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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공산당-국제공산당 운동의 교훈
- 그람시와 보르디가를 넘어 세계혁명당을 향해
-이형로
이탈리아 사회당과 혁명적 분파의 형성
1892년 Genoa에 의해 창건된 이탈리아사회당(PSI)은 개량주의 세력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존재했으나 마르크스주의적 혁명적 원칙을 고수하는 진정한 좌파 세력은 1917년 전까지도 형성되지 못하고 있었다. 1917년 로마대회 이후에야 비로소 비타협적 혁명분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 혁명분파는 아직 소수였지만 “전쟁 이후 평화적인 삶”이라는 당내 개량주의 다수파의 주장에 대항하여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세우기 위해 모든 나라에 프롤레타리아의 권리를…….”, “정치적 영역뿐 아니라, 자본가에 대한 사회주의적 몰수를 통해 모든 부르주아 기구에 대한 투쟁을…….”이라는 강령을 방어했다. 당시 보르디가가 주도했던 혁명분파는 당의 분리까지는 원하지 않았는데, 위의 혁명적 강령으로 당의 다수를 획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20년 3월 토리노에서 10일간의 총파업이 일어났을 때, 주류 법적 노조의 지원을 받던 이탈리아사회당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노동자계급을 배신했다.
1919년 5월 1일 그람시, 톨리아티, 타스카 그룹은 신질서(L'Ordine Nuovo)를 창간했고, 이때 그람시는 레닌과 De Leon의 혁명적 생디칼리즘을 섞어 “노동조합주의가 공장평의회와 소비에트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한편, 당시 파업이 일어난 지역인 이탈리아사회당의 토리노그룹은 보르디가가 이끌고 있었는데, 그는 그람시와 다르게 핵심문제를 혁명당의 부재라고 보았다. 보르디가도 물론 평의회를 지지했지만, 평의회가 “공산당 지역단위”의 기반 위에서 형성될 때 비로소 혁명적 내용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신질서와 논쟁했다.
그런데 정작 보르디가가 신질서와 논쟁한 중요한 이유는 이론적 문제가 아니었다. 신질서 그룹이 개량주의자, 중앙파와 선을 긋고 스스로 혁명분파를 형성하는 것을 주저했기 때문이었다. 당의 다수를 장악하고 있는 개량주의 세력이 노동자계급의 투쟁에서 배신하거나, 당 내부가 혁명적 강령을 관철하고 실천할 태세가 갖춰져 있지 않을 경우, 혁명적 원칙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당내 기반과 일부 건강한 인자들을 포기하더라도 그들과 분명하게 선을 긋고 단절하는 것이 혁명분파의 원칙이자 노동자 계급에 대한 신뢰를 지키는 일이었다. 당시의 신질서 그룹은 혁명분파의 역할과 혁명 강령의 실천적 의미를 소홀히 인식한 결과 개량주자들과의 단절을 주저했던 것이다.
우리는 현재에도 말로는 사회주의나 혁명그룹을 주장하고 있지만, 실천적으로는 개량주의 그늘에 놓여 있는 수많은 기회주의자와 투쟁하고 있다.
