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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데오 보르디가의 옥중 선언
소개
아마데오 보르디가가 1923년 대부분(2월 3일~10월 26일)을 로마에 있는 감옥에서 자신과 30여 명의 동료 피고인들의 변론을 준비하는 한편, 창립 2년밖에 안 된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이 직면한 위기에 대한 정치적 선언을 작성하고 전체 당원들이 토론했다는 사실은 이른바 '코뮤니스트좌파' 진영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보르디가의 체포 이후 당원에 대한 체포와 탄압이 잇따르면서1) 조직이 약화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는 보르디가가 우려했던 위기가 아니었다. 그가 선언문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더 심각한 위기는 이탈리아 당의 ‘원칙적인 전체의 틀’과 그가 정중하게 ‘인터내셔널과 그 집행 조직의 다수파’라고 부르는 러시아 코뮤니스트당, 즉 점점 더 반(反)혁명적인 소련의 외교 정책이라는 목표를 위해 구성 정당들을 관료적인 '예스맨'으로 만들려는 인터내셔널 내에서 권위적 입장을 꾸준히 행사하고 있는 러시아 코뮤니스트당 사이에 균열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것은 100년이 지난 후에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당시 보르디가는 1921년 1월 이탈리아당이 사회민주주의에서 이탈한 이후 인터내셔널이 채택한 전술과 이탈리아당이 채택한 정치적 틀과 정책 사이에 불협화음이 커지고 있는 것에 대해 인터내셔널과 이탈리아당 내부에서 완전히 공개적인 토론을 요구했을 뿐이다.
논쟁의 주요 쟁점은 a) 리보르노 분할이 너무 좌파에 치우쳤다는 모스크바의 원래 불만과 이탈리아 사회당(PSI) '다수파'와의 융합을 통해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b) 1922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인터내셔널 집행부가 처음으로 공식화했고 보르디가가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즉, 코뮤니스트가 다른 정당과의 정치적 거래로 정책을 타협할 수 있는 기초가 아니라 집단적 노동자 행동을 위한)으로 이해하기로 한 '통일전선' 정책을 해석하는 방법. c) 이로부터 전쟁 직후 피우메(Fiume)를 점령했던 다눈치오(d'Annunzio)의 전(前)파시스트 부대를 모방한 반(反)파시스트 저항투사 인민군대(Arditi del Popolo)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d) 보르디가가 주로 초안을 작성하고 제2차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 대회에서 다수결로 승인한 로마 테제를 코민테른 집행부가 단지 권고문으로 축소했다.2)
이러한 문제 중 그 어느 것도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에서 보르디가의 입지를 심각하게 훼손하지 않았으며, 비록 인터내셔널의 나머지 이탈리아 대표들이 제4차 세계대회(1922년 11월/12월)에서 PSI와 원칙적으로 융합하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설득'되었음에도 그 자신이 당 지도부에서 사임하겠다고 위협했지만, 아무도 그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다. 1922년 10월, 투라티(Turati)의 개혁파가 국제코뮤니스트당 대회에서 축출되자 러시아가 원하던 정치적 융합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이 정책은 코민테른 의장 지노비예프(Zinoviev)가 추진하였으며, 그는 이 정책을 통해 투라티 당에 대항하는 통일전선을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보르디가를 제외한 '융합'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가 하던 지도부 역할은 지난 6월 '이탈리아 문제'에 관한 확대집행위원회(ECCI) 회의 이후 러시아에 머물고 있던 그람시가 대신하게 되었다.
1923년 4월 이탈리아 사회당(PSI) 총회에서 그 정책을 부결시켰다.3) 어느 정도 상설화된 인터내셔널의 확대집행위원회(ECCI) 회의에서 통일전선을 준수하도록 러시아에서 끊임없이 괴롭혔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책략에 대한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의 정치적 탄력성에 유일하게 균열이 생긴 시기는 1921년 5월이었다. 이는 인민군대에 대한 「신질서」(L’Ordine Nuovo)에 실린 기사에서 그람시의 열정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다른 정치조직에 가입하는 것은 당 규약과 양립할 수 없다는 당의 결의문을 발표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4) 당시 인터내셔널은 부하린의 방식으로 개입했는데, 그 방식은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이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를 저지르고 있다고 선언하여 불화를 더욱 부추겼다.5)
어쨌든 점점 더 러시아가 지배하게 되고 주로 러시아가 자금을 지원하지만, 국제적인 정치조직이 이탈리아당이 통일전선 정책을 계속해서 준수하지 않아도 용인할 수 있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리고 보르디가가 더 순응하지 않는다면 ... 그람시는 무솔리니의 손이 닿지 않는 러시아에서 치료 기간을 연장하고 코민테른의 확대집행위원회(ECCI) 회의에 항상 참석하여 이탈리아 문제 (현재 우리가 재판을 받는 보르디가의 문제로 점점 더 인식되고 있는 문제)를 고려할 수 있었다.
