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30년 뒤, 러시아혁명이 품은 이상과 현실
Ⅰ.
우리가 여행하려고 하는 지난 30년은 얼마나 끔찍한 길이 될까. 우리 시대에서 가장 커다란 사건, 가장 많은 희망을 안겨준 사건은 우리에게 달린 듯 보인다. 이제 1917년을 휩쓸었던 잊지 못할 열광주의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 코뮤니스트 활동가의 첫 성원이었던 우리 세대의 많은 사람에게 남아 있는 것은 러시아혁명에 대한 비참함뿐이다. 혁명에 가담했던 사람과 목격자 가운데 그 누구도 거의 살아남지 못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만든 당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총살당했다. 문서는 모조리 파괴되었거나, 감춰졌거나 혹은 왜곡되었다. 많은 사람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혁명에 늘 반대했던 망명자뿐이다. 그들은 책을 썼고, 가르쳤으며, 여전히 보수주의의 강력한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지구적 봉기 시기에 그 세력은 모든 진실한 객관성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스탈린주의 러시아에 대한 어두운 광경에 비난의 칼날을 들이댄 이름뿐인 볼품없는 논리는 볼셰비즘 실패와 더 나아가 맑스주의와 사회주의 실패를 입증하려고 시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얕은 술수는 세계를 감싸고 있는 모든 문제에 부닥쳐서 쉽게 이어졌고 내다볼 수 있는 미래에 자신의 지배력을 느슨하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당신은 다른 실패를 잊고 있는가? 사회 재앙의 시기 동안 기독교는 어디에 있었는가? 자유주의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계몽의 형태이거나 반동의 형식이거나 보수주의가 낳았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무솔리니, 히틀러, 살라자르, 그리고 프랑코를 주지 않았던가? 만일 그것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의 많은 실패를 솔직하게 생각하는 문제라면, 우리는 오랫동안 막혀 있던 우리의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끝난 게 아니다.
모든 사건은 한정적이고 이행기적이다. 흔히 잊히곤 하지만, 모든 사건은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시대적 맥락에서 발전한다. 러시아혁명에 대한 견해를 세우기 전에, 프랑스혁명에 대한 견해와 전망에서 생긴 많은 변화를 회상해보자. 칸트가 바스티유가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열광했던 모습, 테러, 테르미도르, 집정부, 나폴레옹. 1789년과 1802년 사이에 자유와 우애, 평등의 공화국은 완전히 선회했고 그 자신의 기원을 부정한 모습을 드러냈다. 새로운 질서의 창조자인 나폴레옹의 정복은 히틀러가 만들어낸 것과 비슷하다는 점 때문에 두드러진 것이다. 황제는 괴물이 되었다. 문명화된 세계는 그에 맞서 힘을 합했다. 그리고 신성 동맹은 유럽 전체에서 낡은 정권을 다시 세우려고 싸웠다. 그런데도 우리는 부르주아지에 권력을 안겨 준 프랑스혁명, 공업의 정신, 과학적 문의는 19세기를 실제로 살찌우게 했다는 것을 이제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사건이 터지고 난 뒤 30년째, 즉 1819년, 루이 18세와 차르 알렉산드르가 지배하던 시기는 역사에서 가장 비싼 대가를 치른 실수로 생각되지 않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길로틴에서 죽었고, 수많은 전쟁과 투쟁이 어떻게 군주제를 가증스럽게 복구시켰는가.
Ⅱ.
역사 왜곡은 으레 그때의 질서로 될 수밖에 없었다. 부정확한 과학 사이에서, 역사는 물질적이고 심리적으로 대부분의 관심을 위협한 오직 하나의 것이다. 비록 사실이 쉽게 이용될 수 있지만, 러시아혁명에 대한 신화, 실수, 목적이 있는 해석은 난무했다. 틀림없이 먼저 자신을 알리지 않고 말하고 쓰는 것은 훨씬 더 단순하고 매력적이다.
