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다생각_펌 - 2007/01/08 22:35

최근 미국 국적의 작은 고모가 쓸데없이(-_-;;;) 한국에 자주 나오면서
전화 통화하면 40분 이상, 한번 만나면 3시간 이상 나를 붙들고
내 가족들을 차례로 성토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이야기속에서 가장 테러당하는 인물은 나의 여동생인데,
신학대학원을 다니며 박사과정을 꿈꾸는 그 녀석이
작은 고모의 입을 빌리면
집안을 혼란케 만드는 성격 파탄, 광신도 식충으로 변모하게 된다.

고이고이 듣다가 구체적으로 '문제가 뭐냐'가 물었더니, 제사 때(=집안 어른 뵐 때) 얼굴도 안 비춘다한다.

 

기독교인이니 제사 회피는 당연지사.
내가 보기에 그녀는 파탄 정도의 성격도 아니고 하고픈 일에 열성 매진하는 멀쩡한 녀석이지만,
돈으로 평가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한푼 안 벌고 있는 사지 멀쩡한 그녀에 대한 나름 적당한(?) 평가일지도 모르겠다.

 

돈을 가치롭게 여길 줄 모르기 때문에 집안을 혼란케 하는 존재이고,
돈을 벌 줄 모르기 때문에 식충이며,
돈을 벌 생각이 없어보이니 성격 이상 광신도가 된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서 느껴지는 자본의 향기.
삶 자체가 어찌나 자본주의스러운지, 문득 섬뜩하게 놀랄 때가 많다.


 



우리 집안에서는 '돈이야말로 최고의 가치구나'라고 처음 깨닫게 된 건 몇해 전 남동생이 가출했을 때.

 

이 사태의 해결에 주도적으로 나설 수 밖에 없었던 가부장의 우두머리, 우리 아빠.

 

집안에는 키우는 개도 알아먹는 나름 서열이 있는 법.
한번도 가출해본 적 없는 애가 나갔으니 꽤 중대사안이므로 꽤 영향력있는 인물을 보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이 직접 갔다가 애가 안온다고 하면 더 이상 손쓸 방법도 없을 듯 싶고...
그래서 아빠가 선택한 조치는 자신의 바로 아래 레벨에 있는 것들에게 남동생을 잡아오라고 급파(!)시킨 것이었다.
그 바로 '아래 레벨로 선택된 것'들이 우리 엄마와 나였다.

 

생각해보니 나는 이 사태에 대해 그닥 심각하게 생각하질 않았다.
짜증나고 복잡하고, 딴 일하고 있는 게 훨씬 생산적이다 싶었다.
한참 바쁠 때이고 속으로는 '돈 떨어지면 돌아올 놈을 왜 잡으러 가야하나?' 싶었지만,
이래뵈도 가부장집안에서 잘 자란 첫째 딸인지라 호출에 응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라도 안 가면 앞으로의 가족 관계가 평탄치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한편 하면서...

 

이렇게 '가출한 남동생 컴백홈'이라는 본래의 목적보다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는 가족주의의 틀 유지를 위해 나섰던 길이니,
진정성이 없고 속에선 왠지 모를 분노만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 밖에 없었다.

여차저차해서 부산 가보니 은행 경호원 노릇하면서 월세집에 TV, 컴퓨터까지 들여놓을 건 다 들여놓고 살고 있더라.


열받은 우리 엄마는 고래고래 소리지르면서 없는 기력에 남동생 팔을 치기 시작했고,
남동생은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있다가 큰 소리로 "시끄러워", "안들어간다구", "빨리 가", 뭐 이따위 말들을 내뱉었던 것 같다.

 

(나에게 있어선) 오기 싫었던 공간에 억지로 배치된 상황, 온갖 감정으로 호소하는 엄마와 전혀 듣을 리 만무한 남동생의 소통없는 커뮤니케이션.


이 모든 상황이 짜증났던 나는,
뭐라 큰 소리 한판 치고 나서 컴퓨터 아래 있던 프린터(기억으론 그러한데)를 두손으로 들고 바닥에 던지려고 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엄마와 남동생 둘다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손으로는 이미 나의 팔을 부여잡기 시작했다.
이런 순간에 그 둘이 연대하고 있다는 사실에 황당해하면서,
한편으론 일단 프린터를 들어올렸기에 '내리친다'는 완결적 행동을 위해 힘을 쓰긴 했는데
일단 저지당하고
프린터는 남동생에 의해 제자리에 놓여졌다.

 

그리고는... 음...
이상하게도... 엄마와 남동생의 대화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졌다.
일단 둘다 자리에 앉았고, 톤을 낮추어 조근조근 말하기 시작했고, 결국 조만간 집에 들어가겠다는 남동생의 말을 마침표로 듣고나서 부산 일정이 끝났다.

남동생은 며칠 후 부산을 다 정리하고 다시 컴백홈했다.
(내가 보기엔 돈이 다 떨어진거다.)

 

그 이후로도 내가 가족을 위해 하는 일이라고는
평상 시 나태한 자세로 관망하기 + 약간의 큰딸 노릇 + 가끔 동떠서 식구들 술 먹이기,
위급 시 값비싼 물건 던지기 뿐이다.(부산 이후로 한번도 안써봤다만..)

 

그러나 그 이후로 나는 우리 집에서
'평소 고요하나 한번 화나면 진짜 무서운' 사람으로,
기분 나쁘게도(-_-) 가족들과 관계 형성에서 -비교우위를 점함으로써- 훨씬 수월해졌다.
아빠 다음으로 확고부동의 서열 2위쯤 된 결과인 셈이다.
그놈의 프린터, 결국 가져와 쓸 것도 아니면서 어찌나 파괴시키는 건 절대 안되는 일이었던지...
프린터 던져 이 정도니, 평면TV 던지면 조만간 아빠도 제압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ㅋㅋ

 

절대절명의 순간에 프린터 정도 집어던질 수 있는 용기만으로도 통제가 되다니 정말 자본 반응적 가족들이다.


동시에 그냥 '세상에 산다'는 행위만으로도
이렇듯 완벽하게 '자본 기반으로 세팅'할 수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위력은 정말 가공할 만하다.

그러니까 이런 가족 집단들이 전세계적으로 모래알처럼 쫙 깔린 게 이 세상인거지?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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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8 22:35 2007/01/08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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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산오리 2007/01/09 08: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프린터나 평면티비 비싸고 아까워서가 아니라, 혹시 깨져서 누가 다칠까봐 그런거 아니었을까요?ㅎ

  2. jineeya 2007/01/09 22: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산오리/과연~~~ ㅋㅋ 에휴... 그렇게 생각하고프지만 왠지 아닌 것 같슴다.^^;;

  3. 바리 2007/01/13 23: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설마 프린터가 아까와서 그랬겠어? 지니야의 포스 때문이였겠지...

  4. jineeya 2007/01/16 08: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리/우리집 돈독 오른 게 맞다니까...ㅋㅋ

  5. 슈아 2007/01/18 00: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 지니아의 포스~~ 폭력은 싫지만 그 포스는 부럽삼.
    지니야. 우리 함 봐요. 기린언어워크샵 일정 조정해 보아요~~ 아침 블로그에 댓글 달아주세요.

  6. jineeya 2007/01/19 05: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슈아/그래여. 함 봐여. 근데 요즘은 워크샵할 때가 아닌 가봐여. 저번 워크샵 때도 머리가 너무 아프고 가슴이 답답한...(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제 상태가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