코민테른 지부,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건
결국,1920년대 말 신질서 그룹은 보르디가 분파로 움직이게 된다. 9월의 공장점거투쟁 실패가 “경제관리”와 “노동자 통제” 이론에 대한 심각한 타격을 입혔기 때문이다. 그 사건은 결정적으로 보르디가가 강조했던 “공장점거 투쟁이라는 혁명적 사건이 그 운동을 지지하고 지도할 공산당이 부재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 되었다. 그해 11월 밀라노에서 “통일공산주의분파”가 형성되었고, 1921년 드디어 리보르노에서 코민테른의 지부인 이탈리아공산당(PCI)이 창건된다. 각 분파는 해소하여 신당에 결합했고, 당 대회의 안건에는 “혁명 중에 일어난 평의회는 그의 다수가 공산당에 의해 획득되었을 때 혁명적일 수 있고, 그렇지 않을 때 혁명투쟁에 대한 심각한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포함했다. 대중행동의 자발성과 혁명의식 사이의 문제는 결국 당과 계급의 문제였고, 이후 보르디가주의와 좌익공산주의 경향의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그람시는 혁명분파 구성에 주저하긴 했지만, 이탈리아공산당 창건에 일정 정도 기여했고, 1922년부터 1924년까지는 모스크바와 빈에서 코민테른을 위해 활동했다. 당시 소련에서는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정책이 수립되어야 하는가와, 서유럽에서 사회주의자와 새로운 공산당 사이의 관계를 주제로 논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또한, 1920년대와 30년대에 코민테른의 변질에 대한 혁명적 반대가 있었는데, 그것은 맑스와 레닌의 방법론적 전제의 변질 비판에 기초하고 있었다. 1921년 리보르노(libomo)에서의 이탈리아공산당 창립성원과 코민테른 내에서 노동자와 혁명가들의 살인에 책임이 있는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지도자들과 통일전선을 형성하려는 정책에 반대하여 싸웠던 혁명적 전투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이탈리아공산당 내에서 다수를 대표하고 있었고 당이 볼셰비키화 되어감에도, 당에서 좌파를 축출하는 것에 반대한 혁명가들이었다. 결국, 이들은 코민테른에 의해 그 자리에서 제거되었다.
그람시는 1924년 이탈리아 의회에 선출되어 돌아와서 당의 지도권을 확보하고, 코민테른의 노선에 따라 이탈리아공산당 창당 초기의 분파주의 경향으로부터 대중운동에 뿌리박은 대중정당으로 전환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이러한 당 노선을 두고 보르디가 경향과 심각한 갈등을 빚게 된다. 왜냐하면, 당시 이탈리아는 이미 파시스트운동의 발전이 당 운동의 행동적 제약을 가져왔고, 모든 투쟁은 방어적 수준에 머물렀고 대중들의 경제투쟁조차 광범위하게 줄어든 상태였기 때문에 대중정당 노선은 보르디가에게는 혁명적 원칙을 포기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람시는 처음엔 공식적으로는 보르디가 노선을 지지하며 공산당의 사회당과의 연합을 반대했으나, 날로 증대하는 파시즘 세력의 위협을 느끼면서 코민테른의 연합전선론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타락하는 코민테른과 이탈리아 좌파의 투쟁
당시 코민테른과 그람시는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사회당과 이탈리아공산당이 통합하여 대중정당을 만들기를 원했지만, 보르디가는 무솔리니와 “평화협정”을 맺는 “중립주의” 정책을 채택한 이탈리아사회당과는 결코 동맹을 맺을 수 없었다. 강령적으로도 프롤레타리아의 혁명투쟁 노선을 갖고 있지 않거나 사실상 폐기해버린 정치세력들과의 “통일전선”을 거부하는 노선을 강력히 밀고 나갔다. 결국, 통일전선 문제는 보르디가 지도부와 코민테른 사이의 대립을 가져온다. 당시의 코민테른 3차 대회는 모든 나라에 통일전선 전술의 적용을 명령했는데, 이탈리아공산당 4차 대회에서 오히려 이것에 반대하는 선언을 한다. 1924년 5월 Como에서의 당 대회에서 보르디가 등이 제안한 테제인 프롤레타리아 독재, 무장투쟁 노선(프롤레타리아독재냐 부르주아지독재냐)을 절대다수로 수용한 것이다.
다음 해인 1925년은 본격적으로 보르디가 경향과 코민테른의 러시아 지도부의 전쟁이 일어난 중요한 해이다. 또한, 1925년은 트로츠키의 좌익반대파와 러시아공산당 및 코민테른이 대립한 시기였다. 1925년 3월~4월 코민테른 확대집행위원회는 이탈리아공산당 3차 대회의 의제에 대한 보르디가 경향을 강제로 삭제·제거했고, 트로츠키에게 우호적인 보르디가의 글 ‘트로츠키 문제’의 출판을 금지했다.
