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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9호] 레닌의 4월 테제 對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 인민전선 Ⅳ

레닌의 4월 테제 對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 인민전선

양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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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사회주의혁명이 승리했다임시정부를 타도하고 소비에트의 단독 권력이 수립됐다. “러시아 인민에게는 아직 코뮌을 도입할 만큼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흔히 듣는 반론을 거슬러 코뮌이 도입된 것이다그러나 이것이 사회주의의 도입은 아니다구 볼셰비키를 비롯한 많은 반대자들이 그렇게 혐의를 씌었지만코뮌은 정치적 틀거리즉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이룩할 정치적 형태일 뿐그 자체로 아직 사회주의는 아니다코뮌을 도입하는 데는즉 전 국가권력을 소비에트의 수중으로 옮기는 데는 사회주의혁명가당치헤이제체레텔리스테클로프 등의 전술과 정책이 완전히 틀렸고 유해하다는 것을 모든 (또는 대다수의소비에트의 대의원 다수자가 명확히 인식하도록 참을성 있게 설명하고 조국방위주의 유행병과의 투쟁을 거치는 것으로 가능했지만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여전히 소농이 주민의 압도적 다수를 이루고 있는경제적으로 뒤떨어져 있는 러시아에서 직접적으로 사회주의의 도입을 목표로 할 마르크스주의자는 없다.

 

코뮌즉 노동자 · 농민 대표 소비에트는 경제적 현실 내에서도인민의 압도적 다수의 의식 내에서도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개혁은 그 어떤 것도 도입하지 않고, “도입할 의도도 없고또 도입해서도 안 된다.”

소농의 나라에서는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은 주민의 압도적 다수가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를 인식하지 못하는 한에서는 결코 사회주의의 도입을 목표로 할 수 없다.”(<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코뮌으로의 이행’ 요구가 사회주의의 도입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는 혐의에 맞서 레닌은 그렇지 않음을 누차 설명하고 논박해야 했다전쟁에서 벗어나고 토지를 농민의 손에 쥐어주고 식량 부족과 기근을 해결하고 임박한 붕괴에 맞서 싸우고 등등 실생활이 일정에 올려놓고 있는 긴박하고 사활적인 문제가 코뮌으로의 이행/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을 강제하고 있는 것이지사회주의의 도입을 목표로 해서가 아니다소농의 나라 러시아에서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없다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볼셰비키 모두가 인정해온 바다레닌도구 볼셰비키도 모두가 말이다그러나 그것이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없다고 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으로 권력을 옮기는 것도 할 수 없는가? ‘사회주의의 도입이라는 문제와 관계없이, “실생활이 일정에 올려놓고 있는 긴박하고 사활적인 문제들이 그것을 강제하고 모든 정세 조건이 그것을 지시하고 있는데 말이다더구나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를 만들어냄으로써 이미 세계적 규모로의 자본 전선의 돌파” 직전까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를 끌어당겼는데 말이다.

 

지금 세계의 교전국 중에 러시아 정도의 자유가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으며노동자 · 병사 · 농민 등 대표 소비에트와 같은 혁명적 대중조직이 있는 나라도 하나도 없다는 것따라서 인민의 진정한 다수자즉 노동자와 농민의 수중으로 전 국가권력의 이전을 이와 같이 용이하게이와 같이 평화적으로 이룩할 수 있는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전쟁을 끝장내는 것은 권력을 다른 계급에게로 이전시키는 것에 의해 비로소 가능한 것인데러시아는 이 지점을 향해 어느 나라보다도 가까이 가 있다.”(<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의 수중으로 권력을 이전하는 것 (즉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과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을 조금도 혼동할 일 없이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위 인용문에서 레닌이 러시아가 이 지점을 향해 어느 나라보다도 가까이 가 있다고 한 이 지점은 권력을 노동자계급에게로 이전시키는 것이지,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구 볼셰비키는 왜 권력 장악을 한사코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으로 간주하고자 하는가여기에 깔려 있는 가정은 이렇다설사 일시적으로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 하더라도 소농의 나라 러시아에서 그것이 유지될 수 있겠느냐결국은 농민을 건너뛰어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이 될 것이고이것은 모험주의적인 파리 코뮌처럼 패배로 끝나고 말 것이다이것이 권력 장악 반대에 깔려 있는 예측 시나리오다구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 시나리오에 대해 확고한 만큼이나 이러한 예측 시나리오에 대해서도 확고하다두 시나리오는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여기서 우리는 다시 러시아 혁명에 대한 레닌의 총괄적인 전략 규정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구 볼셰비키가 걸고 있는 혐의와는 달리결코 주관주의적이거나 모험주의적이지 않음을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그 전략 규정 말이다.

 

“1917년 23월의 러시아 혁명은 제국주의 전쟁의 내란으로의 전화의 출발점이었다이 혁명은 전쟁 종결로의 제1보를 내딛었다2즉 국가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인도하는 것만이 전쟁의 종결을 보장할 수 있다그것은 세계적 규모로의 전선 돌파”, 자본의 이익이라는 전선을 돌파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그리고 이 전선을 돌파함으로써만 프롤레타리아트는 인류를 전쟁의 참화로부터 구하고 평화의 축복을 인류에게 안겨줄 수 있다.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를 만들어냄으로써 이미 이러한 자본 전선의 돌파” 직전까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를 끌어당긴 것이다.”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러시아에서 국가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인도하는” 2의 혁명즉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은 세계적 규모로의 자본 전선 돌파즉 세계 사회주의혁명의 구성부분이자 그 출발점이다그리고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러한 전선의 돌파 직전까지 와 있다러시아에서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이 이와 같이 세계적 규모로의 자본 전선 돌파의 일환이자 그 출발점그 촉진자라면구 볼셰비키의 예측 시나리오는 그 전제부터 허물어진다러시아의 노동자권력은 유럽에서의 승리한 사회주의혁명의 원조를 통해 단지 유지만이 아니라 성공적인 사회주의 도입의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특히 농업 문제와 관련해서는농민이 자발적으로 시범 집단농장에 결합하도록 유도할 기계화된 농업 기반을선진 유럽의 노동자권력으로부터 제공받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이미 전쟁 전부터 모든 나라 사회주의자들이 인터내셔널 대회(바젤슈투트가르트)를 통해 전쟁이 야기하는 경제적 · 정치적 위기를 이용하여 자본주의 전복을 앞당긴다는 결의를 거듭 반복해서 해 왔다이 점에 비추어 볼 때 레닌이 러시아 혁명을 제국주의 세계전쟁의 결과로 인한 국제적 대격변 물결의 제1()로 본 것은전쟁 발발 이래 줄곧 노동운동 내 조국방위주의 · 사회배외주의와의 투쟁에 전력해 온 국제주의자로서 자연스런 것이며또한 발전하는 정세의 총체성을 담아낸 과학적인 정세인식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오히려 그렇게 보길 거부하고러시아 혁명을 세계적 규모로의 자본 전선 돌파와 관계없는 일국 혁명(‘특수 러시아적 혁명’)이라는 암묵적인 전제 하에 후진국’ 러시아에서 단계를 건너뛰는’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구 볼셰비키의 예측 시나리오야말로 죽은 공식에 매달려 있는, “자칭 과학적이지만 실제로는 아무 내용이 없는현학적인” 도그마다.

 

4월 테제로 촉발된 당내 투쟁이 최종적으로 정리되는 볼셰비키 당 7차 전국협의회(4월 24-29)에서 레닌은 현 정세에 관한 결의’ 내용의 일부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사태의 전개는다름 아닌 바로 제국주의 전쟁과 관련하여, 1912년 바젤 선언에서 전원일치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천명한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의 예측을 명확히 확인해주고 있다러시아 혁명 [2월 혁명]은 전쟁의 결과로 불가피하게 된 프롤레타리아 혁명들 가운데 첫 번째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최초 단계일 뿐이다모든 나라에서 자본계급에 대한 반란의 기운이 대중 속에서 성장하고 있고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으로 넘기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폐지시킴으로써만이 인류를 파멸로부터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해 가고 있다.”

 

레닌이 4월 테제에서 러시아 현 시기의 특수성은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자각과 조직화가 충분치 못해 권력을 부르주아지에게 넘겨준 혁명의 최초 단계로부터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층의 수중으로 권력을 넘기지 않으면 안 되는 혁명의 두 번째 단계로 이행하고 있다는 점이다라고 했을 때 여기서 혁명의 최초 단계라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전쟁의 결과로 불가피하게 된 프롤레타리아 혁명들 가운데 첫 번째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최초 단계를 뜻한다이것은 역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자각과 조직화가 충분했다면, “권력을 부르주아지에게 넘겨준” ‘단계’ 따위는 없었을 것이고처음부터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코뮌 국가 수립으로세계적 자본 전선 돌파의 출발점이 되었을 것임을 말해준다.

 

이 점에서 구 볼셰비키는 죽은 민주주의 독재’ 공식을 붙들고서러시아 혁명을 세계적 규모로의 사회주의를 위한 내란의 일환으로 위치 짓길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세계 교전국 각국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사회주의를 위한 내란으로 전화하라는 슬로건을 러시아에서 실행하길 처음부터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구 볼셰비키는 자본주의를 세계체제로 만들어놓은 제국주의 단계 이전의제국주의 세계전쟁 이전의말하자면 1905년 단계에 머물러 있다. <제국주의론이전의,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전술>>의 민주주의 독재 단계론에 고착되어 있다그럼으로써 러시아 혁명이 세계적 규모로의 자본 전선 돌파즉 세계 사회주의혁명의 첫 주자이자 출발점이 되는 것도러시아 혁명의 승리 자체도 모두 가로막고 있는 걸림돌, “고물보관소에나 수용해야 마땅한” 사회주의혁명의 걸림돌이 되어버린 것이다.

 

모든 발전을 비약적으로 가속화시키고 계급 모순을 극도로 첨예화시킴으로써 혁명 과정의 거대한 촉진자가 된 전쟁은 단순히 외부에서 끼어든 우연적인 요인이 아니다. “전쟁은 세계 자본주의의 반세기에 걸친 발전의 산물이자그 무수한 끈들과 연관들의 산물이다.” 이 전쟁은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단계의 산물로서제국주의가 우연이 아닌 것처럼 이 제국주의 전쟁도 정세의 우연이 아니다제국주의 전쟁이야말로 배우들의 역할 및 위치와 무대 배치를 지휘하는, “세계사의 속도를 비상하게 높이고 역사의 방향을 순식간에 트는 전능한 무대감독이다.(<먼 곳에서 보낸 편지>) 임시정부가 인민의 전쟁 종결 염원을 무시하고 전쟁 계속을 감행하여 평화도빵도토지도인민이 요구하는 그 어느 것도 줄 수 없는 것은 ㅡ 따라서 제2의 혁명을 불가피하게 만든 것은 ㅡ 임시정부 각료들이 특별히 더 배외주의적이거나 주전파라서가 아니라임시정부가 맺고 있는 러시아 · 영국 ·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금융자본과의 커넥션” 때문이며그러한 제국주의 자본의 이익을 보호해야 하는 제국주의 정부이기 때문이다.

 

닥쳐온 완전한 경제적 해체와 기근에 맞서 싸우기 위해 긴급히 필요한 즉각적인 혁명적 방책들”, 즉 생산과 분배에 대한 통제 도입은행과 자본가 신디케이트에 대한 즉각적인 통제와 국유화 같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이행기 프로그램’(넉 달 뒤에 <<임박한 파국그것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서 체계적으로 제시될)을 실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도따라서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을 강제하는 것도 모두 전능한 무대감독인 제국주의 전쟁의 결과로 나온 문제들 때문이다.

 

토지의 국유화모든 은행과 자본가 신디케이트의 국유화아니면 적어도 그것들에 대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의 즉각적인 통제 실시 등과 같은 조치는 결코 사회주의의 도입은 아니지만무조건적으로 주장해야 하며가능한 한 혁명적 방법으로 실행되어야 한다이들 방책은 사회주의로 가는 몇 걸음에 지나지 않으며경제적으로 완전히 실행 가능한 것이지만이들 방책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전쟁으로 입은 상처를 치유하고 닥쳐온 붕괴를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그리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은 다름 아닌 전쟁 덕에’ 특히 괘씸한 방식으로 이익을 보고 있는 자본가와 은행가의 전대미문의 높은 이윤에 손대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전쟁은 한편으로 자본의 집적과 국제화를 가속화시키고 독점 자본주의를 국가독점 자본주의로 전화시킴으로써 사회주의혁명의 객관적 조건이 엄청난 속도로 성숙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레닌은 위에서 언급한 볼셰비키 당 7차 전국협의회에서 현 정세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현 정세에 관한 결의에서 러시아의 조건만 말하는 것은 틀렸다우리가 국제적 제관계의 총체를 무시한다면 크나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될 정도로 전쟁은 우리를 분리할 수 없게 한 데 묶어버렸다.

전 세계 운동이 사회혁명의 문제를 제기할 시에는 어떠한 과제들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 앞에 놓이게 될 것인가이것이 결의에서 다루어진 주된 질문이다.

보다 발달한 선진국들에서는 이미 전쟁 전에도 의심할 바 없이 존재한 사회주의혁명의 객관적 조건이 전쟁의 결과로 엄청난 속도로 성숙해졌다중소기업들은 어느 때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밀려나서 파산하고 있다자본의 집적과 국제화가 거대하게 진전되고 있다독점 자본주의는 국가독점 자본주의로 발전하고 있다많은 나라들에서 사회에 의한 생산 · 분배 통제가 도입되고 있다몇몇 나라는 보편적 노동 징집제를 도입하고 있다전쟁 전에는 트러스트와 신디케이트의 독점이었는데전쟁 이후 국가독점이 형성되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7차 (4전국협의회>)

 

전쟁의 결과로 형성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이러한 조건이 소농의 나라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걸음들을 내딛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또한 내딛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리고 러시아가 사회주의에 한 발을 걸칠” 수 있게 해주는 물질적 전제다또 러시아에서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이 세계적 규모로의 자본 전선 돌파의 출발점으로 되게 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조건이다세계사회주의혁명 전략을 전제하지 않는한 나라의 조건만을 논하는 그 어떤 일국혁명 전략도 구체성과 현실성을 담보할 수 없게 되었다제국주의 세계체제와 제국주의 세계전쟁이 후진국 러시아에서도 혁명을 민주주의적 단계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전진하여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갈 것인가아니면 후퇴하여 제국주의 전쟁 계속과 반혁명으로 학살되어버릴 것인가.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볼 때제국주의에 대해 말하면서 한 나라의 조건만을 논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그 이유는 자본주의 나라들이 상호 아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지금의 전시 하에서 이 결합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강화되어 있다전 인류는 한 줄의 피투성이로 된 실구슬로 엮여 있기 때문에 어떤 민족도 단독으로 빠져나올 수는 없다선진국이 있으면 후진국이 있듯이현 전쟁은 그들 모든 국가들을 많은 실로 엮어버렸기 때문에 일국 단독으로 그곳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지금 다른 모든 국가들과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 실구슬로부터 빠져나올 수가 없다..... 즉 프롤레타리아트 전체가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오든가 그렇지 않으면 학살되어 버리든가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7차 (4전국협의회>)

 

독일과 러시아이 양국에서 국가의 전 권력이 완전히남김없이 노동자 · 병사 대표 소비에트의 수중으로 이양된다면전 인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것인데왜냐하면 그 때는 전쟁의 가장 신속한 종결이모든 나라 국민들 간의 가장 영속적인진정으로 민주주의적인 평화가 실제로 보장될 것이고그와 함께 모든 나라의 사회주의로의 이행도 보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7차 (4전국협의회>)

 

마지막으로 레닌은 권고한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라는 죽은 공식에 매달려 민주주의 혁명을 최후까지 수행한다는 구 볼셰비즘의 집착을 떨쳐버리자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첫 주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우리는 세계를 개조하고자 나서고 있는 것이다우리는 수억 명의 사람을 끌어들인그리고 수천억수조 규모의 자본의 이익이 얽혀 있는 제국주의 세계전쟁을 끝장내고자 하고 있다인류 역사상 최대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하지 않고는.... 끝날 수 없는 이 전쟁에우리는 종지부를 찍고자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다우리는 익숙하고 그리운”, 더러워진 셔츠에 집착하고 있다더러워진 셔츠는 이제 벗어던지고깨끗한 속옷을 입어야 할 때다.”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 * *

 

구 볼셰비즘의 문제는 단순한 일시적인’ 전술 차이가 아니라 이와 같인 근본적인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위에서 우리가 보았듯이레닌이 지금의 관건적인 임무라고 말한노동자 · 병사 대표 소비에트로 실현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 내부의 분립은 혁명의 발전과 승리에 있어 말 그대로 관건이었다. “프롤레타리아적 분자 (조국방위주의에 반대하고 코뮌으로의 이행에 찬성하는 국제주의적, ‘공산주의적’ 분자)와 소부르주아적 분자 (코뮌으로 나아가는 것에 반대하고 부르주아지와 부르주아 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에 서 있는 치헤이제체레텔리스테클로프사회주의혁명가당그리고 그 밖의 혁명적 조국방위주의자들)를 분리시키는 임무” 없이는이 관건적인 임무가 선결되지 않고서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10월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가는 것도 다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여기서 구 볼셰비키는 어떻게 했는가? “지금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만을 말하며 코뮌으로 나아가는 것에 반대하는 구 볼셰비키는 마찬가지로 이 관건적 임무에 대해서도 반대했다그 생활에 뒤쳐진” 노선그 죽은 공식으로부터 나오는 논리적 귀결이었다이것은 적어도 해당 국면에서는위의 소부르주아적 분자와 다를 바 없는 위치즉 코뮌으로 나아가는 것에 반대하고 부르주아지와 부르주아 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에 서 있는 치헤이제체레텔리스테클로프사회주의혁명가당그리고 그 밖의 혁명적 조국방위주의자들과 같은 인민전선에 서 있는 것이었다레닌이 규정한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반대하여 소부르주아지 쪽으로 넘어간 사람이다.

 

이와 같이 레닌의 4월 테제 대() “구 볼셰비즘” 간의 이 시기 당내 투쟁은 러시아 혁명의 진로와 명운을 가르는 투쟁이었다. 10월 사회주의혁명으로 갈 것인가아니면 이 길을 가로막고 제국주의 전쟁으로 계속 나아가 결국 반혁명에 길을 내줄 것인가다행히 4월 테제가 당의 노선으로 정리되면서 구 볼셰비즘은 고물보관소로 영구 수용되고 마침내 10월 혁명이라는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었지만,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반대하여 소부르주아지 쪽으로 넘어가 부르주아지와 함께 공동의’ 전선에 서는 인민전선 노선은 18년 뒤 스탈린이 당과 코민테른 내 좌익반대파 숙청을 완성한 직후 화려한 부활을 맞는다.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인민전선이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총노선으로 등극한 것이다파시즘을 금융자본의 가장 배외주의적이고 가장 군국주의적인 분파의 테러 독재라고 규정하여, ‘그 이외의’ 금융자본 분파들그 이외의 부르주아와는 히틀러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에 함께 해야 한다며영 · 불 연합국의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와 동맹을 맺었다그리고 영국프랑스미국 등 각국에서 반파쇼 인민전선” 이름으로 공산당이 국의 제국주의 지배계급을 지지하고부르주아지 · 소부르주아지와의 인민전선 협정을 지키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억제하는 데 앞장섰다실제로 1936년 프랑스 공장점거 파업물결에서그리고 스페인 혁명에서 인민전선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반대하는 계급협조 체제를 통해 노동자 투쟁과 나아가 노동자권력의 맹아를 파괴하는 반혁명적 노선으로서의 면모를 실물적으로 보여주었다. (이후 그리스에서한반도에서나아가 인도네시아에서칠레에서오늘날 남아공에 이르기까지 인민전선은 민주주의혁명 단계론과 한 세트를 이뤄 계급투쟁과 노동자혁명에 재앙적인 노선이 되어 왔다는 것은 여기서 다 상술할 수 없다.)

 

임시정부와 전쟁에 대한 태도, “혁명적 조국방위주의에 대한 태도소비에트에 대한 방침소부르주아 민주주의 파와 농민에 대한 태도 등 모든 전술 문제에서의 차이는 인민전선 노선의 이러한 역사적 궤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혁명의 성격전략 목표세계 사회주의혁명과의 연관 등 근본적인 전략 규정의 차이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었다.