전체의 재판 과정은 긴 여정이었다. 보르디가와 그의 공동 피고인 31명은 국가 전복 음모 및 공모 혐의로 기소되었다. 적어도 1924년 로마의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이 만든 기록에 의하면 보르디가의 경우에는 장시간의 예비 심리가 있었다. 보르디가는 당이 지하 본부를 세우려던 프라티나(Frattina)의 한 아파트 블록 밖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3,000리라, 약 3,000파운드(1923년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한 액수)를 소지하고 있었다. 보르디가는 3,000파운드가 크라신(Krasin)이라는 '러시아 담당자'에 의해 송금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외국 국가의 돈을 받고 있지 않다는 점, 즉 외국의 음모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곤혹스러워했다.
“판사 : 모스크바 집행위원회는 러시아 정부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까?
보르디가 : 아니오. 그 정부와 혼동해서는 곤란하며, 이제 이 두 기관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설명하겠습니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는 다른 국가에 상주할 수도 있습니다. 보기를 들어, 로마의 비아 프라티나(Via Frattina)에 있는 우리 본부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숙련된 경찰이 없었다면 집행부의 본부를 이곳으로 옮기는 것에 반대했을 것입니다. 기존 인터내셔널은 브뤼셀, 제네바 등에 본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제3 인터내셔널은 모스크바에 본부를 두고 있습니다. 인터내셔널에는 가장 중요한 정당 중 하나이자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정당인 러시아 코뮤니스트당이 포함되어 있고,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고려할 때 가장 경외심을 갖고 있으며 또한 가장 부러워하는 정당입니다.
러시아 정부, 러시아 코뮤니스트당과 제3 인터내셔널은 완전히 별개의 조직입니다. 자금 송금은 여러 국가의 동지들로 구성된 제3 인터내셔널 예산위원회에서 이루어졌으며, 우연하게도 이 위원회의 의장은 이탈리아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금액을 보내기로 한 사람은 실제로 이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러시아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일 수도 있지만, 이는 우리에겐 모두 똑같았습니다. 인터내셔널과 러시아 정부 사이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전 세계 코뮤니스트당이 가입된 제3 인터내셔널에 소속된 코뮤니스트당입니다. 러시아에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은 다른 나라와는 다른 상황에 처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부의 조직이 아니라 정부가 인터내셔널의 조직이라는 의미에서, 또는 적어도 인터내셔널이 정부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 국가가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에 종속되는 관계가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 러시아 정부와 여러 조직은 인터내셔널 코뮤니스트 운동 문제에서 행동할 권한이 없으며, 오직 인터내셔널만이 이를 수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코뮤니스트당 대회와 지도 조직의 지시를 받는 러시아 정부의 정책은 인터내셔널에 의해 논의되고 수정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러시아 정부의 대외 대표에 불과한 크라신과 어떤 교류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내가 감사하고 존중하는 나의 동지이지만, 우리와 러시아 국가의 다른 대외 대표 사이에 어떤 관계도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와 아무런 조직적 관계도 없는 사람입니다.6)”
부르주아 법정에서 열린 재판에서 보르디가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 러시아 국가 사이의 분리를 강조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이것을 얼마나 깊이 믿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그의 선언문은 '이탈리아 문제'뿐만 아니라 ‘우익으로의 일탈에 맞서 싸우는 인터내셔널 강령, 조직 및 전술적 문제’에 관한 공개 토론이 여전히 진행될 수 있다고 생각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1923년에 일어난 사건은 완전히 반대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제3차 대회 이후 러시아는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해 '올바른' 결정, 즉 자본주의 세계에서 러시아 국가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리한 결정이 나오게끔 관료적 변화를 강요해 왔다. 우리는 1922년 말 인터내셔널 코뮤니스트당과 통합을 논의하기 위한 위원회에서 그람시가 보르디가를 대신해 단순히 교체된 것을 보았지만, 더 일반적으로는 러시아가 통제하는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 위원들이 총회 사이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사전에 각 정당의 성원이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총회 현장에서 '선출'했다.7) 또한, 대회 사이에 보르디가가 선언문을 작성할 무렵이었던 1923년 중반부터 1년에 두 번씩 확대집행위원회(ECCI) 회의를 개최하는 패턴이 확립되었는데, 여기에는 선출직 위원도 포함되었다. 러시아에서 반(反)혁명이 일어나면서 '레닌의 당'의 근본적인 목표는 새로 출범한 소비에트 및 지금의 소련 코뮤니스트당(CPSU)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러시아 국가의 고립을 깨기 위해 혁명적 봉기, 특히 1923년 불가리아 사태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독일 10월혁명을 기획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역 협정을 체결하여 자본주의 열강과 화해를 시도하는 등 결과적으로 초래된 불규칙한 외교 정책은 언급할 수 없다. 코민테른 당원들의 충성심이 러시아의 국제적 위상에 매우 중요해졌을 뿐만 아니라, 코민테른 내부에서는 소련 코뮤니스트당(CPSU)의 지도력을 둘러싼 주도권 다툼이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었다. 이탈리아 법정에서 보르디가가 묘사한 러시아는 이보다 더 선명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러시아 정부, 러시아 코뮤니스트당, 제3 인터내셔널은 완전히 별개의 조직이다.”
