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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7/22
    허전을 채우는 술(2)
    풀소리
  2. 2006/07/16
    임사홍
    풀소리
  3. 2006/07/14
    뭉게구름(2)
    풀소리

허전을 채우는 술

말이 많아지고,

술은 마른 논에 물 들어가듯 술술 들어갔지만

허전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도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좋아지겠지...





 

어제 「자주관리기업의 현황과 발전방향」이라는 주제로 토론회가 있었다.

운수산업노조추진준비위원회에서 주최하고 운수노동정책연구소와 우리 민주버스가 주관하는 행사였다. 여기서 난 2명의 주발제자 중 한명이었다. 여러 쟁쟁한 교수들과 자주관리기업 3사가 모두 참석한 행사였다. 참석자 누구나 ‘성공적’이었다고 할 만큼 의외의 성과를 낸 토론회였다.

 


 

그럼에도 우진교통 대표와 노조(지부) 대표의 발언은 나의 가슴을 후벼 팠다.

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른바 ‘우진교통 사태’의 중심에 있었다. 내 아무리 ‘나’를 변호할 충분한 ‘말’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아무리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내게 또는 민주버스에 ‘적의’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론회 주제와 별개인 그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은 참으로 의외였다. 더욱이 사실관계를 완전히 왜곡해서 말이다.

그들은 민주버스가 지나치게 경영에 ‘간섭’했고, 마치 그룹사가 계열사 다르듯이 했다고 한다. 부글부글 끓었지만 참아야지. 참아야하겠지...


2005년 1월 20일 자주관리기업이 출범하고, 2005년 내내 민주버스는 자주관리기업 ‘우진교통’에 간섭한 일이 전혀 없다. 심지어 민주버스 중앙(본조)이 가지고 있는 ‘교섭권’과 ‘체결권’을 모두 지부와 경영관리단에 위임했다. 경영관련하여 보고를 요구한 적도 없다. 우진교통에서 요구하지 않는 한 지부를 방문하지도 않았다. 최대한 자율을 보장했다. 그런데도 지나치게 경영에 ‘간섭’했다고 한다.


토론회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다. 더욱이 발제내용을 보면 모든 것을 미화하는 데 급급하다. 2005년 8월부터 조합비(의무금)을 납부하지 않은 자금은 조합원 복지자금으로 변신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성과'로 자랑한다.


우리는 현재의 문제를 드러내놓고 문제의 해결지점을 찾고자 토론회를 했는데, 모든 게 잘되고 있단다. 문제가 있다면 민주버스가 잘못해서 조직이 ‘분열’돼 있는 것이라면서...


우진교통은 민주노총 지역본부 사무처장 출신인 인사가 대표를 맡고 있다. 노조의 핵심 간부들이 그런 대표를 ‘성역’이니 ‘금지된 영역’이니 한다. 민주버스가 그런 성역을 건드렸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제길. 운동이 아무리 대의를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다고 하더라도 도대체 대놓고 ‘성역’이 뭐란 말인가.

 

그들이 그렇게 가는 것에 대하여 분노하면서도, 그들이 ‘분노의 대상’이 된 것 또한 ‘나’를 포함한 ‘조직(노조)’의 책임이라는 걸 생각할 때 일방적으로 마냥 비난만 할 수도 없다. 스스로 해야 할 반성이 비난할 수위만큼이나 높아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점점 망하는 길로 가고 있는 그들을 볼 때 무기력하고 아린 책임감 또한 커질 수밖에 없다.


‘사랑은 쓸쓸한 것’이라고 양희은은 노래했지...

마시고, 허툰 말을 쏟아내고, 헛웃음을 흘리면서 텅 빈 가슴을 채우고 또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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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홍

지난 토요일(7월 8일) 난 여주 한국노총 수련원에서 개최된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에 참석차 가는 길에 임사홍 묘소에 들렸다. 임사홍 묘는 명성왕후 민씨 생가 바로 옆에 있다.


글을 쓰려고 일부러 들렸고, 다녀와서 바로 쓰고자 했는데,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에 참석했던 (정신적인) 후유증이 커서 쓸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임사홍은 유자광과 함께 연산군 시절의 대표적인 간신으로 기록되고 있다. 내 취미 중 하나인 고무덤, 고적(古蹟)을 답사를 하다보면 이전에 알고 있던 상식이 오히려 의심이 들 때가 많다. 특히 역사적으로 패자의 무덤에서는 더 많은 이면을 생각하게 된다. 임사홍의 경우도 그렇다.

