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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머발트에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설까지 : 좌파의 투쟁
100년 전 사건
100년 전인 1919년 3월 2일부터 6일까지 러시아 밖의 여러 나라에서 40개가 넘는 정치단체 소속 52명의 대표가 모스크바에 모였다. 5일 동안의 대회는 코민테른(Comintern)으로 약칭되고,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이라고도 알려진 제3인터내셔널의 첫 번째 총회가 되었다. 그 사건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조직의 발전에 핵심점이 되었다.
총회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가장 큰 도전을 한 역사적 순간에 열렸다. 레닌은 총회 이후 3월 말에 녹음한 축음기 음성을 통해 ‘혁명적 낙관주의’로 제3인터내셔널의 전망을 밝혔다.
"오늘날 자본의 멍에를 벗어던지는 대의에 충실한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코뮤니스트'라고 부릅니다. ... 곧 우리는 전 세계에서 코뮤니즘의 승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소비에트연방공화국의 기초를 보게 될 것입니다." (「제3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레닌, <FTCI, p.316>), *FTCI :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립 - 제1차 총회 회의록과 문서: 1919년 3월(Anchor Foundation, 1987)」
이어 4월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세계사의 새 시대가 열렸습니다. 인류는 자본주의 또는 임금 노예라는 마지막 형태의 노예 제도를 폐기할 것입니다. 노예 제도에서 스스로 해방됨으로써 인간은 처음으로 진정한 자유로 나아갈 것입니다." (「제3 인터내셔널과 역사의 장소」, 레닌, <같은책 p.33>
이처럼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설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에 대한 자신감과 세계혁명에 대한 희망을 표현했다. 하지만 전체 자본가계급과 하수인들에게는 불쾌한 기억이었다. 특히 1차 세계대전 말 혁명적 물결은 그들에게 공포와 악몽이었다. 1917년 10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 참호에서의 반란, 독일에서 빌헬름 황제의 퇴위와 노동자계급의 반란과 폭동에 직면한 휴전 서명, 그리고 독일 노동자 봉기, 러시아 노선에 따른 바이에른(Bayerische Räterepublik)과 헝가리에서의 노동자평의회 공화국 건설,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노동자 대중의 파업,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적대적 개입을 거부한 몇몇 영국 군대뿐만 아니라 프랑스 함대와 군대의 반란 등이 그것이다.
벌써 100년 전의 일이지만, 코민테른 창설은 1917년으로부터 적어도 1923년 말까지, 유럽으로부터 아시아로 그리고 북아메리카로부터 라틴아메리카에 이르는 전 세계의 혁명 물결에서 정점이었다. 이러한 혁명 물결은 세계를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분할로 이끈 1차 세계대전, 4년간의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응답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계급투쟁의 역사에는 프롤레타리아 운동 내부의 커다란 분열과 전환점이 있었다. 바로 세계대전 시기 제국주의 전쟁을 대하는 사회주의자들과 프롤레타리아트의 태도와 그에 따른 결과이다. 1914년 제국주의 전쟁과 1917년 러시아혁명은 자본주의가 불가피하게 ‘사회혁명의 세기’에 돌입할 것이라는 맑스주의의 전망을 확인했고, 프롤레타리아운동 내부에서 근본적인 분열을 촉진했다. 당시 제2인터내셔널의 주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이전 맑스의 저술까지 환기시키면서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했고, 러시아는 여전히 부르주아 발전시기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0월 혁명을 비난했다. 결국 그들은 그렇게 부르주아의 진영으로 들어갔고, 1914년 제국주의 전쟁을 위한 신병모집과 1918년 반혁명의 경찰견이 되었다. 맑스와 엥겔스로부터 시작한 사회주의 조직들이 처음으로 적대적인 편에 서게 된 것이다.
이것은 계급과 혁명에 대한 충실성이 위선적인 선언이나 정당의 간판에 의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실천으로 입증된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보여주었다. 제국주의 대학살 동안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깃발을 홀로 나부끼게 한 것도,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수호로 다시 모인 것도, 전쟁 시 수많은 나라에서 발생했던 파업과 봉기를 주도한 것도 모두 제2인터내셔널 내부의 좌파 흐름이었다. 그리고 1919년 창설된 새로운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핵심을 제공한 것도 같은 흐름이었다.