이때 그람시와 톨리아티는 이탈리아공산당을 볼셰비키화 시키면서 당 중앙을 장악해나갔는데, 좌파를 축출하기 위해 당 중앙테제 찬성투표, 좌파(보르디가)의 테제 반대투표라는 공작을 펼쳤다. 이런 공작은 당 기관지인 Unita에 1925년~1926년에 걸쳐 보르디가를 트로츠키주의자로 비방하면서 악의적인 캠페인을 펼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결국, 코민테른의 스탈린 정책을 이탈리아공산당에 이식시키기 위해 그람시는 혁명적 좌파들의 입을 막음으로써 다수의 당원과 분리하려 했고, 코민테른 안에 이미 뿌리내리고 있던 강압적 관료주의(스탈린주의)를 이용하여 혁명분파들을 차례로 축출하는 변절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또한, 그것이 참혹한 스탈린주의의 잉태였던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혁명적 좌파들은, 그해 4월 보르디가의 동료이자 훗날 보르디가 경향을 극복하고 국제공산당(PCint)을 창설한 데이먼 등을 통해 조정위원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조차도 그람시는 “조직화한 분파”라고 위원회를 비난하면서 격렬하게 공격했고, 그를 추종하는 다수의 맹목적 조직보존주의자들의 축출 위협 아래 위원회는 결국 해산해야 했다. 그것은 다수파로서의 이탈리아 좌파 종말의 시작이었다. 그 후 당을 장악한 그람시의 대중정당 노선 아래 당은 12.000명에서 30.000명으로 증가했다. 그런데 당시의 신규 당원들은 사상적으로 무장되지 않은 젊은 노동자와 농민이 다수였고, 낮은 수준의 강령으로 정치의식의 하락을 가져왔고, 정치적 미숙함과 무능력은 당을 급속도로 변질시켰다. 정치의식이 균질화되지 않은 미성숙한 다수에게 조직보존주의, 양적 팽창주의 노선을 강제하는 것과 사상투쟁의 자유마저 제한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사상투쟁과 혁명적 실천을 통해 다수를 획득해나가고자 하는 혁명적 좌파들에게는 치명적인 상황을 초래했다. 코민테른이 채택한 조직보존주의와 양적팽창주의 당 노선은 혁명분파의 역할을 축소하면서 개량주의적 당 노선으로 자리 잡아 현재에도 혁명분파의 탄생과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적 재조직 화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결국, 1926년 주위상황 때문에 이탈리아 밖 리옹에서 비밀리에 열린 이탈리아공산당대회에서 그람시는 공산당 총서기로 승인돼 당의 지도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보르디가 경향은 완전히 제거된다.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축출당한 보르디가는1926년2월~3월 6차 코민테른 확대집행위원회에 마지막으로 참여했는데 트로츠키와 장시간 토론할 기회를 가졌다. 위원회의 참여는 “일국사회주의”에 대한 트로츠키의 투쟁에 이탈리아 좌파의 연대를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보르디가는 극단적 개입의 형태로 가장 맹렬하게 스탈린을 공격했다. 그는 당시를 “분파의 역사는 레닌의 역사이다.”라고 회상했다. 이것이 코민테른 내에서의 이탈리아 좌파의 마지막 투쟁이었고, 그 이후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저항 그리고 스탈린의 잔혹한 숙청과 살해의 역사였다. 1927년 12월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를 선언한 러시아 공산당 15차 대회에서 트로츠키를 축출했다. 또한, 혁명과 관계된 모든 사진과 기록들에서 트로츠키의 흔적을 지워나갔고, 수많은 공산주의자와 혁명적 노동자계급을 추방하고 살해했다.
