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레닌과 레닌주의
“위대한 혁명가들이 살아 있는 동안, 억압하는 계급은 끊임없이 그들을 괴롭혔고, 가장 야만적인 악, 가장 격렬하게 증오하고 가장 파렴치한 거짓말과 비방 캠페인으로 그들의 이론을 받아 들였다. 그들의 죽음 이후, 그들을 해가 없는 상징으로 바꾸고, 말하자면 신성시하고, 억압받는 계급의 ‘위로’를 위해 그리고 후자를 속이기 위한 목적으로 그들의 이름을 어느 정도 거룩하게 만들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혁명 이론의 실체를 빼앗고 혁명적인 예리함을 무디게 하고 저속하게 만든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노동운동 내 기회주의자들은 맑스주의에 대한 이러한 도용에 동의하고 있다. 그들은 이 이론의 혁명적 측면, 즉 혁명적 영혼을 생략하거나 모호하게 하거나 왜곡한다. 그들은 부르주아지가 수용하거나 수용할 수 있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고 찬양한다.” (레닌, 「국가와 혁명」, 1917년)
레닌의 시신이 방부 처리되어 모스크바에 공개 전시된 지 100년이 지났는데, 이는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레닌의 진정한 공헌을 체계적으로 왜곡하는 것과 더불어 '붉은' 부르주아지의 기괴한 제스처였다. 시대가 변하면서 러시아는 더는 레닌을 '건국의 아버지'로 여기지 않고 제국 붕괴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묻고 있으며, 구(舊)동구권의 많은 국가에서는 '탈(脫)코뮤니즘화'의 목적으로 레닌 동상이 철거되고 있다. 따라서 레닌 서거 100주년은 큰 틀에서 보면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위기와 전쟁의 세계에서 '코뮤니즘' 사상은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서 지난 수십 년 중 그 어느 때보다 인기가 높은 것 같다. 따라서 자본주의 너머 세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애매모호한 기념일은 '코뮤니즘'이 라는 개념과 함께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한 사람을 다시 돌아볼 기회이다.
레닌, 집단적 조직가
1870년 레닌은 오늘날 상류층 가정으로 묘사되는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Vladimir Ilyich Ulyanov)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노 출신이었지만, 대학에 진학하여 교사가 되었다. 어머니 역시 교사 자격을 갖추고 있었지만, 대부분 시간을 자녀를 양육하면서 보냈다.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그중 두 형제는 유아기에 사망했다. 자유주의적이고 보수적인 부모의 설득에도 자녀 중 다섯 명은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장남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Aleksandr Ulyanov)는 대학 재학 중 나로드나야 볼랴(Narodnaya Volya)에 가입했는데, 암살 음모 혐의로 체포되어 1887년 차르 당국에 의해 처형당했다. 이 사건이 레닌이 사회주의에 관심을 두게 된 직접적인 동기였는지 모르겠지만, 그 후 2년 동안 지역 도서관을 뒤져 급진적인 서적을 찾다가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의 저작과 칼 맑스의 『자본』을 접하게 되었고, 곧 나로드냐와 맑스주의 연구 서클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은 제국 전역에 퍼져 있는 혁명 세포와 연구 서클이 정치적으로 이질적인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었다. 레닌은 특히 게오르기 플레하노프(Georgi Plekhanov)와 베라 자술리치(Vera Zasulich) 등이 주도한 '노동해방' 그룹의 맑스주의 사상에 매료되었다. 그는 1895년 노동계급 해방을 위한 투쟁 연맹을 설립했고, 곧 체포되었다.
감옥과 망명지에서 그는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나로드닉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 경제 문제를 연구했다(사회주의혁명당(SR)이 창당된 이후에도 계속 유지됨). 레닌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 러시아에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존재한다.
• 더 많은 수의 농민이 아닌 노동계급이 미래의 혁명에서 주도 세력이 될 것이다.
• 이 혁명은 사회주의(계급제 파괴를 목표로 한 자본가계급과의 투쟁)와 민주주의(정치적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절대주의와 투쟁) 과제를 모두 결합하게 될 것이다.
