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59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9/06
    여름의 끝, 맥문동 꽃
    풀소리
  2. 2005/09/05
    책임지지 않는 자유로움(4)
    풀소리
  3. 2005/09/02
    아내의 분노와 그 정체는 뭘까?(1)
    풀소리

여름의 끝, 맥문동 꽃

공원에 맥문동 보라색 꽃이 한창이다.

맥문동은 원래 약재로 유명한 풀이다.

그늘에서도 잘 자라고 꽃도 예뻐 요즈음은 관상식물로 많이 심는다. 특히 나무 그늘 밑에.

 

맥문동 꽃이 지면 곧바로 가을이다.

아직 맥문동 꽃이 피어 있고, 매미가 운다.

그래도 세월은 무서운 것, 곧 저 꽃도 지겠지...

 

공원에 핀 맥문동 꽃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책임지지 않는 자유로움

이 글은 아내[ 결혼생활 8년 만에 드디어 내가 미쳐가는구나.] 에 관련된 글이며,
풀소리[아내의 분노와 그 정체는 뭘까?] 에 관련된 글이다.

-----------

▶◀ 고 류기혁 조합원의 명복을 빕니다.

 

-----------

또 한 명의 동지가 목숨을 바쳤다.

동지가 죽고, 투쟁의 불길을 옮겨야 할 자리에서

투쟁 이외의 글을 쓴다는 건 무안하기만 하다.

 

또한 난 개인 사이에 감정을 많이 드러내는 걸 좋아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와 감정을 다중 앞에 드러내는 것은 싫어한다.

괜히 칭얼대는 아이처럼 보인다고나 할까...

 

그래도 이 글은 올려야겠다.

아내가 '결혼생활 8년 만에..' 글을 올려달라고 했을 때에도

내가 거기에 대하여 답글을 올렸을 때에도

다른 어떤 것보다 아내와 나 사이의 소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최소한의 아내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이 글은 어찌보면 (지극히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3부작 완결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이글에 대하여 답글은 쓰지 않을 계획이다.

아내가 지적한 나의 문제점은 90% 정도는 수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있으면 고쳐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난 내가 수긍하는 100%를 고치지는 못 할 것이다. 못 고치는 부분은 나의 '욕심' 부분이 가장 클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하여 아내의 이해를 구한다.

 

그리고 그동안 마음 써준 분들께 고마운 말을 전한다.

다음은 아내의 글이다.



결혼하고 나서 2년째 즈음인가 “주말의 명화”에서였나 아님 일요일에 하는 “명화극장”에서였나 제목도 기억이 안 나는 (처음부터 본 것도 아니고 채널 여기저기 돌리다 본 영화다) 영화에서 갑자기 가슴이 맺힌 듯한 부분이 있었다.


대충 “000의 집짓기” 같은 제목의 영화인데 철없는 시절 만난 남자는 자식만 여섯 일곱 명을 남기고 어느 날 집을 나가버렸다. 배운 것도 없고 특출한 재능도 없는 이 여자는 대도시에서 박봉으로(비정규직의 처지가 그렇지. 흑흑) 애새끼들 데리고 사는 것에 넌덜머리를 내고선 커다란 트럭에다 얼마 안 되는 살림살이를 싣고 무작정 시골로 떠난다.

이 여자의 꿈은 자기 힘으로 집을 짓는 것이다. 그에 온 식구가 일을 해야 한다. 큰 아들은 인근 농장에서 아르바이트로 농사일을 도와주고 학교에 등교해야하고 엄마는 좀 더 멀리 떨어진 볼링장에서 근무를 하고. 자기의 노동력을 팔 수 없을 만큼의 아이들은 동네 고물상을 돌아다니며 집에 쓸만한 것들을 주워 온다. 엄마는 자신의 꿈을 빨리 이루고 싶은 만큼 아이들의 놀고 싶고 이것저것 사고 싶은 욕구들을 눌러간다. 보험사 영업사원처럼 지금까지 모은 돈을 그래프로 그려놓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뜻대로 쉽게 될 일이 없고 문제는 갈수록 꼬여간다. 아이가 놀다 지붕에서 떨어져 척추가 마비되는 장애인이 되고 때맞춰 아이를 돌볼 수 없기에 어린애들은 자주 아프고...