1926년 이탈리아 좌파는 보르디가를 중심으로 다음의 문제를 제기하며 싸웠다. ‘코민테른의 혁명적 의회주의 발상에 대한 문제 제기’, ‘공동전선 개념, 그리고 중도주의자와 명백한 부르주아 요소들과 함께 당을 만드는 것을 지시한 코민테른에 대한 반대’, ‘러시아 국가가 부르주아 국가로 발전한 것과 코민테른이 차츰 국제주의 입장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반대’, ‘공산당들이 반파시즘과 민주주의 수호를 내걸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함으로써 점점 부르주아 민족주의당으로 되어가는 것에 대한 투쟁’
그러나 이탈리아 좌파는 당의 역할, 그리고 노동자계급과 당의 관계 문제에 관해서는 러시아 혁명 퇴행의 모든 교훈을 끌어낼 능력이 없음을 증명했다. 이들은 혁명에서 당의 역할과 관련하여 전적으로 코민테른의 테제와 입장(1920년 채택)으로 되돌아갔다. 보르디가는 오래된 분리. 즉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발전된 경제와 정치투쟁 사이의 낡은 분리를 또다시 채택했다. 보르디가는 노동자계급은 오직 혁명적 소수를 통해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계급으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다는 부정확한 결론에 이른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을 경제적으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정치적 운동을 통해서, 즉 당을 통해서만 정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계급이 단순히 경제적 범주만이 아니며 혁명적 당은 그 정치적 의식의 동질화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정확한 전제에서 출발했지만, 불합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러시아혁명과 20년대 혁명적 물결의 퇴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오직 통일되고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당, 어떤 소수도 이 과업을 프롤레타리아트를 대신해서 수행할 수 없다. 이탈리아도 노동자계급의 퇴보에 직면하여 당의 역할이 이를 대신할 수 없었다.
파시즘과 공산주의 좌익분파의 결성
1926년 파시스트 정부의 정당금지령에 따라 이탈리아공산당은 해산 당했고, 그해 11월 그람시는 체포되어 20년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혁명적 좌파와 결별한 당은 이미 혁명성과 전투력을 모두 잃은 채 파시스트의 탄압 하에 조직적 활동이 끊어지게 된다.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모스크바로 망명했다 귀국한 톨리아티의 대중정당형 의회주의 노선을 채택하면서, 스탈린주의에서 사민주의까지 혼재된 다원주의의 길로 접어든다. 또한, 톨리아티의 사후에는 러시아파와 이탈리아파로 양분, 유로코뮤니즘과 민족 공산주의 노선 등으로 혼란을 겪다가 결국 소련 붕괴 후 완전한 사민주의 좌파 정당으로 몰락하고 만다. 이것이 바로 파시즘과 통일전선의 반혁명적 성격을 명확히 하지 못해 파시스트에게 길을 열어주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혁명노선을 굳건히 하지 못해 전투성을 잃어 변절한 이탈리아공산당의 비극이었고, 그람시가 주도한 스탈린주의 공산당의 실패였다.
보르디가 또한, 1926년 말 파시스트에 의해 체포되어 3년간 추방되었다. 당시 국외로 망명한 이탈리아 좌파는 유럽에서 투쟁을 계속했지만, 보르디가는 점점 정치적 삶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혁명운동에서 멀어져 간다. 하지만 보르디가를 극복한 그의 동지 데이먼과 후배 혁명가들은 파시즘 하에서도 전쟁 중에도 수백 명이 분명하게 살아남아 여러 공장과 거리에서 목숨을 건 선전활동을 해나갔으며, 혁명적 분파활동의 원칙과 실천적 경험들 때문에 전쟁이 끝나기 전 독자적인 국제공산당(PCint)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수백으로 시작한 당원들이 수천으로 증가하는 데에는 채 몇 년이 걸리지 않았고, 이것은 대중적 노선이 아닌 혁명적 원칙과 혁명 강령을 전투적 노동자계급에 굳건히 뿌리내린 결과였다. 이들은 파시스트뿐만 아니라 스탈린주의자들에게서도 탄압을 받았지만, 그들은 무솔리니의 감옥에서, 그리고 외국으로의 망명 속에서도 투쟁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는 1928년 파리의 팡탱(Pantin)에서 이탈리아공산당(PCI)의 좌익분파가 결성되면서 시작되는데, 이 대회의 목적은 새로운 당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중도주의”를 제거함으로써 인터내셔널에 재결합하는 것이었다. 즉 “이탈리아분파”로서가 아니라 “코민테른의 좌익분파”로서 자신을 규정하는 대회였다. 팡탱에서는, 다른 여러 가지 결의안 중에 코민테른에서 축출된 모든 반대파를 재통합하기 위하여 의장인 트로츠키와 함께 코민테른 6차 대회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탈리아 좌파는 이미 러시아 반대파와 10월 혁명의 영광스런 원칙의 수호 아래 연대했으나, 차이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들은 프로메테오(Prometeo)를 발행했는데, 프로메테오는 원래 이탈리아공산당 나폴리 지역의 보르디가 분파의 혁명적 잡지였다. 당시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일국사회주의 건설 노선에 반대했던 국제 좌익반대파에 동의했지만, 그것을 주도한 트로츠키와의 강령적 차이에 의해 1930년대부터 선을 긋게 되고, 특정경향의 국제적 분파를 거부하며 1933년 제4인터내셔널을 만들려는 트로츠키의 시도에 반대한다.