• 러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던 혁명가들은 이후 과제에 맞서기 위해 하나의 통합된 정당으로 뭉쳐야 했다.
사회주의 운동 통일을 레닌 홀로 추진한 것은 아니었으며, 1898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 제1차 대회가 민스크에서 열렸다. 그러나 경찰의 탄압과 내부 다툼으로 인해 새로운 RSDLP는 주로 이름만 존재했다. 레닌의 수정주의와 경제주의에 대한 비난, 이스크라를 중앙당 기관지로 만들려는 시도, 1902년 『무엇을 할 것인가』의 출판은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당시 레닌은 러시아에서 부상하는 계급 운동에 개입할 수 있는 정치적, 조직적 일관성을 갖춘 당을 건설하기 위해 직업 혁명가들로 구성된 고도로 중앙집권적인 조직을 주장했다. 이러한 당을 만들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레닌은 동맹 중 일부와 결별하게 되었고, 1903년 제2차 RSDLP 대회에서는 당원을 구성하는 요소에 대한 사소한 정의 차이로 인해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라는 두 당파가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1905년 혁명에서 드러난 실질적인 정치적 차이가 있었다.
레닌, 혁명적 국제주의자
1905년 사건은 정교회 사제에서 경찰 스파이로 변신한 가퐁 신부가 이끄는 노동자와 농민들의 평화 시위가 차르에게 탄원서를 제출하려는 의도로 별다른 생각 없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소총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 학살 사건은 러시아 제국 전역 대중의 분노를 일으켜 시위, 파업, 봉기, 그리고 노동자 평의회(소비에트)의 창설을 촉발했다. 1905년은 노동계급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조직에 불을 지피는 시기였다.
레닌은 1905년 혁명이 발발했을 때 망명 중이었지만, 1789년, 1848년, 1871년 혁명을 연구하며 통찰력을 얻기 위해 사건을 면밀히 추적했다. 그는 러시아 제국의 거리와 공장에서 볼셰비키 동지들에게 파업을 연장하고, 노동자들이 무장할 것을, 그리고 군인들이 정부에 대항할 것을 촉구했다. 차르가 두마(의회)의 설립과 언론 및 결사의 자유를 약속하는 10월 선언을 선포한 후 레닌은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는 이제 당이 새롭게 부상하는 노동계급 요소에 개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민주적 중앙집권주의를 기반으로 당을 변화시키기 위해 싸웠으며, 모든 상급 기관이 선거를 통해 선출되고 책임을 지며 소환될 수 있도록 했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는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같은 당이었지만, 두마 선거를 통해 분열의 깊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가 봉기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 수립을 요구했지만, 플레하노프와 파벨 악셀로드 같은 멘셰비키 지도자들은 바로 이때 입헌민주당이나 카데트(Kadets)와 같은 부르주아지의 진보적 요소와 의회 연정을 제안하고 있었다.
이 혁명적 열기의 시기에 볼셰비키는 역동적인 조직이 되었고, 1907년에는 4만 명이 넘는 당원을 확보했으며, 그중 대다수가 노동자였다. 레닌은 1902년 악명 높은 팸플릿에서 공식화한 전술이 정치적, 조직적 일관성의 토대를 마련했지만, 이제는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이야기했다. 차르가 모든 자유주의 개혁을 되돌리면서 촉발된 반(反)혁명 시기는 새로운 문제도 생겨났다. 많은 사람이 체포되어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의 세력이 약화하면서 분파주의가 더욱 심해졌다. 레닌은 다시 망명길에 올랐고, 그곳에서 당 조직(악셀로드와 멘셰비키 청산파 반대), 맑스주의 정통성(알렉산더 보그다노프와 볼셰비키 사이에서 맑스주의 영향력 반대), 민족의 자결권(폴란드, 독일, 러시아 당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그녀의 추종자 반대) 논쟁에 참여하게 된다.
러시아에서 점진적으로 부활하던 노동계급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혼란에 빠졌다. 레닌의 관심은 이제 국제무대로 옮겨져 제2 인터내셔널 붕괴와 배신의 원인을 파악하고 자본주의 제국주의 본질을 설명하고자 했다. 침머발트와 키엔탈에서 열린 회의에서 그는 전쟁에 반대하는 국제주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고, 혁명가들이 제3 인터내셔널로 재결집할 수 있도록 투쟁했다. 2월 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러시아로 돌아와 자신의 관점을 확신하게 되었다.