나아가 이러한 전략 규정의 차이를 가져온 근저에는전쟁 발발 이후 레닌이 발전시켜온 제국주의 이론과 코뮌국가론 (파리 코뮌의 경험에 기초해 새롭게 정립된 마르크스 · 엥겔스 국가 이론의 재발견이라고 그가 말한)을 구 볼셰비키가 수용공유하는 데 실패한 문제가 또한 놓여 있었다. “세계적 규모로의 자본 전선 돌파”, 즉 제국주의 세계 사슬 돌파와 분리된 일국혁명 전략과새로운 국가 유형으로서의 소비에트의 의의를 부인하고 코뮌으로의 이행을 가로막은 민주주의’ 독재 단계론에 대한 집착은 명백히 이러한 실패와 관련이 있다. (레닌이 4월 테제 속에서 제국주의 문제와 코뮌국가 문제를 당 강령 개정안에 포함할 것을 제안한 이유도 이러한 중대한 차이를 감지하여낡고 생활에 뒤쳐져” 걸림돌이 된 공식과의 단절 · 쇄신을 명문화하고 당의 강령 · 전술적 재무장을 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망명지 스위스에서 레닌은 2월 혁명이 제기하게 될 문제들과 이론적 고투를 벌이고 있었고그에 대한 강령 · 전술적 답을 정식화하고 있었다특히 코뮌국가론의 경우그의 <<국가론 노트>>에서 보듯이 레닌이 2월 혁명 직전까지도 붙들고 씨름하고 있던 주제로서 자신의 이전 규정과의 명시적인 단절을 보여준다. 1905년의 <<민주주의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전술>>에서 레닌은 파리 코뮌을 당시에 민주주의 혁명의 요소와 사회주의 혁명의 요소를 구별하지 못했고또 구별할 수 없었던 정부공화제를 위해 투쟁하는 임무와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임무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한 정부라고 평가하며, “‘혁명적 코뮌’ 슬로건은 틀렸는데왜냐하면 역사에 알려진코뮌이 범한 바로 그 과오라는 것이 다름 아니라 민주주의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과 혼동한 점이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었다이러한 평가는위에서 우리가 본 1917년의 평가즉 새로운 국가 유형으로서의 코뮌의 의의에 대한 레닌의 적극적인 평가와는 명백히 다른 것이다. 4월 테제 논쟁 석 달 뒤에 발표되는 <<국가와 혁명>>(미처 완성 못한 <<국가론 노트>>를 이 때 완성한 것)에서는 이러한 적극적인 평가가 체계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파리코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분쇄하고자 한 첫 시도다또한 분쇄된 국가기구를 대체할 수 있고또 대체해야만 하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적 형태다.” 그리고,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파리 코뮌의 사업을 다른 상황에서다른 조건 하에서 계속하고 있고마르크스의 빛나는 역사적 분석을 확증해주고 있다.” 1917년뿐만 아니라 1905년에 대해서도 코뮌을 말하고 있다이제 레닌은 거슬러 올라가이러한 코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1905년 혁명에 투영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현재 혁명의 성과를 지키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평화자유를 쟁취하고자 한다면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기존의” 국가기구를 분쇄하고그것을 새로운 국가기구로 대체해야 ㅡ 경찰력군대관료를 무장한 전체 인민에 융합시킴으로써 ㅡ 한다. 1871년 파리 코뮌과 1905년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프롤레타리아트는 주민 가운데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모든 층을 조직하고 무장시켜야 한다이들 자신이 국가권력 기관을 직접 자기 손에 장악하도록이 국가권력 기관을 이들 자신이 구성하도록 말이다.” (<먼 곳에서 보낸 편지중 세 번째 편지’)

 

구 볼셰비키가 이미 죽은 민주주의 독재라는 1905년 공식을 1917년에 투영하여 코뮌국가를 단계를 건너뛰는’ 것이라며 반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레닌은 “1905년 혁명의 경험이 가리키는” 코뮌국가의 길이야말로 1917년 혁명이 따라야 할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이와 같은 코뮌국가 대 민주주의 독재의 대립구도는 레닌의 4월 테제와 구 볼셰비즘 간의 차이가 일시적인’ 전술 차이의 문제가 아님을 확인해주는 또 하나의 지점이다레닌은 코뮌의 재발견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관점도 코뮌의 시각에서 재정립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민주주의는 국가의 일 형태다그런데 우리 마르크스주의자는 모든 종류의 국가에 반대한다. [궁극적으로 국가 사멸론의 입장에서 반대’]... 마르크스주의가 아나키즘과 다른 것은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데 국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점에 있다그러나 통상적인 의회제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 유형의 국가가 아니라1871년의 파리 코뮌 같은, 1905년과 1917년의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같은 국가가 필요하다.

실생활은혁명은 이미 실제로 우리나라에 — 허약하고 맹아적인 형태로지만 — 바로 이 새로운 유형의본래 의미에서의 국가가 아닌 국가를 만들어냈다....

본래의 의미에서의 국가란 인민으로부터 분리한 무장한 인간 부대가 대중을 지배하는 것이다.

태어나려 하고 있는 우리의 새로운 국가 역시 하나의 국가인데왜냐하면 우리에게도 무장한 인간 부대가 필요하며가장 엄격한 질서가 필요하며차리즘 반혁명이든구치코프-부르주아 반혁명이든 모든 반혁명 기도를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어나려 하고 있는 우리의 새로운 국가는 더 이상 본래의 의미에서의 국가가 아닌데, 왜냐하면 러시아의 많은 지점에서 이 무장한 인간 부대를 이루고 있는 것은 대중 자신, 인민 전체이지인민 위에 서 있는인민으로부터 분리한실제상 소환 불가능한 특권적 인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을 내다봐야지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즉 낡은 군주제적 통치기관 — 경찰군대관료 — 에 의해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강화시킨 통상적인 부르주아 형()의 민주주의 쪽이 아니라앞을전방을 보아야 한다.

태어나려 하고 있는이미 민주주의이기를 그치고 있는 — 민주주의란 인민의 지배인데무장한 인민 자신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 새로운 민주주의 쪽을 보아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말은..... 1917년 3월을 거친 오늘에는혁명적 인민의 눈을 가려그들이 새로운 것 — 즉 국가’ 내의 유일 권력이자국가 일체의 사멸을 예고하는 전령으로서의 노동자 · 농민 등 대표 소비에트 — 을 자유롭게대담하게자신의 주도로 건설하는 것을 방해하는 눈가리개가 되고 있다.”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레닌이 당명 개정을 제안하면서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코뮌이즘)로 우리 이름을 대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한 배경에도 국가 일체의 사멸을 예고하는 전령으로서의” 코뮌의 시각에서 바라본이러한 눈가리개로서의 민주주의라는 인식이 깊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닌 사후특히 인민전선이 총노선으로 등극한 코민테른 7차 대회 이후 공산당들의 전략·전술 어휘에서 코뮌은 사라지고 민주주의 인민전선’, ‘반파쇼 민주주의’, ‘인민 민주주의’, ‘반독점 민주주의’, ‘민주대연합’ 등 온통 민주주의’ 판이 된다레닌이 경고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반대하여 소부르주아지 쪽으로 넘어간 사람들이 새 옷으로 위장하고 변신 부활에 성공했다. 1917년 4월에 레닌의 투쟁은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았다혁명의 승리를 위해 레닌이 당내로부터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극복해야 했던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 인민전선주의는 오늘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진정한 공산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데서 마주하는 최악의 내부 걸림돌이다.

 

<편집자 주>

이 글은 본지의 요청으로 싣게 된 소중한 기고 글로 국제코뮤니스전망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전 글>

레닌의 4월 테제 對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 인민전선 Ⅰ,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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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4월 테제 對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 인민전선 Ⅲ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7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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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9호] 레닌의 4월 테제 對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 인민전선 Ⅲ

레닌의 4월 테제 對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 인민전선

양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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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테제>의 전술에 관해 설명하는 두 번째 편지인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에서 레닌은 러시아 혁명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1917년 23월의 러시아 혁명은 제국주의 전쟁의 내란으로의 전화의 출발점이었다이 혁명은 전쟁 종결로의 제1보를 내딛었다2즉 국가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인도하는 것만이 전쟁의 종결을 보장할 수 있다그것은 세계적 규모로의 전선 돌파”, 자본의 이익이라는 전선을 돌파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그리고 이 전선을 돌파함으로써만 프롤레타리아트는 인류를 전쟁의 참화로부터 구하고 평화의 축복을 인류에게 안겨줄 수 있다.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를 만들어냄으로써 이미 이러한 자본 전선의 돌파” 직전까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를 끌어당긴 것이다.”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여기에 레닌의 총괄적인 전략 규정이 있다2의 혁명으로즉 국가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인도하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해야 한다이것이 제국주의 전쟁의 내란으로의 전화의 완료로서전쟁의 종결을 보장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은 인류를 전쟁의 참화로부터 구할 세계 사회주의혁명의 첫 주자가 될 것이다.)

이 점은 앞서 4월 테제에서 이렇게 표현되었다.

 

러시아 현 시기의 특수성은....혁명의 최초 단계로부터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의 수중으로 권력을 넘기지 않으면 안 되는 혁명의 두 번째 단계로 이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행의 전략 규정은 주관주의적인 것이 아닌가구 볼셰비키의 비판처럼, “이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을 직접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공상적인 도식을 그리는 것이 아닌가그렇지 않다레닌의 전략 규정의 전제는 지금 러시아에 존재하고 있는 코뮌 형 국가즉 노동자 · 병사 · 농업노동자 · 농민 대표 소비에트다첫 번째 혁명이 만들어낸 (그리고 명백히 인민 다수의 직접적인 조직이 소비에트가 이행의 객관적 근거이자 물질적 담보다소비에트는 계급들의 상호관계라는 측면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를 구현하고 있지만국가 유형으로는 이미 민주주의 독재를 넘어선, “경찰군대관료 등 억압기구를 분쇄해서 없애버린” 코뮌국가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맹아다.

 

소비에트는 국가의 새로운 형태보다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유형이. “우리 혁명 속에서 성장해나가고 있는 새로운 유형의 국가.

의회 부르주아 공화제에서 군주제로 되돌아가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아주 쉽다군대경찰관료 등 억압 기구 전체를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두기 때문이다코뮌과 노동자 · 병사 · 농민 등 대표 소비에트는 이 기구를 분쇄해서 없애버린다.”

노동자 · 병사 소비에트는 파리 코뮌이 만들어낸그리고 마르크스가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이룩할 마침내 발견된 정치적 형태라고 이름 붙인 국가 유형을 재현하고 있다.”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노동자권력의 정치적 틀거리로서 코뮌 형 국가의 기초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또 <이중권력>에서는 이 점을 좀 더 상세히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혁명에 대해 서로에게 천 번이고 축하를 보내지만노동자 · 병사 대표 소비에트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이들 소비에트가 존재하고 있는 한에서그것들이 하나의 권력인 한에서 러시아에는 파리 코뮌 형의 국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명백한 진실을그들은 보려 하지 않는다.

나는 한에서라는 단어를 강조했는데왜냐하면 그것은 맹아적인 권력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이 권력은 부르주아 임시정부와의 직접적인 협정에 의해그리고 일련의 사실상 양보에 의해 스스로 부르주아지에게 진지를 내주었고지금도 내주고 있다.

왜인가?.... 원인은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자각과 조직화가 불충분한 것에 있다.”

 

2월 봉기를 주도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소비에트를 만들어 군대경찰관료 등 억압 기구 전체를 분쇄해서 없애버리(적어도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는권력을 쥐었지만, “계급적 자각과 조직화가 충분치 못해 권력을 부르주아지에게 넘겨준” 것이다그러므로 지금 존재하고 있는 소비에트로 모든 권력을 이양하는 것,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의 수중으로 권력을 넘기는 것을 혁명 발전의 일반적인 전략 목표로 규정하는 것은 결코 주관주의적인머릿속에서 그려낸 전략 구상이 아니다레닌의 이러한 소비에트 권력’(“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요구를예를 들어 영구혁명론을 처음 정식화한 파르부스의 차르 반대노동자 정부!” 슬로건과 비교해 보라소비에트 같은 인민적 권력 근거를 전제하지 않음으로써 소수자에 의한 권력 탈취 요구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 슬로건은 확실히 주관주의적 위험또는 블랑키주의적 모험주의를 내포하고 있다그러나 이와는 달리레닌의 소비에트 권력’/ ‘코뮌국가’ 요구는 명백히 노동자 · 농업노동자 · 병사 · 농민 대표 소비에트에 근거를 두고 있고따라서 다수자를 건너뛰지 않는, “다수자의 직접적이고 무조건적인 지배와 대중의 활동성을 완전하게 보증하는즉 이러한 대표 소비에트 내부에서 영향력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으로 귀착되는 요구다.

 

이와 같이권력을 임시정부에 양도하는 바람에 현재 맹아적인 국가권력으로 머물렀지만그 유형에서는 이미 파리코뮌 형 국가(“인민으로부터 분리된 군대와 경찰을 인민 자신의 직접 무장으로 대체하는 국가”)인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의 존재가 바로 이행의 물질적 담보다.

 

 

생활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독재를부르주아지의 독재와 서로 얽히게 했다다음 단계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지만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는 아직 충분히 조직되고 각성되어 있지 못하다프롤레타리아트를 각성시키는 것이 필요하다전국에 걸쳐서 이러한 대표 소비에트가 필요하며이것은 생활의 요구다이 이외의 길은 없다이것이 바로 파리 코뮌이다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는 부르주아지가 바라는 것과 같은 노동조합 조직이 아니다인민은 그것을 다르게그리고 보다 정확하게 보고 있다인민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를 통치권력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인민은전쟁에서 벗어나는 길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의 승리에 있다고 보고 있다바로 이것이 그 아래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한 국가 유형이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그렇다면이제 그러한 맹아적인 통치권력을 본연의 통치권력으로 성장 전화시키기 위해 남는 것은 충분한 계급적 자각과 조직화라는 과제다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임시정부와 뒤얽혀서 그 부속물이 되고 있는 소비에트를임시정부를 타도/대체하는 소비에트로 탈바꿈시켜낼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계급적 자각과 조직화를 소비에트 대중 속에서 이루어내는 과제다노동자 · 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맹아’ 딱지를 떼고 실제 노동자권력으로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이행하기 위해 지금 충족시켜야 할 이 과제는 어떠한 구체적 정세를 매개로 하여어떠한 전술적 임무로 제기되는가?

 

지금 일정에 올라 있는 것은 이제 별개의 새로운 임무다이 독재 [노동자 · 병사 대표 소비에트로 실현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 내부의 분립즉 프롤레타리아적 분자 (조국방위주의에 반대하고 코뮌으로의 이행에 찬성하는 국제주의적, ‘공산주의적’ 분자)와 소경영주적 또는 소부르주아적 분자 (코뮌으로 나아가는 것에 반대하고 부르주아지와 부르주아 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에 서 있는 치헤이제체레텔리스테클로프사회주의혁명가당그리고 그 밖의 혁명적 조국방위주의자들)를 분리시키는 임무다.

지금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만을 말하는 사람은 생활에 뒤처진 사람이며그 결과로 사실상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반대하여 소부르주아지 쪽으로 넘어간 사람이다그런 사람들은 혁명 전 볼셰비키” 고물보관소 (“구 볼셰비키” 보관소라 불러도 무방하다)에나 수용해야 마땅하다.” (<전술에 관한 편지>)

 

구 볼셰비즘을 버려야 한다소부르주아지의 방침과 임노동 프롤레타리아트의 방침을 분별 하는 것이 필요하다혁명적 인민이라는 문구는 케렌스키에게는 어울리지만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차르 니콜라이가 정리되어 버린 오늘에는혁명가라는 것은아니 민주주의자라는 것조차도 대수로울 게 없다. ‘혁명적 민주주의 파는 아무 쓸모도 없다그것은 공문구다그것은 계급 이해관계의 모순들을 덮어 가리기나 하지들춰내지 않는다볼셰비키는 노동자와 농민을 이들 모순의 존재에 눈뜨게 해야 하지그것을 얼버무려서는 안 된다.”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와 소부르주아지를 분별해야 하며, “혁명적 민주주의 파라든가, “혁명적 인민이라든가 하는 말들은 케렌스키에게 줘버려야 한다러시아의 민주주의 파는 제국주의자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소비에트 내에서 혁명적 인민이라는 문구 하에 소경영주 · 소부르주아지와 임노동 프롤레타리아트 간 계급 이해관계의 모순이 덮어 가려지고 있다부유한 농민은 제국주의 약탈 전쟁으로 이익을 볼 수 있다고 여겨 임시정부의 전쟁 계속 결정과 러시아 제국주의를 지지하고 조국방위주의에 찬성한다빈농(농민층의 다수를 이루는 반[]프롤레타리아)과 프롤레타리아트(농업노동자 포함)에게 이 전쟁은 불필요하며그들의 계급 이익과 이 전쟁은 양립할 수 없다계급적 자각과 조직화의 미비라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비에트 대중을 바로 이러한 계급 이해관계의 모순에 눈 뜨게 해야 한다. ‘혁명적 민주주의 파라는 이름으로대중의 눈에 한 묶음으로 처리되고 있는 국제주의자 · 공산주의자와 조국방위주의자 ·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 · 사회제국주의자를 분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구 볼셰비키를 자칭하는 우리의 동지들까지도” 이러한 분리분별시키는 임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지금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만을 말하, “그 결과로 사실상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반대하여 소부르주아지 쪽으로 넘어가고 있다. “우리의 동지들까지도”, ‘단계를 건너뛰어 이 혁명을 직접적으로 사회주의혁명으로 전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거냐며 계급 이해관계의 모순에 눈뜨게 하는 임무를 망각하고 혁명적 민주주의 파의 간판 뒤에 숨고자 한다.

 

여기서 이러한 분리분별시키는 임무가 제기되는 구체적 정세계급 제세력의 배치관계를 레닌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좀 더 살펴보자.

 

부르주아지는 부르주아지의 단독 권력에 찬성한다.

계급적으로 각성한 노동자는 노동자 · 농업노동자 · 농민 · 병사 대표 소비에트의 단독 권력에 一 모험주의적 행동에 의해서가 아니라프롤레타리아적 의식을 명료하게 하고 그것을 부르주아지의 영향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가능해지는 단독 권력에 一 찬성한다.

소부르주아지 一 사회민주주의자”, 사회주의혁명가당 등등 一 는 동요하며그와 같이 동요하는 것에 의해 이 명료화와 해방을 방해하고 있다.

이상이 우리의 임무를 규정하고 있는 현실의 계급적 세력관계다.” (<이중권력>)

 

현 시기 평가에서 레닌은, 2월 혁명이 모순을 일정 해결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모순계급 제세력의 새로운 배치관계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구 볼셰비키를 비판한다.

 

카메네프 동지의 오류는 1917년에 이르러서도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의 과거만을 본다는 점이다그러나 실제로는 이미 그 미래는 시작되었다왜냐하면 임금노동자와 소경영주의 이해관계와 정책은 현실에서 이미 엇갈려 버렸기 때문이다. ‘조국방위주의’ 문제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태도 문제 같은 극히 중요한 문제들에서도 이해관계와 정책을 완전히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전술에 관한 편지>)

 

우리가 1905년에 말한 것을 지금 반복해서 말하고농촌에서의 계급투쟁 [부농 대 빈농 · 농업노동자 간의]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은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에 대한 배반이다.

지금도 벌써 우리는 토지 문제의 해결을 제헌의회 소집 시까지 기다리려는 경향을 수많은 농민대회의 결정 속에서 발견하는데이것은 카데츠 쪽으로 기울고 있는 부유한 농민의 승리다.”

우리의 임무는 이 소부르주아적 수렁으로부터 계급적 방침을 떼어내는 것이다.”

소부르주아지는 완전히 그들에게 굴복했다만약 우리가 프롤레타리아적 방침을 떼어내지 않는다면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를 배반하는 것이 될 것이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가 기본 슬로건이었던 1905년과 비교하여 1917년 지금의 정세 조건은 어떻게 다른가?

 

혁명을 최후까지 수행한다는 낡은 표현그러나 어떤 혁명을? 1905년의 객관적 정세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이 유일한 혁명적 분자였던 반면.... 오늘의 조국방위주의는 농민이 소부르주아 전술로 넘어간 것이다이러한 상황에서 [민주주의혁명을 최후까지 수행한다는 것은 의미를 잃었다.”

볼셰비즘 정치로부터 새로운 방침이 태어나고 있다소부르주아지와 대부르주아지가 결합했다우리는 제계급의 이익의 상충을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농업노동자 농민과 소유자 농민은 서로 다른 입장이다전자는 제국주의 전쟁에 틀림없이 반대다후자는 조국방위주의에 찬성이다.