 

연산군의 총신 임사홍은 연산군이 폐위되는 중종반정 와중에 거리에서 반정군에 의해 맞아 죽는다. 무덤에 묻히고서도 또 한 번 부관참시를 당했다. 그리고 간신열전에 실릴 정도로 대표적인 간신으로 낙인 찍혀 끝내 복권되지 못했다.





 

대단한 명문가 출신인 임사홍


무지막지한 간신으로 꼽히는 임사홍은 의외로 대단한 명문가 출신이다. 아버지 임원준은 3정승 바로 밑인 종1품 좌찬성을 지냈고, 임사홍 자신은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의 손주사위가 되었다. 그 뿐인가. 큰아들 광재는 현숙공주에 장가들어 예종의 부마가 되었고, 둘째 아들 숭재는 휘숙옹주에 장가들어 성종의 부마가 되었다. 이렇듯 임사홍 가문은 왕실과 이중 삼중으로 결혼한 대단한 명문가이다.


임사홍은 과거에 급제한 문신이고, 성종의 명에 의해 월산대군 신도비문을 지었을 정도로 문장에 능했으며, 글씨 또한 뛰어나 촉체(蜀體)를 잘 썼고 특히 해서(楷書)에 뛰어났다고 한다. 그가 남긴 글씨는 <노문광공사신신도비명(盧文匡公思愼神道碑銘)>, <박중선묘비명(朴仲善墓碑銘)>, <이계손묘비명(李繼孫墓碑銘)>, <한확묘비명(韓確墓碑銘)>, <영원윤호묘비명(鈴原尹壕墓碑銘)>, <서거정묘비명(徐居正墓碑銘)> 등이 있다. 그리고 중국어에도 능통해 역관들을 교육시킬 정도였다.


이렇듯 다재다능했던 임사홍이 희대의 간신으로 몰린 것은 갑자사화의 주역이었고, 그 자신과 아들 숭재가 연산군에게 미희들을 뽑아 올리는 채홍사 역할을 맡았기 때문일 것이다.

 

임사홍 아버지 임원준의 무덤

 

 

선비들을 죽인 갑자사화의 주역


연산군 시절에는 크게 두 번의 사화가 있었으니 연산군 4년에 있었던 무오(戊午)사화와 동 10년에 있었던 갑자(甲子)사화이다. 무오사화는 그 유명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록에 실은 것이 문제가 되어 당시 사림이 대거 죽음을 당한 일대 사건이었다. 조의제문은 조선 사림의 시작(宗祖)이랄 수 있는 김종직이 세조 3년에 지은 것으로 그의 제자인 김일손이 성종실록에 실은 데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조의제문은 항우에게 죽음을 당한 초나라 의제(義帝)를 조문하는 내용인데 단종을 죽인 세조를 은근히 빗댄 것이다. 세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으면 그 후손인 연산군의 정통성도 문제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유자광 등 훈구파는 문제를 확대해 김일손과 김종직의 제자들 등 사림을 대역죄로 몰았으며, 김종직을 부관참시(시체를 무덤에서 꺼내 목을 치는 형벌)하였고, 그의 제자들을 대거 죽였다.


갑자사화는 임사홍과 유자광이 주동이 된 사화로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죽음에 관련된 사람들을 훈구파 사림 할 것 없이 대거 죽인 사화이다.

역사기록은 성종이 폐비 윤씨 건을 자신의 사후 100년 동안 함구하라고 유언하였는데 임사홍이 폐비 윤씨 죽음의 비밀을 연산군에게 알리고, 외할머니를 궁에 들어오게 하여 그 유명한 피 묻은 금삼(비단저고리 소매)을 보였고, 생모의 비극적인 죽음을 안 연산군이 분노가 극에 달해 관련자들을 모두 죽인 사화라고 한다.

 

임사홍의 무덤과 문인석/ 역적의 무덤이라지만 석물도 갖추고 있다.

 

 

믿을 수 없는 역사기록


앞서 말한 대로 난 무덤을 살피면서 역사를 다시 볼 때 믿기 어려운 구석을 많이 본다.

조선시대 사화들 특히 연산군 시절 또는 중종, 명종 시절의 사화는 대부분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에서 훈구파에 의한 사림파의 (피의)숙청이라는 형태를 띤다. 선조 이후에는 사림파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사림을 숙청한 훈구파는 조선 말까지 복권이 안 되거나 간신, 소인배로 낙인이 찍힌다. 유자광, 임사홍, 남곤, 심정, 김안로, 윤원형 등등이 대표적이다.