프로메테오는 첫째, 스페인 문제와 민주적 슬로건에 대해 트로츠키가 「스페인 혁명과 공산주의자의 임무」에 “공화국 슬로건은 자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슬로건”이라고 한 것을 두고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트로츠키가 코민테른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체제를 포기했다고 비판하고 제국주의 시대에는 전쟁 아니면 혁명이라는 하나의 구호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둘째, 독일 문제와 통일전선에 대해 1931년 트로츠키가 독일공산당과 독일 사민당의 통일전선을 주장한 것에 대해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중도주의 혁명’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비판한다.
셋째, 분파와 당 문제에 대해 1931-32년에 러시아 국가에 모든 공산당이 복속한 것에 대해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모든 나라 좌익분파의 실질적 발전이 당이며 혁명적 상황에서만 존재할 인터내셔널의 인위적 구성이 당이 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한편, 벨기에와 프랑스에서는 이런 흐름이 1930년대에 걸쳐 나타나게 되는데, 1933년 브뤼셀에서 좌익분파의 이론지인 빌랑을 발간한다. 빌랑 주변의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당시의 임무들을 정확히 정의했는데, 첫째, 전쟁에 직면해서 국제주의의 기본적인 원칙들을 배신하지 않을 것. 둘째, 러시아 혁명 실패의 대차 대조표를 작성할 것. 그리고 미래의 계급투쟁 부활 시 나타나게 될 새로운 당들에게 이론적인 기초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한 교훈들을 이끌어낼 것 등이었다.
이 시기에 트로츠키와 이탈리아 좌파 입장의 가장 큰 차이는 통일전선 문제였다. 트로츠키에게 통일전선은 코민테른의 가장 높은 성취의 표현이었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정치적 틀을 처음 네 번의 당 대회에 두었는데 반해 이탈리아 좌파는 처음 두 번의 대회에 두었다. 그들 사이에서 드러난 격차는 사회민주주의가 노동자 계급 일부를 조직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그들이 프롤레타리아적이라는 트로츠키의 시각으로부터 나왔다. 하지만, 공산주의 좌파는 이 기준을 사용하는 것이 반혁명세력을 프롤레타리아라 명명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공산주의자의 임무는 노동계급에 공산주의 원리를 명확하게 하려고 투쟁하는 것이다. 이탈리아 좌파와 트로츠키 사이의 틈새는 그래서 균열로 결론이 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비타협적 투쟁과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당을 위한 강령적 기초를 세우는 임무를 가장 충실히 수행했음에도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파시스트와 공산당의 이중 탄압 속에 고립될 수밖에 없었고, 1943년 전쟁의 시기에 다시 부활하게 된다.