레닌은 러시아 제국 전역에서 다시 생겨나고 있는 소비에트가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을 가능하게 하고, 더 발전된 서구 혁명과 연대함으로써 사회주의를 의제로 삼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봉기해야 한다는 그의 요구는 처음에는 당내 일부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볼셰비키 대중은 이를 열렬히 받아들였다. 볼셰비키는 당원 수가 급증하여 당시 약 20만 명으로 늘어났고, '소비에트에 모든 권력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점차 운동 내 주요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다. 10월 혁명의 발발은 전 세계에 혁명의 물결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레닌, 정부의 수반
소란스러운 절차 끝에 「제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회의」는 권력 이양을 승인하고 새로운 중앙집행위원회(VTsIK)를 선출했으며, 중앙 집행위원회에 인민위원회(소브나르콤)를 구성하는 임무를 맡겼다. 레닌은 이 새로운 기구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볼셰비키는 러시아 코뮤니스트 당으로 재조직하고 제3 인터내셔널 창당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10월 이후 6개월 동안 소비에트 원칙은 러시아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노동자와 농민은 착취와 억압의 체제를 뒤집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례인 파리 코뮌은 72일 동안만 지속하다가 잔인하게 진압되었기 때문에 본받아야 할 청사진이 없었다. 그러나 초기의 혁명적 열정이 객관적 현실을 감출 수 없었다. 노동자들이 물려받은 러시아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 수년간의 전쟁과 혁명으로 경제는 엉망이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혁명이 실패하게 되면서 제국주의의 개입이 가시화되고 있었다.
1918년 3월에 체결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은 중요한 최초의 후퇴였다. 레닌은 페트로그라드 진격을 불과 몇 주 앞둔 독일군의 진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도 이 결정은 당내에서 광범위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소비에트 권력을 지지하는 좌파 사회혁명당(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소비에트 권력이 채택된 후에야 모당과 분열했다)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좌파 사회혁명당은 소브나르콤에서 철수하고 독일과의 전쟁 재개를 목표로 봉기를 일으켰다. 레닌의 팸플릿 「소비에트 정부의 당면 과제」는 다음과 같이 사고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러한 끔찍한 상황에 직면하여 이제 "움직이고, 후퇴하고, 기다리고, 천천히 건설하고, 무자비하게 닦달하고, 엄격하게 규율하고, 느슨함을 분쇄"하는 것이 과제로 떠올랐다. 1918년 8월, 레닌은 공장 대회에서 연설한 후 최근 해산된 제헌의회 지지자가 쏜 총에 맞았다. 레닌이 거의 죽을 뻔한 상황에서 소브나르콤은 '백색 테러'와 '적색 테러'에 맞서기로 했다.