조국방위주의는 소부르주아지가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떨어져나가 대부르주아지의 편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부분적으로 도시에서의 노동으로 생계를 영위하는 빈농에게는 이 전쟁은 불필요하다이 계급은 전쟁의 반대자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현재 러시아에서 지금 거의 모든 나로드니키 당들 (인민사회주의자트루도비키사회주의혁명가당)과 멘셰비키파 사회민주주의자의 기회주의적 당 (조직위원회치헤이제체레텔리 등)과 나아가 대다수의 무당파 혁명가를 사로잡고 있는 이른바 혁명적 조국방위주의는 그 계급적 의의에서 볼 때자본가와 마찬가지로 약소민족에 대한 억압으로부터 이윤을 끌어내고 있는 소부르주아지소경영주부농의 이익과 관점을 표현하고 있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이러한 정세이러한 계급 제세력의 배치관계 속에서 구 볼셰비키는 여전히 농민이 권력에 올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완성할” 가능성만을 말하고, “부르주아지와 농민 간에 협정또는 계급협조가 존재함을 드러내주는 현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그러면서 구 볼셰비키는 농민과의 동맹을 포기해야 한다는 거냐’, ‘여전히 가능성이 남아 있는 농민혁명을 건너뛰어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해야 한다는 거냐소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를 분리시키는 것에 반대한다.

 

마르크스주의자가 그와 같은 미래의 단계 [농민혁명에 의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완성]가 가능하다는 이유로농민이 부르주아지와 협정을 맺고 있는 현재에 자신의 의무를 망각한다면그는 소부르주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사실상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소부르주아지를 신뢰하라고 설교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농민이 임시정부의 꼬리를 이루고 있고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이 부르주아 정부의 부속물 역할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정세 속에서 구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완성” 가능성을 내세워 소부르주아지를 신뢰하라고 설교하고 있다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독립적인 투쟁을 제한억제하고 소비에트를 임시정부에 계속 묶어두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만을 말하는 사람은 생활에 뒤처진 사람이며그 결과로 사실상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반대하여 소부르주아지 쪽으로 넘어간 사람이다.”

 

이렇게 하여 구 볼셰비키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소부르주아 카우츠키 파로, “혁명적 민주주의파의 좌익으로 되어버렸고과거에 혁명적 전술이었던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는 구 볼셰비키의 손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반대하는 계급협조 인민전선 전술로 되어버렸다. (물론구 볼셰비키는 멘셰비키처럼 임시정부에 대한 전략적’ 지지자는 아니다구 볼셰비키의 지지는 현 시기 전술로서의 지지다구 볼셰비키는 향후 농민혁명에 의해 임시정부를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로 대체한다는 가능성을 전략 시나리오 안에 포함해두고 있다그러나 그 경우에조차도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완성한다는 범위 내에서의 독재지그 틀을 넘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의 전화’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는 독재는 아니다구 볼셰비키에게 이러한 전화란 단계를 건너뛰어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려는” 모험주의적인 발상이다구 볼셰비키의 전략 시나리오에서 두 독재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 두 단계두 역사적 시대로 엄격히 분리되어 있다레닌은 구 볼셰비키기가 말하는 농민혁명 → 소부르주아지의 권력 장악’ 시나리오가 지금도 가능한지는 알 수 없는 문제지만만약 지금도 그것이 가능하다면그것에 도달하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데그것은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소부르주아적 분자로부터 즉각단호히돌이킬 수 없이 프롤레타리아적 · 공산주의적 분자를 분리시켜내는 것이라고 말한다이 경우에도 프롤레타리아적 공산주의 당을 분리시키는 것에 의해서만이이들 소부르주아의 소심함으로부터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적 계급투쟁을 감행함으로써만이 그것은 가능해진다.”)

 

이와 같이 프롤레타리아적 분자(방침)를 분리분별시키는 임무를 규정하는 현 시기 정세 조건은 다름 아닌 소부르주아지가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떨어져나가 대부르주아지의 편으로 넘어 간 것”, “농민이 소부르주아 전술로 넘어간 것이다이 정세의 특수성을 레닌은 다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러시아는 지금 들끓고 있다. 10년간이나 정치적으로 잠자고 있어 왔고차리즘의 끔찍한 압제와 지주자본가를 위한 고역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짓눌려 있던 수백만수천만의 사람들이 깨어 일어나 정치에 돌입하고 있다그런데 이 수백만수천만의 사람들은 누구인가그 대부분은 소경영주소부르주아고자본가와 임금노동자의 중간에 위치한 사람들이다러시아는 모든 유럽 나라들 중 가장 소부르주아적인 나라다.

거대한 소부르주아적 파도가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있고계급적으로 각성한 프롤레타리아트를 쪽수의 힘으로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압도하고 있다즉 아주 광범위의 노동자에게 소부르주아적인 정치적 견해를 전염시키고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평화와 사회주의의 최악의 적인 자본가를 불합리하게도 쉽게 믿어버리는 무자각적인 태도이것이 러시아의 현 시기 대중의 정치를 특징짓는다이것은 유럽의 모든 나라 중 가장 소부르주아적인 나라의 사회경제적 토양 위에서 혁명적 속도로 성장한 열매다이것은 임시정부와 노동자 · 병사 대표 소비에트와의 협정”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형식적 협정이라기보다 오히려 사실상의 지지암묵적 협정쉽게 믿어버리는 무자각적인 권력 양도임을 강조해둔다), 구치코프들에게는 두툼한 살코기 一 진짜 권력 를 주고소비에트에게는 단지 케렌스키들의 말뿐인 약속과 존경 (잠시 동안의), 아첨미사여구맹세굽실거리기만을 준 그 협정의 계급적 기초다.

러시아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수적으로 힘이 부족하다는 것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자각과 조직화가 부족하다는 것이것이 동전의 이면이다.”

 

혁명적 조국방위주의는 거의 모든 것을 쓸어버린 소부르주아적 파도의 가장 중요한가장 두드러진 표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그것이야말로 러시아 혁명이 더 한층 전진하고 성공하는 데 최악의 적이다.”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레닌은 이와 같은 계급 세력관계가 어떠한 종류의 전술을 요구하는지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이러한실제 정세의 특수성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자에게 필요한 현 시기 전술의 특수성이 나온다이 특수성은 일차적으로 혁명적 민주주의 미사여구의 설탕물에 식초와 담즙을 붓는 것을 요구한다비판 작업사회주의혁명가당이나 사회민주당 등 소부르주아적 당들의 오류를 설명하는 작업의식적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당공산주의 당의 분자들을 훈련시키고 결속시키는 작업, ‘전반적인’ 소부르주아적 도취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를 해방시키는 작업이것이 바로 그 식초와 담즙을 붓는 과업이다.”

이것은 선전 작업에 지나지 않는” 듯이 보이지만그러나 실제로는 가장 실천적인 혁명적 작업이다왜냐하면 혁명이 정지해버리고 공문구에 빠지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은 외부적인 장애 때문이 아니라부르주아지가 폭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대중의 쉽게 믿어버리는 무자각성 때문이며이를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혁명의 전진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 이다.”

이 쉽게 믿어버리는 무자각성과 싸우는 것에 의해서만 (그런데 이 싸움은 오로지 이데올로기적으로동지적 설득에 의해생활의 경험을 보이는 것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고또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우리는 횡행하고 있는 혁명적 공문구의 광란에서 빠져나올 수 있으며프롤레타리아적 의식도대중의 의식도현장에서의 대중의 과감하고 결연한 창의도 진정으로 북돋을 수 있다.”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정세의 특수성에서 나오는 현 시기 전술의 특수성이란달리 말하면 경찰 · 상비군 · 관료 등 억압기구를 분쇄해서 없애버린 맹아적 통치권력으로서 노동자 · 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당장’ 임시정부 타도에 착수할 수 없는무장봉기를 직접적’ 일정으로 올릴 수 없는따라서 당장은 소부르주아적 도취로부터 깨워내는 쓰디쓴 비판 작업”, “참을성 있게 오류를 설명하는 일”, “분리분별시키는 일부터 해야 하는그러한 특수성이다우선은 혁명적 민주주의” 도취를 깨는사실상의 임시정부 지지인 인민전선 협정을 깨는그리하여 그로부터 프롤레타리아적인 당공산주의 당의 분자들이 분별정립하고 소비에트 내부에서 프롤레타리아적 방침으로 다수자를 획득하기 위해 조국방위주의적 유행병과 끈질기게 투쟁하는 것을 요구하는그러한 종류의 전술 (몇 년 뒤 초기 코민테른에서 노동자 통일전선’ 전술로 정립된)이다.

 

구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라는 죽은 공식을 부여잡고 매달리느라 지금 존재하는 소비에트 내부에서의 이 같은 과업을 방기한다소비에트 내에서 조국방위주의적 · 소부르주아적인 대중적’ 도취로부터 프롤레타리아적 방침을 끌어내 분별정립 시키는그러한 관건적인 임무에 반대함으로써 소비에트를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의 지배에 내맡기고 있고그리하여 임시정부의 부속물로 남도록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동지들까지도당장 임시정부를 타도해야 한다는 것인가 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문제를 제출하여 그토록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구 볼셰비키는 당장 타도’ 아니면, ‘(비판적지지로 문제를 단순하게” 제출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건너뛰어’ 사회주의 혁명에 이르고 싶어 하는” 블랑키주의적 위험에 빠져들지 않으려면당장은 인민전선으로 임시정부와 함께 공동의’ 전선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이에 대한 레닌은 대답은 단호하고 명료하다.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게 하는 데는 살아 있는 힘이 소비에트를 밀어 올려야 한다그렇게 하지 못한다면우리는 자본가가 인민을 기만하여 계속하고 있는 이 전쟁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모든 나라가 지금 파멸의 벼랑에 서 있다이 점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활로는사회주의 혁명 이외에는 없다정부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그러나 모두가 이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임시정부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에 의거하고 있는 한그것을 간단히” 타도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소비에트 내부에서 다수자를 획득하는 것에 의해서만 그것을 타도할 수 있고또한 그 때는 반드시 타도해야만 한다전진하여 노동자 · 병사 대표 소비에트의 단독 권력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아니면 후퇴하여 제국주의 전쟁으로 향할 것인가이 이외의 길은 없다.”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

 

소비에트 내부에서 다수자를 획득하는” (“살아 있는 힘이 소비에트를 밀어 올리는노동자 통일전선 전술을 통해 소비에트를 바꿔내는즉 임시정부와 뒤얽혀 그 부속물이 되고 있는 소비에트를 임시정부를 타도/대체하는 소비에트로 재편하는 길만이 단 하나의 활로다이 길만이 맹아적인 노동자권력에서 실제 노동자권력으로의 이행코뮌 국가로의 이행을 보장하는 길이다그리고 전쟁으로부터임박한 파국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소비에트 내부에서혁명적 조국방위주의의 신봉자 대중 속에서 참을성 있게 설명하고 끈질기게 선전하자는 것그 자체야 구 볼셰비키로서도 반대할 부분은 없을 것이다. “참을성 있게” 설명하고 선전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조급하게 임시정부 당장 타도에 착수하자거나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하자고 할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결국 문제는 선전의 방향내용이다어떤 방향무슨 내용인가레닌은 자본의 이익과 이 전쟁 간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을 설명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또 자본을 타도하지 않으면전쟁을 끝장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따라서 전 국가권력을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로 옮길 필요를 선전해야 한다고 한다.

 

자본가들에 의해 시작된 전쟁을... 끝내는 것은자본가의 이윤을 보호하는 데 실제로 이익을 갖지 않는 계급진정으로 자본의 압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계급즉 프롤레타리아 · 반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수중으로 전 국가권력을 이양하는 것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것이 진실을 우리 당은 참을성 있게끈덕지게 인민에게 설명할 것이다.”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그것을 코뮌국가로 대체해야 할 필요를 설명선전하자는 것이다이 방향으로이 내용 쪽으로이러한 프롤레타리아적 방침” 쪽으로 다수자 전취에 볼셰비키 당이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결국 구 볼셰비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며여전히 단계를 건너뛰어” “이 혁명을 직접적으로 사회주의혁명으로 전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모험주의적 전술이다. “블랑키주의를 절대적으로 배제하며다수자의 직접적이고 무조건적인 지배와 대중의 활동성을 완전하게 보증하고 있는 명백히 인민 다수의 직접적인 조직인 소비에트 내에서 참을성 있게 설명하는 노동자 통일전선의 과정을 거치자고 하는 데도 여전히 단계를 건너뛰는” 것이라고 한다. “이 소비에트 내부에서의 영향력 획득을 위한 투쟁으로 귀착되는 작업은 블랑키주의의 늪으로 빠져들 염려는 절대로 없는데 말이다.

 

구 볼셰비키도 지금 당장만 아니라면 임시정부를 타도해야 한다는 데는 반대 입장이 아니다문제는 레닌이 그 타도/대체의 결과물로 상정하고 있는 국가권력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가 아니라프롤레타리아트 독재코뮌국가라는 것이다그래서 구 볼셰비키는 절대 반대다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을 분간하지 못하고 사회주의를 직접적으로’ 도입하려 한 오류를 범했고 그래서 패배한 것이 파리 코뮌이 아닌가지금 레닌의 코뮌국가 요구는 그 같은 오류를 되풀이하자는 것 아닌가이러한 구 볼셰비키의 반론에 레닌은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카메네프 동지는 참을성 없이’ 너무 나아간 나머지 파리 코뮌이 사회주의를 직접적으로’ 도입하고자 했다는 식의 부르주아적 편견을 반복해서 표하고 있다이것은 사실이 아니다코뮌은 불운하게도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데 너무 더뎠다코뮌의 진정한 본질은 흔히 부르주아들이 말하는 데 있지 않다특별한 유형의 국가를 만들어냈다는 점거기에 코뮌의 본질이 있다그런데 러시아에는 그러한 국가가 이미 생겨나고 있다노동자 · 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그것이다!” (<전술에 관한 편지>)

 

레닌의 코뮌으로의 이행’ 요구는 아무 전제도근거도 없이 무매개로 무언가를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이와 같이 현실에서 이미 생겨나고 있는 것그것을 전제로 해서즉 현재 존재하는 소비에트를 전제로 해서싹으로 해서 그로부터 이행하는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소비에트의 존재는 ㅡ 임시정부에 권력을 양도하는 바람에 맹아적인 권력이라 하더라도 ㅡ 이미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를 경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러나 구 볼셰비키는 토지 재분배를 비롯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과제들 중 많은 것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고따라서 그 혁명도 완료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여전히 권력체제는 그러한 과제에 걸맞게 민주주의 독재여야 한다고 주장한다따라서 이러한 민주주의적 과제에 조응하지 않는 코뮌국가 요구는 결국 단계를 건너뛰어’ 농민을 배제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수립하자는 것이라고 비판한다구 볼셰비키의 일원으로 노동조합 지도자인 미하일 톰스키는 4월 테제에 반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민주주의 독재는 우리의 주춧돌이다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권력을 조직해야 하며이것을 코뮌으로부터 구분해야 한다왜냐하면 코뮌은 프롤레타리아트 혼자만의 권력을 뜻하기 때문이다.”

 

레닌은 구 볼셰비키가 사실을실재하는 소비에트의 의의를 충분히 살펴보지 않죽은 도식으로 주의를 돌리고 있다고 반박한다.

 

소비에트란 대체 무엇인가소비에트는 그 유형으로 볼 때 의회공화제보다도 한층 더 고도의 것인가 아닌가인민에게 더 유용하고더 민주주의적인 것인가 아닌가투쟁에 더 적합한 것인가예를 들어 식량 부족 등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에 더 적합한 것인가 아닌가 — 이와 같은 실생활이 일정에 올려놓고 있는 긴박하고 사활적인 문제로부터, “직접적으로 전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식의 공허한자칭 과학적이지만 실제로는 아무 내용이 없는현학적인 죽은 문제로 주의를 돌리고 있는 것이다.” (<전술에 관한 편지>)

 

구 볼셰비키는 민주주의적 과제의 해결을 오늘의 현실이 아니라 어제의 도식에서 찾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를 수립하지 못해서 여전히 과제가 미해결되고 있다는 것이다현실의 이중권력 정세그리고 소비에트가 권력을 임시정부에게 넘겨준 정세소부르주아지가 노동자계급에게서 떨어져나가 부르주아지의 편으로 넘어간 정세 등이러한 실제 사실현실의 계급 제세력의 배치관계는 그러한 민주주의적 과제조차도 전 국가권력이 소비에트의 손에 쥐어지는 것에 의하지 않고서는 달리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시하고 있는데도 말이다현 시기 모든 정세조건은 오직 노동자와 빈농의 손에 권력을 인도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서만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과제도 비로소 해결될 수 있음을 가리키고 있는데도 말이다전쟁과 자본가의 사보타지로 인한 당장의 기근과 닥쳐온 경제 붕괴와 전쟁 참화 앞에서 임시정부는 빵도토지도평화도 그 어느 것도 인민이 요구하는 것을 줄 수 없다민주주의적 과제 등 최소요구와 전쟁 중지를 실행하고나아가 임박한 파국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은행과 자본가 신디케이트카르텔 등 독점 금융단체에 대한 통제와 국유화를 도입하는 등 아직 사회주의는 아니지만사회주의로 나아가는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소비에트 권력뿐이다민주주의적 과제 등 최소강령의 실행과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걸음들[조치들]”이 서로 맞물려서 더 이상 그 양자를 시간적 선후(先後)의 과제로 분리할 수 없게 되었다임시정부를 소비에트로 대체하고맹아적 권력에서 본연의 권력으로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이행하는 것에 의해서만 이 모든 것은 가능하다. “전진하여 노동자 · 병사 대표 소비에트의 단독 권력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아니면 후퇴하여 제국주의 전쟁으로 향할 것인가이 이외의 길은 없다.”    <계속>

 

<편집자 주>

 

이 글은 본지의 요청으로 싣게 된 소중한 기고 글로 국제코뮤니스전망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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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9호] 레닌의 4월 테제 對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 인민전선 Ⅰ, Ⅱ

<기고>

레닌의 4월 테제 對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 인민전선

양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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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2월 혁명이 터진 뒤레닌이 러시아로 귀환하자마자 발표한 “4월 테제는 혁명운동에서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와의 투쟁인민전선주의와의 투쟁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잘 보여준다.

레닌의 귀환 직전까지 임시정부와 전쟁에 대한 볼셰비키당의 공식 입장과 전술은 자칭 구 볼셰비키들의 주도 하에 나왔다혁명의 성격은 여전히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며단계를 건너뛰어 사회주의 혁명으로 넘어가선 안 된다는 전제 하에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비판적지지하고 혁명적 조국방위주의로 기운 구 볼셰비키” 노선이 만약 볼셰비키 당을 계속 지배했다면 과연 결말은 무엇이었을까만약 이 중대한 시점에볼셰비키라는 그 프롤레타리아 당이 이 4월 테제를 통해서 제 때 노선 전환과 강령 · 전술상의 재무장을 기하지 못했다면우리가 알고 있는 10월 혁명이라는 행복한 성공적 결말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볼셰비키 당의 재무장은 무슨 레닌의 권위로 간단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레닌이 당내 반대로부터 <4월 테제>를 방어하는 가운데 구 볼셰비즘” 노선을 고물보관소에나 수용해야 한다고 공격적으로 반박하고 있는 데서 보듯이테제가 구 볼셰비즘과의 단절과 발본적 쇄신의 내용을 담고 있어 볼셰비키 당 내에서도 충격과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논쟁적 문투로 <4월 테제>를 공세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전술에 관한 편지>와 <이중권력>, 이어서 테제의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정교화 시킨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정세 보고와 결의안등이 4월 테제의 연장선상에 있는 논쟁 글들이다.

 

479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아주 짧은 글인 <4월 테제>는 10개의 테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그 중에서도 제1순위의 긴박한 사안으로 임시정부와 전쟁에 대한 태도 문제 및 그와 관련한 권력 및 국가체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 2월 혁명 이후 신정부(임시정부하에서도 전쟁의 성격은 바뀌지 않았다이 정부의 자본가적 성격 때문에 여전히 제국주의적 약탈적 전쟁이지결코 혁명적 전쟁이 아니다따라서 전쟁에 대한 우리의 태도 문제에서 혁명적 [조국방위주의에 조금이라도 양보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방위주의가 아니라 제국주의 전쟁 반대’/패전주의를 견지해야 한다. (권력이 프롤레타리아트와 이에 동조하는 빈농에게로 넘어갈 때에만즉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한 경우에만 혁명적 방위주의가 정당한 것이 될 수 있다.) 자본을 타도하지 않고서는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하지 않고서는 이 전쟁을 끝장내는 것이 불가능함을 소비에트 대중에게 참을성 있게 설명해야 한다.