“1917년 10월과 11월에 볼셰비키가 일으켰던 폭력적인 쿠데타가 민주주의의 싹을 뽑아버렸다”라는 주장이 있다. 그 어떤 것도 사실과 아주 다르다. 그 어떤 공화국도 러시아에서 선언되지 않았고 소비에트와 노동자ㆍ농민ㆍ병사 위원회 말고 그 어떤 단일한 민주주의 제도도 없었다. 케렌스키가 이끈 임시정부는 농업 개혁을 거부했고, 대중이 요구했던 평화 협상을 여는 것을 거부했으며, 반동 세력에 맞서 효율적 조치를 거부했다. 이행기적이고 단명한 국가는 두 개의 커다랗고 앞서 나아가고 있는 집단, 즉 장군들의 집단과 혁명적 대중 집단 사이에 끼어있었다. 그 어떤 것도 사회주의적 경향을 띤 민주주의 발전을 지시하지 않았다. 1917년 9월쯤에 오직 하나의 대안은 반동적 장군들의 독재냐 또는 소비에트 독재냐였다. 그러한 쟁점에 서로 반대되는 쪽에 있는 두 역사가, 트로츠키와 우익-자유주의적 정치가인 밀류코프는 이 문제에 똑똑히 동의했다. 소비에트 또는 볼셰비키 혁명은 전제정이 무너지고 난 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와 기회주의적인 사회주의 정당이 이끌었던 불안전하고 비효율적인 온건 민주주의 혁명이 실패한 결과였다.
또한, 11월 7일(옛 달력에 따르면 10월 25일)의 봉기가 한 줌 밖에 안되는 음모가, 즉 볼셰비키당 작품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것보다 실제 사실에 훨씬 더 모순되는 것은 없다. 1917년은 대중 행동의 시기였다. 그러한 행동은 변화, 다양성, 힘에서, 그리고 갈증을 느낀 대중의 주도가 뚜렷이 볼셰비즘 쪽으로 나아갔던 끈기에서 놀라웠다. 농민 소요는 러시아 전체로 퍼졌다. 군인들 사이에 있는 낡은 규율은 폭넓은 반항으로 무너져 버렸다. 크론슈타트와 발트 함대는 임시정부에 대한 복종을 딱 잘라 거부했다. 트로츠키만이 해군 기지에서 일어난 무장 갈등을 소비에트와 만나 막을 수 있었다. 투르게스탄에서 타쉬겐트 소비에트는 그 자신의 이름으로 권력을 잡았다. 케렌스키는 칼루가 소비에트를 그의 포병으로 위협하고 있었고 볼가에서 50만 병사가 케렌스키의 명령을 거부했다.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주변 지역에서, 노동자 적위대가 세워졌다. 페트로그라드 요새는 소비에트의 권위로 자신을 위치 지었다. 소비에트 사이에서, 다수파는 평화적이고 합법적으로 온건한 사회주의자와 볼셰비키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온건한 사회주의자는 케렌스키에게 등을 돌렸다. 페트로그라드에서 봉기가 열광주의의 커다란 물결 속에서 거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성공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존 리드와 자크 사둘이 쓴 책을 다시 읽어보자. 그 사람 모두 그 열광주의의 장면을 목격한 사람 아닌가! 그렇다, 볼셰비키 ‘음모’라고 하는 것은 대중적 정서의 커다랗게 떠오르는 물결에 의해 권력을 실행했다.
제국이 페트로그라드 교외 무장되지 않은 주민의 압력 아래 1917년 2~3월에 무너졌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가치 있다. 요새의 군대와 시위하고 있는 노동자 사이에 자발적인 친교는 전제정의 운명을 정해버렸다. 나중에 이러한 친교를 부추겼던 잘 알려지지 않은 개인들을 동질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몇몇은 이름이 있었지만, 다수는 이름 없는 상태로 남았다. 모든 혁명정당의 지도자와 가장 능력 있는 전투가는 그 순간에 감옥에 있거나, 또는 외국에 있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활동한 소규모 집단은 볼셰비키가 노동자를 공장으로 복귀하라는 호소를 내걸려 계획했던 사건 전환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가! 4개월 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와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이 잡고 있는 연립 정부의 경험은 7월 초에 요새와 교외 주민이 소비에트로 권력 이전을 요구하는 슬로건을 들고 일어난 커다란 시위를 조직했던 깊은 분노를 낳았다. 볼셰비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자가 이끌었던 이러한 조치를 받아들였고 고통스럽고 위험한 결론으로 끝난 시위에 마음 내키지 않았지만 결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나라의 나머지가 수도에서 일어난 사건을 절대 따르지 않을 것을 느꼈다. 으레 그들은 희생양이 되었다. 그들은 중상(“독일 간첩”)과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압박당했다. 그 순간부터 볼셰비키는 만일 그들이 이러한 대중 운동을 장악하지 못한다면, 장군들은 힘으로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17년 9월에 코르닐로프 장군은 케렌스키 정부에 있는 공개적인 공범과 함께 전투에 들어섰다. 레닌과 지노비예프는 잠적했고, 트로츠키는 감옥에 갇혔고, 볼셰비키는 지하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 군대는 철도 노동자와 다른 전투적 노동자와 접촉 결과로 저절로 흩어졌다.