좌파가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의 다수를 차지했다 하더라도 러시아가 지배하는 코민테른이 보르디가, 그리고 필요하다면 당 지도부 전체를 편들기 시작하는 것은 시간의 문제였다. 러시아 정당의 정치적 방향과 미래 지도력을 둘러싼 내분이 심화하면서 이탈리아 문제는 이러한 책략에 얽히게 되었다. 보르디가의 구속으로 인하여 확대집행위원회(ECCI)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6월에 그람시는 스코치마로(Scoccimarro), 타스카(Tasca), 테라치니(Terracini), 포르티차리(Fortichiari), 보타(Vota)와 함께 확대집행위원회(ECCI) 회의에 참석하여 ‘이탈리아 문제’에 대해 연설했다. 그 결과 우익의 소수파 대표들이 포함된 새로운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 '혼합' 집행위원회가 임명되었고, 포르티차리는 이 위원회에 합류하기를 거부했다. 이 새로운 집행부는 그동안 중앙위원회에 속해 있지 않았던 톨리아티, 스코치마로, 타스카, 보타, 겐나리(Gennari)(포티차리 대신)로 구성되었다. 8월, 감옥에 갇혀 있던 보르디가와 그리에코(Grieco)는 새로운 집행부의 소식을 듣고 물러났다.
이제 보르디가는 이탈리아 당 내부와 외부에서 자기 선언문에 대해 최대한 폭넓은 지지를 얻는 데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놀랍게도 감옥에 갇혀 있어도 간단한 암호와 협조적인 교도관을 통해 외부 세계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데 지장이 없었다. 후자는 주로 톨리아티에게 메시지를 전달했고, 톨리아티는 이탈리아의 다른 당원들, 지노비예프와 부하린을 포함한 코민테른, 그리고 보르디가는 잘 몰랐겠지만, 그람시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확대집행위원회(ECCI)의 내용을 충실히 따르는 지도부, 이탈리아 당을 위한 새로운 지도부, 즉 타스카로 대표되는 우파에 너무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보르디가와 구(舊)집행부보다는 '온건'한 지도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이미 갖고 있던 그람시였다. 그람시가 보르디가를 약화하려는 첫 번째 움직임이 그람시 자신의 표현대로 ‘파시즘의 승리에 대한 책임은 당신들(즉, PCd'I 전체)에게 있다’는 지노비예프의 확대집행위원회(ECCI) 선언에 의해 타격을 입었다면, 그는 ‘장어처럼 미끄러지는’ 방법, 즉, 보르디가와 달리 당의 어떤 권위 있는 자리에서도 물러날 이유가 없는 직책을 지키는 전쟁에서 교묘하게 움직이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한편 보르디가는 분파 작업을 하는 것은 모스크바의 지시에 대해 공개적으로 대놓고 반대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당의 대표 자리에서는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가 감옥에서 석방된 후 1923년 말, 확대집행위원회(ECCI)의 최고 간부 회의(Praesidium)는 다시 한번 보르디가에게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 집행위 위원으로 합류할 것을 요청했다. 보르디가는 어떤 경우에도 전 이탈리아 집행부 전체를 복직시켜야 하는데, 그들은 그럴 권한이 없으며,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코민테른 집행부가 승인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고 응수했다. 그러나 그 무렵 보르디가는 ‘미끄러지는’ 방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에 의해 완전히 조종당했다. 그람시는 처음부터 보르디가의 선언문에 서명하기를 거부했고, 톨리아티가 수정하여 제출했음에도 계속해서 서명하지 않았다. 보르디가가 석방될 무렵에는 다른 게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러시아를 모방하여 당을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이미 9월에 그람시는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노동자 일간지를 발행하기로 한 코민테른의 결정을 이탈리아 당 집행위원회에 알렸다. 이는 1924년 2월에 정식으로 창간하여 1926년 제3차 당 대회를 앞두고 좌파에 대항하는 코민테른의 볼셰비키화 캠페인의 수단이 되었다. 그람시는 이탈리아로 돌아온 직후에 열린 1924년 5월의 특이한 코모(Como) 대회에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리옹에서 열린 연정을 위한 일종의 사전에 진행된 리허설에서 좌파(투표권이 없는 유일한 좌파 대표 보르디가), 중도( 톨리아티), 우파(타스카)를 대표하는 세 가지 논제가 발표되었다.