● (국가권력을 소비에트로!

러시아 현 시기의 특수성은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자각과 조직화가 충분치 못해 권력을 부르주아지에게 넘겨준 혁명의 최초 단계로부터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의 수중으로 권력을 넘기지 않으면 안 되는 혁명의 두 번째 단계로 이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 의회제 공화국이 아니라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해야 한다경찰군대관료의 폐지!

● 그 밖에농업강령에서는 무게 중심을 농민이 아니라 농업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로토지 국유화모든 은행을 단일 국립은행으로 통합이에 대한 소비에트의 통제생산과 분배를 소비에트의 통제 하에당 강령 개정 (a.제국주의와 제국주의 전쟁에 대하여, b.국가에 대한 태도 및 코뮌 국가라는 우리의 요구에 대하여, c.시대에 뒤떨어진 우리 최소강령의 수정당명 변경 (사회민주당에서 공산당으로 당의 재무장새로운 인터내셔널.

 

1914년 제국주의 세계전쟁 발발 이래 1917년 2월 혁명 전까지 레닌이 발표한 글들에서 줄곧 제시되고 있는 정세인식과 전략·전술적 방침특히 제국주의 전쟁을 사회주의를 위한 내란으로 전화하라는 슬로건과 혁명적 패전주의(전쟁 반대/‘조국방위’ 거부/‘국 정부의 패전을 위한 투쟁전술을 상기해본다면, <4월 테제>의 이러한 내용이 볼셰비키 사이에서 특별히 생소하거나 낯선 것일 수는 없다.

그런데 왜 이런 4월 테제가 당내 논쟁과 반대를 불러일으켰는가이미 전쟁 발발 초기부터 그러한 정세인식 · 정치방침이 레닌 개인의 견해로 머물지 않고 당 중앙위원회의 결의로까지 표명되어 왔음에도 말이다정작 내란으로의 전화의 시작인 2월 혁명이 터진 상황에서 <4월 테제>를 레닌 개인의 견해일 뿐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는 당 지도부 일각의 반대는 대체 어찌 된 것인가다른 어떤 노선을 가지고 있었기에 테제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기각한 것인가?

 

이후 우리는 이 논쟁의 전말을 살펴볼 것인데일단 이 반대 입장을 요약하면 이렇다이들 당 지도부(당시 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편집국인 카메네프스탈린무라노프)는 2월 혁명으로 전쟁의 성격이 바뀌어서 러시아 입장에서는 더 이상 제국주의 전쟁이 아닌 혁명적 전쟁즉 혁명적 민주주의의 성과물을 지켜야 하는 전쟁이 되었으므로 방위주의 입장을 취해야 하고임시정부에 대해서도 좌로부터 압력을 넣는 비판적 지지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또 토지 문제 미해결 등으로 인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고따라서 민주주의 혁명을 최후까지 수행해야 하며지금 단계를 건너뛰어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에서그것도 그 어느 때보다 중대한 정세 국면에서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두 노선이 충돌하게 된 것이다왜 이런 논쟁이 일어났는지그 의미와 성격그리고 4월 테제의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레닌의 귀국 이전인 2월 혁명 직후 조성된 정세와 이에 대해 볼셰비키 당이 취했던 입장과 태도를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2월 혁명으로 차르 군주제가 타도되자 이제 국가권력을 누가 잡느냐는 문제가 제기되면서 극히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졌다노동자와 병사(군복 입은 농민)의 봉기로 차르를 퇴진시켰는데기존 차르 체제의 의회인 두마의 자유주의 정치가들밀류코프와 구치코프와 로잔코 등 부르주아 계급의 대표자들이 스스로 임시혁명정부를 선포한 것이다봉기를 이끈 것은 고사하고그것을 호소한 바도 없는 자들이 말이다이들은 오히려 봉기 속에서 만들어진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와 병사 대표 소비에트의 힘을 두려워하여 은밀히 군주제를 부활시키려는 시도까지 했다.

이들 임시혁명정부는 현 제국주의 세계전쟁에서 영국 · 프랑스에 대한 동맹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전쟁 중지!”에 반대하였고전쟁에서 승리할 때까지 제헌의회 소집과 토지 개혁 등의 과제를 미룰 것을 요구했다또 병사들은 병영으로 복귀하고무장한 노동자들은 무기를 국가에 반납하라고 명령했다임시정부와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영 · 불 제국주의 부르주아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노동자정부를 구성해서 전쟁 종결에 나서는 것인데실제로 2월 혁명 직후 권력은 많은 부분 노동자 · 병사 소비에트의 수중에 쥐어져 있었다.

 

그런데 부르주아지에게는 다행스럽게도소비에트에서 다수파로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던 멘셰비키와 사회주의혁명가당은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므로 부르주아 정부가 존재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고그에 따라 임시정부 지지를 선서했다여기에 힘입은 임시정부는 콘스탄티노플과 폴란드 동부 ㅡ 러시아의 동맹국인 영국 · 프랑스가 러시아의 몫으로 인정해준 영토 ㅡ 를 탈취하고자 전쟁 계속을 결정했다한편 소비에트의 노동자 · 병사 대중은 강화 협상이 열려서 무병합 · 무배상의 전쟁 종결이 신속히 이루어지길 원했다소비에트 집행부의 멘셰비키와 사회주의혁명가당도 이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전쟁 계속을 결정한 정부에 입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당장은 거부 입장을 취했다.(물론 얼마 안 있어 입각하고나아가 임시정부를 떠맡기까지 하지만 이들 또한 전쟁을 계속한다.) 소비에트 대의원들 대다수도 임시정부 지지에 동의했는데그러나 한편으론 집행부와는 독립적으로 임시정부를 감시한다는 취지의 감독위원회를 설립했다나아가 이 감독위원회 이름으로 유명한 1호 명령을 내려 모든 부대 이동은 소비에트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선포하여 모든 항명 부대들과 병사를 사실상 소비에트의 통제와 지휘 아래 들어오게 했다.

 

이렇게 해서 이중권력 정세가 성립되었다화해할 수 없는 두 계급세력 사이에 일시적으로 권력이 나누어져 있는 것이다노동대중은 소비에트를 단지 투쟁의 무기로뿐만 아니라 통치권력으로 보았다단순히 노동조합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계급협조적인 소비에트 집행부(멘셰비키 · 사회주의혁명가당)가 불어넣고 있는 환상즉 혁명적 민주주의 파라는 이름 아래 부르주아지와의 협력관계를 이루어 이 혁명을 완수해나갈 수 있다는 환상에 무방비로 노출되기도 했다.

 

2월 혁명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나타난 이와 같은 이중권력 상황은 볼셰비키 당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당황스러운 것이었다볼셰비키가 1905년 혁명 이래 품어 왔던 혁명 전략 및 예측 공식에 들어맞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멘셰비키와 달리 볼셰비키는 올바르게도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서 부르주아지는 반혁명적 역할을 할 뿐으로민주주의적 과제를 완수하는 데 장애물로 나설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했다그리고 이로부터 끌어낸 결론으로프롤레타리아 당이 혁명을 이끌어야 하며농민과 동맹하여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좀 더 구체적으로는 지주 권력인 차르 군주제를 타도하는 무장봉기를 이끌어 노동자 · 농민의 임시혁명정부를 수립하는 것인데구체제를 겨냥하여 이 정부가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강제적 조치들로 인해 이 임시혁명정부를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로 표현하기도 했다그렇지만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아닌 (농민과의 동맹을 통한) “민주주의 독재라는 정식화에서 보듯이이 정부가 취할 조치들은 1903년 강령의 최소강령 부분으로 엄격히 제한되어야 하는(자본주의의 기초를 건드리지 않는것들이었다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 강령의 최소요구 부분은 멘셰비키도 여전히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서, ‘민주공화제’, ‘지주 토지 몰수’, ‘8시간 노동제가 그 주요 항목이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결과는 어떤가? 2월 혁명으로 성립된 임시정부는 부르주아지가 ㅡ 노동자 당과 농민 대표자가 아니라 ㅡ 담당하고 있는 정부가 아닌가이 임시정부는 우리의 전략 속에서 만들어내려고 했던 그 민주주의 독재가 아니지 않은가그렇다면 여전히 현 국면은 무장봉기에 의해 그것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상황인 것인가?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그것을 노동자 ·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로 대체해야 하는 상황인 것인가?). 예측 시나리오에 맞지 않은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임시정부와는 별개로노동자와 병사가 만들어낸 권력은 민주공화제를 넘어서는 구조들을 취하고 있다실로 노동자 · 병사 소비에트 (그리고 그 지휘 하에 있는 민병과 공장위원회)는 새로운 유형의 국가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아닌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구현한 국가(“코뮌 국가”)의 맹아다그런데 이런 소비에트가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대의원 다수파로서 멘셰비키 당 · 사회주의혁명가당에 의해 소비에트가 주도되면서 말이다그렇다면 지금 노동자의 다수자가 지지하는 정부를 겨냥하여 봉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되는데우리가 소수자에 의한 권력 탈취를 지지하는 블랑키주의자가 아닌 이상 이건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그렇다맞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데그렇다면 우리 예측 공식 의 핵심축인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같은 혼란 속에서 볼셰비키 당 페트로그라드 시 위원회는 3월 4, “임시정부의 활동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범민주 인민대중의 이익에 부합하는 한 임시정부의 권력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냈다이러한 입장은 이미 임시정부가 프롤레타리아트와 인민대중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과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를 회피하고 있는 것이며또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내 지배적인 멘셰비키 방침에 그 어떤 직접적 도전도 하지 않겠다는그냥 따라가겠다는 뜻이다실제로 집행위원회 내 볼셰비키 위원들 대부분이 정부에 대한 태도 문제에 관한 멘셰비키의 결의안에 찬성투표를 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페트로그라드 시의 산업 중심지인 비보르그 지구 위원회는 임시정부에 대한 중대한 불신을 표하는 성명을 냈다하지만 이 성명 역시 혁명의 부르주아적 단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따라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넘어갈 수는 없다는 취지의 입장을 담고 있었다쉴리아프니코프몰로토프잘루츠키로 구성되어 있는 재외 중앙위원회 러시아 사무국은 좀 더 다른 입장을 취했는데처음에 이들은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서 대표성을 가지고 있는 당들로 임시혁명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구했다소비에트 당들 간의 협정으로 (위로부터부르주아 임시정부를 대체한다는 이러한 구상은 곧바로 거부되었다멘셰비키 당과 사회주의혁명가당은 노동자 정부나 노동자·농민 정부 같은 것은 지금 필요 없다며부르주아 당들에 의해 구성되는 정부를 지지하길 원했다나아가 멘셰비키 당 다수파(원래는 반전 입장이었던)는 이제 전쟁의 성격이 바뀌어서 혁명의 성과물을 지키는 전쟁이 되었다며 전쟁 반대를 내리고 혁명적 (조국)방위주의를 내걸었다이에 대해 쉴리아프니코프 등의 러시아 사무국은 왼쪽으로 더 이동하여 3월 22일에는 소비에트를 새로운 국가권력의 맹아라고 성격 규정을 내리는 지점으로까지 나아감으로써 레닌이 스위스에서 발전시키고 있던 입장에 가까이 다가갔다.

반면당 기관지 <<프라우다>> 편집국은 볼셰비즘 내에서 가장 오른쪽에 서 있었다. <<프라우다>> 3월 7일의 논설에서는 우리로서는지금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의 타도가 아니라전제정과 봉건제의 타도다라고 선언했다또 카메네프와 함께 <<프라우다>> 공동 편집자인 스탈린은 이렇게 썼다. “임시정부는 실제로 혁명적 인민이 쟁취한 성과물의 수호자 역할을 맡았다현재로선 부르주아 층의 퇴출을 재촉하여 사태를 강제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그들은 불가피하게 언젠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임시정부에 대한 이러한 지지 입장은 곧 한 걸음 더 나아가 급기야 전쟁에 대한 지지로 이어진다. 3월 15일에 편집국의 카메네프는 <<프라우다>>의 지면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전쟁 수행에 대한 조건부 지지를 내걸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민주주의 세력들이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우리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짜내 우리 조국을 방어할 것이다.” 카메네프는 계속해서 이렇게 썼다. “군대가 서로 대치하는 상황에서 어느 한 군대에게 무기를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하는 것은 가장 정신 나간 정책일 것이다이것은 평화의 정책이 아니라자유 인민으로서는 혐오감을 느끼며 거부할 노예제의 정책이 될 것이다인민은 총탄에는 총탄으로포탄에는 포탄으로 응수하며 당당히 자신의 진지를 지킬 것이다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우리는 혁명의 무력을 해체시키는 그 어떤 것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다음날 <<프라우다>> 지면에서는 스탈린이 전쟁 중지!’라는 공허한 외침은 혁명적 군대의 해체를 요구하는 슬로건이 될 수 있다며직접 임시정부에 압력을 넣어 평화협상 개시에 앞장서도록 요구하는 것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해결책은임시정부에 압력을 넣어 즉각적인 평화협상 개시에 동의한다고 임시정부가 선언하도록 하는 것이다노동자와 병사와 농민은 집회와 시위를 배치하여 임시정부에게모든 교전국을 즉각 평화협상에 착수하도록 끌어내는 일에 공개적으로 나설 것을 요구해야 한다.” 이러한 요구레닌이 <<4월 테제>>에서 비판했듯이, “이 정부자본가의 정부에 제국주의적이기를 그만두라는 식의 환상을 심는 요구’”로서사실상 임시정부 지지를 전파하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카메네프와 스탈린이 주장하는 논리는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완성시킬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를 향후 수립해야 하는데 이를 위한 최적의 투쟁 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현재로선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적 지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이런 식으로 카메네프-스탈린 지도라인에 의해 볼셰비키는 혁명적 민주주의 파의 왼쪽 날개가 되어 가고 있었다.

결국 3월 17일에는, 2월 봉기에서 선봉 역할을 한 비보르그 지구의 평당원 노동자 세포들이 프라우다 편집국을 당에서 축출하라고 요구하는 일까지 일어났다그럼에도 당내에 협조주의 조류즉 임시정부를 수용하고 멘셰비키 · 사회주의혁명가당의 소비에트에 대한 통제를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나아가 노동자계급의 독립적 투쟁을 제한축소하는 조류(이후의 용어로 말하면, ‘인민전선주의적 조류)가 당 내에 확대되고 있는 것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이 때 레닌이 스위스에서 긴급하게 써 보낸 <먼 곳에서 보낸 편지ㅡ 그 주요 지침은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일절 지지하지 말 것전쟁 반대 당론을 바꾸지 말 것, ‘전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을 위해 투쟁할 것 ㅡ 는 <<프라우다>> 편집국에 의해 완전히 무시되고 있었다보내온 편지 네 편 중 하나만이 <<프라우다>>에 실렸는데그것도 중요한 내용이 삭제되는 등 편집된 상태로였다그 삭제된 내용 중 하나는임시정부에 지지를 보내는 자는 그 누구든 노동자에 대한 배반자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평화와 자유의 대의에 대한 배반자로 낙인찍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마침내 레닌이 유명한 봉인열차를 타고 러시아로 귀국하여 핀란드 역에 도착했을 때 카메네프를 비롯한 볼셰비키 당 지도부가 레닌을 맞으러 나왔다그 때 지도부의 일원으로 함께 나온 크론슈타트 수병들의 지도자 라스콜니코프는 레닌이 카메네프에게 보낸 첫 인사를 이렇게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당신이 <<프라우다>>에 쓴 거그 쓰레기는 뭡니까우리가 몇 호 보면서 정말로 당신 욕을 했소.”

레닌은 당 회합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그의 소리를 들으러 핀란드 역에 나온 군중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의장인 멘셰비키 당의 치헤이제가 공식 환영단을 대표하여 레닌에게 민주파 대열의 결속을 위해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다그의 말을 무시하고 레닌은 둘러싼 군중을 향해 이렇게 선언했다. “전 세계 사회주의 혁명이 이미 시작되었다이제 곧 유럽 자본주의 전체가 끝장날 것이다여러분이 이룩한 러시아 혁명이 그 길을 닦았고 새 시대를 열었다세계사회주의혁명 만세!”

다음날 4월 4볼셰비키 당 소속 소비에트 대의원 70명이 모인 타우리드 궁 회합에서 레닌은 처음으로 4월 테제를 낭독했다이 때의 반응을 레닌의 아내 크룹스카야는 <<레닌의 회상>>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동지들은 일순 좀 당황했다많은 동지들이 일리치 [레닌]가 너무 투박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며아직 사회주의 혁명을 얘기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크룹스카야는 심지어 한 친구에게 일리치가 미쳐버린 걸로 보일까봐 두렵다고 털어놓기까지 했다.

같은 날 오후레닌은 지노비에프의 요청으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합동회의에서 같은 내용을 한 번 더 연설했는데이 회의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재통합 전망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것으로서 카메네프-스탈린 라인이 추진한 또 하나의 프로젝트였다멘셰비키 쪽에서의 반응은 예상과 다르지 않게 미치광이의 헛소리라며 일축했다그러나 볼셰비키로부터의 지지도 냉담했고회의에 배석했던 콜론타이만이 레닌의 입장에 찬성 발언을 했다.

 

당내 투쟁이 뒤따랐다카메네프를 비롯한 일단의 지도부가 레닌의 ” 볼셰비즘에 맞서겠다며 스스로를 구 볼셰비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4월 테제의 내용을 좀 더 상세하게 제시해달라는 당원들의 요청으로 이 때 레닌은 <전술에 관한 편지>와 이어서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부제 : ‘프롤레타리아 당의 강령 초안’)를 제출했다. 4월 14-22일의 볼셰비키 당 페트로그라드 시 협의회와 뒤이은 24-29일의 7차 전 러시아 협의회가 내부 투쟁의 무대가 되었다레닌에게 이 투쟁은 혁명의 명운이 걸린 긴박한 순간에 신속히 구 볼셰비즘을 고물보관소에 수용해버리고볼셰비키 당의 재무장을 이루어내는 투쟁이었다그런 만큼 이러한 레닌의 투쟁은 당내 구 볼셰비키로부터의 쓰디쓴 저항에 부닥쳤다카메네프는 4월 7일 <<프라우다>>에 레닌의 <테제>를 게재하면서 다음과 같은 편집자 서문을 달았다. “레닌 동지의 일반적 도식에 대해 말하자면그의 도식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완료되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이 혁명을 직접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한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서는 이 글이 레닌 개인의 견해이며당의 견해가 아니라고 덧붙였다.

 

역사적인 볼셰비즘 노선을 청산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한 레닌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볼셰비키의 슬로건과 사상이 옳다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역사에 의해 확증되었지만구체적으로는 사태는 누구도 예상 못한 다른 꼴을 취했다사태는 누가 예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독특하고 더 특이하며 더 복잡하다이 사실을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것은 새로운 생생한 현실의 특수한 측면들을 연구하는 대신에 암송한 공식들을 분별없이 되뇜으로써 우리 당의 역사에서 그리도 개탄스런 역할을 한 것이 이미 한 두 번이 아닌 저들 구 볼셰비키를 닮는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이어서 레닌은 설명한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러시아 혁명에서는 이미 실현되어 있다.... ‘노동자 · 병사 대표 소비에트’, 이것이야말로 생활에 의해 이미 실현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그 공식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져버렸다생활은 그것을 공식의 왕국에서 현실의 왕국으로 옮겨놓았다그리고 그것에 뼈와 살을 입혔고 그것을 구체화시켰으며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수정한 것이다.”

 

당의 모든 지구 및 세포 단위들에서 3주간의 논쟁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레닌의 쇄신된 볼셰비즘이 최종적 다수를 획득했다이제 혼란과 동요를 뒤로 하고 당은 모든(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하는(즉 임시정부를 소비에트 권력으로 대체하는2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자본주의의 타도를 향한 단호한 발걸음을 내딛어야 한다는 방침 쪽으로 대중을 전취하기 위해 나섰다이미 혁명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가 경과했다는 사실그리고 이로써 새로운 모순계급 제세력의 새로운 배치관계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길 거부하고, “민주주의 혁명의 완성을 주장하며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비판적 지지한 구 볼셰비키” 노선은 고물보관소에 영구 수용되었다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최후까지 수행해야 한다는 논리로 (그것도 노동자 · 병사 소비에트의 형태로 이미 파리코뮌 형의 국가가 존재하고 있는 정세에서여전히 민주주의 독재와 최소강령의 틀 안에 혁명을 한계 지으려 하고사회주의 혁명과의 사이에 차단벽을 쌓으려 한 구 볼셰비즘이 폐기극복된 것이다당이 이제 노동자권력/프롤레타리아 독재로의 이행의 프로그램으로 새롭게 무장했다.