어느 날 엄마는 온 식구가 잠든 시간에 일어나 술을 마시다 펑펑 운다. 큰 딸이 일어나 엄마에게 묻는다. 왜 그러냐고. 엄마가 울다 대답한다. “애야, 이 엄마는 너무 힘들구나. 나는 너희들을 가득 실은 수레를 끌고 가야하는데, 수레를 끌 사람은 나 밖에 없는데 너희는 그것도 모르고 수레위에서 껑충껑충 뛰고 있구나.”

딸이 대답한다. “ 아녜요, 엄마. 우리가 수레위에서 놀 때도 있지만 우린 내려서 엄마 수레를 함께 밀고 있어요.”


수레를 혼자 끌고 있다고 생각할 만큼 여유 없는 엄마의 마음과 처지가, 그리고 그 수레를 함께 밀어주는 딸의 마음이 가슴에 참 따뜻하게 다가왔다.


난 가족이란 것도 같이 수레를 끌어가는 거라 생각한다.

앞에서 끌기도 하고 뒤에서 미는 사람도 있고 옆에서 신나게 노래를 불러 주는 사람도 있고... 담당하는 부분이 다를 순 있지만 같이 수레를 한 방향으로 나가게 하는 부분에서는 일치한다고. 적어도 나는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 야, 넌 왜 안 밀어!”라는 말이 나와야만 수레를 미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서론이 지나치게 길었나?

최경순은 내 불만의 정체를 모르겠다고 한다.

- 매일 술 먹고 늦게 들어오는 것 (내가 이런 직업가진 것 모르고 결혼했냐?)

- 돈 별로 못 벌어 오는 것 (이 직업이 그렇지. 돈은 너도 벌 수 있잖아. 돈은 왜 남자만 벌어야 된다는 생각 하냐?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살아야지.)

- 초청장에서 이름 빠진 것 (거꾸로 니네집 행사에서 내 이름 빠졌다고 난 성질내지 않는다.)


나는 당신에게서 책임지는 사람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집안일을 도와달라고 말해야, 또는 아주 심하게 어질러 있어야만 하는 게 아니라...

나는 집안일을 할 만큼의 시간을 빼고 다른 활동의 시간을 잡고 당신은 다른 활동 다 하고 시간과 체력이 남으면 그제 서야 애랑 놀아주거나 집안일을 거들어 준다.

이건 내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지?


돈 적게 벌어 오는 것 정말 짜증난다. 사회에서 돈은 시간이니까.

돈이 없으니 하고 싶은 것도, 다르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해보는 것도 많이 차단된다.

나나 당신이나 힘들어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사소하게는 술 먹고 종점까지 가는 바람에 택시비 달라고 한 햇수 ( 매번 미안해하지만 말 그대로 미안해하기만 한다.) 매월 술값으로 지불하는 돈. 땅 살 형편은 안 되지만 시어머니는 화장이 죽어도 안 되니까 묘를 써야하고. 이를 배려하는 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들어 주고 싶다. 하지만 그것을 들어 줄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안하는 그 태도. ( 장성한 3형제끼리 매월 돈을 걷자는 제의도 부결하지 않았나. 당신의 그 변론의 진의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정말 그런지 궁금해. 신용불량자인 내 친정언니도 사무국장도 그 부분은 이해를 못해. ) 자신이 바라는 것, 들어주고 싶은 그 일에 왜 항상 당신보다 나의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싫어.


마지막으로 이름 뺀 것 - 대체로 이 일은 내 글에 동감하는 사람들조차 이것은 우발적 해프닝이나 뇌관을 건드린 그 무엇으로 보는데 난 생각이 달라.

당신은 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라는 것으로 답을 했는데. 그리고 대부분의 남자들이 이름은 넣을 수도 안 넣을 수도 있지 않느냐라는 반응인데.

격식은 그 사람과의 마음과는 정말로 별개의 것인가?