“총 65표 다음과 같이(중앙위원회 14표, 연방 및 지역 간부, 청년 연맹, 당 언론 및 선전 기관 대표 49표 중 41표가 보르디가 후보, 10표가 우파 후보에게 그리고 중도 후보가 11표를 얻었다) 투표가 이루어졌다. 두 명은 기권하였고 한 명의 표는 분실된 것으로 간주 되었다. 대회에서 선출된 집행부의 일원이었던 보르디가, 포르티차리(Fortichiari), 레포시(Repossi), 그리에코(Grieco)는 사임했다 하여 투표권이 인정되지 않았고, 중앙위원회에 불참한 세 명의 위원(겐나리, 라베라, 레오네티)이 중앙에 찬성표를 던진 것이 개표에서 확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좌파 논리가 다수의 표를 얻었다. 이러한 절차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결과는 45 대 8로 좌파가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8)”
위 그람시에 친화적인 저술가조차 인정했듯이, "당 전체가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보르디가 방식을 그대로 유지한 것은 분명했다. 이는 그람시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르게 시작된 것이었다."
‘장어처럼 미끄러지는 법’을 배운 사람에게는 할 일이 더 많았다. 인테사(Intesa) 위원회와 그람시에 대한 팸플릿을 참조하라.9) 여기서 인터내셔널의 퇴행에 대한 보르디가의 적극적인 정치적 저항은 1930년 무렵에 줄어들고 중단되었지만, 이탈리아 코뮤니스트 좌파의 투쟁은 그가 없는 상태에서도 계속되었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는 많이 가려져 있지만 중요한 역사적 에피소드에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번에는 전 세계 노동자들이 최소한 혁명적 인터내셔널을 위한 강력한 틀을 이미 갖추고 있다면 훨씬 더 나은 위치에 설 수 있을 것이다, 둘 이상의 국가에 기반을 두고, 개별적인 유대를 기반으로 성원 자격이 부여되므로 어느 한 부문의 통제를 받기 쉽지 않은 구조의 조직이다.
E. 레이너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주>
1)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PCInt) 소개에서 노트 NO. 1,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들의 재판, 1923, 5쪽:
움베르토 테라치니(Umberto Terracini)는 1923년 2월 13일에 제3 인터내셔널 집행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썼다.
"일주일 만에 경찰은 5,000명이 넘는 동지들을 체포했다. ... 당원의 1/4이 체포되고, 지부가 해산되었으며, 지도자 보르디가 동지를 빼앗겼고, 당원들이 죽음과 고문의 위협을 받고 있지만,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은 이미 당의 작업과 활동을 재개했다.“
아마데오 보르디가를 비롯한 거의 모든 집행위원이 체포되었고(테라치니 외에 브루노 포르티차리, 안토니오 그람시는 수배된 상태였다), 반란 선동, 탈영, 국가 권력 전복 음모 및 계급 증오 선동 등의 범죄 혐의로 로마 형사재판소에 기소되었다. 재판은 1923년 10월 18일부터 26일까지 열렸으며 증거 불충분으로 피고인들에게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2)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PCd'I및 코민테른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1925년 인테사 위원회의 강령, 1925년 팸플릿 소개를 참조하라.
3) 세라티는 추방된 후 수천 명의 성원과 함께 단일한 코뮤니스트 분파를 결성했고, 1924년에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PCd'I)에 합류했다. 그는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는 1926년 코뮤니스트당 비밀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5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4) 1921년 7월 31일 「신질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코뮤니스트들은 인민군(Arditi del Popolo) 운동에 반대하는가? 그와는 정반대로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무장시켜 부르주아지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가 창출한 새로운 생산력의 조직과 발전을 감독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군대를 창설하기를 열망합니다.” (우리의 번역)
의심할 여지 없는 반(反)파시스트 동기를 가지고 있고(조직적으로는 원래의 파시스트 아르디티를 모방했지만) 아나키즘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이 공동 당원은커녕 공식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에 회의적이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반면에 파르마의 올트레토렌테(Oltretorrente)와 같은 노동계급 지역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 및 아르디티 성원들은 종종 무솔리니의 갱단에 대항하여 함께 투쟁했다.