독일과의 평화조약으로 인해 러시아혁명의 고립이 다른 곳의 혁명으로 해소될 때까지 '숨통'을 틔워줄 것이라는 희망은 얼마 가지 못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 북부에 대한 연합군의 개입, 콜차크(Kolchak), 랑겔(Wrangel), 데니킨(Denikin)의 백군 정복은 모두 길고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 이어졌다. 1920년까지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주요 내부 위협이 패배하면서 새로운 '평화 건설'에 대한 희망이 잠시 생겨났지만,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공세로 인해 또 다른 전쟁이 발발했다. 이 시기에 소비에트 러시아는 전직 차르 관리들이 이끄는 징집병으로 적군을 구성하고, 체카가 경쟁자 정치 세력을 탄압하고, 산업계에 1인 경영을 도입했으며, 농촌에 곡물 징수를 시행하는 등 포위망을 구축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한편 새로운 제3 인터내셔널은 러시아 외교의 이해관계에 의해 점점 더 지배되고 있었다. 러시아 밖에서 혁명이 실패하자 서방에서는 사회민주주의에, 동방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에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당 내부에서는 당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다양한 반대파가 등장했다(『코뮌주의자』, 민주적 중앙주의 그룹, 군부 반대파, 노동자 반대파, 노동자 그룹). 이에 대해 레닌은 혁명가는 전진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후퇴하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들의 제안 중 일부를 수용하려 했지만, 이러한 그룹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당 지도부의 일부 과잉 행동(보기: 노동의 군사화에 대한 트로츠키, 그루지야에 대한 스탈린)에도 반대했다. 결국, 엄청난 역경을 딛고 소비에트 러시아의 존립은 보장되었지만, 소비에트 성격을 점진적으로 상실하는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전쟁과 억압 상황은 노동자들의 민주주의를 약화했다. 지역 소비에트는 회의를 열지 않았고, 회의를 연다 해도 주로 위에서 내려온 결정에 고무도장을 찍는 수준이었다. 소브나르콤은 소비에트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기관이 아니라 소비에트 위에 군림하는 권력이 되었다. 1921년 크론슈타트 봉기는 이러한 부분의 증가로 인해 나타난 하나의 징후였다. 이 비극적인 진압 이후 레닌은 또 다른 필수적 후퇴로 간주하는 신경제정책(NEP)을 도입했다. 전쟁 경제를 시장에 개방하는 것은 수년간의 혼란으로 인한 경제적 혼란을 해결하고 노동계급 기반을 재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레닌의 마지막 저서에는 혁명의 진전 부족과 혁명이 만들어낸 제도의 부적절함에 대한 실망감이 담겨 있다. 그는 관료주의의 부패에 대한 대안으로 더 많은 노동자를 체제 운영에 참여시키기 위해 다양한 행정 개혁을 제안했다. 하지만 1922년 뇌졸중으로 두 차례 쓰러진 레닌은 전신이 마비되었다. 레닌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었던 국가 기관의 가택 연금에 가까운 강도 높은 감시 아래서 그는 비서에게 유언을 남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1923년 3월 세 번째 뇌졸중으로 활발한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1924년 1월 21일 혼수상태에 빠져 세상을 떠났다.
레닌주의
여기에 요약된 레닌의 전기는 혁명의 물결에 올라탔지만, 혁명이 무너지면서 함께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복잡한 그림을 그려낸다. 그가 어떻게 쓰러졌는지, 그리고 개인으로서 어떻게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는지는 러시아혁명이 관심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한 논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야기의 절반에 불과하다. 레닌이 사망할 무렵 소비에트 권력이 당 국가로 전환된 후, 누가 당을 이끌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싸움이 시작되었다.
전에는 '레닌주의'라는 용어가 구어체로 사용되었다면, 이제 스탈린의 『레닌주의의 기초』(1924)와 지노비예프의 『레닌주의 연구 입문』(1925) 같은 팸플릿에서 경쟁적으로 해석이 등장하면서 공식 이데올로기로 만들기 위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미 1923년 3월에는 당 안팎에서 '레닌주의'를 홍보하기 위해 카메네프가 이끄는 레닌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스탈린-지노비예프-카메네프 3인방은 이른바 '레닌 레비'를 통해 트로츠키에 대항하는 분파 투쟁에서 조종하기 쉬운 약 50만 명의 경험이 부족한 당원들을 당에 대거 끌어들였다. 1924년 레닌이 완전히 불참하게 되는 첫 번째 대회인 제3 인터내셔널 제5차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우익의 위험"과 "극좌의 일탈"에 맞서 "맑스-레닌주의"의 정신으로 제3 인터내셔널의 "볼셰비키화"를 요구했다. 트로츠키, 룩셈부르크, 아마데오 보르디가, 헤르만 호르터, 안톤 판네쿡과 같은 인물에 대해 「코뮤니스트당의 볼셰비키 화에 관한 테제」(1925)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정치 지도자들이 레닌주의에 가까울수록 레닌주의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에서 그들의 견해는 더 위험하다." 1926년 모스크바에 레닌 학교가 설립되어 전 세계의 당 간부들에게 '볼셰비키화' 기술을 가르쳤다.