난 아니라고 생각해. 그동안 당 활동이나 노동운동하면서 시다바리 다하고 이름(개인이 아니라 당명이나 단체명) 한 줄 안 올라가는 것에 대해 우리는 열라 성질내잖아. 그건 정치적인 거고 이건 가족 일이라고 말한다면 내게 시댁은 보다 정치적인 공간이야.

결과적으로도 행사가 굴러가는 과정도 내 의지는 별 반영이 안 되잖아.


당신이 나이에 비해 사고나 행동이 안 막혀있고 자유롭다는 것.

나에게는 그것이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자의 자세에서 나온 걸로 보여.

난 수레를 같이 끄는 사람이 필요한 거지 어쩌다 도와주는 마음 좋은 이웃이 필요한 게 아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아내의 분노와 그 정체는 뭘까?

아내[ 결혼생활 8년 만에 드디어 내가 미쳐가는구나.] 에 관련된 글.

 

1.
아내가 불만이 있다는 건 안다.
다만, 그 불만의 정체를 정확히 모를 뿐이다.
매일 술 먹고 늦게 들어오는 것. 돈 별로 못 벌어오는 것. 아니면 오늘 아내가 올린 글처럼 초청장에 이름을 빼놓은 것.



사실 초청장에 이름을 빼놓은 것은 그 자체로 그렇게 분노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렇게 말한다고 아내의 분노를 부정하거나, 분노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문제는 그 이상일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초청장에 이름을 쓰면서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난 격식을 좋아하지도 않는 편인데다, 초청장을 받을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 부부의 이름을 굳이 다 쓰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해서 그렇게 했다. 최윤순, 최윤희, 최경순 拜上 이렇게 나이순으로.

 

내가 생각할 때 도무지 화날 일 같지 않은 일에 화내는 데 대하여 나도 황당하다. 왜 아내는 황당하게 나올까? 결혼생활과 동거생활 등 10년에 걸친 세월은 아내에 나 사이의 이른바 '코드'를 상당히 맞추는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황당한 대응의 정체는 무엇일까.

 

뭔가 문제가 있다는 반증이다. 부부관계에 아님 아내와 나의 인간관계에.
어렵다. 문제가 해결을 전제로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거는 식으로 제기될 때 더 어렵다. 문제의 근원과 해결을 생각하기 보다 감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나 또한 감정의 완충장치가 많이 발달된 사람은 아니다. 나도 모르는 3대 독자 특유의 이기심이 있는 것 같다. 문제 해결을 위해 서로 머리를 맞대면 며칠이라도 꿍꿍거리지만, 한 쪽에서 뻗대면 의욕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지레 파경을 생각한다. 어렵다.

 

사실 이럴 땐 시간이 최고다.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최소한 나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난 다행스럽게도 화를 오래 간직하는 성격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안 좋은 기억이 희미해진다. 험한 환경에서 자라면서 생존을 위한 진화의 결과일 것이다.

 

아내가 글을 남겼다.
아니 나에게 올려달라고 했다.
어찌됐든 고맙다.

 

2.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됐는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됐는가."

 

사는 게 무어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면 답이 쉽지 않다.
'진리'를 '정의'를 얘기할 정도로 하나의 원칙, 누구나 동의할 원칙을 추구하면서도, 실제 삶의 몇 %를 그런 잣대를 대고 살고 있는 것일까.

 

친구들과 선후배들과 지인들과 때로 즐겁게 술 먹고 수다떨고 하는 것들이 모두 현실일까?
아니면 조그마한 현실 쪼가리와 그것을 들러싼 유머와 위트, 상상과 환상의 멋진 데코레이션일까? 그렇담 그런 데코레이션은 현실이 아닌 것인가?

 

어찌됐든 유머와 위트를 섞고, 상상과 환상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런데, 그런 데코레이션을 모두 걷어내고 오로지 변형가능성이 별로 없는 딱딱하고 찬바람 도는 '현실'과 맞닥뜨려야 할 때가 있다. 그 중 하나가 가족문제이고, 특히 문제가 있을 때 가족관계이다.

 

더 이상 후퇴할 곳도, 숨을 곳도 없을 정도로 감정과 감정이 맞닥뜨리면 선택만 남을 뿐이다. 좋고 싫고의 문제는 그 다음이다. 힘들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