전쟁 중에 창설 한 국제공산당
전쟁 시기 감옥이나 가택연금 상태 속에서도 데이먼(Onorato Damen) 주변의 핵심활동가들은 2년 동안 비밀리에 파시스트 하에 생존하면서1945년 국제공산당(PCint)을 창설한다. 국제공산당은 2차 제국주의 학살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이탈리아 좌파의 많은 구성원들이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오고, 전후 계급투쟁의 파고 속에서 금세 수천 명의 당원을 얻게 된다. 이때 망명 중인 프랑스 동지들의 대부분이 돌아왔고, ICC의 창설자인 Marc Chirik 주변의 프랑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1944년 파리에서 별도의 분파인 프랑스 좌파공산주의자(GCF)를 창설한다. 프랑스좌파공산주의 또한 강령적 기반은 빌랑과 좌익분파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다.
<데이먼(Onorato Damen) : 1893~1979, 국제공산당(PCint)의 창설자>
그리고 이탈리아 공산당의 주류였던 보르디가는 스탈린주의를 이탈리아 공산당에 이식한 그람시에 의해 축출된 이래 파시스트 시절과 전쟁기간 동안 집에만 머물러 있었고, 당의 출판물 발행에만 협조했을 뿐 결코 당에는 가입하지 않았었다. 단지 1945년 전쟁의 끝 무렵에 이탈리아 남부로부터 보르디가 주위에 모여 있던 수많은 동지가 당에 가입했을 뿐이다. 1948년 선거 참여를 두고 ‘혁명적 의회주의’에 대한 견해 차이로 데이먼 그룹과 보르디가 그룹은 대립하기 시작했는데, 이후 소련 제국주의의 특징, 공산당의 성격, 노조개입, 당과 계급의 문제 등에서 대립하게 되고, 데이먼 그룹이 다수의 지지를 얻는다. 하지만, 1949년 이후 보르디가의 노골적인 개입은 당내 반대 블록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고 결국, 3년 후에 또 하나의 국제공산당을 분리하는데 성공한다.
보르디가는 1952년 자신의 조직을 설립하고 Il Programma Comunista를 발간한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그 후에 경직된 분파주의를 위한 이론적 정당화를 하면서 자신을 지구상의 가장 유일한 프롤레타리아트 당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분파주의는 분명히 반혁명의 대가 중 하나였다. 한편으로는 어렵게 성취한 정치적 입장 주위에 불변하는 공식의 벽을 쌓음으로써 적대적 환경 속에서 원칙을 고수하는 시도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으로부터 고립되고 소그룹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혁명가들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진정한 요구로부터 분리한 써클 정신을 강화시켰다.
1930~40년대 반혁명과 전쟁의 암흑 속에서도 진정한 이탈리아의 좌익분파들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본질과 공산주의 운동의 전망을 세우는데 공헌했고, 그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이탈리아 공산주의 좌익분파는 단지 양적으로만 성장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국제적인 혁명적 공산주의 운동의 흐름으로 자리 잡게 된다. 국제공산당은 파시스트와 반 파시스트에 대해 혁명적 패배주의 입장을 방어했고,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이론과 실천의 측면에서 모두 그렇게 한 유일한 당이었다. 그것은 스탈린주의 빨치산으로부터 많은 전투 파를 얻었고 한동안 전후 이탈리아 투쟁에서 수천의 노동자들을 이끌었다. 트로츠키의 반스탈린주의 대오에 가려지고, 1921년 좌익에 의해 세워진 이탈리아 공산당과 그 주류인 보르디가의 명성에 축소되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없었던 이들이야말로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로부터 직접 탄생했으며 자본주의와의 피할 수 없는 결전의 과정을 비타협적 투쟁과 혁명적 전통을 지키면서 이어오고 있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19세기 말부터 기회주의에 대항해 투쟁해 온 제2인터내셔널의 좌익분파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당시부터 그 투쟁이 분산된 형태로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좌익공산주의 세력의 분산은 코민테른과 반 혁명기를 거쳐 1970년대까지 지속하였는데, 68년의 파업투쟁과 함께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역사의 무대에 부활하면서 수많은 그룹으로부터 새로운 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가 시작된다.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혁명적 일관성을 추구한 좌익공산주의 전통이 새롭게 조명되었는데, 옛 프랑스 좌익공산주의 분파의 공산주의자들은 이탈리아 좌익분파의 옛 그룹들을 고무시켰고, 1975년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6개 그룹이 국제공산주의흐름(ICC)을 창설한다.
