 지닌 정치성을 외면하고 현장을 경제적 공간으로만 활용하려 한다면 그 활동가는 진정한 운동을 할 수 없고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 도태될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에 처한 활동가들의 공통점은 기능주의와 과거 지향성이다. 당장 투쟁현장에 필요한 건 인력이다 보니 ‘연대’를 필요로 하게 되는데, 실제로는 원칙 없는 ‘이용’이나 ‘이합집산’인 경우가 돼버려 운동성을 훼손하기도 한다.

 

또한 그가 지닌 정체성이 새로운 학습과 만나지 못하고 과거에 머무르는 까닭에 좀 더 진보적인 타 운동단체나 인사들에게 배타적인 경향을 띠기도 한다. 해서 말이 ‘연대’지, 필요하면 부르고 예민한 부분이 있으면 쏙 빼버리는 기회주의적 속성이 작동된다.

 

결과적으로 ‘쪽수’는 많을수록 좋고 ‘소통’은 적을수록 좋다는 분위기가 되니, 꼭 필요한 새로운 이슈가 생겨도 큰 부(?)가 없으면 논의 테이블이 만들어지긴 어렵다. 활동가들이 이해관계에 매인 자본 논리의 운동을 하게 된 것이다.

 

더 심한 악성일 때도 있다. 활동가가 자신의 신념과 소속 단체의 기조가 다름에도 생계가 해결된다는 이유 등으로 단체에 머무르는 경우다.

 

예컨대 자칭 정통(?)맑시스트가 비정규·비공식부문 노동단체에서 일한다거나, 예전 개념으로 PD계열 활동가가 NL진영에서 일하면서 더욱이 그 단체에서 현장지배권력이 돼 중추를 맡으면 활동가 자신의 정서적 혼란이 가중되기 쉽다. 이런 환경에서 활동가는 권위주의까지 생겨 투쟁 국면은 물론 평소에도 단체 구성원들을 이용 대상으로 여겨 내심 적대시하게 되고, 심지어는 지식 파시스트로 발전할 개연성도 없지 않다.

 

그 결과 활동가는 운동에서 벗어난 단순 관리자로 전락한다. 그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현장을 잘 모르는 이들을 상대로 한 환타지적 무용담이 고작이어서 대중운동의 힘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운동을 망치게 된다.

 

연전에 한 원로 여성활동가를 만난 적이 있다. 필자와 동년배인 그녀는 지금도 모 여성단체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필자가 “요즘 운동진영 분위기가 끼리끼리 어울리는 것 같다”면서 “인간미 넘치는 끈끈한 유대감 같은 걸 보기 힘들어진 것 같다.”고 하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사실, 여성인 저도 겁날 정도예요. 조직적이건 개인적이건 이 동네에선 말도 편하게 못합니다. 다들 조직이기주의에 갇힌 건 아닌지 걱정돼요. 게다가 긴장수치가 높아서인지, 고학벌화 되어서인지 몰라도 요즘은 선후배도 없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동지들 사이에서 소가 닭 보듯 하는 느낌 비슷한 걸 받아요. 예전엔 투쟁현장에서 만나면 성(性)을 넘어 손도 잡고 얼싸안고 동지애가 물씬 느껴졌잖아요. 요즘은 어설픈 스킨십 큰일 납니다. 정말 조심해야 해요.”

 

운동이 속히 조합주의와 관료화를 극복하고, ‘쪽수’보다 기탄없는 ‘소통’의 장으로 진일보했으면 좋겠다. 2011년 신묘년 새해에는 투쟁 현장의 곳곳에서 변증법적 역사와 철학이 숨 쉬는, 인간냄새 물씬 풍기는 신명나는 굿판을 보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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