전제정의 문관은 또렷이 다가올 혁명을 보았다. 그들은 그것을 막을 수단을 지니지 않았다. 혁명정당은 혁명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혁명할 수도 없었고 혁명을 불러일으킬 수도 없었다. 사건이 그러한 과정을 밟았고 봉기가 그들에게 다가왔을 때, 누구에게든 남겨진 것은 의지와 비전을 갖고 참여하는 것이었다.
Ⅲ.
볼셰비키는 권력을 잡았다. 혁명정당 사이에서 일어났던 자연도태의 과정에서 볼셰비키가 힘을 모은 대중의 열망을 일관되고 현명하게, 그리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에 가장 정통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권력을 장악했고 내전에서 이겼다. 왜냐하면, 많은 주저와 갈등이 있었지만, 대중은 발트해에서 태평양 연안까지 볼셰비키를 편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커다란 역사적 사실은 러시아에 있는 많은 볼셰비즘의 적이 받아들였다. 망명한 자유주의 출판업자인 헬레나 쿠스코바(Helena Kuskova)는 얼마 전에 이렇게 썼다. “사람들이 백군도 ……제헌의회를 위한 투쟁도 밀지 않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백군은 군주제적 반혁명, 입헌주의, 민주적인 반-볼셰비즘을 대변했다. 그러므로 1920~1921년에 내전이 끝날 때까지, 러시아혁명은 볼셰비키가 지도자와 중견 요원의 형식으로 두뇌와 신경 조직을 제공했던 커다란 대중 운동의 양상을 띠었다.
볼셰비키가 지닌 직접적인 목표가 국가권력을 독점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것도 또 다른 신화이다! 사실 그들은 권력이 고립될 수 있다는 위험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일찍이 연립 사회주의 정권의 수립을 열렬히 지지한 사람들이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원칙적으로는 온건 사회주의정당과 연립을 거절했다. 왜냐하면, 온건 사회주의정당은 3월 혁명(옮긴이: 2월 혁명)을 실패로 이끌었고 소비에트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당은 전반적으로 맑스주의에 적대적인 이상주의자이자 지식인이 이끈 농촌을 바탕으로 삼은 사회혁명당 좌파의 협력을 구했고 얻었다. 1917년 11월에서 1918년 7월 6일까지, 사회혁명당 좌파는 정부에 참여했다. 그들은 볼셰비키 가운데 잘 알려진 몇몇 사람들(1/3)처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18년 7월 6일에 그들은 볼셰비키가 ‘혼자서 통치하려는’ 의도를 지녔고 ‘독일 제국주의에 맞서 전쟁을 다시 해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모스크바에서 폭동에 가까운 반란을 시작했다. 그때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던 그들의 성명서는 혼자서 통치하려는 의도를 지닌 어떤 당이 한 첫 선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패배했고 볼셰비키가 혼자서 통치하도록 남겨 놓았다. 그 순간부터 볼셰비키의 책임은 늘어났고 그들의 정서는 바뀌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다수파(볼셰비키)와 소수파(멘셰비키)로 분열되기 전에 그들은 다른 러시아 혁명정당과 바탕부터 달랐는가? 볼셰비키가 권위주의적 특성, 수단의 선택에서 편협성과 비도덕성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관료주의적 국가주의의 싹을 포함하고 있는 중앙집중화되고 아주 규율적인 조직, 독재적이고 비인간적인 특성. 잘난 체하는 작가와 뭘 모르고 떠드는 작가는 이와 관련해서 레닌의 ‘비도덕주의’, 즉 그의 ‘프롤레타리아적 자코뱅주의’와 ‘직업적 혁명주의’를 인용하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다.