"볼셰비키화는 ... 맑스-레닌주의(즉, 제국주의 시대와 프롤레타리아혁명 시대 맑스주의)가 마침내 이념적으로 승리했음을 의미한다 ... 레닌의 죽음은 러시아코뮤니스트당에서 그랬던 것처럼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모든 부문에서 맑스-레닌주의 이론의 선전에 큰 자극을 주어야 한다." (1924년 7월, '코민테른과 지부의 선전 활동에 관한 제5차 코민테른 대회 테제')
모스크바의 책략과 추방을 통해 제3 인터내셔널 정당들은 모스크바의 충실한 대변인으로 변모했다. 1928년 스탈린은 권력 투쟁에서 우위를 점했고, 5개년 계획 도입과 함께 그의 '일국 사회주의' 이론이 국가 정책이 되었다. 그는 1930년대 대숙청을 통해 자신의 정적과 옛 동맹들까지 물리적으로 제거하며 쿠데타를 성공시켰고, 그 중에는 옛 볼셰비키도 많았다. '맑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는 선전과 군사력을 통해 전 세계로 수출되었고, 특히 국가 통제, 집단화, 산업화가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는 저개발 지역(주로 중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후 모스크바 지배계급은 공식적으로 '탈 스탈린화'와 '레닌주의로의 회귀'를 통해 면죄부를 받으려 했지만, 중국과 알바니아 같은 곳에서는 이를 '수정주의'라고 비난했다. 어느 쪽이든, 동서양에서 공식적으로, 그 이후로 다양한 '인민 공화국'과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가 어떤 식으로든 레닌의 유산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러한 해석은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스탈린주의자와 마오주의자뿐만 아니라 많은 아나키스트와 평의회주의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요소다.
그러나 레닌의 러시아와 스탈린의 러시아를 항상 구별하는 경향이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추방된 트로츠키와 그의 추종자들이지만, 이들은 스탈린주의에서 테르미도르주의적 반동만 보았을 뿐 반(反)혁명은 보지 못했다. 덜 알려졌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의 선배들이다.
우리의 '레닌주의'와 그들의 레닌주의
우리의 경향은 종종 너무 '레닌주의적'이거나 충분히 '레닌주의적이지 않다'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오늘날 우리는 명확성보다는 혼란을 일으키는 이 딱지를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다. 혁명이 고립된 상황에서 레닌이 옹호한 타협은 레닌을 비방하는 자들과 그의 선배들이 '레닌주의'라는 이름으로 가장 간절히 호소하는 타협이다. 후자는 타협이 객관적 현실에 의해 강제될 수 있다는 사실과 타협을 출발점으로 삼는 정치 강령을 혼동한다.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나고 북부 이탈리아의 공장에서 계급투쟁이 되살아나던 시기에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을 설립한 우리 선배들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다르게 보았다.
"우리를 가장 매료시키고 우리의 사고를 자극하는 중요한 인물인 레닌은, 전술가 레닌이 아니라,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이끌면서 다가올 새로운 혁명적 물결에 대한 기대 속에서 사나운 적인 부르주아 세계의 함정 사이를 능숙하게 움직였던 전술가 레닌이다. 또한, 러시아에서 여전히 살아남은 자본주의 세력과의 타협, 즉 그가 항상 고통스러운 후퇴, 혁명의 행진에서 중단을 고려했던 기발하고 매우 위험한 편법인 신경제(NEP)의 레닌도 아니다. 레닌, 우리의 레닌, 오늘날의 레닌은 4월 테제와 10월 봉기의 레닌이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그를 기억하고 싶은 것은 이론가, 정치가, 지도자로서 그의 삶에서 바로 이 순간이다." (레닌 오기(Lenin Oggi), 프로메테오(Prometeo), 1944년 2월 1일)
"우리" 레닌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것은 또한 그의 경험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토대를 구축하는 요점을 보여준다.
• 당: 레닌은 계급투쟁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정치 조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볼셰비키는 종종 동질적이고 독단적인 정당으로 묘사해 왔지만, 이렇게 묘사된 당은 스탈린주의 신화다. 볼셰비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는 상황에 항상 대응하며 발전하였다.