제2인터내셔널의 배반과 좌파
제2인터내셔널 내에서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는 20세기 초에 발생한 자본주의 시기 변화를 먼저 인식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정점에 다다랐으며 전 지구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제 레닌이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가장 높은 단계인 제국주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다가올 유럽전쟁은 식민지 분할과 그 영향력을 둘러싼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제국주의 세계 전쟁일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프롤레타리아 투쟁 원칙을 저버렸던 기회주의 진영에 맞서, 인터내셔널과 프롤레타리아트를 전투로 이끈 것은 제2 인터내셔널의 좌파였다. 이 투쟁의 중대한 순간에 1905년 러시아의 대대적파업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낸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국주의 전쟁을 대대적파업,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연결시켰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인터내셔널 대회가 있었다. 좌파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레닌이 제출한 대회의 중대한 수정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래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사회주의자들은 가능한 한 빨리 그 전쟁을 끝내고 전쟁이 촉발한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인민에게 일깨우고, 그럼으로써 자본주의 지배의 몰락을 서두를 의무가 있다.” (코민테른 1차 대회에서 채택한 「사회주의 경향과 그들의 베른대회에 대한 결의문」에서 인용)
1912년 제2인터내셔널 바젤 대회는 유럽에서 점증하는 제국주의 전쟁 위협에 맞서는 이와 같은 입장을 다시 확인했다.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이 코뮨의 혁명적 반란을 탄생시켰고, 러일전쟁이 러시아에서 혁명세력을 움직였다는 것을 부르주아 정부들이 잊지 않게 하자. 노동자계급의 눈으로 볼 때, 자본가의 이익, 왕조의 경쟁, 그리고 외교 협정의 남발을 위해 노동자계급이 자신을 학살하는 것은 범죄다.” (같은 글)
1914년 8월 4일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제2인터내셔널의 주요 당들은 (특히 누구보다 기회주의자 수중에 있었던 프랑스와 독일 사회민주당과 영국의 노동당은) ‘조국방어’와 ‘외세침략’에 맞서기 위한 부르주아지와의 ‘신성한 동맹’을 요구하며 전쟁채권에 찬성표를 던졌다. 프랑스에서는 계급투쟁을 포기하면서 장관직을 보상으로 받기까지 했다. 그들은 '맑스주의의 황제'라고 불렸던 카우츠키가 계급투쟁은 '평화 시기'에만 가능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면서 전쟁과 계급투쟁을 구분했을 때, '중도주의'(인터내셔널의 좌파와 우파 사이의 중간)로부터 이론적 지원을 받았다. 결국 제2인터내셔널은 기회주의 때문에 균열이 시작되고 애국주의 홍수와 전쟁광풍에 휩쓸려 깨어져 부끄럽게 수명을 다했다.
“계급의식이 있는 노동자들은 인터내셔널 붕괴에 대해 슈투트가르트와 바젤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대회의 발언과 결의문 속에 담긴 가장 거룩한 선언, 그리고 그들의 신념을 공식 사회민주당의 다수가 명백하게 배신한 것으로 이해한다.” (「제2인터내셔널의 몰락」, 레닌)
이러한 폭풍 속에서 소수만이 우뚝 섰다. 특히 이탈리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고 러시아의 당이 그랬다. 다른 곳에서는 고립된 혁명가들과 혁명 그룹이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그리고 호르터와 판네쿡 주위의 네덜란드 '트리뷴(The Tribune) 그룹'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계급투쟁에 충실했고 재조직화를 시도했다.
제2인터내셔널의 죽음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심대한 패배였다. 이는 그들이 참호 속에서 피를 흘리게 했다. 수많은 혁명적 노동자들이 살육당했다.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는 그들의 국제 조직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당연히 재건해야 했다.