 

4월 테제와 그 후속 글 <전술에 관한 편지>,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등은 10월 혁명으로의 길을 연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획기적인 성취이자세계사회주의혁명으로 가는 길에 가로놓인 낡은 관성과 한계에 대한 단절과 돌파를 대표한다. 4월 테제를 둘러싼 당내 논쟁당의 재무장을 위한 레닌의 투쟁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새기기 위해 우리는 이 논쟁에서 정세인식/전술방침 상의 차이가 어떠한 전략 규정의 차이를 내포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이것이 특히 필요한 것은, 4월 테제의 의의를 최소화하고, “구 볼셰비즘과의 단절’ · ‘돌파의 의미를 부정하면서단지 전술상의 착오를 바로잡는 수준의 논쟁일 뿐이었다는 식으로 덮어버리려는 평가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개를 쳐들고 있기 때문이다이런 평가의 원조가 이른바 스탈린 당사’, 즉 1939년 스탈린의 직접적 지도” 하에 작성된 악명 높은 <<소 교정>>(小 敎程 Short Course : 전연방 공산당사 소교정)이다이 날조된 볼셰비키 당사는처음부터 스탈린은 논쟁에서 레닌의 편에 서 있었던 것으로 그려놓고논쟁은 단순히 일시적인’ 전술 차이에 불과했던 것으로 그 의미를 축소하고 있다또 4월 테제는 볼셰비키에게 특별히 새로운 내용이기보다는 1905년 혁명 이래 줄곧 볼셰비키의 전략노선을 대표했던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전술>>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라며 그 돌파’, ‘쇄신의 의의를 부정하고 있다.    <계속>

 

<편집자 주>

 

이 글은 본지의 요청으로 싣게 된 소중한 기고 글로 국제코뮤니스전망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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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추모하며 (1871년 ~ 1919년 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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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를 추모하며 (1871년 3월 5일 ~ 1919년 1월 15일)

로자 룩셈부르크를 추모하며
  • 야만의 자본주의에 살해당한 노동자 투사들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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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1월 15일 - 추운 겨울밤의 학살

     

     

      따뜻하고 포근한 안개에 둘러싸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의식세계와는 달리 1919년 1월 15일의 밤은 살을 에는 추위 때문에 길이 얼음으로 꽁꽁 덮여 있었다.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로자 룩셈부르크는 군용트럭의 화물칸에 거칠게 내팽개쳐졌다. 거친 폭음을 내며 어둠을 향해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사 하나가 트럭 위에 올라탔다. 다시 한번 로자 룩셈부르크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 그것을 통증으로 느낄 수 없을 만큼 기력은 쇠잔해져 있었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트럭에서 세찬 삭풍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중위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잔인한 눈길을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돌려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마치 그에게 아직도 생명이 붙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허술하게 만들어진 우리에서 피에 굶주린 짐승이 피를 찾아 으르렁거리며 달려들듯이 그는 피스톨의 방아쇠를 끌어당겼다.

     

      촛불은 꺼졌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산산이 부서졌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운하와 동물원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엔진 소리가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고 있었다. 바로 옆의 운하에 멈춰서 있는 두세 명의 병사의 그림자가 물 위에 떠 있었다. 그곳으로 다가가서 급히 생각이 난 듯 차는 급정거 하였다. 병사들의 그림자가 한쪽 발에는 신발도 신지 않은 중년 부인의 그림자를 귀찮은 듯 다리 위에서 운하로 집어 던졌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어둠 속으로 하얗게 흩어졌다. 삽시간에 어둠과 정적만이 감돌았다. 임무를 다했다는 듯 트럭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여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다음날 로자 룩셈부르크의 죽음이 동지 칼 리프크네히트의 죽음과 함께 전해졌다. 그가 선동한 군중의 광폭한 노여움에 의해 자신의 죽음을 초래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리고 시체는 무질서한 혼란의 와중에도 분실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독일의 5월은 아름답다. 시인 하이네가 노래하듯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5월, 모든 초목이 싹틀 때’ 그것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재생 시기였다. 진흙 속에 파묻힌 그의 육체가 운하 위로 떠오른 것은 5월 31일이었다. 6월 13일, 로자 룩셈부르크는 동지 칼 리프크네히트가 32명의 희생자와 함께 고이 잠들어 있는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스펠데 묘지의 같은 장소에 묻혔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묘지 앞에는 생전에 좋아했던 꽃다발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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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자 룩셈부르크의 최후 -비극의 종말

     

      독일혁명의 폭풍 속에서 혁명의 패배가 분명해진 순간에도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원칙과 방법을 포기하지 않고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베를린은 유지되고 있다>라는 논설에서 혁명의 와중에, 반혁명 승리의 환상 속에 있더라도 아직 혁명적 노동자는 사건에 대한 검토를 거듭하고, 경과와 결과를 역사의 척도로써 측정할 것을 요구했다.

     

      1월 이후, 로자 룩셈부르크의 심신의 피로는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고, 혁명에 대한 의욕과 의지가 간신히 그것을 지탱하고 있었다. 최종적인 승리를 눈앞에 두고 과로와 병세로 쓰러질 수도, 아니면 반혁명 군의 총검에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 순간까지도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중을 신뢰하고, 대중에게 미래를 걸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번 투쟁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대단히 날카로운 데 반해 혁명이 발전할 수 있는 초기 단계에 필요한 전제 조건은 모자랐습니다. 그런 모순을 안고 따로따로 맞붙은 싸움이 시작되어 결국은 패배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혁명이 가진 특수한 생명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서만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질서가 베를린을 지배한다>
     
      "지도자는 대중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지도자는 대중 속에서 만들어질 수 있고, 또한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최후의 결정자는 대중입니다. 대중은 혁명의 최후 승리가 쟁취되는 전장입니다. 그들은 이 패전으로 인해 국제 사회주의 사회의 과시이며 힘인 역사적 패배의 연속 일환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래서 이 패배로부터 미래의 승리가 꽃필 것입니다." <로테 파네 1919.1.14>

     

      1월 16일의 <폴베르쯔>는 리프크네히트가 도망치려고 하여 사살되었고, 로자 룩셈부르크 또한 분노하여 광폭한 대중에 의해 살해되어 스스로 죽음을 초래했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그 전날 밤 9시경,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만하임 가의 은신처에서 체포되어 에덴 호텔로 연행되었다. 바프스트 대위가 두 사람을 심문했는데, 살해의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다. 호텔을 나서는 순간 한 명의 수병이 개머리판으로 리프크네히트를 때려 넘어뜨렸다. 정신을 잃은 그는 차에 실려 가 틸가르텐 호수 근처에서 끌어 내려져 그곳에서 학살되었다. 시체는 신원불명자로 취급하였다. 이어 로자 룩셈부르크가 호텔에서 끌려 나왔다. 그리고 그의 최후 역시 비참하게 마감되었다. 이 학살에 대해 슬픔과 격노에 찬 요기헤스는 사실 자료를 모아 공개하고 그들의 범죄를 폭로하였다. 그것 때문에 그도 역시 3월 10일 체포되어 경시청의 감방 안에서 형사에 의해 학살되었다. 기력이 다한 늙은 메링도 역시 그들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독일혁명은 비극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비극의 역사는 반복되었다. 한때 세계 최고와 최대의 사회주의 세력으로 성장하고 국제 노동운동의 지도적 지위를 확고히 했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이었지만, 배신과 학살에 의해 독일혁명의 실패를 초래하더니, 결국 그 독일 사회민주당이 그곳에서 파시즘을 탄생시키고 육성하게 된 것이다. 그 탄생과 양육의 부모였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과거 자기들이 로자 룩셈부르크와 동지들을 학살할 때 사용했던 방법에 의해 그들이 기른 자식에게 조직 자체가 압살 되는 운명을 겪었다.

     

      1933년 나치는 자본의 지지와 원조 하에 권력을 장악하고 국회의사당을 방화하고 그 죄를 독일 사회민주당과 코뮤니스트당, 노동조합에 전가했고, 독일 사회민주당은 이 상황에서도 나치의 눈치 보기에 급급했고 공산당의 총파업 요구는 거부되었고 결국 세 곳 모두 결사금지의 탄압을 받게 된다. 이런 나치의 만행은 죽은 자의 묘를 파헤치고 일련의 사회주의 문헌과 함께 로자 룩셈부르크의 모든 저작을 불태우고야 만다. 결국, 전 인류의 불행과 파멸을 초래했던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로자 룩셈부르크의 묘지는 해방되었고, 아직도 그의 저작과 사상, 혁명을 향한 실천은 복원 중이며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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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 정신

     

      인류에게 있어 이러한 역사적 재앙에 직면하여, 예전의 노동자당에 의한 이러한 배반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 정신의 본보기, 지칠 줄 모르는 결연함과 장기적 관점에서 이론적-정치적 분석을 이뤄내는 역량의 한 본보기였다.

     

      전대미문의 수준으로 전개된 야만성과 당의 배반은 혁명가들에게 진정한 충격이었고, 그들 중의 일부는 침울함에 빠졌다. 독일의 많은 혁명가들이 수감되거나 추방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도 전쟁 기간 대부분을 감옥에 있었다. 4년 4개월간의 전쟁 기간 총 3년 4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의 결연함을 굴복시키고 침묵하게 하려는 것이 수감의 의도였다면, 수감된 후 그의 반응은 이론이라는 무기로 반격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책, 「자본의 축적」에 대한 비판들에 대한 대답으로 「반비판」을 썼다. 전쟁발발 전 독일사회민주당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그는 정치경제학에 관한 강의를 했었다. 수감 중에 그는 당 학교 교사로서 사용했던 초기의 그 강의 자료로 정치경제학입문을 썼다. 그리고 그는 문학과 문화 문제들도 다루었는데, 러시아 작가 코롤렌코의 동시대인의 이야기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그 서문을 작성했기도 했다. 그가 러시아혁명에 대한 분석, '러시아혁명에 대하여'를 작성하고 러시아에서의 혁명에서 행해진 실수들에 대한 비판을 위한 최초의 몇몇 중요 점들을 발전시킨 것도 수감 중인 상태에서였다.

     

      물론 로자 룩셈부르크는 감옥에 갇힌 상태로 고통받았지만, 이것은 결코 그의 의지를 꺾거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없었다. 그가 수감 중에 쓴 기록들이나 서신들을 읽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그가 감옥 속에서 다룬 화제들의 다양성과 예술과 문학에 대한 일련의 편지들은 길들여질 수 없는 창조적 정신을 증언한다. “나는 종종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책 읽기와 글쓰기로만 하루를 보냅니다.”

     

      자본주의의 도덕적 파산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전망에 직면하여 로자 룩셈부르크는 스스로 가장 결연한 투쟁에 투신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깊은 슬픔을 겪으면서도 용감한 정신을 유지했다. 그가 강인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론적인 노력과 다른 열정들(예를 들어 그림 그리기나 식물학)을 추구하는 능력을 통해서 그리고 외부로부터의 거대한 지원망을 통해서였다. 위장이 약해서 특별 식이요법이 필요했던 그는 감옥 밖으로부터 음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의 저작들은 반복적으로 감옥 밖으로 밀반출되었고, 이는 때때로 간수들의 묵인하에 이뤄졌다. 수감 중에 그는 많은 동지들과 서신 교류를 했고, 그들에게 충고를 주고 감옥에 갇혀서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지원했다. 감옥을 둘러싼 그 어떤 벽도 그를 침묵시키고 그가 개인들에게, 그의 동지들에게 그리고 노동자계급 전체에게 그의 지원을 제공하는 것을 막을 만큼 두껍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감옥 밖에서도 '들릴 수' 있었다. 그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날 약 천 명의 노동자들(그 대부분이 여성노동자)이 감옥 정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가 집까지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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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애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 3월 자모치(폴란드)에서 유대인 가정의 다섯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 1871년은 파리코뮨의 해였고, 제 1 인터내셔널 내에서 바쿠닌의 음모에 대항한 투쟁이 있었던 때였다. 17살 로자 룩셈부르크는 폴란드에서의 억압 때문에 스위스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고, 취리히대학에서 몇몇 과목들(식물학, 수학, 경제학, 역사 및 법학 등등)을 수학했다. 1897년 그는 '폴란드의 산업발전'에 관한 박사 논문을 제출했다. 1890년대에 이미 그는 폴란드 출신의 다른 동지들과 함께 제 2 인터내셔널의 오래된 원칙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발달을 감지할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제 2 인터내셔널의 저항에 맞서, 폴란드의 민족자결권이 더 이상 의제가 아니라고 결론지을 용기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입장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지배적인 입장과 특히 레닌의 입장과 마찰을 일으켰다.

     

      1898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로 이주하여 독일 사회민주당에 참여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에 하나의 경향이 출현했는데 그 주요 대표자가 베른슈타인이었다. 그 경향은 자본주의가 다소 위기에서 벗어난다는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 가능하다는 생각을 옹호했다. 사실상 베른슈타인은 운동의 목표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의 답변, 「혁명이냐 개량이냐」(1899)를 썼다. 그 시기 동안에 이미 그는 기회주의에 대항한 투쟁에 앞장섰다.

     

      1903년 그의 글 「마르크스주의의 침체와 진전」에서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죽음 이후 마르크스주의 운동에서의 침체를 비탄하며 새로운 이론적 노력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이유로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6년 옥중에서 쓴 「반비판」의 끝머리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기를, “마르크스주의는 언제나 새로운 인식을 얻으려고 애쓰는 혁명적인 세계관이다. 이는 한번 유용했던 표식에 형식적으로 되는 것을 철저히 혐오하며, 자기비판이라는 정신적인 격렬한 울림에서, 그리고 정신적인 천둥·번개에서 생명력을 가장 잘 유지한다.”

     

      1904년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에 뒤이어 러시아에서 최초로 대대적 파업의 큰 물결이 일어났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20세기 계급투쟁의 새로운 원동력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 중의 하나였는데, 이제는 노동자들의 주도성이 특징적인 요소가 되고 계급투쟁은 노동조합이나 당 기구에 의해 '계획' 될 수가 없다. 비록 로자 룩셈부르크가 노동자평의회의 역할을 아직 이해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책, 「대대적 파업, 당 그리고 노동조합」에서 그는 이러한 대중 활동을 강조했다. 계급투쟁의 이러한 새로운 원동력을 노동조합과 증가하는 독일 사회민주당 내부 인자들은 격렬한 투쟁으로 꺾어버리려 했다. 노동조합 기구와 밀접하게 협력하면서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당 내부에서 대대적 파업에 대한 논쟁을 금지했다. 1906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대적 파업에 관한 책 출판 후 “계급 증오를 조장했다”는 선고를 받고 2개월 동안 수감되어야만 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이전의 지도자로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적인 “교황”으로서 알려진, 칼 카우츠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과격한 노선에 점점 더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 시기 동안 로자 룩셈부르크를 “평화롭고”, “조화를 사랑하는”독일 사회민주당 안에 곤란을 유발하는 “유대인”, “외국인”, 그리고 “노처녀”라고 비방하는 캠페인과 중상모략이 강화되었다.

     

      1907년 점증하는 전쟁위협에 대응하여 조직된 제 2 인터내셔널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레닌 그리고 마르코프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자본주의 계급지배의 철폐를 촉진한다”는 공통된 지향을 위해 투쟁했다. 1912년 「자본의 축적」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의 저작들 속에 존재하는 한계와 모순들을 용감하게 지목했었다. 그녀의 책은 아직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고 그 외부에 존재하는 시장들의 역할과 군국주의의 특수한 기능을 파악하는데 기본을 제공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2년 전에 쓴 그 책은 자본주의의 기본모순들에 대한 필요불가결한 통찰을 제공한다.

     

      1914년 8월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배반이 있자마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 반대 투쟁에서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유니우스 팸플릿>은 그래서 1890년대 이래 새로운 조건들을 이해하려는 그의 투쟁, 제1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게 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조건들을 설명하려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직면한 도전을 설명하려는 그녀의 투쟁과 직접적인 연장선 속에 놓여있다. 1917년 여전히 감옥 속에 있으면서 그녀는 러시아에서 그때 막 시작된 혁명의 중요성에 대해 최초의 분석을 제공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18년 11월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지배계급은 그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두려워했다.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은 노동자계급에 반대한 그 당의 투쟁의 표적을 로자 룩셈부르크로 삼았다. 1918년 12월 베를린 노동자평의회에 그와 독일 노동자계급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 중 하나였던 칼 리프크네히트의 참여가 허용되지 않았는데, 그 핑계는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1918년 12월 독일 코뮤니스트당(KPD) 창립대회에서 강령에 대해 행한 연설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적 차원을 강조하면서 혁명이 테러로 복귀할 수 없으며 노동자계급 전체의 모든 에너지와 의식을 동원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매우 교활한 적에 대항한 재빠르고 쉬운 승리라는 당면(當面)주의적 환상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인 극소수 중의 하나였다. 결국, 그를 겨냥한 중상 비방 캠페인은 1919년 1월 그 극에 달했다. 1919년 1월 중엽 소위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진압되고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학살된 뒤 로자 룩셈부르크도 암살되었다. 지배계급은 당시 가장 용감하고 통찰력 있는 혁명가 중 하나를 일소해버리는 데 마침내 성공하고 만 것이다.

     

    <인용한 문헌>

    1. Takahashi, Shoichi <로자 룩셈부르크>

    2. ICC <로자 룩셈부르크의 독일사회민주당의 위기 [유니우스팸플릿]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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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9호] 칼 코르쉬 「레닌과 코민테른」

칼 코르쉬  레닌과 코민테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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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코르쉬 소개

 

칼 코르쉬는 그람시루카치와 더불어 서구 3대 맑스주의자다. 1920년대 볼셰비키 당사와 역사를 암송하는 이들에게칼 코르쉬는 불편한 인물이다코르쉬는 1920년대 독일코뮤니스트당 안에서 코뮤니스트 정치지를 중심으로 분파활동을 했는데, “자본주의는 안정화되지 않았고주체적인 혁명정치를 위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독일코뮤니스트당은 의회주의 백치’ 태도를 버리고, “노동자평의회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를 주장했다또한 코르쉬는 러시아가 자본주의로 회귀했으며새로운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었다혁명정치와 관련해서 타협을 거부하던 코르쉬와 소련이 주도하는 코민테른은 당연히 갈등관계에 있었는데아니다 다를까스탈린이 직접 나서서 1926년 7월 중앙위원회 총회 자리에서 코르쉬를 초좌파(ultra left)로 맹공을 퍼부었다예상되는 정치 수순으로(!), 코르쉬는 독일코뮤니스트당에서 축출된다그때나 지금이나 정치 소수파는 재정 문제가 중요한데코르쉬 그룹이 발간한 코뮤니스트 정치는 코르쉬가 받는 국회의원 월급으로 근근이 발간을 이어가다, 1928년에 발간을 중단한다.

 

코르쉬 그룹은 노르웨이 좌파 코뮤니스트이탈리아 보르디가 그룹과 국제적 관계를 맺고레닌과 노동조합 논쟁을 벌였던 러시아 노동자 반대파 (worker’s opposition) 실리아프니코프를 지지했다트로츠키가 주도한 좌파 반대그룹(the left opposition)에는 반대했다. 1933년 나찌가 집권하자 코르쉬는 정치적 망명길에 나서는데이로써 고독한(?) 사상투쟁을 벌였던 정치조직 활동은 중단된다.