역사 기록대로라면 이들은 분명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사림이 모두 옳은 것인가? 거기에도 의문이 든다.


조의제문을 쓴 사림의 祖宗(시조 할아버지쯤으로 이해하시길) 김종직은 제문을 쓴 지 불과 3년 후인 세조6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성종 때에는 벼슬이 형조판서에까지 이른다. 정말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하였다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사림 정신을 지켰다면 과연 세조6년에 과거를 볼 수 있었을까?


정사(연산군일기)는 임사홍이 성종의 유지를 깨고 연산군 10년에 생모 파평윤씨의 일을 꺼내 무도하게 많은 사람을 죽게 하였다고 하는데, 사실 이 기록 또한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연산군은 임금에 즉위하던 그 해 전남 장흥에 귀양살이 하던 외할머니 신(申)씨와 외삼촌 윤구를 석방시켜 서울로 돌아올 수 있게 조치한 바 있다. 따라서 생모의 일을 임금이 되고 10년이나 지나 임사홍의 발설에 의해 비로소 알았다는 것은 이치상 맞지 않는다.

 

 

연산군만 문제 있는가


중종반정 세력도 믿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대표적 간신이랄 수 있는 유자광이 반정 1등 공신으로 책봉되었고, 이후 사림에 의해 유자광이 탄핵을 받을 때도 역사적으로 후한 평가를 받는 성희안과 같은 반정 공신도 끝까지 그를 비호했다고 한다. 내 솔직한 심정은 반정세력이나 임사홍이나 그저 ‘그 나물에 그 밥’으로 보인다.


‘왕의 남자’를 계기로 연산군에 대해 새롭게 조명해보려는 시도가 있는 것 같다. 어찌 됐던 사료(史料)를 다양(?)하게 살펴보아도 연산군은 폭군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이나 다른 임금은 엄청 달랐는가.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연산군이 주색에 빠진 황음무도(荒淫無道)로 비판받는다면 그 아버지 성종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성종은 수시로 민가로 나가 주색을 즐겼다고 한다. 연산군 생모 폐비 윤씨와 관계가 나빠진 것도 그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더 나아가 복잡한 남자관계가 문제가 되어 사형을 당한 그 유명한 어우동과도 관계를 맺었다는 야사가 전해오고 있기도 할 정도이다.


성종뿐만 아니라 성종시절에는 사대부나 서민 할 것 없이 퇴폐풍조가 만연하였다고 한다. 어우동은 그 희생물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어우동의 어머니는 딸을 변호하기를 ‘성욕이 없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다만 그 아이는 조금 더 셌을 뿐인 걸’이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적어도 연산군 시절과 같은 조선 초기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유교 의식으로 푹 절은 도덕적인 나라는 아니었던 것 같다.

 

 

역사가 있다면 그래도 단죄해야 마땅


앞의 글이 임사홍을 변호하는 것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난 그를 변호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다만 그를 간신으로, 대역죄인으로 몰아간 세력을 믿지 못할 뿐이다.

 


임원준의 무덤에 있는 무인석/ 앞에 서 있는 아내와 비교할 때 얼마나 큰가?

 

난 사실 임사홍의 무덤이 있다는 사실조차 놀라웠다. 반정의 와중에서 맞아 죽고, 500년 동안 간신으로 낙인찍혔다면 무덤조차 쓸 수 있었겠는가 하는, 나아가 무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지킬 수 있는 후손이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임사홍의 아버지 임원준의 무덤 때문이었다. 임원준의 무덤(여주군 향토유적 12호)은 다른 무덤과 달리 문인석이 아니라 무인석이 서 있다. 왕릉이 아니고는 무인석이 있는 사대부 무덤을 보지 못하였는데, 이곳은 무인석이 있고, 생김도 왕릉의 무인석과 흡사하다. 뿐만 아니라 크기도 왕릉에 있는 것처럼 어마어마하게 크다.


난 임원준의 무덤을 보면서 임사홍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교만했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권력이 막강하였던 것은 물론이었겠지만 왕릉에나 썼음직한 거대한 무인석을 자기 아버지 무덤에 버젓이 세우다니... 역사의 패자에게 흔히 드는 동정심이 싹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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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게구름

 

광주 신규가입 조직 동일관광의 현판식에 다녀오는 길에

정읍 쯤에서 찍은 사진

뭉게구름이 온전히 보이는 게 몇 년만인지 모르겠다.

좋다.

 


정읍 녹두장군 휴게소에서...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에 꽃은 환상처럼 오히려 몽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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