1870~80년부터 모든 러시아 혁명정당은 그들이 처한 조건에서 비합법적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비합법적 활동 때문에 실제로 권위주의적이고 아주 중앙집중화되었고 규율에 의존했다. 모든 사람은 ‘직업적 혁명가’로 훈련받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의 삶을 투쟁에 모두 바친 사람이었다. 모든 사람은 그때 감히 ‘실천적’ 비도덕성을 지닌 유형의 사람이 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비록 우리가 그들을 열렬하고 이타적인 이상주의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이 공평하긴 했지만. 프롤레타리아트이든 아니든 간에 거의 모든 사람은 자코뱅적 정서가 있었다. 모든 것은 영웅과 광신자를 낳았다. 멘셰비키를 빼고 모든 사람은 독재를 열망했고 그루지야 멘셰비키도 빈번히 독재의 방법을 이용했다. 모든 커다란 정당은 그들의 구조상 그들 자신에게 할당한 목표 때문에 ‘국가주의적’이었다. 실제로 그들이 지닌 교의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지만, 거기에는 하나의 혁명적 정서가 있었다.
우리는 아나키스트 바쿠닌이 지닌 권위주의 정서와 그가 제1 인터내셔널에 쓴 비밀 조직 방법을 잊었는가? 그가 쓴 『고백』에서 바쿠닌은 계몽된 독재를 두둔했다. 그러나 그가 사람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독재를 썼다는 점은 매정한 것이다. 공화주의 이상을 지니고 있고 사회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었던 사회혁명당은 아주 중앙 집중적이고 규율 잡혔고 권위주의적 ‘기구’를 발전시켰다. 그 기구는 테러주의적으로 독재와 싸울 것을 목표로 했다. 바로 그것은 경찰이 도발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되기도 했다. 전체로서 러시아 사회-민주 세력은 국가권력에 대한 정복을 목표로 했다. 그 누구도 그들의 지도자인 플레하노프보다 훨씬 더 ‘자코뱅’적 말로 다가올 혁명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지배 세력이었던 케렌스키 정부는 사실 비효율적이긴 했지만, 독재적 색채를 띠었다. 네스토르 마흐노의 검은 군대가 점령했던 지역에서 아나키스트들조차도 몰수, 징발, 체포, 처형을 갖춘 진짜 독재를 실행했다. 그리고 마흐노는 그 독재의 ‘두목’이자 ‘대부’ 또는 ‘주인’이었다.
단과 체레텔리 같은 멘셰비키 우파도 권위주의의 통치를 바랐다. 체레텔리는 더 늦기 전에 볼셰비즘을 탄압할 것을 편들었다. 마르토프 같은 멘셰비키 좌파는 아마 민주주의 혁명 이상을 진지하게 붙잡았던 하나의 그룹이었을 것이다.
볼셰비즘이 갖는 뚜렷한 특성은 공동의 견해를 함께 지닌 그들의 경쟁 정당에 대한 타고난 우위였다. 그 특성은 맑스주의 신념, 혁명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교의, 고집스러운 국제주의, 사상과 행동의 통일이었다. 많은 개인 속에 이러한 사상과 행동의 통일은 그들 자신의 견해에 대한 강력한 신념과 함께 있었다.