 

1920년대와 1930년대 걸쳐 좌익공산주의자로 활약하면서 코르쉬가 굳게 믿었던 맑스주의 혁명이론은 프롤레타리아 실천과 의식이었다우리가 흔히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을 통일적으로 얘기하지만코르쉬가 볼 때 최초의 계기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즉 실제 혁명운동에서 주어 진다예를 들어혁명이론은 지도부나 이론가들에 의해서 외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표현이어야 한다요컨대 노동자를 위한 혁명일지라도, ‘노동자가 나서지 않는 방법이라면 코르쉬는 거절하는데이러한 그의 고집은 노동자평의회 강조로 이어진다코르쉬에게 맑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 안에서 직접 정립되며부르주아 사회 제도생활양식과 완전한 단절을 이루는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 투쟁을 강조한다. (남궁원, “혁명적 코뮌칼 코르쉬”, 코뮤니스트2, 2013)

 

코르쉬와 레닌주의

 

1920년대 독일코뮤니스트당에서 정치적 활동을 하는 동안코르쉬에게 소련과 레닌주의는 주요한 논점이 되었다레닌과 소련에 관한 그의 입장은 변화하는 역사적 상황이라는 복합체의 양가성을 반영하기에 크게 모순적이다개략적으로 코르쉬의 입장은 세 단계로 분류될 수 있는데첫 번째는 레닌주의와 소련에 전심전력하여 집착하는 것으로 두드러지는 열광적인 레닌주의의 시기이다이 입장은 나중에 자신이 편집자로 있는 코뮤니스트 저널인 인터내셔널에 발표한, 1924년 코민테른 세계대회에서 코르쉬가 한 연설인 레닌과 코민테른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코르쉬는 진정한 혁명정치를 위한 토대로서 레닌주의를 전적으로 옹호하고 레닌주의가 일련의 모든 정치적이론적 과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믿는다따라서 레닌의 유산을 이론적으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상속하여 보존하고 활력을 불어넣는 것과현재 상황에 레닌의 정신을 그것의 이론과 실천 속에서 역사적 현실로서 한층 발전시키는 것은 코민테른 전체의 의무였다.

 

코르쉬는 자신의 이론적이데올로기적 기능 속에서 죽은 레닌을 살아있는 레닌주의자들의 크고 강력한 집합체로써” 대체하는 임무를 제안했다레닌주의를 전유하고 발전시키는 이 기획은 세계역사상 이러한 형태로 당 앞에 제기된 적이 결코 없는 아주 거대한 임무로 서술된다코르쉬의 레닌주의에 대한 온갖 집착의 지표로서레닌주의를 소련 내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이론으로 역사화시키려고 한 독일코뮤니스트당 이론가인 탈하이머와반면에 레닌주의와 소련의 모델이 세계혁명운동에 대한 일반적 타당성을 담지한다고 본 코르쉬의 논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코르쉬는 치고 올라오는 코뮤니스트적 수정주의의 쇄도에 맞서 방어벽을 요청하면서 결론짓고레닌주의에 대한 총체적 헌신을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방법이론전략으로서 옹호한다코르쉬의 철저한 레닌주의의 배경은작센과 튀링엔의 노동자 정부에 대한 폭력 탄압과 뒤이은 코뮤니스트당 불법화 이후 1923년 독일 연합전선의 붕괴였다코르쉬에게 이 경험은 무너져가는 독일 운동을 부흥시키기 위해서 더 성공적인 레닌주의 혁명 이론과 전략으로 전환할 필요성을 의미했다이러한 계획으로새로운 역사적 사건들이 정직하고 헌신적인 혁명가 코르쉬가 자신의 레닌주의를 근본적으로 묻도록 강제하여 결국 레닌주의와 결별하기 전까지코르쉬는 이후 몇 년 동안 헌신적인 레닌주의자가 되었다.

 

레닌 및 소련과 관계맺는 코르쉬의 두 번째 단계는 처음에는 소련과다음에는 레닌주의 자체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발전과 관련된다이 전환의 배경은 독일코뮤니스트당이 코르쉬를 제명하고 그가 좌익반대파의 선봉으로 이동한 것이다코르쉬는 혁명적 레닌주의 이론과 소련 및 독일코뮤니스트당 내 스탈린주의자들의 점증하는 반혁명적 실천 사이의 모순을 주목했다코르쉬가 표명하는 스탈린주의와 소련 비판의 입장은 코르쉬가 믿기에 순수히 레닌주의적이고 혁명적이었던 소련과 독일 운동 내 좌익반대파 세력들과의 자기 동일시였다(당시 코르쉬에게 레닌주의적임과 혁명적임은 동의어였다). 그는 레닌주의의 퇴보와 반혁명적 퇴행으로 이어지는 스탈린과 그 동맹자들 속에 구현된 기회주의개량주의 세력들의 승리를 우려했다이 입장은 소련에서의 10년의 계급투쟁이라는 소론에서 명백히 나타난다코르쉬는 양자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라는 교의에 이론적 정식화의 근거를 두는, “러시아 국가의 필요성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요성” 사이에 발전하는 모순을 보았다이것은 세계혁명운동이 소련의 이해관계에 종속되는 것과그리하여 자율적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붕괴를 의미했다(우리가 상기할 것은처음에 코르쉬는 소련의 이해관계와 세계혁명운동 사이에 어떤 모순도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좌익반대파 세력의 패배와 함께레닌주의는 더 이상 혁명적 실재가 아니라 소련코민테른독일코뮤니스트당의 반혁명적 정책을 정당화에 쓰이는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렸다따라서 이제 코르쉬는 레닌 자체를 비판해야할 때가 되었다고 보았다이 때 주목해야 할 것은좌익반대파 시기의 초기에도 코르쉬가스탈린주의를 레닌주의의 퇴보라고 비판한여전히 신실하게 믿는 레닌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그러나 좌익반대파의 분열 및 패배와 함께동일시할 수 있는 어떤 혁명적 레닌주의 세력도 더 이상 없었고그리하여 레닌주의와의 날카로운 결별의 필요만이 남았다.

 

다음 글은 코르쉬가 열광적인 레닌주의자였던 시기, 1924년 코민테른 세계대회에서 코르쉬가 한 연설문이다.

 

<편집자 주>

레닌과 코민테른인터내셔널, 1924.6.2. 이 선집에 로이 제임슨이 Lenin and the Comintern으로 번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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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과 코민테른

 

 

5차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세계대회 의제의 첫 번째 항목은 레닌과 코민테른레닌주의의 기본 원칙들과 선전이라고 되어 있다이것은 단지 레닌주의 정신에 대한 대회의 헌신만을그리고 진정한 레닌주의 정신 속에서 그들 앞에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참가자들의 널리 인지될 수 있는 의지의 선언만을 가리키지 않는다이것은중유럽과 서유럽의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지난해 투쟁의 초점에 관여하고 이후 의제에 등장하는 특수한 문제들이의제의 두 번째 항목을 차지하는 경제적 상황의 분석 이전에 처음부터 주의되어야 한다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는다명백하게도 중유럽서유럽 및 아메리카의 코뮤니스트들의 모든 임무들 가운데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현 발전시기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레닌이 우리에게 배정한 임무즉 노동계급의 가장 중요한 계층의 다수파를 획득하는 것이다더욱이아직 해결되지 않은 이 문제는 오직 레닌주의 정신 속에서만 진실로 해결될 수 있다다시 말해레닌이 급진주의에 관한 고전적 저술(좌익공산주의유아적 무질서)의 말미에 아주 인상적인 방식으로 러시아 볼셰비키의 역사와 유럽 당의 경험에서 그 유래를 찾았던정확히 “[몇 가지]결론의 정신 속에서다이른바 공동전선 전술이 있은 지 4년 후그 때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레닌이 4년 전에 표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1924년 오늘날 서유럽과 아메리카의 현대 코뮤니스트의 주요 임무, “대중을 현실의 결정적인마지막으로 위대한 혁명투쟁으로 이끌아직 완전히 혁명적이지 않은 척도와 방법의 구체적인 계획을 발견하고깨닫고실현하는 것이다그러나 레닌주의자들의 이 주요한 실천적 임무의 해결은 의제에 관한 모든 일련의 항목들과 관련이 있는 것이지특히 단독적인 하나의 항목이 아니며이러한 의미에서만 그 해결은 레닌주의의 기초와 선전을 말하는 이 첫 번째 항목과 더불어 다른 모든 임무에 이바지하는 것이다그 해결은 다음과 같이 귀착된다오늘날 코민테른 전체는코민테른의 위대한 창설자이자 지도자인 V. I. 레닌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 이후자신이 레닌의 유산을 이론적으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상속하여 보존하고 활력을 불어넣는 것과현재 상황에 레닌의 정신을 그것의 이론과 실천 속에서 역사적 현실 즉 레닌주의로서 한층 발전시키는 것을 기꺼이 할 수 있음을이제 처음으로 보여줄 수 있고 또 보여주어야 한다따라서 이런 방식으로 코민테른은 그의 이론적이데올로기적 기능 속에서 죽은 레닌을 살아있는 레닌주의자들의 크고 강력한 집합체로써 대체해야만 한다.

 

레닌과 코민테른을 5차 세계대회의 의제로 설정하면서집행위원회는 이 위대한 임무(세계 역사상 이러한 형태로 당 앞에 제기된 적이 결코 없는 아주 거대한 임무)의 이행을 위하여레닌의 자연적인 주요 상속자인 러시아 볼셰비키당뿐만 아니라 우리의 위대한 코뮤니스트당의 다른 모든 지부들즉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도 이론적실천적으로 함께 노력해야 한다또한 대회 자체는 이 길을 따라 첫 번째 중대한 발걸음을 내딛어야 할 것이다대회의 임무는 확실하고 완전하며 상세하게, “레닌주의의 선전”(의제에서 유일하게 불확정적으로 지시된)의 슬로건을 코민테른 전체에 타당한 방식으로 정식화하는 것일 터이다또한 그들의 상황과 발전 상태에 따라 인터내셔널의 각 지부에 특히 중요한 개별 임무들을 지적하는 것과이 모든 임무들의 해결을 실행해야 할 더 큰 지도 원칙들을 결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5차 세계대회의 의제에서 첫 번째 항목의 중요성은 훨씬 더 광범위하다. “레닌주의의 선전을 구성하는 다방면의 부분적 임무에 대한 더 자세한 규정과 함께대회는 오직 (우리가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기술적 측면에 따라서 레닌주의의 물음에 관한 입장을 가질 것이다명백하게도그 물음의 이 기술적 측면 또한 너무나도 큰 중요성을 지닌다. “레닌주의의 선전은 위대한 코뮤니스트의 혁명의 조직이라는 총체적 임무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그리고 물론 이 선전의 임무를 정확히 이행하는 것은아직 국가권력을 획득한 적이 없는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지부들(따라서 이미 합법화된 모든 유럽과 아메리카의 지부들이지만아마도 처음에는 불법적 조건 하에 있었을 지부들)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의 소련에서보다 훨씬 더 곤란한 것으로 나타난다그러므로 그러한 나라에서대체로 그 임무의 이행은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최고기관인 세계대회를 통해서 더 정확한 설명과 규정을 요구하는전적으로 서로 다른 형식들(각 나라의 특수한 상황에 정확히 일치하는)을 띠어야만 할 것이다그러나 다소 기술적인 이 물음들은 결코 문제의 핵심을 포함하지 않는다.

 

실제로 볼셰비키 이론의 방법 그 자체는 레닌과 코민테른레닌주의의 기초와 선전이라는 문제를 포함시킴으로써 그 의제에 관하여 제기된다. “레닌주의의 기본원칙들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모든 지부에서 이러한 원칙에 근거한 레닌주의적 선전 체계의 발전을 해명함으로써볼셰비즘의 이론가인 레닌이 맑스의 혁명적 방법을 복원하고 그것을 이른바 통일된 제인터내셔널 맑스주의자들의 곡해와 혼란에 맞서 대립시킨 그 형식에서 맑스의 혁명적 방법을 공통된 토대로 삼아 코민테른 전체는 이데올로기적으로 하나의 견고한 통일체로 용해되어야 한다우리의 혁명적 볼셰비키 이론의 방법만이 아니라의제의 세 번째 항목인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프로그램도 레닌주의의 문제에서 토론에 부쳐진다.

 

 

5차 세계대회가 극도로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극도로 어려운 임무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그것은 레닌주의의 방법론적 기초를 예리하고 정확하게 정식화하여 이 기초 위에 방법적이고 체계적인 레닌주의 선전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내에서 이데올로기적 통합과정은 코민테른의 모든 지부들과 집단들이 그 본질적 특징이 모두에게 동일한 하나의 이론적 방법에 헌신하게끔 하는가?

 

이 점에서 그 임무의 급진적인 해결에 거의 여지를 주지 않는 막대한 곤란들이 발생한다한편으로우리는 아직도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의 다양한 지부들 특히 독일코뮤니스트당에서 유일하게 타당한 맑스 이론의 방법인 레닌주의에 대한 단일한 헌신을 전혀 말할 수 없다다른 한편으로하나의 방법인 레닌주의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관련하여현재 본질적인 특징들 속에 서로에게서부터 출발하는 몇 가지 시각들이 존재한다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조직에 속하고 자신의 실천적 정치학 속에서 레닌에 따라” 행동할 각오가 된 수많은 지도적인 다른 맑스 이론가들은 과학적 맑스주의가 복원된 ” 방법인 레닌의 방법의 원리를 이론에서 거부한다그들은 레닌주의적 방법을 현시기(국제적 범위와 유럽 및 아메리카의 국가적 범위에서 아직 정치적 권력의 장악 시기로 대표되지 않는 시기에!) 프롤레타리아계급투쟁의 실천적정치적 목적을 충족하는 하나의 방향설정 방법으로서 인정하지만가장 구체적이고 진정한 유물변증법의 방법으로서즉 혁명적 맑스주의가 복원된 방법으로서는 인정하지 않는다그들에게 타당한 방법은 독일코뮤니스트당의 창설자인 로자 룩셈부르크의 방법이거나그게 아니라면 룩셈부르크주의적 방법뿐만 아니라 레닌주의적 방법도 편향적이라고 선언하고 오직 과학적 성숙 시기의 칼 맑스가 적용한 방법만을 진정한 맑스의 방법으로 인정하기를 원한다이 짧은 소론에서 레닌주의적 방법(하나의 방법으로서혹은 과학적 맑스주의의 ” 방법으로서)에 대한 이 무조건적 적대자들과의 제대로 된 논쟁을 시작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이 과제는 가능한 한 큰 규모의 코뮤니스트 이론계의 집단작업으로 이 저널의 다음 호에서 다루어질 것이다현재로서는 볼셰비키의 정치적 실천과 (레닌에 의하여혁명적 맑스 이론이 복원된 형태가 불가분하게 응집된 통일체를 정립한다는 관측에 만족하자그런데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위한 코뮤니스트당의 역할에 관하여어떻게 이 통일체를 제2차 세계대회의 결의에 관한 코뮤니스트적 입장인 실천적 정치가로서그러면서도 동시에 유물변증법의 룩셈부르크에 특유한 형태로 경제발전과 프롤레타리아계급투쟁 간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과학적 맑스주의자로서 간주하게 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우리에게는 레닌이 복원하여” 한 발 더 나아간인간의 감각 활동과 실천 자체를 그것의 객관화된 현실 속에서 이해하는맑스의 완전한 유물론적” 유물론의 입장에서만 당 역할의 볼셰비키판이 인정된 것으로 보인다다른 한편으로실천적 측면에서 레닌주의적 변증법만큼 거의 유물론적이지는 않은 룩셈부르크주의적 변증법의 입장에서 보면당 역할의 레닌주의적 설명에는 언제나 주관주의의 고통스러운 잔재가 있다그러나 어쨌든룩셈부르크주의적 맑스주의자와 레닌주의적 맑스주의자가(여기에는 세 번째로 룩셈부르크의 더 나아간 발전도순수하고 완전한 맑스주의로서 맑스 방법의 레닌주의적 복원도 인정하지 않는 맑스주의자들이 추가되어야 한다5차 세계대회에서 공동으로 동의할 수 있는 레닌주의의 기본원칙에 관한 해결과, “레닌주의적 선전의 체계가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전체의 동일한 이 이론가들에게 압도적 동의를 얻은 코뮤니스트적 프로그램이 불만족스러운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피하게 존속할 것이라는 점은 아주 분명해 보인다맑스 이론의 룩셈부르크주의적 방법과 레닌주의적 방법 간의 관계에 대한 완전한 해명은 레닌주의의 기본원칙과 선전의 결정에 불가결한 전제들로 구성된다.

 

룩셈부르크주의자와 레닌주의자 사이의 갈등과 상관없이오늘날 이론적 방법으로서 레닌주의의 본질 문제에 관한 일반적 동의는 부재하거나더 강하게 말하면 오늘날 이 동의는 이전보다 훨씬 덜 존재한다그리고 맑스주의 코뮤니스트당의 방법론적 의식이 당의 실천 외부에혹은 그 어떤 의미에서도 그 상부에 있지 않고오히려 이 혁명적 실천 자체의 중요한 요소를 구성하기 때문에격렬한 위기의 결과로서 볼셰비키 실천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이 쓰라린 분파적 논란의 대상이 되어버렸을 때레닌주의의 이론적 방법 문제도 투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가야만 한 것도 전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그러므로 우리가 다시금 레닌주의적 변증법의 방법의 결정에 있어 현재 착수된 시도(다양한 측면에서 착수된속에서오늘날 실제로도 코민테른 내부의 전술 및 다른 실천적정치적 문제에 관한 투쟁에서 서로 대립하고 있는 모든 분파들을 발견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새로운 코뮤니스트 저널 노동자문헌(Arbeiterliteratur)의 1/2권에 나온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일부 문제들에 대한 레닌의 유물변증법 적용에 관하여라는 탈하이머 동지의 소론은 이 점에서 특히 흥미롭다.

 

 

탈하이머 동지는 레닌이 맑스와 동일한 대담성과 통찰 및 엄밀성과 더불어 적용한자신에 의하면 동일한 유물변증법의 맑스주의적 방법일 뿐인 레닌주의적 방법을 해명하고자 한다그는 세 가지 구체적인 물음들즉 프롤레타리아독재 문제농업 문제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전쟁 문제의 전개를 통해 이것을 할 것이다프롤레타리아독재 문제에 관한 절은 레닌이 국가의 소비에트적 형태를 노동계급 독재의 마침내 발견된 정치적 형태로서가 아니라오히려 국가의 새로운 유형”, 그러니까 일탈하는 이 유형의 변종형태의 가능성이 포함되는 국가의 유형으로서만 특징지었다는 언급으로 맺는다농업 문제에 관한 절은 레닌이 이 문제를 다룸으로써 유물변증법적 방법의 각별히 교훈적이고 엄밀한 적용을 부여했다. (탈하이머의 묘사에 따르면이 적용은 레닌이 프롤레타리아혁명 문제의 핵심즉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권력의 이전을 수호하고자이전 볼셰비키적 농업 프로그램의 경직된 모든 요구들을 기각하도록그리고 다른 모든 것은 생활의 과정 속에서 실례(example)의 힘의 결과 즉 실천적 고려의 결과로서, “저절로” 될 것이라는 것을 신뢰하도록 용인했다는 사실에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절에서 탈하이머 동지는 레닌이 민족 문제를 취급한 것을 구체적 변증법적 분석의 진정한 모델로서 특징짓는다레닌은 한편으로는 사회적 애국주의의 허위를 비판적으로 무효화시켰고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전쟁 중인 유럽에서일지라도 특정한 조건하에서 제국주의 전쟁으로부터 민족주의 전쟁으로의 전화는 확실히 개연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았음” 또한 강조하였다.

 

우리는 탈하이머 동지가 이 중요하고 어려운 세 문제들에 대한 레닌의 해결책을 평가할 때의 흠모로부터 한 치라도 뒤로 물러서고자 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즉 레닌이 탈하이머 동지가 묘사한 이 문제를 취급하면서 맑스주의 유물론적 방법 적용의 그토록 각별히” 교훈적이고 엄밀한 실례들을 어느 정도로 부여했는가라는 이 문제를 아주 신중하게 제기해야 한다예컨대농업문제에 대한 레닌주의적 접근에서 유물변증법적 방법의 각별히 교훈적이고 엄밀한 사용은 무엇에 있는가주지하다시피 칼 맑스는그들이 스스로 즉시 그들에게 고유한 상황 속에서 그들의 혁명적 활동의 내용과 소재(material)를 발견하는 데까지즉 적을 때려눕히고전쟁 요구에 의해 주어진 수단을 장악하고그들만의 행위 결과를 진척시키는 데까지 상승하게 되자마자 혁명적 계급의 역량을 인정하였다그들은 자신에게 고유한 임무의 상위에 있는 이론적 작업에 착수하지 않는다.”(프랑스에서의 내전디츠 판, 31러시아 혁명의 이론가들과 실천가들은 투쟁의 한복판에서, “그 자체로부터” 생활 속에 그리고 이 생활의 일부인 혁명적 계급투쟁 속에 보급되는 동일한 권리를 지니고서내재적무의식적그리고 자연적인 변증법에 의지할 수 있었다그러나 레닌은 변증법적 방법을 여기에정확하게는 그가 (맑스와 말하기 위해) “이론 작업의 착수를 거부하는” 데에 적용하는가레닌은 그것에 의하여 각별히 교훈적이고 각별히 엄밀한” 형식으로 변증법을 적용하는가?