한편, 국제공산당도 이탈리아에서의 고립에서 벗어나 세계의 여러 좌익공산주의 그룹들에게 국제회의를 제안한다. 1차 대회는 1977년 밀란에서 열렸는데 이는 단순히 “좌익공산주의 세력의 국제 연결망”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 세계 공산주의 혁명운동의 분산을 극복하고 집중화와 재구성을 위한 국제공산당의 노력이었다. 대회에서는 1936년 그들의 국제대회에서 채택한 정치조직의 계급적 성격을 판단하는 기준을 토론했다. 2차 대회는 6개 조직의 참여와 3개 조직의 동의 속에 1978년 파리에서 열렸는데, 대회 주제는 자본주의 위기와 자본주의 사멸의 경제적 기초, 당의 역할이었고, 보르디가주의 전통의 많은 그룹에게 걸림돌이었던 민족해방투쟁에 관한 토론이 있었다. 3차 대회는 1980년 파리에서 있었는데 자본주의의 위기상황과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전면적 반대,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노동자정당과 노조 영향의 제거를 합의했다. 1983년부터 공산주의노동자조직(CWO)이 참여함으로써 혁명당국제서기국(IBRP)의 형성을 고무시켰다.
공산주의 국제대회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서기국의 결성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공산주의노동자조직은1975년 영국에서 만들어졌고, 륄레, 호르터, 판네쿡 등 독일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을 계승하여 공산주의노동자조직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공산주의노동자조직’이라는 조직이름이 증명해준다. 이 서기국의 형성과 함께, 당의 재건을 향한 과정의 새로운 단계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경험의 교훈에 기초하여 시작되었다.
1984년에 작성된 서기국의 강령은 다른 나라의 혁명적 공산주의 그룹들이 결합하는데 기본적으로 인정할만한 원칙적인 내용으로 작성되었고, 서기국의 입장을 다른 지역에 이식하기 위한 복제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그룹들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준역할을 하고자 했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할 때 이러한 그룹들이 지역의 조건들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영역에서 노동자계급의 투쟁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생겨나기를 기대한 것이다. 서기국에는 1984년 이후 프랑스와 독일, 미국, 캐나다와 남미의 그룹들이 가입하게 되고, 국제공산주의흐름과 함께 현재 최대의 국제적인 좌익공산주의 조직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국제공산주의경향(ICT)은 1983년 혁명당국제서기국(IBRP)으로 결성되었다가, 2009년 국제공산주의경향(ICT)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현재 6개국(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미국, 캐나다)에 지부를 두고 있다.
국제공산주의경향의 정치적 입장은 기본적으로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 전통에 기반을 두는데, 이는 독일 좌익공산주의 전통에 기반을 둔 다른 조직들과 차이점으로 나타난다. 특히 국제공산주의경향은 이탈리아 좌익의 주류였던 보르디가주의를 극복하고 독자적 좌익분파를 형성한 데이먼주의를 전통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당 문제 등에 있어서는 레닌주의와 보르디가주의 모두를 극복했다고 하는 데이먼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경제이론은 폴 매틱의 이론을 일부 수용하고 있다. 정치적 입장에 대한 이런 점들이 국제공산주의경향을 좌익공산주의 경향 내에서의 레닌주의 경향으로 보이게도 한다. 물론 국제공산주의경향의 다른 한 축인 공산주의노동자조직은 출발이 독일 좌익공산주의 전통이었기 때문에 양쪽의 장점을 모두 받아들인 것도 사실이다. 특히 좌익공산주의 그룹 중 유일하게 노조문제에 대해 그것의 자본주의적 본질과 자본의 기구화를 인정하면서도, 적극 노조를 이용(노조 자체의 이용이나 노조개조·장악은 반대함)하여 광범위하게 노동자계급을 만나고 그들 안에서 공산주의 그룹을 만들 것을 주장한다.