• 소비에트: 이미 1905년에 레닌은 당과 소비에트가 다가오는 혁명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1917년에 이 개념을 더 발전시켰다. 레닌은 최선을 다해 소비에트를 "노동자 국가"로 만든 것이 이러한 소비에트 권력의 존재라는 것을 이해했다.
• 국제주의: 레닌은 사회주의 혁명의 국제적 의미를 이해하고, 노동자 운동 내에서 쇼비니즘, 민족주의, 사회애국주의 경향에 대항했다. 그는 자본주의가 새로운 제국주의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사회주의를 위한 혁명적 계급투쟁을 통해서만 제국주의 전쟁에 대항할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레닌은 영향력 있는 당 지도자가 되었지만, 결국 다른 사람들처럼 당의 일원이었다. 그는 비판에 직면했고, 때때로 자신이 소수임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1906년 볼셰비키에 가입한 젊은 투사 가브릴 미아스니코프(Gavril Miasnikov)는 창당부터 1921년까지 당 활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볼셰비키는 비판과 반(反)비판,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든 우상을 타도하라! 대회, 회의, 지방 또는 중앙위원회에서 비판을 허용했다. 오히려! 볼셰비키는 소수가 당 기구에 대항하여 글을 출판할 수 있는 포괄적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보호할 용기가 있었다. 따라서 모든 허풍, 모든 가십과 모든 추문에서 벗어나고 분명히 하기 위해 그것을 신념을 견지하는 투쟁에 부합하는 수준으로 배치하기 위해 투쟁을 강화하려고 했다. … 1905년과 1917년 사이에, 볼셰비키의 이러한 관행은 혹독한 세 번의 혁명 과정을 통과했다. 당의 내부 구조는 혁명에서 살아남은 세력에 제대로 계승되었고, 이것은 세계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승리로 이어졌다.” (미아스니코프, 1930년 최근의 속임수)
10월 혁명의 전제는 언제나 러시아 국경 밖에서 혁명을 비교적 빨리 확대하는 것이었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혁명 요새는 아래에서 보여주듯이 다른 곳의 노동계급에 영감을 주는 것 이상의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소비에트 권력은 관료제, 경찰, 정규 군대가 없는 새로운 유형의 국가다. ... 러시아에서는 거의 시작하지 않았고 잘못 시작되었다. ... 우리는 유럽 노동자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어떻게 지향하는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보여줘야 하며, 이를 통해 유럽 노동자들은 사회주의를 어떻게 달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러시아인들이 가치 있는 일을 시작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해야 하며, 러시아가 잘못하고 있다면 우리 유럽은 더 잘해야 한다. ... 우리는 유럽 노동자들이 그 길에 들어서면 그들을 도울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들은 우리가 하는 일을 하되 더 잘할 것이고, 무게 중심은 형식적인 관점에서 구체적인 조건으로 옮겨갈 것이다." (레닌, 1918년 3월 8일, 강령 검토 및 당명 변경에 관한 보고서)
러시아혁명의 비극은 이러한 도움이 절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코뮤니스트당, 제3 인터내셔널 그리고 소비에트 러시아는 스스로 점점 더 비상시적이고 임시방편적 성격의 정책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는 진정한 혁명 정당이 가능한 역사의 한계 내에서 기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기적을 이루어 낼 수는 없다. 세계대전으로 지친, 제국주의에 목이 졸리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에 배신당한, 고립된 땅에서 모범적이고 흠잡을 데 없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은 기적이 될 것이다. … 그런 점에서 그들의 혁명은 정치권력 정복과 사회주의 실현이라는 문제를 실질적으로 실행하면서,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선두에서 행진하고 끊임없이 역사적으로 공헌하였으며, 세계 전체 자본과 노동 사이의 균형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 러시아에서는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모든 곳의 미래는 "볼셰비즘"을 비껴갈 수 없다.” (룩셈부르크, 1918년 러시아혁명)