1917년 맑스주의의 이상주의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느 정도 지나치게 단순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는 달라졌고 사회 투쟁은 그들이 그때로 돌아와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혁명 동안 역사적ㆍ경제적 현실에 대한 강한 인식에 중점을 두었던 이러한 이상주의는 그때와 환경에 적합했다. 그것은 그때의 자유주의적 표현, 이중거래, 자기 강화하는 미루는 짓, 책임성의 포기에 대한 해결방법을 포함한 것이었다. 온건 사회주의자들은 나라가 자본주의로 나아갈 수 있게 한 “부르주아혁명”을 진행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치 구조의 발전으로 반드시 이끌게 된다.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이러한 ‘부르주아’혁명을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사회주의가 그런 뒤떨어진 무대에서 일어날 수 없지만, 사회주의 발전의 길에 들어선 러시아가 궁극적으로 유럽 노동계급을 위한 본보기가 될 것이라 믿었다. 1917년에 레닌은 모든 생산 수단에 대한 국유화를 계획하지 않았으나 그 대신 생산에 대한 노동자통제를 마음에 그리고 있었다. 나중에 레닌은 자본주의와 국가 통제로 이루어진 혼합 체제에 관한 생각으로 돌아섰다. 1918년 7월에 비로소 내전의 발발은 수세적 필요로서 완전한 국유화를 강제하게 되었다. 볼셰비키가 지닌 타협하지 않은 국제주의는 러시아에서 혁명보다 훨씬 더 발전되고 훨씬 더 기름진 것으로 될 다가올 유럽 혁명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 의존했다. 앞날에 대한 이런 비전은 그들의 것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럽 사회주의가 함께 지닌 토대의 일부였다. 비록 실제로 거대 정당이 전체 혁명이라고 하는 이러한 구상을 이미 포기해버렸지만. 맑스의 독일 후계자인 칼 카우츠키는 1908년까지 이러한 혁명의 주요 이론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프란츠 메링, 칼 리프크네히트 모두는 같은 믿음을 지녔다. 볼셰비키가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혁명적 인텔리겐치아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발전했던 특수한 환경 때문에 생긴 심리적인 것으로 보였다. 차르 제국에는 의회주의적 기회주의와 일상적 타협이 자리할 공간이 없었다. 잔인하고 단순한 사회적 현실은 적극적이기도 하고 아울러 전체적이기도 한 신념을 생기게 했다. 이 점에서 볼셰비키는 좀 더 러시아적이었고 혁명적 사회주의자나 멘셰비키보다 러시아 대중의 기질에 훨씬 더 잘 어울렸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나 멘셰비키는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의 뜻에서 서구적이고, 진화론적 정서, 민주주의적인 특성을 몸에 익힌 당원을 지녔다.
Ⅳ.
이제 잘못과 실수라는 다른 문제로 넘어가 보자. 이런 짧은 연구에서 볼셰비키-사회주의 혁명에 대항해 싸웠던 권력과 정당이 저지른 결점, 잘못, 범죄를 똑같이 헤아릴 수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유감스럽다. 그와 같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맥락이 빠진 가운데, 우리는 일방적인 견해와 똑똑히 싸워야 할 것이다.
1939년에 나는 파리에서 펴낸 『스탈린 초상』(Portrait de Staline)에서 이렇게 썼다. “……정확히 그들의 역사에 대한 인식 때문에 사회주의자(볼셰비키)가 저질렀다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잘못은 반혁명, 투기, 간첩 활동, 의무 불이행에 대한 탄압을 위한 비상 위원회의 창설이었다. 나중에 그 위원회는 ‘체카’로 짧게 줄여 불렸다. 그 위원회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즉 적어도 방어할 여지도 없는 피의자, 단순한 수상쩍은 사람에게 판결을 내렸다. 그들은 비밀리에 선고를 받았고 비밀리에 처형되었다. 심문이 아니라면, 이것은 무엇이었는가? 틀림없이 포위 상태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고 처참한 내전은 예외적인 조치를 강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사회주의자는 공개 재판이 독단적이고 부패한 행동에 맞선 하나의 보증임을 잊었다. 어떻게 푸키에탕빌(Fouquier-Tinville)이 쓴 임시변통 수단보다 훨씬 더 처진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이것은 틀림없이 실수이고 비난받아야 한다. 그 탓에 소름 끼치는 결과가 나왔다. 체카의 훨씬 더 힘 있는 계승자인 GPU도 볼셰비키에서 모든 혁명 세대를 뿌리 뽑았다. 어쨌든 사회학자의 눈으로 볼 때 그러한 환경은 실질적인 중요성을 띠었다. 