“제2인터내셔널은 기회주의에 패배해 죽었다. 기회주의자를 타도하자. 변절자뿐 아니라 기회주의로부터 해방된 제3인터내셔널 만세!”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정세와 임무」, 레닌, 1914. 1. 10)
침머발트 좌파 :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위한 레닌의 투쟁
1915년 9월 5일에서 8일까지 중립국 스위스 침머발트에서 40여 명의 반전 사회주의자들이 모인 국제대회가 열렸다. 침머발트에서 대립하던 정치노선 사이의 논쟁에서 중요한 문제는 이후 몇 년간 유럽 전역에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여전히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영향을 주고 있다.
제2인터내셔널의 주요 정당이 각자의 ‘조국’에 대한 호전적인 제국주의 전쟁 목표를 지지하는 데 동참함으로써 제2인터내셔널이 사상누각처럼 붕괴된 것은 그로부터 1년 이상이 흐른 뒤였다. 전쟁 전에 대다수가 수정주의에 맞서 투쟁했던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세계 제국주의 전쟁은 사회주의의 객관적 조건이 현실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전환점으로 인식했다.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고,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이끌 맑스의 원칙을 확고히 지지하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필요성에 대해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전쟁 직후에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관해 글을 썼던 트로츠키로부터 판네쿡, 롤랜드 홀스트, 호르터의 네덜란드 트리뷴 그룹은 제국주의, 세계대전, 사회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이 전쟁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태어날 용광로”라고 강조했다. 보르차르트의 리히트스트랄렌(Borchardt’s Lichtstrahlen) 그룹으로부터 분리한 독일 좌파, 요한 니프(Johan Knief) 주변의 브레멘 좌파와 폴 프롤리히(Paul Frolich) 그리고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사회민주당(또한 로자 룩셈부르크와 요기세스(Jogisches)의 당)은 전쟁이 발발하자 "프롤레타리아는 정부, 압제자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다!"면서 혁명적 패배주의를 기초로 하여 전쟁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조직하려 했다.
이 흐름 중 일부는 사회민주당의 배신을 공개적으로 확인할 새로운 인터내셔널 설립의 시급성에 대해 다른 사회주의자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보기를 들어 헤르만 호르터는 중요한 2년간 정치 활동을 중단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다른 이들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전쟁 이후 – 또는 오히려 노동자계급 투쟁이 끝난 후에 건설될 것으로 예상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 설립을 원하는 이들은 노동자계급의 이름으로 발언할 권리에 도전할 뿐 아니라 국제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어떻게 사회주의를 위한 혁명적 투쟁으로 통일될 수 있는지 정치적 방향을 제시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심지어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제국주의)전쟁과의 전쟁’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평화’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뜻인지, 아니면 레닌이 가장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처럼, 전쟁의 끔찍한 희생에 맞서 싸우는데 있어 먼저 노동자들이 자신의 정부를 전복하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면서, 사회주의 혁명의 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다는 것인지에 대한 혼란이 있었다.
그는 파리 코뮨과 1905년 러시아 혁명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국주의 세계대전 자체가 혁명적인 상황을 만들어 낼 가능성을 주장했다.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방어하고자 한다면 스스로 권력을 장악해서 사회주의를 위한 세계적인 투쟁을 시작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계속해서 사회주의자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 프롤레타리아트가 평화적인 방법으로 목적을 달성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유토피아적이기 때문에 그곳에 가서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해야 한다. ... " (「Golos 37/38」, 1914년 10월)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현재의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는 것은 유일하게 올바른 프롤레타리아 슬로건이다. 코뮨의 경험으로 알 수 있고 바젤 결의안(1912)에 의해서 윤곽을 드러냈고, 고도로 발달된 국가 사이의 제국주의 전쟁의 모든 조건으로부터 나온다. 내전으로의 전환이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사회주의자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일단 전쟁이 현실화되고 나면 그 방향으로 체계적이고, 끈기 있고, 단호하게 준비해나갈 것이다.
이 길만이 프롤레타리아가 배외주의 부르주아지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곧 어떤 형태로든, 진정한 자유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길에 결정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다.