평가와 교훈
이탈리아 공산당 운동의 역사를 평가하면서 우리는 코민테른의 퇴행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무게가 오늘날도 여전히 공산주의 운동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과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분파가 혁명이론과 미래의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기초를 세우는데 많은 기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이탈리아공산당 운동은 혁명적 분파의 역사였고, 개량주의와 기회주의세력과의 투쟁의 역사였다.
둘째, 이탈리아공산당은 출발에서부터 코민테른의 지부로서 인터내셔널 관점을 가졌으며, 코민테른의 타락에 맞서 형성된 좌익분파 또한 이탈리아 분파가 아닌 코민테른 내의 좌익분파로써 자신을 규정했다.
셋째, ‘신질서’와 ‘공장평의회 운동’, ‘옥중 수고’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람시는 이탈리아공산당 창건에 기여했으나, 타락하는 코민테른에 맞서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는 좌파와 결별하고 스탈린주의 정책을 이탈리아에 이식시킨 핵심역할을 했다. 그람시 이후의 공산당은 스탈린주의 당, 사민주의 당, 부르주아좌파 당으로 몰락해갔으며, 맑스주의의 연속성과 혁명적 공산주의 운동의 전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넷째, 이탈리아 좌파의 선구자였던 보르디가는 이탈리아공산당 창건에 공헌했고 이후 타락하는 코민테른에 맞서 투쟁했으나 한계 또한 명확했다. 프롤레타리아독재 강령, 통일전선, 의회주의, 반파시즘 문제에 대해 혁명적 원칙을 주장했으나 당 문제(당의 역할, 당과 계급과의 관계)에서 코민테른 초기의 입장으로 후퇴했고, 파시즘 이후 경직된 분파주의를 강화시켜 혁명세력의 분열을 초래했다. 따라서 그람시의 스탈린주의 행적에 대한 객관적 평가, 보르디가의 전기, 후기사상에 대한 구분과 냉철한 평가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보르디가를 넘어섰던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 분파인 데이먼 그룹과 망명 중이던 빌랑주변의 공산주의 좌파들에 대한 온전한 복원과 1970년대 말 일련의 국제대회를 이끌면서 미래의 세계혁명당(인터내셔널) 형성을 위해 노력한 좌익공산주의자들의 공헌을 꾸준히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좌익공산주의 혁명세력의 재구성, 결합과는 반대로 트로츠키주의는 수많은 당파로 나뉘어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며 좌파 분열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이들의 다수는 사민주의와 스탈린주의 당의 좌익으로 기능하여 결국 부르주아 정치기구의 좌익을 형성하고 있다.
이렇게 험난한 역사적 상황에서 탄생하고 비타협적으로 살아남아, 세계혁명과 인터내셔널 건설이라는 혁명적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이제 계급투쟁의 새로운 주체와 혁명적 공산주의를 만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자본주의 최대의 위기상황에 직면하여 세계적인 계급투쟁의 부활 속에서 그들은 이미 계급의식의 발전과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혁명적 진전을 위한 새로운 행보를 시작하고 있다. 이 시기에 전 세계에 걸쳐 성장해나가는 전투적 노동자계급과 새로운 혁명가들이 좌익공산주의자들과 만나 소통하고 서로 논쟁하면서, 궁극적으로 하나의 대오로 모여 혁명적 공산주의 진영을 공고히 한다면 세계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세계혁명의 전망을 만나게 해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세계혁명당)의 형성에 공헌할 것이다.
오직 공산주의자(혁명가)들의 세계적인 재조직화와 계급투쟁의 결합만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낡은 껍질을 벗기고 노동자투쟁의 명확한 전망을 밝히는 일을 앞당겨 줄 수 있다.
국제주의와 공산주의 원칙을 더욱 명확히 철저하게, 그리고 모든 계급투쟁의 무기로!
<출처 :국제코뮤니스트전망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1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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