젊은 공화국은 치명적인 곤경에서 살았다. 크라스노프와 코르닐로프와 같은 장군에 대한 공화국의 관대함은 피의 강으로 물들이게 하는 희생을 치렀다. 옛 정권은 또다시 테러의 이용에 호소했다. 1917년 11월에 백군은 크렘린 병기고 노동자를 대량 학살함으로써 내전에서 테러를 이용하는 주도권을 잡았다. 1918년 첫 몇 개월 동안 핀란드 반혁명세력은 러시아에서 ‘적색 테러’가 선언되기 전에 테러를 이용했다. 1848년 6월의 날들에서 시작한 19세기 사회 전쟁과 1871년 파리코뮨은 정복당한 프롤레타리아계급을 대규모로 없애버렸다는 것으로 특징지어졌다. 러시아 혁명가들은 자신들이 졌을 때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런데도 체카는 처음부터 1918년 여름까지 상대적으로 너그러웠다. 반혁명 봉기가 터진 뒤, 볼셰비키 볼로다르스키와 우리츠키가 암살당하고 난 뒤, 그리고 레닌을 암살하려는 두 번의 시도가 있고 나서, 체카가 ‘적색 테러’를 시작하고 인질과 수상쩍은 사람들, 적들을 총살하기 시작하자, 그것은 대중의 분노를 통제하고 다른 데로 돌리는 수단이 되었다. 제르진스키는 지역 체카의 지나침에 대해 걱정했다. 체키스트 자체의 통계는 이러한 공세가 매우 교훈적일 것으로 어림짐작한 것이다. 최근에 나는 이 주제에 관한 작은 책, 사회혁명당 좌파인 스타인베르그가 쓴 『어느 인민위원의 회고』를 다시 펴 보았다. 그 책에서 나는 두 개의 의미 있는 이야기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음을 알았다. 1917년 말에, 총알 두 발이 레닌에게 발사되었다. 레닌을 암살하려 한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난 뒤, 노동자 대표가 레닌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반혁명가들이 당신의 피 한 방울을 흘리게 한다면, 페트로그라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백배로 보복할 것이다. 스타인베르그는 이 구상(암살)에 따라 레닌을 어떻게 없앨 것인지를 꼼꼼히 적었다. 비극적 결과를 막으려고 사건은 특별히 비밀에 부쳤다. 나는 다른 자료를 통해 총을 쏘았던 두 명의 사회혁명당원이 체포되었지만, 곧 풀려났다는 것을 알았다. 나중에 그들은 볼셰비키 지지자가 되었다. 두 명의 자유주의자인 전직 장관, 쉰가레프와 코코쉬킨은 감옥에 있는 동안 병을 앓았다. 그들을 병원으로 옮기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병원에서 그들은 자신의 침대에서 암살당했다. 레닌이 그 범죄에 대해 들었을 때, 그는 아주 충격을 받았다. 정부가 조사를 지시했고, 범인은 많은 동지의 지지를 받고 보호를 받았던 혁명적 수병이었음이 발견되었다. 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려는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수병들은 테러리즘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 행동을 취했다. 사실 함대의 병사들은 암살자를 넘겨주길 거부했고 인민위원은 사건 전체를 ‘잊어버리’라는 강요를 받았다. 수병의 지지가 혁명에 아주 중요한 문제였을 때에, 그들은 자발적인 테러리즘 행동을 둘러싸고 갈등을 일으킬 수 있었겠는가?
1920년에 중요한 처벌은 러시아에서 폐지되었다. 그것은 내전이 거의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조짐이었다. 나는 당내 모든 사람이 정권의 정상화, 포위 상태 종식, 소비에트 민주주의로 선회, 폐지가 아니지만 체카 권력에 대한 제한을 바랐다는 것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은 가능했다. 그리고 그것은 혁명 그 자체가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피폐화된 나라는 재건을 시작하기만을 바랐다. 그 나라는 여전히 신념과 열광의 커다란 저수지였다. 1920년 여름은 혁명의 역사에서 중대한 순간이었다. 모든 러시아 사람이 상황이 평화스러워지길 바랐던 때에, 필수드스키는 폴란드 군대를 우크라이나에 맞선 전장으로 몰아넣었다. 틀림없이 정복에 대한 열망 때문에 빚어진 이러한 공격은 영국과 프랑스가 크림 지방을 점령하고 있던 브랑겔 장군을 승인했던 것과 일치했다. 그것이 혁명에 끼친 나쁜 영향은 즉시 나타났다. 폴란드를 패배시킨 중앙위원회는 폴란드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다. 레닌의 이러한 계획은 바르샤바 문 앞에서 붉은 군대가 패배함으로써 실패했다. 훨씬 더 나쁜 것은 고통스럽고 피로 더럽혀진 전쟁이 끝났음에도 나라가 황폐해졌고 파괴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거기에는 더는 주요 처벌을 폐지하거나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밑바탕으로 삼아 국가를 다시 세우는 일을 시작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비참과 위험은 주민을 참을 수 없게 하는 경제체제에서 당-국가를 불구로 만들었고 그것으로 ‘전시 코뮤니즘’(War Communism)라고 하는 체제 운명이 정해졌다.