모든 나라의 부르주아 배외주의와 애국심에 맞서 단결한 노동자의 국제적인 우애여 영원하라!
기회주의로부터 벗어난 프롤레타리아 인터내셔널이여 영원하라." (「전쟁과 러시아 사회 민주주의」, 1914년 10월 작성, 1914년 11월 출판)
스위스 망명 중에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관점을 획득하기 위해 여러 투쟁을 했다. 무엇보다 먼저 해외 망명 중인 볼셰비키 중 일부는 (한때 러시아 맑스주의의 주류로 여겨졌던 플레하노프가 지지하는 입장) 프랑스군에 자원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1915년 초 해외 사회민주노동당(RSDLP) 그룹 베른 회의에서 프랑스 볼셰비키 그룹은 ‘평화를 위한 투쟁’에 찬성하여 혁명적 패배주의에 대한 그의 요구를 반대했다.
인터내셔널 전선에서 임무는 본질적으로 같았다. 전쟁 기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주장에 맞서는 것(특히 인터내셔널은 평화 시기에 무기지만, 전쟁 후에는 예전처럼 부활할 것이라는 카우츠키의 말), 사회 평화를 파괴하고 노동자 자신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투쟁할 세력을 결집하는 것, 즉 그는 노동자가 기존의 정부에 충성을 다하지 않고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는 것을 기초 노선으로 새로운 국제행동의 기반을 준비하고 있었다.
1915년이 되자 전쟁의 피로감이 가중되고 있다는 징후가 입증되었다. 독일에서는 계엄령을 무시하면서 생활비에 대한 거리 시위가 벌어졌다. 4월부터 러시아의 파업은 증가했고 더 정치적으로 되었다. 7월에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는 전쟁 산업 위원회의 보이콧을 주도했는데, 이 위원회는 노동자들을 전쟁에 참여시키기 위해 정부가 설립했다.
심지어 구 인터내셔널의 수명이 다한 국제 사회주의 서기국도 '평화' 회의를 승인하는 쪽으로 끌려들어 갔다. 1월에 중립국의 사회민주당원들은 코펜하겐에서 만나 교전국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전쟁을 중단시키기 위한 행동을 호소했다. 2월에 영국 독립노동당(ILP)은 키어하디(Keir Hardie)가 주재한 연합국의 '사회주의자' 대회를 개최하여 볼셰비키인 리트비노프(Litvinov)의 국제주의 선언 낭독을 막았다.
이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안은 “전쟁이 자본주의 사회, 제국주의와 식민지 경쟁이 만들어 낸 대립의 결과물로서 모든 나라의 공동 책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승리한다면 자유, 국가 독립, 그리고 조약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기 때문에 전쟁을 계속할 필요가 있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고 명시했다.
연합국의 노동자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인민에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독일과 오스트리아 정부에 맞서 방어전을 벌이고 있으며, 이것을 정복 전쟁으로 전환하려는 시도에 저항해야 한다. 결의안은 특히 벨기에의 복원, 폴란드의 자치나 독립, 그리고 민족자결을 바탕으로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에서 발칸에 이르는 유럽의 모든 국가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4월에는 동맹국 사회주의자들이 사회민주당원 모임과 비슷한 만남을 비엔나에서 가졌고, 전쟁 후 관계를 주로 다루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스위스 사회 민주당이 전쟁에서‘그들 나라'의 역할에 관계없이 노동자 단체의 반전 회의를 제안하자, 국제사회주의서기국(ISB)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들은 어쨌든 밀고 나가기로 하고 계급투쟁의 기본을 고수하며 동시 행동을 통해 즉각적인 평화를 위해 투쟁할 수 있는 모든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자 단체의 대회를 소집하기로 했다. 조직적인 의미에서 침머발트는 썩은 제2인터내셔널의 임무를 벗어났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사회민주주의를 훼손할 의도는 없었다. 지노비에프가 다가오는 대회의 목적에 대해 “명확한 혁명노선을 중심으로 조직하여 구 인터내셔널과의 분명한 단절을 준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별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레닌은 혁명가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하고 영향력을 확대하여,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세력을 통합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인식했다. 대회에 이르기까지 몇 달 동안 프롤레타리아트와 전쟁에 관한 공동 성명서에 포함시켜야할 핵심 주제에 대한 좌파 사이의 집중적인 서신 교환과 토론이 있었다. 라덱과 레닌, 둘 다 결의안 초안을 작성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스웨덴과 노르웨이 좌파 사회주의자의 참여를 조직했다. 네덜란드의 트리뷴 주변의 맑스주의 그룹이 연락을 취해왔다.