혁명 과정 퇴보의 씨앗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 1918년 3월까지 볼셰비키는 소브나르콤에서 대표되는 유일한 정당이었고, 그 다음 몇 년 동안 지역 소비에트가 공동화했지만, (때로는 선거의 게리맨더링을 통해) VTSIK에 대한 점점 더 많은 지배력을 확보했다. 사실상, 볼셰비키는 유일한 통치 정당이 되었고 점점 더 당과 국가의 구별이 사라졌다. 1922년에 레닌은 당 기구가 정부 기구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지만, 그가 제안한 개선책은 결국 실현되지 않았고 너무 늦었다. 단지 소비에트 권력 부활만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지만, 그것은 혁명 물결의 부활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정당화가 고안되었다(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계급 전체가 아니라 그 전위, 즉 당에 의해서만 행사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 트로츠키는 그 후에 소비에트를 '노동자 국가'로 만든 것은 국유화된 재산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한편, 내전 기간 정당 민주주의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지만, 1921년 3월 분파 금지령이 도입되었다고 해서 분파가 즉시 소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후 몇 년 동안 정치국과 당 사무국은 스스로 권력이 되어 당 대회와 중앙위원회의 권위를 약화했다. 이에 따라 권력은 본질적으로 스탈린과 그 분파의 손에 집중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미래의 인터내셔널은 기다리는 정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투쟁 과정에서 노동자평의회와 같은 집단적 권력기관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전체 노동계급이다. 인터내셔널은 더 광범위한 운동 지침이 되어야 하며, 이와 같은 의미에서 집단적 권력기관 내에서 목소리를 내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볼셰비키처럼 그 기관을 대신하거나 그 안에 녹아들 수는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 운명을 혁명적 보루에 묶어두는 것을 의미하며, 혁명적 보루가 자본주의 세력에 굴복하게 되면 세계 혁명운동의 구심점이 되는 것을 멈추게 된다.
오늘날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또 다른 논쟁은 레닌이 민족 자결권을 옹호했다는 이야기다. 이는 종종 추상적으로 민족 자결권을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민족 자결권이 반동적 목적에 부합한다고 판단하면 반대했으며,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억압 민족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피억압 민족이 분리 독립권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에 대한 평등권과 국제 노동계급 연대의 인정은 사실상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한 위선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피억압 민족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피억압 민족 노동자와 억압 민족 노동자의 단결과 통합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자국 부르주아지의 동맹자가 될 것이다." (레닌,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와 민족의 자결권』, 1915)
두 번째 조건은 이른바 많은 '레닌주의자'들이 종종 잊어버리는데, 이들은 타락한 제3 인터내셔널의 '통일 전선'과 '인민 전선' 개념을 받아들여 민족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본다. 우리는 레닌 시대부터 모든 민족 전쟁이 제국주의 경쟁과 필연적으로 얽혀 있다는 것을 보아왔다. 레닌이 제국주의 시대에도 민족 전쟁이 제국주의 전쟁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민족 전쟁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면, 자본주의 발전은 룩셈부르크와 그의 동지들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자유로운 제국주의 시대에는 더는 민족 전쟁이 있을 수 없다. 국익은 노동 대중을 속여 그들의 숙적인 제국주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만 작용할 뿐이다. ... 지배계급이 강대국들의 부속물이자 부속품에 불과한, 약소국들은 강대국들이 벌이는 제국주의 게임에서 졸에 불과하다. 그들도 노동 대중과 마찬가지로 전쟁 중에 도구로 악용되고 있으며, 전쟁이 끝난 후 자본주의 이익에 제물로 바쳐질 것이다." (룩셈부르크, 양자택일, 1916)
우리가 항상 반복하듯이, 러시아혁명은 모방할 모델이 아니라 배워야 할 하나의 교훈이다. 혁명이 결국 탄생시킨 당 국가는 오늘날까지 노동계급 운동이 회복하지 못한 유산을 남겼다. 그리고 반(反)혁명에 직면하여 레닌을 포함하여 혁명에 참여한 사람 중 그 진정성을 온전히 지켜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윤의 이해관계로 병든 지구에서 또다시 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지금, 레닌이 오늘날 남긴 최고의 유산은 그가 러시아 밖의 노동자와 혁명가들에 바랬던 바와 같이 미래 세대가 "더 잘 해 내는" 것이다.
다이즈바스(Dyjbas)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2023년 12월
<출처> 「혁명적 전망」 23호, 2024년 1월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4-01-21/lenin-and-leni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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