5) 그리에코의 답장에는 부하린이 "... 세컨다리가 이런 반(反)맑스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동안 코뮤니스트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라고 반문했던 무솔리니의 로마 진격 직후 파시스트들의 공격으로부터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아나키스트이자 인민군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아르고 세컨다리(Argo Secondari)에 대한 비판이 포함되어 있었다.
6) 1923년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 Il Processo,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 로마 1924) 79~82쪽에서 번역.
7) 이는 1921년 6월 22일부터 7월 1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3차 대회에서 결정된 사항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러시아가 정당 규모에 따라 확대집행위원회(ECCI) 대의원 수를 결정하도록 하여 러시아가 과반수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한 부분이다. 어쨌든 다른 모든 정당은 위원회에서 수적인 열세로 자문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러시아 당만이 다수였기 때문에 결정하는 투표를 할 수 있었다.
(8) Luciano Beolchi, Dal Partito di Bordiga al Partito di Gramsci, 248쪽
(9) 1925년 인테사 위원회와 오노라토 데이먼의 강령, 「맑스주의와 관념론 사이의 그람시」에 대해서는 모두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주소와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마데오 보르디가의 옥중 선언문 (1923)
이탈리아 코뮤니스트 당의 모든 동지에게
확실한 신념과 오랜 숙고 끝에 우리는 동지들에게 현재의 성명을 발표하여 코뮤니스트로서의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은 전체 당원의 참여가 있어야만 해결할 수 있는 종류의 위기를 겪고 있다. 우리는 이탈리아에서 반(反)프롤레타리아 세력이 승리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효율성과 조직의 위기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 위기도 충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또 다른 위기가 없었다면 당의 주요 기구가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쟁점은 불행하게도 첫 번째 위기의 결과를 더 악화하는 또 다른 위기, 즉 당의 전반적인 방향에 대한 내부 위기가 개별 전술적 문제에서 이제는 원칙과 당의 정치적 틀 전체 위기로 확대되었다.
이 위기는 내부의 불일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당과 현재의 다수파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및 집행 기관 사이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정확히 지금의 위기는 절대적으로 비정상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동지들에게 충분히 정보를 제공하고 기본적인 문제를 토론하고, 우리 당의 사상과 행동 강령이 무엇인지에 대해 최종적으로 결정적인 판단을 하기 위해 (전체) 당 앞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당 활동이 마비되고 무력화될 수 있다. 공개적으로 당 회의를 개최할 수 없고 자유로운 언론이 없는 상황에서도 이 문서에서 그러한 작업의 시작을 제안하고자 한다.
리보르노 대회에서 우리 당이 설립되면서 만들어진 강령은 동지들이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은 이는 특히 전후 몇 년 동안 사회당의 본질적인 잘못에 대한 당 내부의 비판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다.
리보르노 직후 당의 지도부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당의 상황과 과제를 어떻게 보았을까? 당의 이론은 러시아 혁명과 제3 인터내셔널의 창립으로 부각된 혁명적이고 맑스주의적인 기초 위에서 분명하게 확립되었다. 국제적 연계의 힘으로 구별되는 이탈리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새로운 투쟁 조직은 구(舊)당에 치명적이었던 전통적으로 피상적, 무질서, 개인 분파를 피하는 방식으로 점진적으로 발전해야만 했다. 진지함을 기반으로 냉철하게 성찰하는 새로운 기준이 공동의 대의를 위한 모든 개별 성원의 무한한 헌신과 결합하였다. 따라서 우리 활동의 가장 큰 문제는 코뮤니스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이탈리아의 상황에 구체적으로 적용해야 할 전술이다.
1921년 초 프롤레타리아 투쟁은 사회당의 결함으로 인해 우리와 같은 소수 정당이 혁명적 공세를 펼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타협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의 활동은 부르주아지의 공세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트가 최대한의 저항을 끌어내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의 투쟁력을 당의 기치, 즉 재건을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가진 당을 중심으로 최상의 상태로 집중한다는 측면에서 구상할 수 있었고, 또 그래야만 했다.