볼셰비키는 대표들에게 배포하기 위한 독일어 팸플릿을 발행했다 ... 팸플릿에는 레닌과 지노비에프의 「사회주의와 전쟁」뿐만 아니라 중앙위원회와 베른대회 결의안 등이 들어있었다. 또한 러시아의 혁명가들이 많은 좌파 동맹국들과 이견을 갖고 있던 민족 문제에 관한 볼셰비키의 1913년 결의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위한 레닌의 투쟁」, John Riddell, Monad Press)
이 마지막 주제(민족 문제)는 제3인터내셔널이 결성되기 전까지는 결코 해결되지 않던 논쟁거리였다. 그러나 침머발트 대회를 앞두고 레닌은 다수에 양보해야 했다. 좌파가 제시할 성명서의 문구를 둘러싼 사전회의 토론에서 8명의 대표단 중 대다수는 레닌보다는 라덱의 초안을 선호했다. 최종본은 피억압, 억압 민족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혁명적 패배주의의 무늬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다수에게 걸림돌이 아니었다. 좌파의 결의안은 거부되었다. 역사적으로 전해져 내려온 침머발트 선언은 주로 트로츠키가 초안을 작성한 타협의 결과였다. 그럼에도 좌파는 문제시되는 조항을 추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명했다. 1915년 9월, 레닌은 침머발트를 '첫 번째 단계'라고 묘사했다.
“모든 모순과 소심함에 대해 ... 그것에 파열구를 낼 수 있는 기회주의에 맞선 진정한 투쟁.” (레닌 저작집, 제 21권)
“두 번째 침머발트 대회(키엔탈)는 의심할 여지없이 한 걸음 진전이다. …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결의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제3 인터내셔널을 위한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 침머발트와 키엔탈 대회는 우리의 길이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노비예프, 1916. 10. 6)
이 사건에서 가장 큰 진전은 대부분의 국제주의자들이 함께 모여서 독립적인 좌파를 조직했다는 것이다. 침머발트를 떠나기 전에 그들은 레닌, 지노비에프와 라덱으로 구성된 침버발트 좌파 서기국을 설립했다. 1916년 전쟁으로 인한 위기와 레닌이 예측한 위기는 유럽 전역에서 첨예화되었다. 사회민주당으로부터 완전히 단절하지 않는 침머발트 다수와 좌파 사이의 큰 차이는 균열이 되었다.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난 후 레닌은 ‘침머발트의 늪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으며’ 지금 필요한 것은 ‘좌파로만 구성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인터내셔널’을 즉시 건설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917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유럽 전역에 혁명적 물결을 열어젖혔다.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위협은 제국주의 대학살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점을 국제 부르주아지에게 확인시켰다. 레닌의 슬로건은 현실이 되었다. 러시아 그리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가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시켰다. 이처럼 프롤레타리아트는 유명한 슈투트가르트 결의를 적용함으로써 제2인터내셔널 좌파의 명예를 드높였다.