1921년 초에 크론슈타트 수병 봉기는 정확히 이러한 경제체제와 당 독재에 대항한 저항이었다. 봉기가 지닌 실질적 의도가 무엇이든지 간에, 당은 굶주린 국가를 통치할 수 없었고 그것의 인기를 지탱할 수 없었다. 대중의 자발적인 열광은 사라져 버렸다. 희생과 결핍은 혁명 안에서 여전히 적극적인 소수를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지독히 추운 겨울, 불충분한 배급, 전염병, 농촌에 대한 끊임없는 징발 등 이 모든 것은 곳곳에 비참함, 일종의 절망, 빵과 반(反)혁명 사이 이데올로기의 혼동을 퍼트렸다. 이런 상황에서 볼셰비키가 권력을 고삐를 놓아버린다면, 그들의 자리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 볼셰비키가 자신의 의무를 계속하지 않았다면? 사실 그들이 계속하는 것이 옳았다. 그들의 잘못은 크론슈타트 반란에 부딪혀 제정신을 잃었던 것이었다.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에 있었던 우리가 잘 알았듯이 크론슈타트 반란을 갖가지 방식으로 다룰 수 있었다.
권력의 잘못과 실수는 1921년 크론슈타트와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수병들은 칼리닌이 냉정하게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 설득과 이해가 필요했던 곳에,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은 위협과 모욕을 썼을 뿐이었다. 형제로 받아들이는 대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로 간 크론슈타트 대표들은 체카에 의해 모두 체포되었다. 갈등에 대한 진실은 당과 나라 전체에서 언론을 통해 숨겨졌다. 크론슈타트를 책임지고 있던 백군 장군 코즐로프스키가 말했듯이, 그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미국 아나키스트인 엠마 골드만과 알렉산더 버크만이 선의에서 한 중재 시도는 거절당했다. 그 대신 대포가 동포들끼리 전투에 쓰였다. 체카는 나중에 죄수를 쏘았다. 만일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수병이 1918년 이래 바뀌었고 이제 후진적인 농민층의 열망 말고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았다면, 지배집단도 바뀌었다고 말해야 한다.
‘전시 코뮤니즘’의 폐지와 ‘신경제정책(NEP)’의 시작을 알리면서, 레닌은 전투와 대량학살이 끝난 뒤 크론슈타트 반란자가 내건 경제적 요구를 만족시켰다. 그럼으로써 그는 정권, 그리고 그 자신이 지킬 수 없는 처지에 빠졌음을 인정했다. 신경제정책이 실시되자 농촌에서 징발이 폐지되었다. 그 대신 일종의 현물세가 들어섰다. 그것은 상업과 소규모 기업의 자유를 다시 세웠다. 다른 말로 하면, 신경제정책은 생산과 교환에 대한 완전한 국가 통제를 통해 나라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누그러뜨렸다. 그와 함께, 인내와 화해를 통해 소비에트 헌법의 권위를 받아들이기로 했던 다른 사회주의자와 자유의지적 요소에 대한 정부 정책을 자유화하는 것도 정상으로 되었다. 라파엘 아브라모비치는 올바르게 1921년에 이러한 노선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볼셰비키를 꾸짖었다. 그 대신 중앙위원회는 멘셰비키와 아나키스트를 불법화했다. 연립 정부가 이때 세워졌다면, 그것은 확실한 위험을 국제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 입증되었다. 그들은 결코 이러한 권력 독점을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사실 당과 노동계급 안에서 불만이 퍼지자, 중앙위원회는 그 순간부터 포위 상태임을 어쩔 수 없이 선언했다. 이러한 포위 상태가 당 그 자체에 미친 영향은 너그러웠던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노동계급 반대파는 비난당했고 숙청당했으며 추방당했다. <계속>
멕시코,
1947년 7~8월
빅토르 세르주
Michel Bolsey가 불어본을 영어로 옮기다.
<한국어 출처> 「실천」 2007년 10월호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