 

오히려 우리가 제안하는 것은그와 반대로 프롤레타리아혁명이라는 역사적 과정의 견지에 따라 온전히 파악되어야 하는 고도로 발전한 유물변증법이그 물질적 생활 현실의 구체적인 역사적 과정이 확실히 변증법적으로 진행하지만 그 진행 과정의 특정 지점에서 변증법론자에 의해 파악될 수 없는그 한계에 다다르는 상태에 정확히 도달하였다는 것이다그것은 이 한계의 존재를 무시하지 않기 위한 맑스주의 방법의 엄밀한 이론의 요구조건에 속한다하지만 이 속에서 맑스와 레닌의 유물변증법의 현실적 핵심을 정확히 알고자 할 때 그것은 이미 과도하다마찬가지로또 다른 방식으로탈하이머 동지가 레닌의 맑스주의적 방법 적용의 두 다른 선택된 실례를 분명히 진정한 유물론에 속하지만 결코 형이상학적 방법론에 속하지 않는 방식으로 구성한다하더라도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가장 내적인 본질즉 일반적으로 맑스주의와 레닌주의의 유물론의 주요 특징과 핵심을 구성하지는 않는다또한 그가 세 가지 실례들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취한 맑스 레닌주의적 방법의 본질 왜곡 외에도탈하이머 동지는 더 나아가 그의 소론의 서문 및 산발적인 언급에서 똑같이 왜곡된이 방법의 본질에 관한 일반 이론을 추가한다그는 맑스뿐만 아니라 레닌의 유물변증법적 사유의 결과들이그 사유가 유래하고 그 사유에 대해 결정되는 순간적인 경험영역의 범위를 넘어설 때전혀결코어떤 형태로도 일반적으로 타당할 수 없다는 캐리커처[풍자적 모방속에서진리는 항상 구체적이라는 맑스의 기본 원칙을 과장한다마치 맑스(예컨대미하일로프스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와 레닌(예컨대, “어떤 형식으로 러시아 혁명의 국제적 중요성을 언급할 수 있는가?”라는 부제의 급진주의에 대한 소개

에서)이 그들의 유물변증법 연구의 결과들을 그러한 일반적 중요성을 지닌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아주 엄밀하게 구별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그렇다면 어떤 의미로 이미 알려진 현재 경험의 범위를 넘어서 도달하려는 것만을 부여하는 유물변증법적” 방법의 가치는 무엇인가혹은 더 나아가탈하이머가 표현하는 것처럼한편으로 이론적 반성(!), 즉 특수한 시대의 분석이자다른 한편으로 특수한 시대일 때와 마찬가지로”, 단지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을 위한 지침들일 뿐인역사적 결과들만이 초래되는가?

 

사실 탈하이머 동지가 만들고 맑스 레닌주의 유물변증법으로부터 변형된이 새로운 방법은 유물변증법과 더 이상 아무 관계도 없다맑스와 레닌의 변증법적 방법론을 순수한 경험과 실천의 역사과학의 방법으로서 아주 물질적으로” 파악하려는 그의 노력에서탈하이머 동지는 이미 유물변증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넘어서버렸고완전히 비변증법적인 역사주의실증주의실용주의를 달성했다앞에서 지적한 것처럼로자 룩셈부르크가인간 실천에 관한 그녀의 견해에서 온전히 유물론적으로 되지 못하여이 점에서 헤겔 변증법론자로 남게 된 반면에이에 반해 탈하이머 동지는 헤겔 변증법의 잔재와 함께 동시에 맑스주의 과학의 방법론의 모든 변증법적인 것을 축출해버렸다탈하이머의 입장에 따르면본질적으로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역사적 과정과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역사적 행동으로서 구체적으로 함축하는맑스의 유물변증법적 방법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른 고립된 역사적 사실성의 순전히 수동적이데올로기적인 반영으로 변형된다.

 

실제로 이러한 맑스 레닌주의적 변증법의 본질에 대한 이론적 곡해는 맑스엥겔스레닌 및 다른 이들이 얻은 모든 성과를 이러한 방법에 의하여 평가절하하는 것으로 귀결된다그리고 맑스 레닌주의적 연구 방법의 성과를 평가절하하는 이러한 경향이 어디서 유래하고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아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탈하이머가 수백 번 반복한 예로 들자면소련 국가는 가능한 종과 변종이 있는 단지 하나의 유형으로서 레닌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는 것이다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오직 이러한 성과들로부터 스스로 벗어나고자 할 때만맑스 레닌주의적 방법론의 성과들을 이토록 평가절하할 수 있다소비에트 국가를 가능한 형태들의 다수성이 있는단지 하나의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유형으로 보는 견해는 레닌주의의 이론가들이 평의회 독재의 엄격한” 형태(레닌에 따르면한층 더 발전할 수 있지만그렇다고 해도 민주주의의 ” 사회주의적 형태의 ” 시초인)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고예컨대 작센 노동자정부처럼이 유형의 다양하고 가능한 변종” 및 퇴화에 이르도록 만든다또한 다른 모든 맑스주의와 레닌주의 이론의 성과도 마찬가지다그 성과들이 모두 특유한 역사적 전제에 구속되고단지 특수한 시간과 장소의 관계에 적용될 수 있는 순수한 역사의 산물이라면새로운 관계 하에서새로운 경험과 변화된 정치적 요구에 반해서이전의 맑스주의의 성과이 타당성을 상실할 것이고그 성과이제 이 새로운 상태가 유물변증법의 레닌주의적” 적용을 위하여 그 속에 반영된”, 새로운 지식과 지침에 의해서 대체될 수 있거나 대체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맑스와 레닌의 혁명적 변증법적 유물론을더 이상 변증법적이지 않으므로 더 이상 혁명적이지 않은(역으로도더 이상 혁명적이지 않으므로 더 이상 변증법적이 않은), 순수하게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과학과 실천으로 변형시키면서탈하이머 동지는 실제로 경향 상 혁명적 맑스주의의 방법 대신에 기회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방법을 매력적인 레닌주의의 외피 아래 둔다.

 

 

우리가 이처럼 상세한 설명으로써 레닌주의적 방법에 관한 탈하이머의 견해를 다룬 것은단지 탈하이머 동지가 제5차 대회의 프로그램의 문제에 관한 두 번째 연설자로서 지명되어서그로 인해 대회에서 그가 방법론으로서 레닌주의의 본질 문제에 있어서 특별히 주목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그보다 중요하게, “레닌주의의 기본원칙을 결정하려는 시도특히 제5차 세계대회에서 레닌주의적 방법의 본질의 고정하려는 시도가 단지 현재의 거대한 난관에만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이를 넘어서 어떤 위험에도 구속된다는 것을자세하고 명확하게 전형적인 실례로써 제시하는 것이 긴요하다이 위험은 그것이 정확히 외관상 순수하게 이 이론적인 영역에서 여전히 전혀 인정되지 않고관찰되지 않는 한에서그리고 분파들의 실천적 투쟁으로부터 아주 거리가 먼 한에서는 오히려 더 큰 것이다최근 존경 받는 레닌주의의 혁명적 깃발 아래 다양한 수정주의적개량주의적기회주의적청산주의적 금제품을 혁명적 코뮤니스트의 이론과 실천에 밀수해 들어오려는 시도들이 있다가장 내적인 토대에서 탈하이머가 지금 정식화한 레닌주의적 방법의 이론은 단지 그릇된 정치적 실천의 그릇된 이론을 의미할 뿐이다기회주의와 개량주의의 공동전선 전술이 라이프치히 당대회 이후 독일에서 적용된선동과 대중동원의 혁명적 방법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탈하이머와 그의 가까운 동지들의 레닌주의적” 방법도 혁명적 레닌주의의 순수한 방법과즉 레닌이 복원하고 완성한 혁명적 맑스주의의 변증법적 방법과 관계가 있다이 입장의 근본을 해명하는 데서5차 세계대회는 코뮤니스트 정치의 다른 모든 즉각 실천적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레닌주의의 기본원칙 문제와 프로그램의 문제에서 치고 올라오는 코뮤니스트적 수정주의의 쇄도에 맞서 특별한 방어벽을 세워야 할 것이다이 부정적 기능의 이행에 의하여이 대회는 그 본질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혁명적 행동의 이론적 의식에 다름 아닌레닌이 복원한 혁명적 맑스주의 과학의 완성된 방법의 위협적인 붕괴를 강력하게 저지할 수 있다코민테른 발전의 현국면에 있어서방법으로서 레닌주의의 본질을 긍정적[실정적]으로 고정하는 것은코뮤니스트 정치의 전시기에 타당한최종적인(궁극적인코뮤니스트 프로그램의 고정하는 것만큼이나 적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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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9호] 국제코뮤니스트 오세아니아 소개

국제코뮤니스트 오세아니아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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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국제코뮤니스트 오세아니아는 계급 사회와 사유 재산 폐지라는 장기 목표를 가진좌익 공산주의자들의 재편성 활동입니다다시 말해인류의 지속적인 생존을 위해 젊은 세대의 생애에 코뮤니스트 사회를 이루기를 우리는 원합니다현시대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말이 들어맞았고 절박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당면한 목표는 오세아니아 지역에서 맑스주의 입장을 가진 조직의 감소로 코뮤니스트 운동을 단념한 동지들을 재편성하는 것입니다이미 우리와 같은 입장을 가진 동지들을 재편성하는 것뿐만 아니라새롭게 또는 맑스주의를 잘못 이해한 코뮤니스트를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또한 맑스주의 교육을 위해 접근 가능한 온라인 공간을 만들려고 합니다.

 

국제코뮤니스트 오세아니아 조직에 참여하려면아래의 정치 입장을 읽고우리와 연락할 것을 제안합니다우리의 입장과 조직에 대한 어떤 질문에도 우리는 기꺼이 답할 것입니다.

 

 

정치 입장

 

 

1. 우리는 코뮤니스트로서 코뮤니즘이 인류 생존을 위해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본다.

 

2. 자본은 자본가계급과 임금노동 프롤레타리아트 사이 역사적 사회적 관계다우리는 자본을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의 산물이라고 규탄한다따라서 정부의 외형적인 형태와 관계없이 자본주의를 반대한다.

 

3.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수행하는 국제적 혁명을 코뮤니즘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본다이것은 자본과 계급 자체를 파괴해야만 달성할 수 있다.

 

4.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당이거나 그것의 유일한 중핵이라고 믿지 않지만계급의 중추적 역할을 할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 당 설립을 지지한다다시 말해 우리는 당이 아니라 당을 위해 존재한다.

 

5.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조국이 없는 이주민의 계급이라고 이해한다현재 자본주의 쇠퇴시대에 우리는 민족-국가가 어떠한 유용한 목적도 갖고 있지 않다고 본다모든 민족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자기조직화와 국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달려 있다.

 

6. 우리는 모든 실제로 존재(자임)하는 사회주의를 국가-자본주의로 간주한다우리는 그들의 활동과 정당(국제기구를 포함)을 부르주아 계급의 도구로 본다.

 

7. 우리는 모든 계급주의 이론을 낮은 계급의식 표현으로 프롤레타리아트 이해관계와 계급 단결에 어긋나는 것으로 본다이러한 반응은 자본주의 사회의 골칫거리인 사회적 적대 앞에 서면 이해할 수 있다우리는 계급 사회에서 비롯된 모든 형태의 억압을 폐지할 것이다.

 

8. 우리는 노동조합이 프롤레타리아트 저항을 억제하고우리가 정복하거나 혁명적인 기구로 전환시킬 수 없는 자본주의 국가 기관이라고 이해한다우리는 개별적인 평조합원 가입에 반대하지 않는다그러나 계급투쟁이 격화되면 노동조합은 반혁명 세력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우리는 동료 노동자들에게 직접 혁명 기관을 만들라고 요구한다.

 

9. 인간의 필요와 풍요가 이윤보다 우선시되는 세상을 보고 싶다면인간은 자본의 존재에서 벗어나야 한다개인의 발전과 인류의 성공을 촉진시키기 위해 현 자본주의 체제를 폐지해야 한다.

 

 

국제코뮤니스트 오세아니아 (Internationalist Communists Oce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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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9호] 칼 리프크네히트 기억하기

칼 리프크네히트 기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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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는 위대한 이론가가 아니었다로자 룩셈부르크와 달리 그의 이름과 영원히 연결될만한 주장 글이나 정치 경제에 관한 주요 논문을 그는 쓰지 않았다.(심지어 노동가치설에 대해 의심하기까지 했다.)(1) 그는 능숙한 정치가도 아니었다전쟁 전에는 맑스의 동료이자 독일사회민주당(SPD) 공동창립자의 아들로 유명했는데(2) 전쟁 후 그는 사회민주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매우 꺼렸다.

 

그러나 리프크네히트는 원칙적인 사람이었다유명한 자유주의 역사학자 세바스찬 하프너(Sebastian Haffner)는 그를 "독일이 배출한 가장 용감한 사람 중 한 명"이라고 묘사했다.(3) 그는 자신이 어느 날 갑작스러운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증명했으며그중 일부는 다음의 단편에서 읽을 수 있다리프크네히트는 1918년 4월에 루카우(Luckau) 감옥에서 이 글을 썼다때로는 장황하고 급하게 쓰기도 했지만내부와 외부 변증법주제와 대상의식과 조건 같은 중요한 주제를 다뤘다따라서 그것은 오늘날에도 관련이 있다.

 

리프크네히트가 여기서 확인하기를 바라는 것은 트로츠키가 몇 년 후 "적절한 순간"으로특히 실패한 독일 혁명과 관련하여, 1917년 10월의 교훈을 되새기며 이론화하려고 시도한 것이다.(4) 게오르크 루카치(Georg Lukács)는 이 문제를 아우겐블릭(Augenblick : 순간이라는 다소 철학적인 용어로 표현했다계급의식이 있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객관적인 사건 과정에 주관적으로 개입하여 자본주의를 총체적으로 교란할 수 있는 순간 또는 눈 깜박할 사이로 표현했다종종 이것은 조건의 "성숙"으로 논의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거의 엉망진창으로 죽었다.”고 폴 매틱은 나중에 회상했다.(5) 사실그들의 마지막 글에는 이미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는 것처럼불길한 예감이 감돌고 있었다오늘날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하고 지도자들을 살해한 지 100년이 지난 지금이 살해당한 혁명가들이 남긴 작품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Walt Auerbach

 

칼 리프크네히트의 사회주의 외교 정책」 읽기  ▶  코뮤니스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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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922년 사후에 출판된 그의 맑스의 비판의 주요 특징(Grundzüge einer Marxkritik)을 참조 바란다.

 

 

(2) 빌헬름 리프크네히트(Wilhelm Liebknecht)와 룩셈부르크는 때때로 리프크네히트가 당에서 "태어났다"고 농담을 하곤 했다. 1914년 8월 이전에 그는 독일사회민주당(SPD)의 청소년 부문을 보강하기 위해 대부분의 노력을 기울였다전쟁 채권에 반대표를 던지기로 한 그의 결정은 그를 반대파의 유일한 주창자로 만들었고결국 1915년에 재판을 받고 1918년 11월까지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3) 세바스찬 하프너(Sebastian Haffner), 독일 혁명의 실패, 1918-1919게오르그 랍(Georg Rapp) 번역. (The Library Press. New York, NY: 1973). 140

 

(4) 어쨌든이것은 보르디가가 가장 좋아하는 트로츠키 팸플릿이었다. (테러리즘과 코뮤니즘을 제외하고) “적절한 순간을 잃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반란에 가장 유리한 조건은 분명히 힘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최대 변화가 일어났을 때이다우리는 물론 의식 영역에서의 힘의 관계즉 정치적 상부 구조의 영역에서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으며혁명적인 시대 전체에 걸쳐 다소 변하지 않은 것으로 가정 할 수 있는 경제 토대의 영역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하나와 같은 경제 토대에서사회의 계급 분열과 함께힘의 관계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분위기에 따라 변하는데그들의 환상이 깨지고 정치적 경험이 커지는 정도국가 권력에서 중간 계급과 집단의 신뢰가 깨지는 정도그리고 마지막으로 후자가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잃는 정도에 따라 변화한다혁명 기간 이러한 모든 과정은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모든 전술상의 기술은 이것으로 이루어진다. : 여러 사정이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순간을 포착하는 것레온 트로츠키10월의 교훈나오미 알렌(Naomi Allen) 번역좌익반대파의 도전, 1923-1925. (Pathfinder Press, New York, NY : 1975). 232

 

(5) 폴 매틱(Paul Mattick). -볼셰비키 코뮤니즘. (Merlin Press. Monmouth: 1978). 95

 

<출처비타협(INTRANSIGENCE)」 4

https://intransigence.org/2019/03/26/remembering-karl-liebknec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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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9호]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의 분파-당 문제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의 분파-당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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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소개할 문서는 1971년 처음 작성되었고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의 전통에 대한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ommunist Workers’ Organisation)의 내부 토론에 사용될 목적으로 수기로 작성된 형태로 1981년 번역되었다그리고 최근 온라인 저널 비타협(https://intransigence.org/2018/11/02/fraction-and-party/)에 출간되었으나여기서는 서문을 대폭 추가하여 소개한다.

 

원문은 국제코뮤니스트당(Internationalist Communist Party, PCInt)이 소집한 코뮤니스트좌파의 국제대회 시기에 작성되었다이 글은 저널 빌랑(Bilan)을 중심으로 한 국제 코뮤니스트좌파의 이탈리아 분파가 이탈리아좌파의 최고 표현(highest expression)이라는 국제코뮤니스트흐름(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의 주장에 대한 부분적인 응답이었다프랑스와 벨기에에서 망명한 동지들로 이뤄진 분파(Fraction)는 전체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의 일부(이러한 사실은 오직 보르디가주의에 감화된 다양한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정당들만이 거부한다)이긴 하지만최고의 표현은 아니다그 구성원의 대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 말에 이탈리아에 돌아가 국제코뮤니스트당(PCInt)에 가입하였으나 그때까지도 많은 문제들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한때는 프롤레타리아 조직이었던 소련의 코뮤니스트당(the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 CPSU)이 반()혁명의 앞잡이가 되어버린 상황에서그 상황을 이해하고 교훈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CPSU는 러시아에서 노동계급에 맞서는 국가자본주의 괴물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코민테른(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을 점점 더 제국주의 이익에 복무하는 도구로 만들어버렸으나분파는 많은 문제들을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보기를 들어 그들은 소련의 계급 본질에 대한 분석을 하지 않았다이 문제는 오직 국제코뮤니스트당을 세운 동지들만이 분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앞으로 소개할 문서는 빌랑(Bilan)의 대차대조표(bilan)에 관한 것이 아니다이 문서의 목적은 훨씬 정확하다해외의 국제주의 코뮤니스트좌파의 이탈리아 분파의 경험을 특정한 역사적 국면의 맥락그러니까 좌파의 많은 투사들이 외국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이탈리아 파시즘의 맥락에서 설명한다분파(Frazione)라는 단어는 1928년 사용되었고이는 과거 사회주의당이 나뉘기 전코뮤니스트들이 그 안에서 분파를 형성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과거 “1921년의 당과의 정치적 연속성과 통합을 가리키는 의도였다좌파의 투사들은 (전체 명칭으로 표현하자면인터내셔널 지부인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Communist Party of Italy, Section of the Third International)을 건설했고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으나 여전히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과의 정치적이고 조직적인 연속성을 주장했다그러므로 이것이 그들 스스로를 국제주의자 분파라고 부르는 이유이다그들은 코민테른과 그람시(Gramsci)와 톨리야티(Togliatti) 아래의 이탈리아 당이 반()혁명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던 것도 알았지만완전히 반()혁명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들은 중도파로 불렸고그들의 이름이 이야기해 주듯이분파의 주요한 노력은 혁명적 정치로 돌아가려는 그들의 시도들을 가로막도록 이용되었다.

 

1935소련의 타락이 명백해지면서 코민테른과 그 모든 당들은 결국 그들을 계급의 적들의 손에 넘겨버렸고분파는 새로운 딜레마에 직면했다계급에게 의미 없어진 당의 분파로 더 이상 남아있을 수도 없었지만어떤 지점에서 새로운 당을 출범해야 하는지도 결정하지 못했다특히베르세시(Vercesi)는 대중정당이 다시 생길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아래의 글이 보여주듯이분파의 많은 구성원들이 그렇게 주장했다그러므로 분파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부터 마비되었고결국 해산되었다전후 잠재적 혁명 계급투쟁을 부활시킨 정치적경제적 혼란이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는 1943년이 되어서야전쟁이 완전히 끝나기 전 국제코뮤니스트당의 탄생하면서 당의 문제가 분석되었다.