코뮤니스트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즉 어떻게 하면 산업주의자들의 공세에 맞서 프롤레타리아를 방어하는 단결을 최대한 보장하고, 동시에 이미 이탈리아 대중의 슬픈 경험이었던 모순된 지침으로 인한 안타까운 융합을 통해 대중이 겉으로 보이는 단결의 망상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우리는 반동과 파시즘에 대항하여 코뮤니스트가 노동자 조직의 통일전선을 구축하려고 시도하는 역사를 여기서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추종자를 가진 다른 정당의 행동 때문에 시도는 실패했지만, 적어도 사실에 근거하여 이러한 실패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전투적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코뮤니스트당에 모이는 경향이 증가함으로써 우리가 이득을 취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선전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분명하게 코뮤니스트의 지도를 받아야만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침묵한 적이 없으며, 이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코뮤니스트가 다른 정당의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할 것을 제안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에 이루어진 이러한 실험의 결과는 당과 인터내셔널이 논의하여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고 대차대조표를 정확하게 작성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 위험은 "당의 전술이 잘못되어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를 초래했다"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질문이 사라진다! 여기서 핵심은 다른 정당의 누구도 선의와 다른 자질을 부인하지 않는 한 개인의 활동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것, 즉 전체 경험의 중요한 부분, 맑스주의 정당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고 이탈리아 역사의 현 단계에서 국제적 의미에 의해서만 더 중요해진 부분에 관한 판단이다. 이는 또한, 이러한 실험의 결과가 나온 후 당이 그 구성 기반을 검토하고 수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난 1년 간 이탈리아 정치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명백한 사실, 즉 코뮤니스트당이 되돌리기에는 너무 깊고 오랜 원인에서 비롯된 사건의 진행을 막을 수 없었다는 점을 언급한 후, 우리가 리보르노에서 수립한 노선은 잠시만 따를 수 있었다는 점을 즉시 지적해야 한다. 여기서는 깊이 있는 토론이 필요함을 동지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질문의 개요를 제시하고자 한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 ‘인터내셔널’ 코뮤니스트 전술에 대한 이탈리아 당의 입장은 인터내셔널의 입장과는 다르다.
· 이탈리아 상황에 대한 견해 차이는 ‘전술’의 한계를 넘어 당 조직의 토대를 훼손하기 때문에 훨씬 더 심각한 문제이다.
· 인터내셔널은 전술에 관한 정책을 수정했고, 지금도 수정하는 과정에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강령과 기본적인 조직 규범도 수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요점은 여기서 다루지 않겠다. 이는 로마에서 열린 당 대회(1922년 3월) 토론을 통해 잘 알려져 있으며, 당 대회에서 승인된 전술에 관한 논문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두 번째 요점은 당원들이 이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프롤레타리아 운동 내에서 이탈리아에 적용될 전술 문제의 차이점은 최근에 그리고 매우 느리게 나타났다. 제 3차 대회에 참가한 이탈리아 대표단은 인터내셔널의 전술에 이미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었지만, 당시와 그 이후까지 당의 구체적인 활동은 여전히 인정되고 찬사를 받았다.
나중에 '통일전선'과 '노동자 정부'라는 슬로건에 직면 한 우리 당의 노선은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두 가지 근본적인 초석의 사실에 근거하여 전술적 방법과 선전의 본질 사이의 충돌을 피하는 기준을 근거로 수립했다. 즉 "프롤레타리아트는 코뮤니스트당과 그 지도부의 정책을 지지함으로써만 부르주아지를 이길 수 있다"는 것과 ‘프롤레타리아 권력은 혁명적 독재에 의해서만 건설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인터내셔널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했을지는 결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노동조합 통일전선선'에 참여하고 기회주의의 그늘에 맞서 공개적으로 캠페인을 벌였다.
인터내셔널은 때때로 구체적인 비판을 하기도 했고, 심지어 1922년 6월에는 당이 '노동자 정부'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이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가명'으로 규정할 정도로 비판했지만, 이후에 실제로 그것은 장관과 의회 참여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노동조합과 파시즘에 대한 문제에 대해 인터내셔널이 우리에게 대신 무엇을 하라고 요구했을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최대 강령주의 정당과의 융합 문제로 인해 이견은 더욱 깊어졌고, 상당히 중요한 분야로 확대되었다. 우리는 당의 '계보'가 리보르노에서 당이 설립되었을 때 역사적으로 확립되었다고 보았고, 당의 주요 목표인 다른 프롤레타리아 요소의 유입은 다른 운동에서 그들을 끌어내어 우리의 정치적 틀에 편입해야 한다고 항상 주장했지만, 다른 정당과 대중적으로 융합하려는 어떤 생각에도 반대했다. 또는 우리 대열에 합류하게 하는 대신 그 안에서 지지자들을 일부 만들려는 시도(즉, 우리는 '침투'나 세포 건설에 반대했다), 즉, 오늘날 인터내셔널은 리보르노를 일시적인 해결책으로 간주하고 사회당의 다른 '일부 조직'을 대중적으로 결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것에 따르면, 최대 강령주의자들은 개량주의자들과 분리되기를 주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와 분리되었다. 우리가 보기에 최대 강령주의는 개량주의만큼이나 위험한 기회주의의 한 형태이며, 그 전통과 주도 세력에 비춰볼 때 결코 혁명적이지 않고 무능과 관성 상태를 가장한 기만적인 말로 대중을 계속 잘못된 길로 인도할 것이다. 인터내셔널은 이탈리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입지를 잃고 당원 수가 줄어드는 것을 보고 최대 강령주의를 인정함으로써 상황을 바꾸고 국제적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이를 (측근들의 비열한 지도자들에 의한) 패배주의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전투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불가피한 후퇴에도 불구하고 다른 정당의 청산으로 강화된 코뮤니스트당의 우위를 유지하고 싶었다.