1차 세계대전은 사회민주당의 의회주의적 우파를 부르주아지 진영으로 결정적으로 몰아넣었다. 혁명적 물결은 중도주의 평화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에 맞서 싸우도록 했지만, 그들의 다수, 특히 카우츠키 같은 지도자들은 부르주아지 진영으로 뛰어들었다. 더 이상 인터내셔널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민주주의로부터 분리된 좌파들이 만든 새로운 당은 '코뮤니스트'당 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혁명적 물결은 고무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당, 제3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요구했다. 1919년은 전후 혁명 물결의 최고정점이었고,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설 총회의 입장은 프롤레타리아운동의 가장 진보된 입장을 표현했다. 사회-애국주의적 반역자들과의 완전한 단절, 자본주의 쇠퇴의 새로운 시기에 의해 요구되는 대중행동의 방법, 자본주의 국가의 파괴 및 노동자 소비에트의 국제적인 독재. 이러한 강령적 명확성은 혁명물결의 거대한 기세를 반영했지만, 그것은 낡은 제2인터내셔널 정당 내부 좌파혁명가들의 정치적 이론적 노력과 투쟁으로 미리 준비되어 있던 것이었다.
나오며
침머발트 좌파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인터내셔널 창설을 향한 발걸음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설의 의의는 그것이 「국제코뮤니스트당」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침머발트 좌파에서 새로운 인터내셔널로 가기까지 너무 늦었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1917년 10월 혁명 1년여 뒤, 그리고 베를린 프롤레타리아트가 겪은 첫 번째 패배로부터 두 달 뒤에 창설되었다. 그 뒤를 이은 여러 해 동안 국제 혁명의 물결은 패배하고 쇠퇴했으며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점점 고립되었다. 이러한 고립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의 퇴행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러한 사태 때문에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기회주의의 확산을 막을 수 없었고 퇴행을 거듭하던 끝에 사망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혁명가들에게 침머발트의 진정한 의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여전히 국제 노동자계급에게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 같은 국제혁명당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919년과 비교하면 현재의 노동자계급은 쇠퇴하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심각한 경제적 고통에 짓눌리고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자본주의의 참상에 맞선 투쟁은 산발적이고 고립되어 있다. 계급 역관계의 커다란 불균형 상태는 100년 전보다 오히려 더욱 계급투쟁에서 정치적, 조직적 역할을 할 혁명당을 필요로 한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자본가계급뿐 아니라 (제2인터내셔널과 마찬가지로) 한때 노동자계급의 조직이었던 노동자/좌파 정당과 노동조합 기구를 통해서 노동자계급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시때때로 자본주의에 비판적이지만, 항시적으로는 자본가계급이 노동자들의 투쟁을 억누르는데 실질적 도움을 주고,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이들이 전취해간 계급의 혁명 의식을 되찾고, 다가올 자본가계급과의 전면전을 위해서는 명확한 강령과 국제주의적 행동일치 능력을 가진 국제혁명당이 반드시 필요하다.
계급투쟁의 가장 의식적인 부분이자, 혁명적 소수인 코뮤니스트들은 자본주의 쇠퇴와 제국제주의 전쟁, 그로 인한 자본주의 참상과 노동자계급의 현실 앞에서 수동적 관찰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레닌은 계급 전쟁에서 휴전은 없다고 했다.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라" 는 슬로건은 오늘날 제국주의 전쟁에 직면한 혁명가들에게 모든 상황에서 과거의 공식을 단순히 반복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일상에서조차 노동자계급에게 ‘국가 방위’나 ‘전쟁 준비’에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이 코뮤니스트의 기본 원칙이다.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조국이 없고 싸울 가치가 있는 유일한 전쟁은 ‘계급 전쟁’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투쟁하도록 해야 한다.
세계의 국제주의자 코뮤니스트들은 100년 전 침머발트 좌파가 했던 것처럼 미래의 국제혁명당 건설을 위해 인내심을 갖고 혁명세력을 재편성해야 한다.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 국제주의 원칙을 사수하며 전쟁을 내전(계급전쟁)으로 전환하는 공동행동과 국제적 연대에 나서야 한다.
우리는 당이 아니지만, 당을 위해 존재한다. 우리와 같은 원칙을 가진 동지들은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을 위해, 코뮤니스트당-국제혁명당 건설을 위해 함께 투쟁할 것을 호소한다. 우리는 침머발트 좌파와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립총회의 정신을 계승한다.
미래의 인터내셔널 건설을 위해 투쟁하자!
전쟁이 아닌 계급전쟁을!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라!
2019년 5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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