 

간단히 말하자면문서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분파의 경험이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독특하다는 것이다오늘날 분파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의 분파?”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과거의 당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과거의 전투에서는 다루었었고그들의 시기의 문제들을 둘러싼 사항들은 결정되었다오늘날 우리는 똑같은 입장에 있지 않다프롤레타리아의 과거 경험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받아들이지만그것은 미래의 인터내셔널을 건설하기 위해서이다맑스가 브뤼메르 18에서 지적했듯이심지어는 혁명가들 사이에서도 너무 과거에 기대하는 경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우리는 오랜-과거의 정치적인 경험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 혁명적 위기의 시대전례 없는 것을 일으키려 한 우리들이 등장한 시점에유서 깊은 위장과 빌려온 언어로 새로운 역사적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우리는 안절부절못하고 과거의 정신그들의 이름그들의 전장에서의 함성그들의 복장을 소환했다.

 

오늘날 우리는 오래전에 죽어버린 당의 분파가 아니라미래 당의 핵심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소그룹들과 함께 새로운 길을 걸어가려 하고 있다.

 

이것은 베르세시(이탈리아 좌파의 해외 주대변인)가 노동계급이 움직일 때까지 당 건설은 기다려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인정하지 않았던소위 역사적 과정의 문제에 대해서도 진실이다그러나 역사적 과정이란 아이디어는 특히 마크 치릭(Marc Chirik, 미래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설립자)과 같은 이들에 의해 선전되었다그의 관점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관점 에서는 역사적 과정이 반혁명으로 향하고 있는 오늘날 계급 정치를 만들려는 어떠한 시도도 실패하게 되어있다베르세시와 같이그 주장은 계급 역학의 실제 균형은 계급 정당의 건설에서 결정적인 요소라는 것이다치릭은 역사적 과정이 전쟁과 반혁명으로 향하고 있으며따라서 분파의 나머지 대부분과 다르게 국제코뮤니스트당에의 합류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그것은 보르디가가 국제코뮤니스트당(Internationalist Communist Party, 1943년 창설설립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몇 년 후, 1948-52년 취했던 초기의 입장과 매우 유사하다국제코뮤니스트당은 각지에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동요의 신호와 함께 북부 이탈리아에서 대중파업의 물결이 있었던 시기1차 세계대전 말과 같이 전후 혁명 물결의 전조처럼 보이는 시기에 설립되었다그러나 1948년 즈음에는 자본주의가 그 폭풍을 잠재운 것이 명백해졌다보르디가는 이제 당을 건설할 시점이 아니라고 주장했고심지어 국제코뮤니스트당(PCInt)이 처음부터 해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 시기는 이탈리아에서만 4천 명이 넘는 구성원이 있었을 때였다!

 

역사적 과정의 옹호자들에게 반혁명은 끝나지 않았고따라서 당의 문제는 그 시점에서 제기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냉전이 노동계급에게 새로운 위협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마크 치릭 뿐만이 아니었지만그는 그 결과가 핵 재앙이 될 수 있고한국 전쟁 발발 당시 베네주엘라를 위해 유럽을 포기하는 결정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3차 세계대전은 발발하지 않았다. 1952년 보르디가주의자들과 결별한 국제코뮤니스트당(PCInt)은 숫자가 감소함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 내에서 제국주의 세력에 반대하는 끈질긴 싸움을 계속했다그들에게 역사적 과정이란 혁명적 조직을 살아 숨 쉬게 하는 책무를 포기하는 변명에 불과한 지적 개념에 불과했다.

 

마크 치릭과 그 동료들은 당의 문제는 객관적인 조건이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한 1930년대의 분파와 동일한 방법을 공유했다이는 분파 내의 기다립시다”라는 경향과 역사적 과정에 대한 옹호자들의 입장을 보여준다여기서 오류는 당이 오직 대중 정당이 될 즉각적인 가능성이 있을 때만 만들어진다고 가정하는 것이다이것은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본질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적(그리고 코민테른의개념에 대한 동의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태어난 개념도 아니다.

 

러시아 노동계급 가운데 작은 소수(8000)였음에도 불구하고, 1912년 멘셰비키로부터 분리한 후 볼셰비키는 이미 존재했었고그리고 1917년 소비에트 권력을 방어하는 조직된 세력임을 명백히 보여주고 계급으로부터 승인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알려졌다이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조직으로서 뚜렷하게 만들어지지도 못했고 중도주의 USPD(독일 독립사회민주당내부의 분파로서 집어 삼켜졌던 독일의 스파르타쿠스단과 명백하게 대비된다. 1918년 11프롤레타리아 저항이 발발한 이후에야 그들은 실질적으로 코뮤니스트당 건설을 고려했고곧 기회주의에 굴복하여 혁명적 정책과 보수적 정책 사이에서 찢어졌다.

 

아래의 글이 언급하듯이정당은 하룻밤 만에 건설될 수 없다이론적 작업뿐만 아니라 정치적 메시지(강령)와 작동 방식 – 구성원들이 모두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도 혁명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준비하는 데에도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당은 방정식의 주체적인 부분이고자유의 도구이며그것은 혁명 발발 이전 투쟁의 과정에서 벼려질 것이었다오노라토 데이먼(Onorato Damen)이 언급했듯이노동계급은 즉각적인 희망과 조건이 어떻든 당을 영구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으며분파는 역사적인 배신이 불러온 심각한 혼란의 시기독특한 역사적 막간극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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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활성화된 경기가 끝나가는 첫 번째 신호가 명백해지자 1960년대 후반마크 치릭은역사적 과정이 이제 역전되어 유럽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전제로부터 작업하고 있었다이윤율의 하락에 의한 경제적 위기의 재래는 자본가들이 노동의 조건과 임금에 대한 그들의 공격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노동자들은 저항했으나 이는 대게 노동조합이 통제하고 있는 기업별 투쟁에 기반하고 있었다국제적으로는 이러한 틀을 넘어서고자 하는 가시적인 시도들이 있었으나 예외적이었다그러나 마크 치릭에 있어서는 반혁명이 끝났고이제 새로운 혁명적 조직(기존의 것은 경화되었으니”)을 건설할 때라고 주장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과거 평의회주의 그룹들 몇몇은 (그들 중 다수는 근래에 건설되었는데) 1975년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에 합류했고그것이 혁명가들의 재편성의 축이라고 주장했다이제 반혁명은 끝났으며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노동계급은 이미 혁명적이며, “역사적 과정이 이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향하고 있으니 탈신비화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노동조합이 이제 노동계급에 반대하고 있다고 노동자들이 듣기만 한다면그들의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혁명으로 향한 길이 열릴 것이었다놀라울 것도 없이 역사적 과정은 훨씬 더 복잡한 것으로 나타났다. 1940년대와 같이, 1970년대는 계급투쟁이 부활하는 시기였는데그것이 노동계급 안의 폭넓은 대중 가운데에서 혁명적 의식으로 자연스럽게 변화되지는 않았다투쟁의 새로운 물결은 반혁명의 끝을 나타내는 신호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새로운 위기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앞으로 25년 동안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방향을 잃은 자들이라고 비난받을 것이었다. “역사적 과정의 확실성으로 무장한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그들이 남은 코뮤니스트들이 다시 모여야 하는 재편성의 축이라 확신했다.

 

1980년대가 시작되면서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점증하는 계급 적대에 따라 진실의 시대를 선언했다이것은 위기가 가져온 구조조정이 중국과 같은 저임금 경제로 생산이 옮겨감에 따라(그 당시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인정하지 않았지만과거의 산업 중심지 자본의 대손상각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어떤 면에서는 진실이었다노동자들은 수세에도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자본가들이 이미 고정 자본을 없앨 준비가 된 상황에서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파업은 결코 편한 입장인 것은 아니었다사기 저하가 나타나기 시작했고계급은 후퇴하기 시작했다그러나 역사적 과정이 심화된 계급 대결로 향하고 있다는 사상의 지지자들은 이를 보지 않았고그들이 이론을 재평가할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은 소련과 그 블록이 붕괴한 이후가 되어서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과정이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잘못되었다는 주장은 없었다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에는 노동계급도 자본가도 서로의 안건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1979년 이후 노동자의 생활 수준이 꾸준히 하락하고 있다는 사실구조조정이 전체 공동체를 무너뜨렸다는 사실이 그들의 대차대조표 계산 속에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대신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포스트모던 대열에 합류하여 혼돈과 해체” 등 그들 자신만의 개념에 도달한다자본주의는 이제 해체(은유로서, “쇠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으로 이제는 진짜진짜 쇠퇴를 의미한다)되고 있는 것이다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에게 혼돈과 해체는 역사적 과정이 혁명으로 향하고 있다는 그들의 관점이 무너지는 것을 가려주는 미봉책 이론이었다우리는 자본주의의 하락의 점증하는 신호가 있다는 것은 거부하지 않지만이것은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이 무시하고 있는 물질적인 요인들(그들에게 자본주의의 위기란 영속적인 것이다때문이다또한 자본주의 위기는 사라진 적도 없고자본주의가 연장되면 될수록 강화된다.

 

자본주의는 수십 년이 넘도록 위기를 관리하려 하거나 또는 이윤율을 높이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었다그러나 1971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남아있는 한 요소는 자본의 과잉 축적이다과잉축적이란 생산 주기의 새로운 부활이 자본의 평가절하를 통해서만 가능함을 의미한다오늘날에는 만연한 전쟁의 대량 파괴 또는 여러 차례의 전쟁만이 이를 달성할 수 있다이 사실은 제국주의 시대가 시작되던 시기부터 가졌던 우리의 관점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전쟁이냐 혁명이냐는 이 체제의 점증하는 대립의 유일한 해결책이다상황이 아직 급박하지 않고 코뮤니스트좌파의 경험에 근거하여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 당을 위한 작업을 시작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 춤추는 자들은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우리는 본다.

 

여기에는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도 포함될 수도 있다우리가 그럴 수도 있다고 한 이유는 그들의 최근 답변이 너무 혼란스러워 그들의 현재 입장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14년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일종의 내부 위기를 경험하였으나결국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그들의 동조자들에게서도 명확해진 적이 없다그 대신 그들은 2016년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40이란 제목으로 국제평론(International Review) 156권에 실린 대차대조표를 생산했다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과거 입장의 몇 가지를 비판한다우리는 일부만을 여기 요약할 수 있다아래는 그들의 언어로 표현된 것 중 일부이다

 

계급 사이의 세력 균형 분석프롤레타리아가 지속적으로 공격적으로 되어가는 경향

. “대 재앙적” 비전

경제적 위기와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이 필연적으로기계적인 방식으로 투쟁의 물결을 촉발시킬 것이라는, 1970-90년대에 동일한 인물이 발전시킨 동일한 모델 환상을 보유하는 경향.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이 수년 동안 오류를 저지른 유일한 조직은 아니지만(일반적으로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이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 이러한 오류들은 역사적 과정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그들의 주장의 결과이다이러한 재검토는 환영받을 일이지만(그들의 문제에 대한 실제 원인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같은 호의 분파로서의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의 역할에 대한 보고서라는 이름의 글이 인용된 글 다음에 이어졌다이것은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포럼에서 몇몇 논쟁을 불러일으킨 매우 혼란스러운 글이다. 2017년 발간된 세계 혁명(World Revolution)」 376호에서 한 동조자링크(Link)는 그 글에 대해 질문했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이제 분파로서의 역할을 채택한 것으로 보이지만나는 그 이유와 가능한 결과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이 역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며이러한 변화의 정치적인 정당화는 어떻게 될까요다시 말해 이 결론에 이르는 현재 상황에 대한 분석이 무엇일까요?

 

나는 이전이 포럼에서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이 재편성의 축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했고 어떤 비판이나 반대도 없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단순히 그 방향을 설명하거나 명확히 하길 피해왔습니다이 새로운 분파로서의 역할이란 것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입니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그 대답으로 오직 더욱 큰 혼란만 가져왔으며역사에 대해 조금 다른 말로 서술했을 뿐링크(Link)가 제기한 핵심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어떤 직접적인 대답은 없다그들은 이제 스스로를 분파라고(그렇다면 무엇의 분파?) 여기는 것일까그들의 활동에서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링크(Link)가 왜 그들이 자신의 비판에 응답하지 않느냐고 질문할 때그들은 코뮤니스트좌파 진영의 나머지에 대한 비판으로 돌린다.

 

좌익공산주의 진영의 보편적인 낮은 사기는 40년 동안 자기-비판이 없었던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이 대답이 없는 배경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이 그토록 오랫동안 방향을 잃고” 헤매었지만여전히 선하다고 확신할 수 있다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명백한 현재의 사기 저하를 남들에게 투영해서는 안 된다우리는 자신의 활동을 정의하기 위한 역사적 과정이란 변하지 않는 비전은 갖고 있지 않다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내재적 위기이지만 그 최종 결과는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그것은 맑스가 코뮤니스트 선언에서 사회의 혁명적 재편성이거나 대립하는 계급들 모두의 파괴라고 공표한 것또는 이후에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전쟁이냐 혁명이냐의 형식으로 표현된 것과 여전히 동일한 것이다.

 

혁명가들은 예언가의 수정 구슬 따위는 갖고 있지 않으며헤겔주의 목적론적 역사와는 다르게 언제나 하나 이상의 가능성을 제공한다최근우리는 계급으로서 계급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으나 앞으로 계속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투기 거품의 폭발은 과거에는 자본주의가 호황이라는 거짓된 이념을 유지시켜 주었지만그 이후 세상은 천천히 변하기 시작했다코뮤니스트들은 이제 공개적으로 비웃음당하지 않고 자본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고자본에 대해 질문하는 새로운 대중운동이 비록 계급의 기반이 없기 때문에(Indignados - 2011-2014년 스페인 시위 -에서 노란 조끼 운동까지스스로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더라도체제의 실패를 보여주고 있으며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조차도 알아차렸듯이, 1970년대 초 이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젊은 세대의 혁명가들이 코뮤니스트좌파로 모여들고 있다이 모든 것이 우리가 혁명적인 국제주의 진영을 확대하는데 단호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있고동시에 우리가 언제나 해 왔던 것을 하고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을 직면하게 하고 있다.

 

미래 당 건설을 위한 근본적인 조건은 물론 계급투쟁 그 자체이다그러나 당 건설은 또한 진정으로 오늘날 계급투쟁에서 혁명가들의 적극적인 활동에도 달려있다혁명적 소수를 역사라는 수동적인 범주에 가두는 것은 능동적인 두 기둥 사이의 복잡한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진정한 이해의 가능성을 닫는 일이다그것은 역사가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것이고인간 존재가 역사를 만든다는 진실을 잃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그것은 수동적인 관찰로 후퇴한다는 것이다동시에 자본주의 위기가 개선되기보다 더욱 심화되는 것처럼 보일 때자본주의가 자신만의 해결책” 준비를 개발하고 있을 때지구의 생태적 오염이 일상적인 자본주의의 위협으로 우리 존재에 대한 위협을 보여줄 때그리고 많은 젊은 세대들이 해답을 갈구할 때우리가 해야 할 마지막 일이 기다려 봐라라는 것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ommunist Workers’ Organisation)

 

<원문 출처>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18-12-22/the-fraction-party-question-in-the-italian-left

 

번역 ㅣ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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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8호] 자본의 좌파 : 사회주의와 무관한 정치세력

자본의 좌파 : 사회주의와 무관한 정치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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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바 ‘사회민주주주의’ 정당들은 제1차 세계대전 시기 "민족(조국)의 수호"를 외치면서 프롤레타리아계급으로부터 이탈했다. 사회민주주의는 1918년과 1923년 사이에 혁명적인 노동자 봉기를 분쇄하고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포함하여 수천 명의 코뮤니스트를 살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사회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강력한 계급투쟁의 시기에는 ‘노동자당’을 표방하면서 자본주의의 방어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고, 계급평화의 시기에는 노동자들에게 의회주의, 선거주의 환상을 확산시킨다. 오늘날,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버팀목으로 현실에서는 개량이 없는 개량주의의 옹호자로 행동한다.

 

 이러한 제2 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와 단절하면서 출발한 ‘코뮤니스트’ 정당들은 코민테른의 타락과 스탈린주의 반혁명으로 국제주의를 포기함으로써 다시 자본주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코뮤니스트 정당의 ‘일국사회주의’ 이론 수용은 부르주아의 재무장화에 참여, 인민전선에 참여, 그리고 전후 국가재건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결국 민족자본의 진정한 협력자가 되었다.

 

 오늘날에도 ‘사회주의자’ 또는 ‘코뮤니스트’를 자임하며, 노동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수많은 그룹과 조직이 있다. 그들의 오류는 대부분 앞서 말한 ‘사회민주주의’를 재창조하려 하거나 ‘스탈린주의’를 부활시키려는 희극적인 시도라서 더욱 문제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맑스주의’의 아름으로 계급운동 전반에 끼진 악영향과 혼란은 운동의 퇴보에 막대한 역할을 했다. 이들 대부분은 사회주의를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동일시하면서 해괴한 강령까지 만들어 내걸고 있는데, 이것은 혁명적 맑스주의와 무관하다. 그리고 이것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이미 맹렬히 비난했던 반동적인 입장일 뿐이다.

 

“근대 국가는, 그 형태가 무엇이든,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의 기구이다; 그것은 자본가, 모든 자본가의 이상적인 공동 기구이다. 그것이 생산력을 장악할수록, 자본가의 진정한 공동 기구가 될수록, 점점 더 시민을 착취한다. 노동자들은 임노동자, 프롤레타리아로 남게 된다. 자본주의 관계는 폐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극단으로 더욱 밀어붙인다.”

 

 중국, 베트남, 북한, 쿠바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단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들 국가에서 노동자계급이 주도한 사회적 변혁은 한 번도 없었으며,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정치·경제적 권력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도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착취체제를 ‘진보적’이거나, ‘반자본주의적’이거나, 심지어 ‘사회주의적’ 성격으로 규정하는 '가짜 사회주의 세력'과 진정한 우리의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진영'을 명확하게 구분한다.

 

 노동자계급을 지속해서 공격하고 혁명적 코뮤니스트를 살해한 스탈린주의야말로 진정한 반코뮤니즘(반공주의)이다. 또한 마오주의자와 게바라주의자들도 스탈린주의자들과 같은 이데올로기(인민전선, 단계론, 국가 미화, 민족주의 등)를 방어하기에 반()코뮤니즘 경향에 속한다.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사회를 코뮤니즘으로 바꾸는 혁명은 경제의 '자주 관리'나 '국유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코뮤니즘은 노동자계급에 의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 즉 임노동, 상품생산, 국가의 의식적인 폐지가 필수적이다. 이는 코뮤니스트 혁명이 인간 필요의 충분한 만족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세계 공동체 건설의 과정임을 의미한다. 이와 무관한 일국사회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의 모든 형태는 반코뮤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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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이나 중국을 노동자 국가로 규정하는 세력과 더불어 이른바 ‘입당주의’ 노선을 옹호하는 세력 또한 스탈린주의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협력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을 부정했다. 그들은 제국주의와 이른바 ‘민족자결권’ 문제에 대한 잘못된 판단으로 여러 지역에서 제국주의적 충돌 (스페인 내전, 아비시니아, 중일전쟁)을 지지했고 결정적으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조국의 방어자로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이에 대한 반성과 교정 없이 국제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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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의 다양한 스탈린주의, 정통 트로츠키주의 자임세력, 그리고 마오주의 경향은 서로 대립하면서 일치하지 않는 정치세력이지만, 우리는 이들 모두를 자본주의의 좌파라 부른다. 역사적으로 그들의 잘못된 강령, 전술 또는 운동 개념은 수없이 프롤레타리아 투쟁을 타락시키고 붕괴시켜왔다. 여전히 ‘좌파통합’ 또는 ‘좌파 공동전선’을 내세우며 반성과 교정 없이 낡은 것들을 지속시키려는 시도는 그들의 전통이자 전부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세력에 맞선 오늘날의 국제주의 코뮤니스트는 오직 국경과 지역을 넘어, 국가와 민족을 넘어, 세계 계급투쟁과 세계혁명을 향한 전망을 함께 세우고 국제적 코뮤니스트 강령에 따라 단결하고 투쟁하는 세력이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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