이러한 사실은 최대 강령주의자가 조직을 혁명적 기반 위에 올려놓고 인터내셔널과의 유착을 충직하게 받아들인 것에 대한 정치적 저항을 보여준다. 예전에는 이것이 세라티 (일반적인 코뮤니스트 경향의 출현을 막음)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세라티 자신이 당에 의해 또는 오히려 최대 강령주의라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하는 수십 명의 지도자에 의해 제거되는 것을 보았지만, 후자는 그들이 잡혀 있는 그물을 찢어야만 이길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 코뮤니스트들이 융합을 막았다고 말한다 !!!
인터내셔널의 이러한 입장이 이탈리아에서 어떤 결과를 불러왔을까? 통일전선으로 인하여 당의 전술적 작업이 방해받게 되어 그들이 우리 전술에 얽매여 있던 상황에서 벗어날 기회를 다른 당에 제공했다. 그들은 코뮤니스트들의 제안에 따라 행동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감추기 위해 '정치적' 연합을 제안했다. 노동총동맹과 노동동맹 내부에서 최대 강령주의자들은 모스크바가 이들에게 그러한 정책의 고수를 권유한 덕분에 오랫동안 지속해 온 치명적인 실수를 이어가면서 개량주의 게임을 하고 마지막까지 노동자들을 속일 수 있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1922년 8월의 운동을 매우 다른 지반 위에서 재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1922년 7월 제노바에서 열린 (노동) 연맹 회의에서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곳에서 개량주의자들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다수파들은 의회 협력에 반대하는 선언을 하는 대가로 그들의 자리를 유지하게 되었는데, 이는 ‘프롤레타리아 행동도 협동도 안 된다’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공식만큼이나 해로운 것이었다. 분명히 세라티와 다른 사람들은 투쟁에 대한 오래된 혐오감 외에도 인터내셔널에 다시 가입하는 대가로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을 조금씩 교환하면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합류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 남아있도록 초대받은 제3 국제주의 분파의 형성은 기본적으로 모호성을 영속화하는 데 기여했다. 결론적으로, 개량주의로부터 분열 이후 사라졌어야 할 최대 강령주의 정당은 인터내셔널과 반복되는 제안을 조롱하면서도 아무런 약속도 이행하지 않고 안일한 기회주의로 상황을 악용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어려운 시기에 노동자들의 관성적 경향을 악용하여 몇 가지 혁명적 문구를 통해 수동적이며 가식적인 충실함의 기치를 내걸고 어느 정도 노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그것은 상황이 변하든 변하지 않든, 최악의 무력감 속에서 스스로 소진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세력이다.
그리고 비록 통합에 이르지 못했더라도 더 심각한 이유로 당원 수가 감소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이기는 하지만, 노동자들이 코뮤니스트당에 호감을 갖는 경향을 보이는 특정 상황에서도 인터내셔널의 정책으로 인해 코뮤니스트당이 이점을 얻지 못하게 했다. 따라서 8월 파업 이후 인터내셔널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여전히 사회주의 분열의 가능성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파시즘의 출현과 우리 당에 반대하는 반동적 행동이 일어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대신 우리 당은 심각한 구조적 변화를 겪고 있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모든 가능성과 모순되는 위화감이 커지고 있으며 활동하지 않는 비정상적인 의회 체제에 종속되어 있다. 더욱이 인터내셔널과의 차이로 인해 이른바 '소수파'라는 흐름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은 정통 코뮤니스트로 위장했지만, 실제로는 리보르노 이후 낡은 사회주의 방식에 다소 집착하고 (새로운) 서투른 작업과 책임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아 고상하고 근거 있는 주장이 아니라 난폭하고 때로는 조용한 험담으로 인터내셔널의 테제를 지지해 왔다.
이 모든 결과로 당은 고통을 겪고 있으며 이러한 부분에 대한 해결책이 필요하다. 이러한 ‘융합주의’접근 방식의 결과는 리보르노에서 발생하여 명예롭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2년 넘게 투쟁해 온 당을 ‘청산’의 위협에 빠뜨리고 있다. 이는 이탈리아 프롤레타리아트를 가장 사악한 최대강령주의적 '중도주의'의 늪으로 다시 빠뜨릴 것이며, 이탈리아 노동계급은 이러한 시련의 과정에서 미래에 필요한 경험조차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좀 더 일찍 경고음이 울렸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술적 문제에 대해 앞에서 말했듯이 실제로는 이견을 좁히기 어려웠다. 인터내셔널의 방식은 어떠한 구호를 한 번에 하나씩 제시하는 것이었지만, 우리는 더 넓은 범위에서 정의하는 표어를 사용하고자 했다. 융합과 연속적으로 이어진 사회주의 대회에서 제시된 다양한 대안과 관련하여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보기를 들어, 1921년 이후에는 더는 융합을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제3 인터내셔널 분파와의 관계조차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한 공식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1922년 말에 이르러서야 이 분열이 심각하게 드러났고, 이후 사건들을 통해 당이 거의 인식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최근에는 길고 고통스러운 협상과 개인적 성격에 지나지 않는 편법을 통해 도출된 미봉책이 아닌, 인터내셔널 내에서 폭넓고 진정한 토론을 통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졌다.
최소한 우리가 검토하기 위해 제안한 일반적인 사항을 언급하고자 한다. 제3차 대회 이후 등장한 인터내셔널의 새로운 전술적 구호(제 4차 대회에서는 전술적 테제를 논의할 시간이 없었다)의 의미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는 강령과 원칙에 대한 변화의 위험, 1924년 강령과 규약의 문제가 반복적으로 연기된 것에서 분명한 위험성을 수반한다. 동시에, 조직 규율의 심각한 문제는 많은 정당과 중앙과의 관계에서 불쾌한 내부 위기를 초래하는 무미건조하고 때때로 불연속적인 절차가 되었다.
이는 매우 심각해질 수 있는 위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아마도 인터내셔널 진영에서 위기의 전야를 맞이하고 있으며, 우리 이탈리아 당은 위기에 깊이 빠져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조건은 중앙 기관이 수행하는 규율을 잠시도 중단하지 않고 모든 성원 앞에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진지한 사항을 고려하여 가능한 한 더 자세히 밝힐 것을 약속하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정 사항에 대한 동지들의 지지를 모으려고 한다.
•현재 상황에 보이는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당을 위한 투쟁 경험의 가치와 당의 강령적 및 전술적 초점에 대해 당 내에서 광범위한 토론과 협의를 끌어내기 위해.
•인터내셔널의 강령, 조직 및 전술적 행동에 대한 논의에 참여하고, 우파의 수정에 맞서 싸우며, 무엇보다도 지침을 결정할 때 최대한의 분명함을 확보하기 위해.
•이러한 토론을 통해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공동의 평가를 수행하여 당의 활동을 안내할 완전하고 분명한 계획이 작성되도록 한다. 이를 바탕으로 모든 성원이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모든 역량을 가장 합리적으로 투입하여 이전의 심각하게 불안정한 상태가 된 이유와 원인을 극복함으로써 당의 업무와 효율성을 강화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시작될 것이다.
이 토론이 공동의 원칙에 기초한 일련의 결정에 대한 실질적인 합의를 끌어내지 못한다면, 인터내셔널 대다수의 의지에 따라 코뮤니스트 성원으로서 우리의 입장을 유지하면서, 우리는 당의 주요 조직이 그들이 적용하도록 요구되는 지침(즉, 이러한 지침은 일관된 방식으로 그리고 적용해야 할 지침에 대해 완벽하게 확신하는 동지들에 의해 작성되어야 한다)에 따라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당의 주요 조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사항
이 문서를 받은 동지들이 복사하여 당원들에게 배포하고 이 글도 복사해 주었으면 한다.
동지들은 이 문서에 대한 동의 또는 반대 의견, 그리고 이 문서와 관련된 모든 통신을 이 사본을 준 동지를 통해 보내주시오. 답장은 같은 방식으로 전해질 것이다.
이 문서는 당 중앙위원회와 인터내셔널에 발송되었다.
해외에 전파하게 된다면 이는 또한 큰 관심을 받게 될 것이다. 번역을 해주시는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 발기인들
1923년 여름, 감옥에서 작성
「혁명적 전망」 22호
2023년 8월 14일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3-08-14/amadeo-bordiga-